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할 우리 가족 - 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홍주현 지음 / 문예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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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환장할 '우리' 사회의 가족을 위한 이야기

'우리' 라는 집단으로서의 가족이 아닌 '나'와 '너'의 가족을 말하다

"남편의 암투병으로 가족이 위기게 처했을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주위의  시선이 우리를 '비정상'가족으로 낙인찍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우리는 '우리' 라는 말이 너무 익숙한 사회다.

우리 나라, 우리 집, 우리 가족 ...

우리말로 하면 전혀 이상할게 없는 '우리' 라는 말은 외국어로 표현하게 되면 사실 굉장히 이상해 진다.

처음 만나는 외국인과 가족을 집을 나라를 공유하여 지칭한다는 게 외국인 입장에서 얼마나 생소하고 당황스럽겠는가? 외국인이 처음 만나는 한국인과 가정관련 얘기를 하다가 상대방인 한국인이 '우리와이프'라는 표현을 써서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를 이야기 하는 것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한국은 스와핑이 자연스러운 나라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


'우리' 라는 말 외에도 이런 공동체적 개념은 우리 사회에 아주 흔하다.

'부부는 일심동체' 라는 말도 그렇다. 생판 남으로 살던 두 사람이 만나 한몸으로 합쳐진다는게 실은 말이 안되는 거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고 싸움이 생기는 거다. 한마음한뜻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과거와 달라진 문화와 관계가 바탕이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로 묶인 가족은 이렇게 환장할 관계로 변화되고 있다. 개인의 삶은 확장되고 있는데 개인이 없는 우리 라는 관계는 모든 관계의 발목을 잡는다. 이 책은 그 발목을 잡고 있는 족쇄를 풀어나갈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는 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가족을 마지막 보루라고 여길까. 혹시 그런 믿음이 가족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가족 탓이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가족의 민낯 보기를 외면하거나, 그저 꾹 참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이런 통념과 태도가 전형적인 집단주의적 시각에서 기인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의 가족은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집단'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족 이라는!

그러나 이런 가족은 가족 구성원을 지켜주는 보루가 아니라 가족(집단)을 위해 구성원(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굴레로 전락한다. 가족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가족이라는 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과 기성 세대를 구분하는 인식의 가장 큰 차이는 개인과 가족에 대한 개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기성 세대들은 기존의 가족 이라는 집단 개념이 익숙한 세대다. 가족으로 묶고 혈연으로 묶고 지연으로 묶어서 '우리'가 되야지만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포괄적 범위와 다르게 실제 '우리'의 적용 범위는 굉장히 배타적이다. 집단대 집단으로 인식하려 하고 개인으로서의 의미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나' 개인이 먼저다. 이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가족을 우선시 하는 기성세대와 나 를 우선시 하는 젊은 세대의 소통은 '개인'의 제대로 된 개념 이해 없이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에 해당하는 1부는 투병하는 남편 옆에서 내적,외적 고충을 겪으며 발견한 한국 가족의 집단주의적 현상을 설명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담은 2부에서는 전통적 가족관을 대신할 새로운 가족관을 제시하며, '우리'라는 집단으로서 가족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립한, 서로 다른 '개인으로서 '너'와 '나'가 모여 연대한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3부에서는 '개인'이 연대한 공동체로서 가족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과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남편은 아내나 부모에게 자신이 해야 할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달라고 구걸 하고, 아내는 자녀에게 자기 꿈을 대신 이뤄달라고 강요한다. 자녀도 부모에게 자기 인생을 대신 책임져 달라고 요구한다. 나 역시 부모에게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해달라며 의지했다. '희생'이라는 아름답고 고결한 명칭을 붙여서!

거칠게 표현됐을 수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가? 결혼을 하면 평소 무뚝뚝하던 아들도 자기의 아내만큼은 시부모에게 애교스럽게 대해주길 바라고 평소 까칠하던 딸도 자기의 남편만큼은 살갑게 친정부모를 살펴주기를 바란다. 자식에게는 다 너를 위한 거라면서 부모의 바램을 대신 실현시켜 주기를 강요하고, 자식은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부모니까 이정도는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의지하려는 모습을 주변에서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나? 하지만 그렇게 가족 이라는 공동체적 모습을 로망으로 갖고 있기엔 우리 사회가 이미 핵가족을 넘어 개인으로 분화된지 오래다. 전통적 가족관을 유지하고자 하면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가족개념이 더 돈독하게 유지돼 왔던 이유는 경제적 복지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오래 일할수록 급여가 올라간다. 일을 잘하던 못하건, 생산성과 급여는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 왜 그럴까. 나이를 먹을수록 부양가족이 생기고, 자녀 양육비가 들며, 노부모의 의료비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용은 선진국이 될수록 사회가 부담하는 부분이 커진다.

한국사회에서는 복지를 사회가 아닌 기업이 책임져 왔다. 주택대출, 학자금, 상여금 등 사회가 지원해주지 못하는 영역들을 회사에서 지원해주면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복지를 제공하는 조직에 들어가야 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이건아닌데아닌데 하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민간(기업,개인)에게 미룬 복지 제공을 국가가 가져가야 하는데, 이 일을 계속 미루면 사회 구성원이 임금을 생산성에 따른 노동의 값이 아니라 복지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점점 커진다.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수단이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임금이어야 한다고 믿으면, 고용자에게 그 책임을 물으면서 각자 입장에 따라 민간끼리 투쟁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 사회 구성원의 태도에 따라 국가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보다 민간(고용자)를 압박하는 일을, 그것이 마치 국가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인 양 강화하고 우선하기에 이른다. 국가의 복지 서비스 제공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각자도생만 심화되는 것이다.

이 단락을 읽고 아차 싶었다. 몰랐다. 한국 사회에서 왜 유달리 대기업에 대한 취업 욕망이 높고 왜 유달리 대학진학율이 높으며 왜 유달리 가족을 위한 희생이 당연시 됐었는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복지를 제공해주는 주체가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복지가 달라진다면 경쟁이 심화될 수 밖에 없다. 국가가 복지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상 이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70여년 전, 독일과 스웨덴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그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 오늘날 한국인이 선망해 마지않는 복지 천국의 바탕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그 핵심에는 국가의 역할이 있었다.

갈등하는 부분에 공권력이 개입해서 기업이나 노동자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여지를 주고 노동자에게는 특정 기업에 소속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경직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책임과 부담을 국가가 나눌 때, 개인은 가족을 서로의 아바타로 삼는 데서 벗어나 자기 행복을 당당하게 느끼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 강조될 때마다 여전히 자기네 이익을 위해 편가르기만 열심인 정치권의 행태가 답답해진다. 그렇게 편을 가르고 국민을 동요시켜 결국은 자기네만 이익을 취할뿐 국민의 복지는 멀리멀리저멀리;;; 국가의 기능을 강화시키려면 국민이 제대로 인식하고 국가의 편을 들어주고 정치권의 갈등을 제압하는 힘을 가져야 하는데, 국민들도 여전히 부화뇌동하기 일쑤이니...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게 아니라 일을 시켜야 하는데...


화목한 가족이란 환상이 클수록 그 가족은 서로에게 환장할 가족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국인의 '우리'는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다. 연대하려면 '너'와 '나'가 있어야 하는데, 구성원이 '우리'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동일시하다 보니 그저 한 덩어리 상태에 가깝다. 그 안에서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중은 커녕 '다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름은 분리를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너'와 '나' 사이 경계가 없는 '우리' 속에서 다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 이 되기 쉽다. 구성원이 서로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집단에서는 당연히 같거나 비슷해야 '정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 과 '틀림', '비정성' 을 구분하는 일을 서툴고 어려워 할 수밖에 없다. 직장 조직 같은 사회에서 이런데, 하물며 가족은 어떨까. '너'와 '나'로 분리하지 못하고 서로를 동일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까. 가족이야말로 누구도 불경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우리'니까.

개인으로 독립적으로 제대로 바로 서는 일은 무엇보다 '우리' 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가족이 환장할 관계가 아닌 화목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보다 '나'와 '너'가 제대로 존재해야 한다.


존재 의미와 가치를 어떤 역할이나 그 역할 수행 능력,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기여에 두면, 그 역할을 잃거나 집단이나 타인에 기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나 사회적으로 존장 받기 어렵다.

내가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어떤 상황이나 집단에서 맡은 역할과 구분했다면, 상황과 주위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해서 갈팡질팡 하지 않을 수 있다. 저자가 남편을 간호하는 상황에서 며느리인가, 아내인가, 간병인인가 하는 혼란을 느낀 것은 같은 상황도 역할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은 먼저 그냥 '나' 임을 인식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주체로 바로 서면, 내가 포함된 공동체 에서도 내 역할을 더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누구 때문에 생긴 불안이든, 어떤 상황으로 생긴 두려움이든,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염려가 있는 곳은 분명 내 마음이다. 따라서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가족으로 인해 생긴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염려를 스스로 다루는 건, 엄밀히 말하면 가족과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분리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가족을 끈저끈적한 '우리' 상태에서 떨어진 '너'와 '나'로 만들 때, 서로에게 힘이 되는 진짜 가족에게 다가가는 것일 테다.

가족에 대한 진짜 사랑은 절절한 '우리'로 똘똘 뭉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의 날개를 가진 온전한 '너'로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도록 서로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안에서 '너'와 '나'를 만드는 일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공감가는 문장이 참 많았다. 표지에 부제로 써 있는 '나'와 ----------- '너'의 가족을 위하여 라는 부분에서 ---------- 사이를 줄이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절실한 때다. 저자의 가족에서 개인으로서의 독립 부분 내용들에도 수긍이 많이 갔지만, 저출산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새로웠다.


저출산 현상에서 우려할 건 인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구수 절댓값에서 2017년 한국은 세계27위이다 OECD에서 단연 1위고, 세계 230여 개국에서 세 번째다. 인구밀도가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대만과 방글라데시뿐인데, 대만은 출생율이 한국보다 낮고, 방글라데시 역시 급속도로 하락하는 추세다. 원인이 무엇이든 인구 감소 자체를 우려하는 건 복작복작한 고밀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그랬다. 저출산이 문제인줄로만 알았지 계속 복닥이며 고밀도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던 것 같다. 아이쿠!


저출산 현상을 우려하는 것은 결국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 청년 한 명이 먹여 살려야 할 노인 인구가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걱정도 앞으로 한국은 생산성을 향상하지 않고 지금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허걱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기술은 발달하는데 생산성을 인구수에서만 찾는다는 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 아닌가?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원인은 국가의 필요와 구성원의 필요가 일치하지 않아서다. 과거에는 누구에게나 출산이 중요했다. 사회가 가족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출산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은 아니다. 성공과 명예는 신분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으로 달성해야 하고, 조직의 권위는 상위의 어떤 모호한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사회도 어느 가족 구성원의 하나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활동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체제나 구조가 가족에서 개인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개인 중심 사회에서는 '나', 이번 생의 내 삶이 가족보다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변화는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는 신호 같아서 나는 오히려 희망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 현상을 문제라고 본다면, 구시대적이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우리' 가족관을 바꾸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전통적인 우리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출생율이 높을 것 같지만, 통계에 따르면 오히려 가족이나 우리보다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방적인 사회(프랑스, 스웨덴, 미국 등)의 출생율이 높다.

이래저래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저자의 관점에 놀라며 읽게 된 책이다. '나' 에 대한, 가족적 '우리' 에 대한 사고의 프레임은 '사회'에 대한, 자녀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을 가져온다.


한국에서 갈등이 가족 간에 언쟁으로, 사회에서는 생사를 건 투쟁으로 악화되기 쉬운 원인은 갈등을 관계의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라는 분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나'와 '너'란 독립적 개인이 아니라 집단 속 개체로 인식하니, 갈등은 관계의 균열을 가져오는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갈등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이 '개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 하는 동안 생긴 문제라도 그것이 자기 문제인지, 타인의 문제인지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일과 타인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 가 아니라 '나' 와 '너', 즉 개인이 되는 첫걸음이니까. '개인'이 그저 개별적으로 고립된 존재를 의미하거나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자립의 존재를 지칭한다면, 그것은 자기 내면에서 시작하지만 반드시 타인과 관계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화의 역할이 중요하다.

예전보다 가족간의 갈등이 사건화 되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뉴스에서 접하는 것 같다. 가족간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심리서들도 붐을 이루며 팔리곤 한다.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독립하지 못한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고민이 수면위로 떠오른 게 아닐까. 구시대적 가족 개념이 변화된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또 같이' 라는 흔한 말을 이제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는 말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가족은 가족이다 라는 경계적 구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 경계는 높다란 담벼락으로 막힌 게 아니라 얕은 울타리와 개방적인 문이 있는 그러한 구분일 뿐인 것이다. 구분이 제대로 될 때 독립은 이루어 지고 독립이 이루어 질 때 연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단단한 개인의 공동체적 연대는 종속적 집단주의 가족보다 이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들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얇고 쉽게 읽히는 책 한 권이 이렇게 큰 생각의 변화점들을 던져주다니...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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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스
제시 볼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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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저자의 형이 세상을 떠났다 스물네살이었고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형은 저자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저자보다 작았고, 저자는 형의 병원 침대맡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닥치기 전, 둘이 함께 유년기를 보내던 시절, 저자의 형이 아직 걷고 뛰어놀 수 있던 시절에도 어린 마음에 언젠가는 저자가 형을 돌봐야 한다는 걸 이미 알았다. 저자가 형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저자와 형이 함께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았다. 무거운 의무를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으로 떠안고 저자의 일부로 품었다. 저자는 사람들이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을 전혀 이해 못한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써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린 시절에 머릿속으로 그려본 어른이 된 형과 저자의 관계는 부자관계와 굉장히 비슷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다 큰 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018년에 나온 책이 CENSUS이고 그 센서스를 2019년에 내가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

그런데 어떤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껏 접하지 못한 장르이고 어느 장르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는 소설이었다.


책의 제목은 센서스, 인구조사 이다.

화자는 의사였지만 아내가 죽은 후 얼마안되 시한부 판정을 받고나자 의사를 그만두고 인구조사원이 되어 아들과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주체가 불분명한 인구조사는 인구조사원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질문을 하고 답을 기록하고 인구조사에 응했다는 표식으로 갈비뼈 근처에 문신을 새긴다. 센서스에 응했다는 문신을 여럿 가진 사람도 있고 처음 문신을 새기는 사람도 있으며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A도시에서 시작한 조사는 Z도시 까지로 이어지며 풍경은 농촌에서 공장지대에서 황무지에서 인적이 드문 기차역으로 이어진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자신마저도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다운증후군 아들과 함께 떠난 여정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천천히 자신의 무덤으로 가는 여행같았다. 남겨질 아들과 이별하는 방법치고는 독특한 분위기랄까... 슬프다거나 애틋하다거나 안타깝다거나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다운증후군 아들을 둔 아빠의 독백으로 서술되는 소설은 읽는 내내 뿌연 안개속을 헤메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아들은 성장한다. 아빠 옆에만 있다가 인구조사를 직접해보기도 하고 운전을 조금 해보기도 하고 방문할 집을 선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일을 맡을 준비를 도와준 건 아들이었다. 아들은 말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해 내게 한 가지를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를 가지고 타고나서 매 순간 서로를 잰다는 사실을. 그 애는 태어나자마자 이런 식으로 인구조사를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내 아들의 인구조사가 우리의 작업을, 우리의 여행을 북쪽으로 이끌었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어릴적 자신의 사진을 보고 그 아이가 자기자신인 것을 모른다. 그 아이는 어디 있냐고 묻는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꿈속에서 엄마가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문을 두드렸다며 깨어나 엄마는 어디 있는지 대답하지 않는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아빠가 많이 아프고 곧 없어질 것이라는 말에 함께 기차를 타고 집에 가자고 한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태어난 이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었고 인구조사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그 연속선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빠의 자 는 세상을 쟀지만 아들의 자 는 사람을 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여행 내내 무터의 책을 읽는다. 무터는 이름난 시장이자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자식과 세 명의 남편을 두고 당대의 극작가로 칭송받은 여자이지만 가마우지에 집착하고 연구하고 책을 펴낸 사람이었다. 그 가마우지 관련 책을 여행 내내 읽는다.

아빠가 처음 가마우지와 맞닥뜨린 것은 어릴 때 읽었던 밀턴의 실낙원 이라는 책속에서 였다. 실낙원에서는 사탄이 가마우지로 분장한다.

무터의 책을 읽으며 아빠는 가마우지 생각을 많이 한다. 사탄은 원래 천사가 아니었던가? 라고도 생각하면서.

표지를 다시 봤다. 무심코 봤을때는 손바닥을 양쪽으로 벌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빨간색 부리가 있었다.

새였다.

검은색 새.​

가마우지!


손으로 그림자 놀이를 할때 엄지손가락을 서로 걸고 양쪽으로 손을 벌려 새를 표현하곤 한다.

그렇게 날개를 펼친 모양의 그림자는 천사같기도 하다.

표지 속 검은새 뒤에 있는 회색의 형상은 그림자일까 다른 가마우지 일까

화자에게 가마우지는 사탄의 형상이었을 까 천사의 형상이었을까


아내는 광대였다. 그녀의 광대놀음은 흔히 생각하는 광대 짓과는 크게 달랐다. 그녀는 광대라 해도 아주 이상한 광대였다. 연기를 하면서도 연기는 없다고 느껴지게 하는, 보는이로 하여금 삶 그 자체를 어쩌다가 목도하게 된 느낌을 주는 연기자였다.

(여기 나오는 광대공연은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 라는 단편을 생각나게 했다. 관람객이 없거나 거의 없는 연극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연극 그런데 보다보면 뭔지 알것만 같은 무언의 침묵. 연기를 하지 않는 것이 연기인 연극, 삶을 반추하는 연극 ...)

아들을 낳고 그녀는 영영 무대로 복귀하지 않았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을 예전보다 덜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는 그들을 위해 공연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아들을 낳고 키운 덕분에 나는 훨씬 좋은 의사가 되었다. 기본적인 입장을 확고히 다졌기 때문이다. 누구한테도 특별히 기대를 품지 않고 누구라도 얕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자기평가에서 나오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만만하게 가치판단을 내리거나 예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겸손을 갖게 되었다. 알다시피 나는 그런 입장에서 인구조사 일을 맡게 되었다.


아들, 그리고 나와 함께 전국을 여행하는 게 아내의 바람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내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 기억이 머릿속에서 굳어져 거스를 수 없는 명력이 되었다. 아무런 목적이 없는 단순한 여행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 여행에서는 선택을 내린다는 게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렵다. 이상하지만 인구조사는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아내와 아들, 내가 있었다면, 이제는 나, 아들, 인구조사라는 전혀 다른 삼각조가 있다. 공통의 목표로 연대한 우리는 굳이 경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느낄 수만 있으면 되었다.

인구조사의 모습은 점차 변해 간다.

인구조사원 교육을 받으면서 배웠던 데로 조사하다가

조사항목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초점을 두고

여러집을 방문하다가 몇몇 집만 방문하게 되며

이마저도 심장발작으로 점점 어렵게 되어 뒤의 도시들은 패스하고 기차역을 향해 가는 길에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인구조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들은 대부분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친절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빠도 위급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아빠와 아들의 그런 여행에서의 경험은 기차역에서 아들 혼자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믿음이 된다.

엄마 아빠 아들 셋 이었지만 아빠 아들 인구조사 셋 이 되었다가 아들 인구조사 사람들 셋 이 되는 게 아닐까

아들은 사는 내내 인구조사를 하는 걸로 생각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자신만의 자 로 사람들을 세상을 재면서


인구조사라는 낯선 직업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어질 세상에 혼자 남겨질 다운증후군 아들을 위한 세상맞이인 셈인것 같다.

아빠의 불안과 아들의 천진함은 인구조사 여행을 통해 사람들로 채워지고 개인으로서 독립하는 시간으로 채워지면서 스스로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빠도 아들도


그리 두꺼운 편이 아닌 소설이었음에도 한장한장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시한부삶 아빠의 독백은 내가 놓치고 넘긴 부분은 없는 건지 신중하게 책장을 넘기게 했다.

그 생각의 흐름은 추억을 회상하고 기억을 소환하고 예상을 추측하며 현실인듯 현실같지 않은 인구조사와 도시들을 배경으로 세우고 담담히 죽음을 수용한다.


저자의 다운증후군 형에 대한 추억은 소설속에 스며들어 책뒷편에 실린 사진들의 소년은 소설속 아들인듯 저자의 형인듯 둘다인듯 여기게 한다.

화자는 아빠이지만 저자의 독백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하는 사진들이다.

다운증후군 당사자의 생각은 알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을지 알수 없다. 아빠도 저자도.

그래서 더욱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헤깔리기도 한다. 소설이지만 소설같지않고 그렇다고 현실이랄 수는 없는데 판타지도 아닌...왜 다운증후군 형의 죽음이 아닌 다운증후군 아들의 죽음이 아닌 보호자인 부모의 죽음을 그렸을까

저자가 다운증후군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쓴 이 작품은 왜 아빠의 죽음인지 왜 가마우지인지 온전히 이해될때 그 바람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먹한 소설이었다. 연극을 보는데 연극을 하지 않는 연극배우를 보듯이. 연기를 보고있을 뿐인데 삶을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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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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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몸으로 제안하는 슈필라움의 심리학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부터 바꿔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불안 없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슈필라움!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텐티티다!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쓰고 파마머리를 한 유쾌한 이미지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저자의 책을

몇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발칙한 제목에 끌려 읽었었는데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한 글들이 전혀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심리학에 여성학과 아동학이 있지만 남성학은 없는 이유가 남성심리는 아동심리와 같기 때문이라는 믿거나말거나 명언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 문화심리학자라기보다는 남성심리학자로서의 꽤 괜찮은 이미지를 주었다고나 할까.


첫기억이 좋았기에 새로나온 저자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전처럼 시종일관 유쾌하긴 했으나 전에비해 본인만 유쾌해졌달까.


슈필라움의 심리학 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저자는 슈필라움 이라는 공간적 단어를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심리학자의 눈에는 슈필라움 이라는 단어가 아주 특별하다. 흥미롭게도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이 단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놀이 와 공간 이 합쳐진 슈필라움 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슈필라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다.

저자는 심리학자로서 나름 잘 나갔었다. 교수로서 방송강연에도 자주 출연했었다. 책도 꽤 많이 팔렸다. 그러다 일본에 그림유학을 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여수에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짓고 있는 중이다. 그림그리고 글쓰면서. 남자들은 자신만의 공간이 꼭 필요한데 현대엔 그게 없다보니 자신만의 공간인 자동차안에서 그 공간을 지키려 공격성이 높아지고 자신을 가로막는 다른 차를 못 참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성들이 행복해지려면 자기처럼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돈과 능력 있는 저자와 같은 처지의 남자가 저자처럼 마음만 먹으면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비단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적 존재이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갖고 싶다. 나도 갖.고.싶.다. 슈필라움!


'슈필라움'을 꿈꾸며 살아온 지난 몇 년간의 삶을 '조선일보'에 '김정운의 여수만만'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그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 이 책이라고 한다. 여수에 짓고 있는 자신만의 슈필라움에 생각보다 지출이 초과되고 있어서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다고 한다. 음... 이질감이 확;;;


은근 톡 쏘는듯 하면서 유쾌한 문체는 여전히 재밌게 읽혔다. 사이사이 사진이나 그림들도 많아서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


대학시절, 여름방학이면 '일찍 배가 끊기는 섬'이 최고였다. 마지막 배가 떠난 항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 친구에게 진짜 착한 표정으로 '오빠 믿지?' 를 연발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때 그 '오빠 믿지?'의 청춘들이 이제 늙수그레한 엄마, 아빠가 되어 자식들에게 수시로 그런다. '엄마는 아들을 믿는다!' '아빠는 우리 딸을 믿는다!' 젠장, 그런 믿음은 없다. 서로 잘 알면서 도대체 왜 그러는가?


타인이 나와는 '다른 생각' , 경우에 따라서는 '틀린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진정한 신뢰가 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믿음'은 타인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이건 정말 주요한 이야기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강요다. '엄마는 믿는다' 또는 '아빠는 믿는다' 고 이야기 할 때 '자녀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부모, 자식 관계만이 아니다.

초반에 읽은 위 구절이 인상깊었다. 시원시원하고 빵빵터졌다. 하지만 슬슬 그런 분위기는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4차 산업혁명'은 독일에서 이미 존재하던 '인더스트리 4.0' 이라는 개념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디지털화하지 않고는 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독일 제조업의 구조를 '인더스트리 4.0'이라는 개념으로 혁신해보자는 거였다. 이 '구호'를 클라우스 슈바프는 학술적 용어처럼 들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슬쩍 바꿔치기했다. 이따위 얼치기 용어를 한국 사회는 마치 엄청난 사회변혁을 예고하는 학문적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종말을 고하는 초연결, 초지능 사회를 아주 낡은 산업사회적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이야기다. '담론적'이어야 할 학문적 개념을 '단언'하는 사회는 아주 '후진 사회'다.

저자의 직설적 표현이 거북하기까진 아니었던것 같은데 이번 책에 나오는 저자의 '단언'들은 좀 거북스런 곳이 많았다. 나도 4차산업혁명 이니 뭐니 호들갑 떠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렇다고 저자만 알고 다른이들은 다 몰라서 4차산업혁명을 사회적 이슈로 화두로 삼고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후진사회가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용어 좀 쓴다고 해서 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충이 취급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나는 유시민 작가가 몹시 불편하다. TV를 켜면 매번 그가 나온다. 그의 '구라'는 갈수록 현란해진다. 게다가 그가 쓴 책까지 모조리 잘 팔린다. 그게 나는 그냥 힘든 거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잘 생겼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아주 간단히 제쳤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라가면 꼭 새 책을 내서 내 책을 끌어내리는 혜민 스님은 좀 다른 방식으로 따돌렸다. 그는 '스님' 이고 나는 '남자'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wow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책의 본문중에 자주 저자 자신의 외모부심을 드러내는데... 거울 안보시나? 유시민이 잘 생겼다는 게 아니라 김정운도 잘 생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대놓고 불편한 사람을 불편하다 말하시면서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먼저 찾으시니 나도 대놓고 말해본다. 나는 당신의 글이 몹시 불편하다! 당신이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책은 읽기에도 불편한 구성의 책이었다. 사진과 그림이 많은 건 분위기 전환도 되고 눈요기도 되고 좋은데, 문제는 문장을 끊어버린다는 거다. 예를들어,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하고 뒷장은 양면에 사진이다. 다시 한장 더 넘기면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로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나같은 경우 한문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 사진의 장을 거꾸로 넘겨 그 앞페이지의 문장을 시작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이렇게 글의 중간에 문장을 끊고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가 있어서 앞 문장을 다시 볼려고 페이지를 다시 거꾸로 넘기곤 해야 했다. 이건 내 기억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여튼 불편하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체험이 탈출구다. 스마트폰의 허접한 음모론이나 들여다보고, 근거 희박한 설명으로 흥분만 하는 각종 평론가의 시사 프로그램 채널이나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존재의 불안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문화와 예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이토록 어려운 이론을 이렇게 쉽게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허걱!', '세상에나!'로 시작하는 스마트폰 문자에 자꾸 손이 가거나, '집단 불안' 마케팅이 반복되는 TV리모컨을 집어 든다면 당신은 교양이 없거나...... 이번 생은 틀린 거다!

헐... 또 할 말을 잃는다... 고상하게 미술관 가시고 음악회 가시는 저자가 그토록 어려운 이론을 그토록 쉽게 설명했는데도 내 삶에는 미술관이나 음악회는 여전히 생소한 단어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교양이 없거나 나의 이번 생은 틀린거라고 저자가 말한다면 저자에게 가요 한곡 틀어주련다. 장기하 의 '그건 니 생각이고'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1 도 없다. 나도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의 중요성에 아주 공감하는 사람이다. 갈수만 있다면 나도 자주 가고 싶은 곳들이다. 다만 갈 만한 상황이 못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기현상이 바로 '냉소주의' 다. 죄다 비겁한 미래 예측 을 퍼 나르며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전능한 신 놀음'을 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비겁한 미래 예측이 난무할수록, 아주 자세하게 과거를 기억애햐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숨기기에 능한 냉소주의' 와 '말 바꾸기에 능한 냉소주의' 가 난무한다. 한쪽은 '은폐한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다른 쪽은 '거짓말한다'고 상대방을 비난한다. 해결책은 아주 디테일한 기억뿐이다. 은폐했던 과거, 수시로 거짓말했던 과거를 아주 자세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미래가 열린다.

동감이다.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은폐하고 거짓말하는 냉소주의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 이 '기억나지않습니다' 아닌가?! 저자여, 실력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친한 분들에게 알려주소, 당신들이 한 일을 기억하라고.


세계사의 전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통해 한국은 세계10위권의 경제적 부를 얻었다. 그러나 상호 인정의 규칙을 제도화하고 실펀하는 일은 건너뛰었다. 당시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한국 사회의 엄청난 사건들은 그렇게 생략하고 건너뛰어도 될 줄 알았던 '상호인정'이라는 근대 시민사회의 근본 원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긴급한 요청이었다. 그래서 갑질, 무시, 모멸감 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담론과 산업화 세대의 급격한 정치적 몰락은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문제'였다는 거다.

제대로 된 이념을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사건의 핵심을 인간적 도리 같은 윤리문제로 축소시킨다. 왠지 꼰대 분위기가 풍기는데... 아니나다를까


과거 독일에서 십삼년, 일본에서 사년을 사는 동안 나는 아주 심각한 '국수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전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민족'은 '가족'이 아니다. '우울'이다.

저자는 '민족'은 원래 없었던 말이라고 한다.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와 '종족'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 '민족', '종족' 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거라고. 나도 뭐 민족이라는 말로 끼리끼리 뭉치는 듯한 뉘앙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좀 거북하다. 한민족으로 보자는 말이 아니라 다른 국가로서 이민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같은 언어를 쓰는 동질감이 높은 존재로서 포용하는게 아니라 남한만을 동질의 민족으로 보는 저자의 편협한 국수주의적 시각이 불편한 거다.


별 고민 없이 거론되는 베트남식, 중국식 개혁 개방은 결코 대안이 아니다. '동네 형'이 잘사는 것과 '우리 형' 이 잘 사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매번 추석이면 겪지 않는가? 통일은 정치,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통일은 심리학이다.

북한을 생판 남으로 보는 국수주의자라면서 이럴 땐 '우리 형' 이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자는 '동네 형'으로 보고 이야기를 풀었어야 하는게 논리적 맥락이 맞는 거 아닌가?


저자의 슈필라움은 분명 부러운 공간이다. 특히나 벽면을 가득채운 책장과 책들에 둘러쌓인 공간에 대한 저자의 로망은 나의 로망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 공간을 가지게 됐지만 나는 언제 가질 수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샘이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글이 더이상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 공간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들어가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성취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습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 아니라 멋지고 포용적으로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웠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바닷가에 멋진 작업실을 갖고 있다면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저자는 너무 자기자신에게만 몰입해 있는 것 같다. 저자에게는 나와 너무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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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앤 마더
엘리자베스 노어백 지음, 이영아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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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ell Me You're Mine

소설은 대부분 원제목이 확 와닿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원제목의 여운이 길다.

딸아 너는 내거야! 내거라고 말해!!


20년 전 죽은 딸이 눈앞에 나타났다

두 엄마와 딸, 여성 셋이 펼치는 최고의 심리 스릴러

'아동 실종'이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상실을 주제로 독자를 사로잡다

아동실종이라는 주제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아이를 둔 부모라면 단어만으로도 가슴떨리는 공포이기에...

나는 김영하 작가를 안좋아하는데 그의 단편 중에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이 있다. "아이를 찾습니다"

마트에서 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부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감쪽같이 아이를 유괴당한다. 부모는 미친듯이 아이를 찾아 헤매고 시간은 흐르고흘러 엄마는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아빠는 생업도 버린체 매일 아이의 사진이 실린 전단지를 나눠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를 되찾는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라고 믿는 여자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그여자가 죽으면서 친부모의 존재를 갑자기 알게 된다. 십수년만에 만난 부모와 아이는 낯설고 불편하다. 아이는 죽은 제엄마가 유괴범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미친여자가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초라한 집에서 지친기색의 남자가 아빠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빠는 그토록 찾아헤매던 아이를 찾았으나 그사이 아내는 미쳤고 집안경제는 파탄났으며 사춘기의 아들은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유괴사건을 다룬 소설은 대부분 잃어버리고 상실감에 피폐해져가는 순간을 다루기 마련인데, 한참후 다시 만났을때의 상황을 표현한 작품의 삭막함이 읽기에 너무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찾아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단순함이 아닌 것은 신선했지만 찾고난 현실이 찾기전보다 더 어려워진 상황이 너무 씁쓸했다. 그렇게 불편한데 왜 그토록 아이를 찾아헤맸던 것일까 작가의 차가운 시선이 몹시 불편했다.

마더앤마더 는 극단적 모성의 양끝단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소설이었다. 아동실종 사건을 바탕에 둔.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이 너무 다른 두 엄마.


두 엄마의 사랑과 집착, 희망과 광기가 맞붙다

이사벨의 진짜 엄마는 누구인가

오래전 잃었던 딸을 찾았다고 확신하는 여자 - 스텔라는 행복한 가정을 꾸린 성공한 심리치료사다. 이사벨이라는 젊은 여성을 처음 만났을 때, 스텔라는 그녀가 자신의 딸 알리스라고 확신한다. 20년 전 가족 휴가 때 비극적으로 익사했다는 아기. 그녀는 정말 그 알리스일까? 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위험이든 감수할 각오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여자 - 세르스틴은 딸 이사벨을 사랑한다. 이사벨은 아버지가 죽은 뒤 행동이 이상해졌고 급기야 심리치료를 받게 된다. 그런데 심리치료사가 이사벨의 인생에 끼어들어 위험한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세르스틴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영원히 딸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싸우는 여자 - 이사벨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을 구한 후 그것이 끔찍한 실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후로부터 그녀 자신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험에 빠뜨를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데...

저자는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작가로 이 작품이 첫 소설이라고 하는데 첫 작품부터 대박이 난 것 같다.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스톡홀름에 살면서 출산 휴가 중 이 심리스릴러를 쓰기 시작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스웨덴 감성이 우리정서와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드릭 베크만 의 오베라는 남자를 시작으로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 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사회 주변에 사는 이웃들 같아서 친숙했는데, 마더&마더 도 거부감 없이 너무 익숙한듯 읽혔다. 영미소설을 읽을때 느끼는 정서적 거리감이 없어서 신기했다. 저 멀고먼 북유럽반도와 우리의 정서가 이렇게 비슷하다니.


이사벨은 남다른 성장기를 보냈다. 집이외에 어느곳도 놀러가보지 못하고 친구도 사귈 수 없었고 정서적으로 늘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 인생을 속속들이 다 알려고 하고, 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싫어한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고 사람들은 위험해, 오래전부터 이렇게 믿어온 사람이다. 아무도 믿지마. 큰일나. 그리고 그건 내게 독이 됐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 아주 다른 인생을 살았다. 마치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나 혼자만의 외로운 별.

이사벨은 아빠의 응원으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드디어 독립을 한다. 처음 나와본 사회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고 친구들은 활기에 넘쳤으며 자신이 괴물인것만 같았는데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사랑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독립후 얼마안되 아빠의 죽음으로 엄마와의 갈등이 시작되지만 엄마외에도 자신의 곁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있었다.


스텔라는 어린 나이에 알리스를 낳았지만 엄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기를 너무 사랑했다. 그런데 아기가 유괴됐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다들 아기가 죽었다고만 한다. 그 상처를 공유해주는 남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아들도 있지만 단 한번도 잃어버린 딸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다 갑자기 알리스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다. 스텔라는 혼란스럽다.

자식을 애도하는 건 외로운 일이다. 그리움과 상실감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알리스가 살아 있따는 걸 알게 된 지금 그 슬픔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돌아온 것이 왠지 슬프기도 하다. 행복에 겨워 기뻐 날뛰며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는데. 하지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뿐이다. 그 오랜 세월 도둑맞은 시간.

세르스틴은 고독한 사람이다. 상처가 낫지 않게 점점 헤집으며 사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결국엔 이 아이도 깨달을 것이다. 그저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오로지 내 딸이 잘되기만 바랄 뿐이다. 이사벨도 이해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인형같던 딸이 성인이 되었다. 세르스틴과 이사벨은 그 간극을 아빠이자 남편인 한스의 죽음으로 건널 수 없는 강 이편과 저편에 서게 된다. 이사벨은 세르스틴과 다른 삶을 선택했다. 함께하는 삶.

하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와야 한다. 엄마의 주장대로 나를 잘 키우고 인도해줬다면 엄마가 나를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사벨의 독립은 세 여자의 독립이기도 하다. 아이가 자라서 당연하게 해야 할 한 인간으로서의 독립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와 상처를 기억하느라 피폐해진 엄마의 독립을 부추긴다. 이 작품은 세 여자의 인생독립기 이기도 한 소설인 셈이다.

범인이 누구일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소설도 재미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알겠는데 알면서도 몰입되는 스릴러의 재미는 남다르다. 이 책은 스릴러의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면서 여성의 심리묘사가 탁월한 작품이었다. 인물심리에 빠져들어 읽다가 나도 미쳐가는 줄 ㅎㅎㅎ


미국여성작가중에 샬롯 퍼킨스 길먼 의 누런벽지 라는 단편이 생각난다. 심약한 여자의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묘사가 그 미쳐가는 과정이 묘하게 공감가는 단편이었는데, 마더&마더의 심리묘사도 그랬다. 고집스럽고 갈팡질팡하고 혼란스러운 세 여자의 심리에 집중하느라 마음이 지쳐갈때쯤 휘몰아치듯 순간에 끝나버린 결말은 조금은 급작스러워서 다 읽고 나서 멍 해지지만 곧 다시 찬찬이 생각하게 된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구조의 소설이라서 왠지 언젠가 극장에서 다시 보게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잡생각이 나지 않게 훅 읽히는 재밌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역시 재밌고 볼 일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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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게 산다는 것 -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
게랄드 휘터 지음, 박여명 옮김, 울리 하우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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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속 저자를 한참 바라보게 되는 책이었다. 깊이있는 눈빛 온화한 미소 중후한 매력이 너무 멋있어서 ㅎㅎ

저자는 신경생물학자로서 뇌과학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통찰을 대중에게 친숙한 언어로 전하는 독일의 대표적 지성인이라고 한다.​ 


기술만능주의와 환경적 재앙 그리고 기업의 착취와 개인들의 탐욕 등 존엄을 잃은 세계에 지금 가장 절실한 삶의 방식은 '존엄'을 생각하고 찾아내는 것이라고, 죽음이 존엄하길 원한다면 삶부터 존엄해야 하지 않겠냐고, 존엄하게 사는 것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인간 두뇌의 처리 능력을 넘어선 정보를 폭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로 지나치게 분주하며,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고, 온갖 추축과 편견, 평가와 의도의 포로가 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사는 동안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인간은 어느새 순식간에 특정 시스템에 속한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자기 존엄성을 스스로 깨우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없다.

며 저자는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과 행동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서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저자는 존엄이란 무엇이고 인간에게 존엄이란 무엇인지 탐구하여 그 결과를 독자와 공유하고 싶어한다.


한 사람의 존엄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타인에 의해서만 다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 때에도 존엄성은 상처를 입는다.

존엄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공동체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서로의 교류속에 배워가는  존재인데 존엄을 알지 못하는 삶은 상대방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존엄하게 살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존엄을 깨닫고 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되고 존중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남을 위해 존엄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존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유지하며 지금처럼 살아갈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다.

지금처럼 지구를 소모하고 산다면 지구에서 인류는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파괴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을 찾아 그곳으로 이주하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그럴리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한, 그 행성 또한 머지않아 지구처럼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인간다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하면서 저자는 그 해답을 '존엄'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존엄이라는 관념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인간 뇌의 조직과 기능 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하나의 '표상'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성향이라고 한다. 존엄하지 않은 행동은 단기적으로 볼 때 성공적인 전략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존엄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도 한다. 개인의 행복한 삶과 모두의 공존을 장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지켜줄 관념을 따라가야 함을 저자는 주장한다.


존엄성과 뇌에도 열역학 제2법칙이 관련된다고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이란, 에너지가 자연의 모든 현상에 고르게 분배된다는 논리인데, 이 논리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자기 조직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우리의 뇌는 스스로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그 해결책 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효과가 있는 방법은 뇌 기능의 원리이기도 한 '단순화'작업이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단일 움직임들을 조정할 목적으로 상위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내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조정한다. 우리가 사고방식, 태도 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 개인이 지닌 삶의 태도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해온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과 태도 역시 우리 뇌에 뿌리를 내린 상위 행동패턴에 따라 조정되고 형성되는데 이것은 유년기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유치원교육에서 존엄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경험을 중요시 여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때로는 긍정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인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내적 표상을 만든다. 공존에서 오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며 어떤 모습으로 인간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그에 대한 신념이 생기는데 이 관념이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될 때 우리 뇌에는 특별한 내적 표상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바로 '존엄'이라는 표상.

동물에게는 태어나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는 신경망이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걷고 먹이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경망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체 태어나는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해 다른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 태어난 이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인간다움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내면에 지닌 존엄이라는 나침반을 통해, 인간다운 삶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알고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은 아주 깊은 내면에서부터 존재한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내면의 나침반, 이 나침반을 통해 아이들이 인간다운 삶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세상을 살아갈 수 잇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수단으로 취급당한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고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보다 노련하게 이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익힌다. 하지만 자신의 존엄함을 인식한 사람은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욕구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은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성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이미 자신의 존엄을 인식하고 있기에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곧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타인의 존엄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엄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생각보다 존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하는 시대라고 요구한다. 이토록 존엄하지 않은 인류의 발전을 그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멈출 있겠느냐며. 존엄한 행동으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킬 뿐 아니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지고 보여주어야 한다고.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도록 도울 기회가 아직 있을 것이라고.


자기 존엄성을 인식하는 능력은 그 사람의 재산이나 지위, 명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존엄함이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을 지는 태도의 문제다. 얼마나 존엄한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존엄함을 인지하고 상대방을 존엄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을까?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나는 나의 존엄함을 인식한 사람일까?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인간의 생각에 맞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스스로 바꾸는 것.

이제는 발전의 방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관념과 인식을, 즉 내면의 나침반을 필요로 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을 바꾸는 것... 죽음의 존엄성을 생각하기 전에 삶의 존엄성을 생각해야 하는 시대...내면의 나침반을 찾아야 하는... 저자가 알려준 나침반 '존엄함'에 대해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매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살아가겠다고. 자기 자신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신뢰 속에서 조금은 호기심 넘치는 삶을 살겠다고.

인공사회 첨단사회가 되어 갈수록 보다 더 인간다움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책이 많은 것 같다. 기계처럼 소모되어지는 인간으로 살던 시대를 벗어나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일까? 기계처럼 소모되다가 사라질 위기이므로 인간만의 인간다움을 다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일까? 시대의 변화는 늘 새로운 생각의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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