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샘과 함께하는 시간을 걷는 인문학
조지욱 지음 / 사계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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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펼쳐진 길들이 역사적 장소로 재탄생한다.

사회를 잇고, 문화를 엮고, 경제를 지탱해 온

세상의 모든 길을 걷는 인문학 여행! (표지 中)

 

 

참 좋은 책이었다. 뜬금없이 시작부터 결론적으로 그랬다. ㅎㅎ

현직 고등학교 지리선생님인 저자 소개를 보니 그동안 지리를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책들을 여럿 펴내신 분이었다.

이 책또한 어른이 읽어도 재미있고 청소년이 읽어도 쉽고 재밌게 읽힐 것이라 생각되는 책이었다.

비교적 얇은 두께에 부담도 없고 사이사이 적절한 컬러자료 인용도 보기에 편하고 무엇보다 예쁘다. 내 기준에는 예쁜 책이다. 그래서 좋다. ㅋ

'시간을 걷는 인문학' 이라고 제목지어졌지만, 이 책은 '시간' 이나 '인문학' 이 아닌 '걷는' 에 방점이 찍힌 책이다.

간략히 표현하자만 '길 이야기' 이다.

세상엔 많은 길이 있고 그 길은 연결되어져 있기도 하고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샛길이 있기도 하다.

길을 따라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수도 있지만 이길저길 둘러보며 정처없이 유랑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이길도 갔다가 저길도 갔다가 천천히 걷다가 문득 뒤돌아 보면 이런 길을 내가 걸어왔구나 하는 소소한 감상을 주는 책이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길 이야기라서

멀고멀어 가볼수 없을것 같은 세계어느곳의 길이 아니라서

이런길에 한번쯤 가봐야 겠다 싶은 곳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길' 에 대해 다양한 잡학다식도 많이 알려준다.

서울지하철이 모든 역과 구간에서 휴대전화와 무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유일한 지하철이라는 것,

경북 문경의 토끼비리 라는 절벽길이 있었기에 왕건이 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

인천 대교는 정부가 보유한 자산 중 가장 비싼 자산이라는 것,

지하철이 다니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지하 터널은 서울 방화동과 상일동 사이에 놓은 지하철 5호선 터널이라는 것

청계천이 바닥에 방수처리를 하고, 전기로 물을 끌어올려 흐르게 하는 인공하천이라는 것(전력난에 허덕이는 국가에서 전기먹는 하마라고나 할까;;;),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가장 많이 로드킬 당하는 고라니가 중국과 한국에서만 사는 귀한 동물이라는 것,

무엇보다 '조선의 길' 이야기는 당시 서양인들이나 일본인들에게 조선이 미개하다는 왜곡된 인식을 주게된 배경을 설명해 주어서 좋았다. 그들이 어찌 생각했던 우리라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이라는 구한말 선교사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그도 '조선의 길' 에 대해서는 혀를 찼다. 하지만 조선이 최소한의 도로망을 가졌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자라고 미개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에 우리 땅을 여행한 러시아 사람 루벤초프는 조선의 길을 보고 질려 버렸다. 사람은 많이 사는데 길이 원시적이라고 느낀 것이다. 그는 '아마도 조선은 도로를 만들 줄 모르는 모양' 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자나 정치가들 중에서도 루벤초프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 백성 대부분은 수레를 이용하기보다는 걸어 다녔고, 화물을 운반할 때도 동물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이 직접 끄는 손수레나 지게를 많이 사용했다. ... (p. 37)

우리 민족은 고조선부터만 따져도 무려 931회에 달하는 침략을 당했다. 이는 약 3년에 한 번꼴로 전쟁을 했다는 소리다. 이런 경험 탓에 우리 민족에게는 '넓은 도로는 적에게 유리하여 영토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러다 16세기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도로 건설에 소극적이다 못해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곧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고 강하게 믿게 되었다. (p. 39)

우리 조상이 도로 건설을 소홀히 한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수준의 육상 교통망(도로망)은 있었다. 우리 땅의 육상 교통망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신라 때 오늘날 우편 제도와 같은 '우역제도' 가 시작되었고, 7세기 이전에 전국적인 교통,통신 체계가 수립되었다. (p. 40)

일본은 우리 땅에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죄다 빼앗아 그 손실을 채우려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길이었다. 조선은 도로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식량이든 지하자원이든 마음껏 가져갈 수가 없었다. 이에 일본은 1906년에 차도국을 신설하고, 1907년부터 주요 간선 도로를 보수하거나 새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빼앗을 물건이 있는 곳에서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로 이어졌다. (p. 47)

 

'길'은 경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길을 통해 문물이 오가고 교류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경제적인 이유로 새로운 '길' 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경제를 핑계로 쓸모없는 길을 만든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반도 대운하계획 - 아라뱃길' 이다.

경인 아라뱃길 홈페이지에는 '1000년의 약속이 흐르는 뱃길', '800년 간 이어진 우리 민족의 염원'이라고 홍보되어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800년이 지난 지금, 조운 제도가 사라진 오늘날, 파나마 운하처럼 엄청난 거리를 줄이는 것도 아니고, 그 옆으로 번듯한 고속도로가 있는데, 왜 반드시 운하가 있어야 하는 것인지. (p. 62)

2012년 국정감사에서 개통 후 5개월 간 운항한 화물선은 모두 10척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2조5천억 원이 들어간 경인 아라뱃길이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개통 이후 2019년 5월까지 7년간 화물처리 실적은 사업 계획 당시 예측치 4717만 통의 8.4%인 478만 톤에 불과했다. 더구나 경인 아라뱃길로 생긴 교량과 도로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이 매년 130억원씩 들어가고 있다. 또한 투자비 회수를 위해 아라뱃길 주변 지역을 개발해 레저,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인데 이는 추가 환경 훼손과 예산 낭비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여름철에는 녹조가 심해져 경인 아라뱃길의 수질은 5급수 '나쁨'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떄문에 수질 관리에 연평균 3억 6천만원 이상의 비용이 투입되고 있다. (p. 63)

한반도 대운하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의 발전이 라인강 운하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선 도로 교통과 철로 교통이 크게 발전하고, 운하 이용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도 정작 독일에서는 잘 알지도 못한다고 한다. (p. 169)

당시 이명박 정부는 운하 대신 '4대 강을 살린다' 는 구호를 앞세워 강을 파내고 보를 설치하는 등 22조원을 들여 엄청난 공사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니 진실이 가려졌다. 4대강은 홍수와 가뭄 조절 이전에 생명체도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해 갔다. (p. 171)

 

건설회사 출신 대통령으로 가장 큰 업적이 건설회사 배를 불려준 것 밖에 없는, 전두환 시대에서 '평화의 댐' 사기극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열성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현대판 사기극을 처벌할 수도 없는 현실... 그 예산을 복지에만 돌렸어도 등록금과 의료혜택과 연금에만 돌렸어도... 말해 무엇하리 입만 아플뿐...

바닷길은 진실을 알고 있다

동한 난류는 중부 지방에서 방향을 바꿔 울릉도와 독도로 가서 일본으로 흐른다. 또 가끔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서 시계 방향으로 감아 흐르기도 한다. 2000년 전 바람이나 해류에만 의지해 배를 띄워도 포항에서 동한 난류를 따라 울릉도나 독도에는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시계 방향 소용돌이를 이용해 왕복도 가능했다. 하지만 오키 군도에서 독도로 가려면 해류를 거슬러야하기 때문에 그 당시 배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독도는 우리 땅 맞다. (p. 67)

 

수천년을 흘러온 바다가 알고 있는 길, 해류의 흐름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왔던 한반도 백성이 알았던 바닷길, 길이 연결된 곳은 문화와 역사가 연결된 곳이다. 바닷길은 알고 있다. 독도가 한반도에 속해 있음을. 독도에 오려면 자연을 거슬러야 했던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결국 자연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길 뿐만 아니라 세계의 길 이야기도 있다.

그 유명한 로마의 길이나 페르시아의 왕도 는 이제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바닷길 이야기는 여전히 아픈 길이야기이다.

콜럼버스의 영광스러운 발견은 무역풍과 편서풍이 열어 준 바닷길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개척한 바닷길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인디언'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다 붙였고, 카리브해의 여러 섬을 '서인도 제도'라 부르게 만들었다. 이것 뿐인가? 원주민들은 유럽인의 노예가 되어 사탕수수밭, 담배밭, 목화밭 등에서 죽도록 일해야 했고, 원주민의 70퍼센트 이상이 유럽인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죽거나 유럽인이 옮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일로 이어졌다. (p. 95)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공적으로 놓여진 길의 역사는 사실 침략의 역사이기도 하다. 길은 새로운 곳을 개척한다는 미명하에 미지의 땅을 수탈했다. 길이 유용해진 것은 사실 최근에서의 일이다. (사실 그 유용성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고대부터 근대까지 새로 놓여진 길을 가장 처음 밟는 사람들은 군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은 한국을 계속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나라로서 대륙으로 통하는 입구는 한반도 뿐이므로...

우리에게 익숙한 '산맥' 이라는 말이 일본 지리학자 고토가 20세기 초에 우리 산줄기에 붙인 이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학교다닐때 지리책에서 주구장창 외웠던 산맥들 이름이 일제잔재였다니...;;; 우리 조상은 산줄기를 대간, 정간, 정맥으로 불렀고, 그 중 으뜸이 백두대간 이라고 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1400킬로미터의 산줄기다. 우리 조상은 우리 땅의 산줄기를 1개 대간, 1개 정간, 13개 정맥으로 구분했다. 동,서 바다로 흘러드는 강을 나누는 큰 산줄기를 대간, 정간이라 하고, 거기서 갈라져 하나하나의 강을 나누는 산줄기를 정맥이라고 했다. 각 정맥의 이름은 대부분 강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백두대간은 우리 국토를 하나로 잇는 척추이자 우리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정신줄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백두대간 곳곳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우리 민족의 일체감과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p. 111)

역사문제로 들어가면 일본이 가장 큰 문제지만 중국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것을 통해서 대동강과 철령 이북의 땅은 과거 중국의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북한이 차지하고 있어서 큰소리 없이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중국이 철령 이북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날이 올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주장일 뿐 이미 한반도에서는 고대부터 철령 이북의 땅에도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왔다.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영산으로 신성시하며 벼농사를 짓고 온돌을 이용하는 같은 문화권을 형성했다. (p. 120)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옛날 고구려 땅인 간도나 연해주 지역만을 이야기하는 것인 줄 알았다. 철령이라는 지명을 처음 알게 됐는데 철령은 강원도 제일 위쪽 현재의 북한땅에 위치한 지역으로 백두대간의 중간지역이었다. 철령이북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주장은 곧 현재 북한 지역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한반도를 반으로 쪼개는 것이다. 일제치하가 끝나고 분단시대가 되지 않았다면 북한땅을 놓고 중국과 싸우게 됐을 지도 모른다.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한땅과 고구려땅의 역사문제로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될 것이 예상되는데 현재 중국만한 강국이 없으므로 생각하면 참 암담하다... 다행이라면 역사문제는 다툼이 될 지언정 땅을 뺏고 뺏기는 식의 전쟁은 앞으로는 좀 어려울 것이라는 점?!;;;

'노가다'란 말이 있다. 공사장에서 막일하는 것을 이른다. 이 노가다란 말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인 경인선 건설 당시 무거운 침묵이나 레일을 나를 때 일꾼들끼리 호흡을 맞추기 위해 쓰던 구령이었다. 작업반장이 일본말로 "노(좋다, 으뜸)" 라고 구령을 붙이면, 나머지 일꾼들이 "가다(덩치, 모양)" 라고 후렴을 붙이며 무거운 것을 날랐다. 경인선은 우리 조상이 다소 우스꽝스러운 '노가다' 란 구령과 함께 땀 흘려 완성한 결실이었다. (p. 134)

'노가다' 라는 말이 어감상 일본말인줄은 알았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군산 지역에 "쌀 미" 자가 들어간 동 이름이 많은데 그것도 일제치하 때 군산항에서 쌀을 수탈해가던 사연을 갖고 있었다. 여전히 일본 침략 피해는 우리에게 진행중이다....

오늘의 새 길이 어제의 길을 옛길로 만드는 일, 빠른 길이 느린 길을 죽이는 일이 전국 곳곳에서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일들은 과연 삶과 죽음처럼 당연한 것일까? 본래 속도란 빠름과 느림, 둘 다 가리키는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빠름만 뜻하는 말이 되었다. (p. 145)

과연 인간다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고개를 든다. 인간은 동물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물도 얻고 사냥감도 얻었다. 그런데 동물들은 인간들이 만든 길에서 그들의 이동로를 잃고, 서식지를 잃고, 심지어 목숨마저 잃고 있다. 30분을 빨리 가기 위해, 경제 발전을 위해,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만든 인간의 길이 동물들의 공동묘지가 된 셈이다. (p. 166)

1987년, 제주 용머리 해안에 450미터의 산책로가 생겨났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한쪽은 절벽, 한쪽은 바다다. 산책로는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는 길이라 물때를 맞춰 가야 걸어 볼 수 있으며, 바람이 많이 불거나 파도가 거친 날은 입장이 제한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산책로가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 잠기는 시간이 길어져 하루 평균 4~6시간에 이른다. 산책로가 사라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지구 온난화가 그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해수면 상승으로 잠기는 곳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길이었다. (p. 181~184)

 

200페이지도 안되는 비교적 짧은 책에서 생각보다 많은 생각들을 건져내다 보니 읽은 시간보다 읽고나서 정리하는 시간이 더 길었던 책이었다. 가볍게 빠르게 재밌게 읽었는데, 무겁게 느리게 여운이 남는 책이었달까...

지리는 역사와 닿아있고 역사는 인문학과 연결된다. '길' 을 안다는 것은 그 길 위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동물들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인간들도 사냥감과 물을 얻으며 그 길을 더욱 단단히 밟았다. 단단해진 길은 도로가 되고 이제 사람이 아닌 자동차 기차가 다니고 언젠가는 땅위의 길보다 다른 길이 더 많이 이용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길' 은 시간을 품고 이야기를 품고 생명을 품고 있다. '길'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언제까지 빠르고 편리한 것만 쫒으며 살건지 걱정된다면 가끔은 '길' 과 '시간' 과 '이야기' 에 고개돌려봐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물음표를 떠안은 책이긴 했지만,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이다. 이렇게 쉽게 읽히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쯤 되돌아볼 시간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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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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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제로캐럿'의 이야기와 일곱편의 팬픽

본편과 팬픽이 교차되는 지금 가장 독특한 소설

 

무대 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 있는 당신에게 (표지 中)

나는 팬픽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처음 경험하는 독특함이었다.

여자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의 이야기를 본편으로 쓰면서 제로캐럿의 열성 팬인 '파인캐럿'이 쓴 팬픽이 중간중간 끼워져 있다.

'제로캐럿'의 아이돌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로캐럿의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한 가상의 소설 '팬픽' 은 소설속의 소설인 것이다.

 

 

 

 

 

 

 

이야기는 제로캐럿의 콘서트로 시작된다.

첫 콘서트이자 마지막 콘서트가 될 콘서트를 앞두고 멤버들 개개인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아이돌 그룹의 속사정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적응이 되어가는 사이사이 팬픽을 읽다보면 멤버들 자체의 성격과 팬픽속의 성격이 섞여들어서 나름 집중하며 읽어야 한다.

 

 

 

 

제로캐럿의 멤버는 처음엔 5명 이었다.

다인(김다인), 루비나(이수빈), 지유(이지은), 재키(홍재영), 준(송준희)

그러다 계약기간이 먼저 끝난 두 멤버가 탈퇴하면서 한 명의 멤버가 영입된다. 마린(최마린)

연습생 생활을 오래한 지유와 재키는 단짝이다. 외국에서 온 재키를 지유는 옆에서 보살펴 주었다. 탈퇴후 지유는 연기자가 되고 재키는 외국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루비나는 늦깍이 아이돌이다. 이십대 중반에 데뷔하여 첫 콘서트를 29살에 하게 되었다. 다인은 춤을 잘 춘다. 중학생때 별 생각없이 친구가 찍어올린 춤동영상이 대박이 나면서 아이돌로 캐스팅 되었다. 준은 노력파다. 다인의 실력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고 아이돌 데뷔를 함께 하게 된 후 다방면에서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으나 사실은 늘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멤버구성의 변화를 가져온 마린은 아역배우였다. 아역배우 생활을 오래하면서 익혀진 엔터테인먼트 능력은 별다른 노력없이 바로 아이돌캐스팅으로 이어졌다.

멤버마다 데뷔한 배경이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이미지와 아이돌 이후의 삶도 다르다. 아이돌 그룹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지금 국내에 넘쳐나는 아이돌 그룹들의 속사정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돌 그룹의 열성팬인 파인캐럿의 마음을 읽고 작가후기를 읽고 나면 '응답하라 1997' 도 생각나고, 몇몇 아이돌 그룹을 소설속 멤버들과 매칭시켜 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작가가 표현하는 'SM 처돌이' 까지는 아니었지만, 젝키보다는 HOT가 좋았고, 핑클보다는 SES가 좋았다. 작가가 열렬히 사랑했던 아이돌그룹 f(x) 도 좋아했다.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서 1988 보다도 1994 보다도 1997 이 가장 좋았던 것은 HOT 빠순이가 주인공인 드라마 내용에 가장 몰입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돌 1세대 그룹은 뭐니뭐니해도 HOT 다. 1997의 주인공도 팬픽을 썼다. 하이틴로맨스소설 시대에서 바야흐로 팬픽으로 넘어가는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

아이돌 그룹은 대부분 동성그룹이기 때문에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주인공을 쓴 팬픽은 멤버들간의 사랑 즉 동성간의 사랑을 다룬다. 팬픽에서의 동성애 코드는 일반 소설속 동성애코드와는 또다르다. 연령대가 낮은 만큼 학창시절의 설레임 가득한 로맨스와 친구같기도하고 연인같기도 한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혼란은 동성이기때문에 오는 혼란이라기 보다는 사랑과 아직 사랑이 아닌 감정 사이의 혼란이다. 그래서 사랑소설로도 성장소설로도 읽게 되는 이야기가 된다.

 

 

 

학창시절 사소한 순간이 주는 설레이는 추억하나쯤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한창 뜨거운 나이에 좋아하는 연애인에 대한 사랑 가득한 팬심을 경험해본 사람은 또 얼마나 많던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HR인듯 팬픽인듯 드라마인듯 읽게 되는 이 소설이 주는 풋풋함은 의외로 어린나이가 경험한 인생의 희노애락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인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그래서 인생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인데 노래가 들리고 노래가 들리는데 추억이 되버린 기분을 주는 이 소설은 라스트 러브가 라스트가 아님을 처음에도 알겠고 끝에도 알겠는, 마지막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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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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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때, 명작은 탁월하게 아름다워진다 (표지 中)

 

 

원제는 Look Again : How to Experience the Old Masters

직역하면 다시 봐 : 옛 주인을 경험하는 방법이지만 '다시 보기 : 명작을 경험하는 방법'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을 듯 하다.

원제의 제목은 '존 버거 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를 떠올리게 하고 저자도 이 책을 언급하며 읽어나가면서도 종종 생각난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는 1972년에 초판 발행된 오래된 미술평론 책이지만 여전히 읽히고 있는 책이라 나도 읽어본 적이 있다. 읽으면서 역시 오래된 책이라 출판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켰겠으나 지금은 그닥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작게 그것도 흑백으로 인용되어 있어서 그림을 알아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었었다.

이 책은 2019년판 '명작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한페이지 가득 그림전체를 칼라로 수록해 주어서 좋았다. 그리고 잘 알려져서 이책저책에 매번 인용되는 그림보다 새로운 그림이 더 많이 제공되어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했다.

존 버거의 책처럼 순수미술에서 광고까지 미술 전반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특정시점의 회화들을 위주로 분석하는 방식도 새로웠다.

저자는 명작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방법으로 10가지 툴을 제시한다.

TABULA RASA

Time - 시간 : 오래, 자주, 계속의 힘

Association - 관계 : 말을 걸고 마음을 나누고

Background - 배경 : 아름다움의 출처를 묻는 일

Understand - 이해하기 : 얼마나 마음을 열 수 있는가

Look Again - 다시 보기 : 작품도 내 마음도 매번 다를 때

Assessment - 평가 : 정답이 없다는 말은 정답이다

Rhythm - 리듬 : 간격과 박자와 배치의 유쾌함

Allegory - 비유 : 그럴듯한 생각과 있음직한 사실들

Structure - 구도 : 그림 속 풍경, 액자 밖 프레임

Atmosphere - 분위기 : 느낌은 아우라가 된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10단계의 툴을 설명하면서도 본문 챕터를 10가지로 구분짓지는 않는다.

프롤로그에서 TABULA LASA 에 대해 하나하나 그림과 함께 설명하면서도 매번 한가지 툴로 그림을 해석하기 보다는 한 그림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툴을 함께 생각할 수 있음을 본문에서 풀어내고 있다.

예술작품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사전 지식의 페해에서 벗어나 고전 미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체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건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예술작품 체험은 단순한 시각 훈련 혹은 역사적인 사실을 얼마나 기억해내는지 지적인 능력을 시험하는 게 아니다. 예술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기분을 바꾸며, 관습에 도전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p. 10)

본문의 글 배치도 한 페이지에 빼곡히 텍스트를 채운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글을 배치함으로써 읽으면서 계속 감각적인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은 여러모로 고전예술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는 책이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며 혼자만의 깊은 감상에 빠진 듯한 무아지경을 경험하게 해주는 책이기를 바라며 '혼자 보는 미술관' 이라고 이름지은 것일까?

본문챕터는 영어 원제와 한글 소제목이 함께 읽혀져서 좋았다. 영어 원서를 읽을 능력은 없으나 제목의 원제만이라도 알고 읽으면 본문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된다. 제목은 의외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1. 사유는 붓을 타고 : 철학이라는 캔버스 Art as Philosophy

2. 보이는 그대로, 마음이 느낀 그대로 : 진짜 같은 장면의 속내 Art as Honesty

3. 그림은 무대고, 조명이고, 주인공이다 : 화폭 속의 명연기 Art as Drama

4. 탁월함에는 논쟁이 없다 : 아름다움의 기준 Art as Beauty

5. 가장 그리기 어렵고 가장 느끼기 쉬운 : 공포와 두려움 Art as Horror

6.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하모니 : 모순의 암시 Art as Paradox

7. 빗대에 비웃는 그림들 : 진지하게 건네는 농담, 풍자 Art as Folly

8. 액자 너머의 그림을 읽다 : 그리는 이의 마음을 보는 법 Art as Vision

예술에서 철학과 정직함과 드라마와 아름다움과 공포와 모순과 어리석음과 전망을 본다는 것은 사실 배우지 않고는 어렵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방법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예술을 예술로서 멀고 어렵게 느끼기 보다는 이런방식 저런방식 다 해볼법하다는 좀더 편안하면서도 의미있는 방식들을.

조금은 어색하게 보이는 괴테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적어도 보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는 문장을 생각하고

<멜랑콜리아> 라는 판화를 보며 "상상력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유념하면서도 고된 일상을 버텨내는 예술의 힘" 을 생각하고

정물화의 가치를 낮게 보던 시기에 그려진 정물화를 보며 "라틴어로 덧없음을 의미하는 바니타스에서 이름을 따와 '바니타스 정물화'로 알려진 회화'가 알려주는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하고

이집트 미라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며 "2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의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안긴다. 이런 식으로 보는 이의 공감을 얻는 게 아마 화가로서 최고의 목표일 것이다" 는 화가의 표현 능력에 대해 생각하고

1915년에 그려진 한국의 병풍그림에 반가워하며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 보는 사람이 둘러볼 수 있는 무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다" 는 저자의 분석을 생각하며

책을 읽고 그림을 보다 보면 어느새 표지에 그려진 그림의 전체 컷을 볼 수 있는 페이지가 나온다.

표지에 인용된 <피에로> 라는 그림에 대해 저자는

"유령처럼 하얀 의상을 입고 똑바로 서 있는 어릿광대는 어쩐지 외롭고 불안해 보인다. 자신의 역할을 해내기가 버거워 보이기도 하고, 우리 앞에 서 있으려니 창피한 것 같기도 하다. ... 어쨌든 힘 없고 불편해 보이는 이 피에로는 가장 쾌할해 보이는 광대라도 웃음 뒤엔 슬픔과 몸부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라고 말하면서

"이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작가들은 겉으로 보이는 세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진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 흰 종이, 빈 캔버스에서 시작한다. 어떤 방식으로 볼지는 점점 더 어려운 문제가 되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게 그 자체로 새로운 예술이 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라고 책을 마무리 한다.

고전예술이라고 어렵게 볼 것 없이 광대를 보듯 가볍게 보면서도 숨은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고

복잡하고 난해해진 현대미술에 비하면 정직하게 시대와 화가를 반영하고 있는 고전미술에 대한 관람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듯 하다.

예술에 대한 감흥은 사실 굉장히 개인적인 것이다. 같은 그림을 봐도 같은 느낌을 갖는 사람은 아마 있을 수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혼자가도 함께가도 직접봐도 책으로봐도 결국 '혼자 보는 미술관' 이 된다.

그렇게 미술관을 가깝게 느끼게 하는데 이 책은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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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사회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0
심너울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잘 들어 주는 AI를 만들 거야. 마지막으로 노인과 이야기하면서 다시금 느꼈어"

2050년대, 한국 사회의 심연을 꿰뚫어 Social SF [소멸사회] (표지 中)

 

 

새로운 SF 시리즈 라는 그래비비티북스의 SF 시리즈를 몇 권 읽었었는데, 너무 맘에 들었었다.

그래서 같은 시리즈물의 최신간인 [소멸사회] 에 대한 기대도 자연스레 컸었다.

이 책은 그리 먼 미래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2043년에 중학생이었던 친구 세명이 2055년에 성인이 되어 만나 벌어지는 일이 큰 줄거리인데,

2043년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4년후 이고 2055년도 50년도 안되는 미래이기에 SF에서 상상할 수 있는 공상과학적인 구상은 사실 어불성설인 시점이다. 시점이 이러하니 만큼 이 작품은 SF 라기 보다는 거의 현재시점의 소설로 읽힌다. 더구나 소재가 'N포세대' 로 불리는 요즘의 청년세대의 고민을 담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심민수와 하수영과 노랑은 중학교 동창이다.

심민수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중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수리기사가 되었고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관련한 능력이 있다.

하수영은 평범한 중산층에서 별일 없이 자라 언론고시에 첫번째 응시에서 합격해 기자가 되었고 글쓰기에 흥미가 있다.

노랑은 배경은 비밀에 쌓여있지만 명품 옷에 비싼차가 있고 시대에 맞지 않을정도로 과한 순수함이 있고 심리학을 전공한다.

이 세친구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핸드폰은 이미 구식이고 첨단 전자기기를 휴대하며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사귀는게 이상한 온라인 시대다.

하지만 심민수는 구식핸드폰을 여전히 가지고 다니며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고 아무도 읽지 않는 종이책을 읽는 친구이고

노랑은 의무적이 아닌 자발적인 의사로 노인요양시설에 일주일에 세번이상 봉사를 다니는 눈치라고는 1도 없는 솔직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친구이고

하수영은 이 둘의 친구지만, 셋이 어울려 지지는 않았다.

이 세친구가 어른이 된 시절은 기본소득지급이 정착된 시점이고 만65세이상 노인에게는 조력자살약이 합법적으로 제공되는 시대이다.

학력도 낮고 정식취업도 어려운 경력을 가진 심민수는 기본소득과 낮은 임금으로 한강에 띄워진 임대주택개념의 좁은 배위에서 생활하면서 언제든 삶을 끝낼 수 있는 약을 모으고

원하던 언론사에 들어간 하수영은 거대 소셜미디어에서 재밌는 동영상을 찾아 인공지능에게 단어 몇개 입력하면 기사가 쏟아지는 엔터테인먼트회사화 된 언론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노랑은... 십년 넘게 봉사를 다니며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 노인들의 마지막 말을 들어주는 봉사를 하면서 느낀 것을 사업화하기로 결심한다. 말을 들어주는 AI는 이미 기존에도 있었지만 좀더 위안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서로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던 사이였던 민수를 만난다.

민수는 서울 사람들 사이에 서서 자신도 또 하나의 색다른 별이 되어 빛나고 싶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지옥 같은 대중교통을 견디면서 출퇴근하고, 적당한 회사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올 입에 풀칠을 하고, 개미굴보다 살짝 나은 오피스텔에 지친 몸을 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서울에서만 할 수 있는 괜찮은 문화활동을 즐기는 삶, 민수는 그것을 얻는데 실패했다.

그는 노랑을 생각했다. 노랑에게 악의가 없다는사실을 그는 너무 잘 알았다. 몇 년 만에 처음 본 백수에게 같이 일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은 선의 없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선의에 차 있다고 해도 노랑의 몰이해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수영을 항상 부러워했다. 서울 중산층 출신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수영, 주요 종합지 공채를 단번에 통과할 정도로 유능하고 성실한 수영, 성격도 괜찮아 인간관계도 좋은 수영, 그렇게 따지면 정확히 알 수는 없 지만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부유한 노랑을 부뤄워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욕망할 수 없다. (p. 96)

 

민수의 독백은 지금 시대의 청년들의 고민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세 친구의 생각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라인은 공상과학적 배경이 그닥 필요치 않아서 SF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다만 기본소득과 노인대상조력자살서비스 라는 두 가지 새로운 복지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그러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미래사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재시점의 소설이 아닐 뿐이었다.

언젠가 현실화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두 제도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상황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사실 그리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수용소에 집어넣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배제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21세기의 방법이 있다. 사람들은 말할 자유가 있고 행동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무한히 펼쳐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체념한다. 딱히 정부의 검열이 없어도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말의 한계를 알아서 내재화한다. (p. 183)

이 작품에서 시도한 두가지 제도은 결국 체념한 사람들에 대한 제도 였다.

기본소득으로 죽지않고 살고는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체념을 겪는 사람들과

급변하는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려고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체념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도는 점점 체념하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걸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친구는 그 체념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기자는 글로써 기사는 프로그램으로써 금수저는 양심으로써 사회에 퍼진 체념을 걷어내는 시도를 하기로 한다.

세 청년의 고민은 지금 시대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멀지 않은 시점의 가상현실은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더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이 소설은 SF 소설이다. 미래소설이다.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이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고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

이 기회는 살아온 날이 많은 사람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에게 당연히 더 많이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SF 소설이다. 지금 많은 것을 체념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담은 소설이다. 하지만 앞으로 포기하지 않을 청년세대를 향한 미래소설이다.

소멸시키려고 하는 사회에서 소멸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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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사를 꿈꾼 영웅 길가메시 - 인류 최초의 신화, 신이 되려 한 인간의 서사시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켄트 H. 딕슨 지음, 방진이 옮김 / 다른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인류 최초의 신화, 신이 되려 한 인간의 서사시

인간의 운명에 맞서 영원한 삶을 찾아 떠난 영웅 길가메시의 위대한 모험

 

신화 하면 대부분 그리스로마신화를 많이 떠올릴 것 같다.

유럽 문화의 대부분은 고대그리스로마문화에 그 바탕을 두고 발전했다.

하지만 최초의 신화는 따로 있다.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 가 그것이다.

역사책을 읽다가 관심이 생겨서 찾아 읽었던 수메르문명에 대한 책과 길가메시 서사시는 내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주었었다.

고대그리스로마 신화도 성경의 신화도 그 신화들이 기록되기 몇천년 전에 이미 수메르 신화들에 기록되어 있었다. 수메르 문명이 남긴 점토판에는 놀라운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모든 신화가 수메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신화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아 그또한 놀라웠다.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의외로 취사선택된 내용들인 경우가 많다. 수메르 점토판의 내용들은 길가메시 서사시의 신화적 내용들은 고대그리스로마문화의 위대함에도 성경의 신성함에도 상충된다. 유럽중심의 문명과 문화에 반갑지 않은 내용들이다...

저자는 영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은퇴한 노학자로 길가메시서사시를 번역하기 위해 설형문자도 공부했다고 한다. 물론, 기존에 수메르 토판들의 번역본은 많이 있어서 기존의 영어 번역본과 프랑스어 번역본 30종도 참고하여 새로운 영어 번역본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 나름대로 원전에 충실한 새로운 번역본을 기존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으로 펴내고자 시도한 만화그림은 저자의 아들이 그렸다. 그림에 참고할 자료가 별로 없다보니 역사적으로 정확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얼마 못가 포기했다고 그린이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번역한 원전의 내용을 최대한 잘 표현하고자 노력한 듯 하다. 만화적 대사표현과 특징을 잘 잡아낸 그림들은 위트있으면서도 진지해서 읽는 내내 놀랐다. 솔직히 만화라고 해서 가볍게 다룬 책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원전내용을 충실하게 옮기고 있어서.

대부분의 길가메시 서사시 토판 번역본들은 토판 XI까지만 옮기고 있는데, 이 책은 토판XII 까지 번역해 놓았다. 그래서 길가메시 서사시를 처음 읽는 것이 아님에도 마지막장의 토판 번역내용은 처음 읽는 것이라 새롭고 좋았다. 저자도 토판 XII 는 후대에 덧붙여진 허구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학자들이 길가메시 서사시로 인정하지 않는 토판이라는 것까지 알려준다. 그렇게 허구적 결말로 마무리 하면서 어차피 온전히 남지 않은 토판의 없어진 부분에 대해 허구를 붙이면 또 어떻겠냐고 되묻는다. 그러고 보니 허구적 결말을 붙이는 것이 정말 뭐 어떤가? 신화는 어차피 지금 우리가 읽기에는 다 허구이자 상상력의 산물인 것을.

 

길가메시 서사시는 친구 엔키두와 함께 하는 여행이 주요 내용이다. 여성과 남성, 이성간의 사랑보다 남성과 남성, 동성간의 사랑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고대그리스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수메르의 문화가 고대그리스문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신성한 여신이자 처녀의 몸에서 나온 아들인 길가메시에게는 인간의 왕인 루갈반다 아버지가 있다. 이러한 탄생설화 익숙하지 않은가?

 

화가 난 여신이 벌을 내리고 벌을 받은 인간이 동물로 변하고 변한 동물의 몸이 인간이었던 자신이 아끼던 사냥개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악타이온'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악타이온은 아르테미스 여신을 화나게 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이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변신시키고 그렇게 사슴이 된 악타이온은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겨 죽임을 당한다.

 

엔키두가 야생에서 동물처럼 살때 그를 인간처럼 살도록 지혜를 준 것은 샴하트 라는 여성이었다. 길가메시가 여행중에 머무른 여관에서는 여주인이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고대문명은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지혜의 궁극엔 여성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그리스의 신화에서 지혜의 신은 아테네 여신이었고, 고대그리스 철학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지혜와 영감을 준 이는 디오티마 라는 무녀였다.

 

고대신화나 문명에서 열이틀 과 일곱째 날이라는 숫자의 날은 항상 특별했다. 수메르에서부터 이미.

 

엔키두를 잃고 죽음의 공포와 삶의 허무를 알게된 길가메시는 영생의 힌트를 얻기 위해 길을 떠나고 도중에 갖은 고난을 당한다. 사자와 싸워서 이기고 사자 가죽을 옷처럼 입고 다니는 길가메시의 모습은 고대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아마도 홍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신이 인간을 벌하려 홍수를 내리고, 홍수가 나기 직전 신을 따르는 인간커플에게 넌즈시 그 사실을 알려주고 배를 만들도록 하고 배에 동물들을 싣게 하고 홍수가 나고 잠잠해진 후 새를 날려보내 육지를 찾고 그 육지에 인간과 동물들이 다시 정착하게 되는 과정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거의 똑같다. 성경이 쓰이기 전에 기독교가 생기기 전에 이미 수메르 신화에 홍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뱀의 행동은 사악하고 인간은 신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성경에서의 의미와 무척 흡사하다.

 

나중에 덧붙여져서 길가메시 서사시의 원본적 내용이라고 볼수 없다고 알려진 토판 XII 의 내용에서 엔키두의 저승여행은 고대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영웅들의 저승여행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엔키두가 보고 와서 이야기 해주는 저승의 모습은 권선징악의 종교적 의미를 너무도 분명히 드러내고 있어서 이승과 저승의 연결 그리고 이승에서의 삶의 태도에 대해 신을 섬기게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성경의 핵심과 무척 닮아 있어 보인다.

노트크기의 큼직한 책에 빽빽이 들어찬 그림과 글은 가볍게 전달하면서도 길가메시 서사시의 원본 내용도 굉장히 잘 전달하고 있었다. 고전중에 시기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이렇게 만화로 보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와 종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기원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 본다면 무척 좋을 것 같다. 문명은 우리가 밝혀내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알 수 없는 그 시절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과는 또다른 꿈을 꾸게 만들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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