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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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공장에서 제품처럼 '생산'되는 세계,

모든 행동과 생각, 죽음까지도 통제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느 만큼이나 인간일까?

표지 中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 중에 최고로 손꼽히는 명작이자 고전이 아마도 '멋진 신세계' 인가 보다. 최근에 읽었던 소설 중 파괴된 지구의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그린 '더 월' 이라는 작품도 여자들의 입을 막고 소유물화하는 시대로 회귀하는 현실을 그린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라는 작품도 '멋진 신세계'의 뒤를 잇는 작품이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멋진 신세계'로 풍자되는 멋지지 않은 미래를 그린 작품들 또한 '멋진 신세계'의 뒤를 잇는 작품이라고 홍보되지 않을까? '멋진 신세계' 라는 제목이 갖는 은유와 상징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인 관용어가 되었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가 상상한 멋진 신세계는 포드자동차가 생산되는 컨베이어벨트 식의 대량생산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데, 이 과정을 묘사하는 생물학적 표현과 공장적 지식은 그가 경험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작가의 할아버지는 진화론의 다윈을 옹호하며 논쟁에 나섰던 유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고 형은 생물학자 동생은 전기생리학자 인 학자집안이었다. 집안 연줄로 들어가 잠시 근무했던 당시 최고의 첨단 시설로 지어진 화학공장에서의 경험또한 '멋진 신세계'에 큰 영감을 주었다. 즉 학문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그는 당시 최첨단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판은 1932년에 발표된 '멋진 신세계'를 1946년 다시 내면서 적은 작가의 긴 머리글은 전쟁을 겪으며 저자가 디스토파이적 미래에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작가에 대한 설명보다 번역자에 대한 설명이 더 길게 써있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지 싶은데, 그 긴 번역자의 약력이 이 책의 번역적 신뢰도를 높여주는데 큰 기여를 하긴 했다. 외국책은 번역자가 정말 중요하다.

워낙 유명한 책이고 읽는 내내 더디게 책장이 넘어갔던데다 다 읽고 나서도 온통 물음표들이 남았던 책인지라 나름 정리하기전 사설이 길어졌다;;;

거의 100년전 나왔던 '멋진 신세계' 의 디스토피아가 여전히 전설적 공감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학생들이 부화-습성 훈련 런던 총본부로 견학와서 훈련국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훌륭하고 행복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면 가능한 한 그런 인식은 조금만 깨우쳐줘야 했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독특한 개성이란 미덕과 행복에 이바지하지만 보편성이란 지적인 필요악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계층은 사상가들이 아니라 실톱으로 뇌문세공을 하는 기술자나 우표 수집가 따위의 사람들이다. (p. 31)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 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는 세계국에서 인간이란 사회구성원 딱 그만큼이어야 했다. 개성보다는 보편성이 중요한 딱 그만큼.

획일적으로 떼를 지어 태어나는 표준형 남자들과 여자들, 보카노프스키 처리를 거친 단 하나의 난자로부터 생산된 인력으로 몽땅 운영되는 하나의 작은 공장(p. 36)

"알파 아이들은 회색 옷을 입어요. 그들은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총명하기 때문에 우리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합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베타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로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감마나 델타보다 훨씬 좋습니다. 감마들은 어리석어요. 그들은 모두 초록색 옷을 입어요. 그리고 델타 아이들은 황갈색 옷을 입습니다. 아, 싫어요, 난 델타 아이들하고는 놀고 싶지 않아요. 엡실론들은 더 형편없죠. 그들은 너무 우매해서 글을..." (p. 64)

 

컨베이어벨트위 유리병 속에서 수정란이 자라고 각종 제제요소가 들어간 주사를 맞고 필요한 만큼의 능력만 가지고 태어나 정해진 운명대로만 살다가 똑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유한한 생명체 인간, 그런 인간이 생산되는 시대에는 날짜도 포드력을 사용한다. 오마이갓 대신 오마이포드 를 내뱉고, 성호를 긋는 대신 T자를 의식하는 600여년 후의 미래사회는 철저한 신분제사회다.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세계 통제관들은 단 10명뿐, 이들은 거의 신적인 존재다.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 사회적인 안정이 없다면 어떤 문명 세계도 존재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안정이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사회의 안정도 존재하지 못한다"

기계가 돌아가고, 돌아가고, 계속해서 영원히 돌아가아먄 한다. 가만히 서 있으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바퀴들은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지만 누가 돌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바퀴들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 축에 달린 바퀴들만큼이나 변함없이 꿋꿋한 사람들이, 건전한 사람들이, 순종하는 사람들이, 만족하는 삶에서 안정을 찾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 아기, 우리 어머니, 오직 나만의 소유, 하나뿐인 사랑을 외치고, 내가 저지른 죄, 내가 섬기는 무서운 하나님을 부르며 신음하고,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고, 열병에 시달려 헛소리를 하고, 늙고 가난한 신세를 한탄한다면, 그런 자들이 어찌 바퀴를 보살필 능력이 있겠는가?그리고 만일 그들이 바퀴를 돌보지 못한다면...... (p. 85)

 

가정은 없다. 모든 아이들은 공장에서 태어나 집단 양육된다.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 라는 단어는 추악한 단어가 되었다. 사회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고 개인은 없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공유된다. 결혼은 미개하다 혼음이 당연하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해지면 소마 라는 약을 먹음으로써 행복한 몽상에 빠진다. 모두 그저 즐기고 소비하며 살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그 소비재를 생산하기위해 인력이 필요하고 그 인력은 또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그렇게 세상의 바퀴는 돌아간다. 세상은 그저 계속 쳇바퀴돌듯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바퀴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순환이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이가 등장한다. 버나드 마르크스.

그는 알파이지만 알파답지 않은 왜소한 체구로 놀림을 받고 스스로도 위축되다 보니 고립감을 깨닫게 되면서 점점 더 일반적이지 않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헬름홀츠 왓슨.

그는 완벽한 알파의 신체를 가졌고 넘치는 능력을 가졌으나, 능력이 넘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신적인 과잉능력이 그에게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두 남자가 가진 공통점은 그들이 혼자라는 인식이었다. 하지만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버나드가 혼자라는 의식에 평생 시달려온 반면에, 헬름홀츠 왓슨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자신의 정신적인 과잉상태를 점점 의식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p. 120)

사회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해야 할 인간이 공동체의 부속으로서만 살아야 할 인간이 '혼자라는 인식'을 하게 되고 주변과 내가 다르다는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말해 '자아'가 생겼다는 말이 아닐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는 결국 '자아' 라는 것일까.

"난 차라리 나 자신 그대로 남아 있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불쾌하더라도 나 자신 그대로요, 아무리 즐겁더라도 남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p. 149)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이 알아들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훨씬 더 나다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토록 철저히 어떤 다른 존재의 한 부분이 되기보다는 진정으로 나 자신다워진다는 거죠. 사회적인 집단의 세포 하나가 아니고요. 당신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나요, 레니나?" 그러자 레니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p. 151)

 

혼음과 성적유희와 소마라는 약이 주는 쾌락을 거부하는 버나드를 보며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한다. 그가 함께 산책하길 원하는 여성인 레니나는 그런 그의 말들을 무서워 한다. 이 사회의 사람들은 성인의 몸에 아기의 정서로 행동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하지만 '야만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있었으니, 이 야만인들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병을 앓고 노화를 거쳐 죽음을 슬퍼하는 삶을 살고 있다. 미워하며 싸우기도 하는 불편한 감정들을 갖고 종교적 제의와 조상숭배같은 관습들도 유지하며 어떤 문명세계와의 접촉도 없는채 경계안에 그들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을 허가받은 이들만 구경할 수 있었으니 알파인 버나드는 레니나와 함께 여름휴가로 이곳을 방문한다.

그런데 이 야만인들의 지역에서 야만인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문명인출생자를 만난다. 존의 어머니는 과거 이 지역에서 조난당한 문명인이었고 그때 임신중이었다. 존은 외모가 달라 야만인들 사회에서 늘 외톨이로 자라면서 '자아'를 확립했다. 그의 외로움에 공감한 버나드는 그에게 문명사회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이곳에는 훌륭한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레니나를 생각하자 그의 상기된 얼굴이 갑자기 더욱 붉어졌다. 젊음과 더불어 피부 영양제로 윤기가 나고, 포동포동하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진한 초록색 인조견을 걸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천사였다. 존은 말을 더듬거렸다. "오, 멋진 신세계여"

"오, 멋진 신세계여" 존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멋진 신세계여. 우리 당장 출발합시다"

당황하고 놀란 표정으로 젊은이를 빤히 쳐다보면서 버나드가 말했다. "그리고 어쨌든 당신이 신세계를 실제로 볼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p. 220)

 

존은 야만인 지역에서 우연히 구한 셰익스피어전집을 읽으며 성장했다. 그의 세계관은 곧 셰익스피어문학이었다.

문학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는 버나드와 레니나는 그의 말도 감성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외모적으로 존은 문명인이었고 연구가치가 있었다.

"학생들은 세익스피어를 읽나요?" 야만인이 물었다.

"물론 안 읽습니다. 우리 도서관에는 참고서들만 비치합니다. 이곳의 젊은이들이 기분 전환할 대상이 필요하면, 그들은 촉감 영화를 보러 갑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혼자서만 즐기는 오락에 탐닉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아요" (p. 253)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참고서만 읽고 관련 기술들만 익히고 시간이 나면 함께하는 오락에 탐닉하는 사람들.

레니나와 촉감영화를 보고 난 존은 화가 나서 소리친다. "그건 천박한 영화였어요. 천박한 영화였다고요"

존이 꿈꾸었던 신세계는 이런 세계가 아니었다. 존은 레니나와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을 하고 싶었지만, 레니나는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금 정신이 들어 외부의 현실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눈에 비치는 주변의 존재들을 인식했다. 그것은 공포와 역겨움의 무게로 그를 절망시켰다. 눈앞의 현실은 개체로서의 구별이 불가능한 동일성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악몽이나 마찬가지여서, 그가 밤낮으로 반복하여 겪었던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쌍둥이들, 쌍둥이들...... 그는 흠칫 동작을 멈추고, 당혹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몰려든 황갈색 집단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인간들이 이곳에 존재하는가!" 노래의 가사가 그를 조롱하듯 놀려댔다.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오, 멋진 신세계여......"

"소마 배급시간입니다!"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질서를 잘 지켜주기 바랍니다. 거기 빨리 좀 움직여요" 기대감에 부풀었던 쌍둥이들인 만족해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만인은 그냥 서서 구경만 했다. "오, 멋진 신세계여, 오, 멋진 신세계여......"그의 머릿속에서는 노래 가사의 음조가 달라지는 듯했다. 노래는 비탄과 회한에 빠진 그를 비웃었으며, 너무나도 흉약하고 냉소적인 모욕의 어조로 그를 놀려댔다! 노래는 악마처럼 웃으며 구역질 나는 추악함의 악몽을, 비천한 더러움의 악몽을 끈질기에 내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전투 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오, 멋진 신세계여!"미란다가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악몽까지도 숭고하고 못진 무엇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선포했다. "오, 멋진 신세계여!" 그것은 하나의 도전, 하나의 명령이었다.

"그만해요!" 야만인이 우렁차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하라고요!" (p. 318~320)

 

야만인이 일으킨 소동에 헬름홀츠가 동참했고 버나드는 당황했다. 존은 세익스피어의 작품속 대사와 노래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세익스피어 문학작품들을 통해 평화를 얻었고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문학의 세계는 또하나의 이상향일 뿐이었다. 또하나의 '멋진 신세계'일 뿐이었다.

소동은 진압되었고 세 사람은 통제관을 만나게 된다.

"난 궁금했어요" 야만인이 말했다. "태아 유리병들을 가지고 마음대로 무엇이나 다 얻어내는 방법을 잘 알면서도 도대체 왜 그들을 만들어놓았는지 말이에요. 이왕이면 왜 모든 사람을 알파 더블 플러스로 만들지 않나요?"

무스타파 몬드가 웃었다. "그건 우리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자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그가 대답했다. "우린 행복과 안정을 신봉합니다. 알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틀림없이 불안정하고 비참해집니다." (p. 336)

 

소설의 앞에서 훈련국장이 인간의 성장-학습 과정을 설명했다면 소설의 뒤에서 통제관은 사회의 시스템과 세계관을 설명한다. 야만인의 질문에 대한 통제관의 대답은 앞서 행했던 그 어떤 시도들 중에서 결국 선택된 가장 나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강조한다.

"섬으로 전출될 거야. 다시 말하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극히 흥미진진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 거지. 어떤 이유에서든 너무 자아의식이 강해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온갖 사람들이 있는 곳 말이야. 정통성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관념을 지닌 사람들. 다시 말하면, 조금이라도 자기주장을 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이지. 난 자네들이 부러울 지경이라네. 왓슨"

헬름홀츠가 웃었다. "그렇다면 왜 통제관님은 스스로 섬으로 찾아가지 않으시나요?"

"그건 결국 내가 이쪽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야" 통제관이 대답했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졌었어" (p. 343)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섬으로 전출가게 되었다.자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것을 통제관은 축하하지만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잘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통제관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물리학자였던 그는 순수과학을 포기하고 통제관을 선택했다.

"과학 덕택이었지. 하지만 과학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일을 과학이 스스로 무너뜨리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연구 범위를 그토록 치밀하게 제한했고, 나는 그 때문에 하마터면 섬으로 쫓겨날 뻔했지. 우리는 과학이 눈앞에 닥친 가장 긴박한 무네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루지 못하게 해. 다른 모든 연구는 지극히 용의주도하게 막아내지." (p. 344)

"만인의 행복은 바퀴들을 끊임없이 돌아가게 해주지만, 진실과 아름다움은 그러질 못해. 물론 민중이 정치권력을 장악했을 때마다 중요성을 강조했던 대상은 진실이나 아름다움보다는 행복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한이 없는 과학적인 연구는 아직 허용되었어. 사람들은 마치 진리와 아름다움이 지상의 선 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떠들어댔어. 9년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는 그랬지. 전쟁은 정말로 그들의 인식을 바꿔놓았어. 사방에서 탄저열폭탄이 터지는 마당에 진리니 아름다움이나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9년 전쟁 이후에, 그때부터 과학이 처음으로 통제를 받기 시작했지. 조용한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식이었어. 우리들은 그 후부터 통제를 계속해왔어. 물론 그것은 진실을 위해서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지.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어.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해. 행복은 대가를 치러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p. 345)

 

모든 것이 통제되는 세상의 당위성은 늘 곤혹스러운 질문을 남긴다. 통제된 안정 속에서의 무지한 행복과 자유로운 혼란 속에서의 복잡한 감정...

괴로운 진실을 모르지만 행복한 것과 행복하지 않지만 진실을 아는것 중 한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가 쉽게 한가지를 고를 수 있을까...

세계대전을 겪으며 이 작품을 써냈을 작가의 당시 시대적 상황은 충분히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게 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미래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를 던지고 있다는 것은 어찌 해석해야 할까...

여하튼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떠나게 되었다. 존은?

야만인은 침울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말파이스에서 지낼 때 그는 푸에블로 마을의 공동체 행사가 열리면 늘 사람들이 그를 따돌렸기 때문에 괴로웠고, 문명화한 런던에서는 공동체 활동들에서 전혀 빠져나갈 길이 없어 조용히 혼자 지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p. 355)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p. 362)

 

존은 고립을 원했다. 고립된 곳에서 자학을 했다. 십자가형을 자처하고 채찍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다. 지나치게 죄의식을 느꼈고 지나치게 속죄하려 했다. 그가 채찍질 하는 것을 보면서 '다빈치 코드'의 '오푸스 데이' 가 떠올랐다. 야만인으로 불리던 존이 문명을 접하고나서 갑자기 그렇게까지 종교적으로 몰입하는 행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가는 존을 예수화 하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존의 마지막 선택은 이 작품의 가장 디스토피아적 장면이었다. 그것은 승화가 아니라 포기였고 절망이었다. 더이상 암울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물들의 이름도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버나드 마르크스 는 버나드 쇼와 칼 마르크스를 합성한 이름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둘다 진보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헬롬홀츠 왓슨 은 과학철학의 선구자였던 헬름홀츠 와 청교도 목사였던 토머스 왓슨의 이름을 합성한 것으로 보아 철학적 인물의 성향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존 은 가장 흔한 이름으로 먼지 같고 톱니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인상깊었던 이름은 다윈 보나파르트였다. 소설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영화제작자인데, 그가 만든 영화로 존의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다윈도 나폴레옹도 어떤 의미로든 간에 커다란 사회적 변혁을 일으킨 인물들 아닌가? 그런 인물들의 이름을 잠깐 등장하는 이 영화제작자에게 부여한 이유를 다른 그 어떤 이름들보다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인물들의 이름부터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소설 내내 포드라는 이름과 포드의 공장생산방식을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은유인지 풍자인지 한쪽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온통 이중적이었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가족은 무엇인가? 사랑은 ?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과학의 발전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문학은 인간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는가?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래서 여전히 이 작품이 보여주는 불평등과 비인간적 안정성이 (그것이 디스토피아인 것이 분명함에도)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플라톤의 '국가'를 읽었음이 분명하다. 피라미드식 사회구조와 운명적이고 역할론적인 삶과 나쁜 감정을 전달하는 문학을 배제하는 공동교육과 가족보다 집단을 중요시하는 공동체를 다스리는 소수 철학자의 나라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국가는 (도덕과 윤리적 면을 제외하고 본다면) 과학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멋진 신세계'에서 디스토피아로 표현된 것 같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했다는 고대철학처럼 미래가 될 수 있는 모든 폐해를 미리 보여주었기에 이 작품이 디스토피아소설의 고전이 된 것일까

그 모든 질문에 다양한 답을 해오면서 철학이 발달해 오고 있듯이 그 모든 폐해가 실현되지 않도록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 것일까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은 무엇일까? 이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미래는 의미있었다. 그리고 그 '멋진 신세계'가 던져주는 오답은 넘치는 해석을 담고 있었다. 앞으로도 '멋진 신세계' 는 계속 멋지게 회자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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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자, 장자크 상페 그림, 박종대 역자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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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의 짧은 단편 <승부> 는 체스 한판을 다룬 작품이다.

가냘픈 선으로 그려진 서정적인 삽화들이 익숙한 것을 보니 장자크 상페가 그리고 쥐스킨트가 쓴 <좀머씨 이야기>도 읽었던 모양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화책 읽듯이 그림책 보듯이 가볍게 읽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전이라;;;

마을의 체스 챔피언이라 할 수 있는 '장'은 볼품 없는 외모를 지닌 일흔 정도의 노인이다. 파르르 떠는 손에는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 있으며 옷차림도 낡고 추레한 노인이지만 마을의 다른 노인들과 둔 체스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고수이다. 그러던 어느날 젊은 도전자가 나타난다. 마을 노인들은 저녁먹으러 가는 것도 잊은채 새로운 고수와 오래된 고수가 벌이는 체스 한판에 집중한다.

어찌 저리 태연하고 도도하고 창백하고 무표정할 수 있을까! 자신감에 넘치는 손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경꾼들은 눈가가 촉촉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들은 그렇게 두고 싶지만 감히 두지 못하는 수를 이 젊은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젊은이가 왜 저렇게 두는지는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들도 저 친구가 지금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젊은이처럼 두고 싶다. 저렇게 당당하고, 승리의 자신감에 넘치고, 나폴레옹처럼 영웅적으로 싸우고 싶다. 장처럼 소심하게 망설이듯이 질질 끌며 두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실전에서는 장과 똑같이 두기 때문이다. 다만 장이 그들보다 더 잘 둘 뿐이다. 장의 게임은 이성적이다. (p. 34)

새로운 고수로 보이는 젊은이가 놓는 체스는 당췌 예상할 수가 없었다. 여지껏 그렇게 체스를 두는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 노인들은 모두 비슷하게 체스를 두어왔다. 장처럼 소심하게 망설이듯이. 그래서 장의 절대고수 위치를 인정해주고 싶지 않다. 자신들과 별다를것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젊은이가 두는 체스방식은 자신들과도 장과도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구경꾼들은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 게임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목표는 오직 하나다. 낯선 젊은이가 저 늙은 챔피언을 무참히 짓밟고 승리하는 순간을 보는 것이다. (p. 42)

자신들은 이겨보지 못한 장을 갑자기 등장한 이름모를 젊은 청년이 이겨주기를, 장이 아니라 이 이방인이 고수중의 고수 슈퍼고수가 되어주기를 한마음으로 바라며 구경꾼들은 체스판의 수 한번한번에 감탄과 탄식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장 이 이겼다. 그리고 동시에 장 은 패배감을 느꼈다.

솔직히 장은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그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게 이방인에게 경탄했고 그와 함께 자신이 수년 전부터 그렇게 기다려온 패배를 마침내 그 인간이 최대한 강렬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맛보게 해주기를 소망했다고 말이다. 그래야 자신은 언제나 최고여야 하고 어떤 상대든 무너뜨려야 하는 짐을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질투로 찌든 그 망할 놈의 구경꾼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고, 그래야 스스로 평온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승리는 그의 삶에서 가장 역겨운 승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승리를 피하려고 체스를 두는 내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욕보였고, 그로써 천하의 그 한심한 풋내기에게 항복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분명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오늘 실제로 패배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복수할 기회가 영영 없고, 미래의 어떤 빛나는 승리로도 만회할 수 없기에 더더욱 비참하고 결정적인 패배였다.(p. 64)

 

젊은이는 풋내기였다. 체스의 ㅊ도 제대로 모르는.

젊은이는 예의도 없었다. 자신의 패배가 확실해 졌을때 무례하게 판을 엎고 구경꾼들에게 인사는커녕 눈길한번 주지 않고 가버렸다.

하지만 장은 이 체스판 이후 결심했다.

다시는 체스를 두지 않기로.

앞으로는 다른 퇴직자들처럼 마냥 즐겁기만 한 '불게임'이나 하기로.

어떻게 보면 장은 이 체스판 이후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은퇴한 것이 아닐지.

체스의 말을 하나 옮길때마다 막상 그 체스판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젊은이의 수는 내내 별생각없이 무모했다. 무작정 킹만 향해 돌진하다가 몇수 만에 대패한 체스게임이었다. 젊은이에겐 아무 의미없는 체스한판.

하지만 그 무모한 한수한수에 어떤 작전이 숨어 있는걸까 고심하고 고뇌하던 장은 설마설마 하면서도 젊은이가 정말 어이없이 져버렸을때 너무 지쳐버렸다. 늙은이에겐 너무 힘에 부치던 체스한판.

책 사이사이 들어있는 삽화들은 파리의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스케치해 보여주기도 하고 체스한판을 두고 고뇌했던 장의 심경을 담은 체스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이 갔던 그림은 36페이지 그림이었는데 삽화중 가장 화사한 색감에 일부만 보여지는 체스판위 젊은이의 검은색 흑기사와 장의 흰색 백폰이 이 작품을 상징해 보여주는 듯 했다.

 

 

 

나이든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을 더이상 시도할수도 이해할수도 없어진다는 것이 아닐까.

젊은 날의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무모한 도전들은 나이들어 원숙해진 이성앞에 결과적으로 패배할진 몰라도

젊은날이 기억하지 못하는 승리감대신 나이들어 씁쓸하게 다가오는 패배감에 의기소침해질지 몰라도

괜찮다.

삶은 승패가 존재하는 체스판이 다가 아니니

그저 공원을 산책하고 가벼운 체조같은 운동을 하고 바쁘게 출퇴근 하는 군중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은가.

흑기사의 용맹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나이에 읽어도 폰의 소박함이 소중해지는 나이에 읽어도 짧고 굵게 여운을 줄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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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기 마을 - 전태일 50주기 기념 안재성 소설집
안재성 지음 / 목선재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는 소설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었다.

6.25를 배경으로 비전향 장기수였던 실존인물의 수기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작품이었는데, 제목그대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삶을 살다간 인물의 삶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한국현대사속 보이지 않았던 장면을 또하나 알게 해준 소설이었다.

그 뒤로 작가의 이름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새 작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을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작품을 통해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을 지속해서 살펴보고 작품화하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마저 다른 곳을 볼 수는 없게 되버렸기에...

이 책은 지난 100년 한국의 놀라운 변화를 주도했던, 그러나 주목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한 민초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단편소설들로 이뤄졌다. 2년간 시사월간지 <시대>에 연재되었던 작품들로, 대부분 본인이나 유족의 직접증언을 토대로 썼다. 따라서 소설의 등장인물과 사건의 줄거리는 모두 실제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며 가독성과 익명성을 위해 약간의 각색만을 거쳤다. (작가의 말 中)

이 책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의 이력을 잠시 찾아보니 노동운동을 오래했었고 지금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듯 하다.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전태일 50주년 기념 소설집'을 엮은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여전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저자 자신의 소개글을 보니 더더욱 작품의 무게감이 진하게 전해져왔다.

그렇다. 무게감... 읽는 내내 잠깐씩 숨을 몰아쉬어야 할만큼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1부에서는 일제치하부터 분단까지의 노동현장을

<이천의 모스크바> 에서는 6.25 전후 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엎치락뒤치락 하는 진영의 갈등을 농부의 시선으로

<두발자전거> 에서는 일제치하 노동운동의 태동과 해방후의 갈등을 방직공장 여공의 시선으로

<달뜨기 마을> 에서는 결혼 후 세상과 사상에 눈을 떠 여맹위원장까지 활동했던 여성의 시선으로

2부에서는 80년대를 전후한 노동현장을

<첫사랑 순희를 찾아서> 에서는 분단 후 혼란스럽던 정치상황을 첫사랑과 엮어 회상하는 노신사의 시선으로

<팬데믹의 날> 에서는 노동운동에 앞장서서 노동자로 한평생 투쟁하는 도중 5.18을 경험했던 여성의 시선으로

<37년 만에 맞춘 퍼즐> 에서는 원풍모방의 여공으로 성장한 노동의식을 여전히 실천중인 여성의 시선으로

3부에서는 불과 몇년 전 혹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노동현장을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에서는 성진노조원들과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작업으로 인한 투쟁의 현장을 겪어낸 노조원의 시선으로

<스무 명의 성난 여자들> 에서는 네임텍 이라는 스티커 회사에서 무시와 멸시 속에 꿋꿋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노조원의 시선으로

<캐디라 불러주세요> 에서는 정식직원이 아니기에 정식노조도 제대로 만들 수 없었던 캐디 노조원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한편한편 읽어갈 때마다 허구가 아닌 실화라는 것을 알기에 하나하나 전부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소설들이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이다가도

변화한 시대만큼 새로운 형태의 착취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푸라기를 쥐던 손으로 계란을 던져 바위를 치다가 돌멩이로 벽을 부수는가 싶더니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조금씩 인정받아 가는 현실은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노동자가 등장한 이후 쌓였던 50년 억압이 전태일 을 계기로 터진지 다시 5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50년 뒤엔 지금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전태일 100주기 기념 소설집을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꼭 그렇게 되길 희망해본다.

나보다 서너 살이나 더 먹었을까, 아주 젊은 검사가 나를 보고는 반말로 이러는 거야.

"고생 많이 했다. 집에 가서 부모님 잘 모시고 농사 잘 지어라"

훈계를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 터지는 거라. 저 사람들은 저리 잘나서 남을 때리고 훈계하는데, 나는 하찮고 못나서 여기 붙들려 와서 이런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펑 터져. 내가 무슨 학교 공부를 했어. 집에 전답이 있어? 배운 것도 하나 없고, 가진 것도 하나 없는 알뜰한 가난뱅이라. 그래도 평생 처음 내 주관대로 옳은 일이라 싶어 나섰던 건데, 모질게 두들겨 맞고 수모를 당하고 나니, 진짜 분하고 서럽더라고. (p. 18 - 이천의 모스크바 中)

 

 

지도부도, 선동가도 없는 시위였어. 계엄군에게 잡히면 피투성이가 되게 두들겨 맞고 팬티만 입힌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판이야. 어느 누가 감히 목숨을 버리라고 선동을 할 수 있겠어? 선동가는 아무도 없었어. 모든 게 자발적이었어. 시위에 참여한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었어. (p. 149)

이길 줄 알면서 싸우는 건 용기가 아니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모두들 나선 거야. 수많은 민란들과 동학난, 삼일운동도 그렇게 일어난 거 아니야?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불의한 권력 앞에 목숨 던져 싸우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나는 믿어. (p. 153 - 팬데믹의 날 中)

 

 

"노동조합은 단순히 월급 몇 푼 올리는 단체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게 노동조합이죠.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나 부모는 가르쳐 주지 않지요. 하지만 노동조합을 가르쳐줍니다. 노동조합의 힘으로 공동체가 되어 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겁니다.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p 211 - 37년 만에 맞춘 퍼즐 中)

"우리는 그동안 지는 싸움만 했어요. 거의 항상 졌어요. 그래서 지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승리했네요.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승리를 한 거죠. 제가 만일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다들 소설이니까 거짓말이라고 하겠죠. 소설보다 현실이 더 거짓말 같다고 할까, 저는 지금도 우리의 승리가 믿어지지를 않네요" (p. 253 -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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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요스트 더프리스 지음, 금경숙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한 히틀러 연구가의 죽음이 촉발한 부조리극,

혹은

사랑하는 스승이자 친구를 위한 긴 고별사

표지 中

 

 

네덜란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요스트 더프리스 의 국내 첫 출간 소설.

1983년 생으로 언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고 예술분야 편집장으로 활동중이면서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데 2013년 발표한 두 번째 작품 <공화국>으로 플랑드르 지역의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황극책부엉이상을 수상한 소설.

사상이 격돌하고 동료와 충돌하는, 지적 싸움으로 가득한 책으로 현재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외양과 실제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접근을 시도한 작품이라는 심사평을 얻은 소설.

이 소설에 대한 배경 설명을 왜 이렇게 길게 하느냐.... 하면...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해해보기 위해서이다.

책의 반 이상을 읽었을때 까지도 내가 읽고 있는 것은 그저 글자 였다.

케이

이런식?!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휘몰아치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BOOK 북

이라고 읽혀졌다는 것을.

읽는 내내 당췌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소설은 처음이라 그런가... 싶다가 또 이해가 안되면 그들의 지적싸움을 나만 이해를 못하는 건가... 싶다가 무엇을 지적하는 부조리극인건가 싶다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에게 왕과 같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을 담은 기나긴 애도였고 슬프디 슬픈 진혼곡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코넬대학교에 있는 브리크의 아파트에서 대화를 나눈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사악한 금발에 훤칠한 미남인 프리소 더포스는 일인 근위대처럼 아래층 부엌에 자리했다. 그는 브리크의 학계 측근 중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동급인 가운데 으뜸인 자'라는 뜻으로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서 항상 커피, 차, 또는 브리크가 요구했음 직한 신문이나 기사, 책을 대령한다. "나의 작은 사설 무장친위대"라며 브리크가 미소 짓는다. (p. 35)

네덜란드인인 브리크와 프리소는 미국 코넬대학교에 함께 있다. 브리크는 저명한 교수이고 프리소는 그가 만든 잡지 <몽유병자>의 편집자이다. 그들은 히틀러학에 관심이 많고 다방면에서 비평을 즐긴다. 브리크의 요청으로 프리소가 칠레로 출장을 떠났을 때 브리크는 한 호텔에서 갑자기 추락사 한다. 프리소는 칠레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느라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위대한 독재자>포스터 액자는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왠지 나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이 집은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니고 낯선 이들의 손을 탔으며, 따라서 그의 존재는 아득히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재회는 내게 덜 개인적이고 덜 '브리크스러운' 것이 되어, 더 가볍고 더 쉬웠다. (p. 61)

프리소가 완쾌되어 돌아왔을 때 브리크는 부재했다. 그가 남긴 것들만 고스란히 존재했다. 하지만 프리소는 그의 부재를 믿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그저 가볍게 일상처럼 그냥 그렇게 보기만 했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말로는, 브리크의 공개 추모식에서 최고조는 놀랍게도 필립 더프리스 라는 네덜란드 연구원의 추도사였다. (p. 71)

그의 이름이 왜 굳이 언급되었을까? 기사에는 그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내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적어도 <몽유병자>에 그가 글을 쓴 적은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 사람을 안단 말인가? (p. 73)

"브리크 일 등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네. 추모식에서 당신이 정말 최고였어"

"그건 내가 아니야!"

"확실해? 신문에 났던데!" (p. 106)

"어떻게 생겼던가요?" 내가 물었다.

"손님 또래에, 머리카락 색이 같고, 키도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p. 129)

 

프리소가 참석하지 못했던 장례식에서 참석했던 모든 이의 관심을 끌었던 필립 더프리스 라는 청년은 프리소 더포스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브리크의 제자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프리소는 브리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느끼기 이전에 필립 더프리스 라는 청년의 갑작스런 등장과 관심집중에 격분한다. 알지도 못하는 그 청년의 추도사로 인해 브리크가 왜곡되었다는 듯이, 갑자기 등장한 그 청년이 오랜 세월 함께 한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듯이. 그래서 그 청년과의 토론 일정이 예정되 있는 학회 참석을 수락한다.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목적? 빈 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는 길에 택시운전사가 던진 질문은 그 자체로는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학회에는 그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기후 변화, 질병 퇴치, 세계 평화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룬다면 틀림없이 그렇다 -- 그런데 우리는? (p. 88)

브리크와 프리소의 대화도 그랬지만, 이 학회 참석기간 동안 설명되어지는 상황들은 그야말로 지적 싸움 이었다.

이 학회는 말하자면 히틀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학회였다. 히틀러학이 어찌나 다양한지;;; 린츠의 히틀러학자들, 빈의 히틀러학자들, 철십자훈장 히틀러학자들, 벙커의 히틀러학자들, 바이마르 히틀러학자들, 베를린의 히틀러학자들, 불가피주의자들 등등등... 이런 학자들이 정말 있단 말인가?

그들중 계보학자들은 '히틀러의 정자 세포를 레판토 해전 이전 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 있게 되었고', 해부병리학자들은 '히틀러의 남성상' 에 대해, 인식론자들은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모든 편지와 모슨 서류'에 대해, 애서가 들은 '히틀러 독서목록'을 만들고, 재봉사들은 '그가 입었던 제복을 죄다 본으로 만들어 정확하게 마름질해 냈고', 이발사들은 '사진을 자료 삼아 그의 수염을 밀리미터 단위까지 정밀한 수치로 재계산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화가, 요리사, 연대학자등 그야말로 거의 모든 분야가 히틀러를 연구하고 있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지적이어서 그저 혀룰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연구학계에는 물론 또다른 부류도 있었다. 갈수록 인가를 끌고 있는 분야로, 사실에는 관심이라고는 없으며 새로 발견된 사실에는 더더욱 관심 없는, 브리크와 나 같은 사람이 속한 그룹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정보가 무슨 소용이냐고 브리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는 사람 없는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어?' 누가 보아도 실제라고 여기는 공포 이미지가 어떤 종류의 사실성보다 가치 있고 힘 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어떻게 비옥한 땅을 찾으며 나아가 그 생각이 어떻게 우리의 상상 안에 존속하느냐이다. (p. 97)

아무도 모르는 정보가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브리크의 추모현장에 없었던 자신을 아무도 모른다고 여겨질수록 참을 수 없게 된 프리소는 필립 더프리스를 향한 맹목적인 미움으로 자신이 필립 더프리스 인양 남들을 속이기고 다니기 시작한다.

펠릭스가 열여덟살 때 그의 부모님은 겨울 스포츠를 하러 가는 그 전형적인 구절양장 도로에서 운전대를 놓치고 말았고, 그는 동생들과 함께 조부모님 집에 가서 살아야 했으며, 장남인 동시에 막둥이 성인으로서 동생들을 돌보았다. 피파는 정작 나보다 펠릭스를 알고 지낸 지 더 오래되었으나 그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해서 내 의견에 동의했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몇 주 동안, 더러는 몇 개월 동안에는 애도에 접어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 꽃과 음악을 골라야 하고, 공증인과 상의해야 하며, 부고를 보내야 하고, 보험과 정기구독을 해지해야 하며,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무릇 완벽한 도피가 되어 '죽음과 부재'가 아닌 다른 무엇에 집중하도록 강제한다. 피파의 말로는, 어쩌면 펠릭스는 그 제1단계를 지나지 않은 듯하다고,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여전히, 삶이 또한 실제 겪어 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질서 정연한 삶을 쫓는 듯하다고 했다. (p. 122)

프리소의 절친 펠릭스의 과거 경험에 대해 여자친구 피파에게 자신의 견해를 들려주었음에도 프리소 자신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더 안좋았다. 프리소는 먼 타국땅 칠레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브리크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정리 절차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죽음과 부재가 아닌 다른 무엇에 집중하도록 강제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필립 더프리스 라는 청년에게 집중하고 집착한다.

필립 더프리스와 토론을 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할 것은 당연지사였다. 벌써 내가 그 대신에 민망함이 느껴졌다. 그가 브리크와 거의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음을, 빌어먹을 그랬던 적도 없음을 내가 알고 있다는 점과 이번에는 허풍 떨 수 없다는 점을 보란 듯이 알려 주어야 했다. (p. 141)

부재를 경험하지 못한 프리소의 일탈이 애도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내게는 꽤 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해긴 했지만... 다 읽고 이제와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종래의 이름은-주로 성인이나 순교자 이름에서 가져온-그 시기에 대대적으로 사라지고 세속적 이름이 선호되었는데, 정치권이 부추기기도 했지만 1940년대부터 전대미문의 성장을 보인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어요. 히틀러라는 이름이 그리 문제될 건 없었지요." 그녀의 이론은 브리크의 학생 한 명이 조사한 내용과 일치했는데, 히틀러 말고도 스탈린 다섯 명, 처칠 세 명, 무솔리니 두 명이 전화번호부에 있었다. (p. 204)

히틀러라는 이름을 갖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갔던 칠레에서의 프리소의 시간은 이름이라는 허명과 실존하는 존재 자체 사이에서 방황하는 프리소의 애도적 방황을 미리 예견한 듯한 경험이었다. 갑작스런 질병에서 타인에 의해 생명이 건져지는 경험을 한 프리소가 브리크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는 스스로 헤쳐 나오기까지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혹시 다른 사람도 고려했었는지 알고 싶었다. 꼭 집어 말하면 프리소 더포스, 1991년 창간된 히틀러 르포지 <몽유병자>의 전무후무한 편집장으로, 요시프 브리크의 최근 저서 다섯 권 가운데 적어도 네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렬하게 공동 편집하고 공동 기획하며 일일이 다 챙겼던 '일인 근위대'

"그게 누구요?" (p. 255)

 

브리크를 애도하는 과정은 곧 프리소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애도기 이자 성장기로 읽혀지는 면도 조금은 있다.

연단에는 옆으로 흰 가르마를 탄 정치인 같은 인사가 샴페인 잔을 들고 <가우데아무스 이기투르>('그러니 우리 모두 즐거워하자'라는 뜻의 라틴어로 중세부터 부르던 유럽 대학생들의 전통적인 찬가이다. 원제는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를 거침없이 선창했다. 나는 교수, 지식인, 언론인, 예술가, 학생이 이렇게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감히 합창을 청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고, 또한 그들이 그 청에 응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마음으로 목청껏 부르는 노랫소리가 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줄은 더더욱. (p. 323)

우리의 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것이 우리의 공동체임이 틀림없었다. 우리의 새로운 공화국, 학력주의 사회, 그토록 박식한 이 모든 사람-상황이 달랐다면 말이다. 그러면 나도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을 테고, 무리의 일원으로 느꼈을 테고, 필시 브리크의 뒤에 서서 기차놀이 춤을 추며 그의 어깨를 내 어깨처럼 느끼며 들썩였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을 즐기지 못했다. (p. 324)

 

그들만의 학회, 그들만의 공화국. 하지만 브리크가 있었을 때는 우리들의 학회, 브리크의 왕국이었다. 프리소는 이제 왕국이 없어졌고 공화국의 혼란을 목도하는 중이다.

"너는 이 학회에 나보다 자주 왔었지? 브리크가 없는 지금은 많이 다른가? 내 말은, 내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건지, 아니면 너무 열렬한 브리크 팬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가 그렇게 사라지면, 왕이 죽은 것과 좀 비슷하지 않아? 그러면 그 자리에 뭐가 남는 거지?"

"공화국" 나는 말했다.

"공화국,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서글픈 구석이 있어. 무언가가 지나가고 난뒤에 오는 법이니까. 왕조의 뒤에, 황조의 뒤에. 공화국은 절대 저절로 존재할 수 없지. 도대체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야" (p. 341)

 

돌고돌아 만난 필립 더프리스는 예상보다 더 많이 프리소를 당혹스럽게 했다. 반전이라면 나름 굉장히 큰 반전적으로. 뒷통수를 뙇

통은 비었다. 브리크는 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거기 빈에 앉아 이 환상 장례식에서 깨어났다. 아주 한참을 물속에 있다가 마침내 수면을 뚫고 공중으로 고개를 내미는 듯했다.

통은 그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필립 더프리스의 침대에서 통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바다에 재를 던져 버린 그 순간에 숫제 머물로 있었다. 나는 일말의 원망도 없이 유골단지를 필립의 침대 옆 협탁에 도로 갖자 놓을 수 있었다. 그 어떤 환영은, 내가 그것으로 무얼 하든지 간에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었다. 어떤 현실도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 내 배속에서 뭔가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몇 달 동안 느끼지 못했던 초연함이라는 감정이었다. (p 376)

 

혼자만의 장례식을 치루고 나서야 프리소는 다시 돌아왔다. 자기 자신에게로. 브리크가 없는 삶도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한 프리소로.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때로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극한 소모가 필요하기도 하다. 너무나 당연히 함께할 거라 믿었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 실제감을 인정하기까지 어쩌면 사람마다 다 다른 방식이 필요한건지도 모르겠다. 프리소가 브리크를 떠나보내며 부른 애도가는 왕국이 멸망하고서야 등장할 수 있는 공화국에서 울려퍼지는 진혼곡이었다. 그리고 그 공화국에서는 왕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왕은 자연스럽게 잊혀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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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수업 - 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김헌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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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문명의 근원 그리스 로마로 꿰뚫는 놀라운 통찰

'답은 틀릴 수 있지만 질문은 틀리지 않는다!'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상적일 수 있는 바닷가 풍경을 이렇게 살짝 양끝을 접어놓은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질문도 아마 그럴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듯 살고 있는 생활 속에 문득 던져본 하나의 질문이 삶 전체를 되짚어 보게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질문들 9가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후 교사로 십년 근무하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직업을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다. 서양고대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서양고전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에서 그리스로마 신화, 비극, 역사, 철학을 녹여낸 강의를 하고, 쉽게 풀어쓴 대중서롤 쓰는 등 활발하게 활동중 이시다.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에 있어 보이는데, 대학신입생이나 사회초년생에게 선물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

질문하며 살라고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사건건 묻고 따지라는 뜻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많은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굵직한 질문들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반복해서 계속 물으며 자신의 답을 검토해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질문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많다는 건, 단순히 질문의 개수가 아니라 굵직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계속 던진 횟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p. 14)

무작정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살다보면 그저 무작정인듯 살게 되곤 한다. 저자는 '질문'하는 삶을 강조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때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자랐다. 자랄 수록 질문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면 질문은 까맣고 잊어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 삶을 관통하는 질문 몇개쯤 갖고 산다는 것은 내 삶의 방향을 확정해놓은 듯한 해답 몇가지를 갖고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할법한 거의 모든 질문은 고대인들이 이미 많이 던져놓았기 때문에 삶에 질문하기 시작하면 고전과의 연결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래서 서양고전을 공부한 저자가 고대그리스로마를 관통하는 조언들을 해주고 있는 것을 읽다보면 그 필연성을 조금은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0 들어가기 전에 -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팩트 체크부터 에포케 까지

플라톤은 그러한 국가를 '칼리폴리스(Kalipolis)'라고 표현했어요. 폴리스polis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말합니다. 앞에 붙은 칼리Kali는 아름답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상적인 국가를 강국이나 부국, 정의실현국가라는 식으로 부르지 않고 '아름다운 국가'라고 했던 거에요.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외적인 미美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이익이나 윤리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p. 34)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는 '실천적 지혜'라는 뜻으로, 지식을 의미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 참된 지혜 혹은 성스러운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sophia)와는 결이 다른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삶을 사는 것에 관하여 잘 숙고하는 사람'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p. 37)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퓌론이라는 사람이 이끈 '회의학파'가 있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에포케(epoche)'라는 걸 강조했는데요, 이 에포케라는 말은 '판단 중지'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고 나쁜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p. 38)

 

그리스 고전을 읽다보면 원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번역되면서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럴때마다 원문 자체로 읽지 못하는 나의 모자란 능력에 아쉽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책들에서 원어가 가졌던 뜻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곤 한다. 아 이런뜻이었구나 하며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곤 한다. 플라톤의 국가 가 칼리폴리스 였구나... 아름다운 국가 라... 굉장히 고대그리스인적인 표현이다!

저자가 중요시하는 '에포케' 도 신선했다. 지지부진하고 회의스러운 회의론이 아니라 '판단중지' 라는 보류개념은 신중해 보였다. 회의스러운게 아니라! ㅎㅎ

1 첫 번째 문 - 나는 누구인가? > 세상을 향한 질문의 시작

꿈은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결핍이 주는 아픔과 그 아픔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지요. 하지만 다른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부족한 것도 없다 말하면서 무슨 꿈을 꾸라는 건가요?(p. 47)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도 섣불리 답을 내리며 단정하고 확신하기에 앞서 끊임없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가 필요합니다. 판단을 중지하고, 다시 한번 묻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진짜 모습을, 의식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p. 73)

 

꿈은 결핍에서 온다.. 잊고 있었다. 요즘 꿈이 없다는 아이들이 많지 않은가...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줬는데 왜 너는 꿈이 없냐고 말할 게 아니다. 부족한게 없어서 꿈을 꿀 수 없는 것이다. 꿈은 스스로의 성장동력이다. 타인이 갖추어준 것들로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동력 찾기란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바로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 격언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델피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던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말의 핵심을 늘 중요시했다. 저자는 이 격언과 더불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해주며 '너 자신을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 는 격언을 남긴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누구인지 알려는 과정중에 '에포케' 는 꼭 필요한 자세인 듯 하다.

2 두 번째 문 - 인간답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 세상에 새겨 넣는 나의 무늬

소크라테스는 아무 이야기나 들려주면 안 된다고 말해요. 시인들을 잘 감독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만 남기고 거짓을 쓰는 자들은 쫓아내고자 합니다. 그들이 쓴 것들은 가르쳐서도 안 된대요. 그러면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시인들이 바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서슬 퍼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그분들을 존경하긴 하는데 애들한테는 그들이 지은 이야기를 가르치면 안 돼, 라고 말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들이 너무 못된 거예요. 도대체 그리스 신들의 역사라는 게 불량하기 짝이 없어요. 이런 이야기들이 사회 곳곳에 퍼지면 가정에도 사회에도 국가에도 질서가 잡힐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끌탕이었어요. 당연히 헤시오도스의 시를 가르치지 말라고 금지한 거죠. 소크라테스는 진실 같은 거짓말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어지럽힐까 봐 걱정이었던 거겠지요. 도덕성이라곤 없는 것 같은 이야기들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p. 86~88)

플라톤이 '국가' 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한 위 이야기는 이 책의 말미에 다시 등장하면서 플라톤의 걱정을 불식시킨다.

신과 이성, 무의식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시대마다 장소마다 사람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랐고, 그들 중에 어떤 것도 정답이라고 딸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 질문만은 결코 틀리지 않고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는 존재로서 인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p. 99)

인간적인 삶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온 발자국의 궤적을 돌아보고, 얼마나 인간적인 삶을 살았나를 물어보십시오. 만족스럽지 않다며 지난 날을 후회하고 과거를 지우려고 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떤 길을 만들며 어떤 자취를 남기고 갈 것인지를 꿈꿀 수 있는 힘으로 바꿔보십시오. 그것을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질 것입니다. (p. 103)

 

저자가 알려주는 헤시오도스의 고전속 신들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한다. 신화는 인간적이지 못한 설화들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나는 그런 모습들과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다를 것인가?

3 세 번째 문 -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가 >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유명한 구절인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문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므로 그대로 번역하자면 '있음이냐 있지 않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어야 해요. 세익스피어는 '삶과 죽음' 보다도 더 깊은 문제가 '존재와 무' 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p. 110)

세익스피어는 그리스 고전을 참 알차게 응용했구나 싶다. 그리스고전을 읽기전에는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이 순수 창작물인줄 알고 그는 천재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그리스고전에서 차용 이나 응용 등 으로 활용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극적으로 잘 쓰긴 했지만 그래도 감흥이 전과 같진 않았더랬다.

여하튼, 저자가 파르메니데스와 연결지어 말해주는 햄릿의 유명한 문장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정말 그랬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었네?! !!!

칼륍소는 그리스 말로 '가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칼륍소와 같이 산다면 오뒷세우스는 감춰집니다. 오귀기아섬에서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완전히 잊히는 것이지요. 오뒷세우스가 칼륍소의 곁을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망각에서 벗어나 기억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뒷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 같은 선택을 한 거에요.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p. 128)

고전은 우리에게 정다블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하지요.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 는 우리가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치욕적인 행동 대신 아름다운 성취를 추구하게 하며, 현재의 안락함에 안주하기보다는 고난을 헤쳐 나가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살아가는 힘'을 주는 셈이지이요. (p. 132)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인간임을 인지한 순간부터 내내 이어여오는 최대의 질문이자 난관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알려주는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 이야기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을 떠올리게도 한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명예' 는 생물학적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이러한 판단기준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라면 내내 하게 되는 원초적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4 네 번째 문 - 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을까? >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멋진 주인공이 되기 위해

나는 내 인생의 시인이고 주인공임을 어느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와 역사를, 그리고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임을 부디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p. 157)

오비디우스 시를 예로 들어 저자는 진정한 주인공으로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는 지금 읽어도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책인데... 살아있는 동안 주인공으로 사느냐 죽은 이후에 주인공으로 남느냐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앞에서의 질문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5 다섯 번째 문 - 세상의 한 조각으로서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 > 개인은 미약하나 시민은 강하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그걸 딛고 일어설 힘을 낼 수 있는 때인 것이지요. (p. 169)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자각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영이나 계층, 세대를 불문하고 대다수 시민에게 판단력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시 안 될 거라며 자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p. 183)

 

아테엔 아고라가 있었고, 로마엔 포럼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촛불 가득한 광장이 있다. 나에서 출발한 질문은 어느새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확장되게 된다.

6 여섯 번째 문 -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교육에 대하여

저는 다음 세대에게 사다리를 놓아주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다리의 용도는 그 위에 이르는 것입니다. 어느 지점으로 가기 위한 것이죠. 교육자는 사다리를 줘야 해요. 그러면 학생들은 사다리를 끌어서 타고 올라갈 것이고, 그게 필요하지 않다면 그냥 버릴 수도 있을 거에요. 버려질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최대한 튼튼하고 좋은 사다리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걸 통해 더 좋은 곳으로 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붙들고 말이지요. (p. 203)

저자는 교사였다고 교수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시절 경험한 그곳의 교육지침은 지금의 우리 교육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좋다 판단하기 보다는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7 일곱 번째 문 -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있을까? > 역사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넘어야 할 것

그리스 신화는 기존의 틀을 부수고 뛰쳐나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있는 자유이 욕망을 자극하면서 말이죠. 어떻게 보면 그런 가르침이 그리스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힘 같기도 합니다. 바로 그 힘이 로마로 이어지고, 서구 세계에 퍼져서 그들이 근대를 이루면서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것처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스 문명의 영향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모험심을 강조합니다. (p. 233)

저자는 카오스에서 시작한 그리스 신화를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 에서 제우스 까지의 '친부살해전통'에 숨어있던 의미를 찾고자 한다. 틀을 부순다는 은 늘 틀을 지키려는 보수와 틀을 부수려는 진보사이의 경계선을 긋게 한다. 하지만 이 경계선은 세대를 반복하며 유지되는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자각일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세대가 강요로 느끼는 기성의 틀은 기성세대가 어렸을 때 그 이전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기존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틀은 그 이후에 태어날 새로운 세대에게는 낡은 것이 된다는 것도 또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생생하게 상상한다면,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틀을 깨고 나오려고 도전하면서도, 그것을 만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어른들에게 존경의 표하는 기품 있는 태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유와 아량의 품격을 갖춘 어른과 패기 있으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기품 있는 청년 사이의 맞대결은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요. (p. 241)

저자가 말하는 이 건강한 두 세대의 모습을 꿈꾸어 본다.

8 여덟 번째 문 -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 갈등을 넘어 화합으로 가는 길

비극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욕망의 절제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면, 축제는 일정 시기마다 각계각층의 욕망을 분출시켜주었던 거예요. 이것이 사회 갈등을 해소해나가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었습니다. (p. 269)

한 사람 안에 누적된 이야기는 곧 그 사람의 세계가 됩니다.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건 결국 같은 세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가까이 묶어주는 힘이 되지요. (p. 282)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비극을 제의와 함께 공유했던 그리스인들이 올릭픽 같은 축제를 통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는지도 이야기한다. '나' 와 '너'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로 묶인다는 것은 이야기를 공감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함께 안다는 것이다.

9 아홉 번째 문 - 잘 적응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 고전과 인생의 상관관계

고전은 영어로 클래식(classic)이라고 합니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라는 말에서 유래했어요. 클라시쿠스는 '클라시스classis'와 '쿠스cus'가 결합된 말인데, 이중 쿠스는 '~한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쿠스 앞에 있는 클라시스 라는 말은 원래 '무리' 혹은 '계급'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예, 평민, 기사, 귀족 계급이 있다면 그 각각의 계급이 모두 하나의 클라시스인 겁니다.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인 거죠. 로마시대에 클라시쿠스는 좀 더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함대'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클라시쿠스 라고 한 것이죠. 로마에서 클라시쿠스란 함대를 내놓을 수 있는 부자 계급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전쟁이 났을 때 국가에 자식밖에 내놓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렸지요. '프롤레스proles'가 라틴어로 '자식'이거든요. 클라시쿠스라는 명칭을 받을 수 있는 클라시스는 주로 귀족 계급이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이런 이유로 클라시쿠스는 '클라시스 중의 클라시스로, 모두가 선망하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갖데 되었어요. 클라시쿠스는 최고 수준의 지위이자 능력이었고, 거기에 맞는 자격과 품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의 모범이요 지표가 되었어요. 이와 같은 이유로 클라시쿠스라고 하면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임을 뜻합니다. 가장 높은 클라시스에 있는 것, 바라보는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 감탄을 자아내는 탁월한 그 무엇, 그것이 바로 클라시쿠스, 클라식, 고전의 핵심입니다. (p. 291~293)

아무나 될 수 없었던 선망의 대상인 클라시쿠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된 다양한 분야의 클라식 즉 고전들, 그러니 그 영광을 마다할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 인생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깊이를 더해주는 고전을 함께 한다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조언에 크게 고개 끄덕여보며, 오늘도 나는 책을 덮자마자 또다른 책을 골라본다. 자신들을 읽어보라며 슬쩍슬쩍 힌트를 주는 책들이 참 많은 세상 아닌가.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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