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든 우리나라 역사지도 세트 - 지도의 형태로 담은 우리나라 5000년 역사 스팟
타블라라사 편집부 외 지음 / 타블라라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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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한 우리나라 전도에 꼼꼼한 역사주석이 달려 있으니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한데, 포장도 휴대용으로 알차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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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우리나라 역사지도 세트 - 지도의 형태로 담은 우리나라 5000년 역사 스팟
타블라라사 편집부 외 지음 / 타블라라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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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다닐때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과목이 '지리'였다. 방향감각이 없는 길치라서 약속을 잡을 때면 늘 내가 아는 곳 혹은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곳만 장소로 정하곤 했다. 그러던 나인데 어느새 지도가 눈에 익숙해졌다. 이유는 역사 덕분이다.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이런저런 역사책을 자주 읽는 편인데,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은근히 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역사책을 볼때면 해당내용에 관련된 지도를 펼쳐놓는 것이 익숙해졌을 정도다.

어쩌다보니 서양역사서를 주로 읽게되서 지중해지역이나 세계전도는 차라리 익숙해졌는데 오히려 우리나라 지도는 큰 모양만 알뿐 지역 곳곳에 대해 그 곳곳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쩌다 한국사 관련 책을 읽어도 낯선 지명이 나오면 이곳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헤깔리곤 했다. 물론 검색의 시대에 초록창에 물어보면 대뜸 답이 나올테지만, 종이책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지도도 종이지도가 왠지 보기에 편하다. 그러던차에 우리나라역사와 지도가 합쳐진 것이 나왔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든 지도'는 제주도 지도에서 무척 만족스러웠었던지라 기대가 됐는데, 우리나라 역사지도 또한 마음에 쏙 들었다. 일단 포장부터 내 스타일이다.ㅎ이다. 요즘 유행하는 언박싱 하듯 살펴보자면 일단 겉 포장은 '제주도 지도'때와 같다. 종이상자에 실로 묶여진 포장이 왠지 뭔가 있어보이는 것이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역사관련 내용이 덧붙여진 만큼 지도에 그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었을 터, 따로 역사 내용이 정리된 자료집은 상자와 따로 패키지되어 있다. 일종의 역사 요약본으로 휘리릭 가볍게 읽기 좋다.



상자에서 내용물을 꺼내보면, 지도가 두 장인데 지역별로 깨알같이 역사정보가 수록된 역사지도와 백지도가 각각 한장씩이다.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여행하며 백지도에 기입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이때 사용할 만한 스티커와 메모지도 함께 들어있다. 여기서 은근 중요한 물건이 '카드형 미니 돋보기'다. 역사지도에 촘촘이 쓰여진 글자들을 읽는데 아주 유용하다.



지도를 촤락 펼치면 A1 사이즈다. 접으면 A5 사이즈로 단추상자에 쏘옥 들어간다. 종이가 방수종이라고 되어 있긴 한데, 일반종이보다 두께도 있고 금방 젖을 정도의 종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닐코팅된 정도는 아니라서 오래두고 보려면 조심히 다루는 게 좋을 것 같다.



1000여곳의 역사 여행스팟이 담겼다는 이 지도 한장 가진 걸로 왠지 역사지식이 벌써 늘어난것만 같은 뿌듯함이 느껴진다. 나처럼 방향감각 없는 길치도 지도와 역사가 함께 연결됐을 때 더 잘 기억나는데 하물며 나보다 지리적 감각이 좋은 사람들이 활용하면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참, 미니책자에서 독도가 조선영토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고지도가 몇장 실려 있었는데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애정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어서 역사지도를 보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추운 겨울이 길다 싶었는데 어느새 봄바람 살랑이는 계절이 되고보니 지도한장 들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렁일렁한다. 하지만 아직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때는 아닌지라... 언젠가 이 지도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려본다.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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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 -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인류 행동의 모든 것
브루스 후드 지음, 조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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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토록 자가 격리에 괴로워했나

그 해답은 바로 인간의 작아진 뇌에 있다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인류 행동의 모든 것

'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 라는 문장을 보면 뇌가 계속 작아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으로 읽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책뒤표지에서 쓰여있듯이 200만년 가까이 지속된 인류의 거대한 진화사에서 인류의 뇌는 점점 커져왔다. 그러다 약2만년 전 인간의 뇌가 돌연 작아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작아져 왔다는 것이 아니라 커지던 뇌가 더이상 커지지 않고 오히려 작아졌다는 의미다. 이 책의 원제는 'The Domesticated Brain' 즉 '길들여진 뇌' 이다. 따라서 원제에 보다 가까운 표현이라면 '인간의 작아진 뇌'가 더 적절한 제목일 수 있겠다.

지난 2만년 동안 인간은 테니스공 하나 정도의 뇌를 잃었다. 선사시대의 인류 화석을 들여다봤더니 현생 인류의 조상은 뇌가 훨씬 컸다. 인류가 진화하는 동안 뇌는 전반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현생 인류의 뇌가 작아졌다는 사실은 분명 의외의 발견이다. (p. 7) 인간의 뇌가 작아진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지만 적어도 이 사실로 미루어 뇌와 행동, 지능의 관계에 대해 몇가지 도발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p. 8) 마지막으로, 터무니없이 들릴지 모르는 가설이 있다. 바로 '인간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p. 9)

'왜 인간의 뇌는 줄어들었는가' 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주제를 명확히 밝힌다. 인간의 뇌가 줄어든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길들였기 때문이라고. '인간은 보다 넓은 협력 관계 속에서 모여 살기 위해 자신도 길들이기 시작했다. 단 인간의 경우는 '자기 가축화'라고 볼수 있는데, (중략) 인간은 더불어 사는 문화와 관습이 발명된 이후 스스로 길들여 왔다고 볼 수 있다. (p. 10)' 라는 문장을 뇌과학적으로 상세하게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몸에 비해 뇌를 천천히 발달시키는 유전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는 기간도 길어졌고, 이 기간에 아이들의 기질을 조정하고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을 가르칠 메커니즘이 필요해졌다. 정착 사회에서는 사람들과 더불어서 평화롭게 사는 이들이 번식에 성공했으며, 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문화를 창조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인간의 지능이 단기간에 향상되었기 때문에 현대 문명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현대 문명은 인간이 자신을 길들이며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과 지식을 발전시키면서 형성되었다. 길어진 유년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도 유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족 안에서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시간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렇듯 집단 지성은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인간은 더 똑똑해지지 않고서도 지식을 공유한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배웠다. (p. 15)

문명의 역사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가르고 석기시대와 청동기/철기 시대를 가르는 중요 기준은 농경과 정착생활이었다. 하지만 괴페클리테페의 유적발굴로 기존의 문명발달사는 커다란 물음표에 직면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문명의 발달사도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 시대에 인류의 발달 또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까 싶다. 직립보행을 하고 뇌가 발달하면서 똑똑해져서 인류가 사회를 이룬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 모여살기 위해 뇌를 줄이면서까지 스스로를 길들여온 것이라는 발상은 신선하고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저자는 이 발상을 뇌과학적인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왜 집단이 그렇게 중요하고,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신경 쓸까? 이 책은 '인간의 뇌가 그렇게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인간의 뇌는 우리를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도록 진화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동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지각 능력과 이해의 기술이 필요하다. 또 사회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 생각과 행동도 바꾸어야 한다. (중략) 우리의 뇌는 거대한 집단에서 협력하고 소통하며, 자녀에게 문화를 물려주기 위해 진화했다. 인간의 유년기가 그렇게 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20)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포유류 동물들은 태어나자 스스로 걷고 움직여 어미젖을 빤다. 하지만 인간의 아기는 오랜 돌봄이 필요하다. 이 오랜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류가 모여살게 되었다는 상식을 깨고 사회적 존재로 키우기 위해 오랜 돌봄이 필요하도록 태어났다는 주장이 그럴법했다. 인류의 진화, 뇌발달, 아동발달에서 유전학, 신경과학, 사회심리학까지 망라하며 '길들여진 뇌'를 설파하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인류의 진화를 새롭게 볼수 있는 프레임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모든 문화에는 출산, 사춘기, 결혼, 죽음처럼 인생의 큰 변화를 기념하는 다양한 의식이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의 삶에 구두점을 찍고, 종종 신앙과도 관련되어 있다. 예식 자체는 대개 논리나 개연성이 없어 난해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각 식에 적용할 수 있는 인과법칙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예식 위반'이다. 즉 예식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 자체가 예식에 힘을 부여한다. (p. 96) 아이들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 중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p. 97)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지키고자 하는 인간만의 '예식'들이 있다. 이것이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도 있을 듯 하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공막이 큰 인간의 눈은 늘 상대방을 살펴보도록 진화한 결과이다. 서로서로 따라하면서 집단의 결속력을 높여갔다. 집단이 커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사회적 동물이 되어온것 같기도 하다.

감각에서 문화에 이르는 모든 사회 매커니즘은 자연선택을 통해 처음부터 신생아의 뇌에 새겨져 있지만 이는 이후에 문화적 환경 안에서 조직되고 운영되는 다층적 체계를 형성한다. 이 시스템은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는 도구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로 묶은 다른 매커니즘도 있다. 우리는 관심과 흥미 이상으로 감정을 공유한다. (p. 10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동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은 난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전이 먼저인가, 환경이 먼저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잘 통제한다고 믿는다.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일은 있어도 여전히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행동의 주체이자 생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 193) 우리는 이 짐승들을 멀리해야 한다. 사회에 수용되려면 자신을 통제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를 배워야 한다. 자기 통제력은 욕동과 욕구를 조절하는 능력이다. (중략) 만약 생물학적 조건과 환경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충동이 조절되는 것이라면 아이들에게는 사회에서 용납되는 것이 무엇인지 지침을 제공하되 강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p. 194)

하지만 저자는 '아무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교육방침은 자기통제력을 키우는 것이지만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을 어쩌면 평생 길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개인의 타고난 성향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날까 악하게 태어날까

인간은 선천적으로 남을 돕는 경향이 있다. 같은 집단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거나, 돕기를 거절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위배된다. (p. 236) 생물학적으로 친사회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나, 닥치는 대로 돕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 세계에는 여전히 영역, 자원, 사상을 둘러싼 집단 간의 갈들이 만연하다. 인간은 친사회적인 동물이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만 친절을 베푼다. (p. 237)

저자가 내린 결론은 성선설에 가깝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은 인간을 개인적 본성으로 파악했을 때 그렇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집단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을 보면 전혀 상반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언제쯤 풀려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도, 고문받는 다른 재소자들의 비명도 아닌 독방에서 홀로 보낸 4개월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절실했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교도관에게 오늘은 취조라도 받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요" (p. 242)

이란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던 미국인 등산가의 인터뷰 내용은 코로나로 인한 격리 시대에 던지는 울림이 크다. 그리고 이 울림이 큰 만큼 친사회성을 지닌 인류가 집단이 되었을 때 못할게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는 논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충격적이기도 하다.

절박한 동료애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강조한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 상호 작용을 위해 진화했고,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길들이기에 의지하게 되었다. 사회적 동물은 고립된 상태로는 잘 지내지 못한다. 인간은 집단 안에서 가장 오래 양육되고 생활하는 종이다. (p. 244) 평범한 사람에게서 잔인함을 불러일으킨 조건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와 '저들'을 구분한 상황의 치명성이었다. (p. 258)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 안할 일 아니 못할 일도 뭉치면 거침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때로는 폭력적인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길들여진 삶의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반전이다. (중략) 의존성은 인간의 긴 어린 시절이 낳은 모든 신체적, 감정적 필요를 해결해 준다. (중략)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우리를 보는 타인의 시각과 연관되어 있다. 그 탐색은 사회적 동물만이 얻는 기쁨과 불행을 모두 가져온다. (p. 288) 개인주의든 집단주의든 궁극적으로 한 문화에서 무엇이 옳은지는 '타인의 마음'으로 검증된다. 내가 나의 성취를 '성공'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단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p. 290) 인간이 진화하는 내내 길들이기는 개인을 위한 다수의 힘을 제공했지만, 그렇게 인간을 번영하게 해준 길들이기가 이제 개인을 말살하겠다고 위협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너무 의존한 나머지 자급자족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더구나 이러한 상호의존은 아직 절정에 이르렀다는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다. 상호의존은 더 쉬운 삶을 제공하고 점점 더 정보 기술에 의지한다. (p. 299)

저자는 인간의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뇌를 설명함으로써 지금의 위기상황을 해결할 방법으로 '전지구적 평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우리'를 제시한다. 현대사회가 정보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비해 개인화된 사회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타인의 시선은 더욱 의식하게 된 사회라는 점에서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더욱 커진 사회이기도 하다. 자가격리는 유유자적 할 수 없고 좋아요와 하트버튼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따로 떨어져 있으나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맹목적 추종의 모습을 보일때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뇌'는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찾고 공고히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 '전지구적 우리'가 되려면 결국 타노스가 지구방문을 해줄때가 되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씁쓸함에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화는 인간이 그러거나 말거나 늘 현재진행중이고 인간이 알거나 말거나 인간의 뇌또한 그렇다. 그 진화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우리'가 되고자 하는 노력에 그래도 좀더 희망을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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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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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인가, 선택인가

1974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은 몰랐지만 '스톡홀름신드롬'은 들어봤던 단어였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감정에 공감하게 되는 심리변화에 대해 '세뇌인지, 선택인지' 묻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실제 납치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니 그 이면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다.

"여러분은 보고서를 써야 해요. 이 모든 걸 다 읽어볼 시간은 없을 거에요. 그러나 이 엄청난 양의 기사들을 종합할 수 있어야 하죠!" 당신은 주어진 기간 안에 반드시 이 일을 마쳐야 하지만, 그 기간이 최대 2주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층계참에 서 있을때 방금 생각났다는 듯 물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군지는 아나요?" (p. 21)

프랑스의 작은 도시의 여학교에 영어 선생으로 온지 얼마 안된 미국인 젊은 여성 진 네베바는 미국으로부터 특별한 의뢰를 받게 된다. 진 네베바 선생은 1975년 가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 한 장을 써서 이 도시에 있는 빵집 두 곳에 붙여두었다. '매우 유창하게 영어를 쓰고 말할 수 있으며 2주일 동안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여학생을 급히 구합니다. 학생이 아닌 분은 사절합니다" 이 광고를 보고 세 명의 여학생이 면접을 보았고 비올렌이 합격연락을 받았다. 세명중 유일하게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낙담하고 있던 비올렌이었다.

당신은 비올렌이 생전 처음으로 만난 미국인이었습니다. (p. 29) 당신의 지시는 비올렌의 역할에 한층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p. 32)

이런 것들이 퍼트리샤 허스트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이 미국 여성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도대체 언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일까? 만일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비올렌은 아예 처음부터 지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p. 49)

퍼트리샤 허스트는 1974년 2월 납치 당시 예술사를 공부하는 대학2학년생이었다. 미국의 최대 언론재벌 허스트가의 딸이었기에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SLA는 몸값대신 극빈층에게 식량을 배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퍼트리샤는 녹음테잎을 보내 자신의 안부를 알렸다. SLA의 요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뉴스에서는 온통 테러로만 표현되었다. 그리고 몇달 뒤 사상전향을 했다며 총을 메고 모습을 드러낸 퍼트리샤의 모습은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기사들과 퍼트리샤의 녹음기록들을 살펴가며 이 여성의 심리를 파악해보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수시로 던져지는 네베바 교수의 질문과 토론이었다. 프랑스 변두리 작은 마을에서 순진하고 순종적으로 자라온 여학생이었던 비올렌에게 네베바 교수의 모든 것은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에밀리, 낸시, 앤절라, 커밀라. 비올렌은 망연스레 1974년 2월 14일자 일간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네 개의 이름을 베껴 썼지요. FBI가 신원을 확인한 공생해방군SLA단원들은 나이가 스물세살에서 스물아홉살 사이였습니다. (p. 50) 그들은 몸값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인질을 잡은 것입니다. 새로운 인질이란 바로 허스트가 소유의 일간지 독자들이었지요. SLA는 이 일간지들이 1면에 그들의 성명서를 싣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자기들의 주장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습니다. (중략) 한편 허스트씨도 자기 딸이 납치되었다는 기사 하나만으로 이렇게 많은 신문을 팔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p. 53) 당신 조수는 당신집 응접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 60)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 사건을 알아갈수록 상황파악은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단순한 재벌가의 딸 납치 사건이 아니었다.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압축시킨 듯한 상징적 사건이었기에 비올렌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공산주의, 빈부격차, 황색언론, 히피족, 여성의 역할 등 무엇하나 쉬운 주제가 없었고 무엇하나 생소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조수의 역할이라기 보다는 학생처럼 느껴지는 업무들이었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납치는 모험 같기도 하고 탈주 같기도 합니다' (p. 63)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퍼트리샤의 납치사건은 알면 알수록 점점 더 페미니즘적인 문제의식을 건드리고 있었다.

비올렌이 맡은 단순한 조수의 역할은 당신이 그녀에게 퍼붓는 격한 단어의 무더기에 깔려 흔들리고 있었지요. (p. 83)

당신의 분노는 비올렌이 알고 있는 어른들의 분노와는 달랐습니다. (p. 85)

사실 진 네베바 교수는 학생시절 시위활동으로 학위를 박탈당했던 경력이 있었다. 이 경력이 새로운 관점의 보고서를 작성할 수도 있으리라 여겨져서 퍼트리샤의 변호인단에게 채택된 것이었다. 미국은 커녕 프랑스의 정치상황에도 무지한 비올렌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퍼트리샤의 기록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은 네베바 교수에겐 어쩌면 행운이었다. 네베바 교수는 비올렌을 통해 퍼트리샤를 새롭게 해석하고 비올렌은 네베바를 통해 알게된 퍼트리샤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게 되었다. 네베바 교수는 탄탄해져 가고 비올렌은 점점 더 세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둘다 자신들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최소 30년 형은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한 여자 경찰이 그녀의 수감서류에 써넣기 위해 직업이 무엇인지 묻자 퍼트리샤는 "'도시게릴라'라고 써요"라고 대답했지요. 그녀는 도시게릴라였던 것입니다. (p. 123)

네베바 교수와 비올렌과 함께 퍼트리샤의 기록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다름아닌 퍼트리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집중하게 된다. 가장 변화무쌍한 존재임에도 실체로서가 아니라 기록속에서만 존재하는 퍼트리샤의 목소리는 소설을 읽는 독자도 궁금해지게 만든다. 그녀는 왜? 혹은 세뇌일까, 선택일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진다.

당신은 비올렌을 채용한 바로 그날, 정확히 알아차렸지요. 비올렌은 당신이 뭘 알아내라고 했는지는 이해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너무 신중한 이 젊은 여성을 당신 취향에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책들만 읽는다며 비웃었지요. (p. 146) 비올렌은 마치 실험용 쥐처럼 번역하고, 버리고, 요약하고, 다시하고, 귀 기울여 듣고, 추측하라는 당신의 요구에 복종합니다. (중략) 비올렌은 언젠가 당신이 자신의 삶을 스쳐지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듯, 당신이 그날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당신 옆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 당신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것이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조수가 마음껏 기뻐할 수 있도록 그녀를 교육한 것입니다. (p. 147)

퍼트리샤 허스트 의 납치사건을 통해 삶이 변한 세 여자인 진 네베바, 비올렌 그리고 작품속 화자 이 세명의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 세명은 허트리샤 허스트의 후예?!이기도 하다.

한 신문기자가 동료기자에게 자기는 당혹스럽다고 털어놓았다고 썼습니다. '도대체 허트리샤 허스트의 죄목이 뭐지? 무장강도행위인가? 아니면 퍼트리샤의 메시지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견해인가? 그녀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건 그녀의 행위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의 전향 때문인가?' (p. 257)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도 점점 더 궁금해지고 의아해질 것이다. 도대체 퍼트리샤의 죄목이 무엇인지... 퍼트리샤는 잡혔고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허스트가가 낸 보석금으로 곧 풀려났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p. 291)

나는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했다. (p. 317)

이 말은 퍼트리샤 허스트가 한 말들이지만, '너무나 많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고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한' 사람은 결국 퍼트리샤 허스트가 아니었다.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짧은 기간 자신에게 정해져 있던 삶을 일탈했던 퍼트리샤는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고 그녀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퍼트리샤 허스트에게 빠져들었던 세 명의 여성은 자신들의 삶이 송두리째 변했다. 그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은 17일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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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5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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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플롯, 스토리텔렝, 모방, 비극, 에피소드, 카타르시스 개념의 탄생

마음에 각인되는 완벽한 이야기 구성의 기술

고전을 좋아하다보니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새번역되어 나온 책을 몇권 읽어보게 됐는데 모두 다 좋았다. 이번 책도 역시 좋았다.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이라는 영역에서 박문재 번역은 앞으로도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충실한 해설은 늘 큰도움이 되고 있다.

인문학을 접하고 고전을 읽고 새로운 학문의 분야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런저럭 책을 잡다하게 읽었었다. 그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 도 있었다. 수사학 부분에서 꼬인 머리속이 풀리지 않은채 덧붙여 있는듯 짧게 이어진 시학은 읽으면서도 대충 넘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 제대로 읽고 싶었다. 이번엔 머리 꼬이지 않게 시학부터 ㅎㅎ

일러두기 1. <시학>은 원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권에서는 비극과 서사시를, 2권에서는 희극을 다루었지만, 지금은 1권만 전해진다. 현재 <시학>은 26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 구분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 그리스어 판본을 편집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러두기> 첫번째부터 감회가 남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읽기전 <장미의 이름> 이라는 소설을 먼저 읽었었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스릴러 처럼 읽히는 그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숨겨졌던 비밀이 바로 '시학의 2권'에서 다룬 '희극' 이었다. 그 소설을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었다. 전해오지 않기에 여전히 알수는 없지만 시학1권을 읽으며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비극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았다.

흔히들 운율의 명칭에 '시인'이라는 말을 덧붙여, 비가시인, 서사시인 등으로 부르지만, 그러한 명칭은 그들이 모방을 행한 대상이나 방식이 아니라 사용한 운율에 따라 일률적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의술이나 자연철학에 관해 글을 썼다고 해도 운문으로 썼다면, 그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행이다. (p. 11)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시인'이라는 개념은 지금의 개념과 무척 달랐다. 당대에 글을 쓰는 지식인이라면 거의 모두 시인이라 불릴만 했다. 플라톤의 철학서도 운문처럼 읽히기 때문에 비극의 위험성을 비판한 본인으로서는 싫겠지만 플라톤도 (당대의)시인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석13. '모방하는 사람'은 모방이 본질인 모든 예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인, 무용가, 화가 등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 예술은 사람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행위는 성격과 사상을 드러내는, 목적지향적이고 가치지향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그 가치는 사물의 본질에 부합하는 미덕과 부합하지 않는 악덕으로 구분된다.

이 책은 본문과 주석의 양은 거의 비등하다. 어쩌면 주석의 양이 더 많을지도?! 이러한 상세한 주석은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원전 번역에 상세한 주석 그리고 뒤에 붙은 해박한 설명은 현대지성클래식 시리즈의 큰 장점이다.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나은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p. 14)

모방은 이렇게 수단과 대상과 방식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소포클레스의 모방은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호메로스의 모방과 동일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방하는 사람을 연기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와 동일하다. (p. 15)

이렇게 모방은 물론이고 선율과 리듬도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본능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끌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즉흥적으로 모방했다가,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시가 출현한 것이다. (중략) 호메로스 이전에 쓰인 풍자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예로 들 작품이 없지만, 그때도 풍자시를 쓴 시인은 많았던 듯하다. (p. 19)

희극과 비극의 차이점에 대해 진지한 공감이 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시학을 정리하면서 호메로스를 무척 많이 칭찬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과거의 작품들이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그런데 그때의 호메로스의 작품을 지금 우리도 여전히 가치있게 읽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리고 시학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당대의 온갖 학문분야에 대해 정리해놓았기에 지금의 학문들이 그 기초로 일어섰구나 하는 것이 '시학'을 통해 좀더 실감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극은 양념을 친 온갖 언어를 곳곳에 배치해, 낭송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통해, 훌륭하고 위대한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모방하여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정화를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양념을 친 언어'는 리듬과 선율을 지닌 언어나 노래를 의미하고, '곳곳에 배치한다'는 어느 부분에서는 운문만 사용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다시 노래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p. 26~27)

여섯 구성요소(시각적 요소, 성격, 플롯, 대사, 노래,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나 사건을 구성하는 플롯이다. 비극은 사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극은 성격을 모방하려고 행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성격을 포함시킨다. 이렇게 비극의 목적은 행위와 플롯이고, 목적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더욱이 행위 없는 비극은 있을 수 없지만, 성격없는 비극은 있을 수 있다. (p. 28)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시학관련 지식을 총망라하여 정리하고 있긴 하지만 상세한 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책들도 본인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단어의미와 지금 의미의 격차가 커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과 행위를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시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역사가와 시인의 진정한 차이는, 역사가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시인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는 데 있다. (p. 35)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고결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주로 말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것은 희극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희극에서는 개연성에 따라 플롯을 구성하고 나서 등장인물에게 그 플롯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중략) 반면에, 비극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고집스레 사용한다. 가능성이 있어야 설득력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능하다고 믿기 어렵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분명 가능하다. 가능성이 없다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p. 36)

역사가 보다 시인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그중에서도 플롯의 통일성과 개연성을 강조한다. 스토리는 플롯에 포함되는데, 이 두단어를 볼때마다 “스티븐 킹이 소설계의 롤링 스톤스라면, 딘 쿤츠는 비틀스다' 라는 홍보문구가 생각난다. 스키븐 킹은 자연스러운 스토리의 흐름을 강조하고 딘 쿤츠는 논리적인 개연성이 뚜렷한 플롯을 강조한다는 해설도 떠오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플롯을 좀더 중요시여기는 편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논리가 더 흥미롭게 읽혀졌다.

가장 훌륭한 비극은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고,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한 사람이 행복했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일은 공포나 연민이 아니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악인이 불행을 겪다가 행보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비극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멀고, 비극의 효과를 조금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긍할 수도 없고, 연민이나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 (p. 45) 결말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말은 앞에서 설명한 사람들이나 그들보다 나은 사람들의 악행이 아니라 큰 실수나 결함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p. 47) 따라서 시학 이론에 의하면, 그런식으로 플롯을 구성한 비극이 가장 훌륭하다. (p. 48)

그리스비극은 항상 깨달음을 남긴다. 공포와 연민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나면 현실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지침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고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성격은 지금의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결말에 대해서는 그리스비극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다양해졌지만 기본적 원리는 같다. 사람의 감정이 변하지 않아서랄까 다시말해 사람이 변하지 않아서랄까... 수천년의 역사가 지나갔지만 사람은 변한게 없는 것같다. 역사를 읽어도 비극을 읽어도... 그랬다.

서사시는 연기가 필요 없는 교양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비극은 저속한 관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따라서 사람들은 비극이 이렇게 저속하다면 분명 서사시보다 열등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평가를 접하면서, 먼저 그런 비난은 비극 자체가 아니라 배우의 연기에 대한 비난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p. 114) 아울러 비극도 서사시처럼 연기 없이 비극의 목적으 달성할 수 있다. 비극을 읽어보기만 해도 비극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략) 게다가 비극에는 서사시에 있는 요소가 모두 있고, 서로 결합하여 생생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음악과 시각적 요소라는 중요한 요소까지 갖추고 있다. (p. 115) 이렇게 비극은 이 모든 점에서뿐 아니라, 각각의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과 관련해서도 서사시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비극은 자기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한다는 점에서 서사시보다 분명히 더 우월하다. (p. 116)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라는 학문을 정리한 것은 이 마지막 문장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였나 보다. '비극은 서사시보다 우월하다!'

이렇듯 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이었다. (p. 126) - 해제 中 -

역자는 '비극에서 사람의 행위나 사건을 모방하는 까닭은, 비극의 목적이 감정의 정화, 즉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서 감정을 정화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서 플롯이 가장 중요하며, 플롯은 철저하게 필연성과 개연성을 토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비극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시학이라는 학문을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했다면 심리학이 좀더 일찍 발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을 읽으면 이런 나의 궁금함이 해결될지도 모르지만 윤리학과 수사학과는 다른 심리학적 어떤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가졌었다면 하는... 여하튼, 얇아서 좋고 원전 번역이라 좋고 본문이해에 도움되는 자료가 많아 좋은, 여러모로 참 읽기 좋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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