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실천이성비판 -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정하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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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자, 칸트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내가 참 좋아하는 시리즈다.

제목을 들으면 알법한 철학고전들, 하지만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은 철학고전들에 대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는, 철학고전에 대한 입문서로 아주 제격인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책들을 몇 권 읽었었는데... 읽을때마다 저자들에게 어찌나 감사한 마음이 들던지. ㅎㅎ

그렇게 거치고거쳐 칸트까지 왔다. wow 내가 (비록 입문서이긴 하나) 칸트 철학에 대한 책을 읽게 될 줄이야!

흔히들 하는 말을 빌리자면 칸트의 철학은 서양 철학사의 중앙에 자리잡은 가장 큰 저수지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들어갔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약간의 과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정하기도 힘든 평가이다. 여하튼 칸트가 철학의 전 영역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최초의 '프로'철학자이며 철학 사상의 한 시대를 연 위대한 철학자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천이성비판]은 칸트의 책 중에서도 계몽주의적 완성자이며 철학의 모더니티를 성숙시킨 칸트 철학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칸트 윤리학의 내용이 집약된 책이다. (p. 4)

칸트 철학서의 대표작은 [순수이성비판] 과 [실천이성비판] 이다. 원작도 마치 소설의 상,하권 느낌처럼 순수이성비판이 상권이라면 실천이성비판이 하권 같은 느낌인데, 소설도 두껍고 어려운 책은 앞에 권만 읽고 뒤에 권은 손도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칸트의 책도 순수이성비판에 비해 실천이성비판은 약간 홀대받는 느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칸트 본인이 하고자 했던 일, 즉 새로운 형이상학, 요즘 말로 하자면 새로운 철학을 확립하는 일에서 보면, [순수이성비판]은 예비 작업이자 중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고 [실천이성비판]이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출발점에 해당한다. 여기서 얻은 내용을 디딤돌로 하여 칸트는 자신의 실천 철학을 더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넓혀나갔기 때문이다. (p. 5)' 따라서 칸트의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실천이성비판]에 꼭 입문해야 한달까. ㅎㅎㅎ

책의 구성은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동일하다.

학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성장과 인생 배경을 알아야 할 터 1부는 칸트라는 사람에 대해 알려주고, 2부에서는 [실천이성비판]이라는 이 책의 주요 화두에 대해 요약 설명한 다음 3부에서 곁들여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하면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나는 늘 그랬듯 1부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는다.

[순수이성비판]의 진정한 의도는 철학을 올바르고 확실한 길에 올려놓으려는 것이었다. (...)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진정한 도덕의 체계를 제시하려고 했다. (...) [판단력비판]을 통해 미의 문제와 자연의 목적론을 다루면서 비판철학의 체계를 완결한다. (p. 17)

칸트의 비판철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비판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근대 철학의 논쟁과 대립을 종합함으로써 근대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밝혔다. 그리고 유럽 사상계는 칸트의 출현으로 일대 혁명기를 맞아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을 낳았고 이후 신칸트학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도록 철학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p. 20)

칸트의 대표저작은 위 3비판서 라고 한다. 이 3비판서로 칸트는 '근대의 이성을 완성한 철학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칸트는 평생동안 학자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지만 그는 태어난 곳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를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다른 곳에서 초빙의 기회가 왔어도 거절했다. '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기를 더 원했다. (p. 16)' 고는 하지만 글쎄... 세계적 사상들을 아우르는 철학을 세우고자 한 사람이 평생 한곳에서만 지냈다는 것이 약간 우물안개구리 처럼 느껴지는 점도 있긴 하다. 하지만 칸트는 '근대의 이성을 완성한 철학자'라고 불리는데...흐음...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이렇게 두 개의 이성이 등장해서 칸트가 이성을 왜 둘로 나눈 것인지 궁금해진다. 둘은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같다면 왜 이름을 달리 쓰는지 등이 궁금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해 두 이성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름을 둘로 나누어 달리 부를까?하나의 이성이 서로 다른 관심과 영역에서 사용되면서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역할이 어떻게 달라질까? 이성은 이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실천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 하나의 이성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앎의 가장 근본적 틀과 원리를 제공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의지가 선을 추구하도록 규정해주는 전혀 다른 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성의 두 기능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할 수밖에 없다. 이 중 첫째 과제를 [순수이성비판]에서 탐구했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둘째 과제를 탐구한 것이다. (p. 28,29,30)

이성이란 단어에 대해 쉽게 생각하자면 사고력, 판단력, 인식력 뭐 이런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아주 초보적으로 이해하자면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과 주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실천이성비판은 그런 이성이란 능력이 인간을 어떻게 행동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행동하게 만드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지 등의 행동력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려나...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을 튼튼하게 성립시킬 수 있는 주춧돌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인식 능력, 앎의 능력, 다시 말해 이성의 이론적 능력 자체를 비판해본 작업이었다. (p. 31)'

'[실천이성비판]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접근함으로써 어떻게 실천 이성이 의지를 규정하여 우리가 의무를 지키게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p. 37)'

칸트는 이러한 이성비판들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윤리학에 대해 고민한 것 같다. 그런데 '칸트는 도덕 법칙을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것으로 본다. (p. 79)' 이러한 측면에서 '실천이성'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되고 그렇게 '자율적으로 도덕법칙을 지킬 때 정말 인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p. 80)' 고 자신의 철학과 인간에 대한 이성적 비판을 완성하지만 문제는 그런 '인간다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더욱 큰 문제로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철학의 종착역이 칸트에게는 종교인것 같다는 점이...

종교는 바로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이다. 최고선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 그런데 이 선택에서 순수 실천 이성의 자유로운 관심은 현명한 세계 창조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 판단을 규정하는 원리는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으로 실천의 차원에서 최고선을 추구하기 위핸 수단으로 도덕적 의무를 받아들이는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상이다. 이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을 명령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에 의한 것으로서, 신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성 사용의 기초에 두도록 하는 도덕적 마음씨에서 저절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신앙과 관련해서 건전한 사람도 가끔은 동요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무신앙에 빠질 수는 없다고 칸트는 생각한다. (p. 178)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무종교자로서 칸트의 위와 같은 결론은 조금 당혹스럽다. 나는 스스로 건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신앙자에 가깝다보니 나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할꼬... ㅎㅎㅎ

하지만 칸트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 철학서를 읽을 때 주의해야 겠다고 깨달은 점이 있었으니, 철학은 답을 주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의문이 생기고 답답해지고 이제 어떡해야 하나 싶어지는 그럴때 철학을 찾게 되지 않나? 하지만 막상 철학서를 읽어보면 철학은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줄 뿐 미래에 대해선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다. 칸트만 해도 그동안의 철학들을 아우르며 그시대가 왜 그렇게 됐는지 그시대의 인간이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하려고 탐구하고 그 탐구결과로 이해완료! 하고 끝냈을 뿐... 앞으로 이렇게 해야한다라느니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라느니 하는 전망같은 건 없다. 그러니 삶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하여 성급한 마음으로 철학서를 읽으면 안 될 것 같다. 철학이란 지금,여기,나 에 대해 좀더 학문적으로 분석해줄 수는 있으나 답을 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책 역시 좋았다. 철학에 대한 입문서로는 역시 <EBS 오늘 읽는 클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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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 - 철학자의 삶에서 배우는 유쾌한 철학 이야기
김헌 지음 / 북루덴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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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문제를 인식하고 질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답을 찾아가는

철학자들의 흥미롭고 유쾌한 이야기!

이제, 철학은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론이다.

서양 역사 읽기에 빠져서 한창 그리스·로마사를 읽어대던 시기에 김헌 교수님의 <천년의 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쉽게 풀어쓰는 그 글솜씨에 반했었다. 하지만 뒤이어 읽은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에선 너무 쉽게만 쓰려던 나머지 깊이가 너무 없는 것은 아닌가 라는 애매한 실망을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로마사를 일상어로 친근하게 풀어주는 그 이야기솜씨를 잊지 못해 다시한번 그의 책을 집어들었다. <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책은 여러모로 아주 흡족한 책이었다.

인문(人文)은 원래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었습니다. 위 글자들을 보면 '사람의 몸에 새겨진 무늬' 즉 '문신(文身)'을 뜻했지요. 그렇다면 인문학은 문신을 잘 새기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잘 생각하면 통할 것도 같습니다. 이제 인문의 뜻을 조금씩 넓혀 볼까요. 사람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주체도 결국 사람일 테니 인문은 이제 '사람이 새겨 넣은 무늬'라는 뜻도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새겨 넣은 무늬, 즉 문신만을 뜻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이 사람의 몸 아닌 다른 것에다 새겨 넣은 무늬도 모두 인문이 됩니다. (p. 6)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무엇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질문을 던지며 인문학이란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다. 인문이란 한자는 글자그대로 하자면 '사람의 글자' '사람의 문장'으로 풀이되겠지만 그 의미가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느낌적인 느낌만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할때의 '인문'은 굉장히 폭넓고 왠지 깊이감 있는 심오한 무언가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자그대로의 단순한 말도 왠지모를 느낌적인 느낌의 어려운 무엇도 아닌 '인문' 그리고 '인문학'에 대해 저자는 특유의 그 다정한 말투로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이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10) 그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인간이기에 인문학의 질문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온다. 그렇게 인간에게는 철학이 자연스레 발전하고 그 철학을 세상이 아닌 인간의 문제로 인간의 삶으로 다룬 철학자가 소크라테스 이다.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을 하며 삶의 방식에 관해 진지한 탐구(p. 15)' 를 본격적으로 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 이기에 그의 철학은 세월이 흘러도 자꾸자꾸 되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목에도 소크라테스가 있고 프롤로그에서도 소크라테스 철학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소크라테스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차례만 살펴봐도 '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는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구성 중 일부일 뿐이고, 내용을 읽다보면 소크라테스 외의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훨씬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과연 그 내용들이 정말 소크라테스가 말한 철학일까 라는 의문까지 품게 된다. 핵심은 부제에 있다. '철학자의 삶에서 배우는 ㅡㅡㅡ 유쾌한 철학 이야기'.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고 ㅡㅡㅡ 에 무슨 말을 집어 넣어야 좋을지 모를 수도 있지만, '철학자의 삶에서 배우는 철학 이야기' 라는 점에서 이 책속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삶은 흥미롭게 읽혀진다. 그렇게 그들의 철학 속으로 자연스레 빠져들게 된다.

철학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면, 철학이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프랑스의 피에르 아도 입니다. 그는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삶의 독특한 양식'이었다고 정의합니다. 철학이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놓고, 마치 개구리를 해부하듯이 파헤치며 탐구하느 행위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활동 자체가 하나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이 삶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철학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p. 31)

서양사 관련 책들을 읽어댈 때 서양 철학사 관련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 큰 도움을 받은 책 중 하나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이다. 서양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강추하고 싶다. 철학을 학문적으로 따로 생각하지 않고 삶을 사는 방식의 하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책이었다. 물론 철학적 내용들에 대해서도 쉽게 풀어준 유용한 책이다.

여하튼, 철학자 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피타고라스 라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삶을 다룬 이 책에 등장하는 첫번째 철학자는 피타고라스 이다. 그러나 철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피타고라스보다 한두 세대 앞서 살았던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두번째 등장하는 철학자는 탈레스 이다. 그뒤로도 왕족으로 태어나 불꽃처럼 한세상 살다간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가 스무살 청년이었을 때 만났다고 하는 (당시 예순다섯)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이자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엠페도클레스, 페르시아 군대의 군인으로 아테네에 왔다가 눌러앉아 페리클레스의 스승이 된 아낙사고라스, 철학자이지만 근대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모크리토스 등 1부에 등장하는 철학자들부터 이미 엄청나게 쟁쟁하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으로 기억해둘 문장 몇개를 추려보았다.

서양철학은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뿌리를 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변화의 철학'이고, 또 하나는 파르메니데스에 뿌리를 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으며 존재와 본질은 영원하다는 '본질의 철학'입니다. 그 후 그리스 사람들은 이 두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고민하면서 철학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p. 67)

엠페도클레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상을 물이나 불, 공기 등 하나의 원소로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 그들을 모두 묶어서 '단일론자'라고 합니다. 그에 반해 4원소론을 주장한 엠페도클레스를 '다원론자'라고 부릅니다. 엠페도클레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다원론적인 특징을 보여 줍니다. (p. 77)

철학사가들은 아낙사고라스에 의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 본격적으로 아테네에 유입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도 젊은 시절에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엘 접하고 기대감을 가지고 공부했다고 하지요. (p. 85)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최고의 지식인과 현자를 만났고, 좋은 책과 자료를 모으는 데에 큰돈을 썼습니다. 그는 박학다식함으로 그리스 전역에 명성이 높았습니다. (p. 93) 아낙사고라스에게 반기를 들었던 데모크리토스는 아테네에서는 찬밥 신세였다고 합니다. (...)플라톤은 모든 것을 물질로만 설명하려고 했던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을 저급한 것으로 여겨 그의 책을 모두 모아 불태우려고 했답니다. (...) 하지만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자신의 저술에서도 진지하게 다루었습니다. (p. 96)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을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에 대한 팁이라면, 서양철학의 주류 철학이라 불리는 플라톤 철학이 짓눌렀던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무시했다거나 플라톤 철학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자와 철학이 나오면 읽었더라도 한번쯤 다시 되짚어 보라,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도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본내용이 2부에서 다룬 일명 소피스트라 불리던 철학자들에 대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소피스트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대개 플라톤의 작품을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에만 의존해서는 소피스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습니다. 20세기 말에 많은 학자들이 소피스트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손을 댔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여러 소피스트를 소개하면서 그들을 어떻게 재평가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p. 107)

그 첫번째 주인공은 프로타고라스이다. 소크라테스가 쫓아다니던 미소년 알키비아데스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노년의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프로타고라스와 함께 최고의 소피스트로 꼽히는 철학자는 고르기아스 이다. 고르기아스는 상대주의 철학을 논했던 프로타고라스보다 한발 더 나아가 회의주의에 가까운 철학을 설파했다. 고르기아스는 사실 철학자라고 혹은 소피스트로라고 하기보다는 명성높은 외교관 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는 그 소피스트에 가까운 철학자는 수사학계의 일타강사라 불리던 트라쉬마코스 이다. 이들은 모두 플라톤의 대화편에 소피스트로 등장하는데, 그 참모습에 대해선 플라톤이 하는 말 말고 그 이면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어머니 이름이 '파이나레테'인데, 의미심장합니다. '파이노'는 '나타나다, 분명해지다'라는 뜻이고, '빛'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레테'는 '덕, 탁월함, 훌륭함'이라는 뜻이고요. 그러니까 파이나레테는 '덕을 드러내다, 탁월함이 빛을 보게 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 파이나레테가 태중의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세상의 밝은 빛을 보게 돕는 산파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깃든 덕과 지식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혼의 산파'로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을 '산파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p. 154)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석공이자 조각가였습니다. 몸을 써서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었죠.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그의 이름은 '소프로니코스'였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소프로노'는 '절제하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라는 뜻이고 '소프로니코스'는 '절제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p. 155)

'소'가 '몸 성히 안전한' 이라는 뜻이고 '크라테스'는 '튼튼하고 힘이 세다'는 뜻이죠. 일단 신체가 건강해서 돌과 쇠처럼 단단하다는 의미인데, 그야말로 '돌쇠'같은 느낌입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에 거창한 의미를 담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부모는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 그저 '몸 건강히 씩씩하게만 자라다오'라는 소박한 소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p. 157)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름에는 그 인물에 걸맞은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가족 이름 풀이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돌쇠'라는 우리말 식으로 친근하게 별명붙이기도 한다. 비슷하게 플라톤에게는 '떡대'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책에서 확인하기를. ㅎ . 참고로 플라톤은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었는데 본이름보다 마음에 들었는지 별명으로 활동하다가 우리에게 플라톤 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한 격언입니다. (p. 168)

우리나라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법에 따라 난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멋대로 거부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입니다. 뭔가 비슷한 것 같지만, 핵심이 다른 이야기지요. (p. 177)


3부의 주인공은 확실히 소크라테스 이다. 아니, 소크라테스 학파라고 해야 하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삶과 철학을 다루고 있다.

중요?!한 건 '플라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전체 지성사에서 플라톤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p. 183)' 라는 점이다. 더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스무 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마난, 불과 9년 동안 제자로 지냈습니다. (...) 소크라테스가 죽고 50년이 넘더록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추억하며 살았습니다. (p. 191)' 수십년을 제자와 스승으로 동고동락하던 사이도 못되는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전해진 플라톤의 철학은 과연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서양철학사를 가장 요령 있게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할 수 있다' 라고 말한 화이트헤드의 말이 정석처럼 통하는 시대가 되었고 그 플라톤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고 당연시 되고 있으니... 누가 왜 플라톤의 철학만 전승되도록 했는가에 대해선 각자 숙고해볼 일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이소크라테스 다.

그가 주야장천 '나야말로 진짜 철학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쳤는데, 막상 서양철학사에서 그가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웬만한 서양철학사 책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극 다 플라톤 때문입니다.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는 최대의 경쟁 관계였는데, 플라톤이 이소크라테스를 철학자로 취급하지 않았던 거죠. (p. 216)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알렉산드로 대왕하면 스승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 전에 이소크라테스가 있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에게 헬라스통일의 이상을 심어준 사람, 알렉산드로스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 이상을 이상적으로 실현할 것을 제안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소크라테스였다.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는데, 서양철학사에서도 확실히 그 말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도 이소크라테스와 비슷한 길을 걷다가 철학사의 계보에서 밀려났고, 근대의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철학자로 불리지 못하는 것은 모두 승자였던 플라톤의 개념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p. 221)' 여하튼,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 전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사람은 이소크라테스 였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소크라테스의 학교에 먼저 가서 배운 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갔다. 플라톤의 후학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후학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에서 프랑스의 고등학교 이름 '리세'가 유래된 것처럼 뤼케이온도 꽤 오래 존속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뤼케이온이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테오프라스토스 라는 한 인물 덕이었다.

국가 주도의 연구기관과 도서관이 건립되고 국가의 공적인 재정이 투입될 때, 학문과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져 나가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전의 학문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이후의 학문은 관이 주도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p. 278)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가 기획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건립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자가 언급한 저 짧은 문장이 지금 쓰디쓰게 읽히면서도 반갑다. 공적 연구재정이 줄어들고 공적 도서관 지원이 삭감되는 이 시대에 이렇게라도 꿈틀해보는 문장에 반가워해야 하는 현실이 더욱 쓰디쓰면서도...

4부는 이 책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의 철학을 마무리하는 장이다. 고대그리스 철학을 넘어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이라고 할까... 알렉산더대왕, 퓌론, 제논, 에피쿠로스 의 철학은 그리스 철학계보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188p에 있는 표를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이후의 철학은 점점, 삶의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에서 점점 멀어짐으로써 그리스 철학에서 멀어져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철학이 삶에서 동떨어진 너무나 멀고먼 그저 하나의 학문으로만 생각하게 된 것일까... 하지만 철학의 중요성은 삶과 뗄 수 없다는 점인데...

아직도 저는 더 살아야 하고, 더 읽고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더 깨닫는 것이 있다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소중한 것이 생긴다면, 좀 더 잘 벼리고 다듬어 내겠습니다. (p. 334)

에필로그에서의 저자의 문장에 그나마 기대를 걸어본다. 이렇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계속 생긴다면, 언젠가 우리의 삶에도 철학이 조금은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모두가 철학자들처럼 세상에 대해 사는 방법에 대해 인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삶의 한 방식으로 익숙해진다면 세상은 좀더 살만해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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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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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뿌리째 뽑히는 상실 앞에서 자연을 닮은 회복력으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참 좋았더랬다. 그래서 이사람저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추천도 했고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듣고선 기다리고기다렸다가 영화도 보았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경우 원작보다 덜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인데 다행히 영화도 썩 좋았다. 그러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이을 작품이라는 소개를 읽고 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또한번의 '벅찬 자연' 혹은 '삶의 의지' 혹은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며 <흐르는 강물처럼>을 펼쳤다. (더구나 오래전 내가 좋아하던 그 영화 제목이라니 더더욱 안 읽을 수가 없었다. ㅎ)

우리 집은 저수지 밑바닥에 있다. 우리 농장도 마찬가지다. 온통 진흙으로 뒤덮여 무엇이 나룻배의 잔해고 무엇이 농장의 잔해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물 밑에 있다.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던 응접실을, 한때 내 침실이었던 공간을 이제는 날렵한 송어가 휘젓고 다닌다. 외양간과 구유는 썩어간다. 엉킨 철조망은 녹슬어 간다. 한때 비옥했던 땅은 무위에 젖어 있다. 블루 메사 저수지 건립을 두고 역사책에서는 아마 콜로라도 강의 지류를 통해 건조한 남서부로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과감하게 실행한 대형 프로젝트라고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세차게 흐르던 거니슨 강의 물길을 막아 호수로 만든 건 좋은 의도였다고 하겠지만, 내가 아는 이야기에는 조금도 선한 구석이 없다. ( 가제본 p. 10~11)

한때 강이었으나 지금은 저수가 된 물 밑에서 부패하는 마을, 물속에서 조용히 잊힌 마을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불어난 물이 마을을 집어삼킬 때 이곳의 기쁨과 고통까지 모조리 앗아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우리를 창조한다. 그 풍경이 내어주고 앗아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어 평생 가슴에 남아 우리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가제본 p. 12)

※ 이후 아래의 인용문들 페이지도 모두 가제본의 페이지임.

프롤로그에서 느껴지듯이 이 소설은 선하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고 평생 가슴에 남았으나 기쁨이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때 모든 것이었던 시간과 장소들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고 그렇게 잠겨서 부패하고 있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질만한 심정으로 지금 살고 있음을 내비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때는 1948년에 시작하여 이야기는 1971년에 마무리되며 장소는 콜로라도주 아이올라 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17세의 소녀 빅토리아(=토리) 그리고 윌슨 문.

아주 평범했던 어느날 토리는 동네 길가에서 낯선 이방인을 마주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토리는 그러지 않았고, '그로써 세상의 모든 게 달라졌다. (p. 20)' 빅토리아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때는 그의 시선을 쫓기 바빠 몰랐지만, 윌슨 문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결코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법이 없었고, 사람 사이에 생기는 긴 침묵을 수다로 채워야 할 어색한 그릇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좀처럼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과거를 돌이키는 일은 그보다도 없었으며,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을 두 손에 소중히 담고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경탄하는 사람이었다. 메인 스트리트에 목석처럼 서 있던 그때는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깃든 지혜를 나도 점점 배워나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지혜는 내게 가장 필요한 때가 찾아왔을 때 빛을 발했다. (p. 26)

그리고 토리와 윌슨의 첫사랑이자 마지막사랑이 움트던 그날 동시에 누군가의 복수의 들불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토리의 동생 세스는 토리와 윌슨의 마주침을 목격했고 우연조차도 참을 수 없어했다. '그때 나는 사탄, 뱀, 지인 등 어둠을 주제로 한 설교를 빠짐없이 들었지만, 세스가 가진 어두움에 대해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무래도 타고나는게 분명한 그런 어둠, 모든 사람이 동의한 규칙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을지 그 방법만 찾아가며 평생을 사는 자의 어둠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없없다. (p. 69)' 한살아래 남동생이었지만 세스는 어렸을때부터 남달랐다. 남다르게 사악했다. 그런 세스가 토리와 윌슨의 첫만남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당시엔 일이 그렇게까지 커질줄 아무도 몰랐다. 살인사건까지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토리도 윌슨도 그리고 세스도.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 140) 라고 부드럽게 말하던 윌슨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불랙 캐니언 바닥에서. 그 인전놈. 피부가 거의 벗겨진 채로. 차 뒤에 있었다니. 던져졌대. (p. 146)' 인전이라는 표현은 당시 인디언을 비하하던 표현이었다. 윌슨 문은 인디언 마을 출신이었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자연을 동경했고 삶을 향유했고 토리를 사랑했다. 그런 윌슨을 토리도 온마음과 온몸을 다해 사랑했는데... 그런 윌슨이 살해당했다.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셀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아쏙,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이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p. 160)

토리는 열두살에 어른이 되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일부를 잃고 남은 가족이라곤 무뚝뚝한 아버지와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와 얹혀 사는 이모부 그리고 잔인한 동생 세스 뿐이었다. 토리는 그런 남자들에게 복종하며 집안을 꾸리고 복숭아 과수원 돌보았다. 윌슨을 만나고 사랑하고 잃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토리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리의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야 했다. 무엇보다도 세스에게서 아기만큼은 지켜내야 겠다고 결심했다. 무모함을 알면서도 가출했다. 윌슨과의 추억이 깃듯 깊은 산 버려진 산막을 향해 가면서 구체적인 계획같은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지금을 살아내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을 만큼 윌이 그리웠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삶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에 집중해야 했다. (p. 169)'

나는 하루하루 계속 살아 나갔고, 차츰 긴장을 늦추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어느 정도의 믿음이 들어섰다. (p. 180)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면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p. 183)

집에서 지낼 때에도 토리는 방문을 늘 잠가야 했다. 남자들만 사는 집에서 유일한 여자인 토리가, 속을 알수 없는 이모부와 세스의 난폭한 친구들이 들락거리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밤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숲속에서의 날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달랐다. 자연은 두려움을 주면서도 토리를 품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삶이 그렇게 만만할리가... 자연이 그렇게 관대하기만 할 리가 없었다... 출산한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날 깡마른 토리는 굶주림에 울부짖는 아들을 데리고 정신없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들을 살려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내 아들로 살다가는 점점 야위다가 결국 죽고 말 게 거의 확실했다. 어찌어찌 아들이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둘 다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아기가 내게서 영영 떠나 다른 여자의 아들로 살아간다면, 내 아들을 잘 먹고 튼튼하게 자랄 것이었다. 내 아들도 미래와 아버지와 가족을 갖게 될 것이었다. (p. 209) 넉넉한 모유,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줄 어머니, 살아 있는 아버가 필요했던 우리 아기 앞에 이 모든게 나타났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우리 아들이 무사히 발견되었다는 증거와 먹을거리였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 손에는 이 과일이 들려 있었다. (p. 211)

복숭아 였다. 토리가 어려서부터 따오던 그 복숭아였다. 낯선 이가 남기고 간 것이 토리네 농장의 그 내시 복숭아라니.

토리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농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난한 삶의 흔적이 가득한 모습으로 걸어가면서도 토리는 집과 농장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붙박이 같은 존재였던 자신 하나쯤 사라진다고 아무 티도 안나고 그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확인한 것은 황폐해진 집과 홀로남아 병마와 싸우고 있는 아버지 였다.

하늘이 새파랗고 높은 가을날 치러진 아빠의 장례식에는 아이올라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참석했다. 장지에서 내려온 마을 사람들은 우리 농장 뒷마당에 다시 모여 조의를 표하며 음식을 나누었다. 거기서 라일 아저씨가 내게 세스를 고발한 사람이 아빠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p. 225)

시간은 빠르게 주변을 변화시켰다. 하루의 일과시간을 알려주던 기차의 경적 소리는 멎었고 더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은 침묵에 잠겼으며 그 침묵속에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것들이 하나둘씩 생명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댐건설 소식이 들려왔다.

"과수원 나무를 통째로 다 구하고 싶어요. 한 그루도 남김없이" (p. 243)

마을은 곧 사라질 것이다. 토리의 시간과 추억과 장소와 흔적이 곧 물에 잠길 것이다. 토리에게 남은건 이제 과수원 뿐이었다. 토리는 마지막 남은 것 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토리는 이제 더이상 토리로 불러줄 사람이 자신에겐 없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빅토리아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장소가 필요할 터였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째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롱누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 277)


빅토리아가 다시 살고 친구를 만나고 관계를 맺고 삶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열일곱 열여덟의 그 폭풍같은 한 해에 비하면 겉으로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속에선 늘 비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에 찔리고 천둥에 움츠려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그리웠다. 매년 그 공터에 가서 돌멩이를 올려두고 왔다.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그러다 발견했다. "숲의 어머니에게, (...) 사실은 당신을 위해 쓴 글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이 알았어야 할 모든 이야기를 이제야 전합니다. (p. 337)'

빅토리아는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숲속을 혼자 산책하고 강가를 혼자 거니는 것이 더 좋았다. 윌과의 기억은 여전히 가슴을 울렸고 아들의 첫울음은 여전히 귀에 쟁쟁했다. 지켜냈어야 했던 것을 지키지못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이후의 삶은 그저 있는듯없는듯 조용하게 살아왔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새로운 인연이 맺어졌고 소중한 것들이 생겨났으며 그러다 과거가 다시 돌아왔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기쁨일까 슬픔일까? 빅토리아의 새로운 삶이 궁금하다면 결말은 책을 읽으며 확인하시기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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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한상원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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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반철학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가?

철학적 종합 예술, 철학적 전복의 길

니체의 저작 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몇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유명한 책이었고 철학책이었기에 굉장히 어렵지 않을까 겁을 내며 읽었었는데 다 읽고 난 기분이 묘했더랬다. 쉽게 읽자면 우화처럼 쉽게 읽히는 책이었고 어렵게 읽자면 온갖 은유의 의미들을 분석하느라 어렵게 읽히는 책이었기에 해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묘한 책이었다. 여러모로 숙제처럼 남아 있는 그 책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EBS북스 클래식 시리즈로 해설서가 나왔다니 반가운 마음에 언능 집어들었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허무할까?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해 보일까? 나는 어째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이토록 비겁하게 운명에 굴종하는가? 이런 물음이 문득 내면에서 제기된다면, 당신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설파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p. 4)

이 책은 EBS북스의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만큼 시리즈의 동일 구성을 그대로 따른다. 일단 책이 작고 얇아 본문의 어려움에 관계없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하고, 서문에서 필요성을 본문에서 배경과 해설을 그리고 마지막에 길잡이 책들을 알려주는 구성이 그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표기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가요에도 유명한 그 '아모르파티'라는 말은 로마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니체가 최초로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즉 니체가 조로아스터 라는 인물의 입을 빌어 인생을 사랑하라고 '아모르파티'라고 설파하는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인 것이다.

인생에 대한 화두는 언제어디서든 던져져온 화두이기에 지금의 시대에도 유의미하다. '니체를 통해 이 시대의 삶을 반추해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을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다. (p. 8)' 라는 저자의 말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 시대에 삶에 대한 긍정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왜냐면... '아모르파티'라는 말을 하면 왠지 웃으면서 빙글빙글 돌아야 할 것 같은 밝은 분위기가 연상되므로.ㅎㅎㅎ

니체가 생애 내내 다루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가지 서구 정신이 천착해온 과정을 전복하고 해체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의 예술 정신을 파헤친 [비극의 탄생]에서 그의 철학적 주저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말년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문제의식 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니체는 서양 철학의 정수라고 불리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p. 25)

한 사람의 지금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시간을 알아야 하듯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책을 쓴 저자의 인생에 대해 알아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특히나 철학책인 경우 저자가 어떤 삶의 여정을 통해 생각이 어떻게 변했기에 그러한 철학적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사상가의 인생알기는 중요한 포인트다. 이 시리즈의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 짧고 굵게 작가와 저작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부분이 개인적으로 참 좋았고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총 네 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각각에는 제목이 달려 있지 않지만, 조심스럽게 제목을 달아본다면, 1부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 2부는 '낡은 도덕과 새로운 도덕', 3부는 '새로운 서판을 위하여', 4부는 '새로운 삶을 향하여' 로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p. 39)

작고 얇은 책이긴 하나 해설서이니만큼 원작을 읽기 전에 읽으면 좋을 책이 있고 원작을 읽고 나서 읽으면 좋을 책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이 책의 경우 후자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터라 아무래도 이 책은 작고 얇긴 해도 어렵긴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이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읽었기에 기억을 더듬어 그 내용들에 대해 언급하는 이 책의 설명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다.

니체의 사상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면서 살았던 것일까?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이런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독자에게 커다란 숙고의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p. 127)

본문의 설명들은 전공자이자 전문가인 저자가 요약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내용들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니체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철학자들의 철학적 개념들도 종종 사용되곤 하는데 그 철학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해줄 수 없을 내용들이었다. 여하튼 저자는 니체의 철학이 지닌 긍정의 의미를 강조하며 독자에게 그 긍정의 에너지를 전달해주려 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니체를 넘어서는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은 그러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p. 35)' 라는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가 말한 문장에 더 큰 울림을 받았다. 이 시대 철학을 왜 읽어야 하는가? 철학이 없기 때문에 시대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철학책이든 철학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하며 사는 시대, 철학적 사고를 좀 하며 사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실이 너무 무식해져가고 있는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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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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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 출신 전과 7범 생계형 범죄자에서

[전태일 평전]을 펴낸 출판사 대표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전태일 평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을 몰래 숨어 읽던 세대까지는 아니지만 이 책이 어린이 동화책으로까지 나와 읽혀질 줄은 몰랐던 나로서는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만큼의 향수는 아니더라도 뒷세대로서의 어렴풋한 존경심을 갖고 있던 책이다. 그 책을 펴낸 돌베개 라는 출판사는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으로도 나의 학창시절에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지만 그 출판사의 사람들까지는 몰랐다. 그저 막연하게 그 시절 난무하던 지식인들의 발자취중 하나였겠거니 싶었었는데... 생계형 범죄자에서 돌베게 출판사 대표라...

돌베개 출판사의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나는 지업사를 차렸다. (...) 전두환 정권 시절 출판사를 경영할 때는 거래하던 지업사에서 혹시 모를 감시를 두려워해 종이 자체를 잘 공급해 주지 않거나 비싼 값에 제공하는 바람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내가 지업사를 양심적으로 직접 운영하여 출판사들이 종이를 편하게 쓸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 들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p. 7)-프롤로그 中-

책의 내용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1993년 돌베개 출판사 대표직을 내려놓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담고 있다. 지금이 2023년인데 1993년에 끝난 이야기를 지금 왜? 그래서 그 다음은? 의문이 들자 마자 아차 싶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자연스레 들던 의문에 대한 답은 사실 프롤로그에 이미 나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사실 초판이라고도 볼 수 없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수십년전에 이미 [걸밥]이라는 책으로 저자의 인생이야기가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이 책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저자나 출판사의 설명이 충분할지라도 각자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삽자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운 바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주로 생각보다는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살았다. 그런 본능을 갑자기 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바짝 선 마음속 칼날을 한 번만 드러내면 감방살이가 편안해질 터였다. 그것을 억지로 참으며 삽자루를 붙들고 나 자신과 씨름했다. 전부 [새 마음의 샘터] 때문이었다. (p. 60)

저자의 인생 지향점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 이었다. 책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책을 읽고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므로 그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적 구호보다는 이렇듯 한 사람의 경험담이 풀어내는 실전은 또다른 감상을 안겨줄 터이다.

출소한 정 형이 대전교도소 소장에게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나만큼 순수하고 인간적인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비록 고아에 전과는 많지만 사회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마음잡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기술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공장으로 출역을 시켜주면 고맙겠다고 사연을 적어 보냈고 여기에 감동을 받은 소장이 나를 인쇄 공장으로 출역시킨 것이었다. (p. 110)

전태일 평전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에게 노동법을 쉽게 설명해줄 대학생 친구가 한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고... 임승남 저자에게는 그런 대학생 친구가 한명 있었던 것이다. 출소후에도 인연은 이어졌고 그렇게 저자는 출판계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영업부장으로 열과 성을 다해 책을 팔러 전국을 다녔다. 신바람 나는 와중에 세상에 대한 눈도 뜨이게 되었다.

좋은 책을 내면 사회라는 흐린 물을 맑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44)

출판업계의 시작이 인문사회분야였던 만큼 연줄연줄하여 그가 옭겨다니게 된 출판사들의 성향은 뚜렷했다. 사회개혁적이었고 인문학적이었다. 의미가 있는 책들이 세상에 널리 읽혀졌으면 좋겠다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전태일평전을 만났다.

일본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열사의 전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승옥 주간이 어렵사리 책을 구해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번역을 시켰다. 조판까지 다 끝내서 본문 인쇄를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마침 전태일열사와 평화시장에서 같이 활동했던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 민종덕 씨가 일본 출판사 원고는 복사본이며 원본은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여왔다. 그 즉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님 이소선 여사를 찾아가 책을 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다칠까 봐 걱정했다. (p. 192)

이 책을 읽다보면 시간적 배경상 80년대 운동권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시대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출판분야에서의 그들의 활동을 잘 몰랐기에 그 당시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는 내용도 꽤 있어 흥미로웠다.

나는 그들이 그물에 옭아 넣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간첩이라는 그 그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나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자전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인 [걸밥]의 출간을 결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편집자와 한두 달을 붙어 지내다시피하며 원고를 정리했다. 책은 1986년 5월 청년사에서 출간되었다. (p. 204)

출판사 청년사... 향수감이 올라온다. 학생시절 이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책을 읽고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었는데... 너무 좋아서 나중에 아이에게 읽혀주려고 다른 책들이 버려지는 와중에도 그 역사책은 소중히 들고다녔었는데 얼마전 보니 아이에게 읽으라고 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당시 책의 인쇄상태며 문장상태가 그당시엔 몰랐는데 지금와서 다시 보니 지금의 인쇄물들에 익숙해진 세대가 읽기엔 영...;;; 그땐 그런 책도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었는데... 뭐... 그땐 그랬다. ㅎㅎ

여튼 숨고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시대였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더 안전할 수 있던 시대였다. 당시의 정치인들도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전두환 정권은 툭하면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에게 국가보안법의 올가미를 씌웠다. 대표와 편집자가 구속당하는 것은 물론, 책도 수시로 빼앗겼다. 대학가 서점 주인들까지 연행되기 일쑤였다. 이에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모임을 꾸려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거름, 공동체, 녹두, 두레, 동녘, 돌베개, 민맥, 석탑, 백산서당, 새길, 실천문학, 사계절, 아침, 역사비평, 이론과 실천, 일월서각, 이삭, 온누리, 지양사, 청년사, 풀빛, 한마당, 한울 등 30여개 출판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 출판인들은 1986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라는 민주적 출판운동단체를 발족시켰다. 한출협은 1987년 6월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p. 208)

저 출판사들중 살아남은 출판사들은 얼마나 될까... 나의 대학시절 책들은 대부분 저 출판사들의 명함을 박고 있었는데...

여하튼 저자는 결국 국가보안법에 걸려 잡혀들어갔다. 하지만 시대는 또 변해있었고 저자의 안위는 그전보다 위태롭지 않았다. 저자는 출소후 성장중인 돌베개 출판사의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그토록 사랑하고 애독했던 '전태일 평전'의 출판사를 운영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떠나게 되었다. (p. 249)'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저자에게 가장 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출판사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문구에서 저자의 마음이 정말 진심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이토록 삶을 사랑하면 그 삶이

세상에 조금은 보탬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정말인 것 같아서 진짜 실현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나직하게 응원을 하게 된다고나 할까...

(책의 글밥은 성기고 저자의 기억은 완전치 않지만 수십년 전의 한 사람의 인생경험이 지금은 고루하다고 재미없어 할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지금 시대에도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배우고자 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책책책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다시한번 말해주고 싶어진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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