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과 삶 - 융의 성격 유형론으로 깊이를 더하는
김창윤 지음 / 북캠퍼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프로이트 의 책을 읽은 것이 있어 융의 책도 궁금해져 읽은 책인데, 결론적으로 이 책은 융의 이론을 알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융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치료를 하고 있는 정신의학 교수인 저자의 성격풀이 에세이랄까.

1부>성격-성격을 알면 사람이 보인다] 에서 융의 성격 유형론에 대해 개괄적으로 풀어내고

2부>삶-어떻게 살 것인가] 에서 저자가 만나본 환자들의 사례와 문학작품의 예를 통해 다양한 캐릭터의 성격을 분석해 본 후

3부>마음의 병] 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기초 이해를 돕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성격과 삶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는 책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격대로 살아간다고나 할까.

영어에서 성격을 뜻하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는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한다. 같은 듯인 '캐릭터character'는 조각상의 얼굴에 새겨진 특성과 같이 '새겨진 것, 조각, 각인'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카락테르charakter'를 어원으로 한다. 따라서 성격은 '페르소나', 즉 개인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캐릭터', 즉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격은 또한 고대 그리스어로 '에에토스'라고 하는데, 이는 '에토스ethos(풍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제논의 제자들은 에토스를 '개별적 행동을 낳는 삶의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즉, 한 개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느끼고 행동할 때 그 사고, 감정, 행동의 바탕에 깔린 개인의 내재한, 고유한 특성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격은 정서적, 인지적, 사회적, 종교적 특성 모두를 포함한다. 현실 적응 능력, 대인 관계 특성, 의사소통 방식, 자기 이미지, 평소 기분 및 감정 조절, 욕구(충동) 조절 및 좌절에 대한 반응, 지각 및 사고방식, 일에 대한 태도, 취미 및 여가활용, 가치관 및 종교적 태도 모두 성격에 포함된다. (p. 14)

성격의 의미를 읽고 나니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던 '성격' 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포괄적인 단어였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넓은 범주의 단어이다보니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들을 합쳐서 그냥 '성격 차이'가 헤어짐의 가장 명확한 표현이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따라서 성격을 제대로 알면 당연히 그 성격을 지닌 사람이 제대로 보이게 될 것이다.

성격을 좀더 학문적으로 명확히 구분해 내기 위해 5요인모델이니 생물학적모델이니 등등의 학자별 다양한 모델이 있나본데, 아무래도 프로이트 와 융의 관점에 좀더 관심이 갔다.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가 끊임없이 서로 갈등하고 타협하는 역동적 관계가 성격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p. 28) 프로이트는 성격 발달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인정 여부는 정통 프로이트학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p. 32) 프로이트의 단계적 발달 이론은 에릭슨의 생애 전반에 걸친 정신 사회 발달 이론으로 발전한다. 에릭슨은 성격 발달 단계별로 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며 성격이 발달한다고 보았다. (중략) 프로이트는 성격 형성 과정에서 5세 이전의 초기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p. 36) 성격 형성 과정에서 성적 본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회 문화적 요인과 대인 관계를 중시하는 신프로이트학파(카렌 호나이, 해리 스텍 설리반, 에리히 프롬)와 자아의 자율적이고 독립적 기능을 중시하는 자아 심리학(안나 프로이트, 하인즈 하트만, 에릭 에릭슨),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내재하여 훗날 대인 관계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 대상관계 이론(멜라니 클라인, 로널드 페어베언), 부모와 치료자의 공감적 이해를 강조하는 하인즈 코헛의 자기 심리학으로 발전한다. (p. 38)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자 무의식의 중요성을 널리 퍼트린 학자이다. 그의 이론이 지금 들어맞건 안 맞건을 떠나 그의 이론은 이후 학문들에서 다양한 갈래로 발전하며 그 중요성을 잃지 않고 있다. 초창기 프로이트와 함께 였으나 이후 다른 분야로 갈라선 아들러와 융과의 비교가 종종 언급되는 점이 이 책에서 가장 유익하게 다가온 부분들이이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내재한 과거 체험이 현재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면서 인과론적이고 결정론적 입장을 취한 반면, 아들러는 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와 목적이 행동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서 삶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목적론적 입장을 취했다. (p. 40) 아들러 이론은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에 비해 상식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며 실생활에 적용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 그러나 성격을 열등감과 우월성 추구의 관점에서 너무 단순하게 설명하고, 사회 적응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개인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 심리학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p. 42)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통해 아들러의 긍정심리학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아들러의 성격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학자들의 성격도 그 학자의 이론을 생각해내는데 밑바탕이 되었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새롭게 다가왔다. 유명학자의 이론은 왠지 범접할 수 없는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었는데 학자본인들의 약점이 이론을 통해 보완되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원인을 유년기 성적 욕구와 관련한 심리적 외상으로 본 것과 달리, 융은 의식 또는 무의식에 치우친 삶의 결과 또는 종교적 심성의 문제로 보았다. 무의식이 개인적 체험의 기억만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의식의 기능을 보상하는 작용을 한다고 보았으며, 집단 무의식과 원형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독창적인 분석 심리학을 개척해 나아갔다. 종교와 신화, 원시 문화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며 무의식이 종교와 신화적 체험을 매개한다고 보았다. 융은 자신의 삶을 무의식의 실현 과정이었다고 말하며 자기 원형을 찾아가는 개성화를 치료 목표로 삼았다. (p. 43)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는 개인적 체험을 담고 있는 개인 무의식 외에 인류의 기억을 보관한 집단의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집단 무의식은 특정 유형의 인식과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원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형과 집단 무의식은 융이 독창적으로 도입한 개념이며 융의 분석 심리학의 핵심을 이룬다. (p. 44)

융의 이론에 관심을 유도하는 대중서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도 이 책에서도 책을 쓴 저자들은 융의 이론이 대중에게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점을 일단 인정하고 시작한다. 두 책다 비록 개괄서이다 보니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여하튼 느낌적으로 융의 이론은 개인개인에 하나하나 맞춘 분석이다보니 이론으로 정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는 포괄성이 특징인 것 같다. 너무 폭이 넓은데 개별적으로 다 다르다보니 일반 대중이 수용하기에는 난해할 수밖에 없다. 한가지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그나마 접근해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아들러의 관점이 내향적이라면 프로이트의 관점은 외향적이라고 한다. 융은 둘다??;;;

성격이 곧 운명이란 말이 있다. 융은 "어떤 내적 상황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 상황은 반드시 밖에서 운명으로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즉, 자신이 알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성격이 곧 운명이 된다는 뜻이다.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다이몬(운명, 소명, 내면의 소리)도 평소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성격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성격은 그 사람 전체를 말하며, 성격을 알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 (p. 57)

저자는 성격과 이런저런 성격유형론에 대해 안내한 후 융의 성격유형론에 대해 설명하는데, 태도유형으로 외햑적과 내향적, 기능유형으로 감각, 직관, 사고, 감정 그리고 보조기능으로 기능유형을 교차 적용시켜서 총 16가지의 성격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외향적-감각-사고 또는 내향적-직관-감정 뭐 이런 식이랄까... 이 16가지 성격유형이 헤깔리면서 복잡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 융의 성격 유형 검사도구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이 MBTI 라는 것을 알고나니 아~! 싶었다.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운명적인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존재에 내재한 신적인 원리(다이몬, 로고스)에 따라 자연 또는 자신의 본성과 일치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신적인 것을 자기 원형으로 대체하면 융의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p. 253)

며칠전 에픽테토스 관련 책을 읽었는데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 ㅎㅎ

에픽테토스의 철학이 융의 정신분석과도 닿아 있었구나~

융의 분석 심리학적 치료는 딱히 정해진 이론이나 방식이 없다. 정해진 한 가지 이론에 꿰맞추기보다는 개개인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개별적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p. 309) 융은 개인 무의식에 원형으로 구성된 집단 무의식의 개념을 더하고, 인격을 구성하는 콤플렉스, 페르소나, 그리마, 아니마·아니무스의 개념과 역할을 소개했다. 또한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입장과 달리 무의식의 자율적이고 목적에 부합하는 보상 기능을 강조했다. (p. 371) 융의 분석 심리학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인격의 중심을 '자기'라 일컫고, 무의식에 내재한 부분은 인격을 의식하고 통합해서 자기 원형에 다가가는 개성화 과정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치료의 목적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분연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융의 치료는 미리 치료 계획을 세우거나 정해진 방식을 따르는 체계적 치료가 아니다. 융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환자보다 치료 방향을 더 잘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략) 융은 한 가지 이론에 얾매인 치료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치료 기법 보다는 치료자의 세계관과 진정성 있는 태도를 중시한다. (p. 372)

융의 이론으로 정신분석과 치료가 가능한 치료자는 정말 드물게 배출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이론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고도 가능해야 하고 종교적 포용력에 가까운 수용능력과 내밀한 개인적 진정성까지 갖추어야 하니... 여하튼 최근의 심리치료의 경향은 분명히 융의 방식으로 느껴지긴 한다. 환자 개개인의 성장발달과 환경과 성격을 두루 분석하면서 환자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스스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 융의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을까 싶기도 하고... 문득 생각해보니 융의 치료방법은 심리치료적이고 뇌과학적 치료는 다른 계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신분석학은 오래되지 않은 학문분야이니만큼 앞으로도 변화무쌍할 것 같다.

융의 치료방법이 딱히 정해진 이론이나 방식이 없고 개인화 되어 접근하는 것이다보니 그런 융의 이론을 토대로 하는 저자의 사례들 또한 한가지로 수렴되지 않은 다양성의 총체였다. 그렇다보니 다양한 성격분석사례들을 읽으면서도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배워 내게 적용시킬 수 있는건지 정리되지 않았다. 그냥 읽으며 아그렇구나 음그럴수있지 하며 남의 이야기로만 읽고 넘길뿐;;;

일반인을 대상으로 알기 쉽게 쓴 융에 대한 책을 찾기 힘들어 이 책을 썼다는 저자의 책이 이렇게 애매하게 뚝뚝 끊어지는 책이 아니라 1부와 3부 처럼 이론적인 내용들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한 융의 정신분석학적 책이거나 2부의 사례들을 좀더 명확히 분류하며 풀어낸 힐링지침서적 책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겨본다.

여하튼 결론이라면... 다 생긴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 생김이 성격이라면 성격일 것이고 자아라면 자아일 것이고 기타등등 다른 단어들로 표현되기도 하겠지지만, 자신의 생김생김을 잘 몰라서 혹은 착각해서 인생살이에 자꾸 오류가 발생하곤 하는 것이니 자신의 생김을 잘 파악하며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꼰대 신부 홍성남의 웃음처방전
홍성남 지음 / 아니무스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웃음으로 마음과 몸의 건강을 지키시길 기도합니다.

 

 

대학졸업과 군제대 후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늦깎이 신부가 된 저자는 불혹에 접어들었을 때 대학원에서 영성상담심리를 더 배워 각종 상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다보니 그동안 스님 책은 여러권 읽었어도 신부님 책은 처음이다. 기독교문화에 워낙 낯설음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보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고른 것인데... 읽다보니 음;;; 신부님께서 이러셔도 되나? ^^;;;;;

난 우리 본당 신자들이 밉다.

신부는 돈이 아니라 기도로 산다 했더니

축일 날 한 푼도 안 내놓는다. (p. 12)

진상 신부 넋두리1 中

본문의 첫 장 첫 단락이다. 홍성남 신부님식 유머인가보다;;; 아무리 유머라지만 정말 거침이 없는 신부님이라는 것은 읽어나갈 수록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주님, 주님!

전 누구보다 똑똑한 신부입니다.

근데 왜 제가 기도하면 외면하시고

매번 시벌 놈이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주님 출신 성분에 의구심이 생깁니다. (p. 17)

진상 신부의 기도 中

분명 진상신부를 꼬집는 유머이긴 한데... 웃어야 하나?;;; 웃어도 되나?;;; 나는 신자가 아닌데도 이런 당황스러움이;;;

난 순명하는 신부이다.

성경 교리서와 교회 공문 외에는 일체 보지 않는다.

강론도 교회 공문을 정확하게 읽는다.

보좌 놈은 품위 없이 지저분하고 잡다하게 독서한다.

근데 신자란 것들은 왜 나는 무식하고,

교양없는 보좌 놈은 박식하다 칭찬할까?

사람을 몰라보는 천박한 것들이다.

근데 왜 주님께서는 꿈마다 나타나서

공부 좀 해라 '시벌 놈아!'라며 욕질을 하시는 걸까?

신분이 천박해서 사람을 몰라보시는 듯하다.

하긴 목수의 아들이 나 같이 수준 높은 사람을 어찌 알까? (p. 25)

자부심 강한 신부 中

아무리 유머라지만 신자들은 계속 천박한 것들이라 윽박지르고 예수의 신성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수시로 하며 욕설까지 섞어 쓰는 이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난 대체 어떤 웃음처방전을 골라야 할런지;;;

혼밥이 싫어서 아는 자매들 불러서 밥 먹는데

돈 많고 예쁜 년들하고만 밥 처먹으로 다닌다고 수군거린다.

그래서 혼자 먹었더니

성질머리 더러워서 같이 밥 먹자는 사람도 없다고 수군댄다.

에라이.

난 스스로 괜찮은 신부라 여기는데

이상하게 신자들은 내가 이상하다고 다른 신부들에게 간다. (p. 48)

이상한 신부 中

뒤로 갈수록 나아(?!)지기는 한다;;; <1. 나는 진상 신부가 아닙니다> 에서 온갖 유형의 진상 신부 모습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그 거침없는 과격함에 이걸 정말 유머로 읽고 넘겨야 할지... 나는 솔직히 살짝 멘붕에 빠졌다. <2. 꼰대 유머> 에서는 진상 신부 보다는 차라리 나아보이는 꼰대 신부의 에피소드들을 빗대어 꼰대를 비꼰 것 같긴 한데 이또한 유머로 웃고 넘기기엔 너무 현실적이라... 어디서 웃어야 하나;;; <3. 나의 작은 전쟁> 이 그나마 저자의 정상적인(?!) 에세이 모음이라 그나마 좀 편안해진 마음으로 책을 마무리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사람들의 마음이 우울과 불안의 파도에 이리저리 치이며 지쳐 가고 있는 것을 보며 작은 웃음이라도 선물하고 싶어 졸저를 내놓습니다" 라는 서문을 가진 이 책에서 나는 한번도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신부님식 유머를 몰라서 그런건지 이 신부님이 좀 이상한 신부님이라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경건한 척 무게잡고 통하지도 않을 설교 늘어놓는 것보다 좋긴 했는데... 여전히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는건 어쩔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단호한 행복 - 삶의 주도권을 지키는 간결한 철학 연습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방진이 옮김 / 다른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2년쯤 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을 읽었었다. 그땐 로마사에 한창 빠져들려 했던 때라 오현제 중의 마지막 황제가 남긴 책이라는 것 때문에 관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이었다. 읽으면서 거대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이렇게까지 자아성찰을 하다니 대단하다 싶긴 했지만 솔직히 좀 재미가 없긴 했다. 그래서 본문이 끝나고 뒷부분에 있던 에픽테토스의 명언집을 음~ 명언이네~ 하며 그냥 흘려읽었더랬다. 그 뒤로 이런저런 로마사책들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접하니 이제야 [명상록]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지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을 읽고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접하고 조만간 세네카를 읽을 예정이니 후기스토아철학을 거꾸로 읽어가게 된 셈이다. 그 사이에 보에티우스와 키케로의 책도 읽은 것이 있으니... 뭐 뒤죽박죽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스토아철학의 일면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토아철학을 세운 제논의 책을 읽을 수 없는 바에야 에픽테토스의 책이 가장 스토아철학적 일것 같아서. 스토아철학을 읽고나면 로마제정초기의 철학자들의 사고와 기독교에의 금욕적 영향과 나중에 스피노자까지 이어지는 범신론의 경향을 미루어 짐작하는데 유용할 듯 하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 책은 에픽테토스의 철학서 원문번역서는 아니다.

저자는 철학과 교수이자 유전학 및 진화생물학의 박사이며 다양한 글을 기고하는 학자인데 철학을 현대인의 삶에 맞춰 실용적으로 다듬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 책도 그런 연장선에 있는 철학실용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에픽테토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의 진짜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는 그리스어로 '구매된 것'을 뜻한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후 35년 즈음에 히에라폴리스에서 태어났고, 네로 황제의 비서관을 지낸 부유한 자유 시민 에파프로디토스에게 팔렸다. 이후 로마로 온 에픽테토스는 당시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꼽히던 무소니우스 루프스의 제자가 되어 스토아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p. 12) 선배 스토아주의자들처럼 그도 곧잘 권력에 진실을 말하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93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를 로마에서 추방했다. 에픽테토스는 굴하지 않고 그리스 북서부에 있는 니코폴리스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에픽테토스의 학교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철학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훗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학교에 들러 유명한 스승인 에픽테토스에게 존경을 표했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롤모델인 소크라테스처럼 아무것도 글로 남기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도 그 제자 중 한 명이 니코메디아의 아리아노스였다. 아리아노스는 훗날 공무원, 장군, 역사가, 철학자를 지냈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아리아노스가 기록한 [담화문] 네권(원래 여덟 권인데 안타깝게도 절반은 유실되었다) 과 이를 요약한 [엥케이리디온]이라고 불리는 짧은 지침서 한 권이다. (p. 14)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대학원 철학 수업에서조차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던 에픽테토스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당연히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저자는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처음 접했을 때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로 유명한데 왜 에픽테토스는 그정도로 알려지지 않은건지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에픽테토스의 글과 가르침 특히 [엥케이리디온] 은 로마의 마지막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불리는 아우렐리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명상록]은 유명해도 [엥케이리디온]은 그렇지 못하다. 나도 [명상록]을 읽으면서야 에픽테토스에 대해 알게 됐었던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엥케이리디온]은 중세 기독교 수도사의 영성 수련 지침서로 활용됐고 르네상스시대와 계몽시대에도 인기를 누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나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에서도 표현될 만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현대의 심리 치료 기법 중 가장 성곡적이라고 인정받는 인지행동 치료요법의 태동에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 활용됐다고 하니 스토아철학은 은근히 2천년의 세월 내내 우리 곁에 있어온 셈이다. 그런 스토아주의의 실용성에 초점을 두고 [엥케이리디온]을 현대인의 삶에 맞게 수정하고 더불어 스토아주의 철학 전체를 보완하고자 시도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법' 이라는 글을 통해 이 책을 '실전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2부라고 하고 있는데,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원문 그대로가 아닌 현대어로 현대생활에 맞게 각색한 내용이자 이 책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아무리 철학자이자 학자라고 해도 고대 철학자의 가르침을 임의적으로 마음데로수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저자는 충분히 인정하며 3부에서 그 문제점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부록]으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 원전과 저자가 수정한 내용을 비교하여 표로 정리한 것을 덧붙이고 있어서 원전을 읽는 이들에게 자신의 해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 돋보였다.

견유학파는 키니코스학파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cynic'이라는 단어는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냉소주의자를 뜻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스토아주의자드를 가리키는 'stoic'라는 단어도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금욕주의자를 가리키지 않았다) 견유학파는 매우 소박한 삶을 추구하면서 도덕적 인격을 수련하는 데 헌신하는 학파였다. 제논은 크라테스를 비롯한 몇몇 철학자 밑에서 공부했고, 기원전 300년 경에는 직접 철학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부러 아테네의 대표 광장 아고라 근처에 있는 기둥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을 골랐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장소를 색칠한 포치(지붕이 있는 현관)를 뜻하는 '스토아 포이킬레'로 불렀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스토아주의'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p. 25) 제논의 새로운 철학은 우리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략) 인간의 본성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중략) 인간으로서 좋은 삶이란, 즉 고대 그리스인이 말한 에우다이모니아란, 이성을 통해 사회가 더 나은 곳이 되도록 기여하는 삶이다. 그래서 스토아주의자는 세계시민으로서 인류 전체를 하나의 큰 혈족으로 여겼다. (p. 26) 스토아주의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4대 기본 덕목을 도덕적 나침반으로 삼는 것이다. 4대 기본 덕목이란 실천적 지혜, 용기, 정의, 절제다. (p. 27)

책의 앞부분에서 에픽테토스와 스토아주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본문에 앞선 이런 안내는 고대그리스철학을 모르더라도 아니 철학 자체에 부담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작고 얇은 이 책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의 첫 구절에서 통제의 이분법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견, 동기, 욕구, 반감 등 우리 자신이 하는 것들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몸, 재산, 평판, 직장 등 우리 자신이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p. 32)

'나의 뜻대로 할수 있는 것' 과 '나의 뜻대로 할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 노력하는 태도 그것이 스토아주의의 핵심이었다. 이것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알게 되면 그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 스토아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에 가까워지게 된다. '선택'은 하되 '갈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2부를 읽으면 에피테토스의 현대화된 가르침을 담은 명언들이 쏟아진다.

온전히 개인의 몫인 것들에 집중하면 어떤 일이 닥쳐도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그 누구도 질시하지 않고, 우주의 섭리에 좌절하지 않고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을 들여 훈련하면 정말로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현명하게 배분하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p. 49)

이 훈련을 정말 제대로 한 사람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였던 것임을 [명상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을 먼저 읽고 [명상록]을 읽었더라면 감회가 달랐을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을 간절히 원합니다. 반대로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소홀히 합니다. 따라서 먼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우선순위를 바꿔야 합니다. (p. 53)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대한 자신의 판단의 결과를 두고 남 탓을 합니다. 어느 정도 현명해진 사람은 남 탓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탓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조차도 탓하지 않습니다. (p. 60)

여관에 들른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무엇도 진정 우리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빌린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p. 68)

개인의 자유는 개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만을, 우리가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것만을 바라면 됩니다. (p. 75)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주의 연결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과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연결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탓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나머지 것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p. 106)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둘지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는 초대받았다고 해서 응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 자리가 당신에게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 무리에 휩쓸려 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가 어울리는 무리는 좋을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의 영혼을 물들입니다. 그런데 굳이 나서서 자신의 영혼을 검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p. 114)

읽다보면 저절로 명상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불교분위기나 요가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존감을 세우는 근래의 심리서나 힐링서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아서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에픽테토스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 살았다. 그는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도 우리처럼 자신이 사닌 시대와 장소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었다. 그의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제국 시대를 사는 시민이어서 지지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긴 특수한 관념들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적·장소적 한계야말고 우리가 에픽테토스가 제시한 사례의 일부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p 185)

고전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원문 의미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라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적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해오던 나로서는 저자의 기본태도에 많은 공감이 갔다. 그래서 저자는 에픽테토스를 현대적으로 봤을때 범신론자 이자 유물론자 이자 평등·평화주의자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가 아리아노스에게 가르침을 전한 뒤 지금까지 2,000년이나 흘렀다. 이 책은 에픽테토스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그의 지혜를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하는 개정판이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히에라폴리스의 현자인 에픽테토스, 더 넓게는 스토아주의의 지혜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나의 원대한 꿈이다. (p. 195)

내가 스토아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돌이켜보니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내가 살고 있는 방식에서 구현되는 부분들이 상당히 있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 혹은 내 자존감이 지켜지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에픽테토스의 명언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낸 이 책은 최근의 심리서 나 힐링서들이 전해주는 것과 또다른 평안을 준다. 아마 고대부터 이어져 온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신뢰가 더 가서 그런것 같다. 이 오래된 지혜가 여전히 활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꿈을 나역시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방촌의 채식주의자 -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
전범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낮에는 서점 주인, 밤에는 로큰롤 연주, 그리고 비거니즘과 동물해방

전방위적 '독립문화인'으로 살고 있는

전범선의 21세기 양반 라이프스타일

 

 

이 책을 읽고서야 전범선 이라는 청년이 꽤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지 사실 나는 저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풀무질'!

내가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저자가 '풀무질'이라는 서점을 인수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성균관대 앞의 사회과학전문독립서점 풀무질, 이제 서울에 단 두곳 남았다는 대학가의 사회과학전문독립서점 중 한 곳인 풀무질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멋진 사람이 누군지 왜인지 어떻게인지 알고 싶었다.

1991년 강원도 춘천 출생, 민사고 졸업, 미국 다트머스대학교와 영국 옥스포드대학원 졸업 후 로스쿨 대신 밴드'양반들' 보컬, 출판사 '두루미' 발행인, 책방 '풀무질' 대표로 살고있는 동물해방주의자 이자 채식주의자인 저자의 이력은 대단하고 화려하면서 독특했다.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 같아 보였다. 이 책의 부제로 적혀 있는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 이 이력에서부터 이미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다. 낮에는 선비질, 밤에는 한량질. 유유자적. 이름하야 21세기 양반 라이프스타일이다. (p. 9)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양반답게 사는 건 녹록지 않다. 내가 지주나 건물주가 아니라 더 그렇다. 월세 내고 월급 줄 생각하면 양반처럼 거드름 피울 수가 없다. 책방도 장사고, 음악도 장사고, 글쓰기도 장사다. 양반 행세를 하지만 결국 나도 상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논리나 사회의 통념에 끌려다니기는 싫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싶다.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나의 줏대를 세우고 싶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하며 로큰롤을 연주한다. 전방위적 독립문화인으로 살고 있다. (p. 10)

진로 선택은 나에게 불행이냐, 불안이냐의 문제로 다가왔다. 안정된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불안을 택했다. 그게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 믿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이 책은 그 결정에 관한 성찰이자 변명이다. (p. 12)

머리말에서 밝히는 저자 본인에 대한 소회가 보기 좋았다. 젊은이의 솔직함과 단단함이 풍기는 그 에너지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비록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생생한 에너지를 접하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건지... 반가웠다.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며 소심해지는 개인주의적 젊은 꼰대가 아니라 부유하면서도 뚜렷한 주관을 갖고 진지하게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청년'의 자유로움이, 사회를 회피하지 않고 공존하려는 책임감이 멋있었다. 안정된 불행보다 행복한 불안을 선택한 그 용기가 이 시대 다른 청년들에게도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책의 머리말부터 벌써 마음속에 움트려 했다.

책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이 책을 쓰면서 저자가 새로 쓴 글이자 저자 본인에 대한 성장기로 볼 수 있고 2부와 3부는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했던 글의 모음 같은데 글의 순서가 1부에서부터 이어지는 저자의 인생순서에 맞춰져 있어서 책 전체적으로는 저자가 지금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짜임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부잘하는 모범생에서 전도유망한 유학생을 거쳐 자유와 공존의 맥을 잇는 N잡러가 됐달까.

내가 자아를 찾는 과정은 주로 역사 연구의 형태를 띠었다. 경계인은 원래 정체성이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의 관점보다는 역사의 입장, 우주의 입장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하는 연습을 했다. (p. 20) 나는 영국에 가서야 비로소 자아정체성이 어느 정도 정립되었다고 느꼈다. 인격이 완성되었다는 게 아니다. 인격도 자아도 평생 변모한다.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믿는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꽤 확신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p. 21)

강원도 춘천에서 전교1등을 놓치지 않다가 대치동 유학을 거쳐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후 미국에 유학을 가고 미국에서 로스쿨 지망생들이 사학과를 많이 택하듯이 저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게 된다. 물론 이 전공의 배경에는 로스쿨의 진학이라는 실용적 목표도 있었지만 민족사관고 시절에도 가장 잘하고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역사였다는 개인적 취향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 엘리트 코스에서 잘 배운 덕에 저자는 해방촌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잘 배웠다는 것의 의미가 제대로 체현된 사람이 저자라는 것에 대해 저자의 이력만 간단히 본 사람이라면 혹은 저자의 지금의 모습만 슬쩍 본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저자가 정말 제대로 잘 배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사고가 민족과 국가라는 고민을 내 가슴 깊이 심었다면, 다트머스는 정체성 정치와 소수자 해방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p. 55) 자아를 성찰하고 뿌리는 찾아가는 과정은 곧 내가 가진 특권을 인정하고 비판하는 일이었다. 특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수록 나는 자가당착과 자기부정의 늪에 빠졌다. (p. 57) 나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읽고 삶의 좌표를 얻었다. 일종의 종교적 안정감을 느꼈다. 무의미한 세상에서 나름의 의미를 설정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가장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원동력을 갖게 되었다. (p. 69) 논문을 제출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옥스퍼드에서 나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던 가치들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됐는지 통감했다. (p. 75) 내가 앞으로 100만명 앞에서 공연할 날이 또 올까. (중략) 물론 광화문 앞에 모인 사람들이 나를 보러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한 관중 앞에 서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p. 80, 81) 주어진 문제를 잘 풀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 칭찬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성취감이었다. 세상에 없었던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남들과 교류하면서, 잠재된 가능성이었던 나의 본질을 구현한다. '자아실현'을 이해했다. (p. 83)

공부로 우열을 다투던 학생들이 모인 민사고에서 한복을 입고 영어로 수업을 들으며 저자는 민족사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 민족사관의 모순이 해외 유학생활에서 깨지는 동안 다트머스 대학교의 플랫문화를 보며 백인남성우월주의 문화의 민낯을 경험하고 옥스포드 대학원에서 진정한 자아성찰을 경험한 이후 돌아온 한국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때 촛불혁명이 터졌다. 그 혁명은 저자 본인에게도 혁명적 선택을 유도했다. 혁명이란 그런것이다. 생각지도 않게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것.

"그러나 예술가의 위치는 공격받기 쉽다. 성공한 예술가만 그의 독창성 또는 자발성이 존경받기 때문이다. 예술을 판매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저 괴짜, '신경증 환자'로 남는다. 이 점에서 예술가는 역사를 통틀어 혁명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 성공한 혁명가는 정치가고, 실패한 자는 범죄자다" 결국 성공한 예술가, 혁명가로 사는 것이 자유로우면서도 존경받는 법이다. (p. 92)

저자가 인용한 에리히 프롬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문득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들이 떠오른다. 나의 중학교 시절을 사로잡았던 책들은 헤세와 헤밍웨이와 에리히 프롬이었다. 자아성찰의 욕구는 자유를 욕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때의 내게 자유란 꿈 같은 것이었다. 소설 '갈매기'를 수차례 읽으며 나도 그렇게 날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여하튼, 예술가와 혁명가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예술가로 살고 있는 저자가 내눈에는 혁명가로 비춰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았지만 야곱이 영어로 제이컵이고 야고보는 제임스란다. 더 이상 성당도 안 다녀서 야고보라는 이름에 대한 애착도 없어졌다. 내가 왜 수천 년 전에 죽은 중동의 어느 인간의 이름을 달고 다녀야 하나. (p. 99)

ㅍㅎㅎㅎ 시원스런 문장이다. 서양사를 읽을 때마다 그 사람들은 어찌나 이름을 자꾸 같은 걸 돌려쓰는 건지 당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가 다 같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문화라니 대체 왜 그런 걸까;;; 그렇게 대를 잇는 이름의 정체성은 생각해보면 굉장히 보수적인 면이 있다. 주체적이라기 보다는 연속성과 자신이 속한 집단성을 저절로 갖게 되니까. 여하튼, 어려서부터 엘리트 교육과정에서 영어로 교육받던 저자가 영어이름이 필요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 영어이름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으며 저자가 내린 결론이 어찌나 속시원하던지.

서울에 딱 두곳 남았다.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도 축소 이전하여 겨우 명맥을 지키고 있다. (p. 110) 풀무질도 '판올림'이 필요하다.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역할은 무엇일까. (p. 113) 과거에는 모든 압제의 주체이자 투쟁의 대상이 독재정권으로 환원되었다면, 지금은 가부장제부터 공장식 축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담론은 분산되었고, 정체성은 세분화되었다. (p. 114) 변화의 기저에는 여전히 책이 있다. 아무리 영상매체가 발달하고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교류가 활발해도, 가장 근본적인 연구와 심도 있는 대화는 책으로 이뤄진다. (p. 115)

내가 자주 가던 학교앞의 사회과학서점도 문을 닫은지 오래다. 후원사업도 있었고 이런저런 노력이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서울안에 사회과학서점은 두곳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중요하다. 다른 매체가 아무리 발달해도 최소 수십년간은 종이책의 깊이를 따라올 매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들도 중요하지만 사회문화의 깊이는 서점의 깊이와 닿아있다. 인문사회과학서점을 살리고 논쟁의 깊이를 더해갈때 새로운 미래를 탄탄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사회는 부유해졌지만 청년 세대는 부유하고 있다. 각자 조각배처럼 둥둥 떠서 목적없이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중략) 이것은 실존의 문제다. 누군가는 이로 인해 '탈조선'하고 누군가는 아예 세상을 등진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와 싸워온 윗세대에게 '실존'의 문제는 가소롭다. 전쟁과 가난과 독재를 겪은 이들에게 정체성과 다양성과 주체성의 문제는 사치다. 20세기 한국인의 지상과제는 부유해지는 것, 즉 근대화의 수면 위로 떠올라 가쁜 숨을 들이쉬는 것이었다. 덕분에 21세기 한국인은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다만 왜, 어디로 나아갈지 모를 뿐이다. (p. 129)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제각각 발버둥 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발길질이 모든 경계를 깨부수고 있다. 성 정체성, 민족 주체성, 종교 신앙 따위의 관념들이 허물어지고 있다. 별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이상한 일을 계속 꾸미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아주 흥미롭다. (p. 131)

생존의 문제에서 실존의 문제로 넘어오게 해준 세대에게 감사할 것은 감사해야 겠지만 그렇다고 후세대를 빚쟁이로 보는 관점은 곤란하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그 과정이 기쁨이고 행복이기도 하다. 성인이 된 자식에게 그동안의 키운값을 내라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성인이 된 자식은 자유롭게 독립시켜야 한다. 그래야 부모도 자식도 행복해진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붕 떠있는 것 같아보이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물위에 유유자적 떠있는 오리도 물아래에서는 열심히 발을 휘젓고 있는 것처럼.

내게 평화주의와 생태주의는 같은 말이다. 평화란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다. (중략) 적극적 평화란, 전쟁이 사라시고 정의가 구현된상태다. 이 땅의 모든 동물을 위한 생태주의적 고려가 있기 전까지 평화도 없다. (p. 141)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개인들이 모여 살면서 느슨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공동체, 나에게는 그게 해방촌이지만, 누구에게는 연남동이나 성수동일 수도 있고, 양양이나 제주일 수도 있다. 동네가 미래다. (p. 153) 비건 운동가는 번아웃할 위험이 크다. 명절에 묀 가족과의 식사에서도, 직장 회식자리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의 구스다운 재킷에서도 폭력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신념과 행동의 부조화를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절대적인 기준은 고수하되, 때에 따라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동물해방운동은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지 비건의 도덕적 숭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신념과 행동 간의 일관성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동물들이다. (p. 157)

저자는 역사를 심도있게 연구해 보았고 철학을 의미있게 고민해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기후변화를 염려하고 생태주의를 넘어 동물해방을 통한 평화와 공존을 주장하는 청년이자 로큰롤을 노래하는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즐거웠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고 무거울 수 있는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이 젊은이의 선택이 앞으로도 불안을 가뿐히 뛰어넘는 행복한 삶으로 구현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 본다.

"눈치 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많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고, 적당히 불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7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어 원전에 의한 새로운 번역!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책 중 하나"

 

 

나는 새로운 음식보다 먹던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장소보다 가던 곳을 좋아하고 새로운 옷보다 입던 옷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책만큼은 새 책이 좋다. 거기에 새번역이라면 금상첨화다. 고전에 대한 새번역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반갑다. 국내 유일의 프로이트 전집이라는 15권 중 이번에 새번역으로 나온 것은 단 2권, 그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이다.

프로이트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크게 정신분석, 무의식, 성적 해석 정도가 아닐까? 사실 이것들도 서로 섞여 있는 개념인것 같긴 한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하면서 가장 적나라하면서 가장 궁금하지만 실은 가장 모르는 척 하고 싶은 욕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최초의 시도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가 주 본문을 이루며 이 논문을 보충할 수 있는 짧은 논문들이 다수 묶여 있는 책이다. 그리고 왠지 편치않은 마음으로 첫 장을 열게 되는 것이 무색하게 굉장히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읽히는 책이라 딱히 거부감도 들지 않았고 나름 고개끄덕여가며 읽게 되는 부분도 많았던 책이었다. 거의 백여년 전의 사고방식이다 보니 그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 읽으면, 프로이트의 논리적 사고에 감탄하고 (그 시대로서는 흔치않은) 보편적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한 주제에 대한 책이긴 하나 프로이트의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보니 전체적 흐름이라던가 줄거리를 정리할 수는 없고 각 논문별로 요약하는 것도 너무 방대한 일이 될 것 같아서 인상적인 문장들을 중심으로 한 감상만 조금 남겨놓아 보려 한다.

이 책이 어서 빨리 시대에 뒤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한때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제법 쓸모가 있던 이 책의 새로운 점들을 비롯해 부족한 부분까지 더 훌륭한 연구들이 나와 대체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p. 11)

1909년 제2판 서문에 쓴 저자의 문장이 저자의 연구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비슷한 표현들이 책 속에 붙여진 주석에서 여러 차례 확인되는데 자신의 이론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열린 태도를 평생 유지하며 연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프로이트는 꽤 매력적인 인물이다. 물론, 자신의 이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다른 학자들의 반론에 대한 강력한 논쟁을 서슴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은 과학적 토론일뿐 상대 학자에 대한 비난 비하 거기에 연결될 자신의 편집 아집 이 아니라서 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초를 세운 정신분석학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고 반가워하는 애정어린 모습으로 보여질 따름이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논문의 일부 내용, 즉 인간의 모든 성취에서 성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나 성욕의 개념을 확대하려는 시도 같은 것이 오래전부터 정신분석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동기기 되었다는 사실이다. 급기야 사람들은 좀 더 선명한 구호로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정신분석의 <범섹슈얼리티>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정신분석이 <모든 것>을 성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질책까지 서슴지 않았다. (중략) <성>이라는 개념의 확대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어린아이와 이른바 성도착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는데, 좀 더 고상한 관점에서 정신분석을 경멸적으로 내려다 보는 사람은 정신분석의 확대된 성이 신성한 플라톤의 에로스와 얼마나 가까운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p. 16, 17 - 제4판 서문 中)

나도 오해를 했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성적으로만 분석한다고. 쥐뿔도 아는 것도 없이 그냥 흘려들은 이야기들로만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알거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제대로 알게 됐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기존의 선입견들을 상당부분 내려놓고 오해했던 부분들을 상당부분 다시 알게 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적 에너지를 탐구했고 어린이에게도 그런 에너지가 있으며 성인들 중 신경증 환자의 치료나 당시 성도착자들로 분류되던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모든 것을 성적으로 분석했다기보다는 성적으로 분석했을때 이해가능한 범주를 만들어나가던 학자였다.

건강한 사람치고 정상적인 성 목표 외에 성도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보편성을 감안하면 성도착이라는 말을 비난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성생활의 영역에서 우리의 심리적 범주 안에 있는 단순한 변형들을 병적인 증상과 명확하게 구분하려고 하면 그 즉시 현재로선 해결할 수 없는 특별한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그들을 확실한 예단을 갖고 정신병자나 다른 종류의 심각한 비정상으로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평소엔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조차 모든 본능 중에서도 가장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 성생활의 영역에서는 환자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반면에 삶의 다른 영역에서 명확하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성적으로도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곤 한다. (p. 48)

다만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무의식적 성도착의 경향은 어디서건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그게 특히 남성 히스테리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p. 54)

내가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라는 논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당시 '절대적 성도착자'로 분류된 동성애자에 대해 혐오나 무시와 차별이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이해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학자적 노력이었다. 동성애가 성도착증이 아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요즘에서야 그런 분석들이 일면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노력은 읽을수록 보편적 인간애로 다가와서 프로이트에 대한 시니컬한 선입견이 누그러지는 듯 했다. 그에 비하면 여성에 대한 입장은 아쉬운 부분이 좀 있었지만 백년전 사람인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서술한 내용으로 성도착증의 기원을 만족스럽게 설명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연구로 상기 과제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인식을 얻은 것 같기는 하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성 충동과 성적 대상 사이의 관계를 실제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로 상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례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의 경우 성 충동과 성 대상 사이에 하나의 땜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 충동에 이어 성 대상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믿는 정상인들의 획일적 사고에서는 간과할 위험이 큰 땜질이다. 따라서 우리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성 충동과 성 대상 사이의 단단한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풀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성 충동은 그 대상과 무관할 가능성이 크고 그 기원도 성 대상의 매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p. 33~34)

이 책을 읽어나감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논리가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럴 수 있구나 이건 좀 이상한데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소심한 판단을 하는 내게 '획일적 사고'를 벗어나 '단단한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풀'게 해주는 프로이트의 논리전개방식은 당시 획기적이었을 사고방식이자 용기있는 학자의 자신감으로 읽혀지곤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여전히 프로이트를 읽어야 할 이유가 조금씩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아이 때는 성 충동이 존재하지 않고 사춘기가 되어서야 일깨워진다는 것이 성 충동에 관한 세간의 통념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순진하면서도 파장이 큰 심각한 오류다. 현재 우리가 성생활의 근본적인 상황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주로 이 오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시기의 성적 현상을 철저히 연구하면 성 충동의 본질적인 특성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그것의 발달 과정이 폭로되고, 그 충동이 여러 원천으로 조립되어 있음이 밝혀질 것이다. (p. 61)

이 책에서의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은 어린아이 시기의 성충동에 대한 분석이다. 첫번째 에세이에서 성도착증(대표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분석이 시대착오적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두번째 에세이부터는 여전히 프로이트 연구에 주목해야 할 논리들이 등장한다. 앞서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나의 오해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어린아이들을 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시기의 행동들을 성충동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교육과도 연결될 수 밖에 없기에 여전히 그 의미가 있어 보였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6세에서 8세 이전의 시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런 기억 상실에 대해 우리는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잊어버린 바로 그 인상들이 우리의 정신생활에 아주 깊은 흔적을 남겼고 이후의 모든 발달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 다른 심리학 연구들을 그 근거로 그게 사실이라고 확신해도 좋다. (p. 63, 64)

이제 나는 모든 개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치 아득한 선사시대처럼 만들고, 성생활의 단서들을 은폐하는 소아기의 기억상실이, 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어린 시기의 성적 발달 과정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데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겨난 우리 기억 속의 공백을 관찰자 한 사람이 메워 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1896년에 이미 성생활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한 현상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어린아이 시절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이후에도 섹슈얼리티에서 어린아이 시기의 요소를 전면에 배치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p. 65)

항상 고독하게 수행되는 소아기의 성적 탐구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자기 길을 찾아 나서는 첫걸음이자, 이전에는 완벽한 신뢰를 부여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강력한 거리두기를 의미한다. (p. 87)

얼마전 읽은 SF소설이 생각난다. 그 소설에서 유아기의 부분기억상실이 외계인연관설로 펼쳐졌었는데 ㅎㅎ 뜬금없지만 유아기의 부분기억상실이란 현상이 다양한 문학적 상상력과 새로운 과학적 가정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여하튼, 프로이트의 이 '성 에세이'에서 강조한 것은 어린아이 시기의 행동들이 그때 받았던 경험들이 성인시기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시절이 중요하다는 것! 성교육에 있어서도 프로이트는 사춘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모호함과 무지로 감추어진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어떤 신경증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들로 그러한 강조를 힘을 보태고 있다.

사춘기가 되면 소아기의 성생활을 최종적이고 정상적인 형태로 만들어주는 변화들이 나타난다. 주로 자기 성애에 빠져 있던 성 충동은 이제 성 대상을 발견한다. 소아기 성 충동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서로 분리된 채 각각 유일한 성 목표로서 모종의 쾌락을 추구해 온 개별 충동과 성감대였다. (중략) 정상적인 성생활은 오직 성 대상과 성 목표로 향하는 두 흐름, 즉 애정적 흐름과 관능적 흐름의 정확한 결합을 통해서만 달성되는데, 이는 마치 양쪽에서 터널을 뚫는 것과 같다. (p. 99)

유기체 내에서 새로운 연결과 조합이 복잡한 매커니즘으로 자리 잡는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새 질서가 구축되지 않으면 병적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성생활의 모든 병적 장애는 발달 억제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p. 100)

성 충동을 다른 충동들과 구분하고, 그로써 리비도 개념을 성 충동의 영역으로만 국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앞서 논구한, 성 기능에 특별한 화학 작용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p. 111)

나는 양성의 영역을 알게 된 뒤로 이 양성적인 속성을 기준점으로 삼게 되었고, 또 양성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실제로 관찰되는 성적 표현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p. 112)

세번째 에세이 에서는 '사춘기의 변화들'을 다루고 있다. 소아기때의 성에너지가 성인시기에 간접적 영향력을 남긴다면 사춘기때의 성에너지는 성인시기에 직접적 영향력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소아기때보다는 신체적으로 두드러진 변화가 눈에 보이다 보니 관찰과 분석이 더 용이한 때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영역 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및 화학적 작용이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유추하는 프로이트의 개방성은, 성호르몬이 언제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다른 영역과의 관계성도 미루어 짐작한 그의 방대한 지적 호기심이 돋보이게 했다. 무엇보다 양성성에 대한 논리는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이었다.

인간성 발달의 싹이 두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 즉 발달 과정이 잠복기로 중단된다는 사실은 특별한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는 고도의 문명을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조건인 동시에 신경증적 경향의 조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영장류에서는 이와 유사한 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인간적 특성의 기원은 인간종의 선사시대에서 찾아야 할 듯 하다. (p. 126)

성생활의 장애에 관한 이 연구에서 나오는 결론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의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조건에 관한 이론을 세울 수 있을 만큼 성욕의 본질을 이루는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p. 136)

소설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열린결말' 로 끝나는 이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따라서 치유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당대의 교육관과 여성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앞뒤를 연결하는 논리가 탄탄하여 읽다보면 '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 하고 저절로 머리끄덕여 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아마도 자신이 세운 논리에 대한 열정적인 프로이트의 탐구력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신경증 환자들이 변성적 소질을 타고난 특별한 부류여서 그들의 어린 시절 삶에서 정상인의 모습을 유추해 낼 수는 없다고 반박하는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경증 환자도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다. 정상인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없으며, 또 그들의 어린 시절도 나중에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과 항상 쉽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신경증이 그 사람들만의 특유한 정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카를 구스타프 융의 지적처럼 우리 건강한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콤플렉스에서 유발된 질병이라는 사실은 우리 정신분석 연구가 일구어낸 가장 값진 성과 중 하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건강한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눈에 띄는 큰 피해 없이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아는 반면에 신경증 환자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p. 152~153)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순종 및 사고의 중단과 연결된 의견은 지배적 의식이 되는 반면에 아이들이 계속되는 탐구 노력으로 찾아냈지만 어른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새 증거들에 기반한 다른 의견은 억압받는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경증의 핵심 콤플렉스가 생겨난다. (p. 156)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신경증의 발병원인이나 치료나 분석이나 그런 중요한 내용들은 차치하고 내가 공감이 갔던 부분은 프로이트가 표현하는 그 대상들에 대한 존중이다. '정신병' 이른바 미쳤다고 표현되는 병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하되어 왔는가? 조현병으로 이름이 바뀌고 '마음의 감기'라며 정신과 상담이 그리 이상하지 않게 된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당시 무시되던 동성애자나 여성히스테리환자나 아이들의 이상행동에 대해 과학자적인 태도로 객관적으로 동등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이 비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한 태도가 발기부전이니 처녀성이니 항문성애니 남근선망이니 페티시즘이니 하는 등의 그 어떤 자극적인 연구내용들보다도 나는 더 인상깊게 남았다.

'세편의 에세이'에 이어지는 논문들은 비교적 짧은 것들로 주로 소아기의 성충동 분석이 대부분인데 뒤로 갈수록 해부학이라던가 여성의 성욕 같은 다양한 주제로 확장되어 가는 것에 비해 내용이 간략하여 아쉬웠다. 1900년 꿈의 해석으로 프로이트 만의 독창석 관점이 제시된 이후 1905년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로 유아기의 성적 본능에 관심을 두었다가 1912년 '토템과 터부'로 정신분석학을 인류학에 적용해보고 1923년 '자아와 이드'로 종전의 이론을 크게 수정한 이후 암투병 중에도 다양한 영역에 여전히 왕성한 호기심을 보여주었던 프로이트의 연구들은 그저 지나간 학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여전한 현재적 유의미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이후의 연구들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지금 굳이 읽을 필요성이 있을까 싶었었는데 이 한권을 읽고나니 '프로이트 전집'의 다른 책들에도 호기심이 생긴다. '라스트 세션' 이라는 연극에서 노학자로 등장한 프로이트도 참 멋있었는데, 책으로 접한 프로이트의 논리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