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리히텐슈타인 베이식 아트 2.0
재니스 헨드릭슨 지음, 권근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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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거장들을 만나볼 수 있는 베이식 아트 시리즈!

미국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

화가의 이름을 몰랐을지라도 그림은 본 적있을 법한 만화풍의 그림, 상업적 그림이라고 하면 앤디 워홀이 주로 떠오를 테지만 그림을 보면 익숙하게 아하 이그림! 하게 되는 또다른 상업적 그림들의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미술전문 출판사인 마로니에 북스에서 베이식아트 시리즈로 나온 책들은 도판이 크고 선명해서 그림 보기에 참 좋으면서도 화가 한 명을 집중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화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이번 화가는 '팝 아트의 창시자' 라고 불리는 대표적 미국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이다.

리히텐슈타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대상 지향과 피할 수 없는 미술가의 의도 지향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중시했다. 그는 이런 긴장감이 자기가 그린 이미지의 주된 힘일 뿐 아니라 이미지를 익살스럽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p. 11)

'리히텐슈타인은 미술시장의 주류와 관계를 맺으려 (p. 16)' 애썼지만 화가로서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계를 주름잡고 있을 때 리히텐슈타인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는 힘들었고 그렇게 리히텐슈타인은 자의반타의반으로 다른 방향의 표현법과 주제를 생각하게 되면서 디즈니애니메이션 캐릭터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산업인쇄 기법을 응용하고 만화캐릭터를 그리는 것을 넘어 말풍선까지 넣은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예술로 간주될 수 있었을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Yes 이다. 심지어 리히텐슈타인과 비슷한 시기에 앤디 워홀도 만화 주인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 표현기법에 있어 더 창조적이었던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워홀의 그림을 제치고 갤러리와 계약을 하게 된다.

그는 고급예술에 익숙한 대중에게 가장 저급한 것, 가장 예술성을 박탈당한 예술을 제시함으로써 논점을 던졌다. 그는 "나는 어떤 것은 예술이고 어떤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구분 짓는 기준을 늘 알고 싶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p. 25)

'리히텐슈타인은 상업미술의 즉각적인 힘에 매료됐을 뿐더러, 상업미술 작품의 형태 속에 미술가의 의도가 효율적으로 나타나는 데 감탄했다. (p. 26)' 리히텐 슈타인은 디즈니주인공들을 그리고 광고지나 다른 상업적인 것들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그림에 대한 화가로서의 의도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만의 독창적 그림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게 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팝아트계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그림에서 부러워한 것은 벤데이 점이었다. (p. 41)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만화풍도 특징적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가치를 높여준 것 중 하나는 '벤데이 점'을 활용한 표현법이었다. 그렇다고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모두 만화적이고 모두 벤데이 점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심사는 다양했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여러 해 동안 리히텐슈타인은 미술양식 시장을 어슬렁거리듯 거의 모든 현대 미술 운동에 반응했다. 그러나 그가선택해 응용한 양식들은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형태의 단위였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은 연대기적 순서를 지켜가며 미술사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p. 70)' 만화풍의 그림만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 책을 보며 리히텐슈타인의 새로운 그림들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여러 가지 탐험을 했지만 모더니티의 미로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행 중에 많은 영역을 발견하고 또 재발견했다. 아마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경 거슬리는 모순과 숨겨진 유머일 것이다. 그는 우리 보이는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 과연 21세기에 미술이란 도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p. 91)

그러니까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그가 어떤 스케치를 했고 어떤 만화 캐릭터를 그렸으며 어떤 아르데코풍을 묘사했고 어떤 화가의 그림을 참고했든 간에 전체적으로 모던하다. 그래서인지 깔끔한 모던풍을 좋아하는 나는 이 책 속 리히텐슈타인의 그림들을 보는 내내 편안하고 좋았다. 그가 어떤 풍자를 담고 어떤 의미를 숨겨놓았든 상관없이 그림을 불편한 마음 없이 그저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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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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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어떻게 내 삶이 되는가

신화를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한다. 그래서 꽤 많은 신화관련 책과 역사서들을 읽어왔는데, 신화가 내 삶에 치유의 말을 건넨다라... 신선한 접근이었다. 신화나 역사에서 교훈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로인해 위안을 얻을 수도 있겠으나 삶이 흔들릴때 그 삶에 치유까지? 게다가 흔한 그리스로마신화 가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과 한국의 신화까지 합쳐서? 참으로 궁금했다. 이 책이.

삶을 일깨우는 영원한 신성의 이야기, 신화로의 새로운 여정을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한다. 화두는 '내 안의 나'다. 세계의 신화를 거울로 삼아서 자기서사의 속성과 좌표를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을 찾아보고자 했다. (p. 5) 나의 쉽지 않은 탐색의 여정에 거점이 돼주고 힘이 돼준 것은 한국신화였다. (p. 6) 우리 신화를 줄이고 외국 신화를 넣어 구색을 갖추는 대신 화두에 어울리는 신화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다. (p. 7) -머리말 [치유적 신화 읽기] 中-

이 책은 신화들을 통해 '나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자기서사'에 신화가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일까?

한 사람의 삶은 간단하게 얘기하자만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은 (1장)창조신화에서 나의 존재의 시원을 유추해 보고 (2장) 자연신화에서 세계와 나를 연결하며 (3장)영웅 신화에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4장)애정 신화를 통해 다시 연결과 확장을 하고 (5장)생사 신화를 통해 삶이 영원일 수 있고 영원이 삶일 수 있는 '서사'를, 그렇게 한 개인의 서사 즉 '나의 서사'를 신화로 보여준다. 낯설어 보이는 이 접근이 막상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보다 우리의 삶은 참 신화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ㅎㅎ

시끄러운 내적 갈등과 쉼 없는 피로의 시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오래 흘러운 원형적 신화들과 함께하는 명상과 치유의 여행이다. 한국 구전 신화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신화를 서사적으로 가로지르는 가운데 깊이 잠들어 있는 내적 실존을 깨워보고자 한다. 누군가를 위한 일임에 앞서, 나 자신을 향한 일이다. (p. 15) 신화는 무엇인가? 흔히들 신화를 '신의 이야기'라고 여기지만, 정확한 답은 아니다. (중략) 신화는 '신성의 이야기'다. '신성'과 '이야기'가 결합하면 신화가 된다. (p. 16)

신화가 신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글을 읽고 막상 꼼꼼이 생각해보니 신화에는 신들도 영웅들도 그냥 인간들도 두루 등장한다. 때론 동물까지. 따라서 신화는 신성한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 그러니 신화를 신화답게 하는 신성성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요소를 탐구하다 보면 나름 신령한 존재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신화는 나의 삶으로 투영된다.

여러 신화에 그려진 태초 세계의 형상을 주요 단어로 표현하면 고요와 적막, 혼돈과 미분, 알, 물과 불, 어둠과 밝음, 흐름과 타오름 등을 들 수 있다. 구체적 형상이 없는 아득한 무정형의 세계이면서, 무엇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생명적 에너지와 창조적 역동이 내재한 세계다. (p. 18)

세계 곳곳에 다양한 인간들이 살아온 만큼 세상 곳곳에 다양한 신화가 존재하지만 막상 뜯어보면 신화들은 생각보다 무척 많이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화는 결국 인간들이 만든 이야기이고 그런 신화가 비슷하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던 인간들이 비슷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 랄까. 그러니 인간의 존재적 시원도, 달라 보이는 신화 속에서 결국은 비슷하게 발견하게 된달까. 가장 유사한 점은 '인간의 탄생이 신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p. 27)' 인간은 자신의 기원을 신화에서 찾도록 해놓았다. 인간에게 신성성이 있다는 것, 그러니 신화에서 인간에게 치유의 말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신화도 종국엔 인간의 이야기니까.

세계 여러 창세 신화는 태초에 수행된 창조의 불완전성을 말한다.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부자유는 어쩌면 우리가 속한 세계의 본원적 속성일 수 있다. 대극을 이루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얽히는 가운데 쉼 없이 역동하는 천변만화의 세상, 하염없이 부딪치고 부대끼면서 나를 살릴 무언가를 찾아서 심신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운명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또는 죽어가는 것이 이승 속 인간의 길이다. (p. 49)

신성성을 지닌 인간은 태초의 이야기부터 서로 상극인 것들이 서로 모순적인 것들을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갈등과 쟁투는 필연적이었달까. 그러니 끊임없이 질서를 추구하게 되었달까. 그래서 좀 괜찮은 조화를 만들어냈다고 여겨졌을 때 선을 넘는 인간에게 다시금 자연의 신성성이 깨우쳐 주는 것이다. 신성성이 있다해도 인산이 신 인 것은 아니라고.

신의 피조물로 만들어졌든 신의 자식으로 태어났든, 이 세상 자연 만물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진 혈족으로서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신의 기운을 간직한 채로 살아 있으며,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 속에는 물론 인간도 포함된다. 신화에서 인간은 여타 자연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창조물로 말해지기도 하지만, 별도의 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p. 67)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자연이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문명과 문화의 발달에 따른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신 관계의 재구성이다. (p. 85)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태초의 거대한 창조신이나 거인 등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p. 87)'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수메르 신화에 나왔건 그리스 신화에 나왔건 북유럽 신화에 나왔건 인도의 신화에 나왔건 그리고 한국의 신화에 나왔건 여하튼, 거인이라든가 모신들은 후세대의 신들에 의해 밀려나긴 했지만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말은 없었다. 여전히 자연속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요컨대 문명의 역사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했다는 것은 단지 부분적인 진실일 따름이다. (p. 88)' 인간이 오만해질때 그 태초의 고대신들은 자연의 모습으로 다시 인간앞에 현현한다. 인간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

세계 신화에서 영웅의 위치는 크고도 특별하다. 영웅은 신화에 역동성을 부여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곤 한다. (p. 123) 하지만 신과 영웅은 정체성과 속성 면에서 차이가 있다. (중략) 신은 개념 범위가 넓고 가변성이 크지만, 그 본래적 속성을 자연성과 영원성에서 찾을 수 있다. (p. 124) 이에 비하면 영웅은 명백히 인간의 속성을 지닌다. 자연이라는 크나큰 신적 세계 앞에 선 인간, 인간에게 그 세계는 만만치 않다. (p. 125) 신화 속 영웅은 인류의 표상인 동시에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의 표상이다. (p. 137)

어떤 신은 신이라기 보다 영웅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 속 오딘과 토르는 '전지전능한 무소불위 능력자가 아니다. 오딘은 한쪽 눈을 잃은 존재이며, 토르는 거인의 주머니에 속절없이 갇혀 휘들리는 곤경을 치른 존재다. 인간이 그런 것처럼, 그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끝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p. 141)' 그래서 저자는 과거의 인기신화였던 그리스로마신화보다 최근엔 북유럽 신화에 젊은이들이 더 많이 호응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신 도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과업을 해내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는 우리 인생에 주어진 과업을 해내는데 더 힘든게 당연한것 아니겠는가 하고.

세계 여러 창조 신화에서 말하는바 하늘과 땅, 또는 남과 여 사이의 결합은 이처럼 만유의 본원적 속성과 연결돼 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운명적으로 반쪽이 되어버린 존재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내 온쪽이 되고자 하는 역동이다. (p. 181)

신이 가장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 이때일 거이다. 사랑하는 이의 예기치 않은 죽음이라는 신의 장난에 직면한 상태 (p. 247) 깨닫는 것은 그러한 살아냄이 제대로 된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다시 나를 죽여야 할 때다. 일어서서 거듭나기 위하여. (p. 257)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경험할 다양한 '사랑'에 대해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신화는 말한다. 신은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법이라고. 천지간 세상을 나아가는 것은 너 자신의 몫이라고. 그 말은 신의 입을 통해서 발화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행위를 통해서 전해진다. 하나의 신령한 서사를 통해서. (p. 220)' 그 서사를 우리는 신화로 읽게 된다. 그렇게 신화는 우리의 삶 속에 계속 젖어들어 있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백년 해골이 무엇인가 하면 오래 흘러온 신령한 이야기로서의 신화가 그것이다. 보기에 따라 지난 시절의 허튼 이야기일 뿐이겠지만, 관심을 주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만, 마음을 열고 그것을 품어서 서사적 연결을 이루어내면 삶에 질적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p. 269) 그 서사들이 오롯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그것을 온전한 나의 삶으로 살아낼 때, 존재는 모든 시공간적 경계를 너머서 영원성을 실현할 수 있다. (중략) 그 우주적 연결의 중심점이 어디인가 하면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이다. 그 연결성을 오롯이 인지하고 구현해낼 때 우리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다. (p. 270)

신화관련 책이라고 해서 역사처럼 읽히는 책일 줄 알았더니 에세이에 가까웠다.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을 두루 섭렵해서 이렇게 개인의 삶에 하나하나 투영시킬 수 있다니 놀랍고도 신선한 책이었다. 신화를 좀 안다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이름들에 반가움이 더할 것이고 신화를 몰라도 그 신화적 에피소드의 개요를 저자가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신화를 한 권으로 압축해 경험하는 계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주 한국의 신화들로 풀어주는 내용들이 좋았다. 한국의 신화는 좀더 널리 잘 알려져야 한다. 우리네 신화도 세계 유명한 신화들과 그리 다를게 없다. 어찌되었든 신화로 풀어내는 개인의 서사가 잘 들어맞는 책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 270)' 이렇게 우리의 삶도 하나의 신화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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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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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프 샤팍

197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과 영국, 요르단과 스페인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서 거주하고 있다. 소설가이자, 정치학자, 여성학자로서, 튀르키예의 역사, 종교, 젠더 문제, 정치적 혼란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쓴다.

대중서로 잘 알려진 영미권 작가 몇명 외에 외국 작가들을 거의 모른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뿐 작품을 몇 읽기는 했었는데;;; 하지만 터키 작가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오르한 파묵 이다. 몇 년전에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소설을 통해 알게 됐는데 작품과 작가 모두 깊게 기억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진한 터키향이라니! 그 역사성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새로 나온 소설 <이브의 세 딸>이 터키 작가의 소설이라는 안 순간 바로 픽! 그런데... <이브의 세 딸>은 터키소설이라기 보다는 그냥 현대소설이었달까. 재미있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터키향은 없었던... 어쩌면 오르한 파묵이 부모세대이고 엘리프 샤팍은 자녀세대라서 격세지감이 그 사이를 벌려놓은 것일지도... 어쨌든 굉장히 흡인력 강한 소설이긴 했다. 그야말로 시간순삭?!

제 아무리 겉으로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광기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유순하지도, 귀엽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제력을 잃을 가능성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 몇 배는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솔직히 '가능성'이라는 건 맞지 않은 말이었다. 한때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서구화되고, 민주적이며, 세속주의의 국가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튀르키예도 결국에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p. 7)

작가는 소설 속에서 현대 터키의 상황을 힐난하고 있지만 작가의 이력을 보건대 작가가 얼마나 터키적인 터키인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이스탄불 이라는 독특한 도시가 터키의 대표도시이기는 하나 과연 가장 터키적인가 라고 생각하면 그또한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모든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곳 그곳이 터키인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페리는 한마디로 '혼돈'적 자아를 지닌 여성이었다. 페리는 '겉보기에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 좋은 주부, 좋은 시민, 현대적이며, 세속적인 무슬림이었다. 이 나라가 겪은 격동적인 혼란은 결국 전부 그녀의 삶에도 녹아 있었다. 그녀의 삶과 과거, 다시 말하면 페리의 인생 이야기는 결국 튀르키예의 역사엿다. 페리가 느끼는 혼란은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겪는 국가적 혼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p. 9)' 작가는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나라이름까지 바꿔버린 혼돈의 현재를 페리라는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글쎄... 그렇게 거창하게 확장되기 이전에 그저 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히고 그렇게 한 개인의 서사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

신앙과 정체성 문제는 날반트오울루 가족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유성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가족을 둘로 쪼개 버렸다. 신앙심이 아주 깊은 민족주의자 작은 아들 하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 편에 섰다. 큰아들 우무트는 한동안 결심을 못 하고 있었지만, 말과 행동에서 좌파 성향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마침내 좌파의 길을 확실히 선택했을 때는 급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양분된 상황은 페리를 힘들게 했다. 아빠 멘수르도, 엄마 셀마도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엄마의 완강한 종교적 믿음과 아빠의 단호한 유물론 사이에서 페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페리는 가능한 한 그 누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였다. (p. 38)

2016년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하며 서술되는 이 소설은 현재는 파티의 어느 날 하루로, 과거는 페리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그 하루로 점차 다가와 합쳐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페리가 일곱살 때부터 어떻게 성장해서 서른 다섯살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현재로 오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남편의 사업적 파트너의 초대로 파티에 가던 날 페리는 핸드백을 소매치기 당하고 그 과정에서 지갑에 묻어두었던 십수년 전의 폴라로이드 사진 한장을 오랜만에 보게 된다.

페리가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감춰 두었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었다. 그건 페리의 아주 오래된 추억이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담고 있었다. (p. 42)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 세 명이 사진 속에 있었다. 그들은 대학 학사모 가운과 목도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나란히 서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보드레이안 도서관을 등진 그들은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속에 영원히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p. 43)

옥스포드를 함께 다녔던 세 명의 친구, 바로 '이브의 세 딸' 이었다. 페리와 쉬린과 모나.

우무트는 불법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고문관이 발가벗기고 눈을 가린 상태에서 금속 스프링에 묶어 전기 고문을 가하자 그때 비로소 권총이 자기 거라 인정했다. 고환에 전극을 묶고 두 배의 전류를 흐려보내자, 정부 주요 인상에 대한 연쇄 암살을 계획한 세포 조직의 우두머리라고까지 '자백'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던지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죽음의 공포에 질려 그들이 뭐라고 하든 다 인정하고 말았다. (p. 55)

2016년과 1980년대 1990년대를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과거 속 몇 에피소드들은 우리네 과거와 너무 똑같아서 이거 한국소설인가? 싶었다. ㅎ 아하... 그래서 터키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했던가 싶기도 하고.

페리가 하나님을 추궁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기도할 수도 없었고, 아빠가 권한 것처럼 창조주를 무시할 수도 엇ㅂ었다. 그 대신에 페리는 엄마와 아빠에게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모든 비난과 불만을 글 포탄을 만들어 하나님에게 날려댔다. 모든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언쟁을 ㅓㄹ였고, 쉽게 대답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질문들을-아무도 듣지 못하게 낮은 소리로-하나님에게 물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많은 부당한 일을 허락하시는 거죠? 선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교도소 벽 너머, 감방의 창살 뒤를 보고 들을 수 있기는 하신 거예요? 만약 하나님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한 게 아닐 것이다. 아니, 만약 보고 듣고 계신다면,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절대 전능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p. 59)

페리는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고 성장하는 내내 집안에서 봐왔던 혼란의 원인인 종교적 견해 차이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공부하는 게 마음 편했고 책속에 파묻히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열심히 하는 만큼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고 아빠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넉넉치 않은 경제사정에도 불구 옥스포드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옥스포드에서 한 교수가 '신'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종교와 신에 대한 질문들을 가득품고 있던 페리는, 더구나 가끔 '안개에 싸인 아기'환영을 보던 페리는 그 강의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답'을 찾고 싶었다.

본 수업은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헌에서 시까지, 신비주의에서 뇌 과학에 이르기까지, 동양 철학자에서 서양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에 기초하여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때 무엇을 말하는지 탐구한다. (p. 206)

페리는 아주르 교수의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쉬린이 자신을 바꿔놓았다고 극찬했던 바로 그 수업.

소수의 학생들로 구성된 세미나 수업이었던 그 수업에 참여해보니 모나도 있었다.

구성원들은 거의 상극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각양각색의 학생들로 모여져 있었고, 따라서 시작부터 끝까지 '혼돈'을 체감시켜주었다. 하지만 아주르 교수의 질문과 그가 바라는 이상은 매혹적이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자 하는 질문은, 여러분은 신을 연구하기 위해 여러분 자신만의 경이로운 학문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의 학문은 달라야 합니다. 누구도 흉내를 내선 안 됩니다.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세요. 다양한 학문을 종합하세요. 신이 궁금하다면 절대 종교에만 집착하지 마세요. 종교적 다툼과 분쟁은 인류를 분열시키고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수학, 물리학, 음악, 회화, 시, 무용에 적용하세요. 예술은 탐구하는 것입니다. 신학도 탐구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믿든 안 믿든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p. 369)

페리는 아주르 교수의 수업에도 빠져들었지만, 아주르 라는 사람 자체에도 빠져들었다. 페리의 심리상태는 아슬아슬했다.

기숙사를 나와 쉬린과 모나와 페리 셋이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 그러한 페리의 심리는 더욱 위태로워져갔다. 본인도 주변사람들도 그때는 몰랐었지만.

독실한 종교주의자 모나와 격렬한 반종교주의자 쉬린의 사이에서 페리는 '그녀가 다시 부모와 함께 사는 것 같았다. (p. 472)' 그럴수록 아주르 교수와 그 수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옥스퍼드의 세 젊은 이슬람 여성 : 한 명의 죄인과 한 명의 신자 그리고 한 명의 방황하는 영혼' 으로 쉬린과 모나와 페리 라는 세 명의 조합이 구성된 것이라는 오해에 빠진 순간 페리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아주르 교수의 교직생활을 파탄내고 자신의 삶을 죄책감속으로 던져 넣게 될 그런 선택을.

쉬린, 모나 그리고 페리. 무신론자, 독실한 신자, 우유부단한 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동 문화권의 성난 자매들. 이브의 세 딸들. (p. 502)

이들에게 벌어진 사건은 사실 그리 많지도 그리 크지도 않다. 553페이지라는 상당한 분량을 읽었는데도 마치 단편 하나를 읽은 것처럼, 뭔가 서사가 명확하지 않고 뭔가 이제 시작하려는데 끝난 것 같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적 스토리를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늘 있는 일이다.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평균 몇 시간 간격으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모든 사건이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해서 말이다. 꼭 잠긴 방문뒤, 뻥 뚫린 마당, 싸구려 모텔 방, 고급 호텔 할 것 없이 한밤중이고 대낮이고 벌어지는 일이다. 이 도시의 사창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꼭지가 돌아 버린 손님들에게 폭행당하는 콜걸들, 남창들, 늙어 빠진 매춘부들, 길 한복판에서 두들겨 맞고도 경찰서에서 무시당하는 게 더 무서워 경찰서도 못 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트랜스젠더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이나 선생님들을 무서워하는 꼬마 아이들, 시아버지나 시동생과 같은 방에 있는 걸 두려워 하는 새 신부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눈이 돌아간 강박적 사랑의 분노를 경험한 젊디젊은 여자들, 남편의 성폭행을 입 밖에 낼 수도, 그럴 용기도 없어 입을 닫고 속으로 삼키는 주부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p. 76)

지금 튀르키예의 상황은 달랐다. 전선은 더 명확해졌고 진영은 더욱 뚜렷해졌다. 색깔도 흑백으로 바뀌었고 중도는 사라졌다. 부부 중에 한쪽이 더 종교적으로 독실하고 다른 한쪽이 더 세속주의적인 그런 결혼-자신들의 부모처럼-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회는 보이지 않는 유리 장벽으로 나뉘었다. 이스탄불은 거대 도시라기보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공동체 파편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열렬한 보수주의자'이거나, '열렬한 반보수주의자'였다. (p. 152)

왜 사람들은 '뿌리'에 집착할까? 예를 들면 '가지'도 아름답지 않은가. '잎'과 '과일'도, 물론 뿌리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나무 자체를 사랑했다. 뿌리는 땅속과 땅 위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러니까 하나의 선이 아니다. 나무뿌리도 고정-또는 고정관념-을 거부하는데, 사람들에게 반드시 '뿌리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하는 건 얼마나 모자란 생각에서일까? (p. 179)

서구에서 부르주아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고수하고 봉건제에 반대하면서 한동안 진보적인 역할을 맡았었다. 반면, 튀르키예에서 자본가 계급은 진화 과정을 끝내지 못했고, 뒤늦게 떠오른 어설픈 사상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튀르키예에서 공산당 선언을 썼다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튀르키에에서 부르주아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사회에 용해되어 버렸다. 여전히 일관성이 없었고, 신뢰할 수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독립된 계급이 된 적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국가였다. (p. 194)

소설 속에서 들리는 작가의 목소리는 여성과 정치와 종교에 대해 쉬지않고 굵게 말하려 한다. 그래서 소설적 구성은 약하고 스토리도 빈약한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단숨에 읽게 하는 매력은 뭘까 신기한 기분이다. 그러니 이 책도 이 작가의 세계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있나. 오르한 파묵의 터키를 까맣게 잊게 만든 이 튀르키예 소설은 여러면에서 문제작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이 던진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일단 이 소설을 읽어봐야 겠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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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프린트 - 이기적 인간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드는가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부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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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100인<포린폴리시>'세계100대사상가'

이 시대 최고 석학이 밝힌 인간 사회 진화의 청사진

"우리는 서로 돕고 배우고,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블루프린트'라는 단어가 낯설어서 이 직관적인 단어를 검색해보니 '청사진'이라고 나왔을 때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영알못의 비애란 단어 뜻 그대로의 해석도 믿지 못하고 일단 검색부터 하게 된다는 ㅠㅠ

'청사진'이라는 단어는 무언가의 지향점, 계획표, 이상향 등의 의미로 전달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간 사회 진화의 청사진' 을 줄여서 '청사진'이라고 제목을 지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제에서 원제와 약간 차이가 있다. 원제의 부제는 'THE EVOLUTIONARY ORIGINS OF A GOOD SOCIETY' 즉 '좋은 사회의 진화의 기원' 인데 한국어판 부제를 보면 '이기적 인간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드는가' 이다. 부제는 항상 책의 주제를 담고 있기 마련인데 그 주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점이 생기곤 하므로 원서와 한국어판 은 그 관점이 달랐달까. 여하튼 제목만으로 내용을 얼추 짐작해보자면, 이기적 인간 투성이로 보이는 현대사회에서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기원에서부터 갖추어져 있음을 진화적으로 증명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의 본문으로 가기까지는 상당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정재승 박사의 추천 및 해제에 이어 리뷰를 통한 추천사들이 연이어 길게 인용되고 있다보니 본문은 50페이지에 가까워져서야 시작된다. 이 엄청난 칭찬들로 시작하는 이 책이 과연 어떤 책이길래 이토록 찬사를 거듭하고 시작하는 걸까?

약30만년 전 시작된 인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종은 선해지도록 진화했다. 우리는 사랑, 우정, 협력, 학습을 비롯한 여러 놀라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바로 이 능력들이 우리의 운명을 빚어내는 지각판 운동에 해당하는 힘들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게다가 이 힘들은 모든 인류 집단이 지니고 있다. 모든 인류의 공통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이 선한 힘들이 어떻게, 왜, 출현했으며, 이 힘들이 인류가 마찬가지로 지닌 폭력과 악의 성향을 상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다루었다. 이 지식을 활용해 계속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P. 7 -한국어판 서문 中-)

저자는 친절하게도 한국어판 서문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인사부터 희망적이다. 성악설 성선설 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성선설 입장이랄까. 하지만 저자의 이 책은 인간 개인의 본성을 성선으로 풀어낸다기 보다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혹은 인간사회의 성선에 대한 본성을 기원적으로 추적하여 풀어내는 책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하다거나 인간사회는 착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특성이 어떤 사회를 추구할때 그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더라 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달까.

인간의 본성과 인류 진화의 궤적을 꿰뚫는 이 책은 탁월한 걸작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바로 집어 들어 읽으시길 강력하게 권한다. (P. 8)

라고 강력하게 추천하는 정재승 박사가 나름 자세하고 긴 해제를 덧붙이고 있는데, '사실 이렇게 서너 줄이면 충분한 '이 책의 소개'에 덧붙여 긴 해제를 사족처럼 다는 이유는 이 책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더 많은 독자가 접했으면 하는 간절하 바람에서다. 묵직한 주제와 책의 불륨감에 압도되어 새로운 개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인간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에 틀림없이 매료될 것이다. (P. 8~9)' 라며 그 사족?!처럼 긴 해제를 시작한다. 중요한 포인트는 '희망의 메시지' 라는 것이고 '탁월한 걸작' 이라는 것이다. 정재승 박사의 책들을 나름 긍정적으로 읽어왔던 터라 이 정도의 찬사를 주는 책이라면 일단 믿고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비록 600페이지를 넘는 벽돌책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책은 그런 정도의 칭찬을 받을 만한 책이었다. '이 책은 좋은 사회에 대한 진화적 '결론'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나누게 될 수많은 토론과 실천을 위한 '서론'이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갈 '우정과 환대 사회'의 씨앗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심어주시길 부탁드린다. (P. 19)' 정재승 박사의 마무리에 왠지 심쿵했다. 정말 멋진 표현이로고...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는 개인 선택과 전체 사회 구성 사이의 개념적 간극을 이어주는 선구자다. 그는 시의적절하고 매혹적인 이 책에서 과거 진화에 뿌리를 둔 우리 본성의 더 선한 천사들이 어떻게 깨달음과 사랑으로 가득한 문명을 낳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 스티븐 핑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저자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시의적절하게 나온 탁월하고 도발적인 역작이다. 나는 책 한 권을 읽고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런데 크리스타키스는 엄밀함과 박식함을 술술 넘어가는 글솜씨와 결합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저자다. 자신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실험을 포함해 흥미로운 연구 결과로 가득한 이 책은 이 힘든 시대에 희망을 품을 이유를 과학에 근거해 제시한다. - 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저자

굉장히 유명한 사람들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의 리뷰가 실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위 두명의 추천사가 인상적이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을 통해 본 스티븐 핑거의 해결책은 너무 서구백인우월주의적이라 실망스러웠고, <정치적 부족주의>의 분석은 명쾌했지만 희망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두사람의 분석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결과까지 포괄하여 논리를 전개시킨다. 그 중에는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도 등장하는데 이 책에서의 비현실성에서도 저자는 나름의 현실적 분석을 찾아내는 것을 보며 그 넓은 학문적 범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의 엄청난 이력을 보면서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책을 읽어나갈 수록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하는 것을 보면 매번 감탄하게 된다. 여하튼 추천사들을 통해 느껴지는 메세지는 이 책이 '시의적절한 책'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인간본성의 연구를 총망라한 통합서 한 권을 읽는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달까.

나는 이 책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하나로 묶는 것이 더 많으며, 사회는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p. 44)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보는 내 관점,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관점은 공통된 인간성으로 사람들이 하나가 되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통성은 우리 진화의 기원이 같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즉 이것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p. 46) 이 범문화적 유사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전쟁까지 할 정도로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이토록 비슷할 수 있다는 걸까? 근본 이유는 우리 각자 안에 좋은 사회를 만드는 진화의 '청사진blueprint'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p. 49) 내가 볼 때 너무 오랫동안 과학계는 우리 생물학 유산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왔다. 부족주의, 폭력성, 이기심, 잔인함의 능력에 말이다. 반면에 밝은 면은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이제 나는 이 밝은 면이 왜, 어떻게 우리 본성으로 진화해왔는지 밝히고자 한다. (p. 50)

'진화의 청사진은 어떤 인간을 만드는가' 라는 제목에 머리말에 이어 이 책의 본문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 사회, 공동체'라는 1부에서 인간의 DNA에 새겨진 사회성이라는 형질을 통해 다양한 공동체(우연한 공동체, 의도한 공동체, 인공 공동체)에서 어떤 사회가 유지되었는지 그 특성을 분석하고, '사랑, 우정, 관계'라는 2부에서 '결국 사랑'이라는 인간 본성이 사랑과 우정과 관계의 진화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 추적한 후, '유전자, 문화, 진화' 라는 3부에서 이 책이 전하려는 그 '희망의 메시지'를 총괄적으로 증명한다.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는데, 고원에서 옆의 높은 산을 보면 그 산이 높은 줄 모르고 그저 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고원에서 내려와 떨어진 평지에서 보면 그 산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어떤 고원 위에 올라서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봐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긴 하다. 일에 지칠때 초심을 기억하라는 말처럼, 인간과 사회에 지칠때 저자처럼 인간의 기원을 생각하다보면 '우리 진화 역사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이 궤적은 '좋음(선함)'을 향해 위어져 있다. (p. 582)'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의 넘치는 긍정에너지는 이 책의 무거움에 눌리지 않도록 꾸준히 읽게 만들긴 하지만, 과학적으로 탄탄한 증거를 제시하다 보니 다양한 사례들을 읽다보면 지칠 수도 있다. 그럴땐 그 주제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길 추천한다. 이 책은 비교적 미괄식이라 ^^;;; 여하튼 그렇게 찬찬이 읽다보면 그동안 잊고 있던 '청사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희망적인 청사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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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 철학의 시대에서 정치를 배우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김예호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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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읽어야 할 동양 고전

시대를 초월해 삶을 가르치는 2600년 유학의 교과서

EBS books 의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를 좋아한다. 작고 얇아서 고전의 무게를 생각지 않고 일단 펼쳐들 마음이 생기고, 읽으면서는 이 작고 얇은 책 속에 고전에 대한 충실하고 충분한 이해가 가득하기에 매번 감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서삼경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유학의 고전, 대학과 중용을 한 권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자신들의 태생적인 신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상가들이 정치 무대 전면에 자유롭게 진출해 자신의 학설을 펼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당시 사상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학파로는 병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이었다. 병가는 당시 일어나는 보편적인 정치 현상인 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장하며 부국강병을 철학의 중심 테마로 삼았다. 묵가는 강자가 약자를 무력으로 침탈하는 당시 상황을 비판하면서 약자를 보호하자는 보편적 박애주의를 주장했다. 도가의 경우 문명의 이기와 지식 등 인위적인 문화의 발전이 인간 삶을 해치고 있으므로 모든 인위를 버리고 자연 원리를 따를 것을 주장했다. 법가는 예와 형(법)의 두 가지 통치 수단으로 다스리던 전통적 정치 방법을 법으로 일원화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직선적 역사관에 입각한 변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가의 경우 당시의 혼란은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나라 천자의 예제를 파괴해 발생한 것이므로 위정자들이 도덕적으로 각성할 것을 역설하며 주나라의 예치를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서 다루는 유가의 경전 [대학]과 [중용]은 태평한 천하의 건설을 위해 위정자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 실천, 앎, 통치 방법등을 논의한다. [대학]이 주로 평천하로 가는 정치 목적과 실천 원리에 대해서 논의했다면, [중용]은 주로 삶의 실천 윤리에 대해 말한다. (p. 16~17)

이 시리즈가 고전에 대한 입문서와 활용서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보니 고전 자체에 대한 본문 이해보다는 배경설명과 핵심 사항을 주로 전달해 주고 있기에 두꺼운 고전 읽기가 망설여지는 독자에겐 더욱 유용한 책이다. 시대상황을 비롯한 다양한 배경지식을 알게 됨으로써 고전 읽기의 사전 준비를 할 수 있고 간단히 요약된 핵심 사항을 이미 알고 고전을 읽게 되면 결국 본문 이해에도 도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 수록한 [대학], [중용]을 비롯한 동양 고전의 인용문은 모두 저자가 직접 번역했다.] 라는 [일러두기]에서 알 수 있듯이 원문을 직접 번역 및 해석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쓴 책이므로 내용 또한 믿고 볼 수 있기에 더욱 훌륭한 시리즈라 하겠다.

유학은 과거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던 성인과 군자들이 실천한 윤리의 내용과 방법을 재음미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이러한 유학의 특징은 "옛것을 서술할 뿐 새롭게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길 가만히 나의 노팽(과거 은나라의 현자)에 견주고자 한다" 라는 공자의 단적인 언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p. 23)

[대학]의 '지극히 선함에 머무른다는' 이상향은, 유가의 옛것을 숭상하는 상고주의, 그리고 이러한 의식에 기인한 옛 성왕들을 기리는 선왕관념, 배움을 중시하는 인문주의 각자의 위상에 맞는 직분 수행을 강조한 정명의 정치·윤리의식 등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발휘될 때 도달하는 경지라 할 수 있다. (p. 25)

공자의 사상은 인간의 현실적인 윤리실천을 강조하며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분리해 사고하려는 내용과 과거의 천명사상을 계승하는 내용이 혼재된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런데 [중용]에 이르러 '하늘'은 인간의 본성을 부여하는 절대적인 주체로 정의된다. (p. 27)

유가의 학문 유학은 공자로부터 시작된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사서이고 시경, 서경, 역경이 삼경이라 유학의 대표적인 경전을 사서삼경이라고 하는데 모두 그 출발점은 공자의 사상이었다. 공자가 살아생전 그렇게 주창했으나 그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던 사상이 어떻게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사상들 중 거의 유일하게 되살아나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계속해서 과거의 선왕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식의, 모든 좋은 것은 다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과거회상만 하고 있는 것 같은 (고리타분한) 사상이 말이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에게 '인(仁)'의 도덕 정치를 권유했지만 어떠한 제후도 그의 말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공자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p. 43) 맹자는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 알리는 것을 자신의 평생 소원으로 삼았다. 맹자는 스승인 공자의 도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매우 걱정한 인물이다. 맹자는 평생 천하를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인의의 정치를 유세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관직에 나아가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 (p. 45)

공자와 맹자는 둘 다 제후의 부름을 받기 위해 천하를 떠돌며 유세했지만 결국 쓰임을 받지 못한 이유도,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부국강병을 원하는 제후들의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p. 47)

그러나 한무제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단순히 과거 유교 경전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닌 당시 유행한 문화들을 흡수하면서 통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변모한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유학의 '천명'관념은 절대적인 위상과 권위를 지니게 되고 더 다양한 내용과 방법으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p. 51)

공자와 맹자의 시대까지는 통일된 제국이 없었다. 공자가 숭상하는 선왕들이 있었으나 진나라나 한나라처럼 통일된 제국을 이룬 나라들은 아니었다. 다양한 소국들은 각자의 이익에 맞는 정치사상을 취할 따름이었다. 유학은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그 어디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너무나 태평한 사상이었다. 하지만 진나라 통일 이후 중국대륙에 거대통일 제국이 탄생했다. 한나라 무제에 이르러 제국의 중앙집권을 돕는 통치이념이 필요해지게 되었고 그 사이 발달한 다양한 사상과 문화들까지 흡수한 새로운 모습의 유학이 그 통치이념으로 채택되게 된다. '천명', 왕이 곧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만큼 확실한 중앙집권화가 또 있을까.

개혁과 혁신의 성격이 약하고 안정을 추구한 유학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국가 전반의 총체적인 혁신을 해야만 했던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없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회정치적 혼란이 일정 부분 종식된 후 제국의 통치자는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추구한다. 그들은 혼란으로부터 야기된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적 통합을 위해 전시 체제에 요구된 과감한 혁신보다는 안정 속에서의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에 부합하는 사상이 바로 안정 속에서 변화를 추구한 유학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통일제국인 한나라에서 채택한 유학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에 유행한 유학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 71)

동양에서 '하늘'의 의미는 다양했다. 자연적이고 하고 신적이기도 하고 미지의 무엇이기도 했으며 절대적 무엇이기도 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던 '하늘'은 점차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유학의 '하늘'은 과거 순수한 도덕적 의지로 충만한 하늘이 아니라 아예 인간사를 주재하는 인격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p. 67)' 서양에서도 종교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 왕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던 것처럼 동양에서도 비슷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하늘에서 선택된 왕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수련하며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겠다는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이 부분이 신격화된 왕이 중앙집권화된 동양과 그렇지 못했던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다르게 만든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에서의 왕은 종교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면 권력을 획득하긴 했으나 그 권력을 '치국 평천하'에 쓰진 않았잖은가.

'유학의 도통과 정통성으 중시하는 내용은 당시 계급사회에 안정감을 줄 수 있었다. (p. 72)'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유학이라는 고전이 전해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대학과 중용의 핵심 사상을 요약한 이 책의 본문을 읽으며 찬찬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시작으로 각각의 첫 문장을 운 띄워놓아본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지극히 선함에 머무는 데 있다. (p. 37)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p. 133)

ps.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 시리즈의 책들이 다 그러했듯이 참고도서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나중에 혹시 고전을 원문으로 읽게 될 수도 있으니까 참고할 수 있도록 옮겨놓아 본다.

[ 시경 ] 유교문화연구소, 성균관대 출판부, 2008

[ 논어정독 ] 임옥균, 삼양미디어, 2015

[ 장자 - 낙천적 허무주의자의 길 ] 김갑수, 글항아리, 2019

[ 맹자강설 ] 이기동, 성균관대 출판부, 2005

[ 한비자 정독 ] 김예호, 삼양미디어, 2018

[ 전국책 ] 유향, 진기환 옮김, 명문당,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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