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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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요동치는 정국에 자신을 맡기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쟁취하기도 했던 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삶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교수, 왕과 참모에 이어 이제는 왕비다!" 라는 홍보문구 옆에 저자의 사진이 박혀있다. 티비를 잘 안보는 편임에도 즐겨 애청하는 티비프로에서 낯을 익힌 저자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극적인 삶을 살다간 왕비 한명에 초점을 두고 소설처럼 야사처럼 풀어낸 책들은 봐왔어도 조선왕조 전체 왕비를 다루고 있는 책은 처음이라는 설레임 속에 책을 펼쳤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시대의 왕비는 결코 동화나 사극 속 왕비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제약이 많았다. 어쩌면 조선의 왕비는 엄격한 궁중에서 자유가 제한된 채 비슷한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힘든 직업을 가진 존재였다. (p. 5)

세자빈이 되었어도 왕비에 오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 왕비, 그리고 아들 숙종이 오아이 되면서 대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세자빈에서 왕비로 그리고 대비까지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이다. (p. 6)

조선왕조오백년이라지만 그 긴 세월동안 이어진 왕조는 사실 적통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적통이 오히려 드물었다. 그렇게 왕들도 살아남기 힘든 왕실에서 왕비는 오죽했겠는가. 역사에서 화려한 왕의 그림자속엔 왕비가 있곤 했다. 왕비는 그림자처럼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존재였다. 사실 여성이라는 자체가 늘 힘든 직업이었음은 어느 시대 역사라도 조금만 펼쳐보면 바로 확인이 될 것이다. 동화속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지 몰라도 구중궁궐 속 왕비는 잠시잠깐도 행복하기 힘들었다.

책은 각각의 주제로 묶여있는 듯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연대순이라 좋았다. 안그래도 헤깔리는 왕조의 계보가 순서마저 뒤섞여 있다면 그야말로 잡학적 흥미거리일 뿐 역사로 읽어내기가 힘들기 마련인데 순서대로 차근차근 나열되니 정리해가며 읽기에 좋았다. 이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왕이었으나 존재감이 없던 왕, 그런 왕과의 사이에 자식마저 없던 왕비는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후궁의 소실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지해주었다는(혹은 지지해주어야만 했을) 그런 왕비들을 만날때마다 역사가 주는 씁쓸함이 배가 되곤 했다. 가끔 야심만만한 왕비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항상 끝이 안좋았다.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왕비들에 비해 처음인듯 생소하게 다가오는 왕비들의 이야기에는 더 마음이 쏠리기도 했는데, 조선초기 야심만만한 아우덕에 갑작스레 왕이 된 정종과 40년 가까이 해로했지만 자식이 없던 정안왕후, 남편을 왕으로 만든 최고의 정치적 동지였으나 정작 남편이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친정 가문까지 철저하게 탄압받다 말년에 존재감없이 살다간 원경왕후, 단종과 사별후 옷감에 물을 들이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82세의 천수를 누린 정순왕후,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는 수렴청정을 했던 정희왕후등 조선 초기의 왕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왕비들의 삶이 헤깔리는 이유 중 하나는 호칭 때문이었다. 불리는 명칭이 너무 다양했다;;; 예를들어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의 어머니인데 인수왕비(=인수대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혜경궁 홍씨로 유명한 왕비도 정식 명칭은 헌경왕후 였다. 왕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신분에 따라 왕비의 존칭도 달라지곤 했으니 헤깔린다 헤깔려;;; 가계도를 정리해서 참고자료로 붙여주셨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왕조 관련 책은 가계도가 꼭 있어줘야 하는데 말이다...

가끔 사진 자료가 참고내용이 있곤 했는데, 그중 가장 놀라웠던 내용이 효령대군 이야기였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은 동생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했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큰 사건들을 거치면서 91세까지 장수했다는!! 불교에 귀의도 아니고 심취했기 때문에 자식도 두었고 왕족이니 나름 윤택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의 삶이 몹시 궁금해진다.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를 간호했던 의녀가 드라마 대장금으로 유명한 장금이었다는 내용도 새삼 흥미로웠다.(드라마를 봤었는데 어느 왕때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장경왕후가 출산에 따른 후유증으로 출산 7일만에 승하하면서 의녀였던 장금에 대한 처벌 논의가 많았다는데 중종은 장금의 처벌을 면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보며 드라마적 상상의 나래가 잠시 펼쳐지기도 했다.

역사서임에도 아니 역사서라서인지 저자의 견해가 많이 들어간 책은 아니었지만 가끔 발견되는 저자의 견해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성종 시대부터 유교국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왕비 이전에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가 본격적으로 강조되었다. 여성이 여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고 특히 왕비는 더욱 모범이 되는 여성상을 지켜나가야 했던 시대였다. 또한 폐비 윤씨의 사사는 조선 전기 대세가 되었던 원경왕후나 정희왕후와 같은 여걸형 왕비의 몰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p. 129)

수원에 있는 심온 선생의 사당 사진을 보자 가봤던 곳이라 왠지 반가웠던 한편으론 역모에 의해 처형된 집안의 사당이 그렇게 크고 귀티나게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세종이 부인을 위해 사후관리를 해주었을 수도 있지만 왕비의 가문이 이렇게 지금까지 잘 관리되어진 곳이 또 있던가... 여하튼, 왕비가 먼저 떠나고 계비를 들이라는 신하들의 건의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은 세종의 의리를 후대의 왕들도 본받았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새삼 들게 하는 유적지였다. 세종의 며느리잔혹사는 다시봐도 참 안타까운 역사의 '만약에' 순간이었다. 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만약에 이랬더라면' 싶었던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였다.

중국을 통일한 후 거침없이 뻗어가던 청나라는 군사대국일 뿐 아니라 문화대국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담 샬과 같은 선교사를 통해 천주교와 더불어 화포, 망원경과 같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도 이러한 서구의 과학 문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p. 258)

소현세가 왕이 됐더라면 정조보다 더 큰 업적을 남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근대문화를 일찍 맞이한 조선이 일본에게 망하는 굴욕을 경험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일본을 압도하는 대국으로 성장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에 '만약에'는 의미가 없다...

사실 조선의 왕 27명 중 적장자 출신이 7명이니, 일단 3단계 과정을 모두 거칠 수 있는 왕비의 숫자는 7명으로 제한된다. 여기에 적장자 출신의 왕 중 문종의 왕비는 세자빈의 신분에서 사망했고, 단종의 왕비와 연산군의 왕비는 폐출되었다. 인종의 왕비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숙종의 후계도 소생의 아들로 이어졌다. 마지막 적장자인 순종의 왕비는 후사없이 승하했다. 조선의 왕비 중에서도 정통성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명성왕후는 누구인가? (p. 273)

현종이 후궁이 없었던 이유로는 현종의 건강 상태와 더불어 명성왕후의 강한 성격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녀의 강한 성격은 아들인 숙종이 왕이 된 후에 일정 부분 드러나게 된다. (p. 276)

명성황후와 앞에 명칭이 같은 명성왕후에 대해 전혀 몰랐다(왕비의 이름들이 같은 이름으로 붙은 경우가 없던데 명성황후는 왜 명성왕후와 같은 호칭을 받은 것일까? 궁금하다궁금해.. 하지만 책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이유를 알수가 없어 슬펐다 ㅜㅜ).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남편이 왕이 되어 왕비가 되고 아들이 왕이 되어 왕대비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왕비라는 명성왕후 김씨, 그녀의 남편은 역사에 그닥 존재감 없는 현종 이다. 예송논쟁으로 혼탁한 정국과 스스로 병약하여 국정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현종은 왕으로서의 존재감은 약했을지 몰라도 조선의 왕 중 후궁이 한 명도 없었던 왕이라는 점에서 강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 이유가 좀 아쉽긴 하지만 ^^;;; 하지만 강한성격이라는 명성왕후는 숙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 했다면.. 문정왕후보다 더강했을까? ㅎㅎ 수렴청정 하면 문정왕후가 떠오르지만 사실 기억해야 할 왕비는 따로 있는 듯 하다.

정순왕후는 여군 또는 여주로 자처하면서 3년반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정조가 구축해놓은 탕평정치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단순히 사학으로만 규정되던 서학(천주교)을 금기시하여 서학을 믿던 사람들을 국가반역자 집단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으니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다. 그녀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지원하던 세력들을 대거 제거하면서 경색 정국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었다. (p. 338)

정순왕후는 66세의 영조가 계비로 맞이한 15세의 신부였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의 관련자였다. 정조에게 부담스러운 어린할머니였던 정순왕후는 정조사후 정조가 이룬 거의 모든 것을 망쳐놓은 셈이다. 하지만 순조는 그녀의 묘비에 송나라의 선인태후에 비교하는 문구를 바쳤다. 선인태후는 송 영종의 비이자 철종의 모후로 수렴청정하며 여자 중의 요순으로 칭송받은 인물이라고 한다. 하긴 왕후 한명이 하면 뭘 얼마나 어쨌겠는가.. 왕후를 내세운 가문이 권력을 휘두른 것이었을 테지만 역사는 이름을 기억한다. 왕비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대부분 안좋은 기록들이다. 그렇다면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왕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10세의 나이 때부터 세손빈과 왕비 그리고 대비를 거치며 무려 60년 가까이 궁궐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의왕후에 대한 기억이 적은 까닭은 뭘까? 영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정조, 정순왕후 등 그녀 주변의 인물들이 너무나 강한 개성을 지녔기 때문은 아닐까? (p. 366)

라고 저자는 정조의 아내 효의왕후에 대한 생각을 밝히지만 글쎄... 저자가 책의 서문에서 극한직업이라고 표현한 왕비라는 삶에 가장 가까운 생애을 살았던 왕비가 효의왕후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려졌으나 사라지진 않았던 왕비에 대해 한참 생각이 머물렀다. 60년이라...

경복궁 중건은 흔히 흥선대원군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원래 착수했던 사업이었고 신정왕후가 남편의 유업을 계승한 사업이기도 했다. (p. 383)

흥선대원군에 대해서 역사책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어린 아들 고종을 앞세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뒷배경로 신원왕후가 있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의 자리에 올라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은 못보았지만 아들이 헌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본 신정왕후는 시어머니인 순원왕후 사후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내보일 수 있었고 그동안의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막을 내리게 한 사람이었다. 신정왕후가 동의하고 지지해주었기에 흥선대원군이 활개를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위승계문제가 불거질때만 존재감 있었던 왕비들은 늘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왕위계승문제 뿐만아니라 정치에 개입한 왕비라고 해서 역사에 명성을 남겨놓은 것도 아니다. 왕비의 삶은 이러나저러나 극한직업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책은 전반적으로 조선의 왕비들에 대한 얼개를 갖추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어미였으며 어느 릉에 묻혔다로 서술되는 왕비들의 요약된 기록에서 정작 그녀들이 살아낸 생은 잘 알 수 없었다. 대부분 '이런 왕비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로 시작해서 변경되는 호칭들의 나열과 최소한의 생의 기록에 비하면 비교적 상세한 왕릉에 대한 기록은 이 책의 기본틀이 왕릉의 연대기인건가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무엇보다 본문으로 뚝 하고 끝나버리는 책의 마무리가 아쉬었다. 나는 서문 보다 후기에 의미를 두는 편이라 본문으로 전개된 내용에 대한 정리가 있으면 참 좋던데...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책은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봄직한 책이었다. 전문가인 저자가 알려주는 내용들은 자료적 측면에서 신뢰도가 높았고 이런 기초자료가 있을때 호기심도 생기고 다른 확장된 내용도 찾아보기 쉽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나중에 시간이 여유로울때 왕비들도 함께 나열된 조선왕조 계보도를 그려볼까 싶은 욕심이 들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빈약하게 서술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조선왕조의 왕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왕비로 산다는 것' 이 어떤 삶인지 느끼게 해주는 책인 것 같다. 다 읽은 책들은 대부분 밖으로 처리하게 하는 크지 않은 나의 책장에 꽂혀있는 조선왕들의 책 옆에 이 한권의 책도 함께할 자리를 마련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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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미스터리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5
정명섭 외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실현되지 않은 미래 기술을 보여주는 SF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Mystery

서로 다른 두 장르가 만나 새로운 장르, 스프 미스터리가 탄생했다!

그래비티북스의 GF시리즈 중 몇 권을 인상좋게 읽었었더랬다. SF 도 미스터리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몹시 관심가는 시리즈다. 이번책은 4명의 작가가 서로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단편 4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멀지않은 미래의 어느날 영종도 근처 인공 섬에 만들어진 자유무역도시인 헤븐에서 한 남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헤븐에서는 공식적으로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헤븐에 사는 세 종류의 거주민 즉, 타워에 거주하는 부유층과 센트럴 지역 및 지하구역에 사는 센트럴 거주민 그리고 관광객들 중 누구라도 아주 작은 범법행위라도 하는 즉시 추방되기 때문에 누구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의문의 폭발로 죽은 한 남자의 사건은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망자는 센트럴에서 시험운행 중인 기아-벤츠사의 전기 버스 운전기사였어요. 기아-벤츠사의 노조는 헤븐의 무인 운행 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민주 통합 운송 노조 소속이죠"

"여긴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p. 12)

"난 유전자 분자 배열 방식에 따른 성장 염색체 추출법을 연구하는 중이었어. 그러려면 건강한 육체는 기본이었지"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해야 한다. 이말이군,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많은데 왜 하필 헤븐이지?"

"타워 거주자들의 유전자가 제일 우수하니까" (p. 25)

"크륍테이아? 무슨 뜻이에요?"

"스파르타 청년들의 비밀결사로 헤일로타이라고 부르는 노예 중 뛰어난 자들을 암살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헤일로타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근데 이건 왜요?"

"헤븐을 조종한다고 알려진 조직의 이름이 올림포스야" (p. 50, 51)

< 헤븐 中 >

폭발로 죽은 남자에 대한 조사를 하던 도중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는 유전자조작약과 관련이 있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독재가 현실화되는 설정은 SF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들 중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연결짓는 것도 새롭진 않다. 하지만 SF가 지금의 현실비판 요소를 반영하는 방식이 새로워서 좋았다.

"미안하지만 헤븐에는 전과자나 지명수배자들은 못 들어옵니다"

"그런 잔챙이들 말고, 여기 전직 대통령이 몇 명이나 살고 있는지 알아요? 전직 장관이나 파산한 재벌그룹 총수로 내려가면 수백 명으로 늘어납니다"

"지상에 천국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잖습니까?"

"껍데기만 천국이지. 사실은 가진 자들의 왕국이잖아요"  (p. 52, 53)

< 헤븐 中 >

이렇게 보면 사실 겉모습이 바뀐 미래가 지금과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본 뒤 현재를 보면 마찬가지이듯이.

화성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므로 가장 궁금한 곳이지만 엄청나게 발전한 것 같은 지금의 과학기술도 아직 화성에 유인우주선을 보낼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다. 화성인에 대한 상상은 늘 SF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화성인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화성인이 지금은 없더라도 과거에 문명이 있진 않았을까? 여하튼, 화성에 지구에서 부족한 광물자원이 넘쳐난다는 설정아래 지구에서 출발한 유인우주선이 화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화성에서 금을 캐던 지구인 광부가 실종된다.

컬쳐호에서 얻어낸 데이터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광부가 도착한 곳은 계곡이었다. 그들은 계곡 주변을 돌아보다가 아래로 내려갔고, 그곳에 있는 오래된 동굴입구를 발견했다. (p. 93)

"컬쳐호가 화성에 도착한 건 6년 전이에요. 6년이요. 정말 6년 동안 홀로 화성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사람이 아니라면 왜 사람 흉내를 내는데?"

"그걸 조사하고 싶습니다" (p. 97)

2차대공황 이전에 다국적 기업이 많은 군인과 광부와 과학자와 비해사를 화성에 보냈지만 제대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소문또한 돌았고, 사람들도 화성이 위험한 곳이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구연합정부는 사람 대신 광물을 캐오도록 프로그램한 로봇을 보냈다. (p. 104)

< 화성의 폐허 中 >

이 로봇들은 앤트라 불렸고 현지상황에 따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자체수리할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형 로봇이었다. 지구에서 광물요청이 많아질수록 앤트들의 수는 늘어갔고 현지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하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진 지구에서 가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모습이 화성에서도 관측됐지만 앤트들은 누가 명령을 보냈던 명령이 오면 그저 열심히 광물을 캘 뿐이었다. 화성은 점점 앤트들이 건설한 시설들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검은비가 내리고 모래폭풍이 쉼없이 발생했다.

타겟은 최대한 많은 금속을 채굴하면서 동시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지만, 계속 실패했다. 헤파이스토스를 통해 연합정부에 도움을 요청해도 명확한 대답이 오지 않았다. 13호가 막 지표면으로 나왔을 때, 하늘에서 타겟이 파괴되어 불타다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늘에서 핵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이를 피해서 움직이는 앤트가 없었다. 그것이 인간이 내린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p. 110)

"이걸 꼭 구해오라고 그렇게 괴롭히더군요" 황금 해골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시겠지만, 3차 세계대전 때문에 지구는 인간이 살기 골치 아픈 곳이 됐습니다. 가까운 화성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선발대를 보내 화성인이 있는지 살피고, 있으면 반드시 제거하라고 했죠. 그게 제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대신 저는 인간을 죽였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이 어찌나 말이 많던지 시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p. 126, 127)

< 화성의 폐허 中 >

인간의 명령을 이행한 앤트들의 사회가 무너진 화성에서 살아남은?! 로봇13호는 사실 인간의 명령을 거부한 살인로봇이었다. 그리고 13호는 화성인을 만났다. 거대한 동굴에서 끊임없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최후의 화성인을.

마지막 로봇과 마지막 화성인은 진화일까? 멸종일까?

곧은 자세로 강단에 서 있던 은회색 머리의 여자가 바로 기획자, 가이아의 데메테르였다. (p. 155)

첫해 가을, 시월의 첫 보름달을 맞아 기획자는 여자들을 벌판에 불러 모았다. 기획자가 작성한 맹약의 문구를 함께 암송한 그들은 보름달 아래 머리를 풀어 헤치고 상의를 벗어 던졌다. 화톳불이 퍼뜨리는 불빛 속에서, 그들 각자는 완전무결한 개체였다. 또한,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결집체이기도 했다. 가이아의 여자들은 그날 밤새도록 발을 굴리며 노래를 불렀다. 격렬한 애무와 함께 춤을 추며 입맞춤을 나누기도 했다. (p. 157)

< 불면의 밤은 끝나고 中 >

여자들만 사는 공동체 가이아를 세우고 여자들만의 비의를 치루는 표현은 그리스신화적 분위기를 풍겼지만 어설프게 다가왔다. 과학기술이 첨단으로 발달한 미래배경도 아니고 원인불명의 병이 퍼졌다고 해서 미스터리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고...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SF적 미스터리한 설정이라고 여긴 것일까...

"변이라고요?"

"네, 그 여자들이 그랬어요.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이할 거라고"

"그 여자들이라면..."

"코라를 숭배하는 사람들"

코라, 혹은 페르세포네. 데메테르 여신의 딸. 데메테르는 기획자에게 붙여진 별명이기도 했다. 이 이름들 간에는 우연 외에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을까, 극심한 어지럼증 속에서도 해인은 답을 구하고 싶었다. (p. 180)

< 불면의 밤은 끝나고 中 >

남자들은 걸리면 죽고 여자들은 걸리면 잠에 빠진다는 그 병의 실체는 알 수 없다. 과연 그 긴 겨울잠에서 여자들이 깨어날 수 있을 것인지도...

곧 만날 아들에 대한 설레임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과학교사가 만삭의 아내와 산책하던 어느날 희한한 라디오가 발견된다.

나도 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곧 태어날 우리 아들만 생각해야 한다. 12년 후에 죽을 운명인 우리 아들을 살리려면 바로 오늘, 저 여자애를 죽여야만 한다. (p. 190)

나는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타자기나 전화기, 턴테이블 같은 옛날 전자제품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 이 라디오는 아내를 위해 밤잠을 희생하는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니 당연히 내 차지가 되어야 한다.

"갖고 싶으면 하나 사"

"살 수 있으면 진즉에 샀지. 이 모델은 단종 돼서 구하기 힘든 거란 말이야" (p. 192, 193)

< 미래 뉴스 中 >

미래를 먼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고물라디오에서 나오는 채널은 단 한곳, 그런데 라디오를 껐다 켤때마다 방송은 점점 더 미래소식을 들려준다. 처음엔 무서웠다가 다음엔 환희에 차올랐다. 주가상승에 대한 소식이 나올때마다 메모를 하고 주식을 미리 사두었다. 사둔 주식은 대박을 쳤고 부부는 점점 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다 한 사건의 뉴스를 듣는다.

뉴스 속보입니다. 지난 18일 발생한 초등학생 은 모군 살해 사건의 범인이 검거됐습니다. 열두살 은 모군을 납치, 학교 인근 공원의 화장실에서 수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범인은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밝혀졌습니다.

피의자의 어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조 모씨... 저 목소리는... 조...화영? 나는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p. 219)

< 미래뉴스 中 >

권선징악...인과응보 는 미래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인간사회의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처럼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수습한다고 하는 현재의 행동은 결국 미래가 현재가 됐을때 더 큰 파장을 몰고 와 버린다.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날에.

짧은 단편들이니만큼 스윽 읽히는 책이었지만 좀 아쉬운 기분으로 마지막장을 덮었다.

크륍테이아, 헤파이스토스, 데메테르 등 신화적 이름들을 어설프게 가져다 쓴 것도 미래소식을 들려주는 라디오도 참신한 SF미스터리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 장편보다 단편이해에 약한 개인적인 취향도 한몫 거들면서 4편의 작품 중 그 어느 작품으로도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삼체 라던가 XX 라는 장편소설들이 떠오르면서 역사적 설정과 현재를 반영한 미래의 모습에 공감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호흡이 긴 장편이 나은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GF 시리즈에서 국내 SF소설의 가능성을 확인한 나로서는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서 만날 젊은 SF작가들의 멋진 작품들을 기다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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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퍼시픽 실험 - 중국과 미국은 어떻게 협력하고 경쟁하는가
매트 시한 지음, 박영준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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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역 전쟁의 격랑 속에서 트랜스퍼시픽 실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중국과 미국, 그 혁신과 변화의 관계를 읽으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국과 중국사이의 갈등은 지금으로선 화해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듯 하다. 언제부터 왜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무역전쟁' 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이 두나라의 관계를 협소하게 본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취재한 저자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두 나라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을 시도하고 나아가 세계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트랜스퍼시픽실험이란 오늘날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민간 차원의 외교적 교류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골든스테이트라고 불리는 캘리포니아 주,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국가 사이에 형성되는 학생, 기업가, 투자자, 이민자, 그리고 갖가지 아이디어의 역동적인 생태계를 의미한다. (p. 19)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가장 먼저 발딯게 되는 땅 캘리포니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첨예한 갈등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땅 캘리포니아, 한때 이민자들의 꿈의 장소였으나 지금은 실리콘밸리의 전초기지가 된 캘리포니아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할수 있게 해주는 가장 적절한 곳이기도 하다.

저자는 먼저 중국유학생으로 넘쳐나는 대학들에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대학운영자에게는 중국 학생이 학교를 재정적인 곤경에서 건져주는 구명줄 같은 존재였을 테지만 캠퍼스에 중국 학생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지켜본 캘리포니아의 미국 학생들은 새로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외국 학생들은 단지 우리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할 셈인가? 대학 생활을 통한 문화적 교류도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학생이 늘어나면서 이 그룹의 내부에만 안주하려는 학생들의 배타성도 함께 증가했다. (p. 36)

미국의 대학은 현지 학생들에게 대학등록금을 대폭 할인해준다고 한다. 국가의 교육지원비가 줄면서 재정난에 빠진 대학들에게 현지 학생들에 비해 세배에 달하는 수업료를 지불하고 학자금 융자도 거의 받지 않는 중국유학생들은 반가운 존재였다. 과거 유학생들은 부모의 고생을 등에지고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이후 부유한 중국유학생들은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이들에게 미국대학학위는 더이상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는 '황금티켓'이 아니었고 중국내에서 자리잡는데 필요한 스펙정도가 됐을 뿐이었다. 다른 교육제도아래 성장한 그들이 미국대학입학조건을 맞추는데 도움을 주는 중국내 교육컨설팅회사의 방법은 사기수준에 오락가락하여 미대학의 입학부서를 당황시키고 미국에 유학온 중국학생들은 중국의 문화를 전혀 모르고 알려하지도 않는 미국인 친구들에게 큰 충격을 받게 되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은 늘어가는 유학생들을 정치교육의 우선 대장자로 삼아 주기적으로 관리하려 하고 미국정부는 중국유학생들을 스파이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을 찾은 중국 유학생들의 이야기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갔다. 1800년대에 미국인들은 이 땅에 도착한 중국 학생들이 새로운 빛(기독교 또는 자유민주주의)을 발견할 거라고 기대했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뽑힌 가장 똑똑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이곳 자유의 나라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거나, 중국으로 돌아가 미국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트로이의 목가'가 되리라 상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미국인들은 그와 정반대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 학생들이 중국의 가치를 미국에 퍼뜨리고, 언론 통제의 수단을 도입하고, 첨단기술을 훔치는 공모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변화가 벌어진 가장 큰 원인은 미·중 양국 간의 지정학적 균형이 구조적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험하는 일은 여전히 매우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 78, 79)

미국인들이 유학생들에 대해 가졌던 우월감은 모래성처럼 부질없던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경험하는 대학내에서의 경험은 그나마 아직 자유로워 보인다. 국가간의 갈등이 학문의 자유를 오히려 왜곡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간의 문제는 분명 개개인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더욱 심각한 수준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사이버공간을 마치 감시하고, 가꾸고, 통제해야 할 물리적 장소인 것처럼 인식했다. 수천 년 전 중국의 고대 왕조는 걸핏하면 자신들의 땅을 침범하는 '오랑캐'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디지털화된 만리장성인 '만리방화벽'을 구축했다. 이 복잡한 기술적 통제 시스템은 구글, 페이스북, 스냅챗, 트위터 등을 포함한 미국의 기술 대기업과 언론매체를 자국의 인터넷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해버렸다. (p. 85)

중국의 경제발전과 통제상황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체제이다 보니 중국이 새롭게 가는 길마다 미국으로선 당황할 수 밖에 없다. 통제를 위한 만리방화벽은 내부의 저항이 아닌 중국본토에서의 디지털경제를 번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자신만만하게 진출했던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경쟁에 패배하거나 중국정부에 의해 쫓겨났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런 실질적 혜책을 얻는 동시에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려운 줄다리기를 벌여야 했다. 즉 실리콘밸리로부터 아이디어와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외국 기업을 중국공산당의 완벽한 통제 아래에 두어야 했다. 미국의 기술기업은 중국 시장에 진입하면서 기업윤리와 경제적 이익 사이의 딜레마에 부딪혔다. (p. 91)

지난 수년간 모든 사람은 인터넷이 중국 정부를 어떻게 바꿀지 궁금해했다. 현재도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었다. 중국 정부는 과연 인터넷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p. 94)

이베이가 중국시장에서 알리바바에 의해 퇴출되고 바이두가 구글을 밀어냈을 때에도 미국의 기업가들은 그런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웨이보가 중국공산당의 검열을 흔드는듯 했지만 법으로 제재하기 시작하자 내부비판의 목소리는 어디서도 듣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에서 중국출신 사업가가는 '대나무 천장'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미국에서 성장한 중국인재를 중국이 빼가는 것인지 미국이 내모는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터넷이 중국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인터넷 지형을 바꾸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미래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현금없는 결제 시스템, 그리고 통신과 상업적 거래가 완벽하게 통합된 세계를 꿈꿔왔다. 중국은 보호주의와 자생적인 혁신의 조합을 통해 바로 그런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p. 142)

인재는 퍼즐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는 이제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을 본격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BAT가 앞다투어 투자에 뛰어는 것은 그들이 고국에서 벌어질 세 회사 간의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그 회사들을 인수해 앞으로 중국 시장에서 벌어질 전투의 무기로 삼고자 했다. (p. 147)

중국의 서투른 벤처투자가가 손에 현금을 쥐고 실리콘밸리로 몰려든 시기에 중국 정부의 관료들은 '인터넷 통치권' 또는 '사이버 통치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외로 수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이념의 골자는 한 국가가 자국의 국경 내에서 인터넷 콘텐츠를 통제할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p. 153)

신용카드도 잘 안쓰고 현금만 쓰던 중국인들은 위챗이라는 앱을 이용해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사이버결제의 세계로 이동했다. 중국의 검열과 사전검사 조건을 거부하여 밀려났던 미국기업들은 이제 중국의 검열규정을 받아들이겠다며 다시 중국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런 기업들의 행보가 미국 정부에서 곱게 보일리 없다. 자유의 상징이었던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중국정부가 제한하는 정보만 검색되도록 하는데 동의하고라도 중국시장에 진출하려는 모습은 인터넷이 결코 자유공간이 아닐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윤리문제를 동반하기 마련인데 '사이버 통치권' 이 인정되면 그다음 AI 통치권 주행통치권 등 온갖 통치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미국 거대기업의 행보가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곤란해질 것 같다...

양국 간에 벌어진 지정학적 경쟁의 세부 형태는 계속 변했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바라본 갈등의 구조는 점점 뚜렷해졌다. 유라시아 그룹은 2018년 세계의 지정학적 위험 요소 중 하나로 '국제적 기술 냉전'을 꼽았다. 이 연구소는 초근 미·중 양국 간에 고조되는 긴장의 양상을 기술 생태계의 분리, 제3국에서의 경쟁, 최첨단기술의 주도권 다툼 등 세 측면으로 요약했다. (p. 172)

우리나라에 냉전은 익숙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세계대전 이후 이념전쟁으로 분단을 겪고 미국과 소련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던 냉전은 이제 총칼만 없다뿐이지 치열함은 더 가속화되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냉전 으로 여전히 중간에 끼어 험난한 길이 예고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양국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자국 기업의 기술을 보호하려 하고 있다. 양국이 직접적으로 경쟁하지 않으면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에서 대리전을 치루고 있기도 하다. 이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살길은 어디에 있을지 찾다보면 고래싸움에 등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조개잡으러 던진 그물에 조개를 먹으려는 새까지 잡는 어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산업에서 헐리우드와 중국기업의 모습에 대한 한 제작자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서로가 속셈이 달랐던 겁니다. 중국은 할리우드를 꿈꿨고 할리우드는 중국을 꿈꿨어요. 중국이 원하는 것은 존중이었습니다. 세계의 관객들이 중국과 관련된 콘텐츠를 봐주길 바랐던 거예요"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을 원했을까?

"현금이죠" (p. 217)

할리우드에서 중국을 모자라고 적국으로 표현하던 때가 언제였나 싶게 이젠 중국 검열에 맞춘 중국내 상영판을 따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돈으로 밀어부치는 영화산업에서 자국의 검열 기준에 맞춘 작품으로 중국영화의 세계화는 아직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보면 문화산업에서는 우리나라가 좀더 승산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ㅎㅎ

국가대 국가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해서 그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한마음한뜻으로 국가의 입장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려면 다른 나라를 존중해야 해요. 하지만 미국은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서는 더 심했죠. 이제 미국에 혜택을 주는 쪽은 아시아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들에 별로 해줄 게 없어요. 일자리가 필요한 건 우리 쪽이니까요" (p. 244)

중국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해 열심인 랭커스터 시장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정부의 입장과 달리 미국의 기업과 도시들은 여전히 중국의 돈을 원하고 있어 보였다. 미국정부가 무역에 있어서 지금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 처음도 아니었단 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미·중 간의 지정학적 배경 아래서 벌어지는 현상은 1980년대 미국과 일본 간에 발생했던 상황과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 세계무대에서 자국의 위상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한 미국은 새로 부상하는 아시아 국가에 우려를 나타내고 외국인이 미국 땅으로 몰려드는 현상에 불편함을 드러낸다. (p. 283)

저자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처럼 시간이 지나면 미국과 중국의 관계도 괜찮아질 것이라 낙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보기엔 일본과 중국은 너무나 다른 나라다.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예측이 불가능하다. 여하튼 이렇게 보니 미국은 늘 굉장히 보수적인 나라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미국인은 '지치고, 가난하고, 불쌍하고, 겁에 질린' 이민자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런데 이주해온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부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p. 296)

중국의 거부들이 미국내 주택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이들은 집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현금으로 턱턱 집을 사놓고 별장처럼 이용하거나 스위스은행에 자산을 맡겨둔듯 그렇게 미국내 고급주택을 사들인다. 그러다 중국정부가 해외로의 자금유출을 제한하기 시작하자 미국내에서 중국인의 돈으로 활발하게 벌어졌던 주택관련 프로젝트들도 수렁에 빠져버렸다. 미국인들은 혼란스럽다. 새로 생긴 중국이웃은 만날 수가 없고 빈집들은 늘어간다. 평화롭던 주택가마저 분위기가 예전같지 않아졌다.

그와중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중국계미국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상은 또다른 복잡함을 더해준다.

"제가 그 사람들에게 '차이나타운을 위해 무엇이든 기여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그들은 대개 이렇게 대답해요. '아니요, 나는 차이나타운과 별로 엮이고 싶지 않나요. 그곳은 옛날 중국인들이 살았던 곳이고, 나는 새로운 중국인이거든요. 우리는 훨씬 수준이 높아요. 만일 내가 차이니타운에 뭔가를 투자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새로운 차이나타운을 만드는 것일 거예요" (p. 343)

미국인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것처럼 중국인들도 각자의 입장이 반드시 중국정부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적어도 미국내 중국계미국인들 사회는 분열되고 있는 중이다. 한쪽은 자신들을 여전히 소수집단으로 보고 한쪽은 자신들이 백인들과 같은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요소(인재, 스타트업, 시위대, 문화적 배합 등)는 한 올 한 올의 실이 되어 문화와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직조해내는 중이다. 그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서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엄청난 복잡성 속에서 우리는 두 나라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긴장과 시너지를 엿볼 수 있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이 만들어갈 관계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p. 386)

문제는 양국 간의 교류에서 오는 비용과 혜택을 정확히 계산해내기가 어렵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상이 트랜스퍼시픽 실험의 초기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p. 387)

저자는 새옹지마 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서로가 겸손함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며,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을 표시하고 그 대상을 알게 되었을때 진정으로 기뻐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저자의 희망적 마무리와 달리 나는 이 책을 읽기전 가졌던 미국과 중국간의 관계에 대한 (남의 일이겠거니 하는)가벼운 생각이 복잡해져 버렸다. 알면 알수록 복잡다단한 그 관계가 잘 지내기 정말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 걱정이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두 나라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랐을때보다는 알고나면 그나마라도 대처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앞으로도 트랜스퍼시픽 실험을 지켜보며 무역뿐만이 아닌 교육, 문화, 기술 전반에 대해 다각도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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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 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이승욱 외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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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탈권위 바람과 권위에 대한 맹목적 향수가 공존하는 시대,

 정신분석학의 대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권위'라는 해법!

 

 

전부터 느껴왔던 것이, 어느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어른'은 없고 '꼰대'만 넘쳐나고 있는것같다는 점이다. 진정한 사회의 어른은 왜 없어졌는가 라는 질문만 가져왔던 내게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라는 제목은 새로운 해답처럼 다가왔다. 어른이 되지 못하니 어른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왜 우리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위는 없어지고 권력만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권위' 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전에 권위와 권력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권위는 권력의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 원하는 행동을 강요하려면 권위에 권력이 필요하다. 이때 말하는 권력이란 정당한 권력을 의미한다. 반면 권력은 권위가 없어도 홀로 기능한다. (p. 23)

뒤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만 정리하면 권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권력은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한 집안의 가장에게 권위가 아니라 권력만 있다고 말하는 경우 가족들은 가장을 존경하지 않고 가장이 휘두르는 권력을 폭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권위있는 가장에겐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가장의 뜻을 존중하기때문에 가장이 권력을 내세울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부모 역할에 얼마나 성공했는가는 자녀가 부모를 떠나는 능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잘 양육되었는가는 부재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p. 30)

요즘 부모들이 자녀에게 미치는 통제력은 당연시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거칠다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자녀의 뚜렷한 자기주관은, 권위자로서 부모 역할을 확실히 이행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부모의 두려움은 분명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잘못이해된 교육방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아이들도 여전히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 부모는 자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 얼마든지 발언권을 주되 최종 결정은 언제나 부모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아이 양육 과정에서 권위를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p. 33)

정상적인 양육 과정에서 부모는 확실한 권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어린자녀가 '다수'로 자라날 때까지 서서히 독립심을 키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이 순서를 인위적으로 뒤바꾸려고 한다. 젖먹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초등학교는 최소한의 규칙들로 아이들을 관리한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썽을 일으키면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협상'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처참한 실패를 낳을 것이 뻔하다.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이러니 학교가 애를 먹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즘 부모들은 학교가 아이들에게 권위를 가르쳐주길 원한다. 반면 학교는 부모가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을 떠넘긴다고 불만을 터트린다. (p. 34)

초반부터 시원스럽다. 솔직히 조금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친구는 밖에 나가면 마음껏 사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는 밖에서 만들 수 없는 존재다. 부모는 오직 부모만이 해줄 수 있는 책임과 역할이 있다. 친구같은 부모보다는 존경할 수 부모가 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존경할 수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인정받는 존재여야 한다. 자녀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부모는 자녀를 제대로 독립시킬 수 있다. 그렇게 부모라는 어른의 모습을 보고자란 자녀만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다. 온통 친구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아이상태에 머물뿐 어른이 될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닐까? 이렇게 자란 아이는 권위를 모른채 결국 권력을 휘두르거나 권력에 휘둘리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권위에 뭔가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우리는 사회로서, 또 개개인으로서 바로 이러한 어려움에 마주쳤다. 사람들은 더티해리, 로보캅, 간달프를 합쳐놓은 강력한 권위자가 돌아와 우리 모두에게 제자리에 있을 것을 명령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실패할 것이다. 진짜 해결책을 원한다면, 우선 문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p. 41, 42)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권위' 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권위의 원천이 개인의 외부에 있다는 것은 권위와 권력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권력은 양변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 두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따라서 권력은 언제나 유예된 폭력이다. 반면 권위는 삼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타인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 그 권위는 제3의 요소, 즉 모두가 공통으로 믿는 외부의 원천에 근거하고 있다. 권위에 대한 다소간 자발적인 복종은 바로 이 외부의 원천에 의지한다. 권위는 언제나 내적 강박과 관련 있는 것이다. 권위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p. 47)

권위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 누구에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지 깨달아야 한다. 권위는 단기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얻고자 마음먹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에 당연하게 인정되어 왔던 것 같은 권위는 권위가 아니었음을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면서 증명해낸다.

원초적 아버지에 대한 사이비 생물학적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지닌다. 어떤 이들은 프로이트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놀랍게도 그는 권위의 근거가 아버지에게 맞서는 최초의 폭력 행위에 있다고 보았다. 법의 정립 또한 최초의 폭력 행위를 뒤따른다. 후기 저서에서 프로이트는 이 혹력 행위 안에서 유일신 종교의 기원을 발견한다. 유일신 종교는 거의 대부분 가부장적이다. 프로이트는 이 종교들의 기원에서 자신이 '가족 로맨스'에서 설명한 것과 비슷한 과정을 발견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가장 높은 자리로 격상하고 그런 다음에 그 환상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이다. 아들 예수가 자신을 희생해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교를 발흥하고 확립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발전 경로는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자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프로이트도 자기 주장 속 순환 논리의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한다. 모든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부류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권위를 얻으며 그 원천은 한 명의 원초적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원초적 아버지의 권위는 그가 죽은 후에야 아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 55 ~ 57 발췌)

우리는 그동안 '권위' 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 뿐만 아니라 사회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서구 사회에서는 서로 밀접히 연결된 권위의 원천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리스 고전 철학(플라톤), 고대 로마 그리고 기독교가 그것이다. 플라톤은 이성과 영원한 진리를 의미한다. 로마는 전통과 조상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양상을 합친 것에대 두려움이라는 요소를 넉넉하게 가미한다. 권위가 작동하는 방법은 아마 전 세계적으로 똑같을 것이다. 반면, 권위의 원천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아렌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위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권위는 특정 시대의 맥락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 권위를 지탱하는 기반이 신뢰를 잃으면 권위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p. 72 ~ 73)

권위는 최초의 폭력을 배경으로 하며 신비로운 근거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 언제나 사후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에, 권위는 그 존재에 대한 실질적 근거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근거를 따지기 시작하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p. 78)

우리는 권위에 대해 별 생각없이 인정해주어 왔다가 뒤늦게 그 기반을 파고들어가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니 그나마의 전통적 권위도 없어진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권위가 없어진 시대는 어른이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한 시대의 종말을 겪고 있다. 약 1만년 동안 성, 사회, 종교, 정치, 경제 등 우리 인생의 모든 분야를 좌우했던 가부장적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 (p. 80) 고. 하지만 이 사라지고 있는 권위가 진정한 권위였으니 다시 되돌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어떤 형태의 권위를 새로 형성해야 하는가"(p. 81) 라고 말한다. 지금 이시대의 우리에겐 모두에게 합의되는 새로운 '권위' 가 필요하다. 이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측면에서 지금의 사회를 진단한다.

정당화되지 않은 우월감은 서양 가부장제의 역사를 관통해왔다. 권력을 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았고 사람들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지도 않았으면서 특정 사람들을 대신해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 두 가지 특성이 가부장제의 전형을 이룬다. 이러한 온정주의 특징이 천박하게 드러난 사례는 수백 년 동안 서구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장받았던 식민주의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p. 98)

깨어 있는 독재는 환상일 뿐이고, 지각력이 결여된 로맨스는 파시즘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다. 이런 환상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신경증적 가족 로맨스', 다시 말해 '엄격하지만 공정한' 아버지에 대한 열망과 관련 있다. 정치체제는 이 열망을 몇 년이고 이용해왔다. 정부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로 내비치며 유권자들을 힘없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만들었다. (p. 100)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례들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해주었던 이들은 사실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도 정치가들 중에서는 스스로가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인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국민이 뽑아준 정치가이건만 국민을 아이달래듯 다루려 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심리치료사는 신경증적 문제를 극복하도록 내담자를 도울 수 있지만, 그가 일상에서 겪는 불행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겪는 문제의 원인은 갈수록 사회적인 것들로 바뀌고 있다. 과거 심리치료사의 목적은 내담자를 돕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내담자를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이 암묵적인 과업이 되었다. 정부 입장에서 심리치료는 새로운 훈육 도구이다. (p. 109, 110)

신체적 질병 못지 않게 마음의 병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기에 그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마음의 병이 더이상 미친정신병자가 아니라 신체적 질병처럼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체적이건 심리적이건 병의 치료 배경에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정치적 목적이 숨어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빠른 치료는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인적 원인인식에 머물게 한다는 것도... 한 마리의 여왕개미에게는 수많은 일개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권위는 자발적 복종을 만들어내는 내면화된 규범에 의해 작동한다. 어떤 집단이 같은 권위를 따른다는 것은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이 권위가 무너지면 전반적인 불신이 생기고 규제 조치가 자기 증식하는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권력은 외부적 통제와 강압에 의해 작동하지만 반드시 저항과 반란을 일으킨다. 권력과의 충돌은 이어질 충돌의 발판이 되어 악순환을 낳는다. 완벽한 통제를 목표로 하는 통제 매커니즘과 강압적 조치가 사회에 만연해진다. 하지만 결과는 완벽한 통제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p. 134~135)

권위인줄 알았더니 권력이었음을 깨닫고 일개미들이 여왕개미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고 여왕개미의 권위를 다시 세울 것인가? 아니다. 저자는 공동체의 권위를 제안한다. "문제는 이 집단을 어떻게 인식되는 권위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p. 141) 이 권위는 그동안의 피라미드식 권력형이 아닌 '수평적 권위' 이다.

지난 두 세대 동안 '대중'은 어느 때보다도 높은 지식 수준을 갖췄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결과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가부장제가 그 자신의 더 나은 버전으로서 '대중의 향상'을 위한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더 쉽게 교육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의 아버지들은 자기 아들들을 놓아주지는 못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권위가 가장 낫다는 것은 자명하며 이 사실은 수평적으로 조직된 권위에도 해당한다. 객관적 지식은 그 자체로는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결정하려면 도덕적인 선택들을 내려야 한다. 집단은 완벽하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장기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정치와 경제 부문에서 그에 관한 설득력 있는 여러 사례가 나왔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정부로 전환하는 데 있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고착화된 행동 패턴을 깰 수 없는 무력함이다. (p. 150)

예나 지금이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도 교육이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제라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층위에서 수평적 권위를 세우려면 최소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첫째, 지식이 충분히 모두에게 보급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도덕적 목표는 수평적 집단이 결정해야 한다. 셋째, 그 집단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조합은, 수평적 집단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장기적 목표를 유념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습득할 수 있고, 그 목표를 위해 어떤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거나 위임하는 형태여야 할 것이다. (p. 154)

수평적 체계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이의 참여를 끌어내 조직을 돕는 것이다. 이때 지도자는 '평등한 사람 중 맨 앞에 있는 자' 가 된다. 협동에 중점을 둘때 지도자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 차이를 중재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각자 해결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권위는 어떤 사람이 계층구조에서 차지한 자리로부터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올바르게 대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서 나온다. 권위는 공동 목표를 위해서라면 여러 명이 나눠 가지거나 서로에게 양도할 수 있다. (p. 156) 이 모델에서 타인은 적이 아니다. 이들은 당신이나 나와 매우 비슷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p. 157)

모두가 사회에 관심을 갖고 의견을 갖고 참여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개인화된 시대에 필요한 것은 결국 공동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보면 맞는 말 같기는 한데 현실성이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이론이 필요한 좀더 강력한 사회적 문제들을 제시하고 다양한 실례들도 제시한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가부장제가 쇠퇴하는 중이고 성적 지향이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으로 존재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음에서 희망을 찾고, 양육 문제에서는 집단으로서의 부모역할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개인적으로 교육관련 입장에서 저자의 표현들에 깊이 공감하곤 했는데, 아이의 자율권을 존중해준다는 미명아래 결국 방임하고, 동기부여와 칭찬육아라는 것이 얼마나 빛좋은개살구인지 지적하고, 요즘처럼 정신장애를 진단받은 아이가 많았던 때는 없었다며 아이의 심리에 대한 무책임을 비판하고, '부드러운' 양육법을 택한 친구같은 부모형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장' 이 성장이 아니었음을 밝히며 앞으로는 '공유와 협동' 모델이 중요해질 것임을 강조하고 이 모든 사회체제의 기본 바탕인 민주주의가 완성형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기성 정치의 몰락에는 위험한 부작용이 따른다. 많은 사람이 기성 정치의 몰락을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의 정권을 모색하는 타당한 이유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시효가 다 되었고, 특히 더는 민주적이지 않게 되어 그 효력을 잃은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출발한 다른 형태의 정부에 대한 추구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즉, 권위가 아니라 권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p. 271)

민주화는 언제나 진행중에 있다. 다만 우리는 민주화의 최종 목표를 늘 명심해야 한다. 최종 목표는 데모스, 즉 민중의 자치다. (p. 278)

경제가 흔들리고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실망이 쌓이면서 강력한 보수주의 리더들에게 현혹되고 있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요즘에 꼭 생각해보아야 할 문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이제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로서의 공동체가 그 권위를 쌓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핵심 질문은, 이 새로운 권위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의 다음 단계로서 어떤 형태를 갖춰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p. 287)

내가 더 선호하는 것은 숙의적 투표 방식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선거 대신에, 투명한 기준을 적용한 계산법에 근거한 비례대표제를 원칙으로 삼는다. 그 목적은 사회를 최대한 정확하게 반영하는 대표 단체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의 다양성이 단체를 구성하는 기준을 결정한다. 사회외 동일한 비율로 대표의 성별, 인종, 연령대, 교육 수준, 그 밖의 중요한 사항들을 고려한다. (p. 294)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는 어찌보면 우리는 왜 시민이 되지 못했는가 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너무 관람객처럼 사회를 멀리 떨어져 보아 온 것이 아닐지... 지식기반이 아니라 이런저런 소문에 휩쓸려 온 것은 아닌지... 역사적으로 그동안은 거의 늘 사회구조가 피라미드 식이었다. 왕에서 대통령으로 귀족에서 의회로 모습은 바뀌었어도 상위 몇 퍼센트에 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배·관리되어 왔다. 하지만 다행히 그러는 사이에도 그런 권력이 조금씩조금씩은 아래로아래로 옮겨져왔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이제 그런 수직적 권력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권위를 나눠갖는 시대로 탈바꿈해야 할 때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권력을 쥐여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닐까. 그동안은 권력과 권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꼰대와 어른을 착각했다면 앞으로는 정말 우리 모두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권력을 휘두르는 꼰대가 아니라 권위를 인정받는 어른이.

우리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들을 관찰하는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친사회적인 행동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면 반사회적인 행동은 학습을 통해 발현된다. 가령 어린아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알아서 돕는다. 그런데 이런 행동에 보상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보상이 걸려 있을 때에만 다른 사람을 돕는다. 이와 같은 결과는 사회와 그것의 권위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피라미드식 권위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반면 내가 선호하는 수평적 권위는 모두가 투명하게 공유하는 지식과 더불어 새로운 두려움, 즉 사회적 통제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 (p. 303~304)

나는 수평적 권위가 정말로 새로운 권위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음을 굳건히 믿는다. 이 변화가 과연 이뤄질지는 더 이상 의심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미 이뤄지고 있는 변화를 어떻게 도울지 고민하고, 어떤 세력이 이 변화를 막으려 할지 감시하는 것이다. (p.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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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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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공쿠르상 수상작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

모두에게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은 분명히 있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꾸며지지 않은 하얀색 표지의 책을 받았다.

책을 읽기 전과 책을 읽고 난 후 표지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매번 다르곤 한데 가제본의 표지도 그러했다. 첫장을 넘길땐 굵은 글씨의 제목에 눈이갔지만 마지막장을 덮을땐 프로펠러를 단 작은 비행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남자의 일기같은 문장들을 읽어가다보면 자신의 인생을 차분이 읊조리는 한남자의 독백이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평화롭지만 애잔하고 쓸쓸한듯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그런 목소리일 것 같다...

이 남자의 첫 대사는 교도소에서 시작된다. 교도소의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교도소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대번에 느껴지는 이 남자는 교도소에 있어서 그런지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다. 그렇게 교도소의 일상과 자신의 인생사가 교차되며 서술되는 동안 현재로 가까워지고 현재로 합쳐지는 순간 아마도 출소할 것이다.

2008년 수감되기 전까지 이 교도소에서 채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동네 아헌트식에서 26년간을 살았다. 폴 크리스티앙 프레데릭 한센.

한센씨는 1955년 툴루즈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스물다섯살의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아나 마르주리, 서른살의 훤칠한 덴마크 남자 요하네스 한센. 두사람은 자신들의 아들 폴을 사랑했지만 두 사람은 너무 다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독립영화관을 운영하는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와 척박한 환경에서 개신교 목사활동을 하는 올곧은 덴마크 남자는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의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덴마크의 끝 시카겐에 있는 한센가를 다녀온 여행은 세가족의 처음이자 마지막여행이 되버렸고 70년대를 전후한 사회적 격변 속에 두 사람의 인생도 격변한다.

폴은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가지 않았으나 매일같이 저녁을 차려놓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영화와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으나 부족한 가족애가 안타까웠다. 그러다 어머니는 프랑스에 아버지는 캐나다에 자리잡게 되고 덴마크의 피가 흐르는 프랑스인 폴은 프랑스에서 학교를 마치고 캐나다로 건너가 캐나다 시민으로 살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먹히는 것 같지 않아보이던 아버지의 설교는 캐나다 퀘백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그의 신앙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마지막 설교에서 이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p. 155)

 

신자들의 축복을 빌었지만 사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마무리 문장이었을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가 책의 제목이 된 것에 대해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왠지 원제는 달랐을 것 같은데 가제본이다 보니 확인할 수는 없다.

소설을 읽다보면 저자가 프랑스작가라는 것이 새삼 상기되곤 하는데, 영국에 대한 표현에서 특히 그렇다.

프랑스와 영국은 역사적으로 앙숙관계다. 저자는 은근하게 영국을 까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의 설정부터 그렇다.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 목사가 프랑스에서 무시 받다가 영국령이지만 프랑스문화가 지배적인 퀘백에서 개신교 목사로서 품위를 잃어가고 신앙이 흔들려 가는 과정, 그리고 영국인 위주의 신도들에 대한 표현과 석면을 둘러싼 환경표현을 읽다보면 저자의 은근한 프랑스인적 도취가 좀 느껴지는 듯 하다.

여하튼, 한센씨의 인생은 평탄한 듯 평탄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무한하다. 나의 외조부틑 DS19시트로엥을 택했다. 내 아버지는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살아갈 날들을 촘촘한 시간 배정으로 지배해버린 그 속세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p. 171)

 

이런저런 일을 하던 저자의 경력이 쌓여 저자는 한 아파트의 관리인이 된다. 여기저기를 보수관리하고 주민들의 불편을 해결하는 만능해결사 였지만 세월의 흐름은 아파트의 분위기도 변하게 만들었다.

'렉셀시오르'건물에서 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관리비 운용, 유지보수, 보안 외에도 68가구로 이루어진 그 콘도가 차질 없이 굴러가게끔 뭐든지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p. 15)

어머니는 메데이아 만큼이나 불경하게, 세상의 모든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지옥으로 갔다. (p. 180)

 

데우스 엑스 마키나, 메데이아 ... 이런 고전속 용어와 인물들을 활용하는 유럽작가들에게 그리스·로마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외국작가들에게서 고전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면서 반갑기도 하다.

여하튼, 폴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낼때 그 감정이 다른 것 같아 보인다. 일반적인 감정의 반대랄까.. 그런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도박의 우연으로 자기가 잃기로 작정한 존재들을 서로 가깝게 하는 계책을 부렸다. 그때의 계책은 노엘 알렉상드르의 친구 노바씨의 부주의였다. 그 부주의가 나를 전격적으로 돌려세워 내 아내가 될 여자에게로 이끌었다. (p. 200)

"오늘 아침에 수상비행기 기지에 다시 나타난 당신을 보고 대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 남자랑 함께이겠구나" (p. 201)

"우린 이미 결혼했는걸. 알곤킨 인디언들은 계약이나 신성한 맹세 같은 거 없어. 함께 살고 서로를 위해 살면 다야. 같이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자, 이 경제적인 네 문장이 영국 여왕과 보통법을 그 습기 자욱한 섬나라로 반송해버렸다. (p. 203)

 

서로가 서로를 운명의 상대로 알아본다는 것, 그 특별함이 폴과 위노나에게 주어졌다. 세상 평범해보이던 폴이 알고나면 점점 더 특별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일랜드 혈통의 인디언 후손인 위노나가 알려주는 자연의 섭리는 캐나다를 지배하는 영국법지배체제를 우습게 여기도록 만들만큼 매력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인에게는 더 잘 통할 매력이랄까. ㅎ

폴은 위노나를 매시매순간 사랑했다. 일분일초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위노나가 구해온 유기견 누크도 그랬다. 세상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었고 그 존재들 덕분에 처음으로 축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폴의 직장이자 집인 아파트는 변하고 있었다. 폴과 함께 처음을 시작했던 노엘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 너무나 급속하게.

나는 그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무슨 말을 뱉기도 전에 저 사람이 당선되겠구나, 하고 알았다. 겉멋 든 자가 구비한 악덕의 일습, 속이 시커먼 위선자, 음흉한 기회주의자의 전형. 과연 에드아르 세즈윅은 친근함과 오만, 전문적 식견과 무시를 적절히 섞은 요즘 시대의 수완으로 우리 건물의 대표가 되었다. (p. 218)

2000년대와 그에 발맞춘 세상은 이제 에두아르 세즈윅의 차지였다. (p. 219)

불행은 대체로 하나의 건물이나 공동체 속에 시기를 두고 자리를 잡는다. 몇달을 각 층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면서 한 집 한 집 밑밥 까는 작업을 하고, 약한 자들을 먼저 쓰러뜨리고 희망을 품은 자들을 망가뜨린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거리와 동네를 바꿔서는 집요한 장인정신으로 일을 밀어붙인다. 우리 콘도에서는 대략 일년 남짓 걸렸다. (p. 230)

"폴, 그런 장례식까지 챙기라고 당신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닙니다. 업무 일과의 절반을 입주자들의 개인적인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보내라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요.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 업무는 각 가구의 문 앞까지만이에요. 입주자의 건강 문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자기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세요. 입주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 업무를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p. 238, 239)

콘도는 분위기가 싸하게 변했고 일종의 불신이 전반적으로 자리잡았다. 입주자 대표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조금씩 주입한 그 분위기는 모든 층으로 퍼졌다. 차츰 모두가 다른 사람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p. 247)

2000년대 초에는 누가 더 인심이 각박해질 수 있는지, 누가 더 쪼잔해질수 있는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주옥같은 일화들이 차고 넘쳤다. (p. 248)

우리는 이제 건물이 아니라 제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일종의 전제 공국에서 살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입주자 모두가 이 조무래기 군주의 변덕스러운 비위를 기꺼이 맞춰줬다는 것이다. (p. 260)

 

폴이 인생의 반을 바쳐 일한 아파트의 분위기가 변해가는 것을 보며 사회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늘 '옛날이 좋았다' 고 이야기하곤 한다. 옛날이 더 너그러웠고 더 인간적이었고 더 믿을만했다고... 하지만 사실 시간적 배경때문이라기 보다는 리더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현상이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분위기는 살만하거나 각박하거나 그때그때 달라졌다. 지금 우리 사는 환경이 옛날을 그립게 한다면 그것이 정말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인지 현실에 대한 무책임함인지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위노나는 매일같이 자신의 땅과 역사를 내려다보며 날아다녔지만 나는 렉셀시오르의 닳아빠진 자물쇠 아래서 늙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단찮은 삶이었으나 내게는 족했다. (p. 253)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고 나의 시간은 누구와도 같을 수 없다.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를 보면서 이 작품이 당연히 실패한 인생을 이야기하는 소설일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이 작품 속에 나왔던 '실패' 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민에 빠지게 된다. 모두가 똑같이 살수 없는 세상인데 그렇게 모두가 다르게 사는 세상인데 무엇으로 성공과 실패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대단찮은 삶이었으나' 후회없고 만족하는 삶이라면 그보다 더 나은 삶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폴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에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큰 파고 없이 내내 잔물결일듯 잔잔하기만 한 성격의 폴이(감옥에 가게 된 것도 그렇지만) 출소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는 '복수'는 복수임에도 읽는이에게 흡족한 웃음을 띠게 해준다. 그가 위노나와 누크와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행동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누구보다 깊이 그들을 이해했던 그만의 방식이이었기에, 누구와도 다른 그만의 선택이었기에.

14세기에 반도 최북단, 도시에서 조금 떨어지 바닷가 바로 옆에 뱃사람들의 수호자들에게 바치는 교회 하나가 지어졌다. 폭이 45미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는 합각머리 종탑까지의 높이는 22미터, 38열에 달하는 신자석, 위풍당당하고 독특하기로는 유틀란트 반도 전체에서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물보라를 너무 많이 맞았던 탓일까, 폭풍의 입김에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방풍벽이 없이 정면이 노출된 교회는 머지않아 땅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770년경에는 모래가 차츰 안뜨로, 그다음에는 본당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모래언덕은 밤낮도 없이 그악스럽게 교회를 갉아먹고 벽을 밀어냈다. 급기야 1775년, 무시무시한 모래폭풍이 교회의 모든 입구를 메워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갱도를 파야 했다. 그들은 매주 벽과 입구에 쌓인 모래를 치워가며 이십년을 더 그 교회에서 예배드렸다. 그러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모래도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던 어느날, 모래에 파묻힌 신이 항복을 선언하고 싸움을 포기했다. 성직자는 교회 세간을 모두 경매에 내놓고 교회 문을 닫았다. 지금은 모래가 건물을 완전히 뒤덮고 묻어버렸다. 종탑만 모래언덕 밖으로 18미터 남짓 드러나 있다. 아버지는 모래에 묻힌 교회당, 신앙의 잔해를 보고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p. 26)

그 교회 종탑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당시 생존해 있던 한센 일가 전원이 줄지어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땅 위에 남은 그 교회의 해골을 보고 느낀 점을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걸 보고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 수가 있어? 암만 봐도 신과 교회의 무기력, 단념, 항복밖에 떠오르지 않던데" (p. 27)

그 시절에는 일상의 소소한 생채기가 있었을지언정 내 부모님이 함께 살며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디서 두 사람의 근원전인 공모 의식이 싹텄는지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 어떤 질문들이 나오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껄끄러워진다는 것은 일찌감치 느겼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떤 상황에서 처음 만났는지, 유사(流沙)에서 빠져나온 스카겐 토박이 청년과 예술영화라는 종교의 수녀가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1953년에 2420킬러미트의 거리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평생을 함께할 그 한판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다. (p. 31)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똑같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마다 다르게 살고 있기에 모두의 삶은 제각각 소중한 것이다. 제각각 다르기에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리는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두에게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은 분명히 있다. 그 반짝임을 나는 실패가 아닌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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