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미래를 과학하라! 10월의 하늘 시리즈 6
정재승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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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과학자가 내일의 과학자를 만나다

'10월의 하늘' 10주년, 10개의 특별한 과학강연

 

'10월의 하늘' 은 전국 중소도시 도서관에서 열리는 과학강연회 라고 한다.

매년 10월 마지막주 토요일, 과학자가 전국 도서관을 직접 찾아가는 강연은 대중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정재승 박사가 지방 도서관에서 했던 강연에서 과학자를 처음 만나본다며 아이돌 못지 않은 환대를 받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과 함께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강연 기부를 해주실 과학자가 있는지 트위터에 글을 올린지 얼마 안되어 의외로 많은 이들의 기부 신청이 들어왔고 그렇게 2010년 시작된 '10월의 하늘' 은 올해로 10년째 과학의 하늘을 열었었고 그 강연들이 이 책으로 나왔다.

어쩌면 '10월의 하늘' 이 오랫동안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른 행사들처럼 법인화된 조직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SNS뿐 아니라 언론을 활용하고 광고를 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기업의 후원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주변의 수많은 조언을 뒤로하고, 올해도 첫해처럼 돈과 조직없이 소박하게 시작했습니다.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폭발적인 열정을 만들어낸다는 작은 믿음 하나로, 느슨한 조직이 갖는 유연함과 자유로움이 우리 모임에 참여하는 많은 분을 즐겁게 하는 가장 큰 가치임을 깨달으며 말입니다. 한국도서관협회가 도서관을 모집해주고, 열정적인 재능기부자들이 모여 강연자와 도서관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전국 100여개 도서관에서 과학강연회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모두를 감동하게 하는 한순간이 필요합니다. 뭔가를 10년째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슴 설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함께 해주고 선한 사람들이 도와줍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현상'이 세상 속에 만들어집니다. ... '10월의 하늘'에서 강연을 들었던 청소년 중에서 한 명이라도 과학자 혹은 공학자가 되어 세상을 좀 더 근사한 곳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해준다면, 우리는 항상 '10월의 하늘'을 준비할 것입니다. (p. 11,12)

선배 라는 말은 이럴때 쓰는 단어가 아닐까? 먼저 걸어본 사람이 뒤에 걸어올 사람을 위해 자신의 길을 이야기해 주는 것, 미래의 과학자에게 현재의 과학자가 선배로서 이야기해 주는 것, 인생선배이자 과학자의 선배로서 이보다 더 좋은 마음이 어디 있을까.

과학자로서 눈에 확 띄지 않더라도 소소하게 작은 장소에서 꾸준히 강연기부를 해주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1년에 한번 과학자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경험한 청소년 중에는 분명 미래의 과학자가 여럿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미래의 과학자가 또 더 미래의 과학자에게 강연기부를 해주고 그렇게 선순환이 이루어지다보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현상' 이 이루어진 세상이 만들어져 있지 않을까?

1> 인공지능 시대, 미래의 기회는 어디에 있을까? - 정재승

우리는 '자극-반응 체계'로 작동하지 않고, '질문-대답 체계'로 살아갑니다. ... 우리의 뇌는 스스로 답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찾으면 기쁘도록 디자인돼 있다는 뜻입니다. 호기심의 보상은 해답이 주는 즐거움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됩니다. (p. 21)

"20년 후에 가장 유망한 직업이 뭔가요?" 제게 많은 학부모님께서 물어보시는 질문인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도 없습니다. 20년 전 우리가 인공지능 전문가나 데이터 과학자를 생각하지 못했듯이, 20년 후 어떤 직업이 유망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서 미래 유망한 직업에 전략적으로 접근했다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 인공지능 시대, 미래의 기회는 어디에 있냐고요? 바로 무엇이든 즐겁게 학습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데 두려움이 없는 바로 그 태도에 있습니다. (p. 26)

 

로봇이건 AI이건 인공지능이건 뭐라고 부르던 간에 여하튼 기계는 자극을 주면 반응을 한다. 입력해야 출력이 나온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필요하건 필요하지 않건 주변에 세상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뭐지?왜지?어떻게?하고 끊임없이 탐색하고 관심을 갖는다. 로봇과 사람의 구분은 창의성이라며 창의성붐이 일었었다. 그 창의성은 다 어디로 갔나? 인공지능이 작곡을 하고 소설을 쓰니까 창의성이 사라졌나? 하지만 창의성은 결과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작과 과정에서 사람은 존재 자체로 이미 로봇과 다르다. 내가 지나온 과거의 20년으로 앞으로 살아갈 자녀들에게 미래의 20년을 재단해 주어서도 안되고 재단해 줄수도 없다. 미래는 후대의 시간이다.

입력해준 데이터를 부정하는 사고를 요구하는 건 아직 인공지능에겐 무리입니다. ... 기존에 나온 작품들을 섭렵한 후에,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예술적 창의성의 핵심입니다.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 의심하고 회의하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인공지능의 핵심이 데이터를 통해 인식을 확장하는 능력이라면, 인간 지성의 본질은 데이터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치전복적 아이디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자신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새롭게 구성하고 이해하는 일, 개인적 경험 안에 인식의 틀을 갇지 않고, 데이터에만 매달리지 않는 비판적 사고가 인간 지성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p. 35,36)

미래는 다양하게 호기심을 갖고 비판적 시각으로 맥락을 이해하는 생각하는 힘이 더 중요해 질 것이다. 나만의 것, 자신만의 것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학습은 교과목만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정재승 박사도 강조하고 있지만, 폭넓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한 깊이 있는 사고, 즉 인문학과 사회과학적인 사고과정을 익히는 것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ㅎㅎ

2> 사람의 뇌와 뇌를 연결하는 법 - 장동선

앞서 첫번째 질문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인지하고 판단할 때 타인의 뇌를 나의 뇌 안에서 시뮬레이션하고 미러링한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질문에선 우리가 다른 살마의 의견에 쉽게 영향을 받게 된 것이 인류의 뇌가 타인과의 이해, 공감, 교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뇌로 진화해왔기 때문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뇌와 뇌를 연결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p. 50)

뇌와 뇌를 연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감과 이해를 통해 다른 사람의 뇌파와 싱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의 뇌가 혼자 행복하기 위한 뇌가 아닌, 함께 행복하기 위한 뇌로 진화했기 때문이지요. (p. 54)

 

뇌과학자가 이렇게 공감을 중요시하다니!!! 비인간적일 것 같고 딱딱할 것만 같은 과학강연이 너무나 인간적인 마음에서 시작되더니 너무나 인간적인 과학자들을 만나게 한다.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과학자들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모아서 소개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참 반갑다. 연구하고 연구해서 새롭게 밝혀지는 것들의 근원은 결국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일 때가 많다. 다만 증명되지 못했을 뿐...

3>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도구, 슈퍼컴퓨터 - 이 식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가장 세계에서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위험하거나 불가능한 연구도 가상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주 생성 같은 대규모부터 소립자 연구처럼 아주 작은 규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시뮬레이션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이제 시뮬레이션은 실험과 이론에 이은 제3의 연구방법으로 실험, 이론과학자들과 협력하며 인간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죠. (p. 78)

바이트, 키로, 메가, 기가 정도까지만 알던 내게 테라, 페타, 엑사 까지 넘어가는 슈퍼컴퓨터의 용량은 엄청난 숫자였다. 컴퓨터의 발달로 다양한 과학적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었고, 이 프로그램들은 가상의 실험을 가능하게 했다. 단번에 성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실패를 거쳐서 하나의 진리를 발견해내는 것이 과학자의 길 아니던가. 위험한 실험을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까지 가능해진 과학적 실험세상에 컴퓨터시뮬레이션이 있었다.

4> 스마트교통으로 만나는 미래 세상 - 한대희

장소를 이동하면서 유발된 혼잡이나 교통사고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이용자의 편리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스마트 교통' 입니다. 좁은 범위의 정의로는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교통시스템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좁은 범위의 정의를 스마트교통이라 부릅니다. 넓은 범위의 정의는 교통 비용을 낮추거나 편리성을 높이기 위한 법규, 물리적 시설물 등 모든 방법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p. 82)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고속철도를 운행한 나라, 2029년 까지 총 5단계로 건설할 계획인데 현재 3단계가 완성된 상태로 세계의 허브가 된 인천공항, 세계6위의 물동량이 오가는 무역항인 부산항에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연결됐을 때의 경제성, 승용차 패러독스 와 대비한 공유교통과 공해없는 전기자동차 등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미래기술은 아무래도 교통분야가 아닌가 싶다. 먼저 발달하는 이 미래기술에 대한 윤리적 지침이 여전히 합의가 되고 있지 않지만 스마트해진다는 것이 단순히 편리해진다는 것만은 아닐 것이기에 보다 빨리 가느라 대충 만들지 말고 차근차근 꼼꼼이 지침을 만들어가면서 교통수단이 스마트해지길 기대해본다.

5> 티라노가 털복숭이라고? - 이정모

지금까지 발견한 공룡이 몇 종이나 될까요? 답은 1000종 쯤 됩니다. 1000종의 공룡 가운데 사람의 무릎보다 작은 건 500종 쯤 됩니다. 공룡이 그렇게 작았다니 놀랍지 않나요? (p. 104)

새들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지구상에 새가 몇 종이나 살고 있을까요? 현재 10,400종이나 살고 있습니다. 새는 지구에 이렇게 많이 있어요. 이 사실을 다르게 생각하면 지구에 살아 있는 공룡이 아직도 10,400종이나 있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새가 공룡이라고 말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난리가 났습니다. 공룡과 관련된 지식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도 많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p. 107)

깃털을 가진 수많은 공룡 중에 비대칭형 깃털을 가진 공룡은 몇 종 안 됩니다. 대부분은 대칭인 깃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칭인 깃털만 가지고는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날지도 못했는데 이 공룡들은 깃털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 까요? (p. 112)

알을 낳는 동물들 가운데 알을 품고 새끼를 양육하는 동물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새 입니다 10,400종이나 되는 새랑 똑같은 모습을 공룡이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공룡학자들은 공룡도 새처럼 알을 낳고 먹이를 가져다주는 양육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p. 114)

공룡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지금 살고 있는 동물' 을 더 관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p. 119)

 

이 책을 읽으며 아직 실현되지도 않은 미래과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이미 한참전에 사라진 공룡에 대한 이야기 였다. 화석을 통한 공룡의 연구는 어느정도 마무리된 학문이라고 내심 생각했었나 보다. 지속으로 새로운 화석이 발견되고 따라서 공룡에 대한 학문도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시조새 말고는 공룡이 파충류가 아닌 조류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12년부터 공룡과학자들은 털이 있는 티라노사우르스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 티라노사우르스에게 깃털이 있다니!!! 공룡에 대한 연구를 지금의 동물을 관찰함으로써 더 많이 알게 된다는 시각도 신선하면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아.. 이 책은 정말 읽을 수록 착한 과학책이다. ㅎㅎ

6> 자연의 빛, 인간의 빛 - 고재현

내부 전반사는 우리 주변을 포함한 광기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내부 전반사는 빛이 어떤 경계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서 빛의 방향을 틀거나 빛을 어떤 물질 속에 가둘 때 사용됩니다. 광통신을 예로 들어볼까요? 디지털 정보를 빛의 펄스로 바꿔서 전달하는 광통신은 광섬유라는 소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나라는 촘촘히 연결된 광통신망으로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p. 132)

광섬유, 광통신 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말을 '빛' 에 연결시키지 못했었다. 가시광선, 적외선, 자외선 같은 정도의 빛 개념은 사실 일상에 크게 와닿지 않는다. 정보의 80%이상을 시각정 자료에서 얻으면서도 빛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냥 있는 것 으로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통신망이 '빛'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빛의 속도'라는 광고 문구가 괜한 말이 아니구나 싶으면서 핸드폰 없이 못사는 요즘 세대들에게 이보다 더 체감적인 과학을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순수과학은 현실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7> 인간의 바다, 고래의 바다 - 장수진

2013년에 이루어졌던 첫 방류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남방큰돌고래 방류 시도였습니다. 제돌이와 마찬가지로 제주에서 우연히 그물에 걸려 제주의 한 수족관에 팔려갔던 춘삼이와 삼팔이가 함께 방류 대상이 되었습니다. (p. 152)

그 이후로 방류되었던 돌고래 중 암컷인 삼팔이와 춘삼이가 무사히 새끼를 추란해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2016년에 확인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고래류의 방류는 꽤 여러 번 이루어졌지만, 무사히 원 개체군으로 돌아가고 새끼를 낳은 것이 확인된 것은 최초입니다. (p. 154)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다에 고래가 산다는 사실을 아직 많은 사람이 잘 모릅니다. 우리나라 바다에도 고래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고래 또한 고래류의 하위분류인 수염고래류와 이빨고래류 중 이빨고래에 속합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약 35종의 고래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제주의 남방큰돌고래와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유명한 고래는 밍크고래와 상괭이 입니다. 그러나 이 두 고래는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고 있습니다. (p. 161)

 

불법으로 포획된 돌고래 제돌이를 자연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제돌이 방류를 위한 행동연구팀으로 참여하게 된 장수진 박사는 바다와 고래에 흠뻑 빠졌다. 성공적인 방류로 자연에서 살아가는 돌고래들을 처음 확인한 순간 연구원들과 환호를 부르며 얼싸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고래가 참 많았다는데 그 많던 고래는 어디로 갔을까? 상괭이 라는 고래의 인상은 스마일 이모티콘 처럼 웃는 인상이 너무 귀여웠다. 제돌이는 여전히 힘차게 물위로 점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고래들이 언제까지 우리의 바다에 머물러 줄까? 불법포획과 돈벌이 대상으로만 여겨지기에는 고래가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8> 기후 위기, 돌이킬 수 없을까? - 조천호

초기 인류는 자연의 변동에 따른 채집과 사냥, 그리고 농업에 대한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은 그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환경이 자신들이 살았던 시절과 똑같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지구에 상처를 냈지만, 지구는 그 흔적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자연적인 흐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p. 168)

현재 우리가 누리는 기후와 우리가 의존하는 생태계는 홀로세에서만 가능합니다. 홀로세는 인류를 먹여 살리고 현대 사회를 유지해주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인류는 지난 1만년 동안 500세대에 걸쳐 이루었던 변화를 최근 50년 만에 완전히 바꿔 버립니다. (p. 170)

현재 지구는 팽창하는 풍선처럼 터져버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70억 명의 인구가 사용하는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식량을 위해 필요한 면적은 2018년 기준으로 지구 1.7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은행가라면 이자로 사는 게 아니라 원금을 까먹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곧 파산입니다. (p. 172)

"미래는 어떻게 될까?" 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미래는 어떻게 만들고 싶은가?" 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p. 187)

 

지구환경파괴문제는 정말 소귀에 경읽는듯 먹히지 않는 심각한 문제다.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문제는 체감되지 않을 뿐 지구에서 사는 모든 생명체의 목숨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줄을 스스로 갉아 먹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태연하게 살고 있는것이 아닐까? 그 줄은 절대 끊어지지 않을거라고 말하면서?

지구환경을 붕괴시키는 요소 가운데 45퍼센트가 서로 연관되어 있어 도미노 효과를 일으키거나 되먹임을 증폭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북극의 빙산이 녹게 되면 그 아래 어두운 바다가 드러나 햇빛을 흡수하여 지구 온난화가 증폭되고 지구 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면 더 많은 빙하를 녹이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북극권 기온이 상승할 경우 북반구에 있는 영구 동토층이 불안정해지면 영구 동토층에 매장되어 있는 엄청난 양의 메탄 가스가 배출될 위험성이 높아지고 이 메탄가스가 배출되기 시작하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실가스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지구온난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고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빙하가 더 녹고 기온이 더 상승하고 악순환 속에 땅덩어리들은 해수면에 잠기게 될 것이다. 지구온난화 문제는 산업과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 늦기 전에 기후협약이 잘 좀 됐으면 좋으련만...

9> 인류는 미래에 어떤 우주환경에서 살아갈까? - 황정아

놀랍게도 우주의 날씨도 지구의 날씨처럼 봄에는 출렁출렁 요동치고 뭔가 요상한 일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어요. ... 1년 중 봄과 가을, 즉 춘분과 추분 지점에서는 이렇게 태양풍 입자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현상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이에 따라서 지구의 자기장의 교란을 의미하는 지자기 폭풍현상도 봄에 더 심해지고, 지자기 폭풍과 동시에 발생하는 오로라 발생 빈도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 봄바람이 불면 총각, 처녀들의 마음만 싱숭생숭해지는 게 아닌가 봐요. 봄이 시작되면, 우주를 연구하는 우주과학자의 마음도 언제 무슨 이벤트가 터질까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합니다. (p. 192,193)

천문우주관측 기술이 가져온 놀라운 발견들과 우주정거장, 우주망원경을 비롯한 우주기기들의 모습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주쓰레기 배치도' 였다. 쓰레기는 지구 뿐만이 아니라 우주에서도 큰 문제였다. 지구를 온통 뒤덮고 있는 우주쓰레기 그림을 보며 우주산업이 계속 이런식으로 가도 안될 것 같은데 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지구에도 우주에도 쓰레기만 넘겨줘서는 안될텐데...

10> 태양계 너머로 떠나는 우주 탐사 이야기 - 이강환

인류가 달에 착륙한게 1969년 입니다. 올해는 달 착륙 50주년이 되는 굉장히 뜻깊은 해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50년 동안 사람들은 달을 넘어서 어디까지 가봤을까요? 안타깝지만 달 이외에 아무 데도 가지 못했습니다. ... 화성에 가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어서 아무 때나 가서 아무 때나 돌아오면 됩니다. 그런데 화성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지 않지요. 지구보다 더 먼 거리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화성에 가려면 우선 화성과 지구가 가장 근접했을 때 출발해야 합니다. 화성과 지구의 거리는 가장 가까이 위치하더라도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거리의 150배나 됩니다. ... 미래에는 일주일만 휴가를 내면 달에 갔다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화성까지 왕복하기 위해서는 36개월은 우주에 있어야 합니다. (p. 213)

적어도 얼마 동안은 사람은 태양계 너머로 직접 갈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웬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한 와계인에게도 우주여행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신 외계에서 오는 신호를 탐지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외계의 지적 생명체라면 어떤 신호를 우주로 보낼수도 있습니다. (p. 224)

여러분이 만약 과학자를 꿈꾸고 있다면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릴게요. 우리나라는 과학 수준이 높은 편이고 앞으로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 한국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과학자는 굉장히 유능하다는 걸 다른 나라 과학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p. 228)

 

우주산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빠르게 속도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워낙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많은 탄탄한 기초가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인도 일본에서의 우주산업현황을 설명하면서 이강환 박사는 우리나라의 우주산업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을 가져오지 않는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가 적은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이룬 성과와 함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희망도 놓지 않는다. 생각보다 우리나라의 과학의 미래는 밝아질 수도 있다. 안된다는 말보다는 그러한 희망을 심어줘야 그 희망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과학에 흥미있는 청소년들에게 최신 과학의 다양한 분야를 이 한권으로 소개해줄 수 있다. 과학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미래는 그러한 변화가 만들어 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주체는 지금의 청소년들이다. 청소년들이 과학에 꿈을 갖는데 이 책이 주는 희망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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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문화사 -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아리 투루넨.마르쿠스 파르타넨 지음, 이지윤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이제껏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매너'의 역사

놀라운 시각과 흥미로운 디테일로 무장한

똑똑하고 유쾌한 문화사를 선보인다! (표지 中)

 

 

역사서술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 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학문으로서의 연대기적 역사서술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주제를 잡아서 주제에 맞는 역사만을 선별취합하여 서술하는 방식도 있다. 아무래도 후자가 쉽고 가볍게 읽기에는 좋다.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근래 무거운 책을 좀 읽었더니 쉬어가는 페이지로 읽은 이 책은 후자의 방식이겠거니 예상했었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냉철한 시선과 예리한 분석이 술술 읽히면서도 비판적 문화사의 장점을 갖춘 책이었다.

이 책은 유럽인의 미덕이라 여겨져 온 것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유럽을 마치 '매사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클럽' 처럼 여기는 고정관념에 흠집을 낼 것이다. (p. 13)

중국 역사가인 쑤 지유는 1848년 출간한 책에서 이른바 '서쪽 대양의 사람들'은 세계를 몇 개의 서로 다른 조각, 즉 대륙으로 나눈다고 전했다. 이 대륙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였다. 그는 또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중국은 아시아에 속한다면서, 그렇다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는 어디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눈에 유럽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달린 반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지유의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누구도 유럽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또한 합리적이다. 유럽은 따로 독립된 단독의 대륙이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판 한구석에 놓인 지역일 뿐이다. (p. 14)

문명화된 대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계몽시대 유럽의 철학자다. 유럽은 정신세계의 발전을 선도하는 북극성으로 여겨지며, 세련된 문화로 세계의 다른 부분과 구별되었다. ... 이전에는 '유럽적인 것'을 규정하는 토론은 모두 '유럽적이지 않은 것'을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p. 16)

이 '유럽적인 것'을 정의하는 작업은 더욱 복잡해진다. 오늘날 '유로-피어니즘'은 그 어떤 무언가가 집약된 민족 정체성의 모자이크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무언가를 선뜻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p. 19)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너라고 생각하는 행동 중 상당 부분이 중세 유럽의 궁정 귀족과 교육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당위성을 한 번쯤 의심해볼 만하다는 것을 풍부한 예시를 통해 증명할 것이다. (p. 21)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방향성이 무척 맘에 든다.

유럽은 뭔가 선구적이고 선도적이며 고급진 고유한 문화를 가진 것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주지만 유럽은 아시아와 떨어져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고대그리스와 터키 지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시작되며 전파되었고 지리적으로도 유럽과 아시아는 붙어 있는데, 유럽은 근동아시아 중앙아시아 극동아시아라고 지칭하며 어떻게든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지으려고 항상 애써왔다. 왜?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와 달리 유럽과 아시아는 한 몸으로 역사를 만들어 왔다. 서로 주고받은 것이 늘 있엇고 엎치락뒤치락 하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아시아는 민족의 혼합이 덜되어서 국가별 민족성이 동일한 편인데 유럽은 고대부터 다양한 민족이 서로 섞여 왔다. 처음 뿌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유럽은 유럽만의 무언가를 늘 찾아 고집한다. 왜?

유럽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미개하다는 시선에서 자신들만의 매너에 대한 우월감을 가진 것처럼 해동해온 것을 조롱하는 이 책이 주는 재미는 은근히 통쾌하다.

이 책이 주는 풍부한 예시들은 유럽인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더러웠는지 다양하게 알려준다. 그들도, 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지역의 사람들처럼 아니 오히려 더많이 미개했다.

아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오른쪽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는데, 이 습관의 원래 주인은 로마 군인들이다. 그들은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른손을 들었다. 악수도 근본은 같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면서 손에 칼이나 비슷한 무기를 숨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악수가 인사법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유럽에서부터다. 이전까지는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확인하는 상징적 제스처로 활용됐다. 싸움이나 협상이 중재됐다는 의미로 악수를 한 것이다. (p. 47)

원래 인사는 안전장치이자 폭력방지책 역할을 했다. ... 인사는 항상 불확실성의 순간과 깊이 연결돼 있다. ... 예의범절과 인사법은 위험 사회에서 폭력성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이러한 규칙들은 국가가 폭력을 독접하기 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서 비롯됐다. (p. 49)

 

거대한 영토를 호령했던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유럽사회는 오랫동안 혼돈시대였다. 국경도 국가도 정확한 경계가 없었고 영토전쟁은 늘 있다시피 했다. 이러한 시대에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자기자신의 무력밖에 없었으므로, 적인지 친구인지 구별짓기 위한 행동은 중요했다. 지금은 예의와 인사 라고 여겨지는 행동들의 시작은 폭력방지책이었던 것이다.

문명인의 예절처럼 보이는 건배 뒤에는 문명이라고 말하기 힘든 역사가 숨어 있다. 원래 건배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술자리에서 사람들을 잔뜩 취하도록 만드는 것 뿐이었다. 건배를 하고 나면 술잔이 경쟁적으로 비워지기 때문이었다. ... 중세에는 음주가 영적 생활에 속했다. ... 수도원에는 술타령이 넘처났고 사람들은 이기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다. ... 프랑스 수도원에서는 15세기 중반까지 '술통 축제'가 열렸다. 2월에 시작해 5월까지 계속되는 축제였다. 매년 100일 이상 축제가 열렸던 셈인데, 그동안에는 언제라도 술을 마실 핑계가 생겼다. 알코올음료가 이토록 사랑받은 데에는 깨끗한 식수가 부족했던 상황도 한몫했다. (p. 65)

만취는 오랫동안 유럽의 도시 거주자와 군인이 가장 선호하는 오락이었다. ... 알코올 중독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말 무렵이다. ... 노동자 계급의 음주 행태가 변한 것이 이러한 인식 변화에 한몫했다. 독주 한 잔에 고단한 삶의 걱정을 잊는 습관을 노동자의 전유물로 고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이 유포한 프로파간다의 문제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음주 습관에 알코올 중독이란 꼬리표를 붙임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체의 도덕성 상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p. 70, 71)

 

중세시대엔 길거리에 주정뱅이가 넘쳐났다. 술을 마시다 아무데다 뻗어 자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비틀거리다 진창에 넘어지면 그 자리에 대자로 뻗어 누워잤다고 한다. 중세가 신앙의 엄격한 시대인줄 알았더니 읽을 수록 방종의 시대인 것에 놀랍기도 했다. 지나친 방종도 문제지만 차라리 모두가 다 술고래인 것이 평등했는지도 모른다. 산업이 발달하고 노동자계급이 생겨나면서 과한 음주를 노동자층에게만 전유시키는 것은 결국 차별이 되었으니 말이다.

예절이란게 막 생겨나기 시작한 그 시절을 상상해 보자. 식기 도구가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전까지는 모두 손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로 음식을 먹었다. 혹은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다. 포도주도 큰 잔에 담아 돌려가며 마셨고, 수프도 큰 대접에 담아 함께 먹었다. (p. 76)

포크는 사탄이 들고 다니는 삼지창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용이 금지된 도구였다. ... 한 독일 목사는 포크의 악마적 성격을 신이 인간에게 손과 손가락을 만들어준 이유와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에게 손가락이 있는 까닭은 포크 대신 손가락을 사용하라는 신의 의도를 보여준다고 했다. (p. 79)

 

유럽에 예절이 생겨나기 시작한 무렵은 12세기 전후라고 한다. 예절이 생겨나고 있건 어쨌건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을 이용해서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손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공동대접에 담긴 수프를 한 개의 숟가락으로 돌려가며 사용하여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13세기 예법서에서는 "숟가락으로 먹을 때 숟가락을 쪽쪽 빨지 마라' 는 지침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포크는 16,17세기가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칼은 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꺼려졌다. 하지만 귀족문화가 발달하고 궁정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들만의 식사예법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중세시대 식사예절은 사회적 차별의 도구로 쓰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중세와 근대의 일반인들은 신호가 오면 그 자리에서 용변을 해결했다. 변기나 보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창문을 통해 길에다가 바로 노폐물을 버렸다. ... 안뜰처럼 길가의 후미진 곳도 장을 비우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일반인들은 물론 귀족의 집에도 그런 공간은 배설물로 질퍽거리는 게 정상이었다. 17세기 런던의 한 사업가는 낯선 집에서 요강을 찾을 수 없자 벽난로에 용변을 봤다. 귀족들 역시 억지로 참기보다는 궁전의 벽난로라도 찾아 소변을 봤다. 당시는 하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유럽 도시의 거리에는 어디나 똥이 넘쳐흘렀다. ... 18세기 에든버러의 행인들은 반드시 모자를 써야 했다. 어느 집이나 하루에 한 번은 창문을 열고 길에다 요강을 비웠기 때문이다. ... 어디에서 배설물이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배설물을 아무렇게 않게 다뤘다. ... 18세기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의 연회에는 식탁옆에 탁자가 하나 더 세워졌고 그 위에는 요강이 올라갔다. 그것이 식사를 마친 손님들을 위한 배려였다. ... 결과적으로 위생 관념이 생긴 것은 유럽 도시들에 하나둘씩 하수도망이 깔리기 시작한 19세기부터다. (p. 99~103)

길거리 를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똥바가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몸서리쳐진다. 푸세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화장실이 있지 않았었나? 아무데서나 싸고 아무데나 버리고 어디서든 똥냄새가 나는 곳에서 살면서 동양에 와서는 도로정비가 안되어있네 가묘제도로 인한 시취가 지독하네 했던 것이다. 똥을 안 밟기 위해 하이힐을 만들고 똥을 안뒤집어 쓰기 위해 모자를 썼던 것이 오늘날 패션이 된 것을 보면 유럽문화의 힘이 대단하긴 한 것일수도.

13세기 독일 기사들의 행동규정에 따르면, 오직 '경박한' 기사들만이 목욕을 했다. ... 그런가 하면 목욕을 부도덕한 육체적 오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비난이 전혀 뜬검없는 소리는 아니다. 그당시 기사들이 목욕하러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닌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을 마친 기사들은 규정에따라 어린 소녀들과 함께 목욕할 수 있었다. ... 기사들이 성적 동기에 이끌려 목욕을 좋아했던 반면, 일반 민중은 물을 기피했다. 13세기 프랑스의 농촌에서 자란 사람ㄷ르은 목욕을 아주 가끔했다. 대신 가까운 친구 사이임을 증명하는 행동으로 서로의 몸에서 이나 벼룩을 잡아주었다. ... 어쩌다 한번 씻을 때도 생식기나 항문 주변은 건너뛰었다. 물이 닿는 곳은 손과 얼굴, 입 등 음식을 나누고 준비하고 맛보는 신체 부위에 한정됐다. (p. 115)

유럽에는 사회 최상류층도 개인의 청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대였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한 달에 한 번 목욕했는데, 그마저도 '필요하면 하고 아니면 건너뛰는'식이었다. 손과 얼굴만 매일 씻으면 그만이었다. ... 17세기 영국인들은 특히 생식기 주변을 씻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 의복이나 향수, 향수가 뿌려진가발 등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는데, 이를 활용하면서 씻어야 할 이유는 더 줄어들었다. 프랑스 귀족들이 '씻는다' 고 하면, 손만 물에 담갔다가 헹군 다음 얼굴에 향수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속은 거의 갈아입지 않았다. 불쾌한 냄새는 향수로 가리고, 얼룩은 파우더로 덮으면 되는 일이었다. ... 유럽인들이 개인의 청결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부터다. (p. 116,117)

 

유럽인들이 안 씻고 더러웠다고 욕하려는 게 아니다. 과거에는 다 더럽고 안 씻고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대부분 모르고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정도 인줄은 몰랐다. 유럽 사람들이 19세기 이전에 저렇게 더럽게 살았다는 것을.

영화에서 보면 중세 유럽과 근대의 유럽은 우아하고 고상하고 고급진 그런 문화로 그려내고는 하지 않나?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나 조선사회를 그릴때는 좀 더럽고 추하게 그린 영화들이 많지 않았나? 하지만 거기나 여기나 거기서거기 였던 것이다. 그들이 더 낫고 우리가 더 못한 게 아니라.

중세의 웃음은 투박하고 잔인했다. 사람들은 지능이 좀 떨어지거나 정상 기준에 못 미치거나 하위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보고 웃었다. ... 때로는 비난이나 모욕, 조롱 등이 공개 형벌의 일부에 포함되기도 했다. 공동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개인에게 가하는 형벌 중 하나였다. ... 15세기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 지역 도시 주민들은 돈을 모아 강도 한 명을 보석으로 꺼냈다. 그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 옛날에는 동물이나 정상인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 다른 사회계층, 다른 종교의 신도 등 절대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없는 대상을 웃음의 원천으로 삼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사람들은 귀족 관료들을 사형에 처하는 장면을 보며 웃었다. ... 남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과 궁정 광대의 전통은 서커스란 제도를 통해 민중을 위한 오락으로 살아남았다. (p. 139~147)

고대로마에서의 검투사경기나 황제들의 잔인한 놀이는 유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가 유럽사회에 내내 있었던 모양이다. 공개처형 구경하기를 즐겼고 고문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보여주며 하다가 구경꾼들의 요청에 의해 고문을 더 오래 하기도 하고, 동물을 학대하는 것을 즐겁게 회자했던 사람들은 몇백년을 걸쳐 그 문화를 유지했다. 웃음의 의미는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웃음은 공격성을 가질 수도 있다. 내옆사람들은 웃는데 나는 웃지못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로부터 소외당한 것이다. 공포를 보며 잔인함을 보며 웃었던 분위기는 그저 투박했다고만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때 웃음 유발시켰던 장면들은 정말 웃음이었던 걸까 공동체로서의 소속감이었던 걸까...

중세의 문화는 어느 모로 보다 오늘날보다 저속했으며 인간 간의 상호작용은 훨씬 직접적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다보니 무심코 던진 농담이 갑자기 피 튀기는 싸움으로 불거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1216년 피렌체 사람들이 연회를 열어 도시의 유력자들을 초대했다. 식사사는 동안 광대 하나가 부오델몬티 가문의 열쇠를 잽싸게 낚아챘다. 이에 젊은 부오델몬티를 제외한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그런데도 부오델몬티가 계속 고지식하게 굴자, 도시의 다른 유력자인 아리기가 이를 질책하며 부오델몬티 머리에 열쇠를 던졌고 부오델몬티는 그에게 칼을 던지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이 작은 소동으로 피렌체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가문간의 싸움이 점화됐다. 가문끼리의 싸움은 교황파인 겔프당과 황제파인 기벨린당으로 나뉘는 정치싸움으로까지 비화해 그 정점을 찍었다. 연회에서 밥을 먹다가 시작된 싸움은 10년이 넘게 계속됐고, 그 여파로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피렌체에서 추방됐다. 겔프당에 속했던 단테는 자신의 작품 <신곡>에서 기벨린당에 속한 자신의 정적을 지옥의 똥구덩이 속에 처박아 버린다. 작품 속에서 단체를 지옥으로 안내하는 베르길은 용감한 단테의 정당한 분노라며 이를 치켜세운다. 중세에 모욕이란 말 그대로 사생결단의 문제였다. 사회계층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명예를 훼손당하면 곧장 칼로 손을 뻗었다. (p. 157)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 중세에는 격투, 주먹질, 사냥이 일상이었다. 누구보다 귀족들에게 폭력은 삶의 즐거움이었다. ... 사람들은 종교와 관습이 다른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존재로 생각하지 못했다. (p.158)

여자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폭력이 일상처럼 벌어졌다. 중세에 결혼한 여자들은 끊임없이 맞았고 농가는 물론 귀족 가문에서도 체벌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 남편이 부당하고 폭력적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 16세기까지 남편의 폭력성은 결혼생활에 필수 요소로 여겨졌다. 그리고 서양의 예법서들은 그 폭력성의 발현을 막기 위해서는 아내가 유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18세기 중반까지도 영국 법원은 아내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남편이 매질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허용했다. (p. 187~191)

 

폭력과 공격성에 대한 부분은 정말 너무 야만적이라 입이 떡 벌어졌다. 명예라는 것도 사실 무슨 거대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중세시대의 명예는 내가 봤을때는 기분이 나쁜것 일 뿐이었다. 아주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상대방의 행동이 내가 맘에 안들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싸우는 것이다. 맥락없이 싸우고 이유없이 죽었다. 노예, 아이, 여자 를 때리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어떤 중세기사는 세딸에게 여자로서 지침을 준다며 쓴 글에서 아내를 바닥에 눕혀 놓고 때리고 발로 걷어차서 코를 뭉개뜨린 후 일그러진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아내가 그나마 남편에게 복종한다고 가르쳤다. 기사도라는 말이 왜 그렇게 멋진 말로 둔갑되었을까? 폭력적 일상에서 기사도를 발휘하는 멋진 남성은 없었다.

중세사회에서 여자들은 기사들을 위해 준비된 상 이었다. 기사들은 결혼을 통해 성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두 가문이 결혼을 앞두고 협상을 시작해 합의를 이루면 결혼 당사자들이 승인하는 것으로 절차가 진행되었다. ... 당시에 결혼이란 딸을 다른 남자의 소유물로 이전하는 절차였다. ... 오늘날 서양 사람들은 인도의 강제 결혼을 생경하게 받아들이지만, 한때 유럽 전역에도 그런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p. 197, 198)

중세와 근대에는 신혼부부의 사적인 공간이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첫날밤의 즐거움이 온 동네에 중계되도록 그들의 침대는 의전에 맞춰 공개된 장소에 놓였다. (p. 199)

중세엔 주거 공간이 좁은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침대 하나를 나누어 썼다. 가족들이 함께 자는 것은 물론이고 하인들이나 손님도 주인과 한 침대를 썼다. 16세기에 들어서야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유별함을 가르치는 지침서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로부터 2백년 후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같은 침대에 누워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p. 207)

중세의 성도덕이 순결한 사생활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저 정해진 사회적 관습을 따르고 공공연한 추문을 피하면 끝이었다. 당시에도 혼전 관계나 불륜은 다반사였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즐거움을 찾을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p. 212)

 

처음 만나는 여성의 가슴을 만져도 괜찮고, 처음 보는 여성이 맘에 들면 어떻게든 꼬셔서 성관계를 갖는 것이 당연하고, 강간이나 납치도 횡행했던 시대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던 걸까? 심지어 뻑하면 맞아가면서까지. 읽을수록 기사도는 대체 언제쯤 나오나 싶었는데 결국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왜곡된 기사도정신에 대해 점점 회의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뽑내기 위해 다양한 도구와 방법들을 만들어냈다. 왜 대체 왜일까?

마지막 9장에 이르러 저자는 '디지털 중세시대' 라며 현재를 이야기 한다.

" 사람들은 이제 SNS 공간에서 허세를 떨고 서로를 유혹하고 행패를 부린다. 중세 기사들의 무절제한 태도가 또다시 만개하고 있다" 면서 인터넷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중세시대 못지 않은 미개한 행동들이라고 말한다. "지금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자화자찬과 악플러들의 장황한 험담을 보고 있자면 중세의 통제되지 못한 행실이 가상세계라는 새집을 구했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디지털 중세기에선 맞대응과 비아냥거림, 공격과 연민의 상실이 일상화 되어버렸다' 며 중세보다 더욱 한계가 없어지고 위험해졌다면서 현재를 비판한다.

1장에서 8장에 걸쳐 매너의 시작, 몸가짐과 바디랭귀지, 인사법, 식사예절, 자연 욕구와 분비물, 눈물과 웃음, 공격성, 성생활 에 대한 중세시대 이야기를 하면서 뒤로 갈수록 중세시대에서 현대에 이어진 문화들을 점점더 많이 자연스럽게 확장해가더니 9장에서는 현재를 이야기 하며 중세와 비교한다. 결국 저자는 중세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중세를 이야기하면서 현재를 다시 보게끔 하고자 했던 것일까? 중세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면서 더욱 야만적이 된 현재를 드러나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책은 결국 매너의 문화사가 아니라 중세적 인류사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풍속 문화에 관한 역사는 항상 훌륭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에서 위로를 얻을 수는 있다. 이제는 당연하게만 보이는 서양의 생활 방식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위대한 역사철학가인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새벽녘에 날개를 펼친다' 라는 말을 남겼다. 고대 사람들은 부엉이가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를 동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터넷 세계 속 시간에서 부엉이는 어디에 있는가. 짐작건대, 둥지에 앉아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것이다. (p. 252)

저자는 사회가 변했다고 행동양식이 변했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일상적 환경에서의 폭력성은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었지만 인간의 존재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에게 본래의 특성은 없다고 말한다. 문명화된 사회속 인간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듯 하면서 인터넷 공간 역시 이 사회의 하나라고 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다시말해 저자는 어떤 결론도 정확하게 내리지 않는다. 짧고 유쾌한 역사로 읽고 넘기기엔 저자가 숨긴 의도가 궁금해지면서 마지막장을 덮기가 아쉬웠다.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고 다양한 민족을 품어안으며 다양한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던 유럽의 속살을 까발리는 듯한 관습들을 알려주면서 저자는 디지털현재에 대한 우려로 글을 마친다. 뭔가 더 필요한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나에겐 '디지털 중세시대' 라는 단어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과거의 관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냐는 질문에 '디지털 중세시대' 라는 단어에 대한 답으로 구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명과 문화에는 상하를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책은 유럽 문화사에 대한 상위의 위치를 하위로 내리는 책이 아니다. (문화는 그저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니므로) 하지만 과거의 잘못된 관습이 현재에 이어지고 있다면 더구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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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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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우리가 알게 된 것들

 

 

페미니즘 이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굉장히 익숙한 단어다.

익숙한 단어이기는 한데 사실 생각해보면 잘 모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제대로 페미니즘을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가 쓴 페미니즘 책이다.

페미니스트 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면 아마도 왜곡된 페미니즘적 인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그런 것일 수 있다.

페미니즘 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스트란 어떤 사람일까?

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데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페미니스트는 답이 없는 두 선택지에서 억지로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거나 질문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p. 5)

이 책은 저자가 2003~2019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기에 쓰여졌느냐에 따라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기성찰이 지속적으로 이루진 것이 글속에 반영됐음을 읽어가며 알 수 있었다. 시기별로 순서대로 글이 배치된 것은 아니지만 흐름을 짚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 흐름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의 변화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내기 위해 그동안의 글을 정리하고 개고하면서, 대략 2009년 부터 페미니즘이 다시 부흥했다고 알려진 2015년까지 5~6년간 글 청탁이 거의 끊겼던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됐다. 이 시기는 대부분 매체에서 여성면 자체가 사라진 시기와 일치한다고 한다. 1980년대 여성운동이 성장하면서 페미니즘은 확산되어 갔으나 2009년즈음 부터 쇠퇴되었다고 한다. 고사 직전의 페미니즘을 되살려 낸 것은 2009년데이트강간약-물뽕사건, 2010년 검사성접대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이 쌓이면서 여성 대중들에 의해 페미니스트 선언이 나오는 필연적 배경이 되었고, 페미니즘은 부활했다. 하지만 근래의 페미니즘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도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이견은 있었지만 지금 같은 형태였던 적은 없었다. 평등은 차이를 무시하기 위한 수사로 사용되었고, 자유는 전례 없이 모욕당했고, 혐오는 새로운 무기가 되었다. 역사는 쌓이기도 전에 크고 작은 실수가 밝혀지면 즉각 삭제되었다. 비판적 사고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자리뺏기 싸움이나 내부 갈등으로 치환하고, 상대의 절멸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자기 편을 모으는 걸 운동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곳곳에 나타났다. 놀랍고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나로 사는 한 결코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선 내가 아닌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지만 혼자는 싫고,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나를 살게 하기도 하며, 자유는 언제나 위험을 담고 있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언제나 모순과 역설 속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냈다. 이 책은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알게 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p. 11)

글들은 여기저기 칼럼식으로 기고되었던 글인만큼 길지 않아 금방금방 읽힌다. 그 짧고 굵은 내용 속에 맘에 와 박히는 문장들이 여러 곳에 있었다.

모든 운동과 이념이 특권을 성찰하지 않는 순간 억압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배웠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p. 22)

1장 첫번째 글에서 저자는 트랜스여성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 한다. 그때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 다시한번 다짐하듯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며 여성운동을 하던 저자도 트랜스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 실수를 인정한다. 모르면 몰라도 알게 되면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알게 되고 나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위선이다. 위선에 대한 자책감 을 경계하며 다시한번 다짐하는 저자의 고백은 왠지 울림이 길었다...

정체성의 정치가 신자유주의와 만나 다양성의 목록 하나를 더하는 식으로 축소된 요즘, 진정한 불온세력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p. 24)

불온세력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사실 불온세력이 아닐수도 있다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집단은 예측가능하며 따라서 불온하게 되지 않도록 막아진다. 정말 위험한 세력은 저자의 말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선택에 의해 사회의 색이 달라질 수도 있다.

수치심을 잃은 인간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아버지를 움직이게 한 마음은 수치심과 정의감이었다. 수치심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게 해주고, 정의감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해준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를 내기 어렵다. (p. 34)

저자는 참 멋진 아버지를 두었고 멋진 어머니를 두었다. 권김현영 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을때 부모의 성이 같아서 김김현영이라고 쓰는 것은 이상하니 그냥 김현영이라고 쓰고 있을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성운동 한다면서 왜 이름을 그렇게 쓰냐고 외할머니의 성을 쓰면 어떠냐고. 저자는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권김현영이 되었다. 아버지의 모임 단톡방에 불법성폭력동영상이 올라왔을때 그런 것을 올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아버지는 천년같은 단톡방의 정적을 이겨내시면서 딸의 의견을 지지해주었다. 이런 부모님덕에 저자의 생각이 어디에 편향되지 않게 잘 자리잡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거리에서 일본인 여성을 한국인 청년이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저자도 한국인으로서 화나고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본여성의 계정에 많은 한국인들이 대신 사과하는 것을 보고 그 일본여성은 "한국인들이 왜 사과를 하지" 하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사과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가해자를 대신해서 사과하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 사건을 보며 페미니즘적 사고를 했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가 직접 사과하는 것은 맞고 주변 사람이 대신 사과해주는 문화가 이상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부모세대가 저지른 제국주의의 폐해를 자신들이 사과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사과를 영원히 할 수 없겠구나...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

낙태문제 에 대해 "이미 태어난 생명에 대한 예의' 를 먼저 생각하는 것

생리대 유해성 문제가 터졌을때 남성전문가가 나와 생리대 사용법교육같은 무지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어이없는 상황

한국같은 고도의 가족중심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존중의 근거가 아니라 협박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

진보진영 남성들이 남성 권력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을 욕망했다는 것

결혼 자체를 부역으로 취급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무너진 사회에서만 가능한데, 가부장제가 무너지기는 커녕 돈독한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서 결혼이 여성에게 부역행위인지를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 현실 은 토론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토론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 서로의 말이 옳다며 침튀기며 소리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토론이란, 정말 좋은 토론이란

좋은 토론이 되려면 사회자, 촉진자, 발제자, 청중 모두 토론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궁금한 것을 상대에게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반론하며 자신의 논지를 점검할 수 있따는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질문을 명목으로 자기과시적인 연설을 하거나 선동하며 혐오 발화를 할 때 모두가 제지할 수 있다.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걸 기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토론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향력만을 과시하려는 사람은 토론에서 논박되었어도 전혀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 ... 겨우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해 토론할 상황을 만들어놓았는데, 저런 이들이 공론장의 주요 스피커로 취급되면 성차별이 있다는 이야기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것이 토론이 아니라 퇴행이라고 보는 이유다. (p. 67)

제대로 된 토론문화가 정착된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인권적인 측면부터 공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권은 "우리"에 대한 기대와 희망, 연대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강력하고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 때문에 인권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자고 하는 것은 인권의 불가능성을 사고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좀더 정치적으로 강력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만들어내는 사회관계를 포함해서 인간이 만들어진다고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 페미니즘보다 휴머니즘을 지향한다거나, 여성인권이 아니라 보다 전체적인 인권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식의 말들이 휴머니즘과 인권을 가장 탈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 페미니즘과 여성인권운동이야말로 인간의 조건과 개념 자체를 질문하고 재구성하는 가장 혁명적인 휴머니즘이자 가장 급진적인 인권운동이다. (p. 91)

페미니즘에 대해서 좁은 범위의 의미만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해 폭넓은 사고의 방향을 알려준다.

대학사회의 변화는 향후 대중정치 방향이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대학 사회에 불고 있는 대표성의 위기와 정치의 내용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분병한 변화는 이제 선출된 이후 결과에 '승복'하는 식의 정치는 더는 없다는 것이다. (p. 105)

학생운동은 옛말이고 대학교에 학생회조직은 사라진줄 알았다. 그냥 과거이고 추억속에 남은 것이겠거니 했는데, 저자는 정점에 있었을때나 바닥이라는 위기에 있을때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낸다. 2008년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나는 그저 실패한 기억이라고 생각했었다. 상실과 좌절의 꺾임이었따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때의 그 시도가 있었기에 이후의 사회적 논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현실이 바뀐 것은 없는데, 실망이 희망이 되는 묘한 느낌이 들면서 내 생각의 프레임이 살짝 돌려지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조차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데도, 역차별 담론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고 정치적 상상력을 닫아버린다. ... 법,제도적 기반 없이 급조된 여성전용 혹은 여성친화를 내세운 정책들은 역차별을 발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성차별을 강화한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기반하거나 성별분업 문제에 대한 고민없이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만든 정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p. 108)

그러고 보니 여성을 위한 정책들이 사실 강제성을 띤 법으로 정해진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러한 유명무실한 시도만으로도 역차별 논란은 거세고 그러면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시도들은 사라진다. 눈치챌 새도 없이...

여자와 남자의 뇌 차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언제나 인기를 끈다는 저자의 글을 보며 사실 나도 그러한 글들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구분이 서로의 이해를 돕는다고 그냥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차별을 당연시하는 기반이 되는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여성의 인권은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착취당하는 최악의 상태를 전시해야 공감을 얻는다. 반면에, 남성의 인권은 잠재적인 피해 가능성과 인간으로서 명예훼손에 대한 우려만을 이야기해도 공감을 얻는다. 여성과 아이에 대한 학대는 그들의 약한 위치 때문에 분노를 일으키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쾌락을 자극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정말 불편해하는 장면은 권력자의 눈물과 상처이다. (p. 134)

그러고 보니 그랬다. 여성은 피해가 겉으로 보여야 동정심이라도 얻고 남성은 그럴 가능성만 있어도 바로 들고 일어난다. 그리고 약자들이 항상 저 위에 있는 강자들을 걱정한다. 왜일까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자신들인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피해자의 곁을 지키며 정의롭게 살악려는 이들에게 꼭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분노로 인해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우리 일상생활의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그 힘을 길러야 한다. (p. 152)

일상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다...

여성혐오와 싸우는 이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무기라기보다는 족쇄에 가깝다. 전략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은 이미 실패를 거듭해왔다. 사회가 전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 전략으로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p. 227)

저자는 지속적으로 연대와 여성들의 목소리를 응원한다. 글쓰는 여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글을 보며 사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에 자기만의 글을 쓰는 여자는 많은데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글 부족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노가 단순히 음란이 문제가 아니라 폭력이 문제라는 것, 아동성범죄자에게 화학적 거세가 사실은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 아동복지예산이 거의 바닥이라는 것, 여성주의 자기방어운동이 단순히 신체적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등 문제를 지적하면서 대안까지 생각해보게 하는 글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면서도 일단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수 있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싫은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저자가 알게 된 것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알아야 할 내용들이었다.

선입견을 갖지 말고 같은 인간의 이야기로 인권의 이야기로 읽어간다면 분명 가슴깊이 박히는 내용들이 있는 책이었기에 나는 이 책을 페미니즘책으로 국한짓고 싶지 않다.

아집에 갖힌 페미니즘이 아니라 퇴행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진화하는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의 생각이 아니어야 한다.

다시 알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 속에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함께 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람의 이야기로 읽혀졌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은 원래 그런 것인것 같다. 한쪽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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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메러디스 메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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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소녀와 양봉가 할아버지,

그리고 신비로운 '꿀벌'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 (표지 中)

 

 

저자의 어린시절을 담은 회고록인데 소설처럼 읽히는 이 책은 굉장히 자연친화적이고 소설보다 더진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다. 감동적인 소설이라고 해도 가슴아픈 실화라고 해도 글을 읽으며 울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책 말미에... 울컥 했다...

1980년 열살이었던 저자는 양봉가인 할아버지와 양봉장에서 벌떼를 만난 기억으로 책은 시작된다.

꿀벌은 가족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혼자서는 하룻밤도 이겨내기 어렵다. 여왕벌이 죽기라도 하면 일벌들은 여왕벌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벌통을 뒤지고 다닌다. 그러다 봉군은 쇠약해지고 꿀벌들은 사기가 꺾여 꿀을 따러 다니지 않고 그저 기신기신 벌통 주변만 어슬렁거리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 가족이 사무치게 그립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p. 16)

저자는 5살때 외갓댁으로 왔다. 부부싸움이 잦았던 부모는 결국 이혼을 했고 5살이었던 저자와 3살이었던 남동생을 데리고 엄마는 친정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이기를 포기했다. 하루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았다. 어린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 처한 메러디스(저자)를 다시 살게 해준 것은 외할아버지와 꿀벌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꿀벌 이야기는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꿀벌 세계의 내면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인간 세계의 외면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수록 나와 자연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나는 꿀벌들이 '서로를 얼마나 살뜰히 보살피는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언제 무리를 지어 어디로 갈 것인지 같은 문제를 얼마나 민주적으로 결정하는지, 또 미래 계획을 어떻게 세우는지' 등을 배워나갔다. 심지어 벌에 쏘이는 경험조차 내게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꿀벌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주지 못한 고대의 지혜를 꿀벌들이 갖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게 참고 버티는 방법을 가르쳐준 건 지난 1억년간 꾸준히 지구상에 존재해온 꿀벌이었다. (p. 18)

 

나는 벌 한마리만 윙윙거리며 주변을 맴돌아도 몸서리치며 무서워하는 타입이다. 가만이 있으라는 옆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팔을 휘저으며 벌을 쫒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꿀벌을 존경하게 되었다. 다음에 꿀벌이 내 주변에서 윙윙거린다면 참고 살펴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젊은 나이에 이혼을 경험한 메러디스의 엄마는 그 좌절감을 버텨내지 못했다.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메러디스와 남동생은 조부모의 손에 컸지만, 사실 남매를 키운것은 꿀벌이고 꿀벌이 사는 자연이었다. 조부모는 의식주를 해결해주었지만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준 것은 꿀벌이고 자연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독신이었지만 이혼녀였던 할머니와 결혼했다. 그때가 할머니 마흔 할아버지는 세살 연하였고 메러디스의 엄마는 이미 열아홉 다큰 처녀였다.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난 메러디스의 엄마는 꿀벌과 자연을 미처 알지 못한채 떠났고 다시 돌아왔을때는 꿀벌과 자연도 자식도 그 무엇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메러디스 처럼 자연에서 치유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불빛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그 버스에 이끌렸다. 날 지켜줄 수 있는 밀페된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잠수함이나 버스처럼 세상과 동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올라 정말로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꿀버스 안에 있으면 따뜻하고 안전할 것 같았다. 버스 안에 있는 아저씨들이 나를 초대해서 그들의 비밀 모임에 끼워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손수 만들어내는 방법을 내게도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벌집들을 주고받고, 또 한사람씩 번갈아가며 유리 단지를 들고,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받아가며 마치 춤추는 것처럼 조화롭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 버스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버스가 내게도 행복을 심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아직 묻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답과 같은, 아주 중요한 것이 버스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저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p. 78)

이 책의 원제가 the honey bus 이다. 꿀버스.

할아버지가 오래된 군용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채밀공장?!이었다.

꿀이 가득한 벌집틀에서 꿀을 채취하는 그 작은 버스 안은 달콤한 꿀이 넘쳐나는 곳이자 달콤한 시간이 넘쳐나는 장소였다. 유일하게 행복을 주는 장소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벌에 쏘이지 않고도 벌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매슈와 내게 모든 생물은 각자 내면의 정서적 삶을 지니고 살아가는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 꿀벌들이 이토록 다정한 존재라면 그 사실을 내가 직접 배워보면 어떨까? 나는 아직 언제나 주변 곳곳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였다. (p. 91)

윙윙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곳에 있는데 어쩐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고 또 누구도 나를 불쌍히 여길 일이 없었다. 이 위에서 나는 더 이상 아빠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엄마를 둔 아이도 아니었다. 꿀벌들은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벌들이 불러주는 노랫소리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 꿀벌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하는 선택권이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내게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에 깔려 무너지는 앞날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앞날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p. 119~120)

꿀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 만큼은 마음이 느긋해지고 편안해졋다. 근심을 내려놓고 벌들과 그들의 행동에 정신을 쏟고 있으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보이지 않던 온갖 생명이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그런 생명들을 지켜보다 왠일인지 내 문제가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위로받는 것 같기도 했다. (p.144)

 

다섯살에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세계는 할아버지에게서 꿀벌세계를 배워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는듯 이해되어져 갔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자연이 주는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된다. 꿀벌세계의 경이로움은 어린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에 대해 그 복잡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머릿속이 뒤숭숭할때 규칙적인 생활은 의외의 안정감을 준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벌어지던 5살 소녀에게 규칙적인 꿀벌의 생활은 안정감을 주었고 그 안정감은 삶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심어주었다.

읽으면서 저자의 유년시절중 저자가 표현하는 고통을 작게 보이게 할 만큼 부러운 지점들이 있었다. 1975년 5살 (우리나라 나이로 하자면 6살?!) 소녀가 유치원에 가서 비틀즈의 음악을 들었을때 대성통곡을 한다. 그 음악은 아빠가 좋아했던 음악이었고 아빠와 추억이 깃든 음악이었다. 추슬러지지 않은 감정이 드러난 그다음날 부터 유치원선생님은 음악수업시간이 될때마다 메러디스를 다른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옛날 벌써 유치원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림치료를 했다는 것이 소설적 감동과 또다른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정말 너무 멋진 분이었다. 어린 소녀의 마음에 생채기가 날때마다 다독여 주고 엄마가 내뱉은 의붓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에도 어린 소녀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었다.

"음, 의붓- 이라는 건, 이 경우에 그저 할아버지가 한 명 넘게 있는 행운아라는 뜻이지"

할아버지는 누구를 할아버지로 삼고 싶은지 내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건 내게 쉬운 선택이었다. 할아버지의 삶은 뒤엉킨 가족사로 복잡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받아들여줄 여유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시간을 보내길 기대하는 어른이었고,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르쳐주는 일을 즐겼으며, 우리의 의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부모가 마따히 해야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었다. (p. 207)

 

벌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새록새록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했다.

벌들의 역할이 생각보다 자세히 구분되어 있어 신기했고, 눈보라가 치든 38도가 넘는 무더위 속이든, 벌통이 어디에 위치해 있든 간에 벌통 내부의 온도는 항상 35도 언저리로 유지한다는 것도 신기했고 (꿀벌이 온도계 없이도 이토록 정확하게 온도를 유지하는 비결은 아직 밝혀지지 못했다고 한다) 벌통을 검사와던 와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벌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머리를 한 방향으로 향하고 날개를 서로 맞물린 채 대군처럼 빈틈없이 정확한 자세로 정렬해 알을 보호하는 모습은, 그것도 밖에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유모벌들이 외부적 환경에 갑작스레 노출됐을때 맞은 비로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했다. 알을 보호해주는 벌들을 보며 메러디스는 깨닫는다.

비를 막아주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유모벌들은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새끼들의 부모가 아니었다. 그 새끼들의 부모는 여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여왕벌의 자손을 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스스로 위험에 처하는 길을 택했다. 유모벌들은 내동생과 내게 부모 역할을 대신 해주는 우리 할아버지처럼 새끼 벌들의 대리 부모인 셈이었다. ... 각각의 벌들은 서로를 똑같이 사랑했고 벌통 안은 '의붓' 과 '친' 사이를 구분 짓지 않았다. 그렇게 벌들은 내게 진짜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p. 212)

할아버지는 항상 꿀벌들과 함께 했고 꿀벌을 통해 메러디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꿀벌을 관리하고 꿀을 채집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 바라기만 하는 이들에게 찾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대가를 얻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또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메러디스는 체득한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꿀벌들을 돌봐주고 있는 것으로 알다가, 사실은 벌들이 할아버지와 메러디스와 나아가 인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까지 배우게 된다. 자연은 그런 존재다.

할아버지와 꿀벌과 자연속에서 살았지만 엄마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엄마' 가 아닌 채로 엄마로서 한 집에 존재 했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소유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제 내 것이고, 다시는 엄마의 것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 엄마라는 이유로 이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어떤 안도감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냥 엄마를 견디며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언젠간 엄마 곁을 평생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그저 엄마 말을 따르고 엄마와 부딪히지 않으면 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은 넘마 밑에 깔린 채 속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내 정신까지 엄마에게 갇혀 있을 필요는 없었다. (p. 353)

엄마의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그 집은 내가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위험한 장소였고 그저 생존하기 위한 곳일 뿐이었다. (p. 368)

나는 우리를 버리고 싶어 하는 엄마의 행동에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바라왔다. 그런 행동이 엄마의 선택에서 비롯된 거라는 가능성을 없애려면 다른 비난할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엄마가 뭔가에 중독되어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약물에도 전혀 손대지 않았다. 엄마는 늦은 시간까지 외출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낯선 사람과 남겨두지도 않았으며 남자들을 집에 들이는 일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보호시설에 입원한 적이 없었고 또 노숙자였던 적도 없었다. 도박도 하지 않았다. 종교적 광신도도 아니었고 일 중독자도 아니었다. '엄마' 라는 역할을 버리고 자식의 삶을 아예 망쳐버릴 만한 그 어떤 일에도 빠져 있지 않았다. (p. 400)

 

어떤 식으로든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장하는 내내 상처만 쌓여갔다. 집은 위험했고 할아버지 곁 만이 안전했다.

엄마에게는 가는 곳마다 쫓겨나게 행동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드러나는 엄마의 독선이 늘 수치심을 안겼다. 엄마의 분노는 상황에 따라 정도는 달랐으나 언제나 기본 값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p. 335)

엄마는 다른 사람을 결코 사랑할 수 없게끔 철벽을 치고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훈련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으며 자랐던 것이다. 엄마도 혼란에 빠져 있는 보호자였다. 엄마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p. 411)

엄마가 나를 때렸고 엄마의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다면, 분명 또 다른 누군가가 엄마의 아버지를 때리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친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아는게 있는지 물었다. 엄마는 기본적인 사실만 알고 있다고 했다. 초등학생때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때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 할아버지의 누나를 데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그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단둘이 남겨졌고 그 아버지에게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곤 했다고. 엄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맞았다고 했다. (p. 413)

 

폭력은 대물림된다. 자각하고 반성하고 그 강도를 약하게 낮출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대물림된다. 그 대물림이 끝나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가능해진다. 부모에게 과거의 상처가 있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의 상처를 떠안을 수는 없다. 부모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고 해서 자식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각자의 몫이다. 메러디스의 엄마는 방임했다가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었다 하는 자신의 엄마가 유일한 가족이었고 둘다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지 못했다. 하지만 메러디스 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할아버지가 있었고 꿀벌의 세계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와 매슈를 데리고 빅서로 나갔고 수확기가 되면 꿀버스에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할아버지의 양봉 수업에 숨어 있는 진지한 의미를 알아듣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우리가 비아콘텐타에 갇히지 않고 사고의 틀을 확장할 수 있도록 꾸준히 우리를 자극했다. 엄마가 아닌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었고,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게 적절한지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꿀벌을 예로 들어 은유적으로 설명하곤 했다. 꿀벌이 살아가는 모습에 녹아 있는 숭고하고 경탄스러운 삶의 방식은 곧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인간이 마땅히 지키며 살아가야 할 기준과도 같았다. (p. 374)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잘 자라 좋은 대학에 합격하여 집을 떠나게 된 메러디스는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꿀벌버스에서 할아버지와 동생과 꿀을 채집한다.

우리 셋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꿀단지를 주고받으며 발레단 단원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것이다. 내가 가장 그리워하게 될 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다는 느낌.

"있잖니" 할아버지가 정적을 깼다. "너희 할머니하고 결혼했을때 내 나이가 마흔이었단단다"

할아버지는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아이를 키울 일이 없을 줄 알았어"

할아버지는 꿀이 나오는 주둥이를 닫고 일어나더니 양팔을 넓게 벌려 우리를 꼭 끌어당겨 안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작아졌다.

"그랬는데 무슨 행운인지 너희 둘이 나타났단다"

그 순간 기쁨이 폭발하여 온몸이 짜릿해졌다. 내게도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내 벌집은 바로 이곳, 할아버지의 꿀 버스 안이었다. (p. 424)

 

여기서 울컥 했다. 정말 울뻔 했다.

논픽션의 감동과 소설적 감동이 함께 존재하는 글은 처음이었다.

5살 소녀가 20살이 되기까지 여정을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메러디스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에게? 누구에게 감정이 쏠렸든 여하튼 간에 다시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장면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설명할 수가 없다...

에필로그 시점인 2015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메러디스에게 벌들을 부탁했다. 그 벌들은 자신의 벌통 속 벌들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벌들이었고 세상의 생명이었다. 할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말한 벌들의 의미를 메러디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메러디스의 벌집이었던 할아버지의 꿀버스는 이제 없지만 세상 곳곳에 할아버지가 있음을 메러디스는 알 수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자연 어디에든 있었다. 메러디스도 알고 나도 왠지 알 것 같았다.

허니버스는 정말 달콤하고 거대한 벌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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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 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마야 뒤센베리 지음, 김보은.이유림.윤정원 옮김 / 한문화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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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성 편견으로 진료실에서도 차별받는 여성의 아플 권리에 대한 보고서

나쁜 의학과 게으른 과학이

여성을 무시하고 오진하고 병들게 한 진실에 대한 보고서 (표지 中)

 

 

표지에 한 여자가 있다.

무채색의 이 여자는딱 봐도 아파 보인다.

여자가 말하는 듯 [ Doing Harm } 이라는 글씨가 여자의 입을 가리고 있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이기도 한 'Doing Harm' 은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있어! , (나를) 아프게 하고 있어! 로 해석된다.

아픈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며 그 시선을 받은 사람에게 당신이 자신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픈데 더 아프게 하는 사람... 이 책은 아픈 여성과 이 여성을 더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인 'Doing Harm' 은 'Do no harm'(환자에게 위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의사결정 절제 명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는 환자의 몸, 정신,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을 하게 되는데 득이 되는 방향의 개입을 하라는 명제보다 해가 되는 개입을 하지 말라는 명제가 먼저 나온다는 것에 대해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 있는 서문에서부터 이미 위협적이다. 치료가 먼저가 아니라 해치지 말라는 것이 먼저였다는 것이, 이미 고대때부터 그러한 인식하에 환자를 대하라고 했다는 것이, 그게 얼마나 실천이 잘 되지 않았으면 여전히 이 짧은 문장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개요는 <1부> 내용이다.

< 눈 감고 무시해온 구조적 문제> 라는 제목 아래 '지식의 간극' 과 '신뢰의 간극' 으로 나위어 어느 방향에서든 여자의 고통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풀어낸다.

<2부 - '남성 중심' 체계 속에서 사라진 여성> 과 < 3부 - 히스테리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질병들> 은 그 실제적 사례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 촘촘하게 저자가 조사한 내용들을 설명한다.

어찌보면 동어반복적인 내용들이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한다 - 의사는 믿지 않는다 - 여성의 병이 심해지지만 감내할 수 밖에 없다

혹은

여성이 아프다고 말한다 - 의사는 정신적인 이유라고 말한다 - 여성의 병이 심해지고 오랜 시간이 걸려 치료를 받게 되지만 다른 곳에서 다른 여성은 이 여성의 전철을 밟고 있다.

전형적인 서양스타일로 쓰여진 보고서 형태의 책으로 연역식인 구조는 첫장 시작부터 결과는 알고 들어간다.

'의사는 여자의 고통을 믿지 않았다'

이 문장을 증명해내는 증거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450여 페이지 내내 아픈 여성들과 믿지 않는 의사들을 보며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으면서도 중간에 놓을수도 없이 다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보수적인 미국의 의료현실에 대해 새삼 놀랐다.

백인남성우월주의가 너무나 뼛속깊이 박혀 있어서 환자에게 공정해야 할 의사가 너무나 선입견이 강한 사람들이라서 놀랐다.

서양의학의 역사속에서 난자당한 여성의 몸과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아픔들이 끔찍했다.

미국의료체계는 우리네와 달라서 더 안되 보이기도 했다.

미국의료체계는 일단 의료보험이 개인부담이라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다. 마약성 진통제가 횡행한 곳이라 중독자가 많다 보니 환자를 중독자로 무시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동네 가까운 병원의 주치의에게 먼저 진료받으면서 초기에 오진되는 경우 상급병원으로 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서양의학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여성의 고통은 정신병이자 히스테리로 치부되어 온 서양의학의 역사를 바탕으로 여성의 질병에 대해 제대로 연구도 교육도 발달해오지 못한 곳에서 여성의 질병은 다 엄살로 치부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의료체계 만큼은 미국보다 우리가 나은 것 같다.

우리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나는 병원에 가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귀찮아서 안가면 안갔지 부담되서 안가지는 않는다. 의료보험이 국가주도라는 것은 굉장한 복지혜택이다. 동네병원에 갔는데 진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병원가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고 다른 병원들이 멀지도 않다. 상급병원들로 가는 것은 예약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무시당하는 수준은 아니다. 아파서 응급실에 갔는데 진통제 처방받으려고 하는 중독자로 의심받는 경우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의료산업-로비스트-정치권 으로 인한 약물남용이 없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서양의학이 기본체제이기는 하나 오랜 세월 동양의학과 함께 해온 우리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신체적 아픔이 생길때 한의원에 가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학기기 에서 증명되지 않아도 맥을 짚고 침맞고 뜸뜨면서 안정을 찾게 되는 경우도 꽤 많다. 적어도 아프다고 말할때 여성이라고 해서 무시당하는 경우를 겪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미국은 같은 질병과 같은 증상이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신병으로 치부해 버린다고 하니 오랜 관습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의료현장에서의 차별은 차치하고라도 임상실험 과 처방기준에 대해서는 공감가는 바가 컸다.

임상 연구와 진료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문제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약의 복용기준은 성인남성 기준이다.

그런데 임상연구 대상에서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고 동물실험에서도 수컷생쥐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놀라웠다. (심지어 에스트로겐 농도가 낮아지는 폐경기 관련 연구 조차도 남성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진행했다;;;) 여성이든 암컷이든 호르몬주기 때문에 임상실험의 조건이 복잡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남성만 수컷만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증명된 약을 남성기준의 양으로 처방받고 있는 여성의 몸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의 호르몬 주기 때문에 남성과 그토록 다르다면 오히려 여성과 암컷을 대상으로 테스트해봐야 더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남성이 잘 걸리는 병에 대한 연구가 먼저이고, 남성은 고통을 여성보다 잘 참는다는 편견아래 여성의 고통은 심인성이다 라고 진료하고, 남성에게 잘 듣는 약으로 개발된 약을 똑같이 처방받고, 여성의 질환은 후대를 생산하는 부인과 외에는 관심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 되어온 현실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차올랐다.

의료체계가 다른 미국에서는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발달이 과학의 발달보다 빠르게 움직여 여성환우들의 단체 활동이 큰 힘을 얻고 있었다. 의사에게 인정받지 못한 질병을 지닌 여성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고 연구단체를 지원하여 새로운 질병임을 인정받고 교육시킬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단체들의 노력이 중요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주로 서양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배우고 서양에서 개발된 약을 들여오고 서양에서 전파된 기술을 배우는 국내 의료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처럼 의사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오진을 당하고 무시당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가? 의료체계는 우리가 나을지라도 의료계를 바꿀 수 있는 외부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훨씬 무력하다.

'잘 연구되었으며 놀랍도록 위협적인 책' 이라는 뉴욕타임스의 평처럼 이 책은 탄탄하면서도 가슴아픈 공포를 주는 책이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라지만 절반의 인류로서 인정받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입지가 너무 드러난 책이라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일수록 널리 알려져야 뭐하나라도 개선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의료현실이 똑같지는 않더라도 의료계에서의 성,젠더 차별에 대해, 고정관념에 빠지기 쉬운 오래된 전통의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수록 더욱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모르면 어쩔 수 없어도 알고 나면 똑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의료계에서 불신을 경험한 사람들도 의료계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사고의 전환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두껍고도 무거운 책이지만 그 묵직함이 더이상 가벼이 여겨지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여성의 증상은 '모두 머릿속에서 생긴' 증상이라는 고정관념이 의학 지식으로 굳어졌다.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이 상호작용하면서 고치기 어려운 수준까지 고착되었다. 여성에게 더 많이 생기는 질병과 증상,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해 의사가 단순히 잘 모르기 때문에 여성 환자가 질병을 호소해도 무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사에게 여성 환자는 신뢰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선입견이 있어서 여성의 증상을 무시하는 걸까? 지식의 부재일까? 신뢰의 부재일까? 내 생각에는 양쪽 모두다.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은 이 지점에서 너무나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의학은 여성의 몸이나 건강 문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여성의 질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성의 질병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의학은 여성의 몸이나 건강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 이 책은 의학계에 있는 몇몇 성차별주의자를 골라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의학계에 편견이 어떻게 스며들었는지에 대해 다룬다. 여성에 대해 특정 편견을 가진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 모두와 보건의료 종사자들이 어떻게 무의식적인 편견을 체화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최고의 의사들조차도 여성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잘 모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의사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들 역시도 여성 건강에 대해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p. 28)

몸은 항상 아플 수 있고, 의사는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과학이 곧장 사람의 몸에 얽힌 신비를 모두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젠더가 그러한 실수의 요인이 되어서도, 미지의 지식으로 남겨져서도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질병을 이해하고 치유하려는 의학적 탐구가 계속 진행되어, 여성의 고통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의학에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를 기대한다. (p. 39)

모든 세대의 의사는 현시대의 이론과 기술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 현재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병은 지금보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정확한 검사법을 갖춘 미래의 의사조차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들을 통합적인 질병으로 취급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집어넣을, 잡동사니로 가득 찬 진단 범주를 만드는 데' 안주한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심인성 원인으로 돌리면서, 의학은 '의사의 무오류성과 의학의 전지성'을 주장한다. 히스테리는 여전히 '적절하지 않은 증상을 던져버리는 의학의 쓰레기통' 으로 남아있다. (p. 119)

증상이 이상하고 낯설다고 해서 질병이 실재가 될 수 없다고 믿어야 하는가? 우리의 실험실 검사가 오래된 질병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질병들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건강한 회의주의' 는 의사에게 귀중한 자질이지만, 이 회의주의자가 환자에게 향할 때는 의료계 전체가 새로운 의학 수수께끼를 풀 수 없게 될 것이다. (p. 368)

의학계가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증거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질성 질환이 19세기에 히스테리, 신경쇠약, 신경증장애 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는지, 그래서 21세기까지 오진되고 있는지 의학계는 잊어버렸다. 다발성 경화증, 측두엽간질, 자궁내막증, 자가면역질환 처럼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도 히스테리나 신경쇠약과 '모든 측면에서 구별할 수 없었다는 사실' 은 무시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계속 변화하는 수많은 느슨한 진단명들의 유사점은 어쩐지 심인성 기원의 증거라고 여겨지지만, 이것은 그저 여전히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p. 375)

결국 자신들의 역사를 잊은 사람들은 그 역사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지구의 온도는 높아지고, 서식지는 변하고, 환경 독소는 점점 많아지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다음 모퉁이를 돌면 언제나 새로운 질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 426)

여성의 신뢰를 되찾는 것은 의료계의 몫이다. 그에 필요한 변화 중에는 의료체계 전체와 관련된 거대한 문제도 있다. 이는 시행하기가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도 있다. 바로 여성의 말을 듣는 일이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할 때, 여성을 믿어라.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수많은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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