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필승! 월드컵 축구 대백과 반갑다 사회야 20
김성호 지음, 박재현 그림 / 사계절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6강 진출따위 기대하지도 않고 1승도 기대하지 않지만 경기중에 제발 1꼴이라도 넣어라!!!! 대한민국 축구 선수님들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일전쟁은 과연 어떤 전쟁이었을까?’ 10대 때부터 2차세계대전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나로선 중일전쟁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기껏 해봐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중국국만당의 수도 남경(난징)을 순식간에 점령한 뒤, 난징에서 소름끼치는 대학살을 전개하며 30만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학살했던 전쟁.”이 정도였다. 따라서 1937년 남경대학살 이후 1945년까지 약 8년간 전개되었던 중일전쟁의 전개양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일전쟁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이후에도 난 중일전쟁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는 않았고 중일전쟁에 대한 나의 인식 또한 일반인 혹은 과거 2차대전 마니아들이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중일전쟁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시각이 많이 변했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굉장히 많이 알게 됐고 중일전쟁 또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유럽이나 태평양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들만큼이나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됐던 전투가 적잖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 지금 까지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은 항일에 소극적이었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항일에 적극적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관점은 진보계열에 있는 유시민 작가나 리영희 선생이 쓴 책뿐만 아니라 보수색이 굉장히 강한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인 이원복 교수도 공유하고 있는 관점이기에 나 또한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진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항일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장개석의 국민당이었고 항일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일본군에 맞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뤘던 건 1940년8월부터 1941년 1월 말까지 팔로군 40만 명이 동원되었던 백단대전 뿐이었다. 백단대전 외에 중국 공산당이 일본군에 맞서 전개했던 전투는 그리 많지도 않고 있어봤자 소규모 교전 정도였다. 물론 백단대전의 경우 팔로군 22000명이 죽고 일본군 12000명이 사망한 대규모의 전투였던 건 확실하지만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치룬 항일전의 대가에 비하면 세발의 피에 불과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 중일전쟁이 일어난 시점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까지 중국이 치른 대다수의 전투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치뤘다. 중국의 베르됭 전투라고 알려진 오송전투, 남경 대학살이 일어나기 전 남경에서 전개되었던 난징 전투, 중일전쟁 이래 최초로 중국군이 승리했던 타이얼좡 전투, 창사 전투, 1939년에 전개 되었던 동계 대공세 그리고 1943년에 일어났던 전투이자 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불리는 창더전투까지 사실상 중일전쟁 시기 대부분의 전투는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치렀다. 8년간 지속되었던 중일전쟁 시기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항일전쟁을 치루면서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다. 8년간의 중일전쟁에서 중국 국민당군은 고위 장성만 206명이 전사했다. 반면 중일전쟁시기 전사한 팔로군 연대장이 5명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중일전쟁 시기 중국 국민당군이 얼마나 항일전을 많이 치렀는지 입증된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이 빨리 끝날줄 알았지만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었기에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몽골 국경지대 근처인 노몬한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중일전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견제했고 1940년 일본이 무솔리니 히틀러와 동맹관계를 맺자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더더욱 압박했다. 이는 결국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기습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일본에 맞서 싸우고 있던 중국 국민당군을 지원했다. 중국 국민당 또한 영국군의 버마 탈환작전에 수많은 군대를 투입했고 교착된 중국 전선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일본간에 섬 쟁탈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중국전선에 투입했던 수많은 군대를 태평양으로 빼돌렸고 이는 결국 패망으로 이어졌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항복하고 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에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해오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무기들을 살펴보면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국민당군의 경우 재정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서방세계의 무기(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권총, 기관단총, 기관총, 야포, 박격포, 전차등)들을 많이 사용했지만 일본군의 경우 38식 아리사카 소총과 같은 구식 소총을 주로 이용했고 일본산 무기를 고집했다. 심지어 기관단총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군부는 “기관단총은 총알은 낭비한다.”라고 하면서 소총의 위력만을 과대평가하기 까지 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전차의 위력이 매우 취약했다. 일본군의 경전차는 대구경 기관총에 뚫리는 정도였고 포신또한 짧았으며 사거리도 전차라고 하기에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주력전차M4셔먼과 소련군의 주력전차 T-34가 독일군 티거 탱크의 먹잇감이었다면 일본군 주력 중장갑 전차인 치하 전차는 미국의 M4셔먼전차에게 먹잇감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군 경전차였던 M3스튜어트 탱크에게도 처참하게 패배하기 일쑤였다.

 
중일전쟁과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전차나 기본적인 보병들의 무기가 취약했던 모습과는 달리 공군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항공전력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고 해군력은 영국을 앞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마져도 세계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대륙에서 전투를 치루는 중일전쟁의 경우 해군은 의미가 없었다. 거기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중일전쟁 초반에 투입되었던 항공전력 대부분이 태평양 전선으로 갔다. 무튼 이 책을 통해서 일본군의 전력과 군사 기술력이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고 항공 전력과 해군력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전차를 비롯한 육군 장비들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집중해서 읽은 파트는 일본과 소련군이 붙었던 교전이었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소련이 붙었던 전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한반도와 만주 소련의 연해주 사이에 있는 두만강 근처에서 벌어졌던 하산호 전투(장고봉 사건)고, 또 하나는 만주와 몽골 근처에서 벌어진 노몬한 전투고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1945년 소련이 만주에서 진격하여 전쟁을 끝낸 8월 폭풍 작전이다. 1938년 두만강 근처에서 벌어졌던 하산호 전투에서 일본군은 520명이 사망했고, 노몬한 전투에선 8400명이 전사했으며 1945년 8월 폭풍 작전에선 최소2만에서 최대8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전사했다. 3번 붙은 중대규모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 보다 사상자가 더 많이 나왔고 3번 다 소련군에게 패배했다. 많은 사람들이 러일전쟁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만 정작 일본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던 이 3개의 전투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이 전투를 다룬 파트를 더 집중해서 읽었다.

 
이 책을 통해서 지금까지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중일전쟁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었다. 9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이긴 했지만 주로 전투위주의 서술이었고, 전쟁사에 관심있는 나로선 책의 내용이 많았음에도 다른 책들에 비해 지루함을 덜 느끼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자체가 국민당의 항일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쓰인 저자의 의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 공산당의 투쟁업적을 너무 평가 절하했던 것 같다. 물론 저자가 얘기한 대로 항일투쟁에 있어서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 보다 훨씬 더 많은 전투를 치렀다 할지라도 과연 국공내전시기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한 이유가 단순히 저자의 말대로 중일전쟁 시기 국민당이 전투를 많이 치렀기 때문일까? 글쎄 난 이 부분에 대해선 좀 회의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중국 국민당의 부정부패 때문에 민심을 못 잡아 패배했다는 주장은 중국 공산당의 선전일 뿐이다.”라고 했지만 그다지 믿기지 않는다. 실제로 국공내전시기 부패한 국민당 관료들이 공산당에게 무기를 팔아넘기는 사례가 적잖았던 것을 생각해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라는 것이다. 이 책은 중일전쟁을 총체적으로 아주 잘 정리한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중일전쟁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서적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점과 기존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중일전쟁시기 중국 국민당군의 항일투쟁을 잘 조명했다는 점에서 분명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이 책은 한국 사람이 쓴 책이기에 이 책의 사실상 마지막 부분에선 1930,40년대 독립운동사를 중일전쟁사에서 1개의 파트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파트만 읽은 뒤 내용을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2차세계대전사와 중일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고 밀리터리 전쟁사 분야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들에게 읽기를 매우 추천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앞으로 극우파들의 인신공격 댓글은 경고 없이 삭제 합니다!!!!!!!!!>

앞으로 단순히 나를 색깔론 가지고 욕하기 위해 내가 쓴 서평에다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다면 가차없이 삭제할 겁니다!!!!

정당한 반론이나 그 사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의 반론이 아닌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헐뜯고 비하하기 위해 댓글을 다는 사람은 제 글에 대해 뭐라 욕할 자격이 없다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인성교육과 도덕교육을 다시 받고와야 할 것 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반론이나 의견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06-08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6-08 19:16   좋아요 1 | URL
무시하는게 답이긴 합니다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죠. 전 그런 글을 계속 보게되는 습관이 있어 힘듭니다. 요즘 2,3일 전부터 극우들의 영혼없는 테러를 당하고 있습니다.

NamGiKim 2018-06-08 20:59   좋아요 1 | URL
좀 힘들어요. 갸들이 워낙 이상한 얘기를 많이 해서

NamGiKim 2018-06-08 21:04   좋아요 0 | URL
또한 당신은 홍어라는 댓글을 썻는데 그런 단어를 쓰는것 부터가 기본적인 인성이 결여되었다는 걸 저한테 보여주시는 군요.

팩트를일깨워 2018-06-08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는것이 영혼없는 테러더냐? 반론도 못하면서 댓글삭제하는 주접떠는 주제에 말이다

NamGiKim 2018-06-08 20:56   좋아요 0 | URL
논쟁 해줄 수는 있는데 당신 인성이 안되서 안해주는 거에요.^-^

NamGiKim 2018-06-08 21:29   좋아요 0 | URL
왜 이리 대답이 없습니까.

NamGiKim 2018-06-08 21:56   좋아요 0 | URL
당신이 하는건 테러 밖에 안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NamGiKim 2018-06-0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반론을 못해서가 아니라

NamGiKim 2018-06-0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10000일 전쟁보고 종북좌빨이라 했는데 진지하게 논쟁 해볼래요?

NamGiKim 2018-06-08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어 종북과 같은 단어를 입에다는 당신은 그 단어를 쓰는것 부터가 스스로의 저급함을 인정했습니다.

NamGiKim 2018-06-08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당신은 저를 종북좌파라 몬 것 부터가 가장 잘못 집었어요. 전 종북좌파가 아니거든요. 전 NL주사파들이랑 논쟁하다 국정원 프락치로도 몰렸고 반북반공주의자로 몰린적도 있습니다. 그런 저보고 당신은 종북좌빨이라 했죠. 당신이 저보고 종북좌빨이라 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랑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고 기본적으로 논리가 없기에 색깔론으로 몰았던 것이죠. 왜냐면 그런 색깔론 공격이야 말로 가장 편하거든요.

NamGiKim 2018-06-0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5.18을 폭동이라 하시는 분이시네요. 5.18은 조갑제 마져도 북한군 개입없었다 얘기하는데 지만원이 설파한 뇌피셜을 믿으시다니 사고라는걸 할줄모르는 분이시네^-^

NamGiKim 2018-06-0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5.18폭동 주장하는것 보니 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핵폐기물 급이네요. 역시 일베충^-^

NamGiKim 2018-06-0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18을 폭동으로 주장하는 분이 펙트를 일깨운다고요? 지나가던 개가 웃고 가겠습니다.^-^

NamGiKim 2018-06-08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이분도 얼마나 관심이 받고 싶었으면 이런짓을 하는걸까? 이걸 귀엽다고 얘기해야하나? 어느누군가에게 따쓰한 보살핌이 필요하려나ㅋ

NamGiKim 2018-06-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리라곤 쥐뿔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곤 쥐뿔도 없는 인간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군요. 이 글이 싫거나 짜증나면 본인부터 책이나 읽고 서평을 달던지 글을 쓰던지 해야지. 결국 이런데서 추접대는거야 말로 찌질이가 따로없군요. 관종인거 아시지만 일부러 관심가져주면서 쓰는 댓글이니 기분나빠하지 마세요. 원래 관심받고 싶어하는거 일베들 특징이잖아요😂😂

NamGiKim 2018-06-0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당신이 공들여 댓글 테러 하면 할수록 전 삭제만 하면 끝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몇몇이들이 나보고 종북좌빨 홍어 빨갱이라 매도한다. 또는 북한으로 가라고 한다. 상관없다. 그들이 북한으로 가라 욕해도 난 대한민국이 더 좋기에 북한에 갈 일이 없다.ㅋㅋㅋㅋ 내가 태영호에 대해서 그런 글은 단 것은 현재 북한이 어느정도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90년대 고난의 행군시절 얘기를 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근거없는 비난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태영호를 비롯한 극우계열 사람들은 문재인을 종북좌빨취급하는데 정작 남북대화 지지하고 문재인에게 A+준 트럼프에겐 묵묵부답이다. 즉 문재인 종북이라는 공식은 환단고기급 개소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당신들을 1명 죽일 때 당신들은 우리 10명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지치는 쪽은 당신들이 될 것이다.”

 

 

1946년 호치민이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인 장 생트니에게 했던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5년부터 사이공이 함락 당했던 1975년 까지 베트남은 약 10000일간 전쟁을 치렀다. 승리를 위해 베트남이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지만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미국에게 유일한 1패를 남겼고 인간의 의지가 최신식무기를 굴복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필자는 1년 전부터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호치민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책 몇 권을 읽었었다.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 중에 필자가 가장 처음이자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었다. 작년 5월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쯤이었던 것 같다. 무튼 이 책의 감격을 잊지 않았기에 지난 1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게 됐고 읽고서 알게 된 사실을 오늘 글로 쓰게 되었다.

 

1.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서막

 

이 책의 시작은 1945OSS에서 근무했던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근무지를 베트남으로 파견되면서부터 시작한다. 패티 소령은 베트남에서의 임무수행을 위해 매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패티 소령은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 살레르노 전투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계속 전개되었던 이탈리아 전투까지 약 3년간 유럽에서 싸웠다. 그러던 중 OSS의 총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을 만났고 패티의 근무지는 아시아로 바뀌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근무지가 바뀐 패티 소령은 1945430일 중국 국경의 어느 찻집에서 나이 50먹은 어르신을 만난다. 그가 바로 호치민이다. 당시 호치민을 만난 패티 소령은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일 까봐 걱정했지만그와의 회담을 가진 뒤 호치민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공산주의자가 아닌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애국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온 호치민은 1940년 팜반동과 보 응우옌 지압을 만나 무장 단체 베트민을 창설하여 대일전을 전개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일본군 점령 하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민을 훈련시켜 대일전에 활용하고자 했다. 19452차 대전이 끝나가던 막바지에 미국의 OSS는 호치민의 베트민 조직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고 군사훈련까지 담당했다. 실제로 OSS가 지원했던 베트민 부대가 소규모의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민이 대일전에 제대로 참전하기도 전에 일본은 항복했고 미국 OSS는 그들을 더 이상 이용할 이유가 사라졌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도 베트남도 그리고 베트민의 지도자들도 20년뒤 미국과 전쟁을 치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2.프랑스의 재침과 디엔 비엔 푸

 

19458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베트남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고 194592일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항복 날짜에 맞추어 호치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호치민이 낭독 했던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였다. 이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북쪽에는 중국군이 남쪽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중국군은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프랑스군을 앞세운 뒤 철수 했다. 사실 프랑스는 19세기 중반부터 1940년 일본에게 인도차이나 반도를 빼앗길 때 까지 베트남을 통치하였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들어온 이유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함이었다. 1946년 프랑스의 도발에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진행하였지만 1946년 베트민군과 프랑스군이 베트남 항구 도시 하이퐁에서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 전황은 프랑스가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베트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베트민에게 불리했지만 1949년 중국의 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베트민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지원으로 세력이 강해진 베트민 군대는 1951년 총공격을 가했지만 네이팜탄까지 동원한 프랑스군을 상대해야 했다. 1954년 베트민은 라오스 국경지대인 디엔 비엔 푸를 포위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다. 1차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군은 7만 명 이상이 사망 했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는 3천명에서 5천명이 죽고 1만 명이 베트민 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베트남이 치른 희생은 당연히 프랑스군보다 훨씬 많았고 베트남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25천명 이상의 병사가 사망했다. 수많은 희생과 투쟁으로 베트남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자신들 땅에서 몰아냈다.

 

3.남북분단과 미국의 개입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를 몰아냈지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된다. 제네바 협약에는 베트남을 남북으로 나눈 뒤 2년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라고 되어있었다. 북베트남에 있던 호치민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 선거를 즉각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당 통일과 한국전쟁을 경험 했던 미국은 총 선거를 실시할시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할거라 예상했고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남베트남의 친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지한다.

 

남북분단이 기정사실이 되자 호치민은 북베트남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60만명의 가톨릭교도들을 포함한 8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월남 했고 악질지주 부르주아 혹은 민족반역자로 몰려 죽은 사람이 약1만에서 5만명정도 된다.(현재 서방 학계에서는 토지개혁시기 죽은 사람이 약 1만5천에서 2만명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결국 호치민은 처참했던 토지개혁의 실상을 인정하고 당내에서 철저한 자아비판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호치민에 대한 민중의 의식은 여전히 다정다감하고 친근감 있는 호아저씨였다.

미국의 지원으로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가족정치를 했고 카톨릭 신자만을 우대한 반민중적인 정책만 펼쳤다.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펼쳤다. 거기다 남베트남 대부분의 관료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린 민족반역자들이었고 대통령 응오딘지엠은 독재정치를 펼쳤으며 베트남 민중의 5%도 안 되는 카톨릭은 우대하면서 95%의 불교도들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당시 응오딘지엠의 반공 정책으로 수많은 사찰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갔다. 응오딘지엠의 반공정책으로 약 7만 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응오딘지엠의 카톨릭 우대 정치와 가족정치 그리고 민족반역자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남베트남 민중들은 분노했고 그 결과 1960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결성하게 된다. 1963년 응오딘지엠의 불교도 탄압에 견디지 못한 승려 틱광둑이 시위도중 소신공양을 했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을 본 응오딘지엠의 동생 와이프인 마담 누는 그 중이 바비큐가 된 것인데 무엇이 난리냐라고 공개언론에서 말했고 이는 결국 미국의 지원을 잃게 되었으며 친미파계열의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 응오딘지엠 타도로 시작된 군사쿠데타는 1965년 응우옌 반 티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끝이 났지만 약 2년 동안 10번이나 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었다. 응우옌 반 티우 정권도 역시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었다.

 

4.베트남 전쟁의 시작과 구정공세

 

1950년대부터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오던 미국은 1959년 북베트남에서 호치민 루트를 통해 훈련된 요인들이 남파되자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부터 존F케네디 그리고 린든존슨으로 이어졌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만든 조작이었고 북베트남은 어뢰로 공격한 적도 없었다.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최신식 폭격기를 동원하여 북폭을 감행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면서 베트남 전쟁은 확전 되었다. 미국을 따라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가 베트남 전에 참전하였다. 베트남 전을 바라보는 시각은 소련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도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권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은 베트남 전을 단기간에 끝낼수 있다는 군사적 오만감에 빠져 전쟁을 지속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까지 연결된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하했고 남베트남 내부에서 활동하던 베트콩은 미국에 맞서 싸웠다. 1965년 미국의 첫 지상군이 다낭항에 상륙했다. 미군과 베트남군이 처음으로 전투를 치뤘던 곳은 남베트남의 이아드랑이라는 지역에서 였다.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300명이 죽고 북베트남군 1700명이상이 죽으면서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베트남 전쟁은 사실상 전선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전쟁이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 군은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폈고 따라서 미군은 수색과 섬멸작전을 이어갔다. 거기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의 전면적인 개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으로 북진하지 않았고 비행기로 폭격만 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안 좋았지만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그들과의 줄타기 외교를 함으로써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모두 받아냈다.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AK47을 비롯한 소총과 탱크 전투기 트럭 SAM미사일과 같은 장비와 무기를 지원해줬고 이 무기들은 북베트남이 미국과 싸우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전선 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을 계속 해나갔고 주둔 병력도 지속적으로 늘렸다. 1967년이 되면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이 40만을 넘었고 1968년에는 베트남 주둔 미군병력 총 549천명이 된다. 1965년부터 1967년 사이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병사가 2만 명이 넘었음에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우리는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선전했다.

1968년 미국의 희망 없는 선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베트남의 대명절인 구정에 있었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공세인 구정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구정공세가 시작되면서 케산의 미군기지는 몇 달 동안 포위되었고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미대사관1층이 베트콩 기습부대에게 잠깐 점령당하기 까지 했으며 베트남의 전통도시 후에는 1달 동안이나 북베트남이 점령했었다. 구정공세 1달 동안 미군 2500명이 죽었고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35천명 이상이 죽었다. 군사적으로 봤을 땐 구정공세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밀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 착각한 미국국민들은 구정공세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생생히 봤고 이는 반전운동으로 이어졌다.

 

5.전선은 미국으로 그리고 호치민의 사망

 

구정공세는 미국국민들은 분노했고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베트남 전쟁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빈부적 계급적 불평들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미국은 징병제도였다. 미국의 징병제도로 인하여 가난한 백인의 자식들과 노동계급의 자식들 그리고 흑인의 자식들은 지옥의 베트남으로 가게 됐지만 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 엘리트 계층들은 학업을 핑계로 징병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베트남으로간 흑인군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 병력 13%를 흑인이 차지했고 이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치였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 징병제도는 계급과 빈부 그리고 인종간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반전운동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방식은 생각보다 무자비하고 거칠었다. 시위대가 반전운동을 하면 거리에 있는 미국의 경찰들은 곤봉을 돌고 시위대를 서슴없이 후려치기까지 했고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화기와 물대포가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위군을 동원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 1970년 미국의 오하이오 주의 켄트주립대학교에서는 반전성향이 강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주방위군이 발포하여 10명이상이 죽거나 다치기도 했었다. 1968년 구정공세 이후 반전시위가 격화되면서 린든존슨은 재선에 실패하고 그해 11월 일시적으로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그 외의 도시 폭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문제는 결국 공화당의 닉슨대통령에게로 까지 넘어가게 되었다. 1969년부터 미국은 단계적인 미군철수를 생각하게 되었음에도 남베트남 안에서의 전투는 계속 되었다.

196992일 호치민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한평생을 베트남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바쳐온 위대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북베트남 인민들은 애도와 슬픔을 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단결하게 되었다.

 

6.미군 철수와 남베트남의 몰락 그리고 승리

 

1969년부터 전투가 지속되면서 북베트남을 향한 미군의 폭격도 재개되었지만 이때부터 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생각하면서도 베트남에서의 전투를 계속했다. 1970년에는 베트콩이 활동한다는 이유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1년에는 남베트남군을 앞세워 라오스를 침공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면서 동시에 대규모 병력의 미군 철수도 이루어 졌고 북베트남과의 협상도 이루어 졌다. 미국의 라오스 캄보디아 침공은 사실 미국이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따내기 위해서 벌였던 협박이었다. 북베트남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완강히 미군철수를 주장했다. 닉슨 정부는 마지막 협박으로 19721218일부터 29일 까지 약 11일간 대규모의 폭격을 하노이와 하이퐁에 감행하였다. 수많은 북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했고 미국의 B-52폭격기도 30~40대 이상 파괴되었다.

 

결국 1973년 미국의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레둑토가 파리에서 만나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했다. 비록 미국이 완전 철수 하긴 했지만 군사고문단 50명 정도는 남겨두었고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은 계속 되었다. 197412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격을 계획하게 되었다. 1975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그해 3월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을 향해 총 공세를 펼쳤고 4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당시 남베트남의 지도자 응우옌 반 티우는 월남이 패망하기 전 금괴 2~3톤을 들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이로써 10000일간 지속되었던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7.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본질적으로 추악하고 잔인하다. 베트남 전쟁은 유난히 그 잔혹함과 추악함을 제대로 증명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19683월 미군은 남베트남의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베트콩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약500명이나 되는 양민들을 학살했다. 학살당한 양민 중엔 0세 유아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군은 수색과 섬멸 작전을 펼치면서 수많은 양민들을 죽였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양민학살과 범죄로 물들여져 있었고 미군의 잔혹함이 잘 들어났던 전쟁이다. 미군의 뿌린 고엽제로 인한 환경피해 또한 어마어마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국은 57천명의 전사자와 26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항공기3700(그중1000대는 북베트남 상공에서 격추됐다.)와 헬기4800(베트남군의 지상포화로)가 격추당했다. 전쟁비용으로 2400억 달러를 지불하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부었던 화력 4배에 달하는 8백만 톤을 베트남전에 쏟아 부었다. 사실상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제외하고 쓰지 않은 무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패배했다. 그에 비해 베트남이 가진건 낡은 소총과 정신력이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150만명의 병사를 잃었지만 승리했다. 위대한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책에 남겼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가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저자의 주장대로 역사는 베트남의 승리를 불굴의 승리 정신력의 승리로 기록할 것이다.

 

8.글을 마치며

 

필자는 개인적으로 호치민 아저씨를 존경하고 베트남 민중의 투쟁을 높게 평가한다. 아쉽게도 국내에 출판된 호치민 관련 서적이나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들은 많지가 않다. 국방부 쪽에서 나온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이나 자료들은 반공적인 시각에 맞추어져 있어 정상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서 객관적인 사실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최근 유튜브 영상을 보는 도중 수구세력의 앞잡이 정규재가 이 책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자신들 멋대로 이상하게 해석하고 결론짓는 영상을 보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정규재를 비롯한 국내의 수구세력들의 입장과 역사관을 반영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월남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호치민의 인간성과 그의 일대기롤 나름 긍정적으로 보며 미국은 어떻게 해서 명분 없고 전선 없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는지 혹은 미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 한 가족의 소중한 자식을 미라이 학살과 같은 학살 주범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미국은 왜 철수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서술한 책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아래 베트남 전에 한국군을 파병했다. 베트남 전에 간 한국군 덕분에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고자이 마을 학살사건, 퐁니 퐁넛 학살사건 그리고 빈호아 학살사건과 같은 일도 일어났다. 군사독재 시기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외치던 군사정권이었기에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으로 치부하게 되었고 현재의 박사모나 수구세력들이 틈만나면 월남 패망을 운운하는 행태를 봤을때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고 본다. 리영희 선생이 주장하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호지명을 비롯한 31명이 이끈 월맹은 민족해방세력이었고 반공정권인 월남은 친불민족반역자 정권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르치지 않던 베트남 전의 진실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은 이와 같은 진실을 아는데 있어서 아주 좋은 서적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무조건 읽어보기를 매우 추천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mGiKim 2018-06-08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좌빨, 홍어 같이 남을 인신공격하기 위해 쓰는 댓글들은 무조건 삭제됩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