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페이지 과학 : INSTANT SCIENCE - 한 페이지로 넘기는 과학의 역사·원리·발견
제니퍼 크라우치 지음, 박성래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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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로 넘기는 과학의 역사·원리·발견

두꺼운 벽돌책이 부담스러운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두껍지 않아도 책 한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읽어내는 것조차 점점 더 부담스러워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1페이지' 어쩌구 하는 수식어를 단 책들이 종종 눈에 띄곤 한다. 그런 수식어를 단 책은 반드시 한권이 아니어도 단 한 페이지만읽어도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볍게 읽으면서도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이다. ^^

'인스턴트 사이언스' 라고 쓰여 있는 이 책을 보며 '과학' 도 인스턴트 로 접근할 수 있구나 싶어서 신선했다.

인스턴트 라는 말은 즉석 식품을 지칭할때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가볍고 간단하게 조리해 먹는 식품을 인스턴트 식품이라고 한다. 과학도 그렇게 가볍고 간단하게 읽을 수 있다면? 이또한 매력적이다. ㅎㅎ

책은 일단 디자인 면에서 굉장히 깔끔하다.

매 페이지마다 한 페이지에서 주제 하나씩을 충실히 담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색감과 시각자료를 활용해서 내용이 어렵더라도 보기좋게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1페이지, 인스턴트 라는 수식어로 가볍게 시작한 것 대비 내용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놀라긴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다 이해하라고 이 책을 쓴 것도 아닐 테고 그 어려움들을 다 이해하려고 이 책을 읽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일종의 '상세 목차' 같은 책이다. 또는 과학용어 들의 감각적 풀이집 이랄까?!

여기 나오는 다양한 단어들과 법칙들을 이 책을 통해 이해까진 아니어도 눈에 익혀두면 언젠가 다른 과학책을 읽을 때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짧은 요약본 같은 책이지만 '과학'의 다양한 분야를 나름 총 망라 하고 있다.

과학의 기초분야인 수학으로 시작해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학, 지질학&생태학, 기술 까지 순수과학부터 응용까지 두루 섭렵한다.

과학적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몇가지 설명된 수학도 시작하자마 전문성이 팍팍 느껴진다. '수학적 개념은 발명한 것일까요? 아니면 발견된 것일까요?(p. 15)' 같은 철학적 질문을 이 '인스턴트 과학'책에서 만날 줄이야 ㅎㅎ

이후로도 신선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오곤 했는데, 파이(π)의 특별함이라던가 극한 생물의 신기함이 재밌기도 하고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 에선 착잡하기도 하고 '활자' 부분의 '나무 활자 기술은 중국, 일본, 한국, 인도에서 수천 년간 사용해 왔습니다.(p. 150)' 에선 반갑기도 했다.

적은 지면속에서도 여성 과학자 에미 뇌터, 벨 버넬, 로잘린드 프랭클린 의 억울한 사례를 빠뜨리지 않고 언급해준 것과 남성임에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배척당한 '앨런 튜링'등 과학의 어두운 이면들을 알려준 것도 좋았다.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마중물 책으로도 핵심용어집으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얇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전문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훌륭해서 한권으로서도 한페이지로서도 의미있게 읽히는 알찬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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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이지 공학 : INSTANT ENGINEERING
조엘 레비 지음, 이경주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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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인스턴트 식품이라면, 간편하게 읽을 있는 인스턴트 공학 책이 이 책이다. 1페이지 공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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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이지 공학 : INSTANT ENGINEERING
조엘 레비 지음, 이경주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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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로 넘기는 공학의 역사·원리·발명

'인스턴트' 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주로 '식품'에서 ㅎㅎ

가볍고 쉽게 조리해먹을 수 있는 음식을 우리는 인스턴트 식품이라고 부른다. 편의점에 가면 종류도 엄청나게 많다. 간편하고 간단하다는 '인스턴트' 가 엔지니어링에 붙으면 어떤 의미일까? 하는 설정에 대한 답변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1페이지 공학' 이라는 제목에서 알수있듯이 '1페이지' 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책속 내용이 한 페이지별로 간략하게 서술된 책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언제부턴가 이 '1페이지' 라는 수식어가 붙은 책이 여럿 눈에 띄곤 했는데... 아마도 '짧고 굵게'를 선호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점점 더 여유없고 바빠지는 일상에서 알고 싶고 궁금한 것이 많지만 시.간. 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 페이지만 읽으면 핵심이 쏙쏙 읽히는 책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일반 상식도 아니고 왠지 전문적으로 느껴지는 '공학' 도 인스턴트 식으로 읽을 수 있다니~!^^

일반원리, 토목공학, 교통공학, 생체공학, 항공우주공학&군사공학, 전기공학&컴퓨터공학, 기계공학 등 공학의 대부분의 분야를 망라하면서도 제목그대로 정말 딱 1페이지면 감을 잡을 수 있도록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전문적인 내용으로 가기 전의 '상세한 목차' 로 읽혀지는 책 같기도 하다.

생명공학의 시작이 기원전 11,000년 경이고 선박은 기원전 800,000년경 이라는 역사적인 내용들 부터

제어 이론에서 '물 시계'의 효용성과 '창발' 이라는 낯선 용어를 알게 되는가 하면

'열' 은 가장 유용하지 않은 에너지 형태 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에펠탑을 만든 공학자 에펠이 자유의 여신상 내부의 철골 구조물을 비롯한 다양한 건설을 했다는 것과

'장형' 이라는 낯선 이름의 공학자도 만나게 되는 등

짧은 서술 속에서도 알찬 정보가 가득한 책이었다.

안정적인 색감과 다양한 시각자료를 활용한 디자인 덕에 책이 더 입체적으로 읽히는 장점도 있었다.

'아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잘 몰랐던 이야기들' 이라는 표지문구 처럼 일상에서 공학을 찾게 되기도 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공학이 가깝게 다가오는 등 쉽고 재밌게 읽히는 깔끔한 책이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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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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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동시대적인 윤리를 서성이며 구축하는 질문들

이름이 낯선 신예작가의 소설집이었다.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책이다. 두번째 작품을 다 읽기전 작가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취재로 표현했다기엔 너무나 전문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글을 쓴 이가 의사가 아닐까 싶었다. 역시나 의사였다. 의사가 쓴 글은 종종 읽어보았다. 하지만 본업이 의사인 작가가 쓴 소설은 처음이었다. 책날개에 쓰여진 저자의 약력은 소설가로서의 약력만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소설가로서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의사와 소설가...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은 저로부터 멀어지고 타인으로 이입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장르인데, 저는 아직까지 지근거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계속 멀어지는 작업을 하고 싶다' 라고 말했는데, 나는 꼭 멀어져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의사이기에 쓸 수 있는 소설이 따로 있지 않을까? 그러니 첫작품부터 인정받고 바로 등단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작가가 앞으로도 '자신의 지근거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면 싶다. 의사이기에 쓸 수 있는 소설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갔으면 좋겠다. 책전반에 퍼져있는 의사로서의 윤리의식에 대한 번민이 느껴질수록 더더 의사로서 쓰는 소설을 기대하고 싶어졌다.

'삼십대 초반의 일개 봉직의임에도 의사 중에는 희귀한 등단작가 (p. 10)'인 '나'는 최근 쓰고 있는 소설이 한 장면에서 막혀서 쓰고지우고쓰고지우고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이 소설에 영감을 준 환자는 이시진 씨라는 남성으로 그의 딸 유나씨는 최근 아버지의 연명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날카로운 절단면이 모두 마모된 해변의 유리알처럼, 둥글게 빛났으나 더는 깨지지 않기로 작정한 듯 단단한 느낌(p. 13)'의 스물여섯살 유나씨와 종종 산책을 하던 '나'는 유나씨로부터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일년전의 사건에 대해 자신의 실수를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아빠는 어떻게 살았을까.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웠을까, 아니면 반대였을까. 아저씨와의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p. 21)' 말하다가도 '사랑, 그거 안 하면 안되나? 그냥 안 하면 되잖아! 나는, 나는 안 사랑해?(p. 23)' 라며 소리치는 유나씨에게 '나'는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에 대해 고백한다. 두 노인의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산부인과 전공의 4년차인 '나'는 같은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온 동생인 소아청소년과 해수 와 대학생활 내내 따랐던 산부인과 전문의 의자 시민단체 활동가인 선배 희진언니 사이에서 '낙태법'에 대한 사회적 논란에 대해 번민에 빠진다. 낙태법은 위헌이고 사라져야 할 법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희진언니는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p. 57)' 라 말하며 '나'의 의견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동의하나 상황적으로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해수는 갑작스런 임신을 하게 되고...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 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p. 70)' 이라는 크리스마스고백을 '그 다른 세계'에서의 생명은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세계에서 이해할 수 없다면... 『다른 세계에서도』

'라이파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내 눈으로 봤어!(p. 75)' 라고 말하던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간 영우는 '루이소체 치매'라는 생소한 병명을 진단받는다. 환시를 보고 환영에 정신을 뺏긴다는 그 병의 초기증세에서 아버지는 왜 하필 자신이 열한살이던 1961년에 봤던 만화책 속 영웅을 떠올리게 됐을까... 만화속 배경이었던 초원을 보고싶어 하는 아버지와 함께 간 몽골여행에서 일행이었던 장사장의 폭행을 보고 아버지는 라이파이가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 번의 돌려차기' 를 한다. 열한살때 창문 너머로 봤던 무고한 죽음에 대해 그 시절 난무했던 폭행에 대해 숨었던 마음이 '단 한 번'쯤은 되어보고 싶었던 것이려나... 한번만이라도 나타나줬으면 싶었던 존재... 『라이파이』

'진단은 귀납적 추론이다. 개별 증상을 통해 가능성 낮은 질병부터 소거하여 단시간에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이 과정은 편견을 수반하며, 축적된 임상 경험으로 구분과 배제에 능할수록 유능한 의사가 된다. 나는 여전히 부태복을 신뢰할 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가 유능한 내과 의사였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p. 105)' 진단이 귀납적 추론이었나? 서구의 논리들이 연역적인 경우가 많아서 나는 은연중에 서양에서 온 대부분의 논리는 연역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진단이 귀납적 추론, 하나하나 소거하다가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여하튼 중요한건 '부태복' 이라는 인물이다. 부태복은 귀순자 였다. '그는 기계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불신했다. 낙후된 병원에서 맨손으로 환자를 돌본 기억을 훈장처럼 말하는 그에게 최소한의 검사는 신념이자 자랑이었다.(p. 112)' 기울어가는 지방의료원이었기에 부태복이 채용될 수 있었다. 이런저런 부침이 있긴 했어도 실력있는 의사였다. 하지만 바이러스성 폐렴 소견의 아이가 입원하면서 부태복과 진단에 대한 의견마찰이 일어난다. '나만 살았슴다...나머진 다 뒈졋소.(p. 126)' 라는 그의 말을 '나'는 무시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옳았다. 『부태복』

'1959년, 동독의 젊은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p. 160) 당대의 평자들은 리히터의 흐릿한 사진 회화에 주목했다. 훗날 '리히터스 블러'라 불리게 될 그 기법은 반사투영기로 실제 사진을 캔버스에 비춰 본을 뜬 다음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스펀지나 찰필로 눌러 뭉개버리는 것으로, 홀로코스트 이후 예술의 가능성을 회의하던 평자들에게 직관적인 통찰을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p. 161)' 지재권을 중심으로 모인 변호사들의 스터디에서 만난 한서와 '나'는 리히터의 작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가까워졌다. '컨프론테이젼. 한서가 아이패드로 보여주었던 구드룬 엔슬린의 초상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었다. (p. 163) 브로슈어에는 그 단어가 심리학에서 '직면'으로 번역된다고 적혀 있었으나 내게는 '대질'이 더 익숙한 번역이었다. (p. 164)' 한서와 연인이 되었으나 지금까지의 연애가 그랬듯 이번 연애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다. 서로가 그 끝을 느꼈을 즈음, '너 좀 이상해! 알아? (p. 176)' 라는 한서의 말에 '나'는 '한서라고 달랐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p. 177)'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직면'하는 순간 사랑은 끝나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사랑이라는 떠난 감정과 '대질'하게 되는 것을까... 리히터의 그림처럼 흐릿하게... 『컨프론테이션』

작은 소도시의 전문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로 한 희곤은 바닷가가 보이는 집을 원했다. ''자연'외에는 덧붙일 말이 없는 풍경 속에서 단 한 가지 이질적인 광경이 있다면 오른쪽 능선 너머로 나란히 솟아오른 일곱 개의 굴뚝이었다.(p. 185)' 한때 그 굴뚝 아래에서 일했던 우재의 집으로 이사하게 된 희곤은 우재의 숨죽인 일상에 대해 처음엔 그닥 신경쓰지 않았었다. 젊은 직원들이 북적였다던 발전소는 이제 하나둘 연기나는 굴뚝이 줄어들고 있었고 몇달을 지내는 동안 우재의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 '잔이 닳도록 그것을 매만지는 동안 화장실에서 우재가 목을 놓아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한참 전부터 벽을 넘어 식탁위를 뒤덮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그의 울음을 듣고만 있던 준모가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로, 저 친구 눈빛이 없었어.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디 저 친구뿐이었겠나' (p. 212)' 컨베이어벨트... 신입... 하지못한 신고... 사고처리반... 그날 그사건 이후.... 『눈빛이 없어』

'너희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부담되면 오지 마라. 간호 과장님의 전언이라며 병원에서 비상 연락망을 돌린 것은 출근 30분 전인 20일 오후 2시반경이었다. (중략) 곤봉으로 모자라 이젠 대검까지 쓰는 거지. (p. 220)'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고 어떤 숭고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중략) 그 순간 그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다. (p. 234)' '시민 동지 여러분, 병원에 피가 부족합닏. 가능하신 분은 병원으로 가서 헌혈에 동참해주십시오.(p. 250)' '구 본관 건물의 측면을 지나, 주차장 가운데 줄지어 심긴 주목나무를 따라 행렬은 이어졌다. 더디게,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는 줄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굳은 얼굴로 나란히 선 노부부가, 손 그늘을 하고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p. 251)' '왜 안 돼요, 왜? 아까 그 아이들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이 보조 침대에 리넨을 덮은 임시 채혈대 앞에서 울먹였다. 제 피라도 써주세요, 제발요, 그래주시면 안 되요? 아이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힌 간호원이 열여섯 살 밑으로는 헌혈이 안 된다며 아이를 달랬다. (p. 252)'

그 날은 그랬다.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정혜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그 날은 그랬다. '1980년 5월 22일의 오후(p. 254)' 『너를 따라가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의학자문을 촉탁받은 진영은 교도소에서 있었던 누군가의 사망에 대한 진정서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된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그는 한편에 남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입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p. 268)' 이런 진영의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최교수는 진영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진영도 그런 최교수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해 못하겠나? 증명이 중요한 게 아니야. 최교수님께서도 늘 말씀하셨지만, 이런 종류의 연구에선 과학이니 중립이니 따지는 게 아니라고. 그건 오히려 연구자가 가져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거란 말이지' 증명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진영이 이해한 건 그 연구가 종료될 무렵이나 되어서였다. (p. 276)' 김선배가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차례로 오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조사가 더욱 신경을 쓰였다. 확인하고 싶었고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교도소 의무 과장은 진영의 마음을 눈치채며 노련하게 말했다. '순간 진영은 의무 과장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중략) 그것은 숱한 짐승을 도륙해왔다는 당당한 고백이었다. (p. 283)' 철창과 철창 사이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진영은 어느 쪽으로 문이 열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p. 284)' 교도소의 문은 한번에 양쪽이 열리지 않는다. 그 철창과 철창 사이의 공간... ·참站』

다양한 현실문제들을 건드리면서도 일정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문체는 그 거리감이 갖고 있는 고민에 저절로 이입되게 만들었다. 직접적인 내문제로 여겨진다면 감정이 앞서서 고민하기가 더 어렵다. 한걸음 떨어져서야 문제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 거리감이 때론 냉정하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그 거리감이 있기에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했다. 동성애, 낙태, 폭력, 섣부른 진단, 산업재해, 5.18, 교도소 의료사고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주제들이었다. <컨프론테이션>이라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애소설로만 읽어도 무방할 '컨프론테이션' 조차 연애보다 리히터의 작품주제가 더 중요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이 품고 있는 질문들은 질문자체로서의 의미가 깊은 것들이었다. 리얼리즘이긴 하되 불편하게 읽히지 않는 리얼리즘, 작가가 거리를 두고 있는 만큼 독자도 (비교적) 부담없이 거리를 두고 읽게되는 이 책의 작품들은 앞으로 작가가 던질 또다른 묵직한 질문들을 기대하게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세계'를 '의사이면서 소설가'로서 꾸준히 보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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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건너뛰기 트리플 2
은모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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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은 한국 단편소설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집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여러 흥미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으며 독자는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매력적인 세계를 가진 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소개말이다. 시리즈의 첫번째 책 <호르몬이 그랬어> 에 이어 두번째 책 <오프닝 건너뛰기>를 읽게 됐다. 박서련 작가에 이어 은모든 작가 도 이 시리즈를 통해 처음 알게된 작가들이었다. 젊은 작가들의 매력이 돋보이는 시리즈다. 소개말처럼 이 작고 얇은 책속엔 세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이 세편을 어떻게 이어붙일 지는 독자의 몫이다.

『 오프닝 건너뛰기 』

경호와 수미는 신혼 부부다. 하지만 신혼부부의 풋풋함을 기대하기엔 코로나 현실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들은 아직 '오프닝' 중이다.

경호가 품고 있는 따스함과 단순함. 그 두가지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은 연애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도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도려내듯 필요 없는 부분은 제거하고 원하는 부분만 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누군가와 한집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일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p. 26)

생판 남이었던 사람 둘이 만나 한집에서 먹고자고산다는 것은 시대가 변해갈수록 점점 더 어려운 문제처럼 보인다. 백세시대라는 장수시대에 오래오래 보고 살아야할 사람이니 나에게 맞춤옷같은 사람이라면 참 좋겠지만 껍질 빼고 씨앗빼고 알맹이만 담아놓은 통조림 같은 사람이라도 아마 원하는 부분만 취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이고 한집에서 산다는 건 그런 단순한 맞춤이 불가능한 것이므로.

경호가 영상을 재생시켰다. 타이틀 시퀀스가 나왔으므로 수미는 어떤 내용이냐고 되물으며 화면 한구석에 있는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클릭했다. "자기 전에 이 드라마 본 적 있어?" " 아니" 수미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본 건데도 오프닝을 안 본다고?" "건너뛰는 게 습관이 돼서" "와, 나는 이런 기능은 누가 쓰나 했어. 알고 봤더니 우리 집에 있을 줄이야" 경호가 신기해했다. "자기야, 타이틀 시퀀스는 작품이랑 세트야. 레스토랑 가서 식전빵 안 먹을 거야? 그러는 거랑 똑같다고" (p. 43)

그런가? 나도 영화나 드라마 볼때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곤 하는데... 그렇지만 식전빵은 꼭 챙겨먹곤 하는데;;; 오프닝을 건너뛴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사람이 사람이 서로에게 적응시간이 필요하듯이 '오프닝'도 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상에서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듯이 '관계'에서도 자꾸 건너뛰어 온 것은 아닐지...

수미는 경호에게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부부란 서로가 만나기 전에 겪은 아픔마저 끝없이 달래주어야 하는 사이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새삼 자신이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는 법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p. 45)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통해 내모습을 보게 되곤 한다. 그 어떤 사이보다 '부부'란 더더욱 내밀하고 세심하게 자주 서로에게 그런 거울이 되곤 한다. 오프닝부터 차근차근 보다보면 좀 덜 싸우게 될지도 ㅎㅎ

『 쾌적한 한 잔 』

은우는 특성화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혼자사는데 익숙해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지금껏 어머니는 한 번도 선을 보라고 종용한 적이 없었지만 자기 선에서 거절했다는 얘기는 꼬박꼬박 전했다. 은우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나는 말도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은우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부담 대신 모종의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이라고는 하지만 존재감은 미미한 크기의 감정이었다. 거실장 위에 으레 하나쯤 올려두고 방치하는 장식품처럼. 한 번씩 눈에 띄면 치워야겠다고, 하다못해 먼지라도 떨어내야겠다고 인식한 후에 대체로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냈다. (p. 64~65)

직업도 안정적이고 나이도 꽤 들어가는 아들에게 부모로서는 중매라도 보라고 은근이 압박을 가하는게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성정체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냥 기다리는 부모의 희망이 아들에게는 고문이 될 수도 있었을 터... 그래서 죄책감은 미미한 크기의 존재감으로 쉽게 잊혀질 수 있었다.

소희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너는 겁 안나?" 하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요새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서 말했다. 연애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도, 일밖에는 모르는 것 같던 선배도, 심지 굳은 비혼주의라던 친구도 하나씩 짝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에는 자기만 혼자 남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졌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래서 정작 만나면 별달리 즐거울 것도 없는 동창 모임도 소중하다고 했다. (p. 75)

비대면이 일상이 되어갈수록 '소속감' 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진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가족이라는 일차적 소속감이라면 좋겠지만 점점 어려워지고 가족이 아니어도 어딘가에 누군가와 '함께'라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정말 점점 그런것도 같다. 그 이유가 성정체성이 되었건 일중독이나 비혼주의가 되었건 여하튼 '혼자' 이고 싶으면서도 너무 '혼자'인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온도와 머물 수 있는 환경에 대해 가늠해보면서 은우는 기다란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p. 84)

'쾌적한 맛 (중략) 요란하고 뜨거운 충돌의 반대편에 위치한 듯한 맛이었다. 크고 단단한 얼음이 뿜어내는 냉기에 중심을 내주어야만 성립하는 맛이기도 했다.(p. 84)' 나도 이런 맛 칵테일을 파는 바가 집근처에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분위기 있게 '쾌적한 한잔'을 즐기고 싶은데... 이런 맛이라면 은우처럼 '혼자' 즐길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ㅎㅎ

『 앙코르 』

세영은 추석연휴에 늘 가던 가족모임에 가지 않고 혼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언니의 입에서 여지없이 이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p. 88) 수화기 저편에서 씩씩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영이 떠올린 것은 언니네가 괌에서 자리 잡기까지 이어졌던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이었다. 언니에게 돌아간 몫의 절반을 자신이 칼같이 요구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언니네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활수준도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터였다. (p. 89)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러다 자신을 위해 한번쯤 한 선택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면서 신경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캄보디아 공항에서 가방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낯선 가람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둘이 함께 하게 된 여행...

이토록 분명한 것을 어째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p. 133)

10여년 전에 그녀가 세영에게 해준 말은 오늘 가람이 한 말과 꼭 닮아 있었다. "나는 그런 말 언니한테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는데? 날 그렇게 봐주는 사람은 세상에 언니밖에 없어" (p. 134)

아무도 몰라주던 매력을 알아봐준 단 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과 나는 어떤 인연일까? 어떤 의미일까...

세편의 단편 뒤에는 [공명을 위한 온도와 속도] 라는 저자의 에세이 한편이 작가후기 처럼 덧붙여져 있다. '나의 길, 나혜석' 이라는 전시를 수원에서 본 이야기를 하며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대한 작가로서의 소회를 밝히고 있었다. 나혜석 작품 전시회를 본 기억이 나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저마다 감상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만일 이 책에 담긴 세 편의 소설을 즐기는 동안 살면서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지 되뇌어보실 수 있다면, 자신을 지키고 삶의 쾌적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형태의 관계를 맺을지 조율해보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p. 146)' 라는 작가의 말을 보며 작품내내 흐르는 '온기'를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선 동성애가 자주 보인다.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만 해도 피투성이였던 사랑은 이제 가볍고 산뜻한 분위기로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무거웠던 가족이라는 가까움이 내삶에서 거리를 두고 멀어져간 사이 다른 관계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대가 변하면서 '관계'도 변했을 것이다. 그렇게 변화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장 '쾌적한 온도'를 찾아내는 과정을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들이 쉽게 읽혀서 더욱 좋았던 책이었다.

ps. 세 편의 작품 제목들로 뭔가 연결되는 문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유치하지만) 한번 생각해 봤다.

'오프닝을 건너뛰지 않고 차근차근 보다보면 늘 마시던 미지근한 술도 어느날 쾌적한 한잔으로 느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 아마 외치게 되지 않을까, 한잔 더! 앙코르! 하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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