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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전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8년만에 개정판을 낸 이승만 평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분단을 추구했고, 반소 반공의 지도자로 부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자신의 환영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 남북한 정치지도자 중에서 나온 최초의 분단정권수립론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가히 폭탄선언이었다. 비록 탁치문제로 좌우가 분열되고, 미ㆍ소공위가 성과없이 결렬 상태에 놓였으나 아직 누구도 분단정권을 세우자고 나서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영구분단으로 갈지 모르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미·소공위가 장기 휴회로 들어가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여운형·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반 민중과 정치지도자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이유에서도 분단정권의 수립을 막아야 한다는 충정에서였다. 이런 시점에서 이승만의 단정수립 주장은 정치인들과 국민에게는 ‘충격과 분노’ 그 이상이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에는 배경이 있었다. 이승만의 발언이 있기 전부터 미 군정 측에서 간헐적으로 ‘단정’관련 발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4월 7일 미국 발신으로 국내 한 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미국과 미 군정은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거나 뜻을 전달받고 ‘정읍발언’을 했을지 모른다.
“미점령당국은 남조선만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한다. 조선의 미 군정당국은 남조선 정부수립 계획에 있어서 미국인은 고문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되리라 한다. 또 일부 정보에 의하면 민주의원 의장을 사임한 이승만 박사는 재차 출마하여 남조선정부의 주석이 되리라 하는데 미측이 남조선정부 수립안을 제의한 중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①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ㆍ소공동위원회를 천연시키려고 하는 것. ② 미군의 복원계획으로 조선미군정 당국의 미군 장교급이 축차 귀국하여 그 수가 희소하여 지는 것.”
실제로 이승만과 그의 측근은 ‘정읍발언’ 이전에 몇 차례 단독정부 수립론을 언급했다. 이승만은 5월 10일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가자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 (주석 28)고 발언하였다. 또 하지의 정치고문이자 이승만의 로비스트인 굿펠로는 5월 24일 귀국에 앞서 가진 회견에서 “소련이 조속히 무산된 제1차 미·소공위를 재개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미 1946년 초반부터 미·소 협력의 불가를 내세워서 단정노선ㆍ북진 통일노선을 측근들에게 공언했다. 5월초에는 미·소공위가 휴회되면 단정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공위가 휴회된 지 한 달 만에 공개적으로 단정 수립을 주장했다. 미 군정 내부에서는 4월 초에 단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미 군정의 정치 고문 겸 이승만의 로비스트였던 굿펠로는 5월 말에 남한을 떠나면서 단정을 주장했다. 이승만ㆍ굿펠로우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단정을 주장했고, 미 군정은 공식적으로 단정론을 부정했다.
이승만의 일련의 발언은 미국(군정)의 의도를 어느 정도 꿰고서 한 것으로 풀이된다. 굿펠로를 통해 하지의 의중을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즈음만 해도 미국의 한반도 기본 정책은 소련을 적대시하지 않고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의 수립 쪽이었던 것 같다. 러치 군정장관은 6월 11일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만일 이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이승만의 단정론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또 하지는 1946년 6월초 서울에 온 이승만의 측근인 올리버를 만나 이승만이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기는 하지만, 끊임없는 그의 반소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의 후원 하에 수립될 어떠한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정수립 쪽으로 노선을 정한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정행보에 매진하였다.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을 물러나고, 정읍발언으로 정계에서 외톨이가 되다시피한 이승만은 탈출구를 찾았다. 방법은 모스크바 3상회의 철회와 남한 단정수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미 국무성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다. 이것은 국내의 정치적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미 군정은 해방 직후 이승만을 자신들의 대리인처럼 지원하였으나 차츰 그의 존재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좌우합작은 사실상의 공산주의자 지원이고, 중도좌파는 공산주의자라며 보다 완강한 반공적 태도를 촉구하였다. 하지도 반공적 입장에선 이승만에 못지않았으나 이승만의 이러한 맹목적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크게 의가 상하게 되고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12월 5일, 이승만은 미 군정에서 제공한 미 군용기로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 방미는 유엔총회에 조선실정을 호소한다는 명목이었다. 도쿄에 들러 출발을 하루연기시켜 가면서 맥아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에게 수분간 면회를 허락했다.” 맥아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그와의 면담 자체가 미국과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었고, 이승만은 그와의 면담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재료로 이용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유엔총회는 이미 폐회 상태에 있어서 한국문제 호소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하였다. 그의 실제 방미 목적은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여 한국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다. 그의 방미 기간에 국내의 어려운 상황까지 겹치면서 오히려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 같은 해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10.1항쟁 등 민중항쟁으로 남한 정국이 크게 불안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언론계와 정계에 있는 지인들은 물론 자신의 로비활동 단체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였다. 보다 강력한 대소련 정책과 반공주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이었다. 이승만은 미 국무성에 6개항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제시했다.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그 후 즉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2. 한국에 대한 미ㆍ소 양국간의 협상에 구애됨이 없이 임시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한국의 점령 및 기타 현실문제에 관하여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3. 남한의 경제재건을 원조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4. 한국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원칙에 입각하여 안정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5. 타국과 동등한 원칙에 입각하여, 또한 어떤 국가에 대한 편중이 없이 완전한 통상권한이 한국에 허용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ㆍ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주석 36)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맥아더를 치켜세우고 하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하지가 좌익을 편애하고 우익을 탄압하는 반면에 맥아더의 대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선전하였다. 대소 강경론과 냉전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이것은 국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의 대소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다. 미국 언론과 조야에서 이승만의 반소ㆍ반공주의가 ‘트루먼독트린’을 이끌어 낸 원동력인 것처럼 보도되었다. 미국 사회에 이승만은 단번에 아시아의 반공ㆍ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셜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이번 방미가 그 자신에게는 권력획득의 길이 되고, 국가적으로는 분단정권 수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고, 민족사적으로는 비운이 되었다.
“이승만은 4월 5일 미네아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재차 동경을 방문해 맥아더를 만났고, 국빈으로 중국에 들러 상해와 남경에서 장개석을 만났다. 이승만은 4월 21일에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을 대동하고, 장개석이 제공한 전용기 ‘자강호’ 편으로 귀국했다. 이승만은 아시아 최고의 반공 지도자인 맥아더ㆍ장개석을 만났고, 그들의 전용기를 마음대로 이용했으며, ‘청산리전투’의 항일명장 이청천을 수행원처럼 동반했다. 맥아더는 하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귀국을 승인했다. 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그 자체로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 아무런 영향이나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 대한원조 계획 등 미국의 대한 정책에 생긴 변화를 자신의 외교성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출처 : 이승만 평전 p.182~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