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의 국부론 -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재유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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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경제학의 어머니, 애덤 스미스

국가 부의 원천을 말하다

EBS books의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는 하나같이 다 명저 인것 같다. 해당 고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배경지식을 탄탄하게 잡아준다. 원전을 읽기 전 읽어야 할 긴 주석 같달까.

애덤 스미스 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은 또 얼마나 자주 인용되었던가. 하지만 시장자유주의자로 배웠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그의 개념 보이지 않는 손 이 얼마나 왜곡되어져 왔는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결과부터 예고하자면,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자본가의 입장이 아니라 노동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으며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은 당시 식민지독점무역을 지배한 정부에게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애덤스미스는 국부가 노동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런 그의 경제철학이 어쩌다 자본가들의 논리로 악용되어 온것인지... 역시 고전은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개인적 철학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유머는 불분명한 것을 분명한 것으로, 불변하는 사실로 알려진 것을 허상으로 밝힐 수 있는 정신적 태도다. 이 정신적 태도가 있을 때, '누가 뭐라 하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위인의 삶을 본받자는 것도 아니고, 실용적으로 먹고사는 데에 써먹자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유머라는 정신적 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는 곧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일이다. 철학적 세계관의 정립은 자신이 당연한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한 모든 의심에서 출발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어떤 유머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는 무엇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주체성을 정립시켜갔을까? 그리하여 나의 유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고전을 읽는 구체적인 의미이지 않을까? 그 의미를 찾는 여행을 이제 시작해보자. (p. 5) -서문 中-

저자는 <국부론>이라는 고전에 대해 어떻게 접해야 할지 그 태도롤 설명하는 것으로 책의 시작을 알린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으로 <국부론>을 다 아는 것처럼 되어버린 이 시대에 <국부론>이라는 오래된 경제철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먹고살기 바쁜데 그런걸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라는 반문을 예상하여 '우리는 왜 먹고살기 바쁠 수밖에 없냐고? 이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는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p. 15)' 이라고 말하며 <국부론>이 부르주아 경제학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당대의 시대사상 먼저 설명하기 시작한다.

원자화되고 이기적인 인간관과 사회계약(론)에 따른 절대적인 국가와 자본의 등장은 근대의 철학적 세계관의 동전의 양면이다. 근대 철학은 경험론적 세계관과 합리론적 세계관으로 나뉜다. 경험론적 세계관은 이기적인 인간관과 연결되며, 합리론적 세계관은 절대적인 국가와 자본의 등장과 연결된다. (p. 19) 그런데 애덤 스미스는 흄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세계관에 기반해 있지만, 경험론적 세계관과 합리론적 세계관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그의 인간관이 공감의 인간관이다. 그리고 이 인간관에 기반해 <국부론>에서 '자유방임주의'(보이지 않는 손, 야경국가), '분업화', 그리고 노동가치설과 임금·이윤·지대의 관계를 논의했다. (p. 20) 이러한 공감의 인간관을 바탕으로 자유방임주의가 등장한다. 이때 자유방임주의는 시장방임주의 또는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간이 공감을 끊임없이 확대해나가게 해주는 자연적인 사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방임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타난다. 분업 역시 공감에 기초해 있다. (p. 21)

냉정하고 이기적인 표현으로 알았던 '보이지 않는 손'이 공감의 인간관에서 시작되었다고? 처음부터 의아해지는 <국부론>의 실체는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사실은 정반대의 의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도덕철학자로서의 애덤 스미스에 대한 연민과 궁금증도 커져가게 된다. 스미스의 '자기애'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이기심'이 아니었다.

이때의 '자기'는 자기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는 관계 총체로서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총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에 대한 사랑은 배타적인것이 아니라 '사회적인'것이다. 자기애로서의 사회적인 사랑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이다. 이 공통적인 것이 흄과 스미스에게 '공감'이다. 그리고 이 공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며 '공평한 관찰자'이다. 또한 공감은 '실천적 행위'로서 근대의 '노동'을 통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며, 이 노동은 자기 자신의 욕구 충족이 아니라 타인의 욕구 충족을 위한 노동으로서의 '분업'의 형태를 띤다. 왜냐하면 사회 구성원 각각의 욕구는 '인간다움의 충족'이라는 공통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처해진 현실 상황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p. 39) 재화의 생산과 이 생산을 통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은 타인의 공감과 그 공감의 실천적 행위인 노동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게 스미스의 도덕철학의 핵심인 '공감'은 정치경제학에서 '노동'으로 재탄생된다. (p. 40)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노동이 부의 본질이라고 본 사람은 스미스밖에 없었다. 그는 노동을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의 기준으로 본다. 그래서 <국부론>에는 무엇보다 '인간의 노동', '노동의 인간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p. 41)

시장경제학의 기초개념이자 자본주의의 대표논리이며 무책임한 이기심의 발로라고 생각했던 '보이지 않는 손'이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한 '노동의 인간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공감=공평한 관찰자=노동=보이지 않는 손' 이라는 등식은 <국부론>을 읽고 싶은 고전이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내게 커다란 호기심을 만들어냈다. <국부론>이 정치권력의 자본가의 '부'를 중요시한 책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을 중요시한 책이었다니!!!

스미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모든 국민의 부와 사회적 이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경제학은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이 주장하는 시장만능주의적 자유방임(이를 오늘날 신자유주의라 칭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소수의 부의 독점과는 상당히 다른 사상적 기반 위에 있다.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국부론>이다. 그리고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생겨났을 때, 이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국부론>이 등장하는 한, <국부론>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p. 47)

이 책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근대 경제학의 어머니 애덤 스미스'의 철학에 대해 기초 개념들을 설명해주다 보니 당대의 세계관과 인간적 애덤 스미스의 삶이 함께 설명되어진다. 2장에서 본격 적으로 <국부론> 읽기 가 진행된다. <국부론>의 내용을 인용해가며 개념적 이해를 돕는다. 3장에서 <국부론>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 여러 권 소개되는데 그 책들 중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있다. 알고보니 <자본론>은 스미스의 <국부론>을 큰 개념적으로 이어받은 이론이었다. 자본가의 '국부'와 노동자의 '혁명'이 연결되어 있었다니.

애덤 스미스의 '공감'의 도덕철학과 인간관은 이기적 인간관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의 도덕철학과 인간관이 <국부론>의 내용에 녹아들어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가 주장하려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 책을 읽는다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좀더 얻을지는 몰라도, 그의 진정한 생각은 이해할 수 없으며 나아가 오늘날 처해 있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의 싹을 그로부터 얻을 수 없다. (p. 58)

스미스는 '부'의 원천은 노동자의 '노동'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부'는 노동자의 '노동'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 밖에 없었고 노동자의 '노동'이 좀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당대의 독점적 국가 권력의 개입을 저지해야 했기에 자유방임적 시장을 강조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는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를 믿는 스미스의 도덕철학이 깃들어 있었다. 개별화된 근대철학에서 유기적 관계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공감'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한 고전읽기의 필요성은 이렇게 스미스의 <국부론> 읽기와 나아가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연결되었다.

이 작고 얇은 책 한권이 교과서 속에 죽어있던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현실세계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궁금해질 것이다. <국부론>이. 그러나 <국부론>을 읽지 않더라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국부론>속 '보이지 않는 손'의 따듯함을. 그리고 그 온기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 생각해볼 여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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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뇌, 망각하는 뇌 - 뇌인지과학이 밝힌 인류 생존의 열쇠 서가명강 시리즈 25
이인아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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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인지과학이 밝힌 인류 생존의 열쇠

기억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면서 인간의 '뇌' 와의 비교도 많아진 것 같다. '지능' 하면 '뇌' 같달까. 하지만 인간과 AI를 구분해주는 것은 '지능'이 될 수 없다. AI가 처리하는 데이터의 양을 인간의 뇌는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AI에겐 데이터가 인간에겐 '기억'인것 같지만 이또한 그렇지 않다. 기억은 데이터가 아니라 뇌가 재해석해 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에서 자주 언급한 영화 <메멘토>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래서 기억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줄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 핵심인 뇌의 '해마'에 대해 저자가 풀어주는 내용을 읽다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기억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준다는 것을.

경험한 것은 모두 뇌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변화는 기억되며 미래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이것이 뇌의 학습과 기억의 핵심이다. 경험하지 않으면 뇌는 학습을 하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멍하게 누워 있는 것도 일종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해 있는 한 경험을 멈춘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고, 경험하는 뇌는 자동으로 학습한다. (p. 25)

살아있는 한 뇌는 끊임없이 학습한다. 여기서 학습은 단순하게 공부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좀더 포괄적인 개념이고 자연스런 과정이 '학습'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생존한다 고로 뇌는 학습한다 랄까.

몸의 팔, 다리, 신체 일부 혹은 전체를 움직여서 새로운 동작을 배우는 학습ㅇ르 '절차적 학습', 그런 학습을 통해 기억되는 내용을 '절차적 기억'이라고 한다. (p. 40)

얼마전에 AI에게 불안해하는 인간을 위해 인간만의 장점을 다른 프레임으로 상기시켜주기 위해 몸의 기억력 을 강조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땐 그렇구나 하며 읽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보니 몸의 기억 이라는 것 또한 결국은 뇌의 기억이었다. 신체의 반응을 처리하는 것이 결국 뇌이기 때문이다. AI에 상응하는 인체의 장기를 뇌로 단순화 시켰을때 뇌가 아닌 다른 부분에 초점을 두는 시도가 나름 의미있다고 여겼었는데 그게 결국은 뇌의 기억이었다니, 결국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했다. AI 가 곧 인간의 뇌 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학습의 주된 목적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기 위해서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경험적 미래 대비 능력과 생존 능력은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이 흉내 내기 어려운 능력이다. (p. 51) 뇌는 지금의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애매한 정보를 처리하고 이에 대응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아마도 이는 오랜 진화를 통한 학습 시스템의 진화와 더불어 생존에 대한 뚜렷한 목표 의식이 시스템에 탑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p. 59) 지금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고성능 컴퓨터는 전기 먹는 하마라고 봐도 될 정도로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면서 성능을 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중략) 이동할 필요도 없고 잠을 잘 필요도 없고 오로지 바둑이라는 게임만을 위해 그 엄청난 자원을 쓴 알파고를 상대로 1.5킬로그램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인간의 뇌 하나가 홀로 그토록 선전했다는 것 자체를 오히려 경이롭게 여겨야 한다. (p. 93)

알파고의 등장에 위협을 느꼈을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게 그리 와닿지 않았었지만... 여하튼 그 이후로 AI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으니 파급력이 대단한 사건이긴 했다. 그러나 인간의 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인간은 AI라던가 인공지능이라던가 여하튼 미래의 지능에 대해 그리 위협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적어도 AI가 한가지 기능을 위해 엄청난 자원을 소모시켜야 하는 한은 말이다.

우리의 뇌는 어떻게든 특정 과제를 별로 에너지를 쓰지 않고 자율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시스템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매번 의식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써가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p. 125) 뇌인지과학적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뇌는 다시 기억을 꺼내는 과정에서 앞의 그림 속 깨진 접시의 빈 곳을 그럴듯하게 메꾸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마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즉 없는 정보를 현재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유추'해낸다. 뇌의 신경망은 이처럼 '빈 곳 채워 넣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므로 우리는 거의 이를 느끼지 못한다. (p. 157~158)

즉 인간의 기억은 뇌에 의해 리메이크 된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사진처럼 찍은 상태 그대로 다시 꺼내 보는 것이 아니라 꺼낼 때 다시 퍼즐처럼 짜맞춰서 재구성해야만 의미가 있는 그런 정보이다. (p. 158)' 저자가 책속에서 자주 언급한 영화인 <메멘토> 속 대사를 다시한번 쓰지 않을 수 없겠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따라서 AI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인간의 뇌 인 것이다. AI의 데이터는 사진 같다면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한 부분을 자의적으로 메꿔 재구성해 낸 결과물이다. 그러면 인간의 기억이 인공지능의 기록보다 모자란 것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아주 많이 제한되고 통제된 환경에서 정확히 규정된 문제를 푸는 일에 특화되어 있을 뿐이다. 어떤 시나리오가 전개될 지 모르는 현실 세계에 내다 놓으면 지금의 인공지능은 세살짜리 아이보다도 못한 지능을 보이고 적응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p. 216) 학습에 사용된 빅 데이터가 인터넷 자료이다 보니 인간의 편향된 사고방식을 학습했다고 한다. 자주 나타나고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리처럼 무작위로 기계적으로 학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p. 222)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뇌의 학습과 기억의 원리를 완벽하게 아는 것은 이를 공학적 기술로 구현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완전한 기억을 소유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p. 232)

문제아이를 보면 우리는 그 부모의 됨됨이를 탓하게 되곤 한다. 육아와 교육의 기준에 따라 아이는 성인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달리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가정마다 나름의 규칙이 다르기에 사회는 항상 다종다양한 인간들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AI는 인간이 주는 데이터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리는 존재다. 그 데이터의 편향성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한 가정 내에서도 구성원마다 목소리가 다르고 한 마을 한 도시 한 나라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전지구적 기준으로 AI에게 기준을 줄 수 있을까? 데이터가 아무리 쌓여도 AI는 인간의 기억과는 다른 방식의 계산만 도출해 낼 수 있을 뿐이다. 그저 기록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완벽한 기록.

부디 이 책의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뇌의 학습과 기억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잘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보다도 '뇌는 우리에게 완전한 기억을 제공한다' 라는 평범한 진리를 공유했으면 한다. 완전하다는 것은 완벽하다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우리가 생명체로 살아가면서 생존하고 삶을 영위하는 데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균형 잡힌 상태를 이야기 한다. (p. 239)

AI가 아무리 완벽해져도 인간의 고유하면서 완전한 기억과 같은 결과를 내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AI는 다 똑같아도 인간은 제각각 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인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생물학적 '뇌' 와 인문심리학적 '마음'을 결합한 뇌인지과학에서의 '기억'에 대해 알려준 유익한 책이었다. 역시 서가명강 시리즈는 참 유용하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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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 - 인간의 문명을 정복한 식물이야기
리처드 메이비 지음, 김영정 옮김 / 탐나는책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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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명을 정복한 식물 이야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첫 번째 농장에서 현대 도시의 부서진 아스팔트까지

모험을 떠나는 식물학과 역사의 유쾌한 연대기

나는 역사를 좋아하고 동물보다 식물을 좋아한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의 고고학적 생태계에도 관심이 있고 인간의 몸을 살찌워 온 작물로서의 변천사에도 관심이 있다. 그러니 <식물의 세계사>라는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는 아니었으나 여전히 궁금하고 또 궁금한 분야이기 때문에 또 읽을 수밖에 ㅎㅎ

풀이 우리가 가진 계획이나 세상을 깔끔하게 정돈해 놓은 지도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잡초가 된다. 그러한 계획이나 지도가 없다면 풀은 어떤 오명이나 비난도 뒤집어쓰지 않았을 것이다. (p. 13)

그러나 이 책 본문의 첫 줄에서부터 이 책의 주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잡.초.

이 책의 원제 WEEDS 는 잡.초. 이다.

'식물의 세계사'도 아니고 '인간의 문명을 정복한 식물 이야기' 도 아니며 '식물학과 역사의 유쾌한 연대기' 도 아니다.

그저 잡.초. 가 왜 잡초로 불리워졌는가 잡초의 특성은 무엇인가 잡초는 정말 잡초일까... 하는 등등의 잡초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잡초 이야기 책' 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방법과 어떤 이유로 식물을 달갑지 않은 존재로 분류하는가? 그것은 자연과 문화, 야생과 길들여짐을 구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고 관대하게 그 경계에 선을 긋는지가 이 지구의 표면을 덮은 초록색 식물 대부분의 성격을 결정한다. (p. 19)

동물도 그렇지만 식물도 인간이 붙인 이름이 자신들의 이름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 쓸모가 있다하여 세상에 쓸모가 있다 말하는 것도 너무 인간중심적이다. '모든 정의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잡초는 인간의 계획을 방해하는 식물이다. (p. 28)' 존재는 그저 존재일 뿐이다. 동물도 식물도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인간에 의해 분류되고 특히나 쓸모없는 잡초로 분류되어 폄하는되는 것에 대해 억울하지 않을까?! 그러니 '그것들도 식물학적인, 혹은 적어도 생태학적인 정의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p. 28)'

잡초는 딱 봐도 변화가 심한 땅과 훼손된 풍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진화했으며, 우리 생각보다는 덜 유해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p. 32)

사실 지구를 자연을 땅을 가장 크게 훼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다. 잡초가 아니라.

이 책은 잡초를 변호하기 위해 쓴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다루기 힘든 이 식물을 그들의 본모습이 무엇이고, 어떻게 자라며, 우리가 골칫거리로 여기는 이유를 보다 공평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논증된 주장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책은 인간의 이야기다. (p. 42)

대부분의 식물과 역사를 접목시킨 책들에서는 인간에게 유용한 식물들이 주인공이다. 인간의 역사에 얼마나 유용한지가 중요하곤 하다. 하지만 인간의 선택과 인간의 의도에 의해 선별된 식물들 외에 그 밖의 식물들에 대해선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닐까?

한 종으로서 그것들은 쉽게 이동하고, 씨앗을 많이 맺으며, 유전적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사는 곳에 까다롭게 굴지 않고 적응해 버리고, 환경적 스트레스에 빨리 대처하며, 자기 길을 가기 위해 여러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우리가 그들과 가장 많이 닮은 종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농경이 시작되지 동시에 잡초라는 문화적 개념이 생겼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인간 창조의 두 가지 명령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었다. (p. 65)

번성과 제거, 유용과 무용, 농경과 채집, 정착과 수렵에 있어 곡물의 발견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인간들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그리고 결국 인류 문명의 전 과정을 변화시켰던 것은 야생 에머밀이라고 불리는 사막의 잡초를 길들인 일이다. (p. 72)' 그러니 잡초에서 출발한 인간의 생존력과 지혜에서 잡초는 절대적 지분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것인지 식물이 문명을 정복한 것인지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색다른 발견을 하게 될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역사는 식물에 대한 끊임없는 선택과 연결되어 있었다. 독초인가 약초인가는 주술과 의학의 경계를 구분지었고 문학에서 식물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징성이 뚜렷했으며, 인간보다 빠르게 서식지를 넓혀 세계화를 이룬 것은 어쩌면 잡초였다. 이러한 잡초의 활약에는 물론 인간의 의도가 계획따위는 없었다.

잡초들이 문제를 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옹호론자들은 지구상에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설명하고, 그들의 생태에서 무언가 도덕적 가르침을 찾기 위해 애써왔다. (p. 225)

잡초들에서도 나름의 유용성을 찾아내야 인간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일까. '야생정원'이라는 서로 너무나 상반된 두 단어를 붙여 보기도 하면서 인간은 가끔 잡초들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잡초를 침략자라고 생각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한 장소의 문화적 전통이나 유산이자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존재이다. 또한 우리의 건물과 어설픈 손질들이 한낱 덧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곳,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유전자은행의 일부이기도 하다. (p. 266)

새로운 전염병이 생길때마다 새삼 유전자풀의 중요성이 거론되곤 한다. 멸종동물들이 하나둘 늘어갈 때마다 그것은 단순히 한 개체의 종말이 아니라 전 지구적 종말의 시작임을 역설하는 것에 우리는 너무 쉽게 눈을 돌려오곤 했다. 그러니 잡초의 유전자은행에 관심을 가진 시기가 짧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연과 문화의 경계에서 마녀 취급을 당하던 잡초이지만, 인간이 훼손하고 무너뜨리고 파괴시킨 땅에 가장 먼저 생명의 꽃을 피워낸 것은 늘 잡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초는 여전히 악역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곤 한다.

잡초의 이미지는 그들이 차지한 땅을 옮기거나 넓힐 때, 어딘가 새롭게 침입할 때 변하고, 대중적 감성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p. 394)

잡초의 시대가 변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성공적인 동시에 잔인하게 공격받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농부나 정원사, 환경보호주의자들이 실시하는 잡초 방제와 관련된 기술적인 문제들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제의 엄청나게 다양한 동기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식물 세계나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p. 406)

우리는 지구의 환경이 중요하다고 자연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잡초는 뽑아버리고 약을 뿌리고 만다. 게다가 '잡초, 그리고 그들의 필연성과 화해하는 것은 항상 아찔한 과정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실질적인 통제와 문화적 수용을 결합하는 것이 포함된다. (p. 419)' 그래서 프레임의 전환은 늘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의 첫머리에서 나는 잡초가 자연계를 야생과 길듦으로 엄격하게 분리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경계 파괴자들, 즉 무국적 소수민족으로서 우리에게 삶이 그렇게 정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들이라면 우리가 다시 자연의 경계선들을 넘어 사는 법을 배우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p. 421)' 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게 남는다. 우리가 처음으로 잡초의 이야기를 읽어야할 시대가 되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문명과 정복과 인간 이라는 단어들을 버리고 오로지 자연 그 자체로서의 잡초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의 생태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보자. 침입자들은 잡초가 아니라 인간이 아니었을지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ps. 잡초라는 한국어판 제목을 달고 나오면 외면받았을 것 같았는지 책 제목에조차 드러내지 못한 잡초의 존재성에 대한 깊은 의미에 공감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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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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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시의 역사를 알게 되는데 정말 유익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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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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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영미 문학의 거장이 써내려간, 시대를 품은 시의 향연

소소의 책 출판사에서 나오는 00의 역사 시리즈를 좋아한다. 책이라는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일테지만 은근 디자인이 먹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나에겐 이 시리즈가 그랬다. 하드커버의 묵직함 대비 쉽게 넘어가는 페이지들의 여백과 일관된 표지 디자인이 일단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갖게 하는 책이었다. 그렇게 <세계 종교의 역사> <철학의 역사> <고고학의 역사> <언어의 역사>를 모두 읽었으니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분야가 '시'일지라도 새로 나온 <시의 역사>를 읽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달까.

시란 무엇일까? 시와 언어의 관계는 음악과 소음에 견줄 수 있다. 기억에 남고 가치를 부여받도록 특별히 지은 언어라는 뜻이다. 언제나 그 목적을 달성하는 건 아니다. 수 세기가 흐르는 사이 까맣게 잊힌 시가 수천수만 편에 달한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잊히지 않은 시들을 다루려 한다. (p. 11)

제목이 시의 역사 이고, 첫줄부터 오래도록 전해져 온 시를 다룬다는 목적을 말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기 전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시'는 '英詩'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영어의 모국인 영국에서 영국의 평론가가 쓴 책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영시가 주된 '시'이긴 하나 '역사'적 흐름으로 서술되고 있기에 기원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모든 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 <길가메시 서사시> (p. 11)' 부터 저자의 '시의 역사'는 시작된다.

시의 지혜는 우리에게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시는, 아니 어떤 시들은 죽지 않고 인간 수명의 한계를 훌쩍 넘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어째서 그러한가는 수수께끼다. 날마다 눈사태처럼 우리를 무서운 속도로 덮치고 흘러가는 망망한 언어 속에서 시인이 몇 개의 단어를 골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것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예술을 창조하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까지 아무도 이 신비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시인은 이 목표를 추구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p. 18) 무엇이 시에 영생을 부여하는지 아무도 모르기에, 시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에 따를 수밖에 없다. 나의 선호도는 독자 여러분과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시처럼 보이더라도 우리가 다른 정신과 다른 과거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미학적 판단에는 옳고 그름이 없고 의견이 있을 뿐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책에서 예전에 몰랐던 시들을 발견하고 그 시들을 나날의 생각 속에 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시들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길 바란다. (p. 19)

서문없이 바로 길가메서 서사시로 시작한 이 책에서 이 첫 챕터는 서문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대한 내용과 이 시가 후대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시란 무엇인가 로 시작해서 독자의 시상으로 끝나는 이 챕터는 '시'에 대한, 그중에서도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는 '시'에 대해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앞으로 미래에 전해져 남겨질 '시'에 대한 독자(나)의 감상이라는 뚜렷한 목표감을 심어준다. 그러니 앞으로 이 책에서 만나게 될 시를 읽으며 계속 느껴봐야 할 것이다. 나의 어떠한 주관적 판단이 그 시에 영생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서.

英詩의 역사이므로 서양사의 흐름과 큰 맥을 같이 한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시작했으니 그 다음은 당연히 호메로스 였는데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를 설명하는 중에 나온 문장이 의미있어 보였다. '많은 다른 시와 달리 호메로스의 작품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도 크게 훼손되지 않는데, 그 이유를 하나 들자면 서술 기법의 단순성, 속도감, 직접성이다. (p. 26)' 길가메시 서사시도 호메로스의 시도 영어로 쓰인 시가 아니다. 심지어 그 언어를 해독했을지라도 그 당시의 발음은 재현할 길이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고대시가 갖고 있는 영생성은 언어와는 큰 상관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로서의 '시'의 탄생은 로마제국의 탄생과 함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유럽을 통합한 제국은 단순히 지역적 통합이 아니었음이 '시'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서양역사나 철학이나 문학작품이나 많은 분야에서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 라기 보다는 라틴어에서 찾아지곤 하는 것 같다. 로마제국의 언어였던 그 라틴어 말이다. 그러니 라틴어 고전의 출발을 알린 세 명의 시인(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이 모두 아우구스투스 초대 로마황제 시절을 함께 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로마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브리튼 섬에서 英時가 시작된다. 앵글로색슨 시의 첫 작품은 '기독교 신상 선언이 이교의 영웅도와 병존해 나타난 (p. 36)' [베오울프] 였다.

앵글로색슨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두운이 맞는 동의어를 찾는 시인의 노력 탓에 시가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을 수 있다. [베오울프]는 3,100여 개에 달하는 구체적 단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중 거의 3분의 1이 앵글로색슨 산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베오울프]나 여타 시에서만 발견된다. 시를 처음 들은 사람들에게는 일상적 용례와 동떨어진 이런 어휘가 영웅 설화의 배경이 되는 다른 세상에 어울리는 경이로운 감정을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p. 39)

'시의 역사'는 '언어의 역사'와 함께 했다. 산문과 달리 시에 사용된 언어들은 시인의 느낌을 좀더 압축적이면서도 상징성 있게 혹은 구체적으로 전달되게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의 조합을 시도한 단어들이었다. 그러니 새로 탄생하는 단어들과 지역적 방언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상 이미 이 초창기의 시부터 우리는 그 시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수 없게 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시의 '영생성'에 대해 독자는 궁금함을 품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이 이 시를 고전으로 남겼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을 통틀어 단테 알리기에리 만큼 현대 독자에게 호소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찾기 어렵다. 단테의 시가 속속들이 중세 신학에 젖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워낙 그의 믿음이 우리의 반감을 유발하기 일쑤라서 그렇기도 하다. 단테는 인간으로서의 매력도 없었다. 복수심이 강하고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p. 45)

ㅍㅎㅎㅎㅎㅎ

인문학 책을 읽으며 이렇게 빵 터져서 웃게 될 줄이야. ㅋㅋㅋ

단테의 <신곡>을 읽었지만 그 명성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저자의 저 문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래서 내가 영국작가들의 책을 좋아한다.

고전으로 남겨진 시의 흐름에서 단테와 페트라르카가 빠질 수 없다. 저자는 '중세 유럽 대륙의 거장들' 이라는 제목 아래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시를 소개하면서 직접적으로 그 단점들을 적시한다. 고전으로 남은 작품에 대한 단점 분석이라니, 이또한 마음에 든다! ㅋㅎㅎ

중세시대에는 영시의 계보가 아직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은 때였기에 '제프리 초서는 중세의 위대한 영국 시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유럽인이기도 했다. (p. 54)' 라는 식의 관점은 당분간 유지된다.

초서에 대한 설명중 마지막 문장에 호기심이 남았는데, '어느 다른 초서의 작품을 읽더라도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미 읽었다면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한 번 더 읽어보라.(p. 61)' 라는 저자의 권유가 (이 책에 등장하는 시들 중에서) 유일했기에 나중에 꼭 읽어보리라 마음먹어 본다.

초서 이후로도 중세 시인들이 연대기적으로 차례차례 등장하는데 스펜서의 [요정 여왕]이라는 작품이 상당히 궁금해졌지만 검색해보니 국내 번역된 작품집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가 되어 세익스피어가 등장한다. 세익스피어를 비롯하여 이 시대의 시인들을 저자는 '사랑 시인들' 이라고 명명한다. 이 식민지의 시대에 존 던 이라는 시인은 '시의 코페르니쿠스'라 불렸고 존 밀턴의 시는 '피안의 세계에서 온 시' 라고 정리되었는데, 저자는 '17세기는 영국 시의 역사에서 놀라운 다양성의 시대였다. 초기는 존 던이 장악했고, 후기는 존 밀턴이 지배했다. (p. 111)' 라고 하면서 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시대는 완전히 뚜렷하게 개인주의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 중에서도 하버트, 본, 트래헌 은 '종교적 개인주의자들' 이었다. 이 뒤로는 '신고전주의 시대'가 이어진다.

저자는 '또 다른 18세기' 라는 챕터에서 굉장히 다양한 시인들을 소개하는데 그중에서도 '신고전주의 문학사를 설명할 대는 여성 작가들을 빠뜨리는 경우가 많지만, 18세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여성 작가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p. 171)' 라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여성시인들과 '민중시'라는 챕터에서 설명되는 시들을 통해 이 책이 정리하는 '시의 역사'가 어느 한 쪽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았다. 이제 근대에 이르렀고 낭만주의자 시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 낭만주의 시인들을 안내하며 저자는 잠시 독일의 시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데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독일은 1871년까지 국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 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낭만주의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라고 대답할 것이다. (p. 236) 독일 시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괴테도 하이테도 아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였다. (p. 241)

이 시대에 독일에 괴테와 하이테와 릴케가 있었다. 시의 역사에서 어찌 이 시인들을 빼놓을 수 있었겠는가.

참고처럼 덧붙여진 이 챕터 뒤에는 러시아의 푸시킨이 소개된다.

다음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들이 나오는데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시인들'을 별도의 챕터로 소개하는 저자의 성의가 반가웠다.

이 뒤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英詩 영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최초의 미국 시인들은 영국 이민자 였다. (p. 285)'

19세기를 매듭짓는 수십 년 동안 유럽 문화는 파편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다양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무참하게 패배하자 유럽의 권력 지도가 불길하게 재편되었다. 19세기 내내 산업과 상업이 도시의 삶을 변모시켰고, 많은 사람의 눈에 예술은 곁가지로 밀려나는 듯 했다. 유럽의 인구는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사람들은 군중과 군중의 힘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또 다른 발전은 교육의 확산이었다. 1900년대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초등교육이 글을 읽을 줄 아는 대중을 창출해냈다. 더불어 대량으로 유통되는 신문과 잡지가 생겨났다. (p. 302)

20세기를 앞두고 모든 것의 근간이 흔들렸다. 시대의 끝에서 새로운 목소리들이 등장했고, '조지 시대의 시인들' 이라고 묶이는 그룹이 있기도 했지만,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뒤엎었다. 그 혼란의 시대에도 '시'는 노래했다. 예이츠 처럼 도피하는 시인들도 있었고 엘리엇 처럼 모더니즘의 선두에 선 시인들도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서양과 동양의 만남에 관심을 갖는 시인들이 있기도 했다. 모더니즘의 창시자라 할 미국인 엘리엇은 영국인이 되기를 선택했지만 미국의 시인들은 엘리엇과 다른 모더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모더니즘에 반하는 새로운 시류가 등장했다. 모더니즘이 극복된 이후 시인들은 이제 하나의 시조로 묶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기에 어떤 시풍 보다는 시대별로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는 고백 시인들이 영국에는 무브먼트 시인들이 있기도 했지만 사회상을 밀접하게 반영한 정치적 시인들도 다수 있었는데, '휴즈와 플라스' 라는 커플에 대한 단독 챕터는 그 어디에도 묶여질 수 없는 내용이라서 신선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 따로 이 커플 시인을 설명했을까 의아해지기도 했는데 마지막 챕터인 '경계를 넘는 시인들'에서 그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가 마지막 시로 선택한 작품이 '머레이의 시 [존재의 의미]' 라는 것이 다시 처음의 목적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니면 시의 결말은 신념 체계를 뒤흔들고, 심지어 자신의 확실성마저 포함한 모든 확실성에 의문을 갖는 시의 힘을 보여주는 걸까? (p. 495)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 '시의 역사' 라는 야심만만한 포괄적 제목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책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 교수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p. 507)- 라고 이 책이 제목과는 다른 불완전성을 가진 책임을 인정한다. 또한, - 모든 문학은 번역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시는 유달리 그렇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단어 하나 대체할 수 없다는 대체 불가능성, 절대적인 유일무이성이 곧 존재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타국어로 '옮긴다' 는 행위는 반달리즘이 무색한 파괴의 작업일 수밖에 없고, 언어권 밖의 사람이 시를 이해하려 들 때의 한계는 너무나 참담하게 뚜렷하기 때문이다. (p. 508) - 라며 시에 대한 책을 번역함에 있어 한계가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역사>를 옮긴 이유는, 우리 역시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끝없이, 부단히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원래의 형태를 잃고 해체되어 재조립된, 복제된 언어의 직조물이라 해도 언제나 타자를, 타 문화를, 타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p. 508)- 라고 이 책의 의미를 밝힌다. 그리고 저자가 물음표로 끝낸 책의 마지막 문장이 남긴 여운에 대해 역자가 답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 답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 세기에 걸쳐 까맣게 잊힌 수천수만 편의 시가 있으나, 끝내 잊히지 않은 소수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화권의 시들은 아니나, 수 세기의 시험을 통과한 걸작들은, 경이롭게도, 번역자의 손에 무너져 내렸다. 재조립된 너덜너덜한 언어의 누더기 속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의미의 찬란한 빛을 발하기도 한다. 정말로 빛나는 시성詩性은 시간과 장소는 물론, 언어마저 초월하기도 한다. (p. 509) -옮긴이의 말 中-

찾아보고 싶어지지 않는가? 시간과 장소는 물론 언어를 초월한 시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지지 않는가? 서양사에 관심있던 사람이라면 그 시작을 <시의 역사>라는 책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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