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티의 플랜B -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의 비밀
나희선(도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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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에 관해 너무 무지했던 터라 토익은 700점도 안 됐고 스펙이라곤 전무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불안했다. (p. 9) 유투브라는 세계를 만나 정상에 도달했다가 '멈춤'버튼을 누른 뒤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동안 배우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이 책을 통해 나누고자 한다. (중략) 존재감을 키우고 운명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가 작은 영감과 희망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p. 13) - 프롤로그 中 -

나는 티비도 잘 안보지만 유투브도 잘 안 본다. 그냥 나라는 사람은 시대에 맞지 않을지 몰라도 여전히 영상매체 보다는 인쇄매체가 편하다. 그래서 연예인도 잘 모르고 더군다나 유투버는 더더욱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티'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도티를 보러 행사장에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도티가 쓴 책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웠다. 출판사에서 모집한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읽을 기회를 얻었다.

'아, 돈이 있음으로써 어떤 이의 시간은 가치 있어지는구나' (p. 19)

도티가 연대법대 졸업생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수저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티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목표를 세웠을때 그 목표를 향해 굉장히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다. 대학생때 친구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때 친구들과 경제력의 차이를 절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낙담하거나 좌절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야 겠다' 고 목표를 세운다. 돈을 벌려고 보니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법을 알아야 겠구나 싶어 법학과로 전과를 했는데 사시가 없어지면서 취업을 고민하다가 PD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PD가 되기위한 자기소개서에 경험 한줄을 적어넣기 위해 개인방송을 시작한건데, 여기서 천직을 찾았다.

'VOD형 플랫폼에는 VOD형 콘텐츠가 있지 않을까?' (p. 35)

아프리카TV방송에서 BJ로 나름 성과를 거두었지만 '차별화'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유투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유투브형 콘텐츠를 제작하여 올렸는데 이게 대박이 났다. 도티의 채널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방구석에서 고군분투했다. 취미로 하는 것과 직업으로 하는 것은 마음가짐부터 노동량까지 천지차이가 난다. (p. 43) 유투브를 시작하고 1년 반 정도는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다. (p. 48) 그런데 만약 이 일이 재미있지 않았다면 아무리 다른 대안이 없어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거다. 다행히도 일이 아주 재미있었다. (중략) 내가 즐거운 일을 발견했기에 힘든 줄을 몰랐다.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못 자도 내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라서 꾸준히 노력할 수 있었고, 그래서 성공에 다가갈 수 있었다. (p. 49)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마도 '내가 즐거운 일을 하라' 가 아닐까 싶다. 마치 수능만점 받은 학생이 '교과서로 공부했어요' 하는 멘트처럼. 하지만 식상할 수 있는 진리가 솔직함으로 다가올땐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진다. 도티의 장점중에 하나는 그런 솔직함이다.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하는 말도 하지만 그 노력이 재미있었기에 할수있었다는 말도 도티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유투브가 경쟁 플랫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p. 53)

내가 어느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아이의 부모와 가정에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이왕이면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졌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자 사명감도 커졌다. (p. 56)

 

도티를 알게 되고 꾸준히 관심을 갖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도티의 '착함' 때문이었다. 도티는 유투브 크리에이터 1세대다. 지금은 너무나 일상적이 되버린 유투브 콘텐츠들이 불과 몇년 전만해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 그 초창기의 무질서 속에서 크리에이터 들의 거친 언어들이 귀에 들어올때마다 심기가 불편해지곤 했다. 하지만 도티는 욕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내용도 착했다. 도티의 유투브라면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아서 안심이 됐다. 그런 유투버는 도티 뿐이었다.

샌드박스 안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여 '실패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크리에이터를 비롯한 창작자들은 자유롭게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들이 마음껏 활동하며 성장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 그런 환경울 제공하고 싶다는 바람이 샌드박스라는 회사 이름을 선택한 이유였다. (p. 67)

도티, 잠뜰 등 샌드박스 캐릭터들을 몇 알고 있었다. 샌드박스 네트워크 라는 회사가 그냥 도티TV가 잘 되서 만들어진 회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맨땅에 헤딩하다시피 회사를 일궈낸 과정을 보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유투브라는 매체의 특성상 근시안적 콘텐츠들만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줄 알았더니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회사의 역할이 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아빠가 없다는 결핍, 몸이 왜소하다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썼던 듯하다. 약점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는 것이 내게는 아주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아빠가 없는 것도 키가 작은 것도 내가 선택한 조건은 아니지만, 존재감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p. 84) 누구나 살면서 상처를 받고 나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중요한 건 그 일을 마주하는 나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쁜 일과 맞닥뜨렸을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 소화하면 자산이 될 수 있다. 자신을 갉아먹는 독으로 쌓아둘지 자산으로 축적할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p. 89)

읽을 수록 기본 마인드가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역시 그 사람이 쓰는 언어는 그 사람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방송에서 하는 착한 언변은 결국 도티의 인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덕질을 해도 남들과 다르게 잘하고 싶었고, 그래서 인정받고 싶었다. 무엇을 하건 어디에 가건 인정받고 싶고 존재감을 키우고 싶었다. 학교에서든 팬카페에서든 게임에서든... 그래서 게임도 공부도 모두 열심히 했다. (p. 107) 미치는 경험을 해보라. 물론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챙기면서 지금 상황에서 허용되는 만큼 미쳐보는 거다. 그때 느끼는 행복은 삶을 살아가는 데 좋은 에너지가 된다고 믿는다. (p. 111)

세상에 저절로 되는 건 없다. 엄청난 과학적 발견도 굉장히 획기적인 발명도 다 앞서서 누군가의 경험들이 쌓인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도티가 김연아 와 이효리 의 광팬으로 덕질을 하며 영상을 모으고 편집하고 꾸미고 카페에 올리던 그 모든 시간들이 도티의 크리에이터 능력을 키워낸 셈이었다. 무엇보다 도티는 미쳤다고 할만큼 뭔가에 꽂히면 정말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다. 뭐가 되도 될놈이었달까. ㅎㅎ

내 구독자들 중에도 꿈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다. 부모님이나 사회가 꿈을 찾으라고 압박하는 분위기여서 그런지 다들 꿈이라는 보물섬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하다. 그렇지만 꿈을 정한다고 해서 꼭 그대로 되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꿈은 찾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서도 꿈을 발견하고 이루기위해 노력할 마음만 굳건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p. 116~117)

도티가 초등학교 다닐때 장래 희망을 써내라기에 '훌륭한 사람'이라고 써냈더니 선생님이 다시 써오라고 했단다. 왜 꿈이 꼭 직업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갔었다고... 선견지명이 있었던게 아닐까 ㅎㅎ 요즘은 꿈을 꼭 직업이라고 생각지 않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가 아닐까 그것이 바로 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시청자들은 진심을 느낀다. 한두 편이면 모르고 넘어갈까, 꾸준히 활동하면 크리에이터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는지 다 보인다. 팬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지, 콘텐츠를 만드는 게 즐거워서 하는지, 그냥 조회수 장사꾼에 불과한지 보는 사람들은 다 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p. 147)

동의한다. 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진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진심이 통하지 않는 관계는 늘 어려웠다. 가식적인 관계는 언젠가는 끝난다. 그리고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 도티의 성공뒤엔 끊임없는 노력과 장기적인 성찰과 쉬지않는 성실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구독자를 향한 진심어린 정성이 있었다.

바람직한 건 그냥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것보다 그냥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편하다. 몸을 사리는 게 아니라 내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자연스레 그렇게 될 것이다. (p. 171)

언제나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 진심어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도티이지만 일년365일 매일 그렇게 노력하는 삶은 즐기고 있는 일임에도 쉽지 않았나보다. 부지불식간에 공황장애가 왔고 어쩔수 없이 모든 활동을 멈추어야 했다. 마라톤 코스에도 잠시 속도를 늦추고 물마시는 테이블이 있는 것처럼 삶이란 멈추고 쉬어가야 할 때를 알아야 더 오래 뛸 수 있는가보다. 이또한 오래된 진리임에도 실천이 참 어려운 법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마음가짐을 좀더 편하게 먹게 됐고 여전히 즐기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유투브는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득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매체다.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장밋빛 미래만을 꿈꾸는 것도 위험하다. 어떤 방식이든 자신에게 행복을 1그램이라도 더하는 방향으로 유투브를 활용하기를 바란다. (p. 187)

유투브 크리에이터 1세대 로서의 도티 개인적 성공담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유투브 세계의 뒷 얘기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뭐하나가 잘됐다 하면 관련 책들이 우수수 쏟아지곤 하지만 속빈강정일 때가 많다. 유투브 관련한 전문적인 기술을 배울 것이 아니라면, 도티의 진심어린 경험담을 통해 유부버들의 세계에 대해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유투버 로서의 도티 못지 않게 인간 나희선의 매력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먼 길을 걸어 처음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성장이란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고 지키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중략) 세상을 향해 나라는 존재를 펼친 출발점이자 정체성인 크레이이터 도티는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탐험하고, 꾸준히 성장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을 것이다.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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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컬러 - 색을 본다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하여
데이비드 스콧 카스탄.스티븐 파딩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마바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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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와 영국의 대표적 화가가 만나 문학과 예술, 역사, 문화, 인류학, 철학, 정치학, 과학을 넘나들며 색의 세계를 탐구한다. 호메로스에서 피카소, 이란민주화운동, <오즈의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흥미로운 소재들로 색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단지 색에 대한 담론을 넘어 세상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생각지 않았던 새로운 흐름에 휩쓸리게 될 때가 있다. 역사를 읽다가 철학을 읽다가 과학을 읽게 되기도 하고 문학을 읽다가 심리를 읽다가 그림을 읽게 되기도 한다. 그림을 읽다... 그랬다. 나는 그림도 책으로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그림도 책으로 읽다보니 '색'에 대해서도 관심이 갔다. 최근 '색채의 심리'를 읽고나서 더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이 '색'에 대하여 색의 의미에 대하여 알려주기를 기대했다.

차례를 보면 총 10가지의 색이 등장한다. 빨주노초파남보 라는 무지개 7색과 검정,흰색,회색 이라는 무채색 3색. 이 10가지 색은 사실 일상에서 접하는 온갖 색에 대한 기본색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 대해 색에 대해 뭘 배워본적 없는 내가 그저 책만 봤던 내가 10가지 기본색들에 대해서만 알아도 어디인가? 하지만... 이 책은 '색'을 말하고 있으나 '색'에 대한 책은 아니었다. '색'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색'을 통해보는 세상이야기랄까.. 하지만 그 세상도 내게서 너무나 먼 고차원적 세상이야기였달까;;;

색은 우리 대화에서 끝나지 않는 주제이자 영감을 주는 소재였다. 10년 동안 대화를 이어가면서 우리 스스로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는 회화와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기반으로 언어와 색의 관계를 학제를 넘어 탐구하는 학자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색의 본질 자체에 골몰하며 생각과 이미지를 나누는 작가와 화가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러다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에 대한 사색도 같이하게 되었다. (p. 11) -서문 中-

<뉴턴의 아틀리에>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물리학자 김상욱 과 그래픽 디자이너 유지원 이 같은 주제에 대하여 다르게 풀어낸 , 과학자는 예술을 보고 예술가는 과학을 생각하는 신선한 책이었다. <온 컬러> 라는 이 책도 비슷하다. 작가와 화가가 만나 '색'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좀 많이 광범위적이고 좀 많이 사색적이라 쫓아가기 버겁곤 했다.

화학자는 색을 띤 물체의 미시물리적 속성에서 색을 찾으려 한다. 물리학자는 이 물체가 반사하는 전자기에너지의 특정 주파수에서 색을 찾는다. 생리학자는 이 에너지를 감지하는 눈의 광수용체에 색이 있다고 한다. 신경생물학자는 이렇게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서 처리한 것이 색이라고 한다. 물론 각자의 탐구분야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생각이 서로 엇갈리는 것을 보면 색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혹은 현상과 심리의 불분명한 경계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이 경계의 한쪽에는 화학자와 물리학자가, 다른 쪽에는 생리학자와 신경생물학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p. 16~17)

색이란 무엇인가? 라는 색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색의 존재론적' 질문이 머리속을 둥둥 떠다녔다. 색은 보는 것인가?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인가? 색이 있기는 한 것인가?;;;

뜻밖에 이야기는 호메로스로 이어진다. 투키디데스가 '바위투성이 히오스섬의 눈먼 시인'이라고 부른 호메로스는 실제로 색을 기피했다. 호메로스가 쓴 세계 최고의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는 색과 관련된 어휘가 극히 적게 나오고 몇 안 되는 것마저도 직관에 어긋나게 쓰였다. (p. 19)호메로스가 '와인처럼 짙은 바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중략) 이 단어를 호메로스는 수소(牛)를 묘사하는 데에도 썼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어떤 색을 가리킨다면 적갈색에 가까운 색일 듯싶다. (중략) 호메로스의 시대나 요즘이나 바다 색깔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p. 20) 그리스인의 색각이 발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으로 본 색을 나타내는 어휘가 달랐기 때문이다. (p. 21) 사실 언어마다 색을 표현하는 말의 체계가 다르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색을 어떻게 감지하는가와 반드시 관련있다고 할 수는 없다. (p. 22) 특이점은 그리스인의 색 지각 능력이 생리적으로 덜 발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추상적 색채 어휘를 거의 쓰지 않는 문화에 원인이 있다. 고대 그리스 바다나 하늘에 파란색이 엄청나게 많긴 해도 바다나 하늘은 시시때때로 색이 급변하니까. 하늘도 바다도 색이 균일하지도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파랗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호메로스나 그리스인들에게는 필요 없는 단어였다. (p. 24) 그리스인들은 색에 반응할 때 색상보다는 명도를 중요시했다. (중략) 그렇다면 색채를 나타내는 단어는 우리가 본래 아는 속성에 붙인 이름인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속성을 알게 되었다고도 할수 있는 것이다. (p. 25) 다시말해 스펙트럼을 부분으로 나누는 어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다. 사람의 생리는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하고, 사람의 문화는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떻게 묘사하고 이해하는지를 결정한다. 색의 감각은 물리적이고, 색의 인식은 문화적이다. (p. 27) 모든 색이 근본적으로 환영이다. 색에는 색이 없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실이다. 색에 있어서는 항상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p. 36)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이다. 눈으로 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훨씬 더 많은 것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색을 보는가, 무엇을 보거나 본다고 생각하는가, 인지하거나 상상한 색으로 무얼 하는가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어떻게 색을 만들고 색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주제별로 나뉘거나 시간 순서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관심이 가는 작은 주제를 내키는 대로 다룬다. (p. 37)

정말 뜻밖에도 색에 대한 담론의 책이 호메로스에서 시작할 줄은 몰랐다. 고전읽기를 좋아하고 더구나 최근 <오뒷세이아>를 읽고 있는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니 <일리아스>를 읽을때에도 색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구나... 색을 표현한다는 것이 눈으로 본 색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었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이었다. 색은 그저 환영이었나... 눈으로 보고 있지만 볼 수 없었던 그런 것이었나...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색' 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 놓은 이 부분들은 이제 겨우 '서론' 에 불과하고, 서론의 제목은 '색은 중요하다' 이다. 정말이지... 생각보다... 색은 훨씬 심도깊게 중요한 것 이었다!

1장 Red : 당신이 묻고 싶은 질문이 들린다. 색이 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 장미는 붉다

'빨갛다'라는 말은 발간 사물의 색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빨갛다'라는 말이 빨간 것을 가리킨다는 말은 명료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빨강을 시각적 특징으로 강력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정의가 없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곤란해지거나 '빨강'이 정녕 무엇인가 의아해하지는 않는다. 의아해할 만한 게 있다는 생각조차 안 한다. 그런데 있다. 그게 색의 본질이다. 일단 이런 의문으로 시작해보자. 장미는 붉은가 아니면 그저 붉게 보이는 것인가? (p. 44~45) 색은 사물의 외양의 특별한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면인가? 어쩔 수 없이 '색'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지낟. 그게 문제다. 색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늘 순환논법에 갇히는데 거기에서 대체 어떻게 빠져나올지 알 수가 없다. (p. 47)

빨강 이라는 색채가 주는 느낌처럼 강렬하게 1장은 색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한다. 뉴턴의 물리학적 발견에서 시작해서 '색은 실재가 아니'라는 철학적 탐구를 지나 인간만이 색에 이름을 붙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추상화 능력으로 이어진다. 결국 색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2장 Orange : 무엇이 오렌지색인가? 아, 오렌지. 그냥 오렌지! - 크리스티나 로제티 <무엇이 분홍인가?> ; 오렌지는 새로운 갈색

어떤 언어에서든 색을 가리키는 단어는 언어인류학에서 '기본색 용어'라고 부르는 몇 개의 범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이 단어들은 구체적으로 색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이름이다. 기본색 용어를 일반적으로 '색을 나타내는 단어의 최소 부분집합으로 어떤 색이든 그 가운데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라고 정의한다. (p. 69) 그러나 영어에서 '오렌지'는 기본색 단어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유사 하위 단어가 없다. 오렌지 범주에는 오렌지색밖에 없는데, 이 이름은 과일에서 왔다. (p. 71) 초서가 사용한 중세 영어보다 훨씬 이전 시기인 5~12세기에 쓰인 고대 영어엔 'geoluhread(노랑-빨강)'라는 단어가 있었다. 사람들은 오렌지색을 볼 수 있었지만 거의 1,000년 동안 영어로 그 색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단어를 합치는 것뿐이었다. (p. 72) '오렌지orange'라는 단어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narang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된 언어인 드라비다어의 naru(향긋하다는 뜻)라는 어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렌지와 함께 이 단어도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옮겨갔다. 거기에서 유럽 언어로 전해져서 헝가리어로는 narancs, 에스파냐어로는 naranja가 되었다. 이탈리아어에서는 원래 narancia고 프랑스에서는 narange였는데 두 언어에서 초성 'n'이 사라져 각각 arancia와 orange가 된다. (p. 76~77)

오렌지색은 있었지만 그 색을 표현하는 단어는 오렌지라는 과일이 유럽에 들어오고나서야 생겨났다. 언어학적으로 시작한 오렌지색에 대한 담론은 반 고흐의 '색채가'적 시도가 표현된 그림을 거쳐 클랭의 '모노크롬 회화'를 지나 바넷 뉴먼의 '더 서드' 라는 작품으로 마무리된다. 저자에게 있어 영어의 역사적 과정과 현대미술에서의 오렌지색은 그렇게 연결되지만 나는 그저 고흐의 그림에서 새로운 오렌지색을 발견한 것이 기뻤을 따름이다.

3장 Yellow : 흐린 노란색 조합은 내 피부색이 아니오, 내 형제들이 그렇다고 믿게 만든 것일 뿐. -프랜시스 나오히코 오카 <파란 크레용> ; 노란 위험

교육받은 서양 사람들도 동아시아인을 직접 접해본 적은 거의 없었으므로 비슷하게 생각했다. 13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거의 500년 동안, 대부분 사람들이 조지 워싱턴 처럼 아시아인은 '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60년 까지도 프랑스 외교관이 일본인에 대해 '우리만큼 희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물론 동아시아인은 실제로는 희지 않다. '유럽인 피부색'이라는 사람들이 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 곧 중국인이 '노랗다'고 불리게 되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인들은 노랗지도 않다. 권위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1판(1910~1911)이 출간될 무렵에는 중국의 방대한 인구 가운데에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나, 그래도 백과사전에는 중국인 가운데 '노란색이 가장 많다'라고 기록되었다. (p. 97)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시아인이 서양인 눈에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상대로 보일 때에는 희게 보인다. 16세기 중국과 일본에 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서양의 도덕적 가치와 경제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듯할 때에는 노래진다. 상상한 도덕적 특성이 상상한 피부색과 뒤섞인다. (중략) 색소가 아니라 편견 때문에 만들어진 노란색이었다. 하지만 일단 아시아인이 노란색이 되자 그 색은 당연시되었다. 부정확한 편견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인 듯 보이게 되었다. (p. 101)

동아시아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사실 이 표현은 한중일 딱 3나라를 지칭한다. 그리고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일본 딱 두 나라는 지칭했다. 유럽인들에게 동아시아인의 이미지는 이 두 나라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두 나라의 폭발적인 변화는 그들에게 위험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동아시아인은 '황인'이 되었다. 피부색으로 시작한 노란색 이야기는 '살색' 이라는 크레용을 거쳐 고대 그리스 의학에서의 4체액설을 지나 '제유' 라는 현대작품에 이른다. 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실 인류의 피부색은 그렇게 다양하지도 그렇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4장 Greens : 내 손을 작은 텃밭에 심는다 - 나는 푸르게 자랄 거야.-포루그 피로호지드 <또 다른 탄생> ; 알 수 없는 녹색

아무튼 녹색이 생태학적 관심을 뜻하는 색이 되었다. 그렇다고 녹색이 환경주의 말고 다른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p 124) 녹색은 역사적으로 무함마드와 관련 있는 색이다. 무함마드는 녹색터번과 녹색망토를 둘렀고, 그가 사망했을 때 수놓인 녹색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전해진다. 녹색은 10세기부터 12세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북아프리카 전체를 다스린 파티마왕조의 색이었고, 이어 이슬람교 시아파의 표지가 되었다. (p. 126) 정치가 색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빤하다. 색은 알아보기도 쉽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오고 여러 다양한 형태와 맥락에 적용될 수 있다. (p. 128) 정치에 쓰이는 색은 모두 각자 유래와 역사가 있으나, 역사는 너무나 다양한데 기본색은 몇 개 안되다보니 색과 정치의 연결이 종잡을 수 없기도 하고 서로 상충하거나 자꾸 바뀌기도 한다. (p. 134)

세계 어느 나라든 녹색당 이라고 하면 환경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정치집단을 의미한다. 나도 녹색은 환경적인 색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녹색은 아일랜드에서 이란에서 다른 의미의 정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색으로 구분되는 정치세력은 녹색 뿐만 아니라 빨강, 파랑, 하양 등 색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빨강은 왕가의 색이자 저항의 색이기도 했고 파랑도 녹색도 그러했다.색은 또다시 색이 지니고 있는 '의미'로 인해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있었다.

5장 Blues : 리노 다코타 네 마음에 친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네가 날 홀린 줄 알면서 나한테 전화도 안 하지 그래서 우울해 펜톤 292 -마그네틱 필즈 <리노 다코타> ; 우울한 파랑

감정에도 무지갯빛이 있지만, 스펙트럼의 여러 색 중에서도 파란색이 가장 압도적인 감정의 색이다. (p. 144) 14세기 말부터 파란색은 낙담과 절망의 색이 되었다. 아마 청색증이라는 병과 연관 지어 이런 정서를 유추하지 않았나 싶다. (p. 145) 파랑은 초월의 색이다. (중략) 비슈누의 파란 피부, 치유의 힘이 있다는 파란 부처, 시크교도들이 쓰는 파란 터번, 유대인들이 기도를 드릴 때 쓰는 숄의 파란 줄무늬, 이스탄불에 있는 아름다운 블루 모스크 등을 보아도 파란색과 초월성의 연결이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p. 154)

블루스 라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지나 또다시 클랭이라는 화가에게로 온다.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 라는 색이름이 있다는데, 오렌지 색 때도 그랬지만 캔버스를 온통 같은 물감으로 칠해놓은 작품에서 그렇게 많은 의미를 꺼낼 수 (혹은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 파랑은 내게 결코 우울하지도 초월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6장 Indigo : 인디고, 인디고잉, 인디곤. - 탐 로빈스 <지터버그 향수> ; 쪽빛 염색 / 죽음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뉴턴 이전에 '인디고'를 색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뉴턴은 프리즘이 여러 색으로 분산시킨 빛에 일곱 가지 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색'이라고 생각한 것에 '오렌지' 와 '인디고'를 더했다. (p. 169) 뉴턴이 인디고를 색으로 '본' 뒤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염료였다. (p. 170) 인디고 염색은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중략)즙을 짜낸다. 즙을 햇볕에 내놓고 증발시키면 꾸덕해지는데 이걸 조각조각으로 자른 것이 우리가 보는 형태다. 유럽인들이 흔히 본 '형태'는 고체 덩어리였다. 그래서 초기 영어사전 중 하나인 1616년에 나온 사전에 '인디고'가 '터키에서 들어온 돌로 파란색 물을 들이는 데 쓴다'라는 잘못된 정의가 실렸다. 이 오해는 그 뒤 백여년 동안 자주 되풀이된다. (p. 174) 18세기에는 이 염료에서 나온 색을 '인디고'라고 부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보통 '네이비(해군)블루'라고 불렀다. (p. 188)

빨주노초파남보 라는 무지개색에 들어가 있듯이 그동안 그저 '남색' 이라고 불렀던 색이 언제부터 '인디고' 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이 인디고 색은 만들어내기까지 엄청난 수고가 필요했고 과거에 그 엄청난 수고를 담당한 이들은 '노예' 였다. 플렌테이션 노예농업이라고 하면 목화나 사탕수수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인디고 농장이 훨씬 더 힘든 노동을 필요로 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디고 색을 가장 많이 썼던 유럽에서 이 색이 인디고 라고 불린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인디고 라는 식물이 염료가 되기까지 들어간 노예노동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나조차도 인디고 색 보다는 네이비 색이 더 편하게 불렀던 배경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7장 Violet : 그자들의 망막이 병들었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 보랏빛 박명

어느 언어에서든 바이올렛과 퍼플을 대체로 구분하는 것 같다. 색조로 구분한다기보다는 환한 정도로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바이올렛은 퍼플의 안쪽에 작은 불을 켜놓은 색이라고나 할까. (p. 192) 현대 미술은 그 빛을 내는 보라색으로 시작되었다. 1874년 파리에서. 4월 15일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날을 꼭 집어야 한다면 그날이 그럴듯한 날이다. 무언가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허위에 가깝다. (p. 193) 무엇보다도 미술계를 분개하게 만든 것은 사실 어떤 색이었다. 바로 보라색이다. (p. 194)

'purple' 이 자주색 이고 'violet'이 보라색 이라고 한 저자의 글을 보며 여지껏 내가 퍼플을 보라색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뭘까 어지러웠다. 여하튼 저자는 인상주의파에서의 보라색 혁명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상주의파의 화가들이 쓰는 보라색을 보며 위스망스는 '그자들의 망막이 병들었다'고 말했다 한다. 비평가들이 분개할 만큼 인상주의 작품에 보라색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뚜렷한 대상을 그렸던 그림에서 '대상과 화가 사이에' 있는 것을 그린 인상주의파 그림과의 차이점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 색이 바로 보라색이었다. 마네는 보라색을 '대기의 색' 이라고 했다. 모네의 팔레트에서도 보라색은 빛을 발하는 색이었다. 공기에, 빛에 색이 있는가? 없다. 아니 있어도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이것을 그렸다.

그때는 예술이 빛의 착시 현상에 푹 빠지기보다는 세상의 근본적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색은 안을 칠하는 데에만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선의 권위를 확인하는 이른바 '도의적 색'이라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상주의 회화에서처럼 색이 추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주요한 것이 되어버리면, 다시 말해 색이 회화의 주제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도의적이지도 진실하지도 않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색은 유혹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색이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것이고 비판자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이 되었다. 비판자들은 나무는 보라색이면 안 되고 세상은 색의 '얼룩' 보다는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p. 206) 그럼에도 미술사에서 현대예술의 시초로 꼽히는 사람은 언제나 세잔이다. (p. 211)

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당대 비평가들에게 뭇매를 맞았던 이유가 뭉개지듯 그리는 화법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었다. 뚜렷하지 않은 그야말로 인상을 그린 그림이라서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색' 에 집중해서 의미를 알고 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불구하고 인상주의 파의 '색' 보다 세잔의 구성이 더 인정받는 점에서 여전히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비주류인가 싶었다. 사실 일상에서 가장 장식적인 활용도가 높은 작품들은 대개 인상주의파 화가들의 작품인데 말이다.

8장 Black : 검정은 가장 기본적인 색이다 -오달롱 르동 ; 기본 검정

오드리 햅번이 1961년 영화 <티파티에서 아침을>의 첫 장면에서 입은 몸에 달라붙는 검정 새틴 슬리브리스 드레스보다 더 유명한 드레스는 세상에 없을 듯 싶다. 이 드레스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리틀 블랙 드레스 LBD 다. (p. 217) LBD는 순수한 가능성의 드레스다. 누구든 사회적 격차를 좁히고 오직 한순간이라도 없앨 수 있을 거라고 꿈꾸게 하는 드레스다. 검은 옷은 언제나 그런 역할을 해왔다. 계층을 지우는 일종의 사회적 연금술을 수행한다. (p. 222) 검은색은 겸허하기도 하고, 과도하기도 하다. 빈곤의 색이자 과시의 색, 경건함의 색이자 변태성의 색, 절제의 색이자 반항의 색이다. 화려한 색이면서 우울한 색이다. (p. 224) 인간의 시각기관은 에너지의 특정 파장을 감지하여 처리하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각 경험에 색 이름을 붙인다. 그걸 색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이 파장들 가운데 검은색에 해당하는 파장은 없다. (p. 228)

검정색 옷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검정옷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옷이다. 여러 의미에서. 옷을 통해 보는 검정색의 다양성은 그 다층적 양명성에도 불구하고 어렵지않게 다가왔다. 하지만 검정색은 사실 색이 아니다. 빛이 없는 일종의 암흑이다. 검정을 관념적 색으로 볼 경우 종교성으로 이어진다. 말레비치의 <검은 정사각형> 이라는 그림은 이콘이라는 성화를 거는 위치에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가지 색만 칠해놓은 그림을 도통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9장 White : 우리는 아직 이 흰색의 주술을 풀지 못했다. -허먼 멜빌 < 모비 딕> ; 하얀 거짓말

'흰색은 모든 색이 섞인 색이다' 이게 흰색에 관한 첫번째 거짓말이다. 뉴턴의 프리즘은 '흰빛'이 어느 정도 구분 가능한 색들의 연속체로 나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색을 프리즘으로 한데 모으면 다시 원래의 흰 빛이 된다. 그렇지만 보통 빛을 흰색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흰색이 모든 색을 섞은 것이라는 말이 빛에는 들어맞을지라도 물감을 섞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흰색은 무엇인가? 검은색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흰색이 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리학자들은 흰색도 검은색과 마찬가지로 색이 아니라고 말한다. (p. 243) 흰색은 무결한 순수의 색이며 완전한 면죄의 색이고 빈 페이지의 색이고 깨끗한 출발의 색이다. 그러나 이것은 흰색에 관한 두 번째 거짓말이다. 흰색은 유령의 색이기도 하다. 백골의 색이다. 구더기의 색이다. 흰색은 창백하게 질리게 만드는 색이다. 미래를 약속하거나 과거를 응시하는 대신 겁먹게 하고 메스껍게 하기도 한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멸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등 뒤에서 찌른다' 이게 세번째 거짓말일 것이다. 두번째 것의 다른 버전이기는 하지만, 흰색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둘 다 거짓말이다. 색에는 의미가 없다. (중략) 색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색이 어떤 의미라고 말해 색이 의미를 띠게 만든다. 시각기관하고는 큰 상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p. 245)

저자가 색과 빛을 혼용할 수록 저자의 이야기는 심도깊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혼란을 종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색의 의미에 대해 알고자 읽은 책에서 색은 의미가 없다고 답해주니 나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지만... 그러나 색에 대한 들쭉날쭉한 저자의 담론에는 분명 새로운 발견들이 있었다. 흰색에 대해서는 주로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이야기를 한다. 흰 대리석으로 칭송받는 고대작품들이 사실 채색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다시한번 캔버스를 온통 한가지색으로 칠한, 여기서는 흰색으로만 칠한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내 머릿속은 하얘져 갔다.

10장 Gray : 회색은 슬픈 세상 색이 추락해 들어가는 곳 -데릭 저먼 <채도> ; 회색지대

'사진은 사실상 포착된 경험이다' 라고 수전 손택이 말했다. 그런데 이 '사실상'이 문제다. '포작된 경험'이긴 한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진은 회색조로만 이루어진 포착된 경험이었다. 그런데 경험이 정말로 그 사진처럼 보이는가? 색은 어떻게 하고? 탁월한 예술 비평가 존 버거는 좀 더 정확하게 사진은 '본 것의 기록'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사진은 대상의 이미지라기보다 기록에 가깝다. 흑백사진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p. 267) 이런 사진을 보통 '흑백'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흑백은 아니다. 얼룩말이 흑백이고 사진은 아니다.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회색 톤들을 나타내기에는 '흑부터 백까지'가 더 적절한 말일 것 같다. 흑백사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회색이니까 '회색' 사진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p. 270)

이 책을 읽으며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었던 문장이었다. '얼룩말이 흑백이고 사진은 아니다' ㅍㅎㅎ 맞는 말이다.

회색에 대해서는 '흑부터 백까지' 의 색으로 표현된 '회색사진' 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진이 담아낸 의미 혹은 상징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컬러의 시대가 왔음에도 여전히 흑백사진들이 찍히고 도로시가 컬러의 세계를 여행하고도 회색의 집으로 돌아왔듯이 색에 대한 담론은 어쩌면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색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675년 왕립학회장 헨리 올든버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자기 눈이 '아주 날카롭게 색을 구분하지는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무지개에서 일곱 색을 본 적도 있지었지만 보통은 빨강, 노랑, 녹색, 파랑, 보라 다섯 가지만 보였다. 그런데 온음계는 일곱 음으로 이루어진다. 천지창조도 7일 동안에 이루어졌다. 무지개는 우주적 조화의 징표이니, 일곱 색이 있는 게 마땅했다. 그래서 뉴턴은 빨강과 노란색 사이에 주황색을 추가했고 (보았고?) 파랑과 보라 사이에 남색을 넣었다. (중략) 뉴턴은 자기가 본 색에 둘을 추가하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생겨난 것이다. 과학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산물에 가깝지만. (p. 31) 무지개에서 실제로 일곱 색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일곱 색을 본다. 색에 있어서든,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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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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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워터스의 대담한 대뷔작이자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의 출발점

 

 

세라 워터스 라는 작가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은 '티핑 더 벨벳' - '끌림' - '핑거스미스' 인데 이 중 '핑거스미스'가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이라고 한다. 영화 '아가씨' 에 대해서 과한 미장센이 어쩌구 세계적인 한국인 감독 어쩌구 를 다 떠나서 나는 그 영화를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봤었다. 내가 그동안 몰랐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 이런 영화가 이렇게 세상에 활짝 펼쳐질 수 있는 시대구나라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그 원작 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에 대해 궁금해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빅토리아 시대 라고 하면 여왕의 가족사진에서 암시되듯 강압적인 윤리관이 지배하던 시대라고 알고 있다. 희한것이 윤리를 강조하는 시대일수록 퇴폐는 더욱 성행한달까. 유리창을 깨끗이 닦으면 닦을수록 그 유리창을 닦은 수건은 더러워지듯 깨끗해진 유리창 바닥엔 항상 더러워진 수건이 떨어져있기 마련이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은 대부분 깨끗해진 유리창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수건에 주목하곤 하는 듯 하다.

18년 동안 나는 내 <굴적> 교감을 절대 의심치 않았으며, 아버지 부엌 너머의 직업을 찾으려 기웃거린 적이 없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고. (p. 11)

내게는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열정이라고 말해도 좋다. 바로 연예장이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연예장의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p. 12)

나 같은 사람은 어두운 객석에 무명으로 앉아 연예인을 지켜볼 운명이었다. 아니면 뭐 어쨌듯, 나는 그런식으로 생각했다. (p. 15)

 

낸시는 윗스터블 이라는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굴식당을 운영하는 대가족의 평범한 소녀였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고 수줌음도 많았지만 식당일을 끝내고 15분정도 기차를 타고 가서 극장쇼를 관람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좋아했고 그 노래들을 흥얼거리는 것을 즐기곤 했다. 일주일에 한번 가던 연예궁전에 매일 가게 된 계기가 발생했으니,

내가 본 가운데 가장 멋진 여인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p. 20)

흡사 저녁 시간을 낯선 이들 사이에서 보내도록 강요받은 것만 같았다. 가족은 공연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즐거워하며 보았고, 내가 그토록 지루함을 견디려 애썼던 내용을 가족이 즐긴다는 점이 내게는 충격적이고 바보스럽게 보였다. (p. 33~34)

 

낸시는 극장에서 키티 라는 남장여가수를 보았다. 그리고 눈을 뗄 수 없었다. 키티를 보기 위해 매일 궁전극장에 갔고 가족과 함께 간 날은 가족들과 이질감을 느끼며 키티 공연 외의 공연들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잠시 온몸이 마비된 듯 앉아 손에 든 꽃을 응시했다. (중략) 캐묻기 좋아하고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는 듯한 시선들이 내 쪽을 향해 있었고, 고개를 든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킥킥거리고 눈을 찡긋거리는 이들과 시선이 부딪쳤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특별석의 그늘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p. 39(

"그냥 네게 버틀러양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뿐이야" 토니가 간단히 말했다. "자, 나랑 같이 갈래 말래?" (p. 41)

 

키티는 공연 마지막 즈음에 여성 관객 중 한 명을 골라 장미 한송이를 주곤 했다. 그 장미를 받던날 낸시는 감격에 차 올랐다. 키티 버틀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낸시를 매일 특별석에 공짜로 앉혀주던 언니의 애인 토니는 낸시에게 키티를 만나보겠느냐고 묻는다.

"당신이 여기 오는 이유가 정말 저 때문인가요? 저는 지금까지 팬이 있어 본 적이 없어요!" (p. 43)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상해! 하지만 또 아주 정상이야.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p. 47)

"당신에게서 냄새가 나요. 마치..."

"마치 청어 같은 냄새죠!" 내가 씁쓸하게 말했다.

"청어라니, 천만에요. 그런게 아니라 뭐랄까, 마치 인어 같아요..." (p. 48)

키티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이제 무대에 선 키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키티의 분장실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가게 된 낸시는 갈수록 점점 더 커져가는 마음에 어쩔줄 몰라한다.

나는 늘 같은 감정을 느꼈다. 이내 기쁨과 가슴 아픈 사랑으로 바뀌는 실망과 후회의 번민이었다. 만지고 껴안고 애무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 욕망이 너무나 강했기에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거나 나도 모르게 달려가 꼭 안을 까 두려워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p. 52)

키티 버틀러가 나타난 뒤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 듯했다. 키티가 오기 전 세상은 평범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키티가 음악을 울리고 빛을 발하는 야릇하고 흥분되는 공간으로 가득했다. (p. 54)

키티는 내게 온 세상보다 더 귀했다. 키티가 우리 집에 와서 내 가족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면서 동시에 무시무시하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키티를 사랑했기에 키티가 우리 집에 오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내가 키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었다. (p. 61~62)

 

키티와 낸시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그 과정에서 풀어지는 낸시의 심리는 딱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 그것이었다. 키티에게도 낸시의 존재는 각별했다. 그렇기에 다음 공연장소로 떠나야 할 때 낸시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아버지는 결론 내리길,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며 딸이 평생 자기 옆에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p. 82)

다행스럽게도 낸시의 가족은 따듯하고 부모님은 바람직한 교육관을 가진 분들이었다. 갑작스럽게 떠나기로 결심한 낸시를 가족들은 이해해준다.

나는 키티와 내가 완전히 같은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대상은 달랐다. 훗날, 나는 이를 기억했어야 했다. (p. 99)

나는 키티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대로 키티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아니면 아예 키티를 사랑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끔찍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p. 107)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제멋대로인 런던의 방식과 관례를 배우는 듯했다. 마침내 키티에 대해 편해진 것처럼 런던 역시 편해졌고, 그러면서 나는 끝없이 매혹되고 반해 갔다. (p. 117)

 

비록 2류이긴 했지만 변두리 도시들의 극장에 서던 키티가 런던의 극장들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의상담당자로 키티 옆에 함께 있게 된 낸시에게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도. 하지만 대부분의 행운이 그러하듯이 그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몰랐죠?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요? 당신과 친구가 되는 게 더 쉬워 보였어요"

"하지만 키티, 그게 바로 제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오, 정말 어려웠어요! 하지만 만약 제가 당신을 연인처럼 생각하는 걸 당신이 안다면... 저는 그런 일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당신은요?" (p. 144)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아무것도 몰랐다. 그 당시 나는 키티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p. 158)

 

런던은 연예극장의 도시였고 향락과 쾌락의 도시였다. 화려한 런던에 매혹되었던 키티와 낸시는 차츰차츰 그 이면의 세계들도 알아간다. 그리고 자신들의 매력과 능력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자신들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해, 나는 천직을 찾았다. (p. 165)

1889년 런던의 연예장에는 우리처럼 공연하는 이들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어쩌면 역시 월터가 예언했던 대로 여자 <두명>이 신사복을 입은 모습이 여자 한 명이 바지에 실크해트에 각반 차림을 한 것보다 더 멋지고 흥분되고 형언할 수 없이 더욱 <음란>해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아주 멋지게 어울렸다. (p. 168)

나는 그냥 걷거나 키티 곁에서 가볍게 스텝을 밟을 뿐이었다. 나는 키티의 장식이자 메아리였다. 나는 키티가 밝게 빛나며 무대를 가로질러 던지는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림자로서 나는 키티에게 그전까지 없었던 깊고 선명한 가장자리가 되어 주었다. (p. 170)

 

낸시는 키티와 함께 무대에 오르게 된다. 장식이던 메아리던 그림자던 가장자리던 낸시는 마냥 좋았다. 그리고 이 소설은 낸시가 그 가장자리에서 중앙으로 그림자에서 주인으로 메아리에서 목소리로 중심에 서는 성장기이기도 하다.

키티 옆에 서고 도시의 거리를 키티와 함께 걸을 때면, 나는 수갑과 족쇄를 차고 사슬에 묶이고 눈가리개를 하고 재갈이 물린 느낌이 들었다. 키티는 내게 사랑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키티는 세상은 내가 키티의 친구 이상이 되는 일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p. 170~171)

"낸! 그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요! 그 사람들은 우리와 완전히 달라요. 그 사람들은 <톰> 이라고요" (p. 175)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난 이후가 낸시에게는 오히려 더 힘들었다. 키티는 너무나 조심스러워했고 낸시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키티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키티는 점점 더 호기심을 키워갔다.

이런 부끄러운 말을 가족에게 하느니 차라리 즉는 게 나아. 넌 절대로 그 사실에 대해 가족에게 말하면 안 돼. 처음 우리를 떠나며 가족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으로도 모자라 가족의 마음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아프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부탁하건대, 더는 부끄러운 비밀로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아 줬으면 해. 대신 너 자신과 네가 걷고 있는 길을 돌아보고 정말로 그게 옳은지 네 자신에게 물어봐. (p. 179~180)

낸시가 세상에가 가장 믿고 따르고 좋아하던 친언니 앨리스에게 자신의 본심을 전달했을 때 앨리스가 보낸 답장은 낸시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공연은 점점 늘어갔고 상처와 바쁨은 가족에게서 낸시를 점점 더 멀어지게 했다. 그럴수록 낸시가 키티에게 품은 열정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하지만,

"나는 그래. 그리고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이상 나는 비웃음당하는 걸, 미움받는 걸, 조롱받는 걸 참을 수 없어. 또다시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톰!"

"그래!"

"하지만 우리는 조심할 수 있어"

"절대로 충분히 조심할 수 없어! 너는 너무, 낸 너는 너무나 남자 같아" (p. 226)

 

키티는 낸시를 사랑했지만 매니저 월터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낸시에게 말하기전에 낸시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둘의 모습을 보게된다. 낸시는 충동적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1부가 끝난다.

이곳에 처음 온 뒤로 세상을 보는 내 시각이 얼마나 크게 달라졌던가! 나는 런던의 삶이 내가 생각해 왔던 것보다 더욱 낯설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나 평범한 눈에는 그 모든 다양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배웠다. 도시의 모든 부분이 매끈하고 우아하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찰하고 심하게 스치고 부딪치고 밀쳐 대고 겹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일부는 무서워 자신을 숨기고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제 전혀 뜻하지 않게 나는 그런 비밀스러운 부분의 눈에 띄었고, 그 일원으로 선포된 것이다. (p. 261)

낸시는 어둠에 숨어 자신이 망가지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한참을 보내고 나서야 새로운 자신의 삶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한다. 2부가 시작된다.

이 소설은 총 3부로 되어있고 1부는 낸시의 새로운 삶에 대한 도입부처럼 느껴졌다. 본격적인 파란만장한 삶은 2부부터 시작될 터였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몰았었다. 536p의 주석8에 가서야 '은어'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때 원어 그대로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느꼈을 충격이 나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아가씨' 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 그런 것이었을까?

<무슨 내용인가요?> 내가 소설을 썼다는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때때로 이렇게 묻곤 했다. 그리고 나는 매번 대답을 하기 위해 마음을, 약간은, 다잡아야 했다. 다소 음란한 제목을 설명하기가 어색했다. 또한 플롯을 밝히기 시작한 순간 내 정체성을 밝히게 된다는 사실도 그랬다. 그리고 플롯 자체도 그랬다. 왜냐하면, 오 맙소사, 엄청나게 야하고 부적절해 보이는 제목도 그렇거니와, 그 무엇보다도, 내용이 너무나 한정된 독자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굴 파는 소녀가 남장 여가수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 여가수와 같이 자고 또 함께 연예장 무대에 서게 되고, 그러다가 잔인하게 버려진 뒤, 한동안 남장을 하고 피커딜리에서 매춘(남창)을 하다가, 돈 많고 나이 든 여자의 섹스 노리개가 되었다가, 마침내 이스트엔드의 사회주의자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구원을 찾는 이야기라니 말이다. 나는 레즈비언들이 이 책을 좋아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입소문을 통해 '티핑 더 벨벳'에 열광하는 게이 팬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이성애자 독자들 사이에 이 소설이 성공했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랐다. (p. 613)

'티핑 더 벨벳'이 20년간 겪은 대우의 변화는 영국의 레즈비언과 게이들이 삶에서 겪은 거대한 변화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제 그들은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결혼, 양육, 취직의 권리를 누리고, 주류 문화를 즐긴다. 1998년의 나는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p. 614)

- 작가의 말 '출간 20주년에 부쳐' 中 -

 

이번 책은 10년만의 개역판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 못지 않게 번역가가 자신의 번역을 수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까. 10년 전 이 작품의 한국어판 제목은 '벨벳 애무하기' 였다고 한다. 역자는 10년전 자신의 번역에 대해 후기에서 '반성?!'하고 있었다. 절판되었던 작품을 다시 손보고 제목도 원제 그대로 해서 나올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작가는 20년 간의 변화를 느꼈다지만 우리나라에선) 지난 10년동안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최근 퀴어문학은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분야가 되었다.

'티핑 더 벨벳'은 작가의 첫 작품이니만큼 설정에서의 우연과 캐릭터들의 일관성이 서툴어보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서툼을 잊게 하는 강렬한 전개와 솔직한 심리묘사가 읽을수록 빠져들게 하는 몰입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소설에 영감을 받은 영국 대중문화의 다양한 흐름들 덕에 작가는 큰 힘을 얻은 것 같아 보인다. 그러한 흐름이 우리나라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또한 의미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최근 읽었던 프로이트 책으로 인해 나는 이 작품에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성의 '다양성'에 대해 우리 사회도 좀더 열리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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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고대~근대 편 - 마라톤전투에서 마피아의 전성시대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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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전투에서 마피아의 전성시대까지

굴욕의 역사를 유머스러운 필치로 집대성한 흑역사의 바이블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때로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필요로 할때가 있다. 역사에 '가정'은 불필요하다지만 '만약에' 라는 가정을 해보는 과정은 늘 흥미롭다. 그렇기에 역사의 교훈은 원인과 결과분석을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만약에 라는 가정을 통한 상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흑역사'에 대해 주목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과정이다.

인류 역사 전반에 일관된 현상이 하나 있다면,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인간들이 역사를 만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p. 4) 96개의 글로 이뤄진 이 책은 인류의 흑역사를 되짚어 본다. (중략) 101가지 흑역사는 각각의 상황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요술을 부렸다. (중략) 그런 흑역사가 없었더라면 오늘늘 우리 삶이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의 모든 여행이 끝날 즈음이면 세상을 변화시킨 흑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p. 5)

96편의 글에서 101가지 흑역사를 풀어내는 원래의 책이 한글판으로 나오면서 2권으로 분리되어 나온 듯 하다. 고대~근대편 과 현대편이다. 하지만 고대~근대편도 대부분 근대편이라고 할 수 있어서 이 책의 흑역사들은 대부분 가까운 역사의 장면들을 주로 들춰내고 있었다. 내가 읽은 '고대~근대편' 에서는 50개의 흑역사에 대한 50번의 '만약에' 가 등장한다.

아테네 사절단이 자신들이 무엇에 동의하는지 정확히 따져보았더라면?(페르시아가 요구한 물과 흙을 바치라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더라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가 다른 선택을 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델로스 동맹이 승리했더라면?

알렉산드로스대왕의 공격에서 다리우스 대왕이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기전에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했더라면?

카이사르를 종신독재관으로 임명하지 말던지 혹은 암살하지 않았더라면?

바루스가 아르미니우스를 깊이 신임하지 않아 토이토부르크숲에서의 패전이 없었더라면?

율리아누스황제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로마의 관리들이 고트족과의 약속을 지켜 삶의 터전을 지원해주고 세금을 쥐어짜지 않았다면?

해럴드왕이 잉글랜드의 모든 병력이 집결할 때까지 기다려서 노르만족의 침범을 물리쳤더라면?

로마누스 황제가 튀르크 군대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리처드왕이 신성로마제국에 포로로 잡히지 않고 잉글랜드로 무사히 돌아왔다면?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할 수 있었다면?

콜럼버스가 자신의 경로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었다면?

스페인함대가 왔을때 아즈텍의 몬테수마2세가 좀더 빨리 결정을 내렸다면?

교황 클레멘스가 헨리의 이혼을 용인해주었다면?

히데요시가 조선정복이 아닌 일본내치에 매진했더라면?

스웨덴의 칼12세가 발트해 정복욕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조지3세가 미국식민지의 국민들 감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조지워싱턴이 프랑스사절단을 알아보고 공격하지 않았었다면?

1781년 영국의 두 해군 장교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차 변경을 하지 않았었다면?

조지워싱턴이 과잉진료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미셀 네 장군이 전세 판단을 제대로 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전쟁에서 승리했다면?

미국 남북전쟁 전에 남부 연합이 10년만 빨리 연방을 탈퇴했었다면?

영국의 무기회사 엔필드가 인도에서 사용할 총알에 동물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미국 남부 연합이 노예제와 목화를 평화롭게 이혼시키는 방법을 찾았더라면?

북군의 매클렐런 장군이 혹은 미드 장군이 남군의 보비리 장군 추격을 서둘러 궤멸시켰다면?

남부 연합이 흑인 병사를 받아들였더라면?

링컨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미국에게 알레스카를 팔지 않았다면?

시펠린이 미국에 영국산 찌르레기를 풀어놓지 않았다면?

화학자 베네딕튀스가 플라스크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미국이 의원내각제를 선택한다면?

타이타닉호에 쌍안경 열쇠가 있었더라면?

러시아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뜬소문을 독일군이 제대로 알아보았더라면?

영국 신병들이 싸우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고 참전할 수 있었다면?

맥스웰 장군이 아일랜드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지 않았더라면?

레닌이 스탈린의 인간성을 진즉 알아보았더라면? 혹은 레닌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연합군 소속의 미군이 러시아땅에 머무르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금주법을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히틀러가 미술학교에서 떨어지지 않았거나 그의 그림이 한점이라도 팔릴 수 있었다면?

스탈린이 라팔로조약을 맺지 않아서 독일군의 훈련기지를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미국 역사상 최장수 FBI국장 존 후버가 48년이 아니라 10년만 국장을 했었다면?

이 모든 가정들은 지금의 현실보다 나은 미래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모두 상상일뿐 지나간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또한 그런 실수들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다른 실수를 했을수도 있고, 실수를 아예 하지 않았더라도 저자가 상상했던 해피한 미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가정'들을 해보는 것은 다른 미래를 생각해봄으로써 좀더 효과적으로 실수를 깨닫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배워야 하는 유익한 교훈일 수 있다. 당장의 걱정거리와 문제 때문에 대중이 독재자와 선동가들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지 마라. 그런 인물들은 대중의 자유나 삶의 방식을 파괴할 것이다. (p. 48)

2세기에 활동했던 페르가몬의 갈렌이 만든 치료법은 거의 2,000년 동안 처음 방식 그대로 이어져 왔다. (중략) 그는 자신의 의학적 지식으로 당대 사람들이 인체에 대해 갖고 있던 많은 인식을 바꿔 놓았다. (p. 178) 갈렌은 단순 감기부터 신장 질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지 체액의 균형이 깨진 신체의 각기 다른 부분에서 피의 양을 줄이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말 그대로 환자의 몸에서 '피를 빼내는' 것이었다. (p. 179)

사실상 그가 정복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유럽의 궁극적인 평화를 위해서였다. 더는 싸울 상대가 없어서 찾아오는 평화 말이다. (p. 185)

수많은 독재자들의 모습을 보아온만큼 앞으로는 그런 독재자들을 리더로 뽑지 말아야 할 것이고, 잘못된 믿음과 상식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객관적 검증에 꾸준히 신경써야 할 것이며, 진정한 평화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흑역사는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실수 모음이다. 지도자들이 어떤 오판을 내렸는가에 따라 바뀌었던 역사적 장면들을 되짚어 보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중요성과 그 잘못된 판단에 따라 무의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일반인들이 크게 대비되었다.

흑역사라는 말은 있어도 백역사 라는 말은 없다. 사람들은 잘못을 끄집어 내기는 쉬워도 칭찬을 찾아내 일부러 해주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백역사 보다는 흑역사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칭찬을 해주지 않아도 인간은 자주 오만에 빠지고 쉽게 자만에 빠져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흑역사가 알려주는 인간의 실수들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새겨보는 시간은 가끔은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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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는 나를 알고 있다 - 나를 찾아 떠나는 색채 심리 여행
진미선 지음 / 라온북 / 2021년 1월
평점 :
절판


컬러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도 몰랐던 과거, 현재, 미래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 돌보는

아주 쉽고 명쾌한 컬러 안내서

 

 

대중심리서 들을 자주 읽어오다보니 최근엔 다양한 분야와 접목된 심리서들을 여럿 읽게 되었다. 예전엔 그저 위안과 힐링 혹은 의학적 분석을 주 내용으로 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비슷비슷한 책들을 읽고나니 이제 그런 책들은 안 읽는 편인데 그럼에도불구하고 여전히 대중심리서들을 찾아 읽게 되는 이유는 언제부턴가 심리적 고민이 책, 그림, 식물, 명리학 등 다른 분야와 함께 풀어주는 책들이 나왔고 그런 새로운 시도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엔 '색' 이다. 이른바, 색채심리학.

오늘 입고 나온 옷의 색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는가? 반대로, 오늘 입고 나온 옷의 색이 갑자기 불편한 적은? 너무나 익숙해서 그냥 지나쳐버린 색이 오늘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느껴본 적이 있나? 색은 우리에게 매 순간 느낌과 정서, 감정을 주는데 우리는 그 많은 것들을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리며 살아간다. (p. 16~17) 색을 찾는 것은 그리고 색을 입는 것은 곧 자신답게 살아가는 일의 다른 이름이다. 자, 이제붜라도 자신의 색을 입고 나답게 살아가자. (p. 20)

어렸을때부터 심리테스트 같은걸 재밌어하곤 했다. 아이들의 그림으로 정서를 풀어내는 책이나 방송들을 보며 신기했던 마음은 색으로 드러나는 심리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몇번이나 무릎을 쳤는지 모른다. 색은 정말 심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색은 본인이 무의식중에 감추어두었던 내면의 상처는 물론이고 미처 몰랐던 마음의 목소리까지 들여준다. 색채 현상에 이런 숨은 인간의 심리를 해명하고 내면을 들려주기 위한 심리학의 한 갈래가 바로 색채 심리라 할 수 있다. 색에는 고유한 파장과 에너지가 있고 이러한 색은 우리의 감정, 행동,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색을 통해 내면을 탐색하고 무의식에 억압된 사건이나 사어를 다시 경험하고 나를 알아가는 것이 색채 심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p. 24) 우리는 색채 심리를 통해 스스로를 쉽게 발견하고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은 물론 타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할 수 있다. (p. 25)

색채만으로 나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며 관계개선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처음엔 의아했지만 색 속에 숨어있는 의미들은 신기하게 심리와 맞아떨어졌다. 총4장으로 구성되있는 이 책은 1장에서 색채 심리의 중요성을 간단히 안내하고 2장에서 나만의 컬러를 찾은 후 3장에서 컬러로 컨디션을 진단할 수 있는 색의 의미들을 분석한 다음 4장에서 관계에 실전적용할 경우 어떤 모습들인지 사례들과 함께 풀어주고 있다.

2장의 첫 페이지는 '마인드 컬러 자가진단표' 문항들인데 50문항에 각각 점수를 매기고 나면 10가지 기본 색 중에서 자신의 성격유형을 대표하는 색을 확인할 수 있다. 색에 따른 성격유형 그리고 그 성격유형에 따른 순기능과 역기능의 에너지들을 옮겨보자면,

레드 - 행동하는 열정가 (순: 열정적, 진취적, 현실감각, 리더십, 생명의 본질, 원천의 색상, 자발성과 변화, 에너지를 주는 색, 프로의 색 (역): 폭력성, 공격성, 폭발성, 잔인함, 분노, 금전적 집착, 보상 심리, 게으름)

오렌지 - 자유로운 표현가 (순: 표현력, 개혁적, 명랑, 활발, 활력, 에너지, 자유로움, 목표지향적, 사회적, 사교적 변화, 새로운 도전, 창의성 (역): 공격성, 외로움, 두려움, 외모 집착, 사치, 의존성, 외부 원인으로 돌리기, 낮은 자존감, 허영심)

옐로 - 지적인 도전가 (순: 지적, 사고적, 발전, 낙천적, 도전적, 창의적, 지적 세계의 추구, 학식을 발전시키는 도전의 색, 향상심, 자아 정체감 (역): 낮은 자존감, 질투, 시기심, 비판적 사고, 이기심, 지나친 분석, 외로움, 혼란, 우울감)

옐로그린 - 온화한 관찰자 (순: 관찰력, 온화함, 관계중심, 안정감, 부드러움, 상냥함, 탐구심, 존중, 외유내강 (역) : 집착적, 의심, 관찰에 대한 확신, 낮은 자존감, 의존성, 겁쟁이, 게으름, 회피적 태도)

그린 - 안전한 평화주의자 (순: 인정, 평화, 회복, 성장, 도덕적 신념, 이해심과 양심의 색, 균형과 조화의 색상 (역) : 게으름, 우유부단, 태만, 무질서, 화병, 소유욕, 집착, 고집)

터키 - 창의적인 독립가 (순: 독립, 독창성, 창조의 색, 잠재력,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색, 자기 균형, 조화의 색 (역) : 감정 분리, 가정 차단, 두려움, 회피적, ㅁ응대, 고집)

블루 - 진실한 소통가 (순: 소통, 신중함, 책임감, 자기 성찰, 이성적 판단, 신뢰, 성숙 (역): 불안장애, 스트레스, 비판적 사고, 우울, 냉정함, 소통불가)

인디고 - 통찰하는 실력가 (순: 통찰력, 정직함, 지적욕구, 이해심, 분석력, 냉철한 판단력, 신중함 (역): 보수적, 아집, 자기주장이 강함, 특권의식, 고집)

퍼플 - 직관적인 몽상가 (순: 창조와 직관력의 색, 따듯함과 차가움, 충동성과 억제, 외향과 내향의 양면적인 색, 이상주의적이며 예술을 추구하는 색, 위로와 치유의 색, 영적인 색상 (역) : 오만함 , 우월감, 우유부단함, 현실도피, 공허함, 고독, 상실, 우울, 불안, 무정착, 정체성 혼란)

마젠타 - 큰 사랑의 포용가 (순: 자신감, 포용력, 수용적, 보살핌, 정신적 사랑, 존중, 성숙함, 치료사의 색 (역): 독재적, 자기중심적, 자기 우월, 물질욕, 거만함, 집착, 게으름)

이다.

자신의 '색'은 평소 좋아하는 색일수도 있지만 문항을 체크하다보면 꼭 그렇게 나오지 않을수도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선호하는 계열의 색임은 맞다. 색채 심리를 몰랐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색을 주로 사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10가지 색의 기본 심리에 대해 파악하고 난 후 3장의 첫장에서는 지금 나의 상태를 알 수 있게 하는 테스트로 시작한다. 이 10가지 색 중 '나'를 떠올리며 가장 마음에 드는 3가지 색을 선택한다. 첫번째 색은 '나의 본질', 두번째 색은 지금 느끼고 있는 '스트레스', 세번째 색은 앞으로 희망하는 '나의 미래' 를 알 수 있게 한다. 이 3가지 색에 대한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보완색' 과 함께 할때 색으로부터 보다 실질적인 심리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도 각각의 색별로 상세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첫번째 선택한 색이 블루라면 당신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다. 또 매사 신중하면서도 융통성 있게 관계하며 일처리를 잘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도 설득력 있게 잘 전달한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즐거워하며 앞에 나서는 리더보다는 조력자로서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조력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블루의 성향은 차분하고 내면의 정신적인 면을 중요시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감과 안정감을 준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힘이 강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반응하며 적응력이 좋다. 간혹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에 빠지면 감정적으로 고립되고 우울감을 느낄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p 152~153)

나만의 컬러와 좀 다른 색이긴 했지만 지금의 '나'를 생각하며 선택한 색은 '블루' 였다. 그리고 평소 좋아하는 색이 늘 '블루'이기는 했다. '블루'가 '강한 책임감'을 대표하는 색이라고 하니 왠지 더 마음에 든다. 나는 책임감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편이다.

두번째로 선택한 색이 그린이라면 당신은 현실에서 자신이 베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썩나 관계에 지쳐서 무기력감을 느끼거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을 수 있다. 그린은 소속감이 중요하고 그 소속의 무리 안에서 자신이 도움이 되길 원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이러한 노력이 인정되지 않거나 그린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그린은 과도하게 타인을 살피고 필요 이상으로 타인을 도우며 스스로 지쳐가는 것을 놓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신체와 감정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며 상실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p. 141)

소오오름! 그랬다. 사실 나는 최근 몇년간 이런저런 '관계'에서 힘들었다. 그런데 색의 의미가... 그랬구나... 흠... 신기한데...

세번째로 선택한 색이 옐로일 경우에는 현재 자신이 도태된다고 느끼거나 발전하는 모습이 없어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적게 느끼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옐로의 에너지를 받아 나날이 향상되고 발전하는 자신의 희망적인 모습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구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자신의 지적 열망을 해소하며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상태이기 쉽다. (중략) 긍정적인 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에너지를 채울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로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 (p. 130)

또다시 소오오오오름! ㅎ 그래서 내가 이렇게 책을 파고 있나 보다. 과거 십년간 읽은 책보다 최근 일이년 사이 읽은 책이 몇배로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 계속 그렇게 책에 파묻혀 지내야 할 것 같다.

4장 '색으로 만나고 관계 맺는 사람들'에서는 가장 사례중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저런 경우에 대해 그 관계들을 색으로 풀어내는데 앞 내용들에서 이미 색의 심리에 조금은 놀라운 마음으로 읽은 터라 마지막 장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특히나 각 색깔별로 순기능과 역기능을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겠구나 싶은 깨우침을 하게 되기도 했다. 친절하게도 마지막 장에서는 '색으로 만나는 관계 패턴'들을 간략히 정리해놓아서 책한권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색이라 할지라도 숨어있는 의미는 다양했다. 순기능이라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 역기능이라고 마냥 나쁜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다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때가 가장 최선이었다. 평소 무채색 계열의 옷만 입고 그닥 색에 대한 개념도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이런저런 색의 심리를 파악하고나니 앞으로는 적절히 색을 활용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색에 대해서도 내 무의식을 더듬어 가며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봐야 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참 유용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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