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패션의 권력학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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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하는 대상을 따라하기는 19세기 영국의 중산계급을 거쳐 노동계급으로, 마침내는 제국의 식민지로 전파되었다. (중략) 판타지와 악몽이 결합된 소비의 시간이 흐른다.

뒷표지 내용 中

영문학을 전공했고 가르치고 있는 저자는 범죄, 남성섹슈얼리티, 소비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불온하거나 저속하다는 이유로 배제된 소설장르를 재평하하고 비평적 관심의 바깥에 머물던 문학지형을 탐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범죄소설의 계보학> <남성섹슈얼리티의 위계> 이후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패션의 권력학>을 냄으로써 3부작 프로젝트를 완결한 셈이라고.

앞선 두 책에선 어떤 소설들을 바탕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책의 경우 19세기 영국에서 댄디문학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 댄디즘은 유미주의로 연결되기도 하고 문학비평의 새 지평을 열기도 하면서 과도기적 장르로서의 불꽃을 화려하게 피워올렸고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미학적 소비'에 대해선 여전히 시사하는바가 컸다.

영국의 중간계급에게 산업혁명은 위기나 불안이 아닌 도전과 기회로 다가왔다. 산업혁명과 함께 기존의 경제적·계급적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p. 9) 중간계급은 새로 획득한 경제적 지위에 걸맞은 사회적 존경을 욕망했다. 이들의 인정욕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경로를 통해 분출되었다. 하나가 도덕적·윤리적 우월성에 대한 승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품격을 갖춘 소비의 과시였다. (p. 10) 중간계급에게 소설은 '거의 모든 종류'를 포괄하는 '지식의 매개체'와 '정보체계'가 되었다. 중간계급의 소설사용법에는 소설에 나오는 대로 귀족계급을 따라하기도 있었다. 중간계급이 귀족 따라하기 매뉴얼로 선택한 소설장르는 실버포크 소설이었다. (p. 14)

땅을 기반으로 세습되는 귀족의 부와 명예는 산업혁명이후 자본을 성장한 세력에게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은 가진것이라곤 노동력 하나뿐인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명예혁명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절대왕권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따지고 보면 이 혁명들은 혁명이라고 볼 수 없었다. 뒤집어진게 없었다. 땅을 소유한 귀족들은 여전히 부유했고 명예는 더욱 탄탄해진 것 같은 영국사회에서 귀족계층에 대한 선망은 높아져만 갔다. 당대엔 비하적 의미로 붙인 표현이 하나의 사조가 되는 경우가 많듯이 실버포크 소설이라는 표현또한 시작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막대한 부에 문화적 소양까지 물려받은 최상류계급을 가리키는 실버포크, 이 질시의 표현이 선망이 된 것은 전적으로 중간계급 독자 덕분이었다.

19세기 내내 영국의 귀족계급은 치솟아 오르는 중간계끕의 기세에 위축됐다. 경제적 지위는 하락했고, 정치권력도 중간계급에게 상당부분을 나눠주어야 했다. 계급적 좌절감은 특히 젊은 세대의 귀족들에게 크게 다가왔다. (p. 16) 젋은 귀족남성들은 문화자본을 과시하는 세련되고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해 중간계급 남성과의 구별짓기를 시도했다. 세상은 이를 댄디로, 이들이 전시한 스타일과 태도, 가치관을 댄디즘으로 불렀다. 댄디는 중간계급의 가치관인 근면성과 실용성, 생산성을 거부하고 장식성과 무용성, 비생산성에 집착했다. 댄디는 나른하고 권태로운 포즈로 중간계급이 기획했던 노동의 존중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맞서려 한 것이다. (p. 17)

이른바 졸부들이 득실대기 시작했을때 젊은 귀족들은 이제 '부'에서의 우월함은 잃은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자신들만의 우월성, 차별성에 대한 욕망을 무엇으로 표출할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이 댄디즘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자수성가한 촌티나는 졸부들과 다르게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쓸모없는 것들에 금화를 뿌리며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동시에 세련되고 독특한 패션으로 문화적 소양만큼은 '세습'되는 것임을 보여주려 했다. 어떻게 보면 우스울 수 있는 이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식의 댄디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하지만 의외로 이 댄디들에 대한 선망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과열되어 실버포크 소설은 중간계급에게 소비지침서이자 문화지침서가 되어갔다.

여전히 영국사회에서는 귀족계급의 문화적 품격과 고급스러운 소비가, 경제적으로 급부상하기는 했지만 천박한 부르주아들을 견제하는 중요한 계급적 장치로 작동했다. 문화적 역량을 갖추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러 세대에 걸친 문화자본의 축적과 상속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넘치는 인정욕구에 비해 인내심이 부족했던 중간계급은 귀족계급의 소비패턴을 따라하는 쪽을 택했다. 모아놓은 돈으로 빠르게 승부를 걸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p. 28)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실버포크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어도어 훅(1788~1841) 의 초상이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혈통적 특권은 없었으나 타고난 수완으로 인맥을 쌓아 조지4세의 측근이 된 그는 '목표에 도달한, 궁정광대라는 호칭보다 더 나은 직함을 지니지 못한, 속물근성의 완성자'로 불린다고 한다. 채무자감옥에서 쓴 소설로 데뷔한 그는 지속적으로 실버포크 소설을 써냈고 큰 인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 시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반영하는가에 따라 문학의 수명이 정해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행과 통찰은 분명 다를 것이므로.

'초창기 실버포크 소설에는 당대 귀족계급의 삶에 대한 묘사와 함께 이들 계급에 대한 비판과 사회개혁의 메시지도 함께 담겨 있었다. (p. 55)' 그러나 사람들이 열광했던 부분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귀족들의 생활방식과 패션양식과 소비패턴이었다. 당연히 이후 실버포크 소설은 점점 더 대중들이 원하는 내용을 구체화하게 된다. '문화자본을 이용한 승부는, 귀족계급에게 남은 유일한 전략이었다. (p. 86)' 따라잡힐 것 같은 위기감은 점점더 극단적인 댄디즘을 추구하게 된다.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댄디의 '반항'은 더욱 격렬해졌고, 세기말의 흐름 속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1891년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p. 112)' 오스카 와일드(1854~1900)도 귀족계층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속에서 그가 추구하는 무위와 권태와 사치의 모습은 댄디 그 자체였다. 아마도 그가 추구한 '유미주의'는 댄디들에 대한 선망이자 댄디가 되고싶은 욕망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댄디가 거부한 것은 중간계급 노동윤리만은 아니었다. 댄디즘은 중간계급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루는 남성은 생산을 담당하고 여성은 장식과 소비를 담당한다는 젠더적 구획의 담장을 허물어버렸다. 댄디가 전시하는 자기치장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욕망은 여성으로 성별화되기 때문이다. 댄디즘에 포함된 강한 연극성은 명백한 젠더위반으로 인식되었다. (p. 122) 댄디즘은 19세기 내내 동성애와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세기말로 갈수록 댄디의 젠더위반은 극단적인 색채를 띠었고, 1895년 와일드의 재판은 댄디즘과 남성동성애 사이의 연관성을 극대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중의 뇌리 속에는 여성적인 댄디와 남성동성애자는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었다. (p. 126)

오스카 와일드, 그가 살았던 시대는 딱 댄디즘의 시대였다. 그의 사망이후 20세기가 막을 내렸을때 댄디주의는 이미 끝나있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었을때 명확히 이해되지 않던 오스카 와일드의 사고방식이 이 책을 읽으며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와일드의 삶은 댄디즘 자체였고 그의 말로 또한 댄디즘와 말로와 다르지 않았다. 동성연애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박탈당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영국 국적은 1998년에야 회복되었다.(p. 115)' 와일드의 동상은 커다란 바위위에 여전히 나른하게 누워있다.

남성인물에 집중하는 실버포크 소설과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실버포크 소설은 모두, 귀족계급의 비생산적이고 소비적인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귀족들의 삶을 따라하는 지침서로 기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양자에 내려진 평가의 가혹함은 동일하거나 유사하지 않다. 실버포크 소설이 사치와 허영을 조장한다는 비난은 주로 여성의 삶을 다룬 실버포크 소설을 향했다. (p. 137)

'실버포크 소설은 여성에 대한 젠더적 편견을 수용하고 확장함으로써 당대의 젠더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강화했다. (p. 136)' 중간계급 남성이 자신들을 화려하게 치장할때 집안의 여자들은 소박하고 순종적이며 무엇보다 순결하게 무성의 존재로 있어야 했다. 그래야 화려하고 방탕한 귀족여인들과 차별적 우월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다. 미혼여성들에게 실버포크 소설이 끼친 영향력은 그 소비패턴이 중적적이었다. '실버포크 소설은 여성을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무기로 결혼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존재로 재현하고, 결혼상대자를 확보했는지 여부로 여성의 성공과 실패를 판정함으로써 젠더적 편견을 옹호하고 재생산했다. (p. 153)' 댄디즘의 여성성이 남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거나말거나 여하튼 여성의 입장에서는, 무성적 아내나 결혼시장에서 팔리는 처녀나 젠더적 편견은 그저 확고해질 뿐이었다.

실버포크 소설을 향한 또 다른 공격지점은 실버포크 소설이 사회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고사시킨다는 데 있었다. (p. 164) 1840년대는 가난의 문제와 '빈곤의 문화'가 압도적으로 부각된 시기였다. 소비와 과시로 요약되는 귀족계급의 생활양식은 더 이상 찬탄과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분쇄해야 할 시대착오적인 악습으로 규정되었다. 실버포크 소설의 몰락은 이제 예정된 수순이었다. (p. 173)

실버포크 소설의 몰락을 견인한 대표 문인이 칼라일 이었다. '칼라일이 제시하는 영웅은 댄디의 여성성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주체이며, 그가 주창한 영웅주의는 당대의 젠더이데올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p. 177) 강고하게 형성된 반댄디즘 대오는 댄디의 스펙터클을 경탄과 부러움의 대상에서 경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렸다. 댄디를 둘러싸던 광채는 사라졌고, 댄디는 무대 바깥으로 밀려났다. 세기말에 이르러 중간계급의 실용주의를 거부하고 우아함과 쾌락, 포즈의 예술을 선포한 유미주의가 나타나기까지, 한때 댄디즘을 환하게 비추던 조명은 꺼진 채로 남아 있었다. (p. 180)'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속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는 굉장히 모순적인 느낌이었다. 와일드가 살던 시대가 그러했다. 유미주의는 댄디즘의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을까.

칼라일의 분노와 한탄과는 다르게, 디킨스의 연민과도 다르게, 새커리는 댄디를 조롱하고 실버포크 소설을 낙후시켰다. (p. 185) 새커리가 칼라일과 달랐던 것은 비판의 어조와 타격방식만은 아니었다. 그의 공격은 칼라일과는 겨누는 지점이 달랐다. 칼라일의 공세가 귀족계급에 집중됐다면, 새커리의 타격지점은 중간계급-귀족계급을 흠모하고 모방하는-이었다. 새커리는 그들을 '속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비판했다. (p. 191)

'<두 도시 이야기>에서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의 시간이 '최고의 시절이면서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고 썼다. 그가 사용한 표현은 19세기 초반의 영국으로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다. 영국의 19세기 전반부는 변혁과 저항, 갈등과 충돌, 협상화 화해, 영광과 수치가 함께하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시절 모든 이들이 몰두하던 사회적 의제는 빠르게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한때 빛나던 존재들은 다음 순간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p. 190)' 실버포크 소설이 유행하던 시대라고 해서 그 문학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디킨스와 칼라일과 새커리를 들자면 그중에서도 실버포크 소설의 대척지점에 칼라일과 새커리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디킨스의 연민이 가장 좋다. 그때 빛나던 그의 소설은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귀족계급 따라하기와 실버포크 소설에 대한 열광은 갑작스럽게 솟아난 현상이 아니다. 영국은 귀족숭배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국가였다. (p. 193) 귀족적 소비에 대한 동경과 선망, 그리고 따라하기가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다. 짐작과는 달리, 품격 있는 소비에 대한 수요는 오히러 더 커져갔다. 중간계급이 빠져나간 따라하기 대열의 빈자리를 노동계급이 빠르게, 넘치도록 채워나갔기 때문이다. 해외식민지의 '신민들'도 제국의 소비를 욕망하며 따라하기 물결에 합류했다. 중간계급이 실버포크 소설을 탐독하며 모방욕구를 구체화했다면, 노동자들과 식민지 원주민들에게는 박람회가 실버포크 소설이 하던 역할을 대신했다. 이들은 박람회장에 진열된 상품의 스펙터클을 통과하며 구입해야 할 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p. 220)

''굶주린 1840년대'를 지나며 그토록 우려했던 노동자혁명은 발생하지 않았다. (p. 220)' 어쩌면 이것이 여전히 귀속숭배가 남아있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혁명이 일어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문화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영국도 그리고 미국도 권력층에 대한 시민혁명은 노동자혁명은 없었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선 상위계층에 대한 선망의식이 따라하기가 너무나 뚜렷하고 또렷하게 지속되고 있어 보인다. 평등해졌다고 하는 시대에 평등하기를 거부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는 '세기말의 체게바라 '산업'은 저항과 투쟁의 신화마저 패션으로 소비되는 풍경을 내려오는 막 위에 그려 넣었다. (p. 229)' 며 여전히 '판타지와 악몽이 결합된 소비의 시간 (p. 229)' 이 흐르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소비의 수준은 계층을 나누고 패션의 권력은 여전히 통하는 사회에서 댄디즘이 아닌 또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하기'는 영원하고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는 욕망도 지속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19세기 영국사회에 국한된 내용이었지만 '소비'와 '문학'을 연결한 분석은 무척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다. 앞으로도 저자의 새로운 문학비평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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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 - 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
앤 헬렌 피터슨 지음, 박다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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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처럼 살기 싫지만 부모만큼 되기도 어려운 세대, 밀레니얼

욕 좀 그만 먹고 싶은 밀레니얼의 정당한 변명

내게 '요즘 애들'이란 십대후반 부터 20대 그러니까 90년대후반부터 2000년대 이후 출생자들을 의미한다. 사춘기 청소년 시절을 지나고서도 (철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의)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방식이나 직업에 대한 마인드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것을 느끼곤 했다. 내가 아직 꼰대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건만 너무나 세대차이를 느끼곤 했기에 젊은이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1981~1996' 출생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내 기준에선 '애들'이 아닌 셈이다. 애들이라기 보다는 '어른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현 30~40대초반 세대의 삶에 대해 저자는 '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로서의 고충을 토로한다. 그냥 '못하겠다' 정도가 아니라 뭔가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현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연령은 이십대가 아니라 3~40대를 지칭함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이 책의 원제는 본문 내용에 부합하는 Can't even 이다.

백인 중산층 밀레니얼은 자신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서사를 믿지 못하게끔 길러졌다. 앞선 세대처럼 우리도 능력주의와 예외주의를 먹고 자랐다. 우리 모두는 각자 흘러넘치는 잠재력을 품고 있으며, 그 잠재력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건 오로지 노력과 전념뿐이라고 믿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현재 인생에서 어떤 지위에 있든, 결국엔 안정성을 쟁취할 거라고 믿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밀레니얼 세대는 이 서사가 얼마나 공허하고 심히 환상적인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중략)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미국이 기회의 땅이자 자애로운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후렴구는 결론적으로 틀렸다. (p. 6)

저자는 미국에 사는 3~40대 백인계층의 불안정한 삶에 대해 조목조목 풀어낸다. 미국의 기득권세력이라 할 수 있는 백인계층이 이러할진대 다른 계층은 더 악조건에 처해 있는 셈이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철저히 미국사회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이 책을 읽으며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어쩌면 십년 후쯤의 우리사회 모습이 저러하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많은 것들을 뒤따라온 한국사회의 미래를 이 책에서 예감한다면 그 슬픈예감이 틀리도록 우리는 지금현재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책에서 반복해 주장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반드시 이럴 필요는 없다. (p. 8)'라는 문장정도로 위안 받을 것이 아니라, 현재 미국사회의 현실이 십년후쯤 한국사회의 현실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좀더 행동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퓨리서치센터에 의하면 1996년생인 최연소 밀레니얼은 2021년에 25세가, 1981년생인 최연장 밀레니얼은 40세가 된다. 인구추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밀레니얼은 인구 7천3백만 명으로 최대 다수를 차지하는 세대다. (p. 22) 우리는 기대치가 너무 높다고, 반면 직업윤리 수준은 바닥이라고 꾸짖음을 받았다. 우리는 온실 속 화초였고, 순진해 빠진 데다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우지 못했다. 이는 우리 세대에 대해 굳어진 합의들로, 우리가 대침체를 어떻게 맞서고 견뎠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학자금 부채를 떠안고 있는지, 성년기의 수많은 이정표가 우리에게 얼마나 도달 불가능한 것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p. 23)

하면되는 세대에 의해 양육되어진 밀레니얼 세대는 하면된다는 믿음을 갖고 성장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부딪힌 현실은 하면된다 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얻은 좌절감을 부모세대는 나약함이라고 치부한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이 책은 저자의 번아웃 경험을 바탕응로 하되, 번아웃이라는 느낌에 대한 이해를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 온 부르주아 계급의 경험 너머로까지 확장하려 했다. (p. 29)' 안정적 직업도 못얻고 학자금대출도 못갚은 게으르고 나약하다고 평가받는 밀레니얼 세대가 어쩌다 번아웃 상태가 되었는지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중산층 백인 밀레니얼의 경험 위주에서 벗어나 밀레니얼 전체의 경험으로 확장하는 것이 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p. 30)' 쉽게 얘기하자면 밀레니얼 세대의 경험은 개인적 무능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 라는 말이다.

80~90년대 베이비붐 세대의 정신은 우리 유년기의 배경에 스며들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품었던 기대들의 토대에도 녹아들었고, 그 미래를 쟁취하기 위한 로드맵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밀레니얼 세대의 번아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리를 만든 베이비붐 세대가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번아웃에 빠졌는지 이해해야 한다. (p. 41) 베이비붐 세대는 1946년에서 1964년 사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회복기에 시작되어 군인들의 귀가 기간에 가속화된, '베이비붐'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세대를 이루었다. (p. 42)

전쟁후 베이비붐 세대는 성인기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경험했고 그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노동현실은 열악했어도 실업률이 높진 않았고 대학을 나온 경우는 그야말로 탄탄대로 였다.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교육열은 과열됐고 자신들의 피와땀을 갈아넣은 자식세대에게 그만큼의 희망을 심어주며 키웠기에 성공가능성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자식세대의 불안정한 직업과 실패는 곧 실망과 배은망덕함으로 이해되곤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밀레니얼은 자신을 걸어다니는 이력서로 완전히 개념화한 최초의 세대다. 부모와 사회, 교육자들의 보조 아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적 자원'으로 여겼으며, 경제 활동에서 더 나은 성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압박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대학에 가기만 하면 번영과 안정을 누리는 중산층의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인식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략) 대학은 우리 부모들의 경제적 불안을 낮춰주지 못했다. 중산층 지위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많은 경우엔 취업 시장에 현실적으로 대비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p. 104)

저자는 '당연한 교육이 가져온 부당한 결과'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절대 다수의 밀레니얼에게 대학 학위는 우리와 우리 부모들에게 약속했던 '중산층의 안정'을 안겨주지 않았다. (p. 128)' 그런데 교육은 너무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효율적인 노동자를 빚어내는 데' 있어왔다. 실용적이리라 믿었던 교육을 받았으나 써먹을데가 없는 현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현실에서 살아남는 법은 더 열악하게 더 많이 일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번아웃의 토대가 마련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좋아하는 것' 이 '직업'이고 '일'이 될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한 착각 혹은 '일을 좋아하라'는 강박에 대한 무지이다.

소명을 따를 때 돈과 보상은 부차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소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초기 계율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략) 문화이론학자 막스 베버는 이런 해석이 모든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을 단지 넓은 관점에서 의미 있을 뿐 아니라 가치 있는 것으로 심지어는 신성한 것으로 보도록 장려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조장했다고 주장한다. (p. 149) 성공할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희망 배양은 회사의 사업 전략이 되었다. 인턴과 펠로들은 정직원 급여의 일부만 받으면서 콘텐츠를 만들고 노동을 제공한다. (중략) 나 자신과 남에게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꺼이 더 적은 것을 요구하고 더 많이 일하는 과다한 수의 노동자들을 딛고서 산업 전체는 번창한다. (p. 153)

고용의 불안정성은 실업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의 비율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과로를 하게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리라는 희망때문에 악조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을 통해 이득을 얻고 있는게 누구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역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모두가 성공했다는 것(p. 162)' 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잘못된 논리인지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특별한 존재라고 소중한 존재라고 이야기 들으며 자라온 세대가 하찮은 존재로 흔하디흔한 인력으로 취급되는 직업사회에서 느끼는 괴리감은 부모세대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큰 좌절감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지는 이유는 그렇게 얻은 일자리마저도 너무나 열악하다는 현실이다.

자유 시장이 모든 것을 고치리라는 약속은 설득력이 있었기에, 80년대와 90년대에 모든 층위의 정치인들이 노동조합 보호 장치를 철회하고 정부 규제를, 특히 금융시장과 관련된 규제를 극적으로 줄여나갔다. (p. 174) 다운사이징, 구조조정, 풀타임 직원 해고 배후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간단하다. 회사의 불필요한 부분을 솎아내면 단기 이익이 발생한다. 단기 이익은 주가 상승과 주주의 만족을 가져왔다. (p. 179)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건, 그냥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자본주의다. 이는 제품이나 제품 뒤의 노동자들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이들을 위해, 단기 이익 창출을 취우선의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다. 자신의 투자금이 다른 노동자의 생계와 근무조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난데없는 보상이 돌아가는 자본주의다. (p. 183)

미국사회에서 노동조합과 복지는 굉장히 생소해진 개념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에 노동자가 맞서기는 무척 힘들다. (p. 183)' 시스템적인 사회구조적인 문제엔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 상당히 많다. 개개인의 노동자들이 어찌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덮어버리는 이데올로기들이 넘쳐난다. '그릿' 이라던가 '시크릿' 같은 온전히 개인의 열정과 개인의 믿음으로 환원시킨 생각들이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과연 개인의 문제일까? 이런 생각만으로도 어려운데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어서 '우버'같은 새로운 분야의 등장은 또다른 노동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노동의 유연성'은 말이 좋아 유연성이지 따지고 보면 '불안정성'과 동의어인 시대가 된 것 같다. 여기에 온라인에서 경험하게 되는 '디지털 피로'까지 쌓이고 있다. '디지털이 더 많은 업무를 가능하게 했다. (p. 273)' 수시로 울리는 이메일과 톡알람은 일터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번아웃을 해결하려면,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이-당신의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당신이 살고 싶은 인생, 당신이 찾고 싶은 삶의 의미와 결이 다르다는 착각을 지워야 한다. 번아웃 상태가 단순한 일중독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당신에게서 일할 능력을 뺐는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중략) 자신에게 다시금 전념하고 자신을 아끼는 것은 이기적이지도, 자기중심적이지도 않다. 도리어 이는 가치의 선언이다. 당신이 일을 하고 소비하고 생산해서 가치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이 번아웃을 떨치고 일어나 다시 그 수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p. 316)

책의 마지막 챕터는 '엄마처럼 살기 싫은 엄마들' 이라는 제목으로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리게 하는 육아현실고충에 대한 내용이었다. 본문의 흐름에서 조금은 겉도는 이 부분은 일종의 부록처럼 읽히기도 한다. 여하튼,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미국사회에서 직업전선의 핵심층인 밀레니얼 세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번아웃에 빠지게 하는 직업현실의 고충을 구조적으로 찾아야한다면서도 번아웃의 해결방법을 '개인의 존재가치 상기'로 정리하는 것은 아쉬웠다. 물론, '당신은 행동해야 한다. 투표해야 한다. (p. 367)' 라는 현실지침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이 말은 대단한 해방감을 준다. (p. 380)' 라는 저자의 깨달음이 월세와 학자금대출금을 갚아주는 것은 아니기에 여전한 현실에 대한 좌절감은 그닥 해소될 것 같지 않다.

당신을 망가뜨린 게 우리 사회일 때, 나는 당신을 고치지 못한다. 그 대신 나는 당신 자신과 당신 주변의 세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하려 했다. 그러니 당신의 인생을 살펴보라. 일에 대한 생각을, 아이들과의 관계를, 당신의 두려움과 핸드폰과 이메일 계정을 살펴보라. 당신의 피로를 직시하고, 그 피로를 덜어줄 앱이나 자기계발서나 밀키트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피로는 오늘날 세상에서 밀레니얼로 살아가는 것의 증상이며, 인종·계급·직업·부채·이민자 지위에 따라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에겐 이 증상을 바꿀 힘이 있다. 자신을 적절히 고쳐 증상을 이기거나,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빠르게 쫓아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당신과 비슷한-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감정을 느끼는 너무나 많은 사람과 유대감을 나누고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382~383)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것이다. 우리는 힘을 합하여 지금 이 상태에 저항할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지치지 않고 변화를 주장할 정치인들에게 집단으로 투표해야 한다. (p. 383)' 이 책이 쓰여진 때는 트럼프집권기 였다. 과거보다 더 열악해진 노동환경 속에서 다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은 아마도 '투표'였을 것이다. 하지만 좀더 장기적인 관점과 구체적인 연대방법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큰선거를 앞둔 우리에게도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은 아마도 '투표'일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트럼프같은 대통령을 뽑으면 안된다는 깨달음을 기억해야 한다고나 할까.

'요즘 애들' 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궁금하여 선택한 책이었지만 '요즘 애들'에게 닥쳐올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많은 책들이 (문제가 어떤 분야이건 간에) 해결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연대' 다. 나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연구한 사람들이 고민해서 낸 결론이 '연대'라면 우리는 진지하게 그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요즘 애들'과 연대하는 방법도 찾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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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 - 김봉렬의 건축 인문학
김봉렬 지음 / 플레져미디어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건축적 인문학이 이런 거구나 깨닫게 해준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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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 - 김봉렬의 건축 인문학
김봉렬 지음 / 플레져미디어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2,500년이라는 시간을 축적한 건축물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

과거는 영원한 현재, 지금 이곳이야말로 건축의 시간이다.

역사를 읽다보면 예술과 문화를 알게 되고 건축과 건물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인간이 살아온 시간이 역사라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건물이고 건축이기에.

올여름 <뮤지엄 산> 에 다녀온 후 건축의 미학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됐다. 건물에 남은 흔적이나 건물 안에 전시된 작품 말고 건축 자체만으로도 사유를 끌어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이후 건축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됐고 예전이면 선택하지 않았을 책을 선택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이런저런 건축과 역사가 결합된 책들을 읽곤 했는데, 기왕이면 국내 건축가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그렇게 [김봉렬의 건축 인문학]을 만났다.

이 책은 서울신문에 2년간 연재했던 [김봉렬과 함께 하는 건축 시간여행]을 보완하고 가필한 것이다. 가급적 원시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28개의 건축적 사례를 택했다. (중략) 등장하는 사례도 무덤부터 궁궐, 사찰, 서원, 정원, 주택, 성곽 그리고 건축가까지 다양하다. (중략) 모든 시대와 건축을 초월한 공통점이 있다면, 다루어진 사례들은 시대적 사회적 한계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부터 현재의 사유원까지 이 책속에 실린 건축물들은 시간순으로 등장하기에 역사로 읽히기도 하고 자재와 지형과 구조를 분석하기에 건축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사람을 아우른 인문학으로 읽혀서 더욱 매력적인 책이었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고인돌 5만여기 가운데 2만 9,500기가 한반도에 현존한다. 그 숫자만으로도 한반도는 '고인돌 왕국'으로 불릴 만하다. (p. 13)> 세계 곳곳엔 거석문화가 남아있다. 왕의 무덤일수도 있고 제의적 기념물일수도 있고 또다른 의미일수도 있는 거석들의 분포를 봤을때 한반도의 고인돌문화는 분명 특별하다. 모양도 구조양식도 크기도 다양한 고인돌이 유구한 역사속에 파괴된 것도 부지기수일텐데 유라시아대륙 끝자락인 한반도에 (세계 현존하는 고인돌 수의) 절반가까이 남아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토록 많은 왕이 그토록 많은 부족이 있었을리는 없다. 우리 문화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그 오랜 옛날에 고인돌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협업과 평등의식이 기초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썩 괜찮은 게 아닐까... 조선과 일제시대에 국한된 역사의식을 그보다 더 오래전 시간으로 확장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집트나 마야문명에만 있는 줄 알았던 피라미드가 고구려의 왕릉에도 있었고 동남아시아에나 있는 줄 알았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고상형 이층집이 가야인들의 생황양식에 퍼져 있었으며 백제의 왕실정원은 그 어디에서도 본적 없는 독창성을 보여주었고 신라의 황룡사9층목탑은 역사상 가장 높은 목조건축물로서 현재의 아파트 27층 높이로 지금도 어려운 목조건축을 당대에 실현시켰다.

신라는 화엄의 불교사상을 건축물로 구현하기도 했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건축에서 기본요소였던 평지 입지 전제조건을 고려는 산지가 많은 한반도 지형에 맞춘 경사지에서의 건축으로 거뜬히 변형시키며 원나라의 지배시기에도 고유의 문화성을 잃지 않았다. 세종과 장영실의 브로맨스만 알았는데 동시대 건축가로 박자청의 업적 또한 경탄할만 했고, 오직 성주인 다이묘만 보호하는 의미의 왜성에 비해 조선의 성곽이 보호하고자 한 대상은 백성이었다는 점에서 (부패하기전)조선사대부의 기본정신에 박수를 보낼 수 있기도 했다.

효명세자의 예악정치사상이 구현된 연경당의 이야기는 짠했고 성공회의 한옥 교회는 애잔했으며 한센인들이 손수 지은 애양원의 역사는 마음아프기도 했지만 저자는 제주도에 남아있는 일제의 군사시설을 보며 '다크 투어리즘'을 상기시킨다. <휴양이나 관광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전재잉나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일컫는다. 즉 어두운 체험과 불쾌한 사유의 여정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왜 이 땅에 이런 건축물이 세워져야 했는가? 왜 그러한 역사에 처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역사의 상흔으로 남은 이 유산들을 둘러보고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p. 267)> 그런 의미에서 건축의 시간은 늘 현재일 수 있다.

세운상가와 절두산성당 그리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를 예로 든 한국의 근현대 건축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의 건축사는 과거보다 오히려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유원을 통해 <화룡점정, 눈을 그려야 용이 되듯이 지형과 조경의 마무리는 결국 건축의 몫이다. (p. 306)> 라는 문장에 다시 힘을 싣는다.

건축은 기술과 예술의 양면성을 가진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건축은 인간 사유의 물리적 결과물이다. 공학 기술과 디자인 능력으로 기능적 건축은 가능하다. 그러나 삶의 기쁨과 슬픔을 공감해야 인간적 건축이 가능하며,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이해해야 사회적 건축이 가능하다. 역사의 질곡과 진실을 알아야 역사적 건축에 도전할 수 있다. 그래서 건축은 기초적인 인문학에 속하며, 지식인 건축가는 포괄적인 인문학자로서 성찰하고 사유하며 깨닫고 실행해야 한다. (p. 308) 과거가 오래된 미래라면, 미래는 새로운 과거일 수 있다. 근원과 본질은 여전히 중요하다. (p. 309)

건축이 인문학일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분명하게 전달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로 정한 이유를 <역사학의 텍스트가 문헌과 기록이라면, 고고학의 텍스트는 유물과 유적이다. 그렇다면 건축 역사의 텍스트는 문자와 유적 모두가 중요하며 서로 보완적 관계이기도 하다. (p. 318)> 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숨과 삶을 품는 건축은 영겁을 지나도 근본과 현재 사이에서 또 묻고 또 대답한다. 과거가 영원한 현재라면 미래 또한 늘 현재일 수 있다. 근원을 묻고 현재의 물음에 충실히 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래다. (p. 319)> 라며 건축에서 인문학적 고찰을 중요시할 것을 당부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래된 미래와 영원한 현재와 새로운 과거로 여겨질때 건축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좀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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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의 불시착
박소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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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라는 우주를 아직 비행 중인 사람들에게,

일하는 이들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보내는 가장 적당한 위로

"어쩌면 나는 31세기형 인재가 아닐까?"

박소연 작가의 첫번째 직장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집 <재능의 불시착> 가제본 서평단 모집에 응모했고 단편 한 작품이 실린 얇은 가제본을 받았다. [이 책은 '일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대다수의 직장인이 한 번쯤은 느꼈을 야릇한 소외감, 비릿한 자괴감, 소박한 연대감 앞에서 짓게 되는 미묘한 표정들을 소설 속 리얼리티 넘치는 상황을 통해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이 책을 정말 잘 대변해주는 문장이었음을 단 하나의 작품만을 읽었을 뿐임에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제본에 실린 단편은 <막내가 사라졌다> 라는 작품이었는데 콩트처럼 읽히는 이 작품을 읽으며 슬며시 웃음이 나는 것이 요즘 젊은 세대의 위트는 이런 것인가 싶었다.

막내가 사라졌다.

유난히 평범한 날이었다. 기묘하거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전조 증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p. 5)

회사의 한 부서에 막내사원이 출근하지 않은 어느날이었다. 평범한 날은 그저 평범한 날인데, '유난히' 평범하게 느껴지는 날이 '유난'했던 이유는 '눈에 띄는 이상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데(p. 6)'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막내사원 시준의 책상의 풍경, 딱 그런 것이었다. '나는 아까 시준의 책상에서 느꼈던 묘한 이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책상 위가 완벽하게 깨끗했다. (p. 7)' 완벽하게 깨끗한 책상이 '이질적'이고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평범'함과 다다르다는 것은 달리말하면 '평범'하다는 것은 조금은 어수선하고 조금은 어지럽고 조금은 더러운 그런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저는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필요한 서류는 대리인이 참석해서 처리할 예정입니다. -강시준 드림-'

갑작스러운 퇴사문자도 당황스러운데 회사사람들 모두를 당황시킨 단어는 '대리인' 이라는 단어였다. 퇴사에 왠 대리인? 그런데 의외로 그 단어는 무시못할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회사는 점점 술렁거리고 그리고 어떤 이들은 떨기 시작한다. 대리인이 와서 과연 무어라 말할까? 각자 그동안 자신들과 막내사원과의 일화들을 곱씹어 보는 동안 누군가는 속이 울렁거리고 누군가는 좌불안석이 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다른 또 누군가는 ㅋㅋㅋ

단순한 무단 퇴사라고 생각했던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p. 15)

'그러고 보니 나는 시준 씨한테 실수한 거 없나?'

덩달아 불안해진 나는 그동안의 행동과 말을 천천히 복기해보았다. 별것 없었던 것 같기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p. 17)

엄청난 회사기밀을 들고 튄 것도 아니고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큰 회사의 여러 부서 중 하나의 부서에 속한 막내사원이 퇴사하는 것에 대해 무어 그리 많은 사연이 있을까 싶지만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하나하나 드러나는 일화들 속에 과연 막내사원이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내일까지 두려움에 떨 사람들이 많아 보이네요. 그러게 회사 다닐 때나 상사고 선배지, 그만두면 아무 관계도 아닐 사람들끼리 진즉 기본 매너는 지키고 살면 좀 좋아요? 지금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껌뻑 죽는 척 해주는 거지, 나가면 알게 뭐에요? 말도 제대로 안 섞어줄 동네 아저씨고 모르는 아줌마지" (p. 20)

몇장 안되는 짧은 작품이었음에도 풍성하게 읽혔고 지금껏 읽은 그 어떤 직장인 에피소드 보다 산뜻하고 발랄하게 다가왔다. 기묘한 퇴사 절차에 대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을 보며 21세기형 사람들과 31세기형 사고관의 만남이 유쾌하게 읽혔다.

직장인 에피소드라는 점에서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 생각났다. '기쁨'과 '슬픔'이라는 대비에서 알수 있듯이 이 책속 작품들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사연들이었다. 그 씁쓸함에 비하면 <재능의 불시착>은 아예 그런 구분을 의식하지 않은 작품들을 모은 책인것 같다. 이 신선한 접근에 조금더 다가가보고 싶다. <막내가 사라졌다> 말고도 다른 작품을 읽으려면 어서 이 책을 집어들어야 겠다. '지구에서 일하는 게 적성에 안 맞아요' 라고 말하는 31세기형 젊은이들은 또 어디에 어떤 불시착들을 했을까 그래서 어디로 안착하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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