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함께하는 여름
실뱅 테송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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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라디오 방송국 <프랑스 앵테르>에서 2017년 여름에 방송된 <호메로스의 함께하는 여름>을 바탕으로 저술되었다. 저자 실뱅 테송은 이 책을 쓰기 위해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에 틀어박혀 에게해 해변과 햇빛, 파도 거품, 바람과 함께 지냈다. 그가 우리에게 제안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펼쳐 들고 바다 앞에서, 방 창문 앞에서, 산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몇 구절 읽어볼 것을. (표지 中)

 

신기한 일이다.

라디오에서 2천8백년 전의 서사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더 신기한 일이다.

문화 깊숙이 호메로스가 자리잡은 사회에서 자란것도 아닌 내가 이런 책에 끌리고 이런 책을 쓴 저자의 권유에 마음이 설렌다는 것은.

이건 고대의 기적이다. 2500년 전 에게해의 자갈밭에 던져진(혹은 상륙한) 한 시인이, 몇몇 사상가가, 철학자들이 세상에 내놓은 가르침이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무뎌지지 않았다니!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아직 되지도 않은 상태에 대해 알려준다. (p. 11)

몇 편의 노래로 인간의 윤곽을 그려낸 것. 호메로스 이후로 아무도 다시 하지 못한 일이다. (p. 13)

서양역사와 철학을 읽는동안 호메로스를 수시로 만났다. 고대그리스 비극과 아이네아스까지 읽고 나니 정작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전을 읽은 듯 하다. 이책저책에서 하도 자주 접해서인지 안 읽었음에도 이미 읽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이 두권을 나는 올여름에 꼭 읽어야할 것 같다. 비록 키클라데스 의 어느 섬에 가지 못하고 에게해는 커녕 동해바다 조차 구경하기 힘들지라도 올여름엔 꼭 이 두 고전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호메로스가 이미 다 풀어냈던 이야기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존재를 둘러싼 불가사의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신들이 정말로 존재해서 그들의 이야기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 신들이 호메로스에게 예지를 불어넣었다는 것. 그렇게 시간의 심연 속에 던져진 이 시는 우리 시대를 만나도록 예정된 전조였다는 가설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제우스의 태양 아래 다랄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이 시들을 관통하는 주제들-전쟁과 명예, 위대함과 달콤함, 두려움과 아름다움, 기억과 죽음-은 영원회귀라는 화로의 연료라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인간의 불변성을. 현대의 사회학자들은 인간이 개선될 수 있으며 진보가 인간을 개선해주고 학문이 인간을 개량한다고 믿는다. 객설이다! 호메로스의 시가 시들지 않는 것은 인간이 옷을 갈아입어도 여전히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트로이 평원에서 투구를 쓰고 있건 21세기의 버스 노선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건, 똑같이 가련하거나 위대하며 똑같이 보잘것없거나 숭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p. 22)

사람은 안 변한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이다. 개과천선? 글쎄... 허드렛말로,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사람은 안 변한다. 2천8년전부터 안 변했고 아마 역사시대 이전의 사람들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변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고대 서사시에서는 더 원초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글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화려하게 꾸민 나머지 엄청나게 변한 것처럼 여겨지게 할 수 있지만, 사실 사람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기때문에 고전이 고전이 되어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오래된 책들을 읽어야 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나는가? 중학교1학년 교과 과정에 호메로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숲속을 쏘다니며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지독히도 지루해하며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곤 했는데, 그때 하늘에는 전차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짜릿한 현대성을 띤 시, 독창적이기에 영원한 황금시가, 소란과 격노로 들끓는 노래가, 풍성한 교훈과 더없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시인들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암송하는 노래가 우리 안에서 우러나도록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 (p. 24)

이 신의 노래들, 이 황금시들, 이 열정적인 시를 여러 세대가 누리지 못하게 박탈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교육부 소속 교육학자들의 노고 덕에 그리스-라틴 인문학이 위축되고 있다. 관념론자들이 학교 개혁을 책임지면서 50년 만에 고대 학문이 죽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죽은 언어를 배우는 건 엘리트주의라는 것이다. (p. 32)

wow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중학교 1학년 교과 과정에 있다니;;; 정작 고전을 배워야 할 나이엔 고전을 배우지 않게 되고... 하지만 어렸을때 고전을 만나는 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만나봐야 어른이 되었을때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나서 찾게 될 수 있다. 청소년기에 고전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나는 대학필수교양과정에 고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할 여유가 있고 삶에 대한 고민이 있을때 고전은 새롭게 다가온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처럼 풍성한 결과를 낳은 작품은 많지 않다 - 종교적 계시가 담긴 위대한 텍스트들은 별도로 치고, 이런 해설 활동은 경이로운 놀이인 셈이다.

시에 빠져들어 이따금 성경의 시편을 암송하듯 그 시들을 암송해보자. 누구라도 거기서 자기 시대의 그림자를, 자신의 번민에 대한 답을, 자신의 경험에 대한 예시를 발견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거기서 교훈을 끌어낼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위안을 찾을 것이다. (p. 34)

나도 고전에 맛을 알게 된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껄 아쉬웠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고전이 가슴으로 읽히는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고전을 읽게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빛과 파도 거품, 바람의 젖을 먹고 자란 늙은 젖먹이, 맹인 예술가의 영감을 이해하려면 그곳의 작은 섬에 머물러 봐야 한다. 장소의 정기가 인간을 기른다. 나는 우리 영혼에 지리의 링거가 꽂혀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그 초소에 머물러 보고서야 <오디세우스> 와 <일리아스> 의 물질적 본질에 다가설 수 있었다.

모든 공간은 저마다의 문장을 갖고 있다. 그리스의 공간은 바람이 때리고, 빛이 관통하며, 의미심장한 발현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다. 오디세우스는 고통의 배를 타고 그런 신호들을 받았다. 프리아모스와 아가멤논의 병사들은 트로이 평원에서 그 신호들을 자각했다. 지리 地理 속에 산다는 것은 독자의 육신과 텍스트의 추상 사이의 거리를 넘어서는 일이다. (p. 40)

인간의 삶은 환경적 조건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 들이 쓰여진 그 곳에 가야 글 속에 스며든 그 바람과 파도와 햇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직접 슝~ 날아가 에게해 섬에서 호메로스를 읽었던 저자가 부럽다. 하지만 장소의 현장감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한글로 이 위대한 고전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숲출판사 천병희 선생님의 그리스로마 고전 책들이 있어 정말 감사하다. 이 책들이 있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영역 일역의 중역이 아닌 그리스어 라틴어 원전 번역서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정말 정말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섬들은 소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호메로스의 가르침이다. 다양성은 저마다 개별성을 지키도록 요구한다. 다양성이 존속하길 바란다면 거리를 유지하라! (p. 57)

태양 아래 드러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길을 열정적으로 걷지 않고 왜 내세를 희망한단 말인가? (p. 59)

현시대에 던지는 호메로스의 전언은 이렇다. 문명은 모조리 잃을 것이고, 야만은 모조리 얻을 것이다. 매일 아침 독서를 하며 호메로스를 기억할 것 (p. 79)

어떤 사람들은 경이로움을 알아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호메로스는 우리가 운명 앞에서 평등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p. 147)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신화의 세계에서는 계급이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왕자와 거지는 똑같은 범용과 똑같은 덕성을 보일 수 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인간애를 타고난 피조물이 아니며, 하인이라고 반드시 순진함을 전유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주라고 해서 반드시 영혼의 품격을 갖춘 것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세계는 본질주의적이지 않다. 그 세계는 현실을 닮아서 횡으로 열려 있다. (p. 151)

이 작은 책을 읽으며 이렇게 내가 밑줄치고 싶은 문장을 많이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가볍게 그리스고전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읽었던 책이 이렇게 다시 고전에의 열망을 갖게 할 줄은 몰랐다. 고대시대 사람들에게 들려졌던 이야기들이 현대의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으로.

우리는 천 년 후에도 호메로스를 읽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이 시에서 21세기 초의 세계를 뒤흔드는 변화들을 이해하게 해줄 지혜를 발견할 것이다. 아킬레우스, 핵토르, 오디세우스가 하는 말이 복잡성의 안개 속에 무지를 감추는 데 탁월한 기술자인 전문가들의 분석보다 더 많은 걸 밝혀준다. 호메로스는 그저 영혼의 불변요소들을 발굴해낼 뿐이다.

투구와 갑옷을 바꿔보라. 말을 탱크로, 범선을 잠수함으로 대체해보라. 도시의 성벽을 유리 타워로 바꿔보라. 나머지는 유사하다. 사랑과 증오, 권력과 복종,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주장과 망각, 유혹과 굳건함, 호기심과 용기, 지구상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신들은 다른 얼굴들을 취했고, 사람들은 더 무장했으며, 인구가 늘어나서 지구는 작아졌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내면의 이타케를 하나씩 품고 있다. 그곳을 되찾기를, 때로는 그곳으로 되돌아가기를 꿈꾸지만, 대개는 그것을 지킬 수 있기를 꿈꾼다. (p. 167)

십년간의 트로이 전쟁, 십년간의 귀향길...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오디세우스의 이타케를 향한 여정을 보며 인간삶의 희노애락을 고전의 문장들로 확인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흥미롭다. 그리고 여전히 사는게 거기서거기다 라고 느껴지는 그 감정이 때로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온함과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고전에서 강조하는 절제를 우리는 지금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곤 한다.

<일리아스> 는 전쟁의 시이기 때문에 시사성이 있다. 2500년이 흘렀어도 피의 갈증은 여전히 펄떡이고 있다. 무기만 변했을 뿐이다. 진보란 인간이 자신의 파괴력을 키우는 능력이다. (p. 291)

얼마나 영혼이 지치고 심장이 메말라야 우리 눈앞에 생생하고 화려하게 펼쳐진 경이를 두고도 불확실한 낙원을 희망하게 될까? (p. 337)

고전을 읽는다고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문만 가득 떠안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들이 중요하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삶의 근본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 질문들을 기억해내는 경험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이었는데 표지가 너무 아쉬었다. 사마귀라니;; 왜 하필;; 사마귀 표지만 아니었다면 두고두고 쓰다듬었을 책인데;;;) 여하튼, 올여름엔 꼭 <일리아스> 와 <오디세이아> 을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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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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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유신의 그늘'이라고 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의 제목으로 다시 한번 '유신의 그늘'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이 2020년인데 저자는 왜 '유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까? 과거 어떤 사건에 엮인 제한된 그리고 이미 끝난 단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유신' 이 무슨 뜻이지? 새삼 생각해보니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검색해봤다. 좀 이상하게도 '유신'의 다섯번째 뜻은 한번 검색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신 維新 -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

이 책은 일본에 대한 책이므로 여기서의 '유신'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의 그 '유신'을 뜻한다. 막부가 통치하던 시대에서 천황이 통치하는 시대로 전환된 일본의 복고는 율령국가 체제로의 복귀선언이었다고 한다.

현대 일본의 정당 가운데 하나인 '유신의 당' 의 영어 표기가 'Japan Innovation Party' 라는 사실에서 눈치챌 수 있듯, 복고란 동시에 혁신(쇄신)이기도 하다.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취한다' 복고인 동시에 혁신이라는 이율배반적 통합이야말로 유신의 숨은 뜻이라고 하겠다. 유신은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내셔널리즘을 만들어내고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진시킨 서구의 선진국을 좇던 아시아 변방의 국가가 근대화를 위해 취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전통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며 부국강병에 매진하는 과제에 도전했다. 그 결과 사회와 국민은 약해졌을지언정 국가는 강력해 졌고, 비서구 세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이 지금도 메이지 유신을 긍정하며 이를 자신의 근대적 뿌리이자 '영광 가득한 출발'로 간주하고 있다. (p. 7)

메이지유신 하면 일본의 근대화 라고 등식처럼 역사시간에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과연 그러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이룬 근대화로 일본이 한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점점 더 국가는 강해졌고 점점 더 국민은 보이지 않았다. 막부에 종속되어 사는 것과 국가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 과연 달라진것일까? 어차피 시민은 없어 보이는데...

메이지 국가를 영광의 시대로 칭송하며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의 아이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은 지금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 의 생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전국에서 균열과 비틀림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착실하게 시민과 사회운동의 힘을 키웠다. 규범과 정의라는 관념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했고, '강한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강한 사회'를 갖는 데 성공했다. 끊임없이 민주화를 통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국가를 감시하는 능력을 길러온 역사의 성과일 것이다. (p. 9)

한국이 '강한 사회' 문화를 형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사회에 비하면 국가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한국 시민들은 국가에 쓴소리 험한소리 하는 것을 어렵지 않아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어떤 피해를 당해도 감내하고 어떤 사건에도 시민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일본사회 와는 많이 다른 것 같긴 하다.

정부는 메이지 150년 세리머니를 통해 네이션의 선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려 한다. 네이션의 선성-국민의 정부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때로 시민이 그 죄에 어떤 방식으로 가담한다 하더라도 네이션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신념-을 보증하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는 '단일한 색의 순수성'이다. 양쪽이 지닌 시대적 사회성을 다 벗겨내고 오직 일본인이라는 속성만 살아남았을 때 생기는 순수성 안에서만 네이션은 선하며 무구하다. 앤더슨의 반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완료=과거의 완성된' 일본인이라는 네이션과 '미래완료=미래에 완성될' 일본인 이라는 네이션이 현재에서 만나, 다시 말하면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유령적 결합이 네이션의 선성을 보증한다. (p. 16)

일본 국가주의에 대해 이미 과거에 완성된 듯한 일본인 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일본 내부 사정에 대해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일본 사회는 정말 의아한 점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좀...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 답답함을 뻥 뚫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근대 일본의 대표작가인 '나쓰메 소세키' 였다. 저자가 종종 인용하는 소세키의 글은 시원스러웠다.

100년 전, 메이지를 대표하는 문호 나쓰메 소세키는 [단편]을 통해 메이지 익찬(힘을 보탠다는 뜻으로 일본 천황을 돕는다는 뜻으로 쓰였다)의 물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과거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1)앞날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며 (2)내리막 길에 있기 때문이며 (3)이상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며 (4)훌륭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39년에는 과거가 없다. 과거가 없을 뿐 아니라 현재도 없으며, 그저 미래만 있다. 청년은 이를 알아야 한다. (p. 17)

100년전에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사회에 직언을 던지는 지식인이 있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지식인조차 없어졌다고 한다. 미래로 발전한 것인가 과거로 가서 머물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은 기행문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의 일본 사회 문제를 직면하게 해줄 장소들을 찾아가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사색을 한 저자의 기록이자 연재됐던 글의 모음이다. 그리고 저자는 "나는 버려진 자들의 상속인이다"라고 말한다. 재일한국인2세로 도쿄대학 교수인 저자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더욱 남다른 사색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서재와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학술 연구라기보다는 현장 연구와 저널리즘의 결과를 이론으로 가공한 것이다. 다시말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서자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서자로 칭한 이유는 적자적 정통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22)

일본에서 나고자라 일본인에 가까워보이는 저자는 재일한국인2세라서인지 역사인식에서만큼은 중립적인 판단을 가지려 노력하며 산 것 같다. 일본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보다 나아진 일본이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일본에서의 왜곡된 한국역사를 바르게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양국 모두에 대한 안타까운 애정이 전해져오는 듯 했다. 그래서 출발장소를 군함도로 선택한 것이 더 의미있어 보였다.

군함도도 후쿠시마 원전도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에너지 시설이 아니었다. 저자는 " '에너지가 곧 국가다' 라는 국책이 걸어온 길에는 수많은 사람기둥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p. 38) 는 것을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왜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라는 일본에서 아동7명 중의 1명이 빈곤에 처해 있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빈곤을 낳는 풍요가 자리잡고 있다. 풍요는 어린이와 한부모가정 같은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풍요는 극단적인 부의 쏠림을 초래하며 거대한 격차를 낳는다. 여기에서는 오직 부로서만 부를 재생산할 수 있다. 소득 상위 10퍼센트의 국민이 전체 부의 40퍼센트를 가진 격차 사회이자 불평등 사회, 이것이 오늘의 일본이다. (p. 41)

1874년 제정된 오늘날의 생활보호법에 해당하는 환난구휼의 규칙에서는 빈민, 즉 하층민은 놀고먹는 사람, 무위도식자로 간주해 엄격한 제한구제주의가 적용되었다. 남구(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까지 보호하는 일)는 저소득층을 지원에 의존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게으른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약자를 잘라내고 사회보장을 제한적으로-그 결과 효율적으로-운용해야 한다는 은혜주의적 사고(복지가 사회 구성원의 권리나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윗사람의 은혜라는 사고방식)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지 정책의 구실로 이어지고 있다. (p. 46)

빈부격차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일본사회만의 문제도 아니지만, 일본 복지에 깔린 사고방식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있는 나라인줄 알았더니 그 혜택을 받는 대상 선정에서의 문제가 무시할 수 없어 보였다. 양극화 문제는 대학의 우열을 가리는 것에서도 심각해보였다.

오늘날 대학을 둘러싼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대학의 우열을 구분해놓은 'G'와 'L' 이 바로 그것이다. G는 글로벌, L은 로컬을 가리킨다. G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으며 L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의 바닥에 위치한다. G대학이 국제화와 조직 개혁을 통해 교육과 연구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 대학이라면, L대학은 지역 경제권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인재 배출을 목표로 삼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학문과 교육은 G에서만 받을 수 있으며, L은 이름만 대학일 뿐 실제로는 직업 훈련소 역할을 한다. (p. 53)

우리나라의 대학서열화 문제도 심각하다. 그런데 일본처럼 아예 대놓고 G 와 L 로 구분해 놓는다면 교육현장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심란하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저렇게 대학 우열을 구분해 놓는 것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지금의 일본 대학이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창조하는 터전이 되지 못하여 '가치의 공동화 空洞化' 가 진행되고 있다며 걱정한다. 그런데 그 빈 구멍을 메우려 국가는 더욱 통제와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한다면, 사회의 희소 자원, 재정, 서비스 등을 어디에 투여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일본의 방위비는 해마다 치솟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생긴 오염수조차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한다. 제한된 가치가 제대로 배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잘못된 정치는 지역과 시민의 활력을 갉아먹고 지역의 힘을 감퇴시킬 것이다. 대지진을 비롯한 천재지변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관련된 일본 정치의 존재 방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p. 82)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도 아니면서 미국처럼 해외파병을 수시로 해대는 국가도 아니면서 방위비를 자꾸 올리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저자가 찾아다니는 곳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었다. 저자는 이 현실들을 좀 직시하라고 정치권에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충고를 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경세제민 이라는 개념이 있다.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이 말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한다' 라는 뜻이다. 그 줄임말이 바로 경제 이다. 이 말은 영어 economy 의 번역어인 경제보다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요샛말로 바꾸면 나라를 통치하는 동시에 곤궁에 빠진 국민을 구하여, 가난한 사람과 이재민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리라. (p. 99)

법안을 의결할 때, 당의 방침에 따라서만 투표한다면 의원은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당의 대표가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정치가에게 경세제민의 기개를 기대할 수 없다. (p.100)

그렇지.. 경제가 이런 뜻이긴 했다.. 하지만 이 경제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다... 정치인도 뭐... 다만 모든 당원들이 당대표에게 예스를 남발하는 예스맨이 아니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게다가 세습에 준하는 정치가문의 세습은 우리네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런 가문의 정치가를 선거에서 뽑아주는 걸까... 정치가문 뿐만 아니라 정치가를 배출하는 학원도 있고... 흠... 이러나저러나 "산전수전을 거치며 당원에서 지도부로 올라서는 그림은 아예 불가능해졌다"(p. 111) 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나마 시민사회에서 정치가가 배출될 수 있는 우리사회가 더 나은건가 싶기도 하고... 뭐... 비교하자고 읽은 책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비교가 안 될수는 없었다;;;

지금 정부는 지방 창생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균형 있는 국토 발전이라는 국가의 의무마저 방기해버렸다. (p. 122)

피해가 확인되고 12년이 지나서야 아세트알데히드 제조 설비의 가동이 중지되고 수은 유출이 멈추었다. 또 40년이 지나서야 환자 단체와 화해 협정에 조인했다. (p. 135)

사람 목숨이 가장 가볍게, 함부로 다뤄지는 순간은 바로 전쟁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이어지는 70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전쟁의 시대를 반성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p. 137)

지방과 중앙도시의 균형발전은 참 어려운 문제긴 하다. 미나마타병이 발생한 지역은 소외된 지방이었다. 미나마타병의 처리과정은 정말 이럴수있나 싶게 너무 안타까웠다. 피해자들의 구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그 질병을 안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데...

일본의 전쟁사가 70년이나 됐다는게 새롭게 다가왔다. 긴 전쟁의 상흔은 인식에 깊게 새겨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지배자들의 머릿속엔 상흔이 아닌 재도전의 욕구를 새겨놓았을지도...

애국심과 내셔널리즘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 그것은 통치 시스템으로서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반성하지 않는다.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한들 국가의 통치에는 폭력이 따르기 마련이다.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막스 베버)이기 때문이다. 패젼 이후 '평화국가'를 주창하며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려 한 일본에서도 폭력은 필수 도구였다. 그럼에도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p. 170)

폭력의 대표적 상징은 '군대' 다. 일본에서 국가의 폭력을 드러내는 군대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군대가 일본의 가장 변방 오키나와 에 거의 주둔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키나와에 폭력을 집적시키고 격리한 이유는 군사 전략이나 억지력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오키나와가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니라서가 아닐까?"(p. 173) 라는 저자의 의문아닌 의문은 일본 본토인들이 오키나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알고나면, 그 차별성을 알고 나면 안타깝지만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차별엔 늘 화가 난다. 일본내에서의 다양한 차별 문제는 이 책의 마지막 대상인 '자이니치' 로 연결된다.

2000년대가 되면서 재일 외국인 중 중국 국적자의 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웃돌게 되었다. 재일 외국인의 국적이 다양해지면서 자이니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가리키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2016년 [출입국 관리 및 난민 인정법] 개정 이후, 재류 자격이 28종으로 늘어났다. 2016년 당시 재류 자격을 가진 전체 외국인 240만명 가운데 재일 한국인·조선인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p. 196)

'혐한' 시위대를 뉴스에서 자주 봤다. 혐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본 정치인들도 자주 봤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일본체류 외국인중 한국인의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원래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던 자이니치 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무색하게 재일한국인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이제 자이니치 본래의 단어로 써야할 만큼 재일한국인의 비중은 전과 같지 않음에도 그 사용현실은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혐한분위기를 보면 그저 한국이 마냥 만만한 자기네들 밥인가 싶기도 하다. 내부문제에서 관심을 돌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한국만한 상대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된 듯...

지리적 변경이 아니더라도 사회적·문화적·심리적 변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을 나는 왜 따라갔을까.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변경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변경을 몸에 두르고 사는 삶을 뜻한다. 동시에 고도성장 시대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내게 삶은 변경에서 이탈하여 볕이 잘 드는 중앙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빛을 구하려 한 결과, 나는 언제부터인가 변경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p. 203)

그러나 볕이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메이지 국가의 반짝이는 미래에서 가장 먼저 어둠을 찾아낸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다. "일본국 전체 어디를 둘러보아도 반짝이는 단면은 1촌4방도 없지 않느냐. 모조리 암흑뿐이다." [그후]의 주인공의 염세적인 독백에 소세키의 심정이 잘 묻어 있다. (p. 204)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내 앞에 놓인 지리적 국경이, 사회적·문화적·심리적 국경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번 여행은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일본은 그런 이들을 끊임없이 배출했다. 바로 여기에 이 나라의 희망이 깃들어 있다. (p. 206)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곳곳에 산재한 문제들은 일본의 그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빛을 찾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제삼자로서 일본의 현실을 좀더 알 수 있었고 다른 나라의 내부사정을 알게 될때마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살기 좋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며 감사할뿐 그네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에 살고 있는 현지인이다. 그의 체감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저자가 찾아낸 희망이 정말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랄뿐....

국가주의의 융기와 감각적 충동의 해방, 국권과 민권의 분열, 국가와 자본의 유착, 도쿄로 쏠린 부와 재화, 피폐해진 지방, 미국에 대한 추종과 그 밖의 다른 나라에 대한 무시... 그 모든 문제는 메이지 국가가 완성될 때 이미 배태되었다. (p. 213)

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은 정치가의 몫이다. 전후 민주주의는 '평화국가'의 기치를 내걸고 개인의 인권과 함께 인간다운 '문화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일본은 마치 국가를 위하여 국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착된 상태였다. 국민 없는 국가주의만 팽창했다. (p. 214)

메이지 초기에는 다카시마 탄광의 갱부를 억압하는 궁핍과 아시오 광독 사건의 참상을 폭로한 지식인이 있었다. 전후에도 공해 반대 운동, 시민운동, 평화운동, 차별철폐 운동 등에 투신한 지식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이 화혼을 꺾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에 국민 없는 국가주의가 대두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응집력이 증발해 버렸다. 이제 '지식인의 종언'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렇다면 유사인텔리에 착목해야 하지 않을까? '유사'는 '사이비'라는 뜻이 아니다. 근대적 의미에서는 지식인이 아니지만, 그 아종이라할 만한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 곤경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유사인텔리이다. 그들의 유산이 현대로 계승된다면 메이지의 그늘에 갇혀 국가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순종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국가라는 돔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아 아니라 미래에서 희망을 구해야 한다. (p. 219)

노벨상도 많이 타고 이런저런 학문분야에서 세계적 업적을 거둔 일본사회에서 지식인이 증발했다는 저자의 표현은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슈퍼엘리트들이 지식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회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야할 지식인들이 특권층이 되어 자신들의 이익만 따지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다만 어떻게 바꾸느냐, 바꿀수 있긴 하느냐가 문제라면 문제랄까...

이 책이 알려주는 일본사회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문제또한 그대로 상기시켜주는 것도 있었기에 남의일인양 무시할 수만은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정도까지 곪아가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게 해주는 내용들이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훨씬 희망적이긴 한 것 같다. 이 희망의 빛들이 점점 더 우리사회를 밝게 비춰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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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재생 이야기
김정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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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진화 중인 런던의 비밀은 무엇인가

도시학자가 바라본 공간과 사람에 대한 철학

 

 

밀레니엄브릿지에서 찍은 세인트폴 대성당과 하늘이 어우러진 표지가 산뜻하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이다.

몇년 전 런던에 일주일쯤 머문 적이 있었다. 숙소가 세인트폴대성당 근처라서 도보로 성당과 밀레니엄브릿지 건너편을 오가며 산책하곤 했었다. 그때는 걸으면서도 그 길들이 왜 편한지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며 알았다.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것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어디를 가든 보행자 중심이었다. 런던시내 곳곳엔 걷기 좋은 곳들이 정말 많았다.

런던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산업시대때부터 전통깊은 도시인만큼 낙후지역도 많았고 발전격차가 벌어진 곳도 많았다. 하지만 런던은 도시재생사업을 꾸준히 벌여왔고 여전히 진행중이기도 하다. 다른 대도시들도 그런곳이 많겠지만, 도시재생사업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런던을 선택한 것은 완성된 모습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방향성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런던이 도시재생에 크게 성공한 것처럼 언급되지만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혹독한 시련과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일련의 과정이 유사한 상황에 직면한 도시들에 충분히 교훈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필자가 런던에 주목하는 분명한 이유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선정한 10개의 대상은 성공한 사례라기보다 교훈적인 사례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p. 6)

시행착오는 중요하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실패로 간주하고 뒤엎어버리기기 쉽지 시행착오에서 무언가를 배워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그와는 반대되는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은 쉬워도 배울건 배우고 버릴건 버리는 반성과 통찰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런던의 도시재생사업의 사례들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그 어려운 시간들을 거쳤기에 지금의 런던이 될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제1회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던 런던이 100주년을 기념하며 개최했던 영국 페스티벌의 중심지역으로 선정됐던 '사우스 뱅크' 는 페스티벌이 끝난 후 그 영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지역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도시재생사업을 새롭게 추진하게 된다. 기존과 다른 방식의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한 모범적 지역으로 발전한 이곳은 지금 시민 모두를 위한 휴식처이자 아지트가 되었다.

오늘날 테이트 모던은 미술품을 전시하는 장소로서의 가치를 훌쩍 넘어선다. 문화예술공간이 쇠퇴한 장소, 나아가 지역 전체를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테이트 모던은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템스강 남북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영국의 대중지 '타임 아웃'을 포함한 각종 언론의 조사에 따르면 테이트 모던은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p. 34)

런던에 관광을 가면 꼭 들러야할 곳 중에 '테이트 모던'은 늘 들어가 있다. 이 예술적 장소는 원래 운영을 중단하고 방치되있던 '화력발전소' 였다. 우리나라에 강남과 강북의 경제격차가 있듯이 런던엔 템스강 북쪽과 남쪽의 경제격차가 있었고, 남쪽은 늘 낙후지역이었다. 런던에서 가장 쇠퇴한 지역에 자리잡은 '테이트 모던' 은 예술적 공간의 가치를 넘어 지역발전 균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테이트 모던' 을 템스강 북쪽 지역과 연결해주는 다리가 '밀레니엄 브릿지' 인데, 이 다리의 의미 또한 남다르다.

오늘날 다리 디자인에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공법과 첨단 재료가 적용되는 만큼, 드러난 결과들 또한 무척 화려하다. 이에 반해 밀레니엄 브릿지는 최근에 건설된 다른 다리들과 비교해 외형적으로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 대신 세인트 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을 보행자 전용 거리로 편안하게 연결함으로써 오랫동안 단절된 템스강 남북을 어우르고 런던을 통합하는 출발점을 만들었다. (p. 82)

이 다리 디자인을 공모했을때 수많은 디자인들이 제출되었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디자인들이었지만, 최종 선택된 것은 다리 자체를 빛나게 해주는 디자인이 아니라 다리가 연결하는 두 지역을 돋보이게 만드는 디자인이었다. 다리를 만드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의도를 캐치한 디자인이 지금의 밀레니엄 브릿지 였다. 이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길에서 길로 연결된 '길' 로서 이 다리를 건너다닌다. 다리 자체를 보며 감탄하지 않는다. 다리위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의 지붕을 보며 감탄하고 다리위에서 테이트모던의 독특한 건물외양에 설레여 하며 그저 건너다닐 뿐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길인 것처럼.

유럽 도시들은 공통적인 도시 구성방식을 갖는다. 규모와 형태는 다르지만 상징 광장을 중심으로 대성당과 시청이 자리잡고, 그 외에 중요한 정치, 행정, 문화예술 관련 건물이 광장 주변을 에워싼다. 이와 같은 구성은 전형적인 그리스 로마 문명의 영향으로써 유럽 대부분의 도시들이 비슷한 원리를 따랐고, 전쟁이나 재난 등의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큰 변화없이 현재까지 유지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럽 주요 도시들의 시청은 보통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낡았을지라도 신축하는 것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p. 85)

이 유럽적 전통을 획기적으로 깨뜨린 곳이 런던 시청 이다. 독특한 외관도 그렇지만 그 위치도 파격적이었다. 중심지가 아닌 낙후된 남부 템스강변에 자리잡음으로써 주변 지역까지 재생시켰다.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 가 늘 새롭게 함께하고 강변 산책로까지 개선시킨 런던 시청은 저자의 표현처럼 '겉모습은 전혀 시청답지 않지만, 내면은 가장 시청답다' (p. 96) 그렇게 런던시청은 런던시민들이 런던을 색다르게 즐기는 공간이 되었다.

런던은 템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이므로 강 주변에 다양한 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테이트 모던이 된 곳도 강변의 화력발전소였고, 템스 강을 오르내리는 무역에 의해 거대한 창고들도 강변에 즐비하게 건설되 있었다. 그러다 강을 오르내리는 물류산업이 쇠퇴하면서 거대한 창고들은 쇠락해갔다. 이 쇠락한 창고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임대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에 다양한 예술가들이 작업실로 관심을 갖고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변모해갔다.

도시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쇠퇴와 마주한다. 쇠퇴한 지역에 남은 과거 유산을 활용할 것인가, 아닌가는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모두 헐고 전면 재개발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샤드 템스는 기존의 산업유산과 주변 공간을 보호하고 재활용하는 것으로, 완전히 새롭게 조성하는 것 이상의 장소를 만들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다시 말해, 도시재생의 구체적인 대안과 가시적 성과를 남겼다. (p. 126)

버려진 창고지대를 훌륭히 복구해낸 샤드 탬스가 있는가 하면 철저히 실패했던 지역도 있었다. 바로 세인트 폴 대성당 앞쪽 지역인 '파터노스터 광장' 이다. 세계2차대전 이후 완전히 파괴된 이 지역을 개발하던 당시 실용성에 중심을 둔 고층건물 중심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0년에 걸친 건설이 마무리되고 몇년후 쇠퇴하는 초유의 현상이 발생했다. 이 지역은 완공된지 20년만에 다시 재개발하기로 전격 결정된다.

런던은 물론이고 영국의 도시계획 역사상 전무후무한 충격적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역사지구, 그것도 오랜 논쟁 끝에 채택된 마스터 플랜에 따라 완공된 장소를 고작 20여 년이 지나 재개발한다니! (p. 137)

큰 실패를 바탕으로 큰 교훈을 얻은 런던은 이 지역 20년밖에 안된 건물들을 부수고 다시 새롭게 구획을 정비하고 층수를 낮춰 재개발했다. 어디서든 세인트 폴 대성당의 커다란 돔 지붕을 볼 수 있게된 지금은 이곳이 런던 시민들을 위한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와 달리 쇠퇴는 커녕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아마 '시장' 이 아닐까.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 은 도시형 재래시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전통의 맥은 있으나 점점 낙후되고 시장으로서의 기능도 쇠락해가던 때 재생사업이 추진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새롭고 최신식 현대적 시장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 아니라, '조명, 전기 배선, 배수, 바닥 포장, 페인트 등 기본적인 기반시설' 에 집중함으로써 본래 가졌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뒀다는 점이다. 이렇게 새로워진 시장은 여느 백화점 못지않게 성황리에 관리되고 운영되고 있다.

브런즈윅 센터는 영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일체형 주상복합 공동주택이다. 영국에서 주거와 상가가 단일 권역, 특히 하나의 공동주택에 자리하는 방식은 보편적이지 않다. 영국의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주거 영역과 상가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러한 방식은 단독주택이나 공동주택이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공동주택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처럼 단지 내에 편의시설을 갖춘 별도의 상가를 만들지 않고, 광장이나 정원 등 거주자들이 공유하는 공공공간만 존재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주거 영역은 주거 기능에만 충실하고, 상권은 주거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조성된다. (p. 174)

역시 문화가 다르면 환경도 다르게 구성된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내에 상가가 없으면 이상하고 아파트 촌 바로 옆에 상가 촌이 없으면 불편하다 여기며 주상복합이 제일 비싼데 영국사람들은 이런 구조를 선호하지 않는다니. 주상복합 형 브런즈윅 센터는 결국 건설되고 얼마후 바로 낙후되기 시작했으나 중심에 광장을 만들고 시민들이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재탄생하게 되었다. 도시재생은 그 도시의 문화적 수용성을 감안해야 성공하기 마련이다.

런던에서 가장 높고 유일한 최고층 빌딩은 '더 샤드' 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런던의 랜드마크로서만 상징적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런던 브리지역' 의 도시재생사업의 결과로서 더 의미있는 곳이었다.

런던 브리지역은 과거나 현재나 지정학적으로 중요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각종 오명을 얻었다. 런던에서 가장 복잡한 역, 런던에서 길 찾기 가장 힘든 역, 런던에서 가장 지저분한 역, 런던에서 가장 추한 역 등 사실상 역과 관련된 부정적 이야기는 모두 들을 정도였다. (p. 19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어설프게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이었다. (p. 195)

더 샤드의 성공여부는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공간적으로 런던 브리지역과 어떻게 연결되고,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인가가 더욱 중요했다.

건물의 형태는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볼륨이 감소해서 300미터가 넘는 높이에도 시각적으로 주변을 압도하지 않는다. 무어보다 중요한 것은 저층부를 최대한 비워서 런던 브리지역의 공용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킴으로써 최대한 공공성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더 샤드에서는 도시에서 흔힌 마주하는 권위적ㅇ니 초고층 건물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절제된 디자인으로 실제 방문객이나 주변 보행자는 더 샤드의 존재를 크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p. 198)

초고층 건물이 주는 위압감... 저자의 글을 읽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말 그랬다. 더 샤드 주변부를 걸으며 이 건물이 크다거나 위압적이라거나 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미리 예약하면 위층에 있는 전망대를 올라갈 수 있어서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다 시간맞춰 전망대에 올라갔을때 내려다본 런던 시내 풍경에 속이 뻥 뚫리며 새삼스럽게 이 건물이 이렇게 높았나 싶은 기분이 들었었다. 잘 지어진 건물이란 외형적으로 위용을 뽐내는 것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두 건축가가 일관되게 공유한 생각은 사용자와 지역 주민을 동시에 고려한 공공성이다. 결국 전혀 다른 두 개의 혁신적 개념이 런던 브리지역에서 통합되어 지역 활성화를 위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p. 204)

런던 브리지역은 내·외부 공간 모두 철저하게 보행자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앞서 설명했뜻이 기존역사가 오명을 넘어 악명을 얻을 정도였기에 새로운 역사가 이용자들과 주민들에게 주는 감흥은 크다. (p. 211)

저자가 알려주는 도시재생사업의 예들을 보면서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사업의 핵심가치는 '공공성' 과 '보행자중심' 이었다. 런던 브리지역에 이어 이 책의 마지막 예로 등장하는 킹스 크로스 역 재생사업은 앞선 사례 지역들을 통과하는 가치들의 총집합 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21세기에 추진된 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사례를 하나만 꼽는다면 아마도 '킹스 크로스'일 것이다. 왜 그럴까?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은 시민참여, 민관협력, 공공공간 조성, 보행환경개선, 역세권 활성화, 산업유산 재활용, 복합개발, 주거지 활성화 등 오늘날 도시재생이 추구하는 화두의 대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p. 217)

초기 논의 과정에서 전문가들과 주민들이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 중의 하나는 높은 비율의 공공공간과 보행친화형 디자인 때문이다. 그 출발은 킹스 크로스역 앞의 광장과 주변 공간이다. (p. 248)

전체 8만여 평의 사업 부지에서 차량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거의 모든 공간이 보행 중심이다. 앞서 설명한 일련의 프로젝트 중에서 서비스 차량을 제외하고 일반인의 차량 출입이 가능한 장소는 단 한 곳도 없다. (p. 250)

도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발전과 낙후과 왔다갔다 한다. 따라서 사람이 잘 갈 수 없는 곳은 사람이 걷기에 불편한 곳은 사람이 모일 수가 없고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지역활성화는 언감생심이다. 런던의 도시재생사업을 보면서 가장 좋아보였던 점은, 낙후된 지역과의 균형 발전을 고려하되 일시적이 아닌 장기적 활성화를 염두에 두고 광장이 되었든 공원이 되었든 일단 사람들이 모일수 있는 공공공간을 중심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행자중심의 길과 건물이 들어서게 되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게 되면 지역활성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걸어서 편하게 갈 수 있는 곳,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은 곳, 걷다보면 자연스레 사람이 모이는 곳, 그런 공간들이 우리 도시들에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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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멀 - 인간과 동물이 더불어 산다는 것
김현기 지음 / 포르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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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MBC 창사특집 화제의 다큐멘터리

인류의 공존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밀도 있는 현장 르포를 담다

 

 

휴먼 그리고 애니멀

익숙한 이 두 단어를 합친 휴머니멀 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만큼 우리는 어쩌면 인간과 동물을 너무 떼어놓고 생각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공존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속에 생명체는 오직 인간뿐이라고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인간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느끼며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려왔다.

부처의 자비를 기리기 위해 축제를 열지만, 거기에 동원된 코끼리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아이러니한 현실. 인간은 초월적 존재를 숭앙하지만, 그 방식은 철저히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문다. 생명 존중에 방점을 찍고 문제를 제기해도, 받아들이는 쪽은 그 진의를 외면하기 일쑤다. (p. 31)

처음 등장하는 동물은 아시아코끼리 이다.

동남아시아 여행패키지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곤 하던 코끼리 서커스나 코끼리 타보기 혹은 현지 축제에서 화려한 천을 걸치고 행진하는 코끼리들을 보며 그 코끼리들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외면해온 것은 아닐까... 야생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얼마나 혹독하고 잔인한지 직접 보지 않았으니 몰랐다고 하기엔 이미 세상에 넘쳐나는 증거자료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시아 코끼리와 인간의 관계를 '학대'라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면, 아프리카 코끼리의 경우는 '밀렵'이다. 아시아 코끼리와 달리 아프리카의 코끼리는 대부분 커다란 상어를 지니고 있다. 이 길고 아름다운 어금니를 노린 밀렵은 소일거리나 우발적 행동을 넘어서 음성적인 산업의 수준에 이른 지 오래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코끼리의 개체수가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다 못해 멸종 위기를 맞았을 정도로 말이다. (p. 45)

상아를 얻기위해 밀렵꾼들의 방법은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었다. 예전보다 규제가 생기고 보니 총을 쏘아대기 보다 한방이든 마취든 일단 쓰러뜨리고 나면 살아있는 상태에서 전기톱으로 상아가 박힌 얼굴을 도려내 가고 있다. 밀렵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사체에 독약을 뿌려놓고 사체를 먹는 동물들까지 몰살시킨다고 한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불법 상아 밀렵이지만, 인간과 동물 간 갈등에 의한 코끼리 살해 건수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코끼리의 생존에 위험 요소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식량, 물, 영토 등 필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경쟁자인 인간들은 양적 팽창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50년까지 아프리카 인구는 지금의 두 배로 늘어날 전망이고, 코끼리의 영역을 잠식하는 속도도 드라마틱하게 빨라지는 추세다. (p. 81)

타노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자연은 존재하던 곳에 그저 존재하고 동물도 그 자연속에 그저 살고 있었을 뿐인데, 침범해들어간 것은 인간인데 인간은 동물이 자연이 훼방꾼인양 거침없이 그들을 치워내고 있는 중이다.

식용이나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레저와 전시를 목적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를 '트로피 헌팅'이라고 한다. '트로피'는 벽에 걸어놓기 위해 그 동물의 머리를 박제하여 만든 장식품을 가리킨다. 서구사회에서 트로피 헌팅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레포츠 산업으로 번성하고 있다. (p. 89)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사냥과 유흥거리로 하는 사냥은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트로피 헌터 들은 스스로를 야생환경보호활동가 라고 여긴다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지역주민들이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비싼 돈을 내고 일부분만 사냥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헌터들이 지불하는 비용의 대부분은 그들을 사파리에 데려다준 헌팅업체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또 상당한 액수가 부패한 정부 관료에게 흘러들어가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약간이라도 혜택을 보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을 수 있지만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단 한번도, 멸종위기 종을 보호하려는 모범적인 트로피 헌팅을 본 적이 없습니다. (p. 133)

미국인 유명 트로피 헌터가 사냥을 한 후 그 자리에서 고기를 잘라 주민들에게 선심쓰듯 나눠주고 저녁 만찬에서 현지 업체직원들이 시중을 드는 모습은 제국주의 시대 주인과 노예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2013년 세계야생동물보호기금의 보고서에 따르면, 헌팅 관광으로 발생한 전체 수입 중 지역사회로 유입된 비율은 고작 3%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는 정부기관이나 중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을 뿐이다. 오히려 트로피 헌팅보다 에코 투어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13배 이상 크다는 통계도 있다고 한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이 존재하는데도 시스템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총기를 이용한 사냥은 그나마 직접적인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어 나름 조심하는 분위기라도 있는듯 한데 더 큰 문제는 전통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자행되는 마구잡이 살육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타이지 마을의 돌고래 사냥이다. 이들의 방식은 그야말로 '피바다' 그 자체였다.

야생동물과 가축 외에 동물의 세번째 유형이 등장한다. 원래 야생동물이었고, 야생동물이어야만 하나, 인간의 손을 타 그 정체성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동물. 야생동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축은 더더욱 아닌, 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태도에 따라 그 미래가 결정될 동물들. 불안정한 지배가 낳은 '경계동물'들은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위태로운 선택의 순간을 맞고 있다. (p. 198)

어미를 잃거나 다친 아기곰들을 살펴주고 야생으로 보내는 일을 하느라 사비를 털어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패한 정권으로 생존의 위기에 몰린 나머지 사자의 영역에서 소를 키우느라 사자를 죽여야 하는 원주민이 있다. 지속적인 내전속에 마구잡이로 잡아먹혀져 세계에 단 두마리 남은 북부흰코뿔소 는 곧 멸종 선언을 받게 될 예정인가 하면 사자나 기린 코뿔소 처럼 책속에 흔히 등장하는 동물들이 멸종위기종이라는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기도 하다.

인간이 압도적 지배자가 된 20세기 100년 동안 척추동물이 멸종한 속도는 인간 출현 이전의 100년보다 최고 114배나 빨랐다. 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의 포유류 멸종 속도는 과거 같은 시기보다 55배, 조류는 34배, 파충류는 24배, 양서류는 100배, 어류는 56배나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속도가 빨라진 양서류의 경우,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100동안 1만 개의 종 가운데 2개만 멸종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는 1만 개 가운데 200여 개의 종이 멸종하고 말았다. 이는 6,600만 년전 공룡이 멸종한 '다섯 번째 대멸종'이후 가장 빠른 속도다.

문제는 이 지나치게 빠른 멸종의 원인이 모두 '인간'이라는 점이다. (p. 266,267)

숫자로 다가오는 멸종의 속도는 압도적이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00년 안에 생물종의 50% 이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한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길어야 1만년안에 지금의 반 이상이 멸종할 것이라고... 동물들의 멸종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이 말은 어떤가?

"다섯 번의 대멸종마다 볼 때 당시의 최상위 포식자는 반드시 멸종했는데, 지금의 최상위 포식자는 인류다. 이것이 규칙이라면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 앞당긴 멸종 위기에서 공룡과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까?" (p. 269)

인간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인간만 남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질 지모 모른다. 자연에서 멀리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인간사회에서만 살고 있지 자연이 동물이 무슨 관계가 있나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연으로부터 왔고 지금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아낸 것보다 알아내지 못한것이 훨씬 많다. 지금 질병의 시대또한 자연을 함부로 다룬 댓가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계속 현실을 직면하지 않을 것인가?

피와 눈물, 삶과 죽음, 분노와 안도감이 뒤엉킨 먼 길을 돌아와 마침내 찾아낸 해답은 '그럼에도 인간' 이었다.

처음에는 '휴머니멀'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위한 특별한 묘책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묘책 같은 건 없었다. 이제껏 제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인간의 탐욕을 지금부터라도 정면으로 응시하고, 멈춰내겠다는 결심. 그것이 이 기울어진 공존의 균형추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유일한 희망이다. (p. 283)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물보호 활동가가 될 수는 없고, 될 필요도 없다. 환경운동에 투신하거나 채식주의자로 사는 것이 유일한 해법도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일상 속에서 생태계를 위한 작은 실천을 행하는 것. 이 각성이 주는 자괴감과 위기감에 비추어, 해야 할 일에 나서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멀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존을 향한 작지만 담대한 첫걸음이 아닐까. (p. 284)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이었다. 인간이 벌여놓은 일 인간이 수습하는 수밖에 없는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진정한 공존을 고민해야 할 주체는 결국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지금 멸종의 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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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랜드 - 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
올리버 벌로 지음, 박중서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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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

불법 금융과 돈세탁의 전초기지는 어디인가

스위스 은행, 파나마의 유령회사, 저지섬의 신탁, 리히텐슈타인의 재단....

21세기 금융공학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나라

21세기 해적질에 관한 통렬한 고발장

 

 

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이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독재자의 약탈을 묵인하는 핵심 기지는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불법 금융과 돈세탁의 전초기지는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금융공학이라는 고급진 허울뒤에 숨은 진짜 목적은 21세기형 해적질이었다. 그 해적들의 보물섬은? 머니랜드다.

'머니랜드' 는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비밀국가 이름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머니랜드의 실체를 진짜 이름을 지도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이 무너졌을때, 어떤 역사가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겼다고 서방세계는 들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후의 동유럽의 정치상황은 전혀 예상밖으로 흘러갔다. 새롭게 출발하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생생한 기사를 쓰고자 모스크바로 이주했던 저자는 '이후 10여 년 동안 나는 자유와 우정에 관하여 글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전쟁과 학대에 관해서 보도하고, 편집증과 괴롭힘을 경험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없었다. 오히려 역사는 가속화되었다.' (p. 20)

부패정권이 속출했고 국민들의 세금은 엉뚱한 곳에 쓰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저자가 우크라이나 의 현실을 알려주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에서 어떻게 삶이 지속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무법지대였다.

국가는 이들 주위에서 증발한 상태였다. 부패가 어찌나 속을 갉아먹었던지, 불법적인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 말고는 국가 자체가 존재하기를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국민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국가를 과연 누가 지키고 싶어 하겠는가? 부패가 온 나라에서 그 합법성을 앗아 가 버린 셈이었다. 이런 종류의 분노가 우크라이나를 잠식했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들을 잠식해 버렸다.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중동의 국민들이 테러리스트 집단에 가입하게 된 동기도 역시나 이런 분노였다. (p. 29)

길가다 교통신호를 어기면 경찰에게 돈을 주면 되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진료비 외에 의사에게 돈을 따로 주어야 했다. 사업을 하려면 공무원에게 일단 뇌물을 주어야 했다. 공무원은 세금을 착복하느라 혈안이 되었고 병원에는 약이 떨어졌으며 사방이 무법천지가 되는 동안 뭐라도 하려면 일단 돈부터 상납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나라의 대통령은 황금궁전을 지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궁전이 지어진 곳은 다른나라의 소유였다. 혁명세력에게 쫒겨난 대통령은 국외에 쌓아두었던 돈으로 호의호식하느라 제 나라로 어차피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역외 책략을 이용하는 부유한 사람들의 능력이 우리에게는 이용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그토록 훨씬 덜 평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일부라는 사실쯤이야 굳이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p. 32)

부패는 반서구 적국들에게 전력 증강 요소이지만, 정작 서구는 계속해서 적들의 더러운 돈을 수십억 달러씩 자기네 경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돈이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빨아들이면, 결국 땅이 무너진다. (p. 34)

돈의 흐름은 국경을 넘나들지만, 법은 그러지 못한다. 부자는 전 세계를 누비며 살아가는 반면, 나머지 우리는 국경을 갖고 있다. (p. 36)

돈 버는 수단이 다양해지는 만큼 돈을 숨기는 방법도 다양해진 것 같다. 국내에서 재산을 지킬 수 없다면 국외로 내보내 쌓아둔다. 나라마다 다른 법은 그러한 재산들을 보호될 수 있는 틈이 있었고 부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나라는 더 가난해지고 부자나라는 더 부자가 되고 있었다. 내돈은 내돈 니돈도 내돈 뭐 그런식으로.

그 당시 영국의 라디오 청취자들은 들을 만한 새로운 방송국 몇 개가 더 생겼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법적으로 오로지 BBC만 라디오로 방송이 가능했기에, 새로운 팝 아티스트들을 청취자와 공유할 시기에는 후진적일 수밖에 없었다. 십 대 청취자는 신나고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어 했으며, BBC가 이들의 곡을 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진취적인 선주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보았다. 이들은 자기네 선박에 라디오 장비를 실어서 영국의 영해 바깥에 정박시킨 다음, 영국을 향해 팝 음악을 방송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라디오 운영자를 해적이라고 불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송국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바로 '역외' 라는 이름이었는데, 비록 재미는 덜하지만 언어상으로는 더 정확했다. (p. 61)

1950년대 아직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웠지만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문화또한 그랬다. 섬나라 영국에서는 바다라는 무한한 공간을 이용하기가 용이했고 '해적방송'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이 해적방송의 아이디어는 돈의 세계에도 엄청난 힌트가 되었다. 시작은 '무기명 채권' 즉 역외채권이었다. 이 기발한 채권은 조세회피와 수익창출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최초의 고객들은 나치를 피해 스위스에 돈을 은닉했던, 그리고 마침내 그 돈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발견했던 유럽 유대인이었다. 문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텔아비르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꼈던 그 사생활 보장과 운반 가능성과 편의상에 급기야 안트베르펜의 치과의사, 런던의 내부 거래 은행가, 심지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치까지도 매력을 느꼈다는 점이다. 스위스에서는 합법적으로 대피한 돈이 야비한 조세 회피 자금과 뒤섞였고, 이는 또다시 사악하게 약탈한 돈과 뒤섞였다. 유로본드는 그 출처를 불문하고 숨겨야 하는 현금을 지닌 모두에게 편리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머니랜드의 마법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부자들이 열어 놓은 최초의 순간이라고 할 법하다. (p. 70)

스위스의 중립성은 여러면에서 안전함을 보장했다. 스위스은행은 그 안전함을 이유로 돈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쌓여가는 돈을 묵혀놓는다는 것을 아까워한 사람들이 유로본드 라는 역외채권을 만들어냈다. 안전했던 돈은 이제 돈이돈을 벌어들이게까지 되었다. 철저한 보안성은 돈의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고에 넣어주었었는데, 이제 그 돈들은 더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바르부르크의 투자은행에서 시작된 발전은 단순한 유로본드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기본 패턴은 복제 가능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고객들에게 돈을 벌어 줄 수 있는 사업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둘러보아 그 사업에 적절한 법령을 보유한 사법관할구역(예를 들어 리히텐슈타인, 쿡섬, 저지섬 등)을 찾아냈고, 그런 곳들을 명목상의 기지로 사용했다. 딱 어울리는 법규를 가진 사법관할구역을 찾아내지 못하면, 자신들에게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법규를 바꿀 때까지 위협하거나 아첨했다. (p. 74)

돈이 돈을 버는 동안 나라의 법규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국내법에 제한이 걸릴 것 같으면 다른나라의 법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치권을 가졌으나 작은 나라들이 그 전초기지가 되었다. 왠만큼 큰 세계지도가 아니면 어디있는지도 몰랐던 그런 나라들은 법적으로 존재하나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런 가상의 주소지를 기꺼이 제공했다. 그 댓가로 그 작은 영토를 유지관리할 수 있는 나라의 수입이 창출되었다.

진정한 혁명은 법치가 없는 국가, 또는 서양 같은 튼튼한 정치 제도가 없는 국가에서 이런 책략들이 차용되면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러니까 브레턴우즈 체재에서 자본이 갇혀 있었던 시절, 머니랜드의 탄생은 이미 과거 여러 세기 동안 대결을 벌여 왔던 과세 당국 대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결과였다. 부유한 사람들의 돈을 통제하기 위한 이 장기간의 전쟁은 포식자와 멋잇감 사이에서 진화론적 군비 경쟁을 만들어 냈고, 양측은 속도와 교활하과 기민함에서 더 눈부신 개가를 올리기 위해 번갈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유령회사, 신탁, 비밀 은행 계좌, 무기명 도구 기타 등등.. 미국 재부부조차도 이런 종류의 저항에 맞서기 위해 분투하는실정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곳에서는 자기네가 지금 뭐에 맞서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변호사들과 회계사들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구소련의 생태계에 이 포식자들의 도구를 풀어 놓게 되자, 그것이야말로 완벽히 잘못된 만남이 되고 말았다. (p. 109)

나쁜일은 빨리 배운다고, 차근차근 발전을 거듭하며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갑작스런 체제변화로 한꺼번에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간 국가들에서의 혼란은 표면적인 것보다 그 아래 숨겨진 부분들이 더 급성장을 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 미끼를 꿀꺽 독식했다.

비닐봉지를 더 많이 겹쳐서 개똥을 담을수록, 외부자들은 그 내부에 뭐가 있는지를 깨닫기가 더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봉지를 유명 귀금속 업체 티파니엔드컴퍼니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에 넣어 두면,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p. 134)

유령회사는 검은 돈을 싸고싸고 또 싸는 검은 봉지가 되어 점점 더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발전했다. 이제 페이퍼컴퍼니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회사를만드는 회사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곳을 살펴보든지 간에 연구자들은 부패와 빈곤의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부패의 수준이 더 클수록 엘리트는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이는 불평등을 초래하는 동시에 사회를 한데 엮어 주는 유대를 약화시킨다. 경제학자의 건조한 언어로 말하자면, 학교와 보건과 도로와 안전에 투자되는 돈은, 역외로 가져가서 타조 가죽 신발을 사는 데 사용하는 돈보다 더 높은 승수효과를 지닌다.(즉 그렇게 돈을 쓸 때마다 경제에 되돌아오는 것이 더 많다) 더 잘 통치되는 국가는 더 높은 생활 수준, 더 나은 건강, 더 긴 기대 수명, 향상된 교육 결과, 더 잘 작동하는 경제를 보유한다. (p. 184)

부패의 역학에 우리가 적절하게 관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누군가가 정직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지금 얼마나 드문 일인지, 즉 역사적 관점에서 얼마나 독특한지를 서구 사람들이 종종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정치사상 상당수는 '선진'국가의 자유민주주의를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말로 내다보았기에 다른 사회들도 '개발도상'에 있다고 지칭했다. 마치 그 사회들이 종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종착역으로 인도될 선로 위의 열차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p. 187)

동유럽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들 그리고 작은 섬나라 여러 곳들의 실제 사례를 읽을 때마다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떻게 이럴수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만 볼 수 있을 뿐 바깥 나라들을 너무 몰랐다. 우리나라 정도면 정말 깨끗한 거였다. 아주 살만한 국가였다. 무법 천지 국가들의 현실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검은 돈들은 끊임없아 거대해져갔고 역외채권이나 유령회사를 넘어선 또다른 방법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작은 나라의 여권을 돈으로 사고 심지어 외교관으로 임명받아 외교관면책특권을 누리려는 시도까지 가능해졌다.

그러나 점점 더 발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머니랜드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결국 나라 안의 법들이었다. 일례로 영국의 엄격한 명예훼손법은 저술가와 출판인에게 검은돈을 추적과정을 글로 쓰고 편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자국내 돈이 바깥에 쌓아져 가는 것을 더이상 두고 볼수 없게된 것을 깨달은 후 역외로 빠져나간 돈을 회수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산 회수는 어려운 일이다. 머니랜드는 그 부를 손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돈은 차마 셀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쌓이며 계속해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국경을 넘나든다. 그걸 감시해야 할 사람들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백만 걸은 더 앞서 나간다. 정의는 계속해서 국경을 넘지 못하며,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가는 사람은 단지 도둑만이 아니다. (p. 280)

돈을 갖고 달아난 사람이 도둑이라면 도둑만 머니랜드에 가던 시절도 옛말이 되었다. 이제 그 도둑을 비호해주는 세력이 그 도둑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권력이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적떼가 출몰하는 나라들이 있었다. 도둑을 쫒는 사람들을 해치우는 암살자들도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첩보영화를 따로 안 봐도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거대하게 쌓은 돈을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일까? 온갖 호화로운 사치품 소비는 개인적인 것들로 그렇다치자. 문제는 고급 부동산 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되고 멋진 풍광과 편리하고 안전한 고급 주택들.. 그 주택들의 실소유주가 과연 자국민이 많을까? 그렇게 집도 땅도 외국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까? 그런 집을 사고 그런 사치품들을 걸친 그들만의 파티를 우리는 이대로 둘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일단 스위스은행으로의 검은돈 유입을 차단하기로 나라들이 움직였다. 자산의 정보를 공유하기로 규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 규제에도 헛점이 있었다.

무려 100개국 이상의 금융기관들이 미국 시민이나 거주민 소유의 자산에 대한 정보를 미국과 반드시 공유해야 하지만,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다른 나라에 아무것도 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세계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해서 완전한 정보를 얻을 것이지만, 다른 국가들의 금융기관들은 미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완전히 깜깜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런던의 시티에서 유로본드를 탄생시켰던 작은 구멍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 보고 나서, 세계의 새로운 금융 구조물의 심장부에서 이와 같은 틈새를 통해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p. 355)

대표적인 곳이 '세계 최대의 소도시'로 일컬어지는 네바다주 북부 와쇼티가운티의 리노 라고 한다. 미국의 이 '최!대!의 소!도시'는 스위스은행보다 더 안전한 조세피난처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 합법적인 방법이 바로 '신탁' 이었다.

이 신탁은 외국 법률상으로는 미국 국적이었고, 미국 법률상으로는 외국 국적이었다. 즉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p. 368)

오로지 한 가지 확실성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머니랜드가 계속해서 진화하리라는, 그 보호는 계속해서 강화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곳의 상상력 뛰어나고 충분한 동기를 갖춘 방어자들은 자기네를 가장 환영하는 그 어떤 사법관할구역에서도 (그곳이 네비스이건, 영국이건, 믹ㄱ이건, 아니면 완전히 다른 어딘가이건 간에) 그 시민들이 돈을 숨기고 배가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 발상과 법치를 고수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걱정스렁누 생각이 아닐 수 없다. (p. 376)

뛰는놈 위에 나는놈 있다고, 머니랜드는 이제 지도상의 작고 힘없는 나라들에 세워두었던 기지들을 금융선진국인 영국과 미국내에 합법적으로 세우는 것을 넘어 무형의 공간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해적질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우리는 점점 눈치조차 챌 수 없게 소외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이민자에 대항하여 국경을 강화하기만 하면 우리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또는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운동 주도자인 나이젤 파라지 같은 사람들의 말을 믿는 시민이 너무 많다. 자유 질서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가난한 이민자들이 아니라 무채임한 돈이다. 역외 강도들은 세계를 약탈하고 있으며, 이런 약탈은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불평등을 촉진하고, 우리가 차마 따라갈 수도 없는 머니랜드로 점점 더 커다란 양의 부를 빨아들인다. 이데 대한 해결책은 도개교를 들어올리지 않는 것, 즉 자국의 돈이 안착한 땅에서 자기도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무너지는 자국을 떠나 도망쳐온 외국인을 악마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애초에 피난민 위기를 촉진하는 불안정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다. (p. 395)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시간도 걸리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늘 최약체에게로 시선을 돌리게끔 하는 희생양의식에 저절로 빠져들게 된다. 정작 원인제공자는 그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인데 우리는 쉽게 그 손가락질이 향한 그 방향으로 눈길을 따라가곤 한다. 그동안 그 손가락질의 주체는 머니랜드의 돈방석위에 돈방석을 또 쌓고 있는 중인데 말이다. 그 돈방석은 눈치도 못채고 희생양의 구멍난 돗자리를 뺏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둑을 감옥에 넣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계의 훔친 부를 우리의 도시들이 세탁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인내를 요구하고, 힘겹고, 전문적이고, 빛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제휴를 구축할 준비가 딘 정치인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우리의 경제와 우리의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세계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p. 396)

그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독재가 횡행하고 무법천지가 당연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 희망이 될 수도 있을까? 그나마 우리가 알려고만 들면 이런 책도 아무 제한 없이 읽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을까? 편한 길은 없다. 쉬운 방법도 없다. 하지만 일단 알기는 해야 한다. 모든 행동은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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