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한국 사회의 여성과 인권, 비주류, 공동체, 계급에 관한 거침없는 제안

세상이 챙겨 주지 않는 나의 권리를 직시하자

 

 

표지만 빼놓고 전부다 마음에 쏙 드는 책이었다.

진중하지만 시원스런 내용에 상응하는 멋진 표지 뭐 없었으려나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 ㅎㅎ

김지윤 저자를 방송에서 몇 번 본 적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자주 등장했었고 그외에도 강연이나 인터뷰등 다른 코너를 통해서도 봤었는데, 볼때마다 어쩜 그렇게 똑부러지게 말씀을 잘 하시는지, 냉철한 판단과 정리된 언어가 볼때마다 멋지다 생각했었다. 그러니 저자가 낸 책에 대한 기대가 없을 수 없었고, 저자를 똑닮은 이 책은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사실 기대를 안했다면 모를까 기대하고 읽었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책들이 은근 많다;;;)

책은 두껍지 않아서 부담없이 읽히면서도 간결하게나마 그동안 굳이 들여다보려하지 않았던 어려운 곳들을 하나하나 드러내준다. 직설적인것 같으면서도 과하지 않게 적절한 부드러움은 예민한 문제를 읽을때도 편안하게 여길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저자는 말도 잘하는데 글까지 잘쓰네~!!

당신의 방 안에 코끼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큰 덩치 때문에 코끼리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 모를 수 없는 당신은, 코끼리를 방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쓸 것이다. 먹이를 줘서 유인해 보기도 하고, 힘껏 밀어 보는 발칙한 행동도 할 것이다. 하지만 코끼리가 마음이 동해 알아서 움직이지 않는 한, 사실상 그 거대한 초식 동물을 방 안에서 내쫓을 방법은 없다. 결국 내쫓는 것을 포기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코끼리가 방 안에서 움직이다 건드려서 부순 물건을 정리하거나 그 큰 덩치가 남긴 배변을 재깍재깍 치우는 일 정도이다. 그렇게 좀 귀찮아진 주변 정리를 하면서, 마치 코끼리는 존재하지 않은 듯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p. 4)

'애써 피하고 싶은,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을 뜻하는 '내 방 안의 코끼리' 라는 표현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한다고한다. 어렸을 땐 커다란 코끼리를 방에서 내보내는 것을 꿈꾸고 살았으나 나이를 먹고 하루하루가 피곤해지면서 코끼리로부터 눈을 돌리면 편하다는 것을 알게됐다는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를 직시해야 함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사회라는 '방'안에 존재하는 '코끼리' 같은 안볼래야안볼수없는 문제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모든 이들이 '주류'라는 안전망을 좇지만, 사실 우리는 대체로 '비주류'이다. 나는 남이 믿거나 말거나 '비주류'라고 말한다. 잘난것보다 못난것이 많은 인간이었기에, 비주류 속에서 편안함과 안온함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비주류'로서의 정체성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많은 비주류들과의 교류와 공감을 통해, 코끼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길 원한다. (p. 10)

저자도 책 속에서 인정하듯이 객관적인 조건들로 봤을 때 저자를 비주류라고 보긴 어렵다. 부유하게 자랐고 해외유학과 다양한 곳에서의 이력은 어려움 없이 많이 배운 지식인 으로 손이 닿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속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지만, 그녀의 국제정세 및 한국사회에 대한 식견을 읽다보면 적어도 주관적인 그녀의 견해는 비주류의 정서와 닿아있다. (그 정서가 공감으로 연결되길 나또한 바란다.)

<1장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 에서 저자는 여성의 참정권 역사를 살펴보면서 여성의 권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되짚는다. 한국의 경우는 광복과 동시에 새로운 체제 속에 당시 선진국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여 여타한 여성 참정권 운동 없이 바로 여성참정권이 보장되었지만, 서양의 경우 여성의 참정권 획득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지금의 페미니즘이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한계도 직시하면서 과거에 저질렀던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염려하고 있었다.

원래 차별은 취약 계층에게 더 잔혹하게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많은 진보 단체와 학자들이 유리 천장을 외치며 이를 깨뜨리는 이들에게 환호하는데,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훨씬 더 심각한 여성 차별에 대해서는 얼마나 주목하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불만이다. 이 사회는 성공에 핀 조명을 맞추고 이를 몇 백배 빛나는 스토리로 만든다. 왜 그러냐고? 알파걸의 성공은 화려한 승전으로 남지만, 취약 계층 여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은 여봐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눈부신 기록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p. 50)

나는 이미 기득권 구조에 속해 있는 여성이다. 그리고 나의 '기득권'의 정체성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압도한다. 그래서 여성 단체나 여성학자, 여성 운동가들이, 대기업 여성 CEO비율이니 여성 국회의원 비율 등과 같은 기득권에서의 평등보다 취약 계층에서의 평등을 더 목소리 높여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것이 솔직히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목소리는 아닌가 하는 못된 의구심도 든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차별과 성희롱으로 인해 마트 창고에서 눈물 흘리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p. 52)

중요한 것은 좀 더 많은 여성이 기득권 집단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도록 하는 것이다. 몇몇 알파걸들의 유리 천장 깨기가 아니라 수많은 봉순이 언니들이 함께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에서 시작해야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를 위해서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를 여성계와 정부, 정치 엘리트들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저 한 표를 얻기 위해 뻔하고 듣기 좋은 이야기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p. 70)

 

여성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으나 유리천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성 국회의원의 수와 여성 CEO의 수가 증가했다고해서 여성 인권이 향상됐다고 말하기도 찜찜하다. 소수의 성공사례로 위안삼고 살기엔 일반적인 여성의 처우조건은 그닥 나아진 것이 없다. 상징적인 성공사례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저자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2장 나는 약자인가, 강자인가?> 에서는 장애인, 성소수자 관련하여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약자와 강자가 명확히 구분될 수 없음을 그리고 소수자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당연한 명제가 당연하게 통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며 새삼 깨닫게 한다.

 

사회적 소수자가 '소수자'로 남거나 불리는 것은 그들을 제외한 이른바 '다수'집단이 그들의 탈소수자화 내지는 주류로 편입되어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별로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p. 94)

국가나 사회는 소수자의 권리를 나서서 먼저 보호해 주지 않는다.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다양성이란 골치 아프기만 한 것이다. 우생학이 저명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효율적으로 사회를 컨트롤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우수한 사람들이 생산적으로 알차고 똘똘하게 문제 없이 살아가 주는 것만큼 국가에게 좋은 것이 없다. 평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챙겨 가며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다. (p. 99)

내가 좋고 싫음의 선호도가 다른 이의 삶을 이등 시민의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건 인권 침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p. 118)

대체로 인간은 '우리'라는 집단에 속해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소속감'은 '안정감'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우리' 집단에 속해 있을 대에는 '그들'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p. 124)

 

'우리' 라는 말은 우리가 아닌 '당신들'이라는 상대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구분은 누군가를 제외시키고 소외시킨다. '우리'안에 들어가 있을때는 편안하지만 밖으로 한발자국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우리'였던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장애인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순간이 온다면? 나의 가장 절친이 알고보니 동성애자였다면? 우리는 손쉽게 우리 였던 사람들을 내칠 것인가?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나름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3부 공동체는 단수인가, 복수인가> 에서는 공동체의 신뢰도에 대해 이웃, 국가, 국제 사회로 범위를 넓혀 가면서 어떻게 신뢰도가 무너지고 분쟁이 발생해왔는지 살펴봄으로써 공동체의 배타성을 상쇄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보게 한다.

같은 지역에 사는 데도 왜 어떤 사람은 이웃과 지역 공동체에 대한 신뢰도가 다른 사람보다 높은 걸까? 이웃에 대한 신뢰 수준에 강한 긍정적 영향력을 가진 변수는 무엇일까? 소득수준? 교육수준? 연령? 정답은 지역 주민이 자가 自家 에서 사는지 여부였다. (p. 136)

'집'은 사유 재산에 따른 권리 및 의무를 챙기면서 자연스럽게 주거의 목적을 넘어서 정체성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과 비슷한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만고만한 동네에서는 서로 정체성을 나누는 '이웃'이라는 막역한 정서가 생성된다. 그런데 이웃끼리 공유하는 '사회적 자본'은 배타적 성격을 가지기 쉽다 단순히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한 애착을 넘어, '우리동네에 사는 이웃'에 대한 검열까지 시작한다. (p. 141)

 

다른 다양한 예들 보다도 '자가 소유' 에 대한 구분으로 공동체적 신뢰도가 좌우된다는 분석은 왠지 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곧 수긍하게 됐다. 아파트 단지 혹은 아이의 학교 등 묶이는 동시에 배타적이 되는 경험을 안가져본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부족 간의 분쟁은 400여년간 아프리카 대륙에서 진행된 노예 무역에 기인한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뚱뚱하고 탐욕스러운 백인 노예 상인들이 붙잡힌 아프리카인들을 노예선에 태워 가는 장면만 상상해 왔다. 그런데 그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누가 노예 상인에게 넘긴 것일까? 당연하지만 노예 상인에게 건장한 아프리카인을 제공한 것은 같은 아프리카인들이었다.(p. 147)

 

아프리카에서 지속되고 있는 내전을 보면서 서구열강에 의해 잘못된 국경선 때문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벌과 납치로 동족을 팔아넘기고 누린 댓가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더 많은 무기였고 서로에게 그 무기를 겨누는 일촉즉발의 긴장상태가 400년간이나 됐다는 것이... 자신의 가족 외에는(때로는 가족조차도 믿을 수 없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간을 400여년간 지속한 곳에서 부족 민족 국가 그렇게 공동체로 엮이는 것은 얼마나 불안한 선택인가...

연합군의 승리는, 미국은 명백히 강한 연방으로 묶여 있는 국가이고, 주는 연방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을 만천하게 명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 탓에 진정한 미국의 건국은 남북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주 정부에 대한 충성도보다 미합중국에 대한 애국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진정한 연방 국가로 탄생하게 된 남북전쟁 이후였다. (p. 153)

미국의 남북전쟁 하면 흑인노예해방이 전부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전에는 복수형으로 쓰였던 미합중국이란 단어가 이 전쟁 이후에야 단수형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북전쟁 이후에야 연합체가 아닌 하나의 미국이 된 것이었다.

사실 '민족주의'와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계에서 '민족'은 '민족주의'가 탄생시킨 개념이고, '민족주의'는 근대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편이다. 절대 왕조의 시대가 끝나고 국민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 주던 종교의 힘마저 쇠퇴한 근대 시민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민족이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p. 160)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무너지면서 신분 사회가 해체되고, 이 과정에서 등장한 외부의 억압적 정치 세력인 일본이라는 존재가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발전시키고 공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출발한 민족주의 정신은 한국 전쟁과 분단 이후 남과 북 양쪽에서 모두 독재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훌륭하게 활용되었다. (p. 164)

함께 하나의 국가를 구성해서 살아야만 한다는 이 결연한 민족적 의지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뒷목을 잡고 있는 일제 강점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지킬 수 없었던 하나의 국가, 지킬 수 없었떤 하나의 민족,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한 치욕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서 '통일'이 꼭 필요해진다. (p. 170)

강한 민족주의가 만든 가장 큰 부작용은 배타성이다. 강한 '우리'의 관계는 악의적인 '그들'이 있어야 정당성을 가지고 더욱 공고해진다. 특히, '그들'이 '우리'에 비해 열등하거나 비열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면 '우리'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계망에서 선한 당위성을 가진 집단으로 승화된다. 선한 당위성이 강해지면 내가 속한 '우리'는 정의로워진다. '우리'집단의 존재 가치는 더욱 올라가게 마련이고, 집단 공동체의 자긍심은 절대적인 것으로 완성이 된다. (p. 179)

 

민족주의 에 대한 부분은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했다. 반만년을 이어온 한민족 이라는 개념에 상당히 익숙한 우리의 민족성이 실은 태동한지 얼마 안된 것인데 한반도에서 있었던 수많은 전쟁을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도, 왕도 종교도 사상도 힘없어진 시대에 왜 민족주의는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것인지도, 통일의 당위성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위치인가 하는 의문도 모두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질문을 생각하더라도 '배타성' 에 가로막힌다. 이 배타성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균형을 맞춰나갈 것인가...

<4장 계급이 쏘아올린 빈곤 곡선> 빈부격차의 배경과 현상 그리고 비만과의 관계성과 계급 사다리 현황을 살펴본다.

소득 불평등이 심할수록 계급 간 이동이 어려워지는 패턴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불평등하고 계급 이동도 안 되는 나라는 미국이었다. (p. 213)

지금의 시골 생활은 소싯적 물장구 치고 개구리 잡으며 노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도시에 거주하는 청소년에 비해 농어촌 거주 청소년의 비만율이 오히려 높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변화한 시골 풍경이 아니라 비만의 사회 구조화이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살수록 아동 청소년 비만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p. 222)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기회균등과 성공신화로 장식됐던 나라였다. 그러나 (과거에도 과연 그 장식이 맞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가장 불평등하고 계급간 이동도 어려운 나라인 것이 여러가지 통계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국은 겉모습과 너무나 다르다.

한국의 도시와 농어촌 소득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 격차는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환경도 바꾸고 있다. 비만율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문제점을 드러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 국방부는 군인 후보군이 고갈되지 않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비만이 국가 안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제대로 된 식습관과 의무 교육을 마치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 비만 여부가 갈리는 것처럼 미국도 사회 구조적 이유로 비만 여부가 결정된다. (p. 224)

인종 장벽이 낮고 안정적인 삶을 제공하는 덕에, 군대는 많은 저소득층의 유색 인종 젊은이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사다리였다. 그 사다리가 어이없게도 비만에 발목이 잡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비만은 또다시 경제 소득에서 기인한다. 또 다른 악순환이 만들어졌다. (p. 226)

 

미국은 성인 비만율이 40%, 과체중까지 포함하면 70%가 넘는다고 한다. 비만인구의 증가는 보건국이 아닌 국방부에 가장 위험신호였다. 징병제인 한국과 달리 모병제인 미국은 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지원해야 한다. 따라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엄청 많다고 한다. 문제는 비만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군인의 체격요건을 갖춘 성인비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속도라면 군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모자르게 될지도... 미국의 군인지원자 감소 이야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빈부격차가 커지고 저소득층의 비만율이 높아지는 것이 총알받이 군인을 뽑지 못하게 되어서야 문제점으로 인식하게 된건가 하는 안타까움...

이른바 '강남좌파'가 그것이다. 노동자와 약자의 권리에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한국의 강남좌파는 '정의'나 '공정' 같은 가치에 방점을 두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하고, 환경 문제, 동성 결혼 합법화와 여성 인권, 이주민 문제와 같은 소수자 이슈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거대 담론을 펼친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대변해주지 않는 집단이 생겼다. 바로 전통적으로 진보 좌파가 대변해 왔던 노동자, 농민, 저소득층을 비롯한 취약계층이다. 좌파고 우파고 모두 천상계에서 노닐고 있고,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환경 이야기, 동성 결혼 합법화, 이주민 인권 이야기나 하고 있다. 우파야 원래 있는 사람들 편이었다손 치더라도, 내 편에 서 있다고 하니 그동안 표를 줘 왔던 좌파 정당 마저 그러는 것은 더더욱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갈 길 잃은 표심을 잡은 사람의 대표주자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p. 245)

변해가는 세계로 인해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을 대변해 줄 사람이 없으니, 불평등은 해결될 수 없고,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무기력해지고 분노만이 쌓인 대중들을 트럼프를 비롯한 포퓰리스트들은 그렇게 휘어잡은 것이다. (p. 246)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구나... 왜 소외된 약자층에서 부자들 입장을 대변하는 편에 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얕은 선동인것을 알면서도 포퓰리스트들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속내를 생각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감대와 간극이다. 간극이 계속 벌어지면서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토대를 잃어간다. 산업 재해로 젊은 청년이 화학 발전 공장에서 쓰러져 갈 때, 공장에서 일해 본 적 없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동정심 외에 다른 감정을 느꼈을까? 안타깝다는 인간적인 감정은 아무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 그 동정심은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기억 밖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극을 좁히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p. 250)

늘 그렇듯 작은 희망은 남아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손놓고 있을 게 아니라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동정이 아닌 공감을 하고 우리와 당신들의 구분이 아닌 간극을 좁힌 공동체를 위해 멀기만 한 이상이 아니라 가까운 주변부터 관심을 가벼보는 것이 어떨까.

ps. 책속에 나온 한 논문의 제목에 눈길이 꽂혔다. <21세기 자본론> 을 펴낸 토마 피케티 교수가 2018년에 낸 논문 이라는데,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 불평등의 증가와 변화하는 정치 갈등의 구조' 가 그 제목이다. 브라만 좌파 와 상인 우파라... 어울릴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는데 너무나 잘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서 이 논문의 내용이 궁금하지만 영어무식자라서 안타깝지만 패~스하는 걸로;;;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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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구 - 4.19혁명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윤태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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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4·19 혁명

윤태호가 그린 한국 민주주의의 굴곡진 역사와 그 안의 사람들

 

 

나는 웹툰을 보지 않는다. 어렸을때 만화책은 꽤 봤지만... 웹툰은 왠지 손이 가지 않는다. 나는 종이책을 선호한다.

윤태호 만화가의 이름은 여러번 들었었다. 이끼 와 미생 이라는 영화 와 드라마의 원작이 만화라는 것을 통해 알게 됐다. 만화의 무거움을 처음 느끼게 해준 작가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의 만화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대단한 작가였다. 이 얇은 만화책 한권으로 이런 묵직한 여운을 줄 수 있다니!

그림은 그저 자연스럽게 거들뿐 핵심은 스토리였다. 만화책이므로 짧은 문장과 간결한 대화로 이끌어가지는 서사가 이렇게 풍성한 감정을 전해주다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배경은 4·19혁명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시리즈의 한 권이다.

그래서 4·19혁명을 만화로 표현한 역사만화책이겠거니 싶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새롭게 읽히는 드라마였다.

4·19 혁명이 일어난 시기의 전후는 격변의 시기였다.

일제가 물러가고 광복을 맞이했으나 분열 속에 전쟁까지 치루고 갈라선 땅에서 민주화를 가장한 독재가 시작되던 때였다.

1945년 광복부터 1960년 4·19혁명까지 한해한해 그저 살아있음으로 버티는 것이 그렇게 생존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던 때였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퍼트렸고 그 씨앗을 품은 자와 그 씨앗을 버린 자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간극이 형제간에 생겨났고 현용과 현석 형제의 삶은 그 씨앗의 발화과정을 보여준다. 비록 꽃이 피어나는 시기는 달랐더라도 두 곳에서 모두 꽃은 피었다.

1936년생 김현용은 태어나니 일제가 지배하고 있었고 자라다 보니 광복을 맞았고 소년병으로 동족상잔의 전쟁터에 끌려가 총알받이에서 겨우 살아남아 돌아왔지만 하루하루 먹고사는것 자체가 전쟁이었다. 삶의 목표는 오직 생존.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 김현석은 철없던 시기를 벗어나니 사방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은 의식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생때 4·19 광장에 나섰다.

4·19 혁명 한가지 사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제부터 광복과 6·25를 거쳐 4·19 까지 근현대사의 맥을 따라오며 광화문광장의 촛불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그 연결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쉽게 입장정리 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한쪽의 입장만 알아서 반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어쩔수없는 입장을 모두 담아냄으로써 통합의 장을 고민하게 한다. 만화책 한권이 이렇게 깊을수가 있구나...

만화책이라고 해서 쉽게 생각했다. 읽고서 학생용으로 추천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읽고나니 이 책은 어른이 읽어도 버거운 무게감을 지닌 책이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느껴봐야 할 무게감이었다. 이 한권에 그 긴 시간을 담아내기까지 고심했을 작가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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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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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년의 눈으로 본 위선에 찬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예민한 성찰과 젊은이가 겪는 성장의 아픔!

표지 中

 

 

고전문학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전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작품들이고 다수의 독자들에게 칭송을 받은 작품들인데다 작가들도 대부분 저세상분이시니 나와 같은 일개 독자 한 명쯤 마음으로 감동하지 않는다 해서 문제가 되진 않을것이다. (사실, 현대 소설에 대해서는 섣불리 말하기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성의 없는 책들은(안타깝게도 그런 책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혹평을 하게 되곤 하지만;;; 그래도 나름 조심하는 편이다. 아무리 먼지같은 존재의 독자이지만 그래도 왠지 안좋게 말하는 건 미안해서?!;;;)

그렇다. 나는 이 책에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감동은 커녕 멘붕이 올 지경이었다.

앞서 읽었던 책들 중에 나를 멘붕에 빠트렸던 책의 으뜸은 다자이 오사무 의 '인간실격' 과 '사양' 이었다. 이 두권의 책은 읽는 내내 한 글자에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공감은 커녕 끝도 없는 냉소와 허무 속에서 무책임의 절정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위대한 개츠비' 였다. 피츠 제럴드의 단편 몇편들을 읽을땐 좋았는데, 이 작품만은 이상하게 몰입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왜 개츠비가 위대한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목이 개츠비의 집념 정도였다면 아마도 꽤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대하다니 흐음...

그리고 이제 한 권이 더 추가 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이 책이 왜 청소년과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책으로 꼽혔으며 지금도 추천도서 목록 상위권에 있으며 샐린저 라는 작가를 칭송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열여섯살 소년의 정신분열적 방황기를 읽는 동안 내 정신도 분열될 뻔 했다.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홀른 콜필드 는 키가 훌쩍 큰 미남형의 마른 체형인 열여섯살 소년이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재학중인 펜시 고등학교에서 곧 퇴학당할 예정이다.(한 과목만 제외하고 전부 F학점을 맞아서) 이번이 세번째 퇴학이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고 자란 이 소년은 폐병이 걸릴 정도로 담배를 피우는 골초에 어지간한 술로는 취하지 않는 주당이며 세상만사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

나는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젠장!" 하고 나는 말했다. 실은 지금도 "젠장!"이라는 어휘가 걸핏하면 튀어나온다. 워낙 아는 어휘가 적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나이에 비해 때로 너무 어리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고 지금은 열일곱 살이지만 아직도 열세살 짜리 소년처럼 행동하기 일쑤다. 정말 웃기는 노릇이다. 나는 키가 6피트 2인치 반이나 되는 데다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그렇다. 머리 한쪽, 그러니까 오른쪽 머리에는 새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도 가끔 열두살 짜리처럼 행동하곤 한다. 다들 그렇게들 말하지만 역시 아버지가 앞장서서 그렇게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절대로 진리는 아니다. 어른들이란 자기네들 말이 절대진리라고 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긴 나잇값을 하라는 말을 들으면 하품만 나오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때로 내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때도 있다. 이건 정말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이 뭔들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있냐마는. (p. 18)

열일곱 살이 되고 보니 열여섯살때의 행동이 열세살짜리 같았다고 회상하는 이 소설은 열두살짜리 어린애보다 더 철없는 행동을 일삼으며 어른들은 죄다 비웃는 정체성 없는 자아를 가진 소년의 분열기 이다.

나는 그동안 창문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맨손으로 눈을 뭉쳤다. 뭉치기에 알맞은 눈이었다. 나는 그 눈덩어리를 아무 데도 던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길 건너편에 주차한 차에다 그 눈을 던지려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차들이 너무나 하얗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다음엔 소화전에다 던지려 했는데, 그것 역시 너무나 하얗고 깨끗했다. 결국 아무 데도 던지지 않고 단지 창문을 닫고 눈뭉치를 더욱 딱딱하게 만들면서 방안을 서성거렸을 뿐이다. 얼마후 나와 브러서드와 애클리 셋이서 버스에 올랐을 대도 나는 여전히 그 눈덩어리를 쥐고 있었다. 운전사가 문을 열고는 나더러 그것을 밖으로 던져버리라고 했다. 이건 어떤 사람에게 던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란 절대로 남을 신용하려 들지 않는다. (p. 60)

누구한테나 시비를 걸고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음담패설에 환장하면서도 진짜 사랑에는 빠지지 못하고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소년의 예민함과 신경쇠약적 반응은 순수한 것을 만났을때 그나마 누그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어른들에 대한 멸시는 여전하다.

나는 그때 겨우 열 세살이었는데, 내가 차고의 유리를 모조리 박살내는 바람에 모두 내게 정신분석인가 뭔가 하는 것을 받게 하려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정말 비난할 뜻은 없다. 동생이 죽은 날 밤 나는 차고 안에서 잤는데 주먹으로 창문을 모조리 때려부쉈던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다. 그저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그해 여름에 산 왜건의 유리까지 박살내려 했는데 이미 내 손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 참 어리석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앨리를 모르니까 내 심정을 이해 못 할 거다. (p. 63)

홀른에게는 작가인 형과 앨리라는 남동생 그리고 피비라는 막내여동생이 있다. 앨리는 병으로 일찍 떠나던 밤 홀른은 난동을 부렸고 앨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앨리의 죽음에 대한 이별을 하지 못했다.

이 세상의 엄마란 누구나 약간씩은 머리가 돈 존재이다. 그러나 나는 모로의 엄마가 마음에 들었다. 괜찮은 여자였다. (p. 88)

나는 옆자리에 있는 그 무당 같은 세 여자들에게 다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금발의 여자에게 그랬다는 뜻이다. 나머지들은 전혀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것들이 갑자기 바보처럼 함께 킬킬거리는 것이었다. (p. 109)

여자란 바로 그런 것이다. 여자들이 무엇인가 예쁜 짓을 하면 별로 볼품이 없거나 바보 같은 것이라도 남자는 그만 그녀에게 반쯤 미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법이다. 여자라는 것. 제기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족속들이란 말이지. 정말이라니까. (p. 113)

여자는 머리가 좀 둔하다. 잠시 끌어안으면 여자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만다. 여자는 흥분하면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p. 142)

 

기차에서 만난 동급생의 엄마가 예쁘다는 이유로 여자로 인식하고, 클럽에서 만난 여자들을 속으로는 깔보면서 춤을 추고 싶어 끌어들이는 홀른은 실은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마초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갖 무시와 쎈척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겉모습일뿐 이해와 공감이라는 단어를 아는지나 모르겠다. 하지만 수요일에 퇴학당하기로 되어있음에도 일요일에 기숙사를 도망쳐 나온 이유는 여자때문이었다. 룸메이트가 자신의 친구인 옆집 소녀 제인과 데이트하러 나갔다온 것을 알게 된 후 괜한 주먹다툼을 하고 무작정 뛰쳐나온다.

제인 앞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회만 생기면 여자를 실컷 놀려주는 걸 즐기지만, 제인에게만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는 바로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여자다. 이따금 여자들이 놀림받는 것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실 그들은 놀림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귀면서 한번도 놀려본 적이 없는 상대라면, 새삼스럽게 놀려댈 수는 없는 법이다. (p. 121)

제인을 생각하고 룸메이트에게 화가나고 제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고 싶지만 홀든은 결국 제인에게 전화도 못했고, 제대로 고백해본 적도 없다. 그저 생각만 할 뿐이다. 그 생각이 자기중심적인 제멋대로의 생각이라서 문제라면 문제랄까... 홀든은 그 누구와도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어린애가 걸작이었다. 보도가 아니라 차도 위를 걷고 있었는데, 인도와 차도를 경계짓는 화강암턱 바로 곁이었다. 그애는 모든 아이들이 그러듯이 직선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걸으면서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애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알아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호밀밭을 걸어 오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고리도 아주 예뻤다. 아이는 별 이유없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들은 붕붕 하며 곁을 스쳐 가고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주변을 요란하게 진동시키고 있었다. 부모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애는 차도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면서 "호밀밭을 걸어오는 사람을 붙잡는다면? 하고 계속 노래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내 마음을 한결 명랑하게 해주었다. 더 이상 나는 울적하지 않았다. (p. 174)

홀든의 타락적 분열의 시간 사이사이 등장하는 순수한 장면들은 홀든의 이상향이다. 어린이의 모습으로 죽은 앨런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지나가는 어린애의 노랫소리에 우울함을 떨쳐내며 추운 겨울 연못가의 오리들은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그때만이 홀든의 진심이 엿보인다. 수시로 우울하고 수시로 화가 나는 홀든의 기분은 대체적으로 외롭고 처참하다. 하지만 홀든은 자신의 오락가락 하는 기분조차 스스로 책임지지 못한다.

제기랄, 그녀는 지독히 화가 났다. 나는 정신없이 사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사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구 울기까지 했다. 이 지경이 되자 나도 약간 겁이 났다. 그녀가 그 길로 집에 돌아가 자기 아버지에게 내가 저와 함께 있으면 엉덩이가 근질근질해 못 견디겠다고 말했다며 고자질하지나 않을까 겁이 났던 것이다. (p. 200)

부모의 돈으로 호텔을 잡아 숙식하고 택시를 타고 다니며 공연을 관람하고 술 마시는 시간 속에서도 겁이 나는 유일한 대상은 부모님이다. 그 무엇에서도 독립하지 못한채 투덜대기만하는 캐릭터들이 나는 참 개인적으로 별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주소록에는 불과 세 명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인의 전화번호, 엘크턴 힐스에서 나를 가르친 앤톨리니 선생과 아버지의 회사 전화번호뿐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주소를 적어두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p. 204)

끊임없이 누군가를 집적대고 시비걸면서 끊임없이 외로운 것을 누구 탓만 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갑자기 드는 생각은, 그 누구의 주소록에도 홀든의 전화번호는 적혀 있지 않을 것 같다는 것.

사실 그랬다.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미치도록 좋아한다. (p. 211)

역시 나랑 안맞는 소설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와 개츠비의 소년시절 이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을 주는 호밀밭의 파꾼이라는 소설은....

"야, 한 가지만 분명해 해두자. 오늘 밤에는 콜필드식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거야. 도대체 언제 어른이 될래?" (p. 218)

"지난 번 만났을 때 네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내가 말해주지 않았어?"

"정신분석인지 뭔지를 받아보라는 말?" 내가 물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그 녀석이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정신분석인가 뭔가를 하는 의사였다.

"별로 하는 것은 없을 거야. 다만 너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고 너도 이야기만 하면 될 거야.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스스로 네 정신의 형태를 인식하도록 도와줄 거야" (p. 221)

 

열세살때도 그랬고,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내 불러냈을때 받은 조언도 그렇고, 홀든은 아무래도 정신분석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듯 한데...

"오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야?"

"아냐. 그건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왜 그런 말을 하니?"

"좋아하지 않으니가 그렇지. 오빠는 어느 학교든 다 싫어해. 오빠가 싫어하는 것은 백만 가지는 될 거야. 그냥 싫어하고 있어"

"아냐, 그게 바로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이야. 바로 그거야.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지?"

"그러니까 그렇다는 거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말해봐"

"한 가지? 내가 좋아하는 것 말야? 좋아, 말하지"

그런데 문제는 내가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p. 251)

 

이도저도 다 귀찮아지고 집에 가기는 두렵고 그냥 어딘가 막연히 먼 곳으로 떠나볼까 싶던 차에 마지막으로 여동생 피비를 만나러 간다. 밤에 몰래 숨어들어간 집에서 자고 있던 피비를 깨워 하는 대화는 이 작품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장면이지 싶다. 순수한 어린 여동생 피비는 홀든 보다 더 사리판단을 잘 하는데, 결국 홀든을 현실에 붙잡아 준것도 어린 피비였다. 홀든에게는 늘 동심이 필요하다.

"지저분한 말씨 좀 쓰지 마. 좋아, 그럼 다른 것을 말해봐. 장차 되고 싶은 것 말야. 이를테면 과학자라든가 변호사 같은거" (p. 255)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줄까?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줘?"

"뭔데? 욕 좀 하지 말고 말해봐"

"너 그 노래 알고 있지? '호밀밭을 걸어오는 사람을 붙잡는다면' 하는 노래 말야. 바로 내가 되고 싶은 것은......"

"그건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나면> 이라는 노래야.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가 쓴"

"'만나면' 을 '붙잡는다면'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 (p. 256)

 

피비의 질문은 좋아하는 것도 되고싶은 것도 없는 홀든을 생각하게 한다. 홀든이 유일하게 피비와만 소통하는 것은 아마도 피비가 어린 어린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심없이 살 수 없는 홀든은 어린이 상태에 머물러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이 커버렸다. 어린이를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 하지만 그 파수꾼은 홀든에게 필요한 존재다.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닌 홀든의 멈춰버린 성장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지금 네가 뛰어들고 있는 타락은 일종의 특수한 타락인데, 그건 무서운 거다. 타락해가는 인간에게는 감촉할 수 있다든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바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본인은 자꾸 타락해가기만 할 뿐이야. 이 세상에서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환경이 자기가 바라는 걸 도저히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단념해버리는 거야. 실제로는 찾으려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단념해버리는 거야. 내말 알겠니?" (p. 276)

주소록에 있던 세 번호 중 제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아버지에겐 전화를 걸 수 없었고 선생에게 전화를 건 홀든에게 지금 다니는 학교도 아니고 전에 그만둔 학교의 선생님이었음에도 앤톨리니 선생은 집으로 오라고 한다. 그리고 성심껏 홀든에게 조언해주려고 노력한다.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만 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냐. 내가 말하려는 것은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밑바탕에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이런 경우는 불행히도 드문데- 단지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만 가진 사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야. 그런 사람은 더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학식이 없는 사상사들보다 겸손하다는 점이야. 알겠니, 내 말을?" (p. 279)

"학교 교육은 그 외에도 도움이 되지.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계속하면 자기 머리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무엇이 자기 머리에 맞고 또 무엇이 자기 머리에 맞지 않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야.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일정한 크기의 자기 머리에 어떤 종류의 사상을 활용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거다. 그리고 또 하나,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상을 일일이 시험해보는 데 드는 막대한 시간을 절약해주지. 자신의 진정한 용량을 알게 되고 거기에 따라 자기 머리를 활용하게 되지" (p. 280)

 

하지만 홀든은 앤톨리니 선생의 집에서도 도망쳐 나온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피비를 보고 떠나려고 피비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홀든은 피비를 만난다. 떠나겠다는 홀든에게 따라가겠다는 피비. 홀든은 화도 내보고 타일러도 봤지만 피비는 막무가내다. 피비는 동심을 지닌 어린이. 홀든은 동심에 약하다. 그리고 동심만을 지향한다.

"아까 말한 것 정말이야? 정말 아무 데도 안가? 나중에 진짜 집으로 갈 거야?" 하고 피비가 내게 물었다.

"그럼"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는 피비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사실 나중에 집으로 갔으니까. (p. 310)

피비가 목마를 탄 채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자 나는 갑자기 행복을 느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큰 소리로 마구 외치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여하튼 피비가 파란 외투를 입고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이건 너무나 멋있었다. 정말이다. 이건 정말 보여주고 싶다. (p. 311)

 

회전목마를 타는 피비를 보며 홀든은 행복해진다.

사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그런 일에 대해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을 후회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여기에 등장시킨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없기 때문에 보고 싶다는 것뿐이다. 우스운 이야기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p. 313)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곧 학교로 돌아갈 예정임을 암시하는 마무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여운을 남긴다. 이제 홀든은 그마저도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어른이 된다는 것이 홀든에게는 그런 의미였을까...

1919년에 태어나 1940년에 등단했고 1951년에 펴낸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명성을 얻은 샐린저는 은둔의 작가로 유명하다. 1965년이후 사회를 떠나 은둔을 시작한 샐린저는 이후 한번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고, 그 누구와도 만나거나 교류하지 않은채 40여년 동안 절필하고 살다가 201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학창시절도 입학과 중퇴를 거듭하며 순탄치 않았고 결혼과 이혼을 거듭한 부부생활도 평탄치 않은채 결국 긴 세월 홀로 은둔하다 세상을 떠난 작가의 삶이 마치 홀든의 노년기 모습같아서 작가의 생애가 궁금하지만 알려진 것이 없다. 작가는 자라지 못한 자신을 숨긴채 살다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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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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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팽팽한 긴장감

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의 새로운 세계

 

 

정혁용 ... 처음 듣는 작가 이름이다.

하드보일드 소설... 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러면에서 처음 경험하는 소설의 세계였다.

한마디로... 매력 있었다.!

손에 잡자마자 빨려들어가 중간에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내렸다.

마주하고 대화하는 상대가 소설속 인물의 말투를 가졌다면 빈정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소설로 읽으니 그 말을 어떤 생각으로 하는지 알 수 있어서 그 삐딱하고 비꼬는 말투가 멋지고 찰지게 다가왔다. 고급진 취미를 숨긴 삐딱한 태도와 따스한 인정을 숨긴 빈정거리는 말투를 가진 슬픈 택배기사 라니... 게다가 비밀스런 과거까지. 매력쩌는 택배기사 K.

"사실 이 바닥이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하죠"

남자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악의는 없었다.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일 뿐, 그래도 약간 기분은 상했다.

"바작이 있다면 아직 진짜 바닥은 아닌 거죠" (p. 16)

 

마흔 다섯의 남자가 텅빈 시간과 얄팍한 지갑이 전부인 채 고속버스터미널에 서있다. 구인광고에서 숙소제공 택배원 모집을 읽고 전화를 건다.

"말해줘도 당신은 모를 거예요. 말해주려 해도 말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개에게는 불성이 있죠"

"무슨 뜻이죠?"

"말해줘도 당신은 모를 거예요. 말해주려 해도 말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자존심이라 이건가요?"

"그런 건 평생 가져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상대가 부탁을 하면 부탁을 들어주죠. 명령을 하면 반항을 하고" (p. 32)

 

이 남자의 대화법은 그 누구와도 다르다. 정말 독특하다. 그런데 나는 이 삐딱한 유머코드가 정말 마음에 든다. ㅍㅎㅎ

이놈의 나라는 저마다 행복에 겨운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에 겨워하며 자랐는지, 아니면 형 동생의 관계가 나빠서 밖에서라도 구해 볼 요량인지, 아무튼 형 동생을 못 해 안달 난 사회 같아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걸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못해서 얼떨결에 응,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p. 41)

"로드 독스? 엘모어 레너드? 무슨 내용이에요?"

"하드보일드 소설이야. 펄프 픽션이고. 감옥, 죄수, 돈에 관한 이야기지. 여자와 탐욕은 덤이고"

나의 말에 주창이는 내가 영어를 들을 때 짓는 표정을 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 (p. 42)

 

매사에 이런 식의 사고방식(삐딱하게 굴지만 결국 허락하고 마는)을 가진 중년의 남자. 택배사무실에 딸린 컨테이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한지 한달이 되가도록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일이 없을땐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남자. 가는놈 잡지 않지만 오는놈 막지도 않는 남자.

대개 이름보다는 별명이나 자기가 맡은 동 이름으로 호칭을 하는데 정말 친해지지 않는 이상 이름은 부르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게 이 동네의 규칙이라면 규칙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행운동 형님이나 행운동으로 불렸다. (p. 65)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안다. 지금은 행운동 이라 불리는 모양인데 봉천동이라 불리던 동네였다. 동네마다 택배기사가 만나는 경험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읽다보니 행운동이 그닥 행운을 가진 동네가 아닌것 처럼 보이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봉천동이 신림동 보다는 나을껄 하는.

이름이 있으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경우는 은근히 많다. 시집을 가면 부산댁 전주댁 이라고 불리는것이 너무 오래된 예라면, 형동생 하기 시작하면 광명형님 서울동생 하는 식 혹은 회사에서 대리님 과장님 처럼 직급으로 부른다거나 아이를 낳으면 아이이름을 붙여 누구엄마 하는 등등... 이름은 대체 언제 써먹나?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서 꽃이 되지 못한 존재들이 참 많은 세상인데...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코알라의 수면 부족을 걱정하고 있는 나라도 욱, 하고 화가 치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일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는 거다. 돼지와 뒹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함께 더러워질 뿐이고, 심지어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 (p. 70)

"아니 무슨 택배가 태도가 이래? 너 이름이 뭐야? 당장 콜센터로 전화해서 클레임 걸어야겠어. 너 같은 인간은 다른 고객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택배하게 놔두면 안 돼. 이름이 뭐야? (p. 71)

"저기요? 그냥 입구에 두시면 어떻게 해요? 저기 안쪽 창고에 둬야 할 것 아니에요" (p. 73)

"아니, 여덟 시 이후에 배송하는 택배가 어딨어요? 오전에는 갔다줘야지. 제가 택배 때문에 하루종일 기다려야 해요? 오늘 약속 다 취소했잖아요. 거기다 박스도 다 젖었잖아요. 안에는 괜찮은 거에요? 아 몰라, 됐고요, 저기 베란다에 갖다놔요? (p. 77)

 

처음엔 읽으면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책이 생각났었다. 홍세화님이 빠리 망명시절 생업으로 택시운전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일상들에 대한 감상을 쓰셨던 에세이 는, 이 소설이 택배기사로서 K가 다양한 인간군상을 경험한다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이다. 더 드라마틱하고 더 극적인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무심하게 살고 싶던 K는 정말 원치 않았는데, 새로운 관계들에 자꾸 엮이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등장하는 엿같은 인간들에게 되받아치는 반격이 색다르게 매력적이다.

"이 아저씨가 정말, 고객이 베란다까지 갖다 놓으라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객이 왕인 거 몰라요?"

"자본주의라고요? 고객님 자본주의 논리를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자본주의 논리로 해보죠. 이 택배 배송비가 천백원이에요. 아침에 분류 작업하는 노동비, 배송 노동비, 차량 유지비, 유류대, 보험료, 전화비, 클레임과 분실 비용, 제 이윤 등을 빼고 나면 여유분은 아예 없거나 많으면 일 원이나 이 원 남을지 몰라요. 택배 하나당 말이죠. 그럼 설명 좀 해주세요. 도대체 일 원이나 이 원의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 케인즈 관점의 거시경제학으로? 아님,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설마 마르크스의 잉여노동으로 설명하실 겁니까? 혹은 애덤 스미스의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 어떤 논리로 저를 설득시키실 건가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베란다에 옮겨주길 원하신다면 여기 제가 십 원을 드릴 테니 본인이 직접 하시죠. 거스름돈은 안 받을 테니 말입니다" (p. 79)

 

푸하하하하 정말 배꼽 잡고 웃을 뻔 했다. 이런 식의 통쾌함이 얼마만인가 ㅋㅋㅋ 십원짜리 동전을 손에 든 싸가지없는 고객의 얼굴이 눈에 그려진다. 갑이 을에게 갑질 하는 것도 문제지만, 병이 정에게 갑질 하는건 정말 더 웃기는 일이다.

"얼음도 없이 마셔요?"

"귀찮아서요"

"알코올 중독자 같네요"

"맞아요, 기분 좋은 알코올 중독자죠.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까지는 아니고"

"무슨 차이가 있죠?"

"종이 한 장 정도? 잠시 삶을 잊으려고 마시느냐 잃어버리려고 마시느냐 차이겠죠. 보통 잊으려나 잃어버리게 되지만" (p. 124)

 

택배기사로서의 애환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로맨스 비스무리 한것도 등장한다. 음... 로맨스라기 보다는 상처의 연대감이라고 해야하려나... 그런... 한 여자를 만난다.

사람이 쓸쓸한 얼굴로 얘기할 때는 들어야 한다. 아무리 아프고 서러운 얘기라도 세상사에서는 흔한 얘기일 테지만, 그 사람에게는 유일한 얘기일 거니까. 그게 예의다. 그런 장점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단점만 185,403개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가끔이나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들었다. (p. 165)

이 남자는 모든 것에 무심하고 모든 것에 일단 삐딱하고 보는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은 그에게 속내를 자꾸 털어놓는다. 그러면 또 이 남자는 거절도 못하고 듣는다. 괜히 들었어 후회하면서.

하지만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되도록 사람과 연은 맺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이 맺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 편해지는 성격이다. 이상한 데 결벽증이 있고 역시 다른 성격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p. 184)

숙소로 돌아와 이언 플레밍의 단편 <Quantum of solace>를 다시 읽었다. 한 줌의 위로, 먼지만 한 한 줌의 위로만을 원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어둠이 내린 숲에서 간혹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밤의 소리였다. (p. 193)

 

그렇게 스스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도 은근 세심하게 마음 쓰는 이남자, 어떤 관계든 가느다란 실 같은 인연일지라도 절대 먼저 끊고 도망가지 않는 이 남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꽤 여러명에게 한 줌보다 큰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누구에게서도 먼지만 한 위로조차 받지 못한채...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p. 205)

어쩌면 본인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내뱉은 말들 속에서 자신에 대한 위로도 조금은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그때 전화가 울렸다. 먼 육지에 있는 친구의 전화.

"아직도 사막에서 집을 짓고 있나?"

"그러려고 했죠"

"이봐, K, 우리는 지옥에 빠진 인간들이야. 지옥에는 입구만 있지 출구는 없어" "이제 돌아올 건가?"

또다시 침묵, 하늘을 올려다 봤다.

제길, 더럽게 맑은 하늘이었다. (p. 338)

 

아무것도 몰랐지만 사건에 휘말려 폭력배들에게 얻어터지는 순간에도 그 누구보다 맷집이 좋았던 남자, 형사가 찾아왔을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답변으로 맞대응할 수 있는 남자, 대기업 회장 면전에서 일관되게 삐딱한 대화법을 고수할 수 있는 남자, 건장한 보디가드에게 멱살잡혔을 때도 보디가드의 넥타이를 감쪽같이 자를 수 있는 남자. 이 택배기사 정체가 뭘까? '설계자들' 이라는 소설속 킬러가 떠오르는 분귀기의 마무리는 아무래도 이 작품의 속편이 나와줘야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 속편이 나온다면 바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일상은 사막이다. (p. 11)

이 작품의 첫 문장이다.

이 작품은 사막에 집을 지으려던 K 가 만난 침입자들 에 대한 이야기인 걸까?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K 가 돌아간 지옥의 이야기일까?

아마도 그 이야기가 진짜 하드보일드 소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죄와 탐욕과 응징이 넘쳐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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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스페이스 - 나를 치유하는 공간의 심리학
에스더 M. 스턴버그 지음, 서영조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나를 치유하는 공간의 심리학

The Science of Place and Well-being

 

 

저자는 인간의 행복에서 장소와 공간의 역할, 그리고 몸과 마음의 상호 작용이 치유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 광범위하게 연구해온 정신건강 전문가라고 한다. 매슈 윌슨과 함께 <셀CELL>에 발표한 획기적인 논문 '신경과학과 건축, 공통의 토대를 찾아서'로 '신경건축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태동을 알렸다는데, 신경건축학 이란 생소한 용어가 등장한다.

공간과 건축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끼치는 영향을 측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건축을 탐색하는 학문을 '신경건축학'이라 부른다. (p. 6)

이 책은 2003년 무렵 태동한 신경건축학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훌륭한 지침서다. 건축과 공간이 인간의 뇌와 마음에 끼치는 영향을 유전자 수준에서 몸 전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친절하면서도 폭넓게 소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얻은 최신 신경건축학 연구 결과들을 통해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삶을 영위해야 행복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p. 7)

 

이 책을 감수한 정재승 박사의 추천의 글을 읽으며 기대치가 높았었다. '신경건축학' 이란 분야 자체가 생긴지 얼마 안되었고, 2009년에 출간됐던 책이 올해 재출간된 것이기에 그간의 보충내용이 있으려나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힐링 공간을 알려주는 공간적 결과를 담은 것이 아니라 힐링을 위해 공간이 의미가 있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뇌과학적 책이었다.

<1부 치유가 시작되는 곳, 당신의 머릿속> 에서는 심리학이 건축을 만났을 때 어떤 효과를 드러낼 수 있을지 살펴보면서 신경건축학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시각적 요소들이 치유에 어떤 영향을 주고, 우리가 귀로 듣는 청각적 요소들이 우리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며, 손끝과 코끝을 느끼는 촉각과후각적 요소들이 어떤 치유적 효과가 있는지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분석한다.

물리적 공간이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문제를 다룬 최초의 연구 결과가 1984년 <사이언스>에 발표되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병실 창으로 자연풍경이 내다보일 때 환자들은 더 빨리 회복되었다. (p. 37)

인간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이용하여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각 감각이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의 개별 특징들을 감지하고 나면 우리의 뇌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특징들을 통합하여 풍부한 색채와 입체음향을 지녔으며 냄새가 나는 3차원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어떤 곳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주변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감각을 통해 우리가 인지하는 그림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럴 때마다 뇌는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를 업로드하고, 그 정보를 끊임없이 갱신되는 세상의 모습 속으로 통합한다. (p. 168)

 

'마지막 잎새' 라는 소설이 갑자기 생각났었다. 창밖에 담벼락만 보이는 낡은 방일지라도 그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잎 한 장이 주는 치유의 힘은 컸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장소들은 대개 자연이 있는 곳들이다. 눈으로 보는 초록이나 파랑과 귀로 듣는 새소리 물소리와 코끝에 스치는 숲냄새 바다냄새 는 그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자연을 연상시킨다. 각각의 감각들을 통합시키는 것은 결국 공간에서 이루어지므로, 공간에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치유능력이 있었다.

<2부 공간과 기억이 빚어내는 마술> 에서는 스트레스란 무엇이고 그 스트레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요소들을 알아야 하는지 살펴보면서, 현대 건축의 심리학적 모험으로 디즈니의 테마파크를 예로 들어 환상적 공간이 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길찾기의 신경과학과 연결지으며 기억에 대한 뇌과학을 설명한다. 공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스트레스와도 연결되고 스트레스 해소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3부 힐링 스페이스를 찾아서> 에서는 사람들이 왜 산티아고로 떠나는지 에 대해 기적의 사례나 평온과 명상이 주는 치유의 사례들을 예로 들면서 몸 속 치유의 경로를 깨우는 법으로 플라시보 효과와 학습되는 면역 그리고 호르몬을 살펴본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살고 있는 공간을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한다.

19세기 의료에서 세균이론을 이해하고 감염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면, 21세기 의료에서는 병원 환경에 존재하는 스트레스 요인들을 이해하고 감소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p. 359)

몸이 아픈 환자들과 마음이 아픈 환자들 모두를 위해서 우리는 다시금 건강과 치유의 방정식에 마음이라는 요소를 다시 불러들이고, 더불어 감정과 물리적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방식까지도 끌어들여야 한다. 건축공간이 기분과 생리적 반응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기분과 생리적 반응은 환자와 의료진의 건강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면, 정서적 건강과 신체적 건강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공간을 짓는 데 돈을 들일 근거와 동기를 얻을 수 있다. (p. 367)

 

과학적인 의료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나이팅게일의 이야기에서 알수 있듯이 전쟁에서 부상당해서 죽는 것보다 부상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의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사망율이 더 높았기에 나이팅게일의 환경개선책 만으로도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감염을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위한 병원이 필요한데, 완연한 자본주의 사회라서 건축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병원이라는 건축물에 대해 환경개선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확대는 비용지출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신경과학 연구는 깊이·빛·색·물체·장면·랜드마크에 대한 시지각, 소리와 정적에 대한 청지각, 냄새의 인식, 길 찾기, 명상의 효과와 치유에 대한 믿음 등 우리가 감각지각에 관해 배운 모든 것을 기초로 더 깊이 있는 혁신을 이끌 것이다. 두뇌의 모든 기능에 도움을 주도록 병원 환경을 설계하면 몸이 원래 지닌 치유력을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혁신안은 스트레스와 불안이라는 짐을 덜어주고, 지각이나 기억의 손상을 극복하게 해줄 디자인 요소들을 내놓을 것이며, 그 결과 약물치료, 내과 및 외과적 합병증, 의료 사고 및 과실의 발생률을 줄여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복감을 키워주고, 치유 속도를 높여주고, 노인의 독립적인 생활을 연장해줄 것이다. (p. 380)

1부의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고는 본내용의 대부분이 뇌과학 신경과학적인 내용들이라서 공간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 싶었었다. 이 단락을 읽고나서야 앞서서 공간과 큰 관계 없어보이는 깊이·빛·색·물체·장명·랜드마크·청지각·후각·길찾기·기적과 명상 이야기를 왜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병이 나면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병에 대한 치료말고 몸이 지니고 있는 치유력을 설명하기 위해 이 모든 요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몸이 지닌 그 치유력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 공간의 힘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더 거시적으로 봤을 때, 병원의 설계를 변경해서 전염병을 뿌리 뽑으려던 19세기의 노력에 견줄 만한 것이 있다. 바로 도시 전체의 설계를 바꾸는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선견지명이 있는 과학자들과 도시계획 설계자들은 도시의 물리적 구조를 바꿔 전염병을 통제하려고 애써왔다. (p. 388)

일단 병원의 건축적 요소들에 신경을 먼저 써야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시 설계를 생각해봐야한다. 병원에선 치유를 돕겠지만 도시에선 힐링을 도울 수 있는 것이 공간에 내재되어 있는 능력이므로.

스모그가 심한 도시는 멕시코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베이징, 카이로, 자카르타, 상파울루, 서울 등이다. (p. 401)

뉴욕 주민의 기대수명은 미국 내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늘고 있다. 뉴욕이 치유의 장소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p. 404)

 

오염된 환경이야기를 하면서 스모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기오염의 사례 사진으로 도시 서울의 스모그 사진이 실려있는 것을 보면서 서울이 이런 예로 인용되는 것이 아쉬웠다. 그에 비교되는 도시 뉴욕의 변화에는 크게 감탄한다. 하지만 기후협약에서 빠져나간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다.

19세기가 도시 전염병의 시대였고 20세기 초반은 도시 전염병이 소탕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전염병 확산이 증가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질병을 심화시키는 사회 기반시설과 환경을 바로잡는 것이 정치 지도자와 보건정책 전문가들이 할 일이 될 것이다. (p. 412)

신경건축학이 바탕이 되어 건설된 병원과 탈바꿈할 도시를 그려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환경을 생각해본다. 감추어져 있는 치유의 메커니즘을 증진시키는 데에 공간이 주는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질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힐링할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공간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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