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1 - 사회, 과학, 수학, 국어 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1
김정화.김혜경 지음, 서원초등학교 교사연구회 감수, 박현주 기획 / 소울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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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나서 학창시절 때 얘기를 하다보면 자주 하게 되는 말 중의 하나가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이라는 후회같은 탄식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나름 역발상의 시도를 한 책이다. '그때 알게 된 것을 지금까지 알고 있다면' 얼마나 탄탄한 지식의 소유자로 보일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역시 책 중의 책은 교.과.서. 라고나 할까. ㅎㅎㅎ 제목 그대로 정말 친절한 지식교과서 였다.

초등학교 5,6학년에서 중학교 1,2학년 국어, 사회, 과학, 수학 4과목의 핵심을 정리한 책으로 딱딱하게 단원별로 나눈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응용하기가 더 쉽게 되어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적절한 대답할 수 있도록 4년치의 지식을 질문별로 한번에 엮어 놓았기 때문에 왠지 좀더 고차원적 대답을 해주는 느낌을 주게 한다. 엄마아빠가 이걸 알겠어? 하며 미심쩍게 물어봤다가 이런 대답을 들으면 오~! 하는 감탄을 혹은 적어도 오호~! 정도의 공감은 할 수 있게끔. ^----^

사실 아이가 부모에게 질문을 해오는 때까지는 아직 아이가 어리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갖추어질수록 아이는 부모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따라서 질문하는 아이를 뒀을때가 그나마 키우는 재미가 있는 때라고나 할까. 질문하는 아이에게 '너네 배우는 교과서쯤이야' 하며 대답해주는 부모는 아이에게 나름 멋진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런 부모의 모습을 갖추는데 이 책은 정말 유용한 책이다.

지리, 정치, 경제, 생명과학, 지구과학, 화학, 물리학, 국어, 문법과 맞춤법, 문학, 수, 식과 연산, 측정단위, 비율과 확율 등 단원별로 세세하고 책 뒤쪽에 교과연계표도 정리되어 있어서 정말 구성이 깔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도 200개가 조금 넘어서 그냥 상식책으로 읽어도 쉽고 재밌게 읽혀지는 책이다. 잡학다식용 대중서가 정말 다양한 종류로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 역사, 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망라하며 하루에 한가지씩만 알아도 일년이면 365가지를 알게 되는 것부터 한 분야를 세세하게 파고든 것까지 마음만 먹으면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책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지적 대화는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과 지적대화를 나누려면 사실 그러한 지식책들보다 이 책이 더 쓸모가 많다.

초4~중2 자녀가 있는 부모는 읽어봄직한 책이다. 더욱이 국어 에서 맞춤법 부분은 어른도 헤깔려하는 것들을 제대로 짚어주고 있어서 더욱 유용하다. 그러고 보면 배워야 할 중요한 지식은 교과서에서 다 배운 것이 맞나 보다. 그런데 왜 교과서의 지식은 그리도 빨리 잊혀졌는지;;;; 이렇게 한 권으로 다양하게 되새김질 하며 읽다보니 교과서로 봤을때는 못 느꼈던 재미도 쏠쏠한 것이 벌써부터 2권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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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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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처럼 끊임없이 재생되고 뒤섞이는

죽음에 대한 충동과 삶에 대한 열망

자신을 구하고 싶은 절실한 이들을 위한 단 하나의 소설

 

 

내가 기억을 더듬을 때 나는 이미 기억 속에 있다. 나는 기억하는가. 기억되는가. 기억되고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쩌면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는 생ㅇ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p. 12)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죽음. 그래, 죽음이다.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만 지금 여기를 포위하기 때문에. 미완성일 때에만 온전해서 끝내 나라고는 호명될 수 없는 것. 내가 되면 사라지는 것. 그리하여, 나조차 나일 수 없게 하는 것. (p. 17)

그만. 멈추고 싶다. 멈춰 있는 것을 멈추고 싶다. 멈춰지지 않아서 멈춘 것을 멈추려고. 그만.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p. 25)

질문은 상충하는 두개의 선택지가 아니고, 선택할 수 없어서 무수해진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의 의미가 혼동된다. 그에 관하여, 그의 고통에 관하여, 나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p. 38)

나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쓸모없어지는 것. 의자에 고요히 앉으려던 것뿐인데 이미 고통이 거기에 앉아 있는 것.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가는 것. (p. 40)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만 겨우 삶을 생각했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죽음만을 생각하는 동안 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잊었다. (p. 55)

나는 책상 앞으로 달려가 다급히 쓴다. 문장이 완결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마지막에 도달하지 않는다. (p. 69)

이것은 누구의 단어인가. 누구의 문장인가. 누구의 이야기인가. 그녀는 그저 한번만 그 안에서 온전히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완성된 문장의 힘에 붙들려, 문장이 단언하는 바를 믿고 싶었을 뿐인데. 존재에 미치지 못하거나 존재를 초과해버리는 단어를 읊조리면,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가는 음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실리지 않아, 차라리 그녀는 언어를 잃고 싶다. 아무리 말해도 말해질 수 없다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고 싶다. (p. 82)

무엇을 쓰고 싶지. 아니면 무엇을 읽고 싶지. 당신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멈추지 않고 쓸 뿐이고, 쓴다는 행위는 쓰이거나 읽힐 수 없는 것이다. (p. 94)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p. 95)

120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문장마다 빗금치어진 무제 를 제외하면 116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95페이지에 다다라서야 작가는 고백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 소설의 표현방식을 따라하며 소감을 적어보자면,

나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기시작했고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인데도 소설인지 모르겠다. 소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소설을 끝까지 읽기로 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인물도 없고 사건도 없고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계속 생각한다. 나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가는 죽음을 이야기 한다. 죽음은 때로는 꿈에서 때로는 음악에서 때로는 환영에서 때로는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작가의 머리에 번뜩인다. 작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생각일 뿐 일어나지 않았기에 작가는 계속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죽음이라는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사건이 되고 시간이 되어 줄거리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줄거리가 없다. 즉 아무 사건도 없다. 그 어떤 명징한 사물조차 등장하지 않고 소제목처럼 붙어 있는 피아노연주곡을 들으며 남긴 감상인가 싶었더니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그냥 책으로 내면서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음악이랑 글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은 자동피아노 인가. 대체 피아노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작가는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작가가 만약 바이올린을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바이올린이 되었을까 작가가 만약 첼로를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첼로가 되었을까. 아니다. 피아노는 자동피아노가 있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현을 직접 켜야 하므로 자동악기가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생긴 자동악기를 만들면 되는것 아닌가. 나는 지금 소설에 대한 느낌을 적고 있는 것일까. 그냥 작가를 흉내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생각을 되짚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마음을 공감해보려는 것일까. 나는 소설을 읽었다. 다 읽었기에 이렇게 이 소설에 대해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 것이 과연 읽힐 수 있을까?

연재를 마친 뒤 한해가 지나 출간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개고를 위해 작품을 다시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를 돌아보기가 쉽지 않아 원고 검코를 마냥 미뤄온 탓이었다. 개고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동피아노]의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내가 본 것이 바로 그렇게 찢기고 훼손된 언어였다. 끝없는 동어반복, 논리와 인과가 없는 진술, 상충되고 모순적인 사유가 끓어넘치는 정념에 매몰된 채 뒤범벅되어 있는 광경은 처참했다. 소설을 써오는 내내 심리적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없지만, 내게는 내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 문학적으로 제련된 작품이라는 최소한의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봄에 쓴 [자동피아노]는 내가 작가로서 세워둔 최후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증상이었다.

작가의 말 中

저자는 '작가의 말' 에서 자신이 그동안 극심한 자살충동과 우울과 불안증세가 있어왔음을, 치료를 받았고 호전되기를 딱히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죽음보다 삶을 생각하게 되었음을, 그리하여 평생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변하였듯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죽고싶은 충동에 시달리며 그 충동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작가의 글을 소설이라고 읽어야 할지 일기라고 에세이라고 읽어야할지 독백 혹은 고백이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가가 썼으므로 소설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소설책이라고 출판되었으니 소설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소설은 허구인데 허구가 아닌 글을 담고 있는 이 책을소설이라 부른다면 허구라고 부른다면 작가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되는데,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엇고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러한 작가를 보며 이 소설은 무엇인걸까. 이책이 소설인지 아닌지 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소설이건 증상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 읽는다면 어느정도 공감을 한다거나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삶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므로. 하지만 소설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이 소설이 얼마나 많이 울려 퍼질지는 모르겠다. 물론 저자는 그닥 많이 울려퍼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지 않긴 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이 책에 공감한다는 것은 저자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므로 저자는 자신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는 것 같으므로. 하지만 자동피아노라는 것이 원래 연주자 없이 관객도 없이 그저 저 혼자 음악소리를 내는 것이니, 작가가 없어도 독자가 없어도 이 글이 책이 되어 나온이상 죽음에 대한 생각의 돌림노래는 계속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어주는 관객이 없기를 바라며 울려 퍼지는 죽음의 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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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 아트?
엘리너 데이비스 지음, 신혜빈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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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스러운 아트, 엉뚱한 위트, 벅찬 감동!

작은 그림책 한 권이 선사할 커다란 충격

Why Art?



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외형상은 작은 그림책이긴 한데...

제목만 봤을 땐 예술에 대한 아~ㄹ트에 대한 대중서이겠거니 싶었다.

예술을 잘 몰라서 예술을 잘 알고싶어서 예술에 관한 대중서는 꾸준히 찾아 읽으려 하는 내게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끌리는 책이었다.

그런데...


읽고 나서 헉 했다. 이건 뭐지???

그림책이다 보니 순식간에 읽히는데, 다 읽자마자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책이 남기는 잔잔한 여운이 아닌 강렬한 엔딩으로 시작되는 느낌을 주는 이 마무리를 뭐라 해야할까.

여하튼, 작은 ? 로 시작해서 커다란 ! 로 끝나는 이 책은 다 읽자마자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떠올랐다.

 

 

 

이 책에는 9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흑백의 단순한 그림으로 진행되는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기법의 예술을 추구하고 있는 친구들을 소개한다.

처음엔 색깔 크기 예술가의 의도나 관객의 반응 소재 표현방법 등 예술을 분류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다가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예술가 집단을 소개한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 강한 작품들을 만들다가 '폭풍우' 를 계기로 함께 작품을 만들게 된다. 아주 안.전.한.작.품.

그런데 그때 돌로레스가 움직인다. 늘 진실어린 퍼포먼스 예술을 했던 돌로레스가. 그리고 묻는다. 어떻게 하면 우릴 구할 수 있냐고

 

 

왜 예술이냐고?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예술의 주변부를 보여주던 저자는

용기를 보여달라고 소리치면서 책을 끝낸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외침이 강하게 마음에 울린다.

묘한 책이었다. 이런 묘하게 강렬한 느낌도 감동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감동이 예술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던 걸까 생각해본다.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림으로 읽히고 퍼포먼스로 끝나는 이 책은 짧고 굵은 영상을 본듯한 느낌을 준다.

작고 안전한 상자를 부수어 내는데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 책이 그 힘이 되어줄 것이다. 예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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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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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 다이앤 아버스, 조앤 디디온의

윤리적·정치적 미학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작가들의 공감의 가치를 뛰어넘는 비감상주의적 기획

표지 中

 

 

지은이 - 데보라 넬슨

시카고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20세기 후반 미국 문화와 정치 분야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1945년 이후 미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 온라인 저널과 책 시리즈를 출판하는 Post45 컬렉티브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미국 시, 소설, 에세이 및 희곡 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및 젠더 연구, 사진학, 자서전 및 회고록, 미국 민족 문학 그리고 냉전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라는 표지 안쪽의 지은이에 대한 설명을 꼭 읽고 이 책을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은 지은이의 소개글을 꼭 닮은 책이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미국 문학과 문화를 시, 소설, 에세이, 사진학, 자서전 등을 통해 연구하고 그 연구 내용을 젠더의식으로 풀어내고자 한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미학적·정치적·도덕적 의무를 열정적으로 설파했던 여성 작가, 지식인 그리고 예술가들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문체의 유사성과 함께 20세기 후반 미국을 사로잡았던 고통과 정서적 표현의 문제에 대해 공통적인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이 여성 작가들은 직접적이고 선명한 시각으로 위로도 보상도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과업을 자발적으로 떠맡았기 때문에 터프하다. 이들 모두가 "감상적이지 않다"는 비평을 받은 적이 있다.

아버스, 아렌트, 디디온, 매카시, 손택과 베유를 고찰하는 것이 이 책이 지향하는 가장 큰 목적이라면, 이는 곧 2차대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우리가 고통과 맺는 관계에 대해 나눠온 이야기에 한 장章을 덧붙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여성 작가들은 모두, 그 과정에서 아무리 많은 걸 포기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변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들어가며 中

이 책의 도입부인 '들어가며' 는 상당히 긴 편이다. 저자가 6명의 여성 지식인을 고르고 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한꺼번에 이야기 하면서 주류로 인식되는 시대적 사회적 인식에 대해 이 여성들이 얼마나 차별화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긴 하다. 이후로 각 장 마다 한 명씩 설명되면서 이 6명을 묶는 통합적 관찰은 앞부분 뿐이라 다 읽고 나서 한번 더 '들어가며' 를 읽는 것도 좋다.

이 책에 나오는 6명을 다 알진 못했다. 시몬 베유와 다이앤 아버스는 이름 정도 들어본 듯 하고, 한나 아렌트와 수전 손택은 그들의 책 1권 정도 읽었을 뿐이고, 메리 매카시는 아렌트의 친구로서 알았을 뿐이고, 조앤 디디온은 전혀 몰랐다. 따라서 저자가 예로 드는 6명의 수 많은 저작들 중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이해에 힘들기는 했다. 게다가 이 책은 굉장히 미국식으로 쓰여진 연구서 같은 책이라 글 스타일도 나에겐 익숙치 않아 읽는데 노력이 좀 필요했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 6명의 주요 저작들은 세계1차 대전 과 세계2차 대전 그리고 베트남전 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나는 미국이 승전국이므로 전쟁에 대한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하지만 국가가 패전국이 아니라고 해서 국민이 고통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전쟁을 지켜봤던 사람들도 '전쟁' 이라는 고통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고통을 마음을 다해 공감하고 위로하고 의지하려는 주류적 인식에서 떨어져 나와 현실을 직시하면서 때로는 냉정하다 때로는 여성적이지 않다는 식의 비난을 받은 것으로 이 6명은 공통분모를 생성한다. 감상적과 감수성을 분리하고 비감상적 반감상적 보다는 비정과 냉정으로 오해받은 그 태도들을 터프하다는 표현으로 밖에 그나마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한 저자의 인식에 공감한다. 그리고 6명의 여성들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여성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책이냐 라고 묻는 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젠더의 인식으로서 페미니즘 책이냐 라고 묻는 다면 조금은 그렇다 라고 대답하겠다.

나의 시련이 쓸모 있기에 사랑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의 시련은 존재하기에 사랑해야 한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中)

기독교의 구원 서사는 수난을 해명하고 수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궁극적으로는 보상을 내린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비극이라는 양식을 파괴한다. (p. 72)

베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번뇌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베유가 보기에 구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야만 하는 천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상이다. 그리하여 천형을 통해 베유는 가톨릭 교회와 가장 큰 갈등을 밎은 주장으로 다가가게 된다. 바로 아나테마(파문)다. 베유의 연대는 교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을 포괄한다. (p. 76)

 

시몬 베유(1909~1943) 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검색해보면 기독교 신비주의 라고도 나온다. 베유는 굉장히 종교적 이타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종교가 사람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모두를 포용하는 종교를 생각했다. 당시 노동자계층의 절박한 삶에 마음아파하며 일부러 공장노동자로 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유의 사상은 평화주의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져 있었고 독실한 신앙인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신비주의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던게 아닐까 싶다.

베유는 특유의 엄혹하도록 논리적인 방식으로 먼저 인간에게 주권이 없음을 정립한 후 구속의 당위를 구성했다. 인간 주권은 자기망상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당위는 그 부담을 공동체로 넘긴다. 천형은 언제나, 또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으나 공동체는 결코 천형에 공모해서는 안 된다. 멸절은 주권 부재의 신학이다. 베유에게 주권자로서의 개인은 영원한 판타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판타지는 온갖 종류의 자기망상, 과대망상, 그리고 압제를 낳는 휘브리스로만 유지된다. 당위에 구속된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주권 부재를 인정하고 신학적 작업의 조건을 창출하여 고통과 수난을 가속하거나 불필요하게 가중하지 않는 것이다. (p. 81)

베유는 그리스 비극에서 많은 답을 얻은 것 같다. 베유의 책을 읽은 것은 없었지만, 그리스비극을 읽었었기에 그마나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베유에게는 국가도 주권도 다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하는 천형이라는 비극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만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평화적이면서도 비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인정 후에야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베유는 굉장히 인류애적 사랑과 공동체적 공존과 자각적 개인을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베유는 글쓰기 또한 자아가 사라지고 자아를 지우는 형식이라 상상했기에 멸절의 한 구성요소라고 보았다. (p. 85)

글쓰기가 번역이라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베유가 숭모의 대상으로서든 동일시의 대상으로서든 작가의 "나"를 지우려 한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칭의 엄격한 몰개성은 화자에게서 우발성과 관점을 걷어내고 문맥이나 사적 감정의 투사가 없는 화법을 창출한다. 이런 화법은 베유의 산문에 권위를 더해주고, 심지어 가장 열렬한 논쟁에서 조차 초연함, 혹은 "얼음 같은 냉정"을 잃지 않게 해준다. 베유의 산문에 미학적 흡인력을 주는 이런 자질들은 심적인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p. 86)

베유는 작업에서 공감(감정)이 아니라 사려 깊음(사유)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수난의 사정 혹은 조건을 안다는 것을 수난자들을 안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받은 개인을 희생자라는 종種으로 분류해 엮어버리는 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99)

궁극적으로 베유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바는 천형의 공포와 수난의 평범성을 인정하되 전통적인 기독교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베유는 인간의 무기력을 상찬하거나 부담을 덜어주려는 게 아니라 신학적 쓸모를 찾을 뿐이다. 무기력의 신학적 쓸모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약하고 제한적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천형이 지나고 남는 게 있다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고개를 들어 부재하는 신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p. 112)

 

베유의 몰개성적 문체는 뒤이어 나오는 다른 여성 작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몰개성적 문체가 비정과 냉정으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베유의 저작을 온전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되 읽은 베유의 문체를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베유의 천형과 신학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라는 푸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읽어야 했다. 인생은 하늘이 내린 벌과 같은 천형이고 그리스비극에 나오는 사건들 처럼 어쩔 수 없는 비극인데 삶이란 원래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라면서 신은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식의 개념들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런 삶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라면서 너무나 열정적으로 짧은 생애를 살다간 베유의 사상은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몹시 혁명적이다.

시몬 베유 부분을 읽는 내내 이반 일리치(1926~2002) 생각이 났다. 신앙인이면서 사상가이고 종교를 초월한 인류애를 지녔으면서 소박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 그 둘 이 만나서 교류했다면 뭔가 좀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왠지 멋진 그런 사상이 나왔을 것 같은데...

베유의 '주목'이 개인들의 관계에서 도출되고 이것이 결국 더 공명정대한 정치적 세계의 초석이 된다면, 야만적으로 흐르기 쉬운 현실을 대하는 아렌트의 무방비함은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아렌트는 복수의 타인과 함께 세계를 공유하는 대가로서, 또한 공유할 세계가 남아 있기라도 한 상태를 위한 대가로서 고집스럽게 현실을 직시하려 한다. 사유와 수난, 즉 공감의 동기는 아렌트의 파리아 개념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p. 125)

아렌트는 정서적 감각이 현실을 감정의 관할에 할당한다고 암시하고 있다. 정서적 감각은 청자가 상상하는 감정에 먼저 주목한 후 눈앞의 현실에 이차적으로 주목하게 해 현실이 오히려 가상의 감정에 봉사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정은 독자를 향한 아렌트의 근본적 질타, 즉 현실을 직시하라는 요구의 핵심이다. (p. 131)

 

베유는 고통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하면서 운명적이었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라면 아렌트는 고통을 직시하고 현실을 제대로 주시하며 사유하라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아렌트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 간극을 넘지 못했다.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p. 148)

아이히만의 무사유가 지적능력의 결핍 또는 교육의 결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아렌트는 무사유가 천성이나 사회화보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p. 151)

아렌트는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은 '무언가가 전체주의로 이끄는가 아닌가' 라고 믿었기에,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숙고에 대한 아렌트의 처방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으리만큼 명징했다. 바로, 모두 함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p. 152)

 

'악의 평범성' 이라는 개념은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태도 와 함께 굉장히 많이 오독되고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다.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개념이 아니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현실을 제대로 사유하지 않거나 현실을 아예 사유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고 자세였다. 그런데 아렌트의 사상 보다는 그저 새로운 심리학적 용어로만 취급되고 있는 것이, 사상 그 자체를 보려하기보다는 감정에 휩쓸려 아렌트를 평가했었고 여전히 그렇지 않나 싶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나 아렌트 부분에서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중심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풀어내고 있는 점도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아렌트의 사상은 하이데거 와의 교류에서 많은 부분 영향을 받았고 미국으로 망명 후 훨씬 정치적이 되었으므로 아렌트의 책 몇권 뿐만 아니라 생애 전체를 바라보면서 사상을 풀어냈으면 더 낫지 않겠나 싶었다. 아렌트는 굉장히 현실참여적인 사상가였기에 그가 살아온 시간의 흐름은 사상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전체적인 조망을 살펴보기는 어려웠다.

실천은 물론이고 이론적으로도 유대감과 집단동질성을 거부한 두 여성은 그들의 지지를 당연히 예상했던 집단들로부터 파리아로 낙인찍혔다. 20세기 후반의 사회운동들이 공감능력의 치유력을 연대성의 접착제이자 진보 정치학의 연료로 권장할 때, 아렌트와 매카시는 소스라쳐 움츠러들었다. 사회 정의라는 목표가 아니라 그리로 가는 길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들로서는 이런 입장을 구분하는 게 항상 쉽지는 않았다. 공감능력이 없는 윤리학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에, 아렌트와 매카시는 전제가 다를 뿐 도덕적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냉정한 인간들로 비쳐왔다. (p. 184)

소설가인 메리 매카시는 한나 아렌트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둘은 '같은 편에 홀로' 있는 절친 이었다. 아렌트의 사상은 매카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매카시는 소설가 였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쓰는 소설이 아닌 자전적 소설을 주로 쓴 작가로서 작품 자체로 인한 작가적 명성 보다는 당시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하는 글들로 이름을 얻은 작가였다. 그러한 글들에서 매카시는 신랄한 직시를 드러냈고 그러한 신랄함은 사상적 토대가 탄탄한 아렌트와 다르게 소설적 표현을 사용했기에 서로 공존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도발하면서 매카시가 독려하는 "용기"는 역설적이다. 직시하는 자는 사실에 항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항복은 수동성과 등치될 수 없다. 오히려 항복은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대하는 고통스러운 행위다. 매카시는 지식인과 자유주의 기자들에게 사실을 막는 방엉기제를 버리라고 요구한다. ...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인지를 수양하는 노력이기에, 매카시는 지식인과 자유주의 파르티잔이 모두 고통스럽고 끝이 없는 자기 소외의 과정에 참여하기를 요구하는 셈이다. (p. 204~205)

저자는 매카시의 몇몇 소설들을 인용하며 매카시의 소설적 특성을 살펴보면서, 당시 주류의 소설들과 다른 문체와 관점을 가졌던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소설속에서 독자들이 불편해할만큼 날카롭게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매카시가 베트남전 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기고했던 글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아쉬웠다. 내가 봤을땐 매카시는 소설보다는 기고문들로 자신의 색을 더 많이 드러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적 재능은 그닥 별로 였던 것을 본인도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 아렌트 부분에서도 그랬지만 매카시도 생애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남성편력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여러번의 결혼과 이혼은 한나 아렌트의 사상 못지 않게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연민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초래한 원인과 공범자가 된다. 우리가 느끼는 연민이란 무기력이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960년대 집단적 희열에 빠진 시대정신으로, 모든 형태의 미학적 실험이 우리를 에워쌌을 때, 손택은 해석학보다는 "예술의 성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인 느끼고" 감각을 통해 "있는 그대로 찬란하게 빛나는 사물들"을 체험하라고 주문했다. 논조가 열정적이기는 하지만 손택의 근본적 통찰은 매카시와 아렌트의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p. 242)

손택도 매카시와 아렌트처럼 감정적 자기 제어를 선호했지만, 감정의 전시에 엠바고를 거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체 내면의 상태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손택은 미학을 단순히 이해와 지식의 도구로서 뿐 아니라 감정 관리의 도구로 이해하기도 했다. (p. 244)

 

손택은 사상가 까지는 아니고 비평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매카시의 후계자?! 인식될 만큼 직설적 표현을 사용한 기고문들로 주목을 받은 손택은 매카시와 아렌트의 뒷 세대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상도 변하기 마련, 손택이 살던 시대는 세계대전 직후의 세대와는 또 다른 시대였다. 저자는 <은유로서의 질병> 을 예로 많이 들었는데, 내가 읽은 손택의 책은 <타인의 고통> 뿐이라 손택의 암투병 관련해서는 공감이 잘 안됐지만 사진 에 대해서는 다행히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읽을 만 했다. 손택은 보여지는 것 이면에 숨어있는 것을 제대로 보기를 요청한다. 보여지는 것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그런 면에서 손택에 뒤이어 나오는 다이앤 아버스는 손택의 비판을 한 몸에 받은 사진작가이다.

손택은 아버스가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이 내재한 실천의 호소는 전혀 없이 시각적 수사학만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양심을 움직이려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아버스가 진열하는 순수한 수난은 '마취제' 가 된다. 고통이 고통의 진통제 역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택이 주장하는 아버스 사진의 핵심 논점은,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 자체의 역치를 높이려는 의도다. 이렇듯 혐오가 잠식되면 위험한 결과를 낳아, 점점 더 세계의 불행에 반응하기 어렵게 만든다. (p. 274)

모든 것은 자주 접할 수록 무뎌지기 마련이다. 좋은 것도 한때고 잔인한 장면도 익숙해질 수 있다. 아버스의 사진을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아버스의 사진들은 지나치게 꾸밈없는 현실적 사진이었는가 보다. 그것도 그냥 사진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 불편해하는 것을 찍은 사진들. 그런 사진들을 자꾸 봄으로써 그런 것들에 무뎌지는 위험을 손택은 지적한다. 하지만 아버스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사진작가였다.

흠/틈에 관한 아버스의 설명을 믿는다면, 그것을 사진에 드러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문제가 된다. 즉, 숨겨진 사적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것, 혹은 더 나아가 평범한 인간의 리얼리티를 포착하지 않겠다는 거부가 된다. 사진은 이렇게 관객과 사진의 대상 모두 동시에 볼 수 없는 "틈"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공표한다. 아버스의 초상 사진에 대한 표준적 설명은 그녀가 이 틈을 잘 구슬려서 보이게 했다는 것, 사진 속의 인물들이 무심결에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그 숨겨진 특징보다는 그 명백함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p. 314)

아버스는 평범한 사람중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순간을 혹은 아예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진 찍었던 것 같다. 그녀의 사진은 직설적이었고 '쳐다봄으로써 모욕을 주는 것과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모욕을 주는것' 의 구분을 헤깔리게 만든다. 아버스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아버스의 사진들은 적어도 그 순간 아버스에게 영감을 주었고 아버스는 자신의 사진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그 순간적 영감들을 항상 추구했던 듯 하다. 누가 뭐라하건 노골적으로.

조앤 디디온은 미국에서는 유명한 작가인가 본데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어서 이 책에 등장하는 6명의 여성중 유일하게, 거의 공감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매카시와 비슷하게 감상성을 중화하고 상처를 드러내는 작품을 쓰면서도 매카시와 다르게 결코 자기 자신을 소설속에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디디온의 글쓰기 특징은 추론(글쓰기는 스스로 말한다), 경사(중심보다는 주변부가 초점에 들어온다), 몰개성(심지어 "단어의 배치" 마저 작가보다 더 큰 인지적 작위를 확보한다) 이라고 하는데, 작품을 하나라도 읽어봤어야 했었다는 아쉬움만 남을뿐...

디디온은 이 책에서 도덕적·미학적인 경성과 자신의 관계를 공공연히 검토하고 재평가한 유일한 여성 작가다. (p. 390)

디디온에게 자기연민은 굴욕적이다. (p. 402)

"네 감정은 검토하지 마. 절대로 감정을 검토하지 마.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은니까" 디디온은 딸이 (디디온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충고를 따랐고 자기연민에 대한 어머니의 교훈을 몸으로 흡수했다는 데에 좌절한다. (p. 405)

 

디디온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애매하다. 디디온의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말년에 아픈 딸에 대한 모성으로 작가로서의 자신의 스타일을 후회하는 디디온을 묘사하며 글을 마무리하는데, 앞서서 등장시킨 5명의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전체적이 아닌 부분에만 집중하더니 디디온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서술하지 않은 건지 좀 의아스럽다. 6명 중 유일하게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이라 저자의 아쉬움을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데보라 넬슨의 <터프 이너프>는 이 팽배한 유비의 사회적 역학을 들여다보면, 여성의 젠더에 '할당'된 적절한 감정의 온도가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터프한 지성인들의 공통점은, 누구보다 '차가운' 현실 인식을 견지하되 사회적 불의나 정치의 실패로 부당하게 수난받는 약자들을 구제하고 개혁을 선도하려는 의지만큼은 '뜨겁다'는 데 있다. 어떤 남성 지식인에 비교해도 '터프함'에서 뒤지지 않았던 이들은, 온정과 연민이란 수난자가 아니라 불행한 수난자들의 시련에 공감하는 자신의 도덕성에 심취하는 허영심에 불과하다고 믿었기에, 무력한 감상주의를 거부하고 환상없는 현실 직시에 근거한 유효한 정치적 비전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이들의 '차가움' 나아가 '비정함' 은 현실을 대하는 감정의 온도라기보다는 잘 계산된 '지적 스타일'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자 해설 中

역자의 해설은 저자가 앞에서 설명한 이 책에 대한 구상보다 좀더 잘 정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역자는 이 책이 명백히 페미니즘을 지향하지만, 막상 이 책에 등장하는 6명의 여성들은 당대의 페미니즘과 명확한 거리를 두었다고 말하면서 이 책의 모든 논의와 더불어 페미니즘의 논의도 단순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 책이라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했던 여성들만 등장하는 이 책을 페미니즘 책으로 읽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역자가 말하듯이 맹목적으로 오도하는 감정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서로 다른 유혹들에 넘어가지 않고 오직 논의의 핵심만을 직시할 수 있는 사고를 하려는 자각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해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보려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사전지식 없이 논의를 따라가기엔 솔직히 좀 버거운 책이긴 했지만, 차별성 강한 행보를 보여줬던 6명의 여성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의미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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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12-27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소중한 리뷰가 아니었더라면, 이 좋은 책을 모르고 지나칠뻔했습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메리 더글라스 등 지성들을 인터뷰한 두터운 책이 생각났는데 정작 제목은 머릿 속에서 지워졌네요....서가에 가면 위치를 기억하니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8 대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대표작

"정확하고 압도적인 문장, 인간의 연대와 따뜻함에 대한 희망"

 

 

2018년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었다. 노벨문학상을 선정하는 한림원에서 성추문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9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두 명이긴 했다. 이 두명 중 한명에 대해서도 또 논란이 일어서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여하튼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한 문학단체들이 한시적인 상을 마련했고, 그 수상자가 바로 이 소설의 작가인 마리즈 콩데 였다.

마리즈 콩데는 1937년 프랑스령 과들르프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이다. 흑인이었으나 부유하게 자란덕에 프랑스 유학을 가서야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현실과 떨어져 자라왔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유학생활 중 미혼모가 되자 집안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끊긴 후 흑인/여성/미혼모/가난 이라는 온갖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뼈저리게 겪게 되면서 작가적 양분을 체득하게 된다. 프랑스어 교사 자격으로 아프리카로 들어가 13년간 살면서 '검은 백인'으로 자랐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고 아프리카를 깊게 알아가게 된다. 이때의 아프리카 체류경험이 남은 일생동안 작가의 문학적 바탕을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세일럼 마녀 재판' 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역사소설인 것은 아니다. 1692년 시작된 이 마녀 재판은 20명이 처형됐고 50여명이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중 티투바 라는 앤틸리스제도 출신의 흑인노예여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과 맹목적 광신이 희한방 방식으로 드러난 상징적 사건으로서 온갖 연구 대상이 되었던 이 사건에서 티투바 라는 흑인노예여성에게 주목한 사람은 마르지 콩데 뿐이었다.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은 티투바에 대해 작가는 소설적 삶과 생명을 부여한다.

1690년대 노예선이 수시로 왕래하던 남미대륙 위쪽에 있는 작은 섬 바베이도스.

노예선에서 강간당한 여성이 섬에 내려 낳은 딸 티투바. 자신을 낳아준 엄마 아베나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딸을 품에 안아준 양아버지 야오. 노예의 삶일지언정 세식구가 각자의 처지를 조금씩 받아들이며 적응해가던 때 농장 주인에게 아베나가 겁탈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인해 아베나와 야오는 죽는다. 일곱살 어린나이에 잔인하게 부모를 잃은 티투바를 숲속에 살던 만 야야 라는 노파가 거두어 들인다. 만 야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흑인여성이었고 티투바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배워나간다.

그녀는 모든 것이 살아 있음을, 모든 것에 영혼이 있고 숨결이 있음을 알려줬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도. 인간은 말을 타고 자신의 왕국을 돌아보는 주인이 아니라는 것도. (p. 22)

티투바가 자연을 배우고 영을 만나게 되면서더 큰 배움이 필요해지려 할때 만 야야는 생이 끝난다. 티투바는 아직 열네살 소녀였을 뿐인데..

죽은 자는 우리 마음에서 죽어야만 죽은 거다. 우리가 망자를 소중히 여기면, 우리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존중하면, 우리가 망자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무덤에 갖다 놓으면, 우리가 규칙적으로 망자를 추모하고 망자와 교감하기 위해 묵상을 한다면, 망자는 산다. 망자는 관심을 갈망하고 애정을 갈망하여 여기저기,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망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육신을 우리의 육신에 바싹 갖다 댄 채 우리에게 도움이 되려고 안달이 나 있으니, 망자를 불러내려면 몇 마디 말이면 된다. (p. 23)

어린 소녀 티투바는 숲속에서 혼자 배운 그대로 자연을 집 삼아 살아간다. 영으로 존재하는 세명의 귀한 어른 들과 함께.

하지만 몇 발짝만 숲을 나가면 농장과 사람들과 노예들이 있었고, 어느날 한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에게 처음으로 '마녀' 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만 야야 와 아베나가 만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 농장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스스로 노예의 삶을 살게 된 티투바가 만난 백인들은 다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에 대해 말을 하는 동시에 나를 무시했다. 인간 지도에서 나를 말소해버렸다. 나는 비존재였다. 보이지 않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들보다도 더 보이지 않는 존재. 적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능력이라도 갖추고 있지 않는가. 티투바, 티투바는 그 여자들이 허용하는 꼭 그만큼의 실재감밖에 없었다. 그건 끔찍했다. 티투바는 추하고 뚱뚱하고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 그 여자들이 그러기로 결심해서였다. (p. 46)

농장에서 지내는 노예의 삶은 힘들었다. 하지만 농장주인이 자신을 새주인에게 팔아버리고, 새주인을 따라 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되면서 더 끔찍한 삶을 만나게 된다.

노예의 삶으로도 모자라 혹독한 마녀재판을 겪고 새롭게 유대인 주인을 만났을때 이제 좀 행복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줬던 유대인 가족도 다른 이들에겐 낯선 이방인들이었고 배척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이 가족이 자기 자신의 불행이 아닌 모든 것에, 세계를 떠돌며 겪는 유대인들의 시련이 아닌 모든 것에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줬다. 어쨌든, 그 슬픈 사건에 대해 알게 됐을 때도,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잔인함이 특징이라고 그들을 탓하며 내 죄를 완전히 사해줬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이보다 더 잘 맞는 주인을 만날 수 없었으리라는 소리다. (p. 200)

평온한 시간도 잠시뿐... 마을 사람들이 유대인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불을 지르고 아홉명의 아이가 모두 죽고 만다. 아이들을 잃은 남자는 모든 것을 잃은 곳을 떠나며 티투바에게 자유를 준다. 그렇게 티투바는 자신의 고향 바베이도스로 돌아오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십년만에 돌아온 바베이도스는 여전히 노예들의 비참한 삶이 우글거리는 곳, 그러나 조금씩 잔란의 새싹이 자라고 있는 곳이었다.

티투바는 숲속의 은신처에 돌아오고 근처의 농장 노예들은 그녀를 반기며 의지한다. 티투바는 노예들을 치료해주고 노예들은 돌아온 마녀에 대한 헛된 신화를 꿈꾸고 싶어한다. 그리고 티투바가 살려낸 한 소년이 신화를 벗어나 움직임을 시도한다.

티투바... 치유사로서의 재능은 존중해요. 내가 이렇게 태양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여전히 살아 있는 게 당신 덕이 아니겠어요? 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사양할래. 미래는 그 미래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들거니까. 날 믿어요. 주술과 동물을 제물로 바쳐서 거기에 도달하는 게 아니에요. 행동을 통해서입니다. (p. 261)

하지만 행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은 발각됐다. 마녀재판에서도 살아남았던 티투바는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죽음이후의 존재로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들은 티투바를 잊지 않았다. 티투바의 노래를 불렀다. 티투바의 노래가 불리는 한 티투바는 아마도 그들 곁에 내내 머무를 것이다. 그들을 치유해주기 위해...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아님에도 아프리카적 신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소설이었다. 주술사 와 마녀의 차이는 결국 믿음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신앙과 광신이 믿음의 차이인 것처럼. 하지만 그 믿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목적이 있는 것이기에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술이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순수한 믿음은 인간을 구할 수 있으나 순수하지 못한 믿음은 파멸을 가져올 뿐인것을...

세일럼의 검은 마녀, 바베이도스의 주술사, 티투바는 온전히 그녀만의 존재성을 강하게 각인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녀가 흑인이고 노예이고 여성이라는 것이 티투바 개인으로서의 특성을 다 가리는 것이 아니라서 이 소설은 1986년 작품임에도 시대를 떠나 읽을 수 있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흑인노예와 마녀재판과 여성의 성적차별이라는 큰 시대적 화두가 아니어도 티투바 라는 캐릭터가 여전히 생생하게 읽히고 있기에 그저 인간적으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마리즈 콩데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상을 받은 대가는 역시 상을 받을 만한 뭔가가 있긴 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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