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의 미래 - 왜 중산층의 직업이 사라지는가
엘렌 러펠 쉘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왜 중산층의 직업이 사라지는가

4차 산업혁명과 AI 시대 그리고 심화되는 양극화 - 갈수록 벌어지는 격차에 대비하라

일자리 초격차 시대가 온다 - 경제성장과 소득에 관한 새로운 통찰과 전망

결국 문제는 고용의 질이다! 일자리 정책에서 '낙수효과'라는 해법은 없다!​


일자리 지킬 것인가? 얻을 것인가?

기본소득은 정말로 게으른 국민을 만드는가?

전통적인 제조업은 다시 부흥할 수 없는가?

자유시장에서 노동조합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가?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직업훈련을 시켜야 하는가?


띠지에 있는 질문들에 책을 다 읽은 후 내가 찾은 답들은

NO NO NO NO NO 였다.

일자리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은 유의미하며, 전통적인 제조업은 여전히 가능성이 있고, 노동조합은 새로운 형태로 늘 필요하며,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였다.

AI 시대가 되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로봇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직종의 직업들이 아래에서부터 먼저 사라질것 같지만, 천만에! 지금 안정적으로 보이는 중산층의 직업이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되고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오히려 단순노동직종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AI 시대건 로봇시대건 다가올 근접한 미래는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더 늘어날 것이다. 왜? 자본주의적 생.산.성 때문에. 기계설비투자비용 과 인간의 노동력에 지불하는 비용을 계산했을 때 기계값보다 더 싼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직종은 당분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기계설비값이 싸질때까진. 하지만 기계값보다 비싼 인간의 노동력이 있다면? 기계로 AI로 대체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산층의 직업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선망해마지않는 바로 그 직업들. 대학에서 인기높은 바로 그 직업들.


THE JOB 이라는 제목으로 2018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일자리의 미래' 라는 제목으로 바로 한국어판이 나왔다.

미국사회에서의 JOB 이라는 것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한국사회에서 거의 동일하게 적용시켜도 되겠다 싶을 만큼 유사함이 많았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축소된미국사회라고 할 만큼 경제지도가 굉장히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이 책이 의미가 있었다.


세계 경제의 흐름 속에서 대부분의 일자리에는 특정한 '고향'이 없다. 기업들은 어떤 곳이건 터전을 잡을 수 있으며, 원가 계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일자리를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국가인데도 억지로 그 일자리가 그곳에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은 먹혀들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이익이 최우선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산업화 시대가 돼서야 비로소 '일자리(job)' 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면서 '일(work)' 까지 포함하게 됐고, '일' 이라는 단어는 '일자리' 의 부분집합으로 전락했다. ... 아무리 '좋은 일자리' 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좋은 일' 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일자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디지털 시대에 그 한계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책은 ​'좋은 일' 이 가져다주는 인간적 '존업성' 과 인류에 관한 '더 깊은 이해'라는, 오로지 '좋은 일' 만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일' 과 '일자리' 의 구분은 영어단어로의 구분을 보고서야 아~! 싶었다. 우리는 일자리 에 급급해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일' 그 자체에 더 집중해야 할 시대가 올 것이다. 이 생각의 전환은 이 책의 핵심이자 미래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우리 모두가 직업적인 경력에 대해 개인적으로 철저히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비참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만약 공공정책까지 이런 헛된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 정책은 역효과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매우 위험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다양한 곳을 다니며 취재를 했다. 그리고 책의 초반부터 일자리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반론을 준비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일자리에 지원했다가 퇴짜를 맞으면 사회 시스템을 탓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미국에서는 지원자들이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었다. 구직자의 태도에 나타나는 이런 차이점은 상당히 상이한 고용정책을 펴는 두 나라의 고용전략에 기인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직장에 지원한 사람들의 기술과 성과에 초점을 맞춘 매우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 우선 한 번 걸러지게 된다. '스펙게임'이라고 부르는 과정을 통해 지원자들은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능력을 시험받기도 하는데, 이때 나이와 같이 업무와는 굳이 연관성이 없는 요인 때문에 탈락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지원자들은 분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자부심까지 갉아먹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공정하기도 한 시스템의 잘못이며, 이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케미스트리게임'이라고 이름붙인 시스템과 싸워야 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그 일자리 자체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그 조직에 대해서도 몰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일자리를 원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거나 그 일자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플레이어라고 묘사해야 하며, 동시에 그 회사가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의욕을 과시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케미스트리 게임'을 하는 동안 대다수의 지원자들은 자긍심이 위축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어떤 종류의 잘못이 발생되면 그들은 회사나 사회시스템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뭔가 익숙한 내용같지 않은가? 한국사회에는 어떨까?


현대 인류는 자신의 무제한적인 욕구와 충분하지 않은 충족수단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 노예화한 조건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비극이다.


알아서 야근하고 초과근무하고 워커홀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매우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왜곡된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자리에 좋은 것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은 것' 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라고 저자는 단호히 이야기한다.


다수의 고용주들이 요즘 '좋은 직원들'을 구하기 어렵다는 불평을 하곤 하는데, 좋은 노동자들이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좋은 노동자들이 보수가 형편없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자신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경제원리가 보여주는 바는 노동력 공급 부족이 아니라 과다 공급이 고용주로 하여금 기준 이하의 고용 조건을 제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건만 개선된다면 지원이 폭주하기 깨문에 '노동력 부족'이라는 투덜거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좋은 일자리' 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좋은 구직자' 가 넘쳐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일자리' 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한 '좋은 구직자'들은 점점 더 형편없는 처우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다시말하면 노동자들의 스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고용주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가장 기본적인 스킬만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에 오려는 노동자들을 충분히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력 부족이라는 입장과 취업할 곳이 없다는 입장에 대해 언제까지 대치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안달하기 전에 '좋은일자리'에 대해 제대로 심사숙고해봐야 할 때가 된게 아닐까?


최근까지도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동화가 인간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영구히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그동안 인간은 보다 일을 잘할 수 있는 기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대체돼왔긴 하지만 '비교우위'라는 경제 원리에 따라 인간은 기계가 열위에 있는 분야로 옮겨가면서 계속 우위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면 기계는 인간을 대체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다 덜 위험하고 도전적인 일,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이리에 집중하도록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줬던 것이라고 믿어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임금이 낮으면서 반복적으로 단순한 작업을 하는 일자리들만이 자동화에 취약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믿음은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예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들은 버거를 만들 때 자동으로 패티를 뒤집는 기계들을 이미 오래 전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도 도입을 별로 서두르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패티를 뒤집는 일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이며, 강력한 노조가 뒷받침해주지 않는 이상 이런 일에서 고임금을 받아야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비용을 감수하고 기계를 들여놓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심장수술을 한다든지, 변호사로서 이혼소송을 담당한다든지, 금융전문가로서 재정적인 충고를 한다든지, 건축을 설계한다든지,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이나 다른 복잡한 일을 하며 높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의 경우 그들의 높은 임금을 상쇄시킬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비용은 금세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걷고 뛰며 자유롭게 움직이며 초코칩머핀과 강아지를 단번에 구분하지만 수학문제에 머리를 싸맨다. 로봇은 아직 계단을 자유롭게 오르내리지 못하고 AI 는 초코칩머핀과 강아지얼굴을 구분하기 위해 수백만 데이터를 학습해야 하지만 고정된 상태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수억단위 계산문제를 푸는데 1초도 안걸린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 같은가? AI 가 인간의 노동을 줄여줄 것 같은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좋은 일자리' 에 적합한 존재가 인간일까 아닐까? 앞으로 인간에게 적합하면서도 좋은 일자리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타트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많아진다는 논리는 또 어떤가? 스타트업 기업은 작은 규모이고 창업자가 곧 직원으로 시작하며 다른 직족에 있다가 합류하는 직원이 있거나, 창업자가 직원인 그 상태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단 하나의 일자리 창출이 과연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순 일자리'의 개념이다. 이는 만들어진 일자리 숫자에서 없어진 일자리 숫자를 뺀 수치이다. 이런 계산법이 적용된다고 하면 실질적으로 스타트업 기업이 지속적인 일자리를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할 것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고개 끄덕여진다. 게다가 스타트업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는 통상적으로 기존 회사들이 제공하는 일자리보다 생산성도 낮고 보수도 낮으며 훨씬 안정적이지 못하다. 스타트업은 상황의 변화일뿐 일자리해결방법은 아닌걸로 보인다.


우리는 중앙집권적인 기능이 훨씬 덜한 일터에서 일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도전에 당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독립적인 상인이나 농부, 장인들이 활동하던 시대로 다시 되돌아간 셈이다. 우리가 하는 일의 정체성이 어떤 특정한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에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경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역사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도 반복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업과 개별수공업 형태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대규모 형태로 바뀌었던 경제가 다시 소규모 개별형태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했던 기념비적인 연설에서 "안주하지 말라" 고 했다. 좋은 말이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에게 이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가 아닌 우리에게는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만약 여러분이 엄청난 열정으로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에 따른 월급봉투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엇의 전조가 될까? 물론 나는 스티브 잡스가 불량한 의도로 되지 않는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분명히 진심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바이블처럼 되는데 있다. 이 경구는 매우 무책임한 말이다. 이 조언은 마치 우리가 기존의 관습적인 것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동시에 그 관습적인 측면에서도 얼마든지 열정만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언은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열정이 미래의 부와 성공을 약속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라는 매우 잘못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열정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속이 좀 시원했다고나 할까?! 몇년전 개봉했던 영화제목이 떠오른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앞에서도 계속 말했고 앞으로도 계속 말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더 희귀해진다. 그런데 일자리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일자리가 의미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해서는 여러 이유로 힘들고 고달프다. 그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일이든 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일을 하고 그 일자리에 몸담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면 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된다. 이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다. 그리고 이 단계는 사회적, 국가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지금 당면한 명확한 도전 과제는 새롭고 좋은 21세기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울러 20세기 계산법에 기초해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확실히 점검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또다시 답습하지 않고, 일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정서적,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당연히 쉬운 과제는 아니지만 기운을 북돋아주는 시도가 될 것이다. 내 눈에는 이 과제를 시작할 지점이 분명하게 보인다. 다름아닌 '학교'다.


대학은 갈수록 점점 더 직업훈련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유용한 방향일까?


고등교육의 시장 가치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가장 희소한 상황에서 가장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1위인 한국을 제외하고 전세계 어떤 나라의 시민들보다도 많은 숫자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으며, 이런 특권을 위해서 지불하고 있는 비용도 대단히 높다.


희소성이 일반화가 되면 다시 새로운 희소성을 찾아가는 것은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이것을 반복한다면 끝을 모르는 삶의 피폐함으로 더 다가가지는 것일 뿐이다. 근본적인것을 바꿔야 한다.


평균소득을 왜곡시키는 빌 게이츠 효과 라는게 있다고 한다. 빌 게이츠 효과란 평균을 결정할 때 이상값이 포함돼 계산에 작용함으로써 결과를 왜곡시키는 효과를 의미한다. 즉, 엄청난 부자가 포함된 집단의 높은평균소득을 보고 그 집단이 모두 고소득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한 엘리트들이 평균을 크게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들은 일반인들의 재산이나 소득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향상시켜주지도 않는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실업인구 가운데 50퍼센트 이상이 대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교육 프리미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학 졸업자들의 평균 평생소득은 최근들어 고등학교 졸업자의 소득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 는 책속의 인용구는 미국보다 더 심각한 한국의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만 같다. 소득불균형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요인들 중 '교육적인 요인' 은 우리가 집중해야 할 올바른 요인이 아니다. 더이상은


특정 산업에서 어떤 수준의 보수를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공급이 일시적으로 부족한 현상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공적인 자원을 특정 직업군에 대한 '적시' 훈련에 모두 집어넣는 것은 아무리 잘 봐줘도 도박 이상의 것은 아니다. 어떤 대학도 일자리 시장의  수요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해 '적시교육'을 제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학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


미래란 원래 단어를 정의할 때 의미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며,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수정 구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유교양 교육이 곧 해방 교육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졸업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지식들이 그들이 어떤 것들을 추구하든 간에 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자가 만난 어느 대학 총장의 말은 곧 저자가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앞 쪽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른다.

사실 미국은 전반적으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기 위해 도박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무척 선호하는 편이다. 유럽은 학생들에게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치지만, 미국의 학생들은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일론머스크와 같은 기업가들을 떠받들도록 교육받는다. 산업계에서 영웅은 일반적으로 '혁신가'를 의미한다. 그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개인적 측면에서든 사회적 측면에서든 무엇을 준비해줄 수 있는지 상환없이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어떤 혁신' 인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혁신을 하고 있는가?


저자는 '일' 과 '일자리' 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사례들을 풀어놓고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다. 앞에서부터 내내 다양한 문제점들을 조금은 지루하다싶게 분석해놓다가( 솔직히 가독성은 좀 떨어지는 책이었다. 자꾸 문제점만 지적하다 보니 읽으면서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그래서 뭐라고 마무리 할 건지 궁금해서 오기로 끝까지 읽은 맘이 없지 않다 ) 뒤에 가서 약간의 해결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는 일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믿고 있다. 세계 경제가 요구하는 핵심 사안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자체가 모든 시민의 욕구와 능력과 재능에 맞게  기회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나라도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으면 기업은 계약에 대한 절충과 소송으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고, 정부는 이념 논쟁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높을 때는 기업과 정부 모두 더욱 민첩하게 변화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사회적 신뢰' 다.


저자는 사회적 신뢰도가 높고 정부가 책임을 지며 개인들과 소통이 잘 되는 체제가 미래지향적이라고 제시한다. 개인에게 실업의 책임을 돌리는 사회는 발전가능성이 낮을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시스템이 바로 설때 개인은 권리를 누림과 동시에 정말 개인이 져야할 책임만 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개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지금


저자는 정부와 사회에 요구하는 시스템과 별도로 개인이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생제도들도 제시하고 있다. 협동조합 이나 프리랜서들 같은 비정규직의 노동조합과 연대, 종업원 지주제, 맞춤형 생산방식 등 노동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 새로운 시도들이 성공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고 저자는 정치권에 쓴소리를 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국가적인 일자리 대란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일자리 대란은 희소해지고 있는 '기회'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언제나 충분한 정도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기술은 인간이 적절히 활용하기만 하면 우리 삶을 개선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국가 차원의 일자리 대란은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낳을 수 있는 문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변화에 대해 준비하고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 그것으로부터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굳은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좋은 일자를 지원하고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실행력 있는 방법은 공공 정책의 핵심 어젠다가 되도록 정부와 기업과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계화된 디지털 경제에서 우리는 민간 분야의 장기적인 고용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 고용을 통해 시민들이 소득을 올리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온 전략은 과거의 유물이 됐다. 안타깝지만 이제 통하지 않는다. 일자리의 미래는 디지털 경제의 창조가 아니라 집단적인 상상력에 달려 있다. 기술은 죄가 없다. AI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이용하는 주체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기술은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여야 할 삶의 동반자다.  '나쁜 일자리' 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 법칙의 소산이 아니라 '치료해야 하는 사회 구조의 결함' 때문이다. 일과 일자리가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제로섬 게임은 아니다.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민주주의에서 일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는 것이다. 교육과 전문성은 여전히 긍정적이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스킬 우선' 에만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을 기계보다 한 걸음 앞서도록 교육하는 일은 헛되다. 그보다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역설계해서 우수한 기술을 십분 활용해 사람들이 일로부터 진정한 가치를 도출해내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고용주들이 우리에게 '선물' 이나 '의미있는' 일자리를 마련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하는 그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생산품이라는 사실에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하는 것이다.


일자리에 가서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에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

개인과 개인이 연대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할 때 '좋은 일자리' 가 창출된다는 것,

개인이 져야 하는 책임보다 사회와 정부가 져야 하는 책임이 제대로 인식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스템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일자리의 미래가 곧 일의 미래는 아니라는 것은 천천히 읽어지는 이 책이 주는 소중한 교훈이었다.

힘들기만 한 work 는 의미있는 job 으로 바꿀 수 있다.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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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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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지옥에 있지 않아요, 지옥을 몰고 오지"

동시에 두 장소에서 목격된 용의자,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참혹한 사건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을 향해 질주하는 추적극

1권에 잔뜩 깔린 밑밥들에 제대로 낚여서 2권이 너무너무 궁금했다.

연이어 바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ㅎㅎ​

1권의 멜론이 2권에서 제대로 잘렸다. 그리고 제대로 쏟아져 나왔다. 썩은 것들이.


1권의 마지막에 등장한 새로운 조사원 홀리 가 2권에서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내고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던 것을 증명해 낸다.


사람이 어떻게 동시에 두 공간에 등장하고, 파일로 저정된 뉴스 영상에서 사라져요? 장난 아니면 거짓말이겠죠

라고 할 줄 알았겠지. 나도 밝힐 생각은 없지만, 알렉 펠리가 모르는 게 있다면, 사람이 동시에 두 공간에 등장할 수 있다는 거야.


2권 초반에서 홀리는 1권에서 밝혀지지 않았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등장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권에서 모든 것을 벌려놓고 가능성들만 깔아놓았다면 2권에서는 그 모든 것을 봉합하는 작업을 초반부터 시작한 것이다.

1권에서 했던 모든 추리들을 엎어놓고 멘붕에 빠트렸던 사건의 진실을 2권에서 제대로 추적해 나가는 과정은 1권보다 몇배 더 흥미진진하다.


"정말로 테리가 피터슨을 죽이지 않았다고 믿는단 말이죠?"

"히스 홈즈가 두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믿어요. 다른 자의 소행이에요. '이방인(outsider)'이요"


제대로 등장했다.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의 정체가 드러날 수록 소설속 인물들은 모두 멘붕에 빠진다.


"하늘과 땅 사이엔 우리의 철학으론 상상도 못할 일들이 수없이 많다" 지넷이 말했다.

홀리는 미소를 지었다. "셰익스피어가 그걸 가장 멋지게 표현한 것 같아요. 사실 셰익스피어는 거의 모든 걸 가장 멋지게 표현했죠"


셰익스피어싀 '햄릿'에 나오는 대사라고 주석이 달려있다. 여기서 잠깐 딴 생각이 들었는데, 서양문학에서는 고대그리스문학이나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정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구나 하는... 여튼, 여전히 몰입도 높게 읽혀서 도대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홀리 기브니가 말하는 이방인을 믿는다면, 그녀가 말하는 엘 쿠코를 믿는다면 모든 게 가능해진다. 우주에 끝이 없어진다.


멕시코전설에 나오는 엘 쿠코의 등장은 스릴러의 거장 스티븐 킹 이 사용했기에 현실감 높은 존재로 다가와 진다. 도대체 안 믿을 수가 없다.


"아뇨, 제 말 잘 들으세요. 저도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부 끔찍한 사건들에 비하면 엘 쿠코라는 존재가 오히려 더 납득이 되지 않나요? 자연재해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들에게 저지르는 짓을 두고 하는 얘기에요. 테드 번디도 따지고 보면 엘 쿠코라는 변신 괴물과 다를 바 없잖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보인 모습과 살해한 여자들에게 보인 모습이 달랐으니까요. 그 여자들이 마지막으로 본 건 그의 다른 얼굴, 내면의 얼굴, 엘 쿠코의 얼굴이었어요. 그런 자들이 더 있어요. 그들이 우리들 사이를 활보하고 다녀요. 형사님도 그렇다는 걸 알잖아요. 그들은 외계인이에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괴물이에요. 그런데도 형사님들은 그들을 믿어요. 그들을 체표하고, 어쩌면 처형당하는 것까지 봤으면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믿지 못하는 랠프형사에게 홀리가 하는 말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랬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인간같지 않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괴물이었으면 좋았을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차라리 괴물의 모습을 한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괴물도, 인간도.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지 모르게.


이방인은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득의양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리 알리바이가 탄탄하고 평판에 티끌 하나 없어도 별문제 없었는데, 증거와 목격자 진술이 있으면 알리바이와 평판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인간들이 워낙 자기들의 현실 인식에서 벗어나는 설명은 받아들이질 못하거든. 너는 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의 알이바이가 아무리 탄탄했어도 나를 감지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왔단 말이지."


아웃사이더가 말하는 인간의 무지아닌무지는 너무나 현실적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의 존재를 현실화한다.


"전에도 이런 일 겪은 적 있죠?" 유넬이 물었다. "아니면 이 비슷한 일을. 맞죠?"

"네. 그리고 경찰은 우리 말을 믿을 거에요, 절대 해소할 수 없는 궁금한 부분들이 남겠지만. 두 분 다 왜 그럴지 이유는 알죠?


홀리에게서 자꾸 느껴지는 기시감은 작가가 홀리를 다른 작품에 등장시켰던 인물임을 넌즈시 드러낸다.

그러다 대놓고 알려준다. 유넬의 질문을 통해. ㅎ 홀리가 등장하는 저자의 다른 작품을 궁금하게 하는 센스가 유쾌하다. ㅎㅎ


랠프는 알았다. 발자국은 그냥 끊기지 않았고 질긴 껍질에 흠집 하나 없이 잘 익은 캔털루프 멜론 안에서 구더기들이 부화할 방법은 없을 테니 그들은 아무리 엉성한 이야기라도 믿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면 현실을 의심해야 하기 때문에 믿을 것이었다. 피할 길 없는 아이러니였다.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이방인을 보호했던 바로 그것이 이제는 그들을 보호할 것이었다. 우주에는 끝이 없지. 랠프는 생각하며 선물 가게 그늘에서 소방차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랠프형사는 이제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현실을 의심하게 하는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로 꿰어맞춘 엉성한 이야기들을 믿게 되는 엉성한 현실과 우주에 끝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우주에는 원래 끝이 없었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우주를 깨닫는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믿고 살게 된다. 그 엉성한 현실이 현실이 아닐지라도.


"이 세상에는 선한 기운도 있다는 거. 저는 그렇다는 것도 믿거든요. 그래야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일들을 생각해도 미쳐 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음... 그걸 입증하는 증거들이 있지 않아요? 여기뿐 아니라 온 사방에. 균형을 다시 맞추려는 힘이 있다는 증거 말이에요."


현실에 대한 부정성을 선한기운으로 바로 회복시켜주는 작가의 센스에 또한번 놀란다. 멋지시다고 엄지척 해드리고 싶다. ㅎㅎㅎ


1권에서 답답했던 테리의 가족들에 대한 처우는 2권에서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있어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사망 당시, 그는 법적으로 무죄였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2권의 스토리가 나왔다. 대단하다.

너무나 당연한 상황을 당연하지 않게 시작하더니 당연하게 정리하는 그 과정이 정말 스릴러의 대가 다웠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정산적인 반응이에요. 현실은 얇은 얼음과도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그 위에서 얼음을 지치는 동안 막판까지 물속에 빠지지 않아요. 우리는  빠졌지만 서로 도와 가며 빠져나왔어요. 지금도 서로 돕는 중이고요."


홀리가 나오는 전작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작품에서 홀리는 동료 빌 을 잃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홀리는 랠프형사를 만났고 사건을 함께 해결했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어느 작품에선가 나왔던 인물이 다른 작품에서 등장할때 느끼는 반가움은 소설을 읽는 새로운 기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스릴러의 거장은 자신의 수많은 작품들 속에 나왔던 인물들을 이렇게도 활용할 줄 아는 구나 싶어서 또한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권에서 뒤집어졌던 머릿속이 2권에서 하나하나 정리되어져 가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던 소설이었다.

스릴러 소설이 찜찜하게 끝나면 공포소설로 둔갑하기 마련인데, 뭔가 다른 여지를 남겨두면서도 깔끔하게 끝내는 솜씨가 대단했다. 스티븐 킹 은 정말 그 누구와도 다른 독보적인 작가인것 같다.

여름에 스릴러 소설이 인기있는 것은 바깥 온도와 관계없이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늘함 때문일 것이다.

그 서늘함과 쫄깃한 스토리와 깔끔한 마무리까지 갖춘 '아웃사이더' 를 시원하게 읽으려면, 꼭 2권 모두 준비해놓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한꺼번에 1권2권 읽어내려가면서 풀어내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여름엔 역쉬 스릴러소설이 짱인듯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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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마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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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고?

요리와 사랑에 빠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은밀한 취미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면 천재화가이자 조각가, 창의적인 다양한 도구들의 설계도를 남긴 사람​, 자신의 창작물을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도 반대로 써서 거울에 비춰야만 알아볼 수 있는 거울체를 쓴 사람, 당시 최신기법인 유화를 시도해본 사람( 동시대의 후배 작가인 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유화를 인정하지도, 시도하지도 않았다 ) 등 참신하고 창의적인 천재의 대가 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수염이 길게 덥수룩하게 난 잘생긴 초상과,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그림과 비스테리우스의 인체도 같은 해부학적 인체그림과 비행기나 기구 같은 그 당시엔 상상조차 힘들었던 물건들을 상상하고 그렸던 설계도 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정도의 다양한 분야의 활동으로도 모자라서 요리사였다는 얘기는 정말 생소했다.

표지에 있는 문구가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유명세에 비해 남긴 작품이 많지 않다. 언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를 빌 게이츠가 엄청 비싸게 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작품보다도 노트를 많이 남겻던 인물이었다. 끊임없이 메모하고 남기고 기록하는 그의 노트가 제대로만 전해졌어도 엄청난 아이디어의 보고가 될 수 있었을텐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요리에 대해 쓴 짤막한 글들을 [코덱스 로마노프] 라는 소책자에 모아두었고, 이 노트는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요리 중에서 특별히 관심이 가는 요리를 최대한 많이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요리를 직접 한 것은 아니나, 요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주방, 조리기구, 요리방법 등에 엄청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노트를 작성할 당시 그는 스포르차 가문의 궁정 연회담당자로서 부잣집 요리라면 유감없이 음미할 수 잇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피렌체에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으나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이 많았고 후배화가인 보티첼리와 식당을 차렸다가 망하기도 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추천장을 써서 밀라노 대공에게 보냄으로써 스포르차 가문에 입성하게 된다. 이 노트는 그가 밀라노 궁정에 있으면서 기록한 요리노트 이다.


책속에는 별별 희한한 요리들이 나온다. 그 당시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먹었나 의심이 갈 정도로 희한하다. 식재료를 다루는 방법부터 먹는 식습관까지 희한하다. 스파게티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들었고, 냅킨도 그랬다.


책에서 묘사되는 식사문화가 너무 더러워서 찾아보니, 포크는 고대부터 사용하던 도구였는데 중세시대엔 악마의 삼지창과 닮았다 해서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음식을 손으로 먹고 잘 닦지 않는 비위생적인 식습관을 너무 싫어해서 냅킨과 포크를 생각해냈으나 활용되지 못했다.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시대는 식탁문화조차 암흑이었다.


식재료나 조리법 등 다 생소했지만, 상추를 먹으면 잠이 잘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보면 아주 이상한 것 같진 않기도 하다. 작은 호두를 까거나 마늘을 빻기 위해 엄청난 기계를 만든 것을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심지어 조리보조도구로 만든것이 나중에 전쟁무기로 사용됐을 정도다.


책 앞 쪽에 번역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을 알려주고, 최후의 만찬에 대한 비화를 설명해준 뒤에 이어지는 부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 온갖 요리들이 나온다. 요리에 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열정과 암흑시대를 천재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게된 점은 신선했지만, 그가 기록한 요리들은 여전히 이상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는 것만큼이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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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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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벗겨 내면 뭐가 남겠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남지"

동시에 두 장소에서 목격된 용의자,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참혹한 사건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을 향해 질주하는 추적극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 최신 장편, 굿리즈 선정 올해의 미스터리 스릴러, 아웃사이더

스릴러 소설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븐 킹 의 최신 장편 소설이다.

여름이라서인지 스릴러 소설 신작이 여럿 눈에 띈다.


신예작가 엘리자베스 노어백의 스릴러 [마더앤마더] 도 읽고, 탄탄한 중견작가 데이비드 발다치의 [폴른:저주받은 자들의 도시] 도 읽고, 스티븐 킹 과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딘 쿤츠의 [사일런트 코너] 도 읽고 다시말해, 스릴러 소설의 신작들을 꽤 읽었는데도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는 허를 찔리는 듯한 기분의 소설이었다.


범죄스릴러 이니만큼 소설은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말로 형언할 수 없도록 참혹한 현장의 어린소년 성폭행살인사건


용의자는 인생의 하이라이트로 기억됐을 법한 순간의 장면들 중 한 장면에서 체포된다. 수많은 인파속에서 수많은 시선속에서.

용의자는 한 가정의 충실한 가장이었고, 성실한 지역봉사자였으며, 마을 주민들 모두의 다정한 친구였다.

형사는 확실한 용의자라고 생각하고 체포했는데, 용의자에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용의자가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난 기이한 사건


그러나 용의자는 자신이 왜 용의자가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짧은 시간후에 살해당한다.

여기서 처음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대부분, 사건이 일어나고 용의자가 생기고 형사가 잡고 알리바이가 있을때, 두 사람간의 증거확인전이 벌어지고 두 가지의 가설로 사건이 재구성되면서 누가 범인인지 좁혀가는 추리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한창 사건을 밝혀나가려던 때 용의자가 죽어버린다. 헉


살해당한 소년의 가정은 그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게 불행하다. 대부분 피해자 가족의 불행은 이 정도에서 그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가정은 불행을 끝까지 몰고 간다. 불행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의 끝까지. 이 또한 기존의 해결방식을 벗어난 느낌이다. 헐


용의자의 가족은 행복의 절정의 순간에 불행의 끝을 경험한다.

충분히 더 적극적으로 해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질 않는다. 때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답답해 미친다. 이건 미국법과 우리법이 달라서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러기엔 용의자도 그의 가족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 뭔가 특별한 밑밥을 던져놓은 거 같은 느낌인데 그게 뭔지 아리송해서 궁금해 미친다. 커헉


단 몇 분 만에 그의 인생이 어떻게 통째로 뒤집힐 수 있는지 파악하려고 애를 쓰는, 어둠의 골짜기가 가장 깊은 이 시각에도 그 사실만큼은 믿어 의심치않았다. 하지만 모든 똥이 다 지워 없어지지는 않으리라는 점도 알았다. ...석방될 것이다. 하지만 ... 그의 이력은 끝났을 수 있었다..... 시민들이 보기에 그는 살인범으로 체포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영원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 고 수군댈 것이었다.

기소는 기각될거에요 - 확실해요? - 확실해요. 합당하게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을 하나만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써야 하는 사건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건 의혹투성이에요. 기소가 성립될 리 없어요 -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사람들 생각이  바뀌는 거 확실하냐고요


용의자도 그의 아내도 알고 있었다. 짐작하고 있었다. 용의자가 된 것 만으로도 이후의 삶이 통째로 날아가버렸다는 것을. 그런데 왜 수습을 하지 않는건지 그 이유가 1권에는 나오지 않는다. 2권을 바로 읽어야 하는데 으윽 ㅠㅠ


사건이 기이한 만큼 기인한 존재가 나타난다. 현실  혹은 꿈속에

이목구비가 엉성하고 눈 대신 빨대를 달고 있거나, 화상을 입은 얼굴에 티셔츠를 뒤집어 쓰고 있거나, 뭔가 초현실적인 존재.

이 초현실적인 존재는 용의자와 똑닮았고 심지어 DNA가 같다. 이 존재는 무엇일까?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두 가정이 파탄났고 한 도시는 흉흉해졌고

급발진 자동차 같은 속도로 용의자를 검거했던 형사는 처박힌 자동차를 빼내지도 못한체 휴직을 당했다. 자동차덩치만큼 커다란 의문들만 남긴체.

확신을 의심으로 바꾼 수많은 의문투성이를 뒤늦게 받아들인 상태로 형사는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천천히 너~무 천~천~히 물음표를 현실화하려고 시도할때 1권이 끝난다. 아아아아아악 궁금해 @.@

겉보기에는 멀쩡했던 캔털루프 멜론 안에서 꿈틀거렸던 구더기들에 대해, 어떤 사람이 초자연적인 현상일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 더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완벽하게 믿을 수 없을 것에 대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식하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닐지 모르는 것에 대해, 그건 심장박동을 의식하는 것과 같았다. 그 지경에 이르면 이미 문제가 생긴 것일 수 있었다.

용의자가 범인이라 확신했던 형사에게 자신의 정신상태에 의심을 가져야 할 정도로 이상한 증거과 정황들이 나오면서 끝난 1권의 뒤를 빨리 이어 읽어야 할텐데... 안그러면 궁금하다못해 내 정신상태에 문제가 생기는건 아닐런지 ㅍㅎㅎ

1권의 진행속도가 더딘만큼 2권의 진행속도는 스피드있고 반전에 반전이 있을 듯한데... 2권을 쌓아놓고 읽지 않았음을 땅을 치며 후회한다. 빨리 2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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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여름 - 남극에서 펭귄을 쫓는 어느 동물행동학자의 일기
이원영 지음 / 생각의힘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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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서 펭귄을 쫒는 어느 동물행동학자의 일기

성실한 여름을 보내는 펭귄과 부지런히 기록하는 동물행동학자가 남극에서 맞닿은 순간들

​우리는 결국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이 책은 남극에서 지낸 하루하루를 기록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펭귄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관찰일기이기도 하다. 펭귄이 알을 깨고 나와 혼자 살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싶었다."

저자는 극지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동물행동학자이다. 여름엔 북극, 겨울엔 남극을 오가며 펭귄을 비롯한 동물의 행동 생태를 연구한다. 한국에선 한겨울인 12월,1월이 남극에선 여름이다. 지금 여름인 한국에서 남극의 얼음대륙을 생각하며 읽다보면 조금은 시원해진 기분도 들고, 애정어린 눈길로 펭귄을 관찰한 저자의 글들을 읽다보면 마음이 따듯해지기도 한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극지방 남극, 한여름의 최고기온이래야 영상 2도 안팎인 영하의 땅, 그곳에 세종기지가 있고 펭귄마을이 있다. 펭귄과 함께 보낸 43일의 기록은 짧다면 짧을수도 있지만 펭귄이 알에서 깨어나 둥지를 나오고 성채로 자라기까지 충분한 시간이라고 한다. 남극의 여름이라고 해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수시로 '블리자드' 라고 불리는 강한 눈보라가 분다고 한다. 12시간의 시차가 있는 남극에서 인터넷도 끊기고 핸드폰도 안터지는 곳에서 오롯이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은 우리가 수시로 흘려보내는 일상의 시간들보다 몇갑절 길게 느껴질까 몇갑절 짧게 느껴질까...


창문 밖으로 펭귄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라면을 먹었다. 대피소 안에서도 펭귄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풍경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텔레비전으로 펭귄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년 남극에서 펭귄을 보는 저자도 창문밖 펭귄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시간이라면 길건 짧건 꿈같은 시간이 아닐까?ㅎㅎ


동물행동학자인만큼 동물에 대한 기본자세가 남달랐다.

물론 현재 사용하는 장비와 연구 방법은 동물 윤리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고, 이에 따라 전 세계의 펭귄 연구자들이 공유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수백 마리의 펭귄에게 괜찮았어도 1마리의 펭귄에겐 괜찮지 않았을 수 있다. 깃털에 붙은 이물질이 펭귄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좋아해서 시작하게 된 연구지만, 과학적 목적을 위해 동물을 괴롭혔다는 사실이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동물 윤리의 핵심은 대상 동물의 관점에서 고통을 느끼는지의 여부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방법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만약 고통을 준다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한다.

연구를 위해 작은 기계장치를 조심스럽게 펭귄깃털에 붙이고 나서 돌아오지 않은 한마리 때문에 잠을 설치는 저자를 보며 동물학자들이 다 이정도의 마음만 가진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펭귄마을에 갈때마다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줄까봐 발소리를 죽이고 말소리를 삼가해가며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관찰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펭귄들의 분변을 몸으로 받아내며 애정어린 눈길로 펭귄을 아끼는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남극에서 온난화를 목격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앞서와 같은 주장을 접하면 당혹스럽다. 때로는 무력감도 느낀다. 기후는 실제로 변하고 있고, 남극의 생태계는 그 결과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매년 빙하가 수십미터씩 줄어들고 있음을 직접 볼 수 있는 연구자이다. 기후변화는 몇몇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문제인데, 지구온난화를 부정하고 기후협정을 탈퇴하는 선진국들에 대한 심정이 무척 답답할 것이다. 그래도 작은 힘을 모아 일단 뭐라도 시작해서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얻어 협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도 작은 마음이나마 보태본다.


극지방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을 보내다보면, 더구나 연구가 마음처럼 잘 안되기라도 하면 더욱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을 때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생활이 지겹고 괴로울 수도 있을 테지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참고 기다렸을 때에야 비로소 찾을 수 있는 의미도 있다 는 것또한 배운다. 남극에서. 펭귄들에게서.

저자가 관찰한 펭귄가족이 있었다. 부부사이에 아기펭귄 두마리. 그러던 어느날 아기펭귄이 한마리만 남은 것을 보았다. 원인은 모르지만 죽은 아기펭귄을 보며 저자는 고민한다. 속으로 이름까지 붙여주고 다른 펭귄가족들보다 더 애정을 갖고 관찰하던 아기펭귄이었기때문에 마음은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대로 지나간다.

사체는 결국 도둑갈매기에게 먹히고 있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날카로운 부리에 찢기는 모습은 차마 보기가 힘들다. 내가 개입해도 될까. 구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그대로 두는 것이 옳을까? 도둑갈매기를 쫒아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자연은 자연그대로 둘때가 가장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관찰일기이다 보니 시간순서대로 차분히 아기펭귄의 성장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는데, 번외로 붙여진 이야기들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도 있었다. 펭귄사회에서 동성애 라던가, 4일간 바다에서 쉬지 않고 헤엄을 치는 동안 어떻게 잠을 안 잘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같은 것들...


아기펭귄이 거의 성채크기로 자랐을 때 남극의 여름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펭귄들은 깃갈이를 한다고 한다.

펭귄에게 깃은 일종의 방수복인데 늘 이 방수복을 입은 채로 생활하기 때문에 헤져서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펭귄은 1년에 한 번씩 깃갈이를 하며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깃갈이는 보통 2~3주 정도 걸리며 이 기간 동안 펭귄은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육지게 가만히 서서 깃털이 새로 나기만을 기다린다.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사냥을 할 수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단식에 들어가는  셈이다. 깃갈이를 하는 동안 펭귄은 영양 공급이 끊긴 상태를 참아내며 체내에 축적된 지방과 단백질로 몸 상태를 유지하고 깃털을 만들어야 한다.

어린 펭귄은 깃갈이를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부모에게서 먹이를 받아 먹었다. 그래서 부모펭귄은 새끼의 깃갈이가 끝난 뒤에야 자신의 깃갈이를 시작한다. 자식에게 밥을 먹이고 옷도 다 갈아 입힌 뒤에 자기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자연은 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알게되도 감동적인 것 같다.


부부펭귄이 번갈아 가며 알을 품느라 선채로 며칠씩 보내고, 부부가 번갈아 가며 사냥을 다녀와서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덩치가 부모만큼 커진 새끼의 마지막 옷입기까지 돌봐주고 나서야 펭귄부부의 여름은 끝난다. 이 여름은 매년 오고 펭귄들은 매년 새끼들을 키워낸다. 그런데 빙하가 녹고 먹이가 줄고 온도가 올라가는 것은 펭귄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펭귄들이 살지 못하는 환경이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자연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펭귄들이 펭귄들의 땅에서 건강하게 잘 살아갈때 인간들은 인간들의 땅에서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환경보호가 지구온난화해결이 좀더 속도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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