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 - 세상 돌아가는 걸 알려주는 사회학자의 생존형 과학 특강
윤석만 지음 / 타인의사유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이슈가 되는 과학적 지식들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법

방대한 과학의 흐름을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아우른, 나의 첫 교양 과학수업

표지 中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과학적 이슈가 낯설지 않은 뉴스로 회자되는 세상이다. 과학적 지식들을 일반 대중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상식서처럼 쓰여진 책들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뉴스로 접하든 상식으로 접하든 그때의 과학은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떨어져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고는 일상에 필요한 시대가 되었으며 과학적 지식들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시기에 사회와 과학의 적절한 통섭을 경험할 수 있는 책으로 유용한 책이다.

현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기자로서, 문명과 역사를 인과 관계로 설명하는 사회학자로서 제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확산되기 위해서는 '지식' 과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p. 7) 자연의 원리를 이론화한 과학과 이를 현실에 적용한 기술은 그 자체로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과학이 해석되고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죠. (p. 11) 과학 이론은 끊임없이 공격받고, 그 과정에서 굳건히 방어에 성공한 이론은 정설로 평가받으며, 그렇지 못하면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 왕좌를 차지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이론은 반박할 수 있어야만(반증가능성) 제대로 된 이론입니다. 반박이 불가능한 것은 신의 뜻이거나 종교적 교리인 것이죠. 반증될 수 없는 의견, 절대적인 진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린 사고를 갖고 '지적 겸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의 시작입니다. (p. 12)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의 발자취는 과학적 발견과 함께 이루어져 왔고 범위가 확대된 것은 시장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지금은 비행기로든 배로든 세계 어느곳 마음만 먹는다면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마다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소통법이 발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갈수는 있으나 이해하진 못한채 엮어진 세계는 사실 서로 더 불통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보일때도 있다. 그럴때 필요한 것이 '과학적 사고' 가 아닐까, 그리고 그 사고방식의 기저에 '지적 겸손' 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15가지 과학적 주제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한 이 책은 그러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듯 하다.

종교와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신념과 실증의 차이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종교는 '믿고 보는 것'이며, 과학은 '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신념을 재판대에 올리고, 과학은 실증적 근거로 판결을 내립니다. 칼 포퍼는 과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반증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새로운 증거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이론이어야만 과학'이라는 게 포퍼의 설명이죠. 절대 불변의 진리는 종교적 신념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p. 26)

저자의 쉽게 풀어쓰는 방식에는 영화의 활용도 두드러지는데 책을 읽다말고 저자가 말한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를 봤다. '다빈치 코드' 다음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영화를 보면서 과학과 종교의 입장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덕분에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볼 영화도 찜해놓았다. '천사와악마' 다음편이라고 볼 수 있는 영화 '인페르노' ㅎㅎ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총량은 그들보다 훨씬 많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우린 여전히 독선과 맹목으로 진리를 추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악용하는 것은 주로 정치인이거나 그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SNS에서 대중적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정치 '셀럽'들일수록 그렇습니다. 논란이 될 만한 발언으로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다른 생각'을 '틀린 사실'로 규정합니다. 그러면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나서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심판하죠. 진리의 독선은 폭력으로 쉽게 전이돼 신념의 제단 앞에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요? 애초 자신을 선과 정의의 편이라고 주장했던 주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선을 가장해 대중을 홀리며, 독선적 주장으로 시민들의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맹신하게 만듭니다. (p. 28~29)

여하튼, 중요한 것은 '열린 사고' 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이 천동설과 지동설로 대비되는 중세에만 있었던것 같은가? 지금의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이성적인가? 라는 저자의 질문에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홀릴 때가 많다.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과학적 사고가 꼭 필요한 이유다.

아주 단순히 생각해보면 빛보다 빠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것이죠. 설령 빛보다 빠른 무언가 있다 해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물리학의 큰 원칙을 위배합니다. 바로 '인과율'입니다. 모든 자연 법칙의 근본 원리는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에 영향을 미쳐 지금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과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인과율을 깰 수 있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기 때문에 설사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p. 63)

예전보다 판타지적 요소를 가진 드라마들이나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판타지적 요소 중 하나가 시간여행이다.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과학적 사고에선 불가능하다. '인과율' 에 대해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상상했을때 항상 뭔가 특별한 발견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여전히 '시간여행' 에 대한 상상이 접혀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과학적 사고 방식을 습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ㅎ 그리고 인과율을 설명하는 저자또한 마무리는 SF였다.

결국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상상력'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그리느냐에 따라 내일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SF는 'Science Fiction' 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Social Fiction'이기도 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비단 기술의 발달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문명 전체를 바꿔놓기 때문이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SF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p.65~66)

과학적으로 상상하는 것, 사회적으로 과학하는 것, Social Future 가 Science Future 와의 간극을 너무 벌리지 않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 그런 SF를 나는 꿈꾸고 싶다.

'양자(量子)'의 '量'은 '헤아리거나 짐작한다'는 뜻이다. 고전 물리학에서처럼 연속적인 값을 갖지 않기 때문에 '양자'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p. 71)

'양자역학'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굉장히 어렵게만 느꼈었는데, '양자' 라는 단어를 들어도 뭔가 숫자적이고 양적인 그런 의미인줄 알았는데, '헤아릴 양' 이라는 한자로 썼구나를 알고 나니 뭔가 철학적으로 다가온다. 과학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낄때마다 과학이 결국 삶과 닿아있구나를 생각하게 되곤 한다.

특이점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 역시 모릅니다. 그저 특이점이란 것에서 빅뱅이 일어났고, 그때부터 우주의 역사가 시작됐을 뿐입니다. 사실 빅뱅이라는 어감과 달리 특이점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현상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보니 빅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빅뱅이 있고 38만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빛이 생겨났습니다. (p. 99)

1949년 우주 팽창을 부정하던 프레드 호일이라는 천문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주가 한 점에서부터 시작됐고 점점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을 비판할 목적으로 빅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우주가 한 순간에 펑 하고 터졌다'는게 말이 되느냐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빅뱅이란 말로 우주 팽창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됐습니다. (p 102)

최근 특이점에 대한 SF소설을 읽었었다. 소설 속 특이점은 미래의 한 시점이었다. 지금의 당연한 것들이 사라진 그 어느 시점.

하지만 저자가 알려준 특이점은 우주기원 속 과거의 한 시점이었다. 처음과 끝 같았다. 특이점에서 시작해서 특이점으로 끝나는... 우주의 역사란 참... 상상 그 이상이다;;; 한순간에 펑 하고 이해되는 때가 올 수 있을까...

북극성 역할을 하는 별은 늘 변합니다. 약1만2000년 후에는 직녀성의 별이 북극성이 될 예정입니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조금씩 틀어지기 때문인데요, 빙글빙글 도는 팽이의 축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구의 자전축은 2만~2만5000년 주기로 변합니다. 작은 곰자리의 북극성 임기가 절반 가량 지난 셈이죠. (p. 118)

하늘을 보며 길을 찾던 사람들은 늘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북극성은 늘 기준점 같은 별이었다. 하지만 수메르 이전 역사를 다룬 책에서 북극성 이전의 기준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고대의 역사가 외계인과 연결지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구의 운동과 별의 움직임이 있었다. 북극성이 북극성이 아니게 되는 때 인류는 아직 생존해 있을까? 별의 기준이 바뀐 그 시대에...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와 이를 통한 '협업' 때문입니다. '공동체'라는 경쟁력을 만들어낸 거죠. 집단에서 나오는 협동의 힘이 다른 종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가지게 했고 결국엔 지구의 주인 노릇까지 할 수 있던 겁니다. 자연에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어린 맹수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할 만큼 약하지만, '공동체'란 경쟁력을 만들어내면서 지금은 지구 밖까지 우주선을 쏘아올릴 수 있는 존재로 우뚝 섰습니다. (p. 145)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지금 현생의 인류보다 컸다고 한다. 뇌용량의 크기는 똑똑함의 크기와 견줄 수 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개인이 아무리 똑똑해봤자 집단을 이기지 못한다고나 할까. 진화관련 책을 읽으면 늘 확인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의 개체로서는 오히려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시대는 어떠한가? 공동체의 붕괴는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인 것일까...

오늘날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무지의 영역을 좁히고, 그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무지의 영역을 극복해왔던 과학이 이제는 종교의 입지를 줄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려 합니다. (p. 152)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든 과학이든 변화될 미래의 모습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p. 154) 결국 해답은 다시 인간입니다. 우리가 무슨 신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우리도 그런 관념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을까요. (p. 156)

종교를 믿건 안믿건을 떠나 여하튼 신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신은 결국 인간의 상상속에 존재한다. 종교도 과학도 인간의 상상력속에서 발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역할을 과학이 대신하는 시대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신의 영역에 과학이 침범할 수 없다는 말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결국 돌고돌아 답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 있음에 동의한다. 4차산업혁명을 단순히 산업혁명의 연장으로 봐서는 곤란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 저자의 말마따나 4차산업혁명이라기 보다는 4차혁명이라고 써야할 만큼 미래는 산업과 인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류가 첫 출현한 이후에도 지구는 소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했고 1만2000년 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간빙기은 '홀로세'Holocene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그리스어로 '완전하고 조화로운Holo' '시대cene'라는 뜻입니다. (p. 167)

'홀로세'라는 말이 그동안 외롭게 들리기만 했었는데;;; '완전하고 조화로운 시대' 라는 의미를 들으니 왠지 더 안타깝게 들리는;;; 이 완전하고 조화로운 시대를 인류는 얼마나 망치고 있는가... 기후변화는 점점 더 체감되고 있다. 지구온난화가 녹이는 빙하가 해수면을 높이는 것보다 해류의 움직임을 멈춤으로써 빙하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과학적 예견이 왜 널리 회자되지 않는건지 의아할 따름이다...

주나라 왕실의 영향력이 약화된 기원전 8세기부터 진의 통일(기원전221년)까지, 약 500여년의 기간을 춘추전국시대라 부릅니다. 보통 우리는 춘추와 전국을 합쳐서 부르지만 두 시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춘추시대의 전투는 2~3일이면 끝났고 상대가 항복하면 군사를 물려 목숨을 살려줬습니다. 명분을 중시해 적장도 인격적으로 대했고요. 춘추의 정신이 막을 내린 건 마지막 패자인 월왕 구천 때입니다. 와신상담 이후 전국시대는 서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싸움이 수백 년간 계속됐습니다. 춘추의 명분과 예법은 사라졌고요. 학문 대신 병법이 활개치며 손빈,방연 같은 전략가들이 출세를 했죠. 전국에 춘추의 정신이 무용(無用)이듯,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도덕과 정의, 명분과 이상이 설 자리는 부족해 보입니다. 비전과 철학을 보여주는 리더보다 승리의 술수만 논하는 책사들이 인기입니다. (p. 229, 230 발췌)

고대 동서양의 역사는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해왔다. 트로이전쟁을 위시한 호메로스 서사시 시대에 중국땅은 춘추전국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일리아스 속 영웅들이 예의를 갖춰 마치 스포츠경기하듯 전투를 치뤘듯이 춘추시대 속 장수들또한 예의를 갖춰 전쟁을 치뤘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이 무너졌을때 인간들의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그러고 보면 인류사는 늘 비슷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지금 우리에겐 어떤 철학이 있는가? 좀 뜬금없는 결론일수도 있지만, 온갖 실용적 문구만 모아놓은 고전짜깁기 책보다 고전원전 그 자체를 읽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남녀의 성별을 가르는 Y염색체는 남성의 고환을 만듭니다. Y가 없으면 난소가 생겨 여성이 된다는 이야기죠. 다시말해 이 유전자가 없으면 생식 기관은 난소가 돼 여성이 되지만, 이 유전자가 있으면 고환을 만들어 남성이 됩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기본형은 여성이고 Y가 들어간 남성은 여성의 변형이란 뜻입니다. (p. 241) Y는 X에 비해 돌연변이가 나올 확률이 큽니다. 이는 유전적으로 Y가 불안정하다는 뜼이죠. 반대로 X는 돌연변이 가능성이 낮고 자가 치유의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p. 242)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이 전능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을 질투했던 것은 불완전한 한계 속에서 나오는 인간만의 도전과 불굴의 의지 대문이었습니다.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고 늘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가 가진 최고의 DNA일 것입니다. (p. 244)

유전자 이야기가 나오면 늘 미래형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되기 마련이다. 유전자의 기본 베이스가 여성형이라는 문장에서 '가이아' '어머니'의 의미가 새로운 깨달음처럼 다가왔다. 진화의 한 측면은 어쩌면 돌연변이의 발달사였다. Y염색체의 불안정성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해진다. 발달일지 소멸일지...

이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처럼 되는 것입니다. (p. 266)

우리는 어떻게 해야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 더욱 높은 시민의 교양과 지혜를 갖춰야만, 인간을 따라 배우는 인공 지능 역시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본인 생각만 옳다고 강조하는 지나친 '자기확신'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마치 '적'을 대하듯 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모두 '거짓'으로 모는 행태는 타인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 갉아먹습니다. 차별과 배제의 언어는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까지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서 물려줘야 할 유일한 유산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품격 있는 언어 입니다. (p. 282,283)

AI 가 어쩌구 4차산업혁명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늘상 기계에게 생존을 위협받는 인간을 생각하곤 한다.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는 기계를 두려워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해야 함을 늘 기억해야 한다.

빅데이터로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에게 인터넷에서 알아서 배우도록 했더니 편견과 욕설로 난무한 지능을 얻게 되서 인터넷을 통한 습득을 정지시켰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내뱉고 있는 언어들로 인공지능을 성장시킬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인공지능의 빠른 속도보다 더 위험한 것이 아닐까? 인간만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 그것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그 뒤에 숨은 진짜 원인을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과학적으로 생각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드러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이성적으로 가설을 세운 뒤에 합리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사회학은 일련의 사건과 현상에서 경향성을 찾아내 일반화하고, 그 뒤에 숨은 구조적 요인을 밝혀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과학과 사회학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은 앞으로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적 겸손' 을 갖는 일입니다.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습관이 우리 몸에 한층 더 스며들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책을 마칩니다. (p. 300, 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모든 것의 종말 -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
밥 버먼 지음, 엄성수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지구는 언제 사라질까?

과학자가 제대로 알려주는 우주적 차원의 종말 시나리오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는 앞표지 보다 뒤표지에서 더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도 그런 경우다.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의 역사' 라는 부제에서 내가 꽂혔던 부분은 '역사' 였다. 지구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재앙'과 '종말'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읽을 수 있을 책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를 다루고 있진 않았다.

이 책의 원제는 'EARTH - SHATTERING 세상이 깜짝 놀랄' 이라는 숙어적 표현이던데... '지구종말'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 하다. '거의 모든 것의 종말' 이라기 보다는 천문학 전문 작가가 생각해본 우주적 시점의 지구 격변 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과거에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일어날 전 지구적인 대격변 내지 재앙들을 사실에 입각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p. 10)

대격변들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결과 지구와 그 생명체들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어떤 대격변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지, 이런 것들이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p. 18)

우주는 너무 멀고 거대하고 체감되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구는 우주 속의 작은 행성이고 지구의 생애는 인간의 시간보다는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과학적이긴 하다. 이 경우 과학적 설명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 수도 있지만;;; 여하튼, 저자는 우주의 대격변들 속에서 지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지구와 태양은 바로 이 밀키웨이 은하계, 즉 은하수 안에서 태어났고, 둘 다 초기에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지구가 생겨나고 처음 10억 년간은 허구헌 날 일어나는 대혼란 속에서도 고통받는 생명체가 없었다. 그러다 최초의 생명이 신비스럽게 나타나기 직전에 지구는 아카데미 최우수 격변상을 받을 만한 대충격을 받는다. 화성처럼 지름이 약 6,400킬로미터나 되는 행성과 충돌했기 때문에 화성과의 충돌이란 말을 쓸 수도 있으리라. 그 행성은 초속 12킬러미터 속도로 정면충돌해 지구를 완전히 파괴시켰으며, 그 후에 테이아Theia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 지구는 궤멸을 면치 못했다. 우리 지구의 가장 두껍고 가장 중요한 층인 맨틀이 테이아 전체와 충돌하면서 산산조각난 것이다. 테이아 잔헤들이 지구 잔해들과 뒤섞이면서 녹아내린 지구의 핵 속으로 내려앉았고, 오늘날까지도 거기에 남아있다. 그렇게 지구는 사실 테이아와 합쳐진 혼혈 행성이 되었다. (p. 38~39 발췌)

지구가 혼혈행성이었다는 것은 처음 읽어보는 내용이었다. 우리 은하 안에서 태양계 행성들이 생겨나던 초기 지구도 그냥 생겨난 것인줄 알았는데 지구는 지구 테이아 라고 이름붙인 커다란 행성과의 혼혈행성이었다. 그때 충돌이 없었다면 아마도 태양계 안에 테이아 라는 행성이 더 있었을 것이다. 화성보다 더 가까이에서 지구와 함께 태양주변을 돌고 있었을지도... 여하튼, 산산조각난 지구가 지구와 관련된 '최초의 대격변'이라 할만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산 증거를 우리는 매일 보고 있다고. 바로 '달' 이다. 달은 그냥 지구의 위성이라고만 여겼었다. 하지만 저자가 알려주는 '달'의 특성은 굉장히 독특했고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스스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아리스타르코스는 달과 태양까지의 대략적인 거리도 계산해냈다. 이는 천문학 역사상 보통 큰 사건이 아니었다. 1세기 후 그리스인 히파르코스가 850개의 별의 지도를 만들었고, 다시 약400년 후에 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지도에 170개의 별을 보탰다. 1,000개 이상의 별이 담긴 그 지도들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귀한 자료가 되었으며, 1725년까지는 더 나은 지도가 나오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빛의 밝기 분류법을 만들었다. 그의 밝기 분류법은 현대 천체물리학자들도 아직 사용 중이다. (p. 55)

기원전 200년 경부터 세계의 전혀 다른 지역에서 하늘을 관찰하던 사람들이 하늘의 변화를 연대순으로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이었다. 히브리인처럼 고도로 체계적인 문화와 문자 언어를 가졌던 초기의 주요 문명권 사람들이 천체 현상 기록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다른 문명권 사람들이 천체 현상을 집요하게 기록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히브리인의 경우 종교심이 워낙 강해 천체 현상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던데 데 반해, 중국인은 지구와 천체 간에 연관성 같은 걸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57)

불가능해 보일 만큼 밝은 이런 새로운 별이 1,500년 전에 나타났다면, 탐구심에 불타는 그리스인들이 많은 기록을 하고 별의 특성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11세기의 유럽에서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별이 무려 1년 넘게 밤하늘을 지배했는데도 그야말로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유는 뻔했다. 하늘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천국의 영역'이며, 기독교 고리에 다르면 천국의 영역은 변치 않는 불변의 영역이었다. 어쨌든 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그 어떤 연대기도 우주의 이 무례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중동 지역에서는 모든게 달랐다. 두 지역의 필경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 새로운 별에 대해 자세히 적었다. (p. 78)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인은 이미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밝혀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음에도 저자는 고대 히브리인들을 고도로 체계적인 문화와 문자언어를 가졌다고 이후 기독교시대에 천문관측은 의미가 없었을 뿐이라고 간단히 넘기면서 중국인들의 기록에는 흥미롭다고 한다. 서양고대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고대인들도 고도로 체계적인 문화와 문자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종교관을 가졌기에 천체 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이라고 표현해 줄 수는 없었을까... 서양중세시대에 뻥 뚫려 비어있는 천문학 자료들을 중국과 중동지역에서 얻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노학자에게 그건 어려운 관점인 것일까... 어쨌든, 우주의 대격돌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저자가 본격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양중세시대 이후의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므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묘한 일이지만, 이 특별한 폭발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타이밍 때문이다. 1572년 첫 번째 초신성 폭발이 있었을 때, 유럽은 이제 막 암흑기를 대체할 새로운 과학 탐구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폭발을 계기로 이 같은 새로운 계몽 시대로의 변화는 더욱 공고해졌다. 두 차례의 폭발은 공식적으로 sn초신성1572와 sn1604로 기록되고있으나, 그들의 유명한 이름인 '티코의 별' 과 '케플러의 별'은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P. 89~90)

우주... 신성... 초신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척 천문학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멀고먼 저 아득히 먼 어딘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만 여길것이 아니라 지구와 지구에 사는 인간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우주대격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우주이야기를 어느정도 마무리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지구의 대격변들' 이야기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 챕터에서 주로 다루어진 내용은 천문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핵'위험에 대한 경고였다.

유감스럽게도 20세기에는 세계 인구의 1퍼센트(이는 우리가 설정한 대재앙의 또 다른 기준이지만)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세 차례나 있었다. 이제부터 잠시 1918년의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이다. (P. 216)

1918년은 세계1차대전시기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재앙은 '독감' 전염성이다. 그리고 2차대전 마지막으로 핵(폭탄 과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다. 이 책의 본문이랄 수 있는 '지구의 대격변들' 에서 앞서서 풍기던 천문학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지구를 종말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핵' 이다. 하지만 저자는 천문학자이고 이 책의 주요 소재는 우주적 격변이기에 마무리는 다시 천문학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탐구해온 재앙들 중 일부는 지구에서 일어났다. 또 어떤 재앙들은 우리 지구와 가까운 우주 공간 안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데서 일어나 그 주변을 파괴시키는 재앙은 우리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꼭 그렇지는 않다. (P. 311)

마무리장은 3부는 '내일의 대격변들' 이다. 미래는 알 수 없기 마련이고 따라서 섣부른 예측은 위험하기에 가장 적은 분량일 수밖에 없을 터.

두 은하계는 초당 약96킬로미터씩 거리가 줄고 있어, 수십 년에 걸쳐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2012년에 나온 NASA의 연구를 통해 이런저런 의문들이 다 사라졌다. NASA는 두 은하계는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그야말로 완전히 정면충돌하게 될 거라고 결론내렸다. 앞으로 약 40억년 후면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p. 328)

우주 전체에서 흔힌 있는 일이지만, 은하계들은 보통 그 은하계 너비의 20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런 상태에서 서로 상호작용하지만, 서로 충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은하계들 속의 별들은 별 직경의 평균 100만 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래서 별들끼리의 충돌 또한 아주 드물며, 충돌이 일어날 경우에 관한 연구논문들까지 나왔다.

두 은하계가 충돌한다 해도 그 안에 있는 별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충돌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일부 별들은 중력에 의해 한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끌려갈 것이고, 언젠가 은하계를 바꿔 우리 은하계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합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충돌이 일어나면, 은하계를 바꾼다는 개념은 별 의미가 없다. 두 은하계가 합쳐져 전혀 새로운 한 은하계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p. 329)

지구와 태양이 속한 우리의 은하계는 안드로메다은하계와 충돌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지구의 종말 시나리오 같지만, 사실은 아니라고 한다. 하나하나의 은하계는 굉장히 광활하고 은하계와 은하계가 충돌한다는 것은 교통사고처럼 물체적인 것이 아니다. 은하계가 충돌한다고 해서 그에 속한 별들이 하나씩 짝지어져 충돌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초속 96킬로미터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계도 아니고 '홀로세 절멸' 이라며 폭발적 인구증가로 인한 지구자원소멸도 아닌 바로, '태양' 이다.

궁극적인 대재앙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우리 생물권, 즉 생물이 살 수 있는 지구 표면과 대기권의 완전한 파괴일 것이다. 이론의 여지없이 지구 생물권을 완전히 파괴해버릴 수 있는 재앙이 딱 하나 있다. 그 무서운 아마겟돈은 다행히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미래에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100퍼센트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태양 얘기를 하고 있다. 만일 태양의 내부 온도 조절 장치가 작동돼 방출 에너지가 2퍼센트 떨어지면, 무시해도 좋을 것 같은 그 감소로 지구는 곧바로 '눈덩이 지구' 상태로 변한다. 다시말해 육지는 물론 어쩌면 바다의 생물까지 모조리 죽는다는 의미이다. (p. 348~349 발췌)

태양의 흑점 폭발이 있었을 때 그 부근에서 가까운 지구의 지역은 전력이 나가고 자기장이 흔들리는 혼돈에 빠졌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인 태양은 사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태양은 별이고 우리는 별이 태어났다가 소멸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태양은 언젠가 빛이 꺼질것이고 지구는 그저 검은 암석덩어리가 될 것이다.

'최종 결정권은 태양이 쥐고 있다' 는 저자의 마지막 멘트가 '거의 모든 것의 종말' 을 설명하는 단하나의 답변인지도 모르겠다. 크게는 우주를 연구하고 작게는 핵분열을 연구하는 것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태양' 연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구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그 마지막에 대해 우리의 과학계 연구가 어디까지 다가갔는지 궁금해지지만 나의 짧은 인생 동안에는 지구종말이 오지 않으리라는 확신하에 이 시나리오는 그만 잊기로 맘먹으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의 살인 2
베르나르 미니에 지음, 성귀수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그날의 사건, 다 잊어도 그들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용의자는 많은데 결정적인 단서가 없다. 배후에서 수사를 흔드는 자는 누구인가?

세르바즈 형사는 여교사 살해 현장에 남아 있던 용의자 위고와 주변 인물, 치료감호소에서 사라진 연쇄살인마 쥘리앙 이르트만, 피해자와 은밀한 만남을 해온 국회의원 폴 라카즈를 중심으로 수사를 펼친다. 저마다 혐의점이 있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다. 범인은 거짓 단서를 흘려 수사를 혼란에 빠뜨리는 한편 더욱 대담한 살인 행각을 벌인다. 용의자들을 중심으로 전개해오던 수사는 끝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점점 더 짙은 안갯속으로 빠져든다. (표지 中)

1권에서 잔혹한 여교사 살인사건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2권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과거사건이 드러나면서 수사의 파편들이 끼워맞춰지기 시작한다. 세르바즈 형사의 심리에 몰입되면 될수록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스릴러의 분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정체모를 남자가 천신만고끝에 프랑스땅에 발딛게 된 말리남자에게 접근한다. 이 말리출신 이주민은 한 건물의 청소부다. 정체모를 남자는 USB를 건네며 거액을 제시한다. 프랑스에 자리잡고 싶은 이주민에게는 이미 앞서 그를 위해 했던일이 발목을 잡고 그가 내미는 거액의 돈이 너무나 필요하다.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결국 이렇게 말한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p. 19)

1권에서 그냥 평범한? 범죄자로 조사받았던 엘비스는 알고 보니 살해사건과 뜻밖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머잖아 겁이 날걸"

목소리 속에 어떤 것이 엘비스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저 확신, 저 침착함 그리고 차가움, 놈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베란다 바닥에 투명한 주방용 랩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는 새장 속 새 한마리처럼 가슴 속에서 파닥거렸다. (p. 46)

 

마르고는 여전히 학교안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을 뒤쫓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뿔사 들켜버렸다. "발칙한 년, 우리를 염탐하고 있었어?" (p. 35)

세르바즈는 마리안과 재회 이후 수사를 하면 할 수록 옛 친구 프랑시스에 대해 자신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엘비스가 목숨걸고 남긴 힌트를 보고나니 더더욱 프랑시스가 의심스럽다.

고교 시절보다 더 오래된 추억. 프랑시스와 세르바즈. 열두 살에서 열세 살 무렵이었다. 프랑시스가 그에게 도마뱀 한 마리를 보여주었는데 벽에 달라붙어 햇볕을 쬐고 있는 녀석이었다. "잘봐" 별안간 프랑시스가 삽인지 녹슨 칼인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무언가로 그 도마뱀의 꼬리를 절단했다. 잘려나간 꼬리는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듯 게속 움직였꼬, 도마뱀은 깜짝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르탱이 몸체에서 떨어져나간 채 살아 움직이는 꼬리를 신기해서 들여다보는 사이 프랑시스는 도마뱀이 구멍으로 사라지기 직전 녀석의 대가리를 큼직한 돌로 내리쳐 박살냈다. (p. 54)

하지만 프랑시스의 진면모를 알게 된 이후 세르바즈는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졌을 뿐이었다. 마리안에 대해서도 역시나 그는 너무 몰랐었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서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 부부사이라 해도 서로를 모르기 쉬웠다. 유력한 용의자인 라카즈 부부만 봐도 그렇다.

"쉬잔 라카즈입니다"

"제 남편에 관한 얘기입니다"

"지난번 저녁에 그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알리바이와 관련해서요" (p. 91)

 

쉬잔이 세르바즈에게 털어놓은 것은 라카즈와 쉬잔의 부부사이를 정리하는데 결정적이었을 뿐 정치인의 속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살인범을 추적하는데는 큰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유력한 용의자였다.

엘비스, 라카즈, 프랑시스, 이르트만. 드라마의 등장인물 네 명은 지금 형사를 가운데 두고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원무를 추고 있는 셈이었다. 눈을 가린 술래는 두 팔을 뻗은 채 대책 없이 더듬거리며 살인마를 찾고 있었다. (p. 113)

독특한 여교사 살인사건이 세르바즈 자신과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지 그는 처음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건을 파고들면 들수록 자신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의혹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되는 현실이 버겁도록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딸 마르고를 지켜야 했다. 그 마르고가 사건의 중요한 힌트를 알아낸다.

다시 서클이 그려졌다. 매년, 같은 날이었다. 6월17일, 각자의 몸뚱어리에 새겨진 날짜였다. 10. 그것은 머릿수. 딱 떨어지는 수였고, 글자그대로 서클이었다. 희생자가 17명이었고, 생존자가 10명이었다. 6월 17일. 신, 우연 혹은 운명의 뜻이었다. 그들은 눈을 감은 채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에 자신들을 내맡겼다. (p. 236)

매년 6월이면 일어났던 사고 혹은 실종으로 처리되었던 사건들은 개별적이고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다. 숨어있던 그들이 여교사 살인사건에선 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는가? 연결성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뚝뚝 끊어지는 지점들이 세르바즈를 갈수록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이르트만의 망령이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마르삭...

마르삭.... 과거는 한번 솟구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솟구쳤다가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배가 가라앉기 직전, 수직으로 꼿꼿이 일어선 선체와 유사했다. 그가 믿었던 모든 것,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젊음의 추억, 존재 깊숙이 자리한 그 모든 향수는 다름 아닌 환상이었던 것. 그동안 거짓을 토대로 인생을 구축해온 셈이었다. (p. 244)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돌이켜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헌병대장 이렌의 도움으로 하나하나 단서를 추가로 모아가면서 세르바즈는 마침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트라우마... 그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잘못된 거였다. 그래서인지 사건이 해결되려던 마지막에 새로운 비극이 탄생하고 만다.

"그녀는 자네의 신의와 사랑을 배신했네, 마르탱. 벌을 받아 마땅했어" (p. 458)

이르트만, 그가 나타났다.

1권부터 2권까지 본 내용의 사이사이 등장하던 이르트만과 그의 범죄대상은 사건수사와 동일한 시간대가 아니었다.

이르트만은 트라우마 따위 상관없는 진정한 싸이코였다. 그런 그가 마르탱을 자신의 분신처럼 의식하기 시작한다. 이르트만과 세르바즈가 만났던 그 단한번의 만남이 어쩌면 이미 또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둘은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할 것 처럼...

주변이 온통 삶의 에너지로 들끓고 있었다. 경제위기에 관한 그 모든 잡설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에 대해 어설픈 통계나 수치를 들먹이며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기자들이 생각났다. 아울러 모든 은행가들, 경제학자들, 탐욕스러운 투기꾼들, 부패한 금융가들, 앞 못 보는 정치꾼들도 떠올랐다. 그들은 반드시 이곳에 와 깨우쳐야 했다. 여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일하고 존재하기를. 단지 연명하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로 너처럼 말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p. 467)

사건은 해결됐지만 세르바즈는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벼랑끝에 서서 자꾸 아래로 향하는 시선을 겨우겨우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혼자 숨어있듯이 머물던 곳에 마르고가 찾아왔다. 그제야 그는 다시 벼랑끝에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평화롭고 단순하며 이상적인 날들은 그렇게 흘렀다. 정녕 어떤 계획도, 어떤 계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동트기 조금 전, 그는 아주 평온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고, 샤워를 한 다음 가방을 쌌다. 간밤에 그녀의 꿈을 꾼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그녀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르트만이 이미 그녀를 살해했다면 놈은 어떻게든 그걸 알려왔을 터였다. 그는 방을 나섰다. (p. 472)

사건이 해결됐으나 또다른 사건이 시작되는 기분으로 끝나는 마지막장을 보며 이 소설이 시리즈의 일부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저자 베르나르 미니에는 마르탱 세르바즈 라는 인물을 페르소나로 내세워 총 다섯 작품 '눈의 살인' '물의 살인' '불 끄지 마' '밤' '자매' 를 발표한 상태라고 한다. 뭐랄까 프랑스적인 고전문학적 사고방식과 깐느영화제에 출품됐음직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 펼쳐지는 장면묘사들이 아 이것이 프랑스풍 스릴러 소설이구나 싶었다.

원제는 '서클' 이었다는데 '물의 살인' 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소설 속 중요사건이 물에서 시작되었고 소설 시작에서의 사건 현장묘사가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매년 제물처럼 물에 바쳐져야 했던 사건들의 연결고리는 남은 서클 이라기 보다는 물 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읽으면 더욱 등골 서늘해질 추리소설 '물의 살인' 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이아, 숨어 있는 생명의 기원
엘리자베스 M. 토마스 지음, 정진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생물은 일련의 협력관계에서 진화한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특별하지 않고, 자연계에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미물도 모든 생명체와 연관이 있다.

표지 뒷날개 中

 

가이아

신화속에서 대지의 여신 이름인 가이아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를 의미하곤 한다. 가이아이론 혹은 가이아학설은 지구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적)유기체로 보고 따라서 모든 것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조화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화속 여신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지구 또한 인간의 눈에 담기엔 너무나 거대한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남긴 흔적을 쫓아 지구라는 유기체의 기원을 탐구하고 가이아가 숨겨놓은 생명력을 얼추 찾아내오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Hidden Life of Life - A walk Through the Reaches of Time 삶의 숨겨진 삶 - 시간의 범위를 걷는 것> 이다.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간단히 생각했을때 두 가지 방향에서 가능할 것이다. 현재에서 출발하여 과거로 가는것 아니면 태초에서 시작하여 현재로 오는 것.

이 책은 과거에서 현재로 오고 있는데 생명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다 보니 읽다보면 내가 마치 가이아가 된 것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내가 가이아라고 여기며 생명을 하나하나 살펴보다보면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까지 애정의 눈으로 보게 되고 그렇게 지구라는 유기체를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된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는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고 서로 하나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추적하려고 한다. (p. 12)

유기적 연관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첫장부터 강조함으로써 이 책의 방향성은 뚜렷한 셈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미생물과도.

우리에게 유익한 미생물은 우리와 함게 거주할 뿐만 아니라 진핵생물 속의 세포보다 그 수가 10배 더 많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며, 그들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 우리는 승객들로 가득 차 있는 초만원 기차처럼 빽빽하고 밀도 높은 생태계 속에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독립적이고 외로운 유기체라고 생각한다. (p. 26)

미생물의 중요성은 아무리 과장해서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상에서 생명체 형태의 기본적인 분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물과 동물 분류가 아니라 원핵생물과 진핵생물의 분류다. 지구가 생성된 후 처음 20억 년 동안, 원핵생물은 지구의 표면과 대기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p. 44)

태초의 지구에 지금 우리가 생명체라고 여길만한 존재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같은 곳에서 나온 것이고 당연하게도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생물은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 데 20억 년이나 걸렸다. 사람들은 왜 20억 년이나 걸렸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20억년 동안에도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미생물을 만들고 있었다는 뜻일까? 사실 미생물은 종류가 많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 시간 동안 심지어 미생물도 진핵생물도 아닌 진핵생물과 같은 종류 또는 어떤 생명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구는 초기에 화산이 분출하고 유성과 충돌하여 힘든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미생물이, 다르고 알 수 없는 유기체를 생산했다면, 그들은 화석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p. 47, 48)

인간이 알수 없는 시간에 대해 알아내는 방법은 과거가 남겨놓은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화석. 그런데 나는 아마도 모든 과거가 화석에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화석으로 남지 않은 (화석이 된 생명체 이전의) 생명체가 있었다는 문장에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 긴 시간 동안 아무 생명체도 없다가 갑자기 화석에 남은 그런 생명체들이 등장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건데, 지구가 수차례의 생명체 멸종을 경험했고 남은 것보다 남지 않은 생명체들이 많았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 듯 하다. 지구는 정말로 쉬지 않고 생명체를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신비로운 기분이 들 정도다.

흥미롭게도,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곰팡이, 동물 또는 식물은 원생생물과 관련이 있다. 우리와 관련된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열대열원충말라리아다. (p. 54)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균류를 모든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p. 68) 진균류로 발달하는 원생생물은 사람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p. 74)

어떤 물질에서 세포에서 균에서 생물에서 (사람을 포함한) 동물로의 변화는 길었던 과정의 시간대비 책에서는 빠르게 진행된다. 그 길고 길었던 시간의 변화에 대해 지금의 우리가 알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파악하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생명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종류에 대해서는 앞으로 추가로 언급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등'존재는 우리 자신의 정의에 의해서만 '고등'인 것이다. 우리가 '하등'한 것으로 보는 다른 것과 비교할 때만 분명하기 때문이다. (p. 74)

인간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외의 모든 것에 대해 인간과 비교하여 차별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인간이 지적이면 다른 생명체는 무지하고 인간이 고등이면 다른 생명체는 하등이다. 하지만 가이아적 입장에서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각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원래의 판게아는 적절한 시기에 갈라져서 더 작은 대륙이 되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바다는 어디에서나 접근할 수 있다. 판게아를 제외한 건조한 대지는 그렇지 않았다. 생명체가 대륙과 섬에서 살기 시작한 후, 그들은 날지 않는 한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지구의 흥미로운 존재는 대부분 날지 못했다. 이런 고립은 중요하다. 고립은 많은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고, 공기와 햇빛으로 당을 만들고 산소가 자유롭게 떠다니게 할 수 있는 생명체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 (p. 92, 93, 94)

진화에서 고립은 중요했다. 너르고 너른 한덩어리로 있었을 때보다 작게 갈라지고 쪼개져 환경이 제한적이 되었을때 진화가 더 빠르게 가능했으리라는 생각도 이제야 해본다. 그냥 그대로 살 수 있으면 진화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있던 대로 살 수 없었기에 진화해야만 했을 것이다.

공기와 햇빛으로 당을 만들고 산소가 자유롭게 떠다니게 할 수 있는 생명체, 저자는 식물을 등장시킴에 있어 가장 먼저 지의류에서 출발한다. 지의류 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검색해봤다. <지의류 - 균류와 조류의 공생체. 균류는 조류를 싸서 보호하고 수분을 공급하며, 조류는 동화 작용을 하여 양분을 균류에 공급한다. 나무껍질이나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데 열대, 온대, 남북극으로부터 고산 지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참나무는 어디서나 이처럼 단체 행동을 한다고 한다. (p. 114) 지능을 가졌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식물은 또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p. 119)

도토리를 먹는 동물이 너무 많아져서 땅에 심어져 싹을 틔울 도토리가 부족해 졌을때 참나무들은 서로 소통하고 다음해 단체로 도토리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러면 도토리를 먹지 못한 동물개체수가 줄고 그 다음해에 참나무는 다시 도토리를 맺는다. 나무들의 의사소통에 관해 최근 읽은 책에서도 나왔었는데 식물의 대화라니 여전히 신기할 따름이다. 지능은 동물만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 애매해진것이 식물의 대화뿐만 아니라 식물의 기억력때문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미모사는 갑자기 물이 잎에 떨어졌을때 잎을 접지만 그 물방울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엔 다음번 물방울부터는 잎을 접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의 구분도 그동안 너무 획일적으로 판단해온 것이 아닐까.

그게 바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실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몸은 따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하거나, 콧물이 나오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심장은 뛰고 콩팥은 물질을 걸러내고 폐는 공기를 주입힌다. 우리의 생각은 나중에 작동한다. (p. 119, 120)

우리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신체능력을 조절해주진 못한다. 퓨마를 만났을때 자동적으로 소름이 돋지만 도망가야겠다는 행동은 그 다음에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식물은 생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는 않을 지언정 느끼고 기억하고 바로 자신의 능력을 조절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동물과 식물의 사고체계가 다르다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식물은 건조한 대지를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고, 그곳에 다음 동물이 도착했는데 그들이 바로 절지동물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동물문으로 최초로 물을 떠난 동물이다. (p. 127) 오늘날 절지동물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그 수가 많다. 그들은 널리 퍼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분류학적으로 우성인 구성원이나 훗날의 척추동물이 하는 일을 했다. 즉, 체구가 매우 커진 것이다. (p. 130) 척추동물은 절지동물만큼 많이 번식하지 않았다. 우리의 조상은 해면동물이나 산호충처럼 바다 밑 지대에 붙어 있는, 미삭동물이나 미삭동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수생 생명체인 멍게였다고 여겨진다. (p. 132)

가이아 라는 명칭이 신화적 의미로 생명의 어머니라고 불린다면 바다는 실질적인 의미로 생명의 어머니로 불리는 것 같다. 생명체의 시작은 바다였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조상이 멍게였다니 ㅍㅎㅎㅎ 신선하다!

척수의 이름을 따서 우리는 척삭동물문이다. 오늘날 달 위를 걷는 우주 비행사와 바다 밑 바다에 박혀 있는 멸종된 여과섭생을 하던 멍게류와 닮은 점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의 조상의 업적을 명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척삭동물문에 멍게를 포함시킨다. 그래서 척수가 있어 책을 읽고, 차를 운전하고, 전쟁을 하고, 현미경을 통해 멍게류이 화석을 관찰한다. (p. 134)

어려울 수 있는 자연과학적 이론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으로 서양사람들은 의외의 위트나 은유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들의 위트가 항상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멍게는 내게도 통했다. ㅎㅎ

물고기가 공기호흡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고 기온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위아래 어느 방향으로도 이동할 수 있는 3차원 생태계인 바다가 있는데, 왜 물고기들은 육지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을까? 물론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포식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초기 척추동물로 추측되는 많은 것은 다른 수생동물에 비해 몸이 작아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흥미롭다. (p. 140)

멍게와 물고기를 거쳐 양서류로 왔다. 지구는 육지보다 바다가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하지만 육지의 생태계는 더 급속하고 다양하게 진화되어 왔다. 평온해 보이는 바다가 생태계적 입장에서는 더 살기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고 진화해야만 하는 육지의 생태계가 더 살기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가이아는 한 순간도 쉬지 않아 온듯 하다.

양서류는 6500만 년 동안 육지에서 번성한 절지동물보다 늦게 나타나서 식물에 의해 조성된 생태계를 차지할 정도로 적응했다. 절지동물은 새로 나타난 양서류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서류 성체는 오늘날에도 절지동물외 다른 동물은 먹지 않는다. 절지동물은 양서류에게는 유일무이한 식량자원이다. 양서류는 시간제 육상동물이 된 이후 절지동물이 했던 일을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항상 젖어 있거나 촉촉한 다른 종류의 생태계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발전했다. (p. 142) 그들은 모든 단점을 잘 극복했고, 모든 절지동물을 먹으며 5000만 년 동안 지구를 통치했다. 양서류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구를 지배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5000만 년은 50만 세기다. (p. 144)

50만 세기라...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긴 시간동안 지구의 육지가 양서류 세상이었구나.... 하지만 지구에 대규모 멸종상황이 발생했고 많은 양서류가 멸종할때 절지동물과 곤충은 거의 영향받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그냥 벌레라고 퉁쳐서 지칭하는 그 생명체들은 정말... 위대하구나;;; 여하튼, 이 양서류에서 양막류가 나왔고 이 양막류는 크게 두 방향으로 진화했는데 한쪽은 포유류 다른 한쪽은 공룡,익룡, 현대의 파충류와 조류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에서 알이 먼저다. ㅎㅎ(이 결론은 얼마전 읽은 다른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공룡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며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이들이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것은 우리 계보의 초기 구성원이 적어도 항상 크지는 않았지만 외관상으로는 무섭게 생긴 공룡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에 믿기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공룡'이라는 이름과 달리 우리 조상의 이름은 박사 과정의 연구과제가 될 정도다. 그 이름은 '단궁류'다. '융합된 아치(궁형)'를 의미하며, 당신의 관자놀이 옆에 있는 얼굴 측면에서 시작하고 광대뼈와 위턱뼈로 구성된 뼈의 다리를 의미한다. (p. 151) 발자국을 남긴 발은 똑바른 다리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포함한 많은 오늘날의 포유류의 것과 같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손이 단궁류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고 단궁류가 오늘날의 보행 방법을 발명했음을 의미한다. (p. 154) 단궁류에는 아마도 비늘이 없었겠지만, 피부도 화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피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p. 155) 단궁류는 8000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한 후에, 여러 종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 줄어들었다. 살았던 것 중에는 우리 조상이 된 오리너구리 타입이 있다. (p. 157)

인류의 기원을 세포나 멍게로 얘기할 때만해도 아주아주 먼 옛날 이야기구나 싶어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공룡시대의 조상이라... 구체적으로 오리너구리 타입이라니;;; 유인원을 넘어선 인류의 조상을 생각하는 것은 뜻밖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단궁류' 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지만 진화에 있어 중요한 획을 그은 단어인 것 같다. 하지만 늘 유의해야 할 것이 중요한 핵심단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주변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단궁류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 다른 타입의 파충류가 진화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봤을때 그들이 지배파충류였다. 바로 공룡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공룡 종의 무리는 '새' 다.

공룡은 평생 성장하지만, 아기는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사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공룡은 대부분 완전히 성숙할 때까지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단정짓기 어렵다. (p. 170) 새의 호흡은 동물 호흡 중 가장 효율적인 형태며, 아마 공룡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은 자가 가온의 징후일 수 있는데, 태양 가온보다 산소가 더 많이 필요하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포함한 많안 공룡은 깃털이나 솜털이 있었는데, 솜털은 아마도 어릴때에만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자가 가온의 징후다. (p. 171) 그리고 익룡이 생겨났다. 또 다른 조룡이다. 익룡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룡과 공존하는 전설적인 동물이고 자가 가온 동물이다. (p. 173)

거대한 크기의 공룡화석을 보며 그것이 성체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공룡의 골격에서는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인 뼈층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평생 자라거나 내부 장기가 너무 커서 그들을 지지할 수 없을때까지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혹한 생태계에서 그렇게 자라다가 먹고먹히게 되는 것이다. 더 클수 있었다니;;; 온혈과 냉혈 동물의 구분이 생기기 전에 이런저런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진화였던 것 같다. 여하튼 티라노사우루스에게 깃털이 있었다는 내용을 작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생소했지만 이제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ㅎ 하지만 새를 보면서 공룡을 연상하는 것은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ㅎㅎ

일부 익룡은 거대했고 모두 날 수 있었다. 그들은 공룡시대에 살았으며 처음에는 공룡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독특한 형태의 파충류였고, 공룡보다 더 흥미로웠다. (p. 186) 익룡은 온혈동물이었던 것 같다. (p. 194) 우리는 석탄기와 백악기 사이의 시간을 생각하고 있다. 약 1억 5000만 년의 기간이다. 그 기간동안 공룡과 익룡 뿐 아니라 돛이 있거나 없는 다양한 크기의 광범위한 단궁류의 집합체인 우리 원시 포유류 조상들이 살았다.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은 이 시대에 속하는 유일한 큰 동물은 악어 타입, 즉 앨리게이터, 가비알, 카이만을 포함하는 그룹이다. (p. 197)

공룡으로 다 뭉뚱그려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익룡도 악어도 공룡과 달랐다. 악어들은 공룡과는 별도로 지배파충류의 조상에게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한다. 이 악어타입은 육지동물인 공룡에서 진화되어 나왔지만 다시 물로 되돌아갔다. 악어외에도 수달, 오리너구리, 고래, 돌고래도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진화의 방향은 역시 직선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또다시 느낀다.

6600만 년 전, 세계는 백악기~제3기 대멸종을 경험했다. 대멸종이 없었다면 지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가지 이론은 멸종기간은 짧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으며 혹독했다는 것이다. 식물, 육상동물, 해양생물, 즉 곤충을 제외한 모든 생물체의 75%가 사라졌다. (p. 203) 첫 번째 셍물체가 유성으로 인해 사라진다면 그들과 유사한 다른 생물체가 진화하여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가이아는 멸종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아이디어 자체가 좋으면, 그녀는 종종 다시 시도한다. (p. 207)

대멸종이 발생할 때마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확확 바뀌었다. 어쩌면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대멸종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명체는 다른 모습으로 계속 등장했고 아마도 새 생명체가 등장하는 시간은 점점 빨라지지 않았을까? 한번 만들기를 했다가 부서뜨리고 새로 만들땐 더 빨리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가시두더지와 오리너구리는 단공류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단공이란 그리스어에서 온 단어로 '하나의 구멍'을 의미하고 총배설강을 뜻한다. 그들은 대변이나 소변 그리고 분만을 위한 배출구가 따로 있는 우리와는 달리, 새나 파충류처럼 배출구가 하나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포유류보다 조류나 파충류와 더 비슷하다. (p. 216)

오리너구리는 생각보다 아주 고대적 동물이었다!

100만 년 동안 화석이 된 사람들은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에서 진화한 것이 틀림없지만, 그들의 새로운 분류학적 이름은 오로린 투게넨시스(투겐 출신의 토착민)이며 그들을 밀레니엄 맨 이라고 한다. '원시인' 과 '호모 사피엔스' 에서와 같이 모든 조상은 '남자' 또는 '호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가사일을 제외한 모든 주요한 일을 남성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번째 '남자' 화석인 '밀레니엄 맨'은 아주 공정한 명칭이다. (p. 231) 밀레니엄 맨은 약 580만 년 전에 사라졌는데, 이는 그 종류이 사람이 200만 년 동안 살아남았음을 의미한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멸실환, 즉 '미싱링크'로 인간과 유인원 사이로 보이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변형되었다. (p. 233)

조류와 포유류를 거쳐 유인원까지 왔다. '밀레니엄 맨' 이라... 이런 명칭이 있었구나... 하지만 사전에 검색하면 안나온다;;; 역시 호모어쩌구저쩌구 라는 학명이 우세한 것이겠지...

사람상과(우리를 포함한 유인원) 와 사람족(인간 형태의 우리 조상의 한 부류) 이 널리 흩어져 자신의 환경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조상들을 한 번에 하나씩 등장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유인원과는 (우리가 보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종류의 원시 인간이 함께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 인간형을 생각할 때에는 여러 종류의 동물이 있었고,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많은 동물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기에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p. 238)

진화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가장 크게 공감하는 것이 바로 이부분이다. 인류의 진화과정을 한장의 직선형 발달로 설명하는 그림은 떼어내야 한다. 인류는 작고 구부정한 모습에서 점점 허리가 펴지고 털이 없어지며 키가 커진 순서대로 그렇게 단 한가지 단 하나의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동시대에 수많은 유인원이 함께 존재했다. 유일무이한 존재로 대를 이어 변모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의 진화에 대한 가장 커다란 왜곡이다.

호모에렉투스 와 네안데르탈인을 간략히 살펴보고 나서 저자는 부시먼으로 알려진 '산족' 에 정착한다. 아주 최근까지, 여구 6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바로 위의 조상이라고 '산족'을 표현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는 왜 우리가 보는 방식을 되돌아보는가'

그 사람들은 '접촉 이전', 즉 다시말해 그들은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것에 접촉하지 않았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선진 세계' 사람들이 감염되는 질병이 없었다. '접촉 이전'은 종종 단점으로 여겨지지만,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우리 종족처럼 적어도 10만 년 동안 살았으며, 그들의 문화는 이제까지 세계에 알려진 문화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문화일지도 모른다. (p. 259)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주환시라고 불렸다. 주환시는 '무해한 사람들'로 번역했다. Ju는 '사람'을 의미하고 hoan은 '깨끗하고 안전하며 유해하지 않다'라는 의미고 si는 복수형이다. (p. 263) 오늘날 산족은 나미비아인으로 시골에서 살고 있고, 그들의 이전 생활방식은 사라져 버렸다. (p. 266)

저자는 '주환시' 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함께 지내며 보고 배웠다. 그들은 결코 미개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혜는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그 환경 속에서는 그들의 지혜가 더 빛났다. 하지만 몇 년 후 다시 저자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

바오바브나무 근처에 백인의 집이 있는 것을 보았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샘물에 갔지만, 한 백인이 집에서 나와 샘물이 자신의 것이르모 물을 마실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접촉 이전의 주환시와 처음 만났을 때는 몇 분 만에 우리에게 물을 마시라고 초청했었따. 나는 시대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바오바브나무는 일찍 죽었다. 백인이 잔디에 물을 주느라 샘물이 고갈되었기 때문인듯 했다. (p. 299)

저자가 처음 갔을때 적어도 200년은 된 거대한 바오바브나무옆 작은 샘 가까이에 주환시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주환시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들은 빼앗은 것 없이 빼앗겼다.

산족은 자연세계에 사는 다른 모든 생명 형태와 같은 종류의 삶을 살았으며 우리와 가축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서로 다른 종은 욕구도 문제해결 방식도 다르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산족은 이것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도 같은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채, 다른 종을, 지식은 가지고 태어났지만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 조상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종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한, 다른 종도 관찰하고 배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p. 274)

주환시 즉 산족의 생활방식은 굉장히 협력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식량을 구하고 삶을 지속하는 것이 '문명'사람들에게는 고난과 힘듦으로 보였지만 그들은 모든 면에서 굉장히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미 접촉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들을 과거의 생활모습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순 없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평화로운가?

저자가 마무리짓는 현재와 미래는 암시적일뿐 (어쩌면 당연하게도)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이아로 이 책의 흐름을 읽어오면서 내가 가이아라면 지금의 현실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는가?

얼마전 읽은 SF 소설에서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해지면서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 로딩되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라면 온전한 육체로 환경에 적응하며 정신을 육체와 함께 유지할 것인가 최신기술에 힘입어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 떠도는 세계로 로딩될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로딩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욱 그런 마음이 견고해진다. 원래 갖고 있고 누리고 있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된 환경이 비참하여 육체를 버리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원래 라는 것 자체를 생각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할 수 있나를 해결해나가는 쪽이 나는 더 마음편하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매이지말고 가질 수 있는 것을 찾아가며 사는 것이 좀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자꾸 이런저런 곁다리로 빠지곤 했지만 쉽게 읽히는것에 비해 어려운 생각들을 심어주는 책이었다. 가볍게 생물학책으로 읽어도 좋겠고 진화의 흐름을 따라가보는 것에서 그쳐도 좋겠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고민해봐야 하는지 찾아가며 읽는다면 더 좋을 포괄적인 주제의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친구가 될 식물을 찾아 주는 식물 사진관 - 포토그래퍼의 반려식물도감
이정현 지음 / 아라크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포토그래퍼의 반려식물도감

저자는 사진작가다. 사진을 찍고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을 한다고 자기소개를 한다.

그런 저자의 눈에 식물이 들어온다. 새삼스럽게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식물의 사진을 찍고 식물과 식물의 사진에 대해 글을 쓰다보니 어느덧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은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자 식물사진전을 관람하고 나온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진작품집이기도 했다.

자칭 '식물똥손'이라며 직접 기른 식물보다는 꽃집동생의 도움으로 잠시잠깐씩 빌려온 새로운 식물과 함께 하고 사진을 찍지만 식물을 보다보니 점점 더 알고 싶고 공부하게 되고 직접 키우게 되면서 식물에 대한 마음만큼은 '식물금손' 저리가라 할 만큼 풍성해진 저자이다.

50여가지가 넘는 다양한 식물들은 하나같이 생소하고 낯설었기에 식물도감이라 할만했고, 그 식물들의 특징과 주의점을 읽다보면 반려식물을 찾아주려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여 따듯했고, 포토그래퍼의 능력이 출중하게 발휘된 사진을 보다 보면 사진하나하나 작품을 감상하듯 그윽하게 보게 되고, 식물에 대한 저자의 감성을 읽다보면 한글자라도 놓치는 것이 미안하여 천천히 꼼꼼히 읽게 되는 진심 가득한 에세이였다.

매 식물마다 첫장에 식물의 전체컷과 식물의 학명을 비롯한 정보 그리고 빛, 물, 온도 등의 재배조건등을 정리해놓고 나면 다양한 각도에서의 식물사진과 그만큼 다양한 방면으로 퍼지는 저자의 생각을 읽게 되는데 식물 하나에 대해서도 이렇게 쓸 수 있구나 싶어 신선하고 무엇보다 감각적인 사진들이 보기에 너무 멋졌다.

제목에서부터 읽는이의 반려식물을 찾아주고파 하는 마음에 응답해보고자 식물하나하나 내게 맞는 반려식물을 무엇일까 고심하며 고른 끝에 나는 3가지를 고를 수 있었다. 회오리선인장, 장미허브, 필레아. 골라놓고 보니 둥글둥글한 식물에 지금 마음이 가고있구나를 깨달으며 뾰족한 잎들에게 땡기지 않는 내 마음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겨 보기도 했다.

선인장이나 다육에 별 애정이 없던 때에는 그저 둘이 서로 다른 종류의 식물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육은 줄기나 잎에 수분을 비축하는 식물 모두를 뜻하는 말이고 선인장은 선인장과에 속하는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인장과의 식물은 전부 줄기에 수분을 비축하니까 모든 선인장은 다육식물에 속합니다. 그러나 선인장과는 아니지만 다육의 특징을 가지는 식물은 수없이 많으므로 다육식물이 모두 선인장인것은 아니죠. 다육식물의 원산지는 전 대륙에 걸쳐 있지만, 선인장은 주로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입니다. (p. 188)

선인장과 다육식물에 대해 나도 별다른 구분기준을 몰랐던 것 같다. 책속에는 다육식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아무래도 실내에 두고 키우기 좋은 화분용 식물의 종류가 다육이가 많아서 그런가 싶다. 나도 다육이를 여럿 보내본 식물똥손인데;;; 뾰족한 가시의 선인장은 말라죽고 매번 과습으로 썩어버리곤 했던 다육이... 여전히 내게는 어렵기만 한 식물들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만의 식물을 찾아 늘상 꽃집앞을 기웃대는 걸 보면 반려식물이 필요한 것 같긴 한데;;;

관엽식물이라는 말은 다육만큼이나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단어였습니다. 찾아보니 잎(엽)을 관찰(관)하기 위한 식물이라는 뜻입니다. 꽃보다는 잎의 모양이나 색깔을 감상하기 위해 재배하는 식물을 일컫는다고 해요. 다육이나 선인장처럼 식물 자체의 특징을 한 이름이 아니라 식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어떤 식물이든 잎을 관찰할 수 있으니 상당히 애매하긴 하지만, 특별히 잎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되는 식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p. 194)

몬스테라를 읽으며 관엽식물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다육이 종류외에는 몬스테라에 애정이 큰 것 같은데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리거나 잎 가장자리가 여기저기 갈라지는 몬스테라 잎이 감상하기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다른 식물 종류를 좀더 배워야 할 것 같다.

에어 플랜트가 행잉 플랜트와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행잉 플랜트는 공중에 걸어 놓고 키우는 식물 전체를 부르는 말이지만, 에어 플랜트는 틸란드시아속에 속하는 식물을 지칭하는 말이었어요. 틸란드시아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공기 중에서 수분과 영양소를 빨아들이며 살아 에어 플랜트라고 불리게 되었지요. 우리나라 말로는 공중 식물이나 공기 식물이라고 부릅니다. (p. 205)

수염이 길게 자란것 같은 틸란드시아나 틸란드시아와 짝꿍인듯 함께 구성된 이오난사가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눈에 많이 띄었었다. 보면서도 참 신기하다 했었는데 책에서 다시보니 반가웠다. 이오난사는 여전히 애정이 가는 식물인데 울집에는 식물을 걸어둘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핑계로 여전히 꽃집에서 구경만 하다 오곤 한다.

식물이 공기정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효과를 너무 확대해석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기정화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식물이 있어야 하니까요. 책상 위에 조막만한 화분을 하나 놓고 넓은 사무실이나 집 전체의 공기가 깨끗해졌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사의 실험이 이상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3.3제곱미터(약1평)에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식물을 놓아야 효과가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p. 213)

식무에 따라 제거할 수 있는 유해 물질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야자류는 포름알데히드를 제거하고, 관음죽과 국화는 암모니아를 흡수해서 화장실에 놓으면 좋다고 해요. 스타티필룸은 벤젠 같은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알로카시아는 사무기기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을, 아이비는 가정용품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을 흡수한다고 합니다. 식물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될 것같이 들리지만, 역시나 확실한 효과를 보려면 식물이 아주 많아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p. 214)

공기정화식물이라고 수식어가 붙은 식물들이 아무래도 많이 팔리긴 한다. 일정기간 꽂아두었다가 버려야 하는 꽃다발과 달리 화분은 오래둘 것이고 오래둘 것이라면 장식성 보다는 편리와 가치를 따져보게 되기 때문이다. 기르기 쉽고 튼튼하고 오래 가는데 공기정화까지 된다면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으므로 공기정화식물은 어느 집에나 한두개쯤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공기정화 효과를 누리려면 정말정말 많은 화분이 집안에 있어야 한다. ㅎㅎ

우리가 스투키로 알고 있는 식물 대부분이 실은 산세베리아 실린드리카라는 것입니다. 둘은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스투키는 줄기 가운데에 깊은 홈이 파여 있습니다. 스투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외양은 비슷하지만 성장 속도가 더 빠른 실란드리카를 판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실린드리카는 한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부채 모양으로 펼쳐지며 나오는데, 이 줄기를 잘라 스투키처럼 한 줄기씩 꽂아 판매하다고 합니다. 어차피 가까운 친척 사이이고 키우는 법도 비슷해 별일 아니라고 할수도 있지만, 스투키가 국민 식물의 명성을 누리고 있으니 실린드리카나 스투키 둘 다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p. 218)

스투키도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화분이다. 그런데 그게 스투키가 아니었다니. ㅎㅎ

저자는 식물의 학명과 본래 이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참 좋았다. 무엇이든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시작하기에 식물의 이름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식물과의 만남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가왔다.

저는 킬러급 식물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식물을 좋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식물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처음 듣는 음악을 친구들에게 들려줄 때의 뿌듯함과 비슷하지요. 음악도 사진도 대중적인 것뿐만아니라 소수의 취향에 맞는 것도 계속해서 생산되고 소개되어야 한다고 믿는 저는 식물도 그랬으면 합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취향이 소중하고, 무엇이든 하나라도 독특한 걸 추구한다면 식물도 그런 걸 키워 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반대로 뭐든지 무난한 게 좋다면 식물에서만큼은 숨겨 왔던 개성을 드러내 보라고 바람을 넣고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감추고 있는 의외의 면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p. 227)

나는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고를 때에도 가장 큰 기준은 무난함이다. 하지만 저자가 찍은 사진 속 식물들은 대부분 독특하다. 독특하지만 저자의 사진 속에서 자연스럽게 멋스러움을 뽑내다 보니 홀린듯이 쳐다보게 된다. 내가 그런 독특한 식물을 집에 들이는 날이 올까? 글쎄...

독특한 것과 평범한 것은 조화를 이룰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면 일탈을 꿈꾸게 되고, 독특한 일만 일어나면 이내 지쳐서 잔잔한 평범함이 그리워집니다. 어찌보면 독특함과 평범함은 저마다의 기준에 맞춰 마음대로 그어 놓은 아주 불분명한 선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가장 평범한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고, 특별하다고 느꼈던 것의 평범한 모습을 발견할 때 더 감격하곤 합니다. 평범하게만 느꼈던 식물의 특별함을 날마다 발견하면서 일어난 변화인 듯 합니다. (p. 230)

모든 것은 조화로울 때 가장 편안할 것이다. 독특함도 평범함도 어느 한쪽이 튀게 되면 사실 불편해진다. 평범했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된 요즘 저자의 독특한 식물들이 멋있어도 딱히 반려식물로 들이고 싶어지지 않는 것은 평범한 식물이라도 보면서 지금의 독특한 일상을 잊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마스크 벗고 다닐날은 과연 언제쯤 온단 말인가...

글을 잘 쓰려면 그저 참신한 글거리를 찾아 매끈한 문장으로 만들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살면서 일어나는 일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잘 내려앉아 어떤 의미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붙들어 두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느끼게 해 주었죠. (p. 249)

사진찍는 모든 이가 글까지 다 잘 쓴다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ㅎㅎ 저자도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자신감도 없었다 한다. 하지만 친구의 도움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과 성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저자처럼 초보작가라 할만한 이의 글을 읽다보면 마음에 닿는 글이 있고 아닌 글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풀어 쓸 수 있느냐가 읽는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곤 한다.

저도 어디에서나 잘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날은 집에 돌아오면 한라산 등정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영혼이 나갑니다. 잠들기 전에는 오늘 내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사람들이 내게 한 말이 과연 무슨 의미였는지 사골국 끓이듯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곤 합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이 나한테는 유독 힘들다고 느껴지거나 별거 아닌 일에 심한 내상을 입는, 예민한 오십령옥이 된 것 같은 순간이 저에게는 많습니다. 식물로 치면 그렇게 탱탱하고 강인한 식물은 못 되는 거죠.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힘을 내어 씩씩하게 잘 자라고 새끼도 치고 번성하는 식물도 있지만, 영 활개를 치지 못하는 식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민한 식물도 살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나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민함도 그 식물의 중요한 성격입니다. 식물도 최선을 다하고, 키우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 보는 거죠. 그렇게 수많은 작은 성공과 실패 끝에 조금 더 적응하고 조금 더 강해지겠지요. (p. 286)

나의 반려식물 후보로 3가지를 골라놓긴 했지만 사실 가장 우선 순위는 오십령옥 이라는 다육이였다. 하지만 식물깨나 키워본 사람도 선뜻 키우기 쉽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식물인 오십령옥의 그 예민함을 내가 잘 보듬어줄 자신이 없다. 그저 저자가 표현하는 사람이든 식물이든 남들과 다르게 좀더 예민한 그 성정을 공감해볼 뿐이다. 전에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집에 오자마자 쇼파에 뻗곤 했는데 요즘은 원래 알던 환경과 원래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나도 집에 오면 일단 쇼파에 뻗는 나를 보면서 이 예민함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이다. 오십령옥을 키우면서 깨달음을 얻어봐야 하려나...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반듯하고 정상적인 모양의 식물보다 어딘가 이상하게 제멋대로 자라난 식물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는 환경에 맞게 자기만의 모양새를 갖춘 식물의 아름다움은 쉽게 설명하기 힘듭니다. 오랜 세월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주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바뀌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죠. 내 식물은 나에게, 나는 내 식물에게 서로 적응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식물을 키우는 사람 모두가 꿈꾸는 바가 아닌가 합니다. (p. 293)

표지에 있는 식물의 이름은 리틀장미다. 제멋대로 뻗어나간 그 자유를 보며 저자는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나도 겉표지를 보자마자 '멋지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식물사진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모던하면서도 감각적이다. 하여튼 멋지다!

하지만 멋진 식물보다는 건조한 겨울철에 비염이 있는 사람에게 좋다는 '실버레이디' 라는 고사리과 식물을 사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식물에 대한 애정이 모자란것 같다;;;

집안에 갇혀있다시피 지내는 요즈음 책으로나마 안구정화해보려 읽게 된 이 책이 이렇게 다양한 멋을 느끼게 해줄줄은 몰랐다. 식물사진을 보며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겠거니 예상했는데 식물사진이 이렇게 도회적일 수 있는건지 감탄할 따름이었다. 사진과 글 모두에서 저자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도 쏠쏠한 정보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하는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식물에세이들과 확연히 달랐다. 저자의 이 사진감각과 진정성 있는 글로 표현한 다른 식물책도 어서 펴내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