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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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의 원작소설이라는 이 책은 3부작의 1편이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었다는 영화를 보기 전이지만 책이 나오기 전의 가제본으로 읽은 책이지만 가제본 표지를 크게 덮고 있는 남자 배우의 매력이 인상적이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뛰어넘는 또 한 번의 위험한 로맨스' 라는 홍보문구에서 대충 짐작을 하긴 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정도일 줄이야' 를 연이어 내뱉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벌써 5년째다. 죽었다가 살아난 거나 다름없다며 의사가 기적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현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의 꿈을 5년째 꾸고 있다. (p. 6)

마시모는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한 이탈리아 마피아의 가주이자 차세대 두목이다. 그리스조각 같은 완벽한 신체와 외모 그리고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이 남자에겐 당연히 여자도 많다. 하지만 총격사건 이후 한 여자의 꿈을 반복해서 꾸는 동안 그 여자를 그린 초상화를 집안 곳곳에 걸어둘 만큼 그녀에게 집착하게 된다.

원하는 건 뭐든 할 시간이 있는데,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이제껏 호텔 업계라는 시궁창엥서 너무 오랫동안 굴러서 그런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세일즈 매니저 자리에 오르자마자 나는 돌연 일을 그만두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싹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겨우 스물아홉살에 번아웃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어쩌겠나. 이미 와버린걸. (p. 20)

라우라는 폴란드 작은 마을 출신이지만 타고난 감각으로 빠르게 성공한 호텔리어였다. 하지만 번아웃으로 일을 쉬는 동안 애인과 그리고 친구 커플과 함께 이탈리아로 휴가여행을 떠나게 된다. 공항에서 마주친 검은 양복의 남자들 그리고 짙게 썬탠한 차 안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 라우라의 인생은 하룻밤 사이 격변을 맞게 된다.

밤공기는 더웠고, 난 취했다. 생일이 끝나가고 있는 지금, 어쩐지 모든 게 잘못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인도가 끝나는 곳에 이르자,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걸 깨닫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망할, 난 형편없는 길치다. (p. 48)

스물아홉번째 생일날이었는데, 애인은 신경쓰지도 않은채 자기일만 했고 친구커플도 무심했다. 라우라는 화가 난 나머지 일행과 함께 있던 호텔을 무작정 뛰어나와 거리를 헤매다 길을 잃고 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처음 보는 바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거야. 나도 공항에서 널 보기 전까지는 실제로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자, 벽난로 위에 있는 그림을 봐" 난 남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 어떤 여자의 초상화였다. 저건, 내 얼굴이잖아. (p. 57)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마시모가 찾아 헤매던 여자는 바로 라우라 였다. 현재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 라우라. 마시모는 라우라에게 제안을 한다.

"라우라, 넌 틀림없이 내 거라는 뜻이야"

"난 누구의 것도 아니야!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당신은 날 가질 수 없어! 사람을 납치해놓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란 말이야!"

"알아. 그래서 너에게 기회를 주려고. 나와 사랑에 빠질 기회를. 네 의지대로 내 곁에 머물고 싶어 할 기회를 주지. 강요하지 않을 거야" (p. 58)

라우라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당이 안 된다. 하지만 라우라의 성격은 만만치 않았기에 마시모에게 맞부딛혀 보지만 마시모가 내민 사진들을 보고 힘이 풀려 버린다.

"폴란드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발 날 집에 보내줘요"

"안타깝게도 앞으로 365일 동안은 그럴 수 없어. 1년간 날 위해 희생해줘야겠어. 네가 나를 사랑하도록 온 힘을 다해 뭐든 할 거야. 만약 네 다음 생일까지도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보내줄게. 오해하지 마. 이건 제안이 아니야. 넌 거부할 수 없어. 이건 통보야.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알려주는 것뿐이야. 물론 난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네가 원치 않는 일은 안 해. 네 의사에 반하는 일을 시키지도 않을 거고. 혹시 무서워할까 봐 말하자면, 널 강간하지 않을 거라고. 넌 내 천사니까. 너를 이 세상 누구보다 존중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너는 내 목숨만큼 소중하니까." (p. 63, 64)

궁전같은 저택에서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게다가 외모 또한 멋지기까지 한 남자가 자신을 납치해놓고는 1년간 옆에 있어야 한다고 통보한다. 다만, 그 시간 동안은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자신한다는 것이 납치를 납치가 아닌 것처럼 여기게 하는 스릴러적 로맨스 상황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저택 마당에서 배신한 조직원을 총 한방으로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마피아 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남자였다.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다. 검은 눈동자와 짙은 색 머리카락, 커다랗고 도톰한 입술, 내 뺨을 섬세하게 간지럽히는 밝은 색 수염까지. 몸매는 또 어떤가. 지금 내 엉덩이를 감싼 그의 길고 늘씬한 다리, 강한 근육질 팔, 몸에 딱 달라붙은 민소매 셔츠 너머로 보이는 넓은 가슴. (p. 73)

이 남자는 정말이지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온화한 야만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표현이 딱 맞는다. 위험하고, 거침없고, 반항을 용납하지 않지만 동시에 너무나 자상하고 섬세한 남자. 이 모든 점이 혼합된 이 남자는 무섭지만 매혹적이고, 그래서 자꾸만 알고 싶어졌다. (p. 85)

라우라가 처한 상황은 분명 무섭고 공포스럽지만 라우라의 내면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무섭고 공포스럽기엔 이 남자가 너무 매력적이다. 마시모 곁에 있게 된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라우라는 이미 마시모라는 남자에게 흔들린다. 하이틴로맨스의 19금 버전 같은 이 소설의 가벼움은 라우라의 변신에도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그때 커다란 깨달음이 다가왔다. 이 상황과 싸울 게 뭐 있어? 뭐하러 도망쳐? 바르샤바에 가봤자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 잃을 것 역시 아무것도 없어. 내가 이제껏 가졌던 건 죄다 사라졌잖아. 지금 남은 선택지는 이 모험이 펼쳐지게 놔두는 것뿐이야. 이제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왔어, 라우라. 난 이렇게 생각하고서 일어섰다. (p. 97)

번아웃 상태였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열정적인 라우라에게 번아웃으로 인한 퇴직이라는 설정은 365일간의 납치에 좀더 편한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운명적 커플이었고 무엇보다 '성적' 결합에 있어서 그러했다. 이 소설의 포인트이자 주요 내용들은 두 사람의 속궁합 확인기라고나 할까.

앞으로 내 삶은 절대 평범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겠지. 말하자면 중간중간 포르노 장면이 곁들여진 마피아 영화 같은 삶이 될 것이다. (p. 341)

라우라의 표현처럼 이 소설은 중간중간 포르노가 곁들여진 마피아 영화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에선 어디에 더 방점을 두었을지 모르겠지만 원작 소설로 보자면 앞쪽에 더 치중한 작품인듯.

"와우, 썅, 네가 해준 이야기 무슨 스릴러 소설 같아. 그것도 19금 딱지 붙은 스릴러" (p. 353)

스릴러적으로 표현하려 애쓴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그렇기엔 19금 딱지가 너무 크게 붙은 이 소설은 욕설과 포르노와 자극적 로맨스가 결합된 킬링타임용 으로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3부작 인줄 모르고 읽었던지라 한권으로 끝나지 않은 것이 좀 아쉽다. 꽤 두툼한 소설을 읽고 났음에도 결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커플의 로맨스가 얼마나 더 자극적으로 펼쳐질지는 다음 권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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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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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 한번은 만나야 할 불멸의 고전!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진짜 삶'을 찾다

철학에서 던져온 질문은 오랜 세월동안 사실 크게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삶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따라서 니체의 철학은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제대로 된 철학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니체의 철학을 먼저 읽고 나면 앞선 철학적 고찰들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해서 가끔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니체관련 책은 늘 나중에 로 미뤄두곤 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이 유명한 책이 실은 철학책은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 가깝다고 하는 설명을 읽고 나니 이 책 정도는 먼저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유명하고 자주 회자되는 책이니만큼 제대로 번역한 책을 읽고 싶었기에 출판사와 옮긴이가 중요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뢰가 갔다. 니체에 대한 첫 책이니만큼 무턱대고 본문을 바로 읽으면 어려울 것 같아서 책 뒤편의 <해설> 먼저 읽고 시작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수수께끼 같은 이 책의 부제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떤 독자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 책은 그 자체로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략) 니체는 개인적인 것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p. 579)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것은 책 속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니체가 왜 페르시아 종교 예언자의 이름을 책 제목으로 사용했느냐고 종종 묻는다. (p. 581) '그 페르시아인이 역사상 이룬 엄청난 독특성과 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성격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굳이 차라투스트라일 필요는 없지만, 선과 악의 도덕적 이원론을 정립한 차라투스트라만큼 선악의 저편에서 도덕을 새롭게 평가하고자 하는 니체의 의도에 부합하는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p. 582)

책의 제목도 부제도 수수께끼 같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내용도 온통 수수께끼 같은 책이었다. 다만 니체의 문장이 말하는 것은 늘 반대편을 의미한다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다. 예를 들어 대중을 말할때는 개인을 강조하는 것이고 믿음을 말할때는 신을 부정하는 식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반박을 위해서 종교가 대표적으로 내세우곤 하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을 부정하기위해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었다. 본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정립된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뒤흔든다. 차라투스트라보다 나은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면 책의 제목은 아마 바뀌었을 것이다.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니체가 읽은 수많은 철학 저서와 문학작품이 녹아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독특한 장르를 구성한다. 때로는 잠언으로 들리고, 때로는 문학작품으로 읽히고, 때로는 그 텍스트의 독특한 음악적 운율 때문에 악극으로 들리기도 한다. (중략) 서양의 형이상학과 기독교적 전통을 뒤집어엎기 위해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를 호출한 이 책은 성서에 대한 니체의 대답이자 패러디다. 성서는 이 책의 내용 및 형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p. 583) 논리적 추론이 생각해낸 것이라면, 영감은 불현듯 찾아온 것이다. (중략)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이미지와 비유에 내맡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마치 번개처럼 필연적으로 번쩍 떠오른 <차라투스트라>의 강렬한 영감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p. 586)

논리적으로 서술된 책이 아닌만큼 옮긴이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본문을 읽으며 주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철학과 호메로스와 괴테를 비롯한 문학고전과 바그너를 비롯한 음악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서의 패러디' 였다. 내가 성서를 읽었다면 더 제대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격렬한 분노 내지 공감을 하며 문장들의 의미를 생각해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감'어린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한번의 독서로는 가능하지 않음은 여전했을 것 같다.

니체의 '초인'은 전치사 '위버'와 '인간'이라는 뜻의 '멘쉬'의 합성어다. 인간인데 인간을 넘어서려는 인간 유형이 초인이다. 그는 인간인 한 결코 인간을 넘어선 인간일 수 없다다. 초인이 슈퍼맨이 아닌 이유다. '넘어선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지 결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p. 589) 초인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다. 초인은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대지에 묶여 있는 존재다. 초월한다는 것이 결코 전통 형이상학에서처럼 감각적 세계를 넘어서 정신적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극복과 초월은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가 '대지에 충실한 것'이다. (p. 590) 그러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에게 '대지와 짐승과 초목'을 마련해주는 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최상의 인간을 자연의 이미지로 구상한다. (p. 591)

니체는 단지 신을 배제하고 우리의 삶과 세계를 하나의 동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려 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이러한 신이 없는 시대에 세계를 이해하는 허무주의적 접근 방식의 상징이다. (p. 593)

미래의 삶을 창조하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개체가 아니라 변화하고 창조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원회귀 사상은 가능한 한 다양한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허무주의 시대에 삶의 의미와 중심을 잡아줄 실존적 삶의 형식이다. (p. 596) 영원회귀 사상은 우리가 이제까지의 헛된 삶과 미래의 의미 있는 삶, 심각한 무지의 시기와 밝은 통찰의 시기를 구별하는 시점에 우리를 일종의 사유 실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p. 597)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매력적인 철학사상가 이론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이 철학 저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논리적 추론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글의 도구는 개념이다. 철학적 글은 어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대신 추상적 개념을 논리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p. 598) 그러므로 논리적 추론을 완전히 포기하는 이론은 있을 수 없다. 이 책에는 이러한 시도들이 보이지 않는다. (p. 599)

이 책이 철학저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다. 본문에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원회귀 같은 니체의 핵심적 철학 개념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개념들에 대해 <해설>을 통한 기초지식이라도 없었다면 읽는데 곤란함을 겪었을 것 같다. 니체 철학에 대한 초행자인 나로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철학서로 읽히는 책이었다.

<차라투스트라>를 이론과 사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운 미궁에 빠진다. 그는 어디에서도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삶을 통찰하고,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삶의 지혜를 얻어가는 성찰의 이야기로 읽으면 흐릿하고 애매모호하던 상징과 비유들은 선명한 빛을 띠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구체적 삶을 사유함으로써 삶과 사상을 일치시키려 했다. (p. 599) 고대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철학을 단숨에 정당화한 것처럼, 니체는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를 썼다는 사실로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려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은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니체의 처절한 노력이 독특하고 독창적인 형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모토는 간단하다. '삶을 철학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을 산다' (p. 600)

철학적 개념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논리적으로 그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니기에 니체에 대한 첫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과욕이었던것도 하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고대그리스관련 책들이 니체의 이 책을 이해하는데 그나마 큰 도움을 주었기에 읽고나니 그나마 해볼법한 선택이기도 했다. '삶을 철학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을 산다' 는 이 책을 설명하는데 있어 최고로 명쾌한 표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삶에 관한 영감을 말과 음악과 춤을 통해 표현한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드라마'는 그리스어로 본래 우리에게 불현듯 일어나고 나타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사건은 동시에 '행위'를 뜻한다. 드라마가 '나는 행위한다' 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전달하려는 사상은 결국 차라투스트라의 삶과 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를 한 편의 드라마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차라투스트라의 드라마는 내려감으로 시작한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342에서 말하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몰락과 함께 비극이 시작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삶에 관한 비극적 인식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다. (p. 601) 떠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고, 돌아오는 것은 다시 떠나기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우리의 삶에 동반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중략) 이러한 풍경이 눈에 들어와야 비로소 그의 핵심 사싱이라고 불리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영원회귀' 사상의 윤곽이 드러난다. (중략)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말해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면 최고의 독자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고 강하게 명하지만, 그를 부정하려면 우선 함께 길을 가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를 읽는다. (p. 604)

차라투스트라는 4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드라마다. 장마다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바뀌고 그 변화를 통해 차라투스트라의 성찰도 성숙한다. 이 한권의 책을 한 번의 독서로 '최고의 독자'가 될 순 없었지만, 아는 것도 없이 니체를 부정하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와 함께 그의 길을 걸어본 것으로 만족하련다. 차라투스트라의 비극을 이제야 시작해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십 년 동안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1). 그러나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주석1) 이 책은 기독교 성서에 대한 패러디로 읽힐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을 받고 활동을 시작한 것도 서른 살 쯤이었다. <누가복음> 3장23절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그는 서른 살쯤이었다' 붓다가 영적인 삶을 살려고 출가한 시기도 그가 스물아홉살 때였다. (p. 13)

보라! 나는 너무 많은 꿀을 모은 벌처럼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났다. 이제는 그 지혜를 얻으려고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p. 14)

<논어>에서 공자는 30세를 '이립'이라고 하여 학문의 기초가 확립된 나이라 했고 40세를 불혹이라 하여 유혹되지 않는 나이라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도 예수도 붓다도 '이립'을 하고 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불혹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려는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자신을 봐줄 사람들이 필요했기에 산을 내려갔다. 이 '내려감'으로 인해 차라투스트라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제 아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을 사랑하지는 않아. 인간은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죽이고 말 거야 (p. 16)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가면서 만난 첫번째 사람은 '성인'이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게 됐기에 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와 헤어지며 생각한다.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 (p. 18) 하지만 이 짧은 만남은 역설적이면서 웃프다. 차라투스트라 본인도 십년간 숲속에 살다가 이제 내려가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p. 19)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내려가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들은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p. 23)

나는 이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인간이다.

이제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다. 이제는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의 싹을 심을 때다. (p. 26)

차라투스트라는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시장에 군중이 많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가서 말했다. '가르치겠다' 라고.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깨달은 지혜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었고 조롱했다.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혜가 지혜인줄 모르는 비극의 시작이다.

나는 목자나 무덤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군중과 말하지 않으리라. 죽은 자와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보여주고, 초인에 이르는 계단을 보여주리라. (중략) 나의 목표를 향해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머뭇거리는 자와 게으른 자들은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리라. (p. 38)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짐승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위험한 길을 간다. 나의 짐승들아, 나를 이끌어다오! (p. 39)

다 읽고 정리하면서 다시 보니 이 책은 수미일관의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교적 짧은 에피소드인 '머리말'에서의 마무리는 이 책의 마지막장의 장면을 미리 드러낸 것이었다. 축제, 몰락의 길, 짐승들.

주석2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문장은 불교 경전에서 붓다의 설법이 끝날 때 반복되는 문장을 모방한 것이다. '얼룩소'는 붓다가 출가하여 방문했던 도시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p. 47)

그대들은 이웃 사람 주위로 몰려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건대, 그대들의 이웃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 나쁜 사랑이다. 56)

주석56) <마태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p. 113)

4장 주석22) <마태복음> 26장 20절,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차라투스트라의 짐승인 독수리, 뱀 그리고 나귀를 포함하면, 차라투스트라의 만찬에 참석한 자도 모두 열 둘이다. (p. 498)

본문의 곳곳에서 성서를 비튼 곳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표현방식은 동양경전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머리말 이후 시작되는 본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로 에피소드들이 마무리되곤 하는 것이 '아멘' 을 비튼 것 같기도 하고 '공자왈' 같은 동양적 분위기를 흉내낸 것 같기도 한 일종의 후렴구였기 때문이다. '머리말 '이후 본문의 많은 서술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말하는 형식인데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과 비슷해서 더 그러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에서의 대중들을 떠나고 난 이후의 여정은 좀 애매하다. 어디서 갑자기 '제자들'이 등장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차라투스트라는 본격적으로 '가르침'들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꾸며대고 신을 갈망하는 자 중에는 언제나 병든 자가 많았다. 그들은 인식하는 자와 덕 중에 가장 새로운 덕인 정직을 격렬하게 미워한다. (p. 57)

나는 그대들의 길을 가지 않는다. 그대들 몸을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결코 초인에 이르는 다리가 아니다! (p. 63)

나는 급류가 흐르는 강가의 난간이다. 붙잡을 수 있는 자는 나를 붙잡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p. 71)

한때 정신은 신이었다가, 다음에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는 심지어 천민이 되었다.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p. 73)

국가는 낡은 신을 정복한 그대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본다. 그대들은 전투에 지쳤고, 지친 나머지 이제 새로운 우상을 섬긴다!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는 자신의 주위에 영웅과 명예로운 자들을 세우고자 한다! 이 냉혹한 괴물인 국가는 기꺼이 양심이라는 햇볕을 쬐고자 한다! 그대들이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숭배하면, 국가는 그대들에게 무엇이든 주려 한다. 그렇게 국가는 그대들의 빛나는 덕과 그대들의 자랑스러운 눈길을 매수한다. 국가는 그대들을 미끼로 삼아 많고 많은 군중을 유혹하려 한다! 그렇다. 그러기 위해 지옥이라는 예술품, 신성한 영광으로 장식되어 썰렁거리는 죽음의 말(馬)이 고안되었다! 그렇다 많은 사람을 위한 죽음이 고안되었다. 스스로를 삶이라고 찬미하며 선전하는 그런 죽음이. (p. 91)

여인에게는 아직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여인들은 여전히 고양이요 새다. 또는 기껏해야 암소다. (p. 106)

나는 그대들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가르친다. 벗은 그대들에게 이 대지의 축제요, 초인을 예감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p. 115)

여자에게 있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그리고 여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임신이다. (중략) 남자는 전쟁을 위해 교육받아야 하고,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략) 여자는 보석같이 순수하고 섬세한 장난감이어야 한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세계의 덕들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이어야 한다. 별빛이 그대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그대들의 희망이 '나는 초인을 낳고 싶다!' 이기를. (p. 123)

결혼. 창조한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 하나를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를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를 실현하는 상대방에 대한 외경심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p. 131)

'얼룩소'라는 도시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설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가르침들은 굉장히 고대그리적인 내용들이었다. 니체에게도 철학의 시작은 고대그리스였던 것일까, 니체 본인이 고대그리스철학에 경도되었기 때문인 것일까. 여하튼 마무리는 기독교에 대해 신에 대해서였다. 어쩌면 이러한 1부의 마무리가 차라투스트라 철학의 시작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 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 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선하고 의로운 자들의 증오와 함께 히브리 사람들의 눈물과 비애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혔다. (p. 136) 그는 황야에 머무르며 선하고 의로운 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는 사는 법을 배우고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게다가 웃음까지 배웠을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나의 형제들이여!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그 젊은이의 사랑은 미숙했고 인간과 대지에 대한 그의 증오도 미숙했다. 그의 심성과 정신의 날개는 여전히 묶여 있어 무거웠다. 그러나 젊은이보다는 성년의 남자가 더 아이답고 그만큼 덜 우울하다. 성년의 남자는 죽음과 삶을 더 잘 이해한다. (p. 137)

그대들은 아직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대들은 나를 만났다. 신도들은 언제나 이렇다. 신앙은 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참으로, 나의 형제들이여! 그때는 아를 잃어버린 자들을 다른 눈으로 찾을 것이고, 그대들을 다른 사랑으로 사랑할 것이다. (p. 146)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147)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아마도 니체가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그 대담성에 자주 놀라게 되는 책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으로 자신의 동굴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깨달음을 얻었다.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예수처럼 (형제들에게) 말했다면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공자처럼 혹은 붓다처럼 (벗에게 때론 제자들에게) 말한다.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사랑을 표현했다면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성찰을 표현한다.

가장 좁은 틈새에는 다리를 가장 늦게 놓는 법이다. (p. 194)

길고긴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저 문장이 가장 좋았다. 어쩌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바와 별 상관이 없거나 혹은 반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문장이겠으나 앞뒤사정 다 빼고 그저 저 문장 하나만 딱 떼놓고 읽었을 때 저 문장이 나는 참 좋았다.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소리없이 말했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말을 하고 부서져라!"

이에 나는 대답했다. "아, 그것이 나의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좀 더 고귀한 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 앞에서 나는 부서질 만한 가치도 없다" (p. 268)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소리없이 말했다. "그들의 조롱이 무슨 상관인가! 그대는 복종을 잊어버린 자다! 이제 그대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 (중략)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폭풍우를 몰고 오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움직인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올 수밖에 없는 자의 그림자로서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명령할 것이고, 명령하면서 앞장서 걸어갈 것이다" (p. 269)

마지막으로 무언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과일은 익었으나, 그대는 그대의 과일에 어울릴 만큼 익지 못했구나! 그러므로 그대는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대는 더 무르익어야 한다" (p. 270)

2부에서 끝에 다다라서 다양한 가르침들을 설파하던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고요한 시간'이 말을 걸었다. '나의 무서운 여주인의 이름'(p. 266)이라고 표현한 '가장 고요한 시간'은 결국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용기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3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배를 타게 된다. 배들의 출발지가 '행복의 섬' 인 것으로 보아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머물렀던 곳은 아마도 '행복의 섬'이었나 보다. 배에서 내려 뭍에 오른 차라투스트라는 곧바로 그의 산과 동굴로 가지 않았다.

나는 이들 군중 사이를 지나가며 많은 말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일 줄도, 간직할 줄도 모른다. (p. 308)

여러 길들을 지나 '얼룩소'라는 대도시를 스쳐 다시 그의 동굴과 그의 짐승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가 3부에서 말하는 가르침들은 이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적인 내용들이었다.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것이 이제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 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p. 352)

동굴에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성찰을 거듭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느날 아침 쓰러진다. 그런 그를 그의 짐승들이 보살핀다.

마침내 이레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장미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냄새를 맡으며 즐겼다. 그때 그의 짐승들은 그와 이야기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p. 388)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그대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의 교사다. 이것이 이제 그대의 운명이다! 그대가 최초로 이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이 커다란 운명이야말로 바로 그대의 최대의 위험이자 병이 아닐 수 있겠는가! 보라,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이 영원히 회귀하고, 우리 자신도 함께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실을, 또 우리가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존재했으며, 만물도 그러했다는 사실을. (p. 394)

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이제 나는 죽어서 사라진다. 나눈 무가된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죽게 된다. 하지만 내가 얽혀 있는 원인의 매듭은 회귀하고, 이 매듭은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나는 다시 온다. (중략) 위대한 대지의 정오와 인간의 정오에 대해 다시 말하기 위해서이며, 다시 사람들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서다. 나는 나의 말을 했고, 나의 말 때문에 부서진다. 나의 영원한 운명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예고자로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제 몰락하는 자가 그 자신을 축복할 때가 왔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끝난다" (p. 395)

자신의 영혼과의 대화 혹은 악극에 나오는 노래로 마무리 되는 3부에 이어 4부는 세월이 좀 흐른 시점이다.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짐승들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일상을 보내던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느날 예언자가 찾아온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가?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우르릉 거리며 포효하는 소리가 올라오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자, 그때 길고 긴 외침이 들려왔다. 심연들이 서로에게 던지고 떠넘기는 외침이었다. (p. 427) 어느 심연도 그 외침을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그 외침은 불길하게 들렸다. 차라투스트라가 마침내 말했다. "그대, 나쁜 예언자여, 저것은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며, 인간의 외침이다. 검은 바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곤경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죄, 그대는 이 죄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은가?" "동정이다!"예언자는 넘쳐흐르는 마음으로 대답하면서 두 손을 쳐들었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그대를 그대의 마지막 죄로 유혹하려고 온 것이다" (중략) "저기서 나를 부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자 예언자가 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무엇을 숨기는가? 그대를 향해 외치는 자는 우월한 인간이다." (p. 428) 그대가 말하는 우월한 인간에 대해서는, 좋다! 나는 즉각 저기 숲속에서 그를 찾겠다. 그곳에서 그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곳에서 사악한 짐승에게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의 영역 안에 있다. 내 영역에서 그가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p. 430)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를 동굴에 남겨두고 숲으로 발길을 뗀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향해, '우월한 인간'을 찾기 위해. 그러나 숲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다양한 존재를 만나고 만날때마다 대화를 나누고는 자신의 동굴로 보내놓고나서 또 돌아다녀봐도 차라투스트라는 헛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스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동굴을 마주하고 섰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 다시 크게 들려왔다. 이것저것 뒤섞인 길고도 묘한 외침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외침에 여러 목소리가 합쳐져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멀리서 들었더라면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외침처럼 들렸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동굴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보라! 이 같은 아우성 뒤에 어떤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거기에는 그가 낮에 만났던 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슬픔에 잠긴 예언자, 오른편 왕과 왼편 왕,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 늙은 마술사, 교황,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 그리고 나귀가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더없이 추악한 자는 하나의 왕관을 쓰고 두 개의 자줏빛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p. 489)

"그대들 절망한 자들이여! 그대들 유별난 자들이여! 내가 들었던 것이 그대들의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제 알겠다. 내가 오늘 헛되이 찾아다녔던 자, 곧 우월한 인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는지를. 우월한 인간, 그가 바로 나의 동굴에 앉아 있다니! 그러나 놀랄 일이 무언가! 제물로 바친 꿀과 나의 행복에 대한 교활한 감언으로 그를 나에게로 유혹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p. 490)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보낸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숲에서 만나 자신의 동굴로 보내놓은 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우월한 인간'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 이 산속에서 기다려온 것은 그대들이 아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저 산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대들과는 아니다. 그대들은 우월한 인간들이 오고 있다는 조짐으로만 나에게 왔을 뿐이다. 그대들은 커다란 동경, 커다란 구역질, 커다란 권태를 가진 인간들이 아니며 그대들이 신의 잔재라고 부른 자들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세 번을 말하자면 아니다! 나는 여기 산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오지 않는 한 나는 여기서 단 한 발짝도 떼지 않을 것이다. 우월한 인간, 더 강한 인간, 더 승리하는 인간, 더 쾌활한 인간, 몸과 영혼이 반듯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웃는 사자들은 오고야 말 것이다. (p. 496)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굴에 있는 존재들이 결코 우월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만찬을 벌이려 한다. 동굴에 있는 존재는 예수와 열두제자 처럼 차라투스트라와 열두 존재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역사책에서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저 기나긴 식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잔치에서는 오직 우월한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p. 501)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에 있는 열둘에게 가르침을 전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동굴밖으로 잠시 나갔을때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외에는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언행을 한다. 동굴로 돌아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들과 마지막 축제를 벌인다. 나귀축제.

좋다! 내가 깨어났는데도, 그들은, 이 우월한 인간들은 아직 잠들어 있다. 그들은 나의 참된 길동무가 아니다! 내가 여기 나의 산에서 기다리는 것도 그들은 아니다. (p. 571) 그들은 아직도 나의 동굴에서 잠들어 있고, 그들의 꿈은 아직도 나의 수많은 한밤중을 씹고 있다. 나의 말을 경청하는 귀, 순종하는 귀가 그들의 사지에는 없다" (p. 572) 보라, 더 기이한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는 자기도 몰는 새에 어떤 무성하고 따듯한 털 뭉치 소으로 손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와 동싱 그의 앞에서 포효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드럽고 긴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징조가 나타났다" (중략) "나의 아이들이 가까이 왔구나. 나의 아이들이" (p. 573)

4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이 책을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사자' 가 등장한다. 이 사자의 등장을 보며 1부의 첫머리에 나왔던 '낙타'를 기억해야 한다. 머리말이 끝나고 본문인 1부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의 그 '낙타' 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주석16- 고대 이란어 차라투스트라는 인도-이란어의 어원에 딸면 '낙타'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낙타를 소유하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지를.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많이 있다. 이 강력한 정신, 인내력 많은 정신의 내면에는 외경심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무엇이 무거운가? 인내력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을 잔뜩 싣고자 한다.(p. 43)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은 '낙타를 소유하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 이라는 것만으로도 니체에게 상징적인 이름이 될 수 있었다. 낙타는 사람이 타기에는 불편하지만 사막에서 짐을 나르는데 더할나위없이 유용한 동물이다. 낙타는 오로지 '짐'을 나르는 데에만 사람에게 쓰인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동안 가르침과 성찰과 깨달음의 말을 풀어냈던 것은 결국 그가 지녔던 정신적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번째 변신이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여기에서 그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의 적이 되려 하고, 최후의 신의 적이 되려 한다. 승리를 위해 정신은 이 거대한 용과 맞붙어 싸우려 한다. 정신이 더는 주인과 신으로 부르고 싶지 않은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가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원한다' 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 한다' 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정신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비늘 짐승으로서,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p. 45)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가 필요하다. (p. 46)

그 사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동굴에서 나온 다른 열둘에게 포효하자 모두 달아나버렸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외친다.

아,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잉, 어제 아침 저 늙은 예언자가 내게 예언했던 것은 바로 그대들의 곤경에 대해서였다. 그는 그대들의 곤경으로 나를 유혹하여 시험하려고 한 것이다. (p. 574) 나의 마지막 죄로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한번 자신 속으로 침잠했고, 다시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동정이다!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청동빛으로 변했다. "좋다! 그것도 이제는 긑이다!" 나의 고뇌와 나의 동정,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내가 행복을얻으려 애쓴단 말인가? 나는 나의 일을 위해 애쓰고 있지 않은가! 자! 사자가 왔다. 나의 아이들도 가까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왔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이제 솟아오르라, 옷아오르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p. 575)

낙타 그리고 사자 그 다음 변신의 내용을 이 마지막 페이지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며 책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아이가 되는지를. (p. 46~47)

차라투스트라는 낙타로서 정신적 짐을 내려놓는 기나긴 과정을 거쳤고 사자가 찾아와 마지막 유혹을 몰아냈으며 자신의 짐승들이 곁에서 아이들로 함께 하고 있게 됨으로써 혼자가 아닌 혼자로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긍정의 에너지를 얻었다. 어쩌면 아익 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동굴을 떠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난다. '태양' 과 '번개' (책에서 니체가 강조하는 용어들) 라는 고대그리스철학적 의미에서 '위대한 정오'는 중요한 시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이가 되어 그만의 '위대한 정오'를 이제는 맞이할수있게 됐기에 오랜 거처인 동굴을 떠난 것인 걸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산 위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힘차게 그의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허게 말했다>의 끝. (p. 575)

책뒤에 '니체 연보'가 나오는데 '1873년 눈이 극도로 나빠지다' 와 '1881년 타자기를 주문하다' (p. 606) 문장이 나온다. 한 사람의 일생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연보에 '타자기'를 주문한 것이 나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다. 다행히도 최근에 읽은 책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니체의 문장은 원래는 난해한 만연체였다고 한다. 그러나 눈이 나빠지고 타자기로 글을 쓰게 되면서 만연체로서의 문장구사가 힘들어졌기에 문체가 변했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은 타자기 구입 후 1883년~1885년에 출판되었다. 직접 만연체를 구사하며 썼던 책이 아니었기에 그나마 내가 읽을 만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기묘한 책이었다. 철학책이 아니면서 철학이 읽히기도 했고 소설책이 아니면서 문학적으로 읽히기도 했으며 종교서는 더더욱 아님에도 종교적 깨달음이 넘치는 책이기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항상 떠나지만 동굴로 매번 돌아오다가 마지막엔 정말로 동굴을 떠난다. 아마도 이번엔 다시 동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 같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자신의 삶을 동굴에서 꺼내어 힘차게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그 철학이 그 삶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는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아직 짐을 가득 실은 낙타이기에 생각해야할 짐이 너무도 많아서 니체의 동굴속에 한참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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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테크 - 자전거부터 인공지능까지 우리 삶을 바꾼 기술 EBS CLASS ⓔ
홍성욱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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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변화시킨다

자전거, 총, 인쇄술에서 인터넷, 아이폰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익숙한 기술 뒤에 숨겨진 놀라운 이야기

 

어떤 주제에 대해서 시리즈로 나오는 책은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들이 큰맘 먹고 사주는 전집처럼 다채롭고 알차면서도 전권이 다 만족스럽지 않기 마련인데 최근 좋은 시리즈를 알게 되어 반갑다. 바로 EBS BOOKS에서 나오는 책들이다.

인간이 기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에 의해 많은 변화를 겪는 것은 결국 인간이었다. 이 책은 그러한 연결점 혹은 전환점에 있어 기술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미처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들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재밌으면서도 유익한 책이었다. 저자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인문학과 엔지니어링을 이어주고 있다고나할까.

우리는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기술을 이해하는 가장 용이하면서 현실적인 방법이 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기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기술이 인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했고,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역사의 장을 하나씩 열어보자. (p. 24)

이 책은 역사서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기술들의 첫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편집앨범 같은 책이다. 그렇게 보여지는 장면들을 통해 기술을 통해 진짜 보아야 할 것들, 빼앗아가기도 하고 더해주기도 하는 기술의 양면성, 사람과 기술의 결합이 낳는 변화, 기술이 가져온 의외의 결과들, 정치에 관여하는 기술, 의도를 담고 있는 기술 등 기술이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기술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야 진정 기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818년에 독일의 귀족이었던 카를 폰 드라이스라는 사람이 선보인 드라이지네가 세계 최초의 자전거다. 드라이지네는 바퀴 두 개를 이어서 안장을 얹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도록 만들어졌다. 이 첫 자전거에는 체인은 물론 페달도 없었다. (p. 30) 페니파딩이라는 자전거 대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안전 자전거를 만들어내는 데는 여성의 역할이 컸다. 또 그런 안전 자전거가 여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p. 42)

바퀴는 대략 5,000년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바퀴 두 개를 이으면 만들어질 자전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굉장히 늦게 만들어졌다. 바퀴를 단 수레나 전차 등 동물에 의해 수단으로서 사용하던 바퀴를 인간이 직접 올라타고 직접 조종하는 것으로의 발상이 이렇게 더뎠다는 것도 새삼 의외이기도 했지만 자전거의 발달이 여성의 이동권과 그렇게 가능해진 이동의 자유를 바탕으로 진정한 자유를 주장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진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과 기술은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상호 관계 속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역사를 함께 만들어오고 있었다.

1860년대에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후장식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전장식 총기를 사용하던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했다. 독일 통일의 파업 뒤에 후장식 소총이라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p. 51) 기관총은 '도덕적 효과'가 있다고 간주되었는데, 몇 명의 군인이 수백 명의 원주민과 대적하면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유럽인들이 덜 죽는 것이 절대 도덕이었고, 아프리카 '야만인'의 희생은 염두에 없었다. (p. 52)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병사는 자신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반면에 기관총을 사용할 때는 조준을 하지 않았다. 몰려오는 적을 향해 그냥 방아쇠만 누르고 있으면 되었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악마 같은 총이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p. 54) 아마 후장식 라이플이나 기관총이 없었더라도 유럽은 아프리카를 침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능 좋은 총기가 없었다면 그 침략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p. 56)

총의 발달을 보며 자연스럽게 '총 균 쇠' 가 생각났다. 화약의 발달은 동양이 먼저였으나 총의 발달은 서양이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침략이 세계의 지도를 바꾸었고 아프리카에 남겨진 총기들은 여전히 화약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중이다. 무기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죄책감은 덜어져갔다. 살상이 점점 더 쉬워져온 셈이다. 인간이 어떤 기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확 뒤집어질 수 있음을 총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었다.

증기기관은 이미 존재해 있었고, 와트가 한 일은 분리 콘덴서를 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허와 만료 기간이 연장된 상황이었다. (p. 73) 와트의 특허가 만료되기 전에는 어떤 증기기관의 특허도 신청되지 않았고, 와트의 특허가 만료된 1800년에 리처드 트레비식이라는 발명가가 고압 증기기관에 대한 특허를 신청한다. 나중에 열차나 기선에 사용된 증기기관은 모두 와트의 저압 증기기관이 아닌 고압 증기기관이다. (p. 74)

우리가 알고 있는 기술의 역사 아니 과학의 역사로 불리는 것들 중에선 의외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부분들이 상당히 있다. 증기기관의 발명가로 와트가 알려져있지만 사실 증기기관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실제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킨 증기기관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아니었다. 이런 사례는 이 책에서 여러 개 찾아볼 수 있는데 유명한 에디슨이나 벨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발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렇다면 그 기계장치와 실제 살아 있는 생명체를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락 생각했다. 프랑시니 형제보다 천 배, 만 배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신일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신이 만든 기계라는 결론이 나온다. (p. 81) 그런데 데카르트는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동물에는 없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몸, 즉 인간 육체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p. 82) 자동인형들은 이 기계 세상에 대한 일종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자동인형들은 이렇게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p. 88) 자동인형은 '세상은 기계다. 동물도 기계이며 인간의 몸도 기계다. 그러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숙련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p. 92)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신기했던 것이 '자동인형' 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로봇인 셈인데, 그 옛날 그 많은 톱니바퀴들로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을 읽으며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철학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노동에 대한 기계와 인간의 역할은 지금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 이것은 뒤에서 AI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인쇄술의 사례는 비슷한 기술이 서로 상이한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사회 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p. 101)

인쇄술 혁명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인쇄술이 지식의 전달을 획기적으로 가속화하여,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등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소 기술결정론적인 성향을 띤 해석인데, 이러한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르네상스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고, 종교개혁은 인쇄술과 무관하게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평민은 인쇄술 발명 이후에도 문맹이어서 신교의 교리들을 담은 인쇄물을 읽을 수 없었다. 또 16~17세기 과학혁명의 요체인 수학적 방법과 실험적 방법의 도입과 인쇄술의 연관을 찾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인쇄술이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낳았다고는 보기 힘들다. (p. 107)

인쇄술의 발달을 보며 동양과 서양에서의 다른 변천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기존에 익숙하게 알려져 있던 인쇄술과 르네상스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것도 의미있었다. 인쇄술처럼 같은 기술도 다른 사회문화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수긍기 갔지만,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다' 라는 오랜 격언을 뒤집는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사례들은 무척 새롭게 읽히는 부분들이었다. 카메라와 전신의 초기 모습들 그리고 뒤에 나올 포드 자동차의 확산에는 만들어낸 것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발명이라는 역발상이 숨어 있었다.

자주 붙여 사용하는 글자를 가급적 멀리 띄워 배열한 자판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쿼티 자판이었다. (p. 140) 드보락이 만든 자판이 60~70퍼센트 더 효율적이었고, 오타를 적게 낸다는 것도 발견한다. (p. 142) 처음 레일을 만들고 기차를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발명가 조지 스티븐슨이었다. 그는 기차를 발명하기 전에 탄광에 마차가 다니는 레일을 깐 사람으로, 마차가 다니는 나무 레일 간 폭을 1,435미터로 만들었다. 나중에 열차가 커지고 무거워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차 레일 간 폭을 그대로 기차에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차의 레일 간 폭은 왜 1,435미터였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마차는 말 두 마리가 끌었는데 말 두 마리가 바짝 붙어서 잘 끌고 갈 수 있는 넓이가 1,435미터였던 것이다. (p. 147)

타자기의 발달이 남긴 것은 우리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쿼티 자판 이다. 타자기의 자판 배열이었던 쿼티 자판의 효율성을 높은 드보락 자판이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기존의 익숙한 것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타자기도 아닌 컴퓨터 스마트폰의 시대로 넘어왔음에도 여전히 타자기시대의 비효율적인 쿼티 자판을 사용한다. 그리고 말들의 엉덩이 간격으로 시작된 레일의 역사는 기차로 운반할 수 있는 우주왕복선의 로켓부스터 폭도 넓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선택한 기술은 때론 효율성 면에서 비이성적 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그 기술을 선택하는 것인 인간인데 인간의 선택이 늘 발달적이진 않다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참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레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굳이 다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특허를 돌연 취소해버렸다. 하지만 벨은 취소하지 않았고, 끝까지 특허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벨은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더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벨과 그레이의 차이였다. (p. 174)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보다 전력 시스템 전체를 고안했던 시스템 디자이너 혹은 시스템 창안자로서의 역할과 의미가 더 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처음부터 그랬듯 끝까지 직류를 고수했다. (p. 201)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인 새뮤얼 랭글리도 비슷한 비행 실험을 했지만 멋지게 실패했다. 자전거 수리공이 저명한 과학자를 누른 것이다. (p. 210) 사람을 태우고 비행한 첫 비행기는 운 좋은 자전거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라이트 형제는 기존의 과학 이론을 습득하고 새를 관찰해 날개의 제어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론과 현장 시험이 맞지 않자 이론을 의심했고, 새로운 계수를 구하기 위해 창의적인 자전거 실험을 고안해서 실험했으며, 이 실험에 문제가 있자 풍동을 개발해 정확한 데이터를 얻어냈고, 이런 데이터에 근거해 비행기 날개와 프로펠러 디자인을 개선했다. (p. 219)

아르파넷의 탈중심적 혹은 탈중앙집권적인 특성의 기원은 베린의 분산된 네트워크 개념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핵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의미가 없듯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네트워크는 극단적으로 분산적이고 탈중앙집권적인 것이어야 했다. (p. 234)

동시에 특허신청을 했던 두 사람들 특허권을 따낸 사람은 벨이었고 그렇게 벨이 전화의 발명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레이는 당시 독보적인 기술이었던 전신 분야의 전문가였기에 전화기의 미래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전력시스템을 회기적으로 발전시킨 에디슨이었지만 교류가 등장했을때 직류보다 나은 교류의 장점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력시스템은 교류를 선택했다. '랭글리의 법칙'을 발견하며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비행기 연구에 몰두했던 랭글리는 실험실 안에서의 실험을 너무 믿었다. 결국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에 대한 과한 신뢰로 과학적 발견에 필수적인 새로운 의심을 하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반면에 폐쇄적인 군조직에서 시작된 인터넷의 연구는 처음부터 개방적인 분위기였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다.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전문가들에게서만 가능하진 않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던 사례들이었다.

그전에는 기계가 단순 작업을 했지만 포드 공장에서는 사람이 하루 종일 단순 작업을 반복하고 기계는 아주 고도로 세분화된 노등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으로 느껴진다. (p. 249) 소비자의 요구가 있어서 물건이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명이 되고 나니 그다음에 소비자의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량소비의 욕구가 있어서 대량생산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대량생산이 되어 물건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니 대량소비라는 욕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 253)

튜링을 컴퓨터의 시조로 삼으려 했던 많은 시도는 모두 컴퓨터라는 것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수학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컴퓨터의 기원이 추상적이고 심원한 수리철학적인 문제에 있었다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p. 261) 베비지는 젊었을 때 천문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천문대는 가장 복잡하고 긴 계산을 했던 곳으로, 계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다. 당시부터 천문대에서 계산하는 사람들의 직종을 일컫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컴퓨터 였다. 계산하는(compute)사람(er), 그러니까 컴퓨터라는 말은 원래 사람을 지칭했다. (p. 263)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IBM), 우리가 잘 알고 있는 IBM 컴퓨터를 만들어낸 회사가 바로 인구조사 데이터를 처리하는 도표기를 만들었던 회사에서 비롯되었다. (p. 273)

기술과 인간은 공존한다. 함께 동고동락한다.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인간을 단순노동의 기계처럼 만들기도 했지만 대량소비의 주체로 만들기도 했다. 튜링을 컴퓨터의 시조로 보지 않고 방직기의 천공카드를 시초로 본 것을 저자는 자신의 의견이라 말하지만 천공카드를 활용한 베비지의 컴퓨터 시조로서의 역사는 다른 책에서 읽은바 있었다. 어쨌든, 컴퓨터가 계산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컴퓨터기기 그러니까 거대한 계산기계의 등장으로 수많은 컴퓨터(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을 보면서 과학기술의 발달이 없애는 직업들에 대한 문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구나 싶어서 그렇다면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새로운 일자리의 생성으로 서로 상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폰은 한 사람에 의해, 특히 스티브 잡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다. 잡스는 애플이 전문성을 갖지 않은 휴대전화 개발에 회의적이었고, 전망을 가진 회사의 임원들은 잡스를 설득해야 했다. (p. 289)

1956년의 일이었다. 인공지능, AI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p. 297)

처음에 체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체스를 두는가를 연구해서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체스를 두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계산을 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p. 303) 컴퓨터 프로그램에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인간의 방식대로 체스를 두는 것이 아니라 높은 확률을 계산해서 체스를 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둑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대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었다. (p. 304)

역시 유명인의 이른 죽음뒤에는 신화적 허구가 덧붙여지기 마련인가 보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일화들이 그러했다. 스티브 잡스 덕에 세상에 아이폰 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스티잡스 때문에 세상에 아이폰이 등장하지 못했던 것을 거꾸로 알고 있는 현실을 보며 관계자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AI 가 최신 용어가 아니었다는 점도 새로웠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이 왜 인간과 같을 수 없는지 명쾌해져서 좋았다. 인공지능은 그저 아주 빠른 계산기일 뿐이었다. 확률로 결정하는 것과 인간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보통 바둑판이 가로세로 19줄이라고 하는데 승승장구 하던 인공지능에게 가로세로 20줄 바둑판을 주면 인간만큼 바둑을 두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의 바둑능력은 아~무 상관없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은 계산기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종합해서 결과를 내는 것인데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p. 306) 쉽게 말해서 더 많은 사람이 관여할수록 자동차는 더 자율적이 되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동차는 혼자 운행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매우 많은 사람의 노력과 노동이 합쳐진 결과물인데 자동차가 자율적으로 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운전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전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p. 307) 어떻게보면 인공지능의 능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편향적이면 인공지능도 편향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p. 308) 감저을 덜어냈기 때문에 인간보다 훨씬 더 객관적이고 투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공지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의 한계와 편견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p. 309) 기술과 인간은 항상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는 마치 기술이 독자적인 생명을 가진 것처럼,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 기술의 대표적인 예인 자율주행 자동차 또한 인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가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인공지능 기술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술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특정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p. 310)

인공지능은 사실 자율적이지 않다.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계산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들기 나름이고 인간이 준 데이터에 따라 편향적이 될 수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600백만불의 사나이'의 눈이나 손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나는, 여러분은 이미 사이보그다. 스마트폰은 내 심장의 일부를 가지고 있으며, 내 몸은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사이보그 관계'다. 이 책에서 나는 인간과 기술의 다양한 방식의 결합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확장되어왔는지를 보이려 했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이제 사이보그 세상의 첫 '시민권'을 득한 셈이다. 새로운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 (p. 314)

기술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고 때로는 의외의 결과들로 인한 새로움을 즐기며 밝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사이보그 세상의 시민으로 마무리한 마지막 문장을 보며 갑자기 섬뜩해지는 기분이다. 기술이 바꿔온 우리의 삶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의식적으로 적응해 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서... 새로운 기술의 발견 뒤엔 늘 새로운 질문이 있었다. 그 새로운 질문을 이제 우리의 삶에 던져야 할 것이다. 우리 삶에 필요한 기술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때마다 인간은 그 기술의 배경과 역할 그리고 지향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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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부 다시, 학교 - 지식은 어떻게 나의 것이 되는가
EBS 다큐프라임 <다시, 학교> 제작진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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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교육 강국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변화

세계적 석학부터 현장 최고 전문가에 이르는 통찰

공부와 학교를 둘러싼 숱한 질문에 대한 놀라운 해답을 만나다

지식은 어떻게 나의 것이 되는가? 이 책은 이 거대한 질문의 답을 학교공부에서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시험부터 수업법까지 수많은 교육상식, 그렇다 상!식! 이라고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을 뒤집고 밝혀낸 학습의 메커니즘에 대해 심층 탐구한 이 프로젝트는 13개국, 5000명의 학생과 교사, 학부모 그리고 30명의 전문가를 만나며 16개월동안 진행한 대장정이었다.

도대체 지금 우리의 교육은 어떤 상황이며,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p. 6) 기존에 우리 교육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 '우리는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킨다'라는 건 사실과 달랐다. 사교육을 제외한 공교육의 교육시간은 다른 나라보다 결코 많지 않았고, 기초학력은 생각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다. (p. 7) 학생들이 체감하지 못하고, 교사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가 과연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더 현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그 현장에 대한 탐구로 찾아낸 결과가 응축된 것이다. 바로 '배움'에 대한 재정의이다. (p. 9)

공교육에 대해 만족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항상 교육제도와 교육정책엔 문제가 많아 보였다. 그래서 자주 바뀌고 변화해 왔지만 그렇다고 나아진것 같지도 않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제대로 파악해보지 않고 개선해온 교육정책들은 결과적으로 공교육의 효과를 약화시킨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핵심을 놓친 것이 아닐까? 교육의 핵심은 '배움' 인데 말이다. 이 책은 학교에서 어떻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인식부터 환기시킨다. 그리고 기존의 얕은 인식에서 지적되온 문제점들이 정말 문제인건지 닫시 묻는다. 예를 들자면 '시험' 같은 것.

시험이 정말 나쁜가? 아이들은 시험을 통해 성장한다. 시험점수가 몇 점 이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함으로써 아이들은 배우고 자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략)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서열을 매김으로써 발생하는 차별이 문제인데, 이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등수를 매기는 것이 교육적이지 못하고 객관식 문제가 충분히 앎을 측정할 수 없다고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교육적이지 않다.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정확히 확인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착각이다. 이를 충분히 확인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교육적인 자세이다. 부모와 교사가 시험의 효과를 정확하게 인지할 때 아이는 성장할 수 있고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공교육의 변화는 그런 수많은 착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p. 10)

제도가 문제라기 보다는 적용방법이 문제였고 적용방법이 문제라기 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러한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그리고 생생하게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교육격차가 심화된 지금 더욱 중요하게 읽어봄직한 내용들이었다.

새 교육과정에서는 많은 양의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을 지양한다. 대신 '학생이 주도하는 활동형 교육'이 강조된다. 또한 학생들이 느끼는 학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배워야 할 교과내용과 수업시수도 줄었다. (중략) 그결과 한국은 세계 주요국 평균보다 100시간 가까이 적게 배운다. 기초 과목의 수업시수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가 되었다. (p. 18)

적게 배우는데 스스로 활동해야 할 것은 늘어났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겉핥기로 지나간 교육진도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는 상태의 학생을 양산했고 기초학력 저하로 이어졌다. 아는게 없으니 수업은 점점 더 재미없어지고 학교교육이 교육적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이 사교육만 활성화되면서 교육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다. 활동형 학습, 학생주도 학습이 과연 좋다고 할 수 있을지 점점 회의스러워지는 현상태에서 이 책이 알려주는 내용들은 무척 반가운 것들이었다.

배우는 입장에서 활동형 수업이나 과제가 충분히 만족스러우려면 그저 주입식 강의에서 벗어나거나 연필과 종이로 문제를 푸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부담은 덜 되면서 몰입도를 높일 수 있는 방식의 수업이나 과제를 더 많이 개발하면 되는 걸까.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아래 인터뷰에서 우리는 학력 격차에 따라 활동형 수업이나 과제에서 소외되는 학생들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인 아이들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교사들이 느끼는 학생 주도 활동형 수업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p. 27)

대입제도에서 학종관련 금수저 논란이 뜨거웠던 때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문제는 대입관련 학종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이 없어지고 활동형 주업과 학생주도 수업 방식을 도입하면서 일상적인 학교수업에서조차 계층격차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강의식 교육이 주입식 교육과 동의어도 아닐 뿐더러 강의식 교육에서는 이렇게까지 드러나지 않던 문제점들이었다. 이런 격차문제가 아니어도 '배움' 그 자체에 대해서도 아이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활동을 통해 스스로 배운다는 믿음과는 배치되는 결과였다. 학업성취도에서도 세 집단은 큰 차이를 보였다. 교사의 개입이 없었던 활동형 수업집단이 나머지 수업집단에 비해 가장 낮은 성취도를 기록했다. (p. 31) 활동형 수업이 가장 신나고 재밌다고 느꼈지만 자기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수업은 강의형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많았다는 것이다. (중략) 학생들은 강의형 수업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p. 33) 성적하위집단일수록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기를 기대하는 활동형 수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p. 34)

학생중심 활동형 교육이 과연 학생을 생각하고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본적은 있는지? 스스로 배운다는 주장은 사실상 교육의 의무를 학생들에게 던져놓고 교육기관은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것과 달라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선진국 교육제도에서 배워왔다고 말하려나?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진국에서 먼저 시도했던 그런 미래학교와 활동들은 처절한 실패를 맞고 문을 닫고 있었다. 그 나라들의 시도를 통해 배워야 할 우리는 그 실패의 길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중이다.

수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는다. 활동을 하는 것은 모두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현재 나타나는 결과들은 좋지 않다. (p. 41)

당연히 암기만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은 좋은 게 아닙니다. (중략) 지금까지 주입식 교육이 강의형으로 이뤄지다 보니 강의형 교육이 그 오명을 뒤집어쓴 것뿐이에요. 학습자의 이해수준에 맞춰 지식을 구조화해 전달하는 강의형 수업, 실감나는 사례와 끊임없는 피드백이 오가는 강의형 수업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낙관론으로 학생 스스로 수업을 주도하라고 방임하는 건 우리가 경멸했던 주입식 교육에 대한 대안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p. 44)

학교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이 독립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며,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주장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독립성을 기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립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가정은 틀리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자기 주도적인 학습자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교사의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p. 45)

스스로 배운다는 것에 대한 오해와 환상으로 '공부'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p. 46)

시험을 안 보고 학생들이 조를 짜서 ppt를 만들던 ucc를 만들던 하는 활동형 수업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재미삼아 하는 활동들은 놀이수준에 그칠뿐 교육적 효과가 극히 미미하다는 말이다. 주입식이 나쁘다고 모든 강의형 수업이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 됐든 간에 학생들을 누구하나 빠트리지 않고 아울러 기초지식을 함양시킬 수 있는 교육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배워야 하고 교사는 가르쳐야 한다. 이 기본을 흔들리게 만든 것은 문제가 크다.

더 많은 지식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장된 지식을 자주 꺼내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출'이라고 부른다. (p. 55) 아이들이 시험을 싫어하는 것은, 틀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으로 시험을 피하지만, '진짜 공부'는 틀리고 실패하는 경험과 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p. 63)

'창의성은 타고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은 잘못된 겁니다. 그건 세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발달에 대해서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겁니다. (p. 83) '창의성이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지식'과 '몰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지식이 있어야 문제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문제에 몰입할 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 (p. 85) 창의성은 수업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p. 87) 우리가 창의성 교육이라고 하면 흔히 배우는 사람이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보는 활동 중심 수업만 생각한다. 하지만 창의성은 배우는 사람이 주어진 것을 적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잘 길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p. 101)

활동형 학생주도형 수업에서 가장 크게 내세우는 점이 아마 창의성 발효 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상식임을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적 발명을 생각해봐도 이는 확인이 된다. 발명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앞선 선배들의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쌓이고 쌓였을때 그 시행착오들을 통해 배운 후배가 발명을 해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발견이나 발명은 없는 법이다. 창의성도 마찬가지였다.

수학과 같이 어렵고 정보를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집행 기능이 중요한 공부일수록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재미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생각이 확장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부의 효용성을 스스로 느끼게 되면 좀 불안하더라도 기꺼이 이겨내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공부일수록 심리적 요소의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학습'과 '교육'이란 이 부분의 관리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p. 144)

글을 읽고 쓸 수 있기에 '문맹'은 아니지만 지식과 정보가 담긴 글을 이해하는 '문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실질적 문맹' 상태라는 것이다. 교육 방침으로 학생들의 사고력 확장을 위해 수학문제를 서술형으로 낸다고 하는데, 문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수리 능력이 있어도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p. 146)

정보화 시대 좋은 자료들이 온라인 도처에 널려 있지만 그 혜택은 문해력이 좋은 사람만 받을 수 있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다. (p. 157)

'문해력을 키우는 것'은 학습능력의 핵심인 동시에 교육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작점이자 지름길이다. 문해력을 통해 아이들은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고 자기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며, 자기 삶과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된다. (p. 173)

수포자가 늘고 있는 것은 수학 자체가 어려운 학문이어서일수도 있고 오랜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할 수리능력이 부족해서일수도 있지만 문해력 또한 그 배경의 중요한 한 요소일 것이다. 어떤 특정한 이슈가 있을때 실검1위를 차지한 단어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올 때가 많다. 세뱃돈과 세벳돈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임에도 그 뜻을 몰라 검색어상위에 랭크된 것을 보면 문맹아닌 문맹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보화 시대면 무엇하나? 검색으로 다 나온다고 한들 무엇하나? 무엇이 정말 맞는 건지 구분할 수 없다면 말이다. 문해력이 키워지는 것은 성장과 발달단계에서 적절한 때가 있다. 그때에 맞춰 공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교육이 문해력이다.

00이는 사교육을 받지 않고 자기처럼 학교만 의지하는 학생들이 공교육만으로도 탄탄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교사들 역시 변화의 거센 파도 앞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다. 미래에는 학교 교육이 '학생 중심 수업'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강렬한 목소리에 공감하며 수업방식을 '학생중심'으로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을 위해 시작한 학생 중심 수업이 외려 부실한 교육을 낳고 있는 현실에 대해 교사들 역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p. 183)

교사의 역할이 줄어든 대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배움을 만들어가야만 하는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학업 부담이 늘어날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p. 188)

학업성취도 세계1위를 자랑하던 핀란드의 성적이 흔들리고 있다. 전체 학업성쉬도는 물론 수학의 하락폭이 커 핀란드 내에서도 걱정이 많다. 더욱 중요한 건 교육 불평등 수치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핀란드는 한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자 빠른 속도로 교육 불평등 수치가 증가하고 있는 나라다. (p. 191)

교육 선진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던 나라가 핀란드 아니었던가, 그랬던 핀란드가, 한국보다 먼저 활동형 학생중심형 수업을 적극 도입했던 핀란드의 교육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뒤를 한국이 바짝 따라가고 있었다. 핀란드의 학부모들은 학생들의 학습저하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코로나사태 이후 한국의 교육현실도 학습저하와 학력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그 심각성이 드러났다.

핀란드나 우리의 학생 중심 수업이 놓치고 있는 점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크리스토둘루는 '무의미한 암기학습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를 교사 주도 활동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과민반응'이라며 '무의미한 암기학습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은 교사의 지도활동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암기가 아닌 방식으로 교사의 수업지도를 내실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p. 195)

'궁극적으로 기술 자체는 교육이 해야 하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개인화될수록 더 맞춤화된 교육을 아이들이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이들이 각자의 커리큘럼을 가지면서 자기만의 섬에 갇히게 되었어요. 아이들은 배워야 할 것을 컴퓨터로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대화나 소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잃어버렸죠. 게다가 흥미있는 분야만 배우게 되니까 아이들이 아주 협소한 분야만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면 성인이 되어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나 다양한 분야의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어려워질 게 분명했죠. (중략) 아이들이 영상을 보며 무언가를 배워나가긴 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교실의 문화와 학습환경, 그리고 어른으로서 선생님이 교실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 아이들이니까요. 선생님은 아이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떠한 경험이 자기에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으니까 어른에게 의존하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p. 196)

현실을 감안하지 못하고 취지의 방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그저 방법적으로만 활동형 학생중심형 수업으로 급하게 바꾼 결과 교실에서 교사의 자리는 축소되었고 그 불이익은 고스란히 학생들이 학업부담과 학력저하로 떠안게 되었다. 시대에도 어른이 필요하고 교실에도 어른이 필요한 법이다. 미국과 핀란드를 비롯한 여러 선진국들의 실패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 한가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여 개선책을 실천하고 있는 사례가 영국에 있었다.

리치아카데미에서는 수업의 질적 수준을 교사의 개별 책임으로 맡겨두지 않고 교사 코칭을 통해 교수법을 통일한 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p. 202)

교육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지식 중심 수업으로 방향을 바꾼 영국은 현재, 더하거나 덜함 없이 학생이라면 누구나 같은 배움을 얻길 바라고 있다. 또 이를 위해 교사와 학교, 국가가 한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리치 아카데미는 왜 우리가 공교육을 실시하는지, 공교육 시스템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다시금 묻게 한다. 교육은 결국 '기회'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포기하지 않고 낙오하지 않도록 기회를 줘서 성장하게 하는것, 그것이 교육의 소명이고, 교사의 소명이다. 그런 소명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효과는 사교육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리치아카데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 204)

지식 중심 수업! 누구나 같은 배움! 그렇게 동일하게 얻어지는 기회!

지식 중심 수업이라고 해서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인 교수 중심의 일방적인 지식 전달 수업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최근 강의식 수업이라고 해도 가급적이면 학습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다양한 활동지들을 제공하죠. 하지만 활동중심 수업에 비해서 다소 지식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식 중심 수업'으로, 또 이에 비해서 훨씬 더 학습자의 주도성을 강조하면서 활동을 위주로 지식을 조금 더 약화시키고 학습자의 자율성이나 확산적 사고를 드러내어 활용했다는 점에서 '활동 중심 수업'으로, 이렇게 두 반의 특징을 구분지어 볼 수 있습니다. (p. 214) 결국 어느 한 가지 수업으로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경험을 줄 수 없다. 역량과 지식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수업은 활동 중심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지식 중심이어야 하는가, 이제 이런 이분법을 지양해야 한다. (p. 219)

결국 중요한 건 정말 학생을 위핸 교육, 정말 학생이 알아야 할 배움 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지금의 형식적인 활동형 수업엔 문제가 있다. 수행평가도 진정 누구를 위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낸 결과물을 통해 배운 것이 없다면 그것을 대체 왜 해야 하는 건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것도 '전이'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고 새로운 지식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활동' 과 '지식'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p. 231)

전문지식과 전이를 가르치되 기능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만 지식은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실제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하죠. 이게 바로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교육입니다. (p. 232)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의 문제도 있지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또한 학생의 경험도 고려해야 해요. 이 모든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결국 '무엇' 과 '어떻게' 의 문제입니다. 교육과정은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게 할지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p. 236)

암기식 주입식 교육이 나쁘다고 활동형 학생주도형 교육으로 바꿨다. 하지만 내실까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불평등의 격차는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고 교실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방식만 바꾼다고 교육의 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이제야 말고 진짜 교육의 '질'에 대해 좀 제대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현재 제도 자체가 수업 중에 자는 것을 교사가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손발이 묶여 있는데 싸우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 현장이 지금 소극 행정이 만연된 시절처럼 되어가고 있어요. (p. 246)

학원에서 배우고 학교에선 잔다. 주요교과목만 공부하고 비주요과목은 내신도 신경쓰지 않는다. 수능에 중점을 둔 학생이라면 더더욱 학교교육은 의미없어진지 오래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자는 걸 눈앞에 보고도 수업을 해야 하고 그런 수업은 그나마 안자고 있던 학생까지 지치게 만든다.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변화하면 아이들도 변화한다' 는 것을 책속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희망을 찾아볼 수 있었다. 더불어 교육 자체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 에도 중요성이 있음이 확인되고 있었다. 교육은 총체적인 것이다. 한 아이를 키워내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하물며 그 아이들이 모인 학교란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

이 책은 활동형 수업, 자기주도 학습, 시험과 평가, 창의성, 수포자, 학습불안, 문해력, 수업법, 학교공간 등 이 시대의 공부와 관련된 가장 민감한 9가지 주제를 다루며, 이러한 주제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포괄함으로써 학습 메커니즘의 본질이 무엇이고 인간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지혜가 생기기까지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학교란 다양한 기초지식을 모든 아이들이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다. 학교 교육에서 제대로 지식을 습득했을때 이 사회를 바르게 끌어갈 지혜로운 어른들이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공교육의 힘을 믿고 싶다.

우리는 왜 학교에 가는 걸까. 학교에서 배움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학교는 아이들이 숨 쉬고, 성장하는 최소한의 교두보이다. 이곳에서 어떻게 배우고 성장하느냐가, 개인의 인생은 물론, 우리 사회의 미래 전체를 결정하지 않는가. 이 책을 출간하며 다시금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과 교사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다시, 학교> 제작진 일동 (p. 12)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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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느낌 2024-05-2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공감 많이 하고 갑니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 디테일로 보는 미술
수지 호지 지음, 장주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그림을 완성하는 결정적 장면들

작품 구석구석 숨겨진 디테일을 만나다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현대미술

그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저 감상자의 입장에서 쉽고 간단하게 좋네vs별로네 정도로 그냥 가볍게 보아 넘겨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림을 보다보면 더구나 봐도 당췌 이해가 안되는 현대미술을 보다보면 감상자로서의 내 입장이 무척 초라해지기 일쑤다. 지금 고전이네 명화네 하는 그림들도 당대엔 그리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허니 지금 내가 도저히 모르겠는 현대미술작품들도 언젠가는 그런 고전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함께 당대를 살고 있는 내가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길잡이책으로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아보고 싶었다.

많은현대 미술과 동시대미술은 작가의 의도나 감정,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식견 등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75점의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p. 6) 양식이나 작가와 후원자들의 포부가 어떤 것이든 간에, 르네상스부터 사실주의까지 거의 모든 미술의 공통점은 주체의 이상화였다. (중략) 미술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사건 중 하나는 1839년 사진의 발명이었다. (중략) 19세기 중반에 들어 화가들이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일상적인 상황을 자주 그리기 시작했다. (p. 8) 20세기에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종류의 양식과 접근법에 대한 변화가 있었고 그렇게 미술 역사상 아주 많은 미술 운동들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로 오면서 작가들의 접근법과 재료 사용이 더욱 다양해졌으며 용인되는 기준도 자유로워졌다. 결과적으로 작가들을 미술 운동이라는 분류로 나누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중략) 이 책은 약120년에걸친 변화와 성장 속에서 예술적 표현과 시도에 대한 개요를 보여주고 있다. (중략)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개념들에 대한 최고의 안내서이며 75명의 최첨단 작가들의 사고와 표현을 상세하게 탐구한다. (p. 9) - 서문 中 -

이 책은 19세기 후반 부터 21세기 현재까지 다루며 75명의 작가들의 작품과 그 작품이 영향을 받았을 다른 작품들까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사이즈가 큰 책으로 올컬러라서 그림책으로는 좋은 조건의 책이다. 그림의 분석도 펼쳐진 페이지에서 장을 넘기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기에 편하다. 본문을 읽다보면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여 이해가 어렵기도 했지만 책의 뒤편에 <용어해설>, <작품 인덱스>, <인덱스>, <도판 저작권> 이 정리되어 있으므로 막힐때마다 참고해가며 보는 것이 이 책을 제대로 보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수백년 동안 작가들이 고수했던 엄격한 아카데미의 전통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의 마지막 몇 십년 동안에는 여러 새로운 형태와 양식의 미술이 개발되었다. 사실주의는 평민을 소재로 자유분방한 붓질과 거친 표면이 특징이며, 과장과 이상화를 피했고, 인상주의의 도래를 알렸다. 곧 이어진 신·후기인상주의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미술 양식과 접근법으로 이뤄졌고, 자주 현대적인 인조 안료를 사용해서 눈부신 색상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p. 11)

<19세기 후반> 에서 처음 다루는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 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던 시대에 유럽 화가들이 일본문화의 영향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은 다른 책에서 읽은적 있었지만 고흐의 그림에서 그 흔적을 이렇게나 많이 찾게될 줄은 몰랐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 을 통해 19세기 후반을 간략히 다루고 이 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20세기 초반>으로 넘어간다.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뒤이어 20세기 초반에는 획기적인 기술 개발과 발견들이 출현하며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중략)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들이 연이어 신속하게 나타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었다. (중략) 사상 최초로 미술은 순수한 구상에서 멀어지고, 일단 처음으로 추상 작품들이 창조되자 더 많은 작가들이 그 개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p. 26)

<20세기 초반> 에서 폴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구스타프 클림트의 <나무 아래에 피어난 장미 덤불>, 앙리 마티스의 <마티스 부인, 초록색 선>,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까지는 그래도 화가 이름을 들어보도 화가의 다른 작품들도 봤던지라 한층 더 심도깊은 내용을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러나 움베르토 보초니의 <도시의 성장>, 조르주 브라크의 <포르투갈인(이민자)>, 페르낭 레제의 <파랑 옷을 입은 여인>, 프란츠 마르크의 <동물들의 운명>,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거리의 다섯 여인>, 후안 그리스의 <바이올린과 기타>, 오스카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역동적 절대주의>, 장 아르프의 <트리스탕 차라의 초상>, 게오르게 그로스의 <메트로폴리스>, 쿠르트 슈비터스의 <그리고 그림>,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파울 클레의 <빨간 풍선>,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 호안 미로의 <경작지>, 오토딕스의 <신문기자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 헨리 무어의 <누워 있는 사람>, 조지아 오키프의 <흰독말풀>, 알렉산더 칼더의 <꽃잎의 호>, 막스 에른스트의 <안티포프>, 조셉 코텔의 <약국> 등의 작품은 역시 현대미술에 대한 어려움을 절감케하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렇지 않은 그림들도 있어서 더욱 관심을 갖고 본 작품들이 있었다.

소니아 들로네의 <일렉트릭 프리즘> 에서 "회화는 시의 다른 형태로 색채는 단어고, 그 관계는 리듬이며, 완성된 작품은 완성된 시다"(p. 70)

바실리 칸딘스키의 <즉흥 협곡>에서 "그는 회화를 세 종류루 정의내렸는데 인상, 즉흥, 그리고 구성이라고 불렀다. 인상은 외적인 현실에 기초하는 반면, 즉흥과 구성은 무의식에서 기인한다" (p. 78)

마르크 샤갈의 <생일> 에서 "그가 얼마나 벨라를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 보여주는 샤갈만의 방법이었다" (p. 84)

에곤 실레의 <초록 스타킹을 신은 여인>에서 "실레의 텅 빈 배경은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만들어서 대상을 고립시켜, 감상자가 대상에 집중하게 한다. 선으로 처리한 그의 작품은 즉흥성과 에너지를 전달한다" (p. 101)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잔 에비테른, 작가 아내의 초상>에서 "모딜리아니가 활동할 당시는 작가들이 부족미술을 탐구하던 시기였다. 그는 고대 이집트의 조각상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이는 이집트 흉상 같은 모델의 모양에 반영되어 있다" (p. 105)

한나 회흐의 <독일 최후의 바이마르 맥주 배불뚝이 문화 시대를 다다의 부엌칼로 절개하기>에서 "이 작품은 전후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실패를 엄중하게 꾸짖고 있다" (p. 112)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에서 "나는 미국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평화가 가득한 나라, 보존하기 위해 희생할 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국가의 모습이었다" (p. 140)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서 "그는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을 비롯해서 자신의 기법에 대해 '감상자를 마비시키는 흔한 눈속임의 수법들'이라고 설명했다" (p. 145)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 에서 "당시 신체적·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낙담한 그녀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p. 150)

에드워드 포허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에서 "주변 마을과 도시에서 발견한 고독감을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독감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p. 163)

피에트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 "미술이 우주의 영성을 나타낸다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림의 모든 요소를 감축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수직과 수평의 직선, 그리고 원색, 흰색, 검은색, 회색만 사용했다. 그는 이것을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p. 166)

위의 작품들은 기존에 알던 화가들이라서인지 작품이 아주 낯설지만은 않아서 그 미술가들과 작품들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몰고 온 그림자가 드리운 채 진행된 20세기는 그 예술적 표현에서 내향적이고, 분노에 차고, 심지어 난폭한 성향을 보였다. 2차 대전 이후 일어난 중대한 변화로는 주요 미술 운동들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중략) 미국에서 개발된 최초의 미술사조로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추상표현주의, 뒤를 이은 팝아트, 그다음에 미니멀리즘이 있었고, 곧 다양한 미술 양식들이 유럽과 북미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p. 176)

20세기 초반과 후반 사이에 <제2차세계대전이후> 라는 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20세기 에서도 특별한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핵심은 미국이었는데 잭슨폴록과 앤디워홀로 알 수 있는 미국문화의 뒤에 어떤 영향력(정치)이 있었는지 다른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광장Ⅱ> 에서 "단절과 대중속의 고독"(p. 179)을, 잭슨 폴록의 <파란 막대기들>에서 "정신과 신체 혹은 현대 사회에 얽매인 감정들을 표현"(p. 194)을,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에서 "나의 작업 방식을 저술가와 비교한다면 가장 단순한 어조를 찾아서 문체의 어떤 멋도 부리지 않고, 독자에게 오로지 글쓴이가 표현하려는 생각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p. 203)는 것을, 마크 로스코의 <빨강의 4색>에서 "색채의 힘과 더불어 로스코는 자기가 만든 형태가 가지는 표현의 잠재력을 믿었으며, 영적인 존재를 포착한다고 여겼다"(p. 218)는 것을,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캔>에서 "반응은 경악과 웃음이었으며 판매는 평편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으로 인해 그는 작가로서 출세했으며 미국 서부에 팝아트를 소개했다"(p. 232) "미국이 가장 위대한 이유는 가장 돈이 많은 소비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기본적으로 똑같은 물건을 사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점이다"(p. 235) 는 것을 깨달은 점은 좋았지만,

위프레도 람의 <대지의 소리>, 윌렘 드 쿠닝의 <여인Ⅰ>, 데이비드 스미스의 <허드슨강 풍경>, 루이즈 부르주아의 <포레(밤 정원)>, 나움 가보의 <구축된 머리 No.2>, 리처드 해밀턴의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있게 만드는가?>, 바바라 헵워스의 <줄이 있는 형상(마도요새)1번>, 루이즈 네벨슨의 <하늘의 성당>, 헨리 다거의 <무제(어린이들이 있는 목가적인 풍경)>, 이브 클랭의 <청색 시대의 인체 측정학(ANT82)>, 프랜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레트로액티브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음-어쩌면> 등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이해에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개념미술은 주로 뒤샹의 아이디어들과 보다 일반적으로 다다,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미술 사조로 발전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다. 개념주의란 재료나 기법보다 아이디어가 더 중요한 모든 미술을 말하며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재료와 방법론이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이후 창조되는 막대한 양의 미술에 대한 선례가 되었다. (중략) 그 사조들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급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개념을 이어 나갔다. (p. 249)

<20세기 후반> 부터는 본격적으로 개념미술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난해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이제까지는 작품을 보면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직접적 힌트가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온통 개념들이라 설명을 읽고 작품을 봐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에바 헤세의 <접근Ⅱ>, 요제프 보이스의 <썰매>,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 방파제>, 아나 멘디에타의 <돌 심장과 피>, 루시언 프로이트의 <반사된 상이 있는 벌거벗은 초상화>, 안젤름 키퍼의 <마르가레테>,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 신디 서면의 <무제#213> 에서는 이제 회화를 넘어 소재도 주제도 워낙 천차만별인데다가 데미언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에서 작가가 "대체품이 애초의 작품과 같은 것이냐는 논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배경은 개념미술 출신이기 때문에 의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동일한 작품이다'"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작품 자체보다 그 의도를 중시하는 것까지 미술의 개념이 확장되고 보니 무엇이 진짜 예술인건지 더욱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백남준의 <TV첼로> 의 파격적 퍼포먼스 일화와 작품분석을 통해 기존에 유명세만큼 이해하지 못했던 백남준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되기도 하고

주디 시카고의 <저녁 만찬> 에서 "작품에는 39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13명씩 3개의 그룹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성서 속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숫자로 그들은 모두 남성이었다.(중략) 거기에 더해 여성 999명의 이름이 흰색 타일 바닥에 금색으로 새겨져 있다. 모두 합쳐서 이 설치 작품은 1,038명의 여성을 기념하고 있다."(p. 268) " 의 경우는 개념에 대해 그나마 접근해볼 수 있었으며

척 클로스의 <자화상> 에서 "각 칸은 추상적인 색채 연구 같지만 멀리서 보면 서로 혼합되어 특정한 색채와 톤을 만들어낸다"(p. 297) 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을 보며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그나마 내가 그림을 통해 '멋지다'고 즉각적으로 감탄할만한 작품이 있기는 있구나 싶어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구상이든 추상이든, 크든 작든, 지속력이 있든 수명이 짧든, 미술은 계속해서 경계와 전통을 허물고 있다. 세계화 현상으로 인간의 상호작용과 소통이 더 신속히 이뤄지면서 예술적 성향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런데 작가들이 정체성, 젠더, 계급, 관계에 대해 가지는 견해자 사회적·정치적 의미 그리고 가치관이 과거 세대의 대다수 작가들과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지만, 놀랍게도 어떤 예술적 접근법과 사고방식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p. 299)

< 21세기 > 에서는 잉카 쇼니바례의 <머리통 두 개를 동시에 날리는 방법(여성)>, 쿠사마 야요이의 <점에 대한 강박-무한 거울의 방>, 모나 하툼의 <작은 덫>, 빌 비올라의 <순교자들(흙, 공기, 불, 물)>, 파울라 레고의 <환영> 이라는 작품들(설치미술 작품들과 사실주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그림한점)을 통해 앞선 장에서 폭이 광범위하게 넓어진 현대미술의 맛보기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구획을 나눠서 때로는 색채와 작업방법을 때로는 배경과 팔레트를 때로는 리듬과 상징등 그 작품 해석에 필요한 요소별로 다각도로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미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이토록 머리아프게 해석해야 하는 미술을 굳이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감상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여전히 나는 그저 내눈에 아름다워보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미술감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현대미술에 대해 다양한 깨우침을 준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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