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도 심장이 있다면 - 법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들
박영화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법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들 >>

 

책은 30년 넘게 법조인으로 살아온 저자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에세이다.

저자는 1959년 강릉생으로 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2002년 까지 16년간 판사직을 수행하다가 이후 변호사로 활동중인 분이시다.

어제 읽었던 '두 얼굴의 법원' 에서 판사계에 대한 현실을 알고 나니 개인적으로 회복이 좀 필요했다.

물론 사법농단 이 일어나던 때에도 용기있는 판사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수습이 되는 중이라는 희망적 결론을 내린 책이었지만 그래도 읽으면서 쌓인 피로도를 낮추고 싶었다.

그래서 법에도 심장이 있기를 바라는 제목에 끌렸다.


그런데... 판사직을 16년간 일했고 2002년 부터 2019년 현재까지 변호사 생활은 17년을 넘어가고 있는데, 책의 내용은 대부분 판사직에 있을 때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판사로서 보낸 시간보다 변호사로 보낸 시간이 더 긴데 판사로서의 관점을 유지하며 쓴 내용들은 왠지 자서전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경험들의 장점들만을 부각시킨다.


본인이 판사로서 법의 판단을 내려야 할때의 고충을 이야기 하며 자신이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최대한의 훌륭한 결정을 내렸는지 줄줄이 풀어놓는다. 할아버지가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하며 모험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듯이...

군법무관 으로 일할때는 군법정에서 일반병사의 지나친 실형을 감해주기 위해 상관과 맞짱뜨고, 형편이 어려운 피의자의 상황에 마음이 아파 양말을 보내주었으며, 심판보다는 화해로 유도했고, 고집불통 주심을 설득시키기 위해 배석판사로서 배려있는 행동을 얼마나 잘 했는지, 사건 하나하나마다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게 얼마나 잘 해왔는지 이야기 한다. 변호사로 활동할 때도 의뢰인이 10억을 준다해도 경우가 아니면 수임받지 않았고, 의뢰상담만으로 소송까지 가지 않도록 해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이야기 한다.


그렇다고 읽기 거북할정도로 자화자찬만 하는 책은 아니다. 그런 경험들 속에서 법은 법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상적 모습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은 구구절절 바람직한 문장들도 많았다.

 


 

법을 존중하고 법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법을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무조건 수호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옳지 못한 법은 고쳐야 한다. 법은 정의롭고 올바르게 사람들을 이끌고 권리를 지키는 동시에 법 자체로도 굳건히 서야 한다. 따라서 옳지 못한 법을 거부하고 비난하기보다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고쳐야 한다. 그래야 그 법을 모두가 인정하고 모두가 따른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법이 진짜 법이다. (p. 57)


판사는 정의롭고, 검사는 용맹하며, 변호사는 따뜼하다. 이는 아마도 법의 최전방에서 움직이는 대표적인 직업군에 기대하는 우리의 이상형이 아닌가 싶다. 법조인 대부분이 이런 이상형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파나가 합리적이고 공정하지 않듯, 검사 또한 모두 용맹하고 정의롭지는 않다. 물론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p. 103)


일반적인 디케상은 두 눈을 감거나 가리고 있다. 이는 디케의 정의가 인종, 계급, 성별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 대법원 로비에 서 있는 디케상은 두건으로 눈을 가리거나 눈을 감은 모습이 아니라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다. 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겠다는 강한 의지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에 엄격한 법 집행을 상징하는 칼을, 왼손에 공명정대함을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있는 일반적인 디케의 모습과는 달리 대법원의 디케상은 오른손에 저울을, 왼손에 법전을 들고 있다. 이 역시 다른 어떤 것도 개입시키지 않고 오로지 법에 근거해 공정하게 판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테다. 사실 정의의 여신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각 나라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어떤 형태든 거기에 담긴 의미엔 차이가 없다. 공정한 잣대로 진실을 밝히고 엄정하게 판정해 공동체에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겠다는 다짐 말이다. (p. 112)

 


 

디케상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은 대법원에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신선했고 다른 나라들의 디케상도 궁금해지면서 우리나라가 그토록 법전을 중요시 한다면 법이 정말 중요한건데 입법기관의 요즘 행태를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나는 16년 넘게 판사로 근무하면서 단 한 건에 대해서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판결을 내려본 적이 없다. 권위적이었던 옛 시절, 간혹 외부의 간섭이나 압력이 가해지면 선배들은 당당히 자신의 소신을 편 다음 법복을 벗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독립성은 법관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p. 64)

 


 

저자는 사법농단을 의식했던 걸까? 지시를 받아 판결을 내려 본적은 없지만, 소신있는 선배들은 결국  법복을 벗어야만 목소리를 낼수 있었다는 건 안타까운 조직문화 아닐까?법관의 생명같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법복을 벗어야 했다면 더이상 올바른 법집행을 못하게 된건데 그것이 과연 법관의 생명을 지킨걸까 못지킨걸까?


2002년 까지 16년 판사직을 수행했다고 하니까, 1986년 부터 였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그 뜨겁던 시절 판사로서 떳떳하게 일했다면 박수쳐주고 싶다. 하지만 그이후 대형로펌에 들어가 기업편에 선 사건의 변호를 위주로 하고 있는 경험들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이 없다. 왠지 이분... 조만간 선거포스터에서 뵐 것만 같다;;;

내가 몰라서 일수도 있지만 사법농단 사태 이후 판사들의 책이 눈에 종종 띈다. 대표적으로 문유석 판사의 책이 있겠지만, 그 책 말고도 신간들중엔 소년법정판사의 책도 있었고 김두식 교수의 법정관련 책도 있었다. 검사 변호사 의 영화같은 사건 일화 책이 아닌 법정과 법 자체에 대한 책 혹은 판사들의 의견은 최근에서야 눈에 띄는 걸 보면 판사들에게도 언론의 자유화?! 시대가 온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최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 집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집단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드러나지 않았던게 아닐까...

저자는 사법농단 사태 이후 추락된 판사계의 이미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현재는 변호사 임에도 17년 전과 그이전의 경험들을 상기하며 올바른 판사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여하튼 법조인으로서 개인적 의견을 담은 에세이니까 자화자찬이든 이상향수립이든 뭐든 다 괜찮겠지만 그래도 법에 심장을 부여한 사람이 저자 한사람만은 아닐진데... 좀... 아쉬웠다.

그래도 정말 이런 마인드의 판사들만 계시다면 아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이 계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얼굴의 법원 -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
권석천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

양승태 코트 사법농단 사건의 진실, 마침내 드러나는 법원의 숨겨진 얼굴

판사 이탄희는 왜 두 번 사표를 냈나

권석천이 추적한 '양승태 코트 사법농단'의 진상!

강제징용 재판, 판사 뒷조사, 청와대 유착... 그 내막을 밝힌다>>

 

 

묵직한 책이었다.

읽기 전엔 사법농단 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반성과 판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선택했는데,

읽고 나니 사법계 실태에 대한 안타까움과 판사들의 양심에 대한 의문으로 읽기 전보다 더 무거워진 책이었다.

하지만 논픽션을 이렇게 손에 땀을 쥐고 읽긴 오랜만이었다. 이미 벌어지고 이미 알려진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음에도 다음이 어떻게 진행될지 너무 궁금해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제가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 중대한 상황을 또다시 무관심과 진영논리의 휴지통에 욱여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과거'를 손가락질하는 대신 '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모두이 미래'를 바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관련자 몇몇의 처벌을 판단하는 형사법정의 좁은 틀에 '사법농단'의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질 때 법원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법원이 달라지면 그 변화는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갑니다. '자유,평등,정의'가 대법원 장식벽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속에 약동할 때 여러분과 저의 일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이제 서막을 올렸을 뿐입니다. 재판은 이어질 것이고, 증거와 증언은 계속 나올 것이고, 다양한 측면에서 저마다의 평가가 내려질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권력에 선악이 없듯 진실에도 선악이 없습니다. 맞서지 않으면 진실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조금은 다른 세상에 살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부디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고, 대안을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프롤로그 p. 7 )>>

저자는 기자다. 법대 출신 기자로 언론사의 법조취재팀에서 오랜시간 일했다. 논설위원, 보도국장을 거치며 법조인들을 오래 옆에서 지켜봐왔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아쉽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자는 취재대상이 아닌 독자를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신념에 더 우선을 두었음을 읽는내내 느낄 수 있었다.

변호사, 검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건별로 제법 각인된 이미지가 있다. 소수의견편에 선 정의로운 변호사, 경찰의 수사력과 군인의 위계질서와 폭력배에 준하는 깡을 가진 검사. 그런데 판사는?? 변호사와 검사의 대치 속에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권한이 있는 것은 판사인데, 그 중요한 역할의 판사를 그동안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다. 판사의 이미지로는 고작 포청천의 판관 정도만 떠오를뿐;;;

사상초유의 탄핵사태를 거치며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이 정의의 심판자처럼 비춰질때 대법원에는 또다른 심판관들이 있었다. 그들이 실은 국민대다수와 더 밀접한 판결을 내리는 핵심판관들이었다. 사법농단 기사들이 쏟아질때 부패정권의 한 가닥 정도로만 여기고 피곤함에 넘겼었는데, 아니었다. 대통령이 누구였건 관계없이 그들만의 조직내에서 썩을만큼 썩은 고름이 터진 것이었다. 물론 그런 조작이 통했던 정권들이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법권 독립의 두 기둥은 '법원의 독립' 과 '법관의 독립'이다. 두 가치는 같은 길을 걷지만 갈림길에 서기도 한다. 외부로부터 독립해야 하지만 내부로부터도 독립해야 한다. 대법원장도 재판에 관한 한 판사에게 지시나 명령을 할 수 없다. 지시나 명령을 하면 그 자체로 헌법 위반이다. 판사의 판단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헌법과 법률,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뿐이다.

(p. 15)>>

판사조직에도 상관이 있고 위계가 있지만, 적어도 사건에 한해서는 판사는 온전히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런데 대법원장이 사법부를 자신의 개인조직처럼 여겼고 판사들을 수족부리듯이 했으며 그 수족들은 정치권과 연합하여 사건의 판결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심지어 김앤장이라는 외부회사와의 공조도 서슴치 않았다. 뇌물을 받거나 지위보존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치적을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대법원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사법농단이라는횡포를 부렸다. 그 행동들속엔 국민에 대한 의무와 정의에 대한 책임은 없었다.

2017년 이탄희 판사에게 법원행정처에서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온다. 판사들에게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가장 중요한 요직이라고 한다. 승진이 보장된 라인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업무인수과정에서 그는 생각지 못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속한 학회의 세미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윗선지시에 의해 부당한 목소리를 내기를 요구받고, 판사들에 대한 성향파악 뒷조사가 있어왔으며, 권력관계에 얽힌 조직서열에 충성하는 판사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처음엔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 아닌가. 그동안 가져왔던 믿음을 한순간에 버린다는 건 쉽지 않는 일이다.

 

<<분리 통치의 체계 안에서 자신의 고민을 같은 조직 사람들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어던 부당한 일이 맡겨져도 해내야 할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쫓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아닐까.

(p. 62)>>

하지만... 점점 드러나는 판사조직내의 권력의 실체에 그는 실망했고, 자신도 그들처럼 되기는 싫었다. 적어도 처음엔 개인적 명예만을 생각한 판단으로 사직서를 내기로 결심했었다

<<그날밤 이탄희가 결단한 것은 '유능하지 않기'였다. 우리는 유능함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유능함만큼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없다. 유능해야 할 때 유능해야 하는데, 무능해야 할 때 유능할 때가 많다. 잘못 유능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된다.

유능하지 않기도 마음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능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탄희는 '유능하다' 는 말도, '무능하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능하지도, 무능하지도 않기로 결심했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자신이 한 행동에 기준을 맞추게 된다. 한번 기준을 낮추면 계속해서 낮추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내고, 그 논리들이 기준을 끌어내리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것이 쉽게 무릎 꿇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기준을 낮추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첫 순간이 중요하다. 그때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 시작점의 작은 각도 차이가 가면 갈수록 큰 차이로 벌어진다. 당신이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섰다면 첫발을 내딛기 전에 고민해야 한다. 조직논리에 가담하기 전에 삶을 건 고민을 해야 한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 못 빠져나온다.

(p. 76, 77, 78)>>

사직서는 반려되고 원래 일하던 곳에서 재판하는 판사로 남기로 한 그에게 폭풍같은 며칠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원래데로 돌아온 것이었다면 그에게 개인적으로 더 평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직에 발령받고 정식출근하기도 전에 제자리로 돌아온 그에 대한 시선은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의문들을 터트리는 계기가 됐고, 그렇게 사법농단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조직논리는 무섭다. 조직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조직만 무사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명예나 인격쯤은 한입에 집어삼킨다. 어느 조직에서나 내부 고발자가 나타나면 바로 공격이 시작된다. 사생활이나 인성에 대한 공격이다. 문제 삼을 것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공격한다.

조직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는 대개 상급자가 아닌 하급자다. 피해자에게 인격적 모멸감을 주고 사회적 고립감을 준다. 조직에서 배겨날 수 없게 한다.

(p. 131)

우스운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만일 사표를 낸 판사가 이탄희가 아니었다면 많이 달랐을 거예요. 이탄희는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거든요. 재판 잘한다는 소문도 났지만 행정처TF일도 많이 했어요. 그것도 굉장히 열성적으로 하면서, 샤프하고, 예의바르고... 그러니까 다들 인정했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판사였어요. 평판이 좋았던, 아니 굉장히 좋았던 판사가 무슨 부당한 지시를 받고 사표를 썼다는 것만으로, 그걸로 게임 끝이었던 거죠.(지방법원 부장판사)

(p. 135)>>

이탄희 판사의 사표였기에 많은 이들의 의견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그는 결국 두번째의 사표로 판사직에서 물러난다. 피해자에 가까운 그의 사표는 가해자들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는 사표였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얼마나 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법농단의 핵심 양승태 전대법원장이 법원에서 마지막 메시지로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교각살우 란 '쇠뿔이 좀 비뚤어졌다고 해서 쇠뿔을 고치려다간 소를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인데, 크고 작은 잘못이 있더라도 시스템에 혼란이나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옳다는 논리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세운 대법원의 시스템을 옹호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쇠뿔이 삐뚤어졌다고 누가 쇠뿔을 통째로 뽑겠다고 막 달려드나? 목숨을 위협할 정도라면 그냥 막 뽑나? 다른 방법을 찾지? 그냥 덮어두고 냅두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자신이 대법원의 목숨이 담긴 쇠뿔인줄 알았다 보다.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재판을 신성하게 진행해야 하는 것이 판사이지, 신성한 재판을 진행할 힘을 지녔다고 해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신성한것으로 간주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을 건드림으로써 재판의 신성함을 침해당했다고 여길것이 아니라, 재판의 신성함을 침해한 그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처벌받아야 한다.

 

<<외압에 흔들린 판사들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재판 독립을 지킨 판사들도 있었다. 그들로 인해 재판 독립이라는 가치가 훼손됐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어떻게 해야 할까. 햇빛만큼 강력한 정책은 없다. 투명성을 높이면 조직논리가 설 곳은 사라질 것이다. 시민들이 조직의 내부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하라. 조직의 문 앞에 걸린 빗장을 풀고 누구든 들어와서 볼수 있게 하라. 그것으로 조직논리 너머의 신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다. 문 하나가 열리면 다른 문들도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개혁은 연결될 수록 완벽해진다.

'사법농단' 사태는 구시대적인 시스템이 더이상 기능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내부자 몇몇이 입을 맞춰 은폐하면 감출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법원에도 교과서에서 읽은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이탄희의 저항은 새로운 세대의 계절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예고편이다. 뒤이어 나타난 희망의 징후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이다. '판사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작됐던 판사들의 자발적인 회의체가 법원의 공식 기구로 자리잡았다.

(p. 376, 392, 399>>

저자는 아직 갈길이 멀긴 하지만 개혁은 시작되었다고 희망의 씨앗을 기대하며 마무리 짓는다. 나도 믿고 싶다. 이참에 판사조직도 조직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정말 공명정대한 곳으로 거듭나기를 진심 바란다.

하지만 이탄희 판사는 자신의 꿈이었던 판사직에서 사직후 현재 공익변호사단체 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양승태와 수하들의 재판은 아직 진행중이며, 새로 대법관이 된 김명수 판사의 개혁은 가시화된 것이 없다.

국가의 정의를 세워주는 곳 법원에서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려면 소수의 판사들에게 기댈것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좀 더 많이 읽혀져야 하고, 재판은 계속 주시해야 하며, 올곧은 판사들에겐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국가들 - 누가 세계의 지도와 국경을 결정하는가
조슈아 키팅 지음, 오수원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누가 세계의 지도와 국경을 결정하는가

다시 던지는 질문,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지도에 없지만 실재하는 나라들의 경이롭고 안타까운 이야기>>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은 지구상에서 국가들의 지정학적 배치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됐는지, 그 배치 상태가 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큰 변화 없이 유지돼왔는지, 나아가 현 상태를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그것이 바람직한 일인지를 탐색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대표적인 예로 든 5개의 나라아닌나라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압하지야, 아크웨사스네, 소말릴란드, 쿠르디스탄, 키리바시.

이 다섯 국가의 현재 상황들은 국가란 무엇이고 국경이란 무엇인지 에 대해, 단순한 답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는 굉장히 복합적인 문제점을 내포한 것들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며] 에서 책의 주제와는 관계없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당황스러운 문장을 만났다.

<<트럼프는 인터뷰를 했던 기자에게 중국 주석 시진핑과 대화하는 동안 "한국이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 것이다.(p.29)>>

헐... 트럼프는 정말;;; 여러가지로 할말을 잃게 만드는 사람이다.;;;


1장 <국가 체제가 지배하는 세계> 에서는 [압하지야] 에 대한 이야기 이다.

[압하지야] 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분리주의 소수민족 거주지로 국제사회가 '조지아'의 영토로 인식하는 곳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를 하러 다닌 곳에서 내가 늘 들었던 불만은 다양한 민족 집단에게 엄연한 독립국 지위를 누린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강대국들이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토 문제가 불거지는 지역에서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결코 아니다. (p. 41)>>

 

압하지야 는 고유의 언어가 있는 독자 문화권으로,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엄연히 주권이 있는 왕국으로서 존재했다고 한다. 그뒤 조지아, 오스만제국, 러시아의 통치를 받으며 半자치 체제를 갖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러시아를 통치하던 시대에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의 자치 공화국으로 지정받았었다가, 1991년 조지가 가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벌어진 유혈 내전에서 압하지야의 자치는 막을 내렸고, 현재 압하지야를 향한 조지아 와 서구 세계의 대체적인 평가는 이곳이 러시아가 점령한 괴뢰 국가라는 것이다. 압하지야 인들은 자국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수많은 러시아군을 조지아 공격을 막기 위한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조지아나 러시아로 재병합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는 더이상의 새로운 국가의 출현을 원하지 않는다.


무주지, 현대국가 영토와 고대 정부와의 정치적 무연속성, 베스트팔렌 체제, 민족주의, 발견자우선주의, 민족자결주의 등 국가가 형성된 역사를 되집어 보면 현재의 국가과 국경선에 대한 생각들은 점점 혼돈에 빠진다.


<<전후 몇 년 동안 UN 회원국 자격은 국가 지위의 황금률이 됐다. UN 회원국 자격을 받았다는 것은 전세계 국가 공동체에 실제로 속한다는 '공인증명서'였다. 창설 당시 UN 회원국은 51개국 이었다. 그 후 회원국이 약 200개로 늘어난 과정은 탈식민지화, 즉 역사상 가장 큰 흐름으로 존재했던 '건국'의 이야기다. (p. 70)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신생국들은 윌슨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 제시한 것처럼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분포를 바탕으로 새로운 영토 국가로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과거 유럽 식민지에 그려졌던 국경을 기반으로 국가가 된 것이었으며,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탈식민지화의 물결로 당시 제3세계라고 불리던 지역에 수십 곳의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지만, 이 나라들은 수십 년 전 베를린이나 파리에서 유럽 열강이 그려놓은 국경선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이렇게 그려진 국경선은 해당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과 의논 한 번 없이 확정됐지만, 이제 개발도상국이라 불리게 된 이 신생국가들의 정부는 1945년 부터 지금까지 대체로 그 당시의 국경을 유지할 것을 요구해왔다. (p. 73)>>

 

현재 국가들의 건국과 국경선은 시작부터 이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강대국들에 의해 그어진 국경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곳저곳에서의 작은 독립국들의 요청은 여전히 강대국들에 의해 묵살되고 있다. 압하지야 도 그런 작은 곳이다.


<<냉전 시대에 기원을 둔 장구한 내전 끝에 1993년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2002년에는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했으며, 2011년에는 남수단이 수단으로부터 독립했다. 세계지도는 이제 정체 상태로 돌입했고 이후 변화 없이 유지됐다. 지도에 더 이상의 조정을 가하지 않으려는 까닭은 이해할 만하다. 예나 지금이나 국경선 변경에는 살상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국을 놓친 나라들에게 정체 상태는 가혹한 처사다. 이라크건 우크라이나건 캅카스건 간에 국경 유지는 그 자체가 바람직한 선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국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압하지야 같은 지역들이 탈퇴한 유사국가 이상이 되려면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1990년대 초반까지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면, 그런 집단의 운은 다한 셈이다.(p. 74)>>

 

크게는 세계대전 이후 작게는 소련의 해체 이후 국가들이 생겨났고 국경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그 뒤로도 몇개의 나라들이 생겨났다. 다만 그 나라들은 여전히 분쟁중이거나, 그 나라들을 보며 다른 지역에서 독립의 열망이 생겨나고 있어서 계속 작은 독립국들의 생성을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작은 독립국의 국가 인정은 독립에서 그치지 않고 인종청소로 이어져왔다는 문제가 있다) 그저 '유지' 만 하고자 하는 입장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애초에 잘못 그어진 국경선인 것을 어째야 할런지...


영토는 있으나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압하지야 대비 영토가 없어도 주권을 인정받고 있는 '몰타기사단' 이 있다. 전에도 몰타기사단 관련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일종의 봉사단체로서 그 역사성이 주권까지 만들어낸 특이한 집단이었다. 몰타기사단 의 예가 신생독립국을 원하는 압하지야에게 답을 줄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2장 <나라들 사이에 끼인 나라> 에서는 [아크웨사스네] 를 다룬다.

[아크웨사스네] 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 지대에 걸쳐 있는 원주민 보호구역 성격의 정치체이다. 역사적으로는 미국과 캐나다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곳이지만 국가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곳이다.


아메리카 를 신대륙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도사람도 아닌데 인디언이라고 불리며 원시종족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는 원래의 주민들은 캐나다 와 미국 이곳저곳에 작은 공동체 마을에 잔존해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아크웨사스네' 는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라 더욱 특이한 상황에 처해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회사까지 오고가려고 해도 미국의 승인 캐나다의 승인을 매일 같이 받아야 하는 곳인데, 주민들은 아크웨사스네 자치여권을 한번쯤 들이밀어 보고 거부당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는 그런 애매한...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현대 국가의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가 사회의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의 가독성을 높인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사회가 특정 지역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통제를 받을 수 있도록 일원화한다는 뜻이다. 현대 국가는 안정적이고 설명하기 쉬운 국민, 질서정연하고 획일적인 체제를 선호한다.

오늘날 인디언 국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시민권 및 영토의 가독성에 대한 도전이다. (p. 125)>>

 

사실 인디언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할 것 같다. 먼저 살고 있었는데 일방적인 침략을 당했고, 뒤늦게 국가를 세워보려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상대가 미국이니만큼 가능성이 없어보여서 더 안타까운 노릇이다. 영화에서 보는 인디언들만의 문화는 독특하면서도 약간 신비스러운 면이 있다. 그들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인정해주기만 해도 굳이 국가로서 독립을 주장하지 않을 것도 같은데, 캐나다에서나 미국에서나 인디언 원주민들의 생활은 몹시 열악하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체제가 이미 있으나 주권이 없는 아크웨사스네 를 마무리 하며 저자는 '에스토니아'의 전자시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는 전자 시민권을 제공하고 있는 세계 최초의 국가이다. 사실 그 시민권이 딱히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그런 정도의 권리라도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없는걸까?


3장 <보이지 않는 국가> 는 [소말릴란드] 에 대한 이야기 이다.

[소말릴란드] 는 소말리아 북부의 半자치 지역으로서, 국가로서의 요소를 제대로 갖췄는데도 국제사회에서 묵살당하고 있다고 한다.


<<소말릴란드는 어딘가에 있는 곳인 동시에 아무데도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 주된 이유는 세계의 다른 대부분의 지역이 이곳을 모르거나 이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p. 144)

국가의 지위는 법적 개념이지만 이를 얻는 일은 전적으로 정치적 과정이다. 어디가 국가이고 어디가 국가가 아닌지를 구분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무엇이건 간에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p. 147)​>>

 

소말릴란드는 소말리아의 북부지역이다. 해적과 내전으로 유명한 소말리아는 남부지역이다. 남부지역과 달리 북부지역은 비교적 오랜 기간 안정적 체제를 유지해왔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원래 독립국이었으나 식민지배를 당했다가 독립하면서 남북 지역이 합쳐져 소말리아가 됐고 이 두 지역의 통일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소말릴란드가 마주하고 있는 실망스러운 현실은 세계지도가 국제법이나 심지어 관습보다도 경로의존성에 의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들은 현 상태를 바꾸지 않으려는 관성에 빠져 있고, 국민들은 현 상태를 바꾸는 것이 몹시 어렵고 위험을 초래하리라는, 어느 정도는 정당한 우려를 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p. 165)>>

 

아프리카에는 미국의 절대적 지지에 힘입어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국 인정을 받은 남수단 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남수단의 분열과 내전 상황은 소말릴란드에 먹구름만 드리울 뿐이다.


<<20세기 동안 제국의 해체로 세계의 땅은 대략 200개 주권국가들로 쪼개졌고 이는 문제를 해결한 만큼 또 다른 문제를 남겨놓았다. 새로 국가가 된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 중 많은 수가 그 나라 사람이고 싶지 않다는 문제가 그것이다. 문제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엥서 특히 극심했다. 이 지역에서는 신생국가들의 국경이 영토 자체에 살고 있는 민족의 현실과 연관을 맺고 그려진 게 아니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열강의 정치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를 세웠던 국가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과거의 국가 모두 전 세계 최대의 민족자결을 향한 윌슨의 원칙에 매진하기보다는 거의 예외 없이 기존의 국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했다. 다시 말해서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은 독립을 해야 하되, 일단 독립을 하면 그 이상의 국경 재편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p. 169)>>

 

아프리카 와 중동 지도를 보면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직선으로 그어진 국경선들이다. 아프리카와 아랍은 동양이나 서양보다 다양한 부족체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국경을 이렇게 자대고 그은 듯 직선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분열이 일어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상황이다.


사실 우리나라 처럼 고유한 영토와 국경을 오랜 기간 유지해 오고 있는 국가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식민지 지배를 당할 때도 민족이 섞이거나 추방당하거나 국경이 무너지진 않았다. 그래서 아프리카와 중동의 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문화와 부족 관계없이 직선으로 그어진 국경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와서 이제 와서 아프리카와 중동을 부족별로 국가로 인정해 줄 수도 없다.

<<소말릴란드의 인정을 통해 국제사회가 아프리카 식민지 시대 이후의 국경들을 재고중이라는 신호를 보낼 경우 앞리카 대륙 전체의 민족주의 운동에 청신호가 켜져 새로운 내전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다. (p. 180)>>


 

나름대로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국가로서의 인정을 원하는 소말릴란드는 세계의 철저한 무시 속에 그 어디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소말릴란드와 대비하여 저자는 [리버랜드] 라는 지역을 소개한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두 나라에게 다 별 관심을 받지 않는 지역으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사는 곳이다. 무시와 방치를 즐긴다고나 할까... 하지만 소말릴란드는 선진국들의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4장 <독립을 향한 꿈> 에서는 [쿠르디스탄] 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쿠르디스탄] 은 흔히 쿠르드 자치구라 불리는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을 말한다. 이곳은 월드 뉴스의 헤드라인데 단골로 등장하면서도 현재의 중동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시도에서 계속 좌절을 맛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쿠르드족에게 로잔 조약은 서구가 저질러왔던 여러 배신 중 하나다. 서구의 배신은 쿠르드족의 현대 민족주의 운동을 규정해왔다. 쿠르드족은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조약에 제시된 약속을 늘 환기시키곤 했다. ( p. 201)

오늘날의 지구상의 국경선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질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든 이유였다. 모든 국경에는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국경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대로 유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의 시대, 골치 아픈 통념은 국경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아니다. 국경 재편이 민족 간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해결책이 되리라는 통념 역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IS가 등장하고 리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가 몰락하면서 이런 생각이 세를 얻게 됐다. (p. 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점에서 현 상태의 국경이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새 국경을 그리지 않는 것일까? 불행히 역사상 존재했던 국경 분할은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효과를 더 많이 낳았다. (p. 231)>>

 

중동의 국경문제는 종교문제와 얽혀 있어서 더욱 복잡하다. IS 때문에 인식은 더 나빠졌고, 분리주의는 독립으로 이어지는 힘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살던 곳에서 더이상 살지 못하고 난민이 되어 떠도는 중동 사람들은 이제 무너진 국가의 의미도 국경선의 의미도 다 필요없이 그저 살던 고향에서 살고 싶은 소망만 가지고 있다지만, 그 소망은 결국 분쟁으로 표출되고 있을 뿐인지라 그 해결이 점점 요원해지고 있는듯 하다.


쿠르디스탄 을 다룬 4장의 끝에 무국적자의 삶을 간략히 다루고 있다. 소련의 여권을 가지고 외국에 나왔다가 해체이후 무국적자가 되거나 동독의 소멸후 무국적자가 되거나 중동난민이 되어 떠돌다 무국적자가 되거나 사연은 다양하지만 무국적자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인은 외국만 나가면 열렬한 애국자가 된다는 데 무국적이라니 도대체 상상이 안간다...


5장 < 지도에서 사라지는 나라들 > 에서는 [키리바시] 라는 섬나라가 나온다.

[키리바시] 는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섬나라인데, 기후 변화 때문에 점점 가라앉고 있어서 '물리적 영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도 존속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새롭게 던지고 있는 나라 라고 한다.


키리바시는 앞의 나라들 처럼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다. 국가로 인정받고 있기는 한데, 기후 변화에 의해 가장 먼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불운의 국가라서 언제까지 국가로 존재할 수 있을 지 알수 없는 나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자, 기댈 만한 천연 자원도 거의 없고 서로 멀리 떨어진 섬들로 이뤄진 키리바시는 그 존재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해 보이는 곳이다. 키리바시는 신생국가 중 하나로서 197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20세기 밀어닥쳤던 탈식민지 물결의 맨 끝에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키리바시는 세계지도를 재편하는 다음번 주요 물결의 최전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정치적 경계 뿐 아니라 물리적 경계라는 문제에 의문을 제기할 뿐더러 국가의 탄생이 아닌 소멸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p. 258)>>

 

영토가 없어도 주권이 있는 몰타기사단 같은 곳도 있지만, 영토가 있는 상태에서 주권을 행사하던 국가가 외국의 침략이 아닌 자연재해로 영토를 소실했을때, 그 주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바다의 제해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국민들은?


<<저자가 키리바시의 전 대통령에게 물었을때,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이 나라가 세계지도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입니다. 키리바시인들은 종말이 올 때까지 여기 있을 겁니다. 우리 땅이 없어진다고요? 북극 만년설이 녹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기에다 우리를 데려다놓으시고 그런 계획을 세우셨을 리가 없어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p. 279)

타라와를 방문하는 동안 내가 느낀 것은 대부분의 키리바시 주민들이 대체로 이와 가까운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태도는 전적인 부인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무관심이 만연해 있는 것 같았따. 이곳 주민들은 기후가 변화하고 있다는 데 동의했지만 섬이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p. 280)>>

 

정말 놀랐다. 세계 곳곳에서 인터뷰가 오고 관찰을 하고 모두가 곧 사라질 섬이라는데 정작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갖고 있다니... 어떤 대통령은 국민들을 이주시킨다며 인접국의 땅을 사기도 했지만 그 땅은 상징적일 뿐 이주계획은 현실성이 없어보인다....이래저래....


<<이 섬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될 경우에 일어날 일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막는 정신적 장벽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계획을 차단하는 주된 걸림돌이다. 키리바시는 미래에 닥칠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세계인들의 태도를 반영하는 축소판인 셈이다. 지도에서 사라지는 나라, 우리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따라서 아직 우리는 이런 소멸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p. 282)>>

 

미래에 닥칠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는 환경문제에서 가장 많이 두드러지고 있다. 아직 현실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망치고 있는 자연이 언제 어떻게 복수해올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가라앉을 섬나라까지는 아니지만 급속히 변화는 기후와 오염되가는 환경은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줄 지 계속 이렇게 정면을 마주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다가 어떤 사태가 될지 정말 걱정스럽다.


<<확립된 지도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국제 기구와 강대국들은 지도를 현재 상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현재의 지도가 가능성 있는 대안보다 반드시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수백년간의 경험이 국경 재편의 파국적 성격과 위험성을 가르쳐줬기 때문이다.(p. 310)

현상을 유지하려는 논거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정말 현상 유지가 옳은가 하는 물음은 던질 가치가 충분히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 속하는 기존 국가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조직체가 아니다. 이들의 유용성과 가치는 세계 전체뿐 아니라 국경 내에 살고 있는 자국 국민에게 안전과 복지를 제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가 이런 순기능을 실행하지 못할 때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국경 유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국경을 개선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p. 311)>>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문제의식 조차 갖지 않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질문해 보는것, 그래서 생각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일단 문제자체를 벗어나 답으로 가는 길에 한발짝 걸음을 시작한 것일 수 있다.


책표지 뒤에 다양한 추천사들이 있는데, 그중 <지도에 없는 마을> 저자가 쓴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전혀 모르는 세상의 영역, 전세계에서 가장 취약하지만 확고한 희망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국가들과 만나게 된다. 경이롭고, 따스하고, 절박하고, 안타까운 여정이 될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는 <지도에 없는 마을> 을 읽었다. 이 책을 읽을 때 가볍게 시작했다가 쏟아지는 무거운 쟁점들에 쉽게 책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정치적 갈등이 있는 곳과 버려지고 감춰진 장소들부터 상상의 장소까지 모두가 논쟁적인 곳들이었지만, 그야말로 마을 단위여서 신기한 마음반 놀라운 마음 반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국가들> 을 읽으면서는 실재해 있는데 보이지 않는 취급을 당하는 국가들의 이야기를 국가단위로 역사와 정치성을 이해하며 읽다 보니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생전 처음 듣는 나라들의 힘들고 아픈 이야기... 하지만 세계는 점점더 자국의 이익만을 따지는 대세에 있으니 이거 참 안타까운...

그러나 한사람한사람 이 국가들을 알게 되고 보게 된다면 보이지 않는 국가 에서 보이는 국가 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미국뉴스만 듣고 일본뉴스만 볼게 아니라 세계의 뉴스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타적 마음으로야 그 나라들이 다 잘 됐으면 좋겠지만, 이기적 마음으로라도 그 나라들에 관심은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 국가들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멀리서나마 그곳의 소식을 알아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언제 어떻게 우리와 엮일지 모르는 세계의 실상을 좀더 빨리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가 대체 뭔가요? -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간결한 자본주의 설명서
조너선 포티스 지음, 최이현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간결한 자본주의 설명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세계 경제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를 명쾌하게 설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표지의 수식문구들이 화려하다. 하지만 읽고 나면 저 문장들 하나하나가 이 책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50 CAPITALISM IDEAS YOU REALLY NEED TO KNOW  라는 원제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50가지 자본주의 아이디어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50가지의 키워드들로 작가는 자본주의가 대체 뭔지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고 있다.


저자는 경제학자이다. 경제학자이면서 다수의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경제 논평도 진행해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글은 매끄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진행된다. 가끔 나오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이래도 되나? 싶지만 그래서인지 나름 통쾌한 맛도 있다.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나 제국주의 같은 역사와 정치의 핵심 개념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고, 애덤 스미스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 그리고 누구보다 역설적인 인물인 카를 마르크스 등 위대한 현대 사상가들이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도 간단히 소개할 것이다.

이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도 많으며, 이견이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내용도 많다. 하지만 부디 이 책이 자본주의라는 주제의 외연과 중요성을 충분히 전달해서,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으면 좋겠다. (p. 7)>>

 

현재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알아야 한다며 한때 마르크스 의 자본론이 필독서처럼 여겨졌을 때 잘 이해도 안가면서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그 빨갛고 두꺼운 6권의 책을 표지만 한참을 노려보다 1권上 에서 결국 멈추었던 기억이 난다. 경제학자도 아닌데 그 자본론을 굳이 읽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자본주의 는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자본론의 현대적용판 단어집처럼 개념하나하나를 쉽게 설명해준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건지 알게 하려는 납득하게 하려는 저자의 성의가 반갑다.

 

책은 매 챕터마다 이렇게 주제의 간단한 개요와 타임라인이 있다.

주제마다 분량이 서너장 정도라서 쉬어가며 읽기에도 좋고 내용전환도 빠르고 주제에 대한 굵직한 타임라인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잘못 생각한 지점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 역할 중 하나만 부여했지만, 사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상호작용하며, 그 방식이 전부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대부분이 자본주의와 맺고 있는 모순된 관계를 설명해준다. 대체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며한 사실이다. (p. 10)>>

 

저자는 1장부터 매우 직설적이다. 시작부터 마르크그가 잘못 생각한 지점을 들춰낸다. 읽고 보니 정말 그랬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노동자 자본가는 자본가 로 역할 을 지정해 두고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자본을 소유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면서 회사의 주식을 소유한 자본가 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소비에서 무척 섬세하게 얽혀있는 관계다. 어느 하나의 입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각 장의 마지막에 항상 핵심문장을 적어두었다. 본 내용에서 약간 이해가 안가거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이 마지막 문장에서 만큼은 매번 이마를 탁 치게 된다.


<<정부의 개입은 전반적인 법적 틀을 마련할 때 또는 특정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생산과 소비의 종류를 언급할 때 필요한 개입과 규제의 종류에 따라 정의되어야 한다. 자유가 곧 무정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 26)

미래의 성장 수익은 자본에게 더 많이, 노동자에게는 더 적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 승자는 마르크스 이다. (p. 39)>>

 

저자는 정부의 적절한 개입의 필요성과 마르크스 의 이론이 여전함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자본주의 와 민주주의 혹은 자본주의 와 자유주의 는 등가 관계는 아닌 것 같다.


<<결정적으로 각 나라들은 '특정 상품'에서 비교우위를 가지며, 그로 인해 모든 나라가 자유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다. (p. 56)

미국의 경제사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 그렇다. 미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과 수많은 경영 혁신 그리고 에너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손을 반복해서 들어올린 것은 새로운 경제활동 영역을 개척해 손이 새로운 자리에서 계속 마법을 부리도록 한 정부이다. (p. 65)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적 효율성이 달성되는 특수한 방식일 뿐, 도덕성이나 공정성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면 자원이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말은 스미스의 이론이나 현대 경제학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p. 66)>>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자유무억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세계는 진정한 자유무역을 해온 적이 없다. 미국은 그들의 역사에서 도덕성과 공정성과는 관계없는 효율성만을 계산해서 성장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대 경제학에서 공정한 배분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노조가 쇠퇴하게 된 것은 정부와의 충돌 외에 광범위한 경제 변화 때문이기도 했다. 경제가 산업 및 제조업 중심에서 소규모 작업장, 여성 노동자 수의 증대, 다양한 특징을 가진 일자리 등 서비스 중심으로 변화하자, 생산 설비에서 일하는 숙력된 남성 노동자라는 노조원의 낡은 이미지에 부합하는 노동자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노조는 주로 사양 산업이나 공공 부문에 종사하는, 수가 점점 줄어드는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단체로 여겨지고 경제 발전의 장애물로 묘사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조 가입률이 대폭 감소했다. 그에 따라 노조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다. (p. 116)>>

 

그러고보니 내게도 노동조합 이라는 단어는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노동자의 이미지와 무척 많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70년대 우리나라에 노동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을때 여공들의 파업은 그리 큰 힘을 얻지 못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만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현장노동직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매년 노동절의 집회규모는 작아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호응하는 사람들도 적어지고 있다.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가 되고 가리봉동이 가산디지털단지가 되었는데 여전히 공장노동자들의 노동조합만으로 노조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사실 문제가 있다. 일자리는 다변화 되고 세분화 되었다. 비정규직과 알바 그리고 서비스직과 프로랜서직이 늘어나고 있는 이때 예전의 노동조합형태로는 무리가 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연대방법을 찾아야 한다.


<<21세기 초인 지금,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화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덜 발달했지만 민주화된 곳도 많다. 그렇긴 하지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관관계는 비교적 긴밀하다. 정책적으로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몇 안되는 나라들은 민주주의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은 나라들은 부의 대부분이 천연자원에서 직,간접적으로 나온다. 결국 이제는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세력으로서 재산권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하는 부루주아 계급도, 정치권력과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산업노동자 계급도 존재하지 않는다. (p. 165)>>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일개념이 아닌데, 사회주의 공산주의 와 섞여서 마치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져온 것 같다. 경제와 정치는 밀접하지만 반드시 한가지 형태를 띠지는 않는다. 세계는 지금 정확히 자본주의라고도 민주주의라고도 볼 수 없는 몹시 혼합되고 혼란스러운 체제들이 뒤섞여 있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조세와 규제 정책을 통해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는 극렬히 반대하면서도, 낙태와 결혼, 이민과 같은 개인적 자유를 제한하는 정책은 지지한다. 영국과 유럽국가들에서는 내부 갈등이 종종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형태로 표출된다. 유럽연합은 소위 과도한 규제와 간섭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로운 교류와 이동을 허용하려고 노력한다. (p. 171)>>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미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많은 것들이 모방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과 굉장히 다르다. 미국은 로비가 인정되고 기업인이 정치인인 경우가 많으며  신대륙으로서 구지배층과의 갈등이 없었던 곳이다. 또한 종교적 통일이 강한 곳이다.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성서에 손을 언고 선서를 한다) 미국보수주의자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한국정치인들을 볼때 많이 답답하곤 하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가 없는 나라의 지금을 따라하기보다 우리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미래인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산업화 이전에 승전국은 패전국에서 쉽게 물질자산과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심지어 그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한 국가의 부는 생산력에 좌우되므로 몰수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 복잡한 생산기술로 부를 창출하려면 노동력과 전문성이 필요하므로, 결국 협력할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는 정복할 목적으로 일으키는 전쟁은 유익하지 않다. 더구나 20세기 들어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어 산업국가들 사이에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관련된 모든 국가들이 손해를 입게 된다. (p. 220)>>

 

뺐고 빼앗은 전쟁의 시대는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곳곳에서 아직 작은 전쟁들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 물리적 전쟁이 아니어도 경제전쟁이니 문화전쟁이니 자꾸 '전쟁'들을 하려 한다. 그냥 좀 같이 잘 살면 안되나;;; 적어도 자본주의가 물리적 전쟁은 없애고 있다는 것에 안도를 해야 하나;;;


<<미국의 자본주의는 유럽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유럽에서는 산업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조와 정당들이 근로조건을 규제하고 정치권력을 나누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유럽의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이 정치,경제적으로 갈등하는 가운데 발전했다.

미국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에도 대중에 영합한 반자본주의 운동과 노조 활동이 있긴 했지만, 유럽처럼 권력을 쟁취하거나 세력을 확대하지는 못했다. 또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주류 정당도 출현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 무정부주의와 같은 유럽의 이념들이 이민자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가기는 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미국은 산뜻하게 새출발할 기회의 땅이었다. 미국이 누구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미지는 지금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그 결과 미국의 자본주의는 여러 면에서 유럽과 같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상당히 달라졌다. 노동자의 권익은 훨씬 적게 보호받았고,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 소유주와 경영진의 권한은 더욱 강해졌다. 또한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데, 이것은 유럽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사회적 안전망 역시 상당히 취약하다. 미국에는 여전히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없고, 유럽보다 노동 시간이 훨씬 길지만 유급휴가는 더 짧다. (p. 241)>>

 

저자는 미국이 그동안은 자본주의 경제의 대표모델로 여겨져 왔고 여전히 중요한 나라지만, 이제는 여러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미국은 세계적인 나라이지만 점점 세계를 생각하지 않아가고 있고, 기회의 땅이었으나 그 기회는 자본가들에게만 주어졌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결코 미래지향적이 아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식으로 간다면 미국의 힘은 축소될 것이다. 세계는 저 혼자 잘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일자리를 없애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은 옳았지만, 그것의 효과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익히다. 심지어 정부는 실업수당을 제공해 노동자들이 기존 일자리를 포기하고 능력에 맞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함으로써, 마찰적 실업을 긍정적으로 이용한다. 반면 구조적 실업은 저절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유용한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제도, 고용주와 구직자를 연결해주는 고용지원 정책 등 노동시장이 효율적으로 기능하게 해주는 조치들을 통해 구조적 실업을 줄일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에 대한 수요는 저절로 부족해지지 않으므로, 경기적 실업을 다룰 때 정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p. 257)>>

 

세계는 실업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업률이 높다. 특히나 한국에서의 청년실업은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개인도 아니고 기업도 아니고 정부다. 정부의 정책이 정말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국회는 정책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국회를 텅텅 비우고 쓸데없는 이슈논쟁만 하느라 바쁘다. 자신들의 권력유지에만 혈안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국민을 위한 정책결정과 국가를 위한 제도개선이다. 그들 본인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진화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기업의 성공 매커니즘은 종이 진화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진화는 무작위의 돌연변이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일부 돌연변이는 개체의 생존과 재생산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이 변이는 다음 세대에서는 좀 더 일반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기업'의 생존은 시장이라는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에 좌우되므로, 결국 기업을 관리하거나 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에 좌우되는데, 이것은 무작위로 일어나지 않는다. (p. 268)>>

 

자본주의를 생태계와 비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진화론처럼 자연스럽게 냅두면 된다는 것은 무책임하다. 자본주의는 저절로 진화하지 않고 우성생식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철저히 인간들의 선택에 따라 변화한다. 선.택.적.이.다.

선택은 빈곤문제에서도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에 도전하는 태도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인류에게 유익히다. 하지만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가 제공하는 기회를 활용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다. 기본 소득이나 그와 비슷한 제도들이 답의 일부가 될 수 는 있다. 하지만 훨씬 중요한 것은 아마도 물질이 넉넉한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을 재고하는 일일 것이다. (p. 313)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변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 이다.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생각할 때 자본주의는 좀더 인간적인 경제제도가 되는 걸까?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실제로 경제사를 살펴보면, 기술 발전이 생산성을 향상시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정확히 사실이다. 1841년에는 영국 노동자의 20%이상이 농업에 종사했지만, 오늘날에는 1%만 농업에 종사한다. 당시에는 30%이상이 제조업에 종사했지만, 오늘날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제조업 종사자가 줄었음에도, 생산량은 그때보다 훨씬 많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직업은 바뀌었다. 지금은 노동자의 약90%가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유사 이래 취업률이 그 어느때보다 높다. 과거보다 훨씬 적은 인력으로 더 많은 음식과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유해졌고, 일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은 경제 조사를 하거나 예술 활동을 하거나 운동선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p. 315)

아직은... 두려워하지 말자. 전통 경제학과 역사는 이런 변화가 일부에게는 고통스럽겠지만, 경제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것이므로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이득을 볼 거라고 주장한다. 기계가 현재 사람이 하는 일을 더 빨리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부유해지고 다른 할 일을 찾게 될 것이다. (p. 317)

심각한 문제는 지금과 같은 자동화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쩌면 이것이 자본력과 노동력 사이의 균형 상태를 영구적으로 바꿀지 모른다는 점이다. (p.318)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했지만, 그 계승자들(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과 투표권을 요구해 경제와 국가를 재건하려 한 차티스트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체로 성공했다. 그러므로 진짜 시험은 우리의 정치 및 사회 제도가 그 도전에 응할 것인가이다. (p. 319)

다시 정치다. 자본주의 라는 경제제도를 이해하려고 할 수록 발을 걸고 넘어지게 하는 것은 다시 또 정치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결국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을 다시 떠올려보면, 미래 사회와 경제의 특징은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규정될 것이다. 정부나 기업, 개인이 이 일을 하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방시으로 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발전은 잠재적으로 현재의 자본주의 모델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p. 338~339)

하지만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복지국가를 만든 것이 '자유시장' 이나 자본가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집단적 노력이 경제 발전을 사회적 진보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p. 339~340)

저자는 마르크스의 핵심사상과 낙관적 미래전망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중국이 점점 세계경제에서 중요해지고 미국이 점점 세계경제에서 약화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고 로봇이 인간의 직업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 가능성을 믿는다. 그 가능성이 실현성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이 의미있어지는 결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레인 홈트 입체 미로 - 가상도시 3D 미로 탈출 게임 브레인 홈트 (Brain Home Training)
토마스 래드클리프 지음 / 폴더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상도시 3D 미로 탈출 게임

이제 미로게임도 3D로 즐긴다!>>

 

이 책은 그림책 크기의 커다린 미로게임 책이다.

차를 타고 이동한다거나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린다거나 등등의 잠깐의 시간적 틈이 생길때 요즘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그 몇분 혹은 몇십분의 시간도 알뜰히 스마트폰을 이용하려고 든다.

하지만 그런 아이를 그런 상대방을 마주보는 입장에선 썩 달갑지 않은 경우가 많다.

눈나빠지는데... 혹은 대화를 하지... 싶으면서도 이미 스마트폰에 관심을 돌린 이후엔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다.

그럴때 일종의 플레이북이 유용할 때가 있다.

책을 펼치면 책장 한가득 흑백의 도시가 나타난다.

네모표시에서 출발해서 동그라미표시로 가면 되는데

훌쩍 뛰어넘으면 될것 같은 저 거리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꼬불꼬불 돌고돌다 보면 어느새 책장만 뚫어져라 보게 되고 집중해서 길을 찾게 된다.

너무 어지럽고 헤깔리다고 중도포기하려 한다면, 잠깐!!! 뒤에 해답이 있다. 기서 힌트를 조금 얻어 다시 해보는 것도 ㅎㅎ

숫자를 좋아한다면 스도쿠나 말하기를 좋아한다면 단어퍼즐이나 끝말잇기를 해도 좋겠지만

이것도저것도 아니라면 누구나 만만하게 해볼 수 있는 것이 미로찾기 가 아닐까?!

게다가 입체 미로찾기다 보니 중고등학생이나 어른이 하기에도 쉽지 않다.

쉽지 않은 것을 해보라고 줘야 해결했을 때 더 뿌듯하고 하는 내내 긴장감이 있기 마련이다.

스마트폰 좀 그만했으면 싶을때, 차안이나 기차안에서 식당이나 카페에서 (누가 보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보일것 같은) 이 책을 펴놓고 미로찾기를 해보게 하는 건 어떨까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