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이 뒤바꾼 자폐의 삶
존 엘더 로비슨 지음, 이현정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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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스릴러처럼 다음 장면을 갈구하게 만드는 놀랍고도 용감한 감동적인 이야기

자폐의 삶을 뒤바꾼 최신 뇌 치료법 회고록​ 

어느 날 마음 스위치가 켜졌다!>>


자폐의 삶을 뇌과학이 뒤바꾸어 놓았다는 문구에 호기심이 생겨서 읽게된 책이었다.

자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대부분 심한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자폐인이 책을 썼고, 강연을 하러 다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다는 것이 가능한건가 싶어서 저자의 책이 궁금했다.

일단, 저자가 말하는 자폐와 내가 생각하는 자폐가 달랐다.

저자는 자폐의 한 분류인 아스퍼거증후군을 진단받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할 정도의 장애는 아니었다.

저자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중퇴했지만, 뛰어난 음향 전문가로 성공했고 취미로 포토그래퍼일도 하면서, 자동차 수리 전문소를 세워 사업을 크게 일으킨 사람이었다. 가정도 있고 아들도 있고 친구도 있었다. 마흔이 되서야 자신이 아스퍼거증후군이라는 것을 진단받고 자신의 삶을 반추한 내용들을 통해 자신과 같은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활발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활동들은 '자폐' 라는 단어를 떠올렸을때 가능한 활동들이 아니었다.


​저자는 책에서 계속 '자폐'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외국과 국내 인식이 달라서인지 모르겠으나 국내 독자가 읽을 땐 용어를 구분해서 생각하며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폐의 70% 이상이 지적장애를 동반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폐도 있다고 한다. 자폐와 아스퍼거 증후군은 같은 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병명을 가진 장애라고 한다.

지적장애를 동반하지 않은 자폐와 아스퍼거증후군 과도 다를 것이다.

저자는 자폐라고 계속 표현하지만, 자폐 라기 보다는 아스퍼거 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자폐 라는 장애에 대한 이미지는 영화를 통해 좀더 쉽계 이해되는 것 같다.

예전에 "말아톤'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

이 영화속에 나오는 초원이는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아였다. 자라지 않는 아이어른. 그때까지만 해도 자폐아에 대한 인식은 이랬다. 자라지 않는 아이.

최근 '증인'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거기 나오는 여고생 자폐아는 지적장애가 없는 자폐아 였다. 감정표현이 안되고 엄마의 얼굴사진을 통해 다양한 감정표현을 외우는 소녀. 소리에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상행동을 하지만, 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고 퍼즐풀기를 좋아하고 변호사를 꿈꾸는 여고생. 자폐아에 대한 인식은 영화에서처럼 변화가 있는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폐 도 아스퍼거 도 잘 모른다. 나또한 그렇다.


​이 두영화의 사이에 '아스퍼거' 라는 단어를 대중에 퍼트린 살인사건이 있었다. 두 여고생이 놀이터에서 초등학생을 꾀어 살해한 후 감옥에 갇히자 자신을 아스퍼거라고 주장하려 했던... 아스퍼거 라는 단어는 학계에서도 발견된지 얼마 안됐고, 국내엔 2005년에야 들어온 단어라고 한다. 아스퍼거는 지적능력엔 문제가 없으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으로 싸이코패스와는 또다른 심리장애라는 것에서 논란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도 정확한 진단이나 장애인 등록에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을 것으로 안다.


저자는 아스퍼거증후군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보면 로봇이 말하는 것 같다고 하는 것에 상처를 받지만 상처를 받은 것이 티가 나지 않고, 상대방의 기분도 읽을 수 없는, 공감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강연장에 뇌과학자가 찾아오고 TMS 라는 뇌파자극 실험에 대한 제안을 받는다. 그 실험에 참여하면서 느낀 자신의 변화를 기록한 책이 이 책이다. 자서전처럼 체험수기처럼 읽히는 논픽션이랄까.


아직 연구중이라서 치료법 개발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저자는 그 실험이후 자신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공감하고 눈치챌수 있었던 순간의 경험은 저자가 늘 상상해오던 꿈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공감능력에는 우울증을 비롯한 슬픔, 고통 같은 안좋은 감정들도 처음으로 느끼게 됐고 그래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꼈던 시간의 경험이 저자는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연구가 치료법으로 어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계속 표현하고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고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무뚝뚝한 사람들은 의외로 참 많다. 장애라고 굳이 생각지 않고 그저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마련이다. 자폐라는 단어도 낯설고 아스퍼거라는 단어도 생소하지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일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AI와 비교하여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찾으려하는 이 시대에 공감능력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격과 장애의 구분은 여전히 좀 어려운 것 같다. 저자처럼 본인 스스로가 공감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심하게 느끼면 장애라고 해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고, 저자가 자폐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고 보지만, 공감능력이 없던 사람이 공감능력을 경험한 것에 대한 체험기 정도로 읽으면 새로운 관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장애인들이 가정에 숨어살지 않고 사회에 나와서 함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하듯, 장애 에 대한 표현들이 점점 더 세상에 나오는 과정중에 이러한 책도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어려움을 극복한 이들의 경험은 늘 박수받아 마땅하다. 저자의 성공적인 경험은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자폐' 극복은 아니었다. '자폐' 치료도 아니었다. 자폐 와 아스퍼거의 의미도 잘 인식되어 있지 않은 국내에서 읽히기엔 단어의 혼용에 아쉬움이 남는다.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닌가 봅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늘 불행하기만 한 것도 행복한때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자폐든 아스퍼거든 여튼 감정적 장애도 장애일진데, 장애를 가진 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다른 이를 돕기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행복도 불행도 다 거기서거기 이고 제각각인 사람들의 삶도 다 거기서거기 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의미있게 열심히 사느냐 그것이 제일 중요하달까.

저자가 자신의 삶을 switched on 시켰듯, 우리는 우리 삶에서 어떤 스위치를 켜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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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라파엘 몬테스 지음, 최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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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에서 진행한 가제본 증정이벤트에 당첨되어 출간되기 전에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비오는 장마기간에 배송되어 책이 젖은체 도착해서 마음아팠지만, 읽고 나서 보니 젖은뒤 마른 얼룩이 왠지 어울려 보인다.

하얗고 깨끗한 표지에서 퍼펙트 데이즈 라는 제목이 깔끔하게 한눈에 들어왔었는데, 얼룩져 내려온 ​무늬아닌무늬가, 퍼펙트했던 표지를 변형시킨 그 무늬아닌무늬가 어울린다. 이 소설과.


가제본이다 보니 홍보문구도 저자에 대한 설명도 없다.

작가 후기를 읽어보니 젊은 신예 작가인것 같고, 전작도 스릴러 소설이었던 듯 하다.

온전히 소설 자체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 가제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이 작품은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스릴러다.

왜냐하면 사랑의 주체가 싸이코패스다. 싸이코패스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사실 싸이코패스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싸이코패스인 거다.

그런데 싸이코패스의 사랑이야기라니! 반전으로 시작해 반전에 반전을 하다가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소설이었다.


<<그는 대화와 음악, 모든 것이 완벽한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테우는 자신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테우의 가장 친한 친구는 시체다.

그런데 그 사실을 테우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조차도.

그러던 어느날, 파티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클라리시!

그녀의 사소한 행동이 테우의 모든 감각을  사로 잡았다.

테우는 완벽한 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테우는 알고 있다.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 완벽을 추구하게 되고, 퍼펙트한 날들을 쌓아가기로 결심한다. 퍼펙트 데이즈를.


<<테우는 그녀를 공주 모시듯 할 마음이 없었다. 여자들은 가사 노동을 할 때가 가장 여자다우니까.>>


테우는 왜곡된 생각 투성이이지만, 클라리시를 공주모시듯 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성이 제어하는 한 그녀를 왕비 모시듯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몹시 뿌듯해 한다. 그래서 더욱 인정받기를 원하게 된다. 하지만 클라리시는 납치된 상태다.


<<어릴 적부터 그는 늘 위화감을 느끼며 살았다. 실없이 웃기나 하고 지적 야망이나 고상한 사고가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게 무척 불편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한껏 들뜨고, 생일에 옛 친구들을 초대하고, 8개월 아기가 마침내 아빠!라고 부를 줄 알게 됐다는 걸 이웃에게 자랑하는 사람들, 그런 삶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에 테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연속극에서 그려지는 정상 상태의 개념에 혐오감을 느꼈다. '정상 상태' 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실은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자기 확신에 찬 채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클라리시가 나타난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의 벽을 허물고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그를 붙잡아준 것이었다. 테우는 여전히 인류를 낮춰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등한 그들에게 초탈한 연민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사랑' 덕분이었다.>>


테우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완벽한 자신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클라리시를 만난 순간 그의 안에 잠들어있던 본성이 밖으로 표출되게 된다. '사랑' 은 그를 변화시켰다. 정상적으로 보이던 사람에서 싸이코패스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척 연기하고 싶은 욕구, 그에게는 재밌는 놀이였다.>>


테우는 스물두 살의 의대생이다. 그는 진심으로 사람에게 사람과의 관계속에 자신을 몰입시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척 하는 연기의 달인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클라리시에게는 그런척 하는 연기따위 집어던져 버리게 됐다. 그녀가 쓰고 있던 시나리오 '퍼펙트 데이즈' 라는 시나리오 까지도 자신의 의도데로 만들어가며 클라리시의 모든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든다. 그녀의 정신상태까지도.


<<그는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 뿐이지만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법규와 규칙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테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테우는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뿐인 그를 이해하지 못할 세상을 걱정한다.

완벽한 날들 속에는 완벽한 범죄가 숨겨져 있었고, 완벽한 범죄는 완벽한 사랑 때문이었다.

싸이코패스 테우가 클라리스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납치해서 여행가방안에 넣은체 여행을 하고, 그녀와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그냥 그렇게 돌아오고 나서 끝났다면 이미 읽어봤음직한 싸이코패스 스릴러 소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테우가 강력한 뒷통수를 맞으며 끝을 맺는다. 싸이코패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결말.

그 마무리가 싸이코패스의 새로운 등장일지, 범죄를 저지른 싸이코패스에 대한 복수가 될지 뒷얘기를 독자 스스로 상상하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나라 브라질을 배경으로, 싸이코패스의 독특한 사랑이야기는 소재도 내용도 결말도 색달랐다.

싸이코패스 가 지냈을 법한 완벽한 날들, 퍼펙트 데이즈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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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블루스
마이클 푸어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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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쳤으면 어때, 또 다음 생이 있는걸!

9,995번 환생한 남자의 '완벽한 인생을 사는 법'

"1만 번의 기회가 있다면 더 완벽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영혼을 지닌 남자와 그의 죽음을 따라다니는 여자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환생 모험>>

기묘한 소설이었다.

제목만 봤을때는 환생하고 또 환생하는 다양한 삶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번 생이 끝나도 다음 생이 이어지는데 그 생은 전혀 다른 생으로, 생에서 생이 순차적으로 서술되지 않을까 싶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블르톤을 좋아한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환생' 이란 단어에 눈에 들어왔는데, 다 읽고 나니 '블루스' 라는 단어가 눈에 남는다. 블루스가 뭐지? 검색해봤다.

블루스는 미국흑인노예들의 노동요에서 발생된 음악의 한 종류였고, 따라서 음울한 분위기와 반복적 리듬이 특징적인,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음악장르였다.

작가가 표현한 환생의 삶들과 블루스는 딱 맞아떨어진다.


남자 주인공 마일로는 알고 있다.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늙은 영혼이라는 것을.

<<죽음은 하나의 문이었다. 우린 그저 그것을 통과하고, 또 통과해갈 뿐이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마일로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책속에는 '보아' 라는 개념이 나온다. 고대의 영혼, 전생의 자아, 우주, 대령, 오버소울 등과 혼용해 쓰이는 표현이다. 뒤로 갈수록 오버소울이 주로 사용된다. 우주적인 영혼이랄까.. 균형의 감각 이랄까... 우주 자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이 '보아' 라는 개념에 저항하는 존재가 딱 둘 있는데, 마일로 와 수지 이다.


<<당연히 최고의 죽음은 즉사였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마일로는 오직 단 한 번 즉사했다.

누가 뭐라든 간에 인간은 흙에서 태어난 게 아니다. 인간은 물에서 태어났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강처럼 죽으면 다시 물로 돌아간다. 마일로는 이미 1만번 가까이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물가에서 깨어났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죽음은 기존의 상식들과 좀 다르다.

수천번을 죽었는데 즉사 가 한번뿐이었고, 즉사가 최고의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은 늘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소설속에서 삶과 죽음은 늘 강과 함께 한다. 강에는 늘 새로운 생의 모습들이 들어 있다. 묘한 윤회관이다.

여하튼, 마일로는 항상 죽고 항상 환생하는데 그때마다 항상 함께 하는 여인이 수지 이고, 수지의 본래 이름은 '죽음' 이다.


<<사람들은 죽고 나면 조용히 사색하는 시간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전생에 얼마나 의미 있는, 혹은 의미 없는 삶을 살았는지 숙고해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후 세계에서 배당해주는 집에는 살아생전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전생과 사후세계가 연결되는, 작가가 묘사하는 사후세계는 서양적이지 않다. 사실 윤회라는 것도 동양적인 개념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부처도 등장한다.


사후세계에 도착하면 항상 두 여성이 마일로를 찾아온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린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거의 모든 것이란다" "우릴 우주의 조각쯤 된다고 생각하렴" >>그리고 두 여성은 마일로에게 다음 생은 좀 더 완벽하게 살아보라고 재촉한다.<< "우리는 네가 불의 조각이 되는 걸 돕기 위해 여기 있는 거야" "우리는 네가 환상을 통과해서 실제 우주로 들어갈 수 있게끔 도우려고 이곳에 온 거야"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모든 인생이 네게 뭔가를 가르쳐줄 거야. 그 가르침을 통해 너는 배우고 성장해서 결국은 완벽해져야만 해. 그러기 위해 너는 수천 번의 삶을 살아야 할테고"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야" "네가 다음번에는 어떤 삶을 시도할지 결정할 수 있게끔 돕는 거">>


<<​"한 영혼은 1만 번의 인생을 살 수 있어. 1만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거지. 그 이후에는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

"그러니까 네 경우에는... 상황을 바로잡을 오직 다섯 번의 삶이 남아 있다는 거지. 그 기회 동안 네가 완벽함을 성취한다면, 넌 황금빛 섬광 속에 있는 태양의 문을 지나쳐가서 위대한 실재의 일부가 되는 거야"

"오버소울 말이야" "모든 것이 되는 거지">>


마일로가 환생했다가 죽어서 사후세계로 돌아올 때마다 이 거대한 두 여성은 마일로에게 좀 더 잘 살았어야지 하고 질책한다. 그리고 마일로와 수지의 사이를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영혼은 우주-영혼과 사귀고 그러지 않아. 얘는 인간이야. 그리고 넌 죽음이라고, 세상에 맙소사.">>

그렇다. 수지의 원래 이름이 죽음이라는 것은 수지가 하는 일이 인간의 죽음을 가져오는 일, 그러니까 사신이나 저승사자 같은 뭐 그런 존재라는 거다. 그런데 마일로와 수지는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것도 무려 8천년 동안.


마일로가 환생해서 변변찮게 죽어 사후세계로 돌아올때마 마일로는 늘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지 혼돈에 빠진다.

<<"대체 누가 완벽한 삶이 이상적이라고 한거야? 내가 나의 불완전한 삶을 좋아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 내말은 그들이 '불완전'이라고 말할 때, 그건 인간의 욕망에 관한 얘기잖아, 안그래?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갈망하고, 근사한 직업이나 차를 갖기를 소망하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거.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 예를 들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거나, 가난이나 위험한 환경 속에 살아간다거나, 당뇨를 앓게 된다거나, 또는 너구리가 우리 집 쓰레기통을 다 뒤져놓는다든가, 그런 걸 불완전하다고 하는 거잖아. 하지만 그게 바로 '살아 있음' 이라고.">>

 

9995번을 환생했던 우주에서 가장 현명한 인간의 영혼이 하는 말은 9995번의 환생을 통해 결국 무엇을 배우게 될지 암시한다.

9995번 보다 더 많은 죽음을 사후세계로 이끌었을 수지는 완벽함을 성취한 영혼의 죽음을 보여주며 마일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건 단지 희생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마일로. 만약에 늑대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기 다리를 물어뜯어서 잘라버린다면, 그것도 희생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건 절박함이기도 해. 그게 완벽함은 아니잖아. 완벽함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

"내게도 사랑이 있어" 마일로가 항변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졌잖아"

"'사랑'과 사랑에 빠지는 게 항상 같은 건 아니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인간적인 거라고. 일종의 화학작용이야. '사랑'은 우주적이지. 나도 역시 당신을 사랑해">>


수지의 조언을 듣고도 마일로는 완벽한 삶을 살지 못했고, 거대한 두여성에게 또 잔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말한다.

<<"네가 완벽한 삶을 사는 순간, 우리도 네게 완벽한 순간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물론 그건 놀랍고, 기가 막히고, 불가능할 테지만, 그래도 거의 모든 사람이 9천 번의 생애 내에 그걸 이루어낸다고, 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수지는 우주의 보아 에게 '죽음' 의 일에 대해 사표를 낸다. 그리고 사라진다.

마일로는 강가로 내려간다. 환생의 삶이 있는 강가로 간다.

<<그는 그것을 일종의 자살로 간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당신이 8천년 동안 한 여자를 사랑했는데, 우주의 보아가 갑자기 당신과 그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갈라놓는다면,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 아니겠는가.

우주의 보아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한쪽 끝에서 원인이 제거되면, 수동적인 균형 유지 과정이 진행되고, 반대편 끝에서 그 결과가 나타난다. >>


마일로가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에서의 삶?(사후세계에서 사는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을 포기하기 위해 지구에서의 이승에서의 삶을 선택하는 역설은 무엇이 정말 삶인지 헤깔리게 한다.


<<그녀는 매일 조금씩 더 투명해졌다. 젠장, 수지는 생각했다. 예상보다 더 빨리, 그녀는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결국에는 우주도 그녀가 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즉, 약간의 불균형은 그리 나쁜 게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마일로가 1만번 가까이 환생했다가 다시 죽어도 여전히 완벽함 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왜 완벽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약간의 불균형은 괜찮을 거라는 수지처럼. 그래서 마일로의 환생블루스는 수지를 위한 사랑의 노래가 된다.

마일로는 기원전으로 환생하기도 하고 현대에 살기도 하고 몇백년후 우주세계에 환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일로가 환생해서 살아가는 삶은 대체로 그닥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마일로는 환생해서도 늘 전생의 영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전생을 기억하기도 한다. 결국 새로운 생이 아닌 이어지는 생은 과연 환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지가 사라지고 사후세계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마일로가 깨닫게 된 것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처의 제자로 환생한다.


<<"난 전적으로 완벽해지는 걸 바라지는 않아요. 그렇게 되면 삶의 주기를 떠나게 되는 거니까요. 나는 오랫동안 완벽함에 저항해왔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에요. 이제 완벽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걸 느낄 수 있어요. 난 우주의 일부가 되지 않으려고 저항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엇보다 더 간절히 그것을 원해요">>


마일로가 부처의 제자가 되었을 때 부처의 나이는 80세 였고, 너무 늙었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죽어가면서 부처는 말한다.

<<"행복을 찾아 지구 끝까지 헤매 다니지 마세요. 완벽함이란 여러분의 지금 현재 모습에 행복해하는 겁니다.">>


마일로는 실은... 부처를 독살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럴만한 상황이라고 믿었다.

그 독을 나눠먹은 마일로가 죽고 나서 깨어난 사후세계에서, 이번에 마일로가 깨어난 곳은 강 옆이 아니었다. 그는 깊은 우물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일종의 감방 같은 곳이었다. 마일로는 화가났다.

<<빌어먹을, 그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삶이 한 번 더 남아 있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 그는 지상에서 살았던 가장 위대한 영혼이야. 넌 그를 죽인 나쁜놈일 뿐이라고."

마일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녀 쪽으로 홱 돌아섰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어!" 그가 소리 질렀다. "나는 스승님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하지만 거대한 그녀들은 마일로에게 모두 망쳐놨다고 으르렁거린다.


<<투명해져가는 수지를 만난 마일로는 마지막 한 번 남은 환생에 대해 생각하고, 결심한다.

"당신도 나와 함께 가는 거애" 그가 말했다.

"아니" 수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가 인간의 삶을... 내가 인간이 된다는 거야?"

"한 번의 삶이야. 제대로 살든 못 살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쨋든 우린 함께하게 될 테니까, 모두 갖든가, 아니면... 다 잃든가, 모 아니면 도 라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앞의 잿빛 물속에는 수천의 가능한 생명이 있었다.

그녀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난 그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 수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신과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신처럼 되는 거겠지." 마일로가 말했다.

"당신은 그게 싫다는 말처럼 들리네"

"난 태어나는 게 싫어. 지긋지긋해"

"다 갖느냐, 다 잃느냐!" 그녀가 말하고는 돌아서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일로도 그녀 바로 뒤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1만번째 환생에서 그들은 만나고 사랑한다. 그 시대는 형편없이 열악한 시대였고, 폭력아래 노에처럼 사는 우주인의 삶이었다. 마일로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조너선 야야'의 우화는 1만번째 마일로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조너선 야야는 관 속에 누워서, 자신이 너무도 형편없는 삶에 안주해 살았던 것에 슬픔을 느꼈어요. 하지 않았던 모든 일 때문에 두려워하며 살았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겁만 집어먹고 살았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이냐고요. 다른 식으로 살았더라도, 어차피 그는 지금 똑같이 자기 무덤에 누워 있을 테니까요.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돌아보고 자랑스러워할 멋진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였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지금 그는 화장실 쓰레기 처리장의 기억을 안고 무덤 속에 누워 있었던 거에요.>>


마일로의 이야기는 노예처럼 살고 있던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그 희생을 가치있게 만들어보자고요. 그래서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는 세상과 태양계를 만들어봐요. 그런 세상에서는, 누군가 폭력을 써서 다른 사람을 강제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그 폭력에 굴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누구도 타인을 억압하려 하지 않게 될 거에요."


폭력아래 굴종적인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마지막 환생에서의 삶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은유 같았다.

여하튼, 마일로와 수지는 함께 죽었다. 그리고 함께 태양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책은 거의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조금은 두꺼운 편에 속하는 소설이다.

마일로가 살아내는 다양한 삶들은 다채롭다. 그런데 다채롭게 폭력적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반복된다. 삶은 선택할 수 있는데 전생의 삶에 의해 조건적이기도 하다. 죽음은 또다른 삶?!을 사는 사후세계와 연결되는데 이또한 전생의 삶에 의해 조건적 환경을 부여받는다. 삶과 죽음의 반복인 윤회는 환생을 통해 나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1만번의 환생 동안 마일로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깨닫는데 그렇게 이 책은 깨달음의 책이 되기도 하고,

1만번의 환생 동안 그가 추구한 완벽함은 결국 사랑 이었는데, 그렇게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 되기도 하다.

환생이 만들어낸 블루스는 그렇게 지금 삶속에 그냥 자연스럽게 반복되고 있는 것을 알려주며 소설은 마무리 된다... 블루스를 많이 들어본적은 없지만, 진한 블루스 한곡 길~게 들은 것 같은 기분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된다...


ps. 소설 속 환생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묘사에서 플라톤이 생각났다. <국가> 의 9권에서 '에르신화' 나 <파이드로스> 라는 대화편에서 '혼' 에 대한 묘사등을 작가가 참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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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품절


<<"웃자고 한 말에 왜그래?" 당하는 사람은 안 웃긴 '갑'들의 말, 말, 말!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의 세상에서 평등을 외치는 당신을 위한 안내서

"나는 차별을 하지 않아" "우리 회사에는 차별이 없어" 정말 그럴까?>>

 

제목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됐다.​

차별 이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선량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묘하게 상쇄시키는.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가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차별을 했다고 인지하는 순간, 모르고 그랬어 라던가 선의로 그랬어 라든가 하는 말로 차별주의자가 아님을 강변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선.량.한.차.별.주.의.자. 가 된다.


차별은 대개 다수가 소수에게 저지르기 쉬운 행동이다.

다수이기 때문에 모르고 한 행동들이 소수입장에서는 차별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소수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러한 소수자들 즉, 여성,외국인,장애인,성소수자 들의 입장을 재고하게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수자 차별론도 결국은 차별은 옳지 않다는 기본 전제 위에 성립한다. 사람들은 적어도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에게 차별을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에 가담한다는 건 도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내가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만큼 오히려 차별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반전은 헉하면서도 왠지 부정할 수가 없다.


<<무언가 베플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호의의자 선의도 차별이 될 수 있다.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는 느낌은 왜일까... 차별의 진의는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지는 느낌이랄까...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요구하는 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하면서 나름의 삶을 헤쳐나가겠다는 의미다.

기존에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의 이익이 곧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가 보기엔 세상이 소수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이 평등해 보인다. 전자의 관점에서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들이 후자의 눈에는 역차별로 보이는 이유다.>>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손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은 생각보다 흔하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수이기에 연대하려고 하고 연대하면 그 자체가 역차별의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평등은 점점 어려워진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저자도 말한다. 차별하지 않기는 사실 불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ㅠㅠ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시야에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이다. 그 성찰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렇다. 평등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게 오는 것이 평등이다.

개그맨이 흑인분장을 하고 웃기는 것도 누군가에겐 차별이고,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인 다 됐네 하는 말도 차별이고, 퀴어문화제를 불편하게 보는 것도 차별이고, 한부모가족, 다문화가족이라는 단어 자체도 차별이다.

능력주의관점에서 노력과 능력으로 올라간 지위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하는 대부분의 말들도 차별이고,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이 커지는 만큼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겨난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았다.


저자가 예로든 화장실 문제는 그야말로 평등에 대한 차별에 대한 생각들을 멘붕에 빠트렸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화장실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화장실이 실제로 이용 가능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화장실이 충분히 가까워야 하고, 진입이 쉬워야 하며, 화장실 안에서 용변과 손세척이 가능하고, 이 과정이 수치감, 불안감이나 위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해야 한다. 이런 조건으로 모든 사람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는 몇가지의 화장실이 필요할까?

오늘날 익숙한 공중 화장실은 남성용과 여성용을 별도로 갖춘 모습이다. 그 다음으로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기에 많은 건물과 시설에서 장애인용 화장실을 남녀공용으로 한개만 설치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녀로 분리된 화장실도 사실상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 젠더 여성의 경우, 여자 화장실에서는 사람들이 남자라고 생각해 무서워하고 거분한다. 반면 남자 화장실에서는 여성스러운 외모때문에 본인이 성폭력의 두려움을 겪는다.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성별의 전형에서 벗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이 안전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그럼 이제 화장실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상충되어 보이는 논쟁들 속에서 모두에게 평등한 화장실을 만드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저자가 말하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선 실질적 평등의 길은, 다양서을 모두 포함하는 보편성을 찾는 길은 너무나 멀어만 보인다.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화장실 문제만 해도 '뭘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 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 되버린다.


<<소수자가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억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가시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실질적 평등을 쟁취하려는 의도이다. 집단의 차이를 강조할 수록 차별이 고착될 것 같기도 한 '차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서로 다른 위체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 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 으로 옮기는 것이다.

법이 우리의 모든 일상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래서 교육, 고용, 서비스와 재화의 이용과 같은 공식적인 부문에서 일어나는 차별이 주로 규제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일상의 미세한 차별적 시선이나 행동은 규제보다는 체계적인 교육으로 바꾸고, 사회 전반을 검토하고 구조적인 차별을 개선할 수 있도록 제도적 골격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그중 하나로 우리가 서로 차별을 '하지' 않게 만들자는 즉각적인 해법이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인간 조직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차별에 대한 논의는 불편하다. 그런데 불편하다는 말조차 할수가 없다.

평등에 대한 논의는 어렵다. 그런데 평등하지 않으면 세상은 살기 힘들어진다.

제대로 잘 살기 위해 차별 과 평등 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성찰하고, 사회적으로는 교육으로 성찰하고, 제도적으로는 법으로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성찰들이 쉬지않고 반복되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차별이 이상하게 여겨지며 차별법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질 것이다.


이 책이 힘들게 읽혀지는 나는 아마도 차별주의자 였나 보다. 좋게 말해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고 해야 하나... 정말 몰랐다. 내 안에 그렇게 많은 차별주의자적 생각이 들어있었는지...

선량해도 차별주의자는 차별주의자다.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차별을 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선량하다고 표현해도 차별주의자가 되기는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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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의 미래 - 왜 중산층의 직업이 사라지는가
엘렌 러펠 쉘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왜 중산층의 직업이 사라지는가

4차 산업혁명과 AI 시대 그리고 심화되는 양극화 - 갈수록 벌어지는 격차에 대비하라

일자리 초격차 시대가 온다 - 경제성장과 소득에 관한 새로운 통찰과 전망

결국 문제는 고용의 질이다! 일자리 정책에서 '낙수효과'라는 해법은 없다!​


일자리 지킬 것인가? 얻을 것인가?

기본소득은 정말로 게으른 국민을 만드는가?

전통적인 제조업은 다시 부흥할 수 없는가?

자유시장에서 노동조합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가?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직업훈련을 시켜야 하는가?


띠지에 있는 질문들에 책을 다 읽은 후 내가 찾은 답들은

NO NO NO NO NO 였다.

일자리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은 유의미하며, 전통적인 제조업은 여전히 가능성이 있고, 노동조합은 새로운 형태로 늘 필요하며,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였다.

AI 시대가 되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로봇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직종의 직업들이 아래에서부터 먼저 사라질것 같지만, 천만에! 지금 안정적으로 보이는 중산층의 직업이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되고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오히려 단순노동직종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AI 시대건 로봇시대건 다가올 근접한 미래는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더 늘어날 것이다. 왜? 자본주의적 생.산.성 때문에. 기계설비투자비용 과 인간의 노동력에 지불하는 비용을 계산했을 때 기계값보다 더 싼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직종은 당분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기계설비값이 싸질때까진. 하지만 기계값보다 비싼 인간의 노동력이 있다면? 기계로 AI로 대체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산층의 직업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선망해마지않는 바로 그 직업들. 대학에서 인기높은 바로 그 직업들.


THE JOB 이라는 제목으로 2018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일자리의 미래' 라는 제목으로 바로 한국어판이 나왔다.

미국사회에서의 JOB 이라는 것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한국사회에서 거의 동일하게 적용시켜도 되겠다 싶을 만큼 유사함이 많았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축소된미국사회라고 할 만큼 경제지도가 굉장히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이 책이 의미가 있었다.


세계 경제의 흐름 속에서 대부분의 일자리에는 특정한 '고향'이 없다. 기업들은 어떤 곳이건 터전을 잡을 수 있으며, 원가 계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일자리를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국가인데도 억지로 그 일자리가 그곳에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은 먹혀들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이익이 최우선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산업화 시대가 돼서야 비로소 '일자리(job)' 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면서 '일(work)' 까지 포함하게 됐고, '일' 이라는 단어는 '일자리' 의 부분집합으로 전락했다. ... 아무리 '좋은 일자리' 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좋은 일' 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일자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디지털 시대에 그 한계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책은 ​'좋은 일' 이 가져다주는 인간적 '존업성' 과 인류에 관한 '더 깊은 이해'라는, 오로지 '좋은 일' 만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일' 과 '일자리' 의 구분은 영어단어로의 구분을 보고서야 아~! 싶었다. 우리는 일자리 에 급급해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일' 그 자체에 더 집중해야 할 시대가 올 것이다. 이 생각의 전환은 이 책의 핵심이자 미래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우리 모두가 직업적인 경력에 대해 개인적으로 철저히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비참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만약 공공정책까지 이런 헛된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 정책은 역효과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매우 위험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다양한 곳을 다니며 취재를 했다. 그리고 책의 초반부터 일자리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반론을 준비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일자리에 지원했다가 퇴짜를 맞으면 사회 시스템을 탓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미국에서는 지원자들이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었다. 구직자의 태도에 나타나는 이런 차이점은 상당히 상이한 고용정책을 펴는 두 나라의 고용전략에 기인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직장에 지원한 사람들의 기술과 성과에 초점을 맞춘 매우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 우선 한 번 걸러지게 된다. '스펙게임'이라고 부르는 과정을 통해 지원자들은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능력을 시험받기도 하는데, 이때 나이와 같이 업무와는 굳이 연관성이 없는 요인 때문에 탈락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지원자들은 분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자부심까지 갉아먹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공정하기도 한 시스템의 잘못이며, 이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케미스트리게임'이라고 이름붙인 시스템과 싸워야 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그 일자리 자체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그 조직에 대해서도 몰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일자리를 원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거나 그 일자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플레이어라고 묘사해야 하며, 동시에 그 회사가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의욕을 과시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케미스트리 게임'을 하는 동안 대다수의 지원자들은 자긍심이 위축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어떤 종류의 잘못이 발생되면 그들은 회사나 사회시스템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뭔가 익숙한 내용같지 않은가? 한국사회에는 어떨까?


현대 인류는 자신의 무제한적인 욕구와 충분하지 않은 충족수단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 노예화한 조건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비극이다.


알아서 야근하고 초과근무하고 워커홀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매우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왜곡된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자리에 좋은 것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은 것' 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라고 저자는 단호히 이야기한다.


다수의 고용주들이 요즘 '좋은 직원들'을 구하기 어렵다는 불평을 하곤 하는데, 좋은 노동자들이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좋은 노동자들이 보수가 형편없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자신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경제원리가 보여주는 바는 노동력 공급 부족이 아니라 과다 공급이 고용주로 하여금 기준 이하의 고용 조건을 제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건만 개선된다면 지원이 폭주하기 깨문에 '노동력 부족'이라는 투덜거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좋은 일자리' 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좋은 구직자' 가 넘쳐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일자리' 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한 '좋은 구직자'들은 점점 더 형편없는 처우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다시말하면 노동자들의 스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고용주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가장 기본적인 스킬만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에 오려는 노동자들을 충분히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력 부족이라는 입장과 취업할 곳이 없다는 입장에 대해 언제까지 대치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안달하기 전에 '좋은일자리'에 대해 제대로 심사숙고해봐야 할 때가 된게 아닐까?


최근까지도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동화가 인간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영구히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그동안 인간은 보다 일을 잘할 수 있는 기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대체돼왔긴 하지만 '비교우위'라는 경제 원리에 따라 인간은 기계가 열위에 있는 분야로 옮겨가면서 계속 우위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면 기계는 인간을 대체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다 덜 위험하고 도전적인 일,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이리에 집중하도록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줬던 것이라고 믿어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임금이 낮으면서 반복적으로 단순한 작업을 하는 일자리들만이 자동화에 취약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믿음은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예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들은 버거를 만들 때 자동으로 패티를 뒤집는 기계들을 이미 오래 전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도 도입을 별로 서두르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패티를 뒤집는 일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이며, 강력한 노조가 뒷받침해주지 않는 이상 이런 일에서 고임금을 받아야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비용을 감수하고 기계를 들여놓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심장수술을 한다든지, 변호사로서 이혼소송을 담당한다든지, 금융전문가로서 재정적인 충고를 한다든지, 건축을 설계한다든지,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이나 다른 복잡한 일을 하며 높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의 경우 그들의 높은 임금을 상쇄시킬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비용은 금세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걷고 뛰며 자유롭게 움직이며 초코칩머핀과 강아지를 단번에 구분하지만 수학문제에 머리를 싸맨다. 로봇은 아직 계단을 자유롭게 오르내리지 못하고 AI 는 초코칩머핀과 강아지얼굴을 구분하기 위해 수백만 데이터를 학습해야 하지만 고정된 상태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수억단위 계산문제를 푸는데 1초도 안걸린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 같은가? AI 가 인간의 노동을 줄여줄 것 같은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좋은 일자리' 에 적합한 존재가 인간일까 아닐까? 앞으로 인간에게 적합하면서도 좋은 일자리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타트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많아진다는 논리는 또 어떤가? 스타트업 기업은 작은 규모이고 창업자가 곧 직원으로 시작하며 다른 직족에 있다가 합류하는 직원이 있거나, 창업자가 직원인 그 상태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단 하나의 일자리 창출이 과연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순 일자리'의 개념이다. 이는 만들어진 일자리 숫자에서 없어진 일자리 숫자를 뺀 수치이다. 이런 계산법이 적용된다고 하면 실질적으로 스타트업 기업이 지속적인 일자리를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할 것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고개 끄덕여진다. 게다가 스타트업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는 통상적으로 기존 회사들이 제공하는 일자리보다 생산성도 낮고 보수도 낮으며 훨씬 안정적이지 못하다. 스타트업은 상황의 변화일뿐 일자리해결방법은 아닌걸로 보인다.


우리는 중앙집권적인 기능이 훨씬 덜한 일터에서 일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도전에 당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독립적인 상인이나 농부, 장인들이 활동하던 시대로 다시 되돌아간 셈이다. 우리가 하는 일의 정체성이 어떤 특정한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에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경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역사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도 반복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업과 개별수공업 형태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대규모 형태로 바뀌었던 경제가 다시 소규모 개별형태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했던 기념비적인 연설에서 "안주하지 말라" 고 했다. 좋은 말이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에게 이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가 아닌 우리에게는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만약 여러분이 엄청난 열정으로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에 따른 월급봉투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엇의 전조가 될까? 물론 나는 스티브 잡스가 불량한 의도로 되지 않는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분명히 진심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바이블처럼 되는데 있다. 이 경구는 매우 무책임한 말이다. 이 조언은 마치 우리가 기존의 관습적인 것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동시에 그 관습적인 측면에서도 얼마든지 열정만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언은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열정이 미래의 부와 성공을 약속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라는 매우 잘못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열정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속이 좀 시원했다고나 할까?! 몇년전 개봉했던 영화제목이 떠오른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앞에서도 계속 말했고 앞으로도 계속 말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더 희귀해진다. 그런데 일자리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일자리가 의미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해서는 여러 이유로 힘들고 고달프다. 그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일이든 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일을 하고 그 일자리에 몸담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면 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된다. 이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다. 그리고 이 단계는 사회적, 국가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지금 당면한 명확한 도전 과제는 새롭고 좋은 21세기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울러 20세기 계산법에 기초해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확실히 점검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또다시 답습하지 않고, 일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정서적,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당연히 쉬운 과제는 아니지만 기운을 북돋아주는 시도가 될 것이다. 내 눈에는 이 과제를 시작할 지점이 분명하게 보인다. 다름아닌 '학교'다.


대학은 갈수록 점점 더 직업훈련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유용한 방향일까?


고등교육의 시장 가치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가장 희소한 상황에서 가장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1위인 한국을 제외하고 전세계 어떤 나라의 시민들보다도 많은 숫자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으며, 이런 특권을 위해서 지불하고 있는 비용도 대단히 높다.


희소성이 일반화가 되면 다시 새로운 희소성을 찾아가는 것은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이것을 반복한다면 끝을 모르는 삶의 피폐함으로 더 다가가지는 것일 뿐이다. 근본적인것을 바꿔야 한다.


평균소득을 왜곡시키는 빌 게이츠 효과 라는게 있다고 한다. 빌 게이츠 효과란 평균을 결정할 때 이상값이 포함돼 계산에 작용함으로써 결과를 왜곡시키는 효과를 의미한다. 즉, 엄청난 부자가 포함된 집단의 높은평균소득을 보고 그 집단이 모두 고소득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한 엘리트들이 평균을 크게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들은 일반인들의 재산이나 소득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향상시켜주지도 않는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실업인구 가운데 50퍼센트 이상이 대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교육 프리미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학 졸업자들의 평균 평생소득은 최근들어 고등학교 졸업자의 소득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 는 책속의 인용구는 미국보다 더 심각한 한국의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만 같다. 소득불균형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요인들 중 '교육적인 요인' 은 우리가 집중해야 할 올바른 요인이 아니다. 더이상은


특정 산업에서 어떤 수준의 보수를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공급이 일시적으로 부족한 현상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공적인 자원을 특정 직업군에 대한 '적시' 훈련에 모두 집어넣는 것은 아무리 잘 봐줘도 도박 이상의 것은 아니다. 어떤 대학도 일자리 시장의  수요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해 '적시교육'을 제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학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


미래란 원래 단어를 정의할 때 의미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며,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수정 구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유교양 교육이 곧 해방 교육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졸업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지식들이 그들이 어떤 것들을 추구하든 간에 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자가 만난 어느 대학 총장의 말은 곧 저자가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앞 쪽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른다.

사실 미국은 전반적으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기 위해 도박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무척 선호하는 편이다. 유럽은 학생들에게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치지만, 미국의 학생들은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일론머스크와 같은 기업가들을 떠받들도록 교육받는다. 산업계에서 영웅은 일반적으로 '혁신가'를 의미한다. 그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개인적 측면에서든 사회적 측면에서든 무엇을 준비해줄 수 있는지 상환없이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어떤 혁신' 인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혁신을 하고 있는가?


저자는 '일' 과 '일자리' 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사례들을 풀어놓고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다. 앞에서부터 내내 다양한 문제점들을 조금은 지루하다싶게 분석해놓다가( 솔직히 가독성은 좀 떨어지는 책이었다. 자꾸 문제점만 지적하다 보니 읽으면서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그래서 뭐라고 마무리 할 건지 궁금해서 오기로 끝까지 읽은 맘이 없지 않다 ) 뒤에 가서 약간의 해결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는 일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믿고 있다. 세계 경제가 요구하는 핵심 사안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자체가 모든 시민의 욕구와 능력과 재능에 맞게  기회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나라도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으면 기업은 계약에 대한 절충과 소송으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고, 정부는 이념 논쟁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높을 때는 기업과 정부 모두 더욱 민첩하게 변화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사회적 신뢰' 다.


저자는 사회적 신뢰도가 높고 정부가 책임을 지며 개인들과 소통이 잘 되는 체제가 미래지향적이라고 제시한다. 개인에게 실업의 책임을 돌리는 사회는 발전가능성이 낮을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시스템이 바로 설때 개인은 권리를 누림과 동시에 정말 개인이 져야할 책임만 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개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지금


저자는 정부와 사회에 요구하는 시스템과 별도로 개인이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생제도들도 제시하고 있다. 협동조합 이나 프리랜서들 같은 비정규직의 노동조합과 연대, 종업원 지주제, 맞춤형 생산방식 등 노동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 새로운 시도들이 성공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고 저자는 정치권에 쓴소리를 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국가적인 일자리 대란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일자리 대란은 희소해지고 있는 '기회'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언제나 충분한 정도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기술은 인간이 적절히 활용하기만 하면 우리 삶을 개선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국가 차원의 일자리 대란은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낳을 수 있는 문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변화에 대해 준비하고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 그것으로부터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굳은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좋은 일자를 지원하고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실행력 있는 방법은 공공 정책의 핵심 어젠다가 되도록 정부와 기업과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계화된 디지털 경제에서 우리는 민간 분야의 장기적인 고용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 고용을 통해 시민들이 소득을 올리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온 전략은 과거의 유물이 됐다. 안타깝지만 이제 통하지 않는다. 일자리의 미래는 디지털 경제의 창조가 아니라 집단적인 상상력에 달려 있다. 기술은 죄가 없다. AI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이용하는 주체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기술은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여야 할 삶의 동반자다.  '나쁜 일자리' 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 법칙의 소산이 아니라 '치료해야 하는 사회 구조의 결함' 때문이다. 일과 일자리가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제로섬 게임은 아니다.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민주주의에서 일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는 것이다. 교육과 전문성은 여전히 긍정적이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스킬 우선' 에만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을 기계보다 한 걸음 앞서도록 교육하는 일은 헛되다. 그보다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역설계해서 우수한 기술을 십분 활용해 사람들이 일로부터 진정한 가치를 도출해내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고용주들이 우리에게 '선물' 이나 '의미있는' 일자리를 마련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하는 그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생산품이라는 사실에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하는 것이다.


일자리에 가서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에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

개인과 개인이 연대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할 때 '좋은 일자리' 가 창출된다는 것,

개인이 져야 하는 책임보다 사회와 정부가 져야 하는 책임이 제대로 인식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스템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일자리의 미래가 곧 일의 미래는 아니라는 것은 천천히 읽어지는 이 책이 주는 소중한 교훈이었다.

힘들기만 한 work 는 의미있는 job 으로 바꿀 수 있다.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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