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그림자를 한 고양이 - 공황, 오늘도 죽다 살아난 사람들
김진관 지음 / 생각의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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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오늘도 죽다 살아난 사람들

호랑이인 줄 알았던 공황은 사실 고양이였다

 

호주에서 심리상담가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공황장애가 생각보다 흔하고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고 생각보다 쉽게 치유될 수 있는 증상인데 이러한 사실들이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나아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공황장애'라는 단어가 이제 낯설기만 한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끔 뉴스를 통해 유명인의 '공황장애' 소식을 듣는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흔한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공황장애' 가 왜 발생하고 어떤 증상을 띠며 어떻게 해야 나아지는지까지는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짧고 굵게 공황장애 에 대한 많은 의문들을 해소해 주고 있는 책이었다.

공황발작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나는가?

>>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은 넓게 잡아 대략 삼분의 일 정도 된다. 소위 순하고 여리고 착하다는 평을 듣는 이들은 대체로 생각이 많고 감정의 여운이 길다. (p. 16)

>> 이처럼 감수성이 높은 사람은 생각이 복잡하고 집요한 탓에 감정의 파고가 크고 여운이 길게 남는다. 감수성이 높은 이들은 낮은 이들에 비해 생리적으로도 각성 수준이 높은 편이다. (p. 17)

>>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스스로 끌어다 곱씹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성의 파고가 더욱 거세고 여운이 길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은 긴장 위로 또 다른 긴장을 얹는 상황이 이어진다. 긴장이 누적되면서 신체 안에 생리적 각성이 자꾸 상승하고, 그런 식으로 서서히 공황발작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각성 수준이 한껏 높아진 상태로 지내다가, 어느 날 조금만 더 각성이 상승하면 공황발작이 시작될 것이다. (p. 18)

>> 공황발작을 경험하는 빈도수는 현저히 증가했다. 긴장이 누적되고 각성이 쌓이면서 어느덧 역치 수준의 턱밑까지 도달한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 정도까지 각성이 상승해 있으면, 약간의 자극만 얹어도 쉽게 역치 수준을 넘기게 된다. (p. 21)

>> 공황발작이 뭔지 아는 사람이 그 정도로 없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한두 번 겪다가 자연 치유가 되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된다. 처음엔 극도로 무서웠더라도, 반복해서 겪었지만 몸에 아무런 탈이 나지 않으니 '별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 안도할 수 있게 되면 그러다 공황발작이 점화되는 일이 없어지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자연 치유가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p. 22)

생각보다 공황발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 스스로 인지해서 치료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인지하지 못한채 스르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심각하게 여길 건 없어보인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내내 공황발작 증세를 겪은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알려준다.

공황발작의 증상은 어떠한가?

>> 사실 공황발작 때문에 기절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각성이 상승했을 뿐인데 우리의 뇌는 눈앞에 위기 상황이 닥친 줄로 착각을 했고, 온몸이 전시 태세에 돌입해서 에너지를 숨 가쁘게 내뿜는다. 그럴 때 자신의 신체 중 좀 더 예민한 부위들이 잘 못 견디면서 탈이 난다. 소화기 계통이 예민한 사람들은 공황발작 때 메슥거림과 구토 증상을 겪기 쉽다. 심장 부위가 좀 더예민한 사람들, 평소에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잘 느끼는 사람들, 억눌려 쌓인 화가 있는 사람들은 가슴 부위의 통증을 호소하느 경향이 있다. 두려움 때문에 불편한 감정을 부인하고 숨기는 성향의 사람들은 두통을 호소하곤 한다. 평소 긴장이 잦고 식은땀을 잘 흘리거나 얼굴이 잘 달아오르는 사람들은 공황발작 때 어김없이 땀을 비 오듯 흘리거나 몸에 열기가 오른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p. 26)

죽을 듯한 위기감으로 다가오는 공황발작이 아닌 사소한 공황발작적 증상들은 사실 살면서 긴장될때 자주 경험했던 상태들이다. 다만 공황발작 이라 함은 이러한 증상들이 좀더 복합적으로 좀더 심하게 겪는 상황인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해도 되는 이유는,

>> 공황발작은 고작 10분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있어도 어차피 짧게는 2~3분, 길어야 10분 정도 지나면 가라앉는다. 10분 동안의 현란한 증상은 분명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10분을 기다려 주면 된다. 10분만 기다리면 지나간다는 믿음이 확고해야 한다. (p. 30, 31)

아무리 심한 증상도 공황장애로 오는 증상은 최대 10분만 참으면 지나간다. 몸에 어떤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니다. 몸이 어딘가 고장난 것도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이고 몇분 기다리면 지나간다. 그렇다고 공황장애가 올때마다 마냥 참으며 살라는 말은 아니다. 분명 치유하고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긴장할 때마다 공황발작을 겪으며 살 필요는 없다.

>> 공황장애의 극복 과정에 있어서 자동화된 사고를 찾아내 인지하고 검증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며 또한 제일 먼저 할 일이다. '그래, 맞아. 신체의 질벼이면 왜 때와 장소를 가려서 오겠어?' 라는 깨달음이 진하게 가슴을 때려야 치유 과정이 시작된다. 심리상담/치료는 무의식 안의 생각을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p. 37)

일단 안심하라는 말이다. 공황장애는 심각하지 않게 잘 치유할 수 있다.

공황장애 에 대해 걱정을 일단 내려놓고 마음을 편안히 한후에야 좀더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는 준비가 될 것이다.

>> 공황발작은 아무에게나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대체 누구에게, 왜, 어떻게 각성이 쌓이고 쌓여 공황발작이 점화되는 역치 수준에 가까워지는가. 몇 가지 고려할 요인은 감수성의 정도, 스트레스의 강도, 그리고 스트레스 기간의 길이 등이다. 감수성이 낮아도 스트레스가 강렬하면 각성이 치솟을 수 있고, 감수성이 높으면 잔잔한 스트레스에도 오래 시달리면 각성이 역치 수준까지 다다를 수 있다. (p. 45)

>> 감정의 강도보다 여운의 길이가 각성을 끌어올린다. (p. 51) 긴장은 회피패도 긴장이다. 의식이 외면해도 무의식은 잊지 못한다. (p. 53)

>> 리더보다 참모가 더 똑똑한 경우가 흔하다. 자신보다 덜 똑똑한 사람을 리더로 앉히는 참모는 흔하지만 덜 똑똑한 사람을 참모로 두고 의지하는 리더는 별로 없다. (p. 56) 공황발작은 리더보다는 참모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법이다. (p. 58)

>> 우울 및 불안에 취약한 기질을 가진, 즉 감수성이 높은 사람은 공황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은 기질적으로 늘 생각이 무성하고 감정의 여운이 길다. (p. 61)

타고나는 기질로 인해 쉽게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 만성화된 우울 및 불안장애가 있다면 이것은 공황발작으로 나 있는 잘 닦인 도로와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공황장애가 극복하기가 가장 쉬운 심리장애라고도 말한다.

>> 공황발작이 왔던 건 어쩌면 잠시 멈추어 서서 각성이 너무 높아진 채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자신을 좀 더 돌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닌지, 계속 이대로 살아가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지 점검해 보라고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는 셈이다. (p. 75)

>> 삶은 견디는 것이듯, 모든 심리장애에 대한 심리치료의 핵심도 마찬가지로 '견디면 열린다' 그리고 견디는 힘은 의지와 결심에서 오는 게 아니라 '완벽한 이해와 통찰에서 비롯된다' (p. 83)

공황장애로 심리상담/치유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 대해 건강보험법에서 10회에 한한 보험금지원을 해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와 임상경험에서 밝혀졌다고 한다. 10회안에 공황장애는 치유되는 것으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공황장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 공황장애는 다부진 용기를 가지면 잘 맞설 수 있고, 견디는 힘을 가지면 잘 넘길 수 있다. 그보다 나은 방법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완전하게 통찰함으로써 공황발작에 수긍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황발작이 별것 아님을 느끼는 것이 올바르고 완벽한 치유다. (p. 87)

그런데 저자의 경험에서 깨닫게 되기도 했고 다양한 연구결과에서 밝혀졌듯이 공황장애는 단독으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공황장애는 독립된 하나의 심리장애로 간주되지만, '하나의 증상' 으로 여겨야 할 만큼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공황장애 단독으로 진단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고한다.

>> 왜 공황장애만 단독으로 가진 사람이 드물까? 혹시 공황장애가 일차적 원인이고 나머지 다양한 심리장애들은 이차적으로 갖게 되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공황장애는 심리치료를 통해 상대적으로 가장 빨리 치유되고, 공황장애가 완치된 후에도 다른 심리장애들은 거의 대부분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종류의 심리장애들이 일차적인 문제이고, 공황장애는 이차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p. 89)

공황장애는 사실 생각보다 별로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공황장애를 치료했다 할지라도 일차적 심리장애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공황발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하니 당연히 공황발작과 밀접한 심리장애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 다양한 심리장애를 세 가지 큰 범주로 나눈 후 하나씩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심리장애는 깊이 또는 심각성의 정도에 따라 정신장애, 성격장애, 그리고 정서장애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모두 10가지의 성격장애 가운데 여기서는 공황장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네 가지의 성격장애만 소개하였다. 그리고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포함하는 정서장애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공황장애를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독자들은 거의 대부분 어느 한두 가지의 정서장애에 대해 '어, 이건 완전히 내 이야기다' 또는 '이건 나하고 좀 비슷하다' 하고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정서장애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공황장애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p. 92)

공황장애가 정서장애와 밀접하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뉴스에 나오는 공황장애 소식들도 대부분 우울증과 세트로 보도되곤 하는 것을 보면.

>> 정신장애는 성장과정에서의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갈등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생물학적, 유전적 소인 때문에 발병한다.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다. (p. 96)

대표적으로 조현병 같은 정신장애들은 뇌에 문제를 가진채 타고 나는 것이었다. 심리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초기 증상이 공황발작과 비슷하다 해서 심리치료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 정신병은 정신과에 가야 한다.

>>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문제다. 성격장애 라는 용어는 이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경계션 성격장애는 '정서조절장애'라 불러야 옳다. (p. 108)

본문의 사이사이 이런저런 진단기준들이 있어서 자가테스트를 해볼 수 있는데, 이런 진단기준들을 읽다보면 거꾸로 어떤 증상이 치료가 필요한 병적인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 불안한 성향은 아동기에 발달하여 청소년기에 틀이 잡히고 성인기에 들어선 후 더욱 굳어져 간다. 평온하고 느긋한 아동기를 보내면서 이런 성향이 발달할 리는 없다. 이들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온전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을 겪었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고통에 휘말렸었다. 아동기에 불안을 잔뜩 품은 채 성장하다가 청소년기에 이성이 발달하고 자율성이 늘어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면에 가득 찬 불안에 대처하게 된다. 즉 자기만의 방어기제들이 발달하고 다양해지고 깊어지면서 습관처럼 굳어진다. 그러면서 성격의 틀이 갖춰진다. 한마디로 이들은 평온하고 느긋한 시절이 어떠한지 잘 모른채 평생 불안과 싸워온 셈이다. 각성이 낮은 평온한 상태가 어떤 건지 잘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 (p. 116)

'어린아이가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을 겪었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고통에 휘말렸었다' 는 것이 엄청난 학대를 받은 성장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경험이라 타고난 감수성에 따라 고통의 파고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상처의 깊이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저 무심한 부모이거나 너무 바쁜 부모이거나 성향이 너무 다른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불안한 성향' 은 자라날 수 있다.

>>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 묻인 감정들이 성장하는 동안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잊겠다 해서 잊히는 건 아니다. 의식이 잊어도 무의식이 다 기억한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데 늘 불안정하다. 어디서 오는지 알 길이 없는 내면의 불안에 자주 직면하게 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항상 대처한다. 방어기제가 하나둘 쌓여서 성격패턴을 형성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성격이 굳어져 간다. 그리고 그런 성격 패턴이 또 다른 불안을 낳는다. 불안을 피하려다가 불안이 커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이렇게 각성이 쌓여가는데 어느 날 공황발작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의아할 일이다. (p. 117)

본인이 본인의 불안한 성향을 잘 모르고 살다가도 공황발작이라는 신체적 경험을 하고 나면 그제야 자신이 묻어놓았던 상처를 들춰보게 된다. 어쩌면 공황발작은 성격장애나 정서장애를 알리는 시작인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감수성은 타고나는 기질이라는 데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어느 정도는 배우고 익히면서 키워 갈 수 있고, 그래서 감성 지능을 발달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타고나는 기질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데에 동의한다. (p. 139) 청소년기와 성인 초기에 사회불안장애, 일반화된 불안장애, 우울증, 또는 강박장애 등을 겪고 있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영유아기에 '행동억제' 그룹으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심리학계에서는 감수성이라는 타고난 기질은 세월이 지나면서 쉽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 즉 노력해서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p. 140)

뇌의 질병도 타고나는 것이지만 여린 감수성도 타고나는 것이었다. 언제 어느때 터질지 모르지만 늘 발병의 가능성을 타고나는 셈이다. 하지만 알고 대처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 몰라서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감을 갖지 말고, 무엇이 문제이고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알고 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났을때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 저자는 공황장애의 원인과 증상에 대한 이해를 상식적인 수준에서라도 반드시 알고 있기를 강조한다.

>> 자신의 심리에 무엇이 숨어 있고, 어떻게 발달해 왔고, 무의식중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통찰하고 받아들이면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공황장애가 납득이 된다. 그러면 공황장애의 치유는 훨씬 빨라진다. 납득이 된 것만으로도 공황장애는 거의 다 치료된 거나 다름없다. 공황발작이 오면 '그래, 왔구나, 그럴 만도 했지' 생각해 주고, 그저 백 미터 달리기 한번 한셈 치고 잠시 쉬고, 진정이 되면 다시 일상을 살면 된다는 걸 받아들인다. (p. 147)

>> 공황발작이 어느 날 느닷없이, 그저 운이 나빠서 바이러스가 침투하듯 갑작스레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게 치유의 첫걸음이다. 지나온 삶에 큰 굴곡이 없어 보여도, 대인관계가 남 부러울 것이 없이 원만해도, 큰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잘 나가고 있는 사람에게도 공황발작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젠 납득해야 한다. 남들 보기엔 잘 살고 있는 당신의 내면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도 모른채 각성이 차곡차곡 쌓여왔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p. 179)

이책은 일종의 예방주사 같은 책이다.

스스로 예민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이유없는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삶의 스트레스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 몸이 더워지면서 식은땀이 나는 듯하다.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곧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하고,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내 호흡이 짧아지고, 어지럽고, 몸에 열이 본격적으로 오르고, 시야가 흐려지면서 주위와 내가 분리되는 듯 붕 뜬 느낌이 든다.(p. 77)>> 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이 책의 내용들을 생각하며 너무 겁먹지 말고 바로 치유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심리예방서 같았다.

비슷비슷한듯한 이런저런 심리치유서 힐링서들을 읽었는데도 여전히 비슷비슷한 책을 찾아읽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며 좀더 구체적으로 심리장애문제를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 싶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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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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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가끔은 스릴러 소설을 읽어줘야 한다.

간만에 몰입해서 읽은 이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었을때 왠지 머리가 개운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표지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두 부부, 즉 4명의 인물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로이드 와 헨 부부는 한적하고 쾌적한 동네로 이사를 와서 동네 주민들을 위한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매슈 와 미라 부부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서로 옆집 이었다.

헨은 벽난로 위에 놓인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작은 놋쇠 뱀, 나무로 만든 촛대, 자그마한 개 초상화, 불이 켜진 지구본 그리고 한가운데에 트로피가 있었다. 트로피의 은색 받침대 위에는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다른 쪽 다리는 쭉 편채 앞으로 칼을 겨눈 펜싱 선수상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헨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p. 23)

표지였다.

표지 그림이 이렇게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줄은 미처 몰랐다.

신선했다.

서재로 돌아간 매슈는 신문지로 유소년 체전 트로피를 싸서 빈 상자에 넣었다. 밥 셜리의 라이터, 제이 사라반의 BMW에서 가져온 비아르네 선글라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런 맨소가 가지고 있었던, 너덜너덜해진 아동판 <보물섬>도. (p. 29)

아직 사건이 벌이지지도 않았는데 범인은 암시되었다.

대부분 소설 초반에 밝혀진 범인은 범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반전은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었다.

그렇게 범인을 염두에 두고 과거 사건을 역추적하는 동시에 현재 사건이 전개된다.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로 헨은 늘 음산한 분위기의 책들을 골랐고,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등학교때 어둡고 징그러운 그림으로 몇몇 대회에서 상까지 탔으니까. 하지만 캠던 대학교 1학년 때 첫 조증이 오면서 과도한 자신감과 심각한 불안감 사이를 미친 듯 오가게 되었다.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했으며, 머릿속으로는 쉴 새 없이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헨은 자살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상상했으며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씹었다. (p. 37)

화가이자 동화삽화작가인 헨은 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병원에 입원도 하고 전기치료도 받고.. 여하튼 긴 치료 끝에 지금은 조증은 없이 가끔 우울증만 있는데 이또한 꾸준히 복용중인 약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지 꽤 오래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충분이 정상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하지 않은 기기묘묘한 그녀의 작품들은 볼때마다 섬찟하지만 그녀는 그 그림들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그림이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매슈는 <동떨어진 거울>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이 세 번째로 읽는 것이리라. 매슈는 역사물은 다 좋아했지만 특히 중세 시대를 다룬 책이 제일 좋았다. 죽음이 만연하고, 생명이 값싸게 다뤄지며, 거칠고 생생한 당시 분위기 때문이었다. (p. 47)

매슈는 고등학교 역사선생님이다. 헨이 몇년 전 일어났던 미제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자신을 신고하면서 두 이웃은 서로 친해질 새도 없이 접근금지신청을 한 사이가 됐지만 매슈는 헨에게 자꾸 끌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헨은 자신을 알아보았다. 헨의 그림에서 매슈는 동질감을 느꼈다. 매슈는 헨과 헨의 그림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통할 거라고 여겼다.

경찰도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매슈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헨리에타 머주어는 믿을 수 없는 증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가짜 증인이었다.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이 이상한 여자, 어떤 면에서는 일이 완벽하게 풀렸다. (p. 199)

어머니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무표정했고, 어떤 모욕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증인의 얼굴이었다. 그 일을 겪는 게 아니라 그냥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 그게 바로 헨리에타의 표정이었다. 그녀 역시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매슈는 그 순간 그녀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뿐 아니라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일어났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헨리에타는 그의 아버지의 괴물 같은 면, 어머니의 나약함과 우아함을 모두 보았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동생 리처드도 보았다. 매슈가 처음으로 누군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 그의 안에서 열려버린 문도 보았다. (p. 200)

헨의 추리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남편 로이드도 경찰도 아무도. 오직 범인 매슈만이 헨의 말을 믿어주었다. 헨의 과거 병력은 철저히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매슈는 알았다. 헨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헨에게 모든것을 말하고 싶어졌다.

유일한 증인이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증인인 헨, 헨리에타.

고대그리스 신화속 인물인 카산드라가 생각났다. 트로이의 공주이고 예언력을 가졌으나 저주 받은 예언력이라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어주지 않았던, 진실되지만 거짓으로 받아들여졌던 카산드라의 예언. 그리고 실현된 트로이의 멸망.

헨과 카산드라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나 같은 욕구를 가진 사람은..."

"당신도 알겠지만 난 누구에게도 솔직히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상담사를 찾아가도"

"상담사가 돼달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우리 관계가 얼마나 특별한지 설명하려는 겁니다. 난 당신에게 무슨 얘기든 할 수 있고, 당신은 그걸 듣고도 어쩌지 못해요.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생각을 바꿔보면 당신에게도 가치 있는 제안일 겁니다. 당신은 절대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난 여자는 죽이지 않아요. 그러니 난 당신도 해치지 않을 겁니다." (p. 234, 235)

매슈와 헨은 기묘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헨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고, 매슈는 헨에게 자꾸 솔직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기괴하면서도 웃기는 일이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녀와 매슈뿐이라니. 매슈는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테니까. 헨 역시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고, 다들 그녀의 정신병이 도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매슈를 만나야 할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무서웠는데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슈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들어줘야 할지 몰라. (p. 247)

매슈는 남자만 죽였다. 그것도 바람핀 남자만. 그런 남자들은 지속적으로 여자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이므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슈의 살인은 작품 초반부터 등장했지만, 그가 저지른 살인은 잔혹하진 않았다. 그저 일종의 사형집행수 처럼 보였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나한테 구세주 콤플렉스가 있고, 세상의 모든 죄 없는 여자를 사악한 늑대에게서 구해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죠? 난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도 없진 않아요. 우리 아버지는 괴물이었고, 어머니는 피해자였죠. 그래서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 난 당신이나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을 훨씬 더 많이, 훨씬 더 깊게 분석했습니다. 난 나를 잘 압니다.

남자를 해치는 여지보다 여자를 해치는 남자가 훨씬 많습니다. 이건 그냥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난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단지 당신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난 압니다. (p. 264)

매슈는 살인을 저질렀지만 늘 논리정연하게 자신을 분석하고 있었다. 아무나 죽이지 않고 죽어야 할 놈만 죽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이 살인범 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갖진 않았다. 늘 이성적으로 생각했고, 헨과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헨을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살인범 매슈 뿐이었다.

처음부터 시작된 아이러는 점점 더 타당한 근거를 드러내며 독자가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매슈가 비록 살인범이지만 잔인한가에 대해 자꾸 의구심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한동안은 괜찮다가 살인을 맛보고 나면 문이 열리는 셈이고, 다시는 그 문을 닫지 못합니다. 적어도 난 죽어 마땅한 남자들만 죽이면서 그걸 통제할 수 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해요. 동생은 아버지와 똑같습니다. 죄없는 여자들을 해치고 싶어 해요. (p. 312)

매슈에게 열린 문이 동생에게도 열려 버렸다.

그리고 동생 리처드는 늘 헨 을 예의주시하며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슈와의 대화를 통해 헨은 남편 로이드의 감춰진 모습을 깨닫게 되고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매슈를 '나의 곰 아저씨' 라 부르며 믿어왔던 아내 미라는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매슈의 감춰진 부분들을, 하지만 언젠가부터 눈치챘던 부분들을 이제 인정해야 될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때 사건이 터저버렸다. 미라가 매슈를 만나러 가고 있던 그때.

살인사건이 연거푸 발생하고 여전히 헨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뜻밖의 인물이 활동을 개시한다.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 그날, 미라고 집에 가고 있던 그날, 헨의 작업실에 누군가 찾아온다.

잠들었던 그가 깨어났다.

처음부터 드러난 진실이, 거짓에서 진실이 되어 가는 과정 내내 서서히 쫀득해지는 소설이었다.

스릴러 소설다운 반전의 재미도 함께 있는 가독성 좋은 소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브링 미 백' 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브링 미 백은 여자 버전이고 이 작품은 남자 버전이랄까.

헨은 싸이코패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였는지 그녀 주위엔 자꾸 싸이코패스들이 다가왔다. 여자건 남자건 어리건 나이들었건.

그리고 그들은 제정신이고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고 끝까지 자신을 지켜냈다. 그녀는 싸이코패스가 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또다른 싸이코패스를 만나더라도 헨은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Before She Knew Him 그녀가 그를 알기도 전에' 라는 원제 뒤에 어떤 말이 어울릴까 문득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그를 알기도 전에 ... 그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알아보았을때 그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ps. 이 책에서 가장 서늘했던 부분은 호밀밭의 파수꾼 은 언급한 부분이었다. 최근 읽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싸이코패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읽고 나니 어찌나 공포스럽던지;;;

매슈는 손끝으로 책등을 훑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열세 살 때 그를 구원해 주었다. 그 책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부모와 세상 전반에 느끼는 분노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p. 318)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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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역설 -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 외 지음, 이경식 옮김 / 부키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혁신은 어떻게 가난을 물리치는가

 

 

The Prosperity Paradox 원제의 부제 How Innovation Can Lift Nations Out of Poverty 는 '어떻게 혁신이 국가들을 가난에서 구해줄 수 있는가' 로 번역된다. '왜 (어떤 국가들에서는 지속적인 국가적)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를 물었을때 '(그러한 국가들에서)혁신이 어떻게 가난을 물리치는지'를 알려주는 반어법적 질문이랄까. 미리 답을 말하자면, '혁신이 답'이다.

저자소개글을 보니 저자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경제학자였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이론에서 한국은 훌륭한 성공사례로 등장한다. 본문에 한국이야기가 많아서 한국내 출판을 염두에 둔 책이었나 싶을 정도였지만 번역되어 들어온 책이 맞다. 신기했다. 이렇게 한국경제를 들여다본 책을 번역서로 읽는다는 것이.

나는 1970년대 초에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한국에서 모르몬교 선교사로 2년을 보냈다. 그때 나는 가난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직접 목격했다. 그때의 경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나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로즈 장학금을 받았을 때 한국에 초점을 맞추어서 경제 개발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내가 취직하려던 바로 그해에 세계은행에서는 미국인을 더는 채용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내 인생의 운명이 바뀌었고, 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한국을 방문하면 예전의 가난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나는 무척 마음이 가볍고 행복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극적인 전환이 수십 년 전 한국과 비슷한 정도로 가난에 찌들었던 다른 나라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래전 한국을 도우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들었을 때 떠올렸던 질문, 이른바 '번영의 역설' 문제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끈덕지게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p. 16~17)

한국의 경제발달은 역사에서 기적으로 남았다. 단기간에 빠른 성장 그리고 유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사례인데다 한국과의 인연이 있는 저자로서는 자신의 경제학이론연구에서 한국의 경제발달이 내내 관심대상이었던 듯 하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의 탈바꿈은 경이로운 변화이긴 하다. '중공업 투자가 한국에서 엄청난 경제적 변화를 만들어 내고 또 뒤이어진 커다란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고 주장하기는 무리'(p. 455-주석17) 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국이 불과 50년 만에 이룩한 놀라운 성장'의 배경에는 국가주도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저자는 그 무언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1990년 35.5%이던 전 세계 극빈율은 2015년 9.6%로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이후 10억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극빈의 나락에서 구제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통계 수치는 극적이긴 하지만 발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 극빈층에서 벗어난 10억 명 대다수인 7억3천만명이 중국이라는 한 나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1990년에 66.6%이던 극빈층 비율을 현재 2%미만으로 줄였다. 실로 눈부신 발전이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극빈층 인구가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것도 상당한 폭으로 말이다. (p. 18)

중국은 여러 면에서 참 예외적인 국가다. 역사와 정치도 그렇지만 경제 또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경우가 아닐까 싶다. 세계적 극빈율 저하의 숨은 의미를 읽고 나니 역시 평균 수치는 함부로 믿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중국을 빼고 아프리카의 극빈층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프리카에는 끊임없는 원조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있다. 왜일까? 저자가 말하는 사례는 '원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에포사는 3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어렵게 모금했고, 우물을 설치할 마을 다섯 곳을 정했다. 에포사와 친구들이 우물을 처음으로 가동하기 위해 그 마을들을 방문하던 날, 에포사와 마을 주민들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맛보았다. 그런데 우물에 탈이 나고 말았다. 새 우물들이 마련되고 약 여섯 달 뒤였다. 우물들은 모두 시골 지역에 있었고, 부품을 마련해 우물에 문제가 생긴 마을로 갈 숙련공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우물 하나를 고치면 다른 우물이 또 말썽을 일으켰다. 에포사와 친구들은 그동안 물이 부족한 마을들을 돕겠다고 그렇게나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제는 또 다른 마을에 우물을 설치하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 버린 상태이다. (p. 21~22)

이 사례는 특별한 사레가 아니라고 저자는 덧붙여 설명하기를, '국제환경 및 개발연구소'에 따르면 이렇게 고장 난 채 방치된 우물이 아프리카에만 5만개가 넘고 몇몇 지역에서는 전체 우물 가운데 80%가 고장난 채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에포사가 우물을 설치했던 한 마을에도 새 우물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방치된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국제 원조 기관이 예전에 설치했지만 고장이 난 뒤로 버려진 우물이었다' 고 한다. 그야말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 라는 속담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국제원조의 이면이다.

이 책의 공저자이자 저자의 하버드대학교 제자인 에포사는 선의의 노력과 시도가 결국 실패하고 마는 아픔을 직접 겪어 봐서 잘 알게 되었는데, 에포사의 경험을 통해 피폐한 나라들에서 삶과 노동의 조건을 개선하겠다고 마련된 여러 프로젝트들이 결국 좌절로 끝나 버리는 사례들이 알려주는 통찰은 바로 '가난을 누그러뜨리는 일은 번영을 창조하는 일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p. 23) 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우리 저자들은 당신이 이 책을 읽고 경제 발전 문제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기를, 제기하는 질문을 바꾸기를, 그리고 문제 해결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역들을 돕기 위해 개발하는 해결책을 바꾸기를 기대한다. (p. 23)

저자는 가난만 보지 말고 기회와 잠재력을 보라고 말한다. 명백해 보이는 해법 즉 직접 지원하는 해결책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직접적인 지원이라는 방식으로는 가난을 일시적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몰라도 상황을 눈에 띄게 바꾸어 놓지 못함을 알아차리고 같은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볼것을 제안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98년 아프리카에 설립된 휴대전화회사 셀텔 의 성공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힘겨운 투쟁은 흔히 '비소비'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비소비란 잠재적인 소비자가 자기 삶의 특정 측면에서 어떤 발전을 필사적으로 원하지만 해당 문제에 대한 간편하고 저렴한 해결책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가장 단순하게만 대응한다. 해결책 없이 그냥 고통스럽게 살거나 차선책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봤자 고통은 계속 이어진다. (p. 33)

우리가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많은 나라들에서 지속적인 번영은 가난을 바로잡는다고 찾아오지 않는다. 번영은 그 나라들에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는 혁신에 투자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바로잡기만 하면 번영이 곧바로 뒤따를 것 같은 질 낮은 교육, 부족한 병원, 나쁜 통치, 빈약한 인프라를 비롯한 여러 빈곤 지표들을 개선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자원을 직접 쏟아붓는다고 해서 진정하고 지속적인 번영이 그 나라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했다. 많은 나라들에서 번영은 특정한 유형의 혁신, 즉 '시장창조혁신'에 투자할 때 전형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p. 35)

대부분의 경제투자는 소비할 능력이 없는 계층 즉 '비소비'계층을 제외한 소비능력이 있는 소비계층을 타깃으로 한다. 경제발달이 잘 이루어진 나라에서도 이러한 타깃투자가 당연시 되는데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더더욱 그나마 있는 소비계층을 타깃으로 할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경제투자는 성공신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비소비 계층을 소비계층으로 변화시키는 경제투자가 있을 때 국가적 성장에까지 닿을 수 있었다. 왜 어떤 나라는 가난을 탈피해 번영하고 어떤 나라는 여전히 가난한가 라는 번영의 역설은 '비소비' 계층에서 해답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좋은 이론은 해결해야 할 문제의 틀을 잡아 줌으로써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그리하여 가장 유용한 대답을 얻도록 이끄는, 내가 아는 최상의 길이다. 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학문적인 온갖 시시콜콜함의 진창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무엇이 무엇을 유발하는가?' 라는 지극히 실용적인 질문에, 그리고 '왜?'라고 묻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접근법이 이 책의 핵심이다. (p. 39)

그런데 분명히 해둘 점이 한 가지가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설명하는 발전 과정은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을 누리고 있는 모든 나라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좋은 이론은 특정 조건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사용되어야 한다. 즉 좋은 이론도 특정한 환경에서만 유용하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면적, 인구, 문화, 리더십 그리고 역량 등이 제각기 다르다. 이런 환경 요소들이 그 나라의 운명에 상당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혁신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장을 창조하는 혁신에 투자하는 것이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을 번영으로 이끄는 신뢰할 수 있는 경로라는 사실이 계속 입증되어 왔음을 우리는 확인했다. 이 책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는 것이 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설명한다. (p. 40)

내가 봤을 때 이 책의 핵심은 '1장' 이다. 1장에 이 책의 개략적인 내용이 전부 들어있다. 대표적 사례를 들어 분석하고 이론화 하고 그 이론의 중요성을 빠르고 쉽게 설명해준다. 그렇다고 1장만 읽고 이 책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면 결코 그렇지 않다. 뒤이어 연결되는 내용을 통해 보다 확실히 이해하고 구체적 사례들을 확인하면서 1장의 핵심들을 체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대표사례들 중에 한국의 경제이야기를 읽으며 새로운 역지사지도 느낄 수 있게 된다.

'비소비'에서 기회를 포착한 혁신 기업들의 사례는 흥미로웠다. 사파리콤, 톨라람, 셀텔, 갈란츠, 표도르바이오테크놀로지스, 포드자동차, 어스인에이블, 클리니카스델아수카르, 그루포빔보, 옵티카스베르데베르다, 마이크로인슈어 등의 성공사례는 가난한 나라에서건 부유한 나라에서건 어찌됐든 비소비계층에게서 소비를 이끌어냄으로써 새로운 성장엔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례는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가난을 끝내고자 하는 노력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에는 빈곤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설이다'(p. 143) 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었다.

국가적인 사례로 들어가도 저자의 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 미국, 일본, 한국 에서의 혁신과 멕시코에서의 (잘못된) 혁신을 대조하면서 혁신이 번영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혁신'의 성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하지만 여하튼 지금까지의 혁신은 한 개인에서 한 회사에서 비롯된 혁신이었다. 이러한 혁신들이 국가적 번영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기반들이 필요하다. 법률같은 제도, 부패와 정치권, 인프라우선주의 등을 실사례를 통해 분석하면서 인식에서의 혁신 또한 필요함을 강조한다. 부패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는데

부패는 기본적으로 훌륭한 리더십이 부족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런 이유도 일부 작용하지만 근본 요인은 따로 있다. 부패는 사람들이 어떤 순간에 자신이 접근 가능한 가장 유익한 선택지로 보이는 것을 가장 편리한 해결책으로 '채용'하는 데서 발생한다. (p. 284)

발전이 흔힌 성공적인 반부패 프로그램들보다 '선행하지', 그 반대는 아니다. 사람들이 발전하도록 도울 대안이 별로 없을 때 부패는 가장 실행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로 대두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패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제시되면 투명성도 이어지는 발전이 시작된다. 이런 일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p. 293)

부패를 개인적인 비리문제로 생가하는 것은 너무 좁은 시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부패는 해결책이었고 선택사항 중 하나일 수 있었다. 그리고 부패를 저지른 개인을 없애도 또다른 누군가가 부패를 저지르는 것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그 사회에서 여전히 부패가 좋은 선택지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패는 나쁜 선택지가 될 수 있고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로 저자는 다시 한국을 언급하고 있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을 다스렸던 독재 지도자 박정희 장군에게 딸 박근혜가 나중에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더라도 그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딸이 나중에 부패 혐의로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고 기소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아마 박정희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실제로 한국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려면 박정희 장군이 1979년 암살될 때까지 한국을 통치했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그의 독재 아래에서 한국이 이룩한 경제 발전의 규모는 모든 나라가 부러워할 정도였지만, 그동안 축적된 부패의 규모 역시 반론의 여지가 없이 거대했다. 적어도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에는 그런 부패가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였다. 하지만 한국의 부패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더 투명한 사회로 순조롭게 바뀌어 가고 있다. 시민을 위한 번영을 창조하는 혁신에 사회가 더 많은 투자를 할 때 부패와 맞서 싸우는 여러 체계는 비록 느린 속도이지만 뚜렷하게 개선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투명성이 뿌리를 내려 온 과정이다. (p. 297~298)

한국은 참 시끄러운 나라다. 다른 나라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많은 의견과 오해가 난무하는 뉴스들을 보면 그저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시끄러움이 민주주의의 증거이기도 하다. 투명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말할 수 없는 침묵을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했던 시대는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부패의 시대였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노력끝에 탄생한 당당한 민주주의 사회인 것인지 새삼 상기해 본다.

번영의 역설을 증명하면서 쌓아진 것들로 이제 번영의 과정을 위한 것들을 정리하며 책은 마무리를 향해간다.

우리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번영을 창조하는 데서 혁신이 수행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번영의 역설'을 이해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혁신이란 사회가 스스로를 고쳐 나가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 사회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무엇이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를 고쳐 나가는 과정 그 자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제시하는 시장 창조 혁신의 원리들은 가난과 발전 그리고 전 세계의 번영을 바라보는 관점과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p. 354)

이 책이 완벽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이 책은 결코 최종 완성품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이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번영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일에서 혁신이 수행하는 역할을 더 온전하게 이해하는 길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여정에 당신이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모든 좋은 이론과 발상은, 그것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가장 적합한 환경과 가장 부적합한 환경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 더 나아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에 소개된 이론들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도록 당신이 이 이론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더 나아가 이 이론들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 주기를, 그리하여 가장 올바른 해결책을 함께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p. 361)

저자의 의도가 참 좋아 보였다. 나는 종교가 없어서 이런 표현을 잘 쓰지는 않지만, '선한 영향력' 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책이었다.

어려운 경제이론서가 아니라 현실경제지침서 처럼 읽히면서도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 모두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책이었다. 관점의 전환은 경제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늘 머리가 새롭게 트이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번영의 역설은 개인에게는 기회의 포착을 국가에는 성장의 연결점을 국제기구에는 가난구제의 허실을 새로운 관점으로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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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 쇼크 - 생존을 위협하는 대기오염을 멈추기 위해 바꿔야 할 것들
팀 스메들리 지음, 남명성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생존을 위협하는 대기오염을 멈추기 위해 바꿔야 할 것들

재생 가능한 공기와 지속 가능한 일상을 위해

우리가 알고, 멈추고, 해야 할 것들

 

 

저자는 환경전문기자이자 자유기고가 라고 한다. 안개와 연기의 사이 그 어디쯤의 뿌연 런던에서 살면서 문제가 일상이 되면 문제로 여겨지지 않듯이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는데, 딸아이가 태어나면서 대기오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자 특유의 심층탐구력을 발휘하여 다양한곳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하며 지금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공기가 얼마나 '쇼크' 상태인지 책으로 정리해내게 되었다.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다른 국가에서 '납과 범죄'에 관한 비슷한 연구들이 진행되었고, 대체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주요한 인구통계학적인 변수들을(나이, 교육정도, 수입 등)감안해 보정을 한 뒤에도 대기 중에 포함된 납은 폭력적 범죄에 대한 가장 결정적 요인이었다. (p. 16)

1980년대에는 도로에 다니는 모든 차랑은 납이 섞인 연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납에 노출되면 감정 조절과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충동 조절이 잘 되지 않아 공격적 행동이 늘어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사용된 납 첨가 휘발유 때문에 1976년부터 1980년까지 5세 미만 미국 아이들의 혈중 납 농도 중앙값은 정상 수치에 비해 거의 천 배가 높았고, 2005년 범죄 기록과 비교했을 때 폭력범죄와 유의미한 관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그 당시의 어릴때 들이마셨던 납이 섞이 배기가스가 폭력범죄와 유의미한 관계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 있다. 그저 숨만 쉬었을 뿐인데 납에 중독됐다니! 그리고 폭력적이 되었다니!!

위 연구결과는 그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저자는 1부 원인 과 2부 반격으로 나누어 대기오염의 문제와 해결점을 풀어낸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세계 대도시들을 예로 들어 심각성과 희망을 과거와 현재로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2000년대의 런던은 그레이트 스모그에서 교훈을 배우기는커녕 디젤 배기가스의 국제적 중심지가 되었고, NO₂와 미세먼지 오염의 가장 강력한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p. 36)

중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발전 과정을 겪고 있으며, 그런 상황은 많은 도시에서 대기오염의 주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2010년 현재 중국은 포괄적이고 전국적인 대기오염 및 건강 감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p. 39)

인도 델리는 최근 세계에서 주변 공기가 가장 오염이 심한 주요 도시로 뽑혔다. (p. 46)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의 12개 도시가 매년 오존 오염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LA는 최근 16번의 보고서 가운데 15번 '가장 오염된'도시의 위치를 차지했다. (p. 54)

2017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파리를 포함한 19곳의 대기유지구역에서 반복적으로 NO₂ 허용치를 위반한 사실에 대한 대처가 부실하다는 마지막 경고를 프랑스에 보냈다. (p. 59)

1952년의 런던은 그레이트 스모그를 경험했지만 2000년에도 대기의 질은 만만치 않게 안좋았다. 2013년 베이징의 에어포칼립스 는 대기재앙 수준이었다. 인도의 델리는 외교관들이 자녀와 함께 가지 않는 도시가 되었고 푸른바다가 있을 것 같은 캘리포니아도 문화와 유산의 중심인 파리도 숨쉬기 좋은 곳들은 아니었다. 대기오염은 열악한 위생과 오염된 식수를 추월해 세계에서 조기 사망을 끌어내는 환경적 요인 가운데 1위를 차지했고 전세계적인 문제가 된지 오래였다.

전 세계는 연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불이 붙는 것이라면(그리고 특히 화석연료라면) 우리는 기꺼이 태울 것이다 그 연기 속에 무엇이 있는지, 연기가 결국 어디로 가는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 그럼 도대체 그 연기 속에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 연기는 결국 어디로 가는 걸까? (p. 60)

세계 주요 도시들의 하늘이 잿빛인 것이 언제부터 당연하게 여겨져 왔을까? 원래 하늘은 파래야 하는데 잿빛이어도 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왔을까? 지금 당장 베이고 쓸린 상처가 아니라고 해서 몸에 괜찮은 것은 아닌줄 알면서도... 저자는 공기를 나쁘게 만드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찾아봄으로써 추상적이게 느껴지는 문제점을 하나하나 구체화시켜주고 있다.

이산화질소, 암모니아, 오존, 휘발성 유기화합물, 이산화황, 일산화탄소, 메탄 ... 화학책은 아니지만 대기오염을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몇몇 화학기호들은 눈여겨 봐둬야 한다. 오래전 화학시간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그 화학물 보다 그 화학물이 일으키는 문제점에 초점을 둘 것이므로. 그리고 그 문제점들은 굉장히 일상 가까이에 있다. 먼저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이산화질소부터.

우리가 사는 도시와 마을에서 일산화질소(NO)와 이산화질소(NO₂)라고 불리면서(합쳐서 NOx라고 한다) 질소산화물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자동차 배기가스이다. 모든 자동차 엔진은 사실상 아주 작은 번개 생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모든 도로는 끝없는 폭풍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산화질소는 중대한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그래서 가장 우려되는 것이지만 일산화질소는 덜 해로운 대신 공기 중에서 빠른 반응 속도로 더 많은 이산화질소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p. 64)

대기오염이라고 하면 문제의 원인을 공장굴뚝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더 심각한 원인이 자동차 배기가스 임을 강조한다.

2015년 기준 EU에서 암모니아 배출량의 94퍼센트가 농업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가운데 절반은 소를 키우면서, 4분의 1은 비료에서 생겼다. (p. 66)

오존층은 행성에 얼굴에 바르는 선크림 같은 존재다. 그러니까 위에 오존층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우리는 단지 오존층이 지상에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존층을 제외하고 남은 오존의 9퍼센트는 지상에서 만들어지는데, 대부분 우리가 배출하는 것이다. (p. 69)

공기 중에서 화학 반응을 보이는 질소 기반의 또 다른 가스 암모니아는 질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세 개가 결합한 형태이다. 암모니아의 발생처는 농업이다. 오존은 이산화질소가 있는 상태에서 유기물에 비친 햇빛의 반응으로 공기 중에서 만들어진다. 오존이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프레온가스 금지 헤어스프레이 사용제한등 여러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존은 그냥 햇빛반응으로도 만들어진다. 배기가스가 내뿜는 이산화질소만 있으면.

대표적인 이 가스들 말고 다른 유해 가스들도 많지만 더 중요하고 더 심각한 것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가스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앞서는 대기오염 물질이 있다. 그건 가스가 아니다. 고체인 미세먼지(PM)이다. PM은 도로 먼지부터 매연까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입자들로 우리 건강에 가장 큰 피해를 준다. 과학자들은 PM을 생성원인(석탄 연기인지 농업 먼지인지 배기가스인지)이 아니라 크기로 정의한다. 그리고 대체로 크기가 작을수록 우리 건강을 더 효과적으로 파괴한다. (p. 90)

어쩌면 발생원인이 분명한 가스로 인한 연기로 인한 스모그가 더 나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작아지는 먼지는 눈에 뿌옇게 보이지도 않는 그 먼지는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보이지 않기에 체감하지 못하므로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나노먼지이며 우리가 들이마시는 전체 입자의 수가 우리 건강에 가장 큰 위험을 제기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 몸은 공기 중 약간의 소금과 모래는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30nm보다 작은 많은 양의 먼지입자, 우리의 동맥에서 헤엄쳐 다니고 콜레스테롤 주위에 뭉치는 입자들은 국경을 넘어온 오염물질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도로에서 나왔다. 더 명확히 말해 추진력을 위해 화석연료(썩은 생물학적 물질로 찬 오래된 호수)를 태우는 자동차를 포함한 탈 것들에서 나온다. (p. 115)

화학분자까지 분석해가며 미세먼지까지 왔지만 결국 문제는 처음에 언급한 베기가스다.

미세먼지 라고 하면 바람타고 다른나라에서 넘어온것이 많다고 생각해왔는데 아니었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 더 많았다. 우리가 태우는 연료들로 인해 우리의 폐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석탄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들이 이제 모든 산업 도시의 중심이 되었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가정도 석탄으로 난방을 했다. 런던은 검은 우산을 쓰는 도시로 유명해졌다. 시커먼 비가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은 검정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p. 134)

인간들이 뭔가를 태우는 한 대기오염은 살인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산업 방식이 더욱 발전하면서 나무 태운 연기는 뭔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했다. 현대 경제는 점점 더 많은 화학물질을 찾아내 태우기 시작했고 연기는 점점 더 치명적으로 변했다. 새로운 연료는 과거에 사용하던 연료에 비해 오염을 더 심화시킨다. 이번에 새로운 연료는 디젤이다. (p. 138)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비오는 런던 거리의 풍경을 분위기 있게 표현한 그림이 있었다. 모두 다 검정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더랬다. 그런데 검정우산을 쓸수밖에 없었던거라니...

화합물도 가스도 미세먼지도 결국 무언가를 태움으로써 발생하고 따라서 그 연료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저자는 그 원흉을 디젤에서 찾았다.

2000년 이런 우대정책이 시작되었을때, 가장 효과적인 디젤 자동차도 킬로미터당 NO₂를 세배, PM을 10배 더 배출했다. 도로 위 대부분 자동차는 더 오래된 것들로 휘발유 차량보다 최소한 NO₂가 네 배 그리고 22배에서 백배의 PM을 더 배출했다. 그러니까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드른 우리가 사는 도시의 CO₂ 목표치를 맞추기 위해 대기오염을 오히려 늘리고 그 결과로 건강이 나빠지는 걸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p. 145)

나도 기억이 난다. 오존층 파괴 문제로 전지구적 오존보호문제가 대두됐을때 친환경에너지 디젤이 각광받았었다. 그런데... 디젤이 친환경연료가 아님을 이 책을 읽고야 알았다;;;

유럽 전역의 모든 정부가 이 모든걸 무시했다. 디젤을 '환경친화적'인 대안으로 홍보하는 판촉은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광풍에 약간의(너무 가볍지만)질서는 존재한다. 모든 신차가 EU에서 팔리기 전에 통과해야만 하는 유로 배기가스 기준은 좀 더 깨끗한 디젤이 곧 나온다고 약속하고 있다. (p. 147)

디젤로 CO₂를 줄인다던 계획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연구에 따르면 디젤 엔진의 블랙 카본 배출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 효과는 CO₂ 감소 효과를 웃돌았다. 열을 흡수했다가 방출하는 블랙 카본의 능력 때문이었다. NOx 역시 아산화질소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아산화질소는 CO₂ 보다 온실효과를 더 낼 가능성이 있는 가스였고, 디젤은 휘발유보다 더 높은 농도의 NOx를 배출했다. 그것만이 아니고 유로6 기준을 충족하는 많은 휘발유 자동차들은 이제 디젤과 같은 연료 효율과 킬로미터당 CO₂ 배출량을 달성했다. 유럽은 기후에 대한 이익도 얻어내지 못한 채 온통 건강만 해치고 말았다. (p. 150)

헐 좀 더 나은 대안적 연료 인줄 알았던 디젤은 전혀 대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휘발유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대기를 오염시키는 원인을 연료에서 찾기는 했으나 여기서 벽을 만난 듯 했다. 더 좋은 엔진을 만들고 더 나아진 후처리 시스템을 만들 수록 먼지입자의 크기는 작아졌고 건강엔 더 해로워졌다. 사람이 태어나 평생 하는 일이 숨쉬는 것인데, 숨쉬는 것으로 평생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상황이 되버린 것이다. 뭔가 관점을 바꿔야 하는 걸까? 싶을때 저자의 2부 반격이 시작된다.

2015~2020 런던은 스모그로 인한 잠에서 천천히 깨어나 맞서 싸우고 있다. 노동당 후보였던 사디크 칸은 널리 알려진 2016년 5월 시장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날 초저공해지역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또 전임자(보리스 존슨)가 묻어두려고 했던 대기오염 피해 학교 연구를 다시 시행했다. (p. 207, 208)

2014년 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대기오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때를 기준으로 상황은 변했다. (p. 217)

일상은 생각보다 많이 정치적이다. 정책의 결정은 일상에 바로 반영된다. 리더의 문제의식은 사회변혁의 초석이 될 수 있다.

캘리포니아는 유럽보다 엄격한 규제 기준으로 배기가스를 없애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파리는 자동차 없는 날을 시행해보면서 방향성을 타진중이다. 안타깝게도 델리는 실효성있는 정책을 아직 찾지 못한듯 보였다. 여하튼 저자는 서서히 희망을 찾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내연 기관에 의존한 에너지 사용과 운송 수단은 이제 끝났다. 이제 전기로 움직이는 시대가 온 것이다. (p. 267)

휘발유와 디젤 차량을 전기 배터리 자동차로 바꾸는 것은 깨끗한 공기를 가진 도시가 되기 위한 청사진의 일부이다. (p. 276)

그러나 중심 전제는 깨끗한 공기를 원하는 모든 도시라면 이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바로 우리가 자동차를 사용하는 방식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깨끗한 공기를 위한 청사진의 일부이다. 전기차는 훌륭하지만 차의 수가 적은 것이 더 좋다. (p. 309)

만일 배기가스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왜 차를 샀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동 방식을 어떻게 계획할 건지 패러다임을 차량을 소유하는 것에서 차량 운영자 또는 서비스 제공자를 갖는 것으로 바꾼다면, 전체 시스템이 바뀔 겁니다. (p. 312)

저자는 연료적인 문제에서는 전기차에서 희망을 보고, 시스템적인 문제에서는 자동차의 존재이유에 대한 패러다임에 주목한다. 작은 시도일 수도 있지만 실천가능한 방법들로 자전거 타기나 식물심는 것에도 다시한번 중요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델리에서 모든 정책들이 실패한 이유중 하나는 결국 경제적인 이유때문이었다. 대기오염이 건강과 직결된다는 건 이제 많이들 알게 되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경제문제는 끊임없이 삶에 직결된 문제였다. 이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의 경제적 영향은 순이익인가? 순손실인가? (p. 355)

대기오염을 줄이는 것으로 경제적 순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애초에 그런 기획과 기반시설 프로젝트에 들어갈 예산은 어디에서 얻어낼 수 있는가? (p. 362)

세계가 대기오염을 막으면 뭐가 좋은지 깨달아가고 있지만, 정치는 언제든 쉽게 일을 망칠 수 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같은 대중영합주의의 여진이 과거의 장밋빛 산업사회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환경법에 맞서는 쪽으로 물길을 돌리려고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과거 산업사회는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p. 373)

일부 국가에서는 지키고 싶어 하는 문화적 금기가 있다. (델리)디왈리 축제일 밤에 불꽃놀이가 전혀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미국 독립기념일이나 영국의 가이 포크스 날에 축하 불꽃놀이가 없어도 될까?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바비큐를 포기하게 될까? (p. 382)

저자는 꼼꼼이 분석하면서 구체적인 예시들로 대기오염 문제를 읽는 내내 새롭게 환기시켜주고 있다. 봄마다 있던 황사를 넘어 이제 사계절 내내 찾아오는 미세먼지에 콜록거려본 사람이라면, 코로나가 끝나도 공기오염때문에 마스크를 일상화하며 살아야 하는 미래가 현실화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대기오염 문제를 저자와 함께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저자가 제안하는 우리의 할일을 기꺼이 맡을 것인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좀더 맑고 깨끗한 공기를 숨쉬며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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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몸으로 신화를 그리다 - 신화와 어원으로 읽는 요가 이야기
클레망틴 에르피쿰 지음, 류은소라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뒤집히고 얽히고 버티는 신들의 요가, 그 안에서 삶의 균형을 배우다

신화와 어원으로 읽는 요가 이야기

 

 

나는 번역된 외국서적을 볼 때마다 원제목에 늘 관심이 가곤 한다.

프랑스 요가강사가 쓴 이 책의 원제는 Le chien tête en bas, 45 recettes d'asanas 인데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보니 '아래쪽의 개는 45개의 파인애플 레시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나온다. 표지에 개의 그림이 있다. 그리고 이 책엔 45가지의 요가동작이 나온다. 원서의 제목센스가 남달라서 한국어판 제목이 고민됐을 것도 같은데, 한국어판 제목이 내용에 아주 적절하게 잘 붙여진 것 같다.

여하튼, 이 책은 요가관련 책이자 인도신화 관련 책이다.

이 책은 이야기의 모든 형태를 절충하는 데 목적을 둔 책은 아니다. 당신의 요가 경험을 확장시켜 줄 사유의 길을 제공하고자 한다. 요가 자세와 신화적 이야기를 원활히 연결하기 위해 각 요가 자세에는 상징적 해석이 뒤따른다. 이 해석들은 읽고, 듣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구상됐다. 고심 끝에 나온 것도 있고,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온 것도 있다. 이 책의 상징적 해석들은 어떤 학술적 권위도 지니지 않는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다. (p. 8)

저자가 미리 밝혀놓는 이 책의 의도는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려 하는 물음표들을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신화의 학술적 해석을 담은 책이 아니라 요가의 상징적 해석을 제안해본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요가를 배웠던 사람이라면 그 동작에 깃든 상징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고 요가를 모르를 사람이라면 요가 와 신화의 연결고리에 흥미를 갖게 될 것 같다.

100브라흐마 년(지구상의 시간으로 수천억 년에 해당하는 시간)이 되면, 창조신 브라흐마의 생이 끝난다. 이때 지구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주 전체가 소멸한다. 이를 마하프랄라야, 즉 대홍수라고 부른다. 뱀의 신 세샤의 똬리에서 휴식을 취하는 비슈누신만이 남아 태초의 물 위를 떠다닐 것이다. 그리고 우주는 수천만 년 동안 무엇으로도 나뉘지 않은 미분화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창조의 힘이 잠재되어 있는 이 상태는 새로운 우주 주기가 시작될 때까지 이어지며,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우주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쳐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우주는 다시 만들어지고 다시 미분화 상태에 접어든다. 우주는 창조와 소멸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따라서 진정한 시작도 끝도 없다. 다만 반복만 있을 뿐이다. (p. 19)

인도신화관련 책을 쉽게 나온 책으로 몇권 읽어봤었는데, 읽을 때마다 참 신비롭다는 느낌이 든다. 윤회라고 하기엔 지구에서의 인간삶의 반복을 넘어 전 우주적인 반복의 생성과 소멸을 담은 인도신화는 과학적인 빅뱅이론과도 비슷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이전 고대신화들에 어김없이 대홍수가 등장하는 걸 보면, 석기시대에 인간이 대홍수를 겪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혹은 비슷한 종교관이 다른 구체화를 거친 것이 문화의 발달사 같기도 하고 여튼 묘하게 공통적인 면이 신기하기만 하다.

인도에서는 뱀과 인간이 항상 가까이 살았기 때문인지 뱀과 관련된 풍부한 상징들이 전해 내려온다. 힌두교 사상에서 뱀은 세상을 떠받드는 존재, 비슈누의 잠자리, 과거 세계의 잔재이자 미래 세계의 기원이다. 허물을 벗고 재생하는 뱀의 능력도 이러한 상징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뱀은 반복되는 창조와 소멸 과정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p. 30)

거의 대부분의 신화에 뱀이 등장한다. 때로는 풍요로운 대지의 신이기도 하고 때로는 악의 상징이기도 한데 인도신화에서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 하다. 허물을 벗는다는 것이 재생과 반복의 상징성을 가지게 될때 뱀은 세계관과 연결된다.

인도신화에는 엄청 많은 신들이 등장하던데, 커다란 나무줄기에서 뻗어나가는 가지들처럼 엮이는 일관성 보다는 새롭게 자꾸자꾸 생기고 서로 연결되어 끝도 없이 넓어지고 다양해지는 것이 인도신화의 세계인 것 같다. 이 책의 특성과 인도신화의 특성이 겹쳐져 내용들이 어떤 흐름보다는 따로따로 읽히는 책이다.

7일 안에 우주는 소멸할 것이다. 홍수가 일어나 모든 존재가 사라질 것이다. 큰 방주를 만들어라. 모든 식물의 종자와 동물의 종을 모아라. 일곱 명의 현자와 그들이 가족을 데려오거라. 그리고 거대한 뱀 바수키를 잊지 말아라 (p. 36)

수메르 신화인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고대그리스 신화에도 인도신화에도 어쩜 이렇게 자꾸 대홍수와 큰 방주와 7일이 나오는건지... 모든 신화들의 시작이 어떠했고 어떻게 파생됐기에 이런 공통점들이 있는 걸까...

서사와 구전 사이, 허구와 실제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서사시들은 인간 전체의 운명을 다룬다. 영웅들의 활약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배경이 되는 갖가지 상황을 통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신과 악마는 인간의 이야기에 얽히고, 동물들은 말하고 사유한다. 큰 이야기에 액자 형식으로 삽입된 수많은 이차적 신화, 우화, 전설들은 저마다 윤리적, 철학적, 정치적 사유를 담고 있다. (p. 139)

신화는 서사와 구전 사이, 허구와 실제 사이에 놓여있다. 이 서사시들에는 신과 동물과 영웅들과 인간들이 등장하고 소멸한다. 그 오랜 신화적 요소들이 인도에서는 요가 동작에도 남겨져 있다.

식물의 모습, 동물의 모습, 물질의 모습, 상징적 모습이 구체화된 45가지 요가 동작들은 때로는 수행의 동작이기도 하고 때로는 깨우침의 동작이 되기도 한다. 요가 자세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매 동작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요가를 따라할 마음 보다는 그 동작이 상징하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기 때문에 상관없기도 했다.

흔한 물건에도 내 추억의 순간을 함께 하게 되면 세상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듯이, 운동으로서의 요가동작들도 그 상징적 이야기들을 알고 하게 되면 훨씬 더 특별해질 것 같다. 나는 하루 일정정도는 꼭 멍때리는 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좀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법해 보이는 요가동작으로 명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명상의 순간 신화속 신들이 내 머릿속을 떠돌다 신체적 균형 못지 않은 정신적 균형도 함께 알려주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러나저러나 뻣뻣의 정점같은 내 몸으로 그릴 수 있는 신화(=요가동작)가 있을런지 걱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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