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학자의 인문 여행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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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더미북 으로 받은 책은 시집사이즈의 작고 얇은 가제본 책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작은 사이즈라 받았을때는 당황스러웠지만, 몇 쪽 안되는 글을 읽고 나서 본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반가움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몇 편의 글이 이렇게 매력적인데 본책은 얼마나 다양한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장소, 사람, 문화를 연구하는 지리학자는 여행에서 무엇을 보는가

여행지를 고르지만 말고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해야 합니다

역사를 알면 여행이 풍부해지듯이 장소에서의 의미를 끄집어내면 여행이 더 즐겁다

나는 여행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에세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행하며 쓴 에세이는 더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자랑하는 듯한 여행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여행가서 왠 쓸데없는 개인적인 감상이나 끄적거린 글들은 더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행에서의 의미를 여행지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역사와 연결시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지리학자의 인문 여행 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내겐 매력적이었다. 지리를 관광으로 보지 않고 여행을 개인적 경험으로만 여기지 않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넓혀주기 위한 인문 여행이 되려면 지리를 잘 아는 지리학자가 여행을 인문학적 으로 한다는 것 만큼 적합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행기에서 인문학을 어렵게 고전적 의미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저 좀더 폭넓은 사고의 프레임이라고나 할까.


여행은 이처럼 어느 하나 같은 곳이 없는 다양한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서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여행을 함께 해봐야 그 사람의 진정한 인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낯선곳에서의 여행을 함께 하다보면 돌발적인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시간을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감탄하게 되는 여행의 시간들은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이 맞는 것 같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면서도 살아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어느 책에선가 살아가는 것이 힘들때 살아있으므로 살아지는 데로 살뿐이라는 (표현은 달랐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의미상으로는) 구절을 읽고 인상깊게 남았었다. 그때는 살아 '가는' 것과 살아 '지는' 것에 대해 오랜 생각을 했었는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가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니 책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게 된다.


영어에 take place 라는 숙어가 있다. '사건이 발생하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 숙어를 직역하면, '장소를 취하다' '장소를 갖다' 라는 뜻이다. 인간들의 모든 사건과 현상이 반드시 장소를 취해야만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항상 장소를 취하는 여정 속에서 이루어 졌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여행 역시 새로운 장소를 취하는 경험이기에 여행의 핵심은 장소다. 장소는 그렇게 인간 존재의 기반이 되는 필연적 무대다.

삶은 여행이다 라는 말은 흔하디 흔한 광고문구 같은 문장이었는데,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삶이 여행이다 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장소의 의미... 여행은 장소를 새로운 장소를 경험하는 시간이고, 삶은 장소를 취하는 것이니 삶은 정말 여행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이 있다. 거꾸로 하면 보고 싶은 만큼 알아야 한다.

짧은 글이 담긴 더미북이었는데도 맘에 드는 문장이 꽤 여러 곳에 있었다. 특히 이 문장이 맘에 들었다. 알고 있는 문장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구절들은 더 깊은 깨달음을 준다. '보고 싶은 만큼 알아야 한다' 내가 비록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은 못되지만 요즘 책을 읽어대고 있는 (그냥 읽는다 정도가 아니라 정말 읽어대고 있다는 느낌이라;;;) 것을 잠시 생각해 보니 내가 보고 싶은 게 많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는 자신의 몸속에, 즉 마음속에 국경이 내재되어 있다. 지리적 경계의 안쪽이나 바깥쪽 어디로든 마음속의 국경은 지워지지 않은 채 항상 여행자와 함께한다... 여행자의 몸과 함께 이동하는 국가와 국경은 여행자 자신을 항상 경계상의 존재로 사고하게 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글로벌화 시대에도 국경의 위상은 변함없이 굳건하다.

저자가 경험한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외국에서의 경험을 나도 비슷하게 한 적이 있다. 한국이라는 국적은 늘 북쪽에서 왔냐 남쪽에서 왔냐 라는 질문을 동반한다. 세계는 우리 생각보다 분단국가 한국을 잘 모른다.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만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을뿐.

여행은 전혀 예기치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해준다. 경계 너머를 여행하며 경험하는 '나' 밖의 것들이야 당연히 낯설게 다가오겠지만, 그것들을 경험하는 나 자신조차도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은 무척이나 신기하고 경이롭다.

내가 경험한 여행들은 나 밖의 낯선 것들을 경험할 뿐이었다. 낯선 '나' 를 경험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낯선 나를 경험하는 여행이라...


지리학적으로 모든 장소는 인간의 의도에 따라 중심이나 주변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우주에서 본 지구의 모습처럼 국가의 경계를 지워 버리고, 경계의 안쪽과 바깥쪽을 뚜렷이 구분해 위계적으로 바라보려는 삐딱한 시선을 걷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 뒤에 연결되는 에피소드에서 호주 멜버른역 앞 여행 안내소에서 본 지도 이야기를 한다. 그 지도는 남반구와 북반구가 뒤지집혀있고 '호주는 저 아래에 처박혀 있지 않다' 라는 글귀가 큼직하게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 뒤집혀 있다고 말할 뿐이지 사실 뒤집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여행의 멋중에 하나는 이렇게 생각의 틀을 확 뒤집어주는 경험이 아닐까.


이미 공식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세계 곳곳의 지명 중에는 원래의 원주민 지명을 무시하고 서구 세력이 붙인 것들이 많다.

그 예시로 아메리카, 인디언, 인도네시아, 서인도제도, 라틴아메리카, 빅토리아폭포, 코트디아부르, 근동, 중동, 극동, 필리핀, 에베레스트산, 짐바브웨, 쿡제도 등 이름하나하나마다 놀랐다. 나도 모르게 서구적 사고로 그 지명들을 사용하고 바라보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안되는데... 적어도 안된다는 것은 알아야 하는데... 제대로 보기 위해 결국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척도로 국가를 평가하는 습성이 얼마나 잘못되고 그것이 여행자들의 생각과 행동에 얼만큼 독이 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볼수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을 여행할땐 우와! 하고 동남아나 남미를 여행할땐 이런! 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자뻑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나 그들이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제3국을 여행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데.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여행은 잘 모르는 것을 인정하게 해주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다름을 이해하려면 결국 알아야 하고 그렇게 이러한 책이 필요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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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서커스 - 2,000년을 견뎌낸 로마 유산의 증언
나카가와 요시타카 지음, 임해성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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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일본인이지만 번역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책이다. 일본인인 저자가 처음부터 한국출판사와 계약하고 한국에서 출판하기로 한 책이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쓰여진 책을 한국어로 옮긴 책이긴 한데, 번역본하고는 뭐랄까 다르게 불러야 할 것 같은 ㅎㅎ

나는 개인적으로 표지와 홍보문구가 정직한 책을 참 좋아하는데, 이 책이 그러했다.

2000년을 견뎌낸 로마 유산의 증언

'남겨진' 것들이 말해주는 '사라진' 로마

토목, 건축의 관점에서 다시 살피는 로마 이야기

'빵과 서커스' 의 제국 로마의 번영과 몰락

본문의 내용이 딱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토목, 건설의 전문가로서 고대로마사에도 관심이 많아 기존 역사학계의 시각이 아닌 토목건축엔지니어의 관점에서 고대로마사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연구를 오랫동안 수행해오면서 여러권의 책을 냈는데, 이 책또한 그 흐름의 선상에 있는 책이다. 옮긴이가 말하듯 로마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으나 로마사에 관심이 있고 관련 역사서를 읽은 사람이 읽기엔 흥미로운 책이다.


로마는 유럽 곳곳에 많은 유적을 남겼다. 그 건축물들 때문에 로마사의 가치가 더 인정받는 측면이 있다. 남기지 않은 역사는 알 수가 없다. 남겨진 것이 많은 역사를 많이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고대그리스가 서양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나 그리스식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뿐 그리스가 직접적으로 전수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의 경우 로마인들이 직접 가서 직접 세우고 전파한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 로마가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도 로마문화가 더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은 직접적인 결과물들 때문인 것이다. 그리스신화가 로마신화로 자연스럽게 둔갑할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인듯 하다.

세계최초로 산업화를이룩한 영국이 1820년에 100만명이 넘는 최초의 근대 산업도시를 선보인 이래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는 전세계를 통틀어 1900년에도 11개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로마는 2000년 전에 인구 100만의 대도시를 운영하고 유지했다. 이제 그 원천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저자는 책을 시작한다.

수도로마가 최대로 번성할때 100만명이 생활했는데, 인구밀도를 따졌을때 2015년 서울보다 4배가 많은 인구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서울을 생각할때도 엄청 복작거리는 도시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보다 4배나 많은 인구밀도였다니 얼마나 초과밀 도시였는지 짐작케 한다. 이런 과밀 대도시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다양한 기술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도와 포장된 길 튼튼한 성벽 기술이 발달했는데, 로마에는 튼튼한 성벽이 있어서 장기농성전이 가능한 구조였음에도 그런 경험은 없는 도시였다고 한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내부분열로 문을 열어줬다는;;; 인구가 많아 성을 튼튼하게 지었는데, 튼튼한 성벽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많은 인구였다는 아이러니...


거대한 수도교 유적을 보면 깨끗한 상하수도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 로마 같지만, 실은 그 이전에 이미 있었던 설비라고 한다. 기원전8세기경 이란의 건조지대에서 시작된 흔적이 있고, 고대 페르시아에도 비슷한 관개시설이 이미 있었다고 한다. 그이전 기원전 5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 바빌론 등에도 세계 최초의 하수도가 정비됐고 일부 수세식 화장실도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고대로마지도를 보면 로마시를 흐르는 큰강이 있는데 거대한 수도교를 통해 멀고먼 외부에서 물을 끌어온 이유는 로마인들에게 상수원에 대한 '샘 신앙' 때문이라고 한다. 상수원은 아무리 멀더라도 반드시 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시를 흐르는 티베리스 강은 하수용으로 이용됐다고 한다. 그래서 오염이 심하긴 했지만, 이러한 로마의 하수시스템은 중세 유럽에 비해 콜레라의 발생 빈도가 현저히 낮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도시의 급수관은 납관을 주로 사용했으므로, 화산재를 사용한 콘트리트와 납은 수도 건설에 필수 재료였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콘크리트의 재등장한 때는 1824년 시멘트를 발명하고서라고 한다. 콘크리트의 발견과 발명은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 시대의 일이었던지라 그리스가 제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도 이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게다가 고대그리스는 해양도시 위주라서 도로시스템이 없었고, 수도망도 없었다. 물론 로마의 수도망과 도로망의 중심에는 로마의 콘크리트가 있었다.

중세 건축물은 콘크리트가 아닌 대리석과 벽돌로 만들어졌다. 로마에는 납광산이 없어서 먼 속주에서 로마로 가져왔었는데, 로마제국 멸망후 영토가 분할되면서 공급망이 사라짐으로써 납관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교 배격을 위한 도서 및 도서관 파괴로 기술의 전승이 끊긴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수도 기술은 사라졌고 중세는 말 그대로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의 도로망은 지금까지도 유용할 정도로 유명하다. 길이 멀리까지 잘 닦여 있다보니 관광여행도 많았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 비잔티움의 수학자 필론이 썼다는 '세계7대경관'이 유명해지면서 이른바 '고대7대불가사의'여행이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이집트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세움, 할리카르나수스의 마우솔레움, 로두섬의 콜로수스, 알렉산드리아의 파루스등대 가 그것인데,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대피라미드라 불리는 이집트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 뿐이다. 당시 로마인들은 7대불가사의 건축물들을 전체건 부분이건 볼 수 있었다는 얘기인데 어땠을지 궁금하고, 실물을 볼 수 있었다니 부럽기도 하다.

잘 포장된 도로망은 이민족의 유입도 불러왔다. 로마의 멸망은 게르만족의 대이동때문이라고 하는데, 살기 힘들던 게르만족이 잘 닦여진 길을 따라 로마로 오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런 측면에서 로마 가도는 로마제국의 번영을 가속화한 동시에 쇠망도 가속화시킨 양명성을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고대 로마는 기원전 123년부터 시민들에게 저가 또는 무상으로 식량과 오락거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른바 '빵과 서커스'다. 일반적으로 식량난이나 폭정이 극에 달하면 내란이 일어난다. 배고픔이 해결되고 오락이 제공되면 불평불만을 품는 시민들은 거의 사라진다. 로마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농민들은 대부분 군인으로 차출됐고 남은 가족들은 빈궁했다. 전쟁에 차출된 군인들도 제대로 전리품을 챙기지 못하면 돌아와도 거지꼴일 뿐이었다. 빈곤과 불만의 해결을 위해 로마지배층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커스는 라틴어 발음으로 '키르쿠스'인데 본래는 고대 로마의 전차경주장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서커스로 표현되어지는 오락거리에는 공공목욕장과 희비극을 상영하는 극장, 검투사의 경기나 모의 해전을 볼 수 있는 경기장과 전차경주를 하는 극장등이 있었는데, 이중 전차경기장은 다른 곳과 달리 신분별로 나뉘어 앉지 않았고 경기결과에 따른 내기도 성행했으며 규모가 커서 대규모 인원이 관람했던지라 서커스거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잔인해보이기만 하는 검투사 경기를 로마인들은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에 대해 저자는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검투사 경기에서 유혈이 낭자한 장면을 구경함으르써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던 로마의 시민들에게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 시민에 대한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점, 명령복종훈련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경기를 관람하게 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권력자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수용시킬 수 있었다는 점,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한 선심거리라는 것 등 4가지 관점에서 로마의 권력자들은 검투사 경기를 중시했다고 한다.


저자는 로마의 유적이 남아있는 도시들을 다양하게 예로 들면서 건축물들을 분석하고 의미를 되짚는다. 그렇게 융성하던 로마가 멸망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로마가 그때 이런 선택을 했다면 하고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 기독교를 국교화함으로써 로마만의 특성이 사라지고 암흑의 중세로 향하는 문명의 종말을 아쉬워 하기도 한다.


나는 이민족관련 언급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민족들에게 로마는 동경의 나라였다. 싸우기보다는 그 일원으로 넣어달라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싸워서 이긴들 얻을 것도 없었다. 자신들 문화로는 그런 시스템을 돌릴 수 없었으니까. 이주의 규모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계속해서 이민족들을 수용했다. 그리고 이들이 나태해진 로마 시민과 식민 도시민들을 대신해 국방의 최전선을 담당하게 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시에도 게르만족은 로마와 싸우자고 국경을 넘은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로마군이 승리했다.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패한것이 아니라 게르만화된 것이다. 게르만족은 애초부터 로마타도를 추구하지 않았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도 그들은 로마인들을 고용하고 로마의 제도를 이용했다. 로마의 멸망은 313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때 아리우스파의 추방이 결정됐다. 아리우스파 신도들은 이민족의 땅으로 몸을 피해 그곳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종교적 대립의 씨앗이 뿌려졌다. 아타나시우스파의 불관용은 심화됐고 로마는 타락해갔으며 로마군단의 정규군은 이민족 출신들이 주력이 됐다.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가 대다수였고 로마군 내의 규율확보는 점점 어려워졌다. 이민족 출신 군인들은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용병 오도아케르가 어린 황제 로물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단 한번의 전투도 겪지 않고 로마군은 소멸했고 그렇게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문화를 배우고 싶었지만 이교 탄압등에 의해 로마 지식인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서 지식의 쇠퇴도 급속히 일어났다. 그 간극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제국이 몰락하자 통일된 영토는 소국 난립상태로 변화했다. 계속되는 전란으로 삶은 피폐해졌다. 로마제국을 이어주던 공급망과 인프라가 기능을 멈췄다. 르네상스로 도시국가가 융성해질때까지 유럽은 무려 1000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EU가 떠올랐고, 난민문제가 생각났다. 세계대전을 겪고 국경이 확립된 후 각자도생하던 유럽국가들은 다시 EU로 묶여 있다. 로마의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들인 유럽은 로마라는 연대감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경제불황과 난민문제로 다시 분열의 위기에 있다. 로마역사를 기억하는 그들이 과거를 답습할 것인지 과거와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 궁금해졌다. 역사는 물론 한쪽만 굴러가진 않으므로 서양의 역사는 동양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물론 우리나라까지.

세계사를 안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서양의 역사를 읽는 다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를 제대로 이해하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낀다. 어쩌면 요즘 개인적으로 로마사를 읽고 있어서 더 그런것일수도 있지만, 서양의 역사나 동양의 역사나 우리나라의 역사나 역사의 흐름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깨달음을 준다. 그 깨달음을 나보단 이 시대에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얻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일단 나부터 잘 깨달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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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제 탓인가요? - 당신이 화가 나는 진짜 이유
로베르트 베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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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화가 나는 진짜 이유

분노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적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 즉, 나 자신 때문에 무너진다.

인생이란 결국 자기 상처와의 싸움이다

쓸데 없이 폭발하지 않고 내 마음부터 이해하는 심리 기술

슈피겔 베스트셀러 작가, 독일 아마존 심리1위

표지에 잔뜩 씌여진 홍보문구들은 그렇고 그런 심리서들에게서 비슷한 표현들로 익히 봤던 낯설지 않은 문장들이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고, 나를 속이고, 나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필요할 때만 나를 이용했던 그들, 심지어는 나의 뒤통수를 때렸던 내 인생의 블랙리스트들, 그들이 모두 나를 위해 나타난 천사들이라고요?!

라는 문장 속에서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천.사.

분노를 다룬 심리서에서 천사라니?!

저자는 독일내에서 유명한 심리학자 라고 한다. 이 책의 독일어 원제는 '더 이상 못 참아' 라고 하는데, 분노 짜증 압박감 등 나쁜 감정을 새로운 관점으로 분석하여 긍정적인 힘으로 바꿔주는 비법을 알려주는 책으로 출간한 책이 이 책이라고 한다. 사고의 전환이라... 아~ 천사~! 느낌이 온다. ㅎㅎ

이 책은 나의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연결고리를 따라가면서 평화를 찾는 법을 알려주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쁜 감정에서 벗어나 평화로워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무기력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내가 내 인생을 쥐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지 길을 알려주려고 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외부세계에 대한 내면세계의 반응, 즉 분노의 소리를 집중하여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1장 도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래 -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분노 유발자들 에서 바로 천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냥 천사가 아니다. 또라이 천사 의 등장이다. 독일어로 또라이 라는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절한 번역인듯 싶다. 느낌이 확 전달되는 단어이다. 말그대로 또라이 천사. 저자는 내 주변의 분노유발자들이 또라이들이 천사가 될 수 있으므로 또라이 천사 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저자는 아마 지금 당장은 또라이 천사가 준 선물을 전혀 뜯어보고 싶지 않을테지만, 곧 그들의 선물은 삶의 질과 인간관계의 질, 심지어 몸과 마음의 건강까지도 개선시켜줄 것이라고 장담한다.

내가 화가 났을때 나를 화나게 한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상대방과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가 스스로를 화나게 만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졌다는 생각때문에, 나의 감정이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고 느낀 것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상대방이 아니라 내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이 바로 앞으로 바꿔나가야 할 태도의 핵심이다. 또라이 천사가 주는 첫번째 선물은 오래전부터 끌고 다니던 나의 감정들과 직면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 감정들이 스스로 창조해낸 거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살필 수 있게 된다. 내 감정이고 내 분노이며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장 왜 자꾸 그 사람만 보면 화가 날까 - 분노 뒤에 움츠러든 속마음의 정체 와 3장 화가 난 것도 내 탓이라고? - 욱하는 감정을 부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 에서는 어릴 때의 상처로 생겨난 내면아이 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 안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끌려다니라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나름 분명하게 강조한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첫째, 우리가 가진 기대들이 무엇인지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 그런 기대들을 없애야 한다. 그렇다. 당신이 제대로 읽은 것이 맞다. 그런 기대들을 없애고 새로운 생각을 갖기로 결심해야 한다. (100page)

우리안에 토라지고 상처받고 화난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을 통해 평화로워질 수 없다. 오직 어른이 된 우리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109p)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든 사랑하든 아니면 친절하게 대하든 그것은 당신의 사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친절 또는 불친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당신의 사정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기를 기대하고 바라는 이상, 당신 역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왜곡하면서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115p)


4장 이렇게 화낸다고 뭐가 달라질까 - 폭발하지 않아도 속이 풀리는 분노 해소법 에서는 우리가 성인이 되어 겪는 대부분의 갈들이 유년 시절이나 청소년 시절에 어떤 사람과 겪은 경험한 갈등의 결과임을 이야기 한다. 따라서 현재 우리 곁에 있는 대부분의 또라이 천사들은 우리가 인생의 초창기에 만났던 그 사람들의 자리에 대신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미 경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또라이 천사들과 이미 한바탕 했었는데, 똑같은 대응을 해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유형별로 나눠 설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 방법은 한가지다. 생각을 바꾸는 것. 같은 상황이라도 다른 여러 가지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을 텐데 내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유형의 문장을 찾아야 한다. 또 어떤 생각이 나와 잘 맞을지 나를 편하게 해주는 생각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5장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말아줘 - 또라이 천사를 내 편으로 만드는 관계 정리법 에서는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 는 파트 라고나 할까. 독일사회도 우리와 비슷한 건지 저자가 유년 시절에 행복한 아버지 혹은 행복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냐고 묻는 질문에 5% 미만 때로는 2% 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서툰 부모 아래 자란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는 자기자신도 행복하게 자라지 못했고, 따라서 행복한 삶을 사는 모범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대가 될 수 있다. (161p)

이 문장이 왜 이렇게 생소했을까... 생각해보면 세계사의 대대적인 전쟁얼룩이 옅어진지 오래되지 않았다. 부모세대들 까지는 그야말로 먹고살기 힘든 세대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빠른 변화 속에 첨단문명이 나날이 등장하고 있는 지금은, 지금의 부모들은 서서히 누려가며 자라온 세대들이다. 행복의 기억을 갖고 자란 세대이니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세대 라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이와 어른의 결정적인 차이는 더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립할 수 있고, 아이였을 때 다른 사람이 해주던 모든 것을 이제는 자신이 직접 자신에게 선물할 수 있다.(185p)

거의 모든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아이 에 대해서 자가 치료를 권하고 있는 셈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알아서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어쩔 수 없다.


6장 내 마음은 이제 나를 위해 쓴다 - 나쁜 감정 대신 나에게 집중하는 셀프 치유법 에서 본격적인 자가치료에 들어간다.


불편한 감정 역시 우리가 만들어낸 감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불편한 감정들은 당신의 수용과 사랑을 갈망하는 당신의 어린아이다. 이제 당신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불편한 감정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 사랑을 줄 수 있다. (234p)

어떤 일이나 누군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우리 인생의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우리 인생의 행복을 결정한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할 수 있다. 수락할지 아니면 거부하고 저항하고 분노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239p)

'내가 잘못 생각했어. 다르게 행동하거나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용서란 잘못된 생각을 알아차리고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당신은 아무에게도, 어떤 사람이나 신에게도 빚을 지고 있지 않다. 신은 당신에게 말한다. '나는 네가 지금 너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단다. 무한한 창조 능력, 한없이 왕성하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이제 새로운 삶을 선택하라!'(247p)

셀프 치유, 자가 치료 다시 말해 생각의 전환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원인도 알겠고 과정도 알겠는데 결말은 어렵기만 하다. 책의 마무리는 약간은 종교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으로 마무리 된다.


마음이 힘들고 사람이 어렵고 관계가 버거울 때 심리서 들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몸은 어른으로 자랐으나 내 안에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도 어느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게 될 만큼 심리서는 흔해진 감도 있다. 감정에 빠지지 말고 한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누구의 탓이 아니라 왜 그런건지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해결법도 새롭지 않을 수도 있다.

책은 오래두고 보아야 좋은 책이 있고, 적절한 시기에 읽어야 좋은 책이 있는데, 심리서들도 적절한 시류를 타야 하는 책인것 같다. 옛날 심리서들로 지금을 사는 내 마음이 위로 되지 않으니, 최신 심리서들로 찾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 또한 요즘을 사는 이들에게 심심한 해결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내 주변인들에 대한 솔직한 표현들에 공감되는 구절이 많았다. 내 사고의 전환 이라는 큰 숙제가 남긴 했는데... 또라이 천사 들의 존재를 악마에서 천사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다보면 이 책의 진가가 발휘될 수도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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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축가의 사람, 이야기, 공간에 관한 낙서장
신웅식 지음 / 하움출판사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건축을 잘 모르지만, 멋있는 건물 소박한 건물 특색있는 건물 보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그림을 잘 모르지만, 공간을 그리고 건축물을 세우고 그 안에 사람과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을 존경스러이 생각하고

그것들을 직접 해낸 사람이 풀어주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깔끔한 흰색 표지에 단순한 선 몇개로 공간 과 사람과 이야기를 표현한 작고 짧은 이 책에

어쩌면 예전 TV방송에서 집을 고쳐주는 건축가의 센스와 최근 급부상한 유현준의 건축에세이 같은 의미깊은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은 과욕이었을까


어려서부터 만들고 그리기를 좋아했던 저자가 세 가지 주제에 관한 결과물(초상화, 이야기 그림, 건축 그림)들을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는 공간에 담긴다는 철학하에 묶어 구성한 그림 에세이집이 이 책이라는데, 이 에세이집을 통해 대중과의 거리가 가장 먼 건축이, 건축보다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그림의 힘을 빌려 사람들과 아주 조금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욕심을 부려본 것이 이 책이라는데, 과욕이었다고 본다.


차례를 보면 다 영어인데, 읽어보면 별것 아닌 단어들인데 굳이 영어로 멋을 내야 했을까?

초상화가 자주 나오는데 누구의 초상화인가? 초상화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공간에 대한 그림들은 구상단계의 스케치부터 완성단계의 그림들도 스케치와 크게 다를바 없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건축가들은 원래 이렇게 대충 쓱쓱 그려놔도 알아보는 건가? 나만 못알아보는건가;;;;;

차라리 음악이나 개인적 감상을 담은 그림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 바라던 그림들은 이야기들은 건축에 대한 것들이었다.


따지고보면 제목에 굉장히 충실한 책인 셈이다.

한 건축가가 사람, 이야기, 공간에 대해 낙서한 것들을 모아 엮은 낙서장이지 작품집은 아니었으므로.

간단한 그림과 짧은 개인적 감상들 을 담은 에세이 로 인식하고 읽었다면 괜찮았을까?


건축가가 쓴 공간 에세이 로 기대하고,

서점에 흔한 아름다운 사진과 해상도 높은 이미지가 들어간 깔끔하고 정형화된 책이 아니라 저자의 평소 생각을 담아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출판사 서평에 기대했기에,

읽고 나니

건축가가 아니어도 쓰고 그릴만한 에세이였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혹평하는 것일까?


세상에는 다양한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책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 책이 어떤 내용이 되었건, 과한 기대를 품었다면 그것은 결국 내문제이지 책의 문제는 아닐것이다.

더구나 이 책은 솔직하게 제목에 낙.서.장. 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었으므로.

낙서장에서 공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은유를 기대했던 내가 잘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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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필리프 J. 뒤부아 외 지음, 맹슬기 옮김 / 다른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하얀 표지에 새가 날아간다. 모양새가 왠지 철새인 것 같다. 깨끗하고 작은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철학책이다.

두명의 공동저자는 조류학자이자 작가, 작가이자 기자로 둘다 환경보호 관련 글을 써온 분들인듯 하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새들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들은 인간의 생활을 반추하는 철학이 되어 책속에 담겼다.​ 


육지동물과 다르게 하늘을 나는 새라는 동물은 인간에게 이룰 수 없는 것을 향한 존재적 의미를 늘 지녀왔다.

날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되었으나, 하늘을 정복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새들은 여전히 신비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날아가는 새를 보며 드는 생각들은 몽상적이고 추상적인 그래서 철학적인 생각들이 되곤 하는 것 같다.


청소년시절 읽었던 '갈매의 꿈'이라는 책을 참 좋아했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끌렸던 것 같다.

하늘을 나는 것을 통해 더 높이 날아오르는 꿈을 이루는 갈매기를 통해 새의 의미는 내게 이미 철학적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새들의 생태를 보며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글들은 글의 제목만으로도 그 의미가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존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시간 - 오리의 털갈이

누구도 혼자 희생하지 않는 - 멧비둘기 부부의 완벽한 연대

삶이 무감각한 회색빛일 때 - 굴뚝새의 놀라운 하루

잃어버린 직관을 찾아서 - 큰되부리도요와 뻐꾸기의 신비한 여행

가족이라는 복잡한 울타리 - 거위의 정신적 젖떼기

고양이에게 도전장을 - 진정한 싸움꾼, 유럽울새

의심과 의문을 모르는 - 멧비둘기 연인의 다정한 사랑

지금 이 순간의 강렬한 행복 - 암탉의 모래 목욕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예술가 - 극락조의 춤

자유로워질까, 길들여질까 - 새장으로 돌아온 카나리아

너무 영리한 진화 - 바위종다리 부부의 유별난 바람기

호기심이 살렸다 - 유럽울새의 대담함

다시, 푸른 바다의 부름 속으로 - 영원한 여행가, 극제비갈매기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 독수리의 불안한 식사

그저 행복을 경험할 뿐 - 절제를 모르는 개똥지빠귀

겸손이 없는 지성이란 - 까마기의 놀라운 지적 능력

선악의 저 편에 선 - 뻐꾸기의 번식과 도둑갈매기의 비상

두려움이 우리를 흔들 때 - 그림자에게 놀란 방울새

어쩌면 별로 진화하지 못한 - 칼레 방울새와 마르세유 방울새의 노랫소리

사랑, 그 최고의 전략 - 펭귄의 이성과 오리의 열정

이 치열한 미의 세계에서 - 아름다움으로 증명한 검은머리방울새의 유능함

죽는 법을, 그리고 사는 법을 배우다 -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제비

제목들에서 이미 뭔가 느낌이 온다. ㅎㅎㅎ

'이미 알려져 있더라도, 인간이 원하는 이미지와 맞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는 모습도 있다; 는 문장에서 자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인데 인간이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알아왔구나 싶어서 씁슬했다. 변화하는 자연, 밤하늘의 별, 사방에 펼쳐진 풍경을 읽을 줄 알던 인간의 능력이 거의 퇴화되었음을 철새를 보며 새삼 느끼게 되는 것 또한 씁쓸했다.

'가족이란 개념은 보통 복잡한 체제를 이루고 있는 고등 동물, 특히 젖을 먹여 새끼를 기르는 포유동물과 조류, 즉 새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는 문장에서 새삼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어류도 파충류도 알만 낳아놓고 가버리면 부화하는 데로 새끼들이 알아서 사는 데, 조류는 알을 낳지만 포유류 처럼 육아를 한다. 새와 인간의 공통점이 있었다니~! 그런데 가장 큰 차이점이 더욱 와닿았다. '어떤 동물도 늙었을 때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는 다는 사실' 포유류도 조류도 새끼가 자라면 야멸차다 싶게 독립을 시킨다. 다시 보지 않을 완전한 독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인간은...

유럽문화는 곳곳에 로마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는데, 수탉이 프랑스의 상징이 된데 로마인들이 한몫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수탉을 뜼하는 라틴어 갈루스 와 골족을 뜻하는 갈리아 , 이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말장난을 했다. 사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골족을 놀려 먹었다.' 로마인이 놀려먹던 동물이 골족의 나라 프랑스의 상징이 되다니 역사의 이면엔 참 우스운 일화들이 많은 것 같다.

티티새의 일화는 사랑에 대한 것이었는데, '티티새는 마음에 드는 새를 향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온종일 고민하지 않는다. 호감을 표시해서 상대 마음에 들면 드는 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 새들에게 노래는 그리고 사랑은 치밀하게 짜야 할 전략도 고민거리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솔직함과 자연스러움, 단순함이 필요하다. 사랑에 대해서도

모래목욕을 하는 암탉 일화에서 카르페디엠 이라는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이 철학적 문장은 현재 에 존재하라는 권유이자, 불교에서의 지금여기 에 있으라는 격려이며, 심리학에서 조언하는 그날그날을 살아라 라는 의미다. 이는 과거의 추억에 젖어 있지 않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희망과도 멀어지는 일이다' 라는 구절이 참 좋았다. 현재는 오늘은 그래서 선물 present 인 것인지도... '새는 그렇게 살아 있다. 성실하게, 다급하게, 무언가를 찾고, 파헤치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하지만 그러고 나면 몇 시간이고 나무 아래에서 가만히 쉴줄도 안다. 그저 매 순간에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카르페디엠'

동물의 세계에는 먹이사슬, 먹이피라미드가 존재한다. 독수리는 새들의 왕이라고 불리지만 육식동물이 나타나는 순간 먹이를 지킬 수 없다. '계급은 하나의 게임일 뿐이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에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 시간은 꼭대기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다' 동물도 인간도 계급의 저 꼭대기 에 오르려고 긴 시간을 들이지만, 그 꼭대기 날카로운 자리에서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는 것을 오르고 있는 동안은 모르는 것이 매한가지 인가 보다.

'우리가 아는 진실은 하나다. 새는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새는 그저 행복을 경험할 뿐이다. 걱정하지 않을 줄 아는 것, 여기서 행복은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새들에겐 보험도 걱정인형도 필요없다. 인간에겐 수많은 보험과 매시간 걱정인형이 필요한것 같다. 하지만 지금여기 에 집중하면, 과거에 묻고 미래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 현재를 느끼고 현재를 살면, 인간도 조금은 더 행복해지는 것일까?


'새의 뇌에는 그 어떤 포유동물보다 뇌 활동을 담당하는 시냅스가 두 배나 더 많다. 이 사실은 뇌의 크기가 지적 능력에 관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 동물의 지적 능력을 정의 내리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기준을 사용하곤 했다. 이 기준은 동물의 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를 읽고 보니 정말 그랬다. 동물을 인간의 기준으로 테스트 하면 결국 얼마나 인간과 닮았느냐를 확인할 뿐 그것이 그 동물의 지능을 확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동물과 인간에겐 필요한 지능이 다른데도? 새대가리 라는 속어에는 새는 멍청하다는 편견이 있는건데, 알고보니 새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시냅스가 더 많다지 않은가! 인간의 뇌가 아무리 커도 그 뇌를 다 활용하지 못한다는데, 조그만 뇌를 가졌어도 더 많이 활용한다면 과연 어느쪽 지능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뻐꾸기와 도둑갈매기 일화를 보며 선과 악이 불변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수긍이 갔다. '선악이란 결국 언제나 변화하는 환경과 맥락의 영향을 받는 집단 또는 개인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도'


'조금이라도 다르게 노래를 부르는, 외지에서 온 새를 쫒아내는 방울새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도 '낯선' 억양을 들으면 울리는 빨간불이 있다 / 그러고 보면 결국 인간도 방울새보다 크게 진화한 것 같지는 않다' 같은 위트있는 문장들도 맘에 든다.


제비의 죽음 일화에서 '자연은 고통이 오래가도록 두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최후의 순간은 언제나 짧다.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쇠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들의 세계에서, 삶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이다. /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저 사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될 일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은 여운이 길었다. '새를,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사랑하기로 한 바로 그 순간부터야말로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고 사랑할 수 있다' 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 또한 그랬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연을 무시하고 살때 멸종은 내일이 될 것이며, 자연에서 배우는 자세를 유지할 때 인간의 삶도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철학책이라고는 하나 학문적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흔하다고 볼 수도 있는 생각들을, 그렇게 잊고 살던 것들을 새삼 깨우치게 해주는 책이라서 가볍게 읽기 좋았다. 순서 상관없이 어디든 펼쳐 읽어도 상관없는 책이었고, 가끔 조금씩 읽기에도 좋을 책이었다. 읽고 나면 하늘 한번 바라보고 새도 조금 눈여겨 보며 그 시간을 오롯이 나를 쉬게 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바쁜 일상에 쉼표 한번 찍고 가기에 좋을 책이었다. 부담없이 읽히면서도 잔잔한 여운이 있는 책이었다. 내용이 착하고 예쁜 책이랄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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