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연효숙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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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유토피아 사유를 풀기 위한 열쇳말

유토피아를 둘러싼 현대적 물음들

동서양 철학고전을 쉽고 입체적으로 읽도록 도와주는 시리즈라고 안내된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얇고 작은 책이라서 일단 겉보기만으로는 '고전은 어렵다'라는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기대했던 고전책은 아니었다. 나는 '모어의 유토피아'를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려나 기대했던건데, 이 책은 '모어의 유토피아'를 먼저 읽고 난 후 읽었어야 했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생각했던 질문들에 대해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본 적 없는 내가 어찌 그 질문을 이해하며 하물며 답을 유추해볼 수 있었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모어의 '유토피아' 원전 번역서를 찾아 읽는 건데...싶었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기 전에 사전정보로 알아둘 만한 내용들도 꽤 있었기에 + - 퉁치는 걸로.

유토피아는 15,16세기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어는 어떤 시대에 살았을까? 그는 왜 <유토피아>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일까? 토머스 모어가 살았던 때인 15,16세기 유럽 사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흔히 암흑기라 불리는 1,000여년 동안 중세 유럽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고 새로운 기운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 곳은 이탈리아였다. (p. 18) 유럽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르네상스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 사상과 문화, 예술에서 새로운 기운이 퍼져나갈 때,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p. 21)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스위스, 프랑스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으로 중세 교회의 통일은 무너지고, 계파간 갈등과 대립이 심해져 유럽 각지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모어가 살았던 영국에서는 다소 엉뚱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p. 22) 헨리8세는 자신의 재혼을 관철시키기 위해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독특한 영국식 성공회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p. 23)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토머스 모어는 이렇게 교회가 구교와 신교로 나뉘는 것을 반대했다. 모어가 다른 데에서는 굉장히 진보적이었지만, 종교에서만큼은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p. 24)

모어가 살던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였고 종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으며 무역의 활로가 점차 전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그러니까 모어는 급변하는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개혁적인 성향으로 비판적 관점을 가졌으나 종교에서만큼은 보수적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이렇게 각 나라마다 앞다투어 신천지를 발견하려는 분위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26)' 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운 땅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유럽땅에 국한되어 있던 상상력이 새로운 땅 즉 어쩌면 유토피아 같은 새로운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력이 발휘되기 딱 좋은 때였던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지금 이 문제투성이 현실보다 좋은 곳, 하지만 그동안은 몰랐던 곳, 그러니 새로 발견되는 땅이 그러한 유토피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런 상상력의 흐름이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지금 눈앞의 현실속 문제점들이 적나라하면 적나라하게 보일 수록 더 꿈꾸게 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유토피아>의 주요 등장인물은 신천지로 비유되는 유토피아 땅의 삶을 5년 동안이나 경험하고 온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이다. 이 라파엘이 참여한 탐험대가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 일행이라고 모어는 상상력을 발휘해 설정한 것이다. (p. 26)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를 대표하는 에라스무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의 교분이 상당히 지속되었다. (p. 28) 당시 영국은 장미전쟁에서 승리한 헨리7세가 리처드3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튜더왕조를 열고 있었다. 모어는 헨리7세와 여러 가지 정책 면에서 종종 충돌하곤 했다. (p. 29) 헨리7세와 종종 충돌했던 모어는 헨리8세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p. 30) 귀족과 성직자들이 로마 교황청에 헨리8세의 이혼 청구서를 제출하는 서류에 모어는 서명을 거부하고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해 헨리8세로부터 거듭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534년 마침내 모어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다. 15개월 동안 악명 높은 런던탑에 구금된 기간에도 그는 저술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35년 7월1일 모어는 재판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닷새후 단두대에 올랐다. (중략) 가톨릭 교회는 죽음을 선고받고도 의연히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굳건히 지킨 모어를 그의 400주기인 1935년에 성인으로 올렸다. (p. 33)

사실 <유토피아> 원전 번역본을 읽었다면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지식들은 아마도 해제에 설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모어의 유토피아를 쉽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모어의 유토피아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들을 미리 던져주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저자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현대적 버전의 질문들까지 던진다. 그런 질문들을 열쇳말로 삼아 왜 지금 이 현대에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원제는 <사회의 가장 좋은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 이다. <유토피아>를 몇 개의 핵심 개념으로 정의하면,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 사회, 미래를 위한 관점, 완벽한 사회, 새로운 법률제도, 인간적인 시선 등이 될 것이다. (p. 34)

<유토피아>의 원문이 조금 인용되고 있긴 하지만 그 양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책만으로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직접 탐험하고 돌아온 라파엘 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마치 소설처럼 혹은 여행담처럼 서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분명 당시 영국사회에서는 나름 파격적인 사상이었음은 분명하다. 고대의 플라톤의 <국가> 부터 근대의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그 생각의 범위가 넓어보이는 <유토피아>는 무척 궁금한 고전이다. 이 책을 보니 고전이긴 하나 소설처럼 읽혀질 것도 같아 무척 궁금해진다.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 '모어의 <유토피아>와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될 여섯 권의 대표적인 책들을 소개 (p. 164)' 하고 있다. 이 부분을 보니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라는 책도 무척 궁금해진다. 또한 본문에 등장했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도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비록 이 책이 처음의 내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으나 이렇게 읽고 싶은 책들을 남긴 것을 보면 이 책또한 읽어봄직한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엔 좋은 책들이 어찌나 많은지...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없고... 여하튼 이 책이 속한 시리즈는 고전읽기를 할때 참고용으로 썩 괜찮은 책들이 될 것 같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 그만큼 유토피아가 저절로 꿈꿔지는 요즘 시대에 중세말의 <유토피아>를 찾아 읽어보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지, 이 책의 저자와 나는 어떤 질문을 공감하고 다른 질문을 생각하게 될지 숙제처럼 남은 이 궁금증을 언제 풀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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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나는 예술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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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혼자 가지 않아도 좋은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거리 미술관 산책

2020년 한 해 동안 <국민일보>에 연재되었던 칼럼 '궁금한 미술'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우리가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굳이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일상 속에 미술품이 있다는 것. 하지만 언제든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작품의 작가, 제작 경위, 미학적 가치, 시대사적 맥락을 두루 알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거리 위 조각물과 건축물이 누구의 손을 거쳐 탄생했는지, 설치된 배경은 무엇인지, 어떤 점이 멋진지 등을 궁금해할 이들에게 '친절한 거리예술 안내서'가 될 내용을 담았다. - 책표지 앞날개 내용 中-

예술작품이라 하면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어딘가 좀 격조 높은? 곳에 있을 것 같고, 그런 곳의 야외전시장에서 보는 작품들 조차 실내에서 보는 작품들에 비해 대충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공공미술'을 막상 의식하고 나면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 길거리 곳곳 도심의 한복판에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궁금했다. 내가 봤더라도 그냥 스치고 지나갔을 그리하여 봤어도 기억나지 않을 그렇게 예.술.작.품. 인지 몰랐을 작품들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

첫번째 소개 작품은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앞에 있는 <해머링 맨> 이었다. [ 흥국생명은 당시 '1%법'에 따라 이 작품을 주문했다. (중략) 흥국생명은 2008년 <해머링 맨>의 인체 윤곽이 멀리서 더 잘 보이도록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도로 쪽으로 5m 더 빼는 결단을 내렸다. 이 거대한 철제 조각상은 망치질하는 데 드는 전기료, 보험료 등 유지비만 1년에 7천만원 가량이 든다고 한다. 설치와 이전, 유지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기업 오너의 미술 애호가 거리의 공공조각의 수준을 어떻게 업그레이드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p. 27) ] 그랬구나... 광화문에 가면 당연하게 눈에 보이는 그 거대한 입상이 수많은 사람들의 출퇴근길에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공공미술작품이었구나... 이 작품에 비하면 두번째 소개되는 청계광장의 <스프링>은 그야말로 공공미술의 폐해애 가까웠다.

올덴버그에게 제시된 작품 가격은 무려340만달러 (당시 환율로 35억원). 해외 미술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거액이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지속 가능한 녹색 성장 시대로의 이륙을 선언하는 기념비적 상징물을 외국인 작가에게 빼았겼다는 허탈감이 미술계를 휘정었다. 서울시는 다슬기 모양이라고 설명하지만, 소라를 닮은 게 분명한 조각의 형태도 생뚱맞았다. 그리고 설사 다슬기가 맞다고 해도 거기 왜 다슬기 모양의 조각이 들어서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던 미술인들 (p. 35) <스프링>을 제작하던 당시에는 이 과정이 없었다. 외국 유명 작가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내리꽂은 것이다. 그때 여러 미술 단체에서 '외국 작가의 작품이 선정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공론화 과정이 빠진 것이 문제'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스프링>에 대해 미술계가 반감을 가지는 또 다른 이유는 올덴버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청계천을 찾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올덴버그는 한국을 단 한번도 찾지 않고 <스프링>을 디자인했다. (p. 38) 2007년 대선이 코앞인 시점이었다. 천천히 제대로 개울을 복원하고 조각물을 세우는 것은 대권 가도에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그는 '빨리빨리'를 거듭 외쳤을 것이다. 그 결과, '길게 누운 분수대' 거대한 시멘트 어항'으로 불리는 청계천이 탄생했다. 복원된 자연 하천이 아닌 한강과 지하수를 끌어와 흘려보내는 인공하천이다. 그러니 청계천 초입에 놓인 <스프링>은 허구이자 위장이다. (p. 40)

MB의 대권 야망 속에 서둘러 마무리된 청계천 공사와 공공미술 작품은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건만은 그의 위풍당당한 자랑질에 우리가 너무 쉽게 넘어갔던 것이 아닐까. 비싸게 들여온 외국작가의 작품들이 흉물 취급 당한 작품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있다고 해서 공공미술일지라도 소위 '작품'이려면 반드시 외국작가의 작품이어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DDP 앞에 서있는 거대한 인간꽃처럼 보이는 조형물의 작가는 김영원 조각가였다. 아무리 예술성이 높더라도 말도많고 탈도많은 건물인 DDP에 비해 나는 이 조각상의 예술성이 훨씬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았다. 앞선 사례들에서도 확인되지만 건물앞에 서있는 예술작품은 동상인 경우가 많다.

동상은 통치자가 국민에게 통치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서구에서는 19세기에 엄청나게 생겨났다. 민족적 우월감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제국주의 시대는 애국주의 물결이 거셌고, 이런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수단은 영웅화된 인물의 동상을 공공장소에 높이 세우는 일이었다. 이성의 시대인 근대는 동상을 통해 영웅적인 인물의 강인한 정신력과 실천력을 보여주려 했다. (p. 62) <이순신 동상>자리에 예정돼 있었던 4·19기념탑은 5·16군사정변 이후 지금의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는 곳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박정희 시대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동상에 따라붙는 오명이기도 하다. (p. 65)

권력이 독재일때 그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분야는 없었다. 예술계도 마찬가지라서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조각상과 건물은 그 모양을 달리하게 되곤 했다. 공공미술이 아니라 권력자의 선호도에 맞춘 그런 작품들을 과연 공.공.미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1%법'을 만들었기에 그나마 그런식의 공공미술이나마 확장되게 되었다.

때는 1983년. 서울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건축 심의 조례를 강화했다. 핵심은 서울의 미관지구 안에 11층 이상, 건축면적 10000㎡이상 건물을 신축할 때 건축주가 공사비의 1% 이상을 조각과 벽화 등 '미술장식'에 쓰도록 한 것이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준공검사를 받을 수 없도록 했다. ('건축물 미술장식'이라는 용어는 2011년부터 '건축물 미술작품'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면서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제13조에서 건축물 미술장식의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권고 사항이었지만, 서울시가 선제적으로 '미술장식'을 의무화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1995년부터 의무화되면서 '1%법'으로 통칭되었으나, 2000년부터 설치 비용이 건축비의 1%에서 0.7%이하로 경감됐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거리 조형물 시장의 분수령이 된 계기였다. (p. 71)

공공미술작품이 흔해지는 만큼 그 작품성에 대해 둔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을때 뭔가 들어서면 초집중하여 보게 되지만 여기에도 하나 저기에도 하나 있게 되면 그냥 뭔가 있는가보다 하면서 지나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지나친 공공미술 작품들 중에 은근 작품성 높은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고나서 좀 놀랍기도 했다. 저자는 도심 안의 또 다른 예술로 '건축'이야기도 풀어놓는다.

"객실 수는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수익은 적게 나도 좋습니다. 버킷 리스트에 올릴, 그런 건축물을 지어주세요. 우리나라에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그런 건축물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2015년 봄, 코오롱 그룹으로부터 리조트 설계를 요청받은 김찬중 대표는 이 같은 주문이 믿기지 않았다. (p. 117)

울릉도에 있다는 '코스모스 리조트' 는 2개동을 합쳐봐야 총 객실 수가 고작 12개. 리조트로서 경제성은 한참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작고 소박하게 지음으로써 울릉도의 절경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풍광이었다. 여기... 꼭 가보고 싶다!!

이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이나 한옥의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 이야기였다. 일명 '달항아리'로 불린다는 이 건물또한 오너가 경제성만을 추구하지 않을때 어떤 미학적 가치가 획득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DDP 건물은... 건축가 본인의 이력에는 상당한 장점이 됐겠지만... 글쎄...

1988년 서초구에 예술의 전당 음악당이 개관하기 전까지 10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장 역할을 한 세종문화회관은 남북 체제 경쟁과 대화의 산물로 탄생했다. 그 시절 남북은 군사력·경제력 뿐 아니라 문화적 능력을 두고도 경쟁했다. 21세기인 지금, 그때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는 건축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p. 179)

애초 5층으로 설계됐던 국회의사당은 해방 후 중앙청(5층)으로 쓰던 총독부 건물보다 높아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6층으로 높아졌다. 이렇듯 권력자 입맛에 따라 시공 과정에서 누더기가 된 것이 국회의사당이다. (p. 189)

앞선 에피소드들에서 잠깐씩 이야기되기도 했지만 저자는 한 챕터를 역사이야기로 할애해서 공공미술 혹은 건축물과 관련된 역사를 들려준다. 예술의 전당이 왜 갓을 쓰게 됐는지 세운상가가 왜 '좌절된 유토피아'가 됐는지 등의 이런저런 뒷이야기들 모두 재미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압권은 국회의사당 뒷얘기였다. 건축가 누구도 자신이 참여했음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누가 지었다고 말할 수조차 없게된 기형의 건물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사당이라니...

오피스텔에 설치된 이 전광판 작품에 주목한 이유는, 이 작품이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의해 설치됐기 때문이다. 통상 건축물 미술작품은 조각이나 회화를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미디어아트다. 게다가 그걸 전광판 형식에 구현하니 신선하다. (p. 230)

시대가 변한 만큼 공공미술도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관점을 바꾸고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한다. 아파트 조경에서부터 전광판, 길가 혹은 계단 아래 등 작품이 위치하는 공간은 이제 반드시 건물앞이 아니었고 그 형태또한 동상이 다가 아니었다. 그 새로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서울로7017에 있다는 <윤슬> 이었다. 언젠가 서울로에 가게되면 이곳에 꼭 가봐야 겠다.

광화문 하면 떠오르는 풍경, 인천공항 하면 떠오르는 풍경, 녹사평역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곧 공공미술 작품이 녹아든 일상의 풍경이고 거리 갤러리 풍경이다.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를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길. 공공예술, 공공미술이 멀게 느껴졌던 사람들에게도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p. 296)

이 책은 그야말로 공공예술에 대한 도슨트투어가 맞았다. 이 이게 이런 작품이었어? 하며 새롭고 아니 이런 배경이 있었어? 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고나니 더 궁금해진다. 거리 곳곳에 또 어떤 예술작품들이 있을지... 저자가 2편을 내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좀 시일이 걸릴 것 같으니까, 저자의 말대로 공공예술작품들 앞에 안내판이라도 어서 설치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그게 작.품.인지 정도는 알고 지나치게 될테니 말이다.

ps. 생각해보니 아파트마다 있는 이런저런 조형물들도 대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건지 모를 것들이 수두룩한데 설치할때 작품설명판도 함께 붙여주면 참 좋을 것 같다. 꼭 대작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작품일테니 그 의미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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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좋았던 리뷰 ㅎㅎ 축하드립니다 *^^*

LILLY 2022-03-15 11: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시소 첫번째 - 2022 시소 선정 작품집 시소 1
김리윤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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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가장 다채로웠던 시와 소설의 풍경을

한 권으로 만나는 '시소'

<시소>는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2021년 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담은 책이다. 매 계절 발표된 시와 소설을 한 편씩 선정하여 좋은 작품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이 프로젝트는 각 작품마다 작가와의 인터뷰가 뒤따르고, 그 작품들과 인터뷰를 한권에 모아낸 책이 <시소>다.

문학지를 구독하지 않는 이상 발표되는 시와 소설들을 바로바로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볼 수 있기에, 잡지가 아니라 한권의 작품집을 선호하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최신의 시와 소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한권의 <시소> 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1년의 사계절동안 발표되고 그 계절 마다 선정위원들이 신속하게 선별하여 <시소>에 담은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봄 - 시 : 안미옥 <사운드북> / 소설 : 손보미 <해변의 피크닉>

여름 - 시 : 신이인 <불시착> / 소설 : 이서수 <미조의 시대>

가을 - 시 : 김리윤 <영원에서 나가기> / 소설 : 최은영 <답신>

겨울 - 시 : 조혜은 <모래놀이> / 소설 : 염승숙 : <프리 더 웨일>

나에게 시란 한글로 쓰여졌어도 외계어로 읽히는 분야이기에 시를 읽고 시인의 인터뷰를 읽어도 시의 이해는 역시 무리였다. 따라서 소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감상을 남겨두고자 한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하고 미심쩍고 불미스러운 그 느낌-그 당시에 나는 언제 어디서나 그런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무엇을 궁금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남자애들은 갑자기 키가 컸고, 골격이 자랐다. 여자애들 중 일부는 가슴이 나오고 엉덩이가 커졌다. 크고 작은 소동이 있었다. (p. 39 -해변의 피크닉 中)

이 작품은 열한살의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작품으로 이제 막 이차성징이 시작되려는 어린 소녀의 감정적 혼란을 다루고 있다. 어릴때 이혼한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유일한 혈육인 손녀를 만나기 위해 시부모는 전 며느리와 딜을 했고 일곱살때부터 방학이면 부산에 내려가 한달씩 보내게 된 '나'는 열한살 여름방학때 처음으로 삼촌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렴풋이는 깨닫게 되는 가족간의 비틀어진 관계와 그 관계를 해석하는 어린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춘기소녀도 아닌 열한살의 '나'는 비틀어진 첫사랑을 꿈꾼다.

충조의 잘못도 있었고, 엄마의 잘못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론 내가 잘해야 되는 문제로 귀결되었던 지난날을 언니도 다 알았다. (p. 163)

우리는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하지만 둘 다 그걸 인정할 수 없었는데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구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5천만원은 아버지가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이었다. 우리는 그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절대로 기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의 집값은 아버지의 유산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느새 아버지는 6평 남짓한 반지하방의 전세금만 남겨준 사람이 되어 있었다. (p. 178) (미조의 시대 中)

미조는 단순경리업무 구직중이지만 잘 되지 않고 있다. 엄마는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를 쓰는 중이고 하나뿐인 오빠는 진작부터 가출해서 거의 절연상태다. 살고 있는 집이 재개발에 들어가자 집주인은 어서 방을 빼달라하는데 전재산인 5천만원으로는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반지하 전세방조차 구하기 힘든 상태다. 절친인 수영언니는 성인웹툰 어시로 그림을 그리는 중인데 너무 왜곡된 웹툰 내용에 스트레스 받아서 원형탈모가 진행중이다. 미조의 사정을 다 아는 수영언니는 미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조야, 너 그거 아니?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p. 184)'

네 나이때는 하루에 한쪽이나 두쪽의 일기를 꼭 써야 잠들 수 있었어.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일기의 길이는 점점 줄어들었고 요즘에는 그냥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손님을 만났는지 같은 내용을 짧게 메모하는 수준이야. 오늘이 어제와 달랐고 또 내일과도 다를 거라는 근거를 적어두는 거지.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되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삭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아마 수감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 나는 그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글을 썼다. (p. 245 답신 中)

자매가 있었다. 언니는 일곱살, 동생은 네살 일때 부모는 이혼을 했고 자매는 고모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자매를 떠났을때의 엄마 나이는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아빠는 일용직을 하며 전국을 돌았고 자매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심정으로 자랐다. 하지만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p. 268)' 만이 자매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언니는 열여덟에 만난 학교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임신을 하게 되고 빠른 결혼생활을 했지만 남편은 만삭의 아내에게 자신이 없을땐 보일러도 틀지 못하게 하고 동생이 있거나말거나 막일을 시키는 사람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 언니의 삶은 더 고달파 보였지만 언니는 늘 괜찮다고 남편은 좋은 사람이라고 동생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형부의 외도를 목격했고 언니에 대한 폭력을 눈앞에서 보게 된 순간 동생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만들고 모른척' 했다. 그때 그 나이 스물세살이 된 조카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이 작품의 제목은 <답신>이다. 받은 편지도 없건만은 답신 이라니...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주제넘지 말라고, 수경씨 제발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그때 나는 그런 말을, 두 손에 다 쥘 수 없는 크기의 공처럼 어, 어, 어 소릴 내며 받아 안고는 어쩔 줄 몰랐다. (중략)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도, 나는 또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공은 이미 저리로 굴려버렸다는 듯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왜 따져 묻디 않았을까. 화내지 않더라도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아니, 당연히, 나는... 무서웠던 것 같다. (p. 347) 알고 있다. 나는 아주 느린 사람, 시간 가는 것에 느리고 감정이 내 속으로 드나드는, 들고 나는 지점을 곧장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즉각적인 것들은 종종 나를 상처 입혔으니까. 뒤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몰살당하는 기분에 휩싸이게 했으니까. 나는 점차로 무감해지는 것을 택하여 왔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바짝 외면하며 살아왔는지도. (p. 353 프리 더 웨일 中)

수영씨와 우상우씨는 함께 소설가를 꿈꾸는 사이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수영씨만 등단하게 되고 우상우씨는 노동현장에 뛰어든다. 우상우씨가 사고로 죽었을때 수영씨의 뱃속엔 둘의 아이가 있었다. 혼자 아이를 낳고 맘카페에서 무상나눔 되는 품목들에 연연하며 아둥바둥 살다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수 있게 되자 교재전문출판사에 취직하게 됐지만 경력도 없이 나이도 있는 싱글맘으로 회사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아이는 수시로 아팠고 코로나때문에 어린이집에서도 가정보육을 권했지만 회사는 재택이 아닌 정상출근해야 했기에 종종거리며 사무실 눈칫밥을 먹던 중에 어느날 부터 노란쪽지가 돌기 시작한다. '프리 더 웨일' 이라고 쓰여진, 회사 게시판에 올라오는 족족 사라지던 '차별 철폐'라는 의미의 그 문구... 하지만 수영씨의 삶은 그 메모를 바라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시를 읽는 것도 쉽지 않지만 단편소설을 읽는 것도 녹록치 않았다. 단편소설은 왜 그리 어두운 건지... 이 시대 싱글여성의 삶은 왜 그리 힘들기만 한건지.... 사계절 마다 발표된 작품이라고 해서 그 계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어느 작가가 발표 계절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겠는가;;; 따라서 어느 계절에 발표되었든 2021년 이 한해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작품들은 일종의 '82년생 김지영'들의 이야기다. 인터뷰를 보면 작가들 본인들도 이런저런 육아고충을 토로하고 있었고 그러고 보니 모두 여성작가이자 비슷한 연령대라서 문화적 공감코드도 비슷했을 것 같다. 그렇게 이 책은 사계절의 각기 다른 시와 소설을 담았지만 서로 제법 어울리는 한권의 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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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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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유대교에서 여성 랍비라는 것부터 색다른 책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진행중인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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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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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거대하고 상실의 시간을 건너는 이들에게 약하고, 일시적이며, 빈틈투성이의 삶이 보내는 위로

내가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 책의 홍보문구 한 문장 때문이었다.

[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저마다 아름답다" 소설가 김연수 추천 ]

이라고 책의 띠지에 쓰여있는 것을 보고 이 책이 궁금해졌다. 책에 대해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었지만 김연수 작가가 아름답다고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아는 소설가들 중에 김연수 작가만큼 서정적인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책을 받아들고 보니 이 책은 프랑스에 사는 여성 랍비인 저자가 자신이 진행했던 장례식들에 대해 쓴 에세이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장례식이라는 예식을 통해 추모하고 애도하는 유대인 랍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은 그렇게 죽음에 대한 송가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찬가이기도 했다. 이 책의 원제를 번역하면 <죽은 자와 함께 살기 : 위안에 대한 작은 논문> 이다.

유대 전통은 천 가지 이야기를 통해 죽음이 당신을 따라올지라도 그를 돌려보낼 방법이 있다고, 죽음이 결국 당신을 추적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은 수많은 전승 속에 등장하는데, 천사의 형상으로 우리네 집을 방문하고 우리네 마을을 둘러본다. 이 등장인물은 심지어 이름까지 있다.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다. 아즈라엘은 한 손에 검을 쥐고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주변을 서성거린다고 전해진다. (p. 15) 랍비의 일이란 뭘까? 단연, 의례를 집행하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내 직업과 가장 엄밀하게 가까운 직업명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바로 이야기꾼이라는 이름이다. (p. 19) 당신이 손에 잡은 이 책은 내가 들려줄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들, 내가 경험해야 했거나 내가 함께할 수 있었던 삶과 애도들을 망라한다. (p. 25)

'나는 장례를 진행할 때마다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죽은 자에게서 살아 있는 자에게도 이어지는 이 이야기의 힘으로, 그 자리를 빛내고,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p. 25)' 저자는 말한다. 정통 유대전통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여성랍비가, 그들의 부모세대가 탈취한 땅에서 프랑스로 망명하여 랍비로서의 삶을 살면서, 죽음의 천사가 지나간 자리를 되돌아보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에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이야기꾼이 맞다. 다만 그 이야기의 소재가 '죽음'일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좀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경우는 '죽음'에 대한 경험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 같다. 아마도 '죽음'에 가까워져가고 있다고 느끼는 나이일수록 이 책속의 이야기들을 '아름답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토라는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직접 호소한 것이었다. 시나이산에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그것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당신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해석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어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도, 다수가 표현한 것인 한 현자들의 의견을 무효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탈무드]에서 이 에피소드는 하느님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내 아들들이 나를 이겼구나, 내 아들들이 나를 이겼어" (p. 40~41)

살인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살인 행위의 가당찮은 모순을 알아차렸을까? 앙갚음을 요구하고 무시당한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 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다. 어떤 '위대한'신이 이토록 옹색하게 '초라해져서'인간이 당신의 체면을 세워주길 요구한단 말인가?신이 모욕을 당해서 노여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모독이 아닐까? 유머러스한 신은 위대하다. 유머감각이 떨어지는 그분은 몹시 졸렬하다. (p. 44~45)

이 책의 첫 에피소드는 2015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이슬람단체의 테러로 사망한 사람의 장례식에서 저자가 느꼈던 것들을 풀어내고 있다. 유대교 랍비인만큼 탈무드적 이야기가 이 책에 자주 나올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도록. 몇가지 전통적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저자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동화적 탈무드와 결을 달리한다. 저자가 재해석해낸 이야기들은 전통적이면서 동시에 신랄한 면이 있다. 또한 그럼에도불구하고 온정적이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우리의 장례식 날에 우리의 삶이 비극의 형식과는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고, 우리가 다른 어휘와 다른 상황의 언어로 회상될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스릴러, 로맨스 시리즈, 신화, 심지어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처럼 간주될 수 있기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우리의 죽음으로 요약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 57)

저자의 생각은 우리네 전통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 집에서 초상을 치루던 시절 초상집은 시끌벅적했다. 밤새도록 떠들고 놀고 마시며 '죽음'을 슬픔으로만 내리누르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어느때부터인가 장레식장에서 고스톱치는 사람들도 없어졌을만큼 우리네 장례식은 그야말로 어둠에 잠겨버렸다. 그렇게 비극적인 비극으로만 치루는 장례식이 과연 누구를 위한 장례식인걸까? 그러한 애도가 '죽음'이 곧 단절이라는 공포심을 더 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다. 모르지 않던 '죽음'에 대해 왜 점점 두려움과 공포를 키워가는 쪽으로 변화되어 온 것일까? 그보다는 살아있었을때의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애도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에게 말한 것을 그들에게 번역해줌으로써 그들이 그말을 새로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로, 그들의 입을 벗어난 이야기가 그들의 귀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p. 97)' 라는 저자의 말처럼, 장례식장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는 죽음보다 각자가 알고 있는 떠난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명사의 남녀 성을 구분하는 프랑스에서 직업명은 기본적으로 남성형이다. (중략) 2019년이 되어서야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오랫동안 터부시되었던 주제인 직업의 여성형을 받아들였다. (p. 106)

무엇보다 선례를 만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p. 117) 이 일화가 이토록 유명한 투쟁에 참여한 여성의 장례식 날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저 피식 웃고 지나갔을지 모른다. 시몬 베유의 무덤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버린 행위가 그녀의 투쟁 현안을 탁월하게 증명해준 셈이다. (p. 118)

저자가 1974년생이다 보니 그녀가 진행하는 장례식의 대상들은 그녀의 부모세대, 그러니까 마지막 남은 전쟁세대라 할 수 있다. 유대인에게 2차대전이란 홀로코스트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삶은 정통 유대교적이기엔 신이 너무 무능했음을 경험해버렸기에 이도저도 못하는 그런 침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한다. 시몬 베유도 그런 생존자였고 프랑스에서 선구자적 페미니스트였다. 테러는 외부에서만 폭탄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고 한국인들이 선망하는 서양인들의 언어는 여성들에 대한 터부와 무시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새삼, 평등한 한글과 결혼해도 유지되는 내 이름에 감사를!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왕이었다. (중략) 그는 왕궁을 세우고, 나무를 심고, 과실을 수확하고, 보물을 쌓아올린다. 카인의 아들답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는 말년에 <전도서>라는 책을 쓴다. 그리고 양피지에 모두에게 알려진 이 문장을 반복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구절은 <성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이다. 또한 가장 잘못 번역된 구절 중 하나다. 솔로몬은 히브리이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 예루살렘의 왕은 허무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김이고 입김이니 모든 것이 입김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아벨이고 아벨이니... 모든 것이 아벨이다!" 이렇게 현자, 소유자, 정착민, 그리고 재물을 획득하고 세상의 영속성을 믿었던 자는 말한다. 모든 것이 아벨이라고, 그는 인정한다. 우리가 튼튼하게 세운 모든 것이 결국 마모되거나 사라질 때, 약하고 일시적이며 빈틈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지나간 존재의 입김은 증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숨을 불어넣고,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p. 270~271)

책을 읽으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역나나 어원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새로 알게된 부분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히브리어의 원어 해석을 곁들인 저자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들을 더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자가격리' 시대에 함께 하지 못한 '죽음'들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저절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랍비이자 '쇼아'생존자의 손녀이면서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자의 이야기들은 그동안 알았던 유대교나 탈무드나 성서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 조금 다른 해석을 보여주어 좋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죽음들이 홀로코스트의 생존유대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득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각났다. 전쟁의 마지막 세대 그중에서도 가장 피해를 입은 분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도 저자와 같은 책을 내는 이가 나와준다면 좋으련만.... 여하튼, 이 책은 '죽음'을 다룬 책이긴 하지만 마냥 어둡지 않고 그렇게까지 종교적이지도 않아서 새로웠다. '상실'과 '죽음'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는 이가 읽어보면 좋을 에세이였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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