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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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미술 안내자 양정무의 미술관에는 없는 미술 이야기

몇년전에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던 에트루리아전을 보러 가기위해 사전준비 차원에서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2 - 그리스 로마 문명과 미술>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너무 재밌게 잘 읽혀서 책을 읽는 내내 언젠가 6권인 이 시리즈를 완독하고 말리라 생각했었더랬다. 비록 그 시리즈는 여전히 읽고싶은 책 목록에 남아있는 상태이지만 저자의 쉬운 설명과 풍부한 자료는 여전히 흡족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책의 저자가 바로 <벌거벗은 미술관>의 저자인 양정무 님이었다. 그러고보니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으며 왜 우리나라엔 이런 책이 없나 아쉬워했던 것이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로 미술사를 읽었으면 됐을 것을 이렇게 뒤늦게 생각나다니;;;

여하튼 저자는 국내 미술사 분야에서 대표적인 학자라고 볼 수 있다. 미술의 역사를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대중서 집필과 강연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무척 존경스러운 분이다. 무엇보다 잰체하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미술과 미술사 이야기를 풀어내준다는 점에서 저자의 책은 늘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코로나시대에 생각해봤음직한 역사속 주제들을 흥미로운 미술사이야기로 엮어낸 책이다. 이렇게 장기화될 줄 몰랐던 코로나시대에 살면서 고전이나 르네상스 그리고 박물관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몰랐던 부분을 깨닫게 하여 예상치 못했던 시대에 대한 새로운 발상을 시도하게 해준달까.

클래식, 또는 고전이라는 용어 속에는 그리스·로마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보는 인식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로마의 것은 최고'이며, 이것을 뒤집어 '최고의 것은 그리스·로마에서 왔다'라는 인식까지도 담겨 있습니다. (p. 20) 고전미술을 추종했던 르네상스 시기부터 18,19세기까지만해도 이것들이 로마시대의 복제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가 20세기부터 미술사학이 고도화되면서 실증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중략) 다시 말해 고전미술의 실체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전미술을 향한 신화와 예찬이 더 극적으로 이뤄졌을지도 모릅니다. (p. 23) 고전기 조각의 정수로 알려진 작품들은 원래는 상당부분 색이 칠해져 있었습니다. (p. 24) 그리스 조각에 대한 관심이 샘솟던 르네상스 시기부터 유럽 사람들은 그리스 조각이 원래 채색되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이런 이유로 르네상스 이후 '조각 하면 순백색 대리석 조각'이라는 공식이 생겼던 겁니다. 그러다 18세기에 이르면 순백색 대리석 조각을 이상적인 피부의 재현으로 미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나오게 됩니다. (p. 25) 18세기 당시 고전미술에 대한 예찬은 대단했습니다. (중략) 어떤 집단이 성공하면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스멀스멀 생겨납니다. '우리의 조상은 누구이고 어디서 왔을까?' 유럽인들의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빙켈만 같은 이는 그들의 뿌리가 그리스에 있다고 말해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8)

서양미술에서 고전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로마 시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시대를 유럽의 뿌리로 인식하고 고전이라 부르게 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좀더 파고들어가보면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한상태에서 자리잡은 개념이었다. 그 착각과 허술함은 이미 밝혀진게 상당히 많지만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한 서양의 예찬은 아직 현재 진행중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는 2천년 전에 쌓아놓은 명성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럽 문명의 종주국으로 큰소리치고 있고, 그것이 유럽의 현실 정치에서 어느정도 힘을 발휘(p. 38)' 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문명의 기원을 쫓아올라가면 그리스·로마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터키(수메르) 등 유럽인들이 동방의 문명이라 부르는 문명으로 가야하는데 자신들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됐다고 말하기 싫어서 유럽의 뿌리는 그저 그리스·로마 시대다 라고 더이상 캐지 않고 덮어놓고 있는 것 같달까. 하지만 이렇게 그냥 덮어놓음으로써 18세기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미술사와 미학이라는 학문과 동시에 생겨난 인종(p. 43)이라는 개념에 대한 편견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게 아닐까. 가장 고리타분할 수 있는 '기원'이라는 문제가 시대를 거듭하며 점점더 첨예해진다는 것또한 인간문명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학의 문제는 미학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곧 뛰어난 것, 우수한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까지 자라나게 된 겁니다. (p. 48)'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미술사의 미적 변화는 역사에 던지는 시사점이 의외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점에서 유럽의 고전시대인 고대그리스사회를 '육체의 파시즘 사회(p. 63)' 라고 한 저자의 표현은 신선하고도 울림이 컸다.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누드 미술은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신의 옷'인 셈(p. 66)' 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미에 관해서 열린 생각을 존중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미술도 열린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p. 75)' 라는 저자의 의견은 고전미술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해준다. 고전미술이 왠지 고급지고 멋지고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생각해왔다면 '우리가 아는 고전미술은 사실 '짝퉁'이다! (책의 띠지 문구 中)' 라는 발칙한 문장에 함께 미소지어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ㅎㅎㅎ

유럽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로마 시대엔 희비극 공연이 유명했다. 배우들이 쓰는 가면엔 인간의 감정이 크고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곤 했다. 하지만 플라톤 이후 조각상들은 무표정해지고 중세의 초상화들에서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저자는 이러한 미술사에서 '문명의 표정'을 읽어내려 한다.

특정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초상을 굉장히 견제하던 시기였기에 이 시기의 무표정은 누구도 아니고, 누구도 될 수 없는 극도로 이상화된 얼굴을 표현한 결과였습니다. (p. 90)

유명세를 따지자면 <모나리자>를 이길 수 없겠지만, 15~16세기 유럽 전역에 등장한 상인이라는 새로운 세력의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사업가였던 크렐의 표정도 르네상스를 대표할 자격이 있을 것 같습니다. (p. 111)

볼테르는 회화, 조각, 판화 등 어떤 매체에서도 항상 웃고 있습니다. 볼테르만큼 회화나 조각으로 많이 만들어진 철학자는 드물 것입니다. (p. 134)

무표정하고 근엄했던 표정들 사이에 상인 계층의 개성적인 얼굴이 등장하더니 철학자의 미소까지 미술은 늘 시대의 인물을 그려왔다. 지금 우리 시대의 초상화는 어떤 표정일까? 이시대의 표정을 생각하기 어렵다면 일단 책의 표지 먼저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책은 겉표지를 벗겨내면 앞뒤 페이지를 초상화로 채우고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4가지 주제 중에서 표정에 관련된 두 그림을 표지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많은 초상화들 중 이 두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책의 띠지에 쓰여있는 표현을 빌려말하자면, 저자는 우리가 아는 고전미술은 사실 '짝퉁'이고 초상화에 웃는 얼굴이 드문 이유를 설명한 다음의 반전의 서사는 박물관에서 풀어낸다.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박물관이 사실은 얼마나 잔혹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곳인지.

누가 고전을 중심으로 세기의 명작을 차지하는가는 곧 누가 유럽의 정신적 뿌리를 차지하는가의 문제, 즉 유럽 전역에서 권위를 발휘할 정통성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벌인 이같은 약탈극은 고전의 지위를 한층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자유라는 혁명의 이념이 약탈의 정당한 근거로 둔갑한 걸 보면 조금 무시무시한 반전이라는 느낌도 들죠. (p. 155) 루브르 이전에 세워진 유럽의 초기 미술관들도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어느정도 예견했지만, 지배층이 베푸는 시혜까 아니라 시민들의 주조하에 확실하고 극적인 변화로 이끌어낸 곳이 바로 루브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p. 161) 유럽 각지에 박물관과 미술관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역할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p. 164)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관 박물관은 나폴레옹의 약탈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제국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 그것이 박물관의 시작이었다. 영국박물관은 나폴레옹과 같은 리더의 대대적 약탈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소소하게 모여지는 재미가 있었다. 영국박물관은 슬론의 기증으로 시작되어 처음엔 자연사박물관 같았으나 윌리엄 해밀턴이 이탈리아에서 모은 소장품을 기증하면서 업그레이드 되었다가 엘긴백작이라 불리는 토머스 브루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엘긴 마블로 채워진 영국박물관도 결국은 약탈품 전시관인 셈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사이어티 오브 딜레탕티' 라는 클럽의 에피소드가 재미있었다. 18세기 영국은 그야말로 클럽의 시대였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에드워드 기번도 사무엘 존슨의 클럽 멤버였는데 이 클럽의 창립멤버인 조슈아 레이놀즈의 '소사이어티 오브 딜레탕티'라는 그림(p. 170)을 보고있자니 그들의 사치와 지적 여흥이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왔다. 역사적으로 내내 충돌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박물관에서도 서로를 경쟁하듯 의식하는데 '프랑스가 굉장히 대담한 방식을 통해 박물관의 변혁을 건축적으로 추구해다면, 영국은 원래 있던 것들을 그대로 존중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00)' 에서 확인되듯이 영국의 귀족문화가 여전한 것이 또한번 엿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몇 개나 있는지 아시나요? 놀라지 마세요. 영화관보다 훨씬 많답니다. 2018년을 기준으로 전국에 위치한 영화관은 483개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은 총 1124개가 있습니다. 이중 박물관이 873개, 미술관이 251개고요. 어마어마하죠? (p. 203)

정말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광복이후 시작된 미술관 박물관이 저렇게나 많다니. 빠르게 세워진 만큼 부실하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일단 초석은 잘 깔아놓은게 아닐까 싶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을 위한 발전의 장소'인 박물관으로서 국내의 박물관들이 잘 성장하길 응원해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H.카 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온 날인데,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는 제가 경구처럼 되뇌는 소중한 문장입니다. (중략) 과거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시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역사학자의 관심사 중 절반은 항상 현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p. 209)

E.H.카 의 저 문장은 정말 유명한 문장이고 나도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다.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의 시간을 읽는 것이지만 현재를 알기 위해 읽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술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자꾸 과거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이유중엔 이러한 역사적 의미도 숨어 있는게 아닐까.

우리가 말하는 르네상스는 흑사병의 병마가 가장 맹위를 떨치던 대역병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르네상스란 흑사병이라는 가공할 공포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낸 도전의 역사였던 거죠. 흑사병은 서양미술의 흐름을 크게 뒤바꿔놓은,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p. 226) 흑사병은 미술의 대중화에 상당부분 공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 234) 역사적으로 흑사병은 르네상스로 이어진 반면 스페인독감은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두 갈림길을 코로나19 이후의 미래에 투영해본다면 우리에게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장밋빛 세계의 가능성과, 지금보다 더 파괴적인 대재앙의 가능성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극단적인 좌표 속에서 어떤 길로 들어서게 될지에 대해 많은 고민과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문명은 또다시 역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p. 258)

코로나19 시대가 길어지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들 이야기한다. 지금은 체감하지 못할지라도 몇년 후 우리는 코로나19 시대가 바꿔놓은 것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니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남기는 여운이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예술에 대해 '예술은 크게 보면 완벽과는 거리가 먼 오류의 세계(p. 261)' 라고 저자는 예술에 대한 벽을 낮춘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보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완벽함과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고민과 그것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온다.(p. 264)' 라며 저자는 미술에서 인간성을 찾는 시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미술의 관점에서 풀어보려(p. 270)' 했다며 미술을 통해 본 인간의 모습은 '인간은 방황하지만 그것에 도전해서 변화를 일으키는 자(p. 271)' 라고 답하며 미술을 더욱 인간적으로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미술의 역사는 도리어 실패와 미완성으로 이루어진 고뇌와 좌절의 역사이기 때문(p. 271)' 이라고 그렇게 '이 책은 미술과 인간의 관계가 지닌 복잡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의 문제로 나아가려 했다.(p. 274)' 고 저자는 책을 마무리한다. '이같은 저의 도전이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p. 274)' 라는 저자의 겸손에 미소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무거운 주제일수도 있지만 가볍고 신선하게 읽히는 책이었기에 저자의 도전이 앞으로도 계속되어 또다른 책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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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 -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 Philos 시리즈 7
제프리 삭스 지음, 이종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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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 않으면서 인류의 역사를 경제학적으로 모두 정리해내고 있어서 재밌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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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 -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 Philos 시리즈 7
제프리 삭스 지음, 이종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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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부와 빈곤부터 지속가능성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교류가 이끌어갈 미래를 예측한 대작

인문대중서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읽었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는 그야말로 충격에 가까운 깨달음을 준 책이었다. 역사에서 '지리'의 중요성을 그토록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알려준 책은 처음이었다. 그러한 명저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찬사에 가까운 추천문장을 달고 나온 이 책을 보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7만 년의 변화를 관통한 단 한 권의 책!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만을 탁월하게 정리해놓았다' 라니, 그런데 그 방대한 역사를 담았다는 책 치고는 비교적 얇은 두께의 책이라니 대체 어떤 책일까...

원제가 <The Ages of Globalization 세계화의 시대>라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저자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7번의 세계화시대로 구분지어 인류 역사를 '세계화'라는 주제에 맞춰 정리하고 있다. 왜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지 1장에서 '세계화의 역사' 개요를 설명하고 각 7 시대를 풀어낸 다음 마지막 9장에서 '21세기 세계화를 위한 조언'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그러니까 '미래를 예측했다' 기 보다는 저자가 꿈꾸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조언' 을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이러한 해악이나 위협에 대하여 간명한 해답이나 처방전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세계화의 역사는 인류의 영광스러운 업적, 잔인함, 스스로 가한 해악 등의 역사이고, 동시에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발전을 성취해온 아주 복잡한 역사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세계화는 자연지리, 인간의 제도, 기술적 노하우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중략) 나는 이 책이 전 지구적 상호연계썽의 오랜 체험을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생활과 사회를 형성해온 세계화의 역할을 더 잘 알게 해주는 밝은 빛이 되기를 희망한다. (p. 23 -머리말 中-)

지금의 시대가 불운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만큼 역설적으로 저자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세계화' 라는 이슈에 맞춰 더 강력하게 주장한다. 저자의 본업이 경제학자인만큼 '세계화' 라는 주제로 풀어내는 인류의 역사는 경제 그중에서도 세계경제의 중심인 '무역'을 중심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원시적 무역에서부터 현대의 무역까지 그 중심에는 지리, 기술, 제도 가 있었음을 논증하여 7만년의 역사를 굉장히 압축적으로 간결하게 이해시켜주고 있다.

지리, 기술, 제도의 상호작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21세기에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변화를 잘 헤쳐나가는 기본적인 길잡이가 되어준다. 우리는 세계화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현재 사회와 우리 시대의 경제를 위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p. 27)

세계화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저자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일곱 시대로 뚜렷하게 구분지어 설정한다.

첫째는 구석기 시대로 인류가 아직도 수렵채집자로 살아가던 선사시대이다.

둘째는 신선기 시대로 인류는 이 시대에 처음으로 농업을 시작했다.

셋째는 기마 시대로 야생 말을 순치(길들이기)시켰고 원시문자가 개발되어 장거리 교역과 통신이 가능해졌다.

넷째는 고전 시대로 이 시기에 대규모 제국이 처음 생겨났다.

다섯째는 해양 시대로 제국들이 최초로 본국의 생태적 지역을 넘어서서 5대양으로 뻗어나갔다.

여섯째는 산업 시대로 대영제국이 선도하는 소수의 사회들이 산업 경제를 부흥시킨 시대이다.

일곱째는 디지털 시대로 온 세상이 디지털에 의해 즉시 연결되는 시대, 즉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이다.

위와 같은 시대구분과 간략한 특징들을 저자는 깔끔하게 하나의 표로 보여주기도 하는데 아주 정리가 잘 된 표였다.

인류의 체험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살펴볼 때, 대부분의 경제·인구·통계적 변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런 변화는 지난 200년 동안 발생했는데, 이 정도의 시간은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 존재해온 30만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잠깐 사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인 전 지구적 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첫번째 교훈은 최근 200년 동안 벌어진 대대적 변화들이 초기하급수적으로, 즉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p. 35)

'초기하급수적 성장을 보인 이 세가지 사례는 아주 극적인 것이다. 이 사례들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극적인 변화가 발생했음을 상기시킨다. (p. 39)' 인류의 총인구수, 도시화비율, 1인당 전세계 생산량으로 살펴본 최근 200년간의 초초초기하급수적 변화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경제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의 역사는 곧 일련의 규모 확대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p. 40)' 그러므로 글로벌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세계화'의 시대로 역사를 정리해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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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로버트 판타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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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의 유한한 날들을 영원한 기록으로 잇는 나 자신과의 대화

서른 다섯살의 젊은 소설가가 있다. 그는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모든 것들의 끝에서 남긴 메모' 라는 제목을 붙인 글을 일기처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단편적인 사색을 일기 형식의 에세이로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 '설정' 이다.

아무 사전정보 없이 이 책을 읽다보면 자전적 에세이인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뒷표지에 쓰여있는 추천사에서 이다혜 작가의 '사고실험' 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아무 정보없이 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던 독자에게 주는 유일한 힌트라면 힌트이다. 출판사의 포스팅 글을 통해 이 책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픽셔널 에세이 fictional essay. 논픽션은 아니지만 소설이라 볼 수 있고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제 에세이처럼 읽히는 이 책을 '픽셔널 에세이'로 칭하고 있었다. '서른 다섯, 젊은 소설가가 남긴 죽음과 삶의 이야기, 끝에 이르러서야 닿을 수 있었던 진정한 내면의 기록들'이란 표현은 사실 허구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가족은 어머니 한명 뿐인 외동아들인 '나'는 혼자 사는 소설가 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감정 표현에 서툴러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고 괴팍하다 싶은 시니컬한 성격의 나는 늘 자신의 자아와 대화하기를 즐기고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다. 그런 '나'가 어느날 갑자기 악성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아직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 이전과 똑같은 일들을 하면서 앞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내가 언제나 해왔던 일들을 할 것이다. 그 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까. (p. 19)

원래 성격이 그러했기에 갑자기 악성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버킷리스트 같은 것은 만들지 않는 유형이다. 이점은 나와 굉장히 흡사하다. 나도 어느날 갑자기 암진단을 받는다고 해서 일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렇게 되고나서야 진정 나만을 생각하며 조금은 욕심내서 남은 시간을 즐기려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솔직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암진단을 시한부삶이라는 것을 좀 선망하는 타입이다.

시간은 돈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쓰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무언가에 소비했을 때만 중요하다. 시간이든 돈이든 쓰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개념일 뿐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시간은 시간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와 교환할 때만 가치가 있다. 돈과 시간의 뚜렷하고 확고한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 잠재적으로 상당한 양의 시간을 부여받는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생득권 혹은 탄생 선물처럼 시간을 일시불로 받는다. 또 시간만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매분 매초 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조금도 아껴두었다가 쓸 수 없고 저축할 수도 없다. 물론 주어진 분량 이상으로 차지할 수도 없다. 쓰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으며 소유를 의식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시간을 쓰고 있다. (p. 34)

이 책이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 이유는 한 사람의 화자가 내밀한 자신의 시한부 삶을 받아들이며 생각해봄직한 것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도 없고 주인공도 없고 그저 '생각'뿐인데 누가 이 글을 읽으며 소설인줄 알겠는가?! 더구나 그 생각 깊이가 좀 남다르다. 얇은 두께에 많지 않은 글밥인데도 한페이지한페이지 힘겹게 넘어간다. 그 무게감이 시한부 라는 설정 때문인지 다루고 있는 철학적 주제 때문인지 잘 구분이 되진 않는다.

가족이란 개념은 정말 이상하다. 임의적인 혈연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도 없고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평생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 마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친구의 친구들 같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줄 알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p. 61) 나는 항상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고, 이 또한 지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할 때처럼 힘들지는 않다. 이제까지 내가 했던 최고의 대화는 나와의 대화였다고 할 수 있다. (p. 64) 내게 남은 시간이 한 줌밖에 없다면, 그러니까 내가 다시는 이 사람들 얼굴을 볼 수 없고, 그 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남길 기회가 없다면, 그동안의 인연과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내가 가장 오래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남이 아닌 나 였다. (p. 72)

'나' 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줄곧 고독을 원했기에 고독하게 살았고 그 고독을 즐겼다. 그러니 시한부 삶이 됐다고 해서 달라질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자신과 대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거리감을 유지한채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고독을 원했다. '나' 의 인간관계는 이 한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 한 명의 좋은 친구는 백 명의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그리고 평화로운 고독은 천 명의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p. 75) ] '나' 에게는 한 명의 친구 도 없고 그저 평화로운 고독 뿐이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이 책이 하고 있는 '사고실험'은 일반적 캐릭터로 볼수 없어 보인다.

나의 건강이 섣부른 위로는 의도와는 정확히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만들어 정당화하고 어떻게든 개입하려고 했다. 잔인하고 부당하고 까닭없는 나의 상황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p. 11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억지로라도 이유를 찾아내어 정서적인 안정을 구하려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중 가장 최악은, 분명 신의 부재가 가장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이 시기에 나에게 신을 설교하려는 사람들이다. (중략)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신이 아마도 나의 이른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앞뒤가 맞는 말이며 어떻게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 해도, 그 신을 사랑하거나 믿거나 아는 일은 나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한다. (p. 112) 신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를 말하면서,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맹목적인 믿음, 신실하고 순수한 신앙만 있으면 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나는 바로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이 곧 이유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위한 이유다. 만약 필요해서 만든 이유에 지나지 않고 그외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신앙이란 부조리와 무의미로 붕괴되는 타락과 후퇴의 순환일 뿐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무엇을, 그저 더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믿는다는 것은 희망이나 신실한 신앙의 표시가 아니라 절망의 증거일 뿐이다. (p. 116)

'나' 는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이긴 하나 그렇기에 '나' 만의 시니컬한 철학적 논리가 내게는 잘 맞았다. 이 책이 허구적 소설형식 에세이이고 일종의 '사고실험'이라면 적어도 내게는 그 실험이 어느정도 가능했다는 말이다. [ 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다. 언제나 그래왔기에 어쩔 수가 없다. 어머니만이 나를 도울 수 있게 허락한 유일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나마도 최소한이길 바란다. (p. 185) ] 나에게 책속의 '나' 와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나'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한 가정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던져주는 '사고실험'은 내게 충분히 실험적이었다.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인생이라는 조건과 한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은(만약 해답이라는 것이 있다면) 애초에 그 해답을 찾으려는 의도 자체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닐까. 문제의 해답은 역설적인 접근 방식으로 해답 찾기를 멈추었을 때 비로소 떠오른다. 인생의 해답은 어쩌면 해답이 아니라, 해답의 필요성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p. 166)

만약 이 책이 허구 인줄 모르고 '나' 의 상황이 '소설적 설정'인줄 모르고 읽은 독자라면 젊은 소설가의 시한부 삶을 애도하며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읽고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이 책 어디에도 이 책이 소설이라는 안내가 없는 것은 아마 의도적으로 이 책을 진짜 어떤 소설가의 이야기로 읽히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적인 접근 방식으로 이 책이 소설이라는 것을 드러냈어야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사고실험'이 더 제대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산다면, 당신은 오늘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 죽을 수 있지만 아마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언젠가는 반드시 죽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종종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든다. (중략) 우리가 하루하루를 온전하고 충실히 산다는 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p. 207)

이 책속의 '나'에게 닥친 것처럼 갑자기 내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금,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사는가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가? 오늘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까?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태어난 이상 내내 갖고 다니는 숙제같은 화두다. 그 화두가 시한부 삶으로 구체적으로 던져졌을때 글을 쓴다면 우리는 무엇을 쓰게 될까? 이 책은 그러한 '사고실험'을 아주 진지하고 철학적으로 고민해본 누군가의 내면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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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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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정의 눈으로 추적한 푸아로와 마플의 시대를 읽는 16가지 단서

'범죄의 여왕' 혹은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애거서 크리스티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다. 66권의 장편 소설과 14권의 단편집을 포함해 100여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흔히 '셰익스피어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져왔고 실제로 2018년에는 기네스 세계기록에서 역사상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소설가로 이름을 올렸다. (p. 7) 그런데 작가 애거서의 화려한 프로필보다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인간 애거서의 삶이었다. 참혹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굳건하게 견뎌내며 간호사와 약제사로 열심히 일앴던 여성, 정규학교 교육과정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독학으로 풍부한 지식을 쌓았고 평생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며 자신을 연마했던 성실한 사람,애거서 말이다. (p. 8)

저자에게 이 책은 코로나패데믹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영국사를 전공했고 대학에서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코로나로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다시 읽게된 애거서 크리스트의 소설에서 어릴 때 읽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생긴 의문들을 풀다보니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애거서의 생애를 염두에 두고 그녀가 쓴 작품을 읽다 보니 개인의 경험과 창작의 결과물 사이의 접점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원 사료와 2차 사료를 병렬해 살펴보는 것 같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p. 8)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새로 읽기' 정도가 될 것이다. 어른이 되어 그녀의 추리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 영국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읽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트 전집과 자서전을 읽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을 16개의 주제로 담아보았다. (중략)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이 책의 의미를 찾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작은 노력이라는 점일 것이다. 애거서의 소설은 100년 동안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지만, 학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신기하리만치 애거서 작품들에 냉담했다. (p. 10)

저자는 어렸을 때 애거서 전집을 읽었다는데 이상하리만치 나는 애거서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없다. 홈즈 시리즈는 다 읽었었고 루팡 시리즈도 몇 권 본 것 같은데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이름은 알았어도 그녀의 작품을 그 많다는 작품을 나는 왜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일까 이상할 정도다;;; 작품을 읽은 것도 없는데 이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기우였다. 작품 내용을 전혀 모를지라도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상관 없었다. 오히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새삼스레 불러일으켰다.

최근에 두툼한 역사책을 읽고 나서 그런지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영국 근현대사로 읽히는 책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여성 추리 소설가의 삶에 그가 그려낸 작품 속에 세계1,2차 대전을 전후한 영국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애거서는 18세 때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작품은 단편 <아름다움의 집>이었고, 이후 장편에 도전했다. 이집트 카이로에 머물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 소설 <사막에 내리는 눈> 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작품을 모노실라바 라는 다소 생뚱맞은 필명으로 여러 출판사에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상심한 딸이 안쓰러웠던 어머니는 마침 이웃에 살던 유명한 소설가 이든 필포츠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둠의 소리>, <빨강 머리 레드 메인즈> 등 다트무어를 무대로 삼은 기괴하고 으스스한 소설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p. 20)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애거서가 정규학교교육과정을 받지 못하고 간호사등 이런저런 직업을 가지며 자수성가한 인물처럼 소개했지만 아니었다. 본문에서 저자가 알려주는 애거서의 삶은 나름 풍요로운 영국 중산층 가정이었다. 학교교육을 못받았다기 보다는 다닐만한 적절한 학교가 없었고 학교교육이 아니었어도 이런저런 충분한 예술사교육을 받았으며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바로 이웃에 적절한 조언을 해줄 만한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애거서는 바로 다른 장으로 전환했고 당시 유행하던 추리소설이 그것이었다.

애거서는 원래 추리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 영국에서 추리소설은 '읽을 거리'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상태였다. 18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약800종의 주간지가 발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무려 240종에 달하는 잡지들이 다양한 형태의 '추리물'을 싣고 있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되던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p. 21)

애거서 크리스티가 홈즈 시즈와 코난 도일과 뤼팽 시리즈의 모리스 르블랑 과 동시대 사람이었다니, 그때 추리소설이 그렇게 붐이었다는 것도 그 시리즈를 여전히 우리가 읽고 있다는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고, 뚱뚱하고, 달걀 모양의 머리에 거대한 콧수염을 기른 우스꽝스러운 모습 (중략) 어느 순간부터 푸아로는 스스로 나서서 셜록 홈스를 언급하고, 심지어 자신이 셜론 홈스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p. 25) 마플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결혼을 원하거나 심지어 로맨스를 꿈꾸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여성적 직관과 감정'을 내세워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고 상황을 꿰뚫어 본다. (p. 29)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셜록 홈스 라면 애거서의 추리 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푸아로 와 마플 인가 보다.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인 사립탐정이고 마플은 이른바 노처녀 이다. 이 두 캐릭터는 함께 나오는 캐릭터 라기 보다는 애거서 가 쓴 작품 들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 탐정 두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코난 도일은 홈스 한명을 창조했다면 애거서는 두명 이었달까. 여하튼, 다른 무엇보다 푸아로의 외모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영국신사적인 홈스와 너무너무 달랐다고 한다. 애거서 가 내세운 탐정 캐릭터는 기존 추리 소설들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무척 달랐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전간기를 '추리 소설의 황금기'로 보는데, 이 황금기를 이끌었떤 대표주자로 세 명의 여성 작가, 즉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 도러시 세이어스 를 꼽는다. 앨링엄은 캠피언이라는 탐정을 내세웠고, 세이어스는 피터 웜지 경 시리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애거서는 이미 푸아로와 마플 이라는 두 명의 대표선수를 데리고 있었다. 이처럼 여성 작가들이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곧 '셜록 홈스와 결별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심신이 망가진 남성들에게서 셜록 홈스같은 완벽한 영웅상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p. 30) 이 시대의 추리물은 전쟁 후 피폐해진 일상에서 벗어나는 듯한 환상을 주었다. (중략) 악인을 찾아 처벌하는 결말은 혼탁한 사회에서 종국적으로 도덕성이 회복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애거서 작품은 영국의 사법체계를 옹호한다. (p. 31)

애거서 크리스티는 세계1차대전, 세계2차대전을 모두 겪은 세대다. 그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야 했던 시절 속 추리소설은 그 이전 시대의 추리소설과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거서의 작품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사립탐정이 사건을 해결하지만 늘 경찰이 범인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체제안정적인 결과로 독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고 한다. 심리스릴러적 추리소설을 읽으며 깔끔한 추론을 통한 카타르시스 를 주면서 권선징악적 엔딩이라... 그런데 B급 소설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은 작가가 여성이었기 때문인 것일까...

영국인들에게는 조금 다른 형태의 집에 대한 집착이 또 있다. 자기들이 발 딛는 곳 어디에나 집부터 짓고 보는 독특한 습성이 그것이다. (중략) 이런 특성 때문에 영국은 대항해 시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 국가들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p. 41)

전쟁이 끝나자 군대뿐만 아니라 군수공장에 투입되었던 여성들은 모조리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p. 71) 그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여성 참정권이다. (p. 72)

애거서 처럼 단호하게 뛰어난 외모와 성적 매력을 전혀 별개의 카테고리로 취급하는 작가는 아주 드물다. (p. 79) 그렇다면 남성들은 어떠한가. 애거서 작품 속의 남성들은 단순히 여성의 외모에 현혹되어 사랑에 빠져버리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에서 출발한다. (p. 80)

퍼블릭 스쿨은 엄격한 위계와 의식화된 코드, 계율과 질서의 총본산이다. 그것의 핵심에는 지독하게도 배타적인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중략) 사립학교 출신들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합쳐 부르는 말)를 거쳐 영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핵심부로 진출했다. (p. 115)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 정치, 군 수뇌부, 법률, 언론, 금융 등은 사립학교 졸업생들이 지배하는 분야로 굳건하게 남아있다. (중략) 이튼은 아직도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p. 117)

애거서의 삶과 작품 속 캐릭터들로 보는 당시의 영국사회 읽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소설 줄거리를 몰라도 저자가 알려주는 캐릭터적 특성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될 만한 주제풀이였다. 그렇게 읽은 영국사회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추리소설 작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뒤에도 애거서는 '나는 여전히 작가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에 휩싸여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캐릭터들을 사랑하지도,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답을 한 적이 없다. (p. 130)

애거서는 부유했고 박학다식했고 활동범위도 넓었고 지적욕구도 높았다. 해외여행도 자주 한만큼 다양한 경험이 있었고 그렇게 활발히 움직이면서도 엄청난 다작을 써낸 작가였다. 그런데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후대의 문학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홈스시리즈만큼 대우해주지 않았다. 왜였을까...

영국은 아직도 U and Non-U (상류층과 비상류층)을 구별하는 '분명한 분별 기준'이 있는 나라다. 냅킨은 상류층의 용어이고, 중하류층은 냅킨을 서비엣이라고 부른다. 중하류층은 후식을 디저트나 스위트라고 부르지만, 상류층은 푸딩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 중상류층이 2~3인용 안락의자를 소파라고 부르는 데 비해 그 아래 계층은 세티 혹은 카우치라고 부른다. (p. 199)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쳤고, 이성을 앞세운 근대성이 완성되었다고 여겨진 시대, 도대체 왜 그렇게 미신적인 내용이 많단 말인가. (p. 203)

영국에 계층간 사다리는 없다. 막강한 선진국이고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대국이지만 영국은 여전히 귀족문화가 지배적인 나라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이고 과학과 계몽주의를 일으킨 나라이지만 마녀, 마술, 심령술, 관상 등 다양한 미신이 여전히 생활 깊숙이 자연스레 존재하고 있는 나라다. 애거서 시대의 영국은 현재의 영국을 다시보게 한다.

애거서의 소설은 주로 20세기에 집필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19세기 말 제국의 영광과 빅토리아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20세기 후반 그 소설에 열광했던 시간은 영제국의 헤게모니를 자연스럽게 내재화하는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애거서의 콘텐츠는 끊임없아 재생산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제국주의를 문화적 현상으로 보자면 '식민'과 '탈식민'의 시간적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의 정치적 종속이 아니라 '식민 세력이 타자의 몸과 공간에 스스로를 새겨 넣는 순간'인 것이다. 애거서가 소설 속에 녹여 넣은 '영원한 영국'을 이제는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p. 244)

다분히 영국제국주의적 시각이 들어간 애거서의 작품들을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홈스 캐릭터처럼 국가의 대표 문학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은근히 드라마로 영화로 새로운 번역으로 유통시키는 것엔 여전한 제국주의적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일까? 문학은 가볍게 소비하기 쉬운 분야인만큼 무의식중에 내재화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문학과 문화를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감탄하며 읽었던 책이었다. 이런저런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국은 참 여전히 늘 흥미로운 나라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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