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간의 교양 미술 - 그림 보는 의사가 들려주는
박광혁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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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일, 그림에 눈뜨는 시간

매일매일 순간이동 미술 여행

저자는 스스로를 '진료실과 미술관을 오가며 의학과 미술의 경이로운 만남을 글과 강의로 풀어내는 내과 전문의' 라고 소개한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 와 <히프크라테스 미술관> 그리고 000에 간 의학자 시리즈를 합쳐놓은 <과학자의 미술관> 은 그러한 자기소개가 적절히 표현된 책이었다. 어쩌다 보니 저자가 진료실과 미술관을 오가며 풀어낸 책을 대부분 읽은 나로서는 이 책의 제목에서 약간 어중간함이 느껴졌다. 의사로서 풀어내는 그림이야기는 의학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신선함이 있었지만, 의학과 상관없이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여 수많은 그림을 본 (직업이 의사일뿐인) 사람으로서 쓴 교양서는 좀 다를 테니까.

제목에서 '60일간' 이라고 써놓았듯이 이 책은 하루에 한명씩 60명의 화가를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목차에서 정리해보면 프랑스 16, 이탈리아 4, 영국 4, 독일 6, 네덜란드 7, 아일랜드 1, 벨기에 1, 덴마크 2, 핀란드 2, 노르웨이 1, 스페인 1, 스위스 2, 오스트리아 2, 러시아 5, 미국 6 으로 굉장히 다양한 나라의 화가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대부분의 화가들이 근대화가들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고전에 대한 교양보다는 생소한 근대미술과 화가들에 대한 상식을 넓힐 수 있는 책이다. 그러니까... 미술사적인 책은 아니란 소리다.

미술사조나 기법 같은 전문적인 미술이야기도 아니고 화가의 생애를 전기적으로 서술한 것도 아닌 이 책은 화가별로 그림 몇점을 보여주면서 그림에 얽힌 이야기 조금과 화가의 인생사를 조금 엮어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저자의 앞선 책들이 의사로서 그림에서 의학이야기를 뽑아냈다면 이 책은 의사로서가 아닌 그림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에세이 라고 할 수 있겠다.

상식을 넓혀주는 소소한 재미들은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소녀> 그림 속 책이 당시 엘리트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던 볼테르의 [캉디드]라는 풍자 소설 이라거나, 유명한 브랜드 '시슬리'가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 부처를 그린 서양화가 르동, 보티첼리는 본명이 아니라 별명인 셈인데 이탈리아어로 '작은 술통'이라는 것, 이 책의 표지그림의 화가이기도 한 레이턴은 영국에서 화가 중 최초로 세습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하루만에 소멸되었다는 일화, 고독한 남자의 뒷모습 그림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가 히틀러에게 칭송받으며 나치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됐었다는 것, 서양미술사에 알려진 화가 중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화가인 독일의 에밀 놀데, 동시대인물도 아닌데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함께 그려지고 그시대엔 있지도 않았던 지구본이 함께 그려진 이유, 아일랜드의 국민화가라고 칭송받은 존 레버리, 제너의 종두법 보다 82년 앞서 '인두법'을 알렸던 몬태규 부인 일화 등이 기억에 남는다.

기존 미술 책들에서 여성화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았던 만큼 책속에 여성화가들이 꽤 여럿 등장한 것이 반가웠는데,

마리 가브리엘 카페 와 스승인 아델레이드의 이야기나, 모리조가 로코코 시대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 라는 것, 초상화 작가로 인정받았던 테레즈 슈바르체, 프랑스 인상주의를 미국에 알린 릴라 캐벗 페리 등 알려지지 않은 여성화가들을 볼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아쉬었던 것은 마리 바시키르체프 의 그림 <회의> 그림이 짤려서 실렸다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짤린 부분이다. 소년들의 '회의'가 아닌 소녀의 뒷모습... 또한 헬레네 셰르프백 의 그림들도 그녀의 화풍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그림들이 실린 것도 좀 아쉽다. 또한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헬렌:내 영혼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는데 홍보 문구에 '핀란드의 뭉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생소할 수 있는 핀란드 여성 화가를 알리기 위해 우리나라 대중에게 익숙한 노르웨이 화가 뭉크를 연결한 듯하네요. (p. 284)' 라는 표현은 개인적으로 정말 많이 아쉽다. 나는 이 영화를 봤다. 굉장히 수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를 저자가 봤다면 단순히 뭉크가 유명한 화가이기 때문에 헬렌과 연결지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텐데... 싶어서... (유명한 화가는 많다. 헬렌이 '핀란드의 뭉크'인 것은 유명세가 아니라 '화풍' 때문이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므로 오류라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좀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내용이 있었는데,

'니체, 슈만, 보들레르 등 다수의 역사 속 인물들이 이 병으로 고통받고 죽었으며 (p. 56)' 라는 구절은 다른 책에선 니체의 죽음이 매독에 의한 정신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설'이 있는 내용일 경우 '설'로만 언급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고,

메두사 에 대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녀에게 반해 끈질기게 구애했고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아테나 여신이 포세이돈을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데다 둘의 사랑이 아테나 신전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p. 132)' 라는 내용은 메두사 신화에 대한 3가지 '설' 중 두가지를 합쳐놓은 내용이라 정리 혹은 구분이 필요해 보인다. (위키백과만 찾아봐도 3가지 '설'이 잘 구분되어 나온다)

다른 책도 아닌 저자 본인의 책에서 다루었던 내용인 만큼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는데

<미술관에 간 의학자> 에선 나폴레옹이 옷 속에 한 손을 집어 넣고 있는 포즈에 대해 명치 부위에 통증이 빈번히 발생해 그곳을 만지는 것이 습관화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했었는데 이 책에선 '흔히 나폴레옹 포즈 라고 알려진 자세입니다. 이 포즈는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 아이스키네스가 유행시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할 때 손이 보이는 게 매너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는 것인데요, 이후 프랑수아 니벨룽의 <점잖은 품행의 기본>(1737)이라는 책에서도 손이 보이지 않게 코트 안에 넣는 것이 겸손의 상징처럼 소개된 것을 보면 당시 상류층 사람들이 다시 이런 자세를 취하고 다녔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p. 39)' 라고 바뀐 입장에 대해 저자 본인의 앞선 책에 대한 내용을 수정한다거나 언급하지 않은 것이 좀...

본문 자체에서 서로 상충되는 구절이 있기도 했는데,

'동시대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렸던 에두아르 마네는 볼롱울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네가 볼롱을 비판했던 기록도 있지요. 그래서인지 사후에 볼롱은 빠르게 잊히고 맙니다. 볼롱은 현재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화가 중에 한 명입니다. (p. 60)' 라는 내용은 마네에게 한 화가를 잊혀지게 할 만큼 엄청난 권위기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마네의 생애 마지막 그림조차 '많은 비평가들은 마네의 자화상뿐만 아니라 초상화에서 인물이 의도적으로 평평하게 묘사되어 있어 입체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했습니다. (p. 56)'처럼 그림마다 혹평과 비난을 받았던 마네에 대해 앞 챕터에서 쓴 내용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편집이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도 곳곳에 있었는데 가장 크게는 한 페이지 상에서 수정전 과 수정후 로 보이는 두 문단이 함께 실린 경우였다.

'꽃 시리즈를 창작한 후 4년이 지난 1968년 6월3일, 편집성 조현병응로 피해망상을 품은 여성의 총에 맞아 두 달간 입원하게 됩니다. 응급 수술로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였고 몇 차례 추가 수술 후에도 후유증으로 고생하였지요.

꽃 시리즈를 창작한 후 4년이 지나 40세가 되던 1968년 6월 3일, 워홀은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으로부터 총에 맞아 두 달간 입원하게 됩니다. (p. 407)'

무엇보다 어색했던 것은 본문의 마지막 페이지 가 끝나고 바로 색지라는 점이다. 본문이 끝나면 저자의 마무리 말이라던가 참고도서나 혹은 도판 출처 라던가 하다못해 출판사 인쇄일 페이지라도 있는 것이 책이 끝났구나 싶은 기분을 주는데 본문의 마지막 페이지 로 그냥 끝 이라니 책의 편집이 여러모로 아쉽다. 하지만 그림들이 비교적 크게 실린 것들은 좋았다.

재미있게 읽히는 책에 대해서 이런저런 아쉬운 점만 잔뜩 늘어놓아서 저자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미술관에 간 의학자> 나 <히포크라테스 미술관> 을 읽으면서도 아쉬운 부분들이 좀 있었기에 그것들이 보완된 책이 아니라 보완해야 할 점이 더 많은 책을 저자가 펴냈기에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곳곳의 숨은 명화들을 보는 것도 좋고 하루 한편씩 두달간 예술 수다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좋고 60명의 화가와 그보다 더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저자가 쓴 책이 이 책이 첫 책이 아닌만큼 앞으로의 책은 기초자료가 좀더 탄탄한 책을 써주시면 어떨까 바래본다.

여하튼 쉽게 술술 잘 읽히는 책이었고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을 풍부하게 보면서 뜻밖의 신선한 에피소드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던 책이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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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 알고 보면 가깝고, 가까울수록 즐거운 그림 속 철학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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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가깝고, 가까울수록 즐거운 그림 속 철학 이야기

미술도 처음, 철학도 처음이라면

그림 앞에서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생각

정치철학을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고 철학과 육아를 버무린 책을 쓰며 독일 맥주가 삶의 원동력이라는 저자의 두번째 책인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미술관에 놀러다니며 느꼈던 것들과 그동안 저자가 학교에서 배우며 공부했던 것들을 엮어서 한껏 잘 차려놓은 잔치상 같은 책이다. 뷔페처럼 골라 먹어도(읽어도)되고 한식처럼 하나씩 맛봐도(읽어도)되지만 나는 (요새 내게 너무 필요한) 주안상을 받은 듯 술처럼 마시고 안주처럼 먹었다(읽었다).

앞으로 이어질 여러 편의 글은 이렇게 조금은 난해할 수 있는 철학적 개념을 좀 더 쉽게 머릿소에서 재생시킬 수 있는 스위치 같은 예술 작품을 골라서, 눈으로 보면서 생각해보는 놀이입니다. 즉 미술에 철학을 올려놓고 싸 먹는 쌈이 될 겁니다. 맛있었으면 좋겠는데 맛이 없을까 봐 걱정입니다. (p. 8) 이 책은 사실 학생 때부터 가장 쓰고 싶었던 것으로, 마음속에 아주 오래 묵혀뒀던 아이디어들입니다. 미술도 철학도 어렵다고 생각해서 살짝 도망치고 싶은 분들께 수줍게 권하고 싶습니다. 저도 노는 겁니다. 같이 놀아요. (p. 9) - 들어가는 말 中 -

13편의 글 속에 그 배가 넘는 철학개념들이 있고 또 그 배가 넘는 그림들이 등장한다. 때로는 철학적 개념이지만 때로는 현실이나 삶 그 자체이기도 했다. 철학자의 책도 어렵고 미술가의 책도 어렵지만 그 둘이 중간 어딘가에서 만난 이 책은 미술사적이지 않고 피상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철학도 미술도 다 구체적이라 좋았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올해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겨주었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는 그림으로 시작해서 더 좋았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니체 철학과 연결될 줄이야 ㅎㅎㅎ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 즉 신에게 가 닿으려고 간절히 염원하는 인간과 그를 부드럽게 포용하는 신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유유자적한 쪽은 아담이고 의지와 열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쪽은 신이다. (중략) 미켈란젤로는 신과 그가 창조한 첫번째 인간이 만나는 순간을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p. 19)

그 유명한 그림 <천지창조> 이고 특별전까지 가서 유심히 봤던 그림이었기에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과 인간의 손가락만 클로즈업 해서 보여졌을때 어느쪽이 신이고 어느쪽이 인간이었더라 라는 방향을 생각하기에 앞서 손가락의 모양만으로는 직감적으로 무심한듯 내민 손이 신이고 손가락 하나라도 길게 뻗어 닿으려 애쓰는 손이 인간의 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두번 본것도 아닌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또한번 놀라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무지와 신의 열망을 니체가 철학으로 풀어냈을 줄이야.

니체는 허무주의로 알려져 있지만 인간 삶의 험함을 가차 없이 폭로한 데서 허무주의라는 이름을 얻은 것을 뿐, 그 허무를 껴안고 계속 전진할 것을 주문하기 때문에 사실 허무주의를 한 차원 뛰어넘는 인물이다. 허무주의자가 아니고 허무주의를 극복하자는 사람이다.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염세의 철학이 아니라 긍정의 철학이다. (p. 27)

철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철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들은 소리로는 철학책을 읽을 대 니체의 책을 가장 나중에 읽으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니체의 철학은 다른 철학들이 애써 쌓아놓은 공든 탑을 허물어버릴 만큼 강력한 염세적 허무주의를 깨닫게 하는 철학이라고 들었었기에 어쩌다 가끔 철학대중서를 읽을 때도 니체의 책은 조심스레 건너뛰곤 했었다. 그러다 올해 어쩌다보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읽게됐는데 다 읽고 나서 허무하긴 했지만 '허무주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우화처럼 쓰인 이 책은 내게 약간은 구도자의 책처럼 읽혔고 약간은 열렬한 사상가의 책처럼 읽혔다. 그 에너지가 넘쳐나서 전혀 허무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 니체 철학이 염세의 철학이 아니라 긍정의 철학이었구나...wow

군자불기는 동양철학의 고전인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간단한 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p. 40) 군자불기는 막스 베버가 말한 '영혼 없는 전문가'와도 맥이 닿는 말이다. 군자가 도구나 부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막힌 곳 없이 두루두루 통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은, 곧 영혼 없는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p. 43) 쓰임새와 크기가 정해진 것은 군자가 아니다. 안팎을 구분하는 단단한 경계가 있고 한정된 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군자가 아니다. 하지만 리카 반도의 작품 속 메이슨 자를 보면서 나는 군자가 이 유리병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생각한다. (p. 46)

동서양의 철학을 넘나들고 동서양의 그림을 넘나드는 이 책은 그 다양한 폭 만큼 생각의 넓이도 넓었기에 가끔 검색찬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내가 검색한 것은 '군자불기'라는 논어의 구절도 아니고 '영혼 없는 전문가' 라는 막스 베버의 철학도 아니었다. 내가 검색한 것은 '메이슨 자' 였다. 메이슨 자가 뭐지??;;; 익숙한 유리병이었지만 메이슨 자라고 하니 생소했다. 아직은 철학도 그림도 내게 이 메이슨 자 같은 것이라서 그러려나...

책가도는 책가, 즉 서가를 그린 그림이고 책거리는 서가가 있든 없든 책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다. (p. 55) 책거리는 가장 한국적인 정물로 통한다. 외국 명화들 속에도 책이 더러 등장하지만, 우리처럼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그려 약2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즐겼던 나라는 없는 듯하다. 그만큼 우리는 책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온 사람들이다. (p. 59) 책거리에 담긴 사물들을 보며 떠오르는 개념은 가치 다원주의다. (p. 66)

나는 책가도도 책거리도 좋다. 외국의 호기심캐비닛이나 장식장을 그린 그림들도 보기 좋지만 병풍 가득 책만 그려져 있어도 잡동사니 속에 책이 쌓여있어도 나는 책이 많은 그림이 좋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나라가 이토록 책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온 사람들인데 출판시장이 힘들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여하튼 이렇게 애정어린 책과 함께 풀어지는 철학개념은 책장이 술술 넘어가듯 쏙쏙 이해가 된다. 철학을 공부하게 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을 그림처럼 음미하게 하는 책이다.

나에게 '사과 하면 홉스'인 것은 단지 내가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배울 때 자연상태의 개념을 사과로 배웠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렇게 파악한 개념들을, 사과를 그린 작품 두 점을 보며 풀어보겠다. (p. 75)

국가의 형성이나 사회계약 관련한 것을 공부할때 중고등학교 교과서엔 홉스, 로크, 루소 3명이 비교대조 설명된다. 저자도 이 3명을 통해 그 개념들을 설명하는데 저자가 보여준 그림을 본 순간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아~ 자연상태의 차이~가 아~ 하고. ㅎㅎ 그리고 홉스와 로크에 비해 좀더 상세히 설명되는 루소의 사상을 깨닫게 하는 파울 클레의 그림엔 실소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들이 무슨 이유로 모여 살게 되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 홉스와 로크에 반해, 루소는 인간이 모여 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더 관심이 있었다. (p. 96) 홉스와 로크는 공통적으로 인간이 사회계약을 통해 보다 더 나은, 진보된 상태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루소는 정반대로 인간들이 맺는 사회계약은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서명에 불과한, 더 나빠지는 상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p. 101)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답이다. (p. 102)

인간들이 모여살아야 서로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홉스와 로크는 왜 모여살게 되었는가 라는 기초적 자연상태에 질문을 던지지만 인간들이 모여살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인 루소에게는 어떻게 모여살아야 좋을까 라는 삶의 형태에 질문을 던진다. 기원을 올라가는 철학도 이상향을 추구하는 철학도 다 철학답지만 그 뜬구름 같은 철학을 그림을 봄으로써 현재에 시선을 둘 수 있었다. 읽을수록 참 묘한 조합이다 싶으면서도 신선했다.

미래주의 미학은 결국 이탈리아 파시즘과 결합하게 된다. 과거를 증오하고 미래를 사랑하자는 파괴적인 생각은 결국 미술의 영역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옳고 그름의 구분'을 예술에 덧대고자 했다. (p. 122) 아름다움의 영역에도 옳지 못한 것, 청산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 그렇게 힘과 속도와 기계를 찬양했던 미래주의는 결국 '약하고 부드러운 것에 대한 구토와 혐오'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던 파시즘과 악수를 나누게 된다. (p. 123)

형이상학적 철학을 구체적 그림으로 느끼게 되기도 하지만, 미학이 너무 정치성을 띠게 될때 그 미학은 결국 미학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어떤 정치적 메시지가 문화의 탈을 쓰고 들어올 때를 특히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한다. (p. 125)' 철학과 그림이 이래서 조화로울 수 있었나 보다. 둘다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

저자는 오만원권의 뒤에 있는 그림 '월매도'와 '풍죽도' 에 대해서 여백을 없애고 달을 내려뜨린 그 합성그림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달이 추락한 그림이 든 지폐로 오늘도 기술을 사고 여유를 팔고 유행을 먹고 낭만을 마신다. (p. 129)' 며 씁쓸해한다. 나는 이렇게 일상속 그림에 대해서까진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림은 미술관이나 책을 통해 보는 것이지 일상 곳곳의 사물에 혹은 다른 곳에 그려진 것을 보면서 '그림'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림이 이렇듯 일상 가까이 여기저기에 들어와 있듯이 철학도 우리의 생활 곳곳에 들어와 있는게 아닐까.

학문의 승리를 그리랬더니 승리는 무슨, 주제 파악을 잘하자는 그림을 그려 온 클림트를 보고 아마 교수들은 <철학>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머리를 싸맸을 것 같다. (중략) 교수들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클림트를 비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보다 학문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클림트였다. 학문이 보일 수 있는 위선이라든가, 학문이 가지는 명확한 한계까지 덤덤이 포괄한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토록 하는 그림들이다. 대학이 무조건적으로 학문을 찬양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p. 139)

오스트리아 빈 대학 천장에 배치할 그림 3점을 클림트에게 요청했었다고 한다. 주제는 철학, 의학, 법학 3가지. 그런데 클림트가 가져온 결과물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당시에 걸리지 못했고 분개한 클림트는 받은 돈을 돌려주고 그림을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클림트의 명성이 높아지자 세계대전 당시 화재를 당한 이 그림의 스케치와 사진을 통해 복원한 그림은 지금 흑백복사본으로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클림트의 화려한 색감은 볼수 없지만 그림의 내용은 분명 클림트가 학문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듯 보였다. 클림트의 화려함만 알았던 내게 클림트의 깊이를 알게 해준 저자는 아렌트와 동시대 철학자였던 주디스 슈클라 라는 뛰어난 여성철학자도 소개해주었다. 슈클라는 그 유명한 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에 맞장을 떴던 여성 철학자였다.

이런 슈클라의 주장은 앞서 본 클림트의 천장화 시리즈와 매력적인 접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클림트의 그림들을 보면서 슈클라의 '공포(로부터)의 자유쥬의'를 떠올렸다. 우리가 자유의 개념을 이해하고 증진시키려면 자유 그 자체보다는 공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자, 슈클라의 그 유명한 논문 제목이다. 자유를 위해서는 공포에 시선을 두어야 하듯 철학은 모호함을 통해, 의학은 죽음을 통해, 법과 정의는 죄와 불의를 통해 그 본질이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다. (p. 147)

이 책은 읽다보면 은근히 다음 주제로 물흐르듯 연결되는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니 '정의'에 대해 논하고 난 후에 정의의 여신 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의의 여신상 이야기는 당연히 '정의'에 대한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무연수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칼은 아무리 보아도 양날이 아닌 외날인데, 고전미를 부각하려는 취지에서 전통적 냄새가 물씬 나는 도검을 선택하다 보니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소중한 알맹이를 놓치게 된 것 같아 아쉽다. (p. 165)' 라는 문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정의와 양날의 칼에 대한 연결과 설명은 이해하지만 우리나라에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이 반드시 양날의 칼을 쥐고 있어야 하는걸까? 양날의 칼은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외검은 칼날로 한번에 베지 않고 칼등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온건함이 있다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영화에서였더라... 사극이었는데 두 원수가 격렬하게 칼부림을 하다가 한명이 칼날로 이기려는 순간 적의 목에 닿은 것은 칼날이 아니라 칼등이었고 두 원수는 대를 이어온 살육을 멈추게 됐었다. 그 이후로 칼에는 칼날만 있는 것보다 칼등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꽤 괜찮은 것이었구나 라는 나름의 깨달음을 간직하게 됐다. 그러니 다른나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에는 서양의 시퍼런 양날의 검이 아니라 칼등과 칼날이 함께 있는 외검을 쥐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클레가 남긴 말 중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말이 철학과 클레 작품들 사이의 매력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정수라고 생각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주변에, 우리 생각 속에 존재하는 관념들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 이런 클레의 예술관은 바로 내가 쓰고 있는 이 책의 의도를 관통하기도 한다. 관념을 눈에 보이게 하는 작품들,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띄우고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들. 그래서 나는 클레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다. (p. 195)

그래서 이 책속에 클레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었나 보다. 저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을 나는 그동안 자주 보진 못했지만 저자의 철학들과 함께 읽다보니 그 매력이 배가되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파울 클레의 그림들을 좀 잔뜩 봐야 겠다. 책으로나마 ^^;;;

골방에 갇혀 쉴 새 없이 수많은 매듭을 짓다 보면 눈이 혹사당하기 일쑤였고, 카펫을 완성하고 나면 아이들은 대체로 시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우표만 한 면적에 백 개의 매듭이 들어갔으니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업은 꽤 선호되는 직종이었는데, 몸이 부서지고 착취당해도 나와 내 가족이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시력을 잃어가며 말랑말랑한 손가락을 놀렸을 태피스트리 짜는 소녀들. (p. 261)

그림보다 더 그림같은 태피스트리를 보며 그저 감탄스럽곤 했다. 어떻게 저렇게 실로 그림보다 더 정교한 그림을 짜낼 수가 있는지 신기해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노고는 미처 몰랐다. 그저 당시 여성들의 손재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느다란 실로 매듭을 지어 만드는 태피스트리는 어른의 손이 아닌 어린 소녀들의 작은 손들이 그 노동이 들어가 있었다. 설국열차의 제일 앞칸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부터도 미술작품을 볼 때만큼은 그저 이런저런 생각 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체로 감탄할 준비를 하고 간다는 바로 그 지점이 우리의 눈을 가릴 수 있다. (중략) 우리가 다소 무방비적으로 감상하러 가는 작품들 안에 제법 그늘이 많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즐기는 편이 나와 그 작품 간의 좀 더 입체적인 만남이 아닐까. (p. 271)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던가 나는 그저 내눈에 이쁘고 내마음에 흡족한 것만 보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림은 그저 휴식처 같은 의미였다. 보기에 불편한 그림은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림도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이 던지는 질문이 모호할때 그림은 구체적으로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으로 경험한 바, 보고싶지 않은 그림을 보며 애써 덮어두었던 생각들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예쁜 그림은 그나름대로 예쁘지 않은 그림도 그나름대로 다 누군가 봐주길 기다렸겠구나 싶었다.

이토록 건강하게 빛나는 아이들, 하루하루 온몸으로 삶의 찬가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주목한 철학자가 있다. 두텁게 드리워졌던 근대의 커튼을 열어젖혀 현대라는 무대에 조명을 비추기 시작한 인물, 바로 니체다. 가끔 생각한다. 계몽과 진보라는 시대정신이 우산처럼 씌워져 있던 근대는 어쩐지 부모 같고, 그게 싫다고 우산을 팽개치고 뛰쳐나간 현대는 알록달록한 아이들 같다고. (p. 280)

니체의 인간형은 뭔가 일반 대중과는 다른 사람,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 무리에게서 떨어져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수행자 같은 느낌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오해다. 위버멘쉬는 누구보다 다른 이들과 함께 가는 인간형이다. (p. 284)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니체로 시작해서 니체로 끝나는 책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알려주는 '니체'는 천진한 아이 같다. 사실 니체도 자신의 철학에서 궁극적으로 아이의 모습을 추구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널리 알려진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의 비유다. (p. 282) 비록 파도에 허물어지더라도 끊임없이 모래성을 쌓으며 즐거워하는 아이, 생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늘 긍정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아이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전형이다. (p. 283)' 미술과 가볍게 조우하는 철학책인줄 알았더니 이렇게 니체를 가볍게 만나게 될 줄이야. ㅎㅎ

이 책에 추천사를 쓴 정여울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그림을 사랑함으로써 철학을 더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고 했고 김만권 정치철학자는 '마음이 고플 때 그의 책을 펼치면 식탁이 된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철학이 만든 온갖 맛있는 지식과 곳곳에 스며든 온기를 만날 수 잇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저자가 맥주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지 종종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게 만든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술상이었다. 얼큰달큰 술술 넘어가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마시던 술처럼 그림에 취하고 철학에 취해서 술술 넘겨 읽다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린, 그런 책이었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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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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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란 단어보다 생존이란 단어에 익숙해진

지금 십대들의 '일주일'의 표정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가 8권이 나오기까지 어쩌다보니 이 책으로 4권을 읽은 그러니까 이 시리즈의 반을 읽은 셈인데 이 4권 중에서 <일주일>이 가장 좋았다.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이 시리즈의 취지에 (내 생각에는) 가장 부합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야 언니에게> 라는 작품으로 최진영 작가를 알게 되었다. 아픈 현실을 아프고 쓰지만 차갑지 않게 쓰는 작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러한 매력이 빛을 발했다.

일요일, 수요일, 금요일 이라는 제목의 3편의 단편은 각각의 단편이기도 하고 여러가지 주제로 하나로 묶이는 작품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모두 고등학생 이라거나, 특성화고/ 특목고/ 일반고 의 이야기 한편씩 이라고 구분한다거나, 해당 사건을 겪는 주인공들에게 의미있는 요일이라거나 등등...

<일요일>

나는 겁에 질려 있다. 왜냐하면. 이유 따위 붙일 필요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이유에 집착하고 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유를 말하기 때문이다. (p. 9)

일요일은 주말이고 쉬는 날이고 휴일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럴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릴때부터 친구인 세 명은 일요일이면 성당에서 만났다. 종교는 큰 의미 없었다. 그들이 약속하지 않아도 일요일이면 늘상 만난다는 것이 중요했다. 일요일은 그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휴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각자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우는 외국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에 외국 대학교의 교수가 될 거라고 했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 모든 걸 다 해낼 거라고 했다.

그러면 이긴 것 같을 거야.

도우는 이기고 싶어했다. 도우의 라이벌은 동급생이 아니라 이미 성공한 부모님이었다. 성공한 자리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부모님과 자존심을 걸고 싸우던 도우. 도우에게 공부는 노동이었다. (p. 19)

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주고 싶었다. 내 돈으로 내가 살고 싶었다. 돈을 모아서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다. 서른 살 되기 전에 그 모든 걸 다 해내고 싶었다. 나 역시 노력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p. 21)

그러나 일요일에는 서로의 평화를 빌 수 있었다. 장난스럽게 목례하면서도 나는 도우와 민주의 평화를 진심으로 빌었다. 도우와 민주도 그랬을 것이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p. 22)

어릴 땐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놀면 그만이었는데 그들은 어느새 고3이 되었다. 외고에 간 도우와 일반고에 간 민주 그리고 특성화고에 간 '나'는 삶의 방식이 이미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때 미성년자 실습생승의 사고사 뉴스가 나왔다.

세상은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누구는 웅덩이에 있고 누구는 언덕에 있다. 각자 다른 세상에서 어쨌든 노력하며 아무튼 불공평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 제발 세상이 좋아졌다느니 젊은 애들이 문제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p. 26)

<수요일>

지형의 보호자가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여준 종이에는 지형의 비밀문자가 적혀 있었다. 보호자가 물었다. 너는 이게 대체 뭔지 알고 있니.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p. 53)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인 특목고에서도 등급은 나뉘기 마련이다. 1등이 있으면 꼴등이 있고 적응하는 이가 있으면 부적응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공부도 잘했고 적응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지형이가 사라졌다.

지형의 보호자가 종이를 접으며 말했다. 애 아빠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어. 이걸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건 장난이 아니야. 우리 지형이는 부모를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는 애가 아니야. '서영광'이라는 사람에 대해 지형은 가끔 이야기 했다. (p. 54)

지형은 장난을 좋아했다. (p. 55) 어쨌든 장난의 끝에서는 웃기 위해 지형은 (치밀하게) 장난을 치는 편이었다. 숨거나 숨기거나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아픈 척하는 건 가벼운 장난. 진실인지 거짓인지 오직 지형만이 알고 있기에 섣불리 화를 내거나 안심할 수 없어서 오직 지형의 말을 믿고 지형이 웃으면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건 (몽유병과 악몽, 상처와 흉터,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기사가 증거로 제시되는 사건들에 대한 증언 등) 지독한 장난. (p. 56)

'멀지 않은 도시의 공장에서 미성년자 실습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짧은 기사를 보여주면서, 지형은 그 아이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죽은 아이가 자기 친구라고 했다. 학교 근처의 아파트에서 또래 아이가 학대를 당하다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지형은 말했다. 그건 뜬소문이 아니라고, 자살한 아이는 자기의 옛 친구이며 또 다른 친구를 통해 소문이 진짜라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했다. (p. 56)' 지형은 자신만의 문자를 만들어 기록할 정도로 독특한 아이였지만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첫사랑 경험도 있는 어떻게 보면 꿈많고 노력파인 고등학생이었다.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를 그저 서영광 이라고 저장하고 자신과 소통이 되지 않는 어머니를 그저 보호자 라고 저장해 놓았지만 친구들에게만큼은 자신을 보여주는 진심이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형이가 사라졌고 보호자가 '나'를 찾아왔다. 부모가 절대 암호를 풀수 없었던 핸드폰을 초기화해서 버젓이 책상위에 놓고 사라졌다. 그 핸드폰엔 '나'에게 보낸 문자 하나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형의 문자를 알지 못한다. 지형의 '장난'일까 아닐까.

하루에 청소년 스물 세명이 자살한대요. 우리나라에서. 아줌마는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얘,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 넘어. 어림잡아서 하루에 천 명 가까이 죽고 태어난다고 치자. 그중 스물 세명이면 1프로도 안 되는 거야. (p. 78)

지형을 구렁텅이에서 어서 꺼내주려고 나는 말했다. 네 탓 아니야. 우리중에 성적 스트레스 없은 애가 어디 있어. 근데 걔는 그걸 네 탓으로 돌리고 싶었떤 거야. 그래서 너한테 들러붙은 거야. 솔직히 네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 그런 애들 걸리적거리잖아. 영주처럼 나약한 애는 언제 죽어도 죽었을 거야.

아줌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영주는 죽고 지형이는 사라졌어요.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아줌마는 어떻게 확신해요? 지형이는 절대 스물 세명에 포함될리 없다고? 지형이가 그렇게 특별해요? 왜 지형이만 특별해요? (p. 84)

'나'는 지형이의 베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형에겐 늘 '나'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었다. 지형이만의 문자를 보여준 것도 '나'에게는 두번째 였다. 하지만 중요한건 이제 정말 중요한건 이런게 아니다. 지형이가 사라졌고 지형이만의 문자를 '나'는 해독하지 못하지만 지형이는 아마 돌아올 것이었다. 다만 '나'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1프로에 속하고 싶었다. 1프로도 안 되는 존재에 속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이 거짓일까 봐 두려웠다. (p.86)'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1프로의 존재와 아무나 올라갈 수 없는 저 위 아득한 곳의 1프로, 세상이 그렇게 양 끝 1프로씩 2프로만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 끝 2프로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너무나 다르게 너무나 다르게. 우리는 그 사이 98퍼센트의 세상에 대해 좀더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2프로가 98프로의 세상을 잠식하지 못하게 98프로의 세상이 2프로의 세상을 감싸 안을 수 있게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을까...

<금요일>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가방을 싸 들고 교실을 나오기 직전에, 아니, 가방을 싸기 직전에 나를 떠민 생각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였다. 이젠 진짜 이곳을 견딜 수가 없다는 생각. 당장 벗어나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p.89)

특성화고, 특목고 의 이야기가 너무 딴세상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고의 이야기라고 해서 그닥 나을 것은 없었다. 일반고에 다니는 아이들 중 과연 얼마나 학교에 정말 가고싶어서 갈까? '나'는 학교를 더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다. 고2가 될때까지 다닌 10년 도 너무 길었다.

여름방학 끝날 무렵 엄마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엄마는 이유를 물었고 나는 학교가 너무 싫어, 라고 대답했다. 그건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많이 했던 말이다. 방학이 끝날 때마다, 운동회나 소풍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월요일마다 금요일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새벽에 눈을 떴는데, 아침이 오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잠이 확 깼다.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울어버렸다. (p. 104)

자퇴하겠다고 하면 혹은 자퇴했다고 하면 무슨 문제가 있는 아이인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속에서도 '나'는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하고 계획도 차근차근 세워놨다고. 학교를 다니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나'는 어떤 분야에 특출나거나 어떤 분야에서 모자라는 학생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론 어떻게보면 그저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하지만 평범해보이는 많은 학생들이 모두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후회할 수도 있는 거고 후회는 잘못이 아니야. 후회될 때는 나한테 말해야 된다. 같이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알았지? (p. 127)

다행인 것은 책속에 나오는 어른이 모두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작품인 <금요일> 에서 '나'의 엄마는 딸의 자퇴를 계속 만류해왔으나 딸과 솔직하게 대화하고 함께 계획서를 검토한 후 결국은 허락해준다. 그리고 당부한다. 앞으로의 여정도 '함께' 하자고.

<일주일>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일주일의 각 요일별로 에피소드를 엮었다면 또다른 어떤 이야기가 나왔을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작가-작품-독자' 라는 트리플의 삼박자로도 충분한 책이었다. 얇고 작은 책이었지만 굵고 큰 메시지를 남기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어두운 현실을 어둡다고만 하지 않고 힘든 상황을 힘들다고만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후회의 선택'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어서 안심이 됐다. 이 아이들이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인물들의 행복을 생각하고 싶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바람은 터무니없거나 비윤리적이지 않다. 일찌감치 자립하는 것,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것, 자기 인생을 자기 속도로 사는 것, 청소년이어서 불완전한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다 불완전하다. 그래서 행복할 수도 있다. 죽음이 비극인 이유도 잊지 않고 싶다. 나는 지난날의 나에게 배우는 점이 아주 많다.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주는 것이 없다. 주는 것 없이 그저 거기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거기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도 많은데... 이런 생각 또한 자만이고 오만이겠지. (p. 135)

소설이 끝나고 난 뒤 두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한편은 작가의 것이고 한편은 작가의 제안을 받아 화답한 박정연 작가의 에세이다. 작가의 후기나 작품해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는 것은 또다른 새로움 이었다.

청소년 소설은 아니지만 청소년 소설처럼 읽히는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라떼 꼰대가 가진 입장에 대해서 였다.

많은 어른들이 후대에게 말할때 '나때는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희는 안힘들다' 라는 명제로 시작하다 보니 소통이 안되는 것인데, 사실 모두가 힘든 세상에서 안 힘들게 사는 세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나때는 이래서 힘들었는데 너희는 무엇이 힘드니?' 라고 묻거나 아니면 차라리 '나때는 이런게 힘들었다' 하고 자신의 경험만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떨까.

예를 들면, 나때는 국민학교때 교실에서 난로 때느라 매일 아침 당번이 석탄을 가져와야 했다 너희는 온풍기가 있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으냐 라고 말하기 보단 너네 석탄 날로 본적 없지? 그 난로 옆에 앉은 애는 너무 따듯해서 졸고 문가에 앉은 애는 너무 추워서 졸고 그랬단다 하면 우리도 온풍기 바로 아래 앉은 애는 코막히고 머리에 뎁혀지는데 문가에 앉은 애는 발이 시렵대요 정도로 대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맥락없이 왠 꼰대 이야기기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고나면 늘 우리는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나 싶어 안타깝곤 했다. 게다가 최근 읽은 소설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작가가 나이들면서 변하는 게 느껴졌다. 좋게 말하면 젊었을 때의 예리함이 나이들면서 너그러워진다 이겠으나 특유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적어도 <일주일> 이 책에서만큼은 그 넓어진 마음이 그 너그러움이 따듯하게 남아서 좋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화르륵 한때의 불꽃보다 미지근하지만 여유로운 온기를 지닐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불꽃들이 한순간에 확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뒷말이 너무 길었는데... 여하튼, 좋은 책이었다 뭐 그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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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똑똑해지는 역사 속 비하인드 스토리 - 인류사에서 뒷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EBS 알똑비 시리즈 1
EBS 오디오 콘텐츠팀 지음 / EBS BOOKS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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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몰아보는 ''역사' 속 비하인드 스토리

역사적 사건 뒤에 감춰진 이야기가 짧은 시간 안에 진실을 드러낸다.

인물의 역사, 직업과 경제의 역사, 전쟁과 정치의 역사, 의식주의 역사, 이슈의 역사... 50가지 진실과 거짓을 단숨에 파헤쳐보자.

'인류사에서 뒷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ㅎㅎ 맞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하는 농담보다 뒤에서 하는 뒷담화를 더 흥미로워 한다. 역사도 다르지 않다. 널리 알려진 사건들보다 숨어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훨씬 재밌게 읽혀질 때가 많다. 하긴 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사라는 게 결국 다 사람사는 이야기인 것이니 ㅎㅎㅎ

<알면 똑똑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EBS 오디오 콘텐츠팀이 새롭게 선보이는 스낵형 지식 콘텐츠로, 평범한 상식 뒤에 숨이 있는 놀라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인류사에서 탄생의 비밀과 최초의 발견 그리고 그 비화만큼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빠져들게 하는 것은 없다. 역사, 과학, 경제(근가),생활문화(근간) 각 권에서 펼쳐지는 뒷이야기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롭고 한 편의 진실 게임처럼 지적 쾌감을 안겨준다. ( 표지 앞날개 中 )

TV 를 안 본지 꽤 오래되서 그중에서도 EBS 채널은 안본지 정말 오래되서 아직 있는지 모르겠는데 '지식채널e'시리즈를 참 좋아했더랬다. 짧은 영상 속에서 어찌나 다양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지 뭔가 하다가도 지식채널e가 나오면 다 멈추고 집중해서 보곤 했다. 그러다 최근에 EBS 에서 나온 대중서들을 몇 권 읽어 봤는데 쉬우면서도 유익해서 딱 EBS 답다 싶었다. 무엇보다 믿음이 가서 이제는 방송이 아니라 즐겨보는 출판사가 되었다. 이 책도 EBS북이기에 주저없이 선택했다.

책은 5분야로 나눠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마다 10개의 에피소드씩 합해서 총 50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순서도 상관없고 배경지식도 상관없다. 그저 아는 내용이면 아는척 하고 모르는 내용이면 '아 그래?!' 하며 아는 척 하면 된다. ㅎㅎㅎ

아무래도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의 역사' 가 제일 흥미로운 분야일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것이 원래 사람에 대한 뒷이야기가 더 궁금한 법, 다른 책에서 이미 다뤄진 내용들을 모은 것이다 보니 모르는 등장인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모아서 읽어보니 시대를 넘나들며 재밌게 읽게 된다.

드라큘라 백작부인은 조작되었나? 클레오파트라는 백인인가? 아이작 뉴턴이 위조화폐 잡는 탐정이었나? yes yes yes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웠나? 여자 교황이 존재했나?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가 몰래 그리고 처음 가져온 목화씨인가? no no no

yes or no 로 구분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었다. 벨은 세계 최초로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라,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제일 먼저 받은 사람 이라거나 에디슨은 천재 발명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사업 감각으로 성공한 CEO에 가깝다거나 표류하다가 3개국어를 마스터한 조선시대 홍어 장수 문순득(1777~1847) 이야기 같은 것들.

그중 나폴레옹의 키에 대해서는 본문에 대해 좀 의구심이 드는 내용이 있다. '나폴레옹 사후에 부검을 했는데, 그 부검 기록서에 기재된 나폴레옹의 키는 프랑스식 야드파운드법으로 5피에 2푸스였다. 이것이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5피트 2인치가 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키가 작다는 것은 나라 간의 단위 차이로 생겨난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중략) 프랑스의 5피에 2푸스를 미터로 계산하면 나폴레옹의 키는 약 169센티미터이지만, 영국의 5피트 2인치를 미터로 계산하면 약 158센티미터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키가 150센티미터대라는 소문이 난 것이다. 실제 그의 키는 169센티미터였고, 당시 프랑스 남자의 평균 신장이 164센티미터 정도였으니 오히려 큰 키에 속했다. (p. 52)' 하지만 이 내용에 문제가 좀 있는 것이 당시 나폴레옹 사망한 곳은 영국령이었고 따라서 영국의사가 부검의 였다. 그러니 영국 단위로 기록한 것이 맞는 길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본문 자체만으로도 상충되는 것이 '누군가 나폴레옹에게 키가 작다고 조롱하자, 그는 '비록 땅에서는 재는 키는 작지만, 하늘에서 재는 키는 당신보다 훨씬 크다' 고 답했다고 한다. (p. 53)' 라는 내용은 당시 프랑스 남자의 평균신장보다 나폴레옹이 컸다는 문장과 상충된다. 평균보다 키가 큰 사람에게 누가 키작다고 조롱하느냔 말이다. 여하튼, 이 책은 깊이 보다는 넒게 상식을 전해주는 책이므로 이런 소소한?! 딴지걸기는 안 하는 걸로 ^^;;;

인물 이야기 뒤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좀더 역사적 비하인드 스토리로 읽혀지는데 다양한 역사 상식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기원전 500년에 발견되었다는 피타고라스 정리가 500년이나 먼저 중국에서 구고현의 정리로 사용되어져 왔다던가, 고려시대 내시는 귀족 자제들로 왕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었는데 조선시대로 오면서 변한 것 이라던가, 고려시대에 백정은 그저 일반 백성을 가리켰는데 조선시대 눈파란 백정이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이지, 루이14세의 치질과 영국 국가의 관계, 칭기즈칸이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게 된 계기가 된 호라즘 제국, 미국의 라이트 형제보다 300년 이나 앞서 조선시대에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던 정평구, 화약의 원료인 초석을 물에 넣으면 얼음이 만들어진다는 것, 조선시대 귀한 배달음식 '효종갱, 이성계를 미워한 개성사람들이 만들어 먹었떤 '성계탕',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간소하게 만들고 차렸던 제사상이 지금처럼 화려하고 여자들의 몫이 된 이유, 단군신화속 웅녀가 먹은 것이 마늘이 아니라는 것(마늘이 한반도에 유래된 것은 통일신라 이후임), 전세제도는 조선시대부터 있어왔다는 것,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서울 이라는 도시명이 한양 이라는 도시명보다 더 널리 통용되게 된 배경, 일본 교토의 한 신사에 장보고를 재물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유 등 재미난 이야기들이 책장 마다 술술 읽혔다.

이 책 처럼 짧고 간단하게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로 역사를 읽으면 역사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재미난 이야기들로 역사를 접하고 난 후 본격적으로 연대기적 역사와 깊이있는 지식으로 확장해간다면 참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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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 - 동과 서,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는 건축 교양 강의
전봉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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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건축 문명 속에서 바라본

한국 건축에 대한 치밀하고 섬세한 통찰!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가 들려주는 건축의 진화와 미래

역사책을 읽다보면 지도를 만나게 되고 예술을 만나게 되고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유명한 관광지 속의 예술적 건축물 들이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는 오래된 건축물 들 모두 남의 나라 얘기 같다.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이라면 어디서든 건축물을 찾아볼 수 있을 터인데 왜 나에겐 한국을 생각하면 건축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고 차라리 건설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에 건축의 역사가 없을리 만무하다. 이 책은 우리나라 건축에 대한 나의 무지함을 깨닫게 해주고 상식을 채워준 알찬 책이었다. 그리고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서가명강 시리즈 였다.

교양서를 읽는 것은 저자와 대화를 하는 것과 같다. 책을 읽으며 무릎을 치는 것은 사실 이미 스스로 생각하던 것일 때가 대부분이다. 내 생각을 확인받았다는 점에서 우선 반갑고, 내가 먼저 쓰지 않은 것이 아쉽고, 그다음은 어떻게 끌고 나갈지가 궁금해진다. 또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을 만나면 '이건 아닌데' 하고 반발하고, '진짜 그럴까' 의심하고, 자료를 찾아 확인해본다.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일깨우고 나아가 탐색을 유도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따라서 밑줄을 그어가며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고 지식을 쌓은 부분도 있겠지만, 그보단 전체적인 흐름과 주장에 대한 의견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p. 6)

강연을 바탕으로 쉽게 풀어 쓴 책이려나 싶었는데 본문에 들어가니 예상보다 굉장히 전문적인 책이었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 같은데 균형을 잘 잡은 것 같다. 책은 총4부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 건축 문명에 대해 세계사속 한국 건축 문명을 깨닫고 2부에서 한옥 한채 지으면서 역사속 한국 건축을 이해한 다음 3부에서 온돌 깔면서 진화되어온 한국 건축을 본 후 4부에서 세계와 만난 한국 건축에 대해 살펴본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연대기적 서술인 셈이라 흐름을 이해하기에 좋았다.

동행한 선배는, 우리는 물을 찾아 아래로 향하고 그들은 빛을 좇아 위를 향한다고 한마디로 정리해줬지만, 궁극적으로 산업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다. 농업과 목축의 차이이기도 하고 논농사와 밭농사, 과수원 농사의 차이기도 하다. (중략) 논과 밭이 양식을 생산하는 곳, 주거지가 생활하는 곳이라면, 먹고사는 것 이외의 활동은 결국 대개 산에서 일어난다. 조상의 산소를 두고, 서원이나 향교를 세워 후손을 교육하고, 절과 성황당, 산신각이 들어서는 신앙의 공간이면서, 산적과 도깨비가 사는 신비한 곳이 산이다. (p. 26) 이탈리아 중부 지역은 목축이나 포도, 올리브 재배가 주산업이다. 생산지는 비탈이라도 상관없으며, 도시는 잦은 전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망루같이 성벽을 쌓아 자리한다. 말하자면 산성 마을인 것이다. (중략) 목축과 밭농사를 주로 하는 유럽의 농촌은 우리처럼 저지대 개발 강박이 크지 않기 때문에 도시 주변의 먼 경치 좋은 강가에 숲을 조성해 비생산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유럽의 요정들이 숲에 사는 이유다. (p. 27)

지도상으로 봤을때 한반도와 이탈리아반도는 흡사한 자연환경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토스카나 지방과 한국의 어느 농촌을 비교해본 내용을 읽으며 산업의 차이이기도 했을 테지만 역사적 상황때문이기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문화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는가 하는 가치관의 차이가 삶의 형태를 결정했다. 무엇보다 저자가 강조하는 '조선 후기는 단지 가장 가까운 과거일 뿐인데, 기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과장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p. 28)' 점에 크게 동의한다. 우리의 전통이 곧 조선사회가 남긴 것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큰데 그 이전의 역사가 훨씬 길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돌은 누르는 힘에 매우 강해 기둥 재료로는 적합하지만, 당기는 힘과 휘어지는 힘에는 매우 약해 보로는 부적합하다. 그래서 그리스 신전에서도 바깥 둘레는 기둥과 보를 모두 돌로 만들었지만 내부에는 기둥만 돌로 하고 보와 지붕틀은 나무로 했다. 그리스 신전 유적 대부분에서 지붕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모두 나무였기 때문이다. 돌을 둥그렇게 쌓아 공간을 덮는 아치 구조도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p. 35)

건축 문명의 동과 서, 그 경계가 현재의 유럽과 아시아의 구분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건축 문명을 기준으로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즉 나무 건축과 돌 건축의 경계를 찾으려면 고대 문명권의 발달 과정을 볼 필요가 있다. (p. 52) 결국 건축 문명을 기준으로 보면 동서 경계는 중국 문명권과 그 외 지역으로 나뉜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매우 특수한 건축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p. 55)

역사적 건축물 하면 서양의 신전이나 성, 성당등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게 돌로 된 건축물이 나무로 된 건축물보다 더 위대하다는 식의 편견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유명한 고대 그리스 신전도 나무 지붕이었고 돌로 만든 건축물은 유럽 뿐만 아니라 인도, 동남아시아등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건축문명이었다. 오히려 중국 건축의 영향을 받은 한중일만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중국 건축문명권이 나무 건축문명인것은 아니었다. 나무와 돌은 세계적으로 사용된 건축 재료일뿐 그 소재로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무와 돌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역사의 우월성과는 관계없는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무 건축 돌 건축 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적중심일뿐 주류를 형성했던 일반 시민들의 건축과는 상관없는 구분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앞서 근대 이전 건축을 돌의 건축과 나무의 건축으로 나누고 지역을 구분한 것은 기념비적 건축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돌 조적조 건축 지역인 유럽이나 인도에서도 일반 시민의 주택은 대부분 나무로 짓는다. (중략) 나아가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유럽에도 북유럽의 스타브식 교회처럼 기념비적 건축조차 나무를 사용하는 지역도 있다. (p. 59) 다시 말하지만, 건축 문명권을 나무 가구식과 돌 조적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최고급 기념비적 건축물을 어떤 구조로 지었는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p. 60)

중국 건축 문화권에서 특별한 점은 궁전과 사찰도 모두 나무로 지었다는 점이다. 경복궁 근정전이거나 시골 초가집이 사실상 같은 건축 시스템을 사용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p. 61) 중국계 목조 건축에는 장점이 많다. (p. 63) 그렇다면 돌을 못 쓴 것이 아니라 안 쓴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몰라서 못 쓴 것하고 알고도 안 쓴 것은 엄연히 다르다. (p. 70) 고대의 위대한 건축물로 피라미드를 들었는데, 고대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만들 때 중국에서는 갑골문을 남겼고, 그리스인이 신전과 조각상을 만들 때 중국인은 금석문을 만들었다. 다른 문명권과 떨어져 발전한 중국 문명은 생산력 수준에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았다. (p. 70)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할 때, 중국은 조상의 신주를 만들어 제사했다. 신주에는 조상의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다. (중략) 이 차이는 영원에 대한 생각 차이에서 비롯한다. 유형한 것은 유한하다고 여기고, 영원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신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고 보았다. (p. 71)

이집트의 거대 피라미드나 유럽의 거대한 신전 등은 돌로 만들어 오래도록 남아 우리에게 감탄사를 내뱉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만큼 그 거대 건축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큰 권력과 얼마나 큰 희생이 있었던 것일까? 왕권이 아무리 강해도 그렇게 큰 건축물을 그렇게 힘든 돌!건축물을 만들지 않은 것을 보면 한반도의 역사는 고대부터 (유럽에 비해) 민주적?이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에서 태동한 민주주의를 한반도의 역사에서 느낀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돌을 알고도 안 쓴' 것을 생각해 봤을때 그럴수도 있지 않나 하는 의미다. 왕권을 뒤엎은 혁명이 유럽 역사에서 굵직한 획을 긋고 있는 것에 비해 그런 혁명이 우리 역사에서는 민주화 혁명 이전엔 없었다는 것을 보면 그만큼 절대왕권이지 않았고 그만큼 일반인들의 삶이 동시대 유럽일반인들의 삶보다 참을만 했다는 건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여하튼, 살아있는 사람을 신격화한 유럽보다 비석이나 기념비 정도로만 기리는 문화가 더 낫다 더 높다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나무 건축 기술은 현실 삶에서 굉장히 실용적이었다.

건축물의 규모는 기술 문제이고 경제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욕망의 문제다. 특히 기념비적 건축은 단지 경제적인 이유로 안 짓지는 않는다. (p. 80) 높이를 대신해서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유행하는 개념은 '깊이'다. 깊이는 높이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고 더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p. 82) 서양 건축이 계속해서 높이에 대한 경쟁을 벌인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깊이 경쟁, 즉 몇 겹이냐의 경쟁이 계속됐다. 양파 껍질 까듯 계속 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겹겹이 에워싸는 건물이 탄생한 이유다. (p. 83) 그러고 보면 유서 깊은 절도 모두 깊은 산 속에 있다.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다. 산을 깊다고 표현하는 곳이 또 있을까. (p. 85)

아! 깊이!! 그랬구나!!!

깊은 산 속 옹달샘 노랫말이 떠오른다. 산을 깊다고 표현하는 곳은 구중궁궐 문화를 가진 곳 뿐이었구나~!

'유독 건축에서 동과 서의 차이가 더 두드러지는 것은 이것이 시각적이고 관념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p. 89)' 라는 점을 꼭 기억해야 겠다. 차이는 차이일뿐 차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전통은 무작정 아름답지도 않고 무작정 고립된 것도 아니며, 고유한 것만도 아니다. 개별성 보다는 개연성, 고정성 보다는 유동성, 고유성 보다는 다채로움에 근거해 전통을 인식해야 한다. (p. 91)' 는 문장이었다. 전통은 한 시대만의 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적 전통은 조선시대에서 유래한 것만이 다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인의 고유한 생활 관습이라는 일상적인 기거 양식조차도 더디지만 변화한다는 점이고, 우리가 전통이라고 기억하는 것들은 대개가 가장 가까운 과거인 조선 후기의 것이라는 점이다. 전통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연한 태도로 볼 필요가 있다. (p. 152)

오히려 견고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협함을 저자는 끊임없이 깨뜨려 주었다. 전통을 생각할때 개연성, 유동성, 다채로움 등을 고려한 유연한 태도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이 깨달음 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이 깨달음 말고도 배울 것들은 엄청 많았다.

석조 건축이라면 한 몸을 이루는 건물 각 부분의 비례 관계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겠지만, 건물 여러 개로 이뤄진 집합체에서는 단일 건물의 비례보다는 건물을 모아 배열하는 질서가 더 중요해진다. (p. 156) 분명한 것은 이 역시 못한 것이라기 보다는 안 한 것이며,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나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서 차이, 가치관 차이다. (p. 162)

우리 전통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것 중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 세계 다른 지역과는 다른 것이면 고유한 전통이 된다. 우리 전통 건축을 일러 자연 친화적이라고 한다. 사실이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 말고도 흔히 보이는 성질이다. 세상의 모든 토속 건축은 자연 친화적이다. 또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세계적으로 특수하다고 해 모두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건축에 대한 공부가 가치를 갖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인류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될 때다. (p. 169)

서양의 궁전과 우리의 궁궐은 많이 다르다. 우리의 궁궐도 경복궁과 창덕국은 축의 개념이 다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중요하게 여겨졌던 가치관의 차이일뿐 기술적 차이나 우월함의 차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기념비적 것에서만 전통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자각도 중요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문화 속에서 찾아야지 일부 특수계층이 누린 것을 우리 전통이라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이 알려주는 한옥과 온돌의 상세한 설명은 무척 새롭고 뜻깊었다. 우리네 문화속 건축은 굉장히 평등한 편이었다. '앞서 온돌은 한옥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말했다. 한옥을 한국 전통 주택의 전형이라고 할 때, 온돌은 한국 주택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온돌은 한국에만 있고, 또 한국 주택에는 모두 온돌이 있다. (p. 218)'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방법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서양과 다른 우리네 전통이라는 게 나는 솔직히 반갑고 좋았다.

건축은 대규모 장치 예술이고, 그러면서 실용 예술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적 환경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단시 섬세한 사고나 혹은 한두 사람의 의욕과 후원만으로는 성과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시기별 산업 발전 단계에 따른 생산 양식을 반영해야 하고, 사회 구성원 일반의 합의를 얻어야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간단히 왜 불국사 3층 석탑을 만든 사람들이 다시 그렇게 만들지 못했느냐는 비난은, 왜 이 시기에 다시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느냐고 탓하는 것만큼 시대착오적이다. 모든 예술적 성과는 다 시대적 산물이고 그 시대 안에서 정당한 것이다. (p. 291)

건축물을 이해하는데도 역사가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건축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시대적 가치라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그 어떤 분야에도 빠지지 않고 필요한 것이 역사 가 아닐까 싶다. 역시 역사책은 꾸준히 읽어야 한다.

그러고보면 8세기의 성취와 14세기의 성취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p. 301)

8세기에는 개방적 당나라의 문화가 한반도에도 널리 퍼져있고 교류가 활발했던 때였고 14세기는 비록 반강제적 지배였기는 했으나 세계적 교류가 활발한 원나라의 문화가 한반도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던 때였다. '세계화'적 개방성은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기술개발을 촉진시켰다. 그런점에서 우리가 전통이라고 여겨온 조선사회에 대해 재고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문제는 전통의 많은 부분이 기대는 조선 추기가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 가장 폐쇄적인 시대였다는 점이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과거라서 익숙하고 친근하지만, 그 때문에 과잉 대표되었다. (p. 310)' 저자는 한국 건축의 미래를 위해 세계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원에 집착해 우리만의 고유함을 찾는 소극적이고 내향적 태도가 아니다. 크게 열린 마음으로 세계 문명을 폭넓게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문명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우리 안에서만 보이는 특수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잘 보이지만 인류 사회 일반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우리 것에 집중하는 것은 가까워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지,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예쁘게 포장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p. 359)

한국의 건축에 대한 전문가적 설명을 읽을 땐 좀 어렵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저자의 역사관이 마음에 들었던 책이었다. 비록 건축이라는 단어가 생긴지 100년 정도 밖에 안되긴 하지만 역사 속에서 한국 고유의 것을 이해하고 현재에서 변화된 가치를 발견하여 미래에 건축분야에서도 한국의 영향력이 커지길 응원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새겨봐야 할 것이다.

<논어>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지 않으면 망령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고 했다.

이에 빗대 말하자면 '세계의 것만 알고 우리 것을 모르면 망령되고, 우리 것만 알고 세계의 것을 모르면 위험하다.' (p.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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