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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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한국 여자의 이야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네 멋대로 해라] 김현진의 도발적 문제작

 

아담한 크기의 작고 얇은 이 소설책에 실린 8편의 단편 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없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 들 중 하나의 제목으로 책의 제목을 대신하는 것보다 이 책처럼 책 제목을 따로 붙인 소설집이 늘 더 인상좋게 다가온다. 그 제목은 책속의 단편들을 아우르는 일관된 주제를 드러내고 있기 마련이고, 단편집이라 해도 장편 못지 않게 일관된 주제를 전하는 소설집이 더 성의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정아' 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인 셈이다.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은 데운 우유 위에 생긴 막처럼 얄팍하고도 녹기 쉬운 가벼운 것들이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다 잊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나누며 마셨던 음료들은 그녀들이 더 이상 그립지 않은 것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리웠다. (p. 10)

그날 그 카페에서 오천오백 원이나 하는 그 스트로베리프라페 값은 은미가 지불해버리는 바람에.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냥, 길에서 둘이 천 원짜리 소프트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아무 상관없었을 텐데. (p. 15)

뭘로 하실래요? 남자애는 구석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요, 조금 망설이다가 프라푸치노, 하고 강하게 말했다. (p. 27)

< 정아 > 中

한끼 식사값보다 비싼 음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름이 잘 외워지지도 않는 생소한 음료들이 카페의 메뉴판마다 즐비한 것을 보며 놀랄때가 종종 있다. 그 희한한 이름의 음료가 이름이 희한할수록 왠지 더 비싼 가격인것 같은 그 음료들이 삶의 질을 나타낼 수도 있구나 싶었다.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페에 즐비한 음료들 대신 자판기 커피로 대신해야 했던 정아는 희한한 이름의 음료를 마시고나면 늘 더 내려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 더 바닥으로 내려앉아야 했다. 대입에도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했으며 다단계까지 겪었던 정아에게 그 음료를 마신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들이 한때 정정은 씨가 자신의 약지에 끼워질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주 큰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러 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정정은 씨의 심장에는 막이 생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막은 한 켜 한 켜 딱딱해지기만 했다. (p. 49)

사람들은 충동적인 것이 청소년기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한때 청소년이었던 모든 어른들도 가끔 자제력을 잃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날은 정정은 씨의 마음속 청소년이 대폭발한 그런 날이었다. (p. 62)

< 정정은 씨의 경우 > 中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남친.. 뒷바라지를 하는 여친... 사법고시에 붙자마자 등돌린 남자.. 결혼시장에 던져진 상품으로서는 나이가 많아진 여자..

여자의 직업으로 최고라는 교사 라는 직업을 가진 정정은 씨지만, 드라마에서 닳도록 봤던 그 현실이 코앞에 닥쳤을때는, 드라마에서 남의일이라 봤던 결혼현실이 믿을 수 없게 자신을 깍아내리고 있었다.

말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일도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칭찬이든 위로든 실컷할 수 있는 거였다. (p. 80)

"인파이터. 무조건 들이대는 애들"

"인파이터 말고는 아웃파이터가 있어요. 음... 간단히 설명하면, 빙글빙글 돌면서 간 보는 애들" (p. 99)

꼭 맞아야 하는 주먹은 맞되, 그 이외에 쓸데없는 펀치는 전혀 맞니 않는 게 아웃파이터. 한번은 맞아야 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맞지 않고서는 권투란 스포츠는 성립하지 않으니까. (p. 101)

< 아웃파이터 > 中

첫 연애에서 호되게 당한 영진에게 첫 남자는 인파이터 였다. 맞고 나서야 알았다. 앞으로 만날 남자는 슬슬 간보는 아웃파이터일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에게 사랑은 이제 핑크빛 설레는 로망이 아니라 치고받는 권투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영진이 쓸데없는 펀치를 맞지 않는 아웃파이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 처음처럼?

"우리가 애를 낳아? 딸이면 어떡해? 나 닮은 딸이면 어쩌냐고. 어릴때부터 코끼리 소리 들으면서 사는 뚱땡이는 나로 족해. 나 그 꼴 볼 수 없어. 내가 한 일 중에 그나마 잘한 일이 바로 수술해버린 거야! 가난뱅이는 우리로 족하지 않아?" (p. 134)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아직도 가로등 밑에서 불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하얀 화장지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전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약간 망설였지만 다시 돌아보지는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세상에 울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 하나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걸까. 사각사각, 김은정의 마음속 빈자리에서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p. 136)

< 공동생활 > 中

김병권은 좋은 만자였다. 윤정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푸근한 살집을 가진 그녀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윤정화를 위해 방한칸짜리 옥탑방에서 방두개짜리 지하월세방을 얻었고 윤정화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욕심없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윤정화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렇게 김병권의 사랑마저 가벼이 여기고 말았다. 그녀는 다이어트에 실패했고 동네주민 김은정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그놈 찾아가자, 당장 멱살 잡자 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사회생활 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 다 같이 더럽게 사는 거야! 누가 덜 깨끗하고 더 깨끗하고, 이거 어차피 흙탕물에서 다 같이 뒹구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 (p. 151)

아이씨 미국에선 마트에서 총이랑 총알도 세트로 판다는데 성가시게시리... 면밀하고도 냉정히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나는 흠칫, 놀란다. 아니, 당신, 아가씨, 댁은 도대체 누구세요? 내 안에 지금 계신 분,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해요. 나는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던진다. 저 팬티는, 내 팬티가 아니다. 그럼, 누구 팬티야?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p. 169)

< 누구세요? > 中

내편이라고 생각했다. 경제관념이 철저한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미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애인이라는 남자는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가 희망퇴직을 강요받은 여자친구에게 제정신이냐며 화를 냈다. 그렇게 제정신이던 남친은 아무 증거도 남겨놓지 않고 완벽하게 그녀의 돈도 깨끗이 가져갔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도둑을 만난다. 남친만 도둑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훔친 것보다 그녀가 도둑맞은 것이 더 그녀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남들은 여학교 때 한 번은 다 보고 지나간다는 속칭 바바리맨이었다. 화정은 6년 내내 여중고를 다녔는데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p. 184)

바바리맨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화정은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자 바바리맨은 소스라치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간신히 바지를 꿰입은 바바리맨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뛰어가다가 바바리맨은 또 엎어졌다 간신히 일어났다 또 엎어졌다 하며 바바리맨은 사투를 벌였다. (p. 189)

< 부장님 죄송해요 > 中

불금의 어느 저녁이었다. 화정은 그 금요일따라 유독 하루가 꼬였다. 불금이라며 칼퇴근하던 부장님은 그런 화정에게 불금을 즐기라고 했다. 그러나 뭐가 되는게 없던 그날 밤 골목길에서 난생 처음 바바리맨을 만나기까지 했다. 그 바바리맨에게 분노가 올라와 몇마디 했을 뿐인데 바바리맨은 줄행랑치며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다른 어딘가의 부장님이었다.

잠깐 눈을 감은 수연은 이렇게만 지내게 해주세요, 하고 소원을 빌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거나 화려하게 살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딱 이 정도만. 지금 이 정도면 수연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p. 200)

<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요 > 中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 중 가장 행복한 여성이 수연이었다. 소박하지만 자신이 이룬 것에 감사하고 여전히 어렵겠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에게 감사해하며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고 생각한 생일밤이었다. 그밤 남녀공용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가지고 들어온 신문뭉치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숙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의 표시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침묵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앞에서 숙이가 나는 당신들이 뽑아 놓은 킹카 신랑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내가 원하는 건 아버지가 사오년 전 저잣거리에서 주워 온 거지새끼이자 우리 집 머슴인 바우와 초가삼간이라도 좋으니 오순도순 사는 거요, 하고 말해봤자 아이고 우리 딸아이는 사상이 아주 프리하구나, 하고 찬성할 부모가 아니라는 것은 숙이도 너무 잘 알았다. (p. 229)

그러나 그녀는 결코 바우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간혹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과 그 딸의 딸과 그 딸의 딸과 딸들도, 바우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은 원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 대다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적절한 '합의'에 불과하지만, 딸과 딸과 딸과 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합의에만 도달해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 그랬다. (p. 237)

< 이숙이의 연애 > 中

조선말 다 가진 양가집 규수 숙이가 마음에 둔 남자는 머슴 바우 였다. 바우도 숙이를 사랑했다. 둘은 다시 만나기 위해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작가는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8편의 단편들은 짠했다가 웃겼다가 심지어 시대도 달리하면서 능수능란하게 여성이 처한 현실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다양한 여성들을 등장시키면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알려준 이유를 '에필로그' 에서 설명한다.

태아들이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성인 태아들에게 미래의 삶을 이야기해주고 그런 현실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면, 그 태아들은 과연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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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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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사람들' 이라는 부제가 붙은 <THE OTHER PEOPLE> 가제본을 받아 읽을 기회를 얻었다.

작가는 C.J.튜더

그녀의 첫 작품 '초크맨'을 읽었던지라 세번째 작품이라는 이 소설에 호기심이 일었다.(두번째 작품은 '애니가 돌아왔다' 도 곧 읽어볼까 싶긴 하다) 첫 소설 '초크맨'은 나오자마자 영화판권이 팔렸을 만큼 대중성을 인정받은 작품이었다. 나또한 재미있게 읽었었다. 첫작품 같지 않게 서사의 촘촘함에 신경쓴 티가 났다고나 할까 ㅎㅎ

'디 아더 피플' 은 '초크맨'보다 더 밀도높게 진행되면서 마지막에 초자연적 현상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 이 떠오르기도 했다.

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보다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더 많을 수도 있기 마련이니까.

처절한 고통을 가까운 사람보다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오히려 속깊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심리 자체가 사실 설명하기 쉬운 심리는 아닐수도... 이 작품은 그러한 복잡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순히 복수 라고 말하기엔 뭔가 모자란 표현 같은 그런...

실종은 죽음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더 나쁘다. 죽음에는 끝이 있다. 죽음에는 슬퍼하는 시간이 허락된다. 추모하고 촛불을 켜고 꽃을 놓는 시간이. 떠나보내는 시간이.

실종은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있는 림보다. 당신은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이 잡힌다. 지평선 위에서 희망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절망이 콘도르처럼 맴을 도는 낯설고 암울한 세상 안에서. (p. 25)

게이브는 퇴근 중이었다. 아내와 딸과 저녁을 함께 먹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런 평범한 저녁을 꿈꾸며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꽉 막힌 도로에서 앞차 뒷좌석에 있는 딸아이의 얼굴이 보았다. 그차를 맹렬이 쫓아봤지만 놓쳤다. 집에 갔을 땐 아내와 딸이 모두 살해되었다며 경찰이 막아섰다. 그는 시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이었다. 살해되었다는 딸이, 분명히 앞차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아빠 라고 말하는 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는 이후 미친듯이 고속도로를 헤매며 딸을 찾는 생활을 전전하게 된다.

화장실, 탈의실, 거울이 있는 모든 곳. 프랜은 예전에는 앨리스의 거울 공포증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공포는 없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논리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는 전처럼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거울이 앨리스의 기면증을 유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p. 41)

계속 도망쳐 다니며 계속 겁에 질렸다. 어떤 아이도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된되는 거였다. 하지만 어떤 아이도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면 안 되는 거였다. (p. 70)

프랜은 어린 소녀인 앨리스를 데리고 도망다니는 중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앨리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앨리스를 지키기 위해 계속 도망쳤다. 하지만 곧 발각되곤 했다. 게다가 앨리스에게는 그녀가 모르는 공포가 심어져 있었다.

그녀는 잠을 잔다. 하얀 방에 누워 있는 창백한 소녀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미리엄은 가장 오래된 직원으로 이 집에 처음부터 있었다. 처음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 현상은 2~3년 전에 시작됐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1층에서 차를 끓이는데 음 하나가 들렸다. 피아노 건반 소리였다. 딱 한번. 아이가 눈을 뜬 것일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는가. (p. 45, 46)

미리엄은 오랫동안 한 여자를 돌보고 있다. 어릴때부터 보아와서 식물인간이 된 소녀때 모습 그대로로만 보이는 여자를 미리엄은 살뜰히 간호하고 있었다.

게이브는 다시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단어와 글자의 파편들이 서로 겹쳐져 있었다. 하지만 다섯 글자가 도드라져 보였다. 죽은 남자가 남긴 희미한 각인이었다.

다른 사람들. (p. 81)

비쩍 마른 그 남자에게 커피를 가져다주지 않았더라면,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다시금 고개를 내민 악몽처럼 너덜너덜한 수첩 위로 떠오른 그 단어를 보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 (p. 86)

케이티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다. 두아이의 싱글맘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중이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정기적으로 들러 식사를 하고 가는 게이브를 몇 년째 보고 있다. 그가 딸의 실종전단지를 돌릴 때부터 3년째 고속도로위를 헤매며 카페에 들를때마다. 그러다 어느날 그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수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는 단어를 보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한참 뒤에 사마리아인은 자기 잔을 집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숨을 쉬었다. "다크 웹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게이브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들어본 적 있었다. 실종된 아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다크 웹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기존의 검색 엔진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하 인터넷. 화려한 공식 웹 아래에 숨겨진 공간. 일반적인 웹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그곳을 이용했다. 하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서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깊고 어두컴컴한 곳이 원래 그렇듯 거기에 오물과 침전물이 쌓였다. (p. 161)

게이브가 자살을 생각했던 다리에서 한 남자를 만만다. 이름이 아닌 다양한 별칭으로 불린다는 그는 그저 '사마리아인'으로 부르라 했다. 그는 여러모로 게이브가 딸의 실종을 추적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게이브는 물어볼 수 없었다. 이 검은 남자는 위험했다. 하지만 게이브는 그저 딸의 실종을 추적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뿐 그의 사연을 알아낼 필요도 여력도 없었다. 그로부터 다크 웹 세상의 '다른 사람들' 을 알게 됐다.

Q: 명칭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지은 이유가 뭔가요?

A: 인간은 누구나 비극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벌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벌어지기 전까지는요,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용서하거나 잊어버리는 데서 위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정의를 구현하도록 서로 돕는 데서 느끼죠.

Q: 대가를 지불해야 하나요?

A: 돈이 오가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우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우리는 기브 앤드 테이크 시스템으로 운영합니다. 요청하고 신세를 갚는 시스템으로요. (p. 180, 181)

게이브의 아내는 살해당했다. 딸도 함께 살해당했다고 경찰도 처가도 얘기하지만 게이브는 딸이 실종됐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집에 있던 여자아이의 시신은 누구인가? 왜 장인어른은 게이브에게 시신검안을 못하도록 했나? 프랜을 쫓는 자들은 누구인가? 앨리스가 보는 환영은 누구인가?

게이브가 수십년간 숨겨온 비밀이 끔찍한 살해사건과 함께 세상에 알려진 날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양심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수십년째 약속을 이행중이었다. 고문에 가까운 약속을.

그 약속과 그에게 벌어진 참혹한 사건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식물인간 소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정말 식물인간인가? 사마리아인은 왜 게이브를 돕는가?

프랜이 사라졌을때 앨리스는 케이티에게 연락할 수 밖에 없었다. 케이티는 앨리스가 앨리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케이티가 자신의 아이들과 앨리스를 데리고 게이브에게 도망쳐 왔을 때 그들은 서로의 퍼즐을 맞춰볼 수 있었다. THE OTHER PEOPLE 이 누구인가를.

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생각한 사건이 갑자기 터져버렸을 때, 뉴스에 나오는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내게 벌어졌을 때, 그 억울함과 분노를 법이 만족스럽게 처벌해주지 않을 때, 낯선이가 다가와서 다른 방법이 있다고 알려준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내가 누군가의 복수를 해주고 누군가가 나의 복수를 해준다면, 내가 했던 복수가 내게 복수로 돌아오고 누군가가 했던 복수가 누군가에게 또다른 복수로 돌아오고, 그렇게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세상은 어찌 되는 것일까...

세상에 The Other People 이 더 많을 것 같지만 The Same People 이 더 많다.

나와 다른 사람들 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하나를 풀고 다음을 풀어가며 차근차근 전체를 완성해가는 이 작품은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이 고통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지도 함께 보여준

단숨에 읽히지만 긴 생각이 남겨지는 괜찮은 스릴러 소설이었다.

여름엔 역시 스릴러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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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내게 화학을 알려줘 내게 과학을 알려줘 1
닥터 스코 지음 / 푸른들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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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같은 화학 히어로가 되고 싶은 이에게 권하는 책

 

스파이더맨을 둘러싼 과학적 호기심들을 아주 유쾌발랄한 어투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보니 과학책을 읽고 있는 건지 스파이더맨 분석서를 읽고 있는 건지 헤깔릴 정도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아주 격없이 친근하게 다가와 힘차게 악수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오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ㅎㅎ

저자는 과학을 전공했고 전공을 살린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이 종종 대중과학서도 쓰고 유투브 실험 영상도 올리는 활기찬 사람인듯 하다. 거기에 마블시리즈 중에서 스파이더맨 '찐' 덕후인 것 같다. 스파이더맨의 만화책 부터 영화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보니 저자가 알려주는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읽다보면 스파이더맨이 만화나 영화속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실존인물인것 마냥 여겨진다.

스파이더맨 이라는 친숙한 매개인물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과학적 호기심을 일으키고 있는 저자의 질문들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폭넓고 다양하다.

스파이더맨 하면 떠오르는 거미줄! 그 거미줄 용액부터 거미줄을 쏘는 스파이더맨과 그 스파이더맨의 수트 로 이어지는 내용들은 스파이더맨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영화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연상이 되는 재미가 있다.

나는 마블시리즈에 뒤늦게 흥미를 가진 사람이다. 거의 해마다 나오는 마블시리즈가 상영관들을 점령할때 한두번 보긴 했지만, 앞뒤 내용을 모르니 한참 뒤에 나오는 쿠키영상에 왜 그렇게 관심들을 갖고 기다리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다 지난 겨울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 마블시리즈를 정주행하고 나서야 아~! 깨달았다. 역시 알고 봐야 더 재미있는 거였다. 이렇게 알고나니 이제 마블시리즈가 새로 나오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 캐릭터가 왜 저러는지 웃으며 볼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본 마블시리즈 가 책읽을때 도움이 될 줄이야 ㅎㅎ 스파이더맨 영화도 마블시리즈에 속한 건 다 봤기에 덕후까지는 아니지만 저자의 스파이더맨 상황설명을 대충은 다 알아먹을 수 있었다. ^^

스파이더맨의 주무기인 거미줄 용액을 화학적으로 예상분석해보면서 스파이더맨의 본 인물인 과학영재 피터 파커의 생각을 추리하는 과정을 읽다보면 스파이더맨 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터 파커 라는 사람이 마치 실존하는 것 같다. 저자는 피터 파커라는 과학자의 사고과정을 따라가는 중 같달까 ㅎㅎ 스파이더맨이 쏜 거미줄의 특성을 연구해보고 스파이더맨이 입고 다니는 수트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까지 충족시키고 나면 조만간 업그레이드 된 스파이더맨이 우리 동네에 나타날 것만 같다. ^^

보너스로 실린 <완소 쿠키 자료> 에서는 어렵지 않은 실험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실험들을 유투부에서 직접 볼 수 있도록 QR코드도 함께 있어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청소년들은 찾아봄직 하다.

이 쿠키자료가 끝이 아니다.

그 뒤에 <스파이더맨 연대기> 에서 스파이더맨 영화 기록과 소유권 분쟁의 간략한 설명과 스파이더맨 에게 보내는 애정어린 편지까지 읽고 나면 wow 저자의 스파이더맨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구나 싶다.ㅎ

청소년들에게 과학을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면,

스파이더맨 거미줄의 근원인 웹플루이드의 정체는 무엇일까? 거미줄의 능력은 어느정도 일까? 스파이더맨은 어떻게 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스파이더맨의 안경이 어떤 렌즈인지? 등이 영화속 스파이더맨을 보며 궁금한적이 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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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 인간의 본성을 뒤집고 비틀고 꿰뚫는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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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다

가부장의 이중생활로부터 열녀 만들기 프로젝트, 자식 사랑 패러독스까지

'가족'을 둘러싼 잔혹하고 기이한 고전 살롱으로의 초대

 

 

'고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본제목보다 '가족기담'이라는 소제목에 더 눈길이 가는 책이었다. '고전'이라는 약간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살롱이라는 얄궂은 단어의 조합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전'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과 국내고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겠거니 하는 약간의 관심으로 읽게된 책이었다.

그런데 웬걸.

읽는 족족 속이 뻥뻥 뚫리다 못해 가끔 혼자 키득거리며 웃음까지 터지게 한 이 책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렸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다 올바른데 어디서 이런 불온한 이야기들만 모아놨느냐고 핀잔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 잘 포장해놓은 이야기들 속에 꼭꼭 숨겨진 신음소리, 한숨소리, 통곡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 헝크러진 소리들 속에서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귀감이 되고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p. 7)

학교에서 우리는 많은 고전을 배웠다. 아이들 책에도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고전들이 스며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전 속에서 저자는 뜻밖의 질문들을 꺼낸다. 그리고 현실감 터지는 분석들을 해낸다. 그야말로 기막히게 혁신적으로 고전을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고전에 등장하는 효자,효녀,열녀 이야기들을 보며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는가? 그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효자, 효녀가 되려하고 열녀가 되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사랑이 샘솟는 가족이라고 믿었는데 영아살해와 근친상간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적은 없었는가? 가부장가부장 해도 가부장의 관습이 어느정도 였는지? 여성과 장애인 같은 약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저 재미있게 읽고 넘겼던 '고전'작품들 속에는 '인간본성'을 꿰뚫는 질문들이 수두룩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본성들이 하나씩하나씩 이야기속에서 은근슬쩍 드러날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잘못을 떠넘김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공범이기에 다급한 그 심경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대부분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가 몽둥이게 맞아죽고 배가 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수순이다. 희생양은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죄가 희생양과 함께 사라지고, 그래야 공범자들의 죄가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공범자들이 더 광분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메커니즘이다. (p. 27)

<1관 불변의 희생양 메커니즘> 에서 소개하는 고전은 <쥐변신설화, 옹고집전, 배따라기> 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남편이 깍아버린 손톱발톱을 먹고 천년 묵은 쥐가 변신하여 남편행세를 했다는 '쥐변신설화' 에서 '쥐뿔도 몰랐냐'의 쥐뿔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돌아온 남편이 가짜(쥐)남편을 없애고 가짜를 알아보지 못한 부인은 죽임을 당했다. 함께 못알아본 부모는 멀쩡하고.

인색했던 옹고집을 벌주기 위해 짚인형 가짜 옹고집이 진짜 옹고집을 쫓아내는 옹고집전에서도 진짜가 돌아왔을때 웃음거리가 된 것은 부인 뿐이었다.

근대 소설가 김동인의 '배따라기' 에서도 '쥐잡기'는 의처증을 타고 부인과 동생을 쫓아내는 실마리가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순간 그 희생양은 '부인' 이었다.

이 모든 불편하고 괴롭고 힘겨운 상황의 근본 문제는 '부재'였다. 그 부재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절간에 간 남편의 공간적 부재보다, 욕심으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옹고집의 상황적 부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의처증 남편의 심리적 부재이다. 자긍심 부재라는 그 열등감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p. 52)

공포와 불안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곳을 파고든다. 그래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한다. 눈이 확 뒤집히게 하는 것이다. (p. 55)

서양의 마녀사냥이 서양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는 어디든 언제든 그러한 일이 있었다. 희생양이 필요해지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스며든 공포와 불안은 그렇게 누군가를 탓함으로써 자신을 위안하려 든다. 지금도 그렇게 우리대신 엉뚱하게 벌받고 있는 희생양이 있지 않을까?

국가적 차원에서 '적서차별' 과 함께 고안해낸 것이 '과부재혼금지' 였다. 남자들에게 적서차별이 있었다면 여성들에겐 재혼금지가 있었떤 것이다. 이 두 제도 밑에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한정된 관직 숫자 문제다. (p. 60)

열녀 만들기 역시 효자 만들기와 같은 방법이 쓰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효자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가 큰 축복의 영예를 얻지만, 열녀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는 최소한 피곤한 수절을 하든지 최악의 경우 죽어야 한다. 혜택? 그건 고스란히 엉뚱한 집안 식구들에게 남겨진다. (p. 73)

<2관 열녀 이데올리기> 에서 다루는 고전은 <열녀함양박씨전> 이다.

'관직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지 못했었다. 나랏일 하는 관직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어서 서자 얼자 의 자리까지는 없었는데, 양반댁 과부가 재혼해서 정식?!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서자 얼자도 아니기에 관직쟁탈의 경쟁율을 높이는 존재가 되었다. 자리가 적은 만큼 대상자를 줄여야 했다. 관직의 혜택은 소수에게만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밀려난 양반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에는 특별한 명분이 필요했다. 효자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며느리가 죽어야 나라가 집안을 알아주었다.

효자 효녀 열녀 의 문화는 도덕과 예절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몸종이 있다. 늘 그렇듯이 찬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주인 어른 드실 차를 소반에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찻잔을 내려놓는 그녀의 거동을 샅샅이 훑어보던 주인어른이 갑자기 뒤에서 덮치는 것이 아닌가. 반항해도 소용없다. 하늘이 핑 돌고 난리가 아니다. 곧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난다. 겁에 질린 울음이 터진 것도 겨우 그때였다. 며칠 후 그녀는 주인어른의 첩이 되어 외진 곳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앉는다. 어제까지 같이 걸레질을 하던 친구들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기는 하지만 눈초리가 요상하다. 입이 열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인어른을 기다린다. 하지만 처음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홀로 지낸다. 이 어린 여자의 이름은 춘섬이다. 귀에 설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 끔찍한 날 이후 배가 불러 태어난 그녀 아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홍길동. 바로 그녀가 낳은 아들이다. (p. 91~92)

홍길동전을 동화로 읽어서 그런지 원전이 이렇게 폭력적이고 질펀한지 몰랐다. 무엇보다 홍길동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첩' 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단순히 첩 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이 '처첩' 문제는 굉장히 다양한 양상을 띤다. 왜냐하면 양반남자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워낙 다양했기 때문이랄까. 그렇게 목숨줄을 거머쥔 한 남자에 의해 '첩'은 언제든 사악해질 수 있었다.

<3관 처첩의 세계> 에서 다루는 고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춘향전> 고전을 몰라도 아마 이 세작품은 다 알것 같은, 이 유명한 세 작품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처첩'의 갈등은 단순히 여성들의 질투가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게임이었고 복수혈전이었다. 그리고 적서폐지를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던 홍길동은 율도국에서 '첩'을 만들어 가졌다. '길동 이놈도 역시 남자였던 것이다.'(p. 102)

19세기에 창작된 한 소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남자들은 이젠 기녀들에게 절개가 아니라 순결을 요구한다. 그녀들의 처녀성을 요구한다. 기녀와 처녀성.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으로 사용한다. 남자들의 꿈과 환상은 이제 로망을 넘어 '노망'수준으로 치닫는다. <옥루몽>이 그렇다. (p. 12)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 기녀들에게 성적 순결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와 은밀하고 은폐된 폭력의 문제를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했다. 눈앞에 버젓이 적혀 있지만 그렇게 보지 못했던 것, 아니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말했듯이 그런 프로노그래피적 상황을 연출한 자들이 모두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p. 139)

<4관 가부장의 이중생활> 에서 다루는 고전 <구운몽, 옥루몽> 중 <옥루몽>은 잘 모르는 고전이었지만, 저자가 인용하는 고전마다 얼개를 다 설명해주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구운몽> <옥루몽> 다 '몽'자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꿈이야기인데 이 꿈이 그야말로 남성들의 로망실현 그 자체다. 그리고 이 판타스틱한 꿈을 성취하는 주인공에 집중하다보면 '설마 주인공이 그랬겠어' 하며 주인공을 두둔하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의 로망을 자신의 것인양 꿈꾸며 주인공을 닮아간다.

조선시대 양명학을 이단으로 몰아 발도 못 붙이게 한 이유는 성리학의 사상적 체계가 매우 수준 높기에도 그랬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제 마음보다 세상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기 잘하는 훈련된 전문 빅마우스들이 듣기에, 왕수인의 '마음을 바르게 써야지' 라는 훈계가 날카로웠기 때문인 것 같다. 밖에서는 성인군자지만 안에서는 추잡한 음란마귀로 변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찔끔했기 때문인 것 같다. (p. 141)

시대의 사상 성리학이 양명학을 이긴 배경에는 이런 남성적 욕망이 숨어져 있었다. 스스로의 인격을 성찰하며 아는 만큼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양명학 보다 세상의 이치 자체를 연구하면 인격수양도 절로 된다는 성리학이 지배층 남성들에게 훨씬 편했던 것이다. 공부만 하면 성인군자가 된다고 믿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와 현실이 다를때 이성과 실천이 연결되지 않을때 얼마나 삶이 비참해지는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 본연의 욕망이란 것이 누른다고 없어지고 눈감아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답답하게 갑갑하게 억압할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 욕망이다.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에너지가 점점 터질 듯이 커지다가 어디 한 곳 토해낼 출구를 찾으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양반 여자들에게 그 출구는 소설이었다. (p. 146)

<5관 욕망의 세계> 에서는 <옥루몽> 과 <홍계월전> 을 다룬다.

김탁환 작가의 <대소설의 시대> 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한글 사용이 보편화 되고 아녀자들도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원활해졌을 때 한글소설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렇게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쓰고 읽는 소설속 내용은 기존의 작품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했던 <옥루몽> 과 비교하는 <방한림전> 과 <홍계월전> 은 여성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말도 안되는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황부인이 몸부림을 친다. 사람들은 그것을 투기라고 매도했다. (p. 160)

그녀는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알았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투기 갈등은 단순한 쟁총이 아니라 여자의 자기 위치 찾기로서의 정당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p. 165)

<홍계월전>에서는 '처첩' 갈등을 다른 측면에서 재조명한다. 정실부인인 '황부인'의 몰락에 집중한다. 왜 황부인은 존중받지 못했는가?

저자가 설명하는 '르네 지라르 의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이론에 무척 공감이 갔다. 욕망하는 주체가 목표대상을 곧장 추구하면 되는데 인간은 그러지 않고 목표대상보다 수준이 낮은 중간대상을 설정해서 그 중간대상 즉 매개자를 모방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감히 엄두도 못낼 목표 보다는, 이정도면 해볼법한 중간대상을 모방함으써 목표를 추구하다보니 주체는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거참... 인간의 심리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6관 - 무능열전 : 흥부전, 심청전, 변강쇠가> 였다.

할수 있는 거라곤 새끼 내지르는 일뿐이었던 흥부와 잘 하는 거라곤 섹스뿐인 기둥서방 변강쇠 둘 다 그저 못난 놈팡이일뿐, 무능하고 무기력한 핑계쟁이에 불과하다는 직설적인 저자의 풀이를 읽다보면 저절로 ㅋㅋㅋ 웃음이 났다. 그에 반해 심청전의 심봉사는 의외로 의지적 인간이었고 그랬기에 똑부러진 딸 심청이를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심봉사의 의지는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 배경에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폭력이 깔려 있었다.

심봉사는 장애가 있어서 무능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무기력하게 대한 것이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일을 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회는 그가 할수 있는 일을 줄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앉아 '효성 지극한 딸의 봉양이나 받으시라'고 하는 것이 최대의 배려였다.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를 인간답게 대접한 사람은 오직 한명, 그의 딸 심청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심봉사는 장애인이 아니라 한명의 사람, 아버지였다.

장애인을 무기력하게 보는 시선보다 더 혹독한 것은 따로 있다. 장애을 '웃음거리'로 보는 것, 그것을 넘어 '죄'로 '악'으로 보는 눈길이 장애인을 두번, 세번 죽인다. (p. 205)

심봉사도 무능하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의 욕심에 딸을 팔아넘긴 대책없는 아비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을 읽고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예로 든 <피터팬> 의 후크선장도 <보물섬>의 존실버도 다른 동화속 마녀들도 다리를 절든 등이 굽든 결과적으로 장애인이었고 그 모습은 희화화 되어있었고 혐오화 되어 있었다. 심지어 '악인' 을 장애인의 모습을 한 인물이 대표함으로써 악을 대리화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장애인을 평범하게 볼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자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비인 흥부의 모습을 보고자란 흥부네 아이들도 분명 사회에 제 몫을 다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심청이가 그렇게 야무지게 자란 것은 다 심봉사 덕분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란다. 그건 맞는 말이다.

<손순매아> <헨젤과 그레텔> <장화홍련전> 을 예로들어 '은폐된 패륜'을 이야기 하는 '7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장화홍련전> 이었다.

먹고살것이 부족한데 할머니 반찬에 손을 대는 자식을 묻어버리러 산에 올라갔던 부모가 효심을 칭찬받는 이야기는 <손순매아>는 제목은 낯설어도 익히 아는 내용이다. <헨젤과 그레텔> 도 <손순매아> 도 친부모가 기근을 못이겨 자식을 버리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차라리 자식을 버리는 게 낫지 더한 짓을 한 부모가 <장화홍련전> 속 아버지인줄 미처 몰랐다.

대체 계모는 왜 이들을 죽인단 말인가? 아무 이득도 없는데. 말했듯이 전처소생 중에 아들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배좌수 집에는 그냥 시집가버리면 그만인 장화와 홍련 말고는 전처소생이 없다. 아들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계모는 장화와 홍련을 죽이려고 술수를 부린다. (p. 240)

도대체 배좌수는 다 큰 딸들을 왜 품에 품고 있었을까?왜 놓아주질 않았을까?배좌수는 끔찍한 비극에 대해 손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든 죄를 악독하고 사악한 계모와 그의 아들에게도 미뤄버리고 그는 다시 재기한다. 그는 새장가를 가서 다시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고을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끝난다. (p. 251)

<장화홍련전> 하면 계모에게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은 자매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계모는 자매를 죽일 이유가 딱히 없었다. 말그대로 시집보내면 끝이다. 하지만 자매의 친아버지가 장성한 두 딸을 시집보내지 않고 애지중지 한다. 그러다 계모가 꾸민 장화의 임신 누명에 사건당일 장화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도 듣지도 않고 바로 계모의 계획을 승인한다. 언니가 죽자 홍련은 따라서 자살을 한다. 마을사또앞에 자매가 나타났을 때에도 장화는 침묵을 지킨다. 홍련만이 구구절절 하소연할 뿐이다. 왜였을까? 자신을 지켜줄 언니가 없어지자마자 홍련을 죽기를 결심했다. 홍련이 두려워했던 존재는 장화가 침묵해야 했던 존재는 계모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해와달이 된 오누이> <여우누이> 를 통해 <자식사랑 패러독스> 를 말하는 <8관> 을 읽다보면 지금의 현실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딸래미가 여우라는 걸 알았으면 간을 내어줄 것이 아니라 사냥하는 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몰랐다면 편애의 색안경을 벗지 못했던 부모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깨우쳐야 한다.

마지막 <9관 가족의 재탄생 : 최고운전> 의 <최고운전> 은 처음 보는 고전이었다. <야래자설화> 와 <아기장수 설화> , <지하대적퇴치설화> 를 비틀어내고 꿰뚫어낸 <최고운전>은 신라시대 실존 인물인 최치원의 인생을 멋지게 형상화한 소설이라고 한다.

밤에 귀한 존재가 방문하고 간뒤 낳은 아들이 영웅이 된다는 <야래자설화> 와 별볼일 없는 평민집에 어느날 날개달린 아기장수가 탄생하자 두려움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기장수 설화> 그리고 귀한집에서 여자와 보물을 훔쳐가는 도둑을 귀인이 섬멸하는 <지하대적퇴치설화> 는 모두 <최고운전> 에 슬쩍슬쩍 섞여있는데 기존 설화의 결말들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만들어냄으로써 최치원의 삶을 더 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능력은 있으나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시대,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이 발목을 잡는 상황,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니라 남을 위한 희망이 외면당하는 갑갑한 현실, 이는 꼭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만이 아니라 <최고운전>의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역시 반복되고 있다. (p. 307)

조선시대 소설가가 신라시대 인물로 당대를 풍자하는 것이나 조선시대 인물로 지금을 빗댈 수 있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역사는 늘 외양만 바꿀 뿐 비슷한 리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본성 또한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역사도 사람도 너무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이런 생각때문에 고전을 읽는다. '고전'은 늘 지금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더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듯 하다. 재밌으면서도 의미까지 있는 좋은 책이었다. 강추~!^^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놀라운 명제를 천명했지만 그 말의 어려움만큼이나 실천은 더 어려운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던져지듯 있다는 무의미에서 허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그렇게 이유없이 던져진 듯하기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혜안이다. 본래부터 결정되고 정해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없는 진정한 자유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짐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어떠한 인간이다(본질)' 라는 것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실존)' 것이 더 먼저 있다는 거다. (p. 314)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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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역사 - 말과 글에 관한 궁금증을 풀다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서순승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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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에 관한 궁금증을 풀다

A Little BOOK of LANGUAGE

 

 

'소소의 책' 에서 출판된 이 교양 시리즈를 개인적으로 참 좋아한다. '철학의 역사' 도 좋았고 '고고학의 역사'도 좋았다. '세계종교의 역사'도 차례를 기다리며 지금 책장에서 대기중이다. 최신간인 이 '언어의 역사' 또한 앞서 나온 책들처럼 광범위한 분야를 아우르면서도 쉽게 읽혔고 시리즈의 통일된 표지가 역시나 예뼜다.

언어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일단 언어를 처음 시작하는 단계의 사람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일단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기 위해 저자는 '베이비 토크' 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아기가 직접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는 아기에게 말을 건다. '토크'가 시작되는 셈이다.

아기는 모국어의 어떤 부분을 제일 먼저 배울까? 그것은 다름 아닌 리듬과 억양이다. 생후 9개월 된 영국·프랑스·중국 아기가 내는 소리를 각각 녹음하여 뒤섞은 다음 사람들에게 아기의 출생지를 구별하게 하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p. 26)

아기는 처음엔 울음소리만 낼 뿐이다. 그러다 한달한달 커갈수록 빠른 속도로 언어를 습득한다. 그리고 미처 단어를 내뱉기 전의 아직은 옹알이에 가까운 소리만으로도 우리는 아기의 모국어를 눈치챌 수 있다. 리듬과 억양!

아기가 언어를 배워나가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언어의 습득과정을 설명한다.

이해방법학습, 음파에 적응해 가면서 발음을 할 수 있게 되고 문법을 익힘으로써 대화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나면 읽고 쓸수 있게 되고 그러려면 철자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철자에는 역사를 거친 변형이 있고 문법 규칙 또한 그렇기에 배우는 것이 만만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거기다 악센트와 방언 까지 있고 언제 부턴가 이중언어는 필수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몇 개의 언어가 존재할까? 약6,000개다. 어쩌면 그보다 조금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언어가 빠른 속도로-몇 주마다 거의 한 개꼴로-사멸해가는 것도 그 한 가지 이유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가 발견되기도 한다. (p. 149)

언어는 아주 서서히 변한다. 하지만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 가족, 즉 어족을 형성한다. (p. 153)

6,000여 개에 달하는 전 세계의 언어는 모두 이런 식으로 특정한 어족에 편입된다. 문제는 많은 지역의 경우 우리가 의지할 역사적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 154)

오늘날 인구어(印歐語) 혹은 인도유럽어라 불리는 언어가 바로 윌리엄 존스가 추정한 조상 언어다. 인도유럽어를 사용한 사람들의 정확한 거주지는 현재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들이 이동을 시작한 시기 또한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동쪽으로는 인도, 그리고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언어 또한 극적인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p. 157)

사람이 태어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원리를 상세히 설명한 다음 저자는 언어의 역사를 시작한다. 역사는 지금 세계의 현재 언어에서 출발한다. 지금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사용하는 어족은 아마도 인도유럽어족 일 텐데 책속에 나오는 분포지도는 눈여겨볼 만 하다.

 

조상언어의 분포도를 보면서 언어라는 문자와 말 중에서 먼저 시작되었을 '말'의 기원을 추적한다. 인도유럽어족 분포도를 보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쉬웠는데 그 이유가 바로 나왔다.

전 세계 언어 중 고립어는 수백 개나 된다. 여기에 서로 관계가 불명료한 언어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난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한국어는 서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유사성이 많지만, 차이점 또한 너무 많아 학자들 사이에서 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족을 살펴보면 실제로 유사성보다 차이점이 훨씬 더 크다. (p. 164)

책에서 지속적으로 저자가 동양언어에 대해서는 일본어 언급을 주로 하고 있는것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어족을 따질 수 없는 고립어 중에서 한글만큼 과학성을 띤 체계적인 언어는 없을텐데 언어학자인 저자가 한국어를 모르고 일본어와 중국어의 특징정도만을 파악한 상태에서 잠깐의 비교대상으로만 한국어를 딱 한번 서술했다는 점이... 아쉽다.

여하튼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발성기관의 발달과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문자가 생겨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기원전 8,000년 경이 인류가 언어능력을 갖추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시기라고 한다. 따라서 10만년 이라는 인류진화의 역사를 생각하면 언어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류 발전사에서 최초의 진정한 글쓰기 체게는 설형문자다. 이집트인도 또 다른 글쓰기 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그 출발 시점이 늦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 이를테면 중국이나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인 사이에서 발전된 문자 혹은 글쓰기 체계는 시기상 이보다 훨씬 뒤진다. 초기 중국 문자는 기원전 1200년경에, 그리고 마야문자는 기원전 5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글쓰기 체계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을 무대로 여러 시대에 걸쳐 각긱 고유한 문자를 개발해왔다. (p. 177)

말은 다양한 지역에 퍼지면서도 서로의 연관성이 있어 어족을 형성할 수 있었던데 비해 말 이후 발달한 글은 정착한 그 곳에서 고유성을 띠며 발전했다. 언어라는 한단어로 부르고 있긴 하지만 말의 역사와 글의 역사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표기법을 보면 글이 아닌 다른 표기법(예를 들어 그림이라던가 기호...)은 만국공통으로 의미가 통하기도 한다. 언어에는 이런 비언어적 언어도 포함되어 있다.

말과 글은 언어가 표현되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수화)

수화 통역사들이 사용하는 수화의 유형도 나라마다 제각각이다. 영국 통역사는 영어 수화를, 프랑스 통역사는 프랑스어 수화를, 그리고 중국 통역사는 중국어 수화를 한다. 세계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수화가 수 세기 동안 진화해왔다. 아니, 어쩌면 역사가 더 깊은지도 모른다. (p. 193)

수화도 나라마다 달랐구나~! 신기하다. 손으로 하는 기호에 가까운 언어인 수화도 나라마다 다르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저자가 강조하듯이 '수화는 결코 단순한 원시적 몸짓이 아니라 구어와 문어 못지않게 복잡하고 유용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언어다'(p. 199) 라는 것이다.

전 세계 6,000여 개의 언어는 모두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든 언어에는 문장이 있다. 모든 언어에 명사와 동사가 있다. 모든 언어에 모음과 자음이 있다. 모든 언어에 리듬과 억양이 있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울 때는 여러 어려움에 부딪힌다. 다른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언어를 말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p. 203)

사람들은 누구나 대화를 하지만 그 방식이 결코 똑같지 않다. (p. 211)

언어의 비교를 통해 보면 언어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면 공통점을 다수 발견할 수 있지만 각각의 언어를 직접 사용할 때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말, 글, 수화는 한 언어가 살아 숨 쉬는 세 가지 방식이며, 동시에 그 언어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세 가지 수단이다. 건강한 언어라면 이 과정이 쉼 없이 진행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언어를 물려주고, 그 자식이 다시 그 언어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언어는 계속 생명을 이어간다. (p. 213)

언어에는 생명력이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언어가 있는 반면 죽어가는 언어도 있다. 이렇게 '사용자 수가 극히 적어 곧 사멸할 가능성이 높은 언어를 위기언어 라고 한다. 위기언어 중 대다수는 주로 적도 근처에 위치한 나라를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동남아시아지역-이를테면 파푸나유니기와 같은 나라-에 수백 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인도와 아프리카에도 수백 개의 언어가 존재하고, 남아메리카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이들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위기언어가 빠른 속도로 사멸해가고 있다'(p. 214) 고 한다. 이 곳의 언어들은 왜 사라지는 것일까? '대부분의 새로운 언어가 좀 더 나은 삶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p. 217)

새로운 언어는 사회에서 최고의 직업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옛 언어는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의식을 유지시켜준다. 다시말해 당신의 정체성을 지켜준다. 두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당신은 두 세계를 넘나들며 최선의 것을 취할 수 있다. (p. 217)

소수민족의 언어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저자는 본인의 정체성을 지켜줄 모어와 현실생활에 필요한 외국어를 함께 익히기를 권유한다. 그렇게 언어를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사라져 가는 언어가 있다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언어는 변한다. 언어의 변천과 변이를 살펴보면서 그 구체적인 증거처럼 직업어, 속어를 살펴본다. 사전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살펴보다보면 어원, 지명, 인명 을 통해 언어역사의 모습도 잠깐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언어적 특징은 무엇일까? 전자혁명, 문자메세지, 놀이 언어를 통해 현실언어들을 살펴 본후 이렇게 변화무쌍한 언어가 왜 필요한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모든 것은 왜 필요한 걸까? 인간은 굳이 왜 말하고 쓰고 수화하는 법을 배워야 했을까?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언뜻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 지금까지 이 책에서 논의한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p. 342)

언어의 1차적인 목적은 의사소통인것이 분명하나 언어의 필요성은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음을 저자는 설명한다. 동물에게 말을 걸거나, 악센트나 방언처럼 정체성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표현하거나 사교를 위한 관계유지 뿐만 아니라 종교적 제의에도 필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을 하기도 한다. 의사소통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도 언어의 활용성은 무궁무진 하다. 특히나 언어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치성을 띨수도 있고 문학성을 띨수도 있으며 개성적인 스타일을 가진 언어를 만들 수 있기도 하는등 언어는 복잡하기에 언어학 이라는 학문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다른 의사소통 수단과 감히 비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가 특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언어에 관한 택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학에서 언어를 연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 403)

언어학의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학은 수많은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p. 407)

나는 언어학이라고 들었을 때 어원학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언어의 역사는 언어학의 역사는 언어의 구성원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꼭 역사가 아니어도 다양한 분야에 응용가능함을 알려주면서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언어세계에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를 조언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진정으로 언어에 관심 있다면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까? 나의 관심사는 대략 여섯 가지로 요약된다.

나는 여러분이 현재 전 세계에서 수많은 언어가 사멸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 점에 늘 관심을 갖기 바란다. 정치가들이 언어 다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는 주체는 다름 아닌 여러분이다.

나는 여러분이 비록 아직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지 않더라도 소수 언어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바란다. 주위에서 생경한 언어가 들려오면 일단 귀를 기울이고,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들어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나는 여러분이 가능한 한 많은 언어를 배워보겠다는 의지를 갖기 바란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집필한 언어 관련 도서도 모두 그런 도전 의식의 산물이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언어에 존재하는 다양성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높이 평가하려고 노력하며, 현재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보라.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언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타일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언어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모국어를 배우거나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를 바란다. (p. 422~427)

언어는 삶과 뗄 수 없는 수단이자 방식이다. '언어의 역사'를 읽는 동안 언어의 자체의 기원 보다 언어와 사람과의 관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점이 신선했다. 저자가 마지막 문단에 써놓은 '이것은 언어에 대한 '작은 책'이다. 하지만 언어는 큰 주제다'(p. 428) 라는 문장에 공감한다. 언어라는 주제가 너무 방대해서 내가 생각했던 언어의 역사는 너무 작은 범주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원제는 'A Little BOOK of LANGUAGE' 였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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