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바치는 심장 문득 시리즈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박미영 옮김 / 스피리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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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고 음산한 분위기, 불안과 광기로 가득찬 심리 묘사로 근현대 환상문학과 추리문학을 창시한 에드거 앨런 포의 세계를 가장 시의적절하게 반영한 새로운 번역판!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루팡', '에도가와 란포' 라는 필명,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레이먼드 카버의 빛나는 단편들, 스티븐 킹 이라는 하나의 세계, 이 모두는 에드거 앨런 포로부터 비롯되었다!>>

 

학창시절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도 읽었었는 줄 알았다.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봐서...

그런데 홈즈시리즈와 루팡시리즈만 읽었었나 보다. 책을 읽어보니;;;

에드거 앨런 포 (1809~1849) 는 정말 유명한 작가다. 독자들에게도 유명하고 작가들에게도 유명하다. 추리소설 고전중의 탑이 아닐까.


그의 생애는 결코 행복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삶이었다.

순회극단의 배우였던 부모는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친척의 손에 자라면서 첫사랑에 실패후 큰 좌절을 겪는다. 사촌여동생과의 결혼했던 10년 남짓한 기간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으며 이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게 되지만, 아내와 사별후 절망에 빠졌다가 얼마안되 사망한다. 고작 마흔의 나이에...

부모를 일찍 여의였으나 가난하게 자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의 멘탈과 심리는 유약한 편이었던 것 같다. 쉽게 망가졌고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11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에드거 앨런 포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우울함이 내 정신에 파고들었다. 견딜수 없다고 한 것은, 아무리 지독하게 황량하거나 끔찍한 자연 풍경에서라도 인간 심리는 시적이고 감상적인 반쪽짜리 즐거움을 얻게 되어 있는데, 여기선 그 기분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번째 단편 '어셔가의 몰락' 의 시작부터 저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저자의 작품들은 읽기 시작하는 순간 예상보다 강한 괴이함이 덮치면서 반쪽짜리 즐거움도 얻지 못하는 심정으로 독자의 기분을 압도한다.


'일주일에 일요일 세 번' 은 비교적 유쾌한 작품이다. 괴팍한 노인네에게서 결혼승낙을 받아내기 위한 재치와 노인네의 당황스런 반응이 웃음짓게한다.


'붉은 죽음의 가면' 은 가면무도회의 방들을 하나하나 설명해나가면서 벌써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


'구덩이와 추' 에서 주인공은 깨어나보니 감옥안이다. 빛한줄기 없는 캄캄한 방이다. <<깨어나서 한 손을 뻗어보니 옆에 빵 한 덩이와 물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라는 문장을 보며 '올드보이' 영화 가 생각났다. 영문도 모른채 갇혔는데 자다 깨보면 항상 놓여 있는 빵과 물주전자. 물론 내용은 영화와 전혀 상관없다. 하지만 섬뜩하게 조여오는 무언가가 동일하게 느껴진다.


'검은 고양이' 는 내가 가장 많이 들어본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제목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적 설정으로 많이 차용했다고 한다. 검은 고양이 이름은 플루토 이다. 사실 플루토는 저승신의 이름이다. 고양이 이름에서 어느정도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섬찟한 작품이다.


<<그렇다!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몹시. 몹시도 끔찍이 신경질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왜 나를 미쳤다고 할까? 그 병은 내 감각을 파괴하거나 무디게 한 것이 아니라 날카롭게 했다. 무엇보다도 청각이 예민해졌다. 천국과 지상의 온갖 소리가 다 들렸다. 지옥의 많은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미쳤단 말인가? 들어보라! 그리고 내가 얼마나 건강한지-그리고 얼마나 차분히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살펴보라>>

 

'일러바치는 심장' 의 첫 문장은 마치 저자의 독백처럼 들렸다. 작품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를 평생 괴롭혔던 불안과 신경증이 이런 문장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로 치면 싸이코패스격인 화자의 신경증은 정유정 소설에서 나왔던 악인들의 모습도 생각나게 한다.


'도둑맞은 편지' 에선 그 유명한 뒤팽 탐정이 나온다. <<의심할 의도로 간 사람의 의심을 강하게 확증시켜>> 주는 오류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뒤팽의 추리는 훗날 셜록 홈즈 를 탄생시켰고 괴도 루팡에 영향을 주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탐정이다.


'긴 상자'는 유쾌한 화자를 설정했지만 사실 되게 슬픈 내용이다. 슬픈 사랑도 괴이함으로 표현하는 저자의 표현방법은 참 일관적인것 같다.


<<전반적으로 내 눈에 들어온 모든 게 어딘가 상당히 괴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워낙 별별 사고방식을 지닌, 별별 관습을 따르는, 별별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이다.>>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 을 발표당시 읽었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호탕하게 웃고 넘겼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의 정신병원은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정신병원과 정신병자들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정상과 비정상의, 정신이 온전한 사람과 미친 사람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아몬틸라도 술통' 은 어찌 보면 '검은 고양이' 보다도 더 잔인한 내용일 수 있다. 폭력과 살의를 드러내는 사람과 드러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 은 둘다 무섭지만 되돌아 보면 후자가 더 무섭기 마련이다.


'절름발이 개구리' 는 나름 통쾌한 복수극이다. 궁정안의 광대 난쟁이인 절름발이개구리는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광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을 무시하던 왕과 신하들을 제대로 속여넘긴다. 잔인하게 복수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은 정말 하나같이 괴이하고 음산하고 광기어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지금도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여기서 시작됐구나 싶은 장면들이 꽤 있다. 대단한 작가이긴 하다. 어렸을 때 탐정추리물에서 그쳤기에 망정이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안 읽은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 읽었으면 잠꽤나 설쳤을 것이다. ㅎㅎ 이번에 읽을 때도 대낮에 읽긴 했다;;; 스릴러 보단 공포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은 매력적이면서도 여전히 섬뜩하다. 추리소설의 고전이라 할 만 하다.


고전도 새로운 번역은 또 다르기 마련이다. 매일 쓰는 언어이지만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언어이다. 고전을 고전어로 읽었을 때와 현대어로 읽었을 때는 분명 다르지 않을까? 나는 기왕이면 새로 나온 번역본을 좋아하는 편이다. 외국작품이라 어차피 원어로 읽지 못할 바에는 지금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인 번역본이 낫다. 이 책의 번역자가 올초에 읽은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의 번역자라서 더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 작품을 읽을 때도 아주 수월한 흐름으로 읽었었다. 에드거 앨런 포 의 작품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작지만 강한 이 책으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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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오류 발생 보고서 덴마 어나더 에피소드 1
dcdc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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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순이 설계한 전천후 SF 스페이스 오페라 만화 DENMA 가 작가 dcdc를 통해 소설로 재탄생했다!

거짓말, 암살자, 신, 사랑 그리고 퀑에 대한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변주>>

표지는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내용은 내 스타일이었다. ㅋ

책을 펼치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캬~!


이 소설의 원작은 웹툰이다. 나는 웹툰을 본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겠으나 엄청 인기가 많은 웹툰이었나 보다. 책의 서문에 작가가 원작자에 대한 칭송이 대단하다. 소설을 읽고 나니 원작 만화가 궁금해진다. 만화에선 어떻게 표현했으려나?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의 경우 대부분 원작이 나은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도 만화를 봤던 사람들은 원작이 낫다고 하려나? 하지만 나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ㅎㅎ


SF 소설이라고 하긴 하나 사실 우주배경과 초능력자들이 나온다는 것 말고는 딱히 SF 장르일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다.

SF 라기 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초능력자 의 존재는 사실 SF 시대가 되어도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다. 초능력은 과학적 발달의 결과라기 보다는 초현실적 상상에 가깝다. 뭐 사실 SF 와 판타지를 구분하는 경계가 명확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 작품에는 초능력자들이 나온다. 이른바 '퀑'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능력은 각각 다르다. 주인공 야고보의 퀑 적 능력은 마리오네트 능력이다. 인간이건 인형이건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는 마음데로 조종할 수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원작 웹툰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 소설화 하기 위해 일부분의 에피소드만 을 가져왔고 영화적 설정도 차용했다. 저자가 말한 영화 대부는 작품 내내 연상되고 개인적으로 레옹 이나 무간도 라는 영화도 떠올랐다. 퀑 들의 장면에서는 X맨 시리즈나 마블 영웅 시리즈가 생각나기도 하고... 여튼 영화적 장면들이 바로 떠오르는 내용들이라 읽는 듯 보는 듯 잠깐의 휴식용으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이 끝나면 만화책을 쌓아놓고 하루종일 키득거리며 쉼없이 만화책을 읽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만화의 묘미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시각적 눈요기와 가벼운 현실망각의 시간을 누리며 잠깐 딴 세상을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 소설은 그런 만화같은 즐거움을 준다.


방랑하는 암살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야고보, 마리오네트 능력을 가진 퀑 이다.

그가 머물고 있는 도시에 거대폭력조직이 있다. 그 조직의 두목은 두단 이고, 그에겐 젊고 아름다운 아내 마디나 와 열살아들 루벤 이 있다.

어느날 야고보에게 두단을 암살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내가 어두운 세계의 사람이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는 밝은 세계의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고 만 것이지. 그런 세계도 그런 사람도 있을 리가 없는데도 그래버렸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믿었어. 다른 사람을 아는 것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믿게 되면 곤란해.>>


두단은 야고보에게 말한다. 자신을 암살해달라는 의뢰를 실행해보라고. 아니 실행하는 척 하라고. 야고보는 <<모든 포석을 다 마친 상태에서, 그저 정해진  수순대로 장기 말을 내려놓기만 하면 자신이 이기는 그런 게임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역시, 두단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성당에 들어와 이런 우스꽝스러운 인형극의 등장인물이 되지도 않았을 것>>. 야고보는 마리오네트가 된 사람들을 조종하면서 스스로 마리오네트가 된 상황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어 매 시리즈마다 새로운 상황을 맞닥드리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익숙한 설정이다. 데이비드 발다치의 소설 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가 그랬고, 딘 쿤츠 의 '제인 호크' 시리즈도 그랬다. 사실 그 이전 셜록홈즈도 있었고, 영웅시리즈물에선 항상 있어왔던 설정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그래도 재밌다. 주인공의 능력과 해결능력에 따라 다음 시리즈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과정을 시리즈마다 반복하게 된다. 야고보는 잘생기도 인간적인 암살자다. 그의 고뇌는 그가 하는 행동들을 이해시키고 다음에 그가 겪게 될 경험들을 궁금하게 한다. 에피소드 마다 다른 내용이라고 하지만 연이어 읽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암살자와 암살을 요청한 사람과 암살에 지목당한 사람이 초반에 드러난 상황에서 보여지는 상황이 다가 아님을 뒤집고 또 뒤집어 긴박하게 읽히는 재미가 있다. 거기에 초능력과 종교적 광신과 우주적 설정이 더해지니 헐리우드 영화 한편을 후딱 보고 난 기분이다.

나는 내가 독서라는 한 길을 파는 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책에도 집중해야 할 분야가 있는 것을 너무 마구잡이로 읽어서 롤러코스터를 타듯 무척 심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독서경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책은 그렇게 오르고오르던, 최근 읽었던 책들과의 등산을 가볍게 해주는 잠깐의 시원한 샛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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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서 (스페셜 에디션) - 영혼의 순례자 칼릴 지브란
칼릴 지브란 지음, 로렌스 알마-타데마 그림, 강주헌 옮김 / 아테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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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단테'라 불리는 레바논의 시인, 철학자 지브란의 영적 메시지!

그는 겉모습인 허상을 버리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고 촉구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열망한다고 가르쳐주었다. 전 세계에 영감을 준 지브란의 목소리는 시대를 초월한 우리 시대의 정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각보다 너무 작은 사이즈의 책이라 깜짝 놀랐다. 흑백의 작고 예쁜 책이었다.

영혼의 순례자라고 불리는 칼릴 지브란 하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예언자] 라는 책이 유명하다.

워낙 제목을 많이 들어본 터라 예전에 읽어봤던 것도 같고...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라는 책은 예언서는 아니다. 시적 영적 에세이랄까.

이 책 [지혜의 서]는 칼릴 지브란의 작품 목록에는 없다. 편집으로 엮은 스페셜에디션인듯 하다.

깨달음을 얻은 자의 여정이 담긴 '스승과 제자의 대화' 두 편과 스승의 메시지를 전하는 '지혜의 말씀' 스무 편이 실린 이 책은 시처럼 읽히는 산문집이다.


칼릴 지브란(1883~1931)은 레바논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평화주의자 이다.

그가 태어난 레바논은 유대교의 이스라엘과 이슬람교의 시리아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 예수탄생지와 가까운 나라이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절반정도씩 공존하고 있는 나라이다.

유대교의 향기가 어린 지역에서 카톨릭 집안의 자손으로 기독교 신자로서 아랍어를 쓰는 칼릴 지브란은 시기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종교분쟁과 깊은 인연이 맺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시인이자 화가로서 예술감이 충만했던 그는 내부와 외부에서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는 종교들을 영혼의 목소리로 통합시키고자 했다. 레바논과 뉴욕을 오가며 아랍과 비아랍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아랍어와 영어를 함께 쓰는 그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를 지향했다. 종교에 상관없이 울림을 주는 그의 말들은 그래서 영혼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 책에는 표지부터 로렌스 알마 타데마 의 그림이 나온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1836~1912) 는 그리스로마 시대를 그리는 신고전주의화풍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대리석의 화가 라고 불릴 정도로 그리스로마시대의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화가이다.

책 뒤편의 칼릴 지브란 생애를 보니 파리에서 스승으로 잠시 함께 했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칼릴 지브란은 독학을 했다고 하는데, 책에는 왜 칼릴 지브란의 그림이 아니라 마음에 안들었던 스승의 그림을 실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내용에 적절한 그림을 사이사이 배치해 놓았는데 아쉽게도 모두 흑백이다.


이 책을 읽고자 마음먹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칼릴 지브란 때문이 아니라 로렌스 알마 타데마 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리스고전을 여러권 읽고 나니 그 시대를 아름답게 그려낸 그림들을 알게 됐고, 로렌스 알마 타데마 의 그림들은 정말 너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그림과 신비스러운 글들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이 너무 작아서 그림도 작고, 흑백인데다, 그림의 전체가 아닌 부분부분을 조금씩 삽입해 놓아서 그림은 영 볼게 없었다.

예를 들어, 표지 그림이 '호메로스 읽기' 라는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원작과 비교하면 영 아쉽기 그지 없다.

표지 뿐만이 아니라 책 속의 그림들도 원작 그림을 알고 보면 그렇게 작고 흑백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느낄 수 있다.

 

 

 

 

그림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지 내용은 평이하게 느껴졌다.

소설로 썼다면 톨스토이 작품 같았을 것 같고, 불교책으로 썼다면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 같았을 내용들이,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 칼릴 지브란의 깨달음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림에 대한 기대 없이 칼릴 지브란 의 순수한 영적 시들을 오랜만에 읽는다고 생각했다면 괜찮았을 것을...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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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 : 소크라테스부터 피터 싱어까지 -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다
나이절 워버턴 지음, 정미화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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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다

소크라테스 부터 피터싱어 까지

궁극의 진리를 갈망한 철학자를 한눈에 읽는다!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의 본질을 파헤치는 앎의 여정>>

처음부터 끝까지, 표지부터 내용까지, 뭐하나 흠잡을 데 없이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이런저런 철학책들을 읽었었다. 주로 입문서나 개요서 들이었다. 꽤 여러권을 읽은편이지만 그럼에도 철학의 한분야를 혹은 한명의 학자를 골라 본격적인 내용을 읽기엔 왠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철학은 늘 나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고대그리스의 철학자들에 대한 책을 읽고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좀 읽고 나니, 서양철학의 시작을 읽었으므로 시대를 훑어내리며 현대철학까지의 흐름을 알수 있는 최신 입문서를 또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움베르토에코의 철학의 역사를 읽어볼까 했는데 너무 정말 너무너무 두꺼웠다.;;; 그러던중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기대이상이었다.


책의 가장 앞부분에 '연대표로 보는 철학의 역사' 가 있다.

펼치면 한눈에 들어오는 양쪽 두페이지에 간략하게 철학자와 연대를 정리해놓았는데, 당연히 이 책에 실린 철학자들과 분야를 중심으로 요약해 놓았다. 본문을 읽는도중 앞서 읽었던 내용이 가물가물할때 연표를 찾아보고 내용을 생각해보기에 유용했다.

40챕터에서 약52명의 철학자를 언급한다.

325페이지의 책인데 챕터가 40이고 등장하는 철학자가 52명이나 된다는 것은 한 철학자당 서술되는 내용이 길지 않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말 핵심만 잘 추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묘미는 챕터에서 챕터로 넘어갈때의 자연스러움 이다. 크게 상관없어보이는 철학자들을 매끄럽게 연결시킬 때 저자의 재치가 느껴지고 호기심이 자극된다. 본문의 내용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해 놓아서 저자의 신중함이 느껴지고, 철학의 핵심내용들도 철학서에 대한 초보독자가 읽고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쉽게 풀어놓았다. 입문서로 정말 괜찮은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등에라고 생각했다. 등에는 성가신 벌레이지만 심각한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하여 상대방을 멘붕에 빠트리는 소크라테스는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테네 사람들에게 등에보다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스승의 죽음을 경험한 플라톤은 완벽한 국가와 지도자의 모습을 찾고자 했다. 그가 남긴 대화편들은 스승의 질문을 포함하여 더 구체적인 질문들을 던져 놓았고 그가 찾은 답은 당시에도 지금도 답이 되기엔 무리가 있었다. 플라톤이 모든 것에 물음표를 붙였다면, 그의 수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고, 플라톤은 최고의 작가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는 저자의 표현은 매우 적절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세대의 철학자 피론은 젊은 시절 인도를 방문했고 회의론자 였다. 피론과 동시대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쾌락주의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추구한 쾌락은 굉장히 절제되고 단순한 삶을 지향했다. 철학을 일종의 치유법으로 생각한 것은 에피쿠로스학파 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도 그러했다. 명상적인 스토아학파은 로마의 철학자들에게 이어지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황제의 측근이었으나 황제들은 그들의 철학에 영향받지 않았다.

5세기에 이르면 철학과 종교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철학자들 대다수는 기독교도 였다. 중세 철학자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웠지만 그들의 사상을 수정해서 자신들의 종교에 적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원죄와 자유의지에 의한 악한 행동들은 여전히 통용되는 믿음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가들로부터 기독교 철학으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한 보에티우스의 철학은 신이 모든것을 안다는 예정설을 설명해내고자 했고 이후의 철학은 '신'을 중심으로 사고하게 된다.

신에 대한 믿음에 중점을 두고 종교적인 삶의 방식에 전념한 안셀무스와 아퀴나스가 있는가하면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도 있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거대한 바다 괴물인 리바이더던을 비유한 홉스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던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을 파고들었다.

스스로를 신학자라고 생각했던 파스칼은 확률을 이용해서라도 믿음의 필연성을 이야기했고, 무신론자라고 비난받았던 스피노자는 쟈연에서 신을 찾았다. 로크의 인격론도 버클리의 관념론도 기성종교에 반대적인 입장이었던 볼테르, 라이프니츠, 흄 과 루소까지도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들 철학자들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어왔다.

하지만 칸트 부터는 철학자들의 믿음이 더이상 중요치 않아졌다. 철학자가 기도교도이건 아니건 본격적으로 인간 이 화두의 중심에 선다. 그래서인지 칸트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두 챕터를 차지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벤덤의 행복과 헤겔의 완성, 쇼펜하우어의 비관과 밀의 불안은 다윈의 진화론 이후 더 복잡하고 더 난해한 철학의 갈래들속에 스며든다. 키르케고르의 결정장애와 마르크스의 신념은 세계전쟁속에 산산이 흩어졌고, 경제의 패권국 미국은 철학에서도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실용주의, 허무주의, 정신분석, 과학철학, 정의론 은 실재와 허상, 물질과 관념, 현실과 이데아 사이에서 여전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심한 하나의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였다. 그에 앞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제기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이 애초에 철학에 끌리는 데는 이 질문에 답하려는 욕구도 한몫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만의 답이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이었다.>>

 

2500년전 철학자들이 고심했던 질문은 지금까지도 고민되는 질문이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이가 태어나 부모에게 퍼붇는 질문들에 부모들은 최선의 답을 쉽게 말해주기 위해 고민하는 것처럼, 고대철학자들이 쉽게 던진 질문들은 몇백년 몇천년의 시간을 흘러 아직도 고심되어지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할 수밖에 없고 어떻게 살았든 언젠가는 죽는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고 잘 살고 싶다. 그래서 철학은 계속되어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삶의 유한성과 죽음의 무한성은 철학의 바탕이자 앞으로도 계속이어질 길이다.

그 길에 네비게이션 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이지도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 철학 아닐까? 지도를 보여줘도 이해못하는 나같은 지도 까막눈도 있을 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 대충이나마 철학자들의 이름만으로도 눈치껏 철학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는 철학지도로 이만한 책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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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라이
헬렌 피츠제럴드 지음, 최설희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사라진 아이, 두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거짓말이 파묻은 것

여러분 제발, 저를 의심하세요.

진실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아.>>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반은 하얗고 반은 검정칠을 하고 어딘가를 보고 있는 여자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반은 하얗고 반은 검정칠을 하고 눈을 감고 있는 여자

흑백의 표지가 너무나 강렬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목은 울고 있는데, 여자는 울고 있지 않았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영국 가디언 여성 작가들이 뽑은 '여성 작가의 베스트 스릴러 50' 에 선정됐다는 띠지의 홍보문구가 책을 다 읽고 나서 새롭게 다가온다.

여성작가들이 뽑은 여정작가의 베스트 스릴러...

이 책은 스릴러 소설이지만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노아는 비행 내내 울었다. 잠시라도 울음을 멈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비행 중 다섯 시간을 조애나는 해볼 수 있는 모든 걸 순서대로 전부 시도했다.

배고픈가? 앙!  기저귀? 우앙!!  지루해?  아앙!!!  피곤해? 엄마는 대체 아는 게 뭐야?

조애나는 모든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조애나는 그녀의 애인 앨리스터와 함께 생후 9주 된 아들 노아를 데리고 영국에서 호주로 가는 중이다.

호주에는 앨리스터의 전처와 딸 클로이가 있다. 4년전 이혼한 전처에게서 딸을 데려오려고 양육권 소송을 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아들 노아가 계속 운다. 계속 계속 멈추지 않고 계속


<<조애나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 반면에 앨리스터는 언제나 바쁘고 긍정적이며 분명하다. 그녀에게 완벽한 해독제인 셈이다.

"내가 미쳤지" 그녀는 앨리스터의 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오 나의 미치광이" 앨리스터가 빙긋 웃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만의 미치광이가 되었다.

우리가 영원할 거라는 걸 어떻게 믿어?

내 아기를 가져!>>


조애나는 앨리스터가 그녀에게 완벽한 해독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은... 완벽한 독약이었다.

노아의 울음에 지치고 승객들의 불평에 지치고 장시간의 비행에 지치고 조애나는 노아에게 아기약을 먹였고 노아는 몇시간만에 드디어 잠이 들었다. 앨리스터는 노아를 안앗고 조애나는 잠이 들었다. 노아가 울자 앨리스터는 아기에게 약을 먹였다.

비행이 끝나고 렌터카를 타고 숙소를 가는 중에도 노아는 계속 조용했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조애나는 현실감을 잃고 자신이 현실보다 나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지옥이었다.>>


노아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고속도로 위에서 조애나가 살아있는 현실은 지옥보다 못한 곳이었다. 조애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세 번째로 소리쳤다. "애가 없어졌어"

마침내 조애나가 그 말을 이해했을 때, 그 말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훌륭해서 그녀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속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무얼 기억하고 무얼 잊어야 할지 그 모든 걸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 나은 진실을 믿으면 된다. 아기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아기를 데려간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꿀꺽 삼켜버렸다.>>


앨리스터는 빠르게 현재를 정리한다. 상황을 만들고 조애나가 해야 할 생각들을 주입시킨다.

조애나는 더 나은 진실을 믿기로 한다. 노아가 사라진 것으로.


노아의 실종사건이 대대적으로 뉴스화하고 유괴범의 후보에 앨리스터의 전처 알렉산드라가 지목된다. 알렉산드라의 집에 경찰이 찾아온다. 알렉산드라는 이 상황이 혼란스럽다. 자신을 망가뜨린 여자가 아들을 유괴당했다니, 그래서 경찰들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쳤다니


<<그녀에게 느끼는 분노의 세 겹쯤 아래로 얇은 죄책감이 한층 자리하고 있다. 나는 어린 여자에게 그 남자를 떠넘긴 것이다. 그 남자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는 그녀를 그곳에 내버려두었다. 미리 경고했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도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말을 듣게 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여성동맹쯤 된다는 건 아니다. 절대 안될 말이지. 그녀는 그에게 속한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의 팀으로 이루어진 적이다. 그녀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 역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절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특히 밤이 되면 죄책감이 분노 아래서 슬그머니 기어 나오고, 그럼 나는 그녀를 걱정한다. 그녀가 그의 배신을 깨닫게 될 그날을 염려한다.>>


알렉산드라는 클로이의 엄마다.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딸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자신의 딸을 데려가려고 오는 도중 갓난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남편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딸이 아빠를 미워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 배신에 분노하며 술을 마시고, 상실에 좌절하며 우울증에 빠졌어도, 그녀는 클로이의 엄마 자리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전남편의 애인이 아들을 유괴당했다니


<<나는 클로이를 학교까지 태워다주고 아이가 학교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걸 지켜보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종일 뉴스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공개 원조를 막 청하려는 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다. 눈이 빨갛지는 않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녀가 울지 않고 있으니 뭔가 이상하게 보였다. 사실 그녀는 매우 차갑고 불편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보통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예쁘고 다가가고 싶은 모습일 때가 많았다. 그녀가 내 남편이랑 자고 내 인생을 망가뜨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한 모습이었다.>>


뉴스화면에서 조애나는 울지 않고 있었다.


<<일련의 교육이 이어졌다.

"나도 알아, 자기야. 하지만 해야 돼.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걱정되면 이렇게 말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이렇게 말해. '죄송합니다. 말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웃지 마. 절대로. 꼼지락거리지도 마. 그러면 뭔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 울어. 참지 말고, 더 많이 울수록 좋아.>>


앨리스터의 교육후에도 조애나는 울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여러분 제발, 저를 의심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기도했다. 그 사람의 손톱 아래 낀 흙을 의심하란 말이에요. 대체 이런 부모가 어디 있냐고 몰아세우세요. 내가 바로 살인자라고 의심하란 말이에요!>>


조애나는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앨리스터가 가르쳐준 말들 뿐이었다.


<<조애나는 침실 창문으로 앨리스터가 뒷마당에서 바비큐 통에 불을 붙인 다음 그녀가 남겨놓은 자기 아들의 물건을 가스 불에 태우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소시지 몇 개를 올리고 익을 때까지 뒤적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다 구워진 소시지를 빵에 넣어 접시에 담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는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줄줄이 홍보 얘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앨리스터는 방송 출연과 책을 출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세상에나!


그는 진정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지 않았다. >>


조애나는 점점 더 괴로워지는데 앨리스터는... 아니었다.


<<조애나는 무슨 말을 할지 연습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 상관없었다. 알렉산드라는 그녀를 전혀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안나 카레니나 읽어보셨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애나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영화는 봤어요"

"전 사춘기 때 그 책에 완전 빠졌어요. 해마다 읽고 또 읽었죠. 그러다 그 사람을 만다고 나서는 그 책을 쳐다볼 수도 없었어요. 그때는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아요. 그 책의 주제 때문이었어요. '다른 사람의 고통 위에 너의 행복을 세울 수는 없다' 앨리스터는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앨리스터가 이해할 만한 책은 아니죠"

그 말을 듣고 조애나는 전율이 일었다. 알렉산드라는 재미있고 똑똑하고 현명했다.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멋진 선배 언니를 따르듯 좋아했을 것이다. >>


조애나는 진실을 밝히고 싶다. 알렉산드라는 딸이 아빠의 모습을 좋은 모습으로 생각하게 하고 싶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시선속에서 더 멋지게 표현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들의 모습과 상대방이 보는 자신들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 어느 쪽이 더 그녀들의 진짜 모습에 가까울까?

 

 

재판이 이어진다. 양육권 재판이 아니라 조애나의 재판이다.

앨리스터가 없는 조애나의 재판

조애나는 아들을 잃었지만 알렉산드라에게 딸을 잃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조애나는 자신이 갇혀있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틀에서 나오기로 한다. 틀을 깨뜨리기로 한다.

그리고...


<<"이제는 괴롭지 않아요" 조애나가 말했다.

상담사는 믿지 않았다. "어째서죠?"

"안나 카레니나 읽어보셨나요?" 조애나가 물었다.

"아뇨"

"주제가 이거에요. '다른 사람의 고통 위에 너의 행복을 세울 수는 없다'"

조애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이제 행복해요"

상담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들의 행복 위에 제 삶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에요">>


조애나는 이제 울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아기의 실종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아기의 죽음을 다룬 작품도 아니다.

초반에 이미 아기의 죽음과 그 죽음을 유발한 상황을 다 알려주고 전개를 시작한다. 실종아닌실종을 알려주고 풀어나간다.

조애나와 앨리스터 그리고 전처 알렉산드라의 심리를 오가는 묘사는 아기의 죽음이후 펼쳐지는 실종사건을 둘러싸고 섬세하게 그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어떤 반전의 복선을 깔아놓은 것도 없으면서 촘촘하게 조여드는 심리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전개는 조애나의 상태를 온전히 느끼게 해준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도 딸을 지키고자 하는 엄마의 마음도 그것이 법적으로 옳지 않더라도 이성적으로 이해할수 없더라도 엄마라면 알 수 있다. 그럴수도 있다는 걸. 그러지 않을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그럴수도 있다는 걸... 엄마들은 안다.

불륜과 육아의 고충과 모성에 대하여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의미와 자존감에 대하여 조애나와 알렉산드라의 심리변화는 스릴러의 긴장감을 통해 더욱 깊이 다가온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나라면?

책을 덮고 표지를 다시 본다. 조애나는 이제 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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