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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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

그 앞에 움츠러든 한 소시민을 둘러싼 세계

아일랜드는 대체 어떤 땅일까? 조너선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 내가 아는 아일랜드 작가들은 다 엄청난 문제적 작가들이다. 이제 여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클레어 키건.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들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p. 11)

'이 소설의 첫 문단이다. 첫 문단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에 대해 클레어 키건은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p. 127) -옮긴이의 글 中-'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 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독자가 처음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도입 부분에서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전체 이야기를 알고 나면 첫 문단이 적절하게 느껴지고 이어질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주문과 설명을 담은 저자의 긴 메일을 이 책 번역을 시작할 때 출판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p. 128, 129) -옮긴이의 글 中-

소설은 첫문장이 중요하다던데 이 작품은 특히나 그 부분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짧은 이 소설을 천천히 읽으며 옮긴이의 글을 읽기 전부터도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내가 읽은 책 또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는데, 옮긴이의 설명을 읽고나니 꼭 그래야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클레어 키건은 무수한 의미를 압축해 언어의 표면 안으로 감추고 말할 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한다.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 번, 네 번 읽었을 때야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 (p. 129) -옮긴이의 글 中-' 그렇다. 이 소설은 시에 가까웠다. 사용한 문장 자체가 상징적이라던가 암시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장들은 길지 않고 평범하며 평이했다. 하지만 그 문장들로 알게 된 상황들과 심리들을 이해하기에는 한번 더 곱씹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보일듯 말듯 베일에 가려진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내듯 이 소설은 어렴풋이 짐작하다 마침내 깨달아지는 그런 멋이 있었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p. 24)

소설은 목재상 빌 펄롱의 일상과 삶의 궤적을 따라 이야기된다.

펄롱은 성실한 노동자였고 온정있는 이웃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였고 믿음직스런 남편이었다. 무엇보다도 펄롱은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 44)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p. 15)'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p. 22)'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p. 29)'

펄롱의 어머니는 열여섯살에 미혼모로 펄롱을 낳았고, 펄롱이 열두살때 사고로 세상을 뜰때까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펄롱이 산타할아버지께 받고 싶었던 선물은 받은 적 없지만 그렇다고 선물을 아예 못받고 자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때에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딸들을 보며 펄롱은 이유모를 심란함에 빠져들었다. 이 심란함은 수녀원에 뗄감 배달을 하고 온 이후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춥고 건조해지자 사람들은 수녀원이 자아내는 모습이 그림 같다고,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같다고 말했다. 주목과 상록수에 서리가 곱게 내려앉은 데다가, 어째서인지 수녀원에 있는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새들이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늙은 정원사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수녀원을 맡아 관리하는 선한목자수녀회는 기초 교육을 제공하는 직업 여학교도 운영했다. 또 수녀원에서는 세탁소도 겸염했다. 직업학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지만, 세탁소는 평판이 좋았다. (p. 48)

그곳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알려진 것처럼 학생이 아니라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거라고 하기도 했다. (...)

다른 사람들은 그곳이 그냥 모자 보호소라고, 가난한 집의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가족이 미혼모를 그곳에 보내 숨기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부유한 미국인에게 입양시키거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고 그렇게 외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수녀들이 상당한 돈을 챙긴다고, 그게 수녀원에서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p. 49)

카더라 통신은 늘 무성한 뒷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펄롱이 사는 마을에 있는 수녀원은 그런 뒷말들의 중심에 있었다. 아무도 내놓고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끊이지 않는 소문이 흘러나오는 곳이 그곳이었다. 펄롱은 '그런 말을 전혀 믿고 싶지 않았지만 (p. 50)' 늘 외상 없이 결제를 제때 해주는 고마운 거래처로만 수녀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평소보다 이른 배달을 갔을 때 처음으로 보게 된다. 소녀를. 소녀들을. 그리고...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어디가 되었든 나는 데려갈 수 없어"

"저한테는 아무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발 그것도 못 해줘요?"

여자아이에 관해 뭔가 묻고 싶었던 마음이 솟았다가 결국 사라졌고 펄롱은 그냥 수녀가 달라는 대로 영수증을 써주고 나왔다. (p. 51, 52, 53)

하지만 펄롱은 수녀원을 나와서 길을 잃었다. 늘 다니던 곳이었는데도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고 최고 속도로 차를 운전하다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한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 (p. 54)

그날 밤 펄롱은 어쩌다 아내 아일린에게 수녀원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게 됐는데, 아일린은 긴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우리 딸들? 이 얘기가 우리 딸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아무 상관 없지.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그게,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듣다 보니 잘 모르겠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당신 말이 틀렸다는 게 아냐"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미시즈 윌슨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걱정할 게 많았겠어? 그 큰집에서 연금 받으면서 편히 지내는 데다가 농장도 있고 일은 당신 어머니하고 네드가 다 해줬는데. 세상ㅇ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 아니었냐고." (P. 55, 56, 57)

다시 수녀원에 배달을 가게 됐을 때, 펄롱은 고요한 새벽녘임에도 평화로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날 한 소녀를 만났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p. 81)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펄롱은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 걸까? (p. 93)

펄롱은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우직한 사람이라 자신의 감정 조차 제때 잘 파악하지 못하곤 그냥 넘겨버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펄롱은 끊임없이 생각하곤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일상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자주 바라봤다. 주변의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을 둘 다를 끌어냈다. (p. 102)

생판 남을 통해 알게 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새삼스레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해 보며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p. 111) 라는 생각을 하게 된건 펄롱에게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p. 117) 느꼈으면서도 펄롱은 선택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 119)

그 선택으로 인해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p. 119)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p. 120)' 펄롱의 삶이 그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이 소설이 펄롱의 삶을 표면적으로 서술한 이유일 것이다. 그 삶으로 암시적으로 전달하고 했던 것...

펄롱은 미스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p. 120)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p. 120)' 하지만 또한 펄롱은 알았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낸 것처럼 자신의 사소한 선택들도 결국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 121)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이나 수십년간 가톨릭교회와 아일랜드 국가가 함께 운영한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120쪽)'의 이야기이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언어가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구조물인 것처럼 소설 속에 묘사된 세계도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위태롭다. (p. 130)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도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p. 131) -옮긴이의 글 中-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12월에 세상 모든 교회와 성당에 이 책이 읽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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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 - 데일 카네기 에센스 DALE CARNEGIE ESSENCE
김범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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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인간관계 고전에서 정제한 24가지 관계 법칙

저자는 10여년 전 관계에서 힘들었던 때 데일 카네기의 저서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으며 하는 일마다 되지 않는 날이 거듭되는 와중에 첫 책을 준비하고 있었어서 좌절과 불안 그리고 걱정만이 가득했던때였는데 그때 만난 데일 카네기의 조언은 저자에게 큰 힘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채을 펴내게 되었다고.

"데일 카네기의 훈련 과정을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당장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데일 카네기의 저서를 읽고 정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10년 이상 서른여 권의 커뮤니케이션 스킬, 인간관계 개선 등의 자기 계발 관련 도서를 출간한 바 있는 제가 데일 카네기의 책과 훈련 과정을 토대로 최우선적으로 읽고 또 실생활에 적용할 만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 관계가 이상해졌을 때, 사회 속에서 혼자만 멈춰진 느낌을 받았을 때 필요한 데일 카네기만의 인간 관계이론을 깔끔하게 재정리한 것이 이 책입니다." (p. 11)

<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 라는 제목은 어찌보면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인생의 오후가 아니어도 인생의 전반에 걸쳐 적보다는 친구가 더 필요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제목에 눈길이 갈 때가 있다.

사실 자기계발서라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읽어보면 새롭다기 보다 당연한 말들인 것 같은데, 그렇게 당연한 말들로부터 인생의 어느 순간엔 큰 힘을 얻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내 눈길이 갔던 구절들도 분명 최근의 내 상황에 비추어져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들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입에서 "아니요"라는 반응이 나오는 순간 인간관계의 파탄은 시작된다. (p. 21)' 라든가

'자기보다도 똑똑한 사람들을 주변에 둘 수 있었던 자, 이곳에 잠들다 (p. 35)' 라는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라든가

'논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p. 231)' 같은 말들.

그러니 이 책은

평소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 이들에겐 평소처럼 따듯한 조언들을

평소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지 않는 이들에겐 당연하지만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조언들을

건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보가 하는 짓의 목록입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렸다.

둘째, 그래서 그들을 비난한다.

바보가 되겠습니까?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현자가 되고 싶을 겁니다. 현자가 되는 방법은? 바보가 하는 짓을 반대로만 하면 됩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생각은 옳다.

둘째, 그래서 그들을 인정한다. (p. 221~222)

  • 본 리뷰는 21세기북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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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것들은 어떻게든 진화한다 - 변화 가득한 오늘을 살아내는 자연 생태의 힘
마들렌 치게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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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가득한 오늘을 살아내는 자연 생태의 힘

저자의 전작 <숲은 고요하지 않다> 를 흥미롭게 읽었었기에 신작에 대한 소식을 듣고 궁금했었다. 이번엔 어떤 책일까.

전작이 제목을 읽고 숲에 대한 책이려니 예상했다가 막상 읽고보면 음~?! 하며 저자가 동물생태학자라는 사실에 새삼 눈길이 갔던 것처럼, 이번책이 제목을 읽고 '진화'에 대한 책이려니 하는 섣부른 예상을 했다면 그 예상 고이접어 넣어두기를. ㅎ

2010년에 나는 의욕이 하늘을 찌른 젊은 생물학자로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도시토끼를 연구할 생각이었다. (...) 그러나 단 4년 만에 나는 의욕과 젊은 패기를 모두 소진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p. 7)

저자는 베를린에서 생활하다가 연구를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생활은 적응되지 않았고 나날이 불행해져가는 가운데 번아웃으로 정신을 잃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에서 토끼들은 저자와 달리 몹시 행복해보였다. 왜 저자는 적응을 하지 못하는 도시에서 토끼들은 잘 적응하게 됐을까? 이 책은 이른바 '토끼 딜레마'에 대한 저자의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는 비자카드만큼 유용하고 코카콜라만큼 만족스러운 단어다. 그런 만큼 확정적이지 않고 확정할 수도 없다" -리처드 슈웨더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에서 토끼들의 행복한 삶과 저자의 그렇지 못한 삶의 차이에는 '스트레스'가 핵심적 요소였기에 저자는 이 스트레스에 대한 탐구부터 집중적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들만 가득 안고 있던 저자였지만 '진화생물학의 안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보았더니 새로운 의미가 열렸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얘기를 나누려고 한다. (p. 35)' 다시말해보자면 이 책은 '스트레스'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시각으로 토끼와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셀리에는 스트레스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을 바로잡으려고 오래도록 노력했다. 자신이 발견한 사실 즉 Stressor라고도 부르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처하는 자연의 반응이 얼마나 중요하고 긍정적인지 거듭 강조했다. 아무리 단순한 형태라도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고 강조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스트레스가 없는 생명체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p. 51)

스트레스 연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셀리에는 자신이 발견한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 결과물을 발견하여 세상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나 연구할 수록 부정적이기만 한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은 스트레스의 긍정적 효과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최근 들어 그 긍정적 효과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나타났고 진화생물학 분야에서도 연구결과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그 긍정적 효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그 결과가 제시된 두괄식이고,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담은 원제는 다음과 같다.

DIE UNGLAUBLICHE KRAFT DER NATUR. Wie stress Tieren und Pflanzen den Weg weist

자연의 놀라운 힘. 스트레스가 동물과 식물에게 길을 알려주는 방법

도시 고유의 논리 이론은 결국 생태계 속성을 드러낸다. 다시말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도시는 제각기 그곳에 정확히 잘 맞을 법한 특정 행동 방식과 사고방식을 낳는다. 아울러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본다는 얘기도 내가 스트레스 연구에서 이미 살펴본 내용이다. 우리 몸이 매일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p. 126)

토끼는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의 특성에 잘 맞출 수 있었고 저자는 그렇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어떤 곳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살아가면서 유기체는 스트레스 요인에 스트레스 반응으로 대처한다. 이 스트레스 반응은 적응으로 이어져 언젠가부터는 서식지에서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진다. 스트레스 반응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스트레스 반응은 외부의 스트레스 요인이 있더라도 높은 적합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자연의 놀라운 힘이다. (p. 154)'

오랫동안 생물학자들은 구조가 더 복잡한 동물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모든 생명체는 일정 수준의 적합성을 지닌다. 환경에 잘 적응하거나 그러지 못하고, 유전물질을 다음 세대에 얼마간 물려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외부의 영향으로 적합성이 떨어질 수 있고, 그 결과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p. 156)

유기체 라고 하면 지적 능력을 가진 동물을 연상하기 쉽다. 이 책에서 줄창 나오는 토끼처럼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예로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달팽이를 예로 든다. 달팽이 뿐만 아니라 물고기, 식물도 이어서 등장한다. 그러다 발견한다. '한마디로, 식물은 스트레스 요인을 관리하는 데 진정한 고수다. (p. 178)' 이런 전개는 전작 <숲은 고요하지 않다>와 비슷한 서술 방식인 것 같다.

페니키아인이 기원전 1100년경에 최초로 에스파냐에 사는 야생토끼를 보고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에는 토끼들은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에서만 발견되었다. 에스파냐라는 이름은 이 시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에스파냐에 처음 상륙했을 때, 페니키아인은 그곳에 사는 야생토기가 어쩐지 낯익었다. 에스파냐 토끼들은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바위너구리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바위너구리는 크기가 토끼만 하고 외모는 마멋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페니키아인은 에스파냐를 '이쉬판인'이라고 불렀는데, 대략 '바위너구리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쉬판인'은 나중에 라틴어로 '히스파니아'가 되었다. 그러나 페이키아인이 틀렸다. 야생토끼와 바위너구리는 가까운 친척이 아니다. (p. 192)

저자가 다양한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다양한 사례들을 예로 들다보니 방만하게 읽히는 느낌도 없잖아 있는데, 덕분에 얻어걸리는 지식도 있어 재밌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기원이 야생토끼였다니. ㅎㅎ

셀리에는 끊임없이 스트레스가 삶의 양념이요 수프에 뿌리는 소금이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썼다. "스트레스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사실 스트레스를 피할 수도 없다. 당신이 무엇을 하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건 계속 살아 있으려면, 그리고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하려면 항상 에너지가 필요하다. 긴장을 싹 풀고 잠을 푹 자더라도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장은 계속 피를 펌프질해야 하고, 위장은 음식을 소화해야 하고, 근육은 당신이 호흡할 수 있게 가슴을 움직여야 한다. 당신이 꿈을 꾼다면 뇌조차 좀처럼 쉬지 않는다." 셀리에의 말이 옳다면, 최고의 적합성을 위한 완벽한 장소는 있을 수 없다. (p. 214)

그렇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식물과 동물에게 새롭게 살 길을 찾도록 해주었고 그렇게 그 결과들을 바탕으로 이 책이 쓰여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책 제목을 '동물과 식물의 회복 탄력성'이라고 붙이지 않도록 출판사에 내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왜냐고? 조사한 뒤로 생태적 회복 탄력성 개념에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회복 탄력성은 개별 생명체가 아닌 전체 생태계에 있다. 생태적 회복 탄력성 원리를 알고 나니 항상성이 떠올랐다. 항상성은 생명체의 최상위 균형이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몸의 전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한다. 건강한 생태계에서는 흙, 공기, 물과 상호작용이 균형을 유지하는 모든 생명체가 바로 이런 기관이다. 생태적 회복 탄력성이 클수록 생태계는 마침내 균형이 깨지기 전까지 더 많은 스트레스 요인을 견뎌낼 수 있다. 기관들이 생태계의 손상을 신속하게 복구하기에 모든 것이 평소처럼 작동할 수 있다. (p. 256)

위에서 잠깐 언급했었는데, 이 책의 원제는 DIE UNGLAUBLICHE KRAFT DER NATUR. Wie stress Tieren und Pflanzen den Weg weist 이고 이것을 번역기에 돌리면 '자연의 놀라운 힘. 스트레스가 동물과 식물에게 길을 알려주는 방법' 이라고 나온다. 알다시피 한국어판 제목은 <숨 쉬는 것들은 어떻게든 진화한다> 이다.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데, 그러면 내 삶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나의 재능은 무엇일까? 나아가 이 재능을 어떻게 발달시며야 하고, 다른 생명체도 모두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자신이 어떤 '동물'이고 행복하려면 어떤 조건을 채워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생명체를 괴롭히는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p. 280)

뒷표지에 보면 '긴장과 불안, 스트레스 가득한 하루를 살아가는 도시의 우리들에게 숨 쉬며 살아가는 모든 생물이 전하는 다정한 위로' 라고 되어 있는데,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이 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프랑크푸르트를 행복하게 뛰어다니던 토끼들은 녹지관리 '정원사'들에 의해 개체수가 거의 남지 않았고, 저자는 프랑크푸르트에 결국 적응하지 못하여 다른 도시로 떠났다. 게다가 매일 아침 저자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기도 하다. 하지만 바라게 되긴 한다. 우리의 삶과 야생의 삶이 너무 다르고 너무 멀어지는 것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깨닫게 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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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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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는 거리

그 막막한 우주에서 '너'를 사랑하는 일

배명훈이 선보이는 새로운 차원의 스페이스 오페라

SF소설을 읽으며 배명훈 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지는 꽤 됐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작년 <미래과거시제>라는 책이 처음이었다. 읽고나서 어찌나 놀랐던지. SF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이런 작품세계를 이제야 읽게되다니 싶어서.

지난번에 읽은 책이 단편집이라 이번엔 장편을 읽기로 하곤 어찌나 기대가 되던지 ㅎㅎㅎ. (장편 이라기엔 짧지만 그래도 책 한권에 한 작품인 책이니까 장편으로 부르기로;;;;)

아, 이래서 UES(지표면연합)나 궤도연합군 사령부가 나 같은 우주 출신을 경계하는 거구나?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 건 아니야. 왜 우리는 서로의 우주를 배우려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손쉽게 상대방의 우주로 날아갈 수 있게 된 시절이 또 언제 있었다고?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웃음이 나. 너를 만나러 지구에 갔을 때 내가 지구 중력을 견디지 못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반쯤 기어다녔던 일 말이야. (p. 14)

서간문 형식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우주군 장교로 우주함대에서 살고 있는 '나'가 지구에 살고 있는 연인 '너'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고백이자 일기이다.

지구인이지만 아마도 우주선에서 나고 자라 무중력 상태에서의 생활이 더 자연스러운 '나'는 지구에서 나고 자라 중력이 없다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너'를 비롯한 지구인들과의 차이에 대해, 다양한 상황속에네 내내 그렇게 '나'와 '너'의 차이에 대해 내내 생각하게 된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서로에게 서로는 '외계인' 같았달까.

"자네가 반란군 사령관이라면서?"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요"

"그럴 만도 해. 감찰군 사령관은 함대를 무슨 해병대쯤으로 생각하더라고. 아, 그러게 자꾸 우주선을 배라고 부르지 말자니까. 함대라는 말도 쓰지 말고"

"함대가 해병인가요? 해병이 뭐죠?"

"아무튼 우리가 해병은 아니니까"

"그럼 뭔데요?"

"공군이지. 당연히" (p. 24, 26)

함대 작전 장교 모임 이름으로 '반란군'이란 사교 모임에서 사령관인 '나'는 감찰군에게 그 모임에 대한 사유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냥 만나서 술이나 퍼마시는 모임'에 트집을 잡는다고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럴만도 한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30여년에 걸친 우주함대의 전쟁준비가 완료되었고 '예언'에서 언급된 '적'이 나타날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더구나 지구에서 '감찰군'이 대거 파견되어 오면서 내부적으로도 혼란과 예민이 증폭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소설적 상황들보다도 '해병'과 '공군'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무척 재미있었다. 우주선을 배로 보느냐 비행기로 보느냐에 대한 관점도. ㅎㅎㅎ

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금쪽같은 휴가를 받자마자 170시간을 날아가서 40시간 동안 너와 함께한 다음 다시 180시간을 날아서 복귀하려는 나에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네가 물었지. 후회하지 않아. 한 번 더 휴가가 생긴대도 또 그렇게 할거야.

"보고 싶었어"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 다시 17분 44초가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 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p. 35~36)

우주 함대가 우주 전쟁을 벌이는 이 때에도 가장 빠른 속도는 광속이었고, 광속으로 간다해도 우주적 먼 거리는 서로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소통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옆에 붙어 있을 때에도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달랐지. 내가 하는 말을 자꾸만 못 알아듣는 거야.

"알아들었다니까, 나도 사랑한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심장이라도 꺼내달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너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봤어. 그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기만 했지만,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런 거였어. 그냥 사라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날아온 거리만큼, 그 지긋지긋한 우주 공간만큼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서 너를 한자리에 매어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어. 정말로 너를 매어두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부분이 애매했지.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 그건 버글러의 모순을 해결한다고 전달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영혼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p. 37)

새삼 이 책의 제목이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청혼> 이고 그래서인지 자꾸 두 연인 간의 소통과 감정에 대해 초점을 두고 읽게 되는데, 사실 이 작품의 재미는 그보다 '우주 전쟁'이었고 이 작품의 핵심은 서로 다른 두 진영간의 입장차이 라고 할 수 있었다.

저들의 정체가 뭐고 어디에서 왔으며 또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음에 나타났을 때 저들이 뭘 노릴지는 대강 알고 있었거든. 그래, 우리 함대 말이야. 적어도 어디서 싸우게 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다는 거지. (p. 55)

정체모를 적들이 불시에 나타나 공격하는 상대는 '나'가 속한 함대의 대장 '데 나다 장군' 이었다. 그들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어쨌든 전해내려오는 '예언서'의 내용과 몇가지가 맞아떨어지면서 감찰대는 더욱 '데 나다 장군'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교모임 반란군이 아니라 진짜 반란군의 수괴로서.

그건 정말 현실감 없는 싸움이었어. 소리라도 들렸으면 좀 달랐을 텐데, 우주에는 대기가 없어서 밖에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도 이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해. 아무 예고도 없이, 별 긴장감도 느끼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삶과 죽음이 갈리는 거야. 중간 과정도 없이 그냥 사라지는 사람들. 마지막 변론도, 죽음을 피하려는 몸부림도, 정의의 칼을 받으리라는 외침도, 전부 생략된 채 신속하게 진행되는 최후의 즉결심판. (p. 64)

우주선과 우주선의 무기와 전술과 우주전쟁의 직접적 교전 등에 관한 서술을 읽다보면 우주적 정적이 느껴지면서 엄청난 전쟁인데도 굉장히 고요하게 읽혀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빛을 나르는 악마들의 무도회처럼' (p. 65) 잔혹 과 아름다움, 빛과 악마 등 서로 안 어울리는 요소들이 한 문장으로 묶여 있듯 그렇게 전쟁과 고요는 함께 느껴진다. 그렇다고 우주가 고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핵무기가 처음 만들어지던 무렵에 말이야.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했어. 궤도에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거기에서 방사선 같은 걸 검출하게 하면 지상에서 발생한 핵폭발의 흔적을 바로바로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어느 나라에서 어떤 규모로 핵실험을 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지 않겠어? 그 생각이 받아들여져서, 마침내 인공위성을 띄우게 됐어. 그런데 그 인공위성이 가동되고 첫 관측 결과가 지상에 있는 기지로 전송된 순간 사람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대. 여기저기 너무 많은 곳에서 핵폭발 신호가 감지됐거든. 벌써 핵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어지러운 신호가 말이야. 알고 보니 그 신호는 대부분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거였대. 우주 어디에선가는 늘 끊임없이 대폭발이 일어나니까. 어떤 건 수백억 년 전부터 날아온 거고, 또 어떤 건 몇십만 년을 날아온 거였겠지. (p. 87)

책속에 나오는 우주의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저자가 뒤에 작가의 말에서 말했듯 이 책을 과학책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곤 했다. 우주가 이렇다고? 하면서. 이렇게 우주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적응해가고 있지만, 우주전쟁은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혹시 지금 적 함대 뒤쪽에 중력렌즈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p. 107)

"그게 뭐죠? 설마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라도 있었다는 건가요?" (p. 108)

한 가지는 분명했어. 그 방향으로 날아가던 적 함대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 (p. 109)

SF소설이고 우주전쟁 이야기이긴 하나 마냥 공상적이고 상상적이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지는 소설이라 그런지, 블랙홀을 통한 이동이라든가 타임슬립이라든가 평행세계라든가 하는 (지금으로선)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적 함대에 대한 과학적 추정도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졌다. 하지만 이게 또 재밌는 것이 이러한 과학적 추정이 소설 속 예언서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설정이다. 동시에 또 재밌는 것이 그렇게 과학과 비과학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인의 감정까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는 점이다.

거기에 너의 중력장이 남아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내 눈에만 보이는 중력장이.

너는 모르겠지. 그런 건 없다고 말할지도 몰라. 하지만 함대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지구 출신과 나 같은 우주 태생 사이에 가로놓인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수도 없이 봐왔어. 그건 말이야, 사소해 보여서 더 본질적인 그런 차이야. (p. 115)

'나'와 '너'의 차이,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사이에 '중력'을 바탕으로 한 사소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감찰단과 우주함대의 입장차이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차이와도 닮아 있었다. 여튼, 그러는 사이 적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는데..

"예언서에는 다른 차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주의 저편이라고"

"그렇지, 그렇게 믿어왔지. 물론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우리 때는 예언서를 외우게 했으니까. 그런데 UES에 새롭게 떠오르는 가설은 말이야. 그 너머에 있는 게 우주 저편이 아니라는 거야"

"그럼......?"

"시간의 저편, 말하자면 저 함대는 다른 차원에서 온 게 아니라 다른 시간에서 왔다는 거지" (p. 123)

같은 함선, 같은 무기, 같은 전술 ... 적들은 누구일까? 외계인일까 아닐까? 아니, 적군이긴 한 걸까?

마지막 교전 이후, '나'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곧 궤도연합군 조사단이 여기로 올 거야. 아니, 조사단이 아니라 조사군이라더군. 그리고 진실이 아닌 진실 하나를 만들어낼 거야. 반란군 사령관 데 나다에 관한 이야기. 그래도 너만은 끝까지 나를 믿어줘야 해.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말이야. (p. 149)

'인류가 만들어낸 첫 번째 우주 함대가 깨부수려 했던 건 외계에서 날아온 정체 모를 함대가 아니라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그 두 인류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거리의 장벽이었으니까' (p. 150) '나'는 지구출신 감찰단장 보다 우주태생 데 나다 장군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p. 152)' 그걸 아는 장군은 '나'를 마지막 교전 때 다른 함선에 옮겨 타게 했다. 그러니 '나'는 더욱 이렇게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p. 154)' 라고 '너'에게 마지막 안녕을 적어 보낼 수밖에 없었다...

2013년에 이 책이 출간됐을 때는 작가의 말을 따로 넣지 않았다. 많은 독자가 사랑하게 된 책의 마지막 문장은 나에게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어서, 그 뒤에는 아무 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사이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 개정판에는 나만 기억하는 발표 당시의 맥락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p. 155) -작가의 말 中-

무척이나 신선하게 읽은 소설이었는데 이 책이 십년 전의 작품이었다니~! '작가의 말'을 생략하는 이유가 마지막 문장 때문일 수도 있었구나! 개정판으로 이번에 새로 내면서 거의 모든 문장을 다시 쓰는 정도로 표현을 고쳐 썼다는데, 처음의 작품이 어땠을 지 궁금해졌다. 시간을 따로 내어 언젠가 꼭 초판본으로 찾아 읽어봐야 겠다.

여하튼 소설에서도 그러했듯 작가의 말에서 중요한건, 맥락에 대한 두 입장에 대한 '차이' 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문학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SF작가에 대한 평이 그렇게 상반되었었다니...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순문학을 주로 다루는 잡지의 주목받는 지면에 우주 전쟁 이야기를 실을 수 있는 소설가'같은 것이었는데, 그 우주 전쟁 이야기가 바로 이 작품 <청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두 개의 문학장 사이에 놓은 '라그랑주 포인트'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어느 쪽 문학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p. 156)' 작가의 말이 작품해설은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 '해설'에 들어맞는 내용들이었다.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도 신기했던건, 순수 문학과 SF 문학 사이에서의 '차이'를 이런 작품으로 소설적으로 형상화낼 수 있는 작가의 작가적 능력이었다. 그 작가적 능력을 발휘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만큼이나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도 훌륭했는데... '함대가 나아갈 우주를 채우는 건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속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새 독자들의 몫이다. (p. 162)'

ps. <미래과거시제> 라는 책도 표지가 소설들의 내용을 함축적이면서 온전히 다 담고 있어서 신선했는데 이번 책도 그랬다. 표지가 참으로 작품의 내용과 잘 어울려서 그또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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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종의 나라 - 왜 우리는 분열하고 뒤섞이며 확장하는가
문소영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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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분열하고 뒤섞이며 확장하는가

돈, 손절과 리셋, 반지성주의, 하이브리드 한류, 신개념 전통, 일상의 마이크로 정치, 포스트 코로나와 인공지능

7개의 키워드로 바라본 이상하고 아름다운 한국 문화

즐겨 읽는 신문 칼럼 중에 문소영 기자의 글이 있곤 했다. 주로 미술이나 예술 관련 글을 쓰는 기자인것 같은데 그런 종류의 글이 대부분 소개나 평론에 그치는 것에 비해 문소영 기자의 글은 항상 사회를 바라보고 있어서 신선했다. 책으로 읽는 것은 처음인데 저자의 이력을 보니 그간의 칼럼들이 왜 그랬는지 알것 같았다. 여하튼, 이 책은 '그 칼럼들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의 혼종성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과 가까운 미래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p. 11)'

한류는 <대장금>부터 <오징어게임>까지, <올드보이>부터 <기생충>까지, H.O.T.부터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까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거쳐오면서 내가 절감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혼종화되기 시작한 세대로서의 나의 혼종적 정체성,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혼종성이다. '끔찍한 혼종'이란 말이 있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혼종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로마 같은 모든 제국의 문화는 혼종이었다. 제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식민지는 혼종성을 키움으로써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문화권력을 전복할 수 있다. (p. 6)

'끔찍한 혼종'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나도 '단일 민족'이라는 단어가 국가적 자긍심을 품은 단어인것 마냥 교육받은 세대이기에 '혼종'에 대한 부정성은 알게모르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역사 속 모든 제국은 제국이 되기까지 혹은 제국이 되었기에 모든 것이 섞여들어간 혼종의 사회였다. 혼종의 긍정성을 찾고 있는 이 책 속 글들은 그래서 다분히 '권력'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문화권력도 권력이므로.

이 책은 표지에 적혀 있듯이 7개의 키워드로 글을 분류하고 있다.

돈, 손절과 리셋, 반지성주의, 하이브리드 한류, 신개념 전통, 일상의 마이크로 정치, 포스트 코로나와 인공지능

사실 차례나 소제목들을 보면 책의 내용을 대강 예측할 수 있곤 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키워드를 봐도 차례를 봐도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질문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그 의견 하나하나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부르디외는 자본이 경제자본 뿐만 아니라 인맥 같은 사회(관계)자본, 그리고 문화자본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자본에는 미술작품, 책 같은 문화 오브제와 석박사 학위처럼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지식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교양 수준을 드러내는 말투나 예술에 대한 감식안처럼 몸에 자연스럽게 밴 성향과 기량까지 포함되는데, 이것을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고 불렀다. (p. 41)

'부자니까 착한거야'라는 <기생충>속의 대사로 시작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깨닫는 건 저자는 그 '아비투스'를 갖추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쓸수 있다라는 점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석사,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 석사, 런던대학교에서 문화학 석사를 받고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과 박사 과정 중인 저자의 이력은 그 시간들 동안 저자가 얼마나 문화적 아비투스를 넘치게 향유해 왔는지 알려준다. 향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사회비판적으로 의견을 내고 활동을 하는 것에는 박수와 응원의 마음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들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 '아비투스'를 갖출 수 있는 성장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그렇기에 저자가 느끼는 '혼종'과 내가 느끼는 '혼종'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손절'은 2018년 즈음부터 인간관계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지만 원래는 주식용어다. 사람과 관계를 끊을 대 쓰는 단어는 따로 있다. 불교적 단어인 '절연', 유교적 단어인 '의절' 등등. 그런데도 왜 굳이 '손절'을 쓰게 됐을까? '손절'은 경제학적 비용편익분석에 의해 인간관계의 지속과 중단을 결정하는 자본주의적 단어다. 은연중에 인간을 물건 취급, 주식 취금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경제학적 의사 결정이 부당한데도 집단의 전통과 관습에 질질 끌어온 인간관계를 단호하게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p. 60)

아하, 손절이 주식용어 였구나! '손절'은 '매몰비용'개념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매몰비용은 이미 지출한 비용으로서 향후 어떤 선택을 해도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결정을 할때 이미 들어간 매몰비용을 고려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p. 62)' 그러니까 인간관계에서도 과거에 어떤 (감정적, 물질적) 비용이 들어갔을 지라도 그 비용?을 매몰비용이라 치고 회수받을 생각을 버리고 관계를 그냥 끊어버리는 것이 '손절'인 것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관계를 질질 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단절해버리는 것, 그것이 손절 인 것이다. 과거에 소모된 감정적 에너지까지 비용의 범주에 넣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에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와 철학이 반영되곤 한다. (p. 66)' 인간관계에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단어인 '손절'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인 것일까?

영국 소설가 H.G.웰스는 무려 120여 년 전에 '타임머신'이란 말을 만들어놨고 지금까지 영화로 만들어지는 <우주전쟁>, <투명인간>등을 쓴 SF거장인데, 그의 천재적인 상상력은 이 단편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p. 95)

'로봇3원칙'으로 유명한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는 1980년 <뉴스위크>칼럼에서 이렇게 일침했다 '민주주의를 '나의 무지나 너의 지식이나 별 차이 없다'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키워왔다' (p. 108)

웰스의 <눈먼 자들의 나라>를 예시로 반지성주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은 SNS와 숏폼이 유행하는 요즘 시대를 떠올리며 더없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주제였다.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를 산다는 것은... 참... 할말하않 이랄까.... 여하튼 SF 작가들은 참 위대하다는 걸 다시한번 깨달았다. ㅎ

혼종적이고 다문화적인 것은 대국의 특징이다. 지금 한국은 경제와 문화에 있어서 역사상 최초로 세계적 대국의 문턱에 와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마인드는 아직 대국적이지 못한 것 같다. 외국인들은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자 강대국인데도 약소국인 것처럼 군다'라고 종종 말한다.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에 함몰되어 강대국에게는 선망과 반감이 뒤섞인 자세를, 기타 국가에는 수출 돈벌이 대상이 아니면 무관심인 게 소국 마인드다. (p. 122)

저자는 외국 유학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전공특성상 외국문화를 자주 접해서 그런지 외국인의 시선에서 한국을 바라봤을 때의 아쉬운 점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한국은 혼종 사회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이 강대국인가?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미소중일의 사이에 낀 지정학적 위치가 변한 것도 아닌데 그 권력관계에서 늘 소외되기 일쑤인데 한국이 강대국인가? 선진국인 것까지는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 선진국이란 타이틀도 왠지 조선시대 족보를 사서 팔자걸음 휘젓고 다니던 허울뿐인 양반모습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더구나 지금은 민주화를 쟁취한 사회였다고 믿기 어렵게 독재화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더더욱... 한숨만 나오는 것을... 이 상황에 대국의 마인드를 가지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고... 여하튼 저자의 이러한 지적?!은 다음 장 '신개념 전통'에서 더욱 강화된다. 해당 부분은 독자들이 직접 책을 읽어보고 생각해보고 하는 것이 유의미할 것 같다.

'백인'이라는 말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중국 청나라에서는 유럽인을 '얼굴이 붉고 털이 많은 '종족이라 불렀고 서구인이 자신을 '백인'이라 칭한 것도 17~18세기부터이다. 그 직전 시대에 산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면 당시 서구인은 자신들을 '기독교도', 타민족을 '이교도'로 분류했고, 아프리카계 장군 오셀로를 '무어인'이라고 불렀지 '흑인'이라고 부르지 안핬다. 즉 타자화와 구분짓기는 있었지만, 문화와 지역에 기초했지 인종에 기초하지 않았다. '백인 정체성'연구의 선구자인 미국 저술가 시어도어 앨런은 '백인 발명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p. 205)

'언어가 사고를 결정짓기까지 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자 (p. 209)' 정치적이지 않은 것 같은 일상에선 은근히 자주 혹은 많이 정치적 메세지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그렇다. '단일'이라는 착각에 빠져온 우리는 특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그렇기에 인종적 혼종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부정적 메세지를 퍼뜨리곤 한다. 하지만 '인류는 모두 '유색인종'이다. '백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 210)' 어쩌면 '인종'도 딱히 없다. 인류는 원래 하나의 뿌리에서 오지 않았던가.

챗GPT는 왜 거짓말을 하며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을 '잘' 하는 것일까. 한국의 인공지능 기업인 솔트룩스의 이경일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쳇GPT는 학습된 어마어마한 지식과 언어 중에서 특정 단어 다음에 올 가장 자연스럽고 문맥에 맞을 만한 단어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글을 만드는데, 확률통계적 선택을 한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해도 답변이 매번 다르다. 이 중에서 인간이 보기에 어떤 답변이 좋은지를 학습하는 것이다. 그 진위는 GPT조차 판별하지 못한다. (p. 254, 255)

포스트코로나시대 급격히 대두된 것중 하나가 쳇GPT일 것이다. 인공지능이니 AI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개인적으로 답답한 부분이 좀 있는데, 왜 그것들에 인간적 도덕성 개념을 덧입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거짓말'이라는 것도 인간 기준이지 GPT는 그냥 확률통계적으로 아웃풋을 내놓을 뿐인것을. 그 얼토당토 않은 아웃풋에 온갖 인간적 개념을 덧붙여서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문제인 것이다. '인공'을 신봉하지 말자. 그것도 어차피 사람이 만든 것일 뿐이잖은가.

'우리는 지금 거대한 사회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p. 267)' 이 시점이 기회일지 위기일지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저자는 '혼종'적 문화 측면에서 기대감이 없잖아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혼종'적 면면들에 대해 사회문화적 분석은 해볼만한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저자의 의견이 다양한 논의로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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