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 - 나의 알 수 없는 기분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처방전
야오나이린 지음, 정세경 옮김, 전홍진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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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뇌의 독감

인생의 문제 중 대부분은 뇌에서 시작한다

인생의 문제 중 절반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며, 다른 절반은 뇌가 우리에게 던져준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뇌과학의 어려운 내용도 쉽고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p. 7) -추천의 글 中-

'현대인에게는 뇌과학이 필요하다'는 추천사에 공감이 갔다. 심리학도 정신의학도 다른 학문에 비해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인데 그 학문들이 제대로 정립되기도 전에 '뇌과학'에 의해 다시 재정립해야할 시대가 된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이제 마음의 문제라 여기던 심리학과 정신의 문제라 여기던 정신의학은 '뇌과학'에서 만나고 있는듯 하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뇌과학적 측면에서 심리문제와 정신질병을 다루고 있다.

우울증은 일반적인 기분저하나 슬픔 또는 즐겁지 않은 기분과는 다르다. 보통 우울은 불안을 동반한다. 우울증 환자 중에는 불안 문제를 겪는 사람이 많은데, 3분의 2에 이르는 우울증 환자가 불안장애의 임상 기준에도 부합한다. 불안 문제는 대부분 우울증이 발병하기 1~2년 전에 나타나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증세가 뚜렷해진다. (p. 20) 우리가 우울중에 걸릴지 아닐지는 유전요인이 40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60퍼센트는 다양한 환경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p. 34) 여성의 정서적 건강에는 거주 조건이, 남성에게는 사회적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p. 37)

첫장에서는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우울증'을 다룬다. 우울증과 불안증과의 관계나 유전요인에 대한 내용은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의해 정서가 더 크게 좌우되는 성별이 남성이라는 점도 새로웠다. 여성보다는 오히려 남성이 혼자 살기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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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해야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p. 116)

다시말해 부모의 보살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이의 신경생물학적 특징과 행동의 특징에 영향을 준다. 또한 이런 특징은 유전자 발현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대를 거쳐 유전된다. (p. 123) 유아기의 경험은 대뇌 발달과 신경회로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며, 성인이 된 뒤에 스트레스와 역경에 대처하는 능력과 자기효능감을 결정한다. (p. 126)

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유전요인과 관련이 있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모두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지 않는것은 유전요인과 성장환경에 의해 누적된 개인의 성향이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은 대를 물려 이어지기에 긍정적으로 변화된 유전요인을 다음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양육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유전은 그대로 똑같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형되고 적응된 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내손자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내아이의 기질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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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는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 (중략) 스웨덴에서 81만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연구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 가정에서 ADHD 발병률이 높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ADHD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ADHD의 여러 핵심 증상이 교육을 받는 햇수나 업무능력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ADHD환자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가 낮아지고, 그 결과가 다음 세대에게도 심리적으로 경제,사회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p. 187~188)

ADHD가 유전된다는 것도 새로웠지만, 환경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 마음한켠이 쓰려왔다. 질병은 유전된다. 그런데 그러한 유전은 사회적, 경제적 계층격차로 인해 어쩔수 없이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같은 질병도 치료받을 수 있는 여건이 다르다. 유전적 요인이 큰 질병의 경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유전될 확률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그 사람들의 유전자가 문제가 아니라 계층격차 때문임에도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될 것이 뻔하다. 그러면 안되는 것인데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종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기 덕분에 진화 과정에서 사이코패스적인 특징이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기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다. 전사유전자를 가진 사람들 중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악마가 될 수 있지만 전쟁 시기에 살았다면 영웅이 됐을지도 모른다. (p. 232)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역사관련 책을 자주 읽는 편이다. 그런 책을 읽을때마다 과거에 자행됐던 잔혹함에 대해 진저리를 치곤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그런 사건들을 그런 전쟁들을 사이코패스와 연결지어 생각한건 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읽고보니 정말 그렇다. 잔혹한 시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그런 유전적 요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유전적 요인이 정도의 차이일뿐 아마 모두에게 있지 않을까. 사이코패스중에서도 양육환경이 좋았다면 정상인으로 자라나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역시 중요한건 성장기의 환경과 경험과 교육이다.

우리의 뇌는 30세가 돼야 안정을 찾으며, 이때 우리는 성숙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p. 240)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수록 생길 수 있는 변이의 양은 어머니의 네 배에 이른다. (p. 242) 내 주변에서 아이의 조기교육 문제에 조바심을 내지 않는 사람은 심리학과 뇌과학을 배운 사람들뿐이다. 아동기는 사람의 일생에서 뇌의 가소성이 가장 강한 시기다. 이 단계에서는 뇌 신경세포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이 빠르게 일어나고 쓸모없는 신경 연결은 빠르게 끊어진다. 이렇게 민감한 단계에는 아이의 감정이 뇌 발달에 영향을 주기 쉽다. (p. 244)

아이가 어릴때부터 경쟁관계에 노출되면 정상적인 인성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발달심리학자들은 조기교육 보다 자유놀이를 추천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참 요즘 사회에선 부모가 선택하기가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여하튼, 뇌가 30세가 돼야 성숙된다는데 과거 20세도 되기 전에 결혼하고 어른노릇해야 했던 조상님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아이낳는 시기에 대해 대부분 엄마의 나이를 문제삼곤 하는데 유전자 변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엄마보다 아빠의 나이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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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뇌와 몸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부위라 굳게 믿었다. 정신질환과 신체질환은 서로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울증은 기분이 나쁜 것일뿐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몸과 뇌에 관한 지나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p. 324)

이 책의 마지막장은 '정신과 신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뇌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 예를들어, 위장이 손상되면 뇌세포도 사라지고,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되면 뇌가 조종당한다고 한다. 심리, 정신, 신체 의 문제들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부분부분들의 연결은 뇌과학의 연구로 인해 더 빨리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보인다. 심리적 감정적 정신적 문제를 느꼈을때 위로와 힐링을 얻을 수 있는 책들도 좋겠지만 최신 연구결과를 담은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소소한 정보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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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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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과 민속학을 가로질러 한국적 서사로 승화한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가

남긴 한글로 쓰여진 단 한 권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모노그래프'

생활에선 죽은 언어이지만 학문에선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언어인 라틴어를 우리는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우리나라 속담만큼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카르페디엠' 과 '메멘토 모리' 가 아닐까. '현재에 충실하라' 와 '죽음을 기억하라' 는 이 문구는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양극한을 알려주고 있는 문구이기에 언어를 떠나서 의미적으로 모두에게 각인되는 것 같다. 삶과 죽음으로.

'한국학의 거장' 이라는데 '김열규 라는 이름 석자는 내게 낯설었다. 그 이름 석자보다도 더 낯설었던 것이 '한국학'이라는 단어였다. 그런... 학문이... 있었나?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기에 궁금해진 책이기도 했지만, 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이란 얘기는 단단히 또 똑똒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 생물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 뿐이다. 잘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맞는다. 인간은 그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갖는 지상의 존재 이유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p. 8)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구 하기 때문이다. (p. 10)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 죽음, 그것으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것이다. (p. 12)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p. 14) 이 효성에는 짙은 자책감이 그늘을 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 21) '열녀'라는 관념에는 '늘'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죽음이 따라붙고 있다. (p. 23) 효와 열은 때로 효열이라고 한 묶음으로 일컬어졌다. (중략) 삶에서 퇴거할 수 없는 죽음, 그런 묘한 죽음이 있게 된 것이다. (p. 24)

<프롤로그 -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저자는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한 학자였다고 한다. 활발한 연구 활동과 저서를 남기고 201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구 인생 60년에 대해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 궤적에 천착한 대표적인 한국학의 거장'이라고 수식어구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한국인들의 '죽음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전공과 연륜이 빚어낼 통찰이 궁금해지게 하는 서설이었다.

'죽음' 이라는 것은 생명을 지난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간'만의 개념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같은 땅에서 오랜 세월 역사를 쌓아온 한국인만의 독특한 '죽음론' 을 고찰한다는 점도 의미있어 보였다. 한국땅에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것일까?

죽음이란 그 자체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죽음이 타자라는 것이 절망스러운 것이다. 내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것이 최후의 나의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 그건 우리가 경험할 최대의 아이러니다. 그렇다. 죽음은 우리들 몫인 가장 무망한 아이러니다. (p. 42) 죽음으로 해서 생은 에누리 없이 일회로 제약되고 만다. 한데 이 죽음으로 한계지워지는 생의 일회성이야말로 생의 진지함이며 집요함의 혹은 열정의 근거라고 릴케는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p. 47) 사람은 자신에게 죽음이 올 것임을 알고 있는 존재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죽음을 사고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존재다. (p. 49) 영원한 미래의 시제, 영원한 미래의 공간 속으로 옮겨앉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피안이란 것을 생각해냈다. (p. 54) 그래서 삶이 적극적인 뜻을 지닌다고 하면, 영원한 미래시제의 그 영토까지 다다를 차표를 얻어내거나, 채비를 하는 절차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p. 55) 이때 큰 함정이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이 사뭇 쓰잘것없는 것이거나 하잘것없는 계기에 불과하게 내버려져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p. 60) 죽음 때문에 우리가 삶을 등져서는 안 된다. 아니 단연코 그 거꾸로라야 한다. (중략) 죽음 때문에 우리들은 삶에 달라붙어야 한다. 그 죽음으로 해서 잃어질 삶이라면, 아니 결정적으로 잃어지게 되어 있는 게 삶이라면 우리들은 한사코 그 삶에 마음을 붙여야 하고 사랑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은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p. 63)

저자가 '죽음' 에 대해 일반적인 고찰을 위해 선택한 수단은 문학이었다. 특히 시를 통해 (그중에서도 릴케의 시와 윤동주의 시를 통해) 죽음의 상징성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안되고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음을 더 제대로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일반적 관심을 시작으로 하여 그 연장선에서 이제 '한국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인의 죽음을 일반론적인 죽음과 꼬집에 비교해가면서 얘기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그것은 필자로서는 너무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다. 또한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개별론을 하자는 그 말이 다른 민족들은 절대로 못 가진, 그래서 딱 한국인만이 갖는 죽음만을 족집게로 집어내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 또한 필자에게는 과분하게 힘들고 겨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굳이 한국인의 죽음을 얘기하자고 나선 것은, 한국 민속 현장과 민간신앙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한국적 현장 속의 죽음을 얘기하고자 하는 기도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인만의 죽음이란 뜻으로 사뭇 좁혀서 한국인의 죽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민속과 민간신앙 현장에 있는 죽음이 지닌 그 한국적 현상성 때문에 한국인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자는 것뿐이다. (p. 75~76)

저자가 미리 당부하듯이 '한국인의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학문적 갈래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저자의 설명은 한국의 민속학적 증거들을 기반으로 한국인이 과거에 어떻게 죽음을 생각했었는지 그 기원을 탐구해보는 과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말미에 저자가 덧붙였듯 그 탐구과정 또한 계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분적이라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한국인이 의식했던 '죽음'의 단편들만을 모아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신화적으로도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수 있을 터였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여성, 그리고 '타(다른곳, 다른 물건, 다른 사람 등)' 또는 낯선 것과 함께 '3대 부정'이라고도 부를 만한 것이다. (p. 106) 앞은 항시 남이고 뒤가 북이고 보면, 사방행위, 인체방위, 지세방위 등이 세 겹으로 엉기게도 되는 것이다. 알기 쉽게 요약하면, 앞=들=남, 뒤=골짝=북과 같이 묶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산을 앞산이라고 하고, 북곡을 뒷실이라고 불고 있음을 듣게 된다. (p. 117) 산 사람의 머리는 동네 아래로 향하고, 죽은 이는 그 머리를 위를 향해서 두고 있다. 그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다. (p. 119) 진북이나 자북이 기준이 된 동향이 아닌 것이 원삼국시대, 신라의 죽은 이들의 머리 방향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그때그때 계절에 따라 옮아가는 태양 중심의 방위에 의거한 것이다. (p. 129)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목숨 어린 방위로 향하여 살았던 그 동남의 방위에다 옛신라인들은 죽은 이를 자리잡게 한 것이다. 밝고 따뜻한 방위에서 잠들게 한 것이다. (p. 133) 산봉우리의 방위로 누운 시신의 머리 방향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지어야 할 몸시늉이다. (p. 138) 상고대의 한반도 북쪽사회에서는 중장제가 시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p. 139) 뼈가 영혼의 참다운 집이라면, 어차피 쉽게 삭을 살은 빨리 없어질수록 좋은 것이다. (p. 140) 서해안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는 초분이 있었다. (p. 145) 영혼의 구원이 없는 저승관은 종교론적으로는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불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이란 현실에서 볼 때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없다. 한국인의 이른바 현실주의, 종교적 믿음에 있어서의 기복의 현실주의는 실상 이 저승관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 161)

한반도에서의 고대묘지문화를 통해 이승과 저승의 관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자연지형인 산봉우리가 꼭 한방향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죽은자의 머리 방향은 동서남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신라인의 방위는 독특했다. 해바라기라... 신라금관에서 상징된 푸나무와 사슴뿔 이야기는 더욱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와 구분짓게 하는 것이라서 고고학관련 책에서 읽은 유목민족설이 생각나기도 했다. '중장제'와 '초분'을 통해 '뼈'를 중시하는 것은 비좁은 땅에 묘를 세울 수 없는 경제성을 따지기 전에 있었던 저승관이라는 점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했다. '뼈를 묻겠다' 라는 결심이 우리나라 언어습관에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저승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먼 과거의 저승관이 현재 한국에 유래된 외국종교에서조차 한국인들은 기복신앙으로 믿음을 형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기도 했다. 단옹관과 처용무, 심청전, 학연화대, 무령왕릉 그리고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연말 나례행사까지도 그러한 고대의 '죽음관'이 배어져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한데 이들 세 가지 죽음은(안락사, 뇌사, 자연사) 한결같이 의사에게 맡겨진 죽음이다. 선택도 판단도 모두 의학에 의탁되어 있다. 그만큼 전적으로 생리현상화된 죽음이 이제 사뭇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물리와 생리에 속할 뿐이다. (p. 182) 규모가 클수록 겉이 화려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소실의 효과, 지워없애기의 효능은 커지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 장례라는 절차가 진행된다. 기왕의 죽음을 한 번 더 완벽하게 죽이기 위한 짓이다. 이제 죽음이 죽었다. (p. 192) 오늘의 죽음에는 내일도 미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그에 수반되어서 오늘의 죽음에는 통과의례가 없거나 불완전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게 된다. (중략)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통로가 폐절되고 만다. (p. 231) 거기에는 우리의 바리데기 신화도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이야기도 보다 더 거슬러올라가서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도 있을 수 없다. (p. 232)

과거의 현재의 죽음관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해 저자가 풀어낸 장레문화의 변화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승화의 단계'를 거쳐 조상신化 했다. 그러고보니 서양에서는 사람이 죽어 신이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아주 드문일이었던데 반해 우리네 문화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신이 될 수 있었다. 그 신이 귀신이건 조상신이건 여하튼 '신'이 될수 있었구나 하는 것이 이 책이 느끼게 한 또다른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여하튼, 과거엔 죽음이 죽음이 아니었으나 현재는 죽음도 죽어가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는 한편, 고조선 신화에서의 '웅녀' 의 상징성과 '바리데기'의 신화적 의미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고조선의 웅녀는 단순히 곰에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바리데기공주는 단순히 동화속 공주가 아니었다. 우리네 신화도 그리스신화나 수메르신화 가 품은 문제의식과 이상향을 충분히 품어안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의미조차 없다고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신화 곧 풀이는 신의 근본과 내력에 관한 얘기다. 신화는 '풀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p. 284) 동화속의 수탐이 궁극적으로는 주인공 자신의 개인적·세속적 영달에 이르러 마무리지워지고 있음에 비해 바리데기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구제, 나아가서는 남들의 구제, 인간 일반의 구제에까지 그 수탐의 여행은 작용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수탐의 경로가 천문학적이고 우주론적이다. 우주적인 규모에서 인류적 범주에 걸친 수탐을 행함에 있어 바리데기는 자신이 신화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리데기는 신화적 인간 구원자다. (p. 290) 한국 민속에서도 볼 수 있는 약물사상은 이 민담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범세계적인 이 얘기는 그 원천도 어지간히 먼 과거로 소급한다. 바빌로니아 신화에는 죽음 탐무즈를 위해 이슈타르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략) 물론 우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낳은 이슈타르 얘기와 바리데기 신화를 직접 맞대놓고 그 양자간의 관계를 운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의 세계를 다녀오는 얘기가 이른바 '오르페우스'얘기로 유형화된다. 그 분포가 구라파 전역은 물론 아시아를 포괄하고 북미대륙의 원주민 세계에까지 퍼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바리데기 신화의 특색이 단순히 한국문화라는 범역 안에서만 해명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p. 291)

수메르나 바빌로니아까지 소급하는 'E 80' 이라는 '오르페우스' 모티브는 해당지역의 샤머니즘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신화 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신화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신화가 아니라 동화로 왠지 그 격을 낮추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형적 모티브 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같은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다. 어디가 먼저이고 무엇이 더 다채로운지 를 비교하기보다 '모티브'적으로 '원형적'으로 그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따져본다면 한국신화는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이다. 이 책의 '4부' 내용은 <새롭게 만나는 한국 신화> 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죽음이 떠나감이나 나그네길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바리데기'는 말해주고 있다. 생명의 꽃이 피고 목숨의 물이 샘솟는 곳이 저승이다. 그곳은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원천이고 본향이다. (중략) 그것은 불행히도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들이 놓쳐버린 죽음이다. '돌아가는 죽음', '복귀하는 죽음'은 '떠나가는 죽음'에 떠밀려서 죽고 만 셈이다. (p. 310)

우리네 민속과 신화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고유의 '관념'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어떤 관념이 더 나은지 판단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변화와 상실의 추이를 보면서 우리가 놓치고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현재의 죽음관이 행복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니까.

사람끼리도 자주 만나야 정이 들기 마련이다. 다른 객체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낯이 익는다는 것, 눈에 자주 든다는 것, 그것은 정붙이기의 전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정을 붙이자면 그리하여 죽음과의 친화를 일구어 내자면 죽음과 자주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삶이 죽음과 정을 붙여야 한다. (p. 347)

고루 살피지는 못했다. 몇 갈래의 항목으로 우리들의 죽음을 살폈으나 항목마다 구석구석 아쉬움이 남아 있고, 다루지 못한 큰 항목도 남겨져 있다. (중략) 이런 결격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옛 죽음의 국면에 관해 말하면서, 죽음을 거울 삼아 드러날 뻔한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추어내는 것에 유념하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옛 죽음이 오늘에 끼친 그림자 같은 것도 조금씩 들여다보고자 했다. (p. 366)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듯이, 죽음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p. 369)

글을 읽으며 시대를 알 수 없었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가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가늠이 되야 좀더 잘 공감될 것 같았다. 검색해보니 2001년에 나왔던 책이 20년만에 다시 새옷을 입고 나온 것 같다. 한국인의 저승관이 죽음론이 그 20년간 그닥 변한것 같지는 않다. 저자의 글은 고(古)어체의 느낌을 주지만 현대어로 읽는데 무리는 없었다.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저자의 통찰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메멘토 모리'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 아니겠는가. 잘 살고 싶은 만큼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시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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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노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2
이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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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어도 보통이 아니어도 충분한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

"어쩌면 나는 여전히 보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페인트>라는 작품으로 청소년문학의 자리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굵게 새긴 이희영 작가의 신작이다.

'18세 애늙이 아들, 34세 철없는 엄마' 라는 힌트에서 미혼모 모자자의 어떤 신파적 스토리를 예상한다면 그 예상은 전혀, 전혀 맞는 부분이 없을 것이다.^^

최지혜 씨는 디자인을 먼저 봤다. 나는 가격표를 흘낏거렸다. '미친거 아니야?' 이 한마디를 어금니 사이로 짓씹었다. (p. 7)

"됐어.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마음에 들어. 그냥 그거 해. 이제 곧 추워질 거야. 제대로 된 점퍼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래요. 누나가 사 주는 건데. 좋겠다. 누나가 동생 옷도 사 주고"

짝짝 박수를 치는 종업원을 향해 최지혜 씨가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누나 아닌데요"

그런가 보다, 할 것을 우리의 최지혜 씨는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아들이에요, 제가 낳은 아들" (p. 8)

"결혼 일찍 하는 것도 정말 좋은 거 같아요. 아빠가 크신가 보다."

"나 결혼 안 했는데. 그리고 우리 아들은 아빠 없어요"

싱긋이 웃는 엄마와 달리 점원은 아예 울어 버릴 기세다. (p. 9)

최노을. 고2의 훤칠한 남학생이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노을이에겐 가족이라곤 엄마 한명, 친구라고는 성하 한명 뿐이었다. 그 한명 뿐인 친구가 생기기 전의 엄마와 단둘만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서로 한팀으로 믿고 의지하며 당차게 살아오다 보니 어느새 고2 아들은 애늙은이가 34세 엄마는 철없는 엄마로 보여지게 됐을 뿐이다.

엄마는 부러 나이 들게 꾸민다거나 노숙한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언제나 자유로운 모습으로 생활했고 나도 그런 엄마를 한 번도 창피해한 적이 없었다. 다만 남들에게 굳이 우리 모자의 'Too Much Information'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은 늘 한결같다. (p. 11)

열 여섯 살 차이나는 모자. 고1때 아들을 낳은 엄마를 아들은 창피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세상에 처신하는 방법을 엄마보다 어쩌면 아들이 먼저 터득한 것도 같은 상황이 됐다. 자신을 낳기 위해 가족과도 의절하고 어린 나이에 홀로 세상과 맞서기 시작한 엄마를 보며 큰 아들은 조숙하다면 조숙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역시 어린 나이였다. 그 미숙함이 '청소년 소설' 특유의 성장하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소용없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니. 왜 자신들의 생각을 멋대로 진실이라 믿는 걸까? 성하가 학원에서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 했을때? 나는 신을 향해 당당히 맹세할 수 있었다. 양파 표피 세포 하나만큼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p. 24)

고2아들과 젊은 엄마의 설정도 사실 '보통'이라고 할 수 없는 가정환경 인데, 하나뿐인 친구 성하는 여자다. 그러니까, '여자 사람 친구' 하지만 정말정말정말 두 사람은 '친구' 다. 제일 친한 절친이자 어려서부터 유일하다시피한 친구가 여자라는 것도 어쩌면 '보통' 이 아닌 셈이다. 소설을 읽을 수록 노을이에겐 '보통'이 아닌 것들을 하나하나 늘어만 간다. 노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보통의 삶'인데 말이다.

벌써 5년이다. 어리게만 보이던 남자가 오직 한 여자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봐 온 시간이. 정말 미련하다 못해 답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p. 35)

최근 엄마에게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노을은 늘 원해왔다. 엄마가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자신에게 아빠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남자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노을의 머리를 복잡하다 못해 터질 지경의 고민에 빠뜨리게 된다.

이런 나를 보며 모두들 독하다고 말하는데, 10대라고 무조건 게임에 열광하리란 건 명백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독한 게 아니라 그저 나랑 만지 않을 뿐이다. '대한민국10대=게임'은 너무 단순한 공식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집안일 하는 게 몇 배 더 마음 편한 열여덟도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p. 40)

보통이 아닌 상황들이 늘어나지만 작품 속에서 화자인 노을의 말투는 항상 생기발랄하다. 가볍지 않음을 가볍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청소년문학의 매력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대한민국10대=게임' 이 일반화의 오류라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다...;;; ㅠㅠ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친근하게 부르는 아빠가 아닌 지극히 생물학적인 관계로서의 아버지 말이다. 내 입에서는 단 한번도 '아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묻고 싶지 않았다. (p. 52)

내가 세상에 빛을 본 순간부터 오늘까지 엄마는 하루를 48시간처럼 살아왔으니까. 최지혜씨에게는 어쩌면 외로움조차 사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바란다. 엄마도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가슴 따뜻한 사랑이라는 것을 해 봤으면, 하고 말이다. (p. 56)

게임도 안하고 집안일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본인의 연애엔 관심없고 엄마의 연애에 온통 신경쓰는 열여덞 아들이라니~! 잘 컸네, 잘 컸어!!!

나는 정확한 시급 외에 모든 돈을 다시 금고에 넣어 두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일한 만큼만 받고 싶었다. 남에게 괜한 호의를 받는 게 싫었다.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도 입히기 싫어다.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싶었다. 똑같이 잘못을 해도 사람들은 내게 다른 시선을 던지니까. 그 누구도 나를 보며 혹은 엄마를 향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가급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중략)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다름과 틀림을 똑같이 여기곤 한다. (p. 59)

노을인 주말이면 성하네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성하의 아버지는 노을이 엄마의 공방이 있는 건물에서 중국집을 하신다. 그런데 이 중국집은 배달을 하지 않는다. 이또한 보통이 아니라면 보통이 아닌 사항이 노을에게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그 여자애 나 소개해 달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구를 누구에게 소개해 달라고?

"그 성하라는 애, 너랑은 그냥 친구 사이라면서. 왜, 안 돼?"

노을이에게 고민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녀석인 동우가 어느날 우연히 성화와 노을이 함께 다니는 걸 보고는 성하를 소개시켜 달라고 한다. 성하가 갑자기 여자로 보이게 된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구를 소개시켜 줘 본 적은 없다. 동우가 친구인건 맞다. 하지만 동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서로의 사생활을 굳이 캐려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묶어준 친구 사이였다. 그런 둘을 소개시켜줘도 될까?

"엄마가 좀 평범한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 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 누군데? 아니, 평범함이 대체 뭔데?" (p. 106)

평범한 사랑이란 뭘까? 사랑에 관해 과연 평범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은 오히려 특별함 아니야?" (p. 121)

"괜찮다고 한마디 해 줘. 누구보다 당사자가 제일 힘들 테니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에 나쁜 사랑은 없어."

녀석이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픈 사랑은 있겠지만" (p. 125)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동우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상대가 엄마라면 그렇게 쉽게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알았냐?' (p. 127)

엄마는 아니 최지혜씨는 노을에게 굳이 설명하려 하지도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아니, 노을이가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동우에게 '평범한 사람'이 뭘까 물었을때 들은 동우의 답변은 자신의 상황에 맞는 답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이때의 동우의 대답은 노을이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한 거이었다. 노을이에게 보통이 아닌 상황이 본인도 모르게 또 추가된 것이라고나 할까.

"전에도 네가 한번 말했지? 평범한 삶, 보통의 인생"

귓가에 성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도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 그냥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같지 않을까?" (p. 143)

세상은 점점 더 평범함과 보통을 잃어 갔다. 평균으로 삼아야 할 것도, 기준으로 내세워야 할 법칙도 시나브로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다행일 때도, 때문에 불행일 때도 있었따. 더 이상 학벌로만 성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과거엔 평범한 삶이라 말했던 삶 역시 쉽게 꿈꿀 수 없게 되었다.

"보통의 삶 따위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아" (p. 144)

처음엔 '보통'의 삶, '평균'적인 삶이 분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노을이의 고민이 십분 이해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원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보통의 삶' 이 뭐냐고. 그런 '평균적인 삶' 이 있긴 하냐고. 모두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그러한 '삶'이 과연 모두가 원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그런 '보통'은 없기에, 그런 '평균'은 없기에, 모두가 다 있을 거라며 믿으며 찾아 헤매는 것 아닐까, 이루고 싶지만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노을이 꿈꾸는 '보통'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지 그 본격적인 경험은 책을 읽으며 하는 걸로~!^^

ps. 역시 청소년문학이 재미있다. 서사 흥미진진하고 메시지 정확하고 결말 깔끔하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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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이 그랬어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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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은 한국 단편소설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집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여러 흥미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으며 독자는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매력적인 세계를 가진 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를 알리는 이 안내글 속에 내가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이미 들어가 있다.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

새로운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통해 그 작가와 그 작품과 그 모두를 포함한 사회를 읽어나가는 과정은 늘 신선한 기대를 품게 한다. 이 작가는 어떤 작가일까?...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첫 문장은 남겨두자. 바뀌지 않는 것도 있어야지. 이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니까.

첫 장면까지도 그대로 쓸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숙취를 처음 겪고 쓴 일기를 가져와 만든 문단들이다.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연민적이고 고쳐쓰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혐오. 어느 쪽도 공정하지는 않다. (p. 9)

이 소설의 첫 문단에서 이 소설은 다시 쓰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이 내용은 뒤에 덧붙인 작가의 에세이를 통해 어떻게 다시 쓰게 된 작품인지 알게 되기도 한다. 썼던 소설을 다시 고쳐쓰는 것은 작품속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기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작가가 고쳐 쓴 과정이기도 하다.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연민적이고 고쳐쓰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혐오' 라는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중 사람들은 무엇을 더 많이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

각각의 이유로 우리 둘은 그해 봄의 커다란 우리들, 에서 빠져나와 각자 남았다. (p. 16)

단편집이라 그런지 내용의 서사적 전개 자체보다도 문장의 표현들이 좋았다. 이 작품은 9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의 상봉 일수도 있고 애인과의 해후일수도 있는 몇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예라는 글자는 예의 이름 끝에 들어갔다. 내 이름 앞 글자인 서 자와 같은 자였다. 미리 예 豫, 펼칠 서 豫, 똑같은 글자가 내 이름에서는 서로, 그애의 이름에서는 예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여겼다. (p. 21)

그런 한자들이 있다. 여러 뜻을 지녔거나 한가지 음이 아닌 한자들이. 내 이름에도 그런 한자가 들어간다. 새로 알게된 이 한자가 반가워서 찾아보았으나 펼칠 서 라는 한자로는 검색되지 않았다. 지금은 미리 예 로만 쓰이나 보다. 여하튼, 이 책속에서는 이름이 온전히 등장하는 적이 없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 지금 서율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서울은 나한테 도시가 아니고 상태인 것 같아. 겨울이 와도 나는 서울. 겨울이 가도 나는 서울. 여름도 가을도 봄도 없이 나는 서울이야. 그러다 예는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너도 서울이야? (p. 34)

명사를 형용사로 쓴다는 것은 분명 다른 느낌이다. 게다가 명사중에서도 도시의 이름으로 상태를 드러낸다는 것은 신선한 표현이었다. 여기서 '서울'이라는 상태는 예와 서 라는 두 여자만이 공감하는 그런 '상태'다. 하지만 둘 다 동시에 '서울'인 상태였는지는...

< 호르몬이 그랬어 >

그 무렵부터의 내 생활은 철저하게 화학적인 것이었다. 몸이 더 이상 잠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자고, 의식이 명료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누워 있는다. 위산이 많이 분비되어 속이 쓰리기시작하면 밥을 먹고, 식사 후에는 뇌에 공급되어야 할 혈액이 소화기로 가면서 자연스레 오는 식곤증에 순응해 잠을 잔다. 깨어 있는 동안은 그날 호르몬의 균형에 따라 날카롭거나 무디거나 즐겁거나 침울하다. 자고 나면 그 잠 너머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도 일종의 화학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이 기억을 혐오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 (p. 45)

대학을 졸업했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본격적인 취업준비라는 미명아래 백수인 '나'는 얼마전 남자친구에게서 문자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처구니없지만, 어쨌든, 진짜로 헤어진 것이 맞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아졌다' (p. 46)

'알아졌다' 라... 그렇다. 닥친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못한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자의적이지 않기에 내게서 능동성이 떨어질 경우 더욱 더디게 수동적으로 나에게 체득된다. 이름 중의 한글자로도 표현되지 않는 이 애인은 작품 속에서 그냥 '누군가' 이다. 그 누군가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잘 지내지?

나는 누군가의 물음이 잘 지내니? 가 아닌 잘 지내지? 인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정말로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스러움이 아니라, 당연히 잘 지내고 있지 않겠느냐는 투의 단정이 질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p. 52)

작품 속 여성의 입장에선 저 감정이 공감가다가도 정말 그런가? 싶기도 하다. '잘 지내지?' 라는 안부는 사실 무책임을 깔고 있는 질문이다. 이 문장의 앞에 '내가 없었어도'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잘 지내니?' 라는 안부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내맘도 모를거면서 다 안다는 듯이 선수를 치는 걱정이 때론 더 불편하기 마련이므로.

엄마의 애인이 사준 비싼 패딩이 날씨에 맞지 않아 땀을 흘리면서도 보풀이 일어난 셔츠소매를 보이고 싶지 않아 계속 입고 있는 채로 마주앉은 '누군가'의 시선은 '나'가 처한 현실을 더 말할 수 없이 '알아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야, 호르몬이 그랬어'

< 총 塚 > (*능 은 왕 또는 비 의 무덤을, 묘 는 그 외 모든 무덤을 가리킨다. 총 은 주인이 없는 빈 무덤이다.)

제목에 붙은 설명에서 새삼스레 '총'의 의미를 알았다. 천마총이 주인 없는 무덤인 거였구나 싶고... ㅎ

너는 내가 화를 내는 것을 싫어했다. 너는 왜 슬프면 화를 내? 라고 했던가, 너한테는 슬퍼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던 거지 라고 했던가. 모두 네가 했던 말일 수도 있다.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나를 싫어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을 수도 있다. (p. 87)

어른이라고 하기엔 아직 젊다고 해야 하나 젊다고 하기엔 아직 어리다고 해야 하나 싶은 이십대 초반의 커플의 삶은... 너무... 가난하다. 너무... 가난해서 웨딩드레스는 커녕 전세방 한번 경험해보지 못한 애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때 남자는 납골당의 관리비마저 버거운 상황이었다. 남자는 납골당에 가서 몰래 단지를 꺼내오려 마음먹는다.

기차는 거대한 너의 무덤을 천천히 빠져 나갔다. (p. 107)

주인 없는 무덤 '총'은 어디라고 해야 할까... 단지를 꺼낸 납골당의 작은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단지 있으나 어디 있을지 모를 도시라고 해야 할까 단지를 두고 싶었으나 두지 못한채 향하는 도시라고 해야 하나...

< 에세이 - …… 라고 썼다 >

이 책은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그 뒤에 붙은 이 '에세이'는 작가후기이자 에세이이자 해설이기도 하다. 작가가 털어놓는 솔직한 삶은 작가가 쓴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 본인에 대한 이해를 하게 함과 동시에 작가-작품-독자 사이의 상상력을 더 부풀려 놓기도 한다. 작가의 에세이는 그래서 하나의 '작품' 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십대 초반에 쓰고 삼심대 초반-근래…에 고쳐 쓴 작품들로, 당시의 제가 삼십대 초반인 저처럼 작품을 쓸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저 또한 이십대 초반의 저처럼은 쓸 수 없습니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해온 단편 작업들 사이에 이 세 편을 자연스럽게 섞을 수 없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못한 의미에서든 이 작품들은 돌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십대 초반의 나는 어떤 작가였는지를…… 해명하기를…… 더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전에 왜 이 해명을 필사적으로 피해왔는지도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이다. (p. 112~113)

작가가 털어놓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는 문체의 개성 때문인지 소설처럼 읽히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의 분위기는 황정은 이나 김애란 을 생각나게 했다. 단편이 가진 특성상의 어두움 때문인지 작가의 삶이 투영된 작품 특성으로서의 어두움 때문인지 여하튼 밝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라도...

가난이라는 것.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피가 안 나는 척하는 기분으로 늘 살았다. (p. 119)

아직 젊은 나이던데 이 작가의 나이에도 이런 성장을 하고 있구나 하는 나와는 다른 세대와의 동시대성은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여하튼, 이 책은 뒤로 갈수록 좋아지는 책이다. 작품 < 에세이 < 해설 이랄까. 윤경희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이 책을 가장 빛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내가 '어두움'으로 느낀 것을 '겨울'로 표현한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게.

< 해설 - 겨울의 습작 >

우리가 쓰는 모든 것이 작품의 이름으로 출판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쓰는 자 본인은 늘 주지하지만 책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작가의 이름 아래 묶인 단행본은 최종과 완성에 도달한, 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 더 이상 나아갈 바가 없다고 간주된, 글쓰기를 담는 물적 형식이자 독자가 가장 손쉽게 접근하고 소장할 수 있는 상품이다. 세련된 마감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출판 경향은 책은 원재료인 글쓰기에 최상의 외적 형태로서 주어지고, 매끈하게 편집되고 장정된 책은 그것이 독자적 사물로 생산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동, 시행착오, 실패와 침묵, 포기와 망각, 거듭된 퇴고와 수정의 끈질긴 시간이 들었다는 사실을 자칫 가리기도 한다. (p. 125)

그런데 주의 깊은 독자가 완결된 작품을 넘어 책에서 더 읽어내고 싶은 것은, 작가와 편집자의 눈에는 언제고 생생할, 바로 이러한 유령적 기미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따금 감지되는데, 주로, 곁텍스트paratext라 명명된, 텍스트 본체의 앞뒤에 부가된 작가 소개문, 작가의 말, 주석, 수록작의 본래 발표 시기와 지면 정보, 표 등에서이다. 곁텍스트는 책에 수록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결코 아니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작품은 온전한 내적 독자성을 보유한다는 만성적 착오를, 곁텍스트라는 복수적 이질의 존재는 파열시킨다. 곁텍스트는 작품에서 억압되거나 누락된 것과 넘쳐 새오 나온 잉여를 받아 담는 장소다. (p. 126)

나는 이 '곁텍스트'를 중요시 여기는 편이다.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작품을 읽기전 표지와 날개에 적힌 정보들을 꼼꼼이 살피고 때론 검색을 해서라도 작품 이외의 정보를 작품과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에세이' 가 그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해설'에서 작품 자체에 대해 문장 하나 분석하는 것이 아닌 책과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키는 서술이 기존 해설들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고 이 책에서는 '곁텍스트'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오늘의 미제와 결핌에서 내일의 작가적 생이 연장된다. 습작의 문학과 함께 동시대인들에게도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색과 연습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p. 135)

내가 어려워하는 단편 특유의 모호함이 너무나 강한 작품들이었기에 '에세이' 와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에 대한 인상을 내가 뭐라고 남겼을지 모르겠다. 박서련 작가를 처음 알게 한 책이고 서사와 상관없이 매력적인 문장들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작가의 다음 책을 궁금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작가의 소설 같은 '에세이' 와 '결핍'을 통한 연장으로 기대감을 품게 하는 '해설'로 인해 아마도 나난 박서련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아직은 더 궁금하고 어쨌든 작가는 계속 다시 시작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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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 '조지 포크'의 조선 탐사 일기
조지 클레이튼 포크 지음, 사무엘 홀리 엮음, 조법종 외 옮김 / 알파미디어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인 최초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가했던 외교관 조지 클레이튼 포크가

전하는 1880년대 조선인의 생생한 삶과 역사를 전한다.

900마일(1448km)을 가마 타고 44일간 기록한 조선의 생생한 기록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이다 보니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인기드라마도 안 봤지만 그 드라마에 '유진 초이'라는 캐릭터가 있었다는 건 안다. 드라마 설정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이었지만 그 실제 모델로는 실존인물 미국장교 '조지 포크'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말의 역사에 대해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의 이런저런 기록들이 있다. 복잡다단했던 시대였던만큼 그 기록들에서도 빛보다는 어둠이 더 많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좀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시절이기도 하기에 미국장교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이 책은 조선말 미국장교 포크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사무엘 홀리'라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캐나다인 교수가 펴낸 책을 한국인 역사학자가 번역 및 편집한 책이다. 따라서 저자는 '포크' 이고 편집은 '사무엘 홀리'이며 번역자는 '조법종, 조현미' 라는 3중 저자를 보유한?! 책이다.

포크가 남긴 자료와 일기장처럼 기록한 두권의 수첩 내용은 이 책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본 내용을 읽기에 앞서 100페이지는 포크의 기록에 대한 설명이다. 역자의 서문이 먼저있고 편자의 서문이 뒤를 잇는다. 이 서문들이 있었기에 뒤의 본문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본문보다 사실 더 중요한 내용은 이 두 편의 서문에 다 있다고 볼수도 있다.

전체 내용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포크의 계획과는 별개로 기록된 내용에 의거해 관련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여과되지 않은 생생한 현장의 기록

2) 시간대별 조사 기록

3) 지방 최초의 온도와 기압 기록

4) 현존하는 최고 여행비자

5) <대동여지도>, <여지도>를 이용한 외국인 최초의 조선 여행 기록

6) 주막과 역원을 활용한 여행 기록

7) 한국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사례집 제작

8) 거북선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외국인 (p. 23~27 발췌)

책의 제목에서 '화륜선'은 '불바퀴로 가는 배'를 의미한다. 당시 '양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조선인에게 '화륜선을 타고 온 사람'이었고 서양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수도인 서울과 외국인들의 배가 수시로 오가는 부산을 제외하고는 '양인'들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조선반도의 남쪽을 포크는 '탐사' 한다. 이 기록은 '관광'이 아니라 '탐사'였고 그 '탐사'를 전후한 배경을 알려주는 '서문'의 내용들은 매우 유익했다.

서울에서 서양식 증기선 제조를 어떻게 시도했었고, 미국전함 가운데 최신식 화륜선인 트랜튼호를 타고 어떻게 포크가 오게된건지, 포크가 누구와 밀접했는지 등의 사전 정보는 포크의 탐사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필수적 정보들이었다. 무엇보다 포크가 남긴 다른 기록들에 대한 안내도 의미있는 자료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역자는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무관으로 처음 부임한 포크의 1884년 조선 남부 지역 조사 기록을 번역, 정리하는 과정에서 포크가 서구 세계에 거북선을 철갑함으로 소개하였고, 이 보고서 내용이 서구 언론에 소개되면서 '거북선=세계 최초의 철갑함'으로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하였다. (p. 45)

1890년대는 제국주의의 전성기로 세계가 제국주의적 확장을 추진하며 해군력을 증가시켰다. 거북선에 대한 포크의 보고서 내용이 미국 신문에 보도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해군력을 앞세운 식민지 쟁탈과 군함외교가 맹위를 떨친 1890년대였기 때문에, 각광을 받고 있던 철갑함의 원조가 조선이라는 포크의 보고서는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많은 신문들이 다투어 거북선을 보고하고 후속 보도까지 한 것으로 보아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p. 60)

본문인 탐사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포크가 미국으로 보낸 보고서와 편지들을 바탕으로 당대 조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역으로 알수 있었다. 특히나 역자가 정리한 '거북선'의 미국언론기사들에 대한 정리 및 분석은 이 책에서 단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조선말까지도 조선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었다. 거북선이 없었다면 미국사회에 조선이 알려질 일이 뭐가 있었을까...

여기까지의 '역자 서문'은 포크의 탐사기를 정리하고 포크가 가진 자료들 중 '거북선' 관련 자료분석에 집중했다면 뒤이은 '편자 서문'은 또다른 분석방향을 보여준다.

1884년 11월1일 미국 해군 소속 조지 포크 소위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조선의 남쪽 지역을 관통하는 900마일(약1448km)의 고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길 위에서 보낸 44일 동안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두 권의 노트에 380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여행기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반크로프트 도서관에 조지 클레이튼 포크 관련 수집품 중 일부로 소장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여행기가 지닌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학자들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p. 61) 무엇보다 이 여행기는 포크가 나타나기 이전까지의 그 어떤 서양인도 경함한 적이 없었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는 조선 왕조의 고위 관리나 정부관리가 하는 방식대로 가마를 타고 기나긴 여정을 소화해 냈다. (중략) 또한 이 여행기는 서양인의 눈에 비쳐진 1880년대의 조선을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한 독특한 기록물이다. (p. 62)

이 책의 가장 앞쪽에는 포크의 여행 경로가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서울-수원-천안-공주-전주-나주-진주-부산-대구-상주-충주-이천-광주-서울로 연결된 여정은 한반도의 남쪽을 삼각형 형태로 넓게 둘러보고 오게 되어 있었고, 포크는 그가 본 환경들을 꼼꼼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대동여지도>가 정말 정확했다는 점이고, 지방의 관리들은 조선의 지리를 정말 잘 몰랐다는 점이다.

1883년 서구를 향한 첫 번째 조선사절단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통역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미국 정부 내에서 포크가 유일했다. (p. 64) 민영익은 포크가 조선의 사절단과 동행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중략) 포크는 해군 무관의 임무를 맡기 위해 서울로 출발했다. 그는 국무부와 해군으로부터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가능한 한 최고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포크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임무에 착수했다. 날마다 조선인과 대화하면서 언어 능력을 키웠고 중요 관리와 유대 관계를 맺었다. (p. 65) 조선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포크는 조선을 여행할 일련의 계획을 세운다. 처음에 그는 세번의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첫번째는 경기도 중심부, 두번째는 조선의 남부를 가로지르는 계획, 마지막 세번째는 북부 지방을 가로지르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번째는 떠나지 못했다. (p. 66)

포크가 미국에서 통역을 맡았다고 해서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건 아니다. 포크는 일본어를 할줄 알았고 조선사람들은 일본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한국어가 익숙해지기 전엔 조선인통역관과 일본어로 소통했다. 이것은 여행말기에 '갑신정변'으로 인한 위험에 처해지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참고로 조선에서 밀려났을때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포크 이전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조선을 경험한 사람은 포크가 유일했다.

포크는 지금 우리가 문화충격이라고 정의하는 증상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는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 우울해 했고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p. 86) 그는 그 당시 설립된 세관과 관련된 서양인들을 '세관 깡패들'이라고 썼으며, 게다가 수다스럽고, 막돼먹고, 불경하며, '내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중략) 포크가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동료인 서양인들에게까지 통렬한 표현을 쓴 것을 보면 비판의 기준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그가 지닌 내면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해군에서 경력을 쌓으며 구축한 원기왕성하고 쾌할한 겉모습 아래에 (중략) 마음속으로 수줍어하고 쉽게 기분이 상하는 여린 심성이 숨어 있었다. (p. 88) 그의 여행일기를 읽어보면 특히 그의 사생활을 조선인이 침해할 때의 반응은, 이런 그의 여린 성격을 가슴에 잘 새겨야만 이해할 수 있다. (p. 89) 포크는 자신이 보낸 편지와 사진을 조심해서 보존해 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했다. 그 자료들이 '조선에 관한 책이나 보고서를 쓸 때 매우 소중하게 쓰일 것'이라고 전했다. (중략) 그러나 불행히도 포크는 그 책을 쓰지 못했다. (p. 96)

28세의 혈기왕성한 미국인 청년이 부푼 꿈을 안고 낯선 동양땅에 왔다. 해군으로서의 의무와 개인적은 탐구욕으로 인해 조선여행에 나선 그가 맞닦드린 현실은 감내하기 힘들었다. 언어도 완벽히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추워지는 날씨에 당시 양반남성들이 타고 다니던 열린 가마(의자만 있는 형태의 가마)를 타고 여기저기 갈때마다 몰려드는 구경꾼들로 인해 힘들어했다. 당시의 관리들의 접대문화나 관리들이 백성들을 대하는 폭압적인 태도도 버거웠지만 가장 힘든 것은 화장실 볼일을 볼때조차 구경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딜가든 그는 동물안 원숭이보다 더한 따가운 눈총을 버텨야 했고 그런 날들이 쌓여감에 따라 신경도 점점 예민해져갔는데 심지어 귀환길에 '갑신정변'소식을 들어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기록에서 이런 전후사정을 알고 읽는 것은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여행 일기'라고 하지만 그 여행이 '관광'이 아니라 '탐사'였기에 포크의 수첩을 번역한 본문의 주된 내용은 지형 파악에 대한 것들이었다. 포크는 가능한 하루에 먼 거리를 이동하려 했고 그렇게 스쳐지나가며 지도와 지형지물을 비교하고 측량하고 기록했다. 그가 한 주된 경험은 관리들의 접대였고 그의 시선은 늘 지리와 작물과 주택분포 와 인구수 같은 외적 파악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가 만난 백성들의 모습은 대개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남겼다.

나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넘어져 감을 떨어뜨렸고 순식간에 등을 밟히며 진흙탕에 머리를 처박혔다.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2피트(60cm)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내게 적개심을 보인다거나 쏘아보는 기색은 없었지만 무례한 호기심은 놀라웠다. (p. 116)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군중들이 너무 많고 이들이 무례한 탓에 전혀 시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일꾼들이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사람들에게 몽둥이질을 하는 것을 막느라 힘들었다. (p. 117)

이러한 상황은 어딜 가든 반복되고 점점더 악화되었다. 깨끗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제공되는 숙소를 만나면 그나마 괜찮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때면 이런 '호기심'스트레스는 말할수 없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는 눈치는 빠른 편이었다.

만약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나라 전체적으로는 크게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의 그 누구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다거나 알고 있지 않았다. 혹은 오랜 세월 서울을 다녀오지도 않았다. 조선의 중심부 지역 국민의 생활이 취약하다는 내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국가는 종족이라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부분이다. 이 정부의 통치 행위를 통해 판단해 보면, 무력으로 백성을 장악하고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p. 145)

포크가 만난 관리들도 천차만별이었다. 예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위풍당당하기도 하고 무지렁이같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공통적으로 관리들은 정세판단에 미숙해 보였다.

대화는 익숙한 동양적 안부 인사와 예절을 갖춘 답변으로 시작됐다. (중략) 대화는 당연하게도 서양 문명에 관한 질문으로 바로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감사는 곧바로 조선은 수백년 동안 쌀을 자족해 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런 생각을 바꿔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렇게 했다. 내가 무역의 장점에 관해 설명하자 감사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지금까지 조선은 그런 일들이 가능한지 몰랐고 아주 서서히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p. 183)

그는 곧 중국과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내게 그 전쟁의 모든 내력을 물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p. 193)

감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이었다. (p. 201)

포크는 민영익이 구해준 지도와 발급해준 통행권 덕에 어딜 가든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지방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지역의 감영관리가 곧 그 작은 왕국의 통치자였다. 그들은 중앙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더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너무나 혼란스런 시국이었다.

'통영의 영웅'은 나라를 위해 수많은 일본인을 죽인 후 (백성들의 영웅), 결국 자신의 힘을 보여 준 행위로 목숨을 잃을 것을 알고, 일본 함댇가 빤히 볼 수 있는 자신의 뱃머리에 서서 일본인의 총을 맞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범죄자처럼 처형당하는 것을 피했다. (p. 287)

아마도 믿기 힘든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거칠어지려고 스스로를 내몰고 있다. (p. 291)

5명의 길나장이가 앞서 가다가 지나가는 남자 두 명을 논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두 명의 나이 든 여자들을 폭력적으로 밀어제쳤다. 아! 여행하는 방법이 이렇다니. (p. 314) 두들겨 패고 발로 차고 욕설을 내뱉고 마구 밀어제치고! 정말 대단한 나라였다! 합천에서 피신하는 내 모습은 정말 웃음거리였다. 비록 내 여행이 국가 기밀이긴 했지만, 전체 장터에 내가 읍내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당연히 알려졌을 것이다. (p. 315)

내가 제복을 입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미 해군의 장교로서, 바로 이곳 조선 관료의 집 안에서 무례한 사람들의 눈길에 노출되고 전시되는 것은 굴욕이었다. 아마도 정신을 놓는다면 참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p. 328)

나는 묵을 보내 목사에게 동래로 바로 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는 내게는 결정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통영은 아마도 조선에서 내가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수리 모자를 쓰고 있는 동안(미군 장교 복장을 한 나로서는) 그 장소에 간다면 내가 다시 겪어야만 할 굴욕과 불명예를 감내할 수는 없었다. (p. 331)

포크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가 머문 각 지방의 현지 목소리로 들을 수 있곤 했다.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다. 해군으로서 '거북선'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통영에 꼭 가보고 싶었으나 이즈음 포크는 '무례한 호기심'에 너무 지친 나머지 통영을 지나치기로 결정한다. 포크는 당대 고위급 관리들의 방식으로 여행하고 있었고 짐도 거느리는 수행원도 많았다. 그 수행원들이 하는 행동또한 관리들을 모시는 방식이었기에 '양인'을 향한 대중들의 관심을 대하는 태도는 폭력적이었다. 그것이 여행 내내 포크를 괴롭게 했다. 그런 길잡이들의 길을 트는 폭력도 힘들었지만 어딜가든 안팎 구분없이 따라다니는 눈길이 그를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어갔다. 어쩌다 장날이 된 읍내를 통과할라치면 그 인산인해 속에서 그는 더욱 더 고통에 빠졌다.

일본인들이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안달복달했다. 부산에서 나는 끊임없이 감시를 당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세관 무리와 일본인들에게 끔찍한 염탐의 대상이었다. (p. 364)

나는 전반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쓰라린 감정을 느꼈다. 그들의 무례와 나를 일종의 진기한 수집품처럼 대하는 반 야만적인 행동응로 인해 그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배려가 무색해졌다. (p. 382)

포크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었다. 그는 사진기와 탐사도구를 가지고 출발했고 산과 계곡과 길과 논밭과 집들의 분포와 새로운 풍속을 나타내는 조형물들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빠르게 관찰하고 지나치려는 그의 여행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상주길에서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공포에 빠진다.

외국인을 싫어하는 악마 같은 인간-선비-들이 나의 갈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조선인들이 싫어하는 일본인들보다도 더 낯선 존재이다. 나는 혼자이며 이 땅은 무정부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p. 408)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그들이 나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략) 그들은 나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의 친절과 도움은 언제나 칭송을 받을만했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조국이 그들에게 보답을 하기를 바랐다. (p. 420)

'조선인들이 싫어하는 일본인들보다도 더 낯선 존재' 임을 스스로 알고 있던 포크는 여행 내내 수행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그 수행원들은 모두 포크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다행히도 서울에서 왕이 보낸 군대에 의해 포크 일행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의 두번째 조선 내륙 여행은 끝이 났다. 다양하고 멋진 경험으로 가득한, 또 걱정과 불안으로 보낸 900마일의 여정이었다. 그동안 나는 세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부를 조선인으로서 살았다. (기독교인의 마음으로). 그토록 많이, 그토록 구석구석, 내가 보았던 조선은 과거에도 이렇게 조명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이 장면들이 되풀이되지는 못할 것이다. (p. 444)

'과거에도 이렇게 조명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이 장면들이 되풀이되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문장은 맞았다. 포크의 이 여행이후 정세가 격변했고 포크는 조선을 떠나야 했다. 조선에 대한 기록들은 서양인의 우월한 시선아래로 쓰여진 것들이 많다. 이 책에서도 다른 서양인들의 기록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역시나 그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기록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비교적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이들도 있었다.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이라는 책을 읽은 적 있다. 선교사였던 저자가 서울에 살면서 경험한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였기에 <화륜선을 타고 온 포크> 와는 관점이 다르고 내용도 전혀 다른 방향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인 마음을 가진 서양인들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조차 느꼈던 '당혹감'은 분명 당시의 조선과 서양의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니 그 넓은 간극을 이해하려면 한쪽 방향의 시선만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이 읽고 깊게 숙고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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