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들꽃 산책
이유미 지음, 송기엽 사진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식물에 진심인 식물학자와 평생 들꽃을 기록한 사진작가의 이야기

다정한 이웃이자 위로가 되어 준 마음속 들꽃을 찾아서

어릴때 자연관찰 책을 생각하면 살아있다는 느낌은 주로 움직인다와 동의어로 다가왔던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주로 동물 책들을 보고 그렇게 커서 동물원에 가면 신기해하며 구경하고 그러다 어른이 되면 자연이고 뭐고 먹고살기 바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꽃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어쩌면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는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물을 쫓던 내 눈길은 있는줄도 몰랐지만 늘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식물에 머물게 된다. 갑자기 자연에 감사하고 숲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런 나와 달리 평생 식물에 진심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합작품인 이 책을 읽는 것은 지금의 내게 적절한 인생의 단계 같았다.

<내 마음의 야생화 여행> 과 <내 마음의 나무 여행> 두 권을 한데 묶고, 내용을 가다듬은 이 책으로 여러분을 만납니다. 첫 마음과는 달리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추억과 인연을 충분히 사색하지 못해 선생님의 주옥같은 사진들이 빛바랠까 걱정했던 초판의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디 선생님의 사진에 담긴 수많은 순간순간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보시길 바랍니다. 제 모자란 글이 이 땅에 사는 우리 식물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보고자 마음을 품는 독자분들의 여정에 참고가 된다면 행복할 듯합니다. (P. 5 - 여전히 제 마음을 흔드는 존재는 들꽃입니다 中-)

저자는 평생을 우리나라의 식물을 연구해온 학자인데 과거에 '한국의 야생화' 탐사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던 야생화전문 사진작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가의 사진과 전문가의 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것이다. 기존에 나왔던 두 권의 책을 합본한 책이니만큼 책은 크게 2부로 나뉜다. 1부는 '아름다운 들꽃 산책' 이고 2부는 '행복한 나무 산책' 이다. 구분을 月단위로 했기때문에 한달한달 읽다보면 우리나라의 1년을 책 한권으로 둘러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식물이 이토록 다채로웠나 새삼 놀라게 된다.

사실 알고 보면 숲속은 이 햇볕을 차지하기 위한 긴장감 넘치는 경쟁터입니다. 하지만 부지런한 초봄의 꽃들은 나무들이 잎을 펼쳐 하늘을 가리기 전에, 주변의 다른 풀들이 키를 올려 그늘을 만들기 전에 남보다 먼저 열심히 올라와 꽃을 피워 아무도 가리지 않는 이른 봄의 햇볕을 독차지합니다. 이런 혜택을 받기 위해선 언제나 남들보다 한발 앞서야 합니다. (P. 12)

봄꽃들을 보며 그저 대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앞다투어 꽃을 피워낸 식물들은 그 누구보다 한발 앞서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거였다. 길가에 피어난 작은 풀꽃 조차도.

바람꽃 집안은 학명으로는 아네모네속 입니다. 아네모네는 희랍어로 '바람의 딸'이라는 뜻이니 우리말 이름이 '바람꽃'이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지요. (P. 18)

색깔 중에서 보라색을 '바이올렛'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제비꽃의 보라색을 보고 이름 붙였기 때문입니다. (P. 34)

붓꽃은 그 꽃봉오리가 글씨를 쓰려고 먹물을 찍은 붓과 같아 '붓꽃'이라고 합니다. (P. 54) 붓꽃 집안을 통틀어 부르는 집안 이름, 즉 속명은 아이리스 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무지개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붓꽃의 꽃잎에 있는 알록한 무늬가 무지개 같아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P. 56)

연보라색 꽃잎들 중 위에 달린 꽃잎 1장만 색이 진하고 노란 점이 박혀 있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봉황의 눈을 가진 연꽃'이라 하여 '봉안련'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부레옥잠 p. 132)

약모밀, 메밀과 비슷한 잎을 가졌는데 약이 되는 식물이어서 '약모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모밀은 '어성초'란 이름으로 훨씬 유명합니다. (중략) '어성초'라는 이름은 한자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잎을 데어 살짝 비벼보면 정말 비릿하고 유쾌하지 않은 생선 비린내 같은 것이 풍겨 옵니다. (p. 148)

냄새 나는 살구색 열매 껍질을 벗기면 딱딱한 은빛의 중간 껍질이 나오고, 그 속에는 갈색의 얇은 속껍질이, 그리고 기름에 살살 볶아 먹으면 맛나는 알맹이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은 은 銀' 자와 '살구나무 행 杏' 자를 써서 '은행나무'가 되었답니다. (p. 250)

잎을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흘러나와서 물푸레나무가 되었답니다. (p. 306)

꽃 이름이나 유래를 알게 되는 과정은 무척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많은 식물명을 한번에 다 기억할 순 없다. 저자는 과학적 체계를 조금 알아두는 것이 좋다며 ' '먼저 집안의 특징을 알고 그 안에서 다른 식별 포인트를 기억하라' 이것이 제가 권하는 식물을 제대로 익히는 비결의 하나입니다. (P. 33)' 라는 팁을 알려준다. 여하튼 풀과 나무들의 이름을 알아두는 것은 자연을 숲을 더 친근하고 반갑게 느낄 수 있는 첩경인것 같긴 하다. 이름의 유래와 상관없이 '음나무'가 등장했을때 사진을 보고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집 현관에 그 나무 가지가 걸려있다. 액운을 막아준다며 이사할때 집안어른이 걸어주신 건데 경상도분이신지라 '엄나무' 라고 부르셨고 나는 여태껏 그 가시나무가 '엄나무' 인줄 알았다. 그런데 '음나무' 였네. ㅋㅎㅎ

우리나라 숲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많이 땅 위를 덮고 있는 풀은 무엇일까요? (P. 38)

꽃이 피지 않는 나무, 꽃이 없는 나무도 있을까요? (p. 255)

무궁화 꽃은 여름이다 싶으면 하나둘 피기 시작해 한창 피다가 가을까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무궁화 꽃 한 송이는 얼마나 오래 피어 있을까요? (p. 336)

생각해 본적 없는 질문에 대해 의외의 답을 알게 될때마다 놀라고, '애기나리' , '꽃이 없다 하여 이름도 '무화과'가 되어 버린 나무 (p. 255)' 속에 숨은 꽃, 하루 라는 답을 읽으면서도 새삼스럽고 새로웠다. 정말? 하면서.

'금강초롱'은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된 초롱꽃과 유사한 식물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 식물인데 전 세계가 함께 쓰는 학명은 애석하게도 하나부시야 아시아티가 나카이 입니다. 일제 강점기때 '나카이'라는 일본인 학자가 이 식물을 발견하고 '하나부사'라는 후견자의 이름을 우리나라 특산 식물의 고유 집안 이름에 붙여 공포한 것이지요. 정말 안타까워도 전 세계의 약속에 따라 붙인 것이니 이제와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P. 57)

가장 아쉬운 것은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야생 나리를 가지고 우리의 백합 품종을 만들어 수출하기보다는 로열티를 물어 가며 외국에서 만든 백합 품종을 들여와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p. 100)

섬초롱꽃은 지구 상에서 우리나라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특산 식물입니다. 그래서 울릉도와 함께 있는 독도의 아름답고 독특한 자연을 말할 때면 이 꽃도 등장하는데, 일본인 학자가 '다케시마'라고 학명을 붙여 매번 가슴이 아픕니다. (p. 108)

안타까운 지점들을 알게 될때마다 아쉽고 또 아쉬워지기도 했다. 과거에야 어찌할 수 없었다할지라도 앞으로는 우리것을 우리가 잘 알아내고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양귀비과 식물들은 줄기를 자르면 유액이 나오는 것이 특징 (P. 60)

가장 진화된 식물의 집안이 난초랍니다. 진화의 방향이야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에 따라 복잡해질 수도 단순화될 수도 있지만, 난초과 식물이 진화된 식물이라는 것에는 학자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많은 꽃 가운데 가장 진화되었다니, 얼마나 영리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엿볼 만하지요. (P. 74)

백합은 꽃이 흰색이어서 백합이 아니라 땅속에 하얀 비늘줄기 100개가 모여 있다 하여 백합百合입니다. 영어로는 릴리Lily, 학명으로 말하면 릴리움속에 해당하는 식물입니다. (p. 96)

정작 우리가 칼라로 부르는 식물은 잔테데스키아속으로 분리되었으니 어찌 불러야 옳은 것인지 고민입니다. (p. 140)

귀화 식물은 외래 식물하고는 좀 다릅니다. (중략) 외래 식물은 '누가 심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식물' 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해바라기나 장미 같은 식물은 외래 식물입니다. (p. 142)

자주닭개비는 방사선에 노출되면 보라색이던 꽃이 분홍색으로 변하거나 색이 없어진답니다. 그래서 방사선 누출 사고를 대비하는 지표 식물로써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곳에 많이 심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p. 152)

우리가 보는 동글동글한 꽃송이는 아주 작은 꽃들이 마치 작은 공처럼 둥글게 달려 있는 꽃차례입니다. 간혹 토끼풀의 수술과 암술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동그란 꽃차례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꽃을 펼치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p. 160)

민들레라고 부르는 대다수가 서양에서 건너온 귀화 식물인 서양민들레 입니다. (중략) 토종민들레인 '민들레'와 '산민들레'는 그렇지 않답니다. (p. 166)

식물도감에서 들국화를 찾아보면 나오지 않는답니다. 공식적으로 들국화란 이름을 가진 식물이 없다는 이야기지요. (p. 170) 국화과 식물들은 아주 진화된 식물입니다. 우리가 흔히 '한송이 국화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수십, 수백 개의 꽃들이 모여 있는 꽃차례입니다. (p. 171)

식물도감에 '계수나무'라는 정식 이름을 가지고 올라와 있는 나무는 따로 있습니다. (p. 244)

한방에서는 뿌리와 줄기를 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스피린의 원료 성분으로 쓰여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 조팝나무 p. 258)

이름이 '앵도 櫻挑'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앵도나무'인데, 열매는 '앵두'여서 혼동되기도 합니다. (p. 260)

한라산의 구상나무는 줄기가 아래까지 늘어져 빼어난 자태를 뽐냅니다. 한동안 구상나무를 심으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에서 있었는데, 갑자기 심어진 나무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더군요. 게다가 고산성 수종이라 너무 까다롭다고 알려져 심으려는 노력도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멀리 유럽에서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정원수가 바로 한국전나무, 즉 구상나무라고 합니다. (p. 271)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개나리'도 특산 식물입니다. 더욱이 학명이 'Forsythia koreana', 말 그대로 '한국개나리'라서 한국 특산임을 자랑스럽게 명시하고 세계가 함께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에 대한 고민은 조금 더 심각합니다. (p. 272)

북한에서는 함박꽃나무를 두고 '목란'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목란이 북한의 나라꽃입니다. (p. 282)

한때 영어 이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들었다는 도그우드Dogwood와 같아 심어졌다가 아닌 것이 밝혀져 제거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아하게 아름답습니다. (산딸나무 p. 298)

성탄절과 이 나무가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가시관을 쓰고 이마에 파고드는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며 고난받을 때, 그 고통을 덜어 드리려고 갸륵한 새 로빈이 몸을 던집니다. 이 작은 새가 호랑가시나무의 열매를 잘 먹어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히 여기고 기쁜 성탄을 장식하며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p. 400)

책을 읽으며 그 무엇보다도 다양한 식물들의 정보들을 하나하나 배워갈때의 느낌이 가장 좋았다. 그중에서도 꽃차례 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실질적으로 가장 놀라운 정보였다. 해바라기 한송이 코스모스 한송이가 사실은 한송이가 아니었다니! 내가 알고 보고 익숙했던 꽃들 중에 의외로 '꽃차례'가 정말 많았다!!

희귀한 식물이 살아가는 자생지는 그대로 보전하고, 곁에 두고 키우고 싶으면 증식된 포기를 구입하여 심는 게 꽃 사랑의 시작입니다. (P. 86)

희귀한 식물의 상당수는 (중략) 수생식물이었습니다. 식물을 살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 중에서 수질 오염은 가장 급속하고도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였으니까요. (p. 121)

망을 치면 망 위로 올라가 한란을 훼손하고, 망 위까지 모두 덮으면 땅을 파고 들어가 캐어 가는 집요한 도채꾼들과의 싸움의 결과이지요. (p. 214)

특산 식물은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 땅에만 자라는 식물입니다. (중략) 중요합니다. 식물 보전을 생각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넓은 지구 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식물이 존재하지만, 특산 식물은 우리가 보전하지 않으면 이 땅은 물론 지구 상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자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지요. (p. 268)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생하는 나무들의 풍부한 유전자 풀이 잘 보전되어 있어야 비로소 개량하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p. 343)

새로 알게되는 다양한 정보들도 좋았지만 사이사이 저자가 건네는 쓴소리도 귀담아들을만 했다. 도채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와우 그정도였나 싶어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여하튼, 데이터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식물연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유전자 풀은 클수록 좋다. 하지만 멸종되어 가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녹지가 많아지고 자연환경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자연보호냐 라고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런 면적의 확대도 중요하지만 생물의 다양성을 지켜나가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양적 질적 데이터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모두가 함께 자연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꽃 우리나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주체적으로 활발해지기를 응원한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니 갑자기 수목원에 가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동네 뒷산부터 다시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것 같다.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 약한 강도 꿈나무와 더럽게 말 안 듣는 인질들의 대환장 소동극!

세상의 바보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가장 눈부신 이야기

"꼭대기 층에 있는 인질인데요, 여기 하와이안 피자 좀 갖다주세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레드릭 배크만은 정말 대단한 작가다. 이번 작품에도 역시나 홀딱 반해버렸다.

흡인력 강한 스토리, 한명한명 모두가 주인공 같은 입체적인 인물들, 무엇보다 감동어린 따듯함.

이렇게 시크하면서 웃기고 웃기면서 따듯하며 따듯하면서 치밀한 구성을 알차게 버무릴 줄 아는 작가는, 게다가 스릴러 소설이 아님에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스릴러 못지 않은 반전 묘미를 선사할 줄 아는 작가는, 이 시대에서 프레드릭 배크만이 으뜸이지 않을까.

은행 강도, 인질극. 아파트를 급습하려는 경찰들로 가득한 계단. 이 지경에 다다르기까지는 수월했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다. 정말 한심한 발상 하나만 있으면 됐다.

이건 여러 가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기는 쉽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바보같이 어려운 일인지 잊어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특히 누군가에게 아주 좋은 인간이 되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그 어려움이 가중된다고 말이다. (p. 15)

소설에서 첫문장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들어봤지만 솔직히 소설을 자주 읽으면서도 첫문장의 중요성을 느껴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책 읽는 법'에 대한 어떤 책에서 첫문장 의 함축성에 대해 깨닫고 나서부터는 소설의 첫문장을 좀더 주의깊게 보기로 했다. 이 소설의 첫문장은 위에 옮긴 바와 같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고 이 첫 단락을 다시 읽으니 '바보'같은 똑똑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한번 마음한곳이 뭉클해져온다.

딱 하나의 지독하게 한심한 발상. 그것만 있으면 된다. (p. 17)

복면을 쓰고 권총을 들고 은행강도가 은행을 털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 은행강도는 은행강도라 할 수 없는 사건을 저지르다가 은행직원이 경찰에 신고하자 겁에 질려 맞은편 아파트로 달아났다. 마침 그 아파트에서는 오픈하우스로 열려있는 아파트가 있었고 갑자기 인질극으로 사건이 변모되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인질 여덟 명은 무사히 걸어나왔고 곧바로 경찰이 급습했을때 아파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론에 집중해주시겠어요?"

"오키도키요"

"그 아파트에 도면에 없는 공간이 있나요?"

"그리고 애들 키우기에도 정말 좋아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짚고 넘어가고 싶었어요. 입지 말이에요. 애들 키우기에 정말 좋거든요! 사실 뭐... 오늘 이런 인질극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것 빼고는 애들 키우기에 환상적인 동네에요! 그리고 애들은 경찰차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거 아시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질문에 대답해달라는 것입니다만"

"죄송해요, 질문이 뭐였죠?" (p. 25)

작은 도시였고 인질들을 조사할 수 있는 경찰관은 두 명뿐이었다. 인질이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을 조사하려는데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경찰관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정신없는 와중에 스톡홀름 본청에서 협상가를 비롯한 전담팀이 파견되기로 했으나 새해를 이틀 앞둔 때라 고속도로가 막혀 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때 젊고 의욕넘치는 경찰관은 본인이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사실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풀려난 이후 경찰이 아파트를 급습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중략) 은행강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한 발의 총성으로 응수했다. 경찰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거실로 들어가보니 바닥이 피투성이였다. (p. 33)

인질들은 협조와 비협조를 오가는 대화로 젊은 경관이 원하는 사건의 실마리를 주지 않는 것 같고 은행강도는 빠져나갈 곳이 없는데도 아파트 안에서 사라졌다. 인질들 중 누군가가 분명 은행강도를 도운 것 같은데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다. 게다가 고참 경관까지 신경을 긁는다.

"어이!" 고참 경관이 외친다.

"안녕하세요" 젊은 경관은 조금 무시하는 투로 답한다.

"커피 한잔 권하고 싶지만 여전히 커피는 마시지 않겠지?" 고참 경관은 그게 장애라도 되는 듯이 묻는다.

"네" 젊은 경관은 상대가 권한 것이 인육이라도 되는 듯이 대답한다.

고참 경관과 젊은 경관은 음식이나 음료에 관한 한, 아니 그 어떤 것에 관해서도 공통점이 거의 없다. (p. 34)

사실 이 두 경관은 부자지간 이다. 아들은 '10년 전에 다리 위에서 그 남자를 맨 처음 본 사람은 아버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장래희망이 바뀌지 않은 10대 소션이었다. (p. 44)' 그리고 10년 전 그 남자는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청구서 더미와 텅 빈 침대, 수면제, 알코올,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밤이면 그는 나가서 어둠과 추위와 정적을 뚫고 몇 킬로미터를 달렸고, 발이 인도를 두드리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도 목적지나 목표를 정한 적은 없었따. 사냥꾼처럼 달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사냥감처럼 달렸다. (p. 49)' 일중독자처럼 일하고 더나은 일자리제안도 거부한채 작은 도시에서 아버지와 경찰관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늘 불안했다. 10년전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들도 내색은 안해도 사냥감처럼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인질들도 불안해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불안해보이지가 않았다. 불안해해야 할 사람은 불안해하지 않고 불안할거라 보이지 않는 사람은 불안한 상황.

사실 10대 소년에게 경찰의 꿈을 심어준 사람은 다리 위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일주일 뒤에 똑같은 난간 위에 서 있었던 10대 소녀였다. 뛰어내리지 않은 그 아이였다. (p. 54)

누군가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경험과 누군가의 죽음을 막은 경험은 둘 다 소년에게 경찰관이 되어야할 이유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구원의 기회를 얻는 사람보다 버림을 받는 사람이 더 많은 법이다. 그렇게 버려진 사람 중 한 명이 은행 강도가 되었다.

은행이 은행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금 없이 운용되는 '캐시리스' 은행이 있는 모양이니, 그건 소위 말하는 짝퉁 아닌가? 카페인 없는 커피, 글루텐 없는 빵, 알코올 없는 맥주가 넘쳐나니 사람들이 헷갈리고 사회는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은행 강도가 되지 못한 은행 강도는 은해잉라고 볼 수 없는 은행 안으로 들어가 권총을 들이대며 자신의 방문 목적을 선포했다. 하지만 창구에 앉아 있었던 스무 살의 런던은 인간의 사회성을 파괴할 정도로 SNS에 심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은행 강도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외쳤다. "당신 장난이에요, 뭐에요?" 강도는 실망한 아버지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보고 권총을 흔들며 이렇게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강도다! 6천 5백 트로나 내놔" 런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6천하고 5백? 0을 두어 개 빠뜨린 거 아녜요? 아무튼 여긴 현금 없는 은행인데, 진짜로 현금없는 은행을 털 생각이에요? 바보에요, 뭐에요?" (p. 68)

창구 직원이라고는 단 한 명 뿐인 작은 은행 지점, 권총을 든 은행강도 앞에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강도의 요구금액과 무지에 콧방귀를 뀌는 어린 직원, 늙다리가 된 기분에 멍해졌다가 은행을 털려던 생각이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깨달은 현실자각의 시간속에 은행강도가 얼이 빠진 사이 은행 직원이 외친다. '"저기, 나 지금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p. 70)' 은행강도가 되려다 실패한 은행강도는 허겁지겁 도망간다. 도주 계획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겁에 질려 아무곳이나 열린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들어가고 보니 사람들이 우글우글 했다.

아파트 안에 있던 여자 하나가 권총을 보고 "어머, 어떡해, 강도가 들었어요!" 라고 외쳤고, 그와 동시에 계단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리자 은행 강도는 경찰인가 보다 싶어(그게 아니라 집재원이었다) 딱히 대안이 없었던 관계로 문을 닫고 권총을 마구잡이로 겨누며 처음에는 "아뇨...! 아뇨, 강도가 아니라... 나는 그냥..." 이라고 외쳤다가 생각을 바꿔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음, 어쩌면 강도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여러분이 타깃은 아니에요! 어쩌면 지금 이건 인질극에 가까울지 몰라요! 그 점에 대해서는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가 참 복잡하게 꼬였네요!" (p. 76)

아파트 안에는 총 여덟 명이 있었다. 한명은 부동산중개업자이고 신혼부부 한 커플, 중년부부 한 커플, 그리고 고급패션의 여성 한 명과 할머니. 여기까지 세면 총 일곱 명인데 왜 여덟 이냐고? 한 명은 나중에 토끼로 등장한다. 토끼... ㅋㅋㅋ 여하튼, 이들 모두는 은행 강도에게 인질이 되었지만 이들 모두는 은행 강도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은행 강도가 너무... 딱했다.

10년 전에 다리 위로 올라간 남자와 어느 아파트에서 인질극을 벌인 은행 강도는 서로 아무 연관성이 없다. 서로 만난 적도 없다.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럴 해저드다. (p. 79) 모럴 해저드? 그 일곱 살짜리는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직전에 그 단어를 배웠다. (p. 81) 은행 강도는 이날까지도 그 말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얼마나 기분이 처첨했는지가 아니라, 엄마를 싫어할 수 없으니 얼마나 희한한지에 대해 생각한다. (p. 82) 다리 위로 올라간 남자는 모럴 해저드를 운운했던 은행 직원 앞으로 편지를 썼다.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적었다. 그러고는 뛰어내렸다. 은행 직원은 그 편지를 10년 동안 핸드백에 들고 다녔다. 그러다 은행 강도를 만났다. (p. 83)

10년전 한 남자의 자살 그리고 10년 후 허술한 은행 강도에게 붙잡힌 인질극, 두 사건은 관련이 없으면서 연결된다. 은행과 집 두 공간은 관련이 깊으면서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비밀을 공유한 끈끈한 사이가 된다. 은행강도와 인질들 그리고 경찰관.

당신은 평생 무슨 일이든 헤쳐나가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왔다. 대책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도움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오고 당신은 고독한 절망으로 몸부림치며 그날을 보낸다. 아이들이 당신하고는 설날을 같이 보내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해 이틀 전날,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변호사의 최근 편지와 그날 안으로 월세를 내지 않으면 내쫓길 줄 알라는 집주인의 편지를 주머니에 넣는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휘청거릴 수 있다. 정말 한심한 발상 하나면 충분하다. 당신은 진짜처럼 보이는 장난감 권총을 찾는다. 검은색 털모자에 구멍을 뚫어서 얼굴이 덮이게 내려 쓰고, 당신이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을 빌려줄 수 없다는 은행으로 들어간다. 월세 6천5백 크로나만 받아내자고, 월급을 받자마자 갚으면 된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p. 100)

은행강도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첫 장부터 바보같은 발상 한심한 발상이라고 말하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설속 공감요소에 누구나 마음이 동요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배우자가 자신의 직장 상사와 바람이 난걸 알게 된 것도 모자라 맨몸으로 집에서 쫓겨나며 이혼당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참았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도 빼앗길 처지에 몰리고 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순간에 이성은 휘청거렸고 한심한 발상이 불안을 극대화시켰다. 그렇게 은행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은행엔 돈이 없었고 도망친 곳에선 희한한 인질들이 자신을 둘러싸기 시작한다.

사라가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동안 심리 상담사는 상담실에 앉아서 하늘로 둘러싸인 그림 속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가 생을 끝낼까 고민 중일지 모른다고 한 사람은 사라가 처음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해석한 적이 없었다. 심리 상담사도 여자가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유는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움 아니면 두려음. 그녀가 그 그림을 그린 이유도 그걸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심리학자들이 사랑하는 주제였다. 그림을 아무리 오랫동안 들여다보더라도 가장 확연한 부분을 놓칠 수 있었다. 여자가 다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말이다. (p. 134)

그리움 아니면 두려움.

이 소설은 두려움으로 시작한다. 불안한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멀쩡해 보이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불안에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저마다의 다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신만의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은행강도사건+인질극 이 터졌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낯선 상황 속에서 서로의 불안을 직면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혹시... 그리움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전부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가 이야기의 주제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 이야기도 은행 강도나 아파트 오픈 하우스나 인질극이 주제가 아닐지 모른다. 심지어 바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다리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p. 158)

그리고 어쩌면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책은 두툼하고 읽은 페이지보다 읽어야 할 페이지가 훨씬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책장을 점점 빨리 넘기게 될 것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분명 조금은 (혹은 많이) 행복해지게 될 것이다.

"그냥... 엎드려주시면 안 될까요? 잠깐만? 나는 지금... 아니 그러니까 나는 은행을 털려고 했지... 이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요!" (p. 192)

"흠,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먼저 각자 자기 소개를 하면 어때요?" (p. 195)

은행 강도는 가서 화장실 문을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이로써 이것이 토끼에 대한 이야기로 돌변했다. (p. 204)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없네! 당신들은 최악의 인질이에요!" (p. 221)

웃다가 찡하다가 하다보면 그렇게 점점 소설속 인물들은 현실속 우리의 모습이 되어온다. 그리고 사이사이 시크하고 삐딱하지만 의미심장했던 문장들에 대해 뒷북치며 아하! 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들어, '스톡홀름은 어떤 장소라기보다 하나의 표현이다.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짜증나는 인간들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상징적인 단어이다. (p. 229)' 처럼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에 대해서 소설에서는 내내 이런저런 비하적 상징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서울사람들 이라고 할때도 그런가? 생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톡홀름'은 증후군이 될 수도 있다. (p. 231)' 라고 한다. 스톡홀름을 그렇게 까내리다가도 단번에 이미지를 바꿔버리는 능력, 역시 프레드릭 배크만이다. (하지만 가장 압권은 스웨덴 어로 읽었을 독자들의 부동산중개업체 상호 에 대한 농담 일 것이다. ※ p. 22)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가 진실이 복잡하길 바라는 이유는 먼저 간파했을 때 남들보다 똑똑한 사람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다리와 바보들과 인질극과 오픈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여러 편의 사랑이야기다. (p. 309)

소설의 진행은 나름 독특하지만 자연스럽다. 작가적 설명이 종종 등장하면서도 언제 그랬나 싶게 인물들간의 상황 속으로 몰입된다. 그런데... 결국은 사랑이야기 여서 그랬을까... 불안도 그리움도 다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따듯함이... 그래서 였을까...

"아들, 코끼리를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그는 똑같은 농담을 천 번 들은 아이답게 대답했다. "조금씩 천천히요" 그녀는 부모답게 천 번째로 박장대소 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때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p. 292)

어쩌면 혼자여서 우리 대부분 '불안한 사람들' 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레드릭 배크만 소설은 늘 일깨워 준다. 우리가 아직은 혹은 우리가 여전히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의 향기 강석기의 과학카페 10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석기의 과학카페, 그 열번째 책

당신을 취하게 하고 홀리게 한 과학의 총집합

십년 동안 매년 한 권씩 꾸준하게 과학카페 글을 책으로 냈다는데 나는 열번째 책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아주 예전에 이문세의 콘서트에 갔을 때 (내 생에 첫 콘서트 관람이었는데도) 이문세가 자신이 이 컨셉으로 백번째 하는 콘서트라며 처음 온 사람 손들라고 했을때 번쩍 들었다가 생각보다 그 수가 많지 않아 놀라워하며 스스륵 내렸던 기억이 난다. 십년만에 처음 알게 된 이 책에 대해서도 그런 아쉬움이 들려나 ㅎㅎ

저자가 과학전문기자 였다가 과학전문작가 인 만큼 책은 전반적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최근 이슈부터 화학, 신경과학, 의학, 환경, 천문학, 물리학, 생명과학, 인류학 등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어서 과학정보는 매년 저자의 과학카페 시리즈를 한권씩 읽으면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책의 인쇄상태가 훌륭했다. 번들거리지 않는 종이이면서도 다양한 자료의 컬러 및 작은 글씨 까지 잘 보여서 꼼꼼한 편집에 일단 박수를 쳐주고 싶은 책이었다.

아무튼 두 백신 모두 의학사의 한 획을 긋는 의약품이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발전한 뒤 채1년이 안 된 시점에서 개발에 성공한 데다 최초의 'RNA 백신'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쓰는 생백신이나 사백신 같은 기존 방식을 제치고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유형의 백신이 가장 먼저 (긴급이기는 하지만) 승인을 받아 현장에 투입됐다는 건 현대과학의 위대한 성취다. (p. 15)

첫 이슈는 코르나 백신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mRNA 백신 두 가지는 화이자 와 모더나 백신을 말한다. 이 두 백신은 아스트로제네카 백신 과 얀센 백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백신이라고 하면 저자 말마따나 생백신이나 사백신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연결매체인 mRNA 를 이용해서도 백신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웠다. 그리고 내가 백신을 선택해서 맞을 수 있다면 화이자 나 모더나 백신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책 자체가 최신 과학정보를 폭넓고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 배우게 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은,

언어 정보의 핵심인 단어는 좌뇌에서, 음악 정보의 핵심인 멜로디는 우뇌에서 주로 처리한다는 것, 세포고기(=배양육)에 대한 내용, 새로운 파란색 안료를 만들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 파란빛은 우울감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낮의 파란빛은 오히려 우울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즉 타이밍의 문제라는 것), 하루에 25cm씩 자라 침수속에서도 길게 자라는 '심수벼' 에 대한 내용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책의 과학적 내용과는 별개로 인상적인 내용이 심리학·신경과학 챕터에 있었는데 심인성 발열에 대한 예시였다.

소녀는 왜 학교에만 가면 열이 났을까.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녀는 온순하고 차분한 모범생 스타일로 등교를 거부하는 불량소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을 한 결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소녀는 학교생활을 좋아했지만, 신체장애가 있는 친구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오카 교수는 부모에게 아이의 전학을 권유했고 학교를 옮긴 뒤에는 등교 발열 증세가 사라졌다. (p. 92)

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선생님이나 학교측과 상의한 게 아니라 그냥 전학을 갔다고?? 그럼 그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상담자였다면 뭐라고 조언해주었을까?? 이것이 과연 심신의학과 전문교수가 권해줄만한 방법인가;;;;

'심인성 발열은 사람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은 포유류와 조류에서도 관찰된다. 즉 진화적으로 보존된 현상으로, '투쟁 토피 반응'의 하나로 설명된다. (p. 92)' 라는 내용은 크게 새로울 건 없는 스트레스 반응으로 이해됐지만 예시가 참... 일본사회는 이런식으로 해결하는가... 싶어 우리사회 예시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개인적으로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고생물학/인류학'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인류학 분야에도 최근 수년 사이 뜬 핫플레이스가 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남서부 마로스-팡켑 지역이다. 450㎢에 이르는 이곳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으로 수많은 동굴이 있는데, 이 가운데 무려 300여 곳에서 과거 인류가 남긴 벽화가 발견됐다. 연대측정 결과 이 가운데는 현생인류 화가의 가장 오래된 작품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p. 286)

아프리카를 인류의 기원 지역으로 보면서도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가 유럽지역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보니 서양인들 중에는 문화적 현생인류의 기원이 유럽인것마냥 자긍심을 가졌던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더 오래된 동굴벽화가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니 배시시 웃음이 나는건 뭐지 ㅎㅎ

이 동굴벽화 이야기 외에도 황하문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는 걸 중국도 인정하게 한 '훙산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관심이 많았던 분야이지만 동북공정문제도 그렇고 과학에 집중해야 하기도 하고 해서인지 이 책에선 강수량과 문명의 발달 관련한 연구내용을 소개한다.

책의 뒤에는 부록으로, 전 해에 타계한 과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뒤돌아보게 한 내용을 붙여놓았는데, 오래전 위인들로서의 과학자들만 알았다가 현재적 과학자들의 업적이나 생애를 짧게나마 알수 있어서 나름 의미있었다.

전반적으로 알찬 정보가 가득한 이 책을 보고 나니 앞선 시리즈들도 궁금해진다.

과학 한잔 하실래요? 를 시작으로 사이언스 소믈리에, 과학을 취하다 과학에 취하다, 사이언스 칵테일, 티타임 사이언스, 과학의 위안, 컴페니언 사이언스, 과학의 구원, 과학을 기다리는 시간 등 매번 다른 제목으로 책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겠다 싶다. 그리고 매번 우수과학도서로 인정받는 것을 보면 앞으로의 시리즈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최신과학칼럼을 모아모아 한권으로 보고 싶다면 강석기의 과학카페 에서 과학 한잔 해보기를.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은 고요하지 않다 - 식물, 동물, 그리고 미생물 경이로운 생명의 노래
마들렌 치게 지음, 배명자 옮김, 최재천 감수 / 흐름출판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How Animals and Plants Communicate with Each Other

고요한 숲 속에 울려 퍼지는 자연의 오케스트라

살아 있음에 대한 기쁨과 놀라움을 아로새기다

'숲' 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어떤 분위기를 예상할까? 대부분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상쾌한 그런 힐링의 장소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숲은 고요하지 않아야 한다' 고 이 책을 감수한 최재천 교수는 말한다. 해외의 숲생물을 연구하다가 국내의 숲을 찾아갔을때 '우리 숲이 너무 고요해서 싫다'며 숲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의사소통이 우리의 숲에는 부재함을 아쉬워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알려주는 '숲'은 몹시 시끄럽다. ㅎㅎ

나는 행동생물학자가 되기로 했다! 동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지 전부 알고 싶었다. 특히 고양이가 흥미로웠고 그래서 이 신비로운 동물의 의사소통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러나 인생이 다 그렇듯, 일은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p. 18)

첫 번째 연구대상으로 삼고 싶었던 고양이의 의사소통이었으나 저자가 처음 연구하게 된 생물은 뜻밖에도 '물고기'였다.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던 물고기의 행동연구는 의외로 하면 할수록 새롭고 매력적임음을 저자는 깨달았다. 예를들어 번식방법을 보면, 대부분의 물고기는 체외수정을 한다. '암컷이 알을 낳고 수컷이 그 위로 헤엄쳐 지나면 끝! (p. 19)' 성생활이고 뭐고 서로간의 소통이 그닥 필요해 보이지 않는 수정방법이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번식하는 물고기들이 있었다.

대서양 몰리나 감부시아 모기물고기처럼 새끼를 낳는 물고기들은 체내수정을 한다. 체내수정을 하려면 수컷의 정자가 어떻게든 암컷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난자와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수정을 하려면, 당연히 암수 사이에 의사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수컷과 암컷의 '대화'가 그렇게 어려운 도전과제가 아니더라도, 떼지어 사는 물고기들은 자동으로 거대한 통신네트워크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수컷과 암컷 단둘이 아무 방해 없이 오롯이 소통하기가 힘들다. (p. 19) 나의 석사 논문은 바로 이런 '삼각관계 소통'에 관심을 두었다. 예를 들어, 나는 수컷이 다른 구경꾼 수컷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다르게 행동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행동실험을 했다. 그들은 구경꾼과 상관없이, 점찍은 암컷을 계속 공략할까 아니면 구애 전략을 바꿀까? (p. 20)

책 제목이 '숲은 고요하지 않다' 인데 왠 물고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동물행동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풀어내자니 물고기가 먼저 등장한 것 뿐이다. 뒤이어 바로 도시의 공원에 사는 토끼가 등장한다.

야생토끼는 아주 특별한 소통방식을 가졌다. 그들은 같은 화장실을 쓰며 똥과 오줌으로 소통한다. 이런 화장실을 '공중변소'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런 '공중변소'는 집단생활을 하는 여러 포유동물의 의사소통 수단이다. 야생토끼는 프랑크푸르트 한복판에서 아주 편안해 보였고, 그 모습이 나의 흥미를 더욱 끌었다. (p. 21) 도대체 왜 야생토끼가 독일의 금융대도시로 왔을까? 사계절 내내 풍성하게 차려지는 식탁, 도시의 따뜻한 기온 혹은 울창한 빌딩 숲의 넉넉한 은신처 때문일까? 연구를 통해 나는 동물의 의사소통 행동이 도시에서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p. 22)

저자는 주변의 모든 생물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땅속물속부터 숲을 지나 하늘까지 거의 모든 생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 그러다보니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Nature is never silent'. 사실 이 책은 숲속 생물이야기 보다는 자연속 모든 생물의 의사소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숲은 고요하지 않다 라기 보다는 자연은 조용한 적이 없다 라고나 할까.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어떻게 정보가 교환되는가? 에 대해 발신 과 수신 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2부에서 '누가' '누구와' '왜' 정보를 교환하는가? 에서 단세포 생물부터 다세포 생물까지 다양한 생물들의 정보교환에 대해 탐구한 다음, 3부에서 모든게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라며 숲에 생명들이 풍성하게 존재해야 함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 3부에서의 내용이 동물이 숲을 떠났을 때의 교훈이 이 책을 강력 추천한 최재천 교수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식물, 동물, 미생물을 넘나들며 워낙 다양한 생명체들이 등장하다보니 한번에 다 알아챌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는 신기한 내용들은 아~! 감탄하게 되기도 했다. 예를들어, '애기장대' 라는 풀은 애벌레가 애기장대의 잎을 갉아 먹는 소리를 녹음한 것을 들려주면 화학 방어 물질의 양을 높이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식물이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귀가 없는데도 소리를 듣고 움직이지 않는데도 방어하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식물의 의사소통 방법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물은 더 다채롭고 미생물은 더욱 놀랍다. 일부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 미생물 곤충 균류 등 모든 생물은 전부다 나름의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많은 사례에서 생명체들이 성공적으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은 발신자가 수신자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망은 철저히 생활환경의 영향 속에 발달 한다. (중략) 그런데 생활환경이 바뀌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활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계속 발달하는 능력이야말로 생명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런 능력은 당연히 정보 교환에서도 발휘된다. (p. 258) 세상은 데이터로 가득한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한 데이터다. (중략) 한 생명체가 어떤 수신자에게 능동적으로 데이터를 보내려면, 데이터를 운송 가능한 소포로, 그러니까 신호로 만들어야 한다. 이 신호는 '생활환경'이라는 채널을 통해 수신자에게 데이터를 전달한다. 수신자가 이 소포를 '열면', 그러니까 수용체로 신호를 감지하면 데이터는 정보가 된다. (p. 278)

정보와 네트워크 그리고 의사소통은 인간사회에만 적용되는 단어로 착각해 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더 오랜 세월 더 변화무쌍하게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보를 소통해왔던 것은 인간 이전에 자연 그 자연속 생물들이었다. 그들의 신호를 무시하고 그들의 의사소통에 신경쓰지 않으며 그들의 정보를 고려하지 않은채 인간끼리만 소통해 와 놓고선 힐링이네 뭐네 하며 숲을 찾았던 건 아닐까? 그렇게 고요한 숲이 과연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숲의 고요함이 좋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선 숲의 고요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지연의 언어'를 존중하고 통찰할 수 있다면 자연과 더불어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야말로 어렴풋이 였다. 이제라도 우리는 확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p. 289)' 라는 것을. '인간 역시 생명체이고, 그래서 이 행성의 거대한 전체의 일부임을 (p. 289)' 일부로서 전체인양 착각해선 안된다는 것을. 그러니 다음에 숲에 간다면 한번쯤 귀기울여 들어볼 일이다. 숲이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혐오 없는 삶 -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 이승희 옮김 / 판미동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언컨대, 어떤 존재도 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혐오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두 손이 맞닿은 심플한 디자인의 표지가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라고 묻고 있는 표지의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혐오' 때문이라고.

<180 GRAD : Geschichten gegen den Hass> 라는 독일어 원제를 번역하면 <180도 : 증오에 반대하는 이야기> 라고 나온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표지의 두 손이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해 'Yes'라고 대답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의문이 바로 뒤따르지만, 뒷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김승섭 교수의 추천사가 마음을 울렸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 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된 김승섭 교수는 공중보건의에 대한 나의 편견을 너무도 따뜻하게 깨뜨려준 사람이기에 그의 추천사만으로도 진정성은 이미 확보한채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정치적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의문에 처했다. 자유 민주주의와 서양의 안정성에 물음표가 붙었다. 심지어 파시즘의 귀환도 가능해 보였다. 보통 그 원인에 접근하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였다. 취재를 위해 위기에 접근할수록 두려움은 더 커졌다. 서양 사회들은 순서대로 하나씩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분열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았다. (p. 7)

저자는 서문에서 마크롱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프랑스의 분열과 브렉시트를 둘러싼 영국의 분열 그리고 트럼프 당선이라는 파격적 상황을 보며 전 세계적으로 몹시 걱정스러운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만 같은) 상황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등서도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강해지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공동집권에 성공했으며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득세하고 독일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의회까지 진출했다. 저자는 이러한 유럽의 상황들을 보며 '다시 무력감을 느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불타고 있는데, 마치 구경군으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10)' 고 말한다. 하지만 '기자로서 내가 이런 양극화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던 사례들을 꽤 자주 다루어 왔다는 사실(p. 11)' 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사소한 만남에서 생겨났던 힘들로, 사회를 파괴하려는 원심력을 막을 정치적 도구와 전체 사회를 위한 전략을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p. 11)' 그렇게 사례들을 찾아 모으게 되었고, '이 책이 바로 그런 발굴 작업 (p. 12)' 의 결과물이었다.

인종주의와 타인을 기꺼이 돕는 마음,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p. 35)

이런 사람들(공감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을 수도 있다. (p. 37)

'우리는 서로를 더는 잘 모르기 때문에 혐오와 경멸을 만들기가 아주 쉽다' 이 구조는 두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거리두기에서 편견으로, 그리고 다시 편견에서 거리두기로 나아간다. 이런 이중 나선의 가속화가 미국을 공포와 혐오 사회로 만들어 갔다. (p. 56)

외국인을 향한 적대감은 외국인이 없는 곳에서 가장 크다. 이슬람을 향한 적대감도 이슬람교도가 없는 곳에서 가장 크다. 우파 포퓰리즘 정당 투표자에 대한 혐오 또한 그들이 거의 없는 대도시에서 가장 크다. 부재하는 자들이 공포를 유발하고 증오를 불러온다. 우리는 편견이 문제라는 것을 안다. 편견을 가진 이들이 접촉을 통해 편견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이제 안다. 편견이 줄어들면 사회가 더 평화롭게 된다는 사실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접촉을 예외로 둔다. 이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p. 57)

이 책의 핵심은 '접촉'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를수록 쉽게 혐오한다. 저자는 접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양한 접촉의 사례들을 모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접촉이 늘 공감을 불러온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한 사회에서 접촉이 많아졌다고 평화와 우정이 넘치는 행복한 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p. 75)' 라며 접촉의 경험이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거나 혹은 예외적이다 라고 설명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접촉의 결과가 부정적인 경우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언론에 묻고 있다.

언론은 사회 안에서 편견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강화하고 있다.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잘못된 히스테리를 만들어 낸다. (p. 84)

우리는 세계를 체계적으로 잘못 인식한다. 우리는 세계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착각이다. 그 착각은 언제나 같은 방향이다. 우리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그것도 너무 많이 부정적으로 본다. (p. 104)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비슷하게 왜곡된 언론사들이 있는가보다. 독일도 우리나라처럼 기레기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생산된 기사들의 진실은 보도된 기사와 전혀 달랐다. 하지만 '당연히 극단적인 사례가 훨씬 흥미롭다. 틀림없이 언론인 대부분은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또한 보도자들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독자들도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p. 107)'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세계 어느나라던 간에 자극적인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게 편견이 더더더 쌓여가게 된다. 그 편견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저자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 사례들을 읽다보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정체(政體)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공직자를 추첨으로 임명하면 민주정으로, 선거를 통해 임명하면 과두정으로 여긴다' 수백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규정은 정치 철학의 기본이었다. 민주주의는 제비뽑기를 의미했다. 고대 시대에 그러했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베니스와 피렌체 도시 국가들도 그러했다. 18세기 중반 몽테스키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이어 갔다. '추첨을 통한 선출은 민주주의의 본성과 잘 맞으며, 투표를 통한 선출은 과두정의 본성과 잘 맞는다.' (p. 192)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제 라고 배웠다. 하지만 고대시대부터 전해내려온 민주주의의 정의에는 선거가 없었다. 선거제는 과두정의 정체를 지지하는 기반이었다. 민주주의라는 정체는 곧 제비뽑기식이었다. 이러한 정의에 대해 그옛날과 지금이 같냐고, 인구가 폭증한 이 시대에 그게 가능하냐고 즉각적으로 반박하게 될 것이다. 저자또한 즉각적으로 실사례를 제시한다. 아일랜드 시민의회를 통한 법개정은 흥미로운 실험이었고, 스위스의 칼크브라이테 라는 거주지는 혁신적인 공동체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들만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집단간의 접촉에서도 이러한 긍정적 실험이 가능할까? 저자또한 이러한 의문을 예상했다.

가끔 접촉은 역효과를 낳는다. 개별 인간이 아닌 집단으로 만날 때, 개인이 아닌 부족들이 만날 때 그렇다. 부족적 사고는 공감의 타고난 적이다. (p. 240)

<정치적 부족주의> 라는 책이 생각난다. 현대사회에서 부족주의가 왠말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부족주의 만큼 작금의 분열에 대해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부족주의에 대해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뜻밖에도 아프리카의 한 나라 이다. 부족주의의 원시적 의미부터 현대적 의미까지 분열에 분열로 뜨겁게 불타고 있는 대륙인줄 알았던 그 아프리카에 부족주의 타파에 성공한 국가가 있었다. 바로 '보츠와나' 였다. 그리고 그 보츠와나의 성공비법은 '접촉' 이었다. 돌고돌아 다시 돌아온 해답 '접촉' 에 대해 저자는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예를 들어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이슬람 급진주의, 무정부주의를 내려놓게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도움이 되지 낳는다. 얼마나 자주 혹은 얼마나 크게 말하든 상관없다.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 주어야 한다. (p. 293)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반복해서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서로를 알아 가야 한다. (p. 305)

직접적인 경험만이 항상 옳다고 할순 없지만 때론 없던 편견을 만들거나 있던 편견을 강화시키는 경험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라서 생기는 왜곡된 편견 보다는 알고자 노력함으로써 혐오를 없애고자 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노력들의 크고작은 사례들을 통해 사소하게는 개인대개인 의 관계에서 크게는 국가의 운영까지 다양한 곳에서 희망을 찾아내 보여준다. 독일의 '차이트 온라인' 이라는 곳에서 진행중인 대화연결 방법도 굉장히 의미있어 보였다. 어렵게 생각하거나 멀게 느끼지 말고, 나와 너를 구별하는 차이점을 찾는 것보다 나와 너의 공통점을 먼저 찾아보는 것으로 삶의 기본방식을 전환시켜본다면 '혐오 없는 삶'이 누구에게나 가능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여하튼 거창한 의의들을 떠나서, 불평불만 가득한 책들 속에서 오랜만에 긍정적인 르포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