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 근대 국가를 규정할 새로운 군주의 탄생 클래식 아고라 6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종법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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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를 규정할 새로운 군주의 탄생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낳은 위대한 정치사상

그 유명한 고전 <군주론>을 이제야 읽었다. 생각보다 본문이 짧았고 예상보다 해설이 길어서 좋았다. arte에서 나온 고전시리즈 중 이번이 세번째 책인데 읽고난후 모두 흡족했다. 이 고전시리즈가 내내 잘 이어지길 응원한다. 그리고 이 책은 해설부터 읽고 본문읽기를 추천하고 싶다. 고전일수록 특히 철학이나 정치등 사상이 내포된 고전일수록 그 글이 쓰여진 시대와 그 시대 속 저자의 생각의 흐름을 그 당위성을 이해하고 읽는 것이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왜 이런 글을 썼는가? 이 글은 어떻게 고전이 되었는가?

그가 이야기했던 정치학은 이탈리아라는 공간에서 당대 이탈리아반도가 처한 정치 사회적 조건과 상황을 타개하고, 르네상스 이후 정체되었던 이탈리아에서 근대 국가의 발전과 새로운 권력을 추구하면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런그가 정치학이라는 학문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구체적인 수준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 연구 대상을 철학적 당위의 영역에서 학문적 존재의 영역으로 바꾸었던 획기적인 동인은 바로 '국가' 개념이었다. 특히 마키아벨리에 의해 제기된 근대 국가 개념이야말로 근대 정치학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p. 208)

마키아벨리의 수직적 삶의 궤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피렌체라는 도시의 역사적 배경과 마키아벨리가 관통했던 15세기와 16세기의 시대적 상황이다. 특히 마키아벨리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15세기와 16세기 이전의 피렌체와 그 이후의 피렌체를 이해해야 한다. 성장의 거점이었던 피렌체 뿐만 아니라 이 시기 마키아벨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군주론 집필의 목적 대상이 되었던 두 개의 가문, 메디치와 보르자 가문에 대한 이해 역시 필수적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메디치가에 바쳤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중용해달라는 근거로 증명하기 위한 책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전체적으로도 그랬지만 특히나 피렌체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메디치가는 가장 큰 세력이었고 마키아벨리가 봤을때 이 난세를 정리할 수 있는 세력은 메디치가가 유일했다. 마키아벨리는 그 메디치가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대를 걸었다. 세습이 아니라 의지가 있는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상은 (마키아벨리 본인도 모르고 그 당시 시대적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굉장히 선구적이고 근대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가 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근대적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제시한 방법은 절대왕정에 가까웠다. 그것도 일인독재 왕정. (하긴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누구라도 깔끔하게 이 상황을 정리하고 통일해 주었으면 하는 안정화욕구가 충만해질 수 있지... 그것이 일인독재일지라도...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피렌체는 중세를 넘어 라틴문화를 종결하고 세속적인 이탈리아적 인문학과 인문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진원지 역할을 수행했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의 이탈리아 역사에서 위대한 작가들이 탄생해 활동하였고, 이들이 사용하던 방언 토스카나어는 현대 이탈리아 표준어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p. 216)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부르즈아 계급들과 시민들은 피렌체를 공화정이라는 체제로 안착시킬 수 있었다. (p. 217) 인문이 중심이 된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면서 마키아벨리에게 진정한 '인민을 위한 정치'란 어떤 것인가 일깨워 준 근대 정치의 학습장이자 현장의 공간을 제공해준 곳이 바로 피렌체였다. 이런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에게 가장 먼저 현실정치의 실체로 다가온 이들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었다. (p. 219)

어차피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에게 좀더 공식적으로 국가를 세워서 피렌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길에 자신이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면서. 자신이 이만큼이나 분석을 다 해놓았으니 쓸모가 충분할 것이라면서.

<군주론>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도 당위성이 충분하고 방법적으로도 가능할 거라면서. 하지만 결론적으로 메디치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솔직히 메디치가로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 피렌체 하나만으로도 머리깨질 것 같은데 국가를 세우고 이탈리아를 통일하라고? 이 무슨 헛소리야! 하고.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이 무슨 꼰대같은 잔소리인가 싶어지지 않았을까?

위인전의 교훈이란 그런 것이니까.

혹은 역사는 나도 알만큼 알거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잘난척 하는 개입을 무시했던 게 아닐까...

메디치가 입장에서 봤을 땐 마키아벨리가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여겨지지 않았을까,

마키아벨리는 심사숙고하여 메디치가를 pick했으나 메디치가에겐 의미없는 pick였달까.)

메디치 가문 중에서 특히 마키아벨리와 연관 지어 주목할 만한 이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다. 교황 레오10세의 동생으로 1513년 이후 피렌체를 통치하던 인물로 마키아벨리의 저작 <군주론>을 헌정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1516년 줄리아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마키아벨리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조카인 로렌초2세 우르비노 공작에게 헌정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적 야망과 공직에 대한 열망이 계기가 되어 <군주론>을 집필하기는 했지만, 이탈리아반도의 통일을 이룩할 희망적인 군주로 로렌초를 상정했다. (p. 222)

1494년 프랑스 샤를8세의 피렌체 침공과 피에로의 항복, 사보나롤라의 봉기 및 메디치 가문의 추방 등의 일련의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는 '위대한 로렌초'만으로는 진정한 피렌체의 독립과 공화국을 유지하는데 한계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결국 그는 <군주론> 헌정 대상과는 다른 유형의 군주와 권력자의 모습을 끄집어냈고, 그가 바로 체사레 보르자였다. (p. 228~229)

<군주론>이 마키아벨리의 포부와는 다르게 메디치가로서는 그닥 구미가 당기는 책도 아니었는데 그 내용이 '체사레 보르자'를 보고 배우라 였다면 더더욱 메디치가로서는 <군주론>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메디치가라는 가문의 이름에서 확인되듯 오랜 기간 약이나 향신료 관련 업종에 종사한 가문이었던 만큼 독약 처방과 판매에 뛰어나다고 알려진 메디치가가 잔혹한 구설수들이 난무하여 가족 범죄집단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체사레 보르자까지 닮는다면 세간의 평가가 과연 어땠을까?! (어휴 절레절레 하지 않았을까;;;)

보르자 가문의 반인륜적 범죄 혐의를 모를 리 없었던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이상적인 군주로 칭송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마키아벨리가 보르자 가문, 그중에서도 특히 체사레 보르자를 주목한 것은 체사레가 가진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치적 지도력, 정치적 통찰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근친상간을 비롯해 간통과 살인, 수많은 혼외자 등의 반도덕적이고 지탄받을 행위를 저지른 가문의 인물이었음에도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가족들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치권력을 형성하면서 투쟁하는 방식이 당대 이탈리아 상황에 필요한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p. 231)

마키아벨리는 너무도 간절하게 강력한 절대군주를 필요로 했던것 같다. 자신이 책사로서 옆에서 돕는다면 체사레 보르자의 단점은 없애고 강점만 키우는 절대군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더구나 정치적 야심이나 고위 관직에 대한 열망이 평생토록 누구보다 높았던 그로서는 마지막 동앗줄 같은 것으로 <군주론>을 헌정했을 것이었다. 다만 상대방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을 뿐. 뭐..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좋은 자리도 아니고 험난한 자리라면 더더욱 굳이?! 그럼에도 이 책이 이토록 중요한 고전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1513년 발표한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생전과 사후에도 여전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치권력과 국가론 관련 야누스적인 이중성을 갖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는 마키아벨리뿐만 아니라 <군주론>에 대한 평가 역시 서구 지식사회를 갈라놓았다. (...) 마키아벨리의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와 정치권력을 향한 노력과 시도는 <군주론>이라는 저서의 중요성이나 과정에 그다지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p. 234) 역설적으로 그의 죽음 이후 마키아벨리의 명성과 저술의 중요성이 높게 평가되면서 18세기에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묘지를 이장했다. 이러한 이장 결정에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공헌에 대한 피렌체의 인정이 뒷받침되었고, 그의 묘비명에도 적혀 있듯이 위대한 저술가로서 그리고 정치사상가로서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p. 241) 마키아벨리에 관한 연구는 현재까지도 극단적 행동주의자로부터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 및 공화주의자로서 다양한 정치사상과 이념 등과 결합해 현대 정치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p. 245)

현실정치가 난세일수록 마키아벨리는 거듭되어 불려나오게 되는 걸까? 누구보다 먼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의미를 너머 심층적 혹은 은유적 의미를 유추하며 여전히 학자들에게 연구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사는게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게 없어서 그런 것일까... 과거 누군가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권위를 얹기 위해서이려나...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주요 사상은 세 가지 정도로 집약할 수 있다. 첫번째 출발점은 '현대 군주'로 상징되는 국가론이다. (p. 248) 두번째 정치사상의 핵심은 통치론이다. 마키아벨리 통치론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현재까지도 큰 이견이나 견해차가 크지 않은 영역이다. (...) 당대 가장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은 영역이기도 하다. (...) 세번째 정치사상은 현대에 와서 더욱 주목하고 있는 공화주의 사상이다. (p. 249)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혼합정의 성격을 갖지만, 좀더 인민의 편에 무게 중심을 싣는다. 이를 위해 마키아벨리는 이상주의적 공화주의보다는 현실정치와 권력의 속성에 적합한 현실주의적 공화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p. 250)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자꾸 회자되는 이유는 두번째 통치론 때문일 텐데 현재 학계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것은 세번째 공화주의 사상이라고 하니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른건가보다. 본문을 읽으며 확인되겠지만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군주를 원하면서도 군주의 덕목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인민의 재산을 갈취하지 말고 반도덕적 패륜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말하면서도 지배자에게 피지배인의 권리를 주지시키는 것은 학자들이 말하는 마키아벨리의 야누스적 사상인가 보다. 여하튼 마키아벨리를 강력한 군주통치로만 회자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렇게 불러내는 이에게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정치학을 현실에 근거한 존재의 학문으로 전환시킨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사상적 출발점을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에게서 구하기보다는 고대 라틴계 사상가들에게서 찾았다. (p. 254)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황제통치를 더 유념했다는 소리다. 서구 정치계에서는 지금도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후예입네 라는 것에 명예성을 두는 경우가 있다. 현재가 과거에 비해 민주주의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 서구의 많은 국가들은 민주주의 국가라기 보다는 공화주의 국가다. 어쩌면 그래서 마키아벨리를 끊임없이 소환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로마제국의 뒤를 잇고 싶고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혼합정 성격의) 공화주의를 실현하고 싶어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는 후대의 사가들이 명명한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흔히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대표적 정치적 신념으로 대표되는 문구는 많은 학자들에게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행위 정당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p. 260)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작의 곳곳에는 앞서 이야기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명제가 일반적인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즉, 마키아벨리가 무차별적으로 정치의 비도덕성, 폭력지상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모든 수단이 옹호되는 유일한 목적은 국가의 창설과 보존, 그리고 건강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팽창이다. (p. 261) 국가는 필요할 때에만 비도덕적일 수 있는 것이지, 모든 경우에 항상 비도덕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마키아벨리가 윤리나 도덕에 극단적 냉소를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질서가 잡힌 국가와 사회에서의 윤리와 도덕은 폭력이나 힘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p. 262)

마키아벨리는 너무나 강력하게 너무도 간절하게 사회질서의 안녕을 바랐던 것 같다. 악덕과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들에게 치를 떨면서도 도덕이나 윤리의 가치들을 보존하고 준수할 것을 잊지 않고 제시한 것은 국가라는 커다랗고 안정적인 틀 안에서 편안한 개인으로 살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을지도. 다만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고위관작에 있어야 한다는 개인적 열망이 가장 컸던 것이 오히려 그의 사상적 발목을 잡았던 게 아닐까...

결론적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근대 국가를 열망하고, 새로운 질서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조건과 행동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혁명가로서 '신군주'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출발점과 사상적인 유사성은 근대 국가의 시작 과정에서 군주라는 개념을 통해 정체의 문제, 국민개병제에 기반한 군대문제, 이를 위해 계급 구분을 통한 국민국아의 정당성 부여 문제, 귀족과 민중의 이분법적 계급대립 구조, 국가 내부의 사회적 제도로서 종교와 법률의 상정 문제 등은 마키아벨레가 추구하고자 했던 근대 국가 개념이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갖게 했다. (p. 273)

자 이제 해설은 끝났다. 본문을 읽을 준비가 되었다. 그에 앞서 외국어로 된 고전인만큼 번역이나 판본이 중요한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현대어로 기술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원전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탈리아어조차 버거웠던 저자에게는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집필을 끝냈을 당시에는 르네상스가 끝나가던 시기였기에 라틴어로 저술했을 것이라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 저명한 사상가들이나 저술가들이 라틴어로 글을 쓰고, 저서들을 집필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p. 10) 그럼에도 <군주론>이 보다 널리 읽히게 된 계기는 라틴어 판본보다는 코스카나어로 쓰인 판본이라고 추정된다. (...) 이 책에서 사용된 원본은 토스카나어로 작성된 판본이며, 내용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위해서 국가편집본을 참조했다. (p. 11)

토스카나어 원전 번역의 어려움과 누구나 느끼는 한국어 용어 선택의 문제는 저자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번역 과정에서 저자는 몇 가지 원칙과 기준에 의해 번역을 진행했다.

첫째, 이탈리아어 판본이 아닌 토스카나어 판본으로 번역을 진행한다는 원칙이었다.

둘째, 기존 번역서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이탈리아에서의 연구 경향과 해석을 중심으로 해설 부분을 덧붙이고자 했다. (...) 기존 번역서들이 주로 취하고 있는 영미 계열의 마키아벨리 번역과 해석에 연연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셋째, 토스카나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문맥과 마키아벨리의 생각이 한국적인 사고에 더욱 적합할 수 있는 윤문 번역을 진행했다.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기준은 용어 선택의 문제였다. 이 문제는 여전히 기존 번역서에서 지속해서 논란과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특히 자질이나 역량 등으로 번역되는 비르투virtu나 행운, 운명, 여신 등으로 번역되는 포르투나fortuna등의 용어는 한국어로 번역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해나 오류 가능성으로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p. 12, 13 에서 일부 발췌) -서문 中-

<군주론>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비르투와 포르투나 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국어가 다중적 의미를 가진만큼 이 단어들 또한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저자가 비르투와 포르투나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에 나도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전을 원어로 읽으면 문맥상 더 다양한 이해의 폭이 필요했을 이 단어가 한국어 번역본에서도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았던 것 같다.

<군주론> 본문을 읽기까지 나름 긴 준비가 필요했고 어느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래서인지 <군주론> 본문 읽기는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생각보다 큰 인상적인 감흥 없이 주욱 읽어가졌다.

전하의 충복이 되겠다는 의미로 무엇인가 바치고 싶지만, 제가 가진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집필한 고귀한 저서를 전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이 책은 최근 사건들에 대한 오랜 경험과 고대 사건들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제가 알게 된 위대한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관한 것입니다. 오랜 천착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을 집대성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얻은 지식을 집약하여 저술한 미천한 책을 전하께 보내드립니다. (p. 19) 이 책을 신중하고 꼼꼼히 읽으면서 그 의미를 새기신다면, 저의 가장 간절한 소망 다시 말해 전하께서 포르투나와 전하의 탁월한 자질을 통해 성취하게 될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저의 고귀한 뜻을 헤아리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그 고귀한 지위에서 잠시나마 아래에 있는 저에게 시선을 향해주신다면, 제가 얼마나 지속적이고 과한 불운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와 신세에 처해 있는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부디 살펴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p. 21)

그러니까 이 책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등용을 위해 마련한 제안서다. 그런데 이 책은 위인전에 가까운 역사서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서를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많았을까 싶은데;;; 게다가

이 사람을 보십시오 저 사람을 보십시오 그 중에서도 체사레 보르자를 보십시오. 배우십시오. 제가 하는 말이 맞습니다. 제가 다 오래 연구해온 결과니까요. 그러니 제 말대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설하고 절대군주가 되어 보십시오. 제가 만들어 드릴 게요. 저를 등용하시면 다 됩니다.

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당대 최고권력가 집안이었던 메디치가에게 과연 혹하는 조언으로 들렸을까, 관직 청탁용 간섭으로 들렸을까... 결과는 알다시피 메디치가는 마키아벨리도 그의 책도 모르쇠 했다.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하게 대하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는 마음을 갖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보복아거나 복수할 엄두조차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이 복수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매우 큰 피해를 주어야 합니다. (p. 32)

모든 악행과 가해 행위는 한꺼번에 실행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그 악행과 가혹 행위들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며, 그럴수록 그러한 행위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가 작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비로운 은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하며, 그래야만 그 은혜의 크기와 감사함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p. 81)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즘의 토대가 될 문장 중 하나이려나... 그런데 은근 이게 지금도 맞는 말 같네;;; 그래서 고전이 된 건가...

저는 여기에서 아주 위대하고 놀랄만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사례를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이 거의 항상 선인先人들의 행적을 따르며, 모방을 통해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p. 52)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군주가 되는 두 가지 방법, 즉 자기 비르투에 의해 군주가 된 경우와 포르투나에 의해 군주가 된 경우를이탈리아 역사 속에서 두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하나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와 체사레 보르자 입니다. (p. 60) 저는 보르자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보르자는, 상술한 바와 같이, 포르투나와 타인의 무력에 의해서 권력을 차지한 모든 사람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는 듯합니다. (p. 70)

지적인 훈련을 위해 군주는 반드시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데, 특히 역사 속 위인들의 행적을 잘 살펴 읽어야 합니다. (p. 118)

이 책은 거의 사례집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요구하는 사상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기에 그는 역사를 훑어가며 아주 다양한 사례들로 증명과 반증을 수차례 한다.

인간은 사악하며 당신과의 약속이나 신의를 잘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 역시 그러한 사악한 이들과 맺은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군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의 정당성을 항상 내세울 수 있습니다. (p. 138)

지금 이탈리아가 신에게 외세의 잔혹하고 오만한 지배로부터 이탈리아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p. 197) 지금 이탈리아가 이러한 희망에 기댈 대상은 오직 영광스러운 전하의 가문 뿐입니다. (p. 198)

이제 여기 전하께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의 순간에 제가 전하에게 여러 모범 사례로 제시한 여러 위인의 방식을 따르기만 한다면, 과업을 이루는데 커다란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p. 199)

모든 것을 진압하는 절대군주가 되십시오 라면서 내말데로 하면 됩니다 라면 절대군주가 과연 순순히 따를까?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자신의 메시지와 자신의 요구가 모순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여하튼,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도 자주 인용한다던 문구로 이만 마무리하련다.

{누군가 불가피하게 수행하는 전쟁은 정의로운 것이며, 무력에 의지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도나 희망이 없을 때는 그러한 무력 또한 신성한 것입니다}

주석: 리비우스의 '로마사' 제9장에 나오는 구절로 마키아벨리가 다른 저서에서도 자주 인용하던 구절로도 유명하다. (p. 198)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지만 의외로 허망함이 남았던 고전 <군주론>이었다.

ps. <군주론>자체를 떠나 arte 고전 시리즈는 역시 이번에도 훌륭했다. 덕분에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고전 시리즈 잘 부탁드려요.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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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보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것은 '중독'이 될수도 '몰입'이 될수도 있다. 문제는 집중력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이다.

이 책은 쉽게 말해지는 중독에 대한 이해와 어려워보이는 몰입이라는 것에 대해 집중력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기를 시도한다.

경쟁이 치열한 세상이다. 적어도 내가 쓰는 글만큼은 '남들보다 1퍼센트라도 더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처세법을 강요하는 또 하나의 자기계발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들인 노력의 본전도 찾지 못한 허망한 사람들이 중독이라는 헛아을 원망만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을 찾으며, 최소의 본전을 회복할 수 있는 소소한 위로 혹은 잔소리를 조금 써보고자 했다. 이 글을 통해 스스로 중독에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 위안을 얻으며 중독을 극복하고 몰입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일 것이다. (p. 7, 8)-프롤로그 中-

"중독은 여행의 끝을 의미하지만 몰입은 여정의 시작이다. (p. 9)

저자는 뇌과학 연구와 심리 이론, 임상을 토대로 주체적 삶을 만드는 '능동적 집중력'에 대해 되짚어 보려고 한다. 과몰입 주치의로 일하면서 다양한 연구와 임상사례를 경험한 저자가 제시하는 솔루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떤 정의들이 나올때마다 자세히 읽고 기억해둘 것을 권하고 싶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현상은 점점 더 심해졌고, 소위 '도둑맞은 집중력'이 사회문제로까지 지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독과 몰입은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를까? 중독과 몰입은 공통적으로 어떤 한 가지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욕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중독에는 특정 물질로 사용하고 싶은 강한 욕구 혹은 의지가 포함되며 사용자가 이 물질에 대한 통제를 어려워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특정 물질을 사용함으로써 유해한 결과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자각함에도 불구하고 끊어내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강한 충동에 휩싸여 지속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몰입과는 구분된다. 반면 몰입의 사전적인 의미는 주위의 잡념, 그리고 방해물을 차단하고 원하는 곳에 자신의 모든 정신을 집중하는 일이다. (p. 18~19)

저자가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은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본인이 핸드폰과 인터넷에 중독된것이 아닌가 그래서 집중력을 도둑맞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책으로 개인적 문제와 해결책 보다는 사회시스템적 개선을 촉구하는 결말로 마무리하고 있는 책이다. <집중력의 배신>의 저자는 아마도 '도둑 맞은 집중력'에서 '집중력'이라는 그리고 '중독'이라는 단어를 잘못 쓰고 있는 것을(혹은 너무 가볍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도둑맞은 집중력'을 쓴 저자는 전문가가 아닌 저널리스트이고 <집중력의 배신>의 저자는 의사이고 연구자이니 그 개념을 아는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하튼, 우리가 평소에 쉽게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인 '중독'이나 '집중력'에 대해 <집중력의 배신>을 통해 보다 정확한 의미를 알아두는 것은 의미가 있을 듯 하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되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중독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충동성에 원인을 두고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중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중독을 진단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적 증상이 나타나야 한다.

첫번째는 갈망이다. (...) 두번째는 내성이다. (...) 마지막 세번째는 금단증상 이다. (p. 21, 22, 23)

중독자가 중독적으로 보이는 모습도 굉장히 집중하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집중력과 중독을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몰입의 한 가지 특성인 집중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고는 한다. 예를 들어 게임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아이에게는 게임에 중독됐다고 말하고 공부를 책읽기를 한참 하고 있는 아이에게는 집중력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게 맞는 표현일까? 저자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는 것은 집중력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싫어하는 것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 복잡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이 의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집중력에 더 가깝다. 이것을 조금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복잡하고 많은 양의 데이터가 머릿속에 들어왔을 때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집중력이라고 이야기한다. 요즘 말로는 쉽게 멀티태스킹이라고도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p. 32)

게임좋아하는 아이가 게임을 오래 하고 책읽기 좋아하는 아이가 책읽기를 오래 하는 것은 집중력과는 무관하다는 소리다. 집중력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는데, 멀티태스킹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것을 멀티태스킹이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한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좋은 말로 멀티태스킹에 능하다로 말하는 줄 알았는데, 집중력이 멀티태스킹이라니... 중독, 집중력, 멀티태스킹 등 이 책을 읽는동안 자주 나오는 몇가지 개념은 평소 알던 것과 사뭇 달랐다.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들이 의학적으론 잘못 사용되고 있는 표현들이었나보다.

집중력에는 있지만, 충동성에는 없는 것은 무엇일까? 집중력이 좋은 사람과 충동성에 취약한 사람은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 걸까? 바로 결과, 미래, 목표, 성공 유무다. (p. 36)

중독이 아니라 몰입으로 가기 위해서는 결과를 예측하고, 미래를 고려해 목표를 세우며, 중간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성공에 이르는 경험을 반복해야 한다. 또한 좋은 재미를 찾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능동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계획과 실천이 따라와야 한다. 마지막으로 반복과 변형은 안정과 불안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삶을 안정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진다면, 잘못된 중독이 아니라 바른 몰입으로 천천히 향하면서 끝끝내 원하는 삶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p. 67)

이 책에서 비중 있는 중독 분야는 '게임'이다. 그리고 게임중독은 잘못된 말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뇌과학적으로.

게임은 마약같은 중독물질이 아니고 뇌과학적으로 다른 설명이 되어지기 때문에 게임중독이란 말도 병도 원칙적으로 맞지 않다. 그렇게 이르는 상황이나 기저질환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일뿐.

흔히 가장 활발하게 공부할 시기인 청소년기, 그 직후인 청년기를 지나면 사람의 기억력이 나빠지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게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뇌과학의 관점에서 사실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뇌는 간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변한다. 다시말해 20세 무렵이 되었을 때 불필요한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효율성을 최적화한 상태가 된다. (p. 109) 따라서 나이가 들며 기억력이 나빠진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뇌는 오히려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 되었을 뿐 퇴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 110)

저자는 이렇게 효율적인 뇌가 다양한 정보에 대해 멀티태스킹적으로 골라내어 집중적인 결과물을 낸다고 설명하는데 나는 저자가 '멀티태스킹'이라는 단어를 사용할때마다 헤깔렸다. 저자는 뇌가 다양한 정보 중에서 적합한 것을 알아서 골라내는 과정을 멀티태스킹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우리는 산만하게 이거저거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걸 멀티태스킹이라고 하지 않나;;; 뇌가 집중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멀티태스킹으로 우리는 평소에 아무런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산만하게 움직인다. 무엇이 적절한 표현인지 여전히 헤깔린다;;;

중독이 몰입이 되기 위해서는 충동성이 가지고 있는 성장 엔진에 집중력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과 조절 능력이 더해져야 한다. (...) 자신의 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어떻게 하면 충동성을 몰입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충분히 집중력이 높은 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p. 119)

멀티태스킹 이라는 단어를 어찌 사용해야 적절한건지도 모르겠는데, 나의 뇌에 대해 제대로 알기란 또 얼마나 가능한 것일지...모르겠다;;;

환자들 뿐만이 아니다. 일반인 가운데에도 중독이나 몰입, 집중력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얕은 지식으로 알은체하는 사례가 정말 많다. (p. 123)

저자에 의하면 이 대표적인 사례가 '인터넷 혹은 게임 중독'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된바 있지만, 게임은 중독물질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존 질환' 인데, 이 공존질환의 대표적인 우울증, ADHD, 애착장애, 불안장애 등에 대해 저자는 기존에 알려진 오해들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자, 여하튼 이제 중요한 것은 '몰입'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몰입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 몰입 분야 중에서도 저자는 게임과 공부에 있어서 '몰입'의 적용사례들을 언급하며, 게임을 공부처럼 혹은 공부를 게임처럼 이라는 계획은 실패할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 어쩐다...???

문장이 가지는 힘은 인문학이 수백년, 수천년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반영해 쌓아 올린 강력한 상상력의 집약체인 것이다. 3000년의 인문학이 어쩌면 30초짜리 숏츠의 재미를 대신할 수 있는 한 방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p. 225)

상상력과 능동성을 키우기 위해 인류는 긴 세월 동안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음악, 미술, 체육, 철학, 역사 등 다양한 예체능 및 인문학적 방법으로 표현했다. (p. 227)

기능성 게임의 효과가 떨어지다 보니 게임이라는 특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목적을 위해 개발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의학적 혹은 질병을 예방, 관리, 치료하기 위해 환자에게 근거 기반의 치료제 개입을 제공하는 소프트 웨어 의료 기기의 개발이 더욱 각광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치료제다. (p. 230)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증명한 인문학의 힘, 그리고 예체능 활동의 경험 나아가 디지털 치료제까지 저자는 나름 방법들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지만 구체적으로 정확히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이고 무엇을 해결하고자 하는거였는지 다 읽고나서도 나는 명확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중독과 몰입은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 같을 수도 있다. 나의 충동 조절 능력, 능동성, 집중력과 같은 성향에 따라 손바닥의 앞면이 될 수도, 뒷면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p. 233) 중독이 아니라 몰입하는 삶을 지향한다면 어떤 물질에 유혹당하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p. 234)

중독이 아니라 몰입이 좋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집중력의 배신이라는 게 중독을 말한 거였다면 중독은 치료해야 하는 병이라는 것도 다들 아는 사실일테고. 게임중독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지만 결국 노오오오력 말고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고. 몰입혁명, 경험하고 싶은데 그저 몰입으로 나아가는게 중요하다고 하면 뭘 어쩌라는 건지;;; 여하튼,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것은 집중력이 아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뇌에 좋은 활동을 자꾸 연습하여 집중력을 키우고 그렇게 유익한 몰입의 경험을 늘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 하자. 가장 쉬운 방법은 결국 독서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ps.(책읽기에 집중이 안되서 느껴진 집중력의 배신 이유를 찾고자 이 책을 읽었다면 결국 답이 독서라는 것에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이 돌고돌아 결국 개인의 노오오오력으로 마무리되는 이상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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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들의 죽음 - 소크라테스에서 붓다까지 EBS CLASS ⓔ
고미숙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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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명랑하고 심오한 탐구"

삶이 심오할수록 죽음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EBS클래식 책이고, 제목에 의하면 관심가는 주제이고, 저자의 이름을 보니 필력은 보장되는 것 같고, 두루두루 땡기는 요소를 가진 책을 발견했으니, 그 다음은? 읽어야지! ㅎㅎ

인류 지성사의 모든 영역,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과 예술 등은 죽음을 이해하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문명을 이끌어 온 동력이기도 하다. 하긴 당연하지 않은가. 죽음을 모르면 삶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분리될 수 없는 법, 고로 생사는 하나다! 동서양의 고전이 수천 년간 전승해 온 진리다. 그 지혜와 방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가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8인의 현자들이 그 최고의 전령사가 될 것이다. (p. 7)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입에 올리면 안 될 것 같은 주제가 되었다. 너무 무겁고 너무 두려워진 단어가 됐달까.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 있으니 삶이 더 가치가 있어진다. 죽음은 늘 슬픔을 동반하지만 역사적으로 과거엔 지금처럼 죽음이란 주제가 터부시되진 않았던 것 같다. 회피할 수록 알수 없고 모를수록 더 무겁고 두려워진다. 사유와 성찰이 사라진 시대, 죽음에 대한 담론도 없어진지 오래, 하지만 잘 살기위해서라도 죽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말했다. 근대 권력은 '삶은 촘촘히 관리하고 죽음은 내팽개친다'라고. 자본의 관점에선 당연한 노릇이다. 죽은 자는 노동할 수 없으니까. 화폐 증식도, 소비 탕진도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눈앞에서 바로 치워 버린다. 아니, 그 전에 노인과 병자 역시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 그 결과 삶과 죽음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생겨났다. 근대 권력이 목전에서 죽음을 치워버렸다면,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죽음이라느 단어를 증발시키고 있다. 자살은 '극단적 선택'으로, 반려동물의 죽음은 '무지개다리'로, 가족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은밀한 '개인 정보'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을 외면하고, 그리고 은폐한다. 고로, 죽음은 없다! 죽음을 환기하는 모호하고 흐릿한 기호들만 떠다니고 있을 뿐!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모른다. (p. 16, 17)

그리고 여기엔 이미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다. 죽음은 참혹하고 끔찍하고 슬프고 비극적인 것이라는! 과연 그런가? (p. 18)

이것이 치명적인 이유는 죽음을 이렇게 해석해버리고 말면 삶의 지반 또한 지극히 협소해지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확신한다. 이 대지에 생의 의지가 약동하기 위해선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고. 죽음을 마주하는 그만큼 삶의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p. 19)

십여년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진 않았는데, 몇년전부터 고전과 인문학 서적들을 찾아읽다보니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튀어나와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저자의 책들을 찾아읽고 싶었던건 아니었는데 이번에 마침 오랜만에 저자의 책을 읽을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문장이 술술 읽혀서 좋았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도 저자에겐 무겁지 않게 다루는 재주가 있는듯 하다.

솔직히 인류의 문명사는 삶의 역사이면서 죽음의 역사다. (...) 모두가 겪는 코스라면 그것에 대한 지혜 또한 우리의 기억 정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 이 책에 등장하는 현자들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데이터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어둠 그 자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만나게 될 8인의 현자들은 죽음을 평화와 지복으로 맞이했다. 이들에게 죽음은 아득한 나락 혹은 깜깜한 어둠으로의 침몰이 아니라 '빛 혹은 평화'로의 비상이었다. 이들의 죽음에는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이 함께한다. (p. 23)

죽음이라는 주제를 심오하지만 명랑하게 전달시켜줄 수 있는 현자 8인으로 저자에게 선택된 이들은, 소크라테스와 장자, 간디와 아인슈타인, 연암과 다산, 사리뿟따와 붓다 다. 현자라고 해서 철학자 중심이려나 싶었는데 철학자부터 정치가, 과학자, 종교인까지 다양했고 8인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닮아 있다는 것일까.

소크라테스 윤회론의 핵심은 '영혼불멸설'이다.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프시케의 발견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로 꼽을 만하다' 미케네 문명의 영웅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고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잘 보여 주듯이, 그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다 특정한 신들의 활약이라 여겼다. (...) 그러니 인간은 내면을 돌보고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영혼의 발견돠 더불어 마음의 모든 활동과 변화를 신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p. 42)

여기서 반드시 환기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육체의 주인임을 강조해 마지않았지만, 현대인은 정반대로 육체가 영혼의 주인이다. 육체를 잘 다듬고 지키는 것이 영혼이 해야 할 주된 소명이다. '물구나무선 이원론'이라고나 할까. (...) 생에 대한 집착은 더한층 증폭되고 죽음에 대한 이해는 나날이 빈곤해진다. 소크라테스가 안다면 진짜 기겁할 일이다. (p. 44)

소크라테스가 안다면 기겁할 일이 또 있는데 그에 대한 잘못된 가짜뉴스다. ''다른 사람에게서 해악을 입었다고 해서 그것을 갚아 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오, 놀라운 도약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가짜뉴스'(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다)가 탄생하게 된 맥락도 이 지점일 듯하다. (p. 48)'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동안 지켜온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중에 나온 말이었다. 그는 아테네시민들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다. (p. 53)' 따라서 그가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했던 건, 아테네 시민들이 후회할줄 알면서도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건, 수많은 사유와 성찰끝에 스스로 터득한 바를 후대에 몸소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에게 죽음은 삶과 반대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 많은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슬퍼할 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슬픔을 겪고 그 애도의 힘을 길어 올려 죽음이라는 심연과 마주하는 담대함일 것이다. 그렇게 맞짱을 뜨다 보면 우리 또한 장자처럼 생사의 순환이라는 경이로운 이치를 깨우칠 수도 있지 않을까. (p. 66)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자는 생로병사의 흐름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듬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낮과 밤이 교차하듯, 겨울과 봄이 서로 갈마들 듯,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 역시 쉼 없이 교체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p. 70)' 장자가 살던 시대는 혼란과 혼탁이 난무했고 죽음또한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 모든 것에 연연해서는 살아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삶과 죽음 그 '사이'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한 결과 그는 '자연은 나에게 몸을 주어 태어나게 하고 삶을 주어 애쓰며 살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p. 101)'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운명에 대한 무한긍정이랄까.

그가 시도한 모든 정치적 결단과 실천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런던에서 [바가바드기타]를 만난 이후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끼고, 붓다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그리고 자이나교에서 비폭력을 배우고, 존 러스킨과 톨스토이에게서 무소유와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배웠다. 그는 배움에 관한 한 거의 '물 먹는 하마'에 가깝다. 모든 진리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즉시 실행에 옮긴다. 물론 달팽이의 속도로 한 걸음씩! (p. 121)

'간디의 죽음은 아이러니투성이다. (p. 108)' 비폭력적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얻어낸 사상가로만 알고 있던 간디의 삶은 생각보다 굉장히 오묘했다. 그어떤 투옥과 단식에서도 살아남았던 그가 폭력적 현장의 가운데서 맨발로 걸어가도 다치지 않았던 그가 노년의 나이에 기도 시간에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간디다웠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였다. 그가 평생을 걸고 수행했던 사탸그라하, 아힘사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패배는 증명하고 말았다. 그의 진리 실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그가 걸어간 길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p. 134)' 간디는 그의 삶으로 그의 죽음도 설명했달까.

이 정도면 그가 왜 양자역학에 그토록 거부감을 보였는지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그것은 결코 자신이 누리는 최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과학적 탐구와 종교적 원리를 일치시키고자 한 자신의 세계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은 혁명가도, 권위자도 아닌, 다만 '아인슈타인'으로 살았을 뿐이다. (p. 172)

상대성이론으로 물리학계에서 뉴턴을 뒤엎은 아인슈타인이었지만 그가 말년에 노력한 것은 양자역학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선 그를 꼰대취급하기도 했다지만 그는 성정상 그럴 수가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가 추구한 진리는 명확해야 했고 양자역학의 이럴수도있고저럴수도있다는 그의 신념에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는 꾸준히 비폭력과 반전운동에 힘을 더했고 과학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한쪽편으로 몰아붙여 판단하는 건 오롯이 후대의 잘못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이론에도 자신의 삶에도 크게 연연해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죽음이 몇이나 될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음이 원초적으로 부조리한 것이라면,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건 실로 요행이요 축복이 아니락. 매일, 매 순간이 기적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던가! (p. 192)

연암 박지원은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의 무수한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가 그 슬픔을 다루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그는 그 죽음들마다 진심을 다한 그만의 글쓰기로 애사를 지어 바쳤다. 그렇게 수많은 글을 올리고 묘비명을 지었지만 정작 그의 죽음 후 묘비명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애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애도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수많은 죽음을 겪었고 묘비명을 쓰면서 죽음과 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달리 말하면, 늘 '오늘 이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p. 214)' 그는 죽을때까지 벗들과 이야기하며 생각하고 글을 씀으로써 그의 삶도 죽음도 자연스럽게 주변에 두었다.

'너희들이 독서하지 않으면 이 아비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왜?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해놓은 저술과 간추려 놓은 것들을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 이 일을 못한다면 내 책들은 더는 전해질 수 없을 것이며,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핵심은 바로 여기다. 나의 독서, 나의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려면 너희들이 독서를 해야 한다. 독서를 해야 문장을 쓸 수 있고, 문장을 남겨야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래야 아비인 나의 명예도 복권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에도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나를 평가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영원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 (p. 225)

다산 정약용은 일흔다섯에 결혼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을 앞둔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다사다난했던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다시 요약하면 무엇하겠나. 다만 그의 '문장'에 대한 집념은 알아둘만 했다. 그의 삶은 긴 시간 유배지에서 보냈고 집안 형제들은 모두 풍비박산났다.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은 '문장'이었고 그는 현재가 아니라 후대에 자신이 어떻게 남을지 아니 어떻게 남아야할지 내다보고 준비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죽음을 준비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독서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것. 그렇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찬묘지명]도 미리 써두었다. 참으로 길게. 그는 그가 살았던 당시보다 그의 죽음 이후의 역사를 더 생각했다. 그러니 그 현재에서의 죽음이 그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었을까.


사리뿟따는 한자로는 사리불 또는 사리자로 불린다. 사리불? 사리자? 불자들이야 익히 아는 이름이지만 불자가 아닌 이들도 종종 들어보긴 했다. 어디서? 바로 [반야심경]에 등장하신다. [성경]이 인류 모두의 고전이듯, [반야심경]역시 신앙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읽히는 고전이다. 그런 명망 높은 고전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리불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p. 268) 붓다, 관세음보살, 사리자, 이 세분의 앙상블로 불멸의 화음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울려 퍼지게 된 것. (p. 269)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 있고, 예수에게 베드로, 공자에게 안회가 있다면, 붓다에겐 사리뿟따가 있었던 것이다. (p. 279)

사리뿟따는 붓다의 '상수제자'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가장 스승과 같은 경지에 오른 제자 혹은 으뜸제자 라고나 할까. 이 상수제자는 전생에 수없이 많은 인연으로 붓다와 얽혀있었고 그렇게 붓다와 상수제자가 되어 태어나 다시 만난 이제야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었는데, 상수제자가 붓다보다 반드시 먼저 열반에 들어야 한다고 한다. 붓다가 열반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했으니 상수제자였던 사리뿟따도 자신의 열반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마지막 제자로 어머니를 선택한다. 평생 아들의 선택을 비난했던 어머니를. 이제 사리뿟따는 윤회의 업이 없으므로 어떤 인연으로도 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없을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참된 길로 이끌어야 했다. 자신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겐 죽음또한 그저 구도의 길로 이끄는 하나의 가르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일뿐이었딸까. 사리쁫따는 그렇게 윤회의 수레바퀴를 마침내 멈추게 하고 열반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어떤 잉여도, 여지도 없는 열반. 해서 '무여열반'이다. 붓다는 지금 생을 마감하려 한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붓다에겐 '죽음'이 없다. 아니, 죽음이라는 사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생도 사도 없는'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이다. 번뇌와 집착 속에서 몸부림치다 문득 죽음에 이르고 그 회한과 애증을 품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윤회라면, 욕망과 번뇌의 모든 불꽃이 꺼져 지극히 고요와 평정에 이르는 것이 열반이다. (p. 299)

붓다는 열반을 준비하는 여행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마지막까지 한명에게라도 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사리뿟따때처럼 붓다또한 자신의 오픈된 죽음은 가르침을 전하는 마지막 방법일뿐이었다. '당연히 애증도 미련도 없고, 회한도 즐거움도 없다. 오직 평화와 자유만이 있을 뿐. 그래서인가, 붓다의 몸은 화장 이후 '표피와 속 살갗과 살점과 힘줄과 관절 활액은 모두 다 타고 재도 먼지도 없이 오직 사리들만 남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소멸이다. (p. 333)' 그러나 모두가 붓다같지 않았으므로 죽음이후 혼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경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전하러. 여하튼 붓다에겐 자신의 죽음도 제자를 위한 가르침이었다.

이 8인의 현자들은 문명권도 다르고, 살아간 시대도, 또 타고난 품성도 서로 달랐다. 하지만이들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극히 평온하고, 지극히 유쾌했다는 것. 하여 남은 자들에게 절망과 비탄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을 선사했다는 것. 우리는 이 모든 과정에 동행했다. 그리고 이제 묻는다. 어떻게 해야 저런 죽음의 형식이 가능할까?

먼저 이들의 죽음은 삶과 대립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생사는 다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삶, 그런 죽임이 가능할까? 역시 간단명료하다.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면 된다. (p. 338, 339)

그럼 또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욕망은 생의 원초적 동력인데,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물론 우리는 이미 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이 현자들의 비전과 방법은 언뜻 결이 다르게 보이지만 깊은 차원에서 상통한다. 덕분에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누구를 멘토로 삼든 우리는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고 선을 행하며 지혜를 연마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자, 이제 마지막 관문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목격한 바 현자들의 죽음은 단순한 종결이 아니다. 자유를 향한 비상이다. 다시말해 죽음은 생의 종결이지만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 (p. 340)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소박한 윤회론에서 시작하여 윤회론의 최고 경지인 붓다의 열반에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윤회와 열반, 이것이야말로 현재 인류가 창안해 낸 죽음과 다음 생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 아닐지. (p. 341)

현세의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윤회론이 힘이 될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사회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해본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기에 이런 책이 그리 널리 읽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8인의 현자의 죽음은 그들이 생애 성취한 업적이 있기에 더 빛을 발하는 평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의 평온한 죽음이 이렇게 회자될수도 없을터, 이렇게 생과 사의 문제는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윤회설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책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빈곤하기 이를 데 없다. 공포와 무지,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새로운 상상력이다. (p. 348)

사유와 성찰까지 가지 않아도 좋다.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애초에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라고들 하지 않은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인간만의 이 능력을 좀더 발휘해보자. 지금과 달리 생각해보는 것, 시작은 일단 그거면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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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우연하고 경이로운 지적 탐구 서가명강 시리즈 37
천명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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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동물을 먹고 사랑하고 동시에 혐오하는가

지금껏 상상해본 적 없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한 첫걸음

내가 참 좋아하는 서가명강 시리즈. 다양한 분야별로 어찌나 작고 예쁘면서 알차게 채워놓았는지 한권한권 읽을때마다 모든 책이 마음에 쏙 드는 시리즈다. 이제 더 새로운 분야의 책이 나올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데, 있었다. 여전히. 새로운 분야가. 이번엔 인간동물학이다.

동물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이슈를 분석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찾고 싶었다. 물론 여전히 혼란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 동물이 인간과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모든 모순이 해결되고 인간과 동물이 영원히 행복하게 공존할 방법은 지금 당장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갈등과 혼란을 이해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이 존재들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애정과 책임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p. 14)-들어가는 글 中-

인간은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부터 지구를 독차지하듯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 외의 존재들에 대해선 인간보다 열등하다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인간은 늘 우리가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아주 오래전 과거부터 '철학자들은 동물이 갖고 있는 모든 요소 중에서 인간과 비슷한 요소보다 인간과 다른 요소를 유독 강조했다. (p. 23)' 그리고 인간은 늘 '동물을 우리의 경험과 필요에 따라 분류한다. (p. 24)' 그 과정에는 '인간은 우월한 위치에서 동물을 구분하고 관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p. 27)'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인간만의 착각이 아닐까? '인간은 인간의 인지적 능력과 비교해서 동물을 이해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의 감각과 인지가 만들어내는 세계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의식적으로 왜곡되고 의인화된 세계다. (p. 27)'

우리는 동물이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과 비슷한 존재일 수도 있고 혹은 동물과 아주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식으로 서로를 인식하는가와 별개로 어쨌든 인간과 동물은 소통과 관계 맺기가 가능한 존재들이다. 희한하게도 말이다. (p. 39)

관점을 바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동물 관계 속에서 동물이 처한 상황은 어떤가? 동물이 겪는 경험은 어떤가? 동물의 삶, 특히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 속의 삶은 어떤가? 우리는 동물이 인간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p. 49)

'동물이 인간다울 필요는 없다' (p. 66)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새삼스러운 뜨끔함이 느껴졌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동물을 바라봐온 프레임에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들도 있었다. 동물의 노동이라던가 실험용 존재 라던가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라던가... '동물에 대한 인간의 모순적인 태도를 성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p. 69)'

과학자들이 예측한 바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2300년경에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바다 생물중 대다수가 멸종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한다. (p. 91)

그러나 지구온난화의 책임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지구온난화와 멸종을 백퍼센트 막을 수 있다는 생각도 따지고 보면 인간중심주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 인간인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의 멸종이 우리의 책임인가'를 묻기보다 '우리가 이런 변화들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p. 99)'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질문이고 그 해결책을 찾는데 가장 앞장 설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만이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해러웨이는 현시대가 인류세가 아니라 '툴루세chthulucene'임을 주장한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이 다른 종, 더 나아가 지구 자체와의 얽힘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가고 함께 번성하고 협력하는 태도와 방식이 필요하다. 나아가 인간이라는 종, 생물학적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친족을 만들어보는 것은 비인간 존재와 환경에 대한 책임을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p. 126)

한국식 발음을 어떻게 해야할지 정립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툴루세 혹은 쑬루세 라는 단어를 이 책을 통해 처음 봤다. 책뒤편에 적혀 있는 참고문헌 [트러블과 함게하기] 라는 책에서 나온 말인듯 했다. 검색을 좀 해보았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라는 책을 쓴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raway)는 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고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류세보다는 자본세나 플랜테이션세와 같은 명명을 선호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이름을 또 제안한다. ‘쑬루세’(Chthulucene)라는 이상한 발음과 철자의 이름을. “이것은 그리스어 크톤khthôn과 카이노스kainos의 합성어로, 손상된 땅 위에서 응답-능력을 키워 살기와 죽기라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배우는 일종의 시공간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잉해는 이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덧붙여 놓는다. (참고기사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04193)


여하튼 핵심은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은 더욱 필요하다. (p. 127)' 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p. 209)' 다.


각 동물이 생태계에서 담당하는 모든 기능을 인간이 다 이해하고 있느냐도 문제다. 그것은 사실상 불간으한 일이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부분 이해한 다음에야 인간은 비로소 어느 지점에 개입하고 어느 정도로 개입할지, 이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과정을 짧은 시간 내에 해내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p. 209)

동물관련 사건사고 뉴스를 본적이 많지만 그동안 너무 단순하게 이해해왔구나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폭력사건이 되기도 하고 여하튼 굉장히 다층적이고 복잡한 사건사고였었다. 동물권 관련 법안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다행한 일이나 어느 정도까지 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동물 복지 정책은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p. 221)' 선언이 정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합의가 되어지길 바랄 뿐이다.

다른 존재에게 공감하고 배려한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지금까지 진화해오면서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능력이다. (p. 238)

동물과 동물 문제를 바라볼 때 인간을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종들과 같은 위치에서 보고, 기존의 윤리적인 틀을 겸허한 눈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태도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의 미래에도 도움이 된다. 때로는 경이롭고 때로는 무덤덤한 동물이라는 존재, 그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갈 필요가 있다. (p. 240)

인간의 공감능력이 동물과의 관계맺기에서 이렇게 중요한 희망이 될 줄이야.

동물에 대해 환경에 대해 그닥 관심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이 작고 얇은 책한권이 건네는 다양한 논점들을 읽고나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그래 지금 이런 문제점들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긴 하지...라고. 이 작고 얇은 책한권읽었다고 그 모든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얻을 수 있을거라 쉽게 생각하진 말자. 해결책을 찾는 것은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종 우리 모두의 몫이니.

인간동물학은 이 모든 관심과 노력을 분석하고 기록하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와 가치가 인류세를 넘어 이후의 공존을 준비하는 과정을 만든다고 믿는다. (p. 249)

나또한 저자의 이 믿음에 한마음 더 보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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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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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신이 설게한 거대한 기계라면

운명이 신의 언어로 구성된 정교한 프로그램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세상에 인간이 넘쳐나고 그만큼 작가도 넘쳐나고 당연히 작품도 넘쳐나다보니 내가 아는 작가보다는 내가 모르는 작가가 자꾸만 더 많아져 간다. 새롭게 등장하는 젊은 작가들이야 모를 수 있다쳐도 연륜이 꽤 길게 쌓인 작가들의 작품을 여태 한권도 읽지 않았다니 를 깨닫게 될때마다 사뭇 놀라게 되곤 하는데 이번엔 이정명 작가였다. 뭐라도 하나쯤은 읽은 줄 알았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기억을 되짚어보니 이번 책이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첫책이었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 심정지와 무호흡, 경직 상태의 무게와 형태는 삶의 정지 혹은 부재를 단호하게 선언한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한시적인 삶은 확정적이고 불변하며 영구적인 죽음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니 어찌 삶은 존재의 윤곽일 뿐이며 죽음이 그 실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찬양하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원하지 않고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내 남편, 정확히 내 전남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p. 7)

소설의 첫 문장 혹은 첫 문단은 중요하다던데 이런 저런 책을 읽다보니 때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긴 했는데 문장이 의미심장한 소설도 있었고 문단이 중요한 소설도 있었다. 이 책의 경우 이 첫 문단이 (핵심적이라고 할 순 없더라도 앞뒤 맥락적으로) 꽤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소재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사이에 AI 라고 할 수 있으므로.

민주의 남편은 아니 전남편인 케이시는 천재IT기술자이자 사업가로 가상도시 알레그리아의 핵심 구성원이자 범용AI마인텔의 개발자였으나 췌장암으로 결혼 6년만에 죽었다. 아니 사망진단서가 발급되었다...라고 해야 하려나. 그가 떠난후 민주는 많이 힘들어했으나 6년이 지난 지금은 현남편과 안정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케이시가 존재하는 듯한 흔적들이 그녀의 주변에 갑자기 발생하기 시작한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나의 몸은 나를 떠났다. 무른 살은 소각로의 불길에 녹았고 한 줌의 뼈는 바람에 날려갔다. 나의 죽음은 광케이블을 타고, 전파를 타고 온 세상에 퍼졌다. (p. 37) 나는 죽었지만 말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당신 눈앞에 나타날 수 있고 놀란 당신 목에 칼날을 들이댈 수도 있다. (...) 그렇다고 내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다는 주장은 살아 있다는 사실과 다르니까. 죽음에 대한 나의 유일한 주장은 그것이 소멸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존재의 동의어가 될 수도 없다.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 (p. 38)

소설 속 화자는 여러 명이다. 각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때마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순서없이 오가고 같은 사건도 다르게 표현된다. 어느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이해하는가 혹은 인물이 아니라 시간의 순서대로 사건을 정리하는가 등은 독자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첫 화자가 민주라서인지 민주 중심으로 읽게 되긴 했다.

죽음과 삶과 죽음과 삶과 죽음과 삶..... 무한한 삶과 죽음의 반복을 통해 진정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에 사람들은 매혹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희석되자 자연히 현실에서도 살인과 자실이 늘어났다. 현실을 모방한 가상세계가 현실의 존립을 위협한 것이었다. (p. 62)

가상현실세계 알레그리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곳에서 현실속 자신과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엔 저마다 다른 의미가 있었고 그곳에서의 삶과 죽음엔 현실에서처럼 그리 연연해하지 않았다. 선택한 캐릭터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상세계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다른 삶을 다시 선택하면 되었다. 하지만 가상세계는 분명 현실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가상세계에서 만난 관계는 현실세계에서 진실하기 어려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와 케이시가 처음 만난 곳은 가상세계에서였다.

나는 가상이라고는 해도 죽음의 그 순간만큼은 현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강렬하다고 덧붙였다. (p. 66)

"이곳에서 사는 것보다 현실을 제대로 살고 싶어요. 그러려고 이곳에 오니까요"

"사람들이 알레그리아에 오는 건 힘든 현실을 피해서예요. (...) 그런데 알레그리아에서 현실을 꿈꾸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p. 67)

민주는 배우가 되고 싶은 간호사였고, 알레그리아에 가는 이유도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케이시는 가상세계에서조차 죽음을 경험해본 적 없는, 민주와는 너무나 다른 상류층의 삶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18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을 때 사람들은 세기의 로맨스라며 열광했다. 두사람은 대화가 잘 통했고 진심으로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케이시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며 상황은 급변했다.

어떤 결혼은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 아내와의 결혼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인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잊었다. 가난과 죽음, 범죄와 공포, 거짓과 속임수...... 그런 것들이 이제는 나와 무관한 일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녀의 전남편이 설립한 이건 예술 재단이 11년째 이어온 한 전시회에서 만났다. (p. 90)

준모는 현재 민주의 남편이자 사진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불행과 불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민주에게 그의 과거를 감추진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공유하면서도 딱 한가지의 비밀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비밀이 두 사람에게 어떤 어두움을 몰고올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전직은 '프리젠터'였다. 가상현실과 현실을 넘나들벼 불법과 합법을 넘나들며 사람들에게 온갖 용역을 대행해주는.

수십만 개의 나노 칩이 발신하는 신호가 감정 변화와 폭력성을 유발하고 장기적으로 어떤 뇌 신경학적 손상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전 희망 없는 치료에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요. 남은 삶의 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만 해도 시술 이익은 분명해요. 부작용은 걱정하지 않아요. 전 그전에 죽을 테니까요" (p. 139)

케이시는 민주에게 통증을 완화하는 간단한 뇌 시술이라고만 일러두었다. 하지만 그 수술은 케이시가 죽기전까지 몰두했던 아니 죽기전에 꼭 완성시키고자 했던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육체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우리의 상호작용은 점점 빈번하고 밀접해졌다. 우리는 동기화를 넘어 일체화되고 있었다. (p. 141)" 케이시는 자신의 뇌를 동기화한 AI에게 앨런이라 이름붙였다.

"기술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수용성이야. 소비자가 제품을 받아들일 도덕적, 심리적 준비가 되어야 해. 사람들이 두뇌 일체형 AI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자고. 그러지 않으면 저 물건은 말 그대로 괴물로 받아들여질 거야.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너무 앞서가면 외면받기 마련이니까" 사이토의 말은 나를 낙담시키기에 충분했다. 남은 삶을 쏟아부은 나의 창조물이 거부당했다. 차 박사는 앨런을 괴물 취급했고 사이토는 상품화에 유보적이었다. (p. 144)

"자네...... 불멸을 꿈꾸는군. 하지만 죽은 후에도 의 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상은 장사꾼에게 좋지 않아. 인간이란 한계가 있고 결핍이 있어야 돈을 쓰거든"

(...) 나는 앨런을 개발하는 데 고심했을 뿐 그 기술이 쓰일 곳은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의 나와는 상관없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앨런이 내 인식과 감정과 생체를 모방한 시스템이라면 왜 나를 대신할 수 없겠는가? 그 순간 내가 할 일이 분명해졌다. 나는 불멸의 꿈을 현실화할 것이다. (p. 145)

그러나... 모든 사건이, 불가능할 일을 가능하게 만들리라 결심하고 믿는 순간 발생하듯... 케이시가 '불멸의 꿈'을 꾸는 순간부터 모든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엔 케이시도 다른 누구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로봇은 인간을 흉내낼 뿐 인간이 아니에요. 만약 의식을 어딘가에 탑재해야 한다면 플라스틱과 실리콘과 복잡한 배선 뭉치보다는 살이 있는 인간의 육체가 낫지 않을까요?" (p. 150)

"로봇이 아닌 인간을 AI의 육체로 활용하려면 법적, 제도적 장치가 선행되어야 해"

"프리젠터를 움직이는 건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돈이에요" (p. 152)

케이시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케이시는 그래도 인간이었고 그의 창조물은 AI였다. 자가학습하는 AI의 진화를 인간인 케이시가 미리 다 예측할 수는 없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케이시의 육체는 죽었고 그의 뇌속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화한 앨런은 케이시가 아닌 건 분명했다.

내가 앨런을 '그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을 기억한다. 그렇게 부르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긴 해도 그 호칭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앨런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183)

학습이 반복될수록 앨런이 도출한 답변이 내 생각과 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느 날 앨런이 내 생각과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그 사실을 정확히 인식했다. (p. 185)

죽음과 동시에 단순한 데이터의 덩어리로 남은 나와 다르게 그것은 내가 죽은 후에도 악의 알고리즘을 통한 자가 학습을 반복했고 카메라와 센서의 입력 경로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생성했다. 그것은 필요한 패턴을 복제하고 오류를 제거했으며 의도에 맞게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p. 190)

케이시는 민주를 사랑했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은 변함없었다. 민주를 지켜주고 싶었기에 그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싶었던 거였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상상밖이었다. 자 이제 현실세계에서 여전히 살아숨쉬는 민주를 중심으로 '그것'은 본격적 개입을 펼친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을. '그것'이 짜놓은 죽음의 그물망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음에 이를 것인가. 그 결과는 책속에서 확인하는 걸로.

작가의 과거 작품명을 훑어보니 대중적으로 알려진게 꽤 많았다. 나는 원작 소설보다도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작품이 있기도 했다. 드라마화된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작가이니만큼 소설적 흡입력은 분명 강했다. 이 책의 경우 소재도 인간과 AI라는 최신형이라 더 매력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형 AI를 다루고 있음에도 SF처럼 읽혀지지는 않는 것이 이 작품의 단점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말하자면 소재적 측면에서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SF로 읽고자 하기 보다는 '삶과 죽음의 가치'라는 인간삶에 대한 고찰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한 소설이었다고나 할까.

내 학습에 의하면 선은 악이 발현되지 않은 잠정적 상태일 뿐이야. 악의 인자는 특정한 악인에게 내재하는 게 아니야. 전쟁과 빈곤, 극심한 경쟁이나 통증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모든 인간에게서 자연스레 발현되지. 그러니까 나는 케이시의 부정적 감정과 악의적 행동을 원천 정보로 악을 학습했을 뿐이야. (p. 259)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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