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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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플로이드 과잉진압 사망사건 이후

불타오른 반인종주의 물결의 횃불이 된 책

유색인의 짐이자 그들 문화의 쟁점이던 인종주의 논의에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으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작

 

 

다양성, 다문화 이런 단어들이 활발하게 사용된지는 따져보니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 적응중인 이 단어들에 대해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하다고 쉽게 판단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식은 아직 다양성을 충분이 인지하지 못하고 다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함을 최근 읽은 사회관련 책들에서 기존의 안일함을 깨우치게 되곤 했다. 언론의 개소리에 대해서 한일관계의 쓴소리에 대해서 느낀바가 많았었는데 이번 책은 인종주의에 대한 편견 깨뜨리기다.

~의 라고 하면 소유격으로 이해된다. 백인의 취약성 이라고 하면 백인이 가지고 있는 약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취약성'은 좀 다르다. 원제도 그냥 WHITE FRAGILITY 백인취약성인데, 원제처럼 그냥 백인취약성 이라고 불러야 할 백인들이 주로 갖고 있는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취약하다라는 의미는 약함보다는 무지나 왜곡으로 인한 편견이나 고집에 좀더 가깝다고 보여지므로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좀 곤란하지 싶다. '백인취약성'은 미국내 인종갈등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백인들의 특성이라서, 이 특성은 백인들의 약함이 아닌 강함을 강화시켜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앤젤로는 양심을 흔드는 외침으로 중요한 반인종주의 백인 사상가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녀가 같은 백인 형제와 자매의 양심을 흔든다는 것이다. WHITE FRAGILITY 은 진정으로 생산적인 개념이다. 우리로 하여금 백인이 그들 자신의 백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인성이 아주 오랫동안 인종 탐지기에 걸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요구에 그들이 얼마나 방어적으로 반응하는지를 더 깊게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결정적인 개념이다. (p. 11)

디앤젤로는 백인의 정체성이 미국인의 정체성이 되어가는 흐름-인종주의적 신념이 국가적 신념이 되어가는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 미국인이라는 것이 곧 백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적어도 완전히 그런 의미는 아니고 주로 그런 의미인 것도 아니라며 목청껏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p. 12)

저자는 백인성 연구 및 다문화교육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 학자이자 강사이다. 이 책은 인종주의 편견에 물들어있는 미국내 백인을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쓴 책이라서 추천사를 쓴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여하튼 추천사에서 표현하듯이 미국인들이 외면해왔던 자신들의 치부를 끄집어내고 흔들어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책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당선 이후 영미권에서 나온 사회문제 관련 책들은 용감하다고 느껴질 만큼 직설적으로 읽힌다. 그들의 문제의식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려나 의구심이 들수도 있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면 우리의 현실과도 닿아있음이 절실히 느껴지기에 국내에서 잘 발견하기 힘든 이런 용감한 책들이 나는 늘 반갑곤 하다.

장벽에 부딪힌 집단을 거명하지 않는다면 이미 투표권을 가진 집단에게 유리할 뿐이다. 투표권을 통제하는 집단이 누리는 권리를 보편적인 권리로 가정하는 셈이다. 권리를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을 거명하는 행위는 불의에 도전하는 우리의 노력을 인도하는 지침이다. (p. 17)

나의 바람은 여러분이 스스로를 백인으로 의식하는 사람들이 인종을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그토록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한 통찰 그리고/또는 일상 생활에서 요동치는 인종의 바다를 항해할 때 여러분 자신이 어떤 인종적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이다. (p. 21)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을때 여성들이 자신들도 동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이라는 집단을 거명하고 나서야 남성지배집단은 투표권을 부여했다. 장벽에 부딪힌 집단이 있을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흑인과 인종주의 라는 단어를 미화하고 덮어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름짓고 직시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저자의 말은 다른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듯 싶다. 따라서 저자가 알려주는 통찰을 위한 여정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소외집단에 대한 통찰을 시작하는것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인의 취약성을 촉발하는 것은 불편함과 불안이지만, 이것을 낳는 것은 백인이 우월하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식이다. 백인의 취약성은 그 자체로는 약점이 아니다. 실은 인종을 통제하고 백인의 이점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p. 24) 유색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수많은 백인을 보면서 우리가 유색인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이로운 체제에 투자하는 우리의 모습도 보았다. 또 우리가 이 모든 점을 부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이런 역학이 거명될 때면 얼마나 방어적으로 나오는지를 보았다. 요컨대 나는 우리의 방어적 태도가 어떻게 현재 인종 상황을 유지하는지를 보았다. (p. 27) 실제로 우리는 인종에 대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려 시도할 때 걸핏하면 침묵, 방어적 태도, 논박, 확신과 같은 반발의 여러 형태로 백인의 취약성을 금세 드러내곤 한다. 이런 반발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사회적 구속력이다. 이 사회적 구속력은 한층 생산적으로 관여하는 데 필요한 인종 지식을 얻지 못하게 막는 한편 인종 위계를 강력하게 유지하려는 기능을 한다. (p. 33) 인종주의의 구속력을 저지하는 것은 평생 지속해야 하는 일인데, 인종주의적 준거틀로 우리를 길들이려는 구속력이 항상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습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p 34)

저자는 사회학자로서 끊임없이 분석한다. 자신이 미국에서 백인으로 살아오면서 경험했고 자신에게도 강하게 존재했던 인종주의에 대해 되짚어보고 사람들에게 강의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반발과 수시로 논쟁하면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지치지 않는 열정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백인은 우리의 인종 프레임에 관해 숙고하기를 유독 힘들어하는데, 인종적 관점을 갖는 것은 곧 편향되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은 우리의 편향을 보호할 뿐인데,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p. 38)

백인성은 근본적인 한 가지의 전제에 의존한다. 바로 백인은 인류의 기준 또는 표준이고 유색인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규정이다. 백인은 백인성을 인정하기 않거니와, 백인의 준거점을 보편적인 준거점으로 상정하고 누구에게나 강요한다. 백인은 누군가의 삶과 인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상태로서의 백인성에 관해 생각하기를 아주 힘들어한다. (p. 61)

보편적이라고 일반적이라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에 대한 숙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받고 생각하기를 권유받았을 때의 불편한 마음, 이런 마음들에 대해 우리도 종종 경험해오지 않았던가? 일단, 이 책의 주제인 백인성에 대해서만 국한시켜 보더라도 우리는 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인의 시각으로 외국인들을 판단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백인들이 보면 우리도 유색인인데!

인종적 예외 사례에 대한 서사는 백인의 제도적 통제력이 유지되는 동시에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가린다. (p. 63) 이런 서사에 기대어 우리는 사회의 제도 안에서 이루어내는 우리의 성공을 자축하고, 성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집단들을 비난한다. (p. 65)

인종뿐만이 아니라 소외집단이 인정을 받았을 때는 대부분 개인적 능력으로 인정받게 마련이고 예외적인 성공담으로 회고되기 마련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을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했을때 뉴스화되고 특별한 경우로 회지되는 것 이것은 결국 그 특별한 경험의 사례자가 그동안 소외되어 왔다는 것에 대한 반증인 셈이다. 저자가 사례로 든 것처럼 백인 남성이 야구선수가 되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흑인 남성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면 뉴스거리가 된다. 나아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소외집단을 망각시키고 개인적 능력주의로 문제점을 환원시키고 축소시키게 된다. 소외되는 계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능력껏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을 감추어버리고 모른척해버리곤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에요 말하게 된다. 하지만 출발선이 달라도 너무 다름을 알아야 한다.

1963년 마틴 루서 킹 박사가 일자리와 자유를 위해 워싱턴으로 행진하던 중에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포함된 문장 - 언젠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문장-이 특히 백인 대중의 이목을 끌었는데, 킹의 표현이 인종 갈등 문제에 간단하고도 즉각적인 해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인종을 보지 않는 척하는 방법으로 인종주의를 끝내는 해법이었다. 그리아혀 '색맹'이 인종주의의 해결책으로 홍보되었고, 백인은 자신이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설령 보더라도 자신에게 인종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우기기에 이르렀다. 분명 시민권 운동은 인종주의를 끝내지 못했다. (p. 86, 87)

이런 방어적 태도는 인종차별은 고의로만 저자른다는, 그릇되지만 만연한 믿음에 뿌리박고 있다. 이렇게 내면화된 암묵적 편향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결국 회피적 인종주의에 이르게 된다. (p. 89)

인종색맹주의, 기막힌 표현이었다. 저자는 트럼프처럼 직접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는 계층에게 이 책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쪽에게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나름 진보적이라 생각하고 인종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그런 것 같냐고 되묻고 있다. 저자의 질문에 no 라고 답했던 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다가 급기야 화를 낼지도 모른다. 뜨끔하고 찔리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인종 색맹이라는 이상에 더 헌신하면서 인종 문제를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로 남겨두고, 인종 간 불평등을 줄이는 조치에 반대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백인 밀레니얼 세대의 41퍼센트가 정부가 소수집단에 지나치에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48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이 유색인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p. 97)

지금의 미국내 혼란의 주된 갈등축은 백인노동자계급의 분노라고, 그동안의 역차별에 대한 저항이라고 표현되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그런 수치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나 몰라서 당하는 것이 참 많은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무엇보다도 어린 세대의 보수화가 세계적이구나 싶었다. 자신들의 피해가 누구로 인해 왜 생긴 것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할텐데...

백인 노동계급은 블루칼라 분야에서 언제나 꼭대기 위치(감독관, 노동조합 간부, 소방서장과 경찰서장)를 지켜왔다. 그리고 세계화와 노동자 권리 약화로 인해 백인 노동계급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백인 엘리트층은 백인의 취약성을 이용해 백인 노동계급의 분노를 유색인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그 분노는 분명히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경제를 통제하여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소수(백인)에게 많은 부를 집중시키고 있는 주역은 백인 엘리트층이기 때문이다. (p. 117)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트럼프의 대선 슬로건)는 당시 백인 노동계급의 처지와 관련해 비난의 화살을 백인 엘리트층에게서 여러 유색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백인을 겨냥한 인종적 조작의 효과를 대폭 높였다. (p. 118) 소수집단 우대 정책은 적격한 소수집단 지원자에게 백인 지원자와 동등한 구직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정책은 융통성 있는 프로그램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할당 인원수나 요구조건은 없다. 더욱이 초기에 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소수집단 우대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백인 여성이다. (p. 165)

실체없는 분노였던 것이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아니 있긴 했었는지 확인한 바도 없으면서 역차별을 당했다고 분노한 셈이다. 상위1%의 부를 더욱 부풀려준 것도 모르고 하위계층이 자신들이 가져야 할 것을 빼앗아갔다고 오해한 것이다. 늘 그랬듯 다수가 소수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나 할까.

인종주의를 개별적·개인적·의도적·악의적 행위로 축소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백인이 자신의 행위를 인종주의로 인정할 가능성을 낮춘다. (p. 141)

인종주의처럼 민감한 무언가와 관련해 이것 아니면 저것 이분법으로 질문할 경우 우리는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주장은 대화에서 어떻게 기능합니까?'라고 묻는다. (p. 144)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실제로 자주 듣지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데 성공할 수는 없다. 인간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기를 원하지 않을 텐데, 사람마다 욕구가 다르고 우리와 맺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유포되어 우리로 하여금 사람에 따라 불공평하게 대하도록 만드는 그릇된 정보다. (p. 147)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도 없다. 누구나 똑같이 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실은 반성할 여지를 닫아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p. 150)

저자는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역지사지'의 관점을 다양하게 알려준다. 인종주의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행위에 대해 인종주의적 견해인가 아닌가 따져보라는 질문이나, 인간은 애초에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 없다라는 문장이 뒷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하면서 시원스럽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흑인을 위험한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이 나라가 건국된 이래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실제로 오간 폭력의 방향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묘사는 흑인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을 유발하고 우리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게 하지만, 이 가운데 우리가 도덕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감정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백인의 집단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p. 164) 요컨대 백인 정체성은 특히 열등성을 흑인에게 투사하는 행위와 백인 집단이 보기에 이런 열등한 지위에 의해 정당화되는 억압 행위에 의존한다. (p. 171)

흑인이 노예로 아메리카에 발을 딛게 된 이후 폭력의 방향은 분명 백인이 흑인에게로 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흑인이라면 무조건 폭력적일거라는 편견이 압도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흑인이 백인을 노예처럼 부려먹은 적은 단 한번도 없는데도. 이러한 프레임이 누구의 지위를 더 돈독하게 해주었던가 생각해보면 이 프레임이 왜 인종주의적인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문제는 당연시 되는 이러한 시각이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지 못해왔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백인의 취약성'은 아주 구체적인 백인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다. 백인의 취약성은 단순히 방어적 태도를 보이거나 우는 소리를 하는 정도를 훌쩍 넘어선다. 이것은 지배의 사회학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우월의식과 이 우월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법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다. 이 용어는 불만을 토로하는 집단이나 그 밖에 다른 까다로운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예컨대 '학생의 취약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p. 198)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약점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가 예를 든 것처럼 학생의 약함을 빗댄 '학생의 취약성' 으로 같은 취약성 이라는 용어를 쓸수는 없다.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지배도구이고 사회화 개념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흔들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인종적 사회화로 인해 각자의 의도나 자아상이 어떻든 간에 인종주의적 행위를 반복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인종주의가 드러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계속해서 자문하는 것이다. (p. 238)

나의 마지막 조언은 이렇다. "당신 스스로 주도해서 찾으세요" 백인성의 길들임-인종주의와 무관심하게 만들고 인종주의를 지지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는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인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훌륭한 조언이 너무나 많다. 그런 조언을 찾아라. 백인성의 무관심과 결별하고 당신이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을 입증하라. (p. 247)

백인의 취약성에 집중하긴 했지만 크게 보면 '백인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들은 많았다. 유태인에 대한 박해나 흑인을 비하하면서 어떤 (백인대비 모자란)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 같은 표현들이나 서양에 비해 동양이 미개하다는 식의 어떤 종족에 대한 편견들... 하지만 백인만이 지니고 있는 '백인성'에 대한 분석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특별하다. 비록 내가사는 나라가 비교적 동일한 인종들이 사는 곳이기에 미국처럼 흑백갈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집단의 고유한 성질과 백인성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에 다양하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책이었다.

유색인이 보기에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도록 하는 인종적 악순환을 유지하는 기능을 해왔다. 결국 백인의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곧 인종 질서와 그 질서 내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지탱하는 것이다. 현행 체재의 기본 설정은 인종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p. 262)

인종주의를 저지하려면 용기와 지향성이 필요하다. 저지한다는 것은 그 정의상 순종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우리의 학습이 끝났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p. 263)

끊임없이 질문하고 돌아보면서 바른 지향점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안주하고 싶고 모르는 척 하는 게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사회가 얼마나 살기 힘든 사회가 되버리곤 했는지 역사는 늘 교훈을 보여주곤 한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보다도 앞으로의 후대를 위해서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가야할 지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ps. 읽는 내내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이 자꾸 떠올랐다. 선량함과 차별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충격받으며 읽었던 책인데, 결국 차별과 맞닿아 있는 '백인의 취약성'을 읽으면서는 그저 고개끄덕이며 읽게 된 것을 보면 그 사이 차별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어느정도 진척되 온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물론, 차별의 대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런 주제의 책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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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월드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7
엄정진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과학과 사변으로 무장한 첨단 스페이스 오페라의 개막!

 

SF 소설 시리즈가 있다는 건 볼때마다 참 반가운 일이다. GF시리즈에서 만나는 새로운 SF소설들은 늘 내게 국내 SF작가들에게 눈을 뜨는 시간을 선사해주곤 했는데 이 작품 또한 그러했다. 이번엔 하드SF 다.

방금 '인간'이라고 말했지만, 지구에 번성했던 호모 사피엔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아득히 오래 전 멸종했으니까. 앞으로 내가 인간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나와 동등한 존재, 즉 은하 연방에 소속되거나 그에 준하는 고등 지성체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호칭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연방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은하계의 지성체를 평등하게 받아들였다. 신분은 오직 두 가지로 나뉠 뿐이다. 나와 같이 각 행성에서 생명체로 태어난 후 연방에 소속된 <내추럴>과 연방에서 직접 만들어낸 인공지능. 능력은 인공지능이 뛰어난 경우가 많아도 생물로 살았던 경험과 풍부한 감각을 가진 내추럴을 연방에서는 소중한 자원으로 여겼다. 그래서 신분차는 없어도 내추럴이 지휘를 맡고 인공지능이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부여받는다. (p. 13)

'싱귤래리티'를 다룬 SF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주로 다뤘던 소재는 지구생태계의 파괴와 인간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육체는 버리되 지능만 업로드할 수 있게 된 세상을 상상하며 그 과정에서 고민될 법한 생각들을 다루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미 그 세상이 도래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지구 뿐만이 아니라 은하 전체적으로 지능이 업로드 되어 연맹을 이루고 있고 인공지능 또한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세상, 작은 우주선 임라나 호에 탑승한 두명은 한명은 내추럴 이자 선장이고 한명은 인공지능이자 부관이다. 은하의 이곳저곳을 오가며 측량, 탐사, 세금추심 등 허드렛일을 하던 이들의 우주행로 앞에 묘한 물체가 포착된다. 언뜻 봤을때 생명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그 파편 들속에서 온전한 신체를 유지한 생명체가 있었다.

유기생명체가 정보의식체로 재탄생하려면 두뇌를 스캔하여 담긴 정보를 홀로그램 데이터 포맷으로 만들고 저장장치에 담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된다. 말했듯 두뇌를 잘라내야 함은 물론 강력한 전자파에 노출되어 뇌기능이 정지되므로 시술은 한 번밖에 못한다. 실패할 경우 원본의 기억은 영원히 소실된다. 복구는 불가능. (p. 33)

정보의식체가 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 기억과 정신을 옮겨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정보를 가진 복사본을 새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유기체의 기준에서 볼 때는 본래 육체와 정신까지도-정신 혹은 영혼이라는 개념이 실존한다면- 완전히 파괴되고 사망한다. 따라서 동일한 기억이라는 정보량을 가진 정보의식체를 생전의 자신과 동일한 본인이라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정보의식체 자신의 의지뿐이다. (p. 35)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시점을 말한다는 싱귤래리티 의 문제는 그렇게 인간의 육신이 없는 지능만 남은 존재가 여전히 인간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미 모두가 다 정보의식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이점이 던질법한 문제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하드SF 라더니 소소한 개인적 고민들은 은하적 범주로의 확장속에 별로 고민되지 않고 넘어간다. 스페이스 오페라 라는 SF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이질감을 이 소설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국내작가의 작품이라서 문화적 이질감이 없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정도의 스페이스 오페라 라면 앞으로도 계속 관심이 갈 것 같다.

새로이 발견한 지성체 종족의 유일무이한 생존자. 그의 고향별을 찾아서 구체적인 현황을 파악하고 조사하는 임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앞서 말했듯 새로운 납세자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 정부 입장에서는 환영할 수밖에. 그래서 우리 셋은 다함게 임라나를 타고 처음 유옌을 발견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 네모나고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유옌의 고향별을 찾는 우리의 모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p. 52)

온전히 살릴 방법이 없었기에 두뇌를 스캔하여 업로드한 새로운 생명체는 파충류과의 외형을 띤 외계종족이었다. 긴 이름을 줄여 유옌이라 부르기로 한 그 생명체는 자신의 고향별이 네모나고 평평하다고 했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으며 자신들의 종족을 만든 신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인구증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 중 자신은 실종된 것이라고 했다. 은하 내부의 정보를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이 생명체와 그의 고향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임라나호는 세명으로 늘어난 탑승객을 태우고 모험을 떠나게 된다.

목격하고 있는 물체는 쉽게 말하자면.....

네모난 별이었다.

보면서도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p. 74)

이곳은 그야말로 거대한 어항이라 할 수 있으니까. 네모낳고 폐쇄된 공간 안에 땅과 물을 적당히 넣어놓고 동식물의 씨앗을 뿌린 다음 내버려두면 오랜 세월 후에 만들어져 있을 법한 세상의 모습이다. (p. 92)

정말로 네모난 별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은 아니었다. 태양이라 여겨지는 행성을 둘러싼 거대한 레일이 있고 그 레일 위를 거대한 '네모난 별'이 달리고 있었다. 이 곳을 '레일 월드'라고 부르기로 한다.

귀하의 요청은 반려한다. 연방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며, 향후의 추이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것이다. 귀하는 앞서 지시한 내용대로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면 다시 보고하라. 별도의 지침이 없는 한 귀하는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문명권과 접촉하도록 하라. (p. 152)

레일월드에는 크게 세 부족이 살고 있었다. 각자 다른 정체를 지닌 이 세 부족앞에 나타난 유옌은 오래전 있었다는 우주전쟁에서 살아돌아온 조상님이었다. 그 조상님이 외계인과 함께 고향에 왔는데, 이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막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방법을 찾아보자고 한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한 연방에서 온 답변은 이 행성에 개입을 반대하고 있었다. 뭔가 수상한 점이 느껴진다. 이 행성에는 분명 연방이 감추고자 하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이다. 임라나호의 선장과 부관은 연방을 불신하게 되고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한다.

"무엇때문이죠?

우리와 대화를 나눈 외계인이 아닌 당신이 왜 굳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지요?" (p. 225)

연방국가체와 연합국가체와 독재군주제가 있는 레일월드에 생겨난 종교는 두 종류였다. 그중 한 교파의 대표를 만났을때 그는 자신들이 외계에서 메세지를 받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별이 더이상 생명체가 살 수 없을만큼 파괴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조상들이 했던 데로 전쟁이 곧 벌어질 것도 알고 있지만 또다른 방법이 있음을 믿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외계에서 온 존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총재님이야 너그러운 분이시니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우리 입장에서 당신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기나 해? 당신들은 제대로 된 종교단체도 아니야. 신도 모집도 안 하고 헌금도 안 받고 율법 강요도 없고 성지순례도 안 하고... 심지어 교당도 안 짓고 전 세계에 흩어진 신도가 각자 모여서 자발적으로 활동한다니, 이게 무슨 종교야? 순 점조직이지 (p. 271)

또다른 종교에서는 외계인의 존재가 몹시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러니 우여곡절끝에 성사된 대표단 회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어쩌면 뻔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일 월드를 파악하고 이곳에 사는 생명체들의 문화를 알아갈수록 의문은 커져간다. 은하연방체의 기술과 다른 것이 보이지만 정작 이곳의 생명체들은 그것에 대해 모른다. 한 교파가 받았다던 메시지가 은하연방에서 보내진 것이 아님은 갈수록 확연해 보이고, 은하연방에 보고를 올릴 수록 뭔가 감추려는 태도도 뚜렷해 보였다. 이 레일월드를 만든 누군가가 있다. 누가? 왜? 무엇보다 이상한건 왜 파괴되도록 그대로 두려는 것인가?

집정관이라는 호칭부터 씨족과 가문과 자신의 이름까지 길게 이어지는 작명법부터 투표방식등 고대로마의 체제를 본뜻 정체를 우주공간에서 재현한 것도 흥미로웠고 광신도 종교집단의 태도로 비틀어 보여주는 모습들도 재미있게 읽혔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의 성격표현과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케 하는 것도 의미있었지만 무엇보다 새로웠던 것은 '전쟁'의 목적과 '생명존중'의 가치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렇듯 소설 한편으로 우주적 범주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SF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짐이 아닐까 ㅎㅎ

책의 말미에 작가의 후기에서 다양한 작품들에서 오마주했음을 밝힌 부분들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2020 우주의 원더키디' 라는 예전 애니메이션 언급에서는 잠시 추억에 빠져들게 되기도 했다. 그랬지.. 그런 티비만화영화가 있었는데... 그 애니에 나왔던 주인공을 닮은 친구가 있어서 원키 라고 별명을 부르기도 했었는데... 그때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2020년이 지금이었네;;;

작가가 말하길, 소설안에 '2020 우주의 원더키디'를 패러디한 부분을 한군데 넣었다고 알아봐주는 독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어느 장면일꼬... 혹시 텬동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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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안의 네 딸들 컬러링북 우리가 사랑했던 순정만화 시리즈
신일숙 지음 / 용감한까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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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을 떠올렸을때 가장 좋았던 시간을 꼽아보라면 나는 주저없이 순정만화를 읽던 그 시간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이돌이나 유명스타에 빠져본 적은 없어도 순정만화 포스터로 벽을 도배하고 싶을만큼 순정만화책들에 포옥 빠져들곤 했었다.

 

 

강경옥, 김혜린, 이미라, 이은혜, 원수연, 천계영, 황미나, 신일숙... 그 어떤 베스트셀러 작가들보다도 그 어떤 고전작가들보다도 내게 의미있던 이름들... 댕기, 화이트 같은 순정만화 잡지가 발행되었을때 매달 손꼽아기다리던 시간들은 '연재'의 설레임을 만끽할 수 있던 순간들이었다.

 

 

당시 내게 순정만화의 세계를 알려준 친구가 가장 유명한 만화가라기에 보았던 황미나의 작품들, SF소설을 좋아했던 취향은 강경옥 만화를 베스트로 생각했던 그때부터 이미 시작됐던것 같고, 김혜린만화의 처절한 비련이 좋아서 남들이 다 우습게 보던 드라마나 영화화된 작품들도 혼자 설레하며 봤었고, 학원물 로맨스 특유의 설레임을 만끽할 수 있었던 이미라, 이은혜, 원수연, 천계영의 작품들도 좋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최고였던 작품은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이었다. 단행본으로 나오던 책이 뒤로 갈수록 후속편이 너무 안나와서 하교길레 만화방에 들려 24권 나왔어요? 하고 물어보며 안 나왔다는 대답에 아쉬워했던 그 시절... 마지막권이 몇년만에 나온 27권이었던가 28권이었던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마지막권을 읽었던 때는 어른이 되어서였다. 마지막권을 읽으며 몰아쳐서 1권부터 다시 정주행을 해봐도 참 좋았더랬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우연히 10권세트로 소장본으로 나왔을때 보자마자 당연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만화방은 없어지고 만화카페는 생기기 전의 공백기에 헌책으로라도 그때 그시절의 순정만화책들을 모으던 때였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지금 컬러링북으로 만난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은 역시나 또 반가웠다.

 

 

흑백으로만 보던 그림을 단 몇장만이라도 컬러로 보는 것도 좋았고, 작은 사이즈의 책으로 보던 그림을 얇은 책 한권으로라도 큰 사이즈로 보는 것도 좋았다. 컬러링북이니 색칠을 하는 재미를 느껴야하겠지만, 솔직히 아직은 그럴 수가 없다. 고스란히 모셔두고 보고또봐도 좋을 뿐이다. ㅎㅎ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했던 만화들은 지금의 독서취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SF 아니면 역사물을 좋아했던 것을 보면...

며칠만이라도 나만의 휴가를 갖게 된다면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순정만화들을 쌓아놓고 정주행하고 싶다. 만화책은 역시 쌓아놓고 보는 것이 묘미인지라 ㅎㅎㅎ

 

 

레 마누, 사와르다, 아스파샤 그리고 샤르휘나 네 자매가 펼여보이는 운명과 사랑의 이야기는 늘 가슴설레며 읽게 되곤 했었다. 그 설레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이 책이 너무나 반가웠다. 아무래도 조만간 모든 일을 제쳐두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 만화책 속으로 빠지게 될것 같다. 그러고 나면 소중한 이 컬러링북에 한칸한칸 색을 칠하며 지친 일상을 잊고 설레임에 몰입하는 순간들을 선물받게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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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왜? - 반일과 혐한의 평행선에서, 일본인 서울 특파원의 한일관계 리포트
사와다 가쓰미 지음, 정태섭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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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아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 사와다 기자의 치우침 없는 한일관계 진단과 한일 양 사회의 인식 차이 분석

 

 

한일관계는 참 어렵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라고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냥 멀고 먼 나라 일본이다. 정치적 이슈에 따라 반일감정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그럴때마다 혐한의 일본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갈등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쪽 이야기만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분야에 있어서 일본인이 저자인 책을 신뢰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한일관계에 대한 책은 일본인의 시각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치우침 없이 쓴다는 것이 사실 굉장히 어려운 건데... 이 책은 얼마나 객관적으로 썼을지 궁금했다.

일단, 저자의 이력은 한국에서의 시간이 꽤 길고 다양하게 있었으므로 기본 소양은 믿을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첫 장을 열었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은 일본인에게 한국의 현재를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점이다. 한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도는 더욱 높아 보였다. 일본인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일본인이 일아야 할 한국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자기가 아는 한국의 이미지에 근거해 혐한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70년대나 1980년대에 한국 주재원을 지냈거나 한국을 상대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한국을 안다고 믿는 사람조차 있다. 한국어를 할 줄 모르고 한국에 관한 지식을 업데이트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한국 이미지와 맞지 않는 최근의 한국에 대해 화를 낸다. 30년전, 40년전의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21세기 대한민국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한국 독자들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정말로 일본에서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말할 때에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p. 7)

집필할 때 상정한 독자는 혐한 시위 같은 헤이트스피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의 대일 자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자신이 혐한파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 불편한 심정은 갖고 있는 일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현재 일본 사회에서 다수일 것이다. (p. 11)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많아 보인다. 일본 내에 혐한 감정이 주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일본인들 대부분이 한국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시작부터 의아할 따름이었다. 자기들이 한짓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수 있지? 싶은 한국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태도다. 그런 일본 본토의 왜곡된 인식을 일본기자가 알려주는 내용들은 대체로 고개 끄덕이며 읽게 되면서도 가끔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또한 일본인의 눈으로 보는 한국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것이 '반일시위'라면 일본에 대한 분노의 표적이 되는 물리적인 대상이 꼭 필요할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그 무엇'앞에서 시위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것은 거기에 없었다. (p. 18)

이 책은 많은 일본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을 설명하고, 한일관계에 둘러싼 의문에 답하고자 한다. (p. 23)

소녀상 옆에서 해온 수요집회는 꽤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활동이다. 하지만 이제 그 소녀상 앞에 일본대사관은 없다. 철거되고 펜스가 쳐져 있을뿐 다른 건물에 입주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집회는 여전히 그 텅빈 공간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그 모습 자체가 일본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상징성' 에 대한 양 국의 사고방식은 이처럼 당연시 보아오던 활동들에서부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인식의 치이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주로 다루는 내용은 일본 시각에서 보면 상궤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반일', 정곡을 찌르는 점도 있지만 자료의 일방적인 해석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눈에 띈다. (p. 37)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결국 문재인 정권에 의해 구석으로 몰린 보수 세력, 그중에서도 현실정치에서 대항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약소 그룹의 반격이다. (p. 39) 일본에서의 경이적인 매출은 '한국인에 의한 반일 비판'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이 많음을 방증한다. (p. 40)

한일 양국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나름 충격적이었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 대해 저자가 알려주는 내용은 중립적으로 보이면서도 아쉬운 부분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책이 양 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 자체가 서로에 대한 무지가 현실에 드러난 셈이 아닐까.

적폐 청산은 일본과 관련된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적폐 청산의 움직임을 추동한 것은 한국에서 최초로 탄핵재판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시켰다는 고양감이었다. (p. 58) 전제가 되는 인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권력을 사물화(私物화)한 세력이 나라를 멸망시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케 했는데 그 세력은 식민지배에 협력하는 '친일파'가 되어서 이권을 탐식했고, 일본의 패전으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후에는 '반공'이라는 가면을 쓰고 독재세력이 되었다. 그러한 세력을 제대로 청산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다. (p. 59)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는 한국의 현대화과정은 신선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서술되는 구나 싶고... 저자는 이러한 한국의 사회변화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저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랑케식 역사서술이랄까. 양반사회가 없었고 민주화혁명이 없었던 일본의 사회적 인식은 한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인식에 있어서 일본인의 랑케식 이해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일본이 우격다짐으로 한국을 제압하려는 것이라는 것은 청와대나 정부부처들, 외교전문가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p. 81) 나도 '우격다짐' 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이 '우격다짐'론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험한 엇갈림이 있다. 나를 포함한 일본의 전문가들은 '총리 관저는 한국의 국력을 잘못 보고 있다. 한국이 약소국이었던 옛날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한 채, 간단하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며 걱정했다. 즉 한국측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에 따라잡힐까봐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대응해야 한다'는 감각과는 좀 다르다. (p. 82)

책에 자주 언급되는 내용인데 일본의 기성세대들은 한국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한국은 가난하고 못살때 자신들이 도와줘야만 했던 나라일 뿐이다. 그런 한국이 자신들과 감히 대등하게 굴려고 하는 것올 보면 화가 난다는 것이다.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일본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양쪽 다 일종의 자뻑이다.

실제로는 진보적인 일본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국회의원조차 '많은 지지자가 한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라고 하는 것이 일본 사회의 현실이다. '혐한을 주도하는 아베 정권만 없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관측은 한국측의 희망에 불과하다. (p. 87) 'NO아베'를 부르짖는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의 '한국 피로'라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아베를 비판하는 일본인들이 아베 정권의 모든 정책에 반대한다고 믿는다. (p. 88) 더욱이 골치아픈 것은 한국과 일본의 법에 대한 의식 차이가 충돌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법률이나 약속을 지키는 것' 이 중시되는데 한국에서는 '법률이나 약속이 옳은지 아닌지'를 중시한다. 옳지 않다면 '바로 잡아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p. 89)

'한국 피로'란 일본 관련 이슈마다 식민지배 문제를 제기하고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에 대해 일본인인 느끼는 피로감을 이르는 용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피로감을 쌓여서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데... 그들은 독일인들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그저 지켜야 하는 것일뿐인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나와 같은 궁금증 자체가 생각나지 않는 것일까.

일본인들이 정대협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왔음을 깨달았다. (p. 98)

일본내에서는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정대협의 활동들이 의외로 한국 국내에서는 이슈가 되지 않는 것을 여러번 보면서 느꼈다는 저자의 깨달음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우리가 지켜드려야 할 존재를 우리는 잘 지켜드리고 있는가...

1970년을 보면, 한국의 무역상대국으로서의 비중은 일본이 37%, 미국이 34.8%로 합치면 70%가 넘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1996년에는 30%가 되었고, 2004년에는 20%대, 2011년에는 마침내 10%대가 되었다. 2018년에 일본은 7.5%, 미국은 11.5%로 합쳐서 19%다. (p. 132)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경제성장을 알게 해주려고 설명한 수치이지만 한국인으로서 읽는 입장에서는 안심이 되는 수치였다. 다행이다....

일본 중장년 세대 중에는 3차 한류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p. 184) 그러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느끼는 것은 최근의 한국에 대한 '용서하기 어렵다' '건방지다' 라는 감정이다. 그 밑바닥에는 일본이 적어도 국교정상화 이후에는 한국에 대해 배려를 해왔고, 한국 경제 발전을 도왔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렇게 쌓아올린 한일관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건방지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p. 185)

생소하다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이 도와줬으니까 감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는 한국의 반일정서가 당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시각을 보면서 그들의 역사인식은 무엇인가 라는 의구심이 자꾸만 쌓여가지만 이 책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책이지 역사서가 아니기에 역사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은 언급되지 않는다.

남자는 정년퇴직 후 우연힌 혐한적인 블로그를 보게 되었다. 그 후 그 블로그를 운영하는 인물을 '보수우익의 거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신자'로서 블로그의 지시대로 징계청구 보내기를 계속했다. '나름대로의 정의감과 일본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고양감도 있었다.' 남성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많았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거래처 등이 65세를 넘어서 (일을 그만두었더니)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사회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소외감도 있었다. 그러나 (블로그에 따르는 행동을 함으로써) 아직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새로이 자기승인을 받은 듯한 느낌에 그만 선을 넘은 것 같다' 고 회고했다. (p. 190)

장년층의 사회활동이 어떻게 극우익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면서 지금의 우리사회와 너무나 똑같음에 놀랐다. 기성세대의 사회참여 방향성에 대한 문제는 인구문제와 노령화와 연결되어 있다. 양국의 과거문제를 떠나서 장년층과 노년층의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한 이런 활동은 계속되지 않을까...

성공이든 실패든 가까운 이웃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은 자기 이익이 된다.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이용할 수 있다는 한일 양국의 '공통이익'은 크다고 할 수 있다. (p. 217)

지리적 위치 때문에라도 일본은 영원히 이웃나라다. 요즘은 아파트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세상이기에 하물며 이웃나라라고 해서 뭔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꼬여있는 관계때문에 왜곡된 인식이 더욱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제대로 알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는 '올바름'으로 상대를 압도하기 위한 논리 구축을 의미하는 '논리 개발'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된다. 그런 사회 분위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습관이 없는 일본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숨이 막히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p. 228)

나름 한국생활을 오래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전문가라는 저자조차도 여전히 한국의 문화는 다 이해되지 않다고 한다. 하물며 일반 일본국민들은 어떻겠는가? 우리의 시각과 우리의 사고방식만 고수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시각과 사고방식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이렇게나 다르구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읽어봄직한 책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왜 그렇게까지 반일정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유지되는 한 한계는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 그들은 왜 독일처럼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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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연대기
기에르 굴릭센 지음, 정윤희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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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시작과 종말, 스러져가는 사랑에 관한 기록

오직 부부만이 살면서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농염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낸 노르웨이판 '부부의 세계'

 

 

'부부의 세계' 라는 드라마를 보지 못했으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륜에 관련된 드라마라고 알고 있었기에 이 소설의 홍보문구에서 대충 짐작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딱히 그런 종류의 플롯에 관심을 둔 적은 없었지만 노르웨이 작가의 소설이 어떨지 궁금했다. 스웨덴 작가의 소설을 몇편 읽은 적 있었는데 북유럽 소설의 분위기가 은근 우리정서와 잘 맞는다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라는 이 작품은 '부부의 세계'이긴 한데 뒤바뀐 입장에서 느껴지는 독특함이 신선했다.

존과 티미는 아들 형제를 키우면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부부생활을 하는 행복한 부부다.

함께 휴일을 보내고 생일을 축하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밤이면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고 아침이면 서로를 깨워주면서 그저 버티는 것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고 애썼다. 서로를 부드럽게 혹은 탐욕스럽게 만지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친밀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렇게 하면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끝없이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사실 그것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p. 53)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한 부부였었다. 과거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남편의 기억으로 서술되는 끝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부라는 관계가 끝나기까지 어떤 과정들이 있었는지 세밀하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마음일기처럼 읽히기도 하는 소설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저 부부 사이에 주고받는 농담의 대상,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남자를 더는 별것도 아닌 대상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지고 나서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p. 59)

나는 그녀에게 장갑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내는 그때 그냥 자기가 샀다고 말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괜히 숨겼다고 나중에 후회하듯이 말했다. (p. 61)

"당신 오늘 장갑맨이라 데이트할 거야? 아니면 나랑 재미있게 놀까?" 내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충격과 짜릿한 흥분을 느꼈고 나 역시도 똑같은 걸 느꼈다. 워낙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고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사람들이라서 어떤 것이든 공유할 수 잇었다. 아니, 공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p. 62)

모든 틀어진 관계를 돌이켜보면 다 그렇듯이 처음부터 문제가 됐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알게 됐고 집에서도 거리낌없이 대화속에 등장시킬 수 있었떤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워지고 그러다가 숨기고 싶어진다. 그땐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땐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런 단발적이고 공개적인 만남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사랑에 빠질 상대를 마주칠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유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나의 얼굴을 살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평소 내가 동경했던 외모나 태도, 자신감, 장난기가 느껴지는 사람 말이다. 드물지만 실제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이미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도, 그 상대 역시 옆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다시 새로운 관계로 옮겨가게 된다. 물론 그런 단발성 만남은 대부분 아무 소득을 올리지 못한 채로 잊히게 마련이다. 사랑할 대상은 어디서든 마주치게 마련이지만 실제 인연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p. 65)

누군가의 외도에 대해 그 아픔과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사실 이 부부의 시작은 처음부터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었던 상태에서 만났고 급작스럽게 빠져들었다. 어쩌면 시작이 이러했기에 누군가에겐 불안감이 누군가에겐 호기심어린 흥분이 시작부터 내재되어 있던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제야 지금까지 맺었던 관계들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랜 예행연습 끝에 그녀와의 특별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p. 72)

누군가에겐 사랑이 누군가에겐 불륜이 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멀고먼 나라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깨트리는 사랑은 순수하다고 볼수는 없지 않나. 비록 그 두사람에게는 이제야 만난 진정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젊은 부부가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굳이 알고 싶다면 그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이 엄마와 나는 너무 달랐고 또 너무 똑 닮아 있었다. 게다가 너무 가까운 사이인 동시에 충분히 가깝지 못했다. 나 자신과 상대, 서로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고 서로에게 지나치게 예민했다. (p. 79)

낯선 젊은 여자와 팔짱을 끼고 딸의 유모차를 밀고 있다가 아내에게 그 모습을 들킨 후 이혼하자는 남편이 하는 말치고는 뻔뻔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전부인도 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아직 할 얘기가 남았어. 하지만 그렇게 듣고 싶지 않다면 나도 이쯤에서 포기할게.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이 얘기는 해야겠어. 언젠가 당신도 나처럼 똑같이 버림받기를 기도할게. 나를 무참히 버리고 떠난 것처럼 당신도 똑같이 버림받기를 내 온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할 거야" (p. 80)

첫번째 결혼을 본인이 망가뜨리고 나서 선택한 두번째 결혼생활이 더없이 만족스러울수록 본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쿨한척 아내의 사회생활을 응원해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 부부의 생활은 시작 뿐만이 아니라 생활 자체도 일반적이지 않다. 역지사지의 관점이 여러번 왔다갔게 하게 되는 이런 점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이다.

아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아이들과 나는 항상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돌아오는 집이라는 공간은 예전과는 다르게, 우리 삶의 연장선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이들과 내가 목을 빼고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나였고 아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친 결벽증 때문에 온 집 안을 쓸고 닦고 말끔히 정리해 놓는 것도 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집에서 일하면서, 아내에 대한 나의 집착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혼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를 붙잡고 온종일 집에서 뭘했는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떠들어댔고, 전날 아내나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을 곱씹어보고는 했다. 그렇게 티미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내 인생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내가 했던 일이나 생각 하나까지 모두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마도 티미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p. 87)

뭔가 입장이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은가?

존은 프리랜서 작가로 집에서 일하다 보니 아이들케어와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활발하지 않은 성격에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티미는 성취욕이 강한 만큼 직장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고 본인의 관리도 철저해서 다양한 운동과 취미생활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만큼 인간관계에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그런 이 부부의 생활에 한 남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저 추문 속 주인공이었고, 한낱 핑크빛 연애 감정에 빠져서 서로의 가족과 아이, 그리고 연인이나 아내를 완전히 망가뜨린 별 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서서히 괜찮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 둘의 사랑이 인생에서 딱 한 번 찾아오는 유일한 사랑으로 보일 날이 올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서로에게 완벽한 반쪽,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럴 것이다. 그 남자나 그 여자가 나의 하나뿐인 반쪽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수십 년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우리는 지금과 또 다른 삶, 또 다른 상대가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풍족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 믿고 서로 함께하기 위해서 어렵게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동의했으며, 이전 상대들에게 했던 끔찍한 것을 서로에게는 절대 할 수 없었다. (p. 93)

시간은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독이 될때도 있는 법이다. 초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지하기 힘든 마음이던가? 특히나 사랑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뜨거움이 따듯해지고 따듯함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체온처럼 그냥 늘 있는 그런 온기가 되었을때 어느날 갑자기 불꽃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사람을 만날때마다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우리 두 사람도 끝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게 된다면 당신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누구랑?"

"나 말고 다른 남자겠지. 당신이 처음 만나는 누군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야?"

"아니, 절대로. 하지만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거야"

"말도 안 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대체 무슨 의미겠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맞는 거잖아.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당신이 더 행복하다고 해도, 나는 예전과 똑같이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당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의 그 결정을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당신을 지지할거야" (p. 107)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겠는가? 사랑이 무슨 의미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겠다고? 아내에게 불꽃튀는 남자가 생겼을때 아내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남자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자신이 했던 말도 아내가 보였던 반응도 곱씹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구석까지 밀어붙이고 아내의 마음을 최대한 상상해보면서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부부생활에 대해 이 남자가 느끼는 감정은 이랬다저랬다 혼란스럽다. 읽다보면 자꾸 까먹게 되는데, 이런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이는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하찮다'라는 단어를 기왕 사용했으니 계속 사용할 작정이었다. 너무나 하찮은 인간으로 완전히 뒷전에 놓인 느낌이 들었다고도 따져 물었다. 그 단어 하나에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온갖 문제들이 모두 집약되어 있었다. (p. 189)

사랑하다의 반대말은 미워하다가 아니라 하찮아지다가 아닐까. 부부 중 한 사람의 외도에 대해 그 문제 자체를 물고뜯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다른 한 사람이 하찮은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커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섬세한 감정변화와 농염한 부부생활을 보여주는 이 소설이 '결혼의 연대기' 라는 제목을 갖게 된 것은 '사랑' 의 문제를 '결혼'의 관점에서 보게 하려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은 끝났어도 결혼은 끝나지 않을수도 있기에 일단 결혼으로 묶인 두 사람의 연대기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쓰여지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장이 '열기를 잃는 것' 으로 끝난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와 어떤 미래를 선택했을지에 대한 생각은 읽는이마다 다를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소설에 대해 이런 설정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면 적어도 아직은?! 괜찮은 관계라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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