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재미있는 수학이라니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매혹적인 숫자 이야기
리여우화 지음, 김지혜 옮김, 강미경 감수 / 미디어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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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마니아가 풀어놓은 흥미진진한 수학적 사고

수론, 도형, 미적분, 확률, 도박이론, 물리학에 응용된 수학,

수학사의 에피소드까지 삽화를 곁들여 흥미롭게 들려주는 수학 이야기

 

 

'수학? 난 아무래도 재미가 없어 ㅜㅜ' 하는 사람에게 '수학! 이렇게 재미있는 걸!! 겁먹지말고 나처럼 즐겨봐!' 라고 저자는 프롤로그부터 신나서 독자를 끌어당긴다. 그야말로 수학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넘쳐나는 수학 마니아라고 할만 하다. 갑자기 라디오광고에서 자주 들었던 문구가 생각난다. '좋은데.. 진짜 좋은데..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였던가 ㅎㅎ 저자는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학이 주는 즐거움을, 수포자가 넘쳐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수학이 재미있음을 진~짜 재미있음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매혹적인 숫자 이야기' 라는 부제는 이 책을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수학은 논리와 증명이 완벽하게 성립된 기초이론들이다. 따라서 아직 가설 상태이거나 증명중이거나 하는 수학이야기들은 다룰 수가 없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기초수학을 가르치는 것이지 학생들 모두를 수학자로 키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수학 이야기들은 증명되지 않은 이론들이다. 다시말해 현재진행형 이란 의미다. 그래서 매혹적일 수 있다. 문제는 제시되었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든 그 문제를 풀어볼 도전의식을 부추길 수 있으므로.

수학자들도 풀지 못한 문제들을 내가 어떻게 푼단 말인가 하고 미리 좌절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답을 구해보라고 어렵기 그지없는 난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발한 문제가 있는데 이렇게 과정들이 진행중이다 라고 설명해주면서 수학적 호기심을 가져보는 것 딱 그정도만이라도 공감하기를 바라고 있다. 무엇이든 일단 관심을 가져야 재미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질문 신선하지 않아? 라며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수학적 호기심은 멀고먼 저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면 수학적 관심은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인지도 ㅎㅎ

메르센 소수는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마랭 메르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그는 메르센 소수를 만든 사람도 아니고 더군다나 메르센 소수를 가장 많이 발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왜 메르센 소수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런 종료의 소수는 고대 그리스인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되었는데 메르센이 이 소수를 처음 체계적으로 연구했고 작은 수부터 시작하여 257까지의 메르센 소수를 구했기 때문이다. (p. 18)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연구중인 숫자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수학자들의 끈기에 박수!!!

이것은 보석을 캐러 보석광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어떤 지점에 보석이 있다는 단서를 알고 있다. 게다가 당신은 많은 지점에 보석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당신은 쉬지 않고 아래쪽으로 파내려간다. 하지만 반나절을 파도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수학자는 메르센 소수를 '수학의 보석'이라고 부른다. 수학자에게 새로운 메르센 소수를 하나 찾는 것은 예기치 않게 보석을 캐는 것과 같다. 우리가 메르센 소수를 보석이라고 하는 것은 희귀할 뿐만 아니라 주목할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메르센 소수는 완전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p. 23)

메르센 소수는 정말 탄광에서 보석을 캐듯이 긴 시간을 거쳐 지금도 계산되어지고 있다. 현재 밝혀진 메르센 소수는 1천만 자리를 넘어서서 계산량이 방대하다 보니 메르센 소수를 검증하는데 평균적으로 1년에서 3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나마 컴퓨터의 계산능력이 발달했기에 이정도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발견한 하나의 숫자! 정말 보석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수학자들을 고뇌에 빠트린 난제들을 읽다보면 때론 이것이 이렇게 어려운 수학적 질문이 될수 있단 말인가? 하고 신기해질때도 있다.

케이크 하나를 친구와 나눠 먹어야 할때 싸우지 않고 나눠 먹는 방법은? 협소한 통로에 있는 소파를 옮기려는데 코너에 막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경우 이 통로의 코너를 돌아 이동시킬 수 있는 소파의 단면적 최댓값은? 계속 늘어나는 고무 고리위에 개미가 기어가고 있다고 할때 이 개미는 과연 처음 위치로 돌아올 수 있을까?

별것 아닌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뜬금없는 이런 식의 질문들은 엄청난 수학적 추론과정을 도모하게 된다. 엄청나다고 할 밖에는;;;

일반적으로 평면상 볼록 n각형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점의 개수를 묻는 문제를 '해피엔딩문제'라고 부른다. (p. 65)

세케레시와 클라인은 함께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사랑에 빠졌고 결국 화촉을 밝히게 된다. 이후 짓궂은 에어디쉬는 이 문제를 차라리 '해피엔딩문제'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두 수학자 모두 장수했는데 90년 이상을 살았다. 2005년 두 사람은 한 시간 차이로 잇달아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은 절대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불릴 만하다. (p. 66)

어디에서는 로맨스는 가능한 것인가 ㅎㅎ 여하튼 수학문제를 '해피엔딩'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들을 존경한다. ㅎ

어려운 수학문제들의 설명을 읽다가 만나는 이런 수학사의 뒷얘기는 음식에 감칠맛을 더하는 조미료처럼 가끔은 책장을 쉽게 넘어가게 해준다.

2017년 한국계 미국인 수학자 허준이박사가 콜라츠 추측을 증명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당시에 검증 중이었는데 그 결론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p. 83)

이 증명을 검증받았는지 어쨌는지 결과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수학사에 등장하는 난제들에 도전하는 여러 수학자들의 이름중에 한국인의 이름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이라 할지라도 반가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다. 수학상의 최고봉이라 하는 필즈상을 탄 수학자중에도 한국인이 아직 없다. 순수학문이 너무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응용학문들이 발달하려면 기초학문이 튼튼해야 하는데...

1975년 미국의 저명한 과학저술가 마틴가드너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칼럼에 이 오각형 테셀레이션 문제를 기고하여 이 문제는 유명세를 타게 됐다. 놀라운 사건은 마조리 라이스 라는 50대 가정주부가 이 문제를 해결해다는 것이다. 그녀는 고등학생 정도의 수학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유가 생길 때마다 종이에 이리저리 그림을 그려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만의 표기법으로 변과 각의 관계를 표시했다. 1977년에 이르러 그녀는 44ㅐ의 새로운 오각형 테셀레이션 모형을 발견했다. 또한 60개가 넘는 서로 다른 기타 다각형과 비단순 테셀레이션 모형도 발견하게 되었다. (p. 98~99)

테셀레이션 모형이라는 것은 쉽게 표현하자면 일정한 규칙적 모양이 반복되는 타일 같은 것이다. 수학적 계산과 공식을 이용해 푸는 방법도 있지만, 수학과 전혀 상관 없이 살아온 (그러나 수학적 호기심은 늘 가지고 있었을 법한) 50대 가정주부가 새로운 해답을 찾아냈다는 것은 굉장히 신선한 사건이다. 자신이 찾아낸 새로운 테셀레이션 모형을 기존 수학자들처럼 변과 각과 그것들의 상관관계 수식으로 풀지 않으면 뭐 어떤가? 수학은 은근 직관과 예감도 통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수학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또 다른 테셀레이션 문제인 '아인슈티인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놀라지 마라. 이 문제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독일어로 '하나의 돌'을 의미할 뿐이다. 이 문제는 '비주기적 테셀레이션'이라고도 부른다. (p. 102)

독일어로 'ein' 은 아인 이라고 읽고 1 이라는 뜻이고, 'stein' 은 슈타인 이라고 읽고 돌 이라는 뜻이니 'einstein' 문제라는 것은 아인슈타인 으로 읽고 독일어로 '하나의 돌'문제라는 뜻인데... 세계적 천재학자의 이름이 이런 연결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읽으니 웃음이 터졌다. 어쩌나... 저자가 알려준 테셀레이션은 기억이 안나도 이제 아인슈타인 이름만 들으면 돌하나 가 연상될것 같으니. ㅋ

그레이엄 수는 64층 화살표 표기법으로 나타냈지만 TREE(3)도 그렇게 표기하려 한다면 필요한 층수는 어마어마하게 클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사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떤 표현, 어떤 표기법을 가져다 쓴들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나는 TREE(3) 이 수를 굉장히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정의가 이렇게 간단하고 TREE(1), TREE(2)는 단순한데 비해 TREE(3)은 우주대폭발처럼 돌변한 값을 보여주니 사람을 완전히 놀라게 하는 수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러브레터에 'TREE(3)만큼 너를 사랑해!' 등으로 쓸 것을 추천하고 싶다. (p. 118, 119)

읽으면서 좀 어렵다 싶으면 이해가 안되는데로 슬렁스렁 넘기다가 꼭 이런 부분은 눈에 콕 들어온다. ㅎ 수학을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게 된다면 저자의 조언을 실행해보는 것도 ㅎㅎ

'임의의 큰' 과 '충분히 큰'의 개념은 간단하게 들리지만, 그 역할을 얕보면 안 된다. 이런 표현은 수학에서 매우 중요한데 극한개념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한의 개념은 미적분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된다. 관련 있는 명제를 더 보겠다.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골드바흐의 추측'이다. (p. 130)

기초학문이란 기초용어부터 생각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서도 그 의미와 해석의 범위를 파고든다. '무한' 에 이르기 전에 엄청나게 큰 숫자를 이해하는 여러 명제들이 등장했었다. '임의의 큰' 과 '충분히 큰' 을 문자로 읽을 때와 수학기호로 표현하고 추론하는 것은 굉장히 차원이 달랐다. 그저 엄청나다고 할 밖에는;;;

저자가 알려주는 수학이야기들에서는 수학사적 논제들도 많지만 때로는 게임에서 때로는 자연에서 때로는 물리학에서 이야깃거리들을 찾아낸다. 저자가 중국인이다 보니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60갑자와 오행이 예로 사용되기도 한다. ㅎ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다루는 수학논제들은 이미 밝혀진 과거가 아닌 앞으로 무궁무진해질 풀리지 않은 문제들을 많이 제시한다. 이것은 아마도 수학적 호기심을 가진 이들이 이 책을 읽고나서 도전정신을 가져봤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나오는 수학적 기호들과 관련 식들을 완전히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 책은 어렵다. 하지만 그런 전문적인 내용들은 그렇구나~하며 넘기면서 저자의 수학에 대한 열정과 응원을 공감하고 난제들에 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으면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수학을 좋아하는 편이라 수학을 쉽게 알려주는 책은 늘 반갑고 읽고나서도 또다른 더 쉬운 수학대중서를 찾곤 한다. 앞으로도 이 책과 같은 도전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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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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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 라는 단어를 보면 왠지 향수어린 기분이 든다. 자판이 익숙해진 시대에 타자기를 쳐본 경험 아니 타자기를 본적이라도 있는 사람이 드물 것 같다. 어렸을때 타자기를 몇번 쳐볼 기회가 있었다. 그야말로 독수리타법으로 한글자씩 톡톡 누를 때마다 종이에 바로 활자가 찍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손가락에 느껴지는 타격감과 동시에 입체감이 느껴지는 소리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타자기를 사용하는 인물이 나오면 왠지 더 멋있어 보이곤 했다.

기린은 또 어떤 연관일까... 싶었는데 작가가 말한 기린은 내가 아는 목이 긴 그 기린이 아니었다. 상상속의 동물 기린이라... 검색해봤다. 동양신화 속 상상의 동물이라 하면 청룡, 봉황, 현무, 백호 같은 사신도에 그려진 동물들만 알았는데, 백호 자리엔 사실 기린이 더 어울려 보였다. 여러 동물의 모습에서 조금씩 따온 모습의 기린은 비슷하게 상상되어진 봉황, 현무, 청룡 처럼 신화적 다른 이름이었으면 목이 긴 기린과 헤깔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신비로운 동물이었다.

'기린의 타자기'는 이렇게 과거의 타자기와 판타지적 기린을 묶어 놓음으로써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작품을 읽다보면 스릴러인가? 싶을 정도로 쫄깃한 서사가 등장하고, 액자소설 형식이라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등장하기 때문에 소설속 현실과 소설속 가상의 세계를 왔다갔다하다보면 현실과 가상이 자꾸 중첩되지만 결말에 이를 때쯤이면 그 모든 의아함들이 저절로 해소되는 잘 짜여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성장소설이었다.

"그럼 네 오빠 다시 길 거리로 나 앉아도 돼? 오빠랑 애들도? 엄마는? 엄마 한 달에 당뇨, 관절염 치료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아버지 암 치료는, 그 비싼 약값은? 네 남편이 병원비 내주고, 약값 대주고 언니 오빠 사업 다 도와주고 이런 큰 집에서 살게 해줬으니까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야" (p. 20)

서영이 시댁식구들에게 맞아죽을 뻔 하던 날 겨우 도망쳐 갔던 친정집에서 서영은 시댁으로 되돌려보내졌다. 그렇게 친정집의 제물이 되어 시댁에서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던 나날 중에 태어난 남매 지하,지민 에게 엄마노릇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여느 날 처럼 남편이 닥치는 데로 집어던지며 폭력을 행사하던 중 서영의 결혼전 아끼던 타자기를 던지려 했을때 지하가 막아섰다. 대신 맞은 지하는 피를 흘리며 집에서 도망쳤다.

입주도우미가 몰래 전해준 물건은 소포였다. 수신인에 나서영이라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없었다. 소포 봉투를 찢자 책이 나왔다. 하얀 배경에 무엇인가로부터 달아나는 듯한 여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표지였다. 표지의 분위기와 제목을 보니 미스터리 소설 같았다. '조용한 세상'이라는 제목 옆에 적혀 있는 작가 이름을 보고 서영은 흠칫했다. 류지하, 작가의 이름이 딸의 이름과 같았다. (p. 35)

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채 살던 서영에게 6년만에 딸의 소식을 알게 해준 건 소설 한 권이었다.

타자기는 그때 당선을 축하한다며 친구 우탁이 사준 것이다. 우탁은 서영을 기린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기린이란 '재능이 남다른 사람'을 부를 때 붙이는 이름이며 상상 속의 동물이기도 하기에 우탁의 선물엔 '이 타자기로 네 상상력을 마구 쏟아내길 바란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우탁이 보는 앞에서 타자기 위에 네임펜으로 '기린의 타자기-우탁&서영'이라고 적어 넣었다. (p. 38)

소설 속에서 현실의 실명들과 마주치다 보니 소설의 허구성은 점점 사라지고 현실성이 극대화됐다. (p. 78)

자신의 꿈을 잊고 산지 오래였다. 기린의 타자기... 그 타자기가 소설의 제목이 되어 서영에게 왔고 그 소설의 작가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리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자신의 가족을 캐릭터로 활용하며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순간, 소설 속에 빠져든 서영은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소설로 읽으며 역으로 소설이 알려주는 자신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시 인식하게 되기 시작한다. 지하는 언제 어떻게 이렇게 어른이 된 것일까...

초기엔 사람들이 순간이동의 순간을 목격하더라도 대부분은 잘못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하와 이든은 경계심 없이 행동했다. 도시에는 사람의 눈보다 CCTV의 눈이 더 많이 잠복해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제 도시는 CCTV에 파파라치의 눈까지 더해졌다. (p. 51)

이든을 만난 3년 동안 두 사람은 지하의 순간이동 능력을 이용해 전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하루 만에 7개국을 구경한 날도 있었다. (p. 65)

'순간이동자'가 등장한다. 사진을 보고 그 사진 속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은 영화 '점퍼'를 생각나게 했다. 영화 속 점퍼 처럼 '순간이동자'가 된 지하는 사진을 벽 한가득 붙여놓고 그 사진속 장소로 순간이동한다. 그렇게 은행 금고도 다녀왔고 그 돈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FBI가 수사망을 좁혀오던 순간 한국으로 순간이동한다.

지하는 자신의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금니가 심하게 흔들렸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어금니가 쑥 빠졌다. 이든은 지하가 뺀 어금니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 이, 이거 혹시 순간이동 부작용 같은 거 아냐? 울프 앞다리랑 가슴 사이에 커다란 종양이 생겼어.크기를 보니 그동안 자라고 있었던 것 같아. (p. 155)

시간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p. 172)

순간이동을 거듭하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지하,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반려견 울프의 몸에도 병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정지하기 시작했다. 부작용인 것일까... 여러 시간대를 옮겨 다니며 치명적 부상을 입는 상황이 최근 봤던 드라마 '더 킹'을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이 소설엔 평행세계가 등장하지 않는다.

- 노트북에 쓰면 이상하게 쓴 만큼의 문장을 삭제하는 게 쉽지 않아.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펜으로 쓰면 버리긴 쉽지만 단단한 문장이 나오지 않아. 타자기를 글쇠를 칠 때마다 단어들이 뇌 속에 각인되는 느낌이거든. 초고는 글의 전체적인 플롯을 짜는 작업인데 타자기로 하면 집중이 잘 돼.

- 노트북 화면 속의 문장은 손에 쥘 수 없기 때문에 불안감이 바탕에 깔려 있지. 하지만 타자기는 활자를 찍는 순간, 종이에 남으니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덜하지. 그런 요소도 있지 않아?

- 맞아. 컴퓨터의 커서는 인내심이 없어.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1초마다 깜빡이면서 불안감을 줘. 그러니까 쫓기듯 생각을 쏟아내게 만들어. 그런데 타자기는 문장이 끝난 그곳에서 진득하게 기다려주잖아. 충분히 생각하고 다시 돌아와, 그때까지 기다라고 있을게, 라고 말해주지. (p. 165)

지하는 청각장애인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하다. 작가를 꿈꾸는 지하에게 남다른 촉각과 시각적 효과를 느끼게 해주는 타자기는 지하의 글을 현실화해주는 매개체였다. 지하가 타자기로 글을 쓰는 부분을 읽으면서 작가들마다 고유한 집필방식이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손으로 쓰는 것을 고수하는 작가도 있고 노트북으로 고쳐쓰는 작가도 있을 터인데 타자기로 쓰는 작가는 여전히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하는 심하게 불안하거나 화가 나거나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사라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예전처럼 가고 싶은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은 두번 다시 가질 수 없었다. 대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어딘가로 소환됐고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p. 189)

한국에서 꿈에 그리던 작가가 된 지하. 첫 소설을 발표하고 독자사인회를 개최하게 된 날 지하는 갑자기 사라진다. 한국에 온 이후 언제부터인가 순간이동능력은 조절되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돌아오고 나면 그동안의 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울프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니 대표가 보냈다던 책이 배달되어 있었다. [조용한 세상] 20권. 류지하의 첫 장편소설. 그는 자신이 일러스트 작업을 한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련하게 깨어나는 새벽의 도시를 배경으로 몸의 절반이 사라져가는 지하를 표현했다. (p. 190)

그 일을 당한 사람이 온라인 어딘가에 글을 올렸을 법한데도 조용하다. 마치 순간이동자 관련 글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삭제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을 향해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p. 192)

'아……아 그것이 다시 시작됐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만 알고 있는 비밀경고였다. 201이라는 모스부호가 적힌 카드가 도착하면 그녀에게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p. 228)

이든이 그려준 지하의 첫 소설 표지, 이 그림이 이 책의 표지에 그려진 그림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라져가는 지하... 그리고 사라져가는 지하의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은 시작도 끝도 불분명하고 서로 연관이 있어보이다가도 연관이 없어보이기도 하는데, 지하의 엄마 서영이 읽는 액자소설과 지하가 경험하는 액자세계는 이 책을 덮을때즈음 맞물리면서 현실세계에서 그 빈 구멍들이 이해되어지게 된다.

공포야말로 대부분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강력한 방법이다.

지하는 그 문장을 아주 오랫동안 곱씹었고 공포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공포영화들은 내용의 변주는 있어도 결론은 같았다. 주인공이 공포를 극복하는 순간, 갈등이 해소된다는 것. (p. 266)

그런가... 공포영화가.. 그런가...

나는 공포영화를 못 본다. 보고나면 너무 찜찜해서;;; 공포영화들 속에 주인공들이 공포를 극복한 경우가 있었던가... 그런 해피엔딩적 결말이라면 공포영화도 무서워 하지 않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에필로그가 남았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찌되었든 책이 끝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페이지가 줄어들 수록 마치 그녀의 생에 대해 조언하고, 힘을 내라고 응원해주는 가까운 사람이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필로그 까지 다 보고 책을 덮으면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다. 아직 에필로그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서영은 그나마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p. 275)

집 나간 딸이 소설을 통해 전해주는 메세지가 엄마 서영을 다시 살게 하고 있었다. 엄마보다 나은 딸인 셈이다. 그래서 엄마 서영은 이 소설을 덮고 나면 딸의 메세지를 다시 받지 못할 것 같아서 아직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다. 아껴두고 싶은 결말일 수도 있고 보고싶지 않은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현실 같은 소설일지라도 소설은 허구이기에 어쩌면 희망일수도 있겠다.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지하는 흠칫했다. 청회색의 큼직한 후드가 달린 롱카디건을 입고 검은색 반장갑을 낀 긴 머리의 여자가 피식 웃었다. 지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p. 283)

알고 있다. 카드에 적힌 오늘 날짜.

-서둘러야 할 거야. 돌아가서 엄마와 네 자신을 구해. (p. 285)

마무리되지 않는 지하의 세계들은 이런저런 암시를 주지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평행세계를 연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지하는 자신의 세계가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아직 그 세계를 깨뜨릴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때가 왔다.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을 '로그아웃' 할 시간이. 그리고 이때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짜 소설이 시작된다.

백일몽은 겉으로 보기엔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창조성과 학습의 숨겨진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두 개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일하는 뇌와 백일몽을 꾸는 뇌다. 두 가지는 동시에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네트워크를 작동시킬 땐 상상에 잠긴 네트워크를 차단한다. (p. 302)

책속에서도 언급되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나도 참 좋아하는 영화다. 열심히 살던 월터에게 갑자기 닥친 시련?!은 그에게 엄청난 여정을 하게 만들고 그 여정들은 상상과 겹쳐지면서 현실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현실은 월터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영화를 보고 난 나에게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소설은 세상에 나갔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소설 속 문장 하나라도 독자들의 마음에 씨앗으로 남길 바랐다. 6년 후 약속한 장소에 어쩌면 엄마는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6년 후 그날이 모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날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p. 397)

6년만에 만난 서영과 지하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6년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한다. 홀로서기는 두 사람에게 모두 필요한 과정이리라.

순간이동의 판타지에 호기심을 갖다가 대물림되는 가정폭력에 분기탱천하다가 살인사건이라는 스릴러에 몰입되다가 어느새 따듯해진 현실로 돌아와 마지막장을 덮게 되는 이 소설은,

여고생 지하가 사회초년생으로 자라는 과정을 함께 하며, 과거 속에 묻혀 살던 서영이 현실로 한발 내딛는 과정을 함께 하며, 두 사람 모두에게 저절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다 보면 마지막장을 덮게 되는 이 소설은,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듯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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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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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춘향전 하듯이 해적전 이라는 제목에서 옛이야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주인공이름으로 붙여진 이야기들에서 알수 있듯 길동이 춘향이 말고 이번 00전의 주인공은 신라공주 다.

영상매체의 영향 탓인지 신라공주 하면 선덕여왕이 그리고 미실 이 떠오르고, 여자 해적 이라고 하니 손예진 주연의 영화 해적이 떠오른다. ^^;;;

하지만 이 소설에는 신라 공주도 무예출중한 여자두목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 제목이 왜 이렇게 붙었나를 개인적으로 풀이해 보자면, 신라시대 공주 불렸던 해적 이야기 이라고나 할까 ㅎㅎ

신라 장보고가 망하고 15년이 지난 때(서기 861년을 말함), 한주지방(지금의 서울, 경기도, 충청북도 일부)에 장희(張嬉)가 살고 있었다. (p. 8)

소설의 첫문장 풍이 전래동화속 '옛날 옛적에' 하는 느낌의 이야기 시작을 알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장희가 등장한다.

가상의 인물 이름을 굳이 한자까지 써놓은 것은 이유가 있을터. 베풀 장張에 즐길 희嬉, 장희.

장희가 어떤 즐거운 이야깃거리들을 베풀어줄 지 개봉박두~!

어려서부터 장보고 패밀리에 섞여 자란 장희는 장보고가 망하자 한주로 넘어와 빈둥거리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밑천이 바닥나자 배가드나드는 강가 공터에 깃발하나를 꽂으며 자리를 잡는다. 깃발에 써놓은 글자는 행해만사行解萬事 즉, 무슨 문제든지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 뜻이다.

파리를 날리며 자리를 정리하려는 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장희를 붙잡는다. 이 남자의 이름은 한수생 漢水生 "낭자, 부디 나를 살려주시오" (이름을 보아하니 물에서 살아날 팔자다 ㅎㅎ)

"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오? 왜 우리가 한수생이 나눠주는 쌀을 걸인이 동냥 구하듯 받아야 한단 말이오? 시 한 구절을 모르고, 옛 성현의 지혜 한마디를 몰라서, 그저 재물만 탐하는 벌레 같은 자에게, 우리가 배고프다는 이유로 쌀을 달라고 빌며 구걸하듯 해야 한단 말이오?" (p. 23)

아전인수도 이런 아전인수가 없다. 한수생이 땀흘려 농사일 할때 여기저기 놀러다니던 마을 사람들이 겨울한파가 닥치고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한수생 집을 털러오면서 하는 말이다. 도둑이 아무리 입만 살아있다해도 이렇게 양심없이 입만 살수가 있나 싶은 지경이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한수생이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장희를 만난 것이다.

"이곳은 신라의 도성이 아니라, 백제의 도성이다"

"여기가 백제의 도성이란 말이오?"

"궁궐이 있고, 공주께서 머무르고 계시며, 장군들이 지키고 있다면 그곳이 바로 도성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그대들은 백제를 되찾겠다는 이름으로 모인 해적 떼라는 이야기요?" (p. 58, 60)

마을사람들에게 쫓기고 관군에게 쫓기고 대포고래와 비단잉어 해적단에게 쫓기고 이제 죽었구나 싶었을 때 붙잡힌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섬을 백제의 도성이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수생을 본 백제의 공주는 한수생을 바로 남편으로 삼고 종부리듯 부려먹는다. 백제가 멸망한지 이백년이 지났는데 부패한 신라를 뒤엎고자 모여든 백제 무리들이라... (장희는 대번에 해적떼라고 했지만 ㅎ)

장희와 한수생이 목숨을 걸고 조세를 걷어 싣고가는 신라관청의 배를 공격하여 재물을 탈취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수생에게 주어진 병사라고는 섬에 도착한지 며칠 안되는 졸개 3명 뿐이다. 그런데 이 3명이 한목소리로 자신들이 섬에 오게된 배경을 말하는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모두 잃고 막막해하고 있을 때, 상잠장군께서 보내신 백제의 검사가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저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신라 조정이 백제를 간교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 (p. 88)

노름을 해서 전재산을 탕진하고 빚까지 얻어 도망친 노름꾼, 향락에 취해 먹고놀고마시다 불을 내 이웃에 피해를 입혀 도망친 방탕꾼, 빚을 내어 물이 없는 땅을 샀다가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망친 나머지 빚 때문에 도망친 농사꾼 모두 자신들이 망한 이유는 신라때문이라며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또다짐을 한다. 하지만 전투에 나설 때가 되어 다시 3명을 불러모아 훈련은 잘 했는지 확인하니,

"신라 조정에서는 아직도 노름꾼을 붙잡아 가지 않았으므로 그놈들을 언제고 다시 만나면 저는 또 노름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저는 하루 종일 주사위 노름을 하며 이기는 법을 궁리하였습니다." (p. 96)

"신라 조정의 사악한 관리들에게 붙들려 갔을 때에 그 놈들이 내 다리를 묶었던 적이 있으니, 아직도 다리가 아파 오래 서 있으면 왼쪽부터 저려옵니다. 다리가 빨리 나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거나 누워 있기만 해야 했으므로" (p. 97)

"밤이 되면 신라 조정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잠을 이루지 못하니, 낮이 되면 졸음이 밀려와서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p. 97)

자기 잘못은 하나 없고 온통 남탓이란다. 앞서 나왔던 베짱이 이웃들보다 더한 놈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오는 배경인물들의 뻔뻔함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해적들의 오합지졸만 문제가 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신라 관군 대장을 만나 장희가 담판을 지으려 할때 한 첫 마디가 바로,

"썩은 세상이니 결국 썩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입니다. 여기 지금 장군을 돕고자, 이렇게 서해에서 가장 뛰어난 해적이 찾아왔습니다." (p. 124)

대놓고 해적이라 말하며 휘황찬란한 옷을 걸치고 노래하며 춤추며 배에 오른 장희를 본 관군의 대장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장희의 썩은 세상 논리는 장군의 귀를 홀린다. 바람앞의 등불같은 목숨이었다가 '공주 해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장희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군은 들으라. 백제 조정이 남긴 가장 큰 보물을 하늘의 도우심으로 드디어 우리가 손에 넣게 되었느니라. 이 기쁜 때에, 내가 직접 그 보물을 먼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공주는 기뻐하며 웃었다. 상잠이 따라 웃었다. 그런데 상잠의 웃는 모양이 이상하였다. (p. 172)

역사판타지의 모양새를 한 이 작품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서 도둑이 되어가는 민중과 대의명분에 목숨을 바치는 우직한 충신의 사라짐과 뺏고 빼앗기는 탐욕의 아귀다툼이 장희의 영민함과 한수생의 순박함과 어우러져 한바탕 시끄러운 해적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앞서 나온 소설Q시리즈 작품들 중 몇 작품을 읽고 이 작품까지 읽으며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작고 짧은 소설 한편한편이 도전하는 분야가 너무나 다양하게 제각각이라 그 실험정신에 박수쳐 주고 싶어진다.

가제본으로 받아 읽으며 궁금했던 작가가 검색을 해보니 SF판타지 작가라고 한다. 그런데 SF판타지가 아니라 역사판타지라니, 역시 소설Q시리즈 답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서 참신한 소재와 독특한 신예작가를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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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 우리가 지나쳐 온 무의식적 편견들
돌리 추그 지음, 홍선영 옮김 / 든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과연 나는 내 생각만큼 윤리적인가?

The Person You Mean To Be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 '선한 사람' 이 되고 싶어 한다. 일부러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주변에서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사람도 스스로는 아마 자신이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에게도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사람은 누구나 다면적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단 한 가지로 규정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편견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다. 교수이자 사회 심리학자로서 자료와 실험, 집필과 교육을 통해 당신과 나 같은 선한 사람의 무의식적 편견을 탐험한다. 더군다나 나는 여성이고 외국에서 태어난 유색 인종이다. 나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고자 모든 것을 뒤로한채 미국으로 떠나온 인도 이민자다. 힌드교 여성인 나는 갈색 피부에 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 남자와 결혼했다. 나는 미국을 열렬히 사랑하며 내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유색 인종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을 겪는다. (p. 25)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이 갖는 입장은 분화된다. '나'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자식이 되고 자라면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친구, 동료, 선후배, 스승, 직장상사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의 '나'는 늘 일관된 입장이 되기 어렵기 일쑤고 같은 모습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다양한 모습들이 상대방의 다양한 모습들과 어떤 식으로 엮이느냐에 따라 '나'는 더 다양하게 규정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형성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습득하게 되는 '편견'들은 '나'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는 기분이다.

어떤 이들은 2016년이 또 다른 1968년 같다고 얘기한다. 2016년 미국 대선으로 깊은 분열이 드러났고 또 발생했다. 이번 분열을 계기로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불평등과 부당함에 대한 논의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p. 30)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분열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제 평등이라는 가치를 그저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편견에 맞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p. 32)

이제 우리는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더 나은 직장과 더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실험을 시도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들은 해결하고 구하기보다 성장하고 고심한다. 나와 당신처럼, 이들은 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선한 사람들이다. (p. 38)

트럼프의 취임은 미국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긴 했나보다. 이후 영미권의 책들에서 사회서이건 소설이건 많은 책들이 트럼프의 대선이후 미국사회에서 표면에 드러난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동안 백인남성만의 지배를 인식하면서도 아닐꺼라고 나아졌을꺼라고 평등한 사회라고 자부해오던 미국에서는 트럼프 등장이후 아니었다고 분열의 골이 깊이 파이고 불평등이 너무나 오래되었으며 올바르지 못한 역사인식은 현대사회문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내재된 편견들이 수도없이 많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표면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더 나은 방향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퍼지고 있는 듯 하다. 이 책도 그러한 인식전환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책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이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길 기대한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지 못하면 위협을 느끼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렇게 자기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선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p. 52)

이 책은 인종과 민족, 젠더와 종교, 신체적·정신적 능력과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더 나은 직장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선한 사람이 되어야겠다'에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선한 듯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로 생각을 전환하면 기대하는 감정의 반응도 달라진다. 선한사람은 수치심을 잘 느낀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틀렸다' 고 생각한다. 이러한 강력한 자기 위협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닫은 채 회피하고 싶어진다. 반면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수치심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수치심을 느낄때 하게 되는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죄책감은 동기를 부여한다. 죄책감을 느끼면 우리는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대인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p. 71)

친구가 슬픈일을 당했다고 가정하자. '나'는 당연히 위로를 건낼 것이다. 하지만 친구가 '나'의 위로에 그닥 감흥을 보이지 않았을때 '나'의 마음이 상했다면 내가 건넨 그 위로는 과연 친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선한 행동을 한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가까운 지인이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대한 강력한 목소리를 낼때 그 의견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으면서도 선뜻 동조의 의견을 내기보다는 일단 거부하고 싶어진다면 그때의 내 마음 속에 자리한 '자기 위협'은 어떤 편견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었을까?

이 책은 다양한 편견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읽는이가 느낄 수 있는 수치심도 죄책감도 모두 다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그러한 심정적 부담감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장형'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이란 배우고 발전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그림 그리기에 대해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막대 인간 같은 그림밖에 못 그려도 노력과 시간을 쏟고 피드백을 잘 받으면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든 훌륭하든 아니면 어중간하든, 그 실력이 쭉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고정형 사고방식은 '양자 택일적' 사고방식이다. 발전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p. 80)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틀리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는 말은 실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러면 틀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뜻이다. 반대의견을 맞닥뜨릴 경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거나 아예 노력 자체를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성장형 상고방식을 고수할 경우, 좋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기꺼이 책임을지려 한다. 스스로 성장할 여지를 주면 책임감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진다. (p. 97, 98)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이견에도 자기위협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럴 수록 더 철저하게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기 쉽다. 편견에 갇히기 쉽다.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경청하려고 노력한다. 자신과 상대방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며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다. 편견이 있었다 할지라도 편견이었다고 인지한 순간 편견을 버리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던 '친구에게 건네는 위로' 에 있어서도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상대에게 자기 마음이라도 편하게끔 위로에 동의해달라거나 감정을 가라앉히라고 요구하며 또 다른 짐을 지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위로란 상대방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사고방식은 삶의 여러 면에서 다양하게 나뉘고 다양하게 영향을 준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느냐는 보다 바람직한 삶의 지향점을 세우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다. 시스템에 내재한 무의식적 편견에 맞서려면 성장형 사고방식을 쉼 없이 가동해야 함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교육자이자 저자 데비 어빙은 시스템 전반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집단적 차별을 흔히 아는 역풍과 순풍에 비유한다. 역풍은 크거나 작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시련으로, 모든 사람이 아닌 일부의 삶을 힘들게 한다. 역풍을 맞으며 달리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더욱 힘껏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 역풍은 느낄 수 있다. 반면 순풍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갈 더 큰 힘을 얻는다. 순풍은 중대한 역할을 하지만 인지하기 힘들거나 쉽게 잊힌다. 실제로 순풍을 맞으며 달리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게 될 텐데, 모두 자신의 기량으로 이룬 것인 마냥 득의양양해질 것이다. 순풍을 맞고 있는 사람은 반대로 역풍을 맞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ㅁ소할 것이다. 역풍을 맞는 사람은 순풍을 맞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들보다 더 열심히 달리겠지만 훨씬 더 느리고 게으른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다 지쳐서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은 자기 파괴적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말 것이다. 순풍과 역풍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역풍을 맞은 사람만 비난을 받기 쉽다.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역풍을 맞은 집단이 가장 부정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p. 143)

미국에서 동부에서 서부로, 또 서부에서 동부로 가는 비행기의 행시간엔 차이가 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뉴욕에서 LA로 가려면 LA에서 뉴욕으로 갈 때보다 40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서부로 갈 때는 역풍이, 동부로 갈 때는 순풍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역풍과 순풍의 비유는 미국내에서의 인종차별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백인은 순풍을 유색인종은 역풍을 맞으며 성장하고 사회생활을 한다. 이 바람을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능력주의로 설명하려 든다면 이 자체가 편견이 될 수 있음을, 단순한 '능력주의'는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개인화된 허구적 '능력주의'를 벗어나 시스템적 '공평'을 생각해야 할 때임을 깨닫게 된다.

대다수 교과서에서는 "노예제에 대해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상대로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사실상 아무 원인 없이 일어난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어째선지 미국에는 노예 400만 명만 있을 뿐 노예 소유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식의 설명이 교과서에 비일비재했다. 미국 역사에서 나쁜 일은 익명으로 일어났다" 널리 읽히는 역사교과서에는 대부분 제목에 '노래' 나 '모험' '승리' 등 희열을 암시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역풍 때문에 흑인 선조들이 뒤처진 것 뿐만 아니라 이런 역풍의 존재마저 후대에 설명되거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흑인과 백인의 격차가 능력주의에서 비롯된 듯이 보였다. (p. 165, 166)

미국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미국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역사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왜 미국을 사랑하는 행동에 포함될 수 없는가? 선택적 애국심은 순풍과 역풍을 무시하여 눈앞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해결책을 강구할 수 없게 만든다. (p. 166, 167)

주차벌금을 제때에 내지 않았을때 백인남성이라면 경고조치 되지만 흑인남성이라면 구속까지 될 수 있고, 경찰이 검문을 요청했을 때 백인남성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겠거니 여겨지지만 흑인남성은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겠거니 여겨져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면, 이것이 과연 편견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올바른 역사인식은 침략을 당한 기억이 있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지배를 했던 외국에서도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문제지만, 있던 역사를 드러내지 않고 없던듯이 여기는 것도 문제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순풍이 계속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뒤에 작용하는 시스템의 존재를 잊게 된다. 개인 안에서 편견을 찾으면서도 시스템 자체에 편견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시스템의 일부라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사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은 받아들이면서 역풍에 맞서 힘겹게 달리는 이들을 게으르고 무가치하며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비난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사회 과학자들은 결국 시스템 전반의 고단한 삶 효과에서 편견을 지우는 것이 개인의 무의식적 편견을 지우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적 관점은 시스템적 관점보다 덜 위협적이며, 우리는 이익(순풍)보다 불이익(역풍)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p. 169)

사회적 시스템이 정말 중요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개인적 편견은 이슈에 따라 바뀌고 다시 바뀔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순풍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개인적 역풍이 능력주의와 맞물려 인지되지 못할때라도 사회적 역풍은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게 되곤 한다.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개인들이 마주하는 시스템적 역풍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회제도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개인적 편견을 고치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 그렇게 사회 시스템을 공평하게 만들어가다 보면 개인들의 편견도 성장형 사고방식을 이용해 스스로 깨우쳐 나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교차적 정체성은 개인에게 독특한 형태의 순풍과 역풍을 야기한다. 누구나 다면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아마도 하나 이상의 일상적 특권을 누릴 것이다. 자신의 일상적 특권이 무엇인지 금방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일상적 특권이 '일상적인' 것은 이것 때문에 자신이 뛰어나다거나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 특권이 '특권'인 것은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 작용한 순풍이 무엇인지 찾고 싶다면 당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p. 215,216)

사람에겐 다양한 입장마다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하는 말과 배우자로서 상대방에게 하는 말과 상사로서 직장에서 하는 말들은 그때마다 다른 가치관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특권'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한번쯤 되새겨 보아야 한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조언을 건낸 것이 자식입장에서는 간섭이 되고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 제자 입장에서는 월권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입장이 상대방이 봤을때 우월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지 그래서 대화의 의미가 왜곡될 여지가 있지는 않은지 늘 생각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태도가 없을때 '일상'의 위치가 '특권'으로 비춰지고 편견으로 이해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지.

온정은 호의를 베푸는 자신이 구원자라 여기면서 어떤 대의를 앞세우고 조직 사회로 파고 들어가 구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구원자라는 덫에 빠진 사람은 온정에 중독된다. 이제 모든 일은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 된다. 자신이 구원자가 될 기회를 잃을까 봐 상대가 주도적으로 나서거나 능력을 키울 기회를 박탈하기도 한다. 그렇게 타인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p. 275)

성장형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편견을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쉽게 '구원자 유형' 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경험담을 통해 풀어내고 있었다. 상대방을 나보다 아래로 낮춰보는 상태에서 도와주는 것은 그러한 온정주의는 결국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라는 자기도취적 마음이랄까. 그또한 편견에 갇혀 있는 셈이다. 저 사람들은 나와 똑같지 않은 사람들이야 라는.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어요, 전 스스로 이렇게 말해요. 이제 성숙해져야지.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싶잖아 라고 말이죠. 선한 사람이 되는 건 힘들어요" (p. 410)

"가끔 강당하기 벅찰 때도 있어요. 해도 욕먹고 하지 않아도 욕먹죠. 점진적 변화와 총체적 변화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에요" (p. 411)

구축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힘들다. 힘들지 않다면, 적어도 가끔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믿는 사람일 것이다. 뜨거운 열이 되고 싶지 않다 해도 모든 노고를 오로지 뜨거운 열에 떠맡길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이해하고 지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면서 빛을 밝혀 각자의 몫을 해낼 수 있다. (p. 415)

올바른 가치를 믿는 사람이 모두 행동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 구축하는 사람들도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음이 빛나고 환한 빛이 모이다 보면 열기를 띠게 되면서 그 열기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차분히 이야기하고 있다. 크게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젠더차별에 대한 편견을 읽다보니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이 생각났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을 읽으면서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차별주의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같은 내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워 마음이 좀 힘들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은 좀더 부드럽게 조언해주고 있는 책이었다. 내가 모르던 내 안의 편견을 일깨움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지지의 방법도 생각하게 해주어서 고마웠다. 이런 좋은 생각들이 퍼지고 퍼지다 보면 사회도 점점더 공평해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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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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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스마트푼과 자동차 설계부터 의료, 노동, 도시계획까지

남자가 표준인 세상에서 여자는 어떻게 투명 인간이 되는가

출간 즉시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젠더 '팩트풀니스'

 

 

'빅데이터' 라는 말이 익숙해진, 그야말로 데이터의 시대다. 그런데 이 넘쳐나는 데이터들 중에 인간에 관한 데이터 중에 인간은 남성과 여성 둘로 나뉘지만 데이터는 남성데이터와 여성데이터가 반반씩 차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데이터의 모든 기준값은 남성이 디폴트 였다. 저자는 편향된 데이터를 각 분야별로 조목조목 분석하며 얼마없는 여성들에 관한 데이터를 끌어모아 이를 증명한다.

당신이 이 책에서 읽게 될 많은 주장과는 반대로, 문제는 여성의 신체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신체에 부여하는 사회적 의미 그리고 그 의미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p. 18)

이 책의 목표는 정신분석이 아니다. 남성 편향적 도구를 생산하는 사람이 은밀한 성차별주의자인지 아닌지에도 관심이 없다. 개인적인 동기는, 일정 수준을 넘지 않는 이상,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패턴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데이터의 경중을 고려했을 때 모든 젠더 데이터 공백이 그저 하나의 큰 우연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물음이다. (p. 19)

남자를 디폴트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 사회구조의 근간임을 저자는 다양한 문헌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생성에 대하여' 에서 '인간이라는 부류로부터의 첫 이탈은 남성이 아닌 여성 자손을 낳는 것이다' 라며 여성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이탈이라고 얘기했다. 10세기의 바이킹 해골이 명백하게 여성의 골반을 가졌음에도 무기일습과 제물로 바쳐진 말2마리가 함께 묻혀있는 전사의 무덤이었기에 (여성이 전사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100년 넘게 남자의 해골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2017년 DNA검사결과가 나오고서야 여성의 골반임을 인정받았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서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2012년 세계경제포럼의 분석에 딸면 성굴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 즉 거의 모든 발언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성 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p. 28)

당신은 언어에 밴 남성 편향이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증거를 보면 그렇지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사용자가 증가하는 언어, 전 세계 누리꾼의 90%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모티콘이다. 그런데 2016년까지 이모티콘의 세계는 이상하리만치 남성적이었다. (p. 29)

성굴절어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은 언어 자체에 깊이 배어 있다. 모든 명사가 남성 또는 여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어로 탁자는 여성명사이지만 자동차는 남성명사라고 한다. 변호사가 여자인 경우 변호사라는 단어 앞에 여성임을 뜻하는 접두어를 붙여야 한다. 이모티콘이 유행하기 시작했을때 다양한 이모티콘은 중성적 캐릭터로 표현한것 같지만 누가봐도 여성은 아니었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왜곡된 성 개념이 들어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성평등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까? 그나마 새로 만들어지는 이모티콘 같은 신언어들은 이제 남성과 여성을 모두 표현하는 중이라고 한다.

남성이 보편이라는 추정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직접적인 결과다. 백인이라는 점과 남자라는 점을 말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다른 정체성이 아예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 보편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원인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보이지 않고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 데이터가 우리 지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남성이 보편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소수자의 위치로 끌어내려진다. 특수한 정체성, 주관적 관점의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설계를 통해 여자들은 문화에서, 역사에서, 데이터에서 잊어도 되는 존재, 무시해도 되는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여자는 투명인간이 된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우리가 인류이 반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남성데이터를 바탕으로 세워진 세상에 사는 여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p. 50, 51)

여자가 사람취급 받게 된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법적 권리만을 따져봤을때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적으로도 동등해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그러니 사회가 발달을 거듭해올 수록 기준은 하나로 점점 더 굳건해져 왔다. 애초에 사람의 종류가 남/여 둘이므로 기준도 둘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늘 기준은 하나였다. 오래되어 온 그 하나의 기준을 문제시하는 질문들은 늘 위험하고 불순하고 예외적으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무차별적 단 하나의 기준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이상한게 아닐까?!

<일상>

눈이 많이 왔다고 하자. 제설작업을 어디부터 하는가? 도로부터 한다. 도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다. 자가용을 소유한 가구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들은 제설작업이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주변을 아이와 함께 수시로 걸어야 다녀야 하는 보행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보행자가 미끄럽거나 얼어붙은 도로에서 다칠 확률은 운전자의 3배라고 한다. 대중교통의 인프라에 있어서도 여성의 이용현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대중교통의 이용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월등히 많은데도. 하지만 <일상>에서 교통분야의 여성데이터 부재는 화장실 문제에 비하면 차라리 심각하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똑같은 면적을 부여하는 것이 공정해 보이고 지금껏 그렇게 설계되어왔다. 위생공사 기준에도 면적을 50대50으로 분할하라고 명시되어 왔다. 그러나 남자 화장실에 소변기와 칸막이가 같이 있다면 동시에 용변볼 수 있는 인원수는 여자화장실보다 남자화장실이 훨씬 많다. 아까까지 동등했던 면적이 갑자기 동등하지 않은 면적이 된다. 그러나 설사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동수의 칸막이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자의 화장실 사용 시간이 남자의2.3배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아이나 장애인, 노인을 동반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여성인구의 20~25%는 가임기 여성으로 언제든 생리 중일 수 있으며 그 경우 생리대를 갈아야 한다. 또 여자는 남자보다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신체적 차이를 알면서도 동일 면적 화장실이 공정하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은 형식적인 평등만 외치는 독불장군일 것이다.

지금부터는 겉으로는 성평등해보이지만 사실상 남성 편향적인 화장실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하겠다. (p. 76, 77)

인간의 기본적 생리욕구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환경이라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화장실 문제과 생명의 위협과 직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UN에 따르면 여자3명 중 1명은 안전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도의 경우 화장실이 집에 없는 경우가 많고 공중화장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여성전용도 없어서 성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폭행의 위험은 화장실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버스정류장, 기차역, 주차장, 공원등 여성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공공장소는 여성을 범죄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설계자가 젠더를 고려하지 않을 때 공공장소는 남성 디폴트가 된다. 그런데 현실은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은 매일같이 그 신체에 가해지는 성적 위협과 싸워야 한다. 세계 인구 전체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데 현재 그 돌봄 노동은 주로 여자들이 무급으로 한다. 이것들은 특수한 관심사가 아니라 보편적 관심사다. 그리고 공공장소가 정말로 모두를 위한 곳이 되려면 지금부터라도 세계 인구의 나머지 절반을 배려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껏 살펴본 것처럼 이는 정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간단한 경제문제이기도 하다.

여성 대상 범죄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줄이면 장기적으로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공공장소와 공공 활동 설계에 여성의 사회화를 반영하면 여성의 정신 건강 및 신체 건강이 보장되어 또 한번 장기적 비용이 절약된다. 한마디로, 공공장소를 설계할 때 세계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빼놓는 것은 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현재는 고의든 아니든 우선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불의이자 경제적 무지다. 여자들은 공공자원을 이용할 동등한 권리가 있다. 우리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여자를 제외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p. 97, 98)

비용도 절감되고 남성/여성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왜 안될까... 몰라서 일까 알아도싫어서 일까...

<남자다움의 사회학>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일상에서 여자답다 남자답다 라는 편견이 남성에게도 결코 이롭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일상에서 소외된 여성의 현실들을 읽다보니 여성의 입장을 좀 생각해달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남성이 남성의 입장을 생각할때에도 관점을 달리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보고 싶다. '남자다움'의 맨박스에 갇혀 사는 남자들의 삶도 행복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직장>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오랜 시간 일한다. 성별 구분 데이터가 모든 나라에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하루에 34분 더 일한다. 포르투갈에서는 90분, 중국에서는 44분, 남아공에서는 48분이다. 격차의 크기는 나라별로 다르지만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일관적이다. (p. 104)

여려 데이터를 근거로 하는 책이다 보니 세계적 데이터가 자주 인용되는데 세계속의 여러 나라들 중 '한국' 데이터도 여러번 언급되고 있었다. 좋은 의미건 안좋은 의미건 간에 세계적 경향을 살펴보는데 있어 소외된 나라보다는 그 데이터 속에 포함된 나라가 되어 있다는 것이 조금은 희망을 갖게 했다.

여자들이 저임금 노동을 선택하는 거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이 돌보지 않기' 와 '집안일 안 하기'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50년간의 미국 인구조사 세이터에 따르면 여자들이 한꺼번에 어떤 업종에 진출하면 그 업종은 임금이 내려가고, '위세'를 잃는다. 즉 여자가 저임금 노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 노동이 여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p. 109)

'돌봄노동' 과 '가사'는 전업주부이건 일하는여성이건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 전담되어진다. 경단녀는 어쩔수 없는 현실이고 일을 하고 싶다거나 경제적으로 일이 급한 경우이거나 어느 경우이든 간에 다시 일하려는 여성에게 제공되는 일자리는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 의 저임금 노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돌봄노동과 가사를 하면서 동시에 일을 하려면 그런 일자리만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여자들의 상황은 더 나쁘다. 전 세계에서 최소한의 유급 출산 휴가조차 보장하지 않는 4개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급휴가 조차도 전체 직장 여성의 60%만 사용할 수 있다. 나머지 40%가 해고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미국의 산모 4명 가운데 1명은 출산 후 2주 안에 직장에 복귀한다. (p. 114)

일본에서는 아빠 쿼터제가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는 남녀 임금격차나 여성의 신체를 반영하지 않은 제도 설계 때문이다. 일본의 극단적인 노동문화도 상관이 있다. 휴가만 써도 상사가 얼굴을 찌푸리는 나라에서는 남자 육아휴직을 쓴다고 하면 창피나 불이익을 당한다고 아빠들은 말한다. (p. 119)

여러 나라의 사례들이 나오지만, 북유럽의 몇개 나라 빼고는 우리나라 상황이 그나마 나아보였다. 극빈층이 많은 나라들의 경우를 차치하고라도 선진국이라 하는 영국이나 미국, 일본 보다 한국의 상황이 그나마 나아보였다. 사회문제를 다룬 외국책들을 읽을때마다 느끼지만 우리나라만큼 살만한 나라가 별로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그리고 몇몇 나라들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물론 증거를 바탕으로 한 육아휴직 정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여자의 무급 노동이 신생아에서 시작되어 신생아에서 끝나는 것도 아닌 데다 전통적인 직장은 가상의 '돌볼 가족이 없는' 직장인의 삶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늘 남자로 가정되어 있다-는 자식이나 노인 가족 돌보기, 요리, 청소, 아이 병원 데려가기, 장보기, 학교폭력, 아이 숙제봐주기, 목욕시키고 재우기, 이 모든 일을 내일이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의 삶은 단순하고 쉽게 두 부분, 일과 여가로 나뉜다. (p. 120)

유급 노동 문화 전반에 근본적인 정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전통적인 직장은 '돌볼 가족이 없는 노동자'에 맞게 설계되었지만 여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 남자가 그런 이상에 잘 들어맞을 확률이 높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혹은 어떤 회사도 양육자의 보이지 않는 무급 노동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무급 노동을 하는 여자들에게 불이익 주는 것을 멈춰야 한다. (p. 126)

일과 여가.. 그렇다. 원래 직장과 가정은 일과 여가로 나누어졌었다. 그런데 여성에겐 이 '여가' 시간이 없었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여가'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예 출퇴근도 없고 임금도 없어 노동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당연시 되어온 무급노동에 대하여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동안 평가절하되어온 무급 노동 없이는 유급 노동도 불가능하다고.

'능력주의' 라는 것이 결코 평등하지 않은 '신화'에 가까운 생각이고, 사회생활 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충분히 친절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고 친절하면 전문가다워보이지 않는다는 사면초가에 빠지기 일쑤이며, 그동안의 역사에서 여자 천재들이 없었던 것은 데이터 공백의 결과로 '총명편견'을 만들어 왔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그렇다고 사회생활 하는 여성이 남성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라면 그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의 사회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여성이 자라는 동안 받는 교육의 내용에서 주입되는 '여자다움'의 특징들은 사회생활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최근 읽은 <오만하게 제밥하라> 라는 책이 생각난다. 사회생활 하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은 세상이다...

환경에서도 문제가 좀 있다. 같은 직종에 일하는 여성 노동자가 환경에서 받는 영향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사무실 냉방온도는 표준남성 기준으로 여성의 신체에서는 추위를 느끼고 산업현장에서 화학약품들이 여성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데이터가 없다. 게다가 직장내에 만연한 성희롱 문화는 업계를 막론하고 너무 흔해서 그냥 문화인가 싶을 정도다. 어디를 봐도 항상 남자는 보편이고 여자는 특수 였다.

<설계>

여성이 사용하는 물건 여성이 생활하는 공간 에 대한 설계에서도 여성의 의견은 조사조차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핸드폰만 해도 남성보다 작은 여성의 손으로는 한손으로 사진찍는 것이 대부분 불가능하다.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데이터베이스에도 젠더 데이터 공백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알고리즘이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뚱뚱한 대머리 남자의 사진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가 되어버렸다. 알고리즘에서는 '대머리' 보다 '부엌'이 더 강력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부엌에 있는 사람은 어떤 생김새건 여성이라는;;;

성 중립적이라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남성 편향적인 제품은 기술업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평균 여자 머리에는 너무 큰 가상현실(VR)헤드셋, 남자 몸에는 딱 맞지만 여자에게는 '두꺼운 겨울 외투 위에 입어도 맞을 만큼 큰' 햅틱 재킷(촉감을 구현하는 재킷), 여자가 쓰면 렌즈 사이가 너무 멀어서 초점이 안 맞거나 '코에 안 걸려서 밑으로 떨어져 버리는' 증강현실AR안경, 또는 손목 밴드나 큰 주머니에 넣어서 차야 하는 마이크. 남성 디폴트는 특히 운동 관련 기술에 많은 듯 하다. (p. 227)

이뿐만이 아니다. 자동차안전평가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인형도 남자의 신체평균으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다. 안전벨트도 임부를 위한 것은 나온 적이 없다. 설계와 계획에서 여자와 여체가 무시되어온 사례들은 차고 넘쳤다. 여자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때에도 남자들의 생각만으로 '이러면 좋을거야'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하는데... 그게 참... 많이 어려운가;;;

<의료>

역사적으로 남체와 여체는 크기와 생식기능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 없다고 간주되어 왔다. 그래서 의학교육은 오랫동안 남성 '표준'에 초점을 맞추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모든 것에 '이례적' 또는 심지어 '비정상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몸무게 70kg의 일반 남성'이 너무 많이 언급 된다. 마치 그가 남녀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자가 언급될 때는 표준 인류의 변형처럼 소개된다. (p. 248)

하지만 여체는 작은 남자의 신체와 같지 않다. 학자들은 인체의 모든 조직과 장기에서는 물론이고 흔한 질병의 '유병률, 추이, 강도'에서도 남녀 차이를 발견했고 심장의 운동, 폐활량도, 질병마다 그 질병에 걸릴 확률도 남녀 차가 있음을 밝혀냈다. 남체와 여체는 세포 단위에서까지도 다른데, 지난 20년간 여자가 단순히 '작은 남자' 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되어 오고 있음에도 의학계의 젠더 데이터 공백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크다.

여자들이 훨씬 많이 앓는 병에서조차도 동물시험에 암컷을 포함하지 않고, 진단을 함에 있어서도 여성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고통을 호소해도 심리적인 문제라며 우울증 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영미권에는 정말 많은가보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의료> 부분의 내용과 동일하지만 보다 상세하게 분석한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의료계의 현실이 여전한 것을 확인하니 너무 씁쓸하고 답답했다.

<공공생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은 공공서비스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문제는 이런 예산 삭감이 사실 절약이라기 보다는 비용을 공공부문에서 여자들에게 떠넘기는 형태라는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7년 추산에 따르면 50세 초과 잉글랜드인 10명 가운데 1명은 공공서비스 예산 삭감 결과, 필요한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돌봄 노동의 책임은 대개 여성에게 돌아갔다. (p. 301)

우리는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이, 여자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자기 가족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혜택을 입는다. 우리 모두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서비스 예산을 정부가 삭감한다고 해서 그 서비스의 수요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여자들에게 노동이 떠넘겨질 뿐이다. (p. 311)

정부의 공공서비스 예산운용이 여자의 돌봄노동과 직결되는 구나 를 깨달았다. 예산을 줄인다고 그 수요가 사라지지 않고 결국 여성이 떠안게 되는 노동이라... 저자는 이 문제가 노동을 떠안는 것 자체보다도 전사회적으로 사회비용의 낭비임을 밝히고 있다. 예산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여성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더 나은 것임을, 즉 문제는 재원부족이 아니라 (젠더에 따른) 지출 우선순위라고 강조한다.

공공생활 문제는 여성정치인의 진출과는 관련이 있었다. 여성정치인의 존재여부가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법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 정치인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아 보였다. 정치인이 되고 나서도 그렇고...

<재난>

우리가 여성을 배제하는 진짜 이유는 인류 절반의 권리를 소수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354)

여자는 이미 전쟁, 팬데믹, 자연재해의 영향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받고 있다. 트라우마, 강제이주, 부상 및 사망은 남녀가 똑같이 겪지만 여자는 여성만이 겪는 피해까지 겪어야 한다. (p. 361)

여자는 전쟁에 뒤따라오는 사회질서 붕괴의 영향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 소위 분쟁 후 상황에서도 강간과 가정폭력의 수위는 여전히 극도로 높다. (p. 362)

전쟁을 벌이는 나라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전쟁에서 생기는 난민도 있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많다. 난민이 되면 집단 수용시설에 일단 머물게 되는데 이 수숑시설에서의 위생과 성폭력 문제는 더욱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이상 갈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여성들에게 가정폭력과 성폭력까지 겹쳐지는... 이럴거면 재난에서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워지는;;; 저자는 다양한 재해의 사례들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여성들인 재난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성별/젠더 데이터 공백에 대한 해법은 분명하다. 여성 진출 공백을 매우면 된다. 의사결정과정에, 연구에, 지식 생산에 참여한 여자들은 여자를 잊지 않는다. 여성의 삶과 관점이 빛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는 세계 곳곳의 여자들에게도 이롭지만, 인류 전체에게 이로운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시 프로이트의 '여성성이라는 수수께끼'로 돌아가보면 해답은 처음부터 우리 눈앞에 있었다. 여자들에게 물어보기만 했으면 됐던 것이다. (p. 387)

읽는 내내 이정도였나...싶었다. 이렇게까지 여성이 소외되어 왔던가... 싶었다. 개인적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내용들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이라면 공감가는 사례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여성만 화장실에 줄을 서고 여성만 가로등 없는 버스정류장이 무섭고 여성만 만원 지하철에서의 성추행을 감내해야 하고 여성만 돌봄노동에 의하여 경력이 단절되고 일상용품이든 산업용품이든 여성의 사이즈는 고려되지 않으며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연구는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고 여성의 무급노동이 당연시되다 못해 사회적 재난이 겹치면 여성의 안전은 더욱 심각한 위협을 받는 현실 속에서 여권을 인정해달라는 말은 그동안 무시되어 온만큼 여자의 권리를 더 생각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부여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저자의 이 길고긴 이 두껍고두터운 하소연의 목소리를 과연 누가 들어줄 것인가... 작년 겨울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팩트풀니스' 여성버전이랄 수 있는 이 책이 그만큼 읽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너무 과한 바람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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