(커티스 르메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추축국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폭격을 진행했다나치 독일과 일본은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 됐다드레스덴 폭격이나 도쿄 폭격은 미공군의 폭격이 얼마나 많은 대량살상을 불러일으키고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는 행위임을 보여준다이러한 폭격의 양상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며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의 사용 빈도도 급증하게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대량 37만 5,000톤의 네이팜 폭탄을 동남아시아에 투하했다이들이 베트콩 게릴라를 붙잡는다는 명분을 들어남베트남의 농촌과 밀림에서 했던 행위들은 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다네이팜 폭탄이 투하된 곳들 대부분은 마을과 농촌 그리고 숲이 우거진 밀림이었고대부분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이었다한 마디로 미국은 아시아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따라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가 속출한 것이었다베트남 전쟁 이전 미국은 또 다른 전쟁에서 이러한 잔혹행위를 자행했다바로 한국전쟁이다.

(B-29기의 폭격 장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대로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현재까지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억 속에서그 본질이 왜곡되어 왔다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은 쉽게 외면 받는다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폭격의 책임이 있는 커티스 르메이는 절대로 저평가 받지 않는다오히려 북한을 폭격해서 군사적 효율성을 높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극우들의 기억 속에서 한국전쟁의 이미지는 침략자 북괴군을 몰아내자.”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가까운 수준이다.

(작렬하는 네이팜 폭탄)

 

극우세력들의 믿음과는 달리베트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인명피해는 공산주의 진영이 아닌 미국에 의해 발생했다그 이유는 미국이 한반도 민중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북한의 전쟁 3년 동안 미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1952년 7월 11일과 12일 미군의 B-29 폭격기가 북한의 수도 평양을 폭격했고당일 폭격으로 6,000~7,000명의 평양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이 때 1만여 통의 네이팜 폭탄과 6만 2천 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조사활동 및 국제연대 활동을 벌였던 국제여맹 인사들은 이후 자신들이 북한에서 본 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충분히 보았다.(We had seen enough)”

 

출처냉전의 마녀들 p.154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이 겪은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3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대략 90만 명에서 100만 명의 북한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폭격의 피해는 남한 안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철로 등에 투하됐다.

(폭격으로 파괴된 현장)

 

글쓴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안양이나 수원도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한 조사에 의하면 1950년 11월 말 중국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이후부터 유엔군의 반격이 본격화되는 1951년 2월 말 킬러작전(Killer Operation) 이전까지 약 3개월간 미 공군은 한국전쟁 전 시기에 소요된 폭탄의 40%네이팜 폭탄의 2/3를 사용했다고 한다물론 이 기간에 사용된 폭탄의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 사용되었지만남한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실제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네이팜 폭탄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초토화 작전(Wildness of Scorched Earth)’을 시행했다미군은 중공군과 인민군의 반격에 밀리자북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의정부·원주 등에서 네이팜 폭탄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고그 결과 수많은 마을이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1951년 1월 19일에는 실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에선 미군 공수부대의 요청으로 공중폭격이 실행됐다작전상 이는 성공적인 사례로 보고됐지만적잖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물론 이 폭격 과정에서도 네이팜 폭탄이 사용됐으며전투기들은 50구경 기관총으로 기총소사를 마을에 갈겼다이 폭격으로 136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사상자 중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당시 남자들은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나무를 하러 갔지만여자들은 마을에 모여 명주를 짜다가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빨치산들 또한 미군의 폭격과 소탕작전을 경험했다. 1951년 당시 미군이 지리산 인근 지역에 항공기를 투입한 이후 적잖은 빨치산 대원들이 재귀열이 발병했으며미군은 이현상이 지휘하는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지리산에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네이팜 폭탄 투하로 죽은 빨치산이나 인근 마을 주민들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심지어 미군은 상주군 화북면 운홍리에서 동네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을 벌였다따라서 이 지역에 잠시 들어온 빨치산들은 주민들에게 신고당하지 않았었다.

(네이팜 폭탄을 투하한 미군 무스탕 전투기) 


이처럼 남한 내에서도 미군 폭격은 항상 있었다특히나 한국전쟁 초기 미군은 남한의 무수히 많은 지역을 폭격했다낙동강 전선에서도 이러한 폭격은 있었으며당시 북한의 종군 기자였던 리태준은 1950년 8월 16일 B-29 폭격기의 폭격에 대해 글을 남기기도 했다경북 칠곡에 있는 왜관에서는 농장과 주택이 있는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고최소 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당시 리태준이 묘사한 폭격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섰고당시 폭격으로 죽은 최소 131명 이상의 희생자 수를 파악했다이 공식적인 희생자 외에도 피난민의 피해까지 합하게 되면 200명이 죽었다는 리태준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950년 9월 2일 미군의 B-29 25대는 김천과 고창 그리고 진주에 225kg 폭탄 803발을 투하했으며다음날에는 안동과 성주의성합천고령상주영동제천 전선 부근의 병력과 장비를 공격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 지역들을 폭격했다. 1950년 9월 14일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의 B-29기 17대는 전선과 무관한 대전과 안동을 폭격했으며인민군이 점령했던 포항 또한 네이팜 폭탄의 폭격을 받았다. 1950년 8월 29일 포항 칠포리에서는 미군의 네이팜 폭격으로 최소 수백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됐다이 폭격은 미공군의 기록에 따르면 마을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고 나온다당시 죽은 민간인들 대다수는 여성과 노인 아이와 같은 인민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들이었다.

 

2000년대 당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고 진상규명해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기 위원회 활동 조사 기간 동안 접수된 미군 폭격 관련 사건은 530건이었다하지만 이중 진실규명된 경우는 120건으로 규명률은 22.6%에 불과하며른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의 규명률에 비하면 가장 낮은 수치다예비검속과 대구 10.1 사건은 100%,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98.9%, 부역혐의 학살은 87.5%, 군인·경찰에 의한 학살은 80.1%,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은 80.3%, 여순사건은 75%,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45.9%의 규명률을 보인 것을 생각하면한국전쟁기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 사건의 규명률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도쿄 폭격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전쟁범죄에 크나큰 책임이 있는 인물인 커티스 르메이는 의외로 한국 내에서 큰 비판이 나오고 있지 않다한국전쟁 시기 커티스 르메이가 실행한 폭격에 의해 무수히 많은 남한 민중이 살해되고 학살당했지만현재 사회는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범죄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미국이 한국을 구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그러나 남한의 국토 대다수를 폭격으로 대량 파괴한 것이 과연 한국을 구한 것일까나는 이점에서 매우 회의적이다미군의 전쟁범죄는 반드시 규탄해야 하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 시기 남한 민중을 폭격으로 대량 살상한 미국은 자신들이 자행한 역사에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기광서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4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휴머니스트, 2010

 

김태우폭격창비, 2013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서중석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20

 

김태우냉전의 마녀들창비, 2021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초토화 폭격뉴스타파, 2021.07.27. https://www.youtube.com/watch?v=keasLxTpL9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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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4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4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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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나는 시간이 날 때, 독서를 자주 즐기는 편이다. 내가 독서를 하게 된 이유에는 아마도 유전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독서를 거의 안했지만, 집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서재에 쌓여있었다. 정치, 역사, 철학, 과학, 인문학, 사진, 바둑, 논어 등 아버지는 다독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버지가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아마 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학생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제법 강력하게 추천했던 책이 있었다. 그 책 중 하나가 김명호 교수가 쓴 <중국인 이야기>.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는 현재도 계속 신작이 출간이 되고 있는 책으로써, 중국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을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무엇보다 책이 현학적이지 않고, 재미있다. 마치 소설을 읽어나갈 때처럼, 문장이 정말 술술 읽히는 책이다. 김명호 교수가 이야기하는 형식처럼 구성된 책이기에, 책이 굳이 책이 출판된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따라서 1권을 먼저 읽든 8권을 먼저 읽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집에는 7권까지 있는데, 내 눈에는 4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 4권을 읽었다.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제법 몰두해서 읽었다. 즉 그만큼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4권의 이미지는 문혁(문화대혁명) 시절의 포스터로 추정되지만, 4권에서는 문혁 관련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4권의 시작은 1936년 시안사건으로 명성을 떨친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의 가정교육부터이며, 1949년 혁명으로 탄생한 신중국의 외교관 형성에서 책은 종결된다. 4권에 포함된 내용들 하나하나가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파트는 아마도 제2차 국공내전에서 혁명을 도왔던 북한에 대한 내용이다.

 

1950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여 평양과 압록강까지 도달하자, 마오쩌둥은 북한을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최소 100만에서 150만 명 이상의 중공군 병력이 전쟁 당시 주둔했었으며, 이들의 사상자 또한 최소 수십만 명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승만의 북진통일이 실패한 이유의 원흉으로 중국의 존재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주장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시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4>를 읽으면, 당시 중국이 북한을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나온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동북 지방에선 토호에 맞선 계급투쟁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당 공산당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중국 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들은 토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했으며, 소련 군정 하에 있던 북한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려 10만 정의 무기와 탄약 그리고 여러 보급품들을 중국 공산당에게 지원했다. 그 외에도 홍군은 북한 인근 지역의 야전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며, 이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내용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1946826, 남양철도 경비 대장이 탑승한 특별열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단둥에 진입했다. 김일성은 10만여 정의 총과 탄약 외에 교량과 철도 폭파에 쓰라며 일제 폭약도 보냈다. 일제가 나진 질소비료공장에서 생산하던 황색 폭약은 당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289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중국 혁명의 승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 외에도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무려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와 국민당 정권에 맞서 중국 혁명에 동참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이 무수히 많은 병력을 보내 김일성을 도왔던 이유이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가진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앞으로 통일 세대를 준비하고 싶다면 이러한 역사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포군관학교 관련한 내용도 재밌었다. 1920년대 손문의 지원을 받았던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는 반제국주의 투사들을 길러낸 군사학교였다. 장제스 본인은 독재자로써 부정부패한 국민당 정권의 수장이었으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인물이었지만, 국민당군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 광저우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고, 또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2015년 영화 암살로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또한 동지인 오성륜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김원봉은 1930년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총리였던 팜반동(Phạm Văn Đồng) 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적잖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과 혁명가들 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황포군관학교는 말 그대로 반제국주의 투사들의 교육기관이었으며, 중국 공산당 인사들 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 불제 치하에 있던 식민지 조선과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굳이 황포군관학교게 중국 혁명에 크게 기여한 점을 따지자면, 아마도 린뱌오(임표)를 군사전문가로 거듭나게 만들어 줬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점은 국민당의 수장인 장제스 또한 인정하는 점이다. 당시 장제스는 린뱌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린뱌오는 전장과 초연, 선혈과 생명이 오가는 곳을 갈망하는, 당대의 한신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울 날이 멀지 않았다. 청사에 남을 공을 세울 테니 두고 봐라.”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163

 

반면에 황포군관학교 시절 장제스를 싫어했던 린뱌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황푸 시절에 본 장제스는 군벌에 불과했다. 항상 군림하려고만 했지 교관과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화도 잘 내고 변덕도 심했다. 기분 내키면 잔정을 베풀었지만, 가끔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우리를 조롱했다. 그런 사람은 특징이 있다. 큰 일은 이룬 듯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156

 

책에 있는 내용들이 전반적으로 감명 깊었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신중국의 외교관 이야기도 정말 흥미로웠다. 1949년 혁명으로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후 외교관들을 해외에 보냈다. 외교관으로 간 이들은 과거 중국 혁명에 동참하여 싸웠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혁명가의 부인들도 포함이 된다. 과거 혁명에 참가하여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은 외교관의 부인이 되자 분개했다. 그 이유는 서구 사회가 강조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이 지켜야할 규칙 중에는 다른 해외 외교관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소리지르며 지적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포함됐다. 그것 때문에 외교관의 부인이 되길 거부하고자 했던 여성들도 많았다. 나는 이 내용에서 혁명 시절 중국의 여성인권이 서구 사회보다 선진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인들은 더 힘들어했다. 포성 속에서 성장한 전사들에게 파마와 얼굴 화장, 치파오와 굽 높은 신발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절교육 담당자가 남편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외교관 부인은 복장·행동·말투가 남달라야 한다. 남편이나 과거의 동지들이 좀 모자란 행동을 했다고 소리부터 버럭 지르는 교양 없는 행동은 정말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354

 

당시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 외교관의 부인이 이 만큼의 권위가 있던 나라가 과연 존재했는가? 나는 이점을 지적하고 싶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여성권리가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점을 제공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러한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번에 <중국인 이야기 4>를 읽으며 제법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 이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어나갈 예정이다. 중국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며, 이러한 내용을 통해 현재 중국을 혐오가 아닌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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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내 언론들과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라는 존재를 비난하기 바쁘다. 사실 대한민국 입장에서 국익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의 존재는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와 전혀 관계도 없는 극우 국가 우크라이나가 지나치게 미화되고 피해자화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대한민국의 일부 좌파들과 우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결코 무고하지 않음에도 상당히 미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대한민국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독도를 사실상 일본땅이라 표기하는데, 멍청한 한국은 멀쩡한 이름 키예프를 나두고 키이우라는 이름을 남발한다. 정말 한심할 따름이다.

러시아의 폭격과 일부 학살로 인한 죽음.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과거 아조프 대대 네오나치들이 돈바스 내전에서 15,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과 현재 전쟁과정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벌인 심각한 학살들은 축소되어 보도되며, 언급도 거의 안되고 있다.

반면에 러시아군이 떨어뜨린 정밀 포격은 하나 같이 극대화되어 보도된다. 사실 러시아군의 포격이나 폭격은 물론 적잖은 양민 피해가 나온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 상황이 바이든 정부가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이유가 될까? 과거 이라크 전때 미국은 수도 바그다드에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그만큼의 폭탄을 퍼부었는가? 현재 키예프는 폭격의 피해가 거의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자주 외치는 ‘슬라바 우크라이니‘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한 반데라와 OUN 일당들이 외치던 구호였으며, 이게 현재까지 온 것이다. 이들은 당시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외의 수많은 양민을 포함하여 100만 이상을 학살한 이들이었다. 물론 젤렌스키는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현재 수천 명 규모로 있는 아조프 부대는 ˝우리가 필요하다면 젤렌스키도 유대인이니 제거할 것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우크라이나 보도에 대한 사진조작과 날짜조작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보도하는 국내 언론은 거의 없다. 이건 조선일보나 경향 한겨레 할거 없이 공통된 모습이다. 참으로 문제가 많다. 지나치게 서방 중심의 보도만 다루니, 바이든 행정부가 하는 프로파간다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어느 편을 들든 간에 최소한 이러한 사실관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지나치게 미국 및 우크라이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여론이 그저 우려스럽기만 하다. 이제는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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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내 언론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사회주의 정당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과 노동법을 19세기 노예노동 수준으로 개악 내지는 퇴보(노동조합 권리축소 & 노동자 임금 및 해고 회사가 맘대로 결정)시킨 것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죠!
 

11. 나찌 점령하의 우끄라이나

 

1931년 일본군은 만주를 점령했고 쏘련의 국경을 따라서 주둔했다. 히틀러는 1933년에 권력을 잡았다.

 

1928년에서 1933년에 쏘련이 착수했던 공업과 농업의 재조직화 계획은 시의 적절했다. 모든 힘을 총동원하는 희생을 치르며, 오직 그들의 성공만이 나찌에 대한 저항과 승리를 허락했다.

 

역사적인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나찌가 우끄라이나인 대학살과 쏘비에뜨 체제의 허약함에 대해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역사가인 하인츠 호네(Heinz Hohne)는 이렇게 썼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러시아에서 2년간 치러졌던 피의 전쟁47)(히틀러가 러시아인들을 비하하는 용어인 역자) 인간 이하 존재(sub-humans)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잔인하게 증명했다. 일찍이 19428독일제국의 보고들에서 경찰보안대(SD, Sicherheit Dienst), 독일 인민들 사이에서 우리가 그동안 망상의 희생자들이라는 지각이 증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엄청난 양의 쏘련의 무기, 그들의 기술적 우수성, 그리고 공업화에 대한 쏘련의 거인과 같은 노력 등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인상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쏘련에 대한 예전의 모습과는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인민들은, 어떻게 볼셰비즘이 이 모든 것을 생산하게 했는지 자문하고 있다.” ’48)

 

1985, 미국의 교수인 윌리엄 만델(William Mandel)은 이렇게 적었다:

 

‘20년 동안 쏘련에 충성하던, 우끄라이나의 가장 넓은 동부 지역은 굉장히 활동적이었다. 50만의 쏘비에뜨 게릴라군이 있었다. .... 그리고 450만 명의 우끄라이나 민족은 쏘비에뜨 군대에서 복무했다. 만약 그 큰 집단 내에 근본적인 불만이 존재했다면, 명백하게 그 군대는 바탕에서부터 무력해졌을 것이다.’49)

 

역사가인 로만 스즈포룩(Roman Szporluk)조직화된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의 활동 지역이 이전의 폴란드 영토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즉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폴란드의 점령 하에, 우끄라이나인 파시스트 운동은 1939년까지 자신들의 기지를 가지고 있었다.50)

 

우끄라이나인 대학살이라는 거짓말은, 히틀러주의자들이 우끄라이나 영토의 정복을 준비하는 일환으로서, 그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끄라이나 영토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나찌 해방자들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알렉세이 표도로프(Alexei Fyodorov)는 전시에 25000명의 나찌를 물리친 한 빨치산 부대를 이끌었다. 그의 책, 행동하는 지하 위원회(The Underground Committee Carries On)는 나찌에 대한 우끄라이나인들의 태토를 훌륭히 보여준다. ‘스딸린주의자의 우끄라이나인 대학살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해독제로서 이 도서를 읽을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51) (5부 끝) <노사과연>

 

번역 : 편집부

 

1) Douglas Tottle, Fraud, Famine and Fascism: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 (Toronto: Progress Books, 1987), pp. 5-6.

 

2) The Nation 140 (36), 13 March 1935, quoted in Tottle, op. cit. , p. 8.

 

3) 역자 주 : 원문에는 월터(Walter)라고 되어 있으나, 워커(Walker)의 오타로 보인다.

 

4) 워커의 원문에 하르호프(Kharhov)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끄라이나 도시인 하르코프(Kharkov)를 워커가 잘못 쓴 것을 피셔가 그대로 원문대로 표기했다는 뜻이다.

 

5) Tottle, op. cit. , p. 9.

 

6) James Casey, Daily Worker, 21 February 1935, quoted in Tottle, op. cit. , p. 9.

 

7) Tottle, op. cit. , pp. 13, 15.

 

8) Ibid. , pp. 19-21.

 

9) Ibid. , pp. 23-24.

 

10) Ibid. , p. 25.

 

11) Ibid. , pp. 4-31.

 

12) 역주: 원문에는 `communist barbary'로 되어 있으나,`communist barbarism'의 오기로 보고 번역했다.

 

13) Ibid. , pp. 38-44.

 

14) Ibid. , p. 41.

 

15) New York Times, quoted in Tottle, op. cit. , p. 50.

 

16) Tottle, op. cit. , p. 51.

 

17) Ibid. , p. 61.

 

18) Ibid.

 

19) Ibid. , pp. 69-71.

 

20) Ibid. , p. 71.

 

21) Ibid. , p. 74.

 

22) Ibid. , p. 79.

 

23) Ibid. , p. 86.

 

24) Conquest, The Harvest of Sorrow, op. cit. , p. 334.

 

25) Tottle, op. cit. , pp. 111-112.

 

26) Ibid. , p. 112.

 

27) Ibid. , p. 113.

 

28) Ibid.

 

29) Ibid. , p. 115.

 

30) Ibid. , p. 118.

 

31) 역자 주: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은 서부 우끄라이나에서 1929년 건설된 정치조직이다. 이 조직 산하에 무장조직인 UPA가 있다. 이후 OUN1940년 멜닉(Melnyk) 그룹과 반데라 그룹으로 분열된다. 주도권은 보다 전투적인 반데라 그룹이 쥐게 된다.

 

32) Ibid.

 

33) Ibid. , pp. 121-122.

 

34) Ibid. , p. 122.

 

35) Ibid. , p. 128.

 

36) Ibid. , p. 129.

 

37) Ibid. , pp. 58-59.

 

38) J. Arch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 5.

 

39) Tottle, op. cit. , pp. 93-94.

 

40) Ibid. , p. 94.

 

41) Ibid. , p. 91.

 

42) Ibid. , p. 92.

 

43) Ibid. , p. 96.

 

44) Ibid. , p. 97.

 

45) Ibid.

 

46) Ibid. , p. 100

 

47) 역자 주 : 1941622일 발발한 독-쏘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8) Ibid. , p. 99.

 

49) Ibid. , p. 101.

 

50) Ibid.

 

51) Alexei Fyodorov, The Underground Committee Carries On (Moscow: Progress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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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

베트남전쟁기 북한은 북베트남을 경제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지원군도 파견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따라서 베트남전쟁기 북한·북베트남 관계는 주목할 만한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북한·북베트남과 관련된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에 양국 관계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으며, 이에 대한 충분한 해석과 연구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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