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 2
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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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어머니와 미국 동해안의 휴양지에서 외롭게 지내던 잭 소여는, 우연히 만나게 된 스피디 파커라는 노인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바로 현재의 세상과 다른 또 하나의 세상, '테러토리'라는 곳에 대해서다. 그곳은 마법이 공존하는 곳으로서, 현세 사람들의 트위너가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잭의 어머니 역시 그곳에 트위너가 있었는데, 바로 여왕이었다. 게다가 잭의 어머니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스피디는 잭에게 두 개의 세계를 넘나들며 여왕을 구하는 것만이 잭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는데...

 

2권 세트 소설은 역시 한번에 몰아서 읽어줘야 제맛이지만, 소설치고 상당한 두께의 1권에 이어 더 두꺼운 2권을 연달아 읽느라 눈이 장시간 혹사당했다;;;

잭과 울프는 히치하이킹을 해가며 서쪽으로의 여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로 경찰에 잡혀서 어느 종교감호시설에 갇히게 되는데 그곳의 책임자인 가드너 목사는 잭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며 어디서 만났는지 추궁한다. 잭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오스먼드의 트위너라는 것을. 테러토리에서 잔혹하게 채찍질을 하던 그 냉혹한의 트위너는 이세계에서 역시나 잔혹성을 떨치고 있었다. 교묘하게.

"우린 30일이면 너희 두 인간쓰레기를 교화시켜 여기 오기 전까지 얼마나 더럽고 부도덕하며 병들고 형편없는 삶을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있어. 정확시 지금부터 시작한다." (p. 43)

잭과 울프가 잡혀들어간 곳은 교화시설이 아니었다. 가드너 목사의 종교적 세뇌아래 갈곳없는 청소년들을 부려먹는 불법착취시설이었다. 감옥보다 더 열악했다. 울프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힘겨워하고 잭도 어떻게든 이곳을 빨리 탈출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가드너 목사는 잭이 누구인지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한다.

" 너 말이야... 옮겨 다니는 재주는 언제 터득한거지?"

"무슨 말슴인지요?"

"언제부터 테러토리에 옮겨 올 수 있었냔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네요"

"검둥이는 어디에 있지?"

"누구요?"

"검둥이 말이야, 검둥이! 파커, 파커스, 이름이 뭐든 말이야! 그자는 어디에 있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p. 137)

잭과 울프에 대한 고문이 점점 더 심해져가고 잭은 그사이 마법주스가 없어도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드너가 작정하고 잭을 실토하게 하려던 그밤 울프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변신하기 시작한다. 피의 밤이 열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잭은 서쪽으로 이동하며 일단 친구 리처드를 찾아가기로 한다. 잭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어릴때부터 단짝친구였던 리처드에게 상담하고 기운을 얻고 싶다. 잭은 리처드의 기숙사로 향한다. 하지만 리처드는 잭의 뒤를 쫓고 있는 모건의 아들이다!

"그럼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는 거구나"

"어쨌든 그동안 힘들게 지냈던 것 같아. 하지만 난 우리 아빠한테 전화도 걸지 않을 거고, 이대로 너를 떠나보내지도 않을 거야. 오늘 밤에는 내 침대에서 자. 헤이우드 사감이 취침 점호를 하러 오면 넌 침대 밑에 숨으면 돼" (p. 229)

리처드를 만난 잭은 그간의 일을 (일단 리처드의 아빠인 모건에 관련해서는 쏙 빼고) 들려주지만 리처드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오후부터 리처드와 학교와 기숙사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모든 학생들이 사라지고 기숙사 마당에 괴이한 생명체들이 돌아다니며 리처드에게 소리친다.

"슬로트! 네 승객을 내놓으라니까!" (p. 250)

하지만 여전히 리처드는 이건 꿈이라고 자신은 열에 들떠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고 있는거라며 현실부정을 하려 든다.

"시브룩섬은 안돼. 아빠는 어디 있지? 어서 그 벽장에서 나왔으면! 제발, 부탁이야. 시브룩섬 사건 같은 건 싫어. 제바아알...." (p. 254)

리처드와 리처드의 기숙사로 잭의 발길이 향한 것에는 친구의 도움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리처드의 학교는 스프링필드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서쪽으로의 여정에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잭은 깨닫는다.

"스프링필드는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미국에서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철도 종착역이었어. 여기는 지리적으로 사통팔달하는 곳이었거든. 스피링필드에서 출발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주요 철도 노선이 있었어. 우리 학교는 앤드루 테이어가 가능성을 알아보았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거야. 그는 철도 수송으로 큰돈을 벌었지. 주로 서부 해안으로 가는 화물 수송에 치중했어. 그는 동부만이 아니라 서부로 향하는 화물 수송이 갖는 잠재력에 주목한 최초의 사람이었어"

"서부해안으로 간다고?" (p. 284, 285)

온갖 학교인물들의 모습을 띤 트위너들이 리처드에게 계속 '승객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잭은 순간 알아챘다. 기차! 기차역! 학교엔 아직 기차시설이 남아있는 곳이 있었다. 두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순간이 다가오자 잭은 리처드를 데리고 테러토리로 넘어간다.

이동이 이루어지고 한쪽이 트위너의 몸으로 들어가면, 그 결과 온화한 빙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p. 297)

잭이 이처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괘씸하게도 그가 단일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 애송이가 한 장소에서 순간이동을 하면, 언제나 떠난 장소와 같은 곳에 도착했다. 반면에 슬로트는 늘 오리스가 있는 곳으로 가기 때문에 목적지에서 아주 먼곳에 떨어지곤 했다. (p. 298)

이세계와 저세계에 트위너가 있는 존재들은 서로 오갈 수 있었지만 한 세계에서 두 영혼이 하나의 육체를 공유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잭은 트위너가 없는 단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순간이동에 있어서 유리했다. 잭은 몰랐지만 잭을 쫓는 모건을 알았다.

한편, 테러토리로 넘어간 잭과 리처드는 기차와 기차역을 발견한다. 그리고 기차역을 지키던 앤더슨에게서 기차에 관련된 사연을 듣는다. 기차가 생겨난 배경과 기차가 지나갈 길과 기차가 싣고 있는 정체모를 짐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초토화된 땅'에 관한 설명은 방사능 피폭 증상과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자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서부는 첫 번째 핵실험이 진행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시제품이 탑에 매달렸다가 폭발하자, 주민이 백화점 마네킹들로 구성된 교외 지역들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군인들도 핵폭발과 그에 뒤따르는 불기둥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진짜 아메리카 테러토리의 마지막 보루인 유타주와 네바다주로 돌아가 간단하게 지하에서 핵실험을 재개해다. (p. 330)

1권의 1부와 2부 중 1부에서 스티븐 킹의 문체가 강하게 느껴졌다면 2부의 3부와 4부중에선 4부에서 스티븐 킹의 분위기가 흠씬 풍겼다. 결국 이 두꺼운 장편 소설은 스티븐 킹이 열고 피터 스트라우브 가 전개하고 스티븐 킹이 닫는 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4부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초현실들과 핵실험에 대한 경고는 여타 다른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역시 스티븐 킹 다웠다. 그의 작품에선 늘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작가의 강한 어조가 느껴진다. 멋있다.

블랙호텔이 이번 원정의 종착지라고 이제 잭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은 무력하고 짜증만 부리고 있지만 리처드가 이 원정에서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소여의 아들과 슬로트의 아들. 필립 소텔 왕자의 아들과 오리스의 모건의 아들. 한순간 세계의 전체 상황이 훤히 보이는가 싶더니, 블랙 호텔에서 무엇과 맞닥뜨릴지는 모르지만 리처드가 그것을 해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p. 358)

솔직히 2권 초반에 가장 이해가 안되던 것이 잭이 왜 리처드를 굳이 찾아가려 하느냐는 점이었다. 아무리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현재 최대의 적인 모건 슬로트의 아들이 아닌가? 하지만 잭의 운명은 리처드에게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임이 점점 드러난다. 리처드는 잭의 예상과 달리 '테러토리'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부정해왔을 따름이었다.

잭은 막연하게나마 그가 하려는 일이 단순히 엄마를 구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부터 잭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일에 뛰어든 것이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제 그는 이 모든 역경이 사람을 강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p. 449)

잭은 그동안의 역경을 통해 몸도 생각도 훌쩍 자라있었다. 리처드는 현실부정의 단계를 지났음에도 머리와 달리 몸이 빠르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마치 독이라도 퍼지고 있는 것처럼.

"너는 가도 돼, 리치. 나는 괜찮아. 그들도 너는 가게 놔둘 거야, 걱정마.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나랑 상관이 있을 수도 있어"

"내가 너를 끌어들인 거야"

"아니, 아빠가 나를 끌어들인 거야. 아니면 운명이 나를 끌어들인 건지도 모르지. 아니면 신이거나, 아니면 제이슨이거나. 그게 누가되었든, 나를 떼어놓고 갈 생각은 마" (p. 467)

리처드는 바르게 자란 소년이었고 착한 심성의 소년이었다. 무엇보다 잭의 진정한 친구였다. 악의화신 모건 슬로트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리처드는 천사의 화신 같은 아이였다.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리처드가 풀어놓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잭은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전체적인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아빠는 그걸... 음... '필 소여의 망상' 이라고 불렀어"

잭이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라 머리가 어찔할 만큼 강렬한 흥분이었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부적이었다. (p. 475)

"어떤 것은 제거할 수 없어. 어떤 사람은 제거할 수 없어. 그것들은 ... 음... 단일한 성질을 가졌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 그것들은 부적과 같아. 단일한 성질이라고, 나도 그래. 단일한 존재야. 나도 트위너가 있었지만 그는 죽었어. 난 테러토리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제외한 모든 세계에서 단일한 존재인 거야. 난 알 수 있어. 느낄 수 있다고, 우리 아빠도 알고 있엇어. 그래서 나를 방랑자 잭 이라고 부른 거야. 내가 여기 있을 때 난 저쪽 세계에는 없어. 내가 저쪽 세계에 있을 때 난 이쪽 세계에 없어. 그건 리처드 너도 마찬가지야!" (p. 477)

잭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친구인 리처드와 함께 남은 여정을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존재를 더 만나게 될까? 어떤 사건을 더 겪게 될까? 부적의 능력은 대체 무엇일까? 꺼져가는 엄마의 생명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잭은 어쩌다 이런 운명을 타고 나게 된 것일까?

스릴러 소설에 스포는 맥빠지는 행동이므로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ㅎㅎ

4부에서 펼치지는 초현실들은 한치앞도 예상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아마 이 소설 2권을 합쳐 가장 긴박하게 진행되는 장일 것이다. 막판에 휘몰아치는 전개 또한 스티븐 킹 다웠다. 1권이 558페이지 2권이 727페이지 라는 어마무지한 두께의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은 눈이 시려옴에도 멈출 수 없는 스토리적 강한 매력이 있었다. 정말 대단한 작가다.

이쪽 세계의 존재와 비슷한 저쪽 세계의 트위너가 존재한다는 것, 두 세계를 오간다는 것, 시공간을 넘나드는 차원이동등은 근래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설정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1984년에 나온 작품이다. 앞서나갔던 상상력이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읽혀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므로 역시 대단한 작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속에 펼쳐지는 상상의 존재들과 초현실들은 여전히 미래적이었다. 어쩌면 이런 앞서나갔던 선배작가의 상상력 덕분에 지금 작가들의 상상력이 더 키워졌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잭 소여' 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톰 소여 처럼 모험을 통한 소년의 성장은 해피엔딩이란 점에서 역시 스티븐 킹 다웠고 그래서 역시 좋았다. 나는 늘 해피엔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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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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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하는 두 개의 세계를 무대로,

소년 잭 소여의 파란만장한 모험을 박진감있게 그려낸 다크 판타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작가 스티븐 킹이 다른 작가와 협업하여 집필한 작품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공저자인 피터 스트라우브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스티븐 킹이 선택한 작가라면 믿고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명의 작가가 함께 쓴 작품이라서인지 그동안 읽었던 스티븐 킹의 작품과는 같은 듯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잭 소여 라는 열두살이 소년이 황량한 바닷가에 서있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소년의 엄마는 한때 유명한 배우였으나 지금은 말기암 환자인 것을 숨기고 머물던 집도 다 팔아치운 채 외진 호텔로 도망치듯 내려와 아들과 단둘이 지내고 있다. 소년은 갑작스레 무너진 일상과 인적드문 비수기의 쓸쓸한 휴양지에서 홀로 이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는 중이다.

또다시 예전에 느꼈던 무엇인가에 지시당하고 조종당하는 듯한 불편한 기분이 잭을 사로잡았다. 보이지 않는 기다린 줄이 끈질기게 엄마와 잭을 바닷가 이 버려진 곳까지 끌고 온 것은 아닐까? 그들은 잭이 이곳에 있기를 바랐다.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p. 26)

잭은 갑작스레 이곳에 온 이후 내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는 호텔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고 침실에 머물며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안색이 나빠졌지만 어디가 아픈지조차 잭은 물어볼 수 없었다.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이제 나가서 놀렴. 잭은 평소와 달리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오, 그래요, 엄마, 아주 잘했어요. 참 잘나셨어요. 이제 나가서 놀라고요? 누구랑요? 엄마,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왜 여기 있냐고요? 얼마나 아픈 거고요? 어째서 나한테 토미 아저씨 얘끼를안 하는 거지요? 모건 아저씨는 무슨 짓을 꾸미는 거예요? 도대체... 질문, 끝없이 떠오르는 질문. 하지만 다 부질없었다.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스피디 할아버지마저 없었더라면... (p. 29)

답답하지만 속앓이만 할뿐 차마 엄마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던 잭은 호텔옆 유원지에서 일하는 스피디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났다. 어렸을때 돌아가신 아빠 대신 후견인을 맡아 주었던 토미아저씨 마저 얼마전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아빠의 동업자인 모건 아저씨는 전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모건 아저씨를 피해 도피한 것처럼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의 일은 복잡해 보였다. 그럴때 만난 스피디 할아버지는 첫만남부터 포근하게 잭을 품어주었다. 하지만 스피디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스피디 할아버지는 잭이 혼란스러워 하는 백일몽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잭이 그저 꿈이라고 여겼던 환상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다.

"테러토리. 공기조차 부잣집 창고에 모셔 둔 최상급 와인 향기가 나. 보슬비도 내리지. 테러토리는 바로 그런 곳이란다, 얘야" (p. 68)

스피디 할아버지는 잭을 처음 봤을때부터 '방랑자 잭' 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가 해주는 말들이 조금 이상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잭은 마침내 기억하게 되었다. 예닐곱살 무렵 납치당할 뻔 했던 사건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이가 스피디 할아버지 였다는 것을. 잭은 깨달았다. 스피디 할아버지는 자신이 모르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잭은 스피디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실컷 울어아. 마음이 풀릴테니. 가끔씩은 울 필요가 있단다. 내가 알지. 할아버지는 우리 방랑자 잭이 얼마나 멀리 왔고,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지쳤는지 잘 알고 있단다. 그러니 속이 후련해질때까지 울려무나." (p. 88)

"어쩌면, 어쩌면 넌 엄마룰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구나. 엄마와... 엄마를 닮은 한 여성을 위해 온 것 같아."

"누구를 구한다고요?"

"여왕이야. 이름은 로라 델루시안이고 테러토리의 여왕이란다" (p. 89)

잭은 스피디 할아버지의 말을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건넨 물약을 마시고 직접 그 세계를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단숨에 그 세계와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기억이었음을 알게 되고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조금씩 완성된 세계의 모습으로 잭에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잭에게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내 말만 잘 들어라, 방랑자 잭. 시간이 별로 없거든. 그 슬로트라는 작자가 이곳에 올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다면 더더구나 시간이 없구나. 그자는 너희 엄마가 죽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이 없거든. 게다가 그의 트위너는 로라 여왕이 죽기를 바라고 있단다"

"트위너요?"

"이쪽 세계 사람들도 테러토리에 트위너를 두고 있단다. 많이는 아니야. 저쪽 세계는 사람 수가 아주 적거든. 여기 10만 명당 한 명 꼴이지. 하지만 트위너들은 이쪽저쪽으로 손쉽게 오갈 수 있단다" (P. 95)

"이 여왕이... 우리 엄마의... 트위너인가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아빠도... 트위너가 있었나요?"

"물론 있었지. 좋은 사람이었어"

"아빠가 이쪽 세계에서 돌아가셨을 때 저쪽 세계의 트위너도 죽었나요?"

"그랬단다. 동시에 죽은 건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었지"

"저도 트위너가 있나요? 테러토리에?"

"너한테는 없단다. 얘야. 너는 너밖에 없단다. 너는 특별한 존재니까" (p. 96)

"잭, 네가 테러토리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단다. 네가 꼭 가져와야 할 게 있거든. 그것은 강력하고 전지전능한 것이란다" (p. 113)

"왜죠? 그렇게 불쾌한 곳이라면 왜 거길 가야 하냐고요"

"왜냐하면 그곳에 부적이 있기 때문이지. 또 다른 알람브라 호텔 어딘가에 있을 거란다" (p. 116)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너는 여정을 시작할 만큼은 알고 있단다. 부적을 찾게 될 거다, 잭. 그것이 너를 끌어당길 테니까" (p. 117)

또 다른 세계 라는 테러토리, 같은 모습을 한 트위너, 이 새로운 세상과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세계를 오가며 자신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빠는 두 세계를 오가며 어떤 일을 한 것인지 등등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에 이해안가는 것 투성이였지만, 죽음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엄마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잭은 해야만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자신이 당분간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고 말하자 엄마는 어렴풋이 잭이 떠나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편이 때때로 자신이 모르는 그 어딘가에 다녀왔던 것처럼.

"자, 떠돌이 잭, 키가 너무 커서 네가 문으로 들어올 때 네 아빠인 줄 알았지 뭐냐. 가끔씩 네가 겨우 열두살 이라는 걸 잊곤 한단다" (p. 127)

"저를 보고 떠돌이 잭이라고 부르셨네요"

"아빠가 그렇게 부르셨잖니. 네가 오전 내내 나가서 안 들어오기에 문득 그 생각이 났단다"

"아빠도 저를 떠돌이 잭이라고 부르셨나요?"

"아마도 그럴걸... 아니, 확실히 그렇게 불렀어, 네가 아주 어릴 때. 방랑자 잭 이라고. 그래, 그렇게 불렀단다. 방랑자 잭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잔디바을 기어다닐 때 였지. 아주 재미있었어." (p. 128)

"저는 가야만 해요, 정말이에요" (p. 129)

"방랑자 잭이라, 믿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나..." (p. 134)

잭의 엄마는 불안했지만 잭의 여행을 허락했다. 어쩌면 마지막 희망같은 것을 품은 것일수도 있다. 두사람 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수 없었지만, 잭 소여는 '방랑자 잭' 이었다.

잭이 다른 세상에 대해 알게 되고 믿게 되고 떠나게 되기까지의 내용이 <1부 잭 소여, 서둘러 떠나다> 이고, <2부 시련의 길>에서부터 본격적인 잭의 여행이 펼쳐진다. 1부의 내용은 특유의 속도감과 펼쳐놓는 흥미요소들과 흡입력이 스티븐 킹이 대부분 쓴것이 아닐까 싶은 부분으로 여겨졌다. 개인적은 기분으론 2부의 내용은 1부와 조금 다른 문체가 느껴졌는데 아마도 2부부터가 공동저작이거나 피터 스트라우브 가 중점적으로 쓴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2부 부터는 이세계와 저세계를 오가며 현실보다 판타지적인 요소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테러토리의 여왕, 로라 델루시안의 아들은 생후 6주 만에 요람에서 숨을 거두었다.

필과 릴리 소여의 아들은 생후 6주에 요람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리고 모건 슬로트는 그 현장에 있었다. (p. 190)

잭의 아버지 동업자인 모건과 그의 트위너는 이세계에서든 저세계에서든 잭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다. 잭은 부적을 찾아 가야 하고 모건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잭을 추격한다. 이 과정에서 잭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내고 모건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었다.

"이쪽 세계의 물리학이 그들에겐 마법인 셈이지, 그렇지? 우린 과학 대신 마법을 이용하는 농업군주제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단 말이야" (p. 334)

"자자, 기본적으로 우리 회사의 이익은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 쪽 사람들에게 이익을 널리 나누어 주는 것은 어떻겠나? 내 생각엔 우리가 저쪽 세계와 합치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의 에너지와 그들의 에너지를 합치면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필." (p. 335)

"모건, 그러니까 저쪽 세계를 너무 많이 좌우하려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 그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도 테러토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 늘 영향을 받고 있네. 좀 더 놀라운 얘기를 알려 줄까?"

"말해 보게"

"다른 세계는 저쪽 세계만이 아니네" (p. 339)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1권에서는 밝혀지지 않지만 잭의 아버지 필은 두 세계를 오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동업자이자 친구인 모건에게 두세계를 넘나드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었고 두사람은 두 세계를 오가며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은 두 세계의 안정을 위해 적정한 선을 유지하려 했고 모건은 최대한 많은 이익을 위해 두 세계의 안정따위 관심이 없었다. 숨기고 있던 모건의 야욕은 필의 죽음이후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때 잭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잭은 고달픈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두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을. 이쪽의 죽음과 저쪽의 죽음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건들은 두세계를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점점 더 두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었다. 잭은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현실에 때론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그러다 늑대인간 '울프'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잭의 아빠 필을 좋은 사람이라고 모건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잭은 친구를 얻은 듯 기뻤으나 급작스레 모건의 트위너가 나타나 목숨을 위협하고 둘은 함께 이세상으로 건너오게 된다. 울프가 늑대로 변하는 보름달이 뜬 사흘간 잭은 울프의 가축이 되어 헛간에 갇혀 있게 된다. 모건과 그의 트위너의 위협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잭은 울프와 서쪽으로 계속 여행을 해야만 한다. 잭의 여행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잭의 여행은 2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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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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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적이고 광적이고 자기도취적이었던 벨 에포크 시대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늘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

사뮈엘 포치

 

거울속을 보듯 액자안을 보듯 예쁘게 뚫린 겉표지속에 빨간 옷과 레이스소매 그리고 가늘고 긴 손이 보인다. 남자라고?

겉지를 벗겨낸 겉표지를 봐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빨갓옷과 하얀 레이스 그리고 가늘고 긴 손... 남자라고??

하지만 표지그림과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이 의혹은 몇 페이지넘기면 바로 해결된다. 15페이지, 존 싱어 사전트 가 그린 <집에 있는 닥터 포치(1881)> 그림.

나는 왜 이 책이 소설이라고 생각했을까?;;;

책을 받아보고 표지에서 벌써 논픽션이고 한 인물에 대한 에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표지가 주는 감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실존인물에 대한 전기적 스토리가 소설처럼 펼쳐지는 책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산문적으로 코트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 다만 코트보다는 실내 가운이라고 묘사하는 게 낫다. 빨간색... 아니, 더 정확하게는 주홍색...에 목부터 발까지 내려오는 표준형이고, 손목과 목에 주름장식이 있는 하얀 리넨이 약간 드러나 있다. 아래쪽의 양단 슬리퍼 한 짝이 이 구상에 노란색과 파란색을 살짝 보태준다.

코트 안의 남자가 아니라 코트에서 시작하는 것은 부당할까? 하지만 코트, 아니 코트의 묘사가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기억을 하기는 한다면. 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안도했을까, 재미있어했을까, 약간 모욕을 느꼈을까? 그것은 이제 이렇게 멀어진 거리에서 우리가 그리는 인물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p. 10~11)

작가는 2015년 미국에서 임대하여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걸린 모습으로 표지를 장식한 그 그림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빠져들었다. 그 그림에, 그림속 인물인 포치에게, 그 인물이 살았던 '벨 에포크' 시대에.

작가가 풀어낸 포치 라는 인물과 벨 에포크 시대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점점 더 머리를 갸우뚱 하게 된다. 작가는 재미로 쓴 것인가? 약간 모욕을 주려고 쓴 것인가? 혹은 벨 에포크 시대로 풍자된 프랑스 에 비교하여 영국의 문화에 안도한 것일까?

그래, 1885년 여름의 그 런던 방문에서 시작하자.

왕자는 에드몽 드 폴리냐크.

백작은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젠사크.

이탈리아계 성을 가진 평민은 닥터 사뮈엘 장 포치. (p. 14)

잠시 런던을 방문했던 이 세명의 일행이 이 책의 주요 인물이긴 하나,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펼쳐지면서 이들과 그닥 관계없어 보이는 타인들의 이야기에 묻혀서 결국 이들이 누구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잘 모르게 된다. 작가가 '벨 에포크'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골라낸 이 세명의 프랑스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왕자는 어느 가문의 왕자인지 모르겠고 백작은 그 유명한 (이름이 비슷해서 헤깔렸던) 몽테스키외 백작이 아니었고 포치는 결국 프랑스인이 아닌셈이라는 것은 이 세명이 살았던 시대를 향한 칭송인가 모욕인가.

1884년 6월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는 스물아홉 살의 귀족 장 플로레서 데제생트 공작을 주인공으로 삼은 여섯 번째 소설 [거꾸로]를 발표했다. 위스망스의 이전 다섯 소설은 졸라류의 사실주의를 구사했으나, 이번에는 그것을 모두 내던졌다.[거꾸로]는 데카당스의 성서로, 꿈을 꾸듯 명상적이었다. 데제생트는 댄디에 유미주의자였으며, 지나친 근친교배로 병약했고, 집안 혈통의 맨 마지막 인물이었으며, 이상하고 타락한 취향의 소유자로 의복, 장신구, 향수, 진귀한 책, 훌륭한 장정을 사랑했다. (p. 20~21)

[거꾸로] 라는 소설과 데제생트 라는 인물이 자주 언급된다. 작가가 보기엔 앞서 말한 세 인물의 시대가 소설로 표현된다면 가장 적절했을 작품이 아마도 이 소설이었던 것 같다. '데제생트' 라는 인물명이 소설과 상관없이도 하도 자주 등장해서 실존인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내가 모르는 소설이라서 더 낯설게 다가왔다. 소설이라는 허구와 실존인물들의 일상이 뒤섞인 표현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갈피를 못잡겠고 머리속을 뒤엉켜 놓기 일쑤였다.

'즐거운 영국', '황금시대', '벨 에포크'. 이런 빛나는 상표명은 늘 회고적으로 만들어진다. 1895년이나 1900년에 파리에 살던 누구도 서로 '우리는 '벨 에포크'시대를 살고 있으니 한껏 즐기는 게 좋아' 하고 말한 적이 없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파국적 패배와 1914~1918년 프랑스의 파국적 승리 사이 평화의 시기를 묘사하는 이 말은 1940~1941년, 프랑스가 다시 한번 패배하고 나서야 언어에 등장했다. 이것은 생방송 뮤지컬 쇼로 바뀌어 나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이었다. 기분 좋은 조어이자 기분 좋은 오락물이었으며, 동시에 오-라-라, 캉-캉 프랑스라는 독일의 어떤 선입관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벨 에포크'-평화와 쾌락의 고전적 표현, 퇴폐미가 상당히 섞인 매력, 예술의 마지막 개화, 정착된 상류사회의 마지막 개화. 이 부드러운 환상은 뒤늦게 금속적이고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20세기에 의해 날아가버렸다. (p. 42)

왕조는 그 왕조가 멸하고 난 다음에야 이름붙여지기 마련이고, 시대는 그 시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야 별칭이 생기기 마련이다. '벨 에포크' 나는 이 명칭이 나올때마다 헤깔리곤 했다. 왜 이런 이름을 굳이 붙인 걸까? 백년도 안되는 고작 수십년의 기간동안의 프랑스 파리 라는 국한된 지역에서의 문화풍조에 이 이름을 붙은 것은 좋은 의미인가? 안좋은 의미인가? 나는 여전히 '벨 에포크' 시대라는 명칭이 모호하고 낯설지만 영국인 작가의 관점에서 이 명칭은 현학적으로 비틀고 싶은 명칭인가 보다.

100여 년마다 망명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해협의 여러 항구에 이르렀다. 위그노, 혁명의 도망자, 코뮌 지지자, 무정부주의자, 또 국가수반 네명이 잇따라(루이 18세, 샤를5세, 루이 필리프, 나폴레옹3세) 안전을 찾아 영국으로 왔다. 볼테르, 프레보, 샤토, 브리앙, 기조, 빅토르 위고도 마찬가지였다. 모네, 피사로, 랭보, 베를렌, 졸라도 의심을 받을 때는 모두 잉글랜드로 향했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정치적 교통량은 이에 비하면 미미했다. 그런 불균형을 보면서 영국인은 당연히 자신의 역사적·정치적 자유에 자족감을 느꼈다. 브리튼 사람이 프랑스에 망명하려 하는 주된 이유는 추문을 피하려는(그래서 계속 추문이 날 만한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것이었다. 이곳은 상층계급 파산자, 중혼자, 카드놀이 사기꾼, 동성애자가 가는 곳이었다. 프랑스인이 영국인에게 추방당한 지도자와 위험안 혁명가를 보냈다면, 영국인은 프랑스인에게 멋이나 부리는 인간쓰레기를 보냈다. (p. 52)

저자에 의하면 '벨 에포크' 시대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닌 듯 하다. 영국이 버린 '인간쓰레기' 들이 모여사는 곳이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였다.

벨 에포크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부의 시기, 귀족에게는 사회적 권력의 시기,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속물근성의 시기, 무모한 식민 야망의 시기, 예술 후원의 시기, 폭력의 규모를 볼 때 손상된 명예보다는 개인의 급한 성미를 반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결투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좋게 말할 만한 것이 별로 없지만, 적어도 이런 것을 많이 쓸어 가기는 했다. (p. 177)

이런 시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인물이 사뮈엘 장 포치였다. 듣도보도못한 그는 누구인가?

나는 사전트가 그린 엄청난 이미지의 형태로 닥터 포치를 처음 만났다. 벽에 붙은 설명은 그가 부인과 의사라고 말해주었다. 그전에 19세기 프랑스 독서에서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술잡지에서 그가 '프랑스 부인과학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여성 환자를 유혹하려 한 확인된 성 중독자'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분명한 역설에 흥미를 느꼈다. 여자들을 돕는 동시에 착취하는 의사,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함을 주고, 혁신과 기술로 여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환자 수로 볼 때 부자보다 빈자를 많이 도왔지만, 사생활에서는 세련된 프랑스 남자의 희화화된 표본처럼 행동한 과학자.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시작하자. 평생에 걸쳐 포치의 이름에는 스캔들이 따라붙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행동은 이성애적이고, 합법적이고, 동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파트너들의 분별과 요령에 의존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그가 밀회를 했는지, 관계는 얼마나 오래갔는지, 그 관계들이 겹쳤는지, 겹쳤다면 얼마나 자주 그랬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여성의 불평은 단 하나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호색가 포치에 관심을 잃고, 걱정하는 가족적 남자 포치, 늘 호기심을 잃지 않는 의사 포치, 여행자 포치, 도회풍 인물 포치, 국제주의자, 합리주의자, 다윈주의자, 과학자, 모더니스트 포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절대 친구를 잃지 않는 남자 포치, 미친 시대에 제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 포치. (p. 216, 217, 219 발췌)

작가가 표현하고 있는 포치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라는 건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든다. 포치를 모욕하고 있는가? 칭찬하고 있는가? 작가는 포치의 일생만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포치와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글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느낌인데 작가는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소통이 되지 않는 글이란 독자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포치가 왜 반드레퓌스파, 반유대주의자, 왕당파, 이민 배척주의자, 가톨릭 우파의 자연스러운 표적이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그의 성이 인정하듯이, 그는 '사실은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가톨릭이 아니었고, 프로테스탄트였다가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알려진 자유사상가인데도 상원에서 의석을 차지할 만큼 뻔뻔스러웠다. 그는 헌신적인 드레퓌스파로 렌에서 열린 재심에서는 기록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혈연과 지연에 집착하는 애국자들에게 '거룩한 히스테리'라는 세월의 최종 결과는 결코 '정의를 위한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을 위한 승리'였다. 포치 자신은 얼마든지 '뿌리없는 코스모폴리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는 유대인 색정광 사라 베르나르와 오래 연애를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정기적으로 선한 프랑스 가톨릭 부인과 딸들의 가리지 않은 음부를 맨손으로 검사하는 남자로, 모두가 알다시피 그 가운데 일부를 유혹하기도 했다. 이런 인민의 적에 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p. 275, 276 발췌)

'벨 에포크' 시대를 검색하면 과거의 '좋은 시대' 라는 의미라고 대충 이해되는 설명이 나온다. 포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벨 에포크' 시대가 과연 좋은 시대로 보이는가?

내가 이 책을 1년 정도 썼을 때 영국은 착각에 빠져 마조히즘적으로 유럽연합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비관적이기를 거부한다. 멀고, 퇴폐적이고, 광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기도취적이고, 신경증적인 벨 에포크에서 보낸 시간이 나를 명랑하게 만들어주었다. 주로 사뮈엘 장 포치라는 인물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의학, 예술, 책, 여행, 사교, 정치, 가능한 한 많은 섹스로 채웠다. 그는 고맙게도 결함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일종의 영웅으로 내세우고 싶다. (p. 338~340 발췌)

뒷표지의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늘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 사뮈엘 포치' 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걸린다. 작가가 포치를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으로 묘사한 것 같은지 이 홍보문구를 쓴 이에게 물어보고 싶다. 대체 이 책의 어느 구절에서 포치가 역사의 옳은 편에 섰고 영웅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일종의 영웅' 으로 내세우고 싶다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벨 에포크'시대를 향한 모욕인지 칭찬인지, 직설인지 반어인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확실한 입장을 정리할 수가 없다.

처음 포치의 생애에 관해 읽었을 때, 오래된 것이든 최근 것이든 모든 자료에 그가 '미치광이에게 암살당했다' 라고 나와 있었다. '그 자신의 환자에게' 라고 나오지 않았다. 마쉬는 까다로운 환자였다. (하긴 음낭 수술을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가 한동안 성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던 것, 사실상 무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쉬에게는 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포치에 대한 불만을 자세히 기록한 메모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환자의 바람을 존중하지 않는 의사들에 대한 경고로 그를 죽일 계획이었다'. 자신의 무능을 치료해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남자에게 총에 맞아 죽은 돈 후안. 이 무슨 도덕적 이야기인가? 픽션에서라면 귀엽게 맞아 들어갈 것 같다. 그러나 논픽션은 말만 그럴듯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도덕주의적인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야만하는 곳이다. (p. 330~331 발췌)

이 책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해 작가가 풀어낸 퇴폐적이고 향락적이고 반도덕적인 이야기의 결말로 논픽션다운 도덕적 결말을 맞은 포치를 주요인물로 내세운 것은 '착각에 빠져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일까? 영국의 숙적 프랑스가 가진 '좋은 시대'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일까?

작가 '줄리언 반스' 에 대해 검색을 하면 N지식백과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반스의 산문은 우아하고 재치와 유머가 넘치며, 종종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 자의식적 언어 스타일, 여러 형식의 이야기들의 혼합)을 활용한다. 이러한 그의 기법은 그가 문학적 창작 과정, 경험과 언어의 차이, 그리고 ‘사실’과 ‘현실’의 주관성을 중요시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언어, 스타일과 형식에 대한 재미있는 실험에도 불구하고 반스의 소설은 심리적 사실주의에 기반해 있으며, 그 주제는 심각하고, 가슴 아프며 진심 어리다. 그는 자주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루면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지속적인 추구와 더불어 특히나 인간의 질투, 집착, 그리고 배신이 어디까지 다다르는지 탐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현대영국작가사전, 영국문화원 문학 본부, 위키미디어 커먼즈)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으니 뭐라 할말이 없지만, 적어도 이 책(산문)은 가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 할만 하다. 그러니 뒤샹의 변기작품 '샘'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에세이가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얀 레이스 셔츠를 받쳐입고 전신을 빨간 코트(가운)으로 감싼 남자 포치 만큼이나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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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블랙독 - 내 안의 우울과 이별하기
매튜 존스톤 지음, 채정호 옮김 / 생각속의집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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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편안한 심리그림책

내 안의 우울과 이별하기

책 제목을 들어본 적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밀리고 잊혀졌던 책이었다. 이번에 읽을 기회가 생겼을때 그 표지를 다시 보니 반가웠다.

이 책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이라고 해서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최근 읽었던 상빼의 그림책들을 통해 어른들만을 위한 그림책도 있어야겠구나 하는 걸 여실히 느꼈더랬다. 그래서 이 심리그림책에 다시 손이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엔 이 책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굿바이 블랙독' 이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와닿는 뭔가가 있었는데 책을 읽으려고 보니 옮긴이가 채정호 님이다. 채정호 박사의 '옵티미스트' 라는 책은 내가 읽었던 심리서들 중에서 주변에 추천하는 책으로 (내 맘속에선) 상위에 링크되 있는 책이다. 첫장부터 마음에 든다.

블랙독(Black Dog)에 대하여

영국 전 수상 윈스턴 처칠을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우울증.

그는 자신의 지독한 우울증을 '블랙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계기로 블랙독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우울증을 뜻하는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 블랙독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게 만들며, 사람들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블랙독이 우리 삶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이 책에서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속표지 中 )

우울증과 블랙독을 처음으로 연관 지은 작가는 새뮤얼 존슨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첫머리에 추천사를 쓴 '블랙독 연구소 소장' 은 이 비유에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연구소의 이름도 따오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블랙독의 이미지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져 왔고 이 책의 접근방식 또한 여러가지 영감을 불러일으켜서 감동적인 메세지를 전달해주고 있으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새뮤얼 존슨의 우울증에 대해서는 얼마전 읽은 다른 책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었다. 존슨이나 처질 외에도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중에서 의외로 우울증을 갖고 살았던 사람이 많다. 우울증 때문에 굳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평생 내적고난에 시달리며 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크던작던 많은 사람들이 블랙독 한마리쯤 다들 키우고 살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감기처럼 흔하다고 해서 요샌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 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 나는 이 표현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우울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주변인들은 감기처럼 우울증이 약 며칠 먹고 잠 며칠 푹자고 훌훌 털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에 그렇게 가볍게 표현하는 것이 편하겠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가볍게 취급되는 자신의 마음이 더 힘들게 되지 않을까? 가까운 사람이 어둠에 휩싸여 있다고 해서 굳이 서둘러 환하게 불을 켜주려고 하기 보다는 어둠이 점점 흐려지고 밝음이 잔잔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천천히 공감해주고 천천히 기다려주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섣부른 위로의 말보다는 가만히 옆에 함께 앉아있어 주는 것이 때론 더 큰 위안이 되는 것처럼.

몸이 추우면 감기가 들듯이 마음이 추우면 감기가 드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마음은 감기에 걸린다기 보다는 구멍이 뻥 뚫리는 셈이기 때문에 메꿔질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그 커다란 구멍을 블랙독이라는 형체로 그려냄으로써 좀더 편안하게 우울증에 젖어든 심리상태를 그림으로나마 직면하게 해준다.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은 그림들은 친근하게 다가온다. 블랙독은 무섭지 않고 때론 친구처럼 가족처럼 일상을 함께 한다. 하지만 함께 하면할수록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나'는 블랙독과 천천이 이별하는 노력을 시작한다.

글줄이 많지 않은 그림책이므로 마음만 먹으면 십분도 안되서 휘리릭 볼 수 있는 책이지만, 그림책이란 것이 늘 그렇듯 그림 한장한장 생각하고 넘기다보면 한참을 붙잡고 있게 되는 책이기도 한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블랙독과 함께 사는 청년의 일상을 보며 때론 블랙독에게 눈길이 가고 때론 청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읽을때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 또한 이런 심리그림책의 매력이다.

중요한 것은 공감과 이해이다. 이 책이 선사하는 편안함과 응원이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꺼내볼 독자들에게 심심찮은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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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지다 -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권재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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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평생을 물리 교육에 투신하신 노학자의 아름다운 물리 에세이이자 첫 시집.

물리를 공부하면 이렇게 작가가 되고 시인이 되는 모양이다" - 김상욱

 

 

김상욱 교수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과학자의 글이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표현력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일단 추천사를 쓴 책을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추천사 문장 그대로 딱 그런 책이었다.

글마다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다 읽고 저자의 '감사의 말' 부분을 보니 타매체에 기고했던 칼럼을 모은 책이었다. 칼럼모음집은 아무래도 칼럼마다 앞내용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소설연재 같지 않고 매 칼럼마다 독립적인 글이다 보니 같은 주제라면 항상 사전안내가 필요하고 그 사전안내는 비슷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은 문학책인가 싶을 정도로 편안하게 읽히는 물리학자가 쓴 물리적인 에세이이자 시집이었다.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정신작용의 결과이다. 사실 눈은 단지 보는 도구일 뿐, 정말로 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시력이 좋다고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조금 알면 조금 보이고 많이 알면 많이 보인다. 더 많이 알면 더 많이 보인다. 우리가 과학자들만큼 볼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감동을 그대로 체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그들의 감동이 어떤 것인지, 그 일부만이라도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 (p. 8, 9)

과학자들이 왜 그렇게 어려운 주제를 그토록 오랜 기간 연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구내용이 뭔지 방법이 뭔지 모르더라도 그 마음과 그 감동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글을 읽고나면. 과학은 생각보다 참.. 아름다운 학문이다. ㅎ

인류의 문명은 별을 보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도 별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어디 과학뿐이랴. 어쩌면 모든 철학도 별을 보면서 생겼고, 종교도 별을 보면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이렇듯 별은 저 멀리서 빛나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사화복과 연결되어 있다. (p. 19)

과학자들이 망원경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 모두 탐구하기 위함은 아니다.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충동 때문이기도 하다. 별을 보는 것, 그것은 또 다른 방랑이다. (p. 25)

그런것 같다. 인류의 문명은 별을 보면서 시작된 것 같다. 인간에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가장 자극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마도 만질 수 없고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반짝이는 멀고먼 별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별을 본다는 것 자체가 참 시적이지 않은가. 별을 따라 이별저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들이 과학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별을 연구하는 과학도 어찌보면 참 시적인 분야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매 글마다 말미에 시 한편씩을 지어 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시집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달은 지금의 달이 아니다. 1.3초 전의 달이다.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전의 태양이다. 태양계의 가장자리라고 하는 오르트 구름대는 1년 전의 모습,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프로시마 센타우리는 4년 전의 모습, 북극성은 400년 전의 모습, 안드로메다 은하는 230만년 전의 모습이다. 그렇다. 망원경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과거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 어떤 별은 1000년 전, 어떤 별은 1만년 전, 어떤 별은 수억 년 전의 별이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우주의 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p. 28)

우리가 현재 라고 하는 지금 이순간도 엄밀히 말하면 지금 이순간이 아니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지금이라던 시간은 지나갔다. 우리는 그저 과거를 보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시간이란 참 철학적이다. 별에게 있어서의 시간은 더 광활해진다. 우리가 보는 저 별은 지금의 별이 아니다. 우리는 늘 과거의 별을 보고 있다. 그러니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과학은 참 철학적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역시 별은 참 시적이다.

우주탐험? 우주 탐험의 종착점은 우주가 아니다. 그 종착점은 바로 지구다. 인간에게 우주 탐험은 바로 지구 탐험이다. 지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p. 52)

여행을 떠나는 목적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우주탐험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의 문장을 읽고서야 알았다. 우주탐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저 먼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 같은 걸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우주탐험을 하고 싶은 이유는 우주에 나가봐야 지구의 소중함을 더욱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진 것은 잃어봐야 머문 곳은 떠나봐야 그 소중함을 아는 법이다.

1974년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아레시보 천문대를 통해서 우리도 외계인에게 전파를 발사했다. 약2만5천광년 떨어진 헤르쿨레스 자리 구상성단의 M13을 향해서. 하지만 그 회신을 우리가 받으려면 무려 5만 년을 기다려야 한다! 5만년 뒤에 받을 편지를, 그것도 받는다는 보장도 없는 편지를, 받는다고 해도 해독할 가능성도 별로 없는 편지를 보내는 과학자들! 이 과학자들의 마음이, 받지도 못할 편지를 애인에게 보내는 사람의 마음과 같을까?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는 과학자들이 왜 시인들이나 할 법한 일을 하고 있을까? (p. 78)

기다림...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 이렇게 보면 과학자들의 마음은 참 로맨틱한 것 같기도. ㅎㅎ

우주로 갈 것도 없이 지구에 있는 우리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외계인과 평화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 한 민족이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다른 민족들을 어떻게 했던가? 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 섹스도 할 수 있고 공통의 자손을 퍼트릴 수도 있는 사이인 다른 민족간에도 잔인한 인종청소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유사성이 전혀 없는 외계인과 평화롭게 만날 것이라고? 서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가 죽이든지 죽임을 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뿐이다. 협상이나 타협은 존재할 수 없다. (p. 82)

이렇게 충격적일수가 ㅎ 하지만 맞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를 외계인은 지구인보다 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허황된 기대 아닐까?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 우주탐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생각만 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평화적이고 아름다운 내용들인지라 다 읽고 나면 저자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느껴지는 것이 있다. 여하튼 저 속시원한 표현들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도둑은 제발 저려야 할 것. ㅎㅎ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쉽게 말하면 무질서한 정도를 말한다. 가지런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이고 어지러운 상태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이다. 자연현상은 언제나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변한다. 모든 변화는 비평형상태에서 평형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자연에서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현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인간의 활동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 인류의 문명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킨 결과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라' 고 할때, 물리학자는 '엔트로피를 줄여라' 라고 말한다. (p. 140~144 발췌)

물리학자의 책이다 보니 이런저런 과학적인 내용들도 많이 나온다. 상식으로 재미있게 알아둘 것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엔트로피 부분은 좀 어려웠다. 여하튼 우주적인 차원에서 봤을때 엔트로피의 흐름은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저자는 '그대들은 알지 못하는가 / 평생에 하는 일이 모두 헛수고였음을 / 부질없는 인간들이여' 라고 읊는다.

우주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 말고도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라는 새로운 물질이 더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우주에서 우리가 아는 물질은 겨우 5퍼센트 정도이고, 25퍼센트는 암흑물질, 70퍼센트는 암흑에너지라고 한다.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더 많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더 많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우주는 거의 대부분 보이지 않는 물질로 되어 있고 아주 조금 보이는 물질이 있다. (p. 149)

물리학에서는 빛을 반사하지 않고 완전히 흡수하는 물체를 흑체라고 부른다. 가장 좋은 흑체는 텅 빈 공간이다. 그런데 이 구멍이 언제가 까많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물체는 온도가 있다. 온도가 높으면 빛을 내게 되어 있다. 태양은 아주 좋은 흑체다. 왜냐하면 태양에 빛을 보내면 빛을 완전히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p. 291, 292 )

인간이 알아낸 것보다 알아내지 못한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퍼센트라니...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흑체... 보이지 않는 것 알아낼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어둠으로 이름 붙였다. 미지의 것은 대부분 어둡게 상상하곤 한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양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선과 악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일 뿐이듯이, 입자와 파동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가공적인 관념이다. 세상에는 악인도 없고 선인도 없듯이 자연에는 입자도 없고 파동도 없다. 인간은 선인도 악인도 아니다. 그냥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빛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그냥 빛은 빛일 뿐이다. (p. 157)

선과 악이든 빛과 어둠이든 입자와 파동이든 다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인간이 이름붙인 것을 뿐이다. 인간의 이해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서 굳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이름에 넣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이분법적인 마인드를 버리면 세상을 좀더 편안하게 받아들일수 있지 않을까... 너와 내 가 아니라 그냥 우리로...

철학에서 가장 큰 난제가 무(無)라면, 수학의 난제는 영(0)이고 과학에서 가장 큰 난제는 진공이다. 무, 영, 공 은 같은 근원을 갖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노자가 한 유명한 말,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듯이 무를 무라고 하면 벌써 무가 아니다. '없는 것이 있다'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p. 214)

미시세계를 연구하여 끝없이 작아지는 세계를 연구하는 것도 거시세계를 연구하여 끝없이 커지는 세계를 연구하는 것도 그렇게 0으로 수렴되던 무한으로 확장되던 과학은 어느새 철학적 난제와 닿아 있는 것 같다. 우주라는 공간 자체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공간이기는 하다.

299792458 , 이 숫자는 아마도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가 될 것이다. 이 우주에 이보다 더 확고하고 불변인 숫자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값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빛은 우주에서 참으로 특별한 존재다. 태초에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빛이다. [창세기]1장에 나오는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의 바로 그 빛이 만물의 표준이 된 것이다. (p. 230)

과학은 온갖 기준 단위들이 꼭 필요한 학문이다. 그래서 세계 공용으로 만들어놓은 표준원기 들이 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질은 가감되기 마련이다. 이때 변하지 않을 기준이 될 만한 것으로 빛의 속력이 제안되었다. 진공 속에서 빛의 속력은 어떤 관찰자가 보더라도 같다고 한다. 영구불변한 표준이 될만 것은 빛의 속력이 가장 좋겠다고 1960년 국제도량혈 협회 과학자들이 정했고 초속 299792458 미터 가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299792458 ! 외워둬야지! ㅎㅎ

시간여행, 얼마나 멋진 여행인가? 과거로 가서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고, 미래로 가서 내 모든 꿈을 실현하고, 이렇게 된다면 인생은 또 얼마나 가벼운 것이 될까? 언제나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인생, 가볍다 못해 아주 무의미해져 버리지나 않을까? (p. 259)

그리스신화를 읽다보면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자꾸 비교하며 생각해 보게된다. 종교적 숭배를 받는 신의 가벼움과 신의 조종을 받는 인간의 진중함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해질 때도 있었다. 시간여행에 대한 저자의 표현을 읽으며 불멸이기에 가벼울 수 있고 필멸이기에 진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이라는 판타지를 인간은 늘 꿈꾸어 왔지만 나는 별로 그 여행이 하고 싶지 않다. '벤자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던건데, 소중한 사람들과 다른 시간대를 산다는 것은 결코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현대 과학이라고 하면 상대론, 양자론, 진화론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세 이론은 지동설과 뉴턴의 고전역학 이래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과학 이론이다. 상대론은 절대적인 시공간을 부정한 이론이고, 양자론은 결정론적인 우주관을 부정한 이론이고, 진화론은 모든 생명을 신이 창조했다는 창조설을 부정한 이론이다. 모든 위대한 사상은 언제나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온갖 오해를 받기 마련이다. (p. 273)

상대성 이론이 주장하는 바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누가 보아도 언제나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보이는 현상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이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다. (p. 275) 상대성 이론의 상대성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오히려 절대성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가깝다. 변하지 않는 무엇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허무할까? 불확실성과 가치 혼란의 시대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상대성 이론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p. 276)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대성의 원리는 과학을 무용하게 느껴지게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욱 탐구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무엇을 발견하던 확정할 수 없고 무엇을 보든 상대적일 수 있다는 막연함에 일반인인 나로서는 맞붙을 엄두가 나지 않는데 과학자들은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탐구하고 또 탐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용기있는 사람들 같기도 하다. 진리는 늘 엄청난 진통 속에 발견되는 모양이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로 이루어진 물질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물리학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학이나 천문학은 무엇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화학도 원자나 분자와 같은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물리학이다. 천체들도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천문학도 본질적으로 물리학이다. 그러면 생물학도 물리학이냐, 라고 물을 수 있지만 생물도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물리학이다.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은 본질적으로 양자론과 일반 상대론이다. 모든 자연과학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생물학의 진화론은 양자론이나 상대론과는 전혀 다른 자연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자연과학은 본질적으로 양자론, 상대론, 진화론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이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p. 317)

모든 과학은 결국 물리학이었다. 물라학자다운 자신감으로 봐야 하나 정말 과학이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학교다닐때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에서 물리가 가장 어려웠는데 이렇게 과학이 전부다 물리 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나마 덜 어렵게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인간이 보고 느끼고 알수 있는 세상은 결국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그러한 물질을 연구하는 학문이 물리학이니 어쩌면 물리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 모두에게 꼭 필요한 학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물리학이 저자의 글처럼 시적으로 전달되고 배울 수 있다면 용기내여 볼텐데... ^^

과학책을 읽다보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가 정말 자주 언급된다. 책 속에 다양한 시가 있었지만 과학과 재미가 동시에 느껴지면서 이 시 한편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은 다 표현되었다 싶었기에 시 전문을 옮겨보는 것으로 책에 대한 소감을 마무리해본다. 우주를 만져보지 못하더라도 물리학을 조금은 만져볼 수 있게 해주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속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고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 있소

문을 열면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아 있소

문을 1000번 열면 500번은 죽어 있고 500번은 살아 있소

499번 죽어 있고 501번 살아 있기도 하오

그 반대일 때도 있소

수학자는 재미있다 하오

물리학자는 아름답다 하오

사람들은 웃긴다 하오

철학자는 그냥 웃어요

슈뢰딩거 선생,

시방 날 가지고 뭐 하는 겁니까?

미안하네, 고양이 양반

개로 하려고 했는데

그건 너무 개 같아서~

(p. 179 ~ 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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