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미카엘라 르 뫼르 지음, 구영옥 옮김 / 풀빛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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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이라는 위안'에 가려진 플라스틱 재활용의 실체,

그리고 쓰레기 식민주의를 파헤친 인류학자의 '플라스틱 마을'르포

저자는 인류학 박사로 엑스-마르세유대학에서 사회학 및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2011년부터 폐기물, 플라스틱 재료, 재활용에 대해 연구중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의 민 카이 마을을 알게 됐고 방문하여 '플라스틱 마을'의 실체를 확인하게 됐다. 저자는 그곳에서 '재활용의 신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무너지는지를 깨달았다. 이 책의 원제는 'Le Mythe du Recyclage' 재활용의 신화 이다.

이 작고 얇은 책은 르포처럼 읽히는 글이긴한데 주제와 결과가 명확히 정리되는 글은 아니었다. 본문에 비해 오히려 추천사에서 그 내용을 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재활용 쓰레기 처리 시스템과 흐름의 진실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재활요잉라는 '신화'에 담긴 모순과 부조리, 긜고 거짓말을 폭로한다. 그럼으로써 쓰레기 재활용을 둘러싼 우리의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을 전복한다.' 라며 탐사보고서 로서의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우리는 재활용 표시가 붙은 상품을 구입하며 지구의 자원을 과도하게 소비한 행동에 용서를 구하지만, 생각과 달리 재활용은 지구를 구하기에 역부족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 라며 깨져버린 신화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지만, 이러한 정돈된 추천사가 없었다면 본문읽기로는 확실한 깨달음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서술방식과 문장들이어서 좀 아쉬웠다.

멀고도 가까운 이 베트남 마을에서 재료의 여정과 포장재, 비닐봉투 등 물건의 삶에 관한 나의 연구를 토대로 쓴 이 글을 통해 이곳과 다른 곳을 연결하고, 인간이든 아니든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멀고도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시팓. 그래서 일상의 경험에 대해 반향을 일으키고 쓰레기, 재활용 그리고 플라스틱과 우리의 일상적 관계를 살피고자 한다. (p. 24)

결과적으로 저자는 베트남의 민 카이 마을에 대한 현장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위와 같은 살펴보는 시선을 독자 스스로 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나름 철저하게? 분리수거 하면서 뿌듯함을 느끼거나 환경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곤 한다. 하지만 그 쓰레기들이 정말 재활용되고 있는 것이 맞을까?

거시적으로 모든 재활용 시스템을 살펴볼 순 없지만 베트남의 민 카이 마을 한곳을 세세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재활용에 대한 기대는 허상이고 거품이었음이 드러난다.

세계의 재활용 쓰레기들은 자국에서 처리되지 않고 타국으로 수출된다. 그 쓰레기들을 수입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들이다. 그 나라들에는 쓰레기 마을이 있다. 쓰레기 마을에서는 온갖 악취와 더러움 속에 쓰레기산을 헤집으며 다시 쓰레기를 골라내고 그중 일부가 재활용품으로 재생되지만 그 사용처 또한 그 쓰레기마을에서 순환될 따름이다. 쓰레기를 버린 나라들에서는 깨끗한 원재료로 깨끗한 재활용 봉투를 만들어 재활용하지 않고 그저 버린다면 그 쓰레기를 받은 나라들에서는 더러운 원재료로 믿을 수 없는 재활용 봉투를 만들어 나름 재사용하지만 그 사이 환경과 건강은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으므로 그것이 과연 재활용인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 대표적 예시가 플라스틱 마을이라 불리는 민 카이 였다.

결국 재활용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의 문제였고 불평등의 문제였다. 누군가의 친환경을 위해 누군가의 환경은 철저히 파괴되고 있었다. 지금은 서로 연관없어 보이는 그 장소들이 사람들이 과연 계속 연결되지 않을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바닷물은 돌고돌고 대기는 돌고돌고 전염병도 돌고도는데?!

현재의 재활용 시스템은 전혀 친환경적이지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에서 더러운 쓰레기가 사라진다고 해서 내가 계속 깨끗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과신하지 말자. 어차피 모두 지구에서 살고 있다. 내가 버리고 더럽힌 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재활용이 진정 재활용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우리는 좀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ps.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역사에서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대부분 서로 앙숙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프랑스학자인 저자는 민 카이 마을에서 찾은 쓰레기들 중에서 유독 영국과 아일랜드의 것을 콕 집어내고 친환경적이지 않은 재활용업체들 중에서 유독 영국 기업을 콕 집어낸다. 험담을 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세계의 쓰레기와 세계의 모순적 기업들 중에서 유독 영국것을 예로 든 것은 인류학자라는 저자의 직업에서 갖춰야할 중립성이 조금은 흔들려 보여 아쉬웠다. 또한 르포라면 상세한 르포로, 프로가 아니라면 좀더 확실한 연구데이터로 논리를 세워 전개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자신이 눈으로 본것 베트남 사람들을 몇명 만나 대화를 나눈 것으로 넌즈시 읊조리고 있는 이 책은 너무 모호한 내용이라 '쓰레기 식민주의'라는 거대한 모순을 파헤쳤다거나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이또한 아쉬웠다.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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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대한 감각 트리플 12
민병훈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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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하고 불연속적인 감각만이 유일한 논리로 작용하는 세계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의 세계

이 책은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12번째 책이다. 이 책의 특징상 작고 얇은 책에 3편의 단편, 무엇보다 새로운 작가.

그 새로움이 이번 책만큼 강렬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싶다. 새롭다 못해 조금은 충격적인,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 이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 책이었다.

너는 잠에서 깨어나 밤새 가라앉았던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낮은 천장과 먹색으로 도배된 벽지를 보며 이곳이 낯선 이국의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코니에 서서 사진과 영상에서나 봤던 양식으로 건축된 시가지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예전 일들을 떠올린다. 누가 곁에 있었고, 주로 무엇을 했으며, 어떤 곳에 있었는지, 떠올리지만, 위상으로 겹쳐진 시공간속에서 너는 희미함을 느낀다. (p. 12)

<겨울에 대한 감각> 中

이미지들의 나열 속에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는 구분되지 않고 도마뱀이 다니는 낯선 이국의 방에서 눈이 너무 많이 내린 이곳까지 모두 아무런 경계가 없다. 작가는 겨울을 이렇게 감각했다는 것일까 겨울로 연상되는 사람관계에서의 의미를 상징한 것일까... 감각은 느껴지지 않지만 서늘한 소설임은 맞다.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고, 담 너머 세상은 깊은 암흑에 빠져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입김이 흩어지는 창밖을 긴 시간 바라보는 것으로 갑자기 깨어난 새벽 내 지루함을 견디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 뒤 동이 트면, 암흑이 걷힌 산중에서, 요 몇 달간 나를 괴롭히던 여러 소리와 상황들이 다시 담 너머에서 밀려 올 것이다. (p. 41)

<벌목에 대한 감각> 中

'나'에겐 일년전 신문지면에 오를만한 사건이 있었다. 그후 고모 혼자 살던 집에 혼자 살고 있다. 이 집은 산 언저리에 있고 이 산에선 벌목이 진행중이다. 그나마 앞 작품에 비해 객관적 상황배경은 좀 파악할 수 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보다는 '나' 가 벌목에 대해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는 서사는 앞 작품의 '겨울' 과도 연결되고 뒤에 나오는 '불안'과도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트리플' 시리즈 구성에 맞춤한 3작품이긴 하다.

나는 산페르난도 항구 선착장에서 항해에 합류할 요트를 기다리고 있다. 선장은 입국 절차에 대해 미리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p. 70)

잠깐 내려다본 바닷속은, 낮은 암흑으로 일렁였다. 선장과 선원은 보이지 않고, 나는 밤바다에서, 이제 모든 게, 다시 처음처럼 가라앉길 기다린다. (p. 94)

<불안에 대한 감각> 中

이미지적 소설문체다 보니 안그래도 단편에 대한 이해력이 딸리는 나로서는 서사를 알게 해주는 문장을 집착적으로 찾아가며 읽게 되곤 했다. 누가 어디에서 언제 무슨일이 어떻게 왜 벌어졌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유와 상징을 넘어선 저자의 표현방식은 너무나 생경했다. 단편 3작품 뒤에 실린 [에세이-당신을 통한 감각론] 은 사실 저자 자신에 대한 소개글이다. 일종의 '작가의 말' 이라고 봐도 될법한. 하지만 저자는 '나' 라고 하지 않고 '당신'에 대해 설명한다. 그 '당신'이 곧 '나' 저자 인데...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말을 당신만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서투르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당신은 소설에게 당신의 손을 빌려준다. 당신은 감각에게 당신의 입술을 빌려준다. 당신은 모든 것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에 대한 감각이 여기로 오고 있다. (p. 107)

<에세이 - 당신을 통한 감각론> 中

저자인 '나'는 '내' 이야기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나'의 말을 '나'만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기에 서두르지 않고 '내' 소설을 쓴다. '내' 소설은 '나'의 손으로 쓰여지고 '나'의 감각은 '나'의 입술로 말해진다. '나'의 모든 것에게 '나' 모든 것을 준 셈이다.그렇게 '나'의 감각이 여기 이 소설에 실렸다.

저자에게 소설이란 '나' 만의 이야기인 것일까... 의아해 질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의 '해설' 을 이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될 줄이야.

여기 실린 세 소설을 읽었을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좀처럼 읽어내기 힘든 그의 글 앞에서 난감함을 느끼기도 했다. 읽다말다 몇 차례 반복하던 끝에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지금 이 읽기를 방해하는 것들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읽는다는 것은 쓰여진 것을 받아들이는 일대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행위가 아니다. (중략) 읽히지 않는 민병훈의 소설은 의식이라는 만들어진 심연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원초적인 표면을 재현한다. 시각으로, 청각으로, 촉각으로 감각된 것들이 무차별적으로 '현상'하는 가운데 이 소설이 재현하는 것은 독해할 수 없는 표면으로 이루어진 무의식이다. (p. 112~113)

민병훈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욕망이었음을 이제 안다. (p. 122) 불친절하고 불연속적인 감각이 나를 나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논리로 작용하는 세계,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의 세계, 민병훈이 심연을 지배하는 작가의 자리 대신 선택한 것은 모두에게 그들의 자연을 돌려주는 작가의 자리다. (p. 124)

<해설 - 감각을 위한 논리 (박혜진 문학평론가)>

줄거리가 없는 소설이라니 낯설다. 시도 아닌데 줄거리가 없다니.

이미지로 진술하는 소설이라니 낯설다. 시적 상징이나 은유도 아닌 그저 이미지라니.

문학평론가도 좀처럼 읽어내기 힘들었다는 작품에 대해 그 작품을 쓴 작가의 무의식을 유추하며 읽어야 한다는 건 독자에겐 모험이다.

이러한 모험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읽혀지지 않는 글에 대한 방해물을 생각하고 읽고, 읽는 내용에 대해 이해하려는 습관을 돌이켜보고, 소설읽기가 주는 감동에서 멀어져보는 경험이 의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감각' 이란 애초에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므로 비록 쓰여진 글이라 읽기는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러한 낯선 문장들이 내게 전해오는 서늘하고 외롭고 불안한 감각을 느낀 것으로 이 책은 온전히 읽은 셈이 된 것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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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필로소피 - 테크네에서 에로스까지, 오늘을 읽는 고전 철학 뿌리어 EBS CLASS ⓔ
김동훈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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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유용하면서도 술술 읽히기도 하고 고전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정말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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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필로소피 - 테크네에서 에로스까지, 오늘을 읽는 고전 철학 뿌리어 EBS CLASS ⓔ
김동훈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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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이 고전 그리스오와 라틴어에서 찾은

엉클어진 생각을 매듭짓는 열다섯 뿌리어

서양고전을 읽다보면 어원을 알게 될때가 종종 있는데 그 어원적 의미가 너무나 절묘해서 감탄하게 될 때가 많다. 또한 지금 사용되는 의미와 그옛날의 의미가 달라서 사전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몸젠의 로마사> 번역자들이 만든 번역어사이트가 문득 생각났다. 다시금 조회해보니 이유는 알수 없지만 지금은 막혀 있는 사이트로 나온다. ㅠㅠ <몸젠의 로마사> 를 읽을 때 그 번역어 사전 사이트를 종종 들어가 보곤 했었는데... 책날개에 소개된 저자의 이력을 보며 <몸젠의 로마사>를 공역한 학자라는 것을 알고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신뢰도가 백퍼로 차올랐다. 고전을 번역하며 사전을 만들정도로 꼼꼼하게 분석한 학자가 그 어원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풀어내 준다니 이보다 더 좋을수 있겠나.

옛말 중에는 시공간을 넘어 생명과 맥을 유지하는 힘을 지닌 말들이 있기 때문인데, 필자는 이런 힘을 지니고 오늘날까지 전해진 이 옛말을 '뿌리어'라 하겠다. '뿌리어'의 말뜻은 정말 깔끔하고 깨끗하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알았다고 자부했던 온갖 것을 내려놓으면 잔물살처럼 맴돌면서 맘속에 스며드는 아스라한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의 명맥을 따지다보면 어느덧 맑은 기운이 솟구친다. 이것이 뿌리어를 익히는 이유라 하겠다. 이 책에서는 특히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 가운데서 '정갈하다' 느낀 뿌리어로 열다섯 매듭을 지어보았다. (p. 6)

저자가 소개하듯이 이 책에는 15개의 뿌리어에서 시작된 하나의 주제가 역사를 지나쳐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되고 있다. 서양고전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들어봤음직한 단어부터 생소하고 낯선 단어까지, 읽기전엔 15개라는 숫자가 적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풍족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만큼 저자의 뿌리어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고 풍부했다.

키케로는 연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르스(ars)'를 공부해야 된다고 말한다. 이 아르스가 바로 테크네를 라틴어로 번역한 말이다. (p. 15) 키케로는 테크네가 온전히 복원돼야 한다 했는데, 그가 말하는 테크네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바로 '후마니타스',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통해서 아르스, 즉 테크네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p. 18) 테크네가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아르스'가 되었는데 이게 영어의 '아트(art)'다. (p. 22)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시간은 촉박하여 그 촉박한 인생에 실수하기 쉽고 인생의 결단은 험난하다. 하지만 필연을 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환자, 간호인, 그 외부인을 위해서도 갖춰져야만 한다. -히포크라테스, <잠언집>1장 중에서 (p. 28)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유명한 말은 사실 의사들의 선서에 나오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이고 여기서 예술은 테크네 를 번역한 말이었다. art 라는 예술이 아니라 의학적 기술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담은 문장이었다. 그런 테크네가 로마시대 아르스를 거쳐 현대시대에는 예술이 되었다. 그 변천사를 보며 주지해야 할 점은 기술적인 테크네도 예술적인 테크네도 중요한 것은 타인을 위해 갖춰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흔하게 알려진 테크네라는 뿌리어가 인생과 인간성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뿌리어로서의 철학적 의미를 완성하다니, 단어 하나로 이토록 풍성한 의미를 읽을 수 있다니, 재밌다!!!

그리스어의 아레테는 라틴어로 번역하면 '비르투스(virtus)'이다. 영어의 벌추라고 하는 말이 이 비르투스에서 온 것이다. 라틴어로 '비르(vir)'는 남자란 뜻이다. 아레테가 라틴어로 비르투스로 번역될 때 남성다움 또는 힘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34) 그럼 그리스어로 아레테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이 아레테라는 말이 '아레스'라는 신의 이름에서 왔다는 설이다. (중략) 주로 고전문학이나 고전철학 전문가들이 아레테가 나오면 힘과 관련시켜 '용맹성'이라 번역하기도 하고, 그 힘이 잘 발휘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탁월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p. 35)

그리스고전을 읽을 때 알게됐던 '아레테'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그리스 시대의 탁월함이 로마시대로 건너가며 남성적 의미가 더해진 것인줄 알았는데 그 시초부터 이미 아레스 신의 이미지가 갖는 상징성을 갖는 단어였다니... 저자는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을 문학 철학 가릴 것 없이 다양하게 활용하며 뿌리어들을 해설한다. 호메로스 시대의 아레테가 플라톤 시대에 와서는 '협업의 능력'이 되고 그렇게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 읽다보니 전혀 새로운 아레테를 배운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뿌리어 메타, 미디어, 트랜스, 포르마, 미메시스, 인판티아, 팍툼, 메타포라, 조에, 데쿠스, 로망, 스티그마, 에로스 모두 고전어의 사전적 의미에서부터 그 함축적 의미 그리고 그 변천사에서 철학적 의미가 현대에 어떤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지 읽다보면 정말이지 새로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게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기록해두자면 너무 많을 것 같아 소개는 이정도만 하고 직접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전에 읽었던 서양고전들도 생각나면서 읽는 내내 너무 즐거웠지만, 그 읽음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나서 저자가 소개한 서양고전책들을 보고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른 책보다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가 읽고 싶어졌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정말 뜻모르고 소설처럼 읽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고나니 '변신'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으며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사람을 자극하고, 사람은 그 자극에 따라 변화하여 행동하게 된다. 더군다나 뿌리어에 대한 이해는 자신을 유연하게 만들어 보다 도량이 넓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신케 할 것이다. 아무쪼록 다른 것보다 이제 일독을 마쳤으니 유연함이라는 힘을 가졌으면 한다. 그 유연함으로의 변신이 이 책이 목표하는 종착점이다. (p. 319)

고전 철학 뿌리어를 통해 삶의 키워드를 다시 생각해보는 philosopher 로 변신?!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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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의 발톱, 캐나다에 침투한 중국 공산당 미디어워치 세계 자유·보수의 소리 총서 4
조너선 맨소프 지음, 김동규 옮김 / 미디어워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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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호의'는 어떻게 '중국의 권리'가 되고 말았나

누군가의 호의가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경우에 대해 우리는 살다보면 생각보다 쉽게 그 예를 경험하게 되곤 한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50여년간 캐나다의 언론인으로 살아오면서 중국공산당이 지난 50년동안 캐나다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차곡차곡 데이터를 모은 것 같다. 그래서 캐나다 선교사의 호의가 현재는 중국 공산당의 권리가 되었다고 개탄하며 이 책을 써냈다.

나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인종주의적 시각에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강조하고자 한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외국에 있는 한 정당, 즉 중국 공산당이 품은 국제적 야심에 관한 것이다. 중국 당국과 그 공작원들은 캐나다뿐만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의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p. 15)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도 따로 쓸 정도로 이 책이 한국의 상황에도 유의미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얽혀온 중국의 정책에 대해 한국은 이미 민감하게 반응해 왔던지라 캐나다인으로서 느끼는 심각성과 우리의 느낌은 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해외에서 이토록 활발하게 움직여 왔다는 점은 한국에서도 분명 주지해야 할 사안일 것이다.

베이징에 들어선 공산당은 현대판 중화제국 왕조라고 하는 편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p. 24)

중공과 접촉하면서 이런 풍조를 경험하는 것은 꼭 캐나다만이 아니다 미국, 유럽, 특히 뉴질랜드와 호주에서도 이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호주에 중공의 입김이 스며드는 것은 정확히 캐나다에서 벌어지는 일과 똑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호주이 정치인, 학자, 언론, 그리고 대중은 중공이 꾸미는 일에 대해 좀 더 크고 명확한 반대 의사를 표시해왔다는 사실이다. (p. 30~31)

중국의 공작원들은 이미 이곳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고, 그들은 캐나다의 가치를 경멸한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p. 37)

저자는 초반부터 조금은 격렬하게 중국의 '공작'에 대해 비판한다. '이 책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공상 소설이 아니다. (p. 34)' 라며 독자에게 지금의 현실을 보고 중국의 실체를 파악하기를 강권한다. 이러한 강한 태도는 이 책이 일단 캐나다인들을 향해 쓴 책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자국민들이 자국의 상황을 좀더 심각하게 판단해야함을 깨닫게 하고 싶어한다.

캐나다가 중공 공작원들이 활개 치는 사냥터가 되다시피 한 이유는 이 나라가 중공을 피해 중화권에서 벗어난 수많은 이주민의 매력적인 종착지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p. 45) 비록 모두는 아니겠지만 중공의 스파이, 비밀경찰, 여론공작원 및 기타 비밀공작원 중 많은 수가 국제엠네스티 보고서에 나오는, 캐나다의 인권 및 정치개혁 단체에 대한 학대와 협박사건에 가담하고 있다. 중공이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기관 및 공작원의 전체적인 실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하며, 그들의 말대로 움직이는 또 다른 심복들도 캐나다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p. 69)

저자는 이 '공작' 들에 대해 세계대전 이후 부터 차근차근 사건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 최근의 일들은 아니라서 너무 옛날이야기 처럼 읽힌다는 점이 저자의 강한 주장에 비하면 그닥 와닿지 않는, 호소력이 약해지는 원인인것 같다. 예를 들어,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반공독후감이나 이승복어린이 등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릴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어간 이승복어린이에 대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냈었다. 책속에서 제시하는 중국공산당의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공작'들은 그 이승복어린이 이야기 같다. 지금은 읽어도 별 감흥이 없는.

중공이 다른 나라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면서 캐나다가 교훈을 얻어야 할 사례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p. 389)

중국공산당은 이제 캐나다의 자유민주 체제를 위협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p. 418)

캐나다의 언론인으로서 중국의 활동에 대핸 위기감은 충분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사례에 대해서는 파이브아이즈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캐나다,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는 파이브아이즈 동맹국가다.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는 영국의 연방체 이므로 크게는 미국와 영국이라고, 간단하게 영미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과 영미권은 좀 다른 듯 싶다. 여하튼,) 미국과 중국은 오랜 경쟁관계이니 중국이 공작을 해야 한다면 영연방국가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호주와 뉴질랜드는 중국에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작년엔가 중국과 호주사이에 있었던 이런저런 뉴스들이었다. 호주는 정치권에 로비자금이 허용된 국가이고 중국이 호주의 정치인들을 많이 포섭해왔는데 중국의 자금을 받은 호주의 부패정치인들이 발각되고 호주의 '다윈항' 관련 중국이 원하는 협정이 호주의 주권을 위협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호주와 중국은 냉전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중이라고 한다. 뉴질랜드는 작은 국가이긴 하지만 일찌감치 독립적 의견을 주지하고 있었고 영국과 미국은 상대적으로 강대국이라 이 파이브아이즈 동맹국들 중에서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살펴보야 할 국가는 캐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있어서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북미대륙을 있는 라인에서 캐나다는 필요한 입지의 국가일테니 중국이 캐나다에 은밀한 '공작'들을 꾸준히 해왔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호주에 비해 캐나다내에 그런 위기의식이 없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저자는 좀더 현대적 쟁점들을 최근의 사안들을 제시했어야 한다. 언제적 일화들로 지금 중국의 활동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전반적으로 문체가 너무 옛스럽고 선동적이다. 이러한 낡은 선동으로 과연 얼마나 캐나다내에서 이슈가 되었을지 의아하다. 저자의 논리가 좀 약하긴 해도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문제이기에 기대하고 읽었는데 이정도 내용으로는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여하튼, 중국의 활동이 얼마나 세계적인가는 깨달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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