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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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겉표지 사진 속 여성을 보며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도시는 누가보더라도 파리!

뒤표지의 파리 에펠탑 사진이 당연한 구성으로 느껴지는 이 책은 저자가 파리라는 도시에 대해 바치는 오마주이자 저자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학일기이다.

내가 플라뇌르(flâneur, 산보자)라는 단어, 아치가 얹힌 â에 구불거리는 외르(eur)라는 발음까지 붙은 독특하고 우아한 프랑스 단어를 처음 만난 게 어디에서 였을까? 1990년대 파리에서 공부할 때 처음 접했겠지만 책에서 본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어 동사 flâner 에서 파생되었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플라뇌르 라는 단어는 19세기 초반 유리와 강철로 덮인 파라의 사사주(passages, 아케이드)에서 탄생했다.

나는 영문학 전공이기 때문에 사실 원래는 런던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절차상 문제 때문에 어쩌다 보니 파리에 오게 되었다. 파리에 오고 한 달만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우리를 나누어놓은 운명의 가는 선을 따라 걷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가 본능적으로 한 일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했으며 그래서 그걸 가리키는 이름이 이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플라뇌르 였다. 아니, 프랑스어를 배웠으므로 나는 남성 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 나는 플라뇌즈다.

플라뇌즈(flâneuse), 명사, 프랑스어에서 논 말. 보통 도시에서 발견되는 한량, 빈둥거리는 구경꾼을 가리키는 단어 플라뇌르의 여성형. 이건 가상의 정의다. 플라뇌즈 라는 단어가 등재된 프랑스어 사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뇌즈'라는 여성 명사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19세기의 성별 분화 때문에 그런 인물은 존재할 수가 없다고 간주되었다. 플라뇌르라는 전형적 남성 인물에 대응하는 여성형은 없다. 여성형인 플라뇌즈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었다. 도시의 관찰자는 오직 남성인물로 여겨졌다." "플라네리를 할 기회나 플라네리 활동은 대체로 부유한 남성의 특권이었고 따라서 '현대적 삶을 그린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남성이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소요하는 철학자, 플라뇌르, 등산가들"로부터 고개를 돌려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리에 나온 여자는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 성매매 여성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플라뇌즈가 도시 산보의 역사에서 삭제된 까닭은 물론, '플로뇌르'의 개념이 확고히 자리잡은 19세기에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 플라뇌르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1585년인데 아마 스칸디나비아어 명사 flana, 즉 방랑자에서 빌려온 말이었을 것이다. 원래 이 단어는 성이 없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말이 유행했는데 이때에는 성별이 부여되었다.

19세기 여성들이 자기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당시 부르주아 여성은 집 밖에 나오는 순간 평판을 망치고 정숙함이 손상될 온갖 위험에 처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전까지 마리 바시키르체프와 같은 계급에 속하는 여자는 주로 가정과 동일시되었고 가정 영역에 국한되었으나 중간계급이나 하층계급 여자는 거리에 나올 일이 많았다. 놀러 가려고 나오기도 하고, 가게 점원, 자선 활동, 하녀, 재봉사, 세탁부 등등의 일을 하기 위해서도 집을 나섰다.

19세기 말이 되자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여자들이 런던, 파리, 뉴욕 등 도시의 공공장소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850년대 와 1860년대에 백화점이 생겨나 여자들의 외출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70년대부터 런던 안내책자에는 '숙녀들이 신사를 동반하지 않고 쇼핑을 하러 시내에 왔을 때 편안하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책에서 그리는 초상은 플라뇌즈가 단순히 플라뇌르의 여성형이 아니고, 플라뇌즈라는 자체의 개념으로 인지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플라뇌즈는 밖으로 여행을 떠나고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간다. 가정이나 소속 같은 단어가 그간 여성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음을 의식하게 한다. 플라뇌즈는 도시의 창조적 잠재성과 걷기가 주는 해방 가능성에 긴밀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진, 재능과 확신이 있는 여성이다. 플라뇌즈는 존재한다. 우리가 앞에 놓인 길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영역을 밝혀나갈 때마다 존재한다.

프롤로그 <여성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 p. 17~44 내용 발췌요약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길게 플라뇌즈에 대한 개념과 역사적 과정을 설명한다. 표지에서 멋진 여성이 도시에서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는 컷이 자연스럽게 혹은 여전히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멋지게 보이게 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저 '산책자' 일뿐인데 여성이 도시에서 하릴없이 걸아다닌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긴 프롤로그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이 책의 원제는 flâneuse : women walk the city in Paris, New York, Tokyo, Venice, and London 이다. 그리고 이 도시들중 핵심은 단연코 Paris 이다.

저자는 머물게 되는 도시들마다 산책자로서의 삶을 추구했고 그렇게 걷는 길에 다양한 여성예술가들을 연상하여 동반했으며 그렇게 걷다가 자신의 삶과 가장 잘 맞는 도시에서 안정을 찾았다. 저자가 길을 떠날때마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곳은 태어난 뉴욕이 아닌 이방인으로 살았던 파리였다. 하지만 저자가 플라뇌즈가 되기 전 살았던 뉴욕이 이 책의 출발도시다.

도시에서 교외로의 이주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집단에서 나와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된 과정이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고 단독주택에서 생활하며 낯설로 이질적인 존재들과 섞이지 않고 살 수 있는데, 도시를 한 가지 용도로만 쓸 수 있는 지역으로 구분해놓은 토지사용제한법 때문이기도 하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산업지역을 나누어놓았기 때문에 직장과 집을 오가고 쇼핑이나 여가활동을 하려면 항상 차를 타야 한다. (p. 50)

교외 동네에는 인도가 아예 없는 곳이 많다. 교외에서 차가 없는 사람은 기묘한 최하층 계급, 불가촉천민에 속하게 된다. 누구나 차를 타고 다니는 길 가장자리에서 걸어가며 위화감을 조성할 때에만 눈에 뜨이는 존재다. (p. 53)

내가 어릴때 걸어서 어딘가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우리 동네에는 친구들과 모여 놀 만한 곳도 없고 시내나 중심가 같은 것도 없었다. (p. 59)

우리는 단절되어 사는 느낌이었다. (p. 60) 교외의 구조는 여자의 활동 반경을 제한한다. (p. 64) 공정한 세상을 만들 최선의 기회를 구할 수 있는 곳도 도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임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p. 65)

저자가 태어나 자란곳은 슬럼화된 도시를 떠나 '괜찮은'주거 지역으로 여겨지던 교외지역이었다. 티비나 매체에서 많이 볼수 있던 잔디마당과 뒷뜰을 갖춘 비슷비슷한 단독주택들이 모여있는 미국의 거주전용 마을. 그런 곳이 우리네의 전원주택 같아 보이고 부유하고 평온하고 멋져보였는데 알고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다. 뭐라도 하려면 꼭 차를 타고 나가야 할만큼 집주변엔 정말 집 밖에 없었고 따라서 집을 (걸어서)벗어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산책은 왠말. 날이 어두워지기라도 하면 현관출입조차 꺼려져 집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생활. 저자는 가족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뉴욕에서의 생활이 저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야 처음 가보게 된 도시문화는 교외지역과 너무나 달랐고 대학교육을 통해 길러진 비판적 관점은 도시와 여성의 활동성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걷기 시작했고 뉴욕보다 걷기 좋은 다른 도시로 떠나기를 갈망했다.

내가 만난 파리는 인정받지 못하는 문명 세계의 중심 같은 느낌이었다. 강가 노점에서 중고 문고본 책을 싼 값에 사거나 글자가 빽빽한(연예계 소식이 아니라 뉴스를 전하는)신문을 사서 카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읽을 수 있는 곳, 어떤 서점을 가든(사방에 서점이 수백개는 있었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 같은 이름이 박힌 책이 앞쪽 테이블 위에 놓인 도시에 오게 되었다니 나로서는 믿을 수 없이 운 좋은 일이었다. 파리는 그림처럼 멋들어진 장소에서 여러 사상의 지적 혼합물을 정신없이 흡수할 수 있는 곳이었다. (p. 83)

관광도시로서의 파리가 아니라 책과 서점의 도시 파리를 연상하니 파리에 가고 싶어진다. 물론 불어를 못해서 저자가 감동해마지 않는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수는 없겠지만 카페에서 신문의 냄새를 맡고 어디에 눈을 돌려도 서점이 보이는 곳에서 산책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저자는 각 도시마다 여성 예술인 한 명을 주요 화두로 삼는데 '진 리스' (1890~1979)라는 여성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저자가 파리에서 시작했던 새로운 삶을 풀어낸다.

포드는 리스가 계속해서 찾아 헤맨, 믿음직하고 의지할 수 있는 타입의 남자 중 하나였다. 그때 쓰던 엘라 렝글릿이라는 이름 대신 진 리스라는 이름을 쓰게 한 사람이 포드이니 말 그대로 포드가 진 리스를 만들어낸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포드는 리스가 작가가 되도록 거들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작가로 보게 했다는 점이다. 리스는 몇 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종이에 글을 쓰는 직업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적 감식력은 포드에게서 베운 것이었다. (p. 88)

포드는 소설가가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군중 속에서 눈에 뜨이지 않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소설가가 무엇보다도 먼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우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언제나" 소설가는 이렇게 군중 속의 일원이자 군중을 관찰하는 자인 플라뇌르와 겹쳐진다. 리스 같은 여자, 그리고 리스가 만들어낸 여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p. 100)

파리의 이곳저곳의 거리를 걸으며 저자는 리스의 작품속 주인공들을 생각하고 리스의 삶을 생각한다. 리스의 인물은 자기가 조롱당한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도시를 돌아다니고 그들은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절박하게 애쓴다. 거리를 걷는 여자를 보는 남자의 시선은 여자가 플라뇌르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여자 스스로도 남자에게서 독립하지 못한다. 저자가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연인과의 시간은 리스의 소설과 닮아있었다.

여기가 바로 울프가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블룸즈버리 스퀘어다. 대부분 소설이 여기에서 쓰였다. 나는 그 주위를 계속 빙빙 돌지만 울프가 살았던 건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소가 52번지라는 게 기억이 났고 전쟁 중에 집이 무너졌다는 건 알았는데 그 지역이 지금 타비스톡 호텔이 들어선 자리라는 것은 몰랐다. 타비스톡 호텔은 근대적인 벽돌 건물로 겉보기에는 공공기관이나 병원처럼 보인다. 텍스처 없이 매끈하게 벽돌로 덮인 건물을 보며 생각에 잠기자 울프의 삶의 수백만 가지 순간이 머릿속에 밀려들어왔다. (p. 116)

로저 프라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 E.M.포스터 등이 들어가는 블룸즈버리 그룹은 격식없는 모임이었고, 울프가 자유를 발견하는 데에 이 모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p. 120) 1905년 겨울, 블룸즈버리의 지리적 경계를 따라 걸으면서 버지니아는 자유에 형태를 부여했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울프는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문학에서 최고의 플라뇌즈라 할 인물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대사가 이렇다. "전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시골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울프에게 혼자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자유였고,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이사였다면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은 산보였다. 거리에는 울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p. 127)

울프가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자기 혼자 혹은 언니와 함께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 도시를 돌아다니면서부터다. 그런 것이 어른의 삶이었다. 독립이었다. (p. 131) 거리에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자신'이 아니고 '도시 풍경의 기능'이 된다. 전에는 시선의 대상이었지만 거리 산보자가 되면 섹스나 젠더에서 벗어난 관찰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는 익명성의 외투를 두르고 종종 알 수 없는 도시처럼 우리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p. 137)

저자는 런던에 가서 울프와 함께 걷는다. 울프의 작품들을 통해 울프의 생각에 공감하고 울프가 걷던 길을 따라 걸으며 울프의 자유를 느낀다. 진 리스가 걷던 파리 거리에서 여자는 관음의 대상이었으나 버지니아 울프가 걷던 런던 거리에서는 서서히 여성도 거리에서 익명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른이 되고 독립적 성인이 되며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나 생각해본다. 여성이 사람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파리 거리에서 시간의 표식, 혁명과 격변이 남긴 흉터를 찾는 나는 파리 시민들이 자기들에게 지워진 것에 저항했으며 삶을 평온하게만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본다. (p. 158)

파리는 역사적으로 혁명의 도시다. 처음 만났던 파리와 다르게 다시 만난 파리는 좀더 깊숙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돌아온 파리에서 저자는 조르주 상드를 생각한다. 이제 청춘을 함께했던 진 리스 는 과거형이 되었다.

조르주 상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남자 옷을 입고, 시가를 물고, 여러 애인을 만나고, 소설을 아주, 아주 많이 쓴 작가. 상드의 신화는 우리의 문화적 의식에 뚜렷이 새겨져 있지만, 사실 요즘에는 상드의 작품을 그다지 많이 논의하지 않는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이 많지 않기도 하고, 번역된 작품을 접한 독자들도 소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p. 160) 당시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상드에게 입회를 권유하였으나 상드는 자신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p. 162)

조르주 상드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상드의 입장은 굉장히 선구적이었다고 보여진다. 당시로서는 남성에 비해 너무 뒤처진 여성의 처우를 개선시키는 일이 급했으니 여성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 지 모르나 지금의 페미니즘을 여성학과 동일시하는 것은 편협한 관점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아우른 함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학 이라는 어느 여성학자의 말을 나는 늘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다.

상드가 남자 옷을 입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밖에 나가 활동하려면 여성임을 드러내는 옷은 제약이 많았다. 남자 옷을 입고 상드는 플라뇌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도시에서 총과 대포소리가 들리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파리에서 살았던 상드는 남자든 여자든 삶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 희망이 지금의 파리에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플라뇌즈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사전에 없다는데 말이다.(저자에 의하면 플라뇌즈 를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으면 '안락의자의 일종' 이라는 뜻으로 나온다고 함)

저자는 영문학 대학원생이었지만 소설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었고 '물 위의 도시' 라는 제목부터 붙여놓았었기에 소설의 자료를 모으기 위해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간다. 베네치아에서 저자가 떠올린 여성 예술가는 '소피 칼'이다. 소피 칼은 사진작가 이자 개념미술가라고 하는데 저자가 설명하는 소피 칼의 작품 특징은 무작위적인 대상을 일방적으로 추적하면서 그 대상의 동선에 따라 찍은 사진이나 영상이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예술가를 길에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좀 무서울것 같은데;;;

소문에 따르면 파리 생탄 병원에는 파리에 크게 실망해 긴장증을 일으킨 일본인 관광객들을 수용하는 정신병동이 있다고 한다. 크루아상과 마카롱과 샤넬 넘버 파이브 향기를 기대하고 왔는데 실제로 마주한 파리가 너무 더럽고 시끄럽고 거칠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증상을 '파리 증후군'이라고 부르는데, 스탕달이 피렌체 여행을 하며 묘사한 것과 비슷한 신체 증상이 나타난다. '베를린에서는 그런 것을 '신경증'이라고 부른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주저앉을까 봐 두려워하며 걸었다'. 하지만 도쿄에는 도쿄의 끔찍함에 정신줄을 놓은 파리 사람들을 수용하는 정신병원은 없다. (p. 229)

도시 전체를 지배하는 미학이 순수한 기능주의였다. 내가 뭘 기대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왜 실망했는지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무언가 덜 산업적인 것. 잠깐 동안이라도 여기가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도시. 내가 늘 그렇게 하듯이 걸어서 탐사할 수 있는 도시. 그렇지만 도쿄는 걸을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너무 크다. (p. 230)

저자의 각 도시별 경험은 저자의 연애사와 함께 하는데 도시를 옮길 때마다 남자친구가 바뀐다고나 할까;;;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파리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도쿄지점으로 발령이 나면서 저자도 됴코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산책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도쿄는 산책하기에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너무 깨끗하고 너무 거대하고 너무 화려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동양에 한번도 가본적 없는 동양에 대해 서양인들이 갖는 로망은 그네들의 선진문물의 손이 닿지 않은, 좋은 말로 하면 향수적이고 안좋은 말로 하면 발전이 덜된 뭐 그런 이미지를 연상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일본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도쿄에서 여자로 산다는 게, 특히 일본인이 아닌 여자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느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거나 (남자들이 길에서 나를 치고 지나가거나 아니면 스타벅스에서 내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를 코트자락으로 쓸어 떨어뜨리곤 했다) 아니면 확연히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p. 260)

도쿄라는 배경이 외국에 나온 미국인이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들고 영화에 현대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파리가 19세기의 수도이고 뉴욕이 20세기의 수도라면 도쿄는 21세기의 수도다. 그러나 그 현대성이 소외감을 준다. (p. 263)

우울했던 도쿄생활에서 저자는 소피아 코폴라 의 2003년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를 떠올린다. 그 영화속 샬럿이라는 인물에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샬럿과는 또다른 비동질감을 느꼈던 저자는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도 도쿄를 산책해보려 하지만

나는 지층에서 도시를 발견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는 도시가 없었다 도쿄에서 플라뇌징을 할 때에는 계단을 올라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다리를 올라 위로, 혹은 꼭대기로 가야 내가 찾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냥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닐 수는 없다. 파리가 아니니까. 수줍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다. '가와이'를 추구하면서 내성적인 척하고 안짱다리로 서 있다가는 도시의 가장 좋은 면을 놓치기 딱 좋다. (p. 270)

도쿄와의 비교감은 연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파리에 돌아온 뒤 저자는 연인과 관계를 끝냈다. 한 도시당 한 건의 연애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는 이국적인 외모와 이질적인 태도를 지닌 본인이 도쿄에서 당했던 경험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더욱 파리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베네치아 성당에서 짧은 치마를 지적당하고 안식일 예배에 카메라와 핸드폰을 외부에 맡겨놓고 가야 하는 불편을 겪을 때 저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지하철에서 연인 무릎에 앉아 가다가 일본 남성에게 허벅지를 철썩 맞고(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자 허벅지에 손을 대고 지나갔다는 것은 아주 몰예의적 몰상식적 행동이었다고 보여지지만 여하튼 남자 무릎에 앉아가는 것도 좀;;;) 식당에서 다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잘못됐다고 지적할때 저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저 파리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저자의 플라뇌즈 적 삶은 파리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여성의 플라뇌즈 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성이 떨어지곤 해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다시 저자는 파리로 돌아온다. 어쩌면 저자에게는 당연하게도.

사회 문제에 맞서 일어나는 시위에는 진지한 면과 스스로를 신화화하는 면이 분명히 공존한다. 그러나 파리 사람들이 일어서서 행군하고 권력에 진지하게 맞서고 반대 의견을 밝히는 것을 보면 나는 늘 깊은 인상을 받는다. 내가 이곳에 살고 싶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었다. 나도 신화화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다고 말할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게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p. 280)

나도 모르는 새에 뉴욕에서 내가 되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용보다 의식(儀式)에 더 관심 있는 사람, 그것도 너무 쉽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군중 소에서 함께 걷는 행위에는 무언가 야만적인 힘이 있다.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무리에 속하게 되자 불안해졌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 의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을 하게 이끌려가기가 너무나 쉬웠다. (p. 290)

저자가 파리로 올때마다 파리에서 저자는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이번 파리는 저항의 도시이다. 혁명의 기운은 현대의 파리 도심에 시위의 모습으로 자주 발현되곤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고민과 의지 없이 휩쓸리게 된 시위는 그저 순간적이고 위험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의식적이고 주체적으로 행동했던 상드를 다시 떠올린다.

상드는 여성참정권을 하루아침에 도입하기에는 무리이고 단계적으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드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여성이 권력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일단 가정에서 평등을 획득한 다음에 바깥세상에서 평등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드가 옹호한 것은 프랑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사회주의적 프랑스였다. 그렇지만 상드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선 곳,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본 곳은 파리라는 도시였다. (p. 293)

상드가 코뮌을 싫어한 까닭은 코뮌이 '시민이 돌아오고 보행자가 쇠퇴'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코뮈나르(코뮌 지지자)보다도 더 위험하게 여겨진 것은 여성 혁명가의 등장이었다. 플라뇌르에게는 거리가 '탈정치공간'이었을 수 있으나, 플라뇌즈에게 탈정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p. 295)

상드가 경험했던 혁명의 시대 속 파리는 가능성과 희망이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새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은 남성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파리는 시위와 바리케이드가 자연스러운 곳이고 그런 파리를 보며 저자는 여전한 저항의 힘을 느낀다. 파리만의 저항성. 그 저항성이 잔인한 내용의 국가, 저자 표현에 따르면 국가중에서도 가장 유혈이 낭자한 노래인 '마르세예즈'에 남아있는한 어쩌면 파리의 이런 모습은 지속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리는 그 어떤 모습을 가졌건 저자가 가장 살고 싶은 도시이다. 삶의 현장으로서의 파리에서 저자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이웃'이다. 저자가 열렬한 팬심을 갖고 있따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라는 영화를 따라가며 저자는 파리를 또다르게 묘사해낸다.

이 영화는 특히 여자는 스펙터클,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남자처럼 익명으로, 주위를 구경하면서 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도전한다. 보이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본다는 것은 도시에서 여성의 자유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p. 326)

고다르가 한 이런 말이 유명하다. "영화는 여자 한 명과 권총 한 자루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바르다는 여자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p. 350)

바르다는 페미니스트의 첫 번째 행위는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시선의 대상이지만 또 나는 볼 수 있다" 바르다의 영화가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과 세상 안의 우리 자리를 비스듬한 눈으로 보는 것, 우리는 이삭 줍는 사람, 플라뇌즈, 방랑자, 이웃이다. 객관성 따위는 없다. (p. 357)

사람들 말이 파리는 천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동네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도시는 심리적 분위기가 뚜렷이 다른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어떤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다. (p. 329)

'정착하고 싶어하는 방랑자'로 스스로를 칭하며 파리에서 저자는 바르다의 영화속 시선을 통해 파리를 또 산책해본다. 그렇게 영화속 클레오가 되어 파리를 걷고 나면 저자는 파리에서 자유롭게 방랑하고 있음을 느끼고 파리에 정착한 이웃으로 환영받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파리는 그 둘이 모두 가능한 도시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하다.

자유롭게 방랑하고 글을 쓰는 여성으로 저자는 마사 겔혼을 등장시킨다. 유명한 종군기자이자 헤밍웨이의 첫번째 아내였던 겔혼.

계속 집을 만들려고 하지만 언제나 집이 없었던 사람, 소설가, 도망자, 이혼녀,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기자, 집 나온 계집. (p. 362)

도시 한가운데에 전선이 있어 걸어서 전선에 갈 수 있는 마드리드에서 겔혼은 날마다 포위된 수도를 돌아다니며 전쟁이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일상적 영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겔혼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일들을 하는지, 어떻게 버티는지 알고 싶었다. 겔혼은 나중에 자신의 전쟁 보도가 '연대의 몸짓'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에 가기 위해 겔혼은 가정생활로부터 멀어져야 할 때가 많았다. (p. 365) 겔혼은 여행과 플라네리가 같은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겔혼은 홀로 동떨어져 있는 고독한 플라뇌르의 이미지를 버리고 플라뇌르를 어떤 목표, 깨달음, 본 것을 기록하고 나누는 방법을 지향하는 존재로 재정의한다. 겔혼은 불행을 드러내는 데에 몰두하면서 플라네리를 '증언'으로 바꾸었다. (p. 366)

겔혼의 삶을 통해 저자는 플라뇌즈의 개념을 확장시킨다. 여성이 산책을 할 수 있게 된 순간,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순간 산책은 산책을 넘어선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그 하나의 예로 겔혼의 여정을 저자는 제시한다.

저자는 파리로 돌아가려 했으나 비자는 만료됐고 일하던 직장에서 계약도 만료됐고 시민권 면접에서는 잘했지만 수입이 많지 않아 거절당하면서 재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렇게 예기치 않게 뉴욕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향인 뉴욕.

나는 뉴욕에서 부동산 개발업자인 남자 친구와 같이 살았었는데 그가 차를 샀다. 그게 우리 사이가 끝나는 계기가 됐다. 남자친구는 시속60마일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나는 걷고 싶었다. (p. 398) 여러 해 동안 낯선 유럽 도시에서 길을 잃고 돌아온 나는 여기, 내 도시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p. 403)

파리에서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고 나만의 맥락에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러시아, 이란, 인도, 독일 ,브라질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독립심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곳 어디에라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에서 사는 게 좋았다. (p. 405) 다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따. 알고 보니, 미국인은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긴 하지만,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p. 406)

미국인들은 실상 대부분 다른 곳에서 왔는데도 미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상 세상의 모든 나라는 누가 땅을 차지하느냐의 싸움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나?인간의 역사는 이주와 정복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게 의식하느 사람들도 있다. (p. 407)

내가 미국에서 유럽과 아시아을 돌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며 방랑벽을 충족시키는 동안 거의 아무 저항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특권 덕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뿌리 내린 곳을 박차고 나오고 장소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공간 덕임도 알게 되었다. 뿌리를 경계하라. 순수함을 경계하라. 고정성을 경계하라.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을 경계하라. 유동성, 비순수성, 혼합을 받아들이라. (p. 409)

저자는 파리로의 입국이 거부되는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누렸던 것과 자신이 그동안 갇혔던 틀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된다. 삶에서 경험만큼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저자가 파리에 다시 신청한 시민권이 수락되고 나서 저자는 다시 파리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파리로 간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저자의 생각을 통해 읽고 내가 보지 않은 영화를 저자의 생각을 통해 보면서 저자가 처음에 심어주었던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에 대한 기대감은 줄어들었지만 저자 개인의 인생흐름을 통해 저자와 함께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프롤로그에서만 여성예술가들의 플라뇌즈적 면모가 돋보이고 막상 본문에서는 저자 개인의 일기처럼 좁혀진 관점이 아쉽긴 했어도 '여성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볼 수 있는 책이었다.

중성적은 눈으로 도시를 받아들이고 싶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육체가 되고 싶든, 그 사이의 무수한 무엇이 되고 싶든, 정서적 풍경의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함으로써 도시에 우리 자신을 통합할 수 있다고 울프는 말한다. 도시 안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인식해야만 그것에 도전할 수 있다. 여성의 플라네리, 즉 플라뇌세리(flâneuseris)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고 공간의 조직에도 개입한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공간의 평화를 흩뜨리고 공간을 관찰하고(혹은 관찰하지 않고) 차지하고(혹은 차지하지 않고) 조직할(혹은 조직을 와해할) 권리를 주장한다. (p.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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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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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맞서는 아이들의 이야기

2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이들이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 TP(텔레파시) 와 TK(염력)

그 아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시설에 갇혔고 테러에 이용된다. 하지만 사소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던 루크라는 소년에 의해 거대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녀와 이 시설과 1955년부터 자금을 대며 비밀리에 이곳을 운영 중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BDNF 수치가 높은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패키지처럼 초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TK 아니면 TP, (드물긴 하지만) 양쪽 모두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는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아이들조차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다. 아는 아이들은 가끔 유용하게 활용했지만 그 외에는 무시하고 지냈다. 거의 모든 신생아가 BDNF 검사를 받았다. (p. 11)

신생아때 으레히 받는 기초 검사 중의 하나가 이렇게 이용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이 검사의 수치로 인해 태어나면서 부터 아이들은 추적관찰되었고 때가되면 납치되었다. 그렇게 잡혀온 루크는 시설의 청소부 모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탈출하고 모린은 암으로 얼마 남지 않아있던 자신의 생명을 좀 더 빨리 끝낸다. 그리고 그 현장에 시설 관계자들이 볼 수 있도록 분명하게 메세지를 남겼다.

지옥이 기다리고 있어. 내가 먼저 가서 너희들을 맞아 줄게. (p. 16)

이 시설은 역사가 60년이 넘지만, 60년이 훨씬 넘지만, 그동안 정체가 누설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숲 속의 이 시설을 두고 인접한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기는 했다. 핵미사일기지 라던가 세균전 혹은 화학전과 연관이 있는 건물이라던가... 이런 소문은 거짓이었지만 진실도 조금은 품고 있었다. 즉, 평소 범인들과는 상관없는 무기시설일 것이라는 추측. 그리고 이 추측은 일면 맞는 것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곧 무기였던 셈이니. 아무도 모르는. 하지만 엄청난.

그들은 전국 각지에 정보원이 있었다. 자가용 비행기가 항시 대기중이었다. 직원들은 보수를 많이 받았고 다양한 직책마다 온갖 부수적인 혜택이 수반됐다. 그럼에도 이 시설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쇼핑몰의 염가 할인 매장을 점점 닮아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바꿔야 했다. 바뀌어야 했다. (p. 24)

이 시설은 그녀의 인생이 되었고 그녀는 거기에 불만이 없었다. 대부분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그들은 군인 아니면 블랙워터나 토마호크 글로벌처럼 까다로운 기업의 보안요원 아니면 경찰이었다. 선발 배치됐을 때는 시설이 그들의 인생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렇게 됐다. 보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부수적인 혜택이나 퇴직 프로그램 때문도 아니었다. 수면처럼 익숙해진 일종의 생활 패턴 때문이었다. 시설은 소규모 군사기지와 같았다. (p. 26)

하지만 다들 항상 되돌아오기 마련이지. 다들 되돌아오기 마련이고 이 시설이 어떤 면에서 아무리 느슨해졌다 한들 그걸 떠벌이고 다니지는 않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 느슨해지지 않지. 우리가 여기서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우리 손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파괴되었는지 밝혀지면 단체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테니까. (p. 27)

이런 시설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시설을 인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직 군인이나 경찰 중에서 온갖 잔인했던 경험들로 인해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이런 시설에서 오히려 마음껏 폭력을 휘두를 수 있어 좋았다. 설령 대상이 어린 아이들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이런 시설이 필요했고 보안은 저절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점점 신규인력 충원이 어려워졌고 그렇게 관리자들은 늙어가고 시설은 오래되고 낡아져 갔지만 보안 때문에 유지보수가 어려웠다. 그런 노후된 시설에서조차 겁에 질린 아이들은 감히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천재적 지능의 소유자였던 루크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루크로 인해 다른 아이들도 용기를 내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됐다, 꼴통. 그 상자에 앉았을 때 너 봤어. 이제 나와도 돼" (p. 104)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숨어든 기차에서 루크는 이대로 끝장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간혹 존재했고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을 매티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루크의 상처와 루크의 절실한 눈빛을 보며 처음 보는 소년의 말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얼마만에 먹어보는 것인지 모를 음식봉지까지 던져넣어 주며 추적자들의 손에서 그 순간은 일단 벗어나게 해주었다. 행운을 빈다며. 그저 자신의 어릴적 가출이 절실했듯이 루크의 가출도 성공하기를 바란다며.

"도망치지 못하면 여길 장악하는 거야" (p. 152)

루크의 탈출을 도왔던 어린 소년 에이버리가 건물 앞동에서 건물 뒷동으로 이송되면서 뒷동에서 해후하게 된 친구들은 루크와 다른 방식으로 시설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에이버리는 절박한 희망이 담긴 눈빛으로 칼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송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눈빛이 모든 걸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 조각들이 있어. 샤. 부족한 것 없이 다 있을 거야. 조립할 수 있게 도와줘. 당분간만이라도 우리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성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줘. 그녀는 엄마가 스바루 뒤 범퍼에 붙이고 다녔던, 오래돼 빛이 바랜 힐러리 클린턴 스티커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함께 힘을 합쳐 더 강하게'라고 적혀 있었고 여기 이 뒤 건물에서는 그게 핵심이었다. (p. 166)

칼리샤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하면 더 강력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모자랐다. 몇 년 전에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녀의 상대와 그 선거운동원들은 정치적으로 여기 관리인들의 전기봉에 맞먹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p. 168)

한창 소설에 빠져들어 읽다가 웃음이 났다. 역시 스티븐 킹!

그는 위대한 이야기꾼 이기도 하지만 현실정치에 당당히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문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때면 멋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여하튼,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아이 였지만 가장 뛰어난 TP능력을 가지고 있던 에이버리를 중심으로 뒷건물 아이들은 생각을 모았고 조금씩 조금씩 해결해 나갔다. 함께. 힘을 합쳐서.

모두들 겁에 질려서 우왕좌왕하는 지금이 기화였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니키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좋은 때가 없어. (p. 177)

맞아. 칼리샤는 생각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복화술사의 무릎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인형으로 지낼 필요는 없었다. 너무나 단순하지만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데서 힘이 생겼다. (p. 178)

루크에게는 또다른 멋진 남자 팀과의 만남이 운명처럼 주어졌고 팀은 따뜻하고도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해 나간다. 시설에서 파견된 추적자들은 팀과 루크가 있는 작은 마을의 경찰소를 습격하고 그 사이 시설에서는 시내 총격전 보다 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올라? 메 에스쿠차스?"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스페인어)

"봉주르, 부 마탕데?"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프랑스어)

"스드라보, 수예 슬리 메?"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크로아티어어)

"할로, 후 어 예메?"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네덜란드어"

"챠오! 미 센티? 미 센티?"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이탈리어어)

"메 에스쿠차스? 회르스트 두 미흐?" (내 말 들리냐는 뜻의 독일어) (p. 315 ~ 319)

시설 속 아이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정신은 하나로 모이게 됐고 그 공통의 정신세계 속에 커다란 전화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전화기를 받아야 하나? 받을 수 있을까?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루크는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메인에 있는 거기가 미국에 하나뿐인 시설일 수도 있고 서부에 하나 더 있을 수도 있어요. 마치 북엔드처럼. 하지만 영국... 러시아... 인도... 중국... 독일... 한국에도 하나씩 있을지 몰라요. 생각해 보면 말이 돼요"

"군비 경재잉 아니라 정신적인 경쟁이다. 네 말은 그거지?"

"경쟁은 아니라고 봐요. 모든 시설이 공조 관계일 거예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것 같아요. 공동의 목표, 훌륭한 공동의 목표죠" (p. 331)

한국이 언급됐다.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서있음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해야 할까? ^^ 아니다. 선진국은 선진국이지만 제대로 알고 나면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한국'의 언급이었다.

"네 친구들을 구하러 거기로 가는 게 아니지?"

"네, 사태를 수습하러 가는 거예요" (p. 332)

열두살 소년 루크의 계획은 겉으로는 친구들을 탈출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루크 자신도 아직 모르고 있을 만큼의 커다란.

에이버리와 다른 아이들은 큰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동그랗게 서 있었다.

아령 모양의 수화기가 정글짐 위로 삐딱하게 얹혔다. 송화구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각기 다른 언어가 똑같은 걸 물었다. 여보세요, 내말 들려? 여보세요, 내말 듣고 있어?

응. 시설의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잘 들려! 지금이야!

스페인의 시에라네바다 국립공원에서 동그랗게 서 있던 아이들이 들었다. 디나르알프스 산맥에 갇혀어 동그랗게 서 있던 보스니아 아이들이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항구 입구를 지키는 팜푸스 섬에서 동그랗게 서 있던 네덜란드 아이들이 들었다. 바이에른 산림에서 동그랗게 서 있던 독일 아이들이 들었다. 이탈리아의 피에트라페르토사에서도. 한국의 남원에서도. 시베리아에서 1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체르스키라는 유령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들었고 대답했고 하나가 되었다. (p. 374, 375)

시설은 미국 메인주 한 곳이 아니었다.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들조차 몰랐지만 시설에 갇혀있던 아이들은 알아냈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었다. 그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걸 무슨 수로 덮었나요, 스미스씨? 궁금한데"

"계속 궁금한 채로 지내세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알려드리자면 우리에게 뒤치다꺼리가 맡겨진 곳이 메인의 시설 한 군데만은 아니었어요. 전 세계적으로 시설이 스무 군데 더 있었는데 남은 곳이 하나도 없어요. 거의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복종을 반복주입하는 나라에 있었던 두 군데는 이후에도 한 6주정도 버텼지만" (p. 407)

아이들이 일을 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일을.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아이들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시설이 있던 곳에 '한국' 이 언급됐던 것은 선진기술의 인정이자 원인미상의 테러가 일어나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걸 기분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시설의 운영방식과 목적을 알고 나면 자연스레 연상되기 마련일텐데 역시나 시작은 나치 였다.

"첫 번째 시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긴 했지만, 나치 독일 치하에서만들어졌죠"

"그게 놀랍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당신은 그렇게 편견으로 가득한 이유가 뭘까요 나치는 미국보다 먼저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어요. 오늘날까지 쓰이는 항생제를 개발했고요. 현대 로켓공학도 그들이 창시한 거나 다름없어요. 독일의 몇몇 과학자들은 히틀러의 열정적인 후원 아래 ESP 실험을 진행하다가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동원하면 눈엣가시, 그러니까 진보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우연히 발견했어요. 하지만 이 아이들은 1944년에 고갈됐죠. 잠재되어 있는 초능력을 알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검사 방법은 나중에 개발이 됐어요" (p. 408, 409)

스티븐 킹은 서양인이니까 온갖 잔인하고 인간이하의 실험들에 대해 나치를 생각했겠지만 그가 세계대전 중 일본이 벌인 실험들을 알았다면 나치보다 더 잔인하고 더 인간이하의 온갖 실험들을 알았다면 다른 소설적 구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군들의 만행을 스티븐 킹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만의 시원스런 스타일로 소설에서 확 까발렸으면 좋겠다.. 소설에서나마.. 소설로라도..

"이모는 트루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는 것도 알았어. 아무도 그 헛소리를 안 믿었지만"

"트럼프에 대해서도 아셨어요?"

"아, 그 골빈당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돌아가셨어" (p. 415)

최근 영미권 소설치고 트럼프 욕이 안나오는 경우가 없어보이던데 이번에도 역시 ^^ 멋지다! 스티븐 킹! 멋지다! 작가들~

"다만 저 사람이 아저씨한테 하지 않은 얘기가 하나 있어요. 아마 자기 입으로 얘기하기 싫어서 그랬을 거예요. 저 사람들 모두 그래요. 베트남 전쟁 때 누가 봐도 이길 방법이 없을 정도가 된 이후에도 장군들은 자기들 입으로 시인하기 싫어했던 것처럼" (p. 417)

"40년대 후반이나 50년대 초반에 맨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는 잘 몰랐을 수 있지만 80년대부터는 알았을 거예요. 아니면 60년대 부터" (p. 420)

"너는 지금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어. 인간은 누구나 그렇지. 앨리스 군. 때가 되면 너도 그걸 알게 될 거다. 그리고 비통함을 느끼겠지" (p. 425)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었다. 그것도 아이들을 이용하는 아주 나쁜 어른들. 그래놓고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일부러 찾아와서 공포와 죄책감을 심어놓으려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다시 그런 시설들을 일으킬 거라고. 너희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어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너희 탓이 아니야. 너희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남자가 오늘 찾아온 이유는 너희들한테 조용히 지내라고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 삶을 오염시키기 위해서였어. 그 남자의 수법에 넘어가지 마라. 너희들 모두 그러면 안돼. 우리 인간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한 가지를 우선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너희들은 그 본능을 따랐을 뿐이야. 너희는 살아남았어. 사랑과 기지를 동원했고 살아남았어. 이제 케이크 먹자" (p. 428)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어른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더 자라야 하고 그런 아이들을 지켜줄 어른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울때는 달달한 케이크가 필요하다. ㅎㅎ

스티븐 킹 답게 서서히 진행되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면서 휘몰아치는 말미에 푹 빠져들어 읽었다. 매번 느끼지만 스릴러와 판타지의 경계에 있는 듯한 그의 이야기들은 묘한 설득력이 있다. 정말 현실에 있을 법한. 그리고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면서 일단은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 뒤늦은 섬찟함을 느끼게 한다. 이런 맛이 역시 스릴러 아니겠는가. 여름에 읽는 스티븐 킹의 소설은 늘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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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뇌과학 - 이중언어자의 뇌로 보는 언어의 비밀 쓸모 많은 뇌과학
알베르트 코스타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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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지 언어에 익숙한 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뇌를 바꾸는 놀라운 언어의 세계를 엿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언어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의 모든 부모와 선생님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 - 정재승

우리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욕심내는 외국어는 영어다. '학원' 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로 자리잡을 만큼 영어학원문화는 한국의 독특한 교육문화가 되어 버렸다. 다시말하자면 대다수의 한국인은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자가 되기를 꿈꾼다. 특히나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 자녀만이라도 이중언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영어에 대한 로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어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 라는 정재승 박사의 추천사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세계적인 이중언어 연구자로서 3개 국어를 하는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생생한 경험이 어우러진 이중언어에 대한 연구들을 쉽고 간결하게 알려주고 있다. 심리학은 점점 뇌과학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그렇게 복합적인 영역 중에서도 '이중언어의 뇌' 에 대한 연구들의 선구자인 저자의 글을 읽고나면 '이중언어자'에 대한 로망을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려놓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ㅎㅎ

서문을 마치기 전에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두 가지도 나누고 싶다. 우선, 이 책은 제2언어를 배우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 아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제2언어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두번째, 이중언어 사용 현상과 관련된 사회, 정치적 의미와 세계 여러 나라의 교육 모델에 끼친 영향 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의 뇌에 두 언어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알아보는 여행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p. 14, 15)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이중언어자가 되는 방법을 배울수 있으려나 하면서 책을 펼쳐든 독자들에게 NO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책이 아니라 뇌과학에 대한 책이다. 뇌과학 중에서도 이중언어에 관련된 연구들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저자의 자세가 믿음직스럽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단어와 문법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소리와 의사소통 시 맥락에 맞게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는 법을 습득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단어만 안다고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다. 언어의 소리를 익히고 그것의 조합 방법을 알며, 어떤 구문 구조가 맞고 틀린지 대화 상대자에게 어떤 표현을 하고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p. 21)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복잡다단한 능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을 아기들이 옹알이라도 하면서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기들은 뱃속에서부터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들도 뱃속에서 듣던 언어의 소리사슬들을 구분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 만일 아기들이 그저 먹고 자기만 한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해다! 이제 아기들을 볼 때마다 머릿 속에는 무척 강력한 통계 컴퓨터가 있다는 생각도 하길 바란다. (p. 28) } 는 저자의 표현에 동감한다.

이중언어 노출된 아기들이 언어를 구별하기 위해 입술의 조음 운동에 집중하는 일을 일시적으로 강화하고 지속시키는 듯 보인다. 4개월 된 아기 이중언어자는 아기 단일언어자보다 말하는 사람의 입을 더 많이 쳐다본다. 이런 특징은 최소 한 살까지 유지되는데, 두 언어를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아기는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해 시각 및 청각 정보를 사용해 의사소통 과정에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p. 40)

두 그룹의 아기들은 공통 발달 특징을 보였다. 따라서 이중언어 경험이 대상과 단어를 연관시키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아기 이중언어자와 단일언어자가 용어 학습 과정에서 사용하는 전략은 차이가 났다. 그중 하나를 바로 '상호 배타성 경험법칙' 이라고 한다. (p. 48)

사회적 접촉이 외국어 학습에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 작용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고 단순히 언어만 노출시킨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만일 자녀가 외국어를 배우길 바란다면, 동영상이 그 일을 대신 해줄 거로 너무 기대하지 말고 그 언어를 사용해서 아이와 놀아주길 바란다. 즉, 고통 없이는 얻는 게 없다. (p. 52)

아기들의 언어학습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게끔 인간의 뇌는 작동한다.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된 아기들은 엄마의 언어와 아빠의 언어가 다를 경우 구분을 위해 시각정보를 활용한다. 그리고 하나의 물체에 하나의 의미를 연결짓는 '상호 배타성 경험법칙' 이 이중언어 환경의 아기들에게는 덜 적용된다. 즉 하나의 물체에 여러 언어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지 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이중언어자로 자라나려면 그 무엇보다 대화상대와의 사회적 접촉이 필요하다. 엄마와 아빠가 다른 언어로 아기를 키우는 환경이 아닌, 부모가 같은 언어를 쓰는데 온갖 시청각 자료를 아기에게 보여준다고 해서 아기의 뇌가 이중언어자의 뇌가 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부모의)고통 없이는 (아이가) 얻는 게 없다. ㅎㅎ

피부색은 같지만 외국인 억양이 있는 아이와, 피부색은 다르지만 외국인 억양이 없는 아이 중에 누구를 선택할까? 억양이 더 중요했다! 아이들은 피부색이 같지만 영어를 할 때 외국인 억양이 있는 아이보다는 피부색이 달라도 모국어처럼 영어를 하는 아이들과 더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즉, 그들의 원하는 친구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는 피부색보다 말하는 방식이었다. (p. 54)

호모사피엔스만 남기전 아주아주 오랜 시간 전에는 다양한 인류의 조상족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언어가 있었다고 하던데... 비슷비슷해 보이는 유인원들 중에서도 저마다의 다양한 그룹이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이 외양 보다 억양이라니 의외의 연구결과였다. 하긴 사회적 동물인 인류가 소통을 하려면 생김새보다는 대화가 더 중요했을 테니...

이번 장에서는 뇌가 어떻게 두 언어를 처리하는지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살펴보았다.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의 언어 행동 연구와 뇌 영상 기술을 통해 확보한 건강한 사람의 뇌 활동 평가로 이중언어자의 언어 사용이 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뇌에서 언어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언어를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사용(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다가왔길 바란다. (p. 102)

이중언어자에 대한 뇌연구는 아직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따라서 저자의 가정과 결론은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중언어자의 뇌가 작동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결국 이중언어를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중언어에 대한 극단적인 의견을 자주 접한다. 또한, 이러한 의견은 대부분 분명한 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실제로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특정 근거를 기반으로 하긴 하지만, 전달 내용이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되어 일반 대중의 판단력을 흐릴 뿐 아니라, 이 분야에서의 연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p. 106)

이중언어에 노출된 사람들이야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해도 그런 환경이 아닌 단일언어자들은 이중언어자가 되고 싶은 꿈을 꾼다. 이중언어자가 더 똑똑하다느니 아기때부터 배워야 한다느니 이런저런 말들에 마음이 오락가락 한다. 하지만 이중언어자의 뇌에 대한 연구는 진행중이기에 아직 그런 소문들을 다 뿌리뽑을 수는 없다. 그래도 저자가 알려주는 객관적 근거들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쓰는 단어만 비교하면 두 집단 간에 차이가 없었다. 일리 있지 않은가?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가 같은 단어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어휘량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이중언어 사용이 학교 성적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p. 117)

이중언어 환경 속에서 자란 아동에게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일찍 발달하고, 자기 관점을 상대방의 관점에 다라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p. 129)

이중언어를 하면 학교 공부를 더 잘 할거라는 것은 왜곡된 편견이 아닐까? 이중언어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습능력보다는 공감능력이 더 발달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중언어를 하다보니 상대방의 다른 언어 방식에 더 개방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언어자가 되면 공부를 더 잘하는 게 아니라 사회성이 더 좋아진다는 것은 학습 때문에 이중언어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에게 제대로 뿌린 찬물이 아닐지 ㅎㅎ

단일언어자와 이중언어자의 뇌 구조를 비교한 연구들은 결과를 놓고 인과적 해석을 시도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즉,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져나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중언어 경험이 뇌 모양을 결정하는지 아니면 특별한 뇌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언어를 배우는 데 더 많이 준비되어 있어 더 쉽게 이중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만일 뇌 모양이 결정되어 있다면,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라더라도 뇌 구조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두 변수는 서로 관계가 있지만, 이것이 인과 관계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p. 137)

비록 찬물 한바가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아직 희망의 끈을 놓을 정도는 아니다. 이중언어의 뇌가 타고나는 것인지 아닌지 뇌과학자도 아직 확답할 수 없다고 하니 ㅎㅎ

결국 이중언어 사용은 우리의 언어 발달과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중언어 경험이 주는 혜택이나 문제에 대해 쓴 글이나 말을 접할 때 신중해야 한다. 적어도, 과학을 그런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연구 결과물이 말하는 내용은 그들이 말하는 내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꼭 다시 강조하고 싶은 말이었다. (p. 141)

과학의 부분적 이용에 대한 저자의 우려는 나도 깊이 동의한다. 어떤 연구결과에 대해 판단할 때는 그 하나만 보면 안된다. 관련된 다른 것들과 함께 고려 해야 한다. 하지만 일반인이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수시로 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과학책을 읽을때 저자와 같은 객관적이고 신중한 태도로 쓴 책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중언어 사용이 인지 예비용량 확장을 돕고 뇌의 퇴화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암시한다. (p. 171) 이중언어 사용은 치매 증상을 4년이나 지연시켰다. 이 연구에서는 교육 수준의 잠재적 영향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는 학교 문앞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맹자 하위 표본에서 이중언어 사용 효과가 여전히 컸고, 치매 증상을 6년 지연 시켰다. (p. 173)

서양에는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 많이 있고 따라서 태어나면서 부터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되어 이중언어자로 자라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했을때 이중언어 능력은 '뇌의 퇴화'에 효과적이었다. 즉, 이중언어자로 자라면 학습이고 뭐고는 차치하고 치매가 지연된다! 우리나라에서 이중언어능력의 효과가 학습능력이 아니라 치매예방에 효과적이라고 말하면 영어학원들이 좀 줄어들려나? 아니 여전히 성행하려나?!

감정적 가치는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낮고, 그 결과 우리 주의를 덜 끌고, 주요 과제 실행에도 덜 간섭을 받는다. (p. 191) 성인이 되어 배웠거나 사회적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학문적으로만 배운 외국어(제2언어)는 언어 사용에 따르는 감정 반응을 감소시킨다. (p. 197) 즉, 외국어는 손실 프레임에서 부정적인 감정 효과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수익 프레임에 비해 위험한 응답이 증가하지 않는 것이다. (p. 201) 모국어보다 외국어로 표시할 때 위험 회비 빈도수가 훨씬 적었다. (p. 202) 의사 결정에서 외국어의 영향은 위험에 대한 평가에까지 확대된다. 예를 들어, 참가자들에게 특정 활동의 이익이나 위험을 평가하도록 요청할 때, 외국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위험은 실제보다 덜 위험한 것처럼 보이고 이익은 더 크게 보인다. (p. 205)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외국어 환경에 있을 때 더 냉철한(또는 덜 감정적인) 사람이 될 것이고, 아마도 더 실용적이 될 것이다. (p. 211) 외국인 억양이 끼치는 영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외국인 억양이 있는 사람보다 원어민의 말을 더 많이 믿는다. (p. 217)

도덕적 의사결정을 할때 언어의 힘은 컸다. 이중언어자라 할지라도 주요 언어인 모국어가 있다. 모국어외의 언어는 제2언어 즉 외국어다.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외국어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국어로 제시될 때보다 더 냉혹한 판단을 내렸다. 모국어로 표현되는 상황은 감정을 건드렸지만 외국어로 표현되는 상황은 감정을 크게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중언어자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다면 그사람의 모국어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제회의에서 공용어로 진행해야 할 회의는 결국 외국어로 진행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국제회의에서는 피해국에 대한 감정적 고려 없이 냉철한 판단이 내려지는 것일까;;; 하지만 언어가 같다고 해도 억양이 주는 영향력이 또 있다. 같은 영어롤 쓰더라도 니편내편 구분이 바로바로 가능해질 수 있달까;;;

하지만 넬슨 만델라의 말을 기억해두고 싶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머리로 간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가슴으로 간다" 어쩌면 만델라가 적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염두에 두었던 말일 수도 있다. 그는 도리에 맞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길 원했다. (p. 183)

그리고 저자가 책의 제일 앞과 책의 제일 뒤에서 한 말도 기억해두고 싶다.

하나의 뇌 속에 어떻게 두 언어가 공존하는지, 그리고 거기 따른 인지적, 신경학적, 사회적 영향에 관한 연구 및 이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세계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었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이 일에 관심을 갖고 계속 참여해보기를 바란다. 공자가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 라고 한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 218)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듣기만 해서는 까먹고 보기만 한 것은 가물하니 직접 소리내 말해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겠다. 그리고 그 언어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겠다.

{ 언어의 기본 수단은 바로 소리다. 우리는 말을 듣는 것보다 할 때가 더 많다. 읽고 쓰는 것을 배운 후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토킹 헤즈'(Talking Heads)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라이팅 헤즈'(Writing heads)가 아니다! 말하는 머리지, 글 쓰는 머리가 아니다. (p. 38) } 라는 문장이 인상깊었다. 그렇다. 인간의 언어는 주로 '말'로 인식된다. 나의 모국어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내게 그닥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상대방의 머리 보다는 가슴으로 가는 언어를 말하고 싶다. 이렇게 또다시 이중언어자에 대한 로망이 생겨나지만 분명 이 책을 읽기전의 로망과는 다를 것이다. 심장을 품은 토킹 헤즈 라고나 할까. ㅎㅎ

뇌과학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감상적인 마무리를 하게 되다니;;; 머리에 대한 책을 읽었으나 심리를 건드리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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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대한 거의 모든 생각 - 이제부터 당신 메뉴에 '아무거나'는 없다
마틴 코언 지음, 안진이 옮김 / 부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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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당신 메뉴에 '아무거나'는 없다

 

 

I Think, Therefore I Eat : The World's Greatest Minds Tackle the Food Question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먹는다' 라는 문장은 이 책에 즐겨 나오는 표현이다. 영국의 철학자인 저자는 음식에 대한 본인의 다양한 생각들을 풀어내는 동시에 본인의 장기를 살려 '음식'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까지 곁들여 낸다. 글 사이사이의 레시피는 일종의 부록 같지만, 진짜 부록은 책 뒤에 알찬 내용으로 덧붙여져 있다.

현명한 식생활을 위한 나의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디테일이 중요하다.

2.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3. 크리스털 꽃병을 깨뜨리지 말라.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쉬운 해결책과 사고의 단순화에 저항하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음식에 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얼마 후에는 그 논쟁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크리스털 꽃병을 깨뜨리지 말라'는 '스위스제 시계를 집에서 수리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다. 복잡성을 인정하라. 크리스털 꽃병(또는 스위스제 시계)에 망치를 갖다 대지 말라. (p. 15, 16)

나는 이 책을 '건강한 음식에 대한 탐구'라는 중심 주제를 가지고 가벼우면서도 깊이있게 집필했다. 책의 구성 측면에서는 바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을 택했지만, 정보를 보다 효과적이고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복잡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심오한 철학적 개념을 사용했다. (p. 17)

인간의 기본욕구를 의식주 라고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역사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음식'의 다양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러한 음식들에 대해서는 그닥 깊이 생각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음식'에 대한 생각을 좀더 진지하게 해볼 것을 제안하는데 풀어내는 방식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음식에 대한 철학 이라기 보다는 음식에 대한 과학을 읽는 기분이었고 덤으로 유명 철학자들의 식생활을 엿볼때마다 웃음이 나기도 했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던 베들레헴이라는 정착촌이 예수의 탄생지로 선택된 데도 숨은 메시지가 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빵의 집'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존 로크와 장자크 루소가 마치 서정시를 쓰듯 갈색 빵의 미덕을 찬양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p. 41)

음식에도 팩트체크가 필요하다며 가짜 음식을 찾아나선 저자가 제일 먼저 언급하는 음식은 '빵'이다. 인간이 빵을 먹어온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지금의 빵은 순수하지 않다. 온갖 화학적 첨가물이 잔뜩 들어가 있고 인위적이로 성급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저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먹었던 마른 빵을 지금은 찾을 수 없음에 존 로크가 서글퍼했을 것이라며 지금의 빵이 진짜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빵이 주식이 아닌 내게는 존 로크 만큼 서글픔이 전해지진 않는다. ㅎㅎ

무시무시한 아조디카본아미드는 어떤 상황에서든 금지되는 화학물질이지만 매우 흔한 식품 첨가물이기도 하다. 제빵업계에서는 밀가루를 표백하기 위해, 그리고 개량과 숙성을 위해 아조디카본아미드를 사용한다. 아조디카본아미드는 스타벅스와 같은 체인점에서 판매하는 제품들(예컨대 스타벅스의 크로아상 제품들)에 첨가되고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는 햄버거와 핫도그 빵의 형태로 판매된다. 규제 담당 기관들도 아조디카본아미드가 '호흡 과민성 물질'로서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조디카본아미드가 분해될 때는 세미카바자이드라는 물질이 만들어지는데 유럽연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싱가포르에서는 세미카바자이드를 약한 발암물질로 간주해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다르다. 언제나(뭔가를 금지하는 일에) 신중한 FDA는 소량만 사용할 경우 세미카바자이드가 안전하다고 간주한다. (p. 65)

영국 학자들의 책은 특유의 반어법적 위트가 있는 것 같다. 영국식 유머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살짝 비트는 문장들에 웃음이 나올때가 있다. 특히나 미국에 대한 평가를 할때 그런 문장들이 빛을 발한다. 미국 FDA 와 맥도널드에 대한 비판은 책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또한 영국 특유의 미국에 대한 감정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팔레오 다이어트를 뒷받침하는 이론에는 또 하나의 제법 큰 허점이 있다. '석기 시대 인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용어라는 것이다. 원시 시대 집단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식물과 동물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에 먹는 음식도 천차만별이었다. 물론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살코기가 주요 영양 공급원이었겠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생선을 주로 먹었을 것이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과일과 견과류를 중심으로 채식에 가까운 식사를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채소를 먹는 방법은 옛날과 다르다. 이 사실은 우리의 소화 기관이 수백만 년 전에 만들어진 진화론적 틀에 고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인간은 단 한 장의 청사진으로 결정되는 융통성 없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으며 항상 적응한다. (p. 86, 87)

저자는 다양한 다이어트에 대한 내용도 많이 다루고 있다. 석기시대 식단을 먹음으로써 다이어트를 한다는 팔레오 다이어트 를 대표적으로 언급하면서 인류의 신체가 얼마나 다양한 적응을 거쳐왔는지 생각해볼 것을 지적한다. 뭐든 한 가지 음식만 고집하는 다이어트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항상 고기에 집착했다. 특히 그는 샤퀴테리를 좋아했고 갖가지 햄과 소시지에서 영감과 기력을 얻었다. '초인'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창시한 악명 높은 철학자 니체는 잠시 채식을 해보기도 했지만 식생활에서는 건강보다 쾌락을 우선시하기로 마음먹었다. (p. 115)

데이비드 흄도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특히 고기를) 말년엔 몸집이 너무 불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된 나머지 짓궂은 풍자만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데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과일과 채소가 지성의 적들이 선호하는 음식이라며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 사고방식을 따랐다고 한다. 덕분에 편두통과 소화불량과 이른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렀다고;;;

루소는 유아에게 모유를 먹이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모유 수유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유대를 형성함으로써 가족 전체의 조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 이것은 아주 참신하고 급진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당시 중산층 여성들은 자신이 낳은 아기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하는 일이 드물었고 아기를 양육하는 일에도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18세기는 유모의 전성시대였다. 처음에는 왕실에서만 유모를 썼지만, 곧 모유 수유를 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낙인이 찍혔다. (p. 128)

다양한 분야에 급진적 관심을 갖고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던 루소가 관심이 많았던 음식은 우유와 유제품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고아원에 맡겼다는 것으로 비난을 받기도 한 루소이지만 그가 했던 생각들은 지금 봐도 공감가는 부분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러니 당시에는 얼마나 급진적이었겠는가.

이누이트(에스키모)는 동물성 지방을 아주 많이 섭취하고 채소는 거의 먹지 않는데 어떻게 오늘날 곡물, 과일, 채소, 고기, 달걀, 유제품으로 균형 잡힌 식단을 짜서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보다 건강할까? (p. 132)

생화학자이자 에스키도 영양학 전문가인 해럴드 드레이퍼는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확실한 이누이트족의 식단이야말로 우리가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은 없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필수 음식이란 없고 필수 영양소만 있다. 그리고 필수 영양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섭취할 수 있다. (p. 135)

'이누이트의 역설'은 지방이 해롭다는 기존의 상식을 편견으로 뒤바꾼다. 편식이 좀 있는 편인 나는 '골고루 먹어라' 는 말을 안좋아하는데 '필수 음식이란 없고 필수 영양소만 있다' 는 문장에 확 와닿았다. 나는 골고루 먹지 않지만 아주 건강하다. ㅎㅎ

당신은 왜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는지, 그리고 서양의 전통적인 식사가 왜 세 가지 코스로 이뤄지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은 영양과는 거의 무관하고 상식과는 더욱 무관하며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 그 답은 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도 칭찬은 가장 적게 받는 철학자들 중 한 명인 피타고라스가 숫자 3에 부여한 의미와 관련이 있다. (p. 142)

와우. 하루 세번의 식사가 피타고라스와 연관이 있을 줄이야.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농경의 생활방식에 따라 삼시세끼가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겠거니 했는데, 서양에서는 피타고라스와 연결시킬 수도 있구나~

채소 위주의 요리는 왜 널리 유행하는 식사법이 되지 못했을까? 아쉽게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운 쇠고기 같은 음식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따. 그리고 그는 관찰을 통해서도 그렇고 첫 번째 원칙을 따르더라도 동물들은(그는 여자들도 동물로 분류했다!) 순전히 남자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추론했다. 여러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성경과 코란에 담긴 가르침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많이 '주입되는' 철학 중 하나였다. (p. 160)

채소를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고기를 먹는 걸 전쟁을 일으키는 일과 비슷하게 취급하던 플라톤은 그의 위대한 선배인 피타고라스의 식단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중세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다. 서양식탁에 채식이 아닌 육식이 위주가 된 것이 철학자들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 깨달은 것이었다. 하긴 먹고사는 것이 삶이고 삶에 대한 생각이 철학일테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ㅎㅎ

인간의 미뢰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 '혀 지도'에서는 '신맛과 짠맛을 감지하는' 영역이 더 넓고 설탕과 단맛을 감지하는 부분은 혀끝의 좁은 영역이라고 돼 있지만, 음식 평론가 마이클 모스가 지적한 대로 혀 지도는 1901년에 독일의 어느 대학원생이 만든 것이고 실제로는 '입안 전체가 설탕을 간절히 원한다'고 알려졌다. '입안에 있는 1만 개의 미뢰는 모두 단맛을 수용하는 특별한 미각 수용체를 가지고 있다. 그 수용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뇌의 쾌락 영역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모스의 설명이다. 간단히 말해서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거부할 수가 없다. (p. 169)

'혀 지도' 는 나도 학교다닐 때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과학적이지 않았다니;;; 왜 교과서에 업데이트가 안된 걸까?? 여하튼 지방에 대한 오해와 설탕에 대한 오해는 저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어 흥미롭게 읽힌다.

하루의 절반인 열두 시간(간의 글리코겐 수치가 중요한데,그 수치는 열두 시간 동안 굶어야 떨어지기 때문이다) 동안만 혈관에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인체는 몸속의 죽은 세포나 손상된 세포를 대체 에너지원으로 삼아 영양분을 얻는다. 이것이 이른바 '자가 포식'이다. (p. 183)

간헐적 단식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냥 끼니를 줄이면 되겠거니 했었는데 아니었다. 시간차가 중요한 거였다. 다음에 간헐적 단식을 하게 된다면 최소 열두 시간은 지나야 체지방이 분해되기 시작할 거라는 걸 기억하고 있어야 겠다.

히틀러는 그가 열렬히 찬양했던 철학자 니체와 마찬가지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그가 니체와 똑같은 질환에 시달렸기 때문에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위경련, 과민성 대장 증후군, 복부 팽만으로 고생했다. 애초에 히틀러의 위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그가 모든 채소를 삶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채소에 있는 좋은 박테리아가 다 죽었던 것이다. (p 193)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였지만 가리는 음식이 많았고 다양한 질병이 있어서 이런저런 약물에 수시로 의존했는데 나중엔 약물중독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히틀러가 먹기전 먼저 먹어보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 속에서 여자들은 전쟁상황 대비 잘먹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히틀러가 삶은채소곤죽을 주로 먹었다니... 흠;;; 하여튼 히틀러는 먹는 것도 희한했나 보다.

다른 음식들과 마찬가지로 대두는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 음식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콩이 정말로 그렇게 나쁜 거라면 정부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노력이 건강보다 돈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서 문제지만 말이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거의 모든 선진국의 정부들은 사람들에게 단 것을 먹지 말고 운동을 더 많이 하라고 훈계하는 와중에도 지난 50년 동안 공적 기금으로 농업에 보조금을 열심히 쏟아부어 왔다. 그 결과 채소와 과일 같은 진짜 음식들의 가격이 40퍼센트 상승하는 동안 대두와 옥수수의 가격은 3분의 1정도 하락했다. (p. 239)

음식 문제에 있어서도 결국 정치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비싸지는 좋은 음식과 값싸지는 안좋은 음식중에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더 먹겠느냐 말이다.

미국에서만 가소제인 비스페놀A가 매년 30억 킬로그램이나 음식 사슬에 들어오며, 그 결과 현재 미국 국민의 93퍼센트에게서 비스페놀A가 검출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비스페놀A는 우리의 배가 꽉 찼을 때 그 사실을 몸에 알려 주는 호르몬을 교란한다는 것이다. (p. 311)

미국에서의 비만 문제는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플라스틱 용기에서 가장 크게 홍보하는 부분이 비스페놀프리 라는 단어던데... 미국의 문화와 FDA의 통과여부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를 보며 과연 앞으로도 계속 미국뒤만 쫓아가야할지... 그래도 될지... 좀더 합리적이고 안전한 규정을 만들어 가야 하는 건 아닐지...

나중에 유럽인들이 아즈텍의 웅장한 축제에 초대받아 축제를 참관했을 때, 아즈텍 사람들의 삶에서 코코아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명백하게 밝혀졌다. 아즈텍 사람들에게 초콜릿은 국가의 가장 큰 집단 치유 의식이었던 것이다! (p. 370)

당시 공공장소에서 초콜릿을 마시는 것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징표로 간주됐고, 앤 여왕 시대에 유명했던 폴몰거리의 '코코아트리'라는 이름의 초콜릿하우스는 도박과 정치 토론의 중심지가 됐다가 나중에는 문학클럽으로 자리 잡았다. 이 문학 클럽의 회원들 중에는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과 시인이었던 조지 바이런이 있었다. (p. 374)

코코아 즉 토콜릿은 중남미에서 전해졌다. 17세기 후반 아메리카를 침략해간 유럽인들은 처음엔 그 가치를 몰랐으나 금세 필수적인 음식으로 초콜릿은 자리매김했다. 얼마전에 읽은 '더 클럽' 이라는 책에 나왔던 클럽 멤버 중에 에드워드 기번이 있었는데... 기번은 다른 문학클럽 활동도 했었나 보다. 17세기에서 18세기는 살롱이던 펍이던 커피하우스던 여하튼 클럽이 문화적 소통의 중심이었으니 당시 지성인들은 각자 다양한 여러 클럽에서 활동했을수도...

이 책의 대부분은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자는 내용이고, 논리와 주장은 양념으로 조금만 곁들여진다. 불행히도 영양학은 부패한 과학과 위험한 교리로 채워져 있다. (p. 399)

건강한 식습관과 다이어트에 관해 지금까지 들은 모든 것을 '의심스럽고' '입증되지 않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잊어버리자. 다음 단계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 사실을 토대로 당신만의 접근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가게까지 걸어갈지, 아니면 운전을 해서 갈지를 잘못 선택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p. 400)

철학자가 쓴 책이지만 사실 위주로 주장은 조금만 들어간 이 책은 '음식'에 대해서도 철학이 필요한 시대임을 깨닫게 한다. 과거의 위대한 지성이라 일컬어지던 철학자들도 음식문제에 직면했었고 자신들의 철학만큼 완벽한 해법은 제시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했다. 그들을 고심하게 했던 음식들에 대해 우리는 지금 더 많이 알게 됐고 마음만 먹으면 더 자세히 알아낼 수 있다.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식에서만큼은 위대한 철학자들보다 더나은 생각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ㅎㅎ

500여 페이지의 꽤 두꺼운 편이지만 쉽게 읽히는 책이었는데, 본편이 400페이지 정도이고 나머지 부분은 부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과 연구자들에 대해 한명한명 이야기해주는 '포크를 든 철학자들' 은 철학자들의 색다른 면모를 알 수 있게 하고

그 뒤에 진짜 '부록' 에는 '모앙먄으로 효능을 알 수 있는 음식들' 이 소개되는데 하나하나 아주 흥미롭다. 예를 들면, 토마토는 심장모양, 호두는 뇌, 당근은 눈, 강낭콩은 신장, 고구마는 췌장, 셀러리는 뼈, 아보카도는 자궁, 오렌지/레몬/자몽 은 유방, 무화과는 고환, 버섯은 귀, 포도는 폐 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는데 그 효능들까지 읽고 나면 아~! 하게 된다. 뒤이어 '간식을 대체할 수 있는 음식들' 도 소개하는데 소금간이 된 피스타치오, 건조 토마토, 견과류와 건포도, 사과, 잣, 절인 청어, 달걀, 버섯, 베이크드 빈, 통조림 채소 등 나중에 한번 먹어봐야지 하고 적어둬 본다.

'추천자료' 에는 책에 소개된 자료와 주장들의 출처를 장별로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는데 읽어보면 유용할 듯한 책들을 다수 소개받을 수 있었다.

'각주 및 자료 출처' 도 어찌나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던지 감탄했더랬다. 특히나 { 피타고라스가 '콩을 먹지 말라'고 했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도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러 가지 색깔의 콩 중에서 하나를 뽑는 방법으로 도박을 했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1947년 처음 출판된 '서양철학사'에서 콩에 대한 잘못된 편견(그리고 피타고라스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들)을 의도적으로 강화했다. 그에게 넘어가지 마시라! (p. 495) } 부분은 꼭 기억해두기로 했다.

{ 내 생각에 위대한 철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사와 그들의 일상생활 습관 및 현실적인 관심사를 함께 논하는 책은 '철학적인 이야기들' 이 유일할 것 같다. (p. 517) } 이라고 본인의 책을 소개해 놓기도 했는데, 찾아보니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나 보다. 아쉽다...

철학자가 풀어놓는 음식에 대한 생각들은 의외로 과학적이었고 과거 위대한 철학자들의 식생활은 의외로 엉망?!이었지만 그랬기에 현실적으로 가깝게 느끼며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담아낸 책들이 자주 눈에 띄는 시대가 됐다. '음식' 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타당한 근거를 찾기 위해, '음식'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혹은 '음식'에 대한 가벼운 철학적 접근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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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 백천수 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0
손서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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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의 유쾌하고도 아슬아슬한 일탈

1만 킬로 떨어진 아프리카에서 보낸 뜨거운 여름

 

스펙을 쌓으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해외봉사 겸 영어연수 차 간 아프리카 케냐에서 살해사건에 휘말린 고등학생의 파란만장 스토리 라는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 호기심이 확 일어났던 책이었다. 자주 왕래가 있던 나라도 아닌 아프리카에서 부모나 의지할 어른도 없는 고등학생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막막할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다.

하지만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고 게다가 내가 예전에 무척 감동깊게 읽은 <컬러보이>의 손서은 작가의 작품이다. 무엇보다 '자음과 모음'의 청소년문학 작품들은 늘 나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었었기에 이번 작품에 대한 믿음도 남달랐다. 그리고 이 소설 역시 '자음과모음'사의 청소년문학은 역시 마음에 직접 와 꽂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20xx년 8월 2일 나이로비 뉴스N

나이로비 근교의 한 펍에서 만취한 한국인 10대 두 명이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국제 자원봉사 단체인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참가자들로 케냐를 방문한 이들은 카지아도현의 마사이 빌리지에서 어린이를 숨지게 한 후 차를 훔쳐 달아나던 중에 붙잡혔다. (p. 9)

자극적인 멘트의 나이로비 현지 기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기사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헉 싶으면서 시작과 동시에 작품에 바로 빠져들게 한다.

공항 로비를 가득 메운 한국인 단체 티는 우리는 관광을 위해 케냐에 입성하지 않았노라 선언하고 있었으니 지저즈, 러브, 스탠바이갓 등등의 문구로 자신들의 신성한 임무를 드러냈다. 그 많은 인원이 이반 아셰프의 세련된 지프를 지나쳐서 한국인 선교사가 대절한 값싸고 구질구질한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머리 한 귀퉁이가 찌릿했다. 세상에. 노다지가 따로 없었다. 저들의 고귀한 스피릿은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사명과 닮아 있었다. (p. 12)

이반 아셰프는 '아이러브 발룬티어' 라는 국제자원봉사단체를 만든 사람이지만 이 자원봉사단체는 비영리기구도 아니고 이 사람은 케냐 현지인도 아니다. 그에겐 여전히 아프리카 땅이 유럽인들의 땅이었다. 과거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몰려와 책상에 지도를 펴고 자로 선을 죽죽 그어 자기들끼리 땅따먹기를 했던 그 시절이 물러간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의 여행지, 휴양지였고 그쪽에서 들어오는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반 아셰프는 자신이 인류애에 기반한 관광사업을 운영한다고 여겼기에 가슴에 사랑이 새겨진 인류 전체가 그에게 고객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나이로비 공항에서 목도한 코레안단체팀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로 각인되었다.

"한국 시장을 노려 봐야겠어. 아이디어 좀 없나?"

"나이로비에 학원을 세우시든가"

"하건? 그게 뭔데?

"노노, 하건이 아니라 학원이라니깐. 학원은 영어로 대체가 안 되거든. 한국만의 독특한 교육문화라서. 학교 끝나면 뭘 배우러 가는 데야. 그게 다 학원이고. 그중에 제일은 영어 학원이지. 돈 벌고 싶어오? 영어 학원을 세워. 그러면 돼. 한국인들이 사교육비로 쓰는 돈이 연간 한 170억 달러쯤 되지, 아마"

"오! 자넨 천재야. 당장 프로그램을 짜게. 한국 학생들 좀 모아 보지 그래. 처음이니까 현지 숙박은 우리 쪽에서 지원해 주는 걸로 하자고. 단체 홍보도 할 겸. 자네 한국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되겠구먼. 오랜만에 힘 좀 써봐" (p. 14, 16)

해리 백은 오래전 선교사로 케냐에 왔다. 하지만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고 지금은 '아이러브 발룬티어'에서 일하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만 성공시키면 본부로 올라오게 해준다는 이반 아셰프의 말에 머리를 굴리던 그는 십여년 만에 형수에게 이메일을 띄운다.

착한 여행이 유행하면서 미숙씨도 한때 아프리카 현지 여행사와 손을 잡고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 커피 농장 투어, 반일짜리 자원봉사, 빌리지 투어, 소똥집 짓기, 이런 것들은 빤한 관광에 걸린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현지식, 지속가능성, 자립, 공정, 착한, 에코, 유기농 기타 등등의 단어에 사로잡혀서 그런 참여가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착각한다. 미숙씨가 보기에 그들은 착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착한 건 현상을 어수룩하게 덮는 거다. 그래서 그런가, 요샌 다크 투어리즘이 새로이 떠올랐다. 지난 세기에 인류가 저지른 죄상을 덮지 않고, 들추어 찾아가서 보고 배우겠다는 것인데 이러나저러나 업계 사람이 보기에 궁극의 목적은 모도 돈으로 귀결되었으니 다르긴 뭐가 다르냐. (p. 19)

해리 백의 형수인 미숙씨는 대학 내내 가난한 배낭여행자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일찌감치 여행사에 취업, 여행지에서 진화한 생활 영어와 발로 뛰는 영업으로 높은 실적을 올렸고, 여행 업계에서 아이디어와 기획이 뛰어나다는 정평을 일찌감치 얻었다. 저가 항공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과감히 회사를 나온 후 투자를 받아 동료들과 이지고를 창립하여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미숙씨는 직원들에게 근엄한 간부가 아니라 현실적인 멘토이자 돈 잘 쓰는 선배였으며, 학부모 세계에서는 쿨한 맘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미숙씨는 자신의 아들과 서로 간섭안하는 쿨한 사이라며 아들을 천수씨라 부르는 동거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백천수씨는 그녀의 영원한 '마이넘버원' 이었고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었다.

미숙 씨의 마이 넘버원 백천수는 밖에서 점심을 먹을 경우 또와 분식집을 이용했는데 그곳 말고 다른 음식점은 안 갔다. 천수는 가는 데만 가고 입는 옷만 입고 먹는 음식만 먹었다. 다른 곳은 낯설고 불편해했다. 호기심도 모험심도 없었다. 식욕 같은 거라도 있으면 메뉴별로 밥집을 훑으며 돌아다닐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p. 21)

여행사를 운영하는 베테랑인 미숙씨가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정체가 선진국 사람들의 아프리카 판타지에 자원활동과 빌리지체험을 얹은 전문 여행사 정도로 정의 내리는 데는 타당한 근거가 차고 넘쳤다. 남이 되어 연락끊고 지낸지 십여년만에 받은 시동생의 메일내용은 코웃음치고 바로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천수가 그런 프로그램이라도 체험하면 친구도 사귀고 자신감도 좀 갖게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자꾸만 커져갔다. 미숙씨의 마음이 통했던 것은 아니지만 방학이 오기만 하면 가출하고 싶었던 천수에게도 그 프로그램은 방학이면 더 빡빡해질 학원프로그램을 탈출할 희망처로 보였고 스스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야, 백천수씨. 그런 건 엄마가 할게. 넌 힐링이나 마저 하셔"

거실 소파에 앉은 엄마는 유명한 스님이 쓴 에세이를 읽으며 구멍 난 마음을 힐링했고, 천수는 구멍 난 학습을 힐링했다. 천수는 대한민국에 힐링이라는 외래종 단어를 처음 들여온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깟 힐링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야흐로 회복기가 오고 있었으니 여름방학이었다. 방학은 자잘한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문제의 근원을 잡아내여 수술하기 좋은 때였다. 학습에 병약한 천수를 위해 미숙씨는 대수술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p. 33)

 

이 시대 학업과 학원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공감할 대목이 아닐까. 학교 보다는 학원에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먼저 배우는게 언제부터 일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방학이면 휴가가 아니라 풀타임으로 짜여진 학원계획표를 짜는 것이 평범해진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공부하라고 하지 힐링하라고 책상에 내모는 미숙씨에게 천수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곤 했다.

미숙씨는 아들의 처진 눈커풀과 갉아먹은 손톱을 볼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어쩌다 저런 못난 자식을 키우게 됐을까. 저걸 스파르타식 학원에 감금한다고 뼛속에 박힌 맹한 기운을 다 뽑아낼 수 있는 건가 말이다. 미숙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뇌했다.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모두가 단 하나의 트랙 위에서 단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달려간다. 천수 같은 아이도 살아갈 다른 길이 분명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미숙씨가 알기로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막차라도 잡아타고 끝까지 쫓아가야 했다. 그런 미숙씨에게 난데없이 해리가 괴상한 제안을 한 것이다. (p. 34)

해리 백은 미숙씨의 남편의 쌍둥이 동생이다. 천수가 일곱살일때 헤어진 그 집안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가 날 뿐이지만 천수의 앞날을 생각하자니 그 프로그램에 자꾸만 마음이 갔고 결국 자신의 여행사 홈페이지에 대대적인 홍보글을 올렸다. 어차피 천수는 그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기로 내정되 있었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천수는 스스로 지원했고 홈페이지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이 게시된 순간 예상외로 뿌듯했고 그때부터 이미 없던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를 싫어해. 나는 아빠를 닮았어. 엄마는 나도 싫어해. 억지로 키우는 것뿐이야. 그래서 노력했다. 아빠를 닮지 않으려고. 엄마 마음에 들려고. 착한 아들이 되려고. 그러나 결국 그 세계는 터져 버렸다. 빵꾸 났다. 너덜너덜했다. (p. 59~60)

여행 전날 처음으로 크게 엄마와 다툰 천수는 홀로 집을 나와 홀로 공항버스를 타고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는 내내 뒤를 수시로 돌아보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 외국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리스 서밋에서 마거릿 패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거릿은 사교성이 좋아서 사람을 보면 먼저 말을 거는 스타일이었고,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쉽게 끝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몇몇 사람들은 마거릿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잽싸게 내뺐다.

마거릿은 특히 아이들을 아꼈다. 마트에서 우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 엄마가 원하건 원치 않건) 자기 돈으로 사탕을 사서 아이의 손에 들려 주었고,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보면 아이 손을 덥석 잡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렸다. 아이를 찾던 부모가 감사의 말대신 마거릿을 신고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경비가 부모를 뜯어말리며 하는 소리가 패리 여사는 종종 그런다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불행한 10대 아이들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마거릿은 지폐 몇 장을 건네주고 가던 길을 가는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 아이들을 맥도날드에 데려가 마음껏 먹도록 해 주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때로 달려오는 모터바이크가 마거릿의 차를 둘러싸고는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렸다. 빅맥을 해치운 아이들은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고 꽉 끼는 셔츠 안에 패드를 넣고 젤 바른 머리를 한껏 치켜올린 다음 모터바이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왜 웃어? 당신도 저럴 때가 있었겠지. 근데 봐요. 우린 나이들었어. 순식이었잖아. 저때 누군가 얘기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p. 76, 77, 78, 80, 81)

 

마거릿은 자신의 착한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지쳤고 자신을 꼰대라 부르며 놀리던 10대아이들 처럼 일탈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때 봉사와 여행이 결합된 '아이러브 발룬티어'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고 남편 존과 함께 케냐로 왔다. 그리고 천수와 (천수가 보기에 엄청난 능력이 있는 아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여고생 고승아 와 한 팀이 된다. 사실 승아는 아기때 외할머니에게 버려졌고 여름방학때 외할머니의 애인과 단칸방에서 지낼 수는 없어서 잘곳을 찾다가 여행사 직원의 호객행위에 이끌려 지원서를 낸 것이 발탁된 경우였다.

"안녕하세요, 리디아에요. 엔젤스 스쿨 1학급 담임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패리 여사께서는 오늘 저희 반을 맡으실 거예요. 여기서 가장 어린 학생들이죠"

"다른 학급의 선생님들도 제 수업을 참관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래 봬도 미국 사람이잖아요. 영어 교육은 케냐에서도 물론 중요하겠죠" 뭐, 세계 공용어니까요. 제가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하는지 다른 선생님들도 보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p. 102, 103)

"그럼 따라 해 볼까? 에이, 애플. 비, 버내너"

아이들은 색연필을 던져 가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종이를 북 찢어서 비행기를 접기도 했다. 마거릿의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도통 통제가 안 되는 군.

"쟤들 파닉스 다 떼지 않았어?"

해리가 리디아에게 속삭였다.

"영어로 일기도 써요" (p. 104)

 

아프리카 아이들은 그저 못먹고 못배우고 불쌍할 것이라는 그래서 선진국에서 봉사를 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착하기만 한 생각일까??

앙벵야는 아이러브 발룬티어를 찾는 서양인들에게 민박을 제공하고 돈을 벌었다. 그쪽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리한 생활에 주기적으로 염증을 느낀다고 하면서 아프리카를 찾았는데, 이곳에 와서 물도 떠다 주고 염소도 대신 치며 여러 가지 자잘한 일들을 거들다가 2~3일이 지나면 떠났다. 그렇게 앙벵야는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는 수고 없이 저절로 앉아서 돈을 벌었다. 더욱 기막히게 좋은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지어준 마냐타로 이듬해 또 다른 여행객들을 상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였다. 앙벵야는 해리의 영어 실력과 인터넷 운용 능력을 빌려 홈스테이로 비즈니스를 확장했다. 매년 여름이 되면 여행객들은 앙벵야의 개인 사이트에 접속해 서로 마냐타에서 자겠다고 경합을 벌였다. (p. 116)

마사이 마을의 대모격인 앙벵야는 해리 백이 처음 케냐에 와서 선교활동을 할때 만났던 인연이었다. 둘의 인연은 이제 상처의 기억으로 얼룩졌지만 여하튼 여전히 둘은 사업적으로 훌륭한 파트너였다. 소똥으로 지은 전통집 맨땅바닥에서 불편한 잠을 자겠다고 오는 서양인들을 앙벵야는 수도없이 봐왔다.

하지만 동네 어린 소녀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고 그 원인 제공자가 해리가 데려온 4명의 이방인들 중에 있음을 알게 되자 앙벵야는 움직인다.

메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외국인들, 살인자들, 맞은편 소파에 앉아 기삿거리를 찾던 수습기자의 귀가 크게 열렸다. 뭔가 조합이 마음에 든다.

사냥감을 문 젊은 기자의 두 눈이 빛났다. 기자는 메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상력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메리가 가고 난 후 그는 심드렁한 경찰들을 부추겼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잖아. 당신들 모두를 승진시켜 줄 큰 사건, 살인이다. 범인은 나왔고 당신들은 그저 시늉만 해라. 기사는 내가 잘 써 줄게. 케냐 경찰이 얼마나 기동성 있게 사건에 대응했는지 전 국민에게 알려 주마. 마침 손톱 때를 다 벗긴 경찰이 곤봉을 들고 일어섰다. 그래? 그럼 슬슬 한번 가볼까. (p. 172)

 

존에게 두둑한 후원금을 받은 이반은 마거릿 부부를 미국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냈고 한국아이 두 명은 케냐경찰에게 붙잡혔다. 케냐 언론은 점점 더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국제사회에도 알려지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마거릿은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 보살피다가 유괴범으로 몰려 유치장에 갇혔다. 케냐의 유치장에는 천수와 승아가 미국의 유치장에는 마거릿이 갇혀 있는 상황에서 상관 없을 듯한 이 두 사건은 '알리스'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연결되게 된다. ('알리스' 라는 존재는 생각지 않았던 성적 자아정체성 문제까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브라운 서장은 무조건 자기 아이 편을 들고 자기 아이가 옳다고 주장하는 부모를 여럿 보았다. 학교 폭력으로 고발당한 아이들의 부모는 대다수 비슷한 패턴을 가졌는데 원래 자기 아이들은 순하고 좋은 아이란다. 그들은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빠져나가는 데만 혈안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들에게 일관된 공통점은 "그래서 피해자 아이는 좀 어때요? 괜찮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관심사는 오직 내아이, 내 아이의 미래였다. (p. 180)

마거릿이 데려온 아이 라몬은 자신이 가정폭력으로 도망나왔다고 했다. 열여섯 이라는 나이를 속이고 펍에 가도 될 나이라고 했다. 라몬의 부모는 한달전부터 대대적으로 유괴범을 찾는 중이었다. 그 라몬이 마거릿과 함께 펍에 있을 때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말해 봐. 그 잘난 혀로 지껄이라고.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해야지? 라몬, 네가 저지른 일들을 난 다 이해하고 용서한단다. 우우. 네 본성은 원래 착하잖니. 라몬, 누구나 실수는 하잖니. 다 거기서 거기야. 나도 그랬는데, 뭐 그러니까 너도 그만 널 용서하렴. 밖에서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도 해야지. 널 얼마나 사랑한다고, 우우. 빌어먹을 사랑은! 그 얼굴을 보면 다 긁어주고 다 뭉개 버리고 싶어져. 알아? 미친! 당신이 뭘 안다고! 웃겨, 당신은 몰라" (p. 213)

착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착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악하기만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기적이기만 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나의 선의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통제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서 였던 것이 아닐까?

돕는 다는 것이 착한 행동일까?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한걸까?

내가 아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부모자식 혹은 부부 라는 가족관계 안에서 이해의 범위는 오히려 좁아지는 것이 아닐까?

착하다 vs 착하지않다 로 양분되는 입장이 될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을 품은채 가볍게 빠져 읽은 책에서 무겁게 나오는 중이다.

착한 아이 백천수씨의 일탈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커다란 사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천수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눈도 못 마주치던 엄마와도 얼굴도 희미한 아버지라는 존재와도 왠지 이제껏 하지 못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착한아이 백천수씨가 멋진어른 백천수씨가 될 것을 믿으며 이시대 모든 (착한아이)백천수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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