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성공 - 한국은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
윤홍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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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복지를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한국의 대표적 학자 윤홍식 교수,

한국 복지국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울 방법을 논하다.

올해 7월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더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조사결과들은 한국을 자살율이 높고 불평등이 심하며 많은 국민들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상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 성공 패러다임속에 무시되어온 복지국가에 대한 혁신적 프레임을 세울 것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한국이 온 길이 특이할 정도로 이상했다면 앞으로 나아갈 길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 된다고 희망을 제시한다.

<2021년 한국 사회의 울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10명 중 6명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p. 8)

OECD에서 부정기적으로 '삶의 질' 순위를 발표하는데, 한국은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OECD 35개국 중 최하위였습니다. (p. 28)

독재정권이 부와 소득을 불공형하게 분배해 불평등과 빈곤이 심각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독재만 무너뜨리면 더 평등한 사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지요. (p. 34)

민주화 시대가 열렸어도 평등한 사회는 되지 않았고 '삶의 질' 조사에서는 매번 하위를 차지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과반수를 넘는 국민들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 있다니, 1인당 GDP가 높아지고 한류를 통해 세계적 문화영향력까지 가졌다는 나라가 이룩한 그동안의 성공은 과연 어떤 성공이었던 것일까? 먼저 지금까지의 '성공'에 대해 면밀히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86세대라고 불리는 1960년대생 중에 출세한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1960년대에 태어난 50대가 모두 대학을 졸업해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높은 지위에 있고 높은 소득과 부를 독점했다고 묘사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계급 불평등을 세대 불평등으로 감추려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p. 40)

현재 청년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세대 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청년들은 '꼰대들이 문제'라고 하니 그 적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세대 담론은 부와 특권이 세습되는 계급사회의 현실을 감추는 위험한 장막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청년들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세대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부가 대를 이어 세습되는 불평등에 있기 때문입니다. (p. 45)

일제치하에서는 일제라는 적이 분명했고 독재에서는 군부라는 적이 분명했기에 지금 현실에서도 꼰대라는 기성세대를 표적으로 삼으면 사실 이해와 설명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쉬운만큼 함정일 수도 있다. 표면적인 적을 내세워 공격의 화살을 받게 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이들은 누구일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 불평등의 사슬을 끊는 것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대다수 기성세대를 적으로 돌리는 세대 간의 반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한 특권 없는 사람들의 세대를 가로지르는 연대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세대가 아니라 부가 세습되는 새로운 신분사회니까요. (p. 45)' 각자도생인 사회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이 시대에 그러한 삶의 방향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 되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상생은 복지국가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기초적 마인드이다. '우리는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를 기성세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넘어 왜 그런 일들이 만들어지고 고착화되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왜 한국 사회는 더 정의롭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는지 질문하고 답해야 할 것 같아요. (p. 63)'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사회경제 문제에 직면한 것은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세계 모든 국가가 찬양해 마지않는 성공의 결과입니다. (중략) 성공의 덫에 빠진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 사회는 자신이 직면한 실패, 위기에서 벗어나기가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p. 63)

성공의 덫에 빠졌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동안의 성공의 발자취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놀라운 성공이 향기로운 술처럼 우리를 취하게 만들어 우리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보지 못하게끔 가리는 역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성공의 덫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게끔 하는 용기의 근원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p. 71)' 라고 희망을 드러낸다. 최근 읽었던 한국사회 혹은 공정이나 공평 에 대한 책들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부담없고 쉽게 술술 읽혔던 이유는 근래에 보기드문 이런 긍정적 태도와 구체적 대안제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클샌델의 능력주의 공격이나 국내 학자의 불공정함을 내세운 정권 공격보다 훨씬 현실적이었고 훨씬 논리적이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답한 것 말입니다. 그는 역사를 어떤 인물의 영웅적 서사로 해석하는 것을 '좋은 여왕 베스'학설과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쉽게 말해 좋은 여왕 베스 학설이란 '역사위인설'으로 불리는 것으로 한 사람의 영웅 때문에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역사관이죠. 그러면서 카는 그 '좋은 여왕 베스'학설을 '최근에 들어와서는 유행에 뒤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따금씩 그 흉물스러운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라고 결론짓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1961년에 출간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죠. 그리고 덧붙입니다. 역사를 개인의 업적에 맞추는 것은 시대라는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저도 카와 같은 생각입니다. 역사를 영웅들의 모헙담으로 그리는 것은 우리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역사의 기본적인 역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p. 120~121)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참 여기저기 다양하게 인용되곤 한다. 그럴때마다 어서 저 책을 읽어야하지 하면서 몇년째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는 두꺼운 벽돌책을 노려보곤 하지만 시작이 영 어렵다;;; 여하튼, 60년 전에 이미 유행이 지났다는 그 학설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싶다. 영웅이 되었건 악당이 되었건 한 인물에 집중해서 역사를 바라보면 그 주변인물과 그리고 대다수의 일반사람들이 무시되는 역사관이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역사에 관련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분석함에 있어서 '나'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신교 신자가 되어야 전쟁구호물자를 받기 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개신교 신자가 되었씁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개신교 신자는 10만 명에 불과했지만, 1950년대 말이 되면 무려 10배 이상 증가한 백만 명으로 폭증하지요. (p. 127)

한국전쟁이 남긴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한국전쟁으로 군대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선진화된 국가기구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p. 130)

1950년대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은 이렇게 몰락합니다. (중략) 재미있는 사실은 농지개혁이후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점입니다. 학교법인에 귀속된 토지는 농지개혁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지요. (p. 135)

지주는 사라지고 자본가와 농민은 정권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었어요. 산업화와 함께 성장하면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만들어갈 노동자 조직은 큰 타격을 입어 정권을 지지하는 어용단체가 되었습니다.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급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좀 과장하면 정권이 원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p. 137)

미국의 요구는 곧 법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정부도 여러 차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4.19혁명 이후에 집권한 장면정권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한 것도, 박정희 정권이 장면 정권이 수립한 계획을 가져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한 것도 모두 미국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개발계획을 박정희 정권만의 독창적인 일로 보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합니다. (p. 140)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이후부터 급격히 변화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이 역사책은 아니지만 과거의 사회흐름을 설명하는 것을 읽다보니 몰랐던 세세한 역사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역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사회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대도 국민의 관심사는 복지확대가 아니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생계의 터전과 직장을 잃었을 때도,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소수의 전문가와 참여연대와 같은 일부 시민단체를 제외하면, 국가가 공적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은 높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과 실직자들을 위한 실업급여를 확대하라고 요구한 것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라고 압박했던 IMF이었습니다. (p. 190) 어쩌면 한국사회는 놀라운 성장을 하는 동안 개인과 가족의 안전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시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지켜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성장 후분배'에서의 분배도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며 지켜주는 공적 복지를 확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서 시장에서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을 늘리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나와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내가 번 돈이지, 국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제공하는 복지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p. 191)

코로나이후의 사회의 어두운 면들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는 설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타격을 입었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자영업자, 비정규직, 청년, 중소기업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인당 얼마간의 돈을 주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우리사회는 지금 경제적 어려움을 개인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보다 공적 복지 보다 개인에 대한 일시적 기본 소득에 더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수십 년의 권위주의 정권은 한국인이 국가를 신로할 수 없게 만들었씁니다. 독재정권도 국민이 정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세금을 걷어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권위주의 정권은 가뜩이나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세금을 많이 걷어 더 취약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낮은 세금은 권위주의 정권의 취약한 정당성을 보완하는 중요한 정책이었습니다. (p. 194) 국가가 나를 지켜준 경험이 거의 없는 한국인은 세금을 모든 악의 근원같이 생각했던 것이죠. (p. 197)

국민이 민간 생명보험사에 낸 돈은 1997년에 정점을 찍은 이후 감소합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민간 생명보험 사랑은 여전합니다. (중략) 국민이 국가보다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 생명보험사를 더 믿는다는 것이고, 사회적 연대보다는 내가 낸 것 내가 돌려받는 '각자도생'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지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비합리적인 행동입니다. (p. 199)

국가가 수립된 이후로 오랜 세월 국가를 믿지 못하며 살아온 국민은 세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가적 복지제도는 세금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선진국이 된 한국에서 세금으로 운영되는 복지제도가 발전하지 못한 역사적 배경을 읽으며 이해가 되면서도 씁쓸하다. 저자의 계산을 읽다보면 알수있는데, 적게내는 세금으로 더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음에도 사회적 불신은 많이 내고 적게 돌려받는 민간 보험사를 선택하게 하고 해왔다. 이 연장선에서 부동산 투기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믿을건 보험과 부동산 뿐이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권위주의 정권도 건드리지 않았던 보유세 강화 방향을 거꾸로 되돌리는 정책도 시행했고, 박근혜 정부는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할 수 있는 '개발이익환수제도'를 완전히 무력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부동산 규제를 강하게 하는 정부가 들어서면 5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너무나 합리적이었던 것입니다. 부동산은 영원한데, 정권은 딱 5년만 참으면 되니까요. (p. 204)

1997년 IMF를 겪으면서 성장 신화가 처음으로 무너졌는데도 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고, 2020년 코로나19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었는데도 국민은 여전히 성장을 꿈꾸고 있습니다. 20~30대 청년들에게 '영끌'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주식 투자와 암호화폐의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내가 축적한 자산 말고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전판이 없는데 집은 너무 비싸 살 수 없으니 주식이나 암호화폐에 투자해서라도 자산을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손잡고 연대해 함께 풀어가는 보편적 '복지 국가'가 들어설 틈은 없습니다. (p. 205)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수십 년 동안 고도성장을 지속하면서 빈곤과 불평등을 감소시킨 한국의 성공적인 산업화는 인류 역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대단히, 대단히,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p. 206)' 한국의 이례적인 성장은 분명 성공이었다. 이 성공경험을 한 국민들은 지금의 위기도 지금까지처럼 '이례적인 성장'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꿈꾼다. 하지만 '기적'은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한번도 힘들었을 '한강의 기적'은 두번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마냥 '성장'의 꿈을 꾸며 '각자도생'으로만 살길을 찾을 것인가?

한국 경제의 모습을 '가마우지 경제'라고 합니다. (p. 220) 생산은 한국기업이 하는데, 생산에 필요한 첨단기술, 소재, 부품, 장비는 모두 외국 기업의 것이니 한국 기업이 열심히 만들어도 결국 이익은 외국 기업의 몫이라는 것이죠. (중략) 한국 산업은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역량, 즉 '개념설계'라고 부르는 혁신역량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p. 221)

한국이 1960년대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모든 자원을 기업에 몰아줄 때, 한국인은 기업의 성공이 곧 국가의 성장이고, 국가의 성공이 곧 국민의 성공이라고 믿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국민의 피와 눈물로 민주화를 이루었을 때도 그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고 나서 뒤돌아보니 산업화와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p. 222) 민주화로 권위주의 정권이 사라지마 재벌 대기업을 통제할 힘은 한국 사회 어디에도 없었어요.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이 기업을 견제할 힘이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오랜 권위주의의 탄압을 겪으면서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못했어요. (p. 223)

한국 기업이 최첨단 설비에 프로그래밍 할 수 없는 축적된 숙력을 갖춰야만 혁신이 가능하고 다른 국가들과 격차도 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노동자의 숙련을 자동화 설비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그런 기회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성공의 이면에는 한국이 선진국을 열심히 따라가도 그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제논의 역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p. 229)

선진국이 됐다는 것은 어찌보면 성장률이 둔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급속한 성장은 그 무엇도 안정화시키지 못하고 그저 지나쳐 달려오기만 한 셈이다. 기껏 힘들게 만들어서 외국기업 배만 불려주고 기껏 힘들게 일해서 대기업 배만 불려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성장을 한 것은 정말 '한강의 기적' 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빨리 뛰어가는 토끼도 몇걸음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은 한국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제 문제는 국가탓만 해서도 기업탓만 해서도 내탓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혁신도 사회적 합의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복지에 대한 개념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선별주의는 자산과 소득이 낮은 사람들을 조사하고 선별해 지원하는 복지를 의미해요. 그런데 한국의 복지제도는 거꾸로 소득이 높고 고용이 안정적인 사람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p. 232) 신화화된 개발국가 복지체제는 한국 사회를 성장제일주의, 낮은 세금, 공적 복지와 사적 자산 축적에서 나타나는 계층간 불평등으로 대표되는 '역진적 선별성'이 강한 복지 체제를 고착화시켰어요. 그러자 한국 사회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4개의 신분으로 구분되는 '신(新)신분사회'로 분열되었습니다. (p. 239)

'결국 나와 내 가족의 안위는 내가 축적한 재산에 달려 있다는 개발국가 복지체제가 만든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는데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이상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p. 241)' 이 이상한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은 아마도 공무원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일 것이다. '청년을 자녀로 둔 많은 부모는 자녀가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 부모 다수는 국가가 공무원을 늘리는 일에 반대합니다. (p. 245)' 여기서 나오는 헛웃음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노랫소리,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앞으로의 미래를 저해할 더 큰 근심거리는 한국적 특수한 상황에 있었다.

반공개발국가의 엄청난 성공이 한국 사회에서 공정하게 이익을 배분하자는 주장조차 사회주의의 발상이라며 발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p. 255)

1987년 한국의 민주화는 이렇게 권위주의 세력과 보수 야당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학생, 재야, 노동자, 농민이 배제됩니다.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헌법, 권력구조, 선거제도가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어렵게 만들었던 이유입니다. 다수 득표자가 승리하는 소선거구제, 결선투표없이 다수 득표자가 승리하는 대통령 선거는 권위주의 세력과 보수 야당의 기득권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으로부터 지켜내는 핵심적인 제도였습니다. (p. 258)

사회경제적 이해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권위주의 세력과 부수야당이 민주화운동 세력을 배제하고 진행한 민주화가 분배 문제를 제대로 다룰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p. 259) 복지는 항상 성장 다음이었습니다. 권위주의 세력과 보수 야당 간에 타협으로 이루어진 민주화는 민주주의가 저절로 시민의 삶을 개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었습니다. (p. 261)

그런가 그런것이었나... 반공으로 인한 몰지각한 폄하와 왜곡은 그렇다치자 그런데 80년대 이루어낸 민주화의 속뜻은 이런 것이었다니...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성공한 사회라고 하나 성장은 멈추었고 분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민주주의도 지켜지지 않은 사회... 암담하기만 할 이런 상황에 저자는 희망찬 목소리로 '이제 그 성공의 덫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p. 273)' 라고 말한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길' 을 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복지국가에 대한 제대로된 정의부터 앞으로 바꿔가야 할 것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정치의 문제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가 더 나빠지도록 방조하는 사람입니다. 정치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사회 비전인 것입니다. 좋은 복지국가란 좋은 정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은 정치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p. 365)

독립적 개인,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회, 증세, 평화와 공존, 선거제도, 기후위기에 대한 방안 등등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개선방안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정치'였다.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는 것도 사회적으로 문제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모두 '정치'로 풀어야 했다. '정치제도가 만들어져도 그 속을 채울 정치집단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유권자와의 공약을 지키는 경우는 공약을 지키지 않았을 대 자신을 응징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할 때입니다. (p. 335) 나를 대표하는 조직이 없고, 정치제도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조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선태지는 조금 덜 보수적인 정당과 더 보수적인 정당,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뿐이었죠. 선거를 통해 복지를 확대하는 '선거 동원 모델'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된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p. 337)' 풀뿌리 시민운동은 옛날에나 통용되던 말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말이었다. 저자는 '촛불항쟁'에서 연대의 희망을 보았다. 촛불항쟁 또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이례적'인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러니 외국의 좋다하는 이론들이 적용될리 만무할 것도 같다. 이상한 성공이 만들어낸 이상한 사회에 살면서 이상한 실패를 겪으리라 미리 좌절하지 말자. 차라리 앞으로 갈 길도 과거에 없던 '이례적' 길이 될거라 생각하자. 그렇게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복지국가를 꿈꿔보고 싶다. 그 출발은 객관적 정치판단을 할 수 있는 시민이 되는 것부터 일 것이다. 정치라면 절레절레 도리질 하는 시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관심을 갖는 '이상한' 시민이 되어보자.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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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복수 주식회사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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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툼한 소설을 이렇게 순식간에 이렇게 빵빵 웃으며 읽게 될줄 정말 상상도 못했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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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복수 주식회사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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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어기지 않고 복수할 필요가 있으십니까?

우리가 해결해 드립니다!

누군가 슬쩍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본다면,

'복수하고 싶으십니까?'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ㅋㅎㅎ

세상풍파 겪으며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단박에 'yes' 라고 하지 않을까? 각자 크건작건 복수의 사연 하나쯤 이갈며 품고 사는게 인생 아닐까!

여기 '복수 주식회사'가 있다. 그런데 그냥 복수가 아니고 '달콤한 복수' 란다. 그래, 복수야 하는 입장에선 달콤할 수 있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이 '달콤한 복수'는 법을 준수하고 폭력적이지 않다. 기발하면서 신랄하고 신랄하면서 유쾌하다. 완벽한 짜임새라던가 앞뒤 딱 맞아떨어지는 서사에 감탄하게 되는 서술방식은 아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예상보다 자주 웃으며 읽게 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이야기는 히틀러에서 출발한다.

옛날 옛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그림을 꽤 잘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이름은 아돌프였는데, 결국에는 다른 이유들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젊은 아돌프는 진정한 예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조금은 사진 같은, 하지만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 같아야 했다. 그는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한 프랑스인의 말을 인용하여 <아름다움은 진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훨씬 후에, 그리 젊지 않은 나이가 된 아돌프는 <올바른 세계관>이라는 미명하에 책과 예술, 심지어는 사람들을 불태웠다. 결국 세상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다. 아돌프는 패배했고 세상에서 사라져싿. 하지만 그의 세계관은 여전히 숨어저 움직이고 있다. (p. 7) -프롤로그-

그 세계관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소년이 있었다. 네오나치즘적 사고관이 뚜렷한 이 소년은 자라서 갤러리에 취직하게 되는데 이유는 단 하나 그 갤러리와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갤러리에 막 취업했을때 기어다니는 아기였던 옌뉘는 자라서 스무살 차이나는 이 남자 빅토르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옌뉘의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빅토르는 옌뉘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옌뉘는 스물셋의 나이에 맨몸으로 쫓겨난 이혼녀가 되었다.

그가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노트북 덕분이었을 것이다. 온라인에서 그는 세계 곳곳의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과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모두가 실제 이름과는 다른 이름을 가졌고, 가짜 나이와 성을 사용했다. 케빈은 오히려 그게 좋았다. 그는 <Lonely planet>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싶었는데, 외로움이 느껴지는 이 시적인 이름은 엄마가 언젠가는 이 나라를 한번 방문할 거라는 약속과 함께 주었던 프랑스 여행안내책자에서 따온 거였다. 그는 프랑스 대신에 볼모라에 갈 운명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Lonely planet47 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세상에는 <외로운 행성>이 벌써 마흔여섯 명이나 있는 모양이었다. (p. 56)

주석에서 <Lonely planet 은 외로운 행성이라는 뜻이고,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총서의 이름이기도 하다 (p. 57)> 라는 문장을 보며 문득 학창 시절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의 채팅명이 Lonely planet 였는데, 그 친구는 그 닉네임을 어떻게 정하게 된 걸까... 혹시 여행 가이드 북의 이름이었던 것을 알았을까... 문득 그 친구와 처음으로 채팅하며 신기해하던 때가 생각난다. 여하튼, 케빈은 빅토르와 창녀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엄마가 케빈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빅토르에게 케빈을 데려갔고 맡겼다. 빅토르는 자신을 후견인이라며 소년을 원룸에 지내게 했고 열여덟살이 되자마자 케냐로 데려갔다. 사자밥이 되라고.

아까시나무 아래에서 치유사에게 발견된 날부터, 케빈은 양부와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5년을 보냈다. 아들은 뛰어난 습득 능력으로 아버지와 그의 동생, 그러니까 케빈에게 사바나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 준 명성 높은 마사이 전사 우후루 음바티안으로부터 끊임없이 칭찬을 받았다. (p. 67)

케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들로 받아들여졌고 마사이 전사로 교육받았으나 마지막 관문인 할례의식전 스웨덴으로 도망쳤다. 그림 두 점을 배낭에 넣고서 본인이 살았던 원룸의 문을 열었는데 낯선 여자가 살고 있었다. ' "난 여기에 살아요" 옌뉘가 대답했다. "아마 나도 그럴걸요?" (p. 69)' 동갑인 두 남녀 사이에는 빅토르 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얘기하다보니 그림 이라는 공통화제가 있었다. 하지만 둘은 가진 것이 없었고 그건 모두 빅토르 때문이었다. 그때 어떤 간판을 보게 된다. 그 간판엔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 라고 써있었다.

이르마는 그리고 또 그렸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흑인 남자와 흑인 여자를 다양한 색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p. 98) 이번에는 고국으로 향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아직 아돌프는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표현주의자일 뿐 아니라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또 스스로도 유대인이었다. 여기에 공산주의만 추가하면 결점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p. 99)

101p에 그림이 나온다. 소설책에 왠 그림? 이르마 스턴(1894~1966) 이라는 실존 작가의 그림이다. 이르마의 그림을 둘러싼 사건은 분명 허구이지만 이르마가 실존 화가였다는 점에서 묘한 긴장감을 준다. 진짜 그림을 보고 소설을 읽다보면 마치 진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갤러리를 배경으로 하고 온갖 그림이야기가 나오는 이 소설에 대해 그래서 작가는 이 책을 '미술에 대한 내 사랑의 고백(p. 511)' 이라고 표현했나 보다.

이 이론은 무엇보다도 누군가가 당신의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줘야 한다는 마태의 증언에 근거한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기서 우리는 <오른뺨>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를 해석하자면, 우리는 다만 왼손잡이들만을 용서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남의 뺨을 때리고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란다. 오른손을 가지고서 누군가의 오른뺨을 갈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겠어요? (p. 122)

소설의 줄거리에서 빠져도 상관없을 그런 대화속 그런 대사였지만 마태복음 관련 책에서 이 구절에 대한 해설을 읽은 적이 있기에 이 구절이 개인적으로 유독 인상깊게 남았다. 내가 이 대화에 끼어들어 있었다면 만면에 웃음짓고 힌트를 줬을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줘야 한다>라는 문장해석에 있어서 고려해봐야 할 것은 바로 '손등'이라고. 뭐, 소설의 진행과는 상관없다. 다시 소설속으로 들어가보자. 이제 알아야 할 인물은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의 CEO 후고다.

최악의 컨디션과는 상관없이 광고맨의 두뇌가 재깍재깍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콘셉트로서의 복수. 비즈니즈 모델로서의 복수. 후고는 마멀레이드와 감자 칩과 긁는 복권을 실제 이상의 가치로 포장할 줄 아는 마법사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팔아먹을 수 있다면, 복수를 가지고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재택근무를 하면서. (p. 125)

광고회사에서 잘 나가던 후고는 조금 슬럼프에 빠져들려 하던 때였다. 그때 기발한 사업이 떠오른 것이다. 후고는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새로운 사업은 처음부터 비교적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 하지만 일이 바빠질수록 점점 생각이 다시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작업의 합법성과 형평성뿐 아니라 자신의 효율성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창의적인 파트너를 영입하여 인력을 보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쉽고, 저렴하고, 즉각적인 방법은 전화를 받고, 이메일에 응답하고, 작업의 우선순위에 대해 조언을 줄 수 있는 보조원을 두는 것이었다. (p. 156) 바로 이때, 두 사람이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p. 157)'

[ 난 모든 것을 완전히 빼앗겼어요] 그녀는 결론지었다. [ 내 어린 시절, 내 유산, 내 인생,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 그렇다면 수임료는 어떻게 내겠다는 거지? 이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있었다. 아니면 옆에 있는 청년에게 돈이 있나?

[ 그렇다면 당신은 어때요?] 그는 케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미술품 거래인은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도 가져갔나요?]

[ 난 아버지를 가져 본 적이 없어요] 케빈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젠 엄마도 없고요, 에이즈로 돌아가겼거든요. 하지만 내 전 후견인-그게 누군지 짐작하시겠죠-이 날 케냐로 데려가 사자들 앞에 떨궈 놓고 갔어요] (p. 158)

난데없이 들이닥친 젊은 남녀중 여자는 빅토르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하고 남자는 빅토르에 의해 사지에 떨어졌으나 살아돌아왔다며 마사이전사로서의 재능밖에 가진것이 없다고 한다. 후고는 당연히 수임료 없이 '복수'를 진행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너무나 현실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때 케빈이 돈대신 그림을 주겠다며 그림 한점을 내민다. 케빈이 자신의 양아버지인 마사이전사이자 치유사인 음바티안이 그린 그림이라면서 내놓은 것은 이르마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 세사람은 지금 이 그림이 가짜라고 알고 있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 복수하게 될까? 아닐까? 하게 된다면 어떤 복수일까?

지금까지 올레는 자신이 타바카나 은돈요 너머까지 여행하기에는 너무 늙었거나 너무 매인 게 많다고 느껴 왔다. 거기까지 가는 것도 <짧은 비>가 내릴 때나 가능했다. 이제 그는 그곳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발바닥에 용수철을 단 듯이 활기가 넘쳤다. (중략) 그는 소 네 마리를 끌어내어 나로크로 몰고 갔다. 그것을 여행비로 쓸 요량이었다. (p. 218)

[ 난 여기 지폐가 몇 장 있소. 우리 추장은 현찰로 소를 더 선호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여러 가지 일을 하기에는 그게 좀 불편할 것 같아. 지금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되며, 이걸로 끝까지 갈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소? 만일 충분치 않다면, 마지막 코스는 좀 걸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p. 226)

케빈의 도망 이후 상심에 빠져있던 마사이 치유사 소 올레 음바티안 은 케빈의 편지를 받고 스웨덴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소 네 마리를 끌고 길을 나서서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자신을 좀 태워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스웨덴 이라는 곳은 자동차로 갈수가 없는 곳이란다. 여권도 있어야 하고 비행기도 타야 한단다. 그러나 음바티안은 스웨덴에 도착했다! 빨간색과 검은색 체크무늬의 홑겹 의상과 맨발로 신은 샌들 차림으로 영하 15도인 스웨덴 스톡홀름의 공항에!

당신은 <양산을 쓴 여자>와 <시냇가의 소년>을 빅토르 알데르헤임에게 팔았지만, 그 일을 바로잡을 뜻은 없어요.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맞나요?

난 그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어 본 적이 없다오.

그리고 과거에서 온 그 사진들과 편지들이 여전히 당신 소유인 것 맞나요?

그건 도둑질이었어! 내게 곤봉과 개미집을 주시오. 둘 다 주면 더욱 좋고. 그럼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리다. (p. 348)

마사이족 전사이자 치유사인 소 올레 음바티안 의 대화는 매번 그야말로 기상천외했다. 옌뉘와 케빈이 원하는 복수에는 이 사고뭉치이자 유일한 증인인 음바티안이 반드시 필요했다. 점점 더 늪에 빠지는 듯한 이 복수전은 기가막히게 빵빵 터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알고 있었다. 그 신화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자기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렇다면 이 케빈이라는 친구가 오이디푸스처럼 자기 아버지를 죽였을 수도 있다는 얘긴가?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p. 451)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데 뜻밖의 고대그리스신화 등장에 살짝 놀랐다. 서양문학에선 문득문득 고대스리스신화가 등장하곤 한다. 참으로 질긴 뿌리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소설을 다 읽어가는 이쯤에서야, 작가가 대놓고 알려준 이 신화를 읽고나서야, 이 소설의 줄거리속에 분명 이 오이디푸스 신화가 스며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wow 치밀하지 않은줄 알았는데 이 소설, 이 작가, 은근 치밀했던 건가~ ㅎㅎ

달콤한 주식회사는 새롭게 출발하여 다시 돈을 벌 수 있었다.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서울에 사는 부유한 과부가 그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먼저 그녀는 자신이 상류층 여자이며, 서울에서 가장 인기 많은 요양원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인이 요양원 원장으로부터 그녀의 1.5킬로그램짜리 포메라니안이 다른 원생들이 무서워하는 관계로 더 이상 시설에 머물 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따라서 과부는 후고가 한국 돈으로 2천5백만원어치에 상당하는 공포를 원장에게 안겨주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물론 개는 그 일을 무료로 해줄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에는 조금도 재능이 없단다. (p. 462)

갑작스레 등장한 서울 이라는 지명에 설핏 놀랐다. 스웨덴 작가가 하고많은 도시들중에 왜 서울을 굳이 집어넣었을까 궁금하여 기사를 좀 찾아봤다. 작가는 2019년에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라는 작가의 첫 작품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한국에서도 흥행몰이를 했고 그렇게 행사차 방문했던 당시 기억이 좋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재기발랄하게 진행되는 복수전은 독자의 예상을 계속 뒤엎으며 펼쳐지고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 가 <달콤한 건강 주식회사>로 변신하기까지의 과정이 유쾌상쾌통쾌하게 진행된다. 그 사이사이 발견하는 미술적 대화는 보너스이자 작가의 미술에 대한 애정이다. 코로나로 우울한 시대라는데 이렇게 유쾌함을 안겨주는 소설이라니! '다수 성공 사례 보유, 책에서 확인하세요!' 라는 홍보문구는 그저 홍보문구가 아니었다. 진실이었다! 잼으로 하는 복수라는 직접적 의미에서도 모두의 꿈을 이뤄주지만 복수는 복수라는 간접적 의미에서도 아주 적절하게 '달콤한' 그런 '복수' 였다. 그 달콤함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어서 이 소설의 책장을 펼쳐보기를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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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명승 - 이야기로 풀어낸 중국의 명소들
김명구 외 지음 / 소소의책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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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사로잡는 풍경 앞에서 새롭게 만나는 역사와 문화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역사서를 자주 찾아 읽는 편이다. 작년에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3>을 읽고나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중국의 변두리 역사(오아시스 , 신장 지역)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무척 인상 깊게 남아있다. <중화명승> 이라는 제목을 봤을때 중국엔 워낙 유명한 곳이 많으니 그 명소들을 소개한 책이겠거니 싶으면서도 [소소의 책]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깊이가 좀 다를 것이다 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였다.

이 책은 중국소설을 전공하거나 연구하고 있는 학회연구자 21명의 글을 모은 책이다. 중국의 각 지역에 얽힌 사연을 '명승'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낸 것인데 문학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다들 필력이 좋으셨다. 저자들이 알려주는 장소들은 하나같이 새롭고 멋졌다.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는 시대이지만 여행할 수 있는 시기라 해도 중국여행엔 그닥 관심없던 내게 가보고 싶은 중국의 곳곳을 리스트업 해두게 만들정도로 이 책속의 중국은 달랐다.

하얼빈에서 이효석의 거리를 떠올린 글에서는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라고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어로 외쳐야 했던 시대적 상황과 그런 시대에서 구라파를 동경한 '모던 보이'로서의 이효석을 알게 해주는 첫 글부터 포옥 빠져들었다.

거대한 자금성이 아니라 그 곁의 습례정이라는 작은 전각에서의 일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치욕의 역사로 알려진 '삼궤구고두례'가 치욕이 아니었음을 그 인사법보다 정말 치욕으로 생각해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키는 내용처럼 우리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들도 흥미로웠지만,

칭다오 맥주가 독일의 지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나 난징이라는 곳이 명당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역설, 원래 만주족 여인들의 옷이었던 치파오가 상하이에서 사교의상으로 변신하고, 마르코폴로가 방문했던 항저우에 3,000개의 공중목욕탕이 있었다거나, 토루를 만들어 살던 변방의 '객가'족이 어떻게 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리게 된건지 등등 중국 자체의 역사적인 이야기들도 무척 재미있었다.

오래전 역사들보다 근대의 이야기들이 많아 더 가깝게 읽혀지기도 했는데, 신채호가 체포된 지룽항 근처 지우펀에 '조선루'와 같은 조석유곽이 어떤 착취를 벌였었는지, 광둥의 비혼주의자 '자소녀' 집단이나 마카오에서의 김대건 신부의 삶,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신해혁명, 북벌전쟁, 국공합작 같은 중요한 사건마다 우한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 소림사 승려들의 사탑인 '탑림'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등등은 소설과 영화를 넘나들며 서술되는 내용들이 재미를 더했다.

고대역사 이야기들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었는데, 북위왕조때 대대적인 석굴이 만들어졌던 이유, 진시황의 진나라가 천대받던 이민족인 유목 민족 계통이라는 것이나 진시황이 나라를 점령할때마다 그곳의 궁궐을 그대로 복제해 함양에 똑같이 지었다는 것, 당나라 공주가 티베트의 여신이 되었던 문성공주 이야기나 둔황의 장경동 문헌이 유출된 과정등 모든 이야기들이 다 흥미롭고 새로웠다.

대부분 가슴아픈 역사 이야기이고 대부분 유명 관광지로서의 명승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서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때로는 역사로 때로는 문학으로 때로는 여행기로 때로는 에세이로 이 책에 실린 21개의 글을 모두 읽고 나면 '그곳에 관해 쓰다 보니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가지 못하는 그곳이 머리에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 느낌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p. 8)' 라는 [서문]속 문장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중화' 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나 '명승'이라는 단어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중국 곳곳에 깃든 이 사연들을 읽어보라, 나만의 명승이 분명 찾아질 것이다.

ps. 나는 중국다운 중국 보다 중국아닌 중국을 느낄 수 있는 '하얼빈의 성 소피아 성당' 과 '칭다오 팔대관' 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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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사회 - 공정이라는 허구를 깨는 9가지 질문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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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철학자 이진우 교수의 한국 사회 읽기

"공정을 간절히 외치는 사회는 불공정사회다"

'공정' 이라는 단어가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은 분명한데, '공정'이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꺼낼수조차 없던 시대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일텐데, 언제부턴가 사회문제를 말할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게 친숙해진 이 단어는 분명 불공정한 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는 단어일텐데 우리사회의 어떤 모습이 불공정한 것일까? 이 책에서 철학자 이진우가 불공정한 사회에 대해 9개의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동일한 질문에 다른 대답, 그것은 우리가 시대적 한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도 시대의 자식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정치철할적 질문에 영원한 답은 없다. 영원한 질문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이다. (p. 6)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책은 또다시 정치철학의 본질적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왜 우리 사회는 이래야만 하는가?' '불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정의는 과연 가능한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을 중심으로 지난 10년 동안 포스텍에서 수업한 내용을 기반으로 집필했다. (p. 8) -머리말 中-

저자의 이름은 니체의 책을 찾아 읽을때 알게 되었다. 한국니체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등을 역임한 저자의 책은 니체관련 책이 대다수이다. 니체의 책을 읽을때 저자가 니체전문 철학자인줄로만 알았었는데 주전공이 정치철학이었구나... 니체와 현실 정치철학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기분인데;;; 여하튼 니체전문가인만큼 현실의 정치철학을 논하는 중에도 니체의 철학은 자주 등장한다.

불공정사회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논하는 대신에 '부정적 자유'처럼 정의를 제한하고 침해하는 사회적 조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p. 13)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퇴보할 수 있고, 문명은 언제나 야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정적 요소를 하나씩 제거해가는 비판적 의심이다. 공정은 허구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정의로운 사회로 안내할 수 있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허구이다. 이러한 허구에 이끌린 이 책이 공정을 방해하는 요인들에 대한 비판적 여정의 동반자가 되길 바란다. (p. 17) -서설 中-

의심하는 철학자라는 이진우 저자는 '공정은 허구' 이지만 '이 책이 공정을 방해하는 요인들에 대한 비판적 여정의 동반자'가 되길 바란다고 본론을 시작하지만 '30여년의 강단 생활을 마무리하며 쓴 책이 명료한 답을 제공하는 대신 여전히 질문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나의 질문에 독자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기를 기대할 뿐이다. (p. 8)' 라고 시작부터 이 책은 '질문' 중심의 책임을 밝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질문의 책에서 답을 찾기를 바랬었다. 혼자 속으로 이 사회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의심과 질문을 되뇌었던가? 그런데 나보다 더 진지하고 논리적으로 진중하게 오랫동안 고민해왔을 철학자에게서까지 질문만 듣고 싶지는 않았다. 철학책을 종종 읽었을 때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재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나는 아무래도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법적인 것은 반드시 정당한가?

능력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가?

뛰어난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가?

내 것은 정말 나의 것인가?

부는 집중되어야 생산적인가?

경쟁은 효과적인 분배 방식인가?

연대는 언제 연고주의로 변질하는가?

정의는 이념 갈등에 중립적인가?

신뢰는 더는 사회적 덕성이 아닌가?

라는 아홉가지 질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왜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사실 이 아홉가지 질문은 질문이 아닌 명제로 명치를 찌르는 듯한 아홉가지 문장이기도 했다.

위의 아홉가지 질문을 바꿔말하면,

합벅적인 것이라고 반드시 정당하진 않고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뛰어난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 없고

내 것은 정말 나의 것이 아니며

부는 집중되어야 생산적이지 않고

무한경쟁은 효과적인 분배방식이 아니며

연대는 쉽게 연고주의로 변질되어 집단주의화 되고

정의는 이념 갈등에 중립적이지 않아 왔으며

신뢰는 사회적 덕성이지만 현실은 너무나 저신뢰 사회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왜 우리 사회에는 공정의 논란이 유독 많은가? 공정이 제도화되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공정에 대한 목소리는 크지 않을 것이다. 공정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불공정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불공정사회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공정사회로 나아간다. (중략) 불공정 사회에서 공정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이렇게 의심하고 질문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p. 282)

마이클 샌델의 <공정이라는 착각>을 읽으며 느꼈던 허무감이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 꿈같은 이상이나마 그나마 답을 주었던 그 책이 갑자기 그리워 졌다. 저자는 아홉가지 질문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본내용들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볼수 있었다. 돈이 능력이 되고 학벌이 그 능력을 공고히 해주는 사회에서 특권계층이 권력을 쥐고 있는 사회가 불공정한 사회라는 것은 아홉가지로 나눠서 현학적으로 질문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 않나. 그런 현실에서 공정에 대한 질문만 던지고 있는 것은 사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형국이다. 우리가 그동안 정말 질문하는 능력이 없었던가? 우리가 그동안 정말 아무 의심 없이 믿고 따라만 왔던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늘 의심했고 왜냐며 따져왔다. 그래서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변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불공정사회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보다는 답을 구해야 할 때가 아닐까. 어려운 질문을 쏟아놓고 독자에게 그 해답을 찾아보라는 책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오래 깊게 고민하여 답을 내놓는 철학자의 책을 읽고 싶다. 하지만 그 시작은 분명 질문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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