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지음, 크리스토퍼 코어 그림 / 연금술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것처럼'

제목부터 끌렸고, 마음에 드는 시들도 여러편 수록된 시집이었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책은 안읽어봤었는데, 시집을 한번 읽은 이후로 다른 책들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저자의 글은 특징이 강한 편이다.

시적으로 말하면 영혼에 대한 글 이라고 할 수 있고, 평범하게 말하면 깨달음에 대한 글 이라고 할 수 있는, 특히나 인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고 인도여행에서 얻은 상념들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몸은 한국인일지 몰라도 영혼은 인도인 이라고나 할까.

이 책또한 저자가 인도를 여행하며 만난 인도인들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에세이 이다.


<<사기꾼과 성자와 걸인, 동료 여행자들이 나의 스승이었다.

그들이 나는 좋았다.

때로 삶으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명상이고 수행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었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들은 시집이었다.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책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 책을 읽는 것이 좋았다.

여행은 언제나 좋았다.

내 생의 증거는 언제나 여행에 있었다.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저자에게 세상은 인도였고, 인도를 여행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고, 길거리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스승이었고, 그들과 함께일때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도를 경험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스승과  사기꾼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도인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낯설었다.

저자는 식당에 가서 주문한 메뉴와 상관없는 음식이 나와도 식당주인이 하는 말에서 명언을 발견하고, 여관에 가서 방이 너무 더럽다고 불평할때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라는 여관주인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고, 길가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걸인들에게 매번 돈과 물건을 털리면서도 스승을 만난듯 표현한다. 사실 걸인과 '사두' 라고 하는 종교인의 경계도 모호하다. 그 무엇도 소유하지 않고 항상 명상을 하며 길바닥 생활을 하는 그들은 여행자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것을 달라하고 말을 걸어 자신이 엄청난 깨달음의 소유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보니 그는 단순한 소똥 철학자나 궤변론자가 아니었다. 시종일관 내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그 일로부터 배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통이란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인도여행에서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기차나 버스가 제 시간에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숙소가 더러워도 당연하고, 음식이 제멋대로여도 당연한, 모든 것이 다 당연하니 받아들여야 되는 상황인지라, 불평해봤자 소용없다면 혼자 애면글면 자기자신을 닦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저 받이들이면 다 편해지고 내려놓으면 여유가 생기는 것을. 하루벌어 하루살아도 행복한 사람들 속에서 여행자가 가지고 있던 욕심은 저절로 버리게 되는 곳이 인도인가 보다.


<<여행자가 가장 힘들 때는 길이 없을 때가 아니라 길이 너무 많을 때다.

"신이 창조한 날은 단지 오늘뿐이란 말이오. 어제와 내일을 만드는 건 바로 우리 자신들이오. 안 그렇소?">>


인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개똥철학자 같고 궤변론자 같지만, 사실은 스승임을 깨닫는 순간 저자에게처럼 인도는 세상이 된다.


<<가난과 인간 고통의 대명사 콜카타. 그곳은 지구의 불랙홀이라 불린다. 전체 인구 천백만 명 중에서 5백만 명이 빈민가에 살고 있고, 또 다른 2백5십만 명은 길거리에서 잠을 잔다. 이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보다 훨씬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시인이라 여기고, 시와 글을  싣는 잡지가 3천종이나 발단되는 기상천외한 도시 콜카타!>>


세계에서 영화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곳이 인도라고 하더니, 잡지도 엄청나게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 인도인가 보다.

처음 만난 여행자에게 예술인 같다고 하며 말을 걸고, 어떤 예술을 하냐고 물어 시인이라고 답하니 자기도 시인이라며 얼싸안고 반가워하다가, 가난해서 시집을 못냈다고 시집을 낼 수 있게 돈을 달라고 하는 거리의 시인들 저자의 친구들 저자의 스승들 은 인도에 차고 넘친다.


<<처음 인도 여행을 꿈꿀 당시 나는 인도라는 나라를 영적인 나라, 깨달음의 나라라고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첫 여행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언뜻 보기에 인도는 더럽고 혼란스럽고 믿을 수 없고, 때로는 전혀 대책이 서지 않는 나라였다. '노 프라블럼'의 나라가 아니라, 단지 '노 프라블럼' 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는 문제투성이의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나 또다시 여행을 하면서 그 지저분한 먼지 밑에서 반짝이는 보석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무질서 속에서 이 거대한 삶을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질서를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삶의 숱한 문제들 속에 진정한 '노 프라블럼'이 깃들어 있음을 알았다. 반복되는 탈수증과 설사병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인도는 내게 무엇보다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했다. 세상을, 사람들을, 태양과 열기에 들뜬 날씨를, 신발에 쌓이는 먼지와 거리에 널린 신성한 소똥들을, 때로는 견디기 힘든 더위와, 숙소를 구하지 못해 적막한 기차역에서 잠들어야 하는 어두운 밤까지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은 나 같은 여행자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신에게만 의지해 살아가는 방랑 수도승들은 차츰 나의 스승이 되었다.

인도 여행만을 고집함으로써 나는 다른 많은 것들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생에선 내가 걸어갈 필요가 없는 길들이었다. 그리고 굳이 걸어갈 필요가 없는 길들까지 다 가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또 어떤 길들은 다음 생을 위해 남겨 둬야 할 길들이었다.>>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IT계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핵폭탄도 보유한 나라이다.

인도는 인구의 절반이상이 빈민층이고 수만의 신을 모시는 다신교국가이며 언어만도 수십가지 이상의 방언이 존재하는 곳이다.

집이 있고, 직업이 있고, 첨단을 달리고, 최신학문을 배우며, 권력을 잡은 소수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걸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그러면서도 신의 뜻이라 받아들여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쉽게 보이는 곳이 인도다.


인도에 매년 여행을 간다는 저자가 경험한 곳은 쉽게 보이는 늘 보이는 자주 보이는 인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하고 더러워도 신의 뜻을 구하고 명상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나게 하는 인도를 저자는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는 법적으로 폐지된 카스트제도가 관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곳이고,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어린 신부를 사고팔고, 여자의 선택은 존중되지 않으며, 관습을 어긴 여자는 마을에서 공개처헝하고, 카스트제도 아래의 천민은 맨손으로 똥을 긁어내는 일 같은 것만 해야하는, 직업에 귀천이 분명하고 사람에 귀천이 분명한 곳이다. 그것도 다 신의 뜻인 곳이다.

저자는 인도에서 명상하고 깨달음을 얻는 여행자로서 인도와 인도인을 사랑한다.

그가 느끼는 인도가 주는 영감들은 시적이고 영적이고 행복하고 충만하다.

시인으로서 여행자로서 느끼는 인도에 대한 저자의 글들은 편안하고 시적이고 소소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이렇게만 읽으면 좋을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전에 다른 책들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한 여성의 악습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여행자로서 읽을 수가 없었다.

저자가 거리의 스승들 외에, 제도에 구속당하고 악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어떤 글을 쓸 지 궁금해진다.

이러튼 저러튼 인도라는 나라는 한번도 안간 사람은 있어도 한번밖에 안간 사람은 없는 그런 나라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이 뒤바꾼 자폐의 삶
존 엘더 로비슨 지음, 이현정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학 스릴러처럼 다음 장면을 갈구하게 만드는 놀랍고도 용감한 감동적인 이야기

자폐의 삶을 뒤바꾼 최신 뇌 치료법 회고록​ 

어느 날 마음 스위치가 켜졌다!>>


자폐의 삶을 뇌과학이 뒤바꾸어 놓았다는 문구에 호기심이 생겨서 읽게된 책이었다.

자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대부분 심한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자폐인이 책을 썼고, 강연을 하러 다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다는 것이 가능한건가 싶어서 저자의 책이 궁금했다.

일단, 저자가 말하는 자폐와 내가 생각하는 자폐가 달랐다.

저자는 자폐의 한 분류인 아스퍼거증후군을 진단받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할 정도의 장애는 아니었다.

저자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중퇴했지만, 뛰어난 음향 전문가로 성공했고 취미로 포토그래퍼일도 하면서, 자동차 수리 전문소를 세워 사업을 크게 일으킨 사람이었다. 가정도 있고 아들도 있고 친구도 있었다. 마흔이 되서야 자신이 아스퍼거증후군이라는 것을 진단받고 자신의 삶을 반추한 내용들을 통해 자신과 같은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활발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활동들은 '자폐' 라는 단어를 떠올렸을때 가능한 활동들이 아니었다.


​저자는 책에서 계속 '자폐'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외국과 국내 인식이 달라서인지 모르겠으나 국내 독자가 읽을 땐 용어를 구분해서 생각하며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폐의 70% 이상이 지적장애를 동반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폐도 있다고 한다. 자폐와 아스퍼거 증후군은 같은 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병명을 가진 장애라고 한다.

지적장애를 동반하지 않은 자폐와 아스퍼거증후군 과도 다를 것이다.

저자는 자폐라고 계속 표현하지만, 자폐 라기 보다는 아스퍼거 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자폐 라는 장애에 대한 이미지는 영화를 통해 좀더 쉽계 이해되는 것 같다.

예전에 "말아톤'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

이 영화속에 나오는 초원이는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아였다. 자라지 않는 아이어른. 그때까지만 해도 자폐아에 대한 인식은 이랬다. 자라지 않는 아이.

최근 '증인'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거기 나오는 여고생 자폐아는 지적장애가 없는 자폐아 였다. 감정표현이 안되고 엄마의 얼굴사진을 통해 다양한 감정표현을 외우는 소녀. 소리에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상행동을 하지만, 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고 퍼즐풀기를 좋아하고 변호사를 꿈꾸는 여고생. 자폐아에 대한 인식은 영화에서처럼 변화가 있는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폐 도 아스퍼거 도 잘 모른다. 나또한 그렇다.


​이 두영화의 사이에 '아스퍼거' 라는 단어를 대중에 퍼트린 살인사건이 있었다. 두 여고생이 놀이터에서 초등학생을 꾀어 살해한 후 감옥에 갇히자 자신을 아스퍼거라고 주장하려 했던... 아스퍼거 라는 단어는 학계에서도 발견된지 얼마 안됐고, 국내엔 2005년에야 들어온 단어라고 한다. 아스퍼거는 지적능력엔 문제가 없으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으로 싸이코패스와는 또다른 심리장애라는 것에서 논란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도 정확한 진단이나 장애인 등록에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을 것으로 안다.


저자는 아스퍼거증후군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보면 로봇이 말하는 것 같다고 하는 것에 상처를 받지만 상처를 받은 것이 티가 나지 않고, 상대방의 기분도 읽을 수 없는, 공감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강연장에 뇌과학자가 찾아오고 TMS 라는 뇌파자극 실험에 대한 제안을 받는다. 그 실험에 참여하면서 느낀 자신의 변화를 기록한 책이 이 책이다. 자서전처럼 체험수기처럼 읽히는 논픽션이랄까.


아직 연구중이라서 치료법 개발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저자는 그 실험이후 자신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공감하고 눈치챌수 있었던 순간의 경험은 저자가 늘 상상해오던 꿈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공감능력에는 우울증을 비롯한 슬픔, 고통 같은 안좋은 감정들도 처음으로 느끼게 됐고 그래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꼈던 시간의 경험이 저자는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연구가 치료법으로 어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계속 표현하고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고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무뚝뚝한 사람들은 의외로 참 많다. 장애라고 굳이 생각지 않고 그저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마련이다. 자폐라는 단어도 낯설고 아스퍼거라는 단어도 생소하지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일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AI와 비교하여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찾으려하는 이 시대에 공감능력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격과 장애의 구분은 여전히 좀 어려운 것 같다. 저자처럼 본인 스스로가 공감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심하게 느끼면 장애라고 해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고, 저자가 자폐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고 보지만, 공감능력이 없던 사람이 공감능력을 경험한 것에 대한 체험기 정도로 읽으면 새로운 관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장애인들이 가정에 숨어살지 않고 사회에 나와서 함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하듯, 장애 에 대한 표현들이 점점 더 세상에 나오는 과정중에 이러한 책도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어려움을 극복한 이들의 경험은 늘 박수받아 마땅하다. 저자의 성공적인 경험은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자폐' 극복은 아니었다. '자폐' 치료도 아니었다. 자폐 와 아스퍼거의 의미도 잘 인식되어 있지 않은 국내에서 읽히기엔 단어의 혼용에 아쉬움이 남는다.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닌가 봅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늘 불행하기만 한 것도 행복한때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자폐든 아스퍼거든 여튼 감정적 장애도 장애일진데, 장애를 가진 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다른 이를 돕기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행복도 불행도 다 거기서거기 이고 제각각인 사람들의 삶도 다 거기서거기 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의미있게 열심히 사느냐 그것이 제일 중요하달까.

저자가 자신의 삶을 switched on 시켰듯, 우리는 우리 삶에서 어떤 스위치를 켜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펙트 데이즈
라파엘 몬테스 지음, 최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출판사에서 진행한 가제본 증정이벤트에 당첨되어 출간되기 전에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비오는 장마기간에 배송되어 책이 젖은체 도착해서 마음아팠지만, 읽고 나서 보니 젖은뒤 마른 얼룩이 왠지 어울려 보인다.

하얗고 깨끗한 표지에서 퍼펙트 데이즈 라는 제목이 깔끔하게 한눈에 들어왔었는데, 얼룩져 내려온 ​무늬아닌무늬가, 퍼펙트했던 표지를 변형시킨 그 무늬아닌무늬가 어울린다. 이 소설과.


가제본이다 보니 홍보문구도 저자에 대한 설명도 없다.

작가 후기를 읽어보니 젊은 신예 작가인것 같고, 전작도 스릴러 소설이었던 듯 하다.

온전히 소설 자체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 가제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이 작품은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스릴러다.

왜냐하면 사랑의 주체가 싸이코패스다. 싸이코패스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사실 싸이코패스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싸이코패스인 거다.

그런데 싸이코패스의 사랑이야기라니! 반전으로 시작해 반전에 반전을 하다가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소설이었다.


<<그는 대화와 음악, 모든 것이 완벽한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테우는 자신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테우의 가장 친한 친구는 시체다.

그런데 그 사실을 테우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조차도.

그러던 어느날, 파티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클라리시!

그녀의 사소한 행동이 테우의 모든 감각을  사로 잡았다.

테우는 완벽한 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테우는 알고 있다.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 완벽을 추구하게 되고, 퍼펙트한 날들을 쌓아가기로 결심한다. 퍼펙트 데이즈를.


<<테우는 그녀를 공주 모시듯 할 마음이 없었다. 여자들은 가사 노동을 할 때가 가장 여자다우니까.>>


테우는 왜곡된 생각 투성이이지만, 클라리시를 공주모시듯 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성이 제어하는 한 그녀를 왕비 모시듯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몹시 뿌듯해 한다. 그래서 더욱 인정받기를 원하게 된다. 하지만 클라리시는 납치된 상태다.


<<어릴 적부터 그는 늘 위화감을 느끼며 살았다. 실없이 웃기나 하고 지적 야망이나 고상한 사고가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게 무척 불편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한껏 들뜨고, 생일에 옛 친구들을 초대하고, 8개월 아기가 마침내 아빠!라고 부를 줄 알게 됐다는 걸 이웃에게 자랑하는 사람들, 그런 삶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에 테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연속극에서 그려지는 정상 상태의 개념에 혐오감을 느꼈다. '정상 상태' 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실은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자기 확신에 찬 채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클라리시가 나타난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의 벽을 허물고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그를 붙잡아준 것이었다. 테우는 여전히 인류를 낮춰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등한 그들에게 초탈한 연민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사랑' 덕분이었다.>>


테우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완벽한 자신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클라리시를 만난 순간 그의 안에 잠들어있던 본성이 밖으로 표출되게 된다. '사랑' 은 그를 변화시켰다. 정상적으로 보이던 사람에서 싸이코패스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척 연기하고 싶은 욕구, 그에게는 재밌는 놀이였다.>>


테우는 스물두 살의 의대생이다. 그는 진심으로 사람에게 사람과의 관계속에 자신을 몰입시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척 하는 연기의 달인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클라리시에게는 그런척 하는 연기따위 집어던져 버리게 됐다. 그녀가 쓰고 있던 시나리오 '퍼펙트 데이즈' 라는 시나리오 까지도 자신의 의도데로 만들어가며 클라리시의 모든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든다. 그녀의 정신상태까지도.


<<그는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 뿐이지만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법규와 규칙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테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테우는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뿐인 그를 이해하지 못할 세상을 걱정한다.

완벽한 날들 속에는 완벽한 범죄가 숨겨져 있었고, 완벽한 범죄는 완벽한 사랑 때문이었다.

싸이코패스 테우가 클라리스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납치해서 여행가방안에 넣은체 여행을 하고, 그녀와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그냥 그렇게 돌아오고 나서 끝났다면 이미 읽어봤음직한 싸이코패스 스릴러 소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테우가 강력한 뒷통수를 맞으며 끝을 맺는다. 싸이코패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결말.

그 마무리가 싸이코패스의 새로운 등장일지, 범죄를 저지른 싸이코패스에 대한 복수가 될지 뒷얘기를 독자 스스로 상상하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나라 브라질을 배경으로, 싸이코패스의 독특한 사랑이야기는 소재도 내용도 결말도 색달랐다.

싸이코패스 가 지냈을 법한 완벽한 날들, 퍼펙트 데이즈 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생 블루스
마이클 푸어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망쳤으면 어때, 또 다음 생이 있는걸!

9,995번 환생한 남자의 '완벽한 인생을 사는 법'

"1만 번의 기회가 있다면 더 완벽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영혼을 지닌 남자와 그의 죽음을 따라다니는 여자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환생 모험>>

기묘한 소설이었다.

제목만 봤을때는 환생하고 또 환생하는 다양한 삶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번 생이 끝나도 다음 생이 이어지는데 그 생은 전혀 다른 생으로, 생에서 생이 순차적으로 서술되지 않을까 싶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블르톤을 좋아한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환생' 이란 단어에 눈에 들어왔는데, 다 읽고 나니 '블루스' 라는 단어가 눈에 남는다. 블루스가 뭐지? 검색해봤다.

블루스는 미국흑인노예들의 노동요에서 발생된 음악의 한 종류였고, 따라서 음울한 분위기와 반복적 리듬이 특징적인,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음악장르였다.

작가가 표현한 환생의 삶들과 블루스는 딱 맞아떨어진다.


남자 주인공 마일로는 알고 있다.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늙은 영혼이라는 것을.

<<죽음은 하나의 문이었다. 우린 그저 그것을 통과하고, 또 통과해갈 뿐이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마일로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책속에는 '보아' 라는 개념이 나온다. 고대의 영혼, 전생의 자아, 우주, 대령, 오버소울 등과 혼용해 쓰이는 표현이다. 뒤로 갈수록 오버소울이 주로 사용된다. 우주적인 영혼이랄까.. 균형의 감각 이랄까... 우주 자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이 '보아' 라는 개념에 저항하는 존재가 딱 둘 있는데, 마일로 와 수지 이다.


<<당연히 최고의 죽음은 즉사였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마일로는 오직 단 한 번 즉사했다.

누가 뭐라든 간에 인간은 흙에서 태어난 게 아니다. 인간은 물에서 태어났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강처럼 죽으면 다시 물로 돌아간다. 마일로는 이미 1만번 가까이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물가에서 깨어났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죽음은 기존의 상식들과 좀 다르다.

수천번을 죽었는데 즉사 가 한번뿐이었고, 즉사가 최고의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은 늘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소설속에서 삶과 죽음은 늘 강과 함께 한다. 강에는 늘 새로운 생의 모습들이 들어 있다. 묘한 윤회관이다.

여하튼, 마일로는 항상 죽고 항상 환생하는데 그때마다 항상 함께 하는 여인이 수지 이고, 수지의 본래 이름은 '죽음' 이다.


<<사람들은 죽고 나면 조용히 사색하는 시간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전생에 얼마나 의미 있는, 혹은 의미 없는 삶을 살았는지 숙고해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후 세계에서 배당해주는 집에는 살아생전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전생과 사후세계가 연결되는, 작가가 묘사하는 사후세계는 서양적이지 않다. 사실 윤회라는 것도 동양적인 개념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부처도 등장한다.


사후세계에 도착하면 항상 두 여성이 마일로를 찾아온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린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거의 모든 것이란다" "우릴 우주의 조각쯤 된다고 생각하렴" >>그리고 두 여성은 마일로에게 다음 생은 좀 더 완벽하게 살아보라고 재촉한다.<< "우리는 네가 불의 조각이 되는 걸 돕기 위해 여기 있는 거야" "우리는 네가 환상을 통과해서 실제 우주로 들어갈 수 있게끔 도우려고 이곳에 온 거야"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모든 인생이 네게 뭔가를 가르쳐줄 거야. 그 가르침을 통해 너는 배우고 성장해서 결국은 완벽해져야만 해. 그러기 위해 너는 수천 번의 삶을 살아야 할테고"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야" "네가 다음번에는 어떤 삶을 시도할지 결정할 수 있게끔 돕는 거">>


<<​"한 영혼은 1만 번의 인생을 살 수 있어. 1만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거지. 그 이후에는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

"그러니까 네 경우에는... 상황을 바로잡을 오직 다섯 번의 삶이 남아 있다는 거지. 그 기회 동안 네가 완벽함을 성취한다면, 넌 황금빛 섬광 속에 있는 태양의 문을 지나쳐가서 위대한 실재의 일부가 되는 거야"

"오버소울 말이야" "모든 것이 되는 거지">>


마일로가 환생했다가 죽어서 사후세계로 돌아올 때마다 이 거대한 두 여성은 마일로에게 좀 더 잘 살았어야지 하고 질책한다. 그리고 마일로와 수지의 사이를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영혼은 우주-영혼과 사귀고 그러지 않아. 얘는 인간이야. 그리고 넌 죽음이라고, 세상에 맙소사.">>

그렇다. 수지의 원래 이름이 죽음이라는 것은 수지가 하는 일이 인간의 죽음을 가져오는 일, 그러니까 사신이나 저승사자 같은 뭐 그런 존재라는 거다. 그런데 마일로와 수지는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것도 무려 8천년 동안.


마일로가 환생해서 변변찮게 죽어 사후세계로 돌아올때마 마일로는 늘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지 혼돈에 빠진다.

<<"대체 누가 완벽한 삶이 이상적이라고 한거야? 내가 나의 불완전한 삶을 좋아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 내말은 그들이 '불완전'이라고 말할 때, 그건 인간의 욕망에 관한 얘기잖아, 안그래?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갈망하고, 근사한 직업이나 차를 갖기를 소망하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거.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 예를 들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거나, 가난이나 위험한 환경 속에 살아간다거나, 당뇨를 앓게 된다거나, 또는 너구리가 우리 집 쓰레기통을 다 뒤져놓는다든가, 그런 걸 불완전하다고 하는 거잖아. 하지만 그게 바로 '살아 있음' 이라고.">>

 

9995번을 환생했던 우주에서 가장 현명한 인간의 영혼이 하는 말은 9995번의 환생을 통해 결국 무엇을 배우게 될지 암시한다.

9995번 보다 더 많은 죽음을 사후세계로 이끌었을 수지는 완벽함을 성취한 영혼의 죽음을 보여주며 마일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건 단지 희생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마일로. 만약에 늑대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기 다리를 물어뜯어서 잘라버린다면, 그것도 희생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건 절박함이기도 해. 그게 완벽함은 아니잖아. 완벽함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

"내게도 사랑이 있어" 마일로가 항변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졌잖아"

"'사랑'과 사랑에 빠지는 게 항상 같은 건 아니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인간적인 거라고. 일종의 화학작용이야. '사랑'은 우주적이지. 나도 역시 당신을 사랑해">>


수지의 조언을 듣고도 마일로는 완벽한 삶을 살지 못했고, 거대한 두여성에게 또 잔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말한다.

<<"네가 완벽한 삶을 사는 순간, 우리도 네게 완벽한 순간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물론 그건 놀랍고, 기가 막히고, 불가능할 테지만, 그래도 거의 모든 사람이 9천 번의 생애 내에 그걸 이루어낸다고, 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수지는 우주의 보아 에게 '죽음' 의 일에 대해 사표를 낸다. 그리고 사라진다.

마일로는 강가로 내려간다. 환생의 삶이 있는 강가로 간다.

<<그는 그것을 일종의 자살로 간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당신이 8천년 동안 한 여자를 사랑했는데, 우주의 보아가 갑자기 당신과 그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갈라놓는다면,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 아니겠는가.

우주의 보아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한쪽 끝에서 원인이 제거되면, 수동적인 균형 유지 과정이 진행되고, 반대편 끝에서 그 결과가 나타난다. >>


마일로가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에서의 삶?(사후세계에서 사는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을 포기하기 위해 지구에서의 이승에서의 삶을 선택하는 역설은 무엇이 정말 삶인지 헤깔리게 한다.


<<그녀는 매일 조금씩 더 투명해졌다. 젠장, 수지는 생각했다. 예상보다 더 빨리, 그녀는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결국에는 우주도 그녀가 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즉, 약간의 불균형은 그리 나쁜 게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마일로가 1만번 가까이 환생했다가 다시 죽어도 여전히 완벽함 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왜 완벽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약간의 불균형은 괜찮을 거라는 수지처럼. 그래서 마일로의 환생블루스는 수지를 위한 사랑의 노래가 된다.

마일로는 기원전으로 환생하기도 하고 현대에 살기도 하고 몇백년후 우주세계에 환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일로가 환생해서 살아가는 삶은 대체로 그닥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마일로는 환생해서도 늘 전생의 영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전생을 기억하기도 한다. 결국 새로운 생이 아닌 이어지는 생은 과연 환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지가 사라지고 사후세계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마일로가 깨닫게 된 것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처의 제자로 환생한다.


<<"난 전적으로 완벽해지는 걸 바라지는 않아요. 그렇게 되면 삶의 주기를 떠나게 되는 거니까요. 나는 오랫동안 완벽함에 저항해왔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에요. 이제 완벽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걸 느낄 수 있어요. 난 우주의 일부가 되지 않으려고 저항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엇보다 더 간절히 그것을 원해요">>


마일로가 부처의 제자가 되었을 때 부처의 나이는 80세 였고, 너무 늙었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죽어가면서 부처는 말한다.

<<"행복을 찾아 지구 끝까지 헤매 다니지 마세요. 완벽함이란 여러분의 지금 현재 모습에 행복해하는 겁니다.">>


마일로는 실은... 부처를 독살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럴만한 상황이라고 믿었다.

그 독을 나눠먹은 마일로가 죽고 나서 깨어난 사후세계에서, 이번에 마일로가 깨어난 곳은 강 옆이 아니었다. 그는 깊은 우물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일종의 감방 같은 곳이었다. 마일로는 화가났다.

<<빌어먹을, 그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삶이 한 번 더 남아 있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 그는 지상에서 살았던 가장 위대한 영혼이야. 넌 그를 죽인 나쁜놈일 뿐이라고."

마일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녀 쪽으로 홱 돌아섰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어!" 그가 소리 질렀다. "나는 스승님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하지만 거대한 그녀들은 마일로에게 모두 망쳐놨다고 으르렁거린다.


<<투명해져가는 수지를 만난 마일로는 마지막 한 번 남은 환생에 대해 생각하고, 결심한다.

"당신도 나와 함께 가는 거애" 그가 말했다.

"아니" 수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가 인간의 삶을... 내가 인간이 된다는 거야?"

"한 번의 삶이야. 제대로 살든 못 살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쨋든 우린 함께하게 될 테니까, 모두 갖든가, 아니면... 다 잃든가, 모 아니면 도 라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앞의 잿빛 물속에는 수천의 가능한 생명이 있었다.

그녀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난 그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 수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신과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신처럼 되는 거겠지." 마일로가 말했다.

"당신은 그게 싫다는 말처럼 들리네"

"난 태어나는 게 싫어. 지긋지긋해"

"다 갖느냐, 다 잃느냐!" 그녀가 말하고는 돌아서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일로도 그녀 바로 뒤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1만번째 환생에서 그들은 만나고 사랑한다. 그 시대는 형편없이 열악한 시대였고, 폭력아래 노에처럼 사는 우주인의 삶이었다. 마일로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조너선 야야'의 우화는 1만번째 마일로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조너선 야야는 관 속에 누워서, 자신이 너무도 형편없는 삶에 안주해 살았던 것에 슬픔을 느꼈어요. 하지 않았던 모든 일 때문에 두려워하며 살았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겁만 집어먹고 살았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이냐고요. 다른 식으로 살았더라도, 어차피 그는 지금 똑같이 자기 무덤에 누워 있을 테니까요.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돌아보고 자랑스러워할 멋진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였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지금 그는 화장실 쓰레기 처리장의 기억을 안고 무덤 속에 누워 있었던 거에요.>>


마일로의 이야기는 노예처럼 살고 있던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그 희생을 가치있게 만들어보자고요. 그래서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는 세상과 태양계를 만들어봐요. 그런 세상에서는, 누군가 폭력을 써서 다른 사람을 강제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그 폭력에 굴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누구도 타인을 억압하려 하지 않게 될 거에요."


폭력아래 굴종적인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마지막 환생에서의 삶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은유 같았다.

여하튼, 마일로와 수지는 함께 죽었다. 그리고 함께 태양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책은 거의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조금은 두꺼운 편에 속하는 소설이다.

마일로가 살아내는 다양한 삶들은 다채롭다. 그런데 다채롭게 폭력적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반복된다. 삶은 선택할 수 있는데 전생의 삶에 의해 조건적이기도 하다. 죽음은 또다른 삶?!을 사는 사후세계와 연결되는데 이또한 전생의 삶에 의해 조건적 환경을 부여받는다. 삶과 죽음의 반복인 윤회는 환생을 통해 나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1만번의 환생 동안 마일로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깨닫는데 그렇게 이 책은 깨달음의 책이 되기도 하고,

1만번의 환생 동안 그가 추구한 완벽함은 결국 사랑 이었는데, 그렇게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 되기도 하다.

환생이 만들어낸 블루스는 그렇게 지금 삶속에 그냥 자연스럽게 반복되고 있는 것을 알려주며 소설은 마무리 된다... 블루스를 많이 들어본적은 없지만, 진한 블루스 한곡 길~게 들은 것 같은 기분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된다...


ps. 소설 속 환생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묘사에서 플라톤이 생각났다. <국가> 의 9권에서 '에르신화' 나 <파이드로스> 라는 대화편에서 '혼' 에 대한 묘사등을 작가가 참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웃자고 한 말에 왜그래?" 당하는 사람은 안 웃긴 '갑'들의 말, 말, 말!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의 세상에서 평등을 외치는 당신을 위한 안내서

"나는 차별을 하지 않아" "우리 회사에는 차별이 없어" 정말 그럴까?>>

 

제목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됐다.​

차별 이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선량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묘하게 상쇄시키는.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가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차별을 했다고 인지하는 순간, 모르고 그랬어 라던가 선의로 그랬어 라든가 하는 말로 차별주의자가 아님을 강변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선.량.한.차.별.주.의.자. 가 된다.


차별은 대개 다수가 소수에게 저지르기 쉬운 행동이다.

다수이기 때문에 모르고 한 행동들이 소수입장에서는 차별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소수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러한 소수자들 즉, 여성,외국인,장애인,성소수자 들의 입장을 재고하게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수자 차별론도 결국은 차별은 옳지 않다는 기본 전제 위에 성립한다. 사람들은 적어도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에게 차별을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에 가담한다는 건 도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내가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만큼 오히려 차별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반전은 헉하면서도 왠지 부정할 수가 없다.


<<무언가 베플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호의의자 선의도 차별이 될 수 있다.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는 느낌은 왜일까... 차별의 진의는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지는 느낌이랄까...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요구하는 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하면서 나름의 삶을 헤쳐나가겠다는 의미다.

기존에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의 이익이 곧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가 보기엔 세상이 소수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이 평등해 보인다. 전자의 관점에서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들이 후자의 눈에는 역차별로 보이는 이유다.>>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손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은 생각보다 흔하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수이기에 연대하려고 하고 연대하면 그 자체가 역차별의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평등은 점점 어려워진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저자도 말한다. 차별하지 않기는 사실 불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ㅠㅠ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시야에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이다. 그 성찰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렇다. 평등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게 오는 것이 평등이다.

개그맨이 흑인분장을 하고 웃기는 것도 누군가에겐 차별이고,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인 다 됐네 하는 말도 차별이고, 퀴어문화제를 불편하게 보는 것도 차별이고, 한부모가족, 다문화가족이라는 단어 자체도 차별이다.

능력주의관점에서 노력과 능력으로 올라간 지위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하는 대부분의 말들도 차별이고,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이 커지는 만큼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겨난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았다.


저자가 예로든 화장실 문제는 그야말로 평등에 대한 차별에 대한 생각들을 멘붕에 빠트렸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화장실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화장실이 실제로 이용 가능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화장실이 충분히 가까워야 하고, 진입이 쉬워야 하며, 화장실 안에서 용변과 손세척이 가능하고, 이 과정이 수치감, 불안감이나 위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해야 한다. 이런 조건으로 모든 사람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는 몇가지의 화장실이 필요할까?

오늘날 익숙한 공중 화장실은 남성용과 여성용을 별도로 갖춘 모습이다. 그 다음으로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기에 많은 건물과 시설에서 장애인용 화장실을 남녀공용으로 한개만 설치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녀로 분리된 화장실도 사실상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 젠더 여성의 경우, 여자 화장실에서는 사람들이 남자라고 생각해 무서워하고 거분한다. 반면 남자 화장실에서는 여성스러운 외모때문에 본인이 성폭력의 두려움을 겪는다.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성별의 전형에서 벗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이 안전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그럼 이제 화장실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상충되어 보이는 논쟁들 속에서 모두에게 평등한 화장실을 만드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저자가 말하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선 실질적 평등의 길은, 다양서을 모두 포함하는 보편성을 찾는 길은 너무나 멀어만 보인다.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화장실 문제만 해도 '뭘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 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 되버린다.


<<소수자가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억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가시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실질적 평등을 쟁취하려는 의도이다. 집단의 차이를 강조할 수록 차별이 고착될 것 같기도 한 '차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서로 다른 위체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 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 으로 옮기는 것이다.

법이 우리의 모든 일상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래서 교육, 고용, 서비스와 재화의 이용과 같은 공식적인 부문에서 일어나는 차별이 주로 규제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일상의 미세한 차별적 시선이나 행동은 규제보다는 체계적인 교육으로 바꾸고, 사회 전반을 검토하고 구조적인 차별을 개선할 수 있도록 제도적 골격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그중 하나로 우리가 서로 차별을 '하지' 않게 만들자는 즉각적인 해법이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인간 조직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차별에 대한 논의는 불편하다. 그런데 불편하다는 말조차 할수가 없다.

평등에 대한 논의는 어렵다. 그런데 평등하지 않으면 세상은 살기 힘들어진다.

제대로 잘 살기 위해 차별 과 평등 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성찰하고, 사회적으로는 교육으로 성찰하고, 제도적으로는 법으로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성찰들이 쉬지않고 반복되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차별이 이상하게 여겨지며 차별법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질 것이다.


이 책이 힘들게 읽혀지는 나는 아마도 차별주의자 였나 보다. 좋게 말해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고 해야 하나... 정말 몰랐다. 내 안에 그렇게 많은 차별주의자적 생각이 들어있었는지...

선량해도 차별주의자는 차별주의자다.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차별을 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선량하다고 표현해도 차별주의자가 되기는 싫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