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몰았는데, 그 수법이 너무나도 잔인했다. 이 중 가장 악질적인 만행이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2004년 장동건과 원빈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장동건의 와이프가 아무것도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우익 청년단이 쏜 총에 맞고 죽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에 따르면, 그녀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은 그저 쌀이나 보리를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자본주의가 뭔지 혹은 사회주의가 뭔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무엇이었길래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몬 것일까?

 

1. 보도연맹이란?

  

보도연맹에 관해 얘기하기 이전에 먼저 해방 전후사에 관해 얘기하겠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미군이 진주한 한반도 이남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익 세력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고,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힘을 얻은 이승만은 그런 노력들을 무력으로 무마시켰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과 친일 세력들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은 여러 곳에서 봉기했었는데,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고 난 이후 이승만 정부는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이다. 보도연맹 조직을 확장하면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했다. 심지어 10대인 중·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할 정도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비단 좌익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 및 사정을 들어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생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정리하자면 보도연맹 단체는 해방 후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키려고 만들었지만, 대다수 민간인이 더 많이 가입했으며, 그 절차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었다.

 

2. 학살의 시작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엄청난 보복 및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부텨였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기에, 한국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과의 전쟁 속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전향자들의 배신을 우려하게 되었고, 그런 이승만의 우려가 결국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을 따라 후퇴하던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은 정부의 명령 아래 보도 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이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 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 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그 외에도 진해, 통영, 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중 가장 악질적인 사건은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이었다. 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보도연맹은 19506월부터 8월 혹은 그 이후까지 전개되었는데, 최소 20~30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학살당했다. 통계에 따라선 최대 100만까지 잡기도 하는데, 확실한 건 이승만이 전개한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이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들도 있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들도 존재했다. 이 학살의 중심에는 항상 북진통일과 반공을 부르짖던 이승만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이 한국전쟁 시기 학살당했다.

 

3. 반공주의가 침묵을 강요했다.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물론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학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주나 자본가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나 군경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이 규모나 무차별 학살이라는 측면에서 인민군보다 더 했고, 더 잔인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을 겪었던 유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고, 연좌제가 두려워 이런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유가족회가 결성되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부 또한 이승만 정부 못지않게 이를 막았고, 유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결국,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9월에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2009년까지 진행되었다. 보도연맹 학살을 2000년대 조사하면서 대략 5000구 정도의 보도연맹원 시신이 밝혀졌고, 많은 증언과 한국군 자료들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나오면서, 역사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얘기할 때, 항상 인민군의 학살만 강조됐다. 그러나 2000년대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던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의 학살은 한국군의 학살에 비해 훨씬 적었고, 거의 16 비율이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인민군보다 더 잔인했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아직도 6.25가 되면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만 강조하며, 마치 우리는 피해자다라는 식의 피해의식을 국가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장치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숨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금기시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보도연맹 학살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한국군의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그런 만행을 우린 한국전쟁일인 오늘 기억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4. 참고 자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르스 커밍스 저, 조행복 역,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저, 2005

이승만 평전, 김삼웅 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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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일 뒤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있을 예정이다. 비록 이번 베트남에서 열리는 회담은 북한과 미국과의 정상회담이지만,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우리나라도 이번 정상회담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 북한과 한반도 정세 관련한 글을 써오며 누누이 강조했던 거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의 정세는 점차 평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잘 성사된다면, 남북관계가 변화가 있을거라는 얘기가 있듯이 말이다. 분단 세월 70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는 다시 한번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되기 이전 좌우갈등과 미소대립을 극복하고 통일정부수립을 꿈꿨던 태양과도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여로모로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해방시켰던 그는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년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함으로써, 3.1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었다. 일본의 그 어떠한 회유와 억압에도 견뎌냈던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친일로 변절하던 시기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대비를 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국내 치안을 유지했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좌우갈등이 극심해지자 좌우합작을 전개하여 분단을 막고자 했다.

 

이렇듯 몽양 여운형은 업적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너무나도 잊혀진 존재다. 최근들어 한반도 관계가 평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보니, 더더욱 그의 정신을 본받고 싶어지고, 그의 염원이던 분단극복과 통일이 빨리오길 보다 더 바라게 된다. 따라서 오늘은 그를 기억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내가 읽은 여운형 관련 서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여운형 평전

 

몽양 여운형의 비서로서 활동했던 저자 이기형 선생께서 쓴 여운형 평전이다. 저자 이기형은 암울하던 전두환 정권 시기 통일운동을 했었고 ,그 시기 몽양 여운형의 평전을 집필했다. 2013년 별세하기 전까지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저자는 통합진보당에서도 활동했었다. 1988년 그가 쓴 여운형 펑전은 2004년 실천 문학사에서 이 책을 새로 출판했다. 사실 평전이라기보다는 인물 사나 회고록 성격이 강하다. 여운형 생애에 대한 웬만한 자료는 다 있다.

 

 

 

 

 

 

 

 

 

 

 

 

2. 찢겨진 산하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그리고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가 사후에 만나 한국 근현대사와 통일을 논한다는 전개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혀진 역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3. 혈농어수

 

여운형 사망 60주기를 앞두고 여운형이 고마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제목으로 삼아 3권으로 묶어 출간한 정치 소설이다.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는 시점부터 1947 몽양 여운형이 암살될때 까지가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리고 1945년 당시에 대한 내용이 굉장히 방대하다. 다만 해방전후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의 일제 시절 독립운동이나 몽양 여운형의 전반생애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짧게 넘어간다. 책을 읽다가 심심해질때쯤 꼭 한번씩 야한얘기가 나와 읽는이의 정신을 번쩍들게 만든다. 당시 해방 전후사를 아는데 있어서 좋은 책이다.

 

 

 

 

 

 

 

 

 

 

 

 

4. 여운형 평전

 

전독립기념관장이자, 민주화운동가인 김삼웅 선생께서 쓴 여운형 평전이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에 출판됐다. 저자 김삼웅에 따르면 여운형 평전이 기존에 꽤 많이 나왔지만 대개는 너무 학술적이거나 대개는 해방 전후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여운형 평전을 다시썼다 한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인물 평전을 30권 이상 쓴 사람이라 책 또한 굉장히 잘 썻다.

 

 

 

 

 

 

 

 

 

 

 

5. 몽양 여운형

 

산하 출판사에서 나온 여운형 평전이다. 서문은 해방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여운형의 생애를 이야기 하고, 끝부분에선 그의 암살과 그의 딸 여연구 여사의 아버지 묘소 방문을 다룬다. 기존의 인물 평전이나 몽양 여운형 관련 서적을 읽는 것이 버겁다면, 입문격으로 읽어볼만 하다.

 

 

 

 

 

 

 

 

 

 

 

 

6. 나의 아버지 여운형

 

몽양 여운형은 비명횡사하기 전 자신의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내 김일성 위원장에게 맡겼다. 그의 두딸 중 하나인 여연구 여사가 쓴 책이다. 따라서 북에서 출판된 책이기도 하다. 그의 딸인 여연구 여사가 본 몽양 여운형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북조선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기에 "김일성 축지법"이나 "일본 천황에게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는 믿기 힘든 얘기도 나오니 이런 부분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의 딸이 썻다는 점에서 대채로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적지 않다.

 

 

 

 

 

 

 

 

 

 

7. 건국투쟁

 

뉴라이트 계열 학자인 박명수가 쓴 책이다. 주로 이승만과 박정희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백년동안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여운형 관련 서적이라기 보단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다루고 있다.저자의 성향 답게 건국준비위원회를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며 친일파의 집합체인 한민당 계열을 마치 독립운동을 계승한 집단처럼 왜곡하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은 여운형의 인민민주주의를 선택하지 않고 송진우와 한민당 세력이 주장하던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에 북한같은 지옥의 나라가 되지 않고, 부자나라 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뉴라이트들이 이승만 세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주 하는 주장인 "좌우합작은 공산화의 길이다."라는 식의 메카시즘적인 주장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8. 여운형을 말한다

 

2007년 몽양 여운형 서거 60주년 해서 개최했던 몽양 학술 심포지엄의 논문 자료집이기도 하다. 논문 뒤에 몽양 여운형의 생각과 행적을 보여주는 글과 자료들을 연도별로 실어 연구자들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했다. 따라서 몽양 여운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자료다.

 

 

 

 

 

 

 

 

 

 

 

 

 

9.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사 교수이기도한 서중석 교수가 쓴 책이다. 이 책은 여운형만을 주제로 다룬 책은 분명 아니지만, 해방 전후사 파트에서 여운형에 대해 나름 심도있게 다뤘다.

 

 

 

 

 

 

 

 

 

 

 

 

10. 여운형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기획한 독립운동가 시리즈 교양 서적중 하나다. 지금으로 부터 2달 전인 2018년 12월에 출판됐다. 주로 몽양 여운형의 독립운동 업적을 잘 정리했다. 말 그대로 교양차원에서 입문하기 위해 읽어볼만 하다.


 

 

 

 

 

 

 

 

 

 

 

 

11.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는 명예교수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와 여운형, 이승만, 박정희등을 주로 연구한 이정식 교수가 쓴 책이다. 지금까지 나온 몽양 여운형 관련 서적 중에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그만큼 자료조사가 철저하다.  다만 저자가 몽양 여운형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이승만과 박정희도 동시에 좋게 보는 인물이라, 이승만 관련 서술은 좀 걸러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보단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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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변은진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역사공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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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조선을 이끌어나갈 저도자"를 선택하는 여론조사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재치고 단연 1위를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집에 있는 노비를 해방시켰고, 1919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으며,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햐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해방 정국 시기 그의 인기는 참으로 대단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노선에서 친일로 변절할 때, 일본제국주의의 회유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인 1944년 8월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마치 나치독일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좌우연합하여 나치독일에 맞서 파리 해방을 미리 대비했던 것 처럼 말이다. 비록 광복군 국내 탈환 작전이 성사되지 않아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그 민중의 군대가 일본군을 무장 해제 시키지는 못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미화하며 그들조차 속고 있었을 시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 총감과 협상하여 총독부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고,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과 동시에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자신의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촉시켜 무정부 상태를 막고, 전국적으로 치안유지와 조국건설 사업을 추진해나갔었다.

 

그랬던 여운형이기에 해방 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다 아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초대 총령이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통려인 이승만보다 더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일제시기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정부수립에 힘을 썼던 그는 안타깝게도 12번의 테러 끝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가 암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인 1948년 남북분단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백만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봤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기 잊혀진 인물이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모른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5년 공로를 인정받고, 2008년에는 대한민국장 1급에 추서됐으나,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

 

해방정국 시기가 아닌 그의 독립운동 행적만 보더라도 몽양 여운형은 분명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젊은 시절 그는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고,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했다. 경술국치 이후 그는 중국으로 넘어가 유학했고, 1918년에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3.1 운동에 불씨를 제공했으며,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써 일본으로가 일본고위급과의 회담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는 1920년대 초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었고, 모스크바에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192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손문, 마오쩌둥,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의 좌우를 아우르는 인물들 사이에서 제1차 국공합작에도 일부분 기여했고, 베트남의 호치민과도 만나 교류했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언론활동을 통해 일제시대의 현실을 비판했고,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을 주도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그를 빼놓고 논하는 것은 사실상 주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꿈꾸던 남북통일정부수립은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변화해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과 미국간의 제2차 정상회담이 베트남 다낭에서 열릴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대립에서 평화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 좌우와 남북의 통일을 꿈꾸던 그를 돌아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를 다룬 대중적인 영화나 드라마가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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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투쟁 -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7
박명수 지음 / 백년동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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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년 전 박근혜가 국정교과서 책동을 벌이기 전 뉴라이트 출판사인 백년동안에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회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출판한 시리즈물 책이 있었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다. 필자는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시리즈들 중에 몇권을 읽어봤다. 순수히 비판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말이다. 그중 가장 처음에 읽은 책은 건국투쟁이라는 책이었고, 읽는 내내 깊은 빡침을 느꼈다. 건국투쟁은 19458.15해방 이후부터 19459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까지 약 20일간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송진우 세력이 과연 어떠한 세상을 이루고자 했는지를 다룬 책이다.

 

책의 저자인 박명수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합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박헌영 세력이 편입됨에 따라 좌경화 되었으며 우파세력은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책에서 지적하며, 송진우가 주도하여 만든 한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송진우 계열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가 지금현재 북한과 남한의 결정적인 차이를 불러왔다는 얘기다. 즉 북한은 인민민주주의라는 것을 택해서 자유도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국가가 됐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서 세계경재 10위권을 자랑하고 신앙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된 국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저자의 독단적인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저자의 주장이 사실과 무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여운형의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된 단체이고 건준의 행적이 과대 포장되었다고 얘기하였다. 물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계열이 대거 합류하고 송진우 세력이 건준가담을 거부하면서 건준이 좌경화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한국현대사 학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서중석 교수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가 저자의 주장대로 처음부터 무분별하게 좌경화 되었던 것은 아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전신인 건국동맹은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48월에 만들어진 건국동맹 시절부터 안재홍,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적극 가담하였고, 임정의 광복군과 일제의 패망을 대비할 계획을 세웠었으며, 좌우익이 연합한 단체였다. 이후 건국동맹은 19458월 일본 천황이 항복방송을 하기 전 총독부와 협의하여 일본항복 이후 국내의 치안을 담당했고,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였으며, 잠시 동안이나마 전국적으로 통일된 형태를 갖추었다. 즉 여운형의 건준세력이 이와 같은 일들을 도맡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과장되었고, 공산당 조직에 가까운 단체로 보는 저자의 주장과 시각은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았고, 사실관계마저도 맞지 않는다.

 

둘째 저자는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소위 송진우의 한민당 계열은 대부분이 친일세력이었다. 물론 조병옥 같이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친일파들을 내세우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독립운동가라 불리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노덕술과 같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하여 친일청산 꿈을 박살내며,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거기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년 후인 1949년에 이르면 한민당 계열 인물 중 많은 사람들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다. 따라서 한민당계열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독립운동 세력이 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한민당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있는 것이다. 즉 저자가 독립운동가 송진우라는 이름을 빌려 한민당을 임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듯이 포장한 것은 한민당 세력이 친일파 세력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저자는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며 현재북한과 남한의 차이를 여운형의 건준과 송진우의 한민당에서 찾았다. 위에 상술했듯이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우익을 망라한 연합단체였지, 사회주의 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몽양 여운형은 사회주의자이기 보단 진보적 민주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다. 위에 상술한 송진우의 한민당 계열은 대부분이 친일세력이다. 물론 여운형이 한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 하면서 레닌,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도 만나 조선독립을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1920년대 그가 비록 사회주의에 좋은 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 적은 있었으나,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도입하자고 했던 적은 적어도 해방정국시기에는 없었고, 그는 해방 이후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이루기 위해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여운형이 인민민주주의를 전적으로 선택한 빨갱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친일파들을 앞세워 노동자 농민을 패죽이고 학살한 친이승만세력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들 입맛에 맞게 여운형 선생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멋대로 왜곡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여운형을 매도하게 될 것이다. 책 저자인 박명수와 같은 이들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공산화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주장은 몽양 여운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이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일 뿐이다. 몽양 여운형은 엄밀히 따지자면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진보적 민족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다. 애초에 좌우합작 운동은 미군정이 필요로 해서 지원한 것이었고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가 미군정의 지원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고 통일된 형태의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앞장선 것이었다. 따라서 좌우합작운동은 적잖은 미군정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고, 미군정이 지지를 철회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또한 미군정이 좌우대표로 내세웠던 인물들마저도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고, 몽양 여운형은 소련보다는 미국 쪽하고 보다 협력하는 인물이었다. 좌우합작은 공산화의 길이었다.”는 주장은 좌우합작의 참 뜻을 폄하하고 이승만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만들어낸 극우세력들의 프로파간다다. 물론 좌우합작의 한계를 중국의 국공합작 사례를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독립투사들을 빨갱이라 모욕하는 짓은 참으로 유치하고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필자는 이 책을 26개월 전 읽었었다. 비록 분량이 짧은 책이기는 했지만, 읽는 내내 혈압이 올라 깊은 빡침을 느끼는 경우가 다반사이기는 했으나,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책 내용이 대부분 사실 관계에 부합하지 않고, 저자 박명수의 독단적인 주장들이 굉장히 많으며, 친일파들을 옹호하려는 저자의 악의적인 의도가 깔려있는 책이기에 매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

 

뉴라이트 친일 세력들은 자신들이 옹호하고 존경하는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반대되는 세력을 빨갱이 몰이 한다. 3년 전 국정교과서 사태는 뉴라이트 세력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사례다. 그 결과 민주주의를 역행되었고, 친일친미 독재세력을 건국의 아버지 혹은 부국의 아버지로 미화하는 책들이 시중에 나돌았었다. 당시 뉴라이트 세력들은 틈만 나면 여운형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왜곡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고 극우세력들의 프로파간다였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아직도 뉴라이트 세력은 건재하다. 그리고 지금도 이와같은 극우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책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몽양 여운형을 왜곡하는 건국투쟁과 같은 책들은 집어던지고, 여운형의 통합정신이 주목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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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15년 독립운동사중에 의열투쟁사를 주제로 했던 영화 암살이 천만관객을 돌파했었다.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이다. 영화 암살이 흥행한 뒤로부터 대중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보통사람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가 하면 안중근, 김구, 유관순, 윤봉길, 안창호, 이봉창 정도다. 그런 일반인들이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보면서 매우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이들중엔 왜 김원봉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졌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일제시기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잊혀졌던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그는 누구일까?

 

1.김원봉 일대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16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9년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받은 뒤 그해 11월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을 만들었다. 1920,30년대 의열단은 주로 사보타주, 요인암살등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열단이 주도했던 사건 중에는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의거도 있었고 그러한 투쟁방식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1926년 김원봉은 장제스가 만든 황포군관학교에서 유학했고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2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고 1938년에는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중일전쟁 시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맞서 수많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까지 수많은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치르던 김원봉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조선의용대 병사들도 광복군국내탈환작전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빨리 항복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해방 이후 김원봉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귀국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합류하였다. 1947년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괴한들로 부터 테러를 당하는 일이 적잖게 일어났다. 그때문에 김원봉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그러던 중 당시 수도 경찰청장인 장택상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이용하여 그를 체포한 뒤 고문했다. 악질 중에 가장 악질인 노덕술에게 고문받은 김원봉은 그 모욕을 견디지 못하여 몇일동안 울었고 결국 1948년 월북했다. 1948년 9월 북한정부가 수립됐고 김원봉은 국가검열위원장에 올랐다. 이 밖에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1953년 박헌영 체포로 시작된 남로당 탄압과 1956년 김일성 일인독재체제에 반대하여 연안파 소련파들이 일으켰던 8월 종파사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은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1958년 부위원장을 사임했다. 1958년 11월 그는 북한에서 죽었다.

 

2.의열투쟁과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무차별 테러.

 

1919년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920,30년대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었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김원봉이 전개한 의열투쟁이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상대로 전개했던 의거를 무차별 테러라고 주장한다. 일본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에게 적극협력하는 앞잡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독립투사들의 의거를 테러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테러와 의거를 구분하지 못한 관점일 뿐이다. 일단 김원봉의 이끌던 의열단의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 7가지"가 어떤 것인지 보자.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4.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제거해야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이렇듯 의열단이 만든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주의자, 친일파, 일본제국주의를 이롭게 하는 기업과 정치단체 그리고 일제 경찰 군인에 한해서 였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조선인 일본인 할 거 없이 민간인들을 타겟으로 테러를 일삼지 않았다. 즉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나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민간인 테러를 일으키고 현재 중동지역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탄테러와 무차별 살상을 일삼고 있는 IS하고는 엄연히 다른 단체였다. 이런 구분없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들의 거사를 무차별 테러라 칭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점이다.

 

3. 김원봉은 과연 북한정권에 의해 죽은 것일까?

 

해방후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월북했다. 월북한 이후 김원봉은 북한에서 고위직을 거쳤고 1953년 북한에서 불어온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숙청시기 살아남았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주도한 연안파 소련파 숙청시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었지만 1956년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1958년 김원봉은 자신이 있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김원봉의 행적은 1958년 이후 알려진게 없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김원봉이 1958년에 사망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일각에서는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자살설, 총살설 등을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길 1958년 북한 고위직에서 내려온 이후 그가 죽었을거라 예상하고 있고 북한정권이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어 죽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고, 북한정권에 의해 간첩혐의를 받고 죽었는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이 진상규명을 해야할 것이다.

 

4. 김원봉은 과연 공산주의자였을까?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계열에서는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빨갱이라 매도한다. 2015년 영화 암살이 떳을때도 수구세력들은 김원봉을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했다.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은 박정희식 반공주의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도 매우 부족하고 매우 편향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김원봉은 1920,30년대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1940년대에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애초에 의열단 자체가 아나키즘적인 성향이 강했고 약간의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없다고는 할 순 없지만 기본 이념은 아나키즘이었다. 일각에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인데 솔직하게 얘기해서 김원봉은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악질친일경찰로 알려진 노덕술이 그를 고문했다. 그런 악질 친일매국노에게 고문당한 김원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해방 후 여운형이 괴한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당했듯이 김원봉도 괴한으로 부터의 테러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괴한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몇번 있었다. 즉 김원봉이 월북한 이유는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닌 괴한으로 부터의 위협과 친일경찰 노덕술의 고문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철저한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하는 수구세력의 관점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5. 글을 마치며

 

김원봉은 남북모두에게 잊혀진 독립운동가다. 한국에서는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를 가지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1인체제가 강화된 이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저자 김삼웅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2007년 평양에 갔을때 애국렬사릉에서 가이드에게 김원봉에 대해 물어봤는데 가이드가 김원봉을 몰랐다고 한다. 오랜세월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된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한국에서 다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영화 암살이 개봉하면서 부터였다. 그로부터 1년뒤인 2016년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이 개봉했고 요즘 대한민국에선 전반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적폐세력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도하기 급급하다. 최근 경남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참 좋은 일이다. 앞으로 김원봉 선생님이 더 재조명 받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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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2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NamGiKim님께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신듯 합니다^^:) 앞으로도 의미있는 독서 좋은 리뷰 기대해 봅니다 !

NamGiKim 2018-04-22 15:40   좋아요 1 | URL
사실 제 전공이 역사입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있어요. 현재는 휴학생입니다. 내년에 복학하면 3학년이고요. 우리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와 민주화운동사를 보면 잊혀진 인물들이 매우 많은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 역사에서 재조명 받기를 매우 바랍니다. 특히 여운형 선생이나 조봉암 선생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무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