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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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내려간, 고통에 관한 고백

 

 

 

권여선 작가의 팬이 된 것은 [안녕, 주정뱅이] 라는 소설집을 읽고 난 후였다. 단편집을 그닥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은 단편하나하나 마음에 닿는 듯 했다. 특유의 알콜릭한 분위기가 취한듯 아닌듯 인물한명한명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레몬]이라는 작품은 처음부터 온전히 읽었으면 좋았을껄 출판사에서 일부 발췌한 가제본부터 읽었더니 스릴러로 짜깁기한 발췌가제본과 작가 특유의 느린 호흡의 본편이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이 작품 [토우의 집] 을 만났다.

우리는 삼악동에 삽니다.

삼벌레고개요?

아뇨, 삼악동이요, 삼악동.

그러니까 삼벌레고개요.

경사를 끼고 형성된 모든 동네가 그렇듯 삼벌레고개에서도 재산의 등급과 등고선의 높이는 반비례했다. (p. 10~11)

익숙한 동네 전경이 아닐 수 없다. 이름하여 산동네 라면 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이름이 있어도 특유의 별칭으로 불리는 그런곳, 아랫동네와 윗동네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곳, 비탈을 올라가야 집이 나오는 그런곳...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이런 산동네가 참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그 비탈진 경사에도 아파드들이 들어서는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우물집 안주인인 순분은 살짝 하자가 있는 식모를 싼값에 알차게 부리는 재주 외에도 집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세놓아먹는 재주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우물집엔 무려 네 가구가 살았는데 크든 작든 머릿수만 헤아리면 도합 열세 식구나 되었다. (p. 12)

산동네 집은 작은 면적일수록 많은 인원이 사는 묘한 곳이다. 부엌이 따로 있어 원래 세를 놓을 수 있게끔 되어있는 곳도 있지만 방하나만 세를 놓을 수도 있는 곳이 그동네 집이었다. 대문 하나 열고 들어가면 방마다 다른 가족이 살고 있달까... 이또한 예전엔 참 흔한 풍경이었는데...

삼벌레고개에서 행해지는 모험의 등급도 고갯길의 등고선에 따라 나뉘었다. 아랫동네 소년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 몰래 불량 냉차를 사 먹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축이었다. 반대로 윗동네 소년들은 극히 불온하고 위험해, 모험이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운 짓거리에 물들어 있었다. 결국 소년다운 모험은 삼벌레고개 중턱 소년들의 몫이었다. '높이의 모험' 과 '넓이의 모험'은 중턱 소년들이 즐기는 모험의 씨실과 날실이었다. 높이의 모험은 윗동에 꼭대기에서 이루어졌고, 넓이의 모험은 아랫동네 개천가에서 이루어졌다. (p. 13)

사는 곳이 다르면 노는 물도 다르기 마련이었다. 산동네 중간즈음에 위치한 우물집은 집앞에 오래된 이제는 안쓰는 말라버린 우물이 있어서 우물집이라고 불렸다. 이 우물집의 안주인인 순분에게는 금철과 은철이라는 형제가 있다. 어느날 새로 세들어온 새댁네 식구는 영이와 원이 라는 자매가 있었다.

갓 결혼한 것도 아니고 딸도 둘이나 있고 나이도 많았지만, 잘난 체하는 새댁은 그 후로도 쭉 새댁이라 불렸다. 새댁의 말투와 몸짓에는 새댁만이 가지고 있을법한 야릇한 급진성이 깃들어 있었다. 삼벌레고개 중턱에서는 애들을 격일제로 두들겨 패지 않고 남편을 몹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새댁스러울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어이없는 참을성과 별난 열정을 짧은 새댁 시절 말고 누가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있겠는가. (p. 19)

그런게 있다. 영원히 '새'라는 접두어가 붙는 존재가. 예를들어 결혼하면 불리곤 하는 '새언니' 는 할망구가 되어도 새언니다. 그에 반해 아가씨는 영원히 아가씨이고. 그렇게 낯선 존재로 영원히 한 가족으로 묶여 사는 그런 호칭들이 있다. 여기서 '새댁'은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한집에 살지만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존재 하지만 한 공동체로 묶인 낯설지만은 않은 존재. 여하튼 여기서 새댁은 아마도 영원히 새댁일 것이다.

소설의 문체가 참 향토스러웠달까 전원스러웠달까... 가끔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싶을만큼 이 작품 속 작가의 문체는 묘하게 옛날틱했다. 흥이 나는 민요같기도 하고 한이 서린 판소리같기도 하고 묘한 리듬감이 읽는 내내 마음을 절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가 스파이라는 거 안 잊어먹었지?"

"안 잊어먹었어"

"이제 활동을 시작해야 해"

"알았어"

"내일 아침 먹고 우물로 나와"

"응"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우물 뒤에 숨어 있어"

"걱정 마" (p. 45)

일곱살 동갑내기 은철과 원이는 단박에 친해진다. 매일 붙어다니며 이런저런 놀이를 했는데, 원이가 어디선가 알게된 '스파이'라는 단어를 은철에게 알려주면서 둘은 '스파이 놀이?!'를 하게 된다. 두 꼬맹이는 마을사람들의 정보를 캐묻거나 귀동냥하며 둘만의 스파이활동을 이어나간다. 꼬맹이들이 어른들에게 묻는 첫 질문은 항상 '이름' 이 뭐냐는 것이었다.

동창이 의례적이고 소극적으로 말부리를 따면 새댁은 가능한 한 길고 장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을 먼저 꺼내는 쪽은 언제나 동창이었고 새댁은 침묵을 감내하며 동창이 어떤 화제든 먼저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너덧 명의 동창 이름을 들먹거리며 지루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원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 사는 게 이렇다, 효경아"

"문숙이 네가 나보다는 형편이 나을 줄 알았는데. 상호씨 직장이 안정적이라"

"직장이 있으면 뭐 하니? 여기저기 뜯기는 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뜯겨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런 사정 모를 거야"

"뜯기는 구나"

"뜯기지. 뜯겨도 이만저만 뜯겨야 말이지"

"애들은 점점 커가는데"

"그래. 애들은 커가지" (p. 82, 83)

새댁은 오랜만에 시내에 있는 동창의 집에 갔더랬다. 그리고 본론은 꺼내지 못한채 빙빙 돌며 말을 하고 동창 또한 모르는 척 빙빙 돌며 말을 하고 그렇게 대화인지 아닌지 모를 대화를 했다. 단칸방에 네식구가 살면서 새댁이 처음으로 궁한 소리를 하러 동창네를 찾은 것 같은데, 새댁은 동창에게서 조금도 '뜯어낼'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내가 그놈 안 보고 산 지가 얼만에 이런 얘길 어디서 듣는 줄 아세요? 저쪽에서 벌써 녀석 근황을 다 꿰고서 나한테 연락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제수씨?"

"애들 고모님을 생각해보세요, 아주버니"

"내 말이 그말입니다. 누님은 천재였어요. 그렇게 재주가 많던 우리 누님이 왜 그렇게 됐습니까? 제수씨야말로 생각을 좀 해보세요"

"고모님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 생각을 해보세요, 아주버니"

"제수씨,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때가 어느 땐데요. 제수씨가 잘 몰라서 그렇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제수씨도 계속 교편을 잡았어야 했어요" (p. 94, 95)

남편 모르게 처음 찾은 시아주버님 이었다. 원이에게 처음 인사시킨 큰아버지였다. 하지만 ...

"너도 잘했고 나도 잘했으니 사백 번 잘했다. 느이 아버지도 뭐라고는 못 하실 거다. 그런 위험한 일을 그렇게 허술한 데서들...... 그래. 이번일 가지고 그이도 더는 뭐라고 못 하겠지. 이제 다시는 안 갈거니까.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뜯어낸 거니까" (p. 109)

꽤 오래전 이야기인것 같긴한데 소설은 처음부터 시간적 배경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저런 상황 설명을 보면 분명 현대는 아닌데... 소설의 1/3쯤 가서야 어림짐작으로 시간적 배경을 알게 된다. 육이오가 터지고 전후상황이 안정되었으나 사회적불안요소가 많았던 시절...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즈음 같다. 새댁과 남편은 지식인층이었다.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은 아마도 반사회적 활동 같다.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갔고 아주버님은 양복점을 크게 하고 있었지만 남편과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사이였다. 그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새댁은. 원이를 데리고.

그럴 때면 가슴속 유리 상자에 쫙쫙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면 달릴 수록 그의 마음은 심하게 베었지만, 파란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로 항상 질척거리는 창자처럼 깊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은철은 온통 신발에 진흙을 튕기며 달리고 또 달려갔다. 아 시시하다, 시시해. 칫칫! (p. 173)

하루가 멀다하고 은철은 새댁네로 가서 원이와 놀곤 했다. 새댁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도 좋고 원이와 함께 하는 소꿉놀이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들이 오실때는 오지말라고 새댁이 하는 말을 은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 하루 오지말라는 소리가 무척 서운했다보다. 은철은 그후로 아예 발길을 끊고 원이도 아는채 안하고 형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새댁이 부르거나 원이가 부를때면 마음이 아팠다. 어린 마음에 유리 같은 마음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빨리 먹어! 씹어 먹으라고! 이거 사람이 먹는 거라고!" (p. 176)

새댁이 해주는 음식들은 은철 입에 꼭 맞았다. 하지만 은철의 집에서는 내장탕이니 닭발볶음이니 생간 같은 것이 식탁에 올라왔다. 원이를 멀리할수록 은철의 마음은 옹색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은철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원이에게 은철은 우악스럽게 생닭발을 입에 욱여넣어버렸다. 원이는 기절했다.

순분은 불구가 될지 모르는 작은아들의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그 강도와 길이에 상응하여 큰아들이 지고 가야 할 자책과 죄의식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렇게 매를 때리기 좋아하던 순분이 이제 아들들에게 내릴 평생의 매는 다 내렸다고 결정한 순간, 빗자루나 막대자 연탄집게 같이 매질에 동원되었던 모든 도구는 제본성을 되찾고 바닥을 쓸거나 눈금을 재거나 연탄을 집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되었다. (p. 202)

분명 짠한 장면인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야말로 웃픈 표현이었다고나 할까. 꼰대같은 말이지만 예전엔 정말 그랬다.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들어 패곤 했다. 집에서는 빗자루며 먼지떨이총체로 맞고 학교에서는 대걸레자루며 지시봉으로 맞았다. 그것들 모두 본연의 임무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까요?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여보"

"저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건 우리니까요" (p. 220)

"얘기는 가면서 합시다. 여긴 아무래도 댁이니까" (p. 248)

뚜벅이할매가 죽고 똥순할매가 사라진 뒤 기력을 잃고 비실대던 박가는 산삼이라도 달여 먹은 듯 예전의 성질과 기세를 단박에 회복했다. 우물집 앞에 형사 둘이 불침번을 서게 된 후부터 박가는 통장으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올라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p. 264) 통장집도 틈만 나면 남편으로부터 반공 교육을 받아 꽤 유식한 소리를 떠들어댈 줄 알게 되었다. 그 아슬아슬한 소문의 가로장을 밟고 오르다 보면 삼벌레고개 전체에 파다하게 퍼진 흉흉한 소문의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었다. (p. 265)

설마설마 했는데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편은 붙잡혀가고 새댁대가 세들어사는 우물집앞엔 형사들이 지키고 섰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말은 가장 무서운 말은 '빨갱이'였다.

"무서운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저놈들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도 멈출 수가 없어요" (p. 269)

원은 가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 친구들에게 간첩 중에는 좋은 간첩도 있고 나쁜 간첩도 있는데 좋은 간첩을 스파이라고 한다고 큰소리로 얘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간첩은 그렇다치고 빨갱이는... 알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짝의 귀를 물어뜯은 원을 야단치는 대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p. 278)

그래도 새댁네는 다행이었다. 집주인 순분은 새댁에게 죽을 쑤어먹였고 이제막 1학년으로 입학한 원의 담임선생님은 원을 혼내지 않았다.

은철은 차창에 다가가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 원의 옆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원은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철은 알았다. 자기가 병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원도 날카로운 고통이 사방에 철창을 두른 작은 방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방에 원 혼자 갇혔다는 것을. (p. 327)

우물집 식구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마지막으로 순분네와 새댁네도 떠나게 된다. 집은 새주인을 맞을 것이고 그렇게 새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떠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기억속에 우물집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토우를 묻은 무덤처럼 그렇게...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 걸. (p. 331) -작가의 말 中-

다른 책에서 말하길 작가의 말을 쓰기 싫다고 했었다. 내키지 않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지게 쓰는 걸. 나는 앞으로도 권여선 작가의 '작가의 말'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p. 329)

집이 무덤같고 사람이 토우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을 이렇게 따듯하게 품어주는 작품이 계속 나오는한 아마도 생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품에 안길지라도 온기를 느낄 수 있게하는 글이 있고 그런 글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면 아마도 삶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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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지음, 송용구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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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의 폭압에 죽음으로 맞선 '백장미'

우리가 몰랐던 독일인의 저항 정신을 소설로 읽는다!

 

 

 

모든 독일인이 나치주의자는 아니었고 나치와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피가 있었으며 나치만큼이나 지독했던 민주화와 자유를 향한 독일인의 의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한스 숄과 소피 숄이 있다고 한다. 이름에서 느껴지겠지만 둘은 남매다. 그리고 저자는 이 남매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게 숄이다. 두 동생에 대한 실명글이자 실화인데 왜 소설이라고 하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숄 남매는 나치에 저항한 뮌헨대학교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백장미단'의 주동자였다. 두 남매는 단두대형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옥고를 치루긴 했으나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렇게 두 남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전하는데 평생 노력했다.

그때 한스는 열다섯 살의 소년, 소피는 열두 살의 소녀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조국, 동포애, 민족공동체, 향토애 따위의 말들을 귀에 익도록 들었씁니다. 이런 말들ㅇ느 우리를 감동하게 했고 학교에서나 길거리에서 이 말들이 들려올 때마다 열성적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중략) '조국'도 고향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 사는 더 큰 고향이나 다름없지요. (p. 18) 10대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업시 우리 모두는 존엄성을 인정받고 위대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온 국민이 창조해가는 하나의 과정과 하나의 운동에 우리가 동참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p. 21)

숄 남매들이 어렸을때 작은 고향마을에서도 애향심은 뜨거웠다. 큰 도시로 나와 살게 되면서 조국애로 그 마음은 확대되었고 그 당시 독일을 휩쓸었던 히틀러사상에 어른아이 할 것없이 빠져들었다. 모든 활동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빠져들고 체험하면 할 수록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진정한 자유를 열망하여 참여했으나 활동은 억압적이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고 믿었었으나 실상은 불행에도 눈감아야 했다.

이럴 수가! 그때까지 한 점의 불꽃처럼 미미했던 의심이 마침내 깊은 슬픔으로 변하더니 결국 분노의 불길로 타오르고야 말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순수한 믿음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 조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조국을 이런 모습으로 망가뜨렸단 말인가요? 자유도 거짓, 번영의 삶도 거짓, 조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발전과 행복도 거짓이었습니다. (p. 30)

실상을 깨닫게 되었을때 그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히틀러 독재의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고 알려주면서 남매들에게 '시대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나는 너희가 인생을 올바르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라고 응원해주었다. 남매들은 '청소년회'를 자체적으로 결성해서 자유롭게 가치관을 형성해 나아갔고 대학생이 되어 뮌헨에 갔을때 더욱 심도깊게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게 된다.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마침내 나타나고야 말았군" (p. 51)

1942년 우편함에서 발신인 없이 복사된 편지를 발견했는데 내용은 뮌스터의 신부가 미사에서 들려준 설교문의 내용을 옮긴 것이었다. 주교는 뮌스터 지역에서 벌어진 약자들에 대한 폭압적 행위들에 대해 고발하고 있었다. 이 편지와 교수들과의 대화와 친구들과의 토론을 통해 자극받고 성장한 남매와 친구들은 저항활동을 계획하게 된다.

나치를 비판하는 전단들이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떠돌아다닌 것이었습니다. 대량으로 복사해 퍼뜨린 전단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흥분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승리감과 끓어오르는 열정, 역겨워하는 거부감과 치를 떠는 분노가 뒤섞여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p. 83)

모든 활동은 일단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야 뭐라도 시작해볼 수 있다. 숄남매와 친구들이 시작한 행동은 현실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것이었다. 전단지 배포활동은 문구작성부터 배포까지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살떨리는 긴장속에서 진행되는 만큼 성취감도 남달랐다.

신문은 날마다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p. 113)

한스와 그의 친구들은 이런 생각에 젖어들었습니다. 대도시마다 그런 저항 단체가 하나둘씩 연이어 생겨난다면 그 단체들로부터 태어난 저항의 정신은 독일의 모든 장소로 확산할 것이라고. (p. 123)

언론이 침묵할수록 지하에 숨어든 지성인들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 중심에 대학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의 70~80년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세계2차대전 시기의 일제치하의 독립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숄남매와 친구들은 결국 붙잡히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수천 명의 의식이 깨어나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내 죽음도 헛된 것은 아닐 거야" (p. 139)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해.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p. 145)

남매와 친구들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나 이들의 죽음은 언론에서 배반자의 죽음으로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침내 수백만 명을 억누르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비판하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엉터리 전설은 없애버리자"라고 독일인들에게 호소했던 헬무트 폰 몰트케를 비롯한 저항 운동가들이 저항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p. 163)

실패했다고 해서 그 활동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활동들이 있었기에 그렇게라도 독일인의 양심이 지켜졌기에 지금의 독일이 있게 됐을 것이다. 독일인 모두가 나치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독일총리가 유태인학살에 대해 말없이 무릎꿇고 사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보니 어떤 면에선 지금의 일본이 조금 이해되는 면도 있다. 폭압이 극심했을때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그 폭압이 과거의 역사속으로 묻힌 현재에 와서 더더욱 그런 목소리가 생겨날 바탕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결국 일본은 영원히 사죄라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고...

짧은 본문이 끝나고 나면 부록으로 백장미단의 전단 들과 독일 저항운동 선언문 등이 실려있는데 그 절절함이 당대에 읽었으면 몹시 마음을 울렸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 문장들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고전을 보며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이 최근에 나온 신간이라서 그동안 나치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못나오다가 늦게 나온걸까 했었는데 아니었다.

잉게 숄의 실명소설 <백장미>는 한 명의 독문학자와 한 명의 번역가에 의해 각각 <백장미의 수기>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백장미의 수기>는 독문학자가 번역한 작품답지 않게 원문을 수십 군데 누락시켰고, 무수한 오역을 범했다. 인명, 지명, 학술 용어 들도 잘못 표기한 것이 많았다. 독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번역가가 옮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앞서 출간된 <백장미의 수기>를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 그래서 누락된 부분, 오역된 부분, 인명, 지명, 학술 용어의 오기등이 대부분 일치한다. 이는 잇어서는 안될 불상사이며, 잉게 숄의 원작 소설을 모독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번역서에서 잉게 숄의 원작을 가능한 오역없이 번역하고, 원문을 누락시키지 않으며, 인명과 지명과 학술 용어의 정확성을 재생하는 윤리를 철저히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p. 226~227)

작고 아담한 사이즈에 본문이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글 임에도 불구하고 초판본에서 그렇게 오역과 누락이 많았다니 의외다. 여하튼 이렇게 자신있게 지적하고 수정했다니 다행이다 싶긴 하다.

실명과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수기'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지만 수기라고 하기에도 차근차근 서술되는 건 아니었기에 소설로 보면 더더욱 맥락과 개연성이 뚝뚝 끊기는 글이었다. 하지만 독일인에게 숄 남매의 존재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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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읽는 말 - 4가지 상징으로 풀어내는 대화의 심리학
로런스 앨리슨 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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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네 가지 방식으로 대화한다

대립의 티라노사우루스, 순응의 쥐, 통제의 사자, 협력의 원숭이

당신은 그리고 상대는 어떤 동물처럼 소통하는가

 

 

 

범죄심리학자 부부가 미국 정보기관의 의뢰로 완성한, 상대를 읽어내고 움직이는 심리 대화법이라니 궁금했다. 관계를 잘 맺는 것은 결국 대화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이런저런 처세술 책들이 많긴 하지만 범죄를 밝혀내는 심리대화법 만큼 믿을만한 기술이 또 있을까 싶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죄를 털어놓게 할만한 대화법이라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갈등정도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갖게 했다.

라포르는 자주 쓰면서도 정의하기 힘든 용어다. (중략) 성공적인 대인관계의 바탕에는 대부분 라포르가 있다. (p. 11) 재차 강조하지만, 고문은 필요악이 아니라 완벽한 무용지물임을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p. 15)

저자들은 라포르가 타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와 관타나모 수용소 캠프 엑스레이의 고문사건으로 인해 '고강도 신문 기법' 같은 혹독한 기법은 거센 비난에 처했다. 효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고문은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게 당연한 수순이고 그렇게 핵심에 자리잡게 된 것이 '라포르' 형성이었다. 미국정보기관 에서는 저자들이 그동안 연구해온 라포르 전략에 관심을 갖게 됐고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라포르 형성에서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을 다룬다. 1부에서는 솔직함, 공감, 자율성, 복기 등 라포르 전략의 네 가지 기본 원칙(HEAR 대화 원칙)을 소개한다. HEAR 대화 원칙은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키우고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늘려준다. 2부에서는 의사소통 유형 네 가지를 다룬다. 우리는 각각의 의사소통 유형을 이를 상징하는 각 동물에 대입해 설명한다. (p. 17)

저자들은 라포르의 다양한 활용 범위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범죄에서의 신문기술로서 뿐만 아니라 더 넓혀서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이 책에서 그 활용법을 정리하고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다양한 사례와 함께 각 장마다 뒷부분에 핵심요약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술술 읽히면서도 깔끔한 책이었다.

라포르 전략이란 당신이 자리를 뜨자마자 사라지는 겉만 멀쩡한 단기성 속임수가 아니다. 상대방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다고 테러리스트와 친구가 되란 뜻은 아니다)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와 상관없이 존중, 존엄, 동정을 보일 때 진정한 라포르가 형성된다. (p. 20)

라포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종종 있었지만 자주 만나고 마음을 터놓고 그렇게 쌓인 친분 관계를 통해 범죄자의 신뢰를 얻은 후 자백을 받아내는 기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라포르가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이 친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관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친밀한 사이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상에서 적용하려면 범죄자와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라포르 보다는 친밀한 라포르가 형성되는 경우가 대다수 이긴 하지만 여하튼 좀 달랐다.

누군가와 라포르를 형성하는 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라포르는 정직과 공감에 기반한 의미 있는 관계를 뜻한다. 제대로 라포르를 형성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끔찍한 일이더라도 말이다. (p. 34)

'당신 말에 집중하고 있어요!' 중요한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 이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신의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집중해서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신뢰감 있는 태도로 보여주기만 해도 상대가 범죄자이든 사이나쁜 친구이든 간에 그 태도만으로도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라포르는 다음 네 가지 핵심 기초 위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이를 HEAR 대화 원칙 이라고 부른다.

HEAR 대화 원칙

솔직함 Honesty 의도나 느낌을 객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공감 Empathy 상대방의 신념과 가치를 이해한다.

자율성 Autonomy 상대방의 자유 의지와 선택을 보장한다.

복기 Reflection 대화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중요하고 유의미하고 전략적인 요소를 확인하고 되짚는다. (p. 49~50)

사실 나는 이 책의 실전전략인 2부의 4가지 동물로 표현한 대화법보다 기초원리라고 할 수 있는 1부의 4가지 원칙들이 더 유용하게 다가왔다. 저자들은 상황이 얼마나 적대적이건 불편하건 상관없이 이 4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키기만 하면 아무리 어그러지고 부정적인 관계일지라도 강하고 긍정적인 관계처럼 동일하게 이 원칙이 작동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말 뜻 그대로가 아닌 좀더 융통성 있는 활용법들을 추천한다. 솔직하지만 예의없지 않게 공감하지만 동정하지 않게 자율성을 주면서도 내권리를 인정받고 복기하는 것이 단순동어반복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공감은 다정하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과 별개다. 이건 공감이 아니다.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진심어린 공감을 보이려면 상대방과 그 사람이 신경쓰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상대가 이슬람 국가 테러리스트든, 무장 강도든, 성범죄자든 상관없다. 다만 누군가의 동기, 가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게 꼭 그것들에 동의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판단이나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야 한다. (p. 85)

솔직함, 공감, 자율성, 복기 라는 4가지 원칙은 사실 경청의 기본토대다. 집중해서 듣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 이 기본적인 태도가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지 않기에 일상에서도 수시로 관계트러블이 생기곤 한다. 무조건 수용도 아니고 무조건 거부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도 완전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 적절함, 이런 태도는 굉장히 오랜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들은 좀더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타인을 4가지 타입으로 분류하여 파악해봄으로써 적절한 응용법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른바 애니멀 서클이다.

이 도식은 인간의 상호작용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일종의 공식으로 활용하면 특정한 의사소통방식을 빠르게 떠올릴 수 있다. 모든 대인 관계는 대략 수직적 '권력' 과 수평적 '친밀감'에 기반한 규칙을 따른다. 사자의 지배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을 순종적인 쥐처럼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중략) 이와 달리 순종적인 쥐의 행동은 지배적인 사자의 행동을 부추긴다. (p. 149) 수평축에서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의사소통은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p. 150) 비슷하게,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원숭이 행동을 부른다. 협조적이고 다정하며 친근한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서 본능적으로 같은 행동을 끌어낸다. (중략) 인간은 관계를 맺을 때 대부분 이 네 가지 의사소통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한다. 상호작용을 이끌거나(사자) 따른다(쥐). 협조하거나(원숭이) 갈등을 겪는다(티라노사우르스). (중략) 권력의 역학을 파악하고 나면 서클 모델을 활용해서 상대가 원하는 당신의 서클상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p. 151)

어떤 상대냐에 따라서 적절한 나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실전활용서에 가깝다. 148p. 에 있는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애니멀 서클 모델' 은 간단하면서도 그럴 법 하다. 수직축 위에는 통제-사자 아래에는 순응-쥐 수평축에는 갈등-티라노사우르스 와 협력-원숭이 이렇게 십자 모양의 위아래 좌우로 간략하게 그려진 이 도표들을 보면서 상대방이 정확하게 이 4가지 타입으로 구분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4가지 유형의 사이 어딘가 있으면서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또한 그때그때 적절하고 융통성있게 대응해줘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타입에 대처 가능한가? 그또한 그렇지 않다. 그러니 일단 나의 상징적 동물을 파악해보는 것이 필요할텐데 171p. 에 '나의 서클'을 해석할 수 있는 설문과 점수에 따른 해석이 있으니 한번 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내가 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내가 할수있는 '정도'를 파악한다는 건 늘 필요한 법이다.

'이게 내 방식이야. 상대방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거야' 하고 마음먹어 버리면, 인간관계에서 최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셈이 된다. 기술을 더 확장할 수록 이점도 더 많아진다. 대인 유연성은 정서지능과 공감력과도 관련이 있다. (p. 304)

저자들은 4가지 동물타입별 사례들을 풀어놓으면서 이 네가지 동물 유형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유능성, 민감성, 융통성 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가정을 통해 실전연습을 해볼 것을 제안한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사실 대화가 안될래야 안될수가 없다. 중요한건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으로 우리는 모두에게 뭔가를 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하건 기존 관계를 더 깊이 하려고 하건, 이 책이 당신이 라포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이 책으로 우리는 대인 기술의 기준을 세우고, 우리 모두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혹은 -현실과 가상 모두의 - 공동체 안에서 이 원칙을 지키길 바란다. (p. 332) 애니멀 서클을 이해하면 나쁜 행동을 피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긍정적인 기술을 발전시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p. 333) 이 모든 걸 항상, 그리고 상호작용을 하는 모든 경우에 기억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중략) 그 과정에서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예전 버릇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 계속 노력하면 거기에 맞는 보상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실천도 더 쉬워지고 덜 수고스러울 것이다. 명심하라. 당신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함께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p. 336)

아는만큼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야 일단 알아놓기라도 하는게 좋다는 건 아니까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내며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저자들의 기법은 응용하자고 들면 거의 모든 대화에 응용할 수도 있고, 읽고 넘기자면 그렇고그런 대화법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대화법을 잘 활용하면 '이 세상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 그건 분명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더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나의 대화법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한번 시도해볼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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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심리학으로 말하다 3
게리 W. 우드 지음, 한혜림 옮김 / 돌배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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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심리학으로 말하다]는 '심리학으로 말하다' 시리즈의 한 편으로, 일상적인 이해, 대중심리학, 학술 저서 사이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저술된 비판적 입문서이다. (p. 8) 이 책에서 젠더라는 개념에 숨겨진 중요한 가정들을 다루고, 몇 가지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며, 독자가 스스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돕고 더 많은 탐구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p. 9)

이 책은 '심리학으로 말하다' 시리즈의 3번째 책이라고 한다. 음모론을 시작으로 신뢰, 젠더, 섹스, 다이어트, 패션, 학교폭력, 일터, 퍼포먼스, 은퇴, 셀러브리티, 음악, 애도, 중독, 운전 이렇게 15가지 주제가 번역 혹은 번역될 예정인 듯 하다. 책 사이즈가 작고 얇은 편인데다 '입문서' 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리학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성姓과 젠더는 정체성의 근본 구성단위로서 우리의 관점을 형성하고, 이러한 관점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는 사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p. 14) '젠더'는 생물학적 성을 사회문화적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물학적 특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구별이며, '남성적'과 '여성적'은 젠더에 따른 구별이다. (p. 15)

세상을 살아가며 다양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릴 때 각자가 지닌 가치관, 세계관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한 개인들의 소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는 것이 아마도 '심리' 아닐까. 그런데 '심리'는 타고나는 부분과 자라면서 변화및발달 하는 부분이 있을텐데 '젠더' 구분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저자는 성별이 보는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X정자'는 XX(여자), 'Y정자'는 XY(남자)를 만들어낸다. Y 염색체의 일부 유전자는 X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자가 더 유전병에 걸리기 쉽다. 여자의 경우에는 비정형 유전자를 양쪽 부모 모두에게서 물려받아야만 X 염색체 두 개가 모두 영향을 받아 질병에 걸리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영향을 받게 되는 X염색체가 한 개밖에 없다. 따라서 염색체 측면에서 본다면 '남자'는 더 취약한 성이며, 이는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관점과 상충한다. (P. 29) 배아는 자연스럽게 여성 생식계통으로 발달한다. 생물학적 작용에 의해 남자를 만들라는 지시가 없는한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음경은 음핵이 확대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P. 31) 생물학적 성을 비교해보면, 호르몬은 유형보다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며, 남성과 여성이 분비하는 호르몬의 숫자와 범위는 사실상 동일하다. (P. 32)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뚜렷이 구분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눈에 보이니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생각보다 높은 비율로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생물학적 구분이 되지 않는 성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 심리학에서 여자는 남자에 비해 결핍과 부족의 존재로 묘사되어 왔다. 하지만 염색체측면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취약하고 성기구분에 있어 남성의 성기가 여성에게 없는 것이 아니며 호르몬에 있어서도 구성에는 차이가 없었다. 호르몬에 성적 구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결국 두 성으로의 구분보다는 개개인별 호르몬의 정도가 다 다르다는 다양성으로 성의 구분을 확장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정치가 가시적인 전문 용어 싸움처럼 되어버렸다. 모든 정체성과 성 소수자 단체를 포함할 수 있는 포괄적인 용어나, 더 중요하게는, 모두가 동의하는 용어는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P. 50)

이 책도 초반에 '젠더'란 무엇인가로 시작했듯이 어떤 분야이든 가장 기초는 '정의'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 합의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트랜스젠더, 입소젠더, 에이젠더, 젠더퀴어, 시스젠더... 그 어떤 용어도 아직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지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성의 다양성은 더 많은 측면에서 확인되어지고 있는 듯 하다. 아직 용어도 없는데 가짓수는 자꾸 늘어가는 형편이랄까. 나와 다른 성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고정불변의 구성체가 아닌 '불분명한 근사치'와 모호함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젠더는 명확하지 않은 발판을 토대로 하므로 다양한 변이와 해석이 가능하다.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는 명칭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젠더가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에서,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정체성에 대한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P. 63)

세상은 이분법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객관식이 4지선다에서 5지선다로 그리고 그 이상으로 늘어가다가 모든 문제가 다 주관식으로 풀어야할 상황이 되버린듯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떤 조사를 할때 남성인지 여성인지 의 두가지 선택란에서 골라 체크를 하곤 한다. 심리학 책들도 많은 경우 남성의 뇌와 여성의 뇌가 뚜렷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중 심리학 서적들은 젠더 역할 고정관념을 확고하게 고수한다. (P. 78) 우선 지나치게 단순화딘 '두 개의 두뇌'라는 용어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두뇌는 한 개이고, 일부 특수화딘 두 개의 반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반구와 좌반구는 광범위하게 상호 교류한다. 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한 최근 연구에서는 엄격하게 편향된 두뇌 유형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연구 결과는 머리기사에 실리지 않았다. 젠더에 관한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대중 미디어에서 최신 이론과 연구는 고정관념에 부합하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것에 미려 무시된다. (P. 79) 증거를 바탕으로 '성별 전쟁'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는 종종 '정치적 올바름이 도를 지나쳤다'라는 명목으로 조소당하고 일축된다. (P. 80)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들이다. 남자는 이럴때 이렇고, 여자는 저럴때 저렇고. 이런 식의 분석은 두 성의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양분법의 기준이 될만한 근거들은 찾을 수 없었다. 염색체에서도 호르몬에서도 뇌연구에서도 확실하게 존재하리라고 믿었던 차이점 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동안의 고정관념들을 고수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 뇌에만 있는 기능이 있고 여자 뇌에만 있는 기능이 있다면 성적 이형화 개념이 성립한다. 연구팀은 남성성-여성성의 스펙트럼에서 양극단에 위치한, 일관되게 나타나는 뇌의 특징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인간의 뇌는 남성 뇌와 여성 뇌의 뚜렷한 두 개의 범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뇌의 대부분은 독자저긴 기능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구성된다. 거침없는 비평가로 잘 알려진 인지 신경과학자 지나리폰은 남자와 여자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접근법을 '신경학계의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P. 102) 연구결과들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남자와 여자는 차이점보다 유사성이 더 많다. 게다가 그 차이점은 질적인 것이 아닌 양적인 것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P. 111)

생물학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남성과 여성이 구분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생물학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은 누구에게 왜 필요했던 것일까 라는 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남성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그런 점에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중략) 젠더 역할 고정관념과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권력 구조 관계의 체계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P. 127) 젠더 고정관념이 세상을 구조화하는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중략) 모두 아울러 짧게 고찰한 결과들은 우리가 이분법 체계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필연성만으로는 젠더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요인을 더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P. 138)

뚜렷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눈 체계는 결국 상하로 나누기 위함이었다. 누군가는 위에 있고 누군가는 아래 있어야 했다. 수직적 관계에서는 뚜렷한 구분이 당연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직체계에 의문을 제기하자고 이 책은 말한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이다 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그동안 모두 똑같은 인간은 아니어왔고 지금도 그러하기에 여기저기서 사회적 문제들이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중이다. 수평적 관계는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인류는 다신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들에는 흥미로운 자취가 남아 있다. 성서의 창조론 이야기에서 하나님God은 '엘로힘Elohim'이라는 단어에서 번역된 것인데 이 단어는 사실 남성 명사의 복수형이다. '엘로힘'은 문자 그대로 '신들gods'을 뜻하며, 신들, 여신들, 그리고 여타 신성시되는 존재를 포함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 창조에 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략) 이 이야기는 원래 인간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양성이거나 간성이었다는 점을 내포한다. (p. 149) 첫째, 아담은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붉은 땅'을 뜻한다. 둘째, '쎌라tsela'라는 단어는 이 부분에서만 '갈비뼈'로 번역이 되었다. 성경에서는 '쎌라'라는 동일한 단어가 40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한쪽 면'으로 번역이 되었다. 따라서 갈비뼈가 아니라 '한쪽 면'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면, 신들은 최초의 인간을 절반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써 더 평등주의적인 창조 신화가 만들어진다. (p. 150)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오역이라는 것은 수메르신화를 읽을때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같은 단어를 딱 한곳에서만 다르게 번역했다는 것을 읽고나니 그 저의가 짐작이 되어 다시금 마음이 어두워진다. 본래의 뜻 그 의미 그대로만 전해졌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오역.. 왜곡이란 참...

하지만 '만약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면, 우리가 새로운 남자, 새로운 여자, 새로운 관계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젠더가 미치는 더 큰 영향들은 무엇일까? (p. 161)

점점 더 기존의 상식들이 흔들리고 점점 더 다양성이 다변화되는 가운데 용어조차 아직 정립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정리가 필요하긴 한 것일까? 연구가 생각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우리는 젠더라는 이야기에 맞춰 태어난다. 젠더는 '그냥 원래 그런 거야' 라는 이야기이다. 젠더는 상향식이면서 하향식이다. 생물학의 사회적 해석이며 가치의 사회적 표현, 즉 '자연계의 질서'이다. 생물학적 본질주의, 남성중심주의, 권력 이 모두가 제한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용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도전은 조롱을 당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불길하게 들리겠지만,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p. 171) 새로운 젠더 심리학은 개인적, 사회적, 심리적 편견을 배제한 젠더화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해 인간의 특성과 특징을 재평가하고, 계층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관점을 넘어설 다른 방안을 고찰할 것이다. (p. 183)

기존에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비정상인 것이었다며 원래의 태초의 정상적인 것들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일리는 있지만 너무 포괄적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과연 가능할것인가...

이분법의 부정적 측면은, 세상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다르지만 평등한 관점'은 지나친 포부일까? 우리는 현실적으로 낡은 체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새로운 체계,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떨까?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젠더 체계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대중 심리학적 자기 계발서는 젠더 체계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부조리를 비웃으며 현 상황을 고수해야 할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제로섬 게임에 갇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젠더 역할 고정관념의 포로인가? (p. 187) 젠더는 되는 것이자 속하는 것이다. 젠더는 개인의 정체성이면서 사회와의 관계이다. 따라서 젠더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재평가하고 재협상하고 재천명해야 하며,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 (p. 188)

'심리학으로 말하다 - 젠더' 라는 책 제목을 봤을땐 그저 여성과 남성의 심리를 각각 이해할 수 있는 팁을 주는 그런 심리학대중서 겠거니 예상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의 책이었다. 이분법적 구분 자체를 문제시삼는 것으로 시작하는 책이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어떤 뚜렷한 지침이나 안내는 없는 책이었다. 유일한 해법 제시격인 결말 역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결국 질문으로 끝나는 책이었다. 이 책이 과연 그동안 쌓아져 온 남녀구분적 심리학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계속해서 질문하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여라.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p. 190)

축하인지 아닐지는 읽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이 마지막 문장이 좀 후덜덜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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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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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이 먼 길을 돌아와 결국 죽게 된다고 해도"

 

 

 

SF소설도 좋고 우주이야기도 좋다. 표지를 감싸는 띠지에 쓰여진 '조지클루니 영화화 확정'도 눈길을 끈다. 그래도 가장 마음이 끌렸던 것은 '별빛' 이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 작품이 품고있는 별빛이 칼 세이건의 '콘택트'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나는 '콘택트'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이 너무 좋았었다.

장밋빛 광채가 지평선 위로 흘러나오며 푸르스름한 얼음의 동토 지대 속으로 스며들어, 온통 눈뿐인 풍광 위롤 쪽빛 그늘을 드리웠다. 새벽은 굶주린 불길처럼 타고 올라와, 섬세한 분홍빛이 주황색으로, 다시 자홍색으로 깊어지며 두꺼운 구름층을 하나씩 삼켜나가다가, 하늘 전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p. 11)

요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첫 페이지이 등장하는 이 묘사에서 [일리아스]의 표현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ㅎㅎ 첫페이지부터 서양작가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영향을 여전히 많이 받고 있구나를 느꼈다면 오버이려나...

하지만 이곳은 북극 천문대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고 안주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거스틴이 갈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명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였다. (p. 13) 시간의 동틀 녘까지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시작을 잠시라도 엿보고 싶었다. 어거스틴은 길이길이 기억되길 바랐다. 하지만 여기 어거스틴은 일흔 여덟 살에, 북극 제도 어느 산꼭대기, 문명의 바깥 지대에서 전 생애를 바친 과업의 종착역을 앞두고 있으며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무지의 황량한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p. 14)

노천문학자이자 현재 북극천문대에 있는 어거스틴과 젊은우주학자이자 현재 목성탐사중인 우주선에 있는 설리가 교차되며 서술되는 이 작품은 별로 시작해서 별로 끝나는 것 같지만 실은 지구에서 시작해서 지구로 끝나는 소설이다. 다만 그 사이에 아득한 별들이 있다고나 할까...

어거스틴이 머물고 있는 천문대에 전원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모두들 급하게 떠나지만 그들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지만 어거스틴은 홀로 천문대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에겐 딱히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앞에 어린 소녀가 갑자기 나타난다.

그를 미치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것은 그일, 쓸모와 중요성이라는 얇은 막뿐이었다. 익숙한 일과에 맞춰 계속 바쁘게 몸을 움직이려 고군분투했다. 문명이 종말을 맞이했다는 막막함이 어거스틴의 마음을 짓눌렀다. 광대함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된 그의 머리로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전에 고민해본 그 어떤 문제보다도 낯설로 압도적인 사건이었다. 인류의 끝, 전 생애를 바친 작업의 소멸,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재조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대신 어거스틴은 우주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데이터들에 전념했다. 천문대 밖 세상은 침묵뿐이었지만 우주는 그렇지 않았다. (p. 34~35)

소녀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다시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누구도 연락되는 이가 없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무선신호조차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상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거스틴은 북극천문대에 고립되었다. 이유는 알수 없었다. 다만 어거스틴 혼자 아니 소녀와 단 둘만 남았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등 조절기가 천천히 지구의 동틀 녘을 재현했다. 단계에 따라 완벽하게 구분되는 새벽의 밝기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설비였다. 설리는 매일 아침 그 과정을 꼭 지켜보았다. 하지만 빛은 하얀색뿐이었다. 제작 기술자들이 약간의 분홍색이나 주황색을 더해놓지 않은 건 불만이었다. (p. 42)

목성탐사우주선 에테르호의 첫 장면도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으로 시작한다. ^^ 다만 우주선에서 조명으로 볼 수 있는 색은 그저 환한 빛 일 뿐이었다.

에테르 호의 대원 여섯 명은 지구에서의 삶이라는 사소하고 하찮은 꿈으로부터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개인사에, 사적인 추억들에 얽매일 수 없었다. 그들이 목성에 도착했을 때 의식의 낯선 층 하나가 깨어나 넘쳐흘렀다. 어두웠던 방에 불이 켜진 듯, 선회하는 전구 아래 벌거벗고 앉아 있는 무한의 당당한 실체가 드러난 듯했다. (p. 44) 다들 말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이 해낸 막중한 경험, 그들이 배우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낼 진리들에는 더 큰 규모의 청중이 필요했다. 에테르 호의 대원들은 자기들만을 위해 그 여정을 감내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위한 일이었다. 지구에서 그들이 추동했던야망은 이곳 깊은 암흑 속에서는 한갓 허무한 허영에 지나지 않았다. (p. 47)

목성을 우주선안에서 직접 본다는 것은 엄청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지구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급작스러웠고 사전징후도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선은 예정에 따라 지구로 귀환하는 중이었고 내내 지구로부터는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목성에 대한 흥분이 지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영원의 감격이 찰나의 충격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그 곳에서 말이다. 설리는 문득 딸의 사진을 한장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 상황에서 일을 계속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컴퓨터로 밀려드는 데이터들에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 모든 새로운 정보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신기원을 이룰 결론들도, 손끝만 까딱하면 되는 세상을 뒤흔들 발견들도 마찬가지였다. 중력 작동 구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중력의 힘이 그녀를 계속 잡아주었으면 했다. (p. 69)

고립된 북극에서 별을 보며 버티고 고립된 우주에서 중력을 느끼며 버티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어거스틴과 설리는 우주를 건너 서로에게 연결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비록 그 연결이 돌고돌아 한참후에 이루어진다해도...

늘 그랬듯이 저 별들이 그의 내부에서 차오르는 막막한 감정들을 하찮게 만들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별들은 그저 차갑게, 밝게, 멀리서 무정하게 눈짓할 뿐이었다. (p. 80)

설리는 바 스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사람들 틈새를 뚫고 지나가며,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에 맞춰 밀쳐지고 흔들리고 휘말리면서, 잠시, 이것이 그들 둘만을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 노래, 데이비드 보위의 목소리가 술집을 가득 채우고 하퍼는 설리를 데리고 댄플로어로, 데비에게로 갔다. (p. 99)

고립된 곳에서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 진정한 고립이 아니게 느껴지도록 해주는 존재, 그건 결국 사람이었다. 가족같은. 어거스틴은 아이리스에게 설리는 동료대원들에게 동거인 이상의 의미를 주고 있었음을 고립되고 나서야 절절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도 스치듯 울려퍼진다. 그리고 또 빠질 수 없는 것, 책과 CQ!

테베스는 <어둠의 왼손> 의 한 귀퉁이를 접고 책을 덮어 탁자 위에 놓았다. (중략) "어떻게 계속 이러고 있을 수가 있어? 어떻게 조각조각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모습일 수가 있지? (p. 104)

그러고 있자니 지하실에서 보내던 날들이 기억났다. 기계를 켜고 처음 불특정 호출 신호인 'CQ' 를 보내던 날, 송신은 단순하고 직설적인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 132)

테베스는 고집을 부려 가지고 탄 또 다른 종이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이었다. 테베스가 종이책을 가져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난리가 났었다. 테베스는 그래 봐야 얼마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고, 테베스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탐사 감독 위원회에서 개입해 반대론자들을 막아주었다. 위원회에서 '심리학적 필요 장비'로 추가해 화물을 승인해 주었다. (p. 138)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과 로봇의 창시인 셈인 아이작 아시모프 또한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소품일 것이다. 더구나 '심리학적 필요 장비' 라는 면에서 사람이 무언가 읽는 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곤 한다. 어거스틴도 작은 소녀 아이리스도 무언가 읽고 또 읽었다. 역시 책은 꼭 필요하다! ㅎㅎ

그리고 CQ... <콘텍트> 에서 어린 소녀가 밤마다 신호를 보내며 시작하던 말 CQ... 그렇게 보내던 신호에 대한 응답이 우주에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상황이 <콘택트> 이야기 였다. 그리고 우주를 건너 만난 외계존재는 뜻밖의 부녀상봉을 선사했더랬다. 읽을 수록 <굿모닝 미드나이트> 라는 이 작품이 <콘택트> 오마주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신화도 비슷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가족을 돌보는 일보다 크고 중요했다. 설리가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마다 진은 대단한 남자였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똑똑하고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족을 위해 마음 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진은 설이에게 아버지의 소명의식을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했다. 가족보다는 세상이 더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설리에게 아버지가 없는 거라고. (p. 254)

어거스틴이 딱 한번 진짜 사랑에 빠졌을때 만난 여자가 '진' 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어거스틴과 설리와의 관계는 작품 초반에 드러난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전혀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이 끝날때까지도. 하지만 둘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아니 너무나 닮아있었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아예 아무것도 발견 못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마련한 새로 찾은 행복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을 서둘러 행동에 옮길 이유가 없었다. 처음으로 어거스틴은 무지에 만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목소리를 찾는 일은 어거스틴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p. 289)

그가 북극곰 발자국을 발견한 이야기를 할 때, 설리는 그에 대해 뭔가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완고한 고독이었다. 그는 지금 세상의 끝에 와서조차, 자신이 외롭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어떻게 얻어내야 할지는 모르면서도 관계 맺음에 갈급하며, 발자국 하나를 발견하고, 다른 존쟁 대한 최소한의 증거만 보고도 동반 의식을 느꼈다. 현재의 고립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늘 그래왔던 사람이 아닐까, 설리는 짐작했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에서도, 분주한 도시에서도, 심지어 연인의 품에 안겨서도 혼자였을 사람이었다. 설리도 그랬기에 그의 내면을 알아보았다. 설리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연결이 끊어졌다. 그 준비가 언제 될지는 늘 알수 없었지만 말이다. (p. 328)

사실 가족을 가진다는 것이 가족을 잃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다. 정말 그랬다. (p. 343) 늘 뭔가 결핍되어 있었고, 지금에서야, 이 모든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야, 설리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온기, 그리고 열림. 한 번도 자라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무언가의 뿌리들이었다. (p. 344)

전 세계적 아니 전 우주적 발견을 하길 희망했으나 아니 어느 정도는 성취했으나 고립된 순간에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원하는 건 단 한 사람의 인정이면 충분했다. 결국 돌고돌아 서로에게 와야 했다.

복닥이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 지구를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누구나 먼지같은 존재들이다. 먼지같은 존재가 하늘을 바라보면 먼지처럼 흩뿌려져 있는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보이지만 그 별빛들은 결국 허상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우주보다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바로 옆을 바라보게 하는 이 작품은 SF라기 보다는 실존적 소설이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함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삶의 가치를 전달받았다면 만족할 수도 있을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보고싶어졌다. 아니 조만간 꼭 봐야 겠다. 영화는 항상 원작보다 못하기 마련이지만 <콘택트>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번 기대해볼 만한 원작이었기에 오랜만에 영화감상타임을 기대해보련다.

"아이리스, 당신이 와서 기뻐"

"나도 기뻐" (p. 358)

ps. '옮긴이의 말' 에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의 원제인 '굿모닝, 미드나이트'는 낮을 떠나보내고 밤을 맞이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기쁨을 노래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20세기 초의 소설가 진 리스가 먼저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차용한 바 있다. 진 리스의 동명 소설은 역사 작가인 헨리 밀러와 이혼한 후 인간관계에 대한 절망과 외로움으로 써내려간 작품인데, 릴리 브룩스돌턴은 그 소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한다. 고립과 관계라는 주제를 묵직하고 솜씨 좋게 파고든 선대의 두 작품을 계승하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 뛰어넘고자 한 의도로 에밀리 디킨슨의 시 제목을 이어받은 다음, 진 리스의 소설에서 이 책의 책머리에 제사를 인용했다고 한다. (p. 371)

나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어둠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그리고 그 남자가 있었다. - 진 리스

 

어느 책에서 '진 리스' 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 와는 또다른 여성작가로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작가였다. 진 리스 와 에밀리 디킨슨 이라... 그러고 보니 <굿모닝 미드나이트> 의 작가가 여성이었나 보다. 작가 사진이 없어서 이름만 보고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 '굿모닝 미드나이트'(한밤이여 안녕) 를 찾아보았다.

한밤이여, 안녕!

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낮은 내게 싫증이 났다지만,

내가 어찌

낮에게 싫증을 느끼겠어요?

태양빛이 너무나 안온해서

나 거기서 살고 싶었지만,

아침은 나를 원치 않는대요. 지금은.

그러니

낮이여, 잘 자요!

Good morning, Midnight!

I'm coming home,

Day got tired of me –

How could I of him?

Sunshine was a sweet place,

I liked to stay –

But Morn didn't want me – now –

So good night, Day!

그런데... 왜 '한밤이여 안녕' 이라고 했을까... 굿모닝은 아침에 하는 인사 그러니까 시작하는 인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헤어질때 하는 인사처럼 '한밤이여 잘가라' 는 듯이 '한밤이여 안녕' 이라가 보다는 '안녕, 한밤!' 이 맞지 않을까? '반가워 한밤' 이라는 듯이...

여하튼 보통 밤에 자고 낮에 활동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낮에 잘자라 인사하고 밤에 굿모닝 인사를 하는 이 역설은 우주를 돌고돌아 이어지는 '관계' 에 대해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어거스틴과 설리에게는 잘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을 배경으로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희망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주인공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었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비록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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