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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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물 어벤저스 시리즈와 토르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토르와 로키가 나오는 북유럽 신화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있는것 같다. 영화에서 보여준 로키와 토르의 이미지가 많은 사람들을 북유럽 신화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북유럽신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라는 게임을 하면서 부터였다. 게임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는 이집트 그리스 노르웨이 아틸란티스등을 주제로 다룬 게임이었다. 그 게임에서 노르웨이로 하다보면 발키리, 거인족, 거대늑대, 니드호그 에인헤야르 트롤등의 신화유닛을 소환할 수 있었고 그런 독특한 유닛들에 대한 호기심의 북유럽 신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10대시절 히틀러와 나치즘에 매력을 느꼈던 나는 히틀러가 북유럽 신화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런 사실이 나로 하여금 북유럽 신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 게임을 한지도 오래됐고 탈나치 한지도 꽤 됐지만 북유럽에 대한 관심은 많다. 어쨌든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의 추억과 당시 가졌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차원에서 북유럽 신화를 읽게 됐다.

북유럽 신화의 내용은 참 독특하다. 보통의 경우 신은 안죽는다는 전제가 있지만 북유럽 신화의 신들은 늙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세계관에도 라그나로크라는 종말 혹은 끝이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하고는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다. 다만 게임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에 거기서
느끼는 당혹감도 있었지만 흥미롭게 읽었으니 개인적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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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사 (보급판)
존 키건 지음, 류한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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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대하다.2008년 중학교 1학년때 메가티비(현재 올레티비)에 저장된 다큐멘터리 중에서 '컬러로 보는 세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보게 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나치독일 그리고 2차세계대전에 대한 관심은 나를 역사학과에 진학하게 만든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접한 2차세계대전사는 다큐멘터리나, 영화, 인터넷 그리고 메달오브아너나 콜오브듀티와 같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 접했던 정보였다. 그랬기에 한번쯤은 2차세계대전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폭염주의보가 발동되던 지난 8월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중 이 책을 발견했고 흥미진지해 보였기에 도서관에서 빌려 2주동안 읽었다.900 페이지라는 분량 때문에 하루종일 읽는 날도 있었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2차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죽은 전쟁이다. 6천5백만명 이상이 죽었고 그중에 2500만이 소련 사람이고 1000만 이상은 중국인이며 전쟁에서 죽은 군인보다 민간인이 조금더 많이 죽었다. 2차세계대전은 전쟁의 양상을 바꿨다. 최초로 민간인을 타겟으로한 공중폭격이 이루어졌고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술이 만들어졌고 민간인 학살도 매우 많이 일어났다. 거기다 2차세계대전 시기 히틀러는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여 유대인 650만명이나 학살했다. 히틀러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를 침공하는것도 모자라 1941년에는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징용으로 끌려갔고 조선의 여성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차마 상상하기 무서운 일을 겪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2차세계대전 하면 남나라 전쟁인냥 생각하는 경우가 간혹있는데 2차세계대전은 우리민족에게 끼친 영향또한 엄청났다. 따라서 2차세계대전은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역사다.


 책의 저자는 존 키건이라는 사람인데 영국사람이고 영국군인이다. 따라서 영국 군인이기에 책을 읽다보면 약간 편향되게 썻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영국인이기에 벵골만 대기근으로 인도인 수백만을 굶어죽게 방치한 윈스턴 처칠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의 한계라고 하자면 900페이지나 되는 책이지만 지나치게 유럽 서부전선에만 내용이 몰두되어있다. 특히 2차세계대전 당시 대서양 해전을 필요이상으로 길게 썻다. 책에서 다룬 주제의 내용 분량을 비교해 보면 서부유럽전선, 동부전선 그리고 태평양 전선이 순서로 서부유럽전선 내용일 지나치게 많이 썻다는 사실이 읽다보면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이 책은 1970년대 중후반에 나온 책이고 저자 키건은 영국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군인이다. 따라서 저자 키건은 영국 중심으로 책을 썻고 거기다 동부전선의 경우 소련이 해체되기 전이라 공개된 문서들이 많지 않았으며 책을 썻던 당시는 냉전시대였다. 책을 읽을때 그걸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런 악조건에서 2차세계대전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했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만 지나치게 서부전선 위주로 서술된 점이 아쉽긴 하다. 그리고 번역에도 약간 오역이 있긴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2차세계대전을 총체적으로 아는데 있어서는 매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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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재스퍼 리들리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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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하면 드골이 이끌던 자유프랑스군과 프랑스 내에서 나치에 대항하여 반파시즘 전선을 구축한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떠올릴 것이다. 나치즘의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을 되찾기 위해 나치즘 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프랑스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레지스탕스와 비록 본부는 영국에 있었지만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은 연합군과 함께 나치독일에 맞서 싸웠다. 한국의 경우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대항했던 서방진영의 반파시즘 투쟁을 역사책에서 가르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의 반파시즘 투쟁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거나 잘 모를 것이다.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많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존재를 알게 됐고 1년전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티토 평전을 읽게 되었다. 


한국사람들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잘 모를것이다. 레닌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호치민 피델 카스트로 체게바라는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름은 들어봤겠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를 아는 국내의 일반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참으로 대단한 지도자다. 비록 1980년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은 소수민족의 갈등을 겪게 됐고 91년 소련이 붕괴될 시기를 전후해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었다. 내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슬로베니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총 6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게임 유저들에게는 유명한 gta4의 주인공 니코벨릭도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고 젊은 시절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참전했던 사람인데 게임상에서 주인공 니코벨릭의 말을 듣다보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문에 유고연방시절을 보냈던 사람들 중에는 티토를 그리워 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는걸로 안다. 적어도 티토 가 있었을 시기 소수민족간의 갈등이 없었고 사회주의 국가 치고는 굉장히 자유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892년 현재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기 때문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 티토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발칸반도를 떠돌아 다니며 기술공으로 돈을 벌며 살았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터졌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고 티토는 오스트리아군으로 징집되어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던중 티토는러시아 제국군의 포로로 잡혔고 1917년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다.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 티토는 볼셰비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1920년 유고슬라비아 지방으로 돌아와 유고슬라비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여러 파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 투쟁에 직접 참가했고 그러던 1928년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보안법에 걸려 5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생활을 하던 티토는 감옥에서도 동지들을 만나며 인맥을 넓혔고 1935년 모스크바로 건너 갔다. 티토의 모스크바 생활시기 스탈린의 대숙청이 있었지만 티토는 살아남았다. 티토는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에 올랐다.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셰계대전을 일으켰고 1940년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를 점령하였다. 


1941년 히틀러의 나치군은 동맹국 이탈리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고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해버렸다. 이때부터 티토는 나치군과 유고슬라비아의 극우조직 우스타샤에 대항하여 파르티잔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뒤 얼마 안되어 히틀러는 소련까지 침공한다.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타잔 활동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을 침공했고 그 시기 티토의 파르티잔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빨치산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2차세계대전시기 독일군은 티토의 파르티잔을 토벌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에 30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했다. 이는 독일이 소련군에 맞서는데 있어 나치독일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30만명이라는 대군을 동부전선에 투입시키지 못함으써 수많은 병력 손실을 초래하기 까지 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히틀러는 오토슈코르체니가 이끄는 SS친위부대까지 투입하여 티토를 죽이려고 했다. 오토 슈코르체니의 SS는 티토를 거의 잡을 뻔했으나 티토는 위기상황에서 부하들과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나치의 티토 사살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티토의 파르티잔은 나치치하의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나치군과 우스타샤에 대항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뤘고 1945년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 내에 들어왔을때 소련군과 연합하여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켰다.


티토는 비록 공산권 지도자였지만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미소냉전기 스탈린과 대립하게 되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암살자를 보내 티토를 암살하려 했지만 암살에는 실패했고 티토는  "스탈린동지 다시한번 암살자를 보낸다면 나도 모스크바에 암살자를 보내겠소"라고 쓴뒤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된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소수민족들에게 우대정책을 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유연한 방법을 썻다. 2차대전 시기 티토와 함께 파르티잔 투쟁을 했던 정적 드질라스는 티토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유언비어도 퍼뜨렸지만 티토는 그를 죽이지 않았고 감옥에만 가뒀다. 다른 정적들의 경우 죽이기 보단 대부분 가택연금을 하는 선에서 끝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세계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었지만 티토는 제3의 외교를 펼치며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먼저 해외 자율화에 성공했다. 거기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에선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출판되기 까지 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첫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1968년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의 구정공세와 구정공세로 인한 미국의 반전운동과 소련의 관료체제에 맞서 봉기했던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민중봉기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인물이 티토이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중립적인 외교를 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74년 티토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어 독재의 길을 걷긴 했지만 주로 해외 순방을 통한 외교활동을 중시했다. 그러던 198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차세계대전 시기 파르티잔으로서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켰고 비록 독재자의 길을 걷긴 했지만 중립외교를 펼치며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히했던 티토는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독재의 길을 걷긴 했어도 제3의 외교노선은 현재 우리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에게 배워야할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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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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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서평>

 

2017년 추석 연휴는 참으로 길었다. 긴 연휴를 끼고 읽어볼 생각으로 2주전 윌리엄J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을 펼쳤다. 976페이지(각주를 빼면 844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이 나를 짓눌렀지만 평소 호치민과 베트남 전쟁에 관심이 많던 나이기에 긴 연휴를 끼고 끝까지 다 읽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현대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이라는 명분아래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고 한국군 5천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의 부상자 속출하였지만 그 덕분에 외화를 벌어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인들은 베트남인들을 죽이고 폭행하고 강간하고 학살하였으며 독립운동세력이 주축의 된 월맹과 민족반역세력의 주축이 된 월남의 싸움에서 미국과 더불어 민족반역세력을 지원하였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세력이 주축의 되었던 민족해방세력인 월맹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가 누구일까? 그가 바로 평생을 민족해방과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바쳐온 호치민이다. 이 책의 내용과 호치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가하기 전에 호치민의 일생을 소개하겠다.

 

호치민 그는 1890년 응우옌 신 삭이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20대의 나이에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취직하여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등을 돌아다니며 노동자, 하인, 요리사 보조등 온갖 일을 하며 프랑스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안남애국자연합을 창설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베트남 민족의 독립요구를 주장했고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베트남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2<르 파리아>를 창간하여 프랑스 제국주의를 낱낱이 비판했고 1923년 모스크바로 건너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하며 베트남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1925년 베트남 청년회를 결성하고 광저우에 세워진 단체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1926<혁명의 길>을 집필하기도 했다. 1930년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하여 반프랑스 활동에도 나섰다. 1930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에 대항하여 통킹반란이 일어난 뒤 1931년 홍콩에서 영국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930년대 까지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며 반프랑스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팜 반 동과 보 응우옌 지압(후에 전설이 될 명장)을 만나 베트민을 창설하였고 1940년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독일의 동맹국 일본이 베트남을 침략하자 그때부터 대일전과 대프랑스항전을 준비하였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고 반파시즘 전선이 형성되자 중국의 도움을 받기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 하여 1년간 감옥생활을 하며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1943년 석방된 이후에 연합국과 협력하여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194412월 베트남 해방군을 창설하여 일본과의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면서 미국의 OSS와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일본과의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1945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총봉기를 일으켜 92일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 프랑스가 다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프랑스를 몰아내려 했으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를 몰아냈다. 디엔비엔푸 전투당시 제네바에서 평화회담이 진행되었고 17도선을 기점으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호치민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2년 이내의 통일 선거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인도차이나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민족반역자 정권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한다. 이에 호치민은 북베트남 안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행하고 토지개혁 이후 부패한 남베트남에 훈련시킨 요인들을 보낸다. 비록 토지개혁 당시 몇몇 이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북베트남 인민들이 가지고 있던 호치민의 인식은 대부분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호아저씨였다.

1960년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됐다. 호치민은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와 불교도 탄압이라는 반민중적인 상황을 보고 남쪽을 해방시키려 노력하였으나 미국은 처음에는 군사요인을 파견하여 남베트남을 방어하려 했고 결국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다. 미국은 북폭을 실행하며 각종 최신식 무기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 하지만 호치민을 비롯한 월맹군과 베트콩은 미국의 최신식 무기에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68131일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구정공세를 감행하여 사이공의 미대사관 1층을 잠깐동안 점령하기도 했고 구정공세 1달동안 미군에게 치명적인 병력손실을 안겨주기도 했다. 구정공세로 인한 미국의 크나큰 병력 손실과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던 린든존슨 정부의 선전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미군은 북폭을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던 196992일 호치민은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호치민의 사망으로 베트남 인민들은 더욱더 각성하게 되었고 197212월 미국은 라인베커 작전으로 마지막 대공습을 가했지만 19731월 파리평화협정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하게 됐으며 1975430일 베트남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처럼 호치민은 프랑스 독립운동, 사회주의 운동, 항일투쟁, 1차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까지 20세기 역사의 격동의 현장 속에서 베트남 민중들을 위해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 윌리엄J듀이커의 말대로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일지도 모르겠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박정희 정권 시절 대한민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그 베트남 전쟁은 우리나라 경제에도 영향을 줬지만 1975년 월맹이 승리로 끝나면서 박정희 정권은 월남 패망의 예시를 들며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반공으로 세뇌시키는데도 영향을 주었다. 그 반공교육으로 인하여 호치민 혹은 베트남 전쟁과 월맹군에 대한 중립적이고 양심적인 평가가 이단자 취급 받을 정도로 세뇌의 골의 매우 깊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박정희식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은 호치민이 어떤 인물인지 혹은 베트남 전쟁에서 월남이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기본적인 사전지식이 없다. 그렇기에 박사모와 수구세력들은 자주 월남패망을 예시로 들어 진보적인 인사를 베트콩과 같은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난 이들의 주장에 결사반대한다. 월남패망을 예시로 들며 호치민과 월맹을 사악한 악마 취급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월남의 응오 딘 디엠 정권은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해 만들어진 부정부패한 정권이다. 그랬기에 1963년 월남 내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를 미국의 케네디 정부가 상황 진전을 위해 묵인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둘째 월남 정권은 근본적으로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고 정권 반대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탄압하며 독재를 일삼던 오직 부르조아 계급들을 위한 정권이었다. 심지어 북부베트남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단행할 당시 그에 걸맞은 토지개혁안을 월남의 정권은 내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주 자본가 계급들이 토지개혁을 결사반대했을 정도다.

 

셋째 월남의 정치 지배층들은 프랑스식민통치때는 친 프랑스파의 길을 걸었던 민족반역자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호치민을 비롯한 월맹의 지도자들은 평생을 베트남 독립을 위해 바쳐온 애국지사들이었다.

 

3가지만 살펴봐도 월남의 정권은 부정부패와 민족반역의 극에 달한 집단이자 미제 앞잡이 정권이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히 들어난다. 그렇다면 월맹과 호치민이 한계가 없었던 것일까? 정답은 물론 아니다. 1930년대 호치민은 반프랑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베트남의 여러 반프랑스 세력들과 결합하려고 했으나 유난히 차별하는 집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호치민과 베트민은 유난히 트로츠키주의자를 매우 경계하고 배척했다. 심지어 필요에 따라선 숙청했다.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정치반대파를 숙청했듯이 아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트로츠키주의자를 숙청한 건 아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를 강경적으로 배척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시대가 트로츠키주의를 이단으로 간주하던 시대였기에 호치민도 그 시대적인 흐름을 못 벗어났다는 한계라고 본다. 트로츠키주의자를 배척했던 호치민의 행보에는 조금의 아쉬움이 남지만 평생을 독립투쟁과 민족해방에 한평생을 바쳐온 호치민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던 공무원이 30년간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쓴 호치민 평전이다. 비록 분량이 너무 많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하고 중간에 읽었던 내용을 종종 까먹기도 했다. 국내에 번역된 호치민 평전은 OSS에서 활동하며 호치민을 직접만난 참전용사 찰스 스펜이 쓴 호치민 평전과 이 사람이 쓴 호치민 평전이 전부고 전자는 절판된 지 오래됐다. 둘 다 괜찮은 서적들이지만 찰스 스펜의 호치민 평전은 절판됐기에 힘들더라도 이 책을 매우 추천해주고 싶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베트남에서 자료를 모와 충실하게 쓴 정성이 보이고 역자의 번역 수준도 매우 높은 것 같다. 무튼 이 책과 같은 훌륭한 서적들이 앞으로 많이 나오길 바라며 우리세대가 베트남과 호치민을 바로 앎으로써 한국이 당당하게 베트남 전쟁의 만행을 깊이 반성하며 베트남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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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평전 -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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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평전 서평

내가 몽양 여운형이란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2015년 1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 1945'를 보고나서 부터 였다. 배우 신구가 연기한 몽양 여운형은 정말 멋있고 포스가 넘쳤다. 드라마를 통해서 "몽양은 살아생전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살아온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내가 지금까지 몽양 여운형을 존경하게 되는데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서울 1945를 다 보고 난 후 난 몽양 여운형의 매력에 빠져 서울 1945에서 그가 나오는 파트를 자주 돌려 봤고 간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난 몽양 여운형 평전은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2015년 김삼웅 선생께서 쓰신 몽양 여운형 평전을 읽게 됐다.

난 이 평전을 3번 이상 읽었다. 2015년 8월달에 처음 읽었고 2016년 3월에 한번 더 읽었으며 2017년 7월에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저자가 워낙 한국 현대사쪽 인물 평전을 주로 쓰는 사람이고 책도 워낙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쓰는 사람이라 책을 읽을때마다 책 내용이 눈에 쉽게 잘 들어왔었다.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해방 이후의 여운형 뿐만 아니라 그 전의 여운형에 대해도 심층적으로 알게 되었다.

몽양 여운형이란 인물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난 여운형은 20대가 되던 시절 집에있던 노비를 해방시켰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자 여운형은 중국으로 가서 남경금룽대학에서 유학 한 뒤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했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함으로써 2.8 독립 선언과 3.1운동에 불씨를 제공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국될 당시 임시정부에 들어가 활동했고 일본고위층의 초대를 받았음에도 도쿄에가 그들과의 회담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함으로써 일본에서 유학하는 조선 유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20년대에는 독립군 창설을 위해 노병회를 만드는데도 기여했고 조선독립을 역설하기 위해 모스크바로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몽양 여운형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했다. 중국혁명에도 관여했던 여운형은 손문, 장개석, 모택동과도 교우했고 베트남의 독립영웅 호치민과 만나 협력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동남아시아와 필리핀에서도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1920년대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몽양 여운형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연결망이 되기도 했다. 1929년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됐고 3년간 감옥생활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양 여운형은 쾌활함을 버리지 않고 주변 죄수들과 간수들까지 감동시키게 만들기도 했다. 1933년 석방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 했고 스포츠 관련쪽으로도 많은 투자와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게된 손기정 선수도 가지전 몽양을 만나 조언을 들었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몽양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는 가장 먼저 일장기를 지워 보도했다. 그 결과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다. 1940년 일본정부과 중국과의 협상을 위해 여운형에게 부탁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1942년에 있던 미국의 두리틀 공습을 목격한 여운형은 일제 패망을 확신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했다. "허위사실 유포죄"로 일본 형무소에서 1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석방된 여운형은 1944년 국내에서 건국동맹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획했던 국내진공작전에도 가담하고자 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 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엔도 총감과 만나 회담한 뒤 일본의 항복 한 이후 자신의 만들어 놓은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 시켜 국내치안을 담당했다. 미국과 소련이 들어온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놓였음에도 여운형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찬탁과 반탁 싸움이 심해질 시기 여운형은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다. 숱한 괴한들의 노골적인 테러와 위협에도 여운형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지만 좌우합작은 극좌 극우 양쪽에서 공격받았고 결국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한다.

이처럼 몽양 여운형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을 통한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훌륭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몽양은 우리역사에서 많이 잊혀졌다. 무엇보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은 여운형의 업적을 감추려 했고
박정희 정권 시기에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여운형의 존재를 너무나도 모른다.

이 책은 2015년 박근혜 정권이 국정교과서를 추진할 당시 김삼웅 선생께서 쓰신 책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이 출판되었던 시기에는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보였고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던 교수 권희영은 여운형에 대해 "여운형과 같은 좌파가 주목 받아선 안된다."라고 하며 여운형을 역사속에서 감추려 했다.

여운형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느꼈던게 있다. 여운형이라는 인물과 그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지만 여운형이라는 인물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상당한 역사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운형을 주제로한 영화가 지금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대하지만 업적에 비해 잊혀진 몽양 여운형 이제는 역사속에서 재조명 받을 때가 왔다. 이 책은 여운형을 이해하는데 있어 읽어야할 필수서적이다. 여운형 관련 책들이 국내에 많이 있지만 대개는 너무학술적이거나 대개는 절판된 책들인 경우도 있다. 여운형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먼저 읽고 다른 여운형 서적을 읽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앞으로 여운형 선생이 일반인들에게 좀 더 알려지길 기대하고 한국 역사속에서 재조명 받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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