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장윤경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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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부터 20세기 유럽 현대사까지

시간과 비용 걱정없이 어디로든 떠나는 궁극의 여행

<Handbuch für Zeitreisende. Von den Dinosauriern bis zum Fall der Mauer> 라는 원제를 구글번역기에 입력해보니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핸드북. 공룡에서 벽이 무너질 때까지> 라고 나온다. 이런저런 번역된 책들을 읽으며 원제보다 나은 한국어판 제목을 발견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이 책은 한국어판 제목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담아낸 것 같다. 이 책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이긴 한데 주요 골자는 '역사 가이드북' 이기 때문이다.

책을 앞뒤로 한 '추천의 말'이 대단하다. 곽재식 SF작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가 볼 만한 곳을 소개함으로써 세계 문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소개하는 역사책이자,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과학책' 이라고 했고 김범준 물리학과 교수는 '역사책이자 과학책' 이라고 했으며 이다혜 기자는 '과거로 떠나는 여행의 사고 실험' 이라고 했고 (내가 정말 즐겁게 감탄하며 읽은 책인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책의 저자인) 정기문 교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이 책을 강력추천하고 있다. 한명한명 그동안 넘사벽 필력을 보여준 이들이 하나같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을 보며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시간 여행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 시간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편안하며 그 비용도 아주 저렴하다. 흥미진진한 체험 여행이든 심신을 달래는 휴양 여행이든,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매번 우리가 살고 있는 해와 같은 연도를 여행하던 시대는 끝났다. (p. 13)

'머리말'의 첫 문장부터 독자를 어리둥절 하게 만드는 이 책은 SF소설책이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역사책이다. 그것도 탄탄한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ㅎㅎ

이 책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을 위한 신개념 안내서다. 시간 여행에 관심이 있거나 인류의 과거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면서, 사실상 모두를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14) 이 책에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수많은 새로운 여행 아이디어와 함께, 각각의 여행지에 대한 상세한 배경 지식과 정보, 그리고 유용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당신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p. 15)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글의 문체 때문이다. '비록 모든 여행지가 과거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현재형으로 쓰였다. 어쨌든 시간 여행자들은 현재를 살고 있으며 현재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과거가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으며 일종의 보호 구역이라서, 그 안의 모두가 항상 동일하게 머물며 본인의 결정으로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차피 모든 일은 역사책에 기록된 대로 벌어질 거라 보기 때문이다. 역사를 흘러간 과거로 단정하는 사람은 역사란 어딘가 지루하고 정적이며 죽어 있다는 생각을 고수할 것이다. (p. 22)' 하지만 과거도 고정형이 아닌 진행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은 알려준다. 현재형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읽다보면 과거의 고정된 역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과거를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상상하는 즉시,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p. 22)' 라는 문장을 강렬하게 체감하게 된다. 역사엔 가정이 필요치 않은 것이라고 따라서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식의 역사책들을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달랐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로 인식하면서 이렇듯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은 '만약에' 라는 무책임한 가설과는 달랐으며 '~이랬다면' 이라는 후회와도 달랐다. 과거의 역사를 존중하고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 이 책은 묘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역사를 실감나게 재현시키고 있었다.

본격적인 시간여행에 앞서 '시간 여행에 관한 짧은 역사'를 소개하는데 웜홀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을 오가는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이 책이 과학책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 책은 분명 역사책에 속한다. 다만 시간여행에 대한 탄탄한 과학적 논쟁들이 이 책을 SF소설 영역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동시에 SF적 세계로 이끄는 묘한 책이기도 하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저자가 알려주는 코스 중에서 내 취향에 맞는 테마여행은 어디일까나~ 하며 찾아보는 사이사이 정말 알아두어야 할 역사들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 다수의 전문가들은 스톤헨지가 하지점보다는 동지점과 관련이 높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여름에 방문하면 텅 비어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12월 말에 찾아간다면 스톤헨지가 원래 무슨 용도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커진다. 겨울 날씨에 텐트는 적절하지 않으니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 대신 튼튼한 고무장화와 방수 재질의 옷가지 그리고 따뜻한 모자를 챙기자. (p. 75)

정말 겨울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톤헨지가 기타 다른 유적들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동지의 일몰 방향과 관련이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책속에 읽게되는 역사는 이런 식이다. ㅎㅎ

하지만 부디 신중을 가하자. 수많은 시간 여행자들이 스파이로 의심을 받곤 한다. 그러니 제발 카메라로 몰래 찍거나, 뒤를 쫓으며 스토킹을 하거나, 갈릴레이 집 대문 앞에서 오랫동안 어슬렁거리지는 말자. 그러는 대신 과학사에 기록된 역사적인 현장에 같이 머물고 있는 순간을 즐기도록 하자. (p. 99)

여행사에 여행을 예약하고 안내서를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과 여행지들에 대한 내용들에 집중하지만 그 안내서의 대부분의 내용은 사실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주의사항 들이다. 저자도 (역사속) 어느 여행지를 가든 주의해야 할 사항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주의사항 속에 정말 깨달아야 할 시간여행의 가치들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역사속 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중세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행객들은 자신의 여행사에게 속았다며 번번이 불만스러운 평을 내놓는다. (p. 107)' 며 중세 시대의 모습을 재현시키는가 하면, '당신이 시간을 잘 맞춰 현장에 도착한다면 이 코덱스들을 슬쩍 가로채서 어딘가에 숨기자. 마른 동굴이다 구덩이에 감춘다면 아마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당신의 과감한 행동을 훌륭한 업적으로 갚아 줄 것이다. (p. 144)' 라며 마야의 사라진 기록에 대한 미션을 제안하기도 하고, '공룡들이 그들의 과거에 편안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들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p. 162)' 라며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존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재미나게만 여겨지던 시간여행에 대해 '엄밀히 말하자면 약간이 아니라 상당히 큰 행운이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출간되는 시점까지도 여행 일정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86)' 라며 경고하기도 하고, '과거를 향한 동경이 제일 적은 지역은 동아시아와 유럽이다. 본인이 속한 나라의 경제 상황이 좋을수록 과거보다 현재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진다. (p. 197)' 라며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정말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꿈꿀법한 '나 돌아갈래~ 그 시절에 살고 싶다~' 하는 여행이 아닌 아예 이주의 상황에 대해서도 '부유해지기 위한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면, 그 전에 부디 한 번만 더 신중하고 철저하게 고민하기를 바란다. 오직 시간 여행의 모든 이론적인 문제들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부를 쌓으려면 일단 당신은 신원과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로 옮겨간 초반 당신에게는 이들 둘이 없다. 다시 말해 당신은 신분 증명 같은 서류가 없는 이주민이다. 이로 인한 모든 불이익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과거에는 당신 자신이 이미 태어나 있으므로, 그곳에서 당신은 영원히 이중으로 존재하게 된다. (p. 210)' 라며 현실적 조언을 해주고 '지구로 떠나는 시간 여행에는 당연히 한계까 있다. 3억년 이상의 과러로는 떠나기가 어렵다. 그 이전에는 숨을 쉴 충분한 산소가 없기 때문이다. (p. 212)' 라며 과학적으로 시간여행지에 대한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이런저런 과거의 시간대로 여행을 (방구석에서 책을 읽으며^^)하더라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아쉬운 장면들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테마여행을 소개하는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간 여행에 관해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아홉 가지 신화를 모아 보았다. (p. 224)' 라며 시간여행에 대한 오해와 사실들을 정리해주는데 또다시 과학과 역사를 오가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세상 개선하기는 기운을 회복하고 충전하는 휴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선에서 분명해 보이는 혁신적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과거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일말의 관심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변화는 여전히 먼 일이다. (p. 250)' 라는 저자의 말을 수긍하게 된다. 시간여행은 '여행'일뿐이다. '여행'일 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워 하는 시간여행자들을 위해 저자는 '당신이 발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돌' 과 '강행해도 되는 것들' 을 알려준다. 과거의 역사에 개입해서는 안되지만 아주 살짝은 괜찮다며 '역사에서 아쉬운 부분을 살짝 고치는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으며, 특히 짧은 휴가 안에서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다. (p. 272)' 는 저자의 말에 점점 더 시간여행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홍보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ㅎ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하다면 장단점이 무엇무엇일까? 3부에서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필수 여행 정보'를 통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종의 여행제안서 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런 주의 사항이 있고 이런 위험이 있고 이런 준비가 필요한데 이 여행을 하겠느냐고 묻는 것도 같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 하며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라는 후기를 통해 시간여행의 불가능성을 토로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신이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당연히 여행 가이드도 필요한 세계를 한번 그려보았다. 이 책은 우리가 설정해 놓은 일련의 가정 위에서만 말이 된다. 그러면서도 최신의 과학 지식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중략) 진짜 세계는 이 책에서 그려진 모습과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세상이 우리가 상상한 대로 흘러간다면, 이 책은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는 미래에 상당한 도우미가 될 것이다. (p. 412)

과학으로 시작해서 역사를 두루 경험하고 과학으로 마무리되는 듯한 이 책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남는다' 라는 문장에 고개끄덕이게 만든다. 역사를 이렇게 SF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는 이 책은 진정 '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가 맞았다. 역사를 생생하면서도 유쾌하게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신선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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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 - 장군, 상인, 지식인
미할 비란.요나탄 브락.프란체스카 피아셰티 엮음, 이재황 옮김, 이주엽 감수 / 책과함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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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치하에서 가장 번성한 실크로드

그 길을 일군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역사에서 '제국'이라는 명칭이 붙은 때가 몇번이나 있었을까? 저마다 자신들의 역사에 '제국'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싶겠지만 세계사적으로 '제국'으로 불리던 나라는 크게 로마제국, 대영제국 그리고 몽골제국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생각해보건데 이중에서도 몽골제국은 왠지 좀 낯설다. 분명 로마제국 못지않은 거대한 영토를 호령하던 제국이었으나 몽골이 '제국'으로 불리게 된 것은 얼마 안 된 것 같은...

실크로드는 13~14세기 몽골 제국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몽골 제국의 성립은 유라시아 대륙에 광대한 안전지대를 창출했고, 이는 물품·사람·사상의 교류를 크게 확대시켰다. 그 결과 세계는 (특히 유럽은)중대한 지적·상업적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는 (유럽 중심의)근대 세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몽골 제국 시기에 실크로드와 그 교류의 발전에 기여한 장군, 상인, 지식인 15인의 흥미진진한 일대기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은 몽골 치하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문화 간 접촉과 물리적·사회적 유동성의 양상을 밝혀준다. 그간 책들의 실크로드가 원경의 스케치였다면 이 책의 실크로드는 근경의 세밀화라 할 수 있다. -뒤표지 내용 中-

고전을 읽다보니 서양사를 읽게 되고 서양사를 읽다보니 로마사를 읽게 됐는데 로마사를 읽을 수록 아쉬운 부분이 점점 커져갔다. 유라시아라는 하나의 땅덩어리로 붙어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다가 떨어뜨려 놓고 있는 듯 동과 서의 역사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세계사적으로 엮여 있지 않은 느낌이 들게 했다. 특히나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는 느낌으로 왔다간 유목민족의 흔적은 항상 신비의 영역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왔다간 유목민족의 흔적이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적이 있으니 바로 '몽골제국'이다. 이 몽골제국을 포함한 유목민족의 역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준 책이 <중앙아시아사>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의 역자가 이 책을 추천했다. <중앙아시아사>를 읽고 자연스레 이 책으로 넘어오면서 '그간 책들이 실크로드가 원경의 스케치였다면 이 책의 실크로드는 근경의 세밀화라 할 수 있다' 는 소개글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 책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중국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라틴어 등의 다양한 언어로 쓰인 사료들을 바탕으로 집필한 총 15명의 전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적인 연구 결과물이지만 흥미진진한 인물들의 극적인 삶을 다루고 있는 만큼 독자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순서대로 읽지 않고 각 장을 따로 떼어 읽어도 된다. <몽골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몽골 제국의 다양한 시공간으로 유쾌한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p. 5) - 추천의 말 中-

위에서 소개하듯이 이 책은 15명의 저자가 각각 한 인물씩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저자들은 이스라엘, 오스트리아, 중국, 독일, 일본, 미국, 헝가리, 한국 등 다양한 국적이지만 모두 아시아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다양한 국적의 학자들이 본인들이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의 문헌에서 조사한 인물들은 모두 낯설지만 '실크로드'라는 하나의 주제로 익숙하게 엮인다. 몽골제국의 역사가 200여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였던만큼 15명의 인물들은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제국의 역사를 풀어낸다기보다는 실크로드를 오고간 삶에 대해 좀더 생생한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낯설면서 무시되어 왔던 제국을 새로우면서 찬란한 시간으로 되살려낸 것에 의미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서양사 특히 로마사를 읽다보면 가보고 싶은 도시가 참 많아진다. 로마의 유적 영국의 유적 프랑스의 유적 등 유럽 곳곳에 여전히 로마제국의 유적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만큼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유적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늘 생소하고 낯설고 미덥지 못한 역사로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반대적 생각도 해보게 됐다. 지금의 삶과 너무나 달랐던 로마제국의 유적은 유적으로 남아 차별화되었지만 지금의 삶과 별반 다를 것 없어서 자연스레 스며들고 이어지는 동안 몽골제국의 유적은 그저 삶의 터전으로 일상으로 연결되어 왔기에 구별되지 않아 유적으로 남은게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세계사에서 '몽골 시기'(1206~1368)는 대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통일 몽골 제국(1206~1260) 시기다. 이때는 확장을 계속했던 정치체가 몽골의 중심부에서 새로 정복한 땅들을 지배했다. 두 번째는 '몽골 연방' 시기다. 이 시기에는 제국이 네 개의 지역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칸국(한국) 또는 울루스로 알려진 이 네 개의 몽골 정치체는 각기 중국, 이란, 중앙아시아, 볼가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그 수장은 서로 경쟁하고 있던 칭기스 칸의 지파 자손들이었다. (p. 13)

몽골제국이 나중에 4개의 제국으로 나뉘게 되는 과정은 로마제국과 그리 다를게 없어 보인다. 제국이 커질수록 한사람이 경영하긴 힘들다. 여하튼,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발음' 문제다. 몽골연방 시기를 4한국 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가 '한국'이다 보니 오해하기 쉽다. 4한국이라기 보다는 4칸국 또는 4울루스 아니면 그냥 몽골연방 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몽골어든 투르크어든 여하튼 외래어를 중국인들이 들리는 데로 한자를 차용해 기록하고 그 한자를 다시 한글로 불러 읽는 과정에서 칸국과 한국 사이에 다른 한자가 사용됐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외국인들이야 칸이든 한이든 발음하는 것에 어차피 그들의 언어가 아닌 이상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한국'은 분명 '칸국'과 다르게 들린다. 한자로 쓰지 않을바에야 외국어는 외국어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없을 듯 싶다. 예전에 이탈리아를 이태리 라고 프랑스를 불란서라고 한자표기된 것에서 음역해 부르던 것을 이제 이탈리아는 그냥 이탈리아로 프랑스는 그냥 프랑스로 부르는 것처럼 '칸국'은 그냥 칸국으로 부르는 게 옳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광대한 땅을 정복하고 지배했으며, 게다가 이를 그처럼 짧은 기간에 이룰 수 있었을까? (p. 16)

이 책의 본문이 인물들의 짧은 전기 같은 형식이다 보니 본문의 어느 챕터 못지 않게 긴 분량의 '서론'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서론을 읽고 나서야 인물 개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워 진다. <몽골 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은 세 엘리트 집단 출신의 개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크로드 일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군 지휘관과 상인과 지식인이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은 13~14세기 몽골 치하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문화 간 접촉과 물리적·사회적 유동성의 양상을 밝혀준다. (p. 31)' 실크로드 하면 상인이 연상되어서인지 이 15인의 비중에서 상인은 가장 적다. 아무래도 실크로드 상인들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15명은 장군 6명, 상인 4명, 지식인 5명 인데 이러한 구분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기록에 남을 정도로 모두 당시의 엘리트 지배계층이었고 모두 정치·경제·문화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글의 짜임은 비슷한 편이다. 해당 인물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의 인물의 가치적 질문을 띄우고 인생을 개괄한 후 결론에서 정리한다. 낯선 이들의 낯선 삶은 몽골제국이라는 낯선 제국을 좀더 생생하게 느껴지게 했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수시로 사용하서도 '실크로드'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무지를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실크로드'라는 말은 1860~1870년대에 중국 지도를 만든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이 1877년 처음 만들었다. 그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길에 적용했다. 그 이름을, 계획하고 있는 철도에도 적용하려는 생각이었다. 폰 리히트포헨 자신은 '실크로드'라는 포괄적 용어 속에 여러 개의 가능한 길을 포함시켰고, 이에 따라 '실크로드'는 대륙과 해양의 길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기 전에도 결코 단일한 길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따라서 '실크로드들'이라는 복수형이 보다 적절한 말이다. (p. 41)' 라는 주석을 보며 후대에 이름붙인 비잔티움에 살던 사람들은 사실 자신들은 로마제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당시 실크로드를 오갔던 사람들은 그 길을 뭐라고 불렀을까... 아니다. 하나의 길이 아니고 여러 갈래의 길이었던 만큼 통칭은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여러 갈래의 실크로드들을 넓히고 새로운 길을 열었던 이들중 선구자는 아마도 정복길에 나선 장군들이었을 것이다.

곽간 장군은 중국인(한족)이었지만 서아시아까지 진출했던 몽골의 장군이었다.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바그다드까지 갔으며 서방 영토의 몽골군 첫 사령관이었던 초르마칸이었는데 이 사령관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함께 였던 바이주 라는 인물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여성들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장군이기도 상인이기도 황제이기도 했다. 쿠툴룬은 실존인물이었고 이 몽골 공주의 삶은 유럽이나 중국의 왕실 여성의 삶과 달랐다.

한편, 실크로드는 육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해상의 실크로드는 비몽골인들이 차지해왔던 만큼 몽골제국은 제국의 확장에 이 해상실크로드 장악이 꼭 필요했다. 이 네트워크를 확장시킨 것이 중국 한족 출신의 장군 양정벽 이었다. 비몽골인 출신의 엘리트들 뿐만 아니라 노예 군인 출신도 있었다. 이들의 군사적 망명은 몽고 치하 유라시아에서 자주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사이프 앗딘 킵착 알만수리 였다. 그의 삶은 술탄국과 몽골을 오가며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킵착인 장군 툭투카의 삶은 또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실크로드 하면 '상인' 이다. 상인들의 삶은 실크로드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에 가장 구체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상인들은 생애는 교역보다는 몽골제국의 관료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출신 역시 다양했는데, 자파르 화자 처럼 중앙아시아에서 교역 활동에 관계있던 사람들이 몽골과의 접촉에 자연스러웠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한 상인들은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유럽에서 동방을 접촉한 사례를 생각했을 때 대부분 마르코 폴로를 떠올리지만 몽골제국에 갔던 최초의 유럽 일반인은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가 집을 나서기 25년 전이자 니콜로 폴로 및 마페오 폴로가 부를 찾아 동방으로 여행하기 10년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십자군 황제의 사절 보두앵 드 에노 가 뭉케 카안의 궁정으로 사명을 띠고 출발했다. (p. 249)' 1226년 보두앵 드 에노가 어떤 목적으로 사절로 간건지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당시 십자군과 몽골 그리고 러시아 및 베네치아 가 흑해 무역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다양한 배경이 있을 수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 무역에 대한 욕망, '흑해를 통제하려는 이 욕망은 로마니아 제국의 파멸을 초래했다. (p. 264)'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이 뚫린 배경엔 무역이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룬 상인들 중 가장 상인다운 모습을 보여준 인물은 아시아를 가로지른 이라크 상인 자말 앗딘 앗티비 였다. 몽골제국의 상인 활동에서도 여성은 빠지지 않았다. 금장 칸국의 황후 타이둘라는 기독교 상인을 후원하기도 했다.

학문적 생산성이 엄청나다고 알려진 라시드 앗딘의 세계사 책인 <역사 모음> 이라는 책은 '세계사의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으며(p. 338), (중략) 인도를 다룬 장에는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내용이 더 들어 있다. (p. 339)' 라시드 앗딘의 저서들을 통해 이란의 불교에 대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는데, 라시드 앗딘은 몽골인 후원자들의 문화적 규범과 전통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몽골과 이슬람 세계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몽골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는 천문과학 분야에는 부맹질 이라는 인물이 소개된다.

몽골제국은 광활하고 다양한 실크로드들이 있었던 만큼 다른 언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지식인으로 성장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이사 켈레메치 는 통역에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사절로 활약했다. 지식인을 다루는 중에도 여성들의 활약은 빠지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파드샤흐 카툰의 생애는 칸국에서 왕실 여성들이 건축·문화·종교에 행했던 후원활동을 알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의 마지막 인물은 실크로드의 이슬람 학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잘랄 앗딘 알아하위 라는 사람이다. 이 중앙아시아 학자의 25년에 걸친 여행은 동시대인들에게는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전기는 현대 역사가들에게 희귀한 자료라고 한다.

이 책은 유럽 연합의 제7차 프레임워크 프로그램 항서 유럽연구협의회가 지원한 예루살렘의 '유동성 제국과 몽골 치하 유라시아에서의 문화 간 접촉'이라는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여기에는 이 책의 필자 대부분이 과거 그 성원 또는 협력자로서 연관을 맺었다. (p. 484) -감사의 말 中-

그동안에 번역한 실크로드 관련서 몇 권은 개설류가 많았다. 물론 새로운 시각과 최신 자료들로 엮은 책들이어서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무언가 복습한다는 느낌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책은 분명한 '심화 학습'이다. 일반 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개설류를 읽은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책이 필요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 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 : 장군, 상인, 지식인>은 누구보다도 옮긴이에게 신선한 책이었다.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망라하고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몽골 지배기로 좁혀진다는 점이 그 '심화'의 한 단면이다. (p. 485) -옮긴이의 말 中-

책 전체를 흐르는 맥락은 없었지만 하나의 프로젝트성 연구 결과로서 보면 의미있는 책이었다. 다만 한두권의 개설서들을 읽고 실크로드 원경의 스케치를 조금은 봤다고 여겨서 근경의 세밀화를 보려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섣부른 시도였나 생각해본다. 다양한 실크로드 관련서들을 번역한 옮긴이에게 적합한 '심화'서가 나같은 역사 초보자에겐 신선하다기보다는 낯설었다. 너무나 폭넓은 다양성이 담긴 징검돌이 너무나 멀찍멀찍 떨어져 있어서 그 돌들만 밟으며 건너려다가 가랑이 찢어질 뻔한 기분이랄까;;; 그러니 그 띄엄띄엄 떨어진 돌들을 건너기 위해선 내 다리를 늘이던 돌사이에 다리를 놓던 해야할듯 싶다. 아무래도 여기 나오는 인물들의 면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실크로드 역사를 다룬 개설서들을 좀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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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 스페셜 에디션 앤디 위어 우주 3부작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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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지구 밖 정착지, 아르테미스에서 벌어지는 인생 대역전기

"난 영웅이 아니라, 우주 최고의 부자가 되고 싶을 뿐이야"

영화 <마션> 을 무척 재미있게 봤었다. 인류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스토리를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극한 상황임에도 유머러스하게 표현되는 방식이 좋았었다. 기발하다고만 생각했던 장면들이 나름의 과학적 토대가 탄탄하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 원작소설 작가의 두번째 작품이라는 <아르테미스>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의 지도가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이런 치밀함이라니! 마음에 든다. ㅎㅎ

나는 달의 첫 번째(그리고 지금까지는 유일한) 도시 아르테미스에 산다. 아르테미스는 '버블'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구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다. 버블의 절반은 땅속에 묻혀 있어 아르테미스는 옛날 SF 소설에서 묘사했던 달 도시의 모습을 정확히 닮아 있다. 바로 여러 개의 돔으로 이루어진 모습. 단지 월면 아랫부분은 보이지 않을 뿐이다. (p. 17)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르테미스'는 인간이 정착한 달 도시의 이름이다. 도시 전체라 해도 지름 500미터 정도인 이곳에는 지구와 다른 중력 만큼 지구와 다른 법칙들이 준수된다. 하지만 이곳도 빈부격차는 지구와 비슷하다. '재즈' 라고 불리는 여성이 주인공인데, 재즈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건 연착륙, 즉, 소프트랜디드 그램(soft-landed grams)을 줄인 거예요. S.L.G. 슬럭(Slug)죠. 1 슬러그면 KSC를 통해 지구에서 아르테미스까지 1그램의 화물을 옮길 수 있어요"

"엄밀히 말하면 화폐는 아니네"

"여긴 나라가 아니니까 화폐를 가질 수 없지. 슬러그는 KSC에서 발행하는 선불 서비스 신용점수야. 달러나 유로, 엔, 어떤 돈이든 지불하고 그 대가로 아르테미스로 오는 화물의 중량 허가를 받는 거지. 한꺼번에 모두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까 회사에서 각자의 잔액을 기록하고 있고" (p. 31)

소설을 구성하는 배경요소들은 과학적 지식들 뿐만 아니라 다른 요건들도 탄탄하다. SF 소설의 재미는 '탄탄함' 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초반부터 무척 매력적으로 읽히는 작품이었다. 재즈는 6살때부터 아르테미스에서 살아왔다. 재즈의 아버지는 용접공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재즈는 그 잠재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포터'로 일하고 있다. 일종의 배달원 이다.

피델리스 응구기는 한마디로 아르테미스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케냐의 재무장관으로 있을 때 국가적 우주산업을 맨땅에서 일구어냈다. 케냐는 우주 기업들에 제공할 단 하나의 유일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적도다. 적도에서 발사되는 우주선은 연료 절약을 위해 지구의 자전이라는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p. 59)

재즈는 아르테미스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지구에 가서 살 생각은 1도 없다. 시작은 허술했지만 이제 나름대로 포터로서의 기반을 잡았고 부업으로 하는 '밀수'에서도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재즈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중이다. 그런 재즈에게 유혹의 손길이 다가온다.

"재즈, 난 사업가야. 내가 하는 일이 활용도 낮은 자원을 개발하는 거라고. 그리고 넌 엄청나게 활용이 안 되고 있는 자원이야"

"넌 뭐든 될 수 있었어. 용접공이 되기 싫다고? 괜찮아. 과학자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엔지니어, 정치가, 성공한 사업가, 뭐든. 하지만 넌 포터가 됐지"

"평가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분석하는 거지. 넌 정말로 똑똑하고 돈을 원해. 나는 정말로 똑똑한 누군가가 필요하고 돈이 있어. 관심있나?" (p. 70)

재즈의 밀수 단골 중에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가 밀수 그 이상의 제안을 했을때 재즈는 거절했다. 하지만

"100만 슬러그를 주지"

"하죠!" (p. 71)

일은 저질러졌고 재즈는 갖고 있는 능력과 자원을 총동원해서 거의 성공에 다다랐었다.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성공할 뻔 했다. 그런데 재즈에게 이 일을 의뢰한 억만장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누군가 재즈를 뒤쫓기 시작한다. 이제 소설은 SF에서 스릴러로 넘어간다.

이제 나는 살인자를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였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마지막 남은 수확기를 해치운다 해도 100만 슬러그는 절대로 받지 못할 것이다. 트론과 내가 계약서를 작성하 것도 아니고. 아무 대가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른 셈이었다. (p. 205)

SF 소설로서도 달의 생활 모습과 시스템이 너무나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어서 재미있었는데 중반부터 스릴러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더니 또다른 분위기를 맛보게 해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 읽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물들이 무겁지 않아 좋았다. 마션에서도 그렇고 작가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으니까. 문명을 건설하는 일은 원래 추하단다. 재스민. 하지만 다른 길로 간다면 아예 문명이 사라지겠지"

"그럼 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죠?"

"내 알 바 아니지. 하지만 얼른 시작하는 게 좋겠구나" (p. 275)

사람이 사는 곳은 지구가 됐던 달이 됐던 권력과 음모와 돈이 얼키고 설키게 마련인가 보다. 부담스럽지만 단순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의뢰는 알고보니 거대조직과 도시전체의 경제가 엮여 있는 엄청난 계획의 일부였다. 돈도 못받고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 재즈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탄탄한 과학과 정확한 수학을 바탕으로 하는 SF에서 살인사건과 폭력조직이라는 스릴러를 지나 인간생명을 존중하는 인류애까지 확장되는 이 소설의 거대한 스케일을 젊고 통통 튀는 매력적인 주인공 단 한명에게 집중하여 해결하는 과정을 읽다보면 무슨 사건이 벌어졌었건간에 일단 저절로 생기발랄해지는 유쾌한 기분이 된다. 그럴법하다는 SF적 상상력도 쫓고쫓기는 스릴러적 쫄깃함도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휴머니즘적 동지애도 모두 한번에 느끼고 싶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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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의 쓸모 - 미래를 예측하는 새로운 언어 쓸모 시리즈 2
한화택 지음 / 더퀘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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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기후변화, 인공지능, 의료진단, 디즈니까지

미적분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가

미래를 예측하는 새로운 언어

작년에 <수학의 쓸모> 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이 책은 그 뒤를 이은 책이다. <수학의 쓸모> 라는 책이 사실상 '통계학의 쓸모' 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기에 <통계학의 쓸모> 라고 부른다면, '미적분의 쓸모' 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이 책은 '수학의 쓸모' 시리즈 2탄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고등학교 수학에서 최고난이도가 미적분일텐데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언어(p. 5)' 가 미적분 이라니 '미적분의 쓸모'를 제대로 알고 나면 수포자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으려나~

수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과학 저술가인 칼 세이건은 수학이란 우주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미적분은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언어다. 특히 미적분의 시각으로 보면 첨단 과학기술의 원리부터 자연현상, 사회의 변화까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분을 통해서 세상의 순간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포착하고 적분을 통해서 작은 변화들이 누적되어 나타나는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과거를 적분하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현재를 미분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p. 5)

미적분을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과거를 적분하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현재를 미분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다시 읽어봐도 참 멋진 문장이다. 왠지 미적분에 호감이 급상하는 기분 ㅎㅎ

미분을 간단하게 한 단어로 정의하면 '변화'다. (p. 20)

어떤 선택이 최적의 선택인지 수학 공식을 이용해 알아내는 것을 최적화 라고 한다. (중략) 최적화 문제는 결국 함수의 극댓값 또는 극솟값을 구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p. 56)

인공신경망의 알고리즘은 손실함수를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미분의 개념을 사용한다. (중략) 인공신경망을 엄청난 양의 데이터로 학습시키는 데 미분의 개념은 필수불가분의 관계다. (p. 74)

살면서 미적분만큼 일상과 멀리 떨어진 수학이 또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저자는 미적분이 얼마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다양한 실례들를 수학적으로 설명해준다. 우리는 정지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세상의 모든 '변화'들을 측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변화'들을 측정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미분' 이었다. 사과가 떨어지는 힘에 대해 고심하던 물리학자 뉴턴이 라이프니츠와 거의 동시에 생각해낸 '미분' 개념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최적화 문제에 적용되었고 지금은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방법에도 활용되는 등 끊임없이 다방면에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미분에서 '상태량'과 '변화량'을 구별하는 것처럼 적분에서는 '합쳐지는 양'과 '합쳐진 결과량'을 구별해야 한다. (p. 100)

미분할 때 어떤 변수로 미분하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적분할 때도 무엇으로 적분하느냐가 중요하다. (p. 102)

고등학교 때 미적분에 대해서 배우지만 미적분항이 들어가 있는 미분방정식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단지 미분하는 법이나 적분하는 법을 배울 뿐이다. 미분방정식은 대학교에서 배우는데, 자연과학이나 공학은 물론이고 경제학이나 사회학에서 미분방정식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미분방정식은 과학법칙에 따라 자연현상을 시뮬레이션하고, 경제 모델을 만들어 경제 전망을 하는 등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학 도구이기 때문이다. (p. 132)

책은 얇은 편이고 설명도 비교적 쉽게 풀이되어 있긴 하지만 때론 수학책으로 때론 물리학책으로 읽히는 이 책을 편하게 읽으려면 책에 나와있는 함수나 도표들을 완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개념적으로만 이해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수학에서 미적분의 방법을 배울때는 이걸 왜 배우나 뭐에 쓸모있나 싶겠지만 원리만 확실이 깨달아 두면 나중에 어떤 분야에서든 발상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기초 풀이방법을 고등학교 때 배우는 것이지만 풀이방법을 잊어버리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나중에 정말 어려운 계산은 컴퓨터들이 다 할 것이므로.

불확실한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고 싶은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다. 이러한 욕구 위에 학문들이 탄생했다. 모든 학문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도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필요한 경우 전문가로서 남들보다 먼저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역사학자는 과거의 일을 바탕으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고, 경제학자는 경제 모델을 세워 국가적 경제 전망을 내놓는다. 과학자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지구의 환경 변화를 예고하고, 공학자는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제품을 내놓는다. 그렇게 우리는 미래 예측이라는 욕망을 좇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략) 미적분은 당신의 결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훌륭한 수학 도구다. (p. 163)

시간은 쉼없이 흘러가고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미래는 현재가 만들어낼 수 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늘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려 현재에서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코로나환자수를 분석하고 재난지원금을 최적으로 지급하는데 미적분이 활용된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연현상을 예측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주식시장을 분석하고 경제를 전망하는데 미적분을 알아야 한다고 누가 생각이나 해봤을까? 하지만 미적분은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도구 이고 '예측'한다는 것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미적분의 쓸모'는 저자의 말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새로운 언어'로서의 활용이다. 교과서 속 미적분 문제를 풀지 못해도 괜찮고 이 책에 나오는 수식들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자괴감에 빠질 필요 없다. 미적분이 세상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고 따라서 그 개념을 왜 알아두어야 하는지만 깨닫는다면 이 책의 쓸모는 충분히 활용한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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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시대 일자리의 미래 - 세계 1위 미래학자가 내다본 로봇과 일자리 전쟁
제이슨 솅커 지음, 유수진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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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닥친 자동화와 로봇으로 인한 노동시장, 직업의 변화

세계1위 미래학자가 내다본 로봇과 일자리 전쟁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로봇이 어느새 일상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산업현장일 것이다. 컨베이어밸트가 인간을 단순노동직으로 내몬지 이제 백년이 되었을 뿐인데 어느새 그 자리는 로봇팔이 차지해가고 있다. 자동화시스템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직업은 로봇에게 위협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사람들은 자동화와 로봇에 관한 논쟁에서 로보칼립스 혹은 로보토피아와 같이 디스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미래로 축소해서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본적인 것들에 있다. 즉, 우리가 노동, 교육, 세금 정책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p. 26)

로봇과 직업을 단순연결하는 것은 전체 시스템적 변화의 흐름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로봇에 의한 직업의 대체는 로보칼립스 든 로보토피아든 여하튼 인간에게 박탈과 좌절감을 주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기존의 직업이 사라지면 새로운 직업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스미스 라는 성이 흔해졌을만큼 대장장이가 많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의 스미스들은 대장장이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

자동화의 로봇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변화는 과거보다 더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동시장 변화이 규모와 그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이것은 우리가 마주할 그 어떤 일보다 더 큰 변화가 될 것이다. (p. 34)

저자는 '빠르게 다가오지만 예측 가능한 미래(p. 34)' 라는 점을 강조한다. 로봇은 인간을 불시에 습격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 의해 발명되고 발전되고 있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로봇에 의한 변화는 인간이 예측할 수 있다.

자동화로 인해 노동시장은 교육과 기술을 축으로 두 갈래로 나뉘는 상항이 올 가능성이 크다. <자료3-1>에서 보듯, 제조업, 운송업과 같은 일부 업종은 자동화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교육, 관리, 전문가, 정보, 의료와 같은 업종은 자동화되기 힘들다. 즉, 교육받은 전문직 종사자일수록 로보칼립스의 위험이 낮아진다. (p. 68)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고 분석한다. 비록 미국내에서의 상황을 표시하고 있는 자료들이긴 하나 미국식 자본주의사회인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영향이 끼칠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도 많았다.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은 준비할 시간이 있다는 의미다. 저자는 '사회보장 제도의 개혁은 직업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 (p. 135)' 라며 자동화 시스템이 가져올 한계도 설명한다.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활동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사회에 위협이 될 것이다. 이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위협이며,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p. 165)

로봇이 점점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면 '기본급여'를 지급함으로써 인간의 삶이 여유로워질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일자리가 줄어든 상태에서 인간의 활동성이 줄어드는 것은 단순히 '급여'의 문제만은 아니었기에 저자는 좀더 크게 관망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저자가 찾은 해결책은 학교에 있었다. '로봇이 점차 우리 삶으로 다가오고 있다. 가장 안전한 장소는 벙커나 무인도가 아니라 바로 학교가 될 것이다. (p. 186)'

로봇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고 프로세스들이 자동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가이드 없이 이것들을 수해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해야 할 역할이다. 로봇이 모든 작업을 수행한다고 했을 때 인간은 이러한 프로젝트 관리 능력이 있어야 한다. 로봇을 관리해야 하는 건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p. 192)

로봇이니 자동화니 말할때 우리는 로봇이 만능일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로봇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로봇은 인간의 지시를 따를 뿐이다.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방식의 자동화로 대체되고 로봇으로 대체되면 그에 따르는 다양한 방식의 관리능력과 유지능력이 필요해진다. 저자는 지금의 일자리들에서 긍정적 미래와 부정적 미래를 모두 예측해보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어려운 미래학을 장황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짧고 쉽게 '일자리'에 집중해서 말하고 있는 이 책을 읽고 나면 막연한 부담감에서 벗어나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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