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조건 -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
자라 바겐크네히트 지음, 장수한 옮김 / 제르미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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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에 알게 된 한 독일 정치인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자라 바겐크네히트(Sahra Wagenknecht). 바겐크네히트는 1969년 과거 동독 지역인 예나에서 이란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 군사훈련에 적응 못하여 동독 정부로부터 크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일부 불이익을 받았던 자라는 1989년 봄 막 다른 길목에 내몰린 사회주의를 재구성하고 기회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동독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녀가 공산당에 가입했을 시기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무너졌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했다. 그 당시 바겐크네히트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외 독일 통일을 반동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통일 이후 그녀는 예나 대학과 홈볼트 대학에서 철학과 독일 근대문학을 공부했으며, 19969월 네덜란드의 흐로닝언 대학 철학과에 등록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5년부터 국민경제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시작하여 20128월 그녀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독일의 로자룩셈부르크 재단의 연구 교수이자 켐니츠 대학의 미시경제학 교수인 프리츠 헬메닥에게 제출해 좋은 평가와 함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이와 더불어 독일 통일 이후에도 좌파로서 정치활동을 이어갔고, 2015년 이후부터는 좌파당의 원내대표로 활동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좌파당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가지고 갈등하다 2024년 바겐크네히트 동맹을 만들어 현재까지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에 구 동독 지역에서 적잖은 지지율(10~15%)을 얻는 것처럼 보였으나, 2025년 안타깝게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총선결과 4.97%를 득표하고 0.03% 차이로 봉쇄조항에 미달하여 모든 의석을 잃고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2016년에 쓴 책이 있다. 책의 제목은 ‘Reichtum ohne Gier: Wie wir uns vor dem Kapitalismus retten’이다. 바로 풍요의 조건이다. 이 책은 2018년 제르미날 출판사에서 번역했고,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작년에야 알게 됐다. 사실 이 책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서다. 현재 우리가 생활과 일상에서 숨쉬듯이 체감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석했다. 해당 비판이 흥미로운 것은 현재 21세기 자본주의 경제를 앞으로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경제 봉건주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분석에서 바겐크네히트는 일정 부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통해 현재의 시장체제가 소수의 독점 자본가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성과나 책임 그리고 경쟁에 토대를 둔다고 하지만, 21세기 상황은 그것이 실행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바겐크네히트는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면서 이런 얘기도 한다. “소수가 멋진 요트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반면, 다수는 겨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증대하는 압박을 견디면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로 정성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보편 선거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해야 상위 10%, 때로는 겨우 최상위 부자 1%만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정치가 거듭해서 다시 실현되는 것을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5.) 그녀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했다. , 현재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들이 극소수의 자본가들을 위해 체제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이러한 부분에 전혀 문제의식을 못느끼거나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걸 바겐크네히트는 경제학적으로 알기 쉽게 풀어낸다. 계속해서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자.

 

“21세기가 시작된 지금도 최고 부자 1%가 중요한 경제적 자원을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마음대로 사용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토지와 부동산 외에 산업시설, 기술 노하우, 디지털 혹은 다른 연결망, 서버, 소프트웨어, 특허 그리고 여타 다른 많은 것들 또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자원들에 대한 소유권은 변함없이 세습 및 혈연원칙에 따라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으며 그 수익은 오늘날에도 많은 경우 거의 세금도 물지 않은 채 소유자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그것이 노동소득으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생활양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인구의 99% 중 압도적 다수는 이들 새로운 금융 귀족들을 위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9~30.)

 

21세기 들어 자본주의는 높은 생산력과 부를 창출해냈고, 물질의 향상과 기술력의 향상을 불러왔다. 그러나 앞서 바겐크네히트가 지적하듯이, 과거 귀족들이나 부르주아들이 부를 세습하는 사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계급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희생하며 하루 밥벌어 먹고살고 있다. 물론 이것이 19세기의 물질적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다르지만, 여전히 불평등한 생산관계 속에서 모순이 재생산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그녀의 분석은 책을 읽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바로 1인당 GDP에 관한 얘기였다. 세계은행의 계산에 따르면, 아프리카 주민의 1인당 GDP가 식민지 체제의 해체 당시에 견주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아프리카 가나의 건국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가 레닌의 제국주의론적인 분석에 근거하여 신식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적잖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전후 냉전기 독립을 했음에도 여전히 저발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가난에 직면한 이유를 자본주의 지배체제에서 은크루마는 찾았다. 그녀에 따르면, 아프리카 뿐만아니라 서부 발칸 국가들의 경우에도 사회주의 해체 이전인 1989년에 비해 현재(2016년 기준) 산업생산 수준이 10%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 지난 25년간 자본주의는 성장을 이루지 못했고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73.) 물론, 반대 사례로서 중국이나 한국 등은 분명히 번영을 이룬 것도 빠지지 않고 설명하지만, 여기서 바겐크네히트는 이들 나라를 부자로 만든 것이 과연 자본주의인가?라고 의문을 던진다.

 

그 외에도 바겐크네히트는 교육기관의 문제, 식품 생산의 문제, 환경 문제, 최저생계의 문제, 자본의 카르텔, 독점 기업 등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을 분석했다. 심지어 21세기에 들어온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알고리즘, 유튜브, 구글, 그 외의 sns 등도 분석했다. 사실 우리가 무심코 구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면, 그에 맞는 데이터들이 뜨는데, 구글의 검색 엔진을 사용할수록 더 많은 데이터들이 축적되며 구글은 이 데이터들을 처리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 광고 지출의 10%에 이르는 금액이 검색 엔진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는 구글이라는 한 회사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바겐크네히트는 국내총생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국내총생산이 번영의 기준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할 것까지는 없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연 3만 달러인 나라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1인당 국내총생산이 3,000달러에 머물러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잘산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빈곤퇴치가 국내총생산의 성장과 결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보건대, 부자 나라에서 국내총생산과 가난은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 더 많은 물품과 서비스가 생산되고 이어서 팔린다면 우리 경제는 성장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으려면, 실업이 줄든 인구가 성장하여 하여튼 더 많은 사람이 일하게 되거나 같은 수의 사람이 더 오래 일하거나 혹은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하면 된다. 바로 이 사실에서 이미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업이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정규직 노동자가 더 긴 시간 노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같은 물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반드시 개선하지도 않는다. 물품에 대한 수요는 결국 언젠가는 충족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기업가는 물론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이 '그들의' 성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풍요는 그것을 통해 반드시 높아지지는 않는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08~209.)

 

, 국내총생산이 증가해도 이것이 반드시 소위 자본주의적 풍요를 절대다수에서 보장하거나 향상시킨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은 분명 경제적으로 성장했다. 국내총생산과 국민소득도 향상됐다. 그러나 그 성장 이면에는 현재 청계천에서 살던 판자촌 주민들이 있었고, 비교적 성장을 하게 된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이들은 개미굴이라 불리는 곳에서 사실상 노숙 생활을 했다. , 빠른 성장이 국민들의 균형적 복지와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그 당시와 2000년대를 비교하면, 사람들의 보편적인 물질적 수준은 매우 향상됐다. 그리고 성장을 하더라도 한국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말 그대로 굶지는 않더라도 하루 밥벌어 먹고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에 반해 상위 1%는 그때도 풍족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순을 생각해보자면,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분석은 많이 공감이 된다.

 

그녀의 책 풍요의 조건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대중적인 언어로 담고 있는 책이다. 상당히 읽어볼만하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을 정도다. 또한, 경제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몰입해서 읽었을 정도니 바겐크네히트가 대중적으로 책을 집필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바겐크네히트의 책이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새롭고 흥미진진한 분석을 그녀가 내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해결 방법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변혁과는 거리가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진보당만 하더라도 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녀의 주장에는 이와 같은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진보좌파라면 지금 당장의 자본주의 해체를 주장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기간 산업의 국유화 정도는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얘기가 없다. 이게 좀 많이 아쉬웠다. 자본주의적 봉건체제의 극복이나 대외문제 의식 그리고 경제문제 의식은 좋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주장이 너무 없는 것은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인에게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상당히 친 동독 정부 성향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독일이 친동독적 주장을 상당히 막고 있기에 바겐크네히트 또한 정치인으로서 문제될 것을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러우전쟁 관련해서도 언급하겠다. 바겐크네히트는 서문에서 러시아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과두 자본주의로 전환한 후 세계 무대에서 잠시 사라졌으나 이제 다시 영향력을 높이려는 투쟁에 나섰다.”고 언급한다. 그녀는 그 당시 진행되고 있던 2013년 유로마이단과 2014년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돈바스 내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돋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측면이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정권에 대한 무기 지원을 항상 반대해왔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전 이후 독일은 그녀의 주장과는 달리 망상과 루소포비아에 빠져 전쟁을 선동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그래서 내가 바겐크네히트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있다.

 

아무튼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을 완독했다. 현대 21세기 자본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 한번 쯤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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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 보림 창작 그림책
서진선 글.그림 / 보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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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을 읽으며

올해 1월 한베평화재단에서 가는 평화기행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기행에서 나는 같은 운동조직에서 활동하는 동지와도 함께 갔다. 5박 6일간 갔고,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기행에서 상당히 친해진 선생님이 계셨다. 이 책의 주인공 서진선 선생이다. 사실 기행 첫째날부터 버스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 분도 뒷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고 너무나 다정해서 더 가까워졌던 것 같다. 여행 막바지에 한베평화재단 활동가인 짜노와 서진선 선생과의 대화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서 선생은 1980년 5.18 당시 고3으로 광주에 있었고, 비극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분이었던 거다. 그리고 작가로서 아이용 그림책을 썼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다. 얘기를 듣고나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도서관에 들렸다가 이 책을 어린이도서관에서 펼쳤다. 책은 아이의 시각으로 5.18을 설명한다. 책에는 5.18 당시 저자가 겪은 경험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아이가 기다리는 누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 비록 아이에게 계엄군의 물리적 폭력이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광주시민의 아픔이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5.18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은 하나하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저 계엄군에 맞서 저항했다. 중고등학생도 계엄군에 맞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저항했다. 시민군을 위해 거리의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헌혈을 했다. 이는 영화 ‘택시운전사‘에도 잘 묘사됐다. 심지어 성노동자도 시민들과 시민군을 살리기 위해 헌혈을 하며 참여했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에서 2개월간 일어났던 일이 1980년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리영희 선생이 표현한 것과 같이 말이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은 M-16 소총을 조준한 다음 군인을 환영하러 나온 초등학생에게 까지 발포했다. 군인이 자국 민간인을 평시에 이렇게 학살했다.

나는 광주를 절대 잊을 수 없다. 5월이 되면 항상 광주에 내려가려 한다. 광주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을때, 유혈없이 계엄이 해체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광주의 추억 덕분이다.

광주라는 역사적 경험이 우리를 살렸다. 우리모두 광주에게 빚이 있다. 그래서 5.18 역사왜곡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지난 2024년 5월 광주에 내려갔다가, 광주에서 5.18을 북한군의 개입이라 선동하는 극우를 봤다.

나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이 그 사람 입밖으로 나왔다.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5.18 광주는 44년 후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듣고 겪은 이야기를 그림 형태로 풀어낸 그림책이다. 그림과 사진이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임팩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도 이 책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잘 읽혀 5.18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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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은 미국과 일본이 교전을 벌인 전투 장소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자,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부터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주의 노선을 유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와 미국령 알래스카주의 알류샨 열도까지 점령했다. 1941년 12월 당시 일본은 영국령 길버트 군도의 타라와 환초와 타라와 근처에 있는 마킨 환초를 점령했다. 오늘은 타라와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이곳이 한국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타라와의 위치: 말 그대로 아시아쪽 태평양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섬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영토를 보면 매우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서쪽으로는 영국령 인도를 위협했고,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위협했으며, 북서쪽으로는 미국령 알래스카를 위협했다. 또한, 일본 해군은 1941년부터 1942년 초까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대표적으로 1942년 2월 27일 인도네시아 자바해에서 일본은 영국·미국·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를 상대로 경순양함 2대와 구축함 3대를 격침시키고, 중순양함 1대(당시 투입한 연합군 전력은 중순양함 2대 경순양함 3대 구축함 9대다.)에 심각한 손실을 야기했다. 또한, 연합군 병사 2,300명이 전사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36명이 전사하고 구축함 한 대가 심각하게 손실 당했다.

(타라와 해변의 모습)


(상공에서 촬영한 타라와의 모습)


그러나 이처럼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전황이 바뀐 것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미 해군에게 대패하면서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11척의 전함과 8척의 항공모함(이 중 4척이 주력 항공모함) 22척의 순양함, 65척의 구축함, 21척의 잠수함을 동원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고, 중순양함 1대를 잃었으며, 35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렇게 되면서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점차 패배하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2달 뒤 치르게 된 과다카날 전역은 일본이 미국과의 지상전에서도 패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과다카날 전역에서 미군은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은 2만 명 가까이 전사했으며, 결국 일본군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철수했다.


미군이 과다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1943년 2월 쯤이었다. 사실 이 시점은 전세가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유리해지는 시점이었다. 1943년 당시 전황을 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소련에게 패배했고, 더 나아가 소련은 8월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규모 전차전을 치른 뒤 승리했다. 또한,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투가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그해 7월에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과 본토에 상륙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동맹인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축출당하고 연합군이 접수한 이탈리아 남부에는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정부가 세워졌다.

(타라와 전투 관련 그 당시 미국의 보도)


따라서 1943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전황이 뒤바뀐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이 마킨 환초와 타라와를 점령한 것은 1941년 12월이었다. 비록 1942년 8월 중순에 미군이 마킨 환초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급습한 적은 있지만, 이 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1943년 전황이 급변하면서 미 해군 지도부는 일본 본토 및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이나 인도차이나 혹은 대만이나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즉, 그 과정에서라도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 바로 길버트 제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3년 11월 20일 미군은 타라와 섬과 마킨 섬 두곳을 그날 동시에 상륙 및 공격했다. 그 당시 미군은 2척의 항공모함, 1척의 경항공모함, 5척의 호위항공모함, 3척의 전함, 8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 17척의 수송선에 미 해병 2사단을 동원했다. 이런 화력을 동원했음에도 미군은 첫날 상륙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당시 타라와에는 일본군 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군이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 공격에 고전했다. 이날 상륙한 미군 중 5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 사진: 미군은 사흘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타라와를 점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과 수륙양용 장갑차)


(타라와 해변에 널부러진 미군 시신들)


미군 군함의 함포가 일본군 진지를 공격했지만, 일본군 거점을 부수지 못했기에, 결국 거점을 점령하는 것은 미 해병대 병사들이었다. 상륙한 다음날의 전투는 탱크와 수륙양용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가 일본군의 거점을 점령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영국의 군사사학자인 존 키건은 책에서 “타라와는 일본군이 지키는 가장 작은 섬을 차지하려는 싸움조차도 얼마나 무시무시할 수 있는지를 미 해병대에 가르쳐준 전투였다.”고 서술했다.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토치카와 벙커 그리고 참호의 방어를 돌파하여 점령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숫자로 보면 미군이 일본군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군은 5,000명인데 반해, 총 상륙한 미군은 18,000명이었기 때문이다. 타라와 전투의 치열함은 종군기자 로버트 셰로드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해병대원 한 명이 방조제를 뛰어넘어 코코넛 통나무로 만들어진 특화점 안에 TNT(폭약) 몇 덩이를 던져 넣기 시작했다. 해병대원 두 명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방조제를 기어올랐다. TNT 또 한 발이 특화점 안에서 터져 연기와 먼지가 뭉게뭉게 솟았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사람이 옆 출입구에서 뛰어나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화염방사기에서 뿜어 나온 강렬한 불길이 그를 휘감았다. 화염이 그에게 닿자마자, 그 일본놈이 필름 조각마냥 확 불타올랐다. 그는 즉사했지만, 까만 숯이 되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다음에도 그가 찬 탄대 안에 든 총탄이 꼬박 60초 동안 폭발했다.”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1)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2)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3)


타라와 전투 상륙 이틀째 되던 날 미 해병대원은 1,000명이 죽고 2,000명이 부상당했다. 이 무렵 일본군 일부가 바리키리 섬에서 타라와의 베티오 섬으로 지원차 접근하고 있었지만, 미리 정보를 입수한 미 해병대가 항공 지원과 전차, 곡사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들이 상륙하려는 순간 공격하여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타라와 전투가 후반부로 접어들 무렵 일본군은 미군에 맞서 이른바 반자이 돌격(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총검을 찬 소총을 들고 자살돌격을 하는 행위)을 감행했다. 당연히 총기 화력에서 일본군보다 압도적인 미군은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을 무력화했다. 결국 타라와 전투는 11월 23일에 종결됐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총 1,700명이 전사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추가적으로 호위 항공모함 1척이 침몰했다. 그에 반해 타라와에 주둔했던 5,000명 가까이 되던 일본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타라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일본군 생존율이 가장 낮은 전투였다. 1970년에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 통사를 집필한 존 톨랜드의 저서에 따르면, “5,000명의 일본 방어병력은 거의 다 전사했고,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은 17명 밖에 안됐다.”고 한다. 이걸 일본군 생존자 비율로 계산하면, 0.34%다. 말 그대로 병력 전부가 전멸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노동 병력 및 비전투원 병력의 생존률을 합쳐도 0.6%를 넘지 않는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처참한 비율이냐면, 이후 치르게 될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생존률은 1.2%였고, 타라와 이전에 치른 과다카날 전투가 2.8%였으며, 태평양 전쟁의 미군-일본군의 마지막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가 12%를 기록했다. 말 그대로 타라와 전투는 일본군 전원이 옥쇄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 참혹한 전투였다.

(비디오 머그에서 보도한 타라와 전투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영상)


(2019년 타라와 관련 한겨레 기사)


타라와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지만,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잊지 말아야할 역사가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일본군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조선인들도 전쟁 속에서 죽었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포로 145명을 붙잡았다. 즉, 앞서 언급한 17명의 일본군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 128명이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었다. 존 톨랜드에 따르면, 이것보다 1명이 더 많은 129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최소 1,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기록에 따라선 타라와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가 1,400명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1,200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전투 과정에서 사망한 것이다.

(2023년 12월 국내에 열린 타라와 전투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제)


2019년 10월부터 타라와 지역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의 유골을 찾아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19년 한국의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공식 확인한 한국인 희생자는 586명이라고 한다. 2018년 12월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타라와 전투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가족 391명에게 유전자 정보 채취를 요청했고 이 가운데 184명이 동의해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2019년 3월 법의학·법유전자·법화학 전문가를 유해가 보관된 타라와와 하와이에 보내 아시아계 희생자 유해 시료(뼛조각) 150여개를 가져왔으며, 유해를 국내로 가져올 계획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연기되었다가, 2023년 12월에 이르러 그 당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을 봉환했다. 한국과 타라와의 거리는 6,100km로 알려졌다. 이 거리만 보더라도 얼마나 멀리서 그들이 끌려왔는지 짐작이 된다.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 CD 케이스 정면과 후면)


이 글을 쓴 필자는 타라와 전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10대 때였다. 그 당시 필자는 FPS 게임(총쏘는 게임)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아는 사람에게 CD게임 하나를 선물받았다. 그 게임의 이름은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Medal of Honor Pacific Assualt)였다. 그 게임의 시작과 끝이 바로 1943년 타라와 전투였다. 타라와 전투가 수미상관적 구조를 이룬 게임이었기에 게임을 하면서 이 전투에 대해 알게 됐다. 반일 불매운동의 여파가 한참이던 때, 존 톨랜드가 쓴 책인 ‘일본 제국 패망사’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책을 코로나 초기에 3달에 걸쳐 완독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타라와 전투 당시 포로로 붙잡힌 사람들 중에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게 됐다. 컴퓨터 게임으로 알게 된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연관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일본 강제 징용으로 죽은 조선인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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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카트야 호이어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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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90년은 세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과 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마침내 통일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로부터 1년 뒤 미국과 더불어 냉전의 한 축을 차지했던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동일 통일과 소련 해체를 전후로 수많은 동구권 국가의 체제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됐다. 1980년대 전두환의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한국의 학생들은 이와 같은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1990년 독일의 통일은 한국 사람들에게 따라야만 할 통일의 기준이 되었고, 그러한 인식은 2024년 현재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다.

 

1990년의 독일통일은 서독의 흡수통일이었다. , 자본주의 국가인 서독이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을 완벽히 흡수한 통일이라는 얘기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독일통일을 보며 한국이 북한을 그렇게 흡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독일 통일 이후 동독에서 생긴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들을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통일 이후의 문제점이라고 해봐야 한국이 북한 사람들 먹여 살려야 한다라는 식의 지극히 재벌·자본가의 인식이 우리나라 사람들 인식일 것이다. , 한국 사람들 인식에는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되고 난 이후에 이들이 겪어야 했던 실업·극대화된 빈부격차·임금격차·남녀차별·토지권 박탈 등의 문제가 있었는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동독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다. 필자는 어린 시절 이원복 교수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시리즈를 즐겨 읽었었다. 특히나 필자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묘사한 동독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원복 교수가 만화에서 묘사한 동독은 자유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고, 생필품은 항상 부족하며, 인민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항상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만화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서독의 입장만을 생각하게 됐고, “역시 공산주의는 이래서 안된다!”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글쓴이가 동독에 대해 다시 재평가하게 된 것은 대학생 시절 독일 통일 이후 역으로 여성인권이 하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5~6년 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비교적 흥미를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후 대학원 수업에서 자유주제로 동독 시절 여성인권에 대해 발제를 한 적이 있다.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느꼈지만, 동독의 여성인권은 세계 최고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때마침 올해 2월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 번역됐다. 그 책이 바로 카트야 호이어가 집필한 장벽 너머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이다.

 

2. 사라진 나라 동독은 어떤 나라였는가?

 

사라진 나라 동독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국가다. 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결국 전쟁에서 패망했다. 전쟁에서 패망하자 독일은 동과 서로 분단됐다. 독일의 서부지역은 미국·영국·프랑스가 점령했고, 동부지역은 소련이 점령했다. 흥미롭게도 수도 베를린의 경우 소련이 접수했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소련은 서구 진영에게 베를린도 분할 접수하도록 양보했다. 그렇게 해서 독일은 베를린도 소련 지역과 미국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소위 우리가 아는 서독과 동독은 1949년에 탄생했다. 서독이 먼저 탄생했고, 그로부터 몇 개월 뒤에 동독이 탄생했다. 서독의 공식 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이었고, 동독의 공식 명칭은 독일민주공화국이었다.

 

동독의 경우 국가가 탄생하기 전 소련군정 하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진보적인 개혁 및 사회변혁을 거친 다음 탄생했다. 저자에 따르면, 1950년대 동독은 신생 공화국으로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기틀을 잡는 데 거의 전적으로 매달렸고, 1960년대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다음 야심찬 건설 사업과 더불어 우주경쟁, 그 밖의 과학적 성과를 달성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들어 동독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 중 생활수준이 가장 윤택한 국가가 되었고, 유엔 회원국이 되어 세계의 여러 국가들에게 인정 받았다. 1980년대에는 여전히 생활수준이 발전하고 많이 윤택했지만, 동독 사람들은 서독을 부러워했고 결국 스스로 변화를 꾀했으며 이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동독은 결국 서독에 의해 흡수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책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매우 잘사는 국가였다. 1990년 기준 소련의 1인당 GDP9,200달러였는데, 동독은 이것보다 400달러 높은 9,679달러였다. 참고로 그 당시 미국이 21,082달러고, 서독이 15,300달러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독의 생활수준은 결코 못살지 않았다. 그 당시 경제성장으로 비교적 중진국 정도로 잘살게 된 한국의 1인당 GDP5,000달러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거기다 1970년대 동독의 호네커 정부는 주택·복지·오락에 막대히 투자했고,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었으며 1980년대 동독인들의 평균 월급은 1,021마르크였다. , 평균 월급도 꾸준히 상승했고, 1987년 기준 절반 이상의 동독 가구가 자가용을 소유했으며, 모든 가구가 세탁기·냉장고·텔레비전을 적어도 한 대는 보유했다. 또한, 1970년대 초중반 기준 서독의 4인 가구가 순수입에서 최소 21%를 집세로 지출했지만, 동독의 4인 가구의 집세 지출은 4.4%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파트를 포함한 집들의 수준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질적으로 향상됐다.

 

이는 당시 전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의 빈민층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생활이다. 거기다 1962년부터 동독 정부는 프리츠 헤케르트호와 같은 유람선을 만들어 동독 시민들에게 서독이 이룬 경제 수준에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생활 수준을 구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참고로 동독의 퓔커프로인샤프트호는 1980년대까지 동독에서 운영하였고, 20217월 미국 여행사가 매각하여 현재까지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배의 성능이 질적으로 나쁘지 않으니, 현재까지도 운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보자면, 동독은 분명 책의 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인민들에게 제법 윤택한 생활을 제공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단순히 자본주의적 성장이 아닌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토대를 바탕으로 둔 성장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 사회주의 국가들도 자신들 나름 기술과 과학 그리고 일생에서의 생활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물론 동독이라 해서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 또한, 슈타지와 같은 경찰 공권력 강화나 베를린 장벽의 탄생 등을 지적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자동차들의 경우 받기까지 대기시간이 최소 7년은 걸렸다. 물론 트라반트나 몇몇 기종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이 되면서 바로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최신 자동차들의 경우 여전히 대기시간이 오래걸렸다. 그리고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동독의 질적 발전은 분명 사회주의적 성과임에도 지나치게 물질을 강조한 측면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윤택함을 부러워했고, 이것은 결국 동독 정권의 해체를 불러왔다. , 물질주의 그 이상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사상 및 계급 교양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 같다. 동독의 해체는 다른 의미에서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동독의 한계점도 분명히 명확하다.

 

또한,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았다. 최소 3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갔다. 이는 동독이 서독보다 높은 출산율을 보였음에도 동독이 저인구 상태를 유지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필자가 생각하는 동독의 한계를 짧게 언급한 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동독의 한계점과 책 저자가 생각하는 동독의 한계 및 문제점은 상당히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책을 보며 가졌던 비판점들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자 한다.

 

3. 책에 대한 명확한 비판 지점 및 문제점들

 

카트야 호이어의 책은 분명 한국 사회에서 깊게 다루지 않는 동독 사회를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히 높은 점수를 받을만한 책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책의 한계나 비판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저자의 친서구적인 내러티브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저자는 책 초반부에서 소련의 독일 점령을 얘기하며, 붉은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전시 강간에 대해 지적한다. 물론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서구 학계의 전형적인 클리셰이긴 하다. 그리고 이를 언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과장된 숫자를 인용하는 것은 지적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소련군의 전시강간 피해자가 200만 명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당히 과장된 수치다. 다른 여러 자료를 같이 인용해야할 사례인데, 서구 반공주의자들이 하는 자료를 너무 액면 그대로 인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친서구적인 관점은 동독과 서독의 건국 과정 및 1950년대 상황에 대한 얘기에서도 상당히 많이 드러난다. 저자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중반까지의 동독의 전후재건과 경제성장 및 사회발전에 대해 부정적인 요소들만 강조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와 같은 동독 상황을 비교하며, 서독의 발전이 경제 및 정치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러나 서독의 경제성장이 동독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전후재건기 동독의 경제적 한계만 지적하는 것이 과연 페어(공평)한지는 상당히 의구심이 든다.

 

대표적으로 저자는 동독에서 이루어진 토지개혁에 대해 매우 강도 높은 비판을 하는데, 여기서 내세우는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동독의 토지개혁은 돈 있는 사람들 기존에 토지를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독일의 대토지 소유층인 융커들이 서독으로 이주하여 이는 경제발전에 타격을 줬다.” 대략 이런 식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동독의 토지개혁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1946년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을 생각해보자. 북한의 토지개혁은 5정보 이상의 토지소유자들을 무상몰수하여 무상분배했다. 이는 빈농 계급을 중심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데 성공적이었으며, 심지어 25일 만에 종결됐다. 조선시대부터 수백년간 지속된 봉건주의적 불평등이 사라졌고, 심지어 몰수당한 지주들도 토지를 일부 분배받아 경작하게 됐다.

 

따라서,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의심한 부분이 바로 동독의 토지개혁과 성과에 관한 부분이었다. 저자는 동독 토지개혁에 대한 성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얻은 동독에 대한 토지개혁 관련 정보는 대지주의 관점으로만 보게 되는 편향성이라는 문제가 분명히 있다. 필자는 이에 관한 부분이 궁금하여 몇몇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찾아보니 동독의 토지개혁이 유혈없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학계의 평가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또한, 소련의 강압적 측면이 발현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 사실도 같이 알게 됐다. 오히려 문제는 1990년 통일 이후 발생했다. 과거 동독으로 도망친 서독의 구 융커 출신들과 그 후손들은 통일 이후 자신들의 땅을 동독인들로부터 빼앗았다. 이에 따라 역으로 독일의 지역갈등이 심화됐다. 따라서 동독에서의 토지개혁에 따른 무토지 계층의 성장과 확장을 안다룬 점은 크나큰 한계다.

 

아무래도 저자가 영국왕립역사학회 정회원이다 보니, 서독 아데나워 체제에 대한 칭송이나 토지개혁에서의 맥락 무시 등의 문제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 체제에 대해 내리는 평가도 너무 친서구적 내러티브를 따른 것 같았다. 저자는 울브리히트가 스탈린 체제의 소련에서 살아남으면서, 스탈린식 숙청과 권력독점욕을 배웠다고 얘기한다. 스탈린의 편집증 또한 마찬가지다. 스탈린 대숙청에 대한 저자의 주관은 대숙청 전통주의에 상당히 가깝다. 이와 같은 내러티브는 소련사를 연구하는 수정주의 학자들이 상당부분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거기다 발터 울브리히트를 스탈린 체제의 전적인 수호자로만 보려는 저자의 시각에도 상당히 의문이 든다. 저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울브리히트는 친스탈린 노선을 수정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1970년 이후에 후계자 에리히 호네커에게 직책을 넘겨줬다. 또한, 그가 1950년대 이후 저자가 생각하는 그런 권력 독점욕을 불렀다는 증거가 없다. 저자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오히려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들이 책에서 제법 부각됐다. 따라서 발터 울브리히트를 서구가 생각하는 스탈린 내러티브에 맞춰 보는 것이 앞뒤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부분은 북베트남 관련 서술이다. 저자가 관련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거슬리는 내용들이 있었다. 저자는 북베트남 체제가 전시 동원을 위해 고혈을 짰다거나 착취했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미국이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남부베트남에 친미정권을 세웠다고 묘사한다. 너무나 친서구적인 관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첫째, 북베트남 정부 또한 집산화와 국유화를 끝냈기에, 생산물을 부당하게 취하는 계층이 없었다. 둘째, 북베트남 정부는 대중동원은 강압이 아닌, 자생성과 민족성에 기인했다. 따라서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셋째, 미국이 남부베트남에 만든 정권은 프랑스에 부역하던 식민지 협력자들이 집권한 정권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맥락을 생략한 성의 없는 설명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책의 비판 지점들을 비교적 길게 썼다. 비판 지점을 길게 쓴 이유는 필자가 이 책을 폄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싶은 개인적인 생각도 있지만, 앞으로 국내에 번역될 동독 및 동유럽 현대사 관련 책들이 이런 친서구적인 내러티브에서 좀 벗어난 시각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할까?

 

4.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2장에서 설명한 부분과 연결이 되는 것 같다. , 저자가 설명하는 동독의 사회발전 부분은 상당히 읽어볼 만하다. , 동독 정부가 인민 생활 발전을 위해 노력한 부분들은 한국 사회가 상당히 모르는 부분이다. 실제로 울브리히트는 생활수준을 향상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냈다. 1960년에는 6%의 가구만이 세탁기를 소유했으나, 1970년에는 절반 이상이 손으로 빨래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여성들이 집안일을 돌보면서도 전업으로 일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1970년에 이르러서 56.4%의 동독 가구가 냉장고를 소유해 28%인 서독을 웃돌았다. , 책에 나오는 이러한 설명들은 상당히 읽어볼만한 자료다.

 

그 외에도 2장에서 언급한 자동차 보유 및 공급의 증가, 여성인권의 성장, 주거생활의 확장 등은 당연히 읽을만한 지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참고할 부분은 상당하다. 또한, 동독 군대 장교의 인적 구성에 대한 얘기나, 동독의 양심적 병역 거부의 허용 등의 내용도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동독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동독의 일반적인 노동자들과 같은 임금을 받고, 제도적 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저자의 지적과 주장도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다. , 사회주의의 단결이 인종차별을 어떻게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최소화했는지(물론 동독이 인종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인종문제에서 차별을 최소화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3장 비판지점에서 저자는 소련군의 전시강간을 얘기했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소련군의 전시강간 문제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전시강간이 심했고 처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저자가 강조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전쟁 시기 여성과 아이들에게 잘 대해주던 소련군에 대한 언급도 분명히 한다. 독일의 한 유부녀가 아이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소련군을 달래줬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러한 부분은 비교적 참고할 부분이라 생각이 들며, 앞으로 더 사례별로 연구가 되어야 할 부분이라 본다.

 

저자가 탈나치 청산에 있어서 동독이 서독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 본다. 동독 정부는 탈나치화를 위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는 것을 감수했다. 서독의 경우 나치 출신을 공직계·교육계·문화계, 심지어 경찰 조직에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독일민주공화국은 반파시즘을 기본 신조로 유지했다. 비록 군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홀로코스트 조사가 충분하지 않았던 점 등 굵직한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동독의 탈나치화는 훨씬 더 전면적이었으며, 학자와 경찰이 사라진 자리는 미숙하더라도 이념적으로 문제가 덜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런 점에서 동독의 탈나치화 과정은 분명 재평가가 필요하다.

 

1952년 스탈린 각서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중요하다. 저자는 그 당시 스탈린이 독일에 중립국으로서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음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지적은 과거 냉전 시기 스탈린과 소련이 팽창적이었다는 전통주의적 사관과는 분명 다르다. 또한, 1953년 동독에서 발생한 1953년 동독 봉기에 대해서도, 단순히 동독 사회주의 정부가 억압했다고만 보지 않고, 그 시위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점도 읽어볼만한 지점이다. 1953년 동독 봉기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친서구적인 관점이 없지는 않으나, 적어도 서구의 정치공작과 개입에 대해 인정하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한 지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길게 인용하고자 한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냉전 전문가로 미국의 동독과 서독에 대한 정책을 전공한 크리스티안 오스터만(Christian Ostermann)은 이런 명명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봉기는 과한 노동량과 적은 임금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것이지만, 서방이 부추긴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는 독일민주공화국 정권을 전복하는 데 힘을 실어 줄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승인하지는 않았으나, 616일과 17일 내내 서베를린 방송국 리아스를 통해 독일에서 운동을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될 병참 정보를 내보냈다. 서독 요원들은 미국 정보부의 지원을 받아 봉기 이후 독일민주공화국의 정치를 와해할 목적으로 추가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서류에 남은 증거와 최근 공개된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를 연구한 오스터만은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봉기에 화들짝 놀랐으나 금세 롤백정책의 기회를 포착했고 동독의 상황을 더욱 불안정하게 할 목적으로 심리전을 계획했다.” 동맹 미국을 등에 업은 서독은 617일의 사건을 빌미로 동독의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봉기 닷새째가 되던 날, 서베를린 상원은 샤를로텐부르거 쇼세의 이름을 ‘617일의 거리로 변경했다. 3.5km 길이의 이 대로는 서베를린을 가로질러 동독 구역이 시작되는 브란덴부르크문까지 이어진다. 2주도 지나지 않아 서독 정부는 617일을 국경일로 선포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서방의 개입이 미친 영향을 연구하고 있으나, 하나 확실한 것은 울브리히트와 그의 조력자들은 자신들의 공화국이 포위되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팎의 적들에 맞서 독일민주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안체계를 구축했다.”

 

카트야 호이어, 송예슬 옮김, 장벽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서해문집, 2024, 209~211.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서구의 개입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지점들은 분명히 읽어볼만하다. 이제 개인적으로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점과 결론을 간략하게 얘기하고자 한다.

 

5. 책에서 추가적으로 재밌게 읽은 내용과 결론

 

전반적으로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앞서 언급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깊게 다루지 않은 동독의 역사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다룬 서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본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몇몇 부분들은 주의해서 읽어야할 것이다. 책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은 또 다른 내용을 얘기하자면, 동독의 락문화와 1973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관한 내용 그리고 동독으로 이주한 미국의 가수인 딘 리드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딘 리드의 경우 말 그대로 이 책을 통해 난생 처음알게 됐다.

 

미국인 대중 가수 중에 1960년대 단순히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넘어 칠레의 아옌데를 지지하고,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신념을 드러는 인물의 사례가 명확히 있음을 확인해서 흥미로웠다. 책에서는 깊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1950년대 초 동독에서 벌어진 양키 딱정벌레 잡기 운동도 기회가 된다면 보다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싶다. 사실 올해 여름 필자는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갔다왔고,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사회주의 시절을 전시한 박물관에 들렸다. 거기서 필자는 폴란드 사회주의 정부가 만든 양키 딱정벌레 퇴치 운동 영상을 봤다. 이 부분에 상당 부분 흥미가 생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카트야 호이어와 같은 책이 동유럽 현대사 관련하여 비슷한 책들이 국내에 번역 및 출간되면 좋겠다. 아마 관련 연구들과 비교하는 것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선 흥미진진할 것이다. 카트야 호이어의 책의 원서는 2023년에 출간되었다. , 몇몇 문제에도 불구하고 동독에 관한 최신 연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읽을 가치는 분명히 높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면서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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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올해 7월 말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여행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12일 동안 머물면서, 소련군 묘역과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방물관,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구 시가 광장을 방문했다. 이와 더불어 폴란드 사회주의 시절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저항과 물건들을 전시한 폴란드 인민공화국 생활 박물관(Museum of Communism, Warsaw)도 들렸다. 박물관은 당연히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 비해 훨씬 나았다. 사실 현재 폴란드의 경우 과거부터 존재해온 반러시아 감정과 이후 현대사에서 나타난 반소련 감정이 매우 강한 나라다. 한국의 경우 소련 깃발을 거리에서 들고 다닌 다해서 처벌받지는 않지만(북한 깃발 들면 처벌받겠지만), 2024년 폴란드의 경우 충분히 처벌받을 수 있다.

(감자잎벌레, 원래는 북미지역에서 살던 곤충이지만, 19세기 유럽에도 전파됐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의 경우 소련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묘사가 상식 이상으로 매우 악의적이고 적나라해서 너무나도 의아했다. 반면 폴란드 인민공화국 생활 박물관의 경우 1980년대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반체제 활동을 하던 자유노조 운동(‘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라고 불림)을 약간 옹호하고 카틴 대학살을 소련의 학살로 규정하지만, 현재 폴란드라는 나라에서는 그게 최선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박물관은 폴란드 사회주의 시절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 등도 제법 균형있게 다뤘다. 따라서 상당히 볼만한 박물관이었다. 필자는 이번에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인민공화국 생활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본 사건이 있었다. 그게 바로 폴란드 내에서 벌어진 반미 캠페인이었다.

 

이 반미 캠페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에 의해 폐허가 된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전후재건에 나섰다. 소련이 접수한 동부 독일과 폴란드도 그러한 전후재건의 시대를 거쳤다. 당연히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며 토지 국유화가 진행됐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동독과 폴란드에서는 농업생산에 타격을 주는 해충들이 창궐한 것이다. 당시 창궐한 벌레의 종류는 감자잎벌레(potato beetle)였다. 감장잎벌레는 주로 북미대륙에 살던 종이고 1811년에 처음으로 서구인들에 의해 발견됐다. 유럽에는 1870년대에 퍼져 작물생산에 피해를 준 것으로 알려졌다.

(감자잎벌레를 잡은 동독의 소년단원들, 이 사진에 나온 동독 소년은 하루에 2,000마리를 잡아 그 당시 벌레잡기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카트야 호이어는 2023년에 출간한 장벽너머라는 책에서 동독은 1950년 이후부터 병충해로 농작물 수확량의 20%가 피해를 봤다고 썼다. 그러면서 호이어는 농산물 생산 목표가 무계획적인 토지분배와 토지국유화로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딱정벌레조차 동독인들의 식량을 죄다 먹어 치우려 들었다.”고도 서술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감자잎벌레가 동독 농업에 적잖은 피해를 줬다는 사실이다. 폴란드 또한 동독과 마찬가지로 감자잎벌레에 의한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폴란드 언론사인 폴스키 라디오(Polske Radio)의 기사를 보면, 주로 사회주의 국가의 캠페인을 비난하고 있지만, 1952년에서 1956년 사이에 이 해충이 폴란드의 농업 생산에 타격을 주었다고도 언급하고 있다.

(동독에서 해충박멸 캠페인을 전개할 당시 만들어진 반미 선전물, 당시 동독은 이를 미제국주의의 침략 및 간섭 행위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에서 해충박멸 캠페인을 전개할 당시 만들어진 포스터, 폴란드 또한 동독처럼 해충박멸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동독과 폴란드에서 감자잎벌레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무렵이었다. 양국 다 이 벌레가 미국이 의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발전과 전후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살포한 것으로 규정했고, 이와 관련한 반미선전활동을 1950년대에 강화했다. 동독 정부와 폴란드 정부는 미국 비행기들이 정해진 비행 구역을 침범하여 동독 지역에 감자잎벌레를 살포했다.”고 보도했다. 폴란드 또한 마찬가지로 미국 비행기들이 벌레들을 살포했다고 주장했다. 동독과 폴란드 둘 다 반미주의 선전전을 진행했다. 양국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현재 작물을 파괴 및 생산을 방해하고 있는 이 벌레를 바로 미국이 뿌렸고, 미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파괴하기 위해 이런 행위를 벌였다.”는 것이었다. 폴란드에서는 "Walka z stonką(딱정벌레에 맞서 싸우자!)"는 전 국민적 캠페인이 벌여졌고, 동독에서도 감자잎벌레를 양키 딱정벌레(Amerikanischer Käfer)’라고 부르며 폴란드와 비슷한 전 국민적 해충박멸 캠페인이 벌어졌다. 동독에서는 소년단들이 앞장서서 감자잎벌레를 수집했는데, 한 소년의 경우 하루만에 2,000마리를 잡아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었다.

(미국의 딱정벌레 살포를 규탄하는 사회주의 시절 폴란드의 신문, 폴란드 또한 미국의 침략과 정치공작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에 대한 서방의 입장은 동독과 폴란드의 반미 캠페인이이며 사실무근이라는 것이다. 2013년에 BBC에서 쓴 관련 기사를 보면, “실질적으로 딱정벌레를 무기로 사용한 증거는 없다는 주장과 더불어, 가이슬러라는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당시 동독 농업부에서 작성한 목격자 및 전문가와의 인터뷰를 포함한 보고서는 감자잎벌레 외의 다른 침입종에 대해서는 발표한 적도 없고 주로 과학자가 아닌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신뢰할 수 없으며 동독 정부가 자신들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프로파간다다.”라고 썼다. 쉽게 말해 미국이 딱정벌레를 동독과 폴란드에 퍼뜨렸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선전으로만 보긴 힘든 측면도 있다. 우선 동독에 사는 한 농부인 맥스 트로거(Max Troeger)1950년 당시 미국 항공기 두 대가 자신이 경작하는 밭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고 알렸었다. 앞서 언급한 BBC의 기사에서도 인정한 것이지만, 실제로 미국 항공기들은 냉전시기 서베를린으로 가거나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동독 상공을 많이 다녔었다. , 미국 항공기가 동독에 위장침입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다 19502월 당시 미국 하원의원인 맥클로이(McCloy)의 주도로 동독에 반대하는 정치활동과 선전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정치경제계획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동독의 생산적인 기반을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49년 색슨 섬유산업과 1952년 솔베이 기업프로젝트에서 그리고 1953년 크라이스 비츠스톡 지역 농업생산에서 생산파괴행위가 있었다.

(폴란드 서적에서 발견한 내용, 미군 항공기가 딱정벌레를 낙하산에 실어 보내는 묘사는 마치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연상시킨다.)


(동독에서 나온 또 다른 반미 선전물, 이 또한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연상시킨다.)

 

아직 밝혀질 것이 많지만,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감행한 것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현재까지도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북한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한 사람들의 증언은 미국의 공식입장과는 다른 주장들도 많다. 세균전을 단순히 북한의 선전으로만 볼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2010년 중동 언론 알자지라가 미국 NARA에서 발견한 문서다. 이 문서는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세균전 실험을 명령한 문서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1950년 당시 미국이 동독과 폴란드에 비슷한 행위를 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룬 미국의 동유럽 생물학전은 깊이 연구가 되지 않았다. 만약 사료만 바탕이 된다면 미국의 동독 및 폴란드에서의 생물학전과 한국전쟁에서의 세균전을 비교한 연구가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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