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댄서
타네히시 코츠 지음, 강동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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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는 순간,

이야기가 우리를다음 세상으로 이어줄 것이다.

"자유로워지는 건 시작일 뿐이야.

자유롭게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지"

 

찬사가 가득한 표지였다. 00베스트셀러에 00선정도서에 00올해의책에 00수상작가 등 책표지에 써붙일 수 있는 모든 외부적 수식어가 다 붙어있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스티커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구병모 작가와 정희진 작가의 추천사였다. 판타지가 되었든 에세이가 되었든 결핍을 강요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온 작가들의 관심이었다. 미국에서 그토록 많은 명예를 획득했다는 이 소설은 흑인노예의 서사를 다룬 책이다. 어쩌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미국인들의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란 것은 늘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전해준 기억의 모음이곤 했다. 그리고 연결이었다.

지금 나는 기억의 경이로운 힘을 안다. 기억이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푸른 문을 열 수 있으며 우리를 산에서 평원으로, 또 푸르른 숲에서 눈이 두껍게 쌓인 들판으로 옮겨줄 수 있다는 것을. 땅을 옷가지처럼 접을 수 있다는 것을. 또 내가 그녀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 '깊은 그곳'으로 밀어넣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잊었지만 잊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기에 나는 이제 이 이야기가, 이 인도가 산 자의 땅과 사라진 자의 땅 사이에 놓인 그 환상적인 다리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음을 안다. (p. 11)

하이람 워커. 19살의 흑인 노예. 미국 남부 버지니아의 농장주 와 흑인여성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두살 많은 (핏줄로는 형이지만) 작은 주인을 모시고 마차를 몰고 가던 중 강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마법의 분위기를 풍기며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마법인지 아닌지 마법이라면 어떤 마법인지를 깨달으려면 이 두꺼운 소설을 절반 이상은 읽고서야 조금씩 알아챌 수 있다.

"하이람, 난 네가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는지 안다. 이 잔인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지만, 너는 몇몇 어른보다도 잘 해냈다. 하지만 세상은 곧 더욱 잔인해질 거야. "테나가 말했다.

"네, 아주머니"

"조심해야 할 거다. 얘야. 조심해야 해. 내 말을 기억하렴. 저들은 네 가족이 아니다. 말을 탄 그 백인 남자가 네 아버지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여기에 서 있는 내가 네 어머니라고 하는 편이 맞을 거다" (p. 36, 37)

흑인노예들이 사는 마을에서 살던 열한살 소년은 저택에서의 생활을 동경했다. 엄마가 팔려가고 나서 일부분 기억을 잃긴 했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가진 소년이었다. 말을 타고 관리하며 돌아다니던 주인에게 눈치껏 자신의 탁월함을 내보인 끝에 저택으로 노역의 일자리가 변경된다. 소년은 기뻤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곳은 저택의 지하 토끼굴이었다.

늘 그런 식이었따. 그렇다고 들었다. 백인들은 지루해지면 야만인이 됐다. 그들이 상급자 놀음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도 잘 꾸며진, 인내심 강한 시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품위에 싫증을 느끼는 순간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이 새로운 게임을 선택하면 우리는 게임판 위의 말이 될 뿐이었다. 끔찍했다. 이렇게까지 고삐가 풀렸을 때 그들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허용할 만한 일에도 한게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자, 앨리스. 우리 집에는 검둥이 노래보다 좋은 게 있소"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p. 44)

하이람은 속으로 계속 주인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주인은 단 한번도 아들이라고 불러주지 않는데 말이다. 아들은 커녕 노예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소년은 '네 주인님' 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자신은 워커 가문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믿음이 소년의 능력을 막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 모든 일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나는 진짜로 라클리스에 멸망을 가져다준 것은 땅이 아니라 그 땅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메이너드를 그가 속한 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터무니없는 예시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두려웠다. (p. 54)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메이너드의 어리석음은 불경스럽긴 해도 특별하지 않았다. 주인들은 물을 가져다 끓일 줄도 몰랐고, 말에 굴레를 씌울 줄도 몰랐으며, 우리가 없으면 속바지 끈 하나 매지 못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았다. 그래야만 했다. 우리에게는 게으름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뜻했지만, 주인들에게는 게으르게 사는 것만 한 인생의 목표도 없었으니 말이다. (p. 55)

어린 소년의 눈으로 저택의 생활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더구나 자신이 스스로 그 가문의 핏줄이라고 생각하는 흑인소년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노예는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모든 것을.

비록 토끼굴에 살긴 했지만 저택의 일을 하며 소년은 소년다운 꿈을 꾸었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재주를 선보인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을때 기대에 차 올랐다. 하지만 교육기간은 금세 끝났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통보받았다. 소년이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채워졌다고 판단되어졌다.

"이젠 네가 메이너드를 돌봐줄 때다. 내 시대는 영원하지 않을 테고, 메이너드에게는 훌륭한 하인이 필요하다. 너 같은 하인, 밭일이나 저택 일도 잘 알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하인 말이다. 나는 너를 지켜봤단다. 얘야. 그리고 네가 무엇도 잊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 하이람 네게는 한번만 말해주면 돼. 너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어" (p. 57)

"우리 모두에게 닥칠 골칫거리가 너무 많다. 그리고 메이너드, 내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 아이는 준비되어 있지 않아. 그 애를 돌봐주거라. 얘야. 내 아들을 돌봐다오. 네 형을 돌봐주거라. 알았느냐?" (p. 66)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 하이람은 특별한 하인이 되었다. 주인보다 나은 능력을 가졌기에 모자란 주인을 보필해야 하는 그런 하인. 그 역할을 영광으로 알라고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런 능력을 가졌기에 경매에 넘겨져 팔리지 않고 저택에 남게해준 거라고 소명을 다하라고 주인은 말했다. 소년은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라고 대답했다. 소년의 형은 소년을 동생이라 생각지 않았다. 물론 소년의 아버지도 소년을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소년의 모든 감각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표현들을 했을 뿐이었다. 소년에겐 형이라 해놓고 그 형이란 아이에겐 하이람을 동생이라 하지 않았다.

내 노역의 논리가 아귀에 맞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라클리스를 한 뼘도 물려받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만 문제인 건 아니었다. 절대 내가 내 노동의 결실을 거둘 수 없다는 것만도 아니었다. 노역이란 자연스러운 욕구를 병 속에 영원히 밀봉해야 한다는 것, 그 욕구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상급자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이상으로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p. 72)

하이람은 천천히 깨닫기 시작한다. 어린나이에 화려한 생활들을 비록 누리진 못해도 가까이에서 동경하며 자라다보니 다른 노예들에 비해 더뎠던 것도 같다. 본인이 노예라는 것조차 잘 몰랐던 것도 같다. 소설에서는 농장주인이나 지주라는 표현이 아니라 상급자로, 노예가 아니라 노역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이 시대의 표현인지 작가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달라진 표현이 좀 더 거리감과 객관적 느낌을 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이므로 좀더 감정적인 표현이 적절할 것도 같은데 논픽션 작가로 오래 활동해서인지 작가의 표현법은 남다른 감이 있었다.

버지니아는 한 인종 전체가 사슬에 굴복하리라는 믿음이 건재한 곳이며, 바로 그 인종이 정확한 비율로 철을 주조하고, 계산하여 대리석을 조각해낼 능력이 있다 해도 그들을 계속 짐승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 순간 그녀를 팔아버리는 곳이었다. (p. 102)

상급자는 자기 '사람들'의 내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알고 우리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았지만 우리를 알지는 못했다. 모른다는 것이 그들 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코앞에서 아이를 팔아버리려면 그 어머니를 가능한 한 얄팍하게 알아야 했다. 한 남자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거나 산 채로 그의 피부를 벗긴 뒤 소금물을 뿌리라는 지시를 내리려면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같이 그 사람을 느껴서는 안 됐다. 그 사람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됐다.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없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손이 나가지 않으니까. 그리고 손이 나가지 않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그 순간 노역자들은 상급자가 자신을 본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상급자 본인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토록 심오한 이해의 순간이 오면 상급자는 끝난 것이다. 더는 필요한 만큼 통치할 수 없을 테니까. (p. 119)

하이람은 성장했다. 피끓는 청춘이 되고 있었다. 사랑하고 싶은 여자도 생겼다. 탈출의 욕망이 샘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규칙 그것이 노예제를 유지하는 권력의 핵심이었다. 노예는 인간이어서는 안되었다. 노예선의 구조는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게 만든다. 버지니아 농장들은 노예선의 실상이 땅 위에서 실현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직 소년이었다. 곧 스무살 이었지만 무모한 나이였다. 무모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런 무모한 나이였다. 무모함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실패 뿐만 아니라 깊은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하이람의 무모함도 그랬다.

서로 전혀 달랐던 모든 동기가 사라져 생존의 동기만 남은 상태였다. 나는 한 마리 동물로 전락했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됐다. (p. 198)

바닥의 바닥을 경험했다. 어둠의 어둠을 경험했다. 비천함이 비천함인지도 모를 만큼 인간성을 터럭하나 남기지 않고 버려야 했다. 죽음의 직전까지 몰려야 했다. 왜냐면...

"우리는 확인해야 했어"

"뭘 확인해야 했는데요?"

"너한테 정말 산티 베스의 힘, 인도의 힘이 있는지. 그런데 있더라. 우리는 그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했어. 그 힘이 너를 어디로 보내줄 지 계산했고,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어"

"어디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라플리스" (p. 218)

라플리스. 하이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일했던 곳. 노예로서의 삶이긴 하지만 영원히 기억될 이름 농장라플리스. 그곳은 노역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집이기도 했다.

하이람 할머니가 일으켰다는 기적, 탈출의 마법, 인도하는 힘. 하이람의 능력은 잠재되어 있었고 아직 능력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모르는 것 투성이였지만 있긴 있었다. 뭔가가.

남부 농장들의 몰락기였다. 북부 공업이 성장하던 때였다. 언더그라운드 라는 지하조직이 생겨났다. 언더그라운드는 하이람의 능력을 주시했다. 하이람은 언더그라운드 라는 조직의 요원 훈련을 받게 된다. 그의 기억능력이 일단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그의 숨겨진 능력에 거는 기대도 있었다. 하이람은 새로운 환경을 배워야 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떠야 했다.

버지니아에서 우리는 무법자들이었다. 무법자로 산다는 건 우리의 명예였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것이 악마적인 법의 기반이라 생각했고, 그 도덕을 넘어서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언더그라운드가 너무 강력했다. 북부에서는 '지하'를 의미하는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이 그 조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요원들인 기독교인이었다. 북부에서는 언더그라운드의 요원들이 무법자가 아니었다. (p. 265)

미국의 남북전쟁이 내세운 큰 명분이 노예해방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소설에서 남북전쟁 이전의 남북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들이 신선했다. 종교적이지 않게 마음에 닿는 부분들이 좋았다. 사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에 반드시 종교적 명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이므로 누구나 평등하다는 기초적인 생각이 그 생각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하이람이 겪는 혼란은 노예로 살았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자유롭게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나는 그 천막 사이를 걸어 다니다가 물오른 토론을 벌이는 대회 참가자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더 큰 천막들 안에서 임시 단상 위에 올라 제 신념을 설파하는 개혁의 연설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화려함을 좋아했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을 모아들이려고 우열을 다투는 듯했다. (p. 334)

나는 더 걸아갔다. 그러다 군중 앞에 멈춰 서서, 작업복을 입고 머리를 민 여자 두 명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영역에서 남자처럼 완전히 자유롭게 활약할 권리가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여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커졌다. 마침내 군중마저 그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나는 또다른 천막으로 이동하면서 그 약탈이라는 것이 다른 방면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천막에서는 백인 남자가 전통 의상을 입은 조용한 인디언 곁에 서서 자신이 보아온 엄청난 파괴 행위와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의 인간들이 토지를 명분으로 얼마나 사악한 일을 기꺼이 저지르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계속 나아간 끝에, 나는 이 나라의 공장에 대해 격분하는 남자 뒤에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들의 부모는 더 이상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을 팔아버렸고, 아이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남자가 대표하는 자선단체가 구해주기 전까지 계속 노동을 해왔다.

더 멀리 가던 나는 이 주장이 노동조합 활동가의 다른 주장과 친척 관계임을 알게 됐는데, 그 활동가는 공장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공장주들에게서 박탈해 힘들게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자 관련된 주자잉 하나 더 들려왔다. 모든 공장을 아예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 사회 전체가 사문화되어야 하며, 남녀 모두 함께 일하고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새로운 존재 방식, 해방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나를 침범했다. 겨우 1년 전만 해도 나는 그 모든 것을 거부했을 터다. 그러나 당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아버지의 책에서 본 것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본 터였다. 끝이 어디일까? 알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동시에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p. 335,336,337)

북부는 들끓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사상들이 섞여 있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흐름이 북부에서 남부로 흐르기 시작했다. 하이람의 관점도 자신만의 탈출에서 점점 더 확장되어지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 노동, 토지, 가족, 부에 관한 여러 주장과 이념들. 노역을 돌이켜보면 버지니아라는 나의 옛 세계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악이 드러날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노예제도는 모든 투쟁의 근원이었다. 사람들은 공장이 아이들을 노예화한다고 했고, 임신이 여성의 신체를 노예화한다고 했으며, 럼주가 사람의 영혼을 노예화한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소용돌이치는 이념들 속에서, 이 비밀스러운 전쟁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버지니아의 노예 주인들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려는 중이었다. (p. 345)

미국남북전쟁 후로 150여년이 흘렀다. 노예제도는 과연 없어졌는가?

세상이 새로 만들어졌을까? 아니 개선이라도 된 것일까? 법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고 개선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노예화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현재진행중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흑인노예서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는 것을 애써 감추느라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요" 해리엇이 말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진정으로 노예가 된다는 뜻이죠. 잊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에요"

"기억을 위하여" 그녀가 말했다.

"친구여, 기억력은 마차이며 길이고 노예제도라는 저주에서 자유라는 은혜로 건너게 하는 교량입니다." (p. 370)

모세라 불리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탈출시키는 방법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이람의 특별함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람은 아직 '인도'할 능력이 없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은 기억하면서 정작 자신의 기억엔 구멍이 나 있었다. 하이람은 여전히 도망치는 중이었다.

노예제도는 그들을 수치스럽게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선량함에 대해 기본 감각을 노예제도가 침해했기 때문이다. 그 비열한 관행을 자행하는 그들의 친척들은 그들 자신도 얼마나 쉽게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상기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야만적인 동족을 경멸했지만, 어쨌든 동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증오심은 일종의 허영이며, 노예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증오였다. (p. 501)

소설이지만 다큐처럼 읽혀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이쪽저쪽의 입장을 골고루 헤아리고자 할때 특히 그랬다. 하이람은 기억력은 좋으나 그것이 지혜는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에서 내내 하이람은 거의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없다. 이쪽의 입장도 이해하고 저쪽의 입장도 이해한다. 아니 이해햐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하이람의 생각들을 읽는 과정은 저자가 소설을 통해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객관성을 전달해주려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이람이 본인의 능력을 자각할 수록 하이람에게도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가는 하이람을 보면서 '자유'에 대해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해 복잡한 메세지를 전달받게 된다.

이 작품은 특히 공들여 번역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그만큼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원작은 남부의 사투리와 노역자들의 말, 북부인의 말을 모두 살려 쓰고 있으나 그런 차이를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살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차이 때문에 작가가 쓴 몇 단어를 완전히 살려 옮기지 못한 점도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p. 550)

'옮긴이의 말' 에서 다시한번 번역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렇게 원작과 번역에서의 차이점을 알려주니 독자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번역자의 설명을 읽고서야 미국에서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찬사를 받았는지 수긍이 갔다. 그들의 언어로 읽는 그들의 이야기는 훨씬 깊이 눈이 아닌 마음에 새겨졌을 테니까.

<워터댄서>는 작가 타네히시 폴 코츠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역자의 말을 읽으면서야 알았는데 마블 코믹스의 블랙 팬서 시리즈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작가라고 한다. 노예제도가 살아 있던 시절의 미국사와 흑인들의 생활에 관한 논픽션을 써서 독자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고, 특히 논픽션 작가로 활동했던 경험이 이 작품에 잘 녹아있다고 한다. 노예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노역자 the Tasked 라는 단어를 사용한 작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만화에서나마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선진세상을 만들어냈던 것은 작가가 썼다는 논픽션들에 대한 위로이자 꿈이 아니었을지...

<워터댄서> 는 묘한 소설이었다. 판타지라는 요소가 없진 않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마법이라는 요소는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처럼 느껴지게 함으로써 현실에 접목시키고 그간의 역사에서 사용되던 익숙한 단어들이 아니라 낯선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흑인노예에 대한 관점을 지금의 현실과 연결시켜주고 있는 듯 했다. 지주나 주인이 아니라 '상급자' 라는 표현은 구속력을 덜 가지는 존재로 느껴졌고 흑인이 아니라 '유색인' 이라는 표현은 흑백이라는 피부색의 차이를 덜 드러내게 했고 노예가 아니라 '노역자'라는 표현은 인격의 종속이 아닌 노동력의 구속이라는 의미를 전달해줌으로써 '인간성'의 가치를 유지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런 세심함으로 인해 작가의 메세지가 독자들에게 더욱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대를 잇는 역사라는 것이 결국 이야기의 연결이기에 이야기로 전달되고 이야기로 시작되는 마법의 힘에 걸고있는 저자의 희망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야기의 힘' 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해준 특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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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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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연하디연한 작은 싹,

고단한 시절의 복판을 통과 중인 우리들이 써 내려가는

가장 보통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

"나, 집을 나각고 싶어.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어"

작고 아담한 사이즈에 산뜻하고 예쁜 표지 그리고 낯선 작가의 이름

표지에 마음이 끌리고 '필사' 라는 단어에 눈이 끌려서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고 읽고 나서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필사는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표면적으로는 못난이 글씨체 때문이었지만 손으로 직접 펜을 잡고 쓴다는 것의 노고를 늘상 버겁게 여기던 부담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팔사'라는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차례에 열거된 제목들을 보며 단편모음집이었나 했는데 읽다보니 서로 연결된 중장편 소설이었다. 단편이 아님에도 단편처럼 제목을 지어놓은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책을 직접 손에 쥐고 나서야 뒤표지에 적힌 구병모 작가의 추천사?를 발견했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 덧붙여 읽게 되는 구병모 작가의 글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였기에 반가웠으나 처음으로 평이하게 다가왔다.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했던 이의 글에 대해 낯선 작가의 소설 하나로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니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마도 현실공감 이라는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지...

문득문득 그 사람과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잊으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 떠오르는 거야 당연했고, 그때마다 그 사람이 몹시 보고 싶다는 걸 굳이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놀랍거나 새로울 것도 없었다. 서로에게는 늘 최선이었으므로 덜 사랑했다는 아쉬움도 없었다. (p. 9~10)

당연한 계절의 변화를 같이 바라보고, 느끼며, 이야기해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누구 때문이라고,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헤어진 이유를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p. 13, 14)

<우리의 정류장 中>

그럴 수 있을까? 일상에서 수시로 떠오르지만 그리워하는 건 아니고 최선을 다했기에 헤어짐도 무던하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특별해진 존재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그럴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듯이 헤어진 이유도 정확히 표현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품고 몇년을 지내다 다시 만나 이별을 나누면서도 여전히 그 마음은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시와 닮아 있어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속 화자는 늘 시집을 읽고 늘 필사를 하곤 했다.

필사 노트를 접어두고 다시 식탁 앞에 놓은 흰 종이를 내려다봤다. 잘 깎은 연필을 쥐었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 (p. 23)

나 혼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 혼자 바르게 산다고, 나 혼자 제대로 산다고 해서 변할리가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분리수거를 철저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게 잘 참아지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상황이었을 뿐이다. 내가 들인 노력에 적당한 대가를 받고 싶었다. 대가란 고생한다고, 수고한다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음이면 되었다. 말뿐이어도 좋으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p. 37~38)

<목련빌라 中>

늘상 하던 필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일상은 더욱 고단하게 다가온다. 매일매일이 똑같지만 매일매일 피로에 더께가 쌓여간다. 그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다. 다 비슷하다.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내손으로 부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마다 겹겹이 쌓인 두께만큼 화가 솟구친다. 말뿐이어도 좋겠다고? 아니다. 결국은 말만이라고 또다시 화를 내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반복의 가치를 알아챈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대로 자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흰 종이 앞에 앉아야 했다. 쓸 수 있든 아니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 1초만이라도 흰 종이 앞에 앉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노트, 흰 종이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 나는 차례대로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엇이든 한 장을 채워야 잘 수 있다는 주문을 건 사람처럼 흰 종이를 노려봤지만 선뜻 연필을 쥘 수는 없었다. (p. 41~42)

<목련빌라 中>

요즘 연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차모양 연필깎이를 부러워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면도칼로 매일매일 연필을 깎아 필통에 가지런히 채워넣는 시간을 나는 은근 좋아했다.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고 예쁘게 깎을 수 있을까 고심하며 면도칼로 세심하게 나무를 깎고 심을 갈아내곤 했다. 그러다 샤프를 손에 쥐게 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연필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이젠 색색깔의 볼펜이 문구점에 갈때마다 한참동안 그 앞에 나를 머물게 하곤 한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연필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전자책과 소리책이 나와도 여전히 종이책이 가장 좋은 나로서는 연필로 필사를 하는 소설속 화자의 마음이 왠지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하루의 일과란 매일이 똑같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다른 것들이란 주로 아이들에게 관한 것들이었고, 같은 건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년 째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었다. (p. 55)

부모의 기대를 받지 않은 나는 어떤 삶을 살든 부모에게 평가받지 않았다. 잘하라는 북돋움도, 못한다는 질책도 받지 않았다. 무엇이 되라는 강요도 없었지만 무엇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여도 상관이 없었다. (p. 59)

<필사의 밤 中>

매일이 같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는 문장이 올해만큼 절실하게 와닿은 때가 있었던가... 일상이 일상이 아니게 된 매일을 보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하던 것을 못하고 산 시간이 한 해가 되어 간다... 베껴쓰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필사라는 행위 조차도 하지 못한 채...

필사하지 못하는 마음을 공감하면서도 아무여도 상관없이 살아온 것에 불뚝 샘이 나기도 했다. 늘 평가를 받고 응원없이 비난만 받고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보지도 못했는데 무엇이 되어야 했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에게는 무심하게 살 수 있었던 그 시간들 조차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까?

어쩐지 나는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제야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못 찾은 것도 아니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른 척 무시하고 안 보이는 척 외면해왔던 것이다. (p. 61, 62)

<필사의 밤 中>

보통의 삶... 적절한 학교와 적당한 수입, 때에 맞는 결혼 일상이라 불리는 생애 그런 것들을 보통의 삶이라 부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보통의 삶'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적어도 그정도는 갖추기위해.

보통의 삶을 추구하지 않을 용기를 지녔으나 자신의 꿈을 알아채지 못하던 시간을 지탱해주었던 것은 어쩌면 필사의 밤... 그리고 가난한 사랑...

아무도 나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집안 일이란 집에 있는 사람이면 하는 일, 바깥 일이 없는 이가 하는 일이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가치로 환산할 의무조차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p. 104)

그 사람이 이해를 못하는 것도 이부분이었다. 동생의 짐을 왜 내가 짊어져야 하는지, 그 고집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럼 나는 다시 엄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안 되는 일이었다. 가족은 공동 희생 구조였다.

"당신 꿈은? 당신 인생은? 그렇게 희생하면 나중에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요?"

"안 알아줘도 상관없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야"

"그 책임을 왜 당신이 져야 하는데요"

"나는 이미, 진작에......"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p. 112, 113)

-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안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

그러곤 뚝, 통화가 끊겼다. (p. 117)

<치우친 슬픔이 고개를 들면 中>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무용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암묵적으로 합의된 '가족을 위한 공동희생구조'가 설정되어 있었다.

피지 못한 꽃일까? 나는 꽃보다는 나무가 되길 소망했다. 때론 풀이 되길 소망했다. 하지만 그 나무와 풀에 꽃이 피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차피 피우지 못할 꽃이라면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소설 속 화자에게는 '피우지 못한 꽃'이라 말해주는 아버지가 있었다. 내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말이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전화로 속에 담았던 말을 무심해 뱉어주었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것을 알 수 없던 것처럼.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지 못한 꽃, 아직 발화하지 못한 꽃, 아직 제대로 맺히지 못한 꽃, 내가 꽃이라면 한 번은 피워내고 싶었다. (p. 151)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칠 곳이, 숨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식구들과 거리감을 둘 공간이 필요했다. (p. 152)

<여름 그림자 中>

부모자식도 형제자매도 가까이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독립되지 않은 '우리' 는 서로에게 족쇄가 되기 쉽다. 각각의 나 이자 때론 우리 가 되려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가족도 가끔 보아야 반가운 법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듯이 매일보는 가족도 지치기 마련이다. 냉정하다고? 이상하다고? 반박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방' 은 누구나 꿈꾸는 그런 공간 아닐까? 나만 그런가? 그렇다해도 별수 없다. 나는 그렇다.

"나, 집을 나가고 싶어.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어" (p. 157)

"철딱서니 없기는, 네 나이가 몇인데 이제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맞는 거냐? 하필 이런 때에?" (p. 158)

"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이대로 맨날 밥이나 빨래나 하고 살라는 소리야!" (p. 159)

"생색 좀 그만 내! 이 집에서 이 악물지 않은 사람이 있기나 하니? 야, 말은 똑바로 하자. 누가 널 억지로 붙들어 앉히기라도 했니? 네가 바보 같으니까 주저앉았지. 네가 아이들 맡겠다고 해서 그러라 했던 거지, 누가 먼저 너에게 해달라고 안 했어! 네가 한 선택이면 끝까지 책임을 지든가, 남 탓을 하지 말든가, 아님 혼자 고생한 척을 하지 말든가, 하나만 해, 하나만!" (p. 160)

<시인의 밤 中>

가족이라 더 잔인한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것일까? 가족이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겠거니 했다면 큰 오산이다. 가족이라서 더 몰라주는 법이다. 예의고뭐고 차릴 필요없이 막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인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것은 없다. 내맘같은 맘도 없다. 바보가 되거나 바보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사실은 긴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건 벌이였다고, 방이었으며, 다시 시를 쓰는 일이었다. (p. 163)

백년도 훨씬 더 전에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은 현대의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꿈이고 로망이다.

그때보다 지금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나마 최저시급의 아르바이트라도 평등하게 할 수 있고 비좁고 빛도 안드는 고시원일지라도 임시적 방을 얻을 수 있으며 읽고 쓰고 배우는 것에 대해 문제삼는 외부적 규제는 없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나를 향해 건재하다고 알리는 몸짓들이 어쩐지 가슴을 저미게 했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p. 170)

필사 노트는 계속 늘어났다.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곧바로 시가 써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p. 171)

어딘가에서의 커다란 사건사고 소식에 세상이 곧 무너질것처럼 위태로워 보여도 막상 세상은 변한것 없이 잘도 굴러가듯이 내가 없으면 큰일날것 같은 가족내에서의 나의 빈자리를 아쉬워할 거라는 생각도 착각일 경우가 많다. 어느 한곳이 무너져 내려도 세상은 건재하고 내가 빈몸으로 쫓겨나듯 집을 나와도 가족은 멀쩡히 잘먹고 잘산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대로 살고 싶었다' 라는 생각을 한 이들에게 공감의 마음을 보태주고 싶다. 쌓여가는 필사노트들에서 찾아낸 단어들을 벼르고 별러 자신만의 시를 쓸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ps. 오늘은 시 읽기에 딱 좋은 가을 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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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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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금에 손대지 마, 그럼 괜찮을 거야"

우리가 처음 상상하는 특별한 인어가 나타났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미스터리 판타지

"그가 가진 백어석은 사람을 죽인 살인 도구였지만

그녀의 백어석은 빛을 담은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작가의 이름만 보고 선택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작가가 아니었다. 동명이인이었다. <세여자> 라는 감탄할 만한 역사소설을 쓴 조선희 작가의 차기작인줄 알았다. 아니었다. 동명의 판타지소설 작가였다. 하지만 굉장한 작품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 바로 빠져들었다. 읽다보면 저절로 숨죽인 채 가빠오는 호흡이 느껴져 가끔 큰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강렬한 몰입감을 주는 책이었다. '인어'라는 판타지적 존재에 대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소설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이야기를 전부 사실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했다. 그들에게는 늘 보이지 않는 사고의 원인이 따로 있었다. 무언가를 지키지 않았거나 무언가를 봤거나 무언가를 노하게 했거나. (p. 10)

백어도라는 섬이 있다. 그 섬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전래동화 같던 그 이야기는 뱃사람들에게 유혹이자 저주였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 전설의 실체를 확인시켜준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백어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백어의 전설 때문이다. 사람만큼 큰 흰 물로기. 백어는 인어를 가리켰다. (p. 18)

망망대해에 솟아오른 작은 돌섬 백어도는 황량한 무인도이다. 그 돌섬 꼭대기에 무덤이 하나 있다. 섬에 있는 것이라고는 돌뿐이었기에 돌지를 쌓아놓은 돌무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이장시키려 했었다. 하지만 그 돌무덤이 열린 순간 백어의 전설이 현실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의문의 죽음이 연이어 발생한다.

"나 같은 놈이랑 결혼해도 괜찮겠어?"

"내 소금만 손대지 마. 그럼 괜찮을 거야" (p. 33)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희고 단단한 것, 그것이 백어의 소금비늘이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니, 백어도 전설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벌어지던 일들에 대해. 평범하디 평범하기만 하던 용보는 그렇게 특별해도 너무 특별한 마리와 결혼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혼은 사람에게만 있다고 해. 사람을 제외한 다른 생물들에게 깃들어 있는 것은 영 뿐, 혼 은 없대. 때문에 사람의 것은 영혼이고, 우리의 것은 영 과 정 이 결합된 정령이야. 그러니까 인어가 사람이 되려면, 혹은 사람으로라도 환생하려면 먼저 영혼을 얻어야 해. 그 영혼을 얻는 데는 조건이 있어. 사랑, 모든 저주를 풀 마법의 열쇠. (p. 42)

인어공주의 이야기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백어의 전설이었다. 인어는 아니 백어는 그들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환생을 꿈꾸었다. 방법은 '사랑'. 동화와 같다. 하지만 인간남자가 백어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백어들에겐 '소금비늘' 이 있었다.

"백어의 비늘은 백어가 처음 한 번만 주는 거야. 그것만 행운이고 나머지는 전부 불운을 가져오지. 백어의 비늘을 훔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화가 난 백어가 자기 비늘로 소금 도둑의 목을 뎅강 잘라. 내 목이 잘리게 생겼는데 어떡해. 살려면 내가 먼저 백어의 목을 잘라야지" (p. 63)

아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버지 최동수는 면회 온 아들 순하에게 백어의 소금비늘을 훔쳤다고 말했다. 순하가 알던 어머니와 무덤속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너무나 달랐다. 그리고 그동안 외면하려 했지만 자신은 다른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인어들의 전설에 이런 말이 전해져. 물 아래 세계가 있고 물 위 세계가 있다. 물속 세계가 있고 물 밖 세계가 있다. 서로 다른 세계로 건너간 자, 그것을 얻을 수 있다. (p. 65)

마리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 과 함께 쓰여있던 문장들을 처음 읽었을때 용보는 무시했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고 글자는 낙서일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물속 백어만 물 밖 인간 세상에 건너오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방법은 양쪽 두갈래 였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 하나만 생각할 수 있었을 뿐이다. 용보는 그 하나의 길조차 알지 못했지만.

이 빛은 오직 백어의 비늘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어의 비늘 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보아도 알 수 없다. 누군가 백어의 비늘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 그 누군가는 어디서 백어의 비늘을 얻었을까? (p. 115)

순하는 비오던 날 우연히 벽화를 보았다. 그 그림에서 백어의 빛을 보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나 홀로 살던 순하에게 그 빛은 향수이자 뿌리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어석염 혹은 어염석 이라고 한다. 산호, 진주와 더불어 바다의 삼대보주로 일컬어진다. 고대 중국에서 산호는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효과가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악마의 눈으로부터 보호하는 부적으로 붉은 산호를 착용했다. 그러나 백어석의 운은 지닌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주성분이 탄산칼슘 96퍼센트인 산호는 손톱보다 조금 강한 정도의 경도를 지니고 있어 흠집이 쉽게 생기지만 백어석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강도를 자랑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소금이기 때문에 민물에 닿으면 녹아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p. 119)

용보가 백어석의 존재를 알게된 후 검색한 결과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검색을 해보았다;;; 백어석은 당연히 소설의 판타지였다. 하지만 너무 실감이 나서 정말로 있을 것만 같았다.

교어와 혼인한 남자는 모두 살해당했다. 그들 중 염린을 탐하지 않은 이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p. 135)

용보에게 마리를 소개시켜 준 준희는 백어에 대해서도 백어석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소금장사를 가업으로 확장시켜오면서 그 누구보다 백어석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대대로 모은 백어석 즉 염린으로 염린등을 완성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염린등에는 또다른 전설이 있었다.

진실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였다. 준희는 완성된 염린등이 자신에게 보여줄 진실이 궁금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순간 정신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염린의 빛에 홀릴 대로 홀렸다. 하지만 한 번도 환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는 이상 그 경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준희는 불운이 담긴 소금 비늘을 원하지 않았다. 불운 없이 소금 비늘을 얻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p. 139)

용보가 마리 몰래 염린을 몇개 들고 왔을때 준희는 용보가 불운을 시작했음을 알았다. 불운이 더 퍼지기 전에 염린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준희는 용보에게 염린을 샀다. 하지만 준희가 염린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영혼의 부재로 우리의 세계에는 언제나 현재만이 존재하지.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 그러므로 시간은 언제나 멈춰 있어. 늙지만 늙는 것을 자각하지 못해. 늙음조차 현재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세지 않아. (p. 184)

마리는 자신의 소망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이제 소금도둑이었다. 하지만 용보와 마리 사이에 딸이 있었다. 섬 이라는 이름의 딸. 또다시 살해를 하고 싶진 않았다.

갓 태어난 백어는 고래 새끼나 사람의 아기처럼 반들반들한 피부를 갖고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주름이 생기듯 백어는 소금 비늘이 돋아난다. 주름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듯 소금 비늘의 크기와 개수는 백어가 살아온 시간을 말해준다. 민물에 몸을 담가본 적이 없는 나이 많은 백어들은 온몸에 소금 비늘이 가득하다. 살아 있을 때 소금 비늘은 심해의 수압을 견디게 해주는 신체의 요긴한 일부이지만 죽고 난 후에는 그 무게 때문에 몸이 바닷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육신은 썩어 물거품이 되고 소금 비늘만 남는다. 소금 비늘은 보주가 되어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을 굴러다니지만 사람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p. 192)

어디인지 모르는 곳을 찾아 헤매고 가져서는 안되는 것을 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이라면 사랑도 또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백어가 따라나선 남자들에게서 바란 사랑은 염린의 가치를 알게 된 후 차갑게 식어버리곤 했다.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하지만 꿈이라는 것이 원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계속 꾸는 것이듯 백어들의 꿈은 시대를 이어오며 계속 시도되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꿈은 계속 꿀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마리가 물에 흠뻒 젖은 채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던 바로 그날 그 순간, 그는 마리가 품고 있던 백어석의 빛을 알아보았다. 가슴이 울렁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 혼자 다르지 않아. 그는 충만감에 휩싸였다. (p. 203)

소금도둑 용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섬을 데리고 거리의 화가로 돌아온 마리를 만난 순하는 백어의 빛을 알아보았다. 마리도 순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순하는 궁금했고 마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용보는 마리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고 준희는 용보에게 백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들의 운명은 얽혀들었다.

"옛 기록에 그렇게 나와. 뭍으로 올라온 수인들은 거문고나 해금, 적과 같은 것에 관심을 보인다. 그들에게 소리는 다양한 전달 효과를 갖는다. 정확히 말하면 소리라기보다는 공기의 진동을 뜻하지"

"그 기록이 사실인지 누가 알겠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사람은 평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채로 살다가 죽어. 세상엔 우리가 본 것보다 보지 못한 것이 더 많지. 내가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것은 아니야" (p. 266)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만해라"

"백어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장봉도나 거문도 같은 서남 해안에서 인어를 잡았다가 놓아주고 만선했다는 이야기는 너도 들어봤을 거야. 신지끼에 대해서도 들어봤을 거고, 경상남도의 어느 소금 장수가 인어와 교접하고 아들을 얻어 아버지의 묫자리를 지켰다는 이야기도 있지. 인어가 준 토산을 먹고 3백년을 넘게 산 낭간의 이야기도 있어. 18세기 보르네오에서는 푸른 눈에 물갈퀴를 가진 인어가 잡혔다고 하지"

"상상이야. 와전된 거고, 콩쥐팥쥐 이야기가 신데렐라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야"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를 동시에 상상해낼 수 있는데?" (p. 274, 275)

작가의 백어에 대한 설명은 치밀했다. 앞서 나도 모르게 검색해봤던 것처럼, 역사서를 찾으면 그 구절이 정말 있을 것만 같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역사서에 기록이 없더라도 신기하지 않은가?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양에 공존한다.

용보는 아무리 많은 설명을 들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다. 마리와 섬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마리는 소금도둑을 죽이는 백어라고 한다.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마리가 백어라는 것은 믿어져도 믿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백어의 전설을 잊었다. 백어의 비늘이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덕재는 백어의 비늘을 언제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따. 동짓날이면서 음력으로 그믐이나 초하룻날이고, 시각이 자정이면 삼음이 겹쳐 가장 어두운 날이 된다. 삼음이 겹치는 그믐날은 19년에 한 번씩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백어를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들은 백어와 엮이면 살해당한다는 기록을 믿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백어가 아니라 백어의 비늘이었다. (p. 280)

준희가 열세살이었을때 삼음이 겹치던 그믐날밤에 아버지와 백어도에 있었다. 백어도에는 백어들이 올라오는 장소가 있었다. 밤새 소금비늘을 떨어뜨리고 먼동이 틀무렵 소금비늘을 모두 벗은 백어는 바다로 돌아간다는 전설의 웅덩이가 있었다. 아침이면 그 소금비늘들은 모두 웅덩이물에 녹아버릴 터였다.

바다로 나간 백어는 지나가는 배를 흔든다. 갓 비늘을 벗은 백어는 남자의 나이를 세지 못한다. 흔들리는 배에서 자칫 바다로 떨어지는 남자들 중 누구든 처음 본 남자에게 백어는 손을 뻗는다. 그렇게 백어는 자신이 살린 남자를 뭍으로 올려 보내며 따라가는 것이다. (p. 281)

마리가 처음 본 남자가 용보는 아니었다. 인어공주의 동화는 소설속에서 현실로 더 구체화 되었다. 용에게 역린이 있다면 백어에게는 염린이 있었다. 둘다 치명적인 비늘이었다.

단숨에 읽혀지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탄탄한 판타지는 현실감을 높여서 나도 모르게 그 기묘함에 포옥 빠져들었다.

소금비늘의 비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해졌다. 거의가 목숨을 잃곤 했다. 하지만 용보, 준희, 순하 세 남자는 마리의 염린을 알고 있지만 전설은 실현된듯 실현되지 않았기에 이 소설은 어찌보면 새드엔딩이고 어찌보면 해피엔딩이었다. 어떤 엔딩을 상상해도 아마 그 이상일 것이다. 치명적인 인어의 판타지에 홀리고 싶은 이들에게 이 소설을 권해주고 싶다.

말이 전하는 온기와 상처, 말이 가진 무게, 약속의 소중함, 행운과 불운을 향한 선택, 그 밖의 이런저런 입장에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소금 비늘을 향한 용보의 욕망은 물질입니다. 물질을 갖춘 준희의 욕망은 지적 호기심입니다. 순하의 욕망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진실에 닿는 겁니다. 용보의 자랑인 고운 손은 운올 좇고 순하의 거친 손은 성실함을 살아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는 연결되어 있고, 너와 너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곧 나와 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후회를 합니다. 때론 후회할 것을 알면서 후회할 일을 선택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백어와 인간은 각자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가며 다음을 기약하고 더 나은,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을 결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저도 여러분도. (p. 452, 453, 454 - 작가의 말 中)

ps. 어찌보면 삶에 결말은 없다. 결말은 죽은 뒤에 나오므로 살아있는 동안은 결말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결말은 사실 결말이 아니다. 하지만 선택에는 항상 그에 따른 결과가 따라온다. 인간들의 욕망도 백어들의 꿈도 그 실현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사랑'이다. 사랑을 잊은 순간 욕망은 탐욕이 되고 꿈은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결말이란 멈추지 않는 사랑과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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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작가와비평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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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

이름은 종종 들어봤었다. 역사에서나 시에서 등등...

위인전에서 생애를 몰라도 표지에 쓰여있는 이름은 알듯이 페트라르카 라는 이름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름으로만 알던 역사적 인물의 책이 새로 나왔다길래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표지를 보는 순간 조금 후회가 되려 했다. 페트라르카 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초상화이긴 한데... 중세 신학자의 복장에 계관시인이라는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꽌을 쓴 모습이니 딱 저 그림이긴 한데... 표정이;;;

다른 초상화를 찾아 봤지만 별로 없다;;; 그나마 동상이 좀더 멋있는 것 같다. 동상의 모습으로 기억에 새겨두어야 겠다. ㅎㅎ

여하튼 표지 속 초상화는 살짝 기운빠지게 하지만 내용은 예상외로 흥미진진했다.

 

 

페트라르카 라는 인물에 대한 사전정보가 워낙 없다보니 책의 가장 뒷부분 <작품해설> 부터 읽었다. 그렇게 읽고 본문을 읽으니 한결 이해가 쉬웠다. 나처럼 페트라르카 에 대해 생소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때 작품해설 부터 볼 것을 권유해 본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인 혹은 르네상스의 바탕을 깔아준 인문학자로 불리곤 하는 페트라르카 는 1304년 이탈리아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평생 여행을 많이 했는데 잦은 거주지 변경으로 마음의 피로나 권태를 풀었다고 한다. 법률을 전공했으나 성직자 된 이유는 문학 활동에 필요한 여유와 한가함을 위한 경제적 기반 때문이었다. 소년시절에는 키케로의 학문, 청년시절에는 연인 라우라의 만남에 영향을 받았으나 성직자가 된 이후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읽으면서 종교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페트라르카는 풍부한 고전적 교양을 갖춘 당대의 대표적 지성인이자 성직자 다운 도덕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 책의 제목만 봤을때 나는 단순하게 페트라르카의 편지들을 모은 책이라는 줄 알았다. 하지만 페트라르카에게 있어 편지는 문학적 기법이었다. 즉 서간집은 문학작품으로 쓰여진 글의 모음이었다. 따라서 문학적 요구에 따라 서간에 대폭적 손질을 하거나 내용을 고치고 바꾸어 보편성을 부여하려 하였고, 페트라르카에게 있어 서간 작성은 중용한 문학적 자기 훈련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편지를 써서 보낼 때는 그 사본을 떠서 보존하고, 그 후에도 계속 고치고 다듬는 습관을 가졌다고 하는데, 플라톤 시대의 작품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체로 쓰여졌는데비해 중세시대의 작품이 일방적 편지 형식으로 변경된것은 종교적 영향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페트라르카의 방대한 라틴어 서간집 중에서 일부를 선별한 것으로 원본 번역 텍스트마다 해설을 붙이고 있어서 읽는데 한결 쉽게 느껴졌다. 또한 시간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묶여 있다보니 페트라르카의 다방면의 활동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페트라르카 자신에 대한 서간문들은 인물됨됨이에 대해, 문학 관련 서간문들은 문학적 열정에 대해, 조국과 정치 관련 서간문들은 애국심에 대해, 로마 관련 서간문들은 공화정에 대한 향수에 대해, 고대문화 관련 서간문들은 고전의 깊이에 대해 페트라르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로마 고전에 대한 다양한 인용문들이 있어 좋았다. 역사서를 읽으며 친숙해진 이름들이 나올때마다 괜히 반갑고 최근에 읽은 로마 최후의 철학자라는 보에티우스의 연장선에서 읽혀지면서 중세의 암흑이나 지나친 종교색이 그닥 느껴지지 않는 점이 신선했다. 산문 사이에 가끔 등장하는 운문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서간문이 문학의 한 방법이었던 만큼 편지의 대상은 실제적 인물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고대의 인물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미래의 후세대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는데 후세인(後世人)에게 쓴 편지에서는 자신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분명 여러 가지로 거론될 것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진실에 이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판에는 무릇 척도가 없습니다. 어쨌든 나도 당신 동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죽어야 하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p. 77) 청춘은 나를 현혹했고 장년기는 타락시켰지만 노년은 나를 바로잡고 옛날 책에서 배운 것의 진실을 경험으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p. 78) 나의 천성은 날카롭기보다는 조화로움이어서 모든 건전하고 좋은 연구에 적합했지만, 특히 도덕 철학과 시학에 적합했습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나는 시학을 소홀히 하여 종교문학에 끌려갔고, 그곳에 이전에는 꺼려하고 있던 숨겨진 달콤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시쪽은 오직 꾸밈을 위해서만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연구 중에서도 저는 오로지 고대를 아는 데 열중했습니다. 이 현시대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p. 82) 내가 법률 연구를 포기한 이유는, 사실 사람들의 나쁜 의도로 인해 법률의 운용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p. 86)

[후세인에게 보내는 서간]은 거의 자서전이라 할 정도로 자신의 생애와 업적과 인연들에 대해 길게 쓰여진 서한인데 역자에 따르면 고대인에게 보내는 서간에 대응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인에게 보내는 서간]은 책에 실려있지 않아서 어떻게 상응되는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페트라르카가 서간문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 서간이었다.

모든 시대의 저명한 인물들을 떠올려 보세요. 로마인을, 그리스인을, 게다가 그 이외의 사람들을, 그들 중 누가 살아 있을 때에 명성을 잃지 않았을까요? 내가 기억하는 한 모든 인물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모든 인물 중에서 오직 스키피오 대 아프리카누스 만이 그 명성에 의해 우러러 칭송을 받았습니다. (p. 119)

페트라르카 는 스키피오를 정말 존경했나 보다. 스키피오의 전쟁을 다룬 <아프리카> 라는 서사시도 썼다고 한다.

페트라르카는 생각보다 당대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위대한 시인이자 역사가'로서 계관을 수여받았던 대관식은 1341년 카피톨리움 언덕에서 성대한 의식속에 치뤄줬다고 한다. 개선장군의 행렬도 아니고 황제 대관식도 아닌 시인을 위한 성대한 계관식이라...

조각상은 몸의 초상이며 범례는 아름다운 덕성의 초상이라고 해도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활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모방은 한 쌍의 빛나는 라틴어의 별을 만들어 냈습니다.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입니다. 이렇게 이제 우리는 웅변이라는 분야에서도 그리스인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를 닮고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를 추종하고 그리고 베르길리우스는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고 키케로는 스승을 능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p. 156)

로마고전을 좋아하고 깊이 연구한 페트라르카는 그의 글 속에 고전을 수시로 인용했다. 그러한 범례 사용에서 그의 자부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키케로는 페트라르카가 가장 존경한 위인이었다. 고대로마위인들에 대한 칭송이 가끔 과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책의 말미에 가서 시대적 배경이 드러난 서간문을 읽고 나면 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페트라르카가 살던 시대에는 교황이 아비뇽에 망명해 있는 상태였다. 모국 이탈리아의 현실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수시로 개탄하고 직설적으로 글을 쓰곤 했다. 그런 그의 글 속에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과 영광이 대비되면서 더욱 이탈리아의 참상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마음이 드러나곤 했다.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교황청을 '서방 바빌론' 이라 부르며 혐오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글은 이탈리아에서 맹위를 떨치고 나아가 유럽 내에서의 명성을 높였다.

구원의 길을 가리켜 주는 인도자라면 누구라도 경멸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어떻게 진리의 탐구에 방해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로 플라톤의 학파는 진정한 신앙을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르쳐 권하고 있고, 키케로의 책은 그것으로 똑바로 이끌어 줍니다. (p. 236) 독자가 하느님의 진리의 빛에 비추어 무엇에 따르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는 한, 위험하지 않은 독서는 좀처럼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빛으로 인도된다면 모든 것이 안전합니다. (p. 237)

고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를 역사에 인본주의자로 남게 했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인으로 기록하게 했나 보다. 페트라르카는 라틴 고전문학이 모든 문학의 정점에 위치해 문학의 완성형태를 보이는 것으로 여겼고 그러한 그의 태도는 고전을 다시 부흥시키는 발판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페트라르카의 정치적 혁신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서간문은 [호민관 콜라와 로마 인민에게]라는 편지다. 이 책에서 가장 긴 서간문인것 같은데 콜라혁명을 일으킨 '콜라'라는 젊은 지식인에게 보낸 것으로 고대로마의 역사를 길게 훑어내리며 공화정으로의 복귀라는 희망을 열렬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는 왕정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혁명은 실패했고 페트라르카는 실망하여 결국 황제라도 와달라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이조차 응답받지 못했다. 어쩌면 당시 이탈리아에는 교황도 황제도 없는 즉 절대권력이 없는 분열상태였다보니 페트라르카가 마음껏 문학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느님의 자비로 나는 이미 모든 인간적 욕망의 불길에서 거의 해방되었습니다. 비록 완전하다고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모든 죄를 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끝없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p. 324) 어떤 병인지 알고 싶으신가요? 나는 책에 싫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물에 있어서도 비슷한 일이 책에 있어서도 생기는 것입니다. 즉, 욕구의 충족은 한층 더 탐욕을 돋우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책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책은 우리를 마음속으로부터 즐겁게 해주고 대화하고 조언하며 생생한 친밀함으로 우리와 연결됩니다. 게다가 책은 각각이 독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의 이름도 숨어들게 하여 서로 욕망을 자아내게 합니다. (p. 325)

페트라르카에게 급 친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책에 대한 욕망!!! ㅎㅎㅎ

휴머니즘, 인본주의, 르네상스 등의 수식어로 표현되는 페트라르카는 좀 낯설었는데 그의 글을 통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페트라르카 는 왠지 중세인답지 않은 묘한 활동성을 느끼게 해주면서 친근감이 들기도 했다. 키케로의 서간집을 보고 자신의 서간집을 구상했을 만큼 키케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과 고대문헌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보며 보에티우스와의 세월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선했다. 여하튼 표지가 주는 아쉬움에 비해 예상외로 재미있고 새롭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역사를 좋아하고 고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중세학자를 이런 기분으로 읽을 수도 있구나~ 읽을 책이 많아도 너무 많은 참 좋은 세상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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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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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여자들의 피난소 '여성 궁전'

열악하지만 따듯하리라 생각하며 찾은 그곳에서

솔렌은 예상치 못한 냉랭함과 마주한다

레티샤 콜롱바니 의 전작 <세 갈래 길> 을 인상깊게 읽었었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사는 여자의 삶과 시칠리아 공방에서 가업을 잇고자 하는 딸의 삶과 캐나다 대형 로펌에서 성공한 여자 변호사의 삶이 얼마나 깊은 좌절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보여주며 세 갈래로 땋은 머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던 그 소설은 여성의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두번째 소설인 <여자들의 집>도 그 희망의 연장선에 있는 소설로 읽힌다.

마흔 살의 성공한 변호사인 솔렌은 어느날 의뢰인의 충격적인 자살을 목격하며 번아웃에 빠진다. 집밖으로 한발짝도 내딛기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의사는 봉사활동을 권유한다. 내키지 않아하던 그녀에게 한 구인공고가 눈에 들어온다.

'글로 의사소통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대신 써 줄 작가를 구합니다. 글쓰기 자원봉사를 희망하시는 분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그 구인공고를 보는 순간 전류 같은 것이 몸을 타고 흘렀다. '작가'를 구하고 있었다. 작가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에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가 전부 되살아났다. (p. 25)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그녀였지만 사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부모님의 의지에 자신을 맞춘 것이었다. 그녀에겐 다른 꿈이 있었다.

소설은 현재의 파리와 1925년의 파리를 오가며 서술되는데 1925년의 파리에서는 블랑슈 라는 여성이 삶이 펼쳐진다.

블랑슈는 자신의 몸을 챙기느라 일을 미룬적이 없다. 블랑슈의 제복 칼라에 달린 세 개의 S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임무이자 소명, 그의 존재이유였다.

수프Soup, 비누Soap, 구원Salvation.

블랑슈가 생을 바쳐 온 과업은 이 세 단어, 즉 극빈자들에 대한 구호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것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블랑슈가 충실히 복무해 온 조직의 이념이었다. (p. 43)

블랑슈가 생애를 바친 단체는 '구세군' 이었다.

<<영국의 목사 윌리엄 부스가 '어떤 전투를 치르는 데는 군대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군대를 모델로 하는 한 단체를 창설했다. 사관학교, 깃발, 제복, 계급체계 등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갖춘 조직이었다. 국가, 인종, 종교의 차별 없이 어디서나 가난과 고통에 맞서 싸우려는 것이 이 단체의 활동 목표였다. 구세군이라는 이 단체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바야흐로 지상의 모든 곳에서 빈곤과의 전투를 확대해 나갔다.(p. 45)>>

크리스마스때면 번화가에서 빨간냄비를 걸어놓고 종을 흔들던 제복을 입을 사람들이 구세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이런 배경으로 이런 목적으로 탄생한 줄은 몰랐었다. 블랑슈의 삶을 읽으며, 종교단체이긴 하지만 종교보다는 빈민구제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니 종교에 친숙하지 않은 나지만 존경심이 저절로 스며들었다.

영국과 스위스에서는 구세군 운동이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프랑스에서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가톨릭 전통을 이어 온 프랑스인만큼 프로테스탄트 교회 일파인 구세군의 전도 활동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프랑스 각 지역에서 구세군 사관들은 봉변을 당하곤 했다. 몽둥이나 주먹으로 얻어맞았고 발길질로 내쫓겼다. 얻어맞지 않으면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뜨거운 물세례를 받았다. 저녁에 로미에르 거리의 기숙사로 돌아올 때마다 블랑슈의 모자와 제복에는 썩은 달걀이나 오물이 묻어 있었다. 사람들이 죽은 쥐를 던지는 바람에 그 사체의 파편을 고스란히 덮어쓴 일도 있었다. (p. 51)

종교적 맹목성을 모르는 나로서는 구세군의 헌신또한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로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만 보다가 구세군 활동을 하던 한 여성의 삶을 읽으니 애초에 종교가 가져야 했던 종교적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전해지는 듯 했다.

백여년 전의 구세군 활동가 블랑슈와 현재의 전직 변호사이자 우울증 환자인 솔렌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앞에서 펼쳐놓은 퍼즐들을 차근차근 단 한곳의 빈곳도 없이 꿰맞추는 방식은 <세 갈래 길>에서 보여줬던 작가의 솜씨 그대로였다.

안뜰이 있는 낡은 주택을 상상했는데 눈앞에 있는 건 사거리를 내려다보는 6층 건물이었다. 아치형 지붕이 출입구를 장식하고, 건물 전면에 머릿돌 격으로 동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솔렌은 동판에 새겨진 내용이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했다. 역사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팔레 드 라 팜므'라고 새겨져 있었다. 건물명이 묘했다. 여성의 궁전. 이름 자체만 보면 어쨌거나 화려한 장소였다. 왕이 사는 곳을 의미하니까. 학대받은 여성들이 피난한 장소에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었다. (p. 60)

솔렌이 대필작가로 일주일에 한번 봉사하게 된 곳은 '여성의 궁전' 이라고 이름붙여진 시설이었다. 시설을 안내해주던 원장의 말이 와 닿는다. < 요즘에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자는 의미로 사회적 공존이라는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데,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뒤섞어 놓는다고 공존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문화와 전통이 뒤섞이는 일은 이곳에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에요. 진정한 공존은 바깥의 삶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데 있어요. (p. 64~65)> 다양성만으로 공존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살면서 종종 체험할 수 있곤 한다. 공존에는 연결이 필요하다. 솔렌에게 필요했던 것도 바로 그런 연결성이었다. 고립이 아닌 공존.

과거 매춘부였다가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범죄자로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친 이들, 장애 때문에 경제 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다양한 경로로 프랑스 땅을 밟은 이주민 혹은 난민 여성들도 있었다.

"그들 각자는 어떤 형태로든 취약성을 안고 있어요. 저마다 폭력과 무관심을 경험했죠. 사회의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p. 70)

솔렌으로서는 큰 결심이었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다. 자신의 상처만 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생전 처음 봉사활동에 나서면서 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내 작은 도움을 그들이 두팔 벌려 환영하리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여성의 궁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은 저마다 다채롭게 우울했다. 솔렌의 우울은 견줄바가 아니었다. 솔렌은 처음 갔을때 그런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솔렌의 알껍질은 좀더 깨어져야 했다.

이해가 되는 상황임에도 솔렌을 엄습한 그 강렬한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신이 그런 심리 상태가 된 게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솔렌 자신을 향해 화가 났으니까. 지금까지 솔렌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면의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좁은 삶, 개인적 성취에 매몰되어 배고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굶어야 할지 배를 채워도 될지가 지갑 속 2유로의 유무로 결정되는 사람들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둔감했다. 그런 현실을 오늘에야, 여성 궁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또렷이 의식하게 된 자신에게 솔렌은 화가 났다. (p. 88, 89)

자신의 삶이 안정적일때 세상의 불안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세상이 흔들렸을때 동시에 세상의 불안이 겹쳐오기 마련이다. 처음 느끼는 불안한 세상에 대한 분노는 급작스러운 만큼 쉽게 꺼지기 마련이다. 세상의 불공정을 알았을때의 정의감은 사실 오래가기 힘들다. 꾸준하게 세상의 불안을 마주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런 삶을 산 인물로 솔렌과 블랑슈의 삶이 대비되듯이 읽혀진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엔 합쳐질 것이다. 이 소설은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구세군에 들어가자마자 '리틀 가십걸'은 모든 면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그의 열정, 결단력, 창의성 넘치는 활동에 모두가 감탄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블랑슈는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구세군 신문의 기자로서 글을 쓰면서 거리 성가대이자 설교자 역할을 했다. 광고판을 앞뒤로 붙이고 거리를 순회하며 구세군 신문을 팔았고, 얼마 후에는 이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 행인이 많은 대로에서 기타를 치고 탬버린을 두드렸다. 수없이 거리 사역에 나서서 극빈자 구호를 위한 현물 기부를 호소했다. 블랑슈는 모임을 찾아다니며 지원을 청했다. 군중 앞에 나서서 연설했고 거리 행인을 붙잡고 호소했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 실내를 한 바퀴 도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p. 91)

한마디로 블랑슈의 삶은 가난 이라는 전쟁터 에서 치루는 싸움이었고 블랑슈는 가장 선두에 나서는 군인이었다. 한때 리틀 가십걸 이라 불릴 만큼 놀기 좋아하던 소녀는 자신의 소명을 깨닫는 순간 불굴의 전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삶이 40년 지난 때가 1925년 파리였다. 평생을 헌신하며 산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 수 있을지 실사례를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소설속 인물인 블랑슈는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성의 궁전'은 실제로 파리에 있는 곳이다. 이런 현실 예시는 종교적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종교이건 무엇에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믿음이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솔렌은 이제껏 '대필작가'라는 일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맡은 일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대필 작가는 펜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리고 언어가 필요한 사람에게 펜과 손과 언어를 빌려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머릿속, 마음속의 글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판정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운반해주는 사람이다. 솔렌은 편지를 쓰기에 앞서 자신은 운반자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p. 173)

솔렌의 좌절과 포기와 번민과 재시도 속에서 만나는 '여성의 궁전' 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부여잡게 만드는 사연들을 안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범죄로부터 딸을 구해내기 위해 가족을 떠나야 했던 기니 여성은 함께 데려오지 못한 아들 생각에 밤마다 숨죽여 울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여자를 이름으로 칭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는('누구의 아내' 이거나 '누구의 딸', 혹은 '누구의 누이'로 불리거나 가족의 이름을 모를 경우 그저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여자는 파리에 와서야 이름이 생겼다. 버려진 아이로 자라나 거리에서 낳은 아이와 생이별한 후 세상 모두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여성도 있었다. 20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칼을 맞고서야 도망쳐 나온 여성의 남편은 재판에서 징역5년에 유예1년을 선고받았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으로 살고자 한 이는 여성의 궁전에서조차 쉽게 어우러지기 힘들었다. 여성노숙인으로 54번이나 강간을 당했던 여성은 방을 배정받고도 침대에 눕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연의 여성들이 있었다... 다양한 폭력에 내몰린 여성들은 차고 넘치고 있었다... 운반자로서의 봉사는 의도치 않게 솔렌을 한계로 몰아넣었다.

프랑스 구세군은 결핍 속에서 후퇴를 거듭해야 했던 시간을 이겨 내고 눈부신 도약을 이루었다. 페롱 사령관 부부의 주도하에 대역사의 시대가 열렸다. 원대한 계획들이 차례로 실현되었다. 블랑슈와 알뱅은 파리 고블랭 구역에 '시민 궁정'을 건립했다. 노숙인을 위한 쉽터였다. 한편으로 라 퐁텐오루아 거리에 여성 피난소도 만들었다. 프랑스 거의 전 지역에 피난소가 생겼다. '가난한 자의 옷장'이 설치되었다. '자정의 수프' 사업도 시작되어 파리의 밤거리를 누볐다. (p. 144)

빈민구제 사업에 헌신하던 블랑슈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같은 일을 하던 구세군 청년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둘이 되니 에너지가 배가된듯 더 활발하게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좌절도 있었다. 해도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빈민들의 삶에 블량슈 본인마저 실망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할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에서 한 기사를 읽게 된다.

"주거용 대형 건물이 비어 있어요, 그것도 파리 시내에!" 블랑슈의 두 눈이 열기를 띠며 반짝였다. 벌떡 몸을 일으켜 알뱅 앞에 섰다. "그 건물을 사야 해요! 그래서 집이 없어 거리로 내몰린 파리의 모든 여자들이 와서 쉴 수 있게 해야 해요" (p. 180)

"고통을 멈추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아뇨, 세상의 고통은 계속될 거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블랑슈가 꿈꾸는 것은 고통받는 여자들이 쉴 수 있는 장소였다. (p. 182)

방의 개수만 743개에 이르는 대형 주거 건물이 5년이 넘도록 거주자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 재단 소유의 이 건물은 1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독신자 거주용으로 지어졌다. 시 당국이 이 건물을 사들이려 했지만 높은 매입 가격과 유지 관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획을 접어야 했다. 엄청난 액수의 예산이 필요했다. 구세군은 가난한 단체였다. 하지만 블랑슈는 뜻을 세웠고 목표를 정했다. 이 건물터는 과거 도미니크파 은거 수녀 공동체인 십자가수녀회 수도원이었다. 블랑슈에게 이 건물은 운명적인 곳이었다.

솔렌은 대필 작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여성 궁전 원장님에게는 전화로 제 뜻을 알리려고 해요. 그곳에서 일하는 건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힘들어요. 그 일을 감당하 힘이 없어요. 그곳 여자들의 상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요. 그들의 망가진 삶을 보면서 제가 휘청거러요. 저 역시 영영 주저앉고 말겠어요" (p. 292)

백년전 블랑슈의 전투와 지금 솔렌의 전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두 전투는 서로 어떻게 엮이게 될까?

솔렌이 '블랑슈 페롱' 이라는 낯선 이름을 확인하기까의 여정은 소설을 읽으며 직접 확인하기를 권한다.

다만 전투의 결과만 미리 스포하자면, 두 전투 모두 승리한다. ^^

이 책의 원제는 Les Victorieuses '승리한 여자들' 이다.

ps1. 전작보다 왠지 서툴게 구사되는 듯한 문장들이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솔렌의 감정에 동요하면서 그 서툼이 더 편안해졌다. 나 역시 사회의 불안을 마주하는 일에는 서툰사람이라서인지...

ps2. '사회가 보듬어 주지 못한 이들에게 쉴 곳을 제공한다' 는 그 임무를 단 한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는 '여성궁전' 이 실존하는 파리에 가보고 싶어졌다. 파리에는 에펠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찬란한 궁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광지로서의 파리에 그닥 큰 유혹을 느끼지 않았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난 후 파리가 갑자기 정겹게 다가온다. 여하튼 파리는 그야말로 '궁전'들의 도시인 것은 맞는 모양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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