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에티켓 -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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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

비로소 죽음에 대한 인간의 예의를 만나다 (표지문구 中)


저자는 1976년생의 저널리스트이다.

몇년 전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을때 삶의 출발에 대한 글을 읽는데 심취해있던 그는 죽음에 대한 책도 그렇게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찾아보니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늘 질문을 던지고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조사하기 시작했고, 조사할 수록 자료가 충분히 조사되지 않는 것에 놀라며,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죽으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죽음은 언제 시작되는가?

죽음의 길은 어떤 경과로 진행되는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등의 질문을 갖고 저자는 죽음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 책에 담았다.

사실 죽음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그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죽음일 뿐, 단 한 번도 다인의 죽음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확실한 죽음을 보지 않고 회피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p. 12)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하면 대부분은 두렵거나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사고방식을 제외했을때, 죽음은 곧 끝 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고, 종교가 있건 없건 죽음의 과정은 알아두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떤 길을 택하든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완전히 해결이 안됩니다. 죽어간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으니까요. 죽어 간다는 것은 배울 수가 없거든요. (p. 45)


죽음은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죽음의 과정을 물리적 실체로서 알려주고자 한다.

서른부터 심장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마흔부터는 근육이 탄력성을 잃습니다.

쉰부터 뼈의 밀도가 낮아집니다.

예순부터는 평균적으로 치아의 3분의 1이 빠집니다.

일흔부터는 두대골 속의 뇌가 줄어듭니다.

당신은 낡아질 대로 낡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체계는 부서집니다. 죽음 역시 천천히 그와 동시에 충분히 빨리, 그렇게 진행됩니다. (p. 49)


저자가 말하는 죽음의 환경은 대부분 병원이다. 요즘의 죽음의 형태가 대부분 그러하기에 어쩔수 없다고 보지만 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과정 그 자체의 모습을 묘사한다.

죽음 전의 신체 상황, 죽었을때 사망선고가 내려지기 위한 조건, 죽음 이후 장례식 전까지 기간동안 일어나는 신체의 변화 등 몸을 기준으로 죽음의 묘사를 한다. 그렇게 죽음을 영적인 것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로 대면하게 한다.

1분마다 100여 명이 죽습니다. 시간당 거의 6,500명이 죽습니다. 하루에 15만 명이 죽습니다. 각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저 사망자들입니다.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것, 그의 죽음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의 역설입니다. 죽음이란 건 완전히 일상적인 과정이고, 그래서 세상에 그보다 더 보편적인 현상도 없습니다. 탄생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우연히 선택된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p. 93)


죽음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특별한 사건이지만, 사실 같은 시간에 나도 모르는 사람들과 죽음의 동지가 되어 죽음을 함께 맞이한다.

같은날 같은시 다른 곳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생일이 같다는 것과 사망일이 같다는 것은 생면부지의 관계일지라도 묘한 동지애를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껴서 좀 재밌기도 했다.

혼자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함께 라고 생각하면 덜 두렵지 않겠는가? ^^

저자는 장례식 과정도 상세히 묘사한다. 그리고 죽기전에 자신의 장례준비를 성실히 할것을 조언한다.

사실 죽고 나면 죽은 당사자는 이후의 상황을 전혀 모른다. 장례식은 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장례식을 잘 정리해놓고 가면 남은 사람들은 좀더 편안한 슬픔을 누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피라미드를 세우고, 죽기 전에 자신의 묘지터를 찾고, 자식들 앞에 자신의 수의를 짜놓는 선조들의 자세는 그 숨은 뜻이 어떠했건 필요한 일이었다. 저자는 죽음의 실체를 신체적 묘사와 함께 그 법적 의미를 이해시키고, 주변정리를 하는 과정을 통한 이런저런 마무리를 꼭 해놓기를 조언한다. 죽음의 에티켓은 죽음을 영적 믿음으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물질적 실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오직 당신 자신의 죽음입니다.

당신이 탄생한 그 순간부터 반드시 있게 될 확실한 종결.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일,

그래요,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은, 나는

준비해야 합니다.

내 삶이 오직 나 자신의 방식이었던 것처럼

죽음 또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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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 세계 사랑으로 어둠을 밝힌 정치철학자의 삶,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추천도서 누구나 인간 시리즈 1
알로이스 프린츠 지음, 김경연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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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사랑으로 어둠을 밝힌 정치철학자의 삶

지금은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할 시간

한나 아렌트의 삶과 작품을 처음 만나는 이들을 위한 선물과도 같은 책! (표지문구 中)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 제대로 읽어본 책이 없었다. 계속 이런 저런 책들에 밀려 관심책으로 찜해두기만 했을뿐 새로 나온 책들에 자꾸 순서가 밀려나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책저책에서 조금씩 언급된 그녀의 책 일부분이나 생각의 일부분을 읽게 되고,

특히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 썼다는 '악의 평범성' 은 심리서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해서,

점점 더 궁금하긴 했었다.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읽기전에 이 책을 읽게 된것은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통해 전기로 그녀의 삶과 생각을 읽게 된 것은 앞으로 그녀의 책들을 읽을 때 배경정보로 충분히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이었다.

이 책은 전기다. 저자는 전기작가다. 전기는 위인전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전기는 인물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있다. 마음에 든다.

한나 아렌트 라고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녀의 직업은 뭐였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곤 했다.

작가? 사상가? 철학자? 평론가? 교수?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에 써있던 '정치철학자' 라는 단어가 처음 보는 듯 눈에 들어온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철학자 였다.

내게 철학은 순수이론학문이라는 지배적인 고정관념이 있었던가 보다.

심리서에서 한나아렌트의 글을 보고, 철학서에서 한나아렌트의 글을 보고, 사회사상서에서 한나아렌트의 글을 보면서 그녀가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었다. 데카르트 나 칸트나 헤겔 같은 철학사상의 처음과 끝을 잇는 사상의 체계가 그녀의 이론에도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어서 그녀의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하는데 하며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삶을 알고 나니

1906~1975 이라는 시기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격동의 세월이었는지를 다시한번 알고나니

그 속에서 순수이론학문적 철학이 얼마나 무용지물이었을지 새삼 깨닫게 되고나니

그녀가 행동형 정치철학자 가 될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 유복하고 전통종교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런 분위기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자아이임에도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고 총명한 아이였다.

유태인과 독일인 사이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전쟁과 하이데거와의 불륜적 연애를 통해 평생 그녀의 자아를 따라다녔다.

전쟁을 밑천삼아 급격한 성장을 하던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본격적인 정치철학자로서의 삶을 만들어가는 자양분이 되었다.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세계사를 현실에서 접하던 그녀의 지적호기심은 한분야로 점철될 수 없는 그녀의 책들을 쓰게 했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의 사상서들에 비교하면 현재 덜 읽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치즘과 유대인박해의 중심에 있는 독일인들과 반공 매카시즘의 중심에 있던 미국인들 사이에 있던 한나아렌트의 진보적인 생각은 조선인박해와 반공전쟁을 경험한 한국인들이 읽기에 굉장히 끌리는 부분이 많았었다. 왜 국내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이 그다지 많이 읽히고 있지 않은지 의아해질 정도였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뭔가를 깨닫게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노동하기만 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며, 작업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였다.

그녀는 평생 사유하는 삶을 살았고, 그 사유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에 때로는 인기를 얻고 때로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시류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계속 근본적인 것을 사유해 나갈 뿐이었다.

평생을 '진정'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삶은 굉장히 인상적인 삶이었다.

그녀가 했던 사유는 지금의 현실정치에도 반영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 같은데, 언제 제대로 그녀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될지 알수 없어 인상적인 구절들을 좀 길게 옭겨 놓아 본다.

그녀에게 하이데거가 숭배하는 천재였다면, 야스퍼스는 존경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이성으로 향하도록'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수십 년 후에 고백하듯이 야스퍼스였다. (p. 64)

그녀는 대부분 자신이 몰두하고 싶고 대결하고 싶은 특정 이념들에 끌려다녔다. (p. 70)

 

유대인 증오는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이지, 개인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나 역시 정치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p. 85)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유대인 주거지는 아랍 이웃들과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더불어 살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족국가적 계획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 그녀가 염두에 둔 것은 일종의 지중해 연방 혹은 그보다 훨씬 큰 유럽 민족의 연방으로서, 여기서 팔레스타인은 제자리를 찾고 더 이상 다수와 소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각기 다른 민족적, 정치적 요소들이 같은 권리를 갖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 보았다. (p. 114)

 

집단 책임 혹은 결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임이란 한 개인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쓴다. 누군가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나치가 악마적인 계획에 이용할 수 있었던 특정 유형의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유형은 광신자나 사디스트 혹은 치정 살인자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가장, 다시말해 자신의 사생활을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가정을 충실하게 돌보는 가장' 이다. (p. 123)

 

민주주의란 폭력적인 방법으로 수립할 수 있는 어떤 완결된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논거였다. 민주주의란 '살아 있는 것' 이며, 의견의 일치만큼이나 대립도 필요하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이 생명력을 배앗길때 파괴된다. (p. 147)

 

전제정치에서의 삶은 공포와 불신으로 규정되며, 공화정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신념이 지배적이고, 따라서 '혼자가 아님'이 기쁨인 반면, 전체주의적 지배의 중심 경험은 고립이다. (p. 159)

 

전통적으로 정치적 행위를 노동의 피안에서 인간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장으로 알고 있는 곳에서, 마르크스는 여가와 한가로움밖에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이러한 여가는 노동과 마찬가지로 생산과 소비의 법칙에 종속된다. 노동과 소비의 이러한 순환 속에서 인간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되던져지며, 한나 아렌트가 근대 세계의 특징으로 보는 '고립'이 생겨나는 것이다. (p. 166)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사적인 영역' 과 '공적인 영역' 이 두 영역이 서로 겹치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각 영역은 자기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고 고유의 행위를 요구한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되거나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으로 된다면 '큰 불행'이 발생한다. .... 그녀에게 사랑이란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며, '비정치적'인 것이다. 반면 유대인들의 운명은 두드러진 정치적인 문제이다. (p. 190)

 

그녀에게는 세번째의 영역, 즉 '사회'의 영역이 있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단체, 협회, 공동체들이 형성된다. 한마디로 말해 차이가 생겨나는데, 이는 전혀 정당하며 법적인 조치를 통해 평준화될 수도 없고 또 평준화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에서 중요한 평등-나쁜 의미에서 정말로 획일화된 대중사회를 원하지 않는 한-사회에서는 실현될 수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오직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녀에게 궁극적인 문제는 '어떻게 차별을 근절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차별이 정당한 사회라는 영역에서 어떻게 그것을 제한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러한 차별이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하여 황폐와시키지 못하게 할 수 있느냐' 이다. (p. 191)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왜 전체주의에 관한 저서에서 했듯이 '근본악' 이라 말하지 않고, '평범한 악'이라고 말하는 것을 더 옳다고 여겼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 사실 악은 언제나 극단적일 뿐 근본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은 깊이가 없으며 또한 마성도 없습니다. 악이 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버섯처럼 표피에서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선이며, 언제나 선만이 근본적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보았다. (p. 234)

 

그녀는 그런 비난들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 경우는 그녀의 책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왜곡된 '이미지'가 문제인, '정치적 캠페인' 혹은 '사냥' 이 행해지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내팽개칠 수 있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고, 그것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고 설명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p. 235)

 

"나는 언제나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대로 계속되는 것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게 죽음은 언제나 유쾌한 동반자였습니다. 서글픔 같은 것은 없습니다."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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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 / 단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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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태양이 불타는 센타우루스성 알파 삼중성계 제 196호 문명, 항성 간 함대가 지구를 향해 출발한다. "너희는 벌레다!"

이곳에 오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이 세계를 얻는 것을 돕겠습니다. 우리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표지 中)

 

 

언제부턴가 SF문학 관련한 글에서 자주 눈에 띄던 이름이 '류츠신' 이었다. 특히나 '삼체' 라는 제목은 꽤 많이 들었었다.

얼마전 류츠신 의 한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대한 소개를 티비프로그램에서 본 계기로 '류츠신 SF 유니버스' 시리즈 중 일부를 읽었었는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SF소설집으로 이만한 작품이 없겠다 싶을정도로 탁월했다. 청소년 뿐만이 아니라 SF문학이 생소한 사람들이 읽으면 폭 빠질만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무엇보다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묘사들이 SF세계를 현실세계로 느끼게 할 만큼 현실감을 높이고 있어서 대단하다 싶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삼체' 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무척 뜻밖의 전개였다.

지구문명 vs 외계문명 이라는 기본설정이 SF가 맞고, 다른 작품에서 보였던 과학적 사실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탁월한 것도 맞는데,

SF 소설이라기 보다는 역사소설 처럼 혹은 소설이 아닌 과학책처럼 심지어 때로는 철학책처럼 읽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한번에 훅 빠져들어 읽어진다기 보다는 천천히 곱씹어가며 읽다가 끝부분에 거의 다 가서야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몰입이 되기 시작하는데 1부가 끝나는 느낌이었다. 어찌보면 2부로 가게 하는 탁월한 전개인지도 모르겠지만, SF소설을 이런 흐름으로 읽어보긴 처음이었다.

저자는 중국을 대표하는 과학소설가로 명성이 높고, '지구의 과거' 3부로 일컬어지는 삼체시리즈로 굵직한 상들도 많이 받은 작가이다.

SF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휴고상을 수상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선택한 책이라는 띠지의 홍보문구에서 나는 막연히 미지의 우주인이나 거대한 우주공간을 연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중국의 1960년대 문화혁명부터 시작하는 중국현대사의 서사이자, 인류가 달성해온 과학문명에 대한 참회록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과 도저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삼체시리즈의 1부인 이 책은 본격적인 지구문명 대 외계문명 의 전쟁 배경에 대한 개연설명을 충실히 하고 있는 책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2부 부터는 내게 친숙한 그런 SF적인 내용들이 전개되려나?

여하튼 이 책은 1960년대 와 현재시점을 오가며 서술된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었지만, 아마도 우리나라 분단사에서 사상투쟁이 있었기에 더 잘 이해가 됐던것 같긴 하다. 그래서 한 국가내에서 공산 vs 반공 의 사상대립이 없던 나라 사람들이 읽을때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주의 보편적인 물리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리학은...... 물리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p. 34)

어느날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갑자기 죽기 시작한다. 과학에 일생을 바쳐오던 사람들이 다다른 막다른 곳엔 그들이 몰랐던 음모가 있었다.

수많은 정보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삼체가 특이한 점은 삼체의 설계자가 여느 게임과는 다른 방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게임 설계자는 보이는 정보를 최대한 늘려서 실제감을 주려고 하는 반면, 삼체의 설계자는 정보를 최대한 압축해 어떤 거대한 진실을 감추려는 것 같았다. 광활한 하늘 사진처럼 말이다. (p. 82)

갑작스레 우주적 음모의 중심에 서게된 응용물리학자 왕먀오 는 '삼체' 라는 컴퓨터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게임은 하면 할수록 정말 이상하다.

38년 뒤, 예원제는 마지막 순간에 [침묵의 봄] 이 자신의 일생에 미친 영향을 떠올렸다. 그전에는 인간의 악의 일면이 그녀의 젊은 영혼에 치유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를 남겼지만 이 책은 인간의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해주었다. 폭넓은 주제를 다루는 것도 아닌, 그저 살충제 남용이 환경에 미치는 위해를 말하고 있는 책이었지만 작가의 시각이 예원제를 뒤흔들었다. 레이철 카슨이 쓴 인간의 행위, 즉 살충제 사용은 예원제가 보기에 그저 정당하고 정상적이며 적어도 중립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대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이 행위는 문화대혁명과 별 차이가 없었다. 우리의 세계에 끼치는 폐해는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렇다면 자기가 보기에 정상이거나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행위 중 사악한 것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더 싶이 생각해나가자 추론 하나가 그녀를 두렵게 했고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빙산이 눈에 잘 띄는 이유는 그저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의 실체는 거대한 물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이 생각이 예원제의 일생을 결정했다. (p. 113~114)

 

예원제는 1967년 문화대혁명당시 지식인계층으로 탄압의 대상층이었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962년 출간된 레이첼 카슨 의 [침묵의 봄] 은 그녀에게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고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나중에 엄청난 복수의 버튼을 누르게 된다.

[침묵의 봄] 은 환경보호 분야에선 손꼽히는 고전이다. 아직도 읽히고 있고 나도 읽으려고 빌려다 놓은 책인데, SF소설에서 제목을 접하니 너무 뜻밖이었다. 게다가 이번주내로 읽으려고 빌려다 놓은 책을 며칠앞서 소설에서 제목을 접했을 때 기분은, 약간 운명적인 필연같은 인연이 느껴졌달까 ㅎㅎㅎ [삼체] 책을 읽다보면, 레이첼 카슨 뿐만이 아니라, 테드 창과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나온다. 이러한 숨은그림찾기 하는 듯한 기분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 재미를 느낀 또다른 소소한 발견이었다.

"외계 문명 탐사는 매우 특수한 분야야. 연구자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예원제는 마치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아련한 말투로 말했다.

"사람 소리도 모두 끊긴 깊은 밤, 이어폰으로 우주에서 전해지는 생명이 없어지는 소리를 듣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그 별들보다 더 영원한 것 같았어. 때로 그 소리는 다싱안링의 겨울에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 같이 차가워. 그 고독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때로 야근을 마치고 나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마치 빛나는 사막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 사막에 버려진 불쌍한 아이 같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 지구의 생명은 정말 우주의 우연 속의 우연이라고. 우주는 텅 빈 큰 궁전이고 인간은 그 궁전에 있는 유일한 하나의 작은 개미지. 이 생각은 내 후반 생애에 모순된 감정을 심어줬어. 때로 생명은 정말 귀해서 태산보다 무겁게 느껴지지만, 또 때로는 인간이 너무나 보잘것없이 미미하게 느껴져. 어쨌든 삶은 이런 이상한 감정 속에 하루하루 지나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은 늙었지....." (p. 198~199)

 

이 부분에서 나는 과학서 코스모스의 저자인 과학자 칼 세이건이 쓴 유일한 소설이자 영화화 되기도 했던 '콘택트'가 떠올랐다.

아버지에게서 영향받은 딸이 우주의 외계문명에 관심을 갖고 접촉을 시도하는 열정은 배경에선 비슷하지만 마인드면에선 거의 정반대에 있다.

칼 세이건의 콘택트 에서의 외계문명은 유토피아 이자 상호보완의 모습을 띠지만, 류츠신 의 삼체 에서의 외계문명은 디스토피아이자 침략자의 모습을 띤다. 하지만 동일한 점은 외계문명을 꿈꾸었던 자의 이상 그대로 외계문명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믿는 만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지구 삼체 조직의 최종 목표와 이상이 바로 모든 것을 잃는 거라네. 우리를 포함한 현 인류의 모든 것을 없애는 거지" (p. 285)

이 소설속엔 어리석은 인간들이 많이 나온다. 굳이 삼체 라는 디스토피아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구문명안에 어리석은 이들이 그득하다. 지구 자체가 이미 디스토피아다. 심지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개인적 복수심에 지구문명을 외계에 송두리째 넘겨버렸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너무나도 기막히게.

가느다란 선에 갑자기 영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녀는 눈앞의 전파가 지능이 있는 생명체가 만든 것이라고 확신했다! (p. 307)

선에 영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눈앞의 전파가 지능이 있는 생명체가 만든 것이라고 확신했다! (p. 391)

 

쌍둥이 같은 이 두 문장에 등장하는 서로다른 두 생명체는, 자신의 문명 밖에서 처음으로 다른 문명의 신호를 받은 이 두 생명체는, 정확히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둘 다 자신들의 문명이 디스토피아 라 생각했지만, 하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꿈은 현실을 만든다. 하지만 이 두 꿈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같게 되었다. 디스토피아.

"최근에 <바람>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어. 봤는지 모르겠는데 끝 부분에 어른과 아이가 무투 중에 죽은 홍위병 묘 앞에 서 있는 장면이 있지. 아이가 '그들은 뭐에요?'라고 묻자 어른이 대답했어. '역사야' "

"들었어? 역사! 역사라고!"

뚱뚱한 여자가 팔을 흔들며 외쳤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야.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고,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 모두 깨끗이 잊었다고!" (p. 340~341)

10여 년 전 비가 내리던 오후처럼 그녀는 또 그렇게 홀로 그곳에 서서 죽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옛 홍위병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던 희망이 뜨거운 태양 아래 이슬처럼 증발했다. 그리고 이미 저지른 자신의 반역을 의심하던 마음도 싹 사라졌다. (p. 341)

 

역사를 잊은 과거를 잊은 인간은 무책임하다.

그 무책임은 결국 복수를 낳고 그 복수는 문명의 소멸이라는 태풍을 몰고 오게 된다.

외계의 문명이 과학적 발전도가 높다고 해서 도덕적 가치 또한 높다고 볼수는 없다. 하지만 이 소설속에 지구를 팔아버린 인간처럼 우리는 그러한 착각을 굉장히 자주 하며 살고 있다. 배운사람이 더 도덕적일 거라는, 가진사람이 더 베풀거라는, 똑똑한 사람이 내린 판단이 더 옳을 거라는... 그래서 나보다 이웃사람이 더 잘사는 것 같고, 자신의 조국보다 남의 나라가 더 살기 좋은 것 같고, 지구문명보다 외계문명이 더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한 모두 알고있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다 착각이다. 내집이 제일이고 내가족이 제일이고 내가 제일이다.

그래서 지구인에게 대놓고 '너희들은 벌레다' 라고 말하는 외계문명이 오기까지 남은 450년의 시간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생각해야하는 지점에서 1권은 끝난다. [침묵의 봄]에서 밝힌 사람도 죽이는 농약을 그렇게 퍼부었어도 살아남은 벌레들을 보며, 벌레보다 못한 지구인들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기대감을 남겨놓으며 1권은 마무리된다.

저자는 '작가의 말' 에서 < 잘 쓴 과학 소설이란 제일 변화무쌍하고 제일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하게 쓴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진실하다. 나는 역사학자가 과거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것처럼 소설을 쓰고 싶다.> 라고 말한다. [삼체] 는 저자의 의도가 정말 잘 반영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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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클리벤의 금화 1
신서로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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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한 끼 식사로 잡혀온 소녀, 울리케 피어클리벤. 구조대조차 바랄 수 없는 가난한 남작의 여덟번째 딸은, 죽음의 위기에서도 해박한 지식과 언변으로 이를 모면한다. 급기야 교섭을 통해 용의 혁력까지 이끌어낸 울리케는, 세상을 뒤흔들 거대한 격랑과 마주한다.

브릿G 최장기간 종합베스트셀러 1위이자 정통판타지 문학의 부활을 알린 화제작!

"유감입니다만 지고한 분이여, 황제 폐하께 제 식용의 적합 여부를 확인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표지 문구 中)

와우 정말 대박이었다.

나는 소설도 좋아하고 판타지소설도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판타지소설들은 한 두권으로 끝나는 판타지의 옷을 입은 소설들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정말 정통 판타지다!

반지의제왕이 영화화되기 훨씬 전에 판타지문학이 뭔지도 모를때 친구의 권유로 읽게된 그 3권으로 나는 판타지문학에 홀딱 반했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은 인간계까 아닌 판타지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은 부수적인 존재다.

반지의제왕 작가와 친구사이라는 작가의 나니아연대기 는 동화적 향기가 너무 짙고 인간계와의 구분이 너무 명확하여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책이며 영화며 오랜만에 홀딱 반했던 작품이었지만, 판타지라기 보다는 로맨스부분에서 반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청소년문학 같은 등장인물들의 성장기와 마법이라는 소재적 판타지가 무척 재미있었지만 거대한 세계관이랄까 그런건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 정말 정통 판타지다!!

마법사는 그만큼 영지의 산업 발전과 문화, 아울러 군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비대칭 전력이이다. 그리고 마법사와 비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대칭전력이 바로 용이다! (p. 35)

용. 지상 최강의 포식자이자 맹수인 동시에 신화의 계보를 증거하는 실재의 현현. 분명히 피를 흘릴 줄 아는 필멸의 육체를 갖되, 재해에 준한 권능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한 반신의 적생자이다. (p. 57)

'라르글드' 는 신들을 모시는 '전사의 인도자', '왈퀴레야'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다. 피어클리벤과 같은 북부인들에게 신들은 직접 기원하거나 구복을 청할 대상으로서 여겨지지 않는데, 신들은 완전하고 고고한 존재이기에 인간의 청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모시는 제장인 왈퀴레야들을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여기고, 그로써 온갖 공양의 속된 의식이나 싸움의 잔혹함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p. 181)

류그라들은 중앙대륙의 토착 민족이었다. 그들의 고향은 앞서 지나치며 언급되었던 아우칼 대호의 한가운데 섬처럼 위치한 류그른 숲이었다. 이제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그들은 숲속에 은둔하며 거대한 신목 류그네라스를 섬겼다고 했다. 하지만 제국의 개국 이후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신목은 차차 고사했고, 결국 이후 류그라들은 고향을 떠나 그 신목의 가지들을 가지고 수십의 행렬로 나뉘어 대륙 곳곳을 누벼왔다. 잘라내었음에도 여전히 잎이 돋아 살아있는 신목의 가지가 뿌리내릴 수 있는 새 고향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p. 301)

먼 북부인들을 어르매라고 하죠. 아무튼 그 어르매들은 아주 추운 북방에서 사는데, 그들의 설신을 달래기 위해 엄격하게 골라진 소녀를 제물로 바쳐요. 바쳐진 소녀는 죽는 게 아니라, 음..., 아니, 살아있다고는 하기 어렵긴 하죠. 무언가 생명체를 벗어난 존재가 되어요. 그러고는 일종의 제사장처럼 설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해 눈과 추위를 다스리게 되는 거죠. 전설에는 서리심 이라는 무석을 심장 대신 갖고 있대요. 이런 서리심의 무녀들이 어르매의 큰 부족마다 하나씩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죠 (p. 381)

마법사, 용, 무녀, 새로운 종족들 하나하나 자연스러운 배경과 상황설정이 감탄스러웠다.

빈곤은 없음에서보다 무지함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부지런히 궁리해 보아라. 결국 영지에 닿을 것이다. (p. 255)

- 린트부름의 적생자들이 결코 모르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가 허락을 구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자랑하는 것이지. 반면에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게 무언지 아느냐?

... 말씀하소서

- 용서하는 것이다!

너무 기가 막혀 잠에서 깨버린 울리케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용의 음성이 귓가에 아직도 생생하였다. 그들은 허락을 구할줄 모른다. -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삼 자랑할 줄도 모른다 - 원래 그냥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하게 용서한다. - 가장 강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즈음에서야, 울리케는 어떤 호의를 갖고 있건 간에 이 용이 결코 만만치 않은 대화상대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용은 그저 좀 더 힘이 세고 좀 더 머리가 좋은 생물이 아니다. 애초에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 것이며, 어쩌면 아무리 그가 울리케와 인간에게 호의를 보인다 해도 인간을 일종의 장기 말로 여기는 가치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지 모른다. (p. 358)

그들의 선조가 신과의 맹약을 어긴 데 대한 저주로 결코 언약에 저항할 수 없는 용들은, 그 때문에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p. 418)

첫장면에서 강렬하게 등장했던 용은 사실 등장하는 페이지가 많지 않다. 하지만 등장할때마 점점더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시무나리란 힘의 노래를 말한다. 이는 창조신 에아가 태초에 천지간을 빚을 때 불렀던 노랫말의 일부라고 전해진다. 일반인은 이를 아무리 읊어도 단순한 섬심의 의미 말고는 가질 수 없지만, 에다의 도리에 달한 우리는 그것을 창조신의 권능과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p. 500)

태초의 신 에아 는 가장 옛적으로 올라가자면 수메르문명에 등장하는 신 이름이다. 에다의 서 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한다.

짙은 숲을 배경으로 하는 북부지역의 묘사와 신화적 이름들은 북유럽 신화에 대한 호기심도 종종 불러일으킨다.

이제 피어클리벤은 그들과 무시할 수 없는 악연으로 묶이고 마는 것입니다. 교섭의 여지가 분명하게 생깁니다. (p. 522)

변방 가난한 영지의 남작의 여덟번째 딸이 어느날 갑자기 용에게 납치된다.

그러나 열일곱살의 울리케 피오클리벤은 은 용과의 교섭에 성공하고 언약을 맺기까지 한다.

뒤어어 고블린 과 밤의 거래자들 까지도 교섭의 대상으로 포섭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까마귀금고단 기사의 이 제안에서 새로운 교섭의 등장이 예고된다.

이 판타스틱한 판타지소설은 울리케가 맺는 교섭마다 한단계씩 위로 성장하고 성장할때마다 관련세계의 영역은 넓어진다.

530페이지에 달하는 1권의 내용은 앞으로 펼쳐질 내용들의 앞자락만 조금씩 알려주는 등장인물소개서 같은 책이었음에도 가독성이 짱이었다.

이 재미난 인물들과 설정들이 앞으로 어떤 상황들을 가져올지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리라 예상하기에 충분한 1권이었다.

게다가 신화적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서사적 세계관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북유럽 신화적 마법사와 용과 마수들 및 중세시대적 기사와 귀족과 함께 현대적 논리와 정치와 교섭이 어우러진 멋진 스타트였다.

이런 세계관적 설정을 잘 갖추어 놓은 판타지문학의 인기작가 중에 전민희 작가가 생각난다. 시리즈별로 다 장편이다.

아직 읽어보기 전이지만, 비슷한 시대와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갑자기 궁금해진다.

세부적 묘사가 뛰어나다는 전민의 작가의 작품도 궁금하고 정통판타지가 무엇인지 오랜만에 느끼게 해준 신서로 작가의 '피어클리벤의 금화' 도 어서 완간이 되었으면 좋겠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두 작가의 작품이 최근에 거의 동시에 출간되고 있는 것도 나름 경쟁구도처럼 보여서 흥미롭다. ㅎㅎㅎ

8권 완간을 예상한다는데 이제 2권까지 나왔다. 1권을 읽은 나로서의 선택은 2가지다.

한권한권 나올때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읽느냐, 8권 다 완간되었을때 쌓아놓고 읽느냐.

고민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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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어머니의 날 1 타우누스 시리즈 9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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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독일을 넘어 전 세계를 매혹시킨 '넬레 노이하우스' 의 '타우누스 시리즈' 아홉번째 작품이라는데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고, 읽자마자 바로 팬이 되었다.!

Muttertag 라는 원제의 뜻은 독일어로 어머니날 이라는 단어다. 어머니의 날 이라는 두 단어가 아니라 어머니날 한 단어다.

그런데 한국어판의 제목은 '잔혹한 어머니의 날' 이다.

궁금했다.

소설의 내용을 잘 함축한 이 제목에서 '잔혹한' 이라는 수식어가 어머니 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어머니날 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잔혹한 어머니 일까 잔혹한 날 일까

가제본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이 책은 2권인데 손에잡자 내려놓을 수 없는 흡인력을 지닌 작품이었다.

조용한 마을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세월이 흘러 누군가 죽고,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첫번째 죽음과 마지막 죽음은 연결되어 있었다.

수사관이 조사를 하고 범인을 추리하고 정황이 조금씩 드러나고 범인의 범위가 좁아들어 갈수록 나도 저절로 범인을 추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매력은 범인을 한번이 아닌 여러번 놓친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범죄스릴러 소설엔 반전이 있고 강력하게 예상됐던 범인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범인이 최종적으로 잡힌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러한 반전이 한번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사람이 범인일 거야 라고 예상했는데,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새로운 인물이 범인일거야 라고 예상하는 순간 예전인물이 재등장한다.

뒤집히고 뒤집히는 추리속에 범인이 확실시된 순간이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정말일까? 왜일까? 어떻게? 라는 질문들이 솟아오른다.

'타우누스 시리즈' 는 아마도 타우누스 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범죄를 해결하는 여형사 피아 의 해결 시리즈인듯 한데, 주인공 형사가 같을 지라도 사건이 매번 다를 것이므로 조금씩 등장하는 앞 사건들의 그림자에 대해 몰라도 큰 상관이 없다. 충분히 이 작품 자체에 빠져들게 된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다가 점점 현재의 한 시점으로 모아진다.

화자의 교차등장으로 형사가 되었다가 범인이 되었다가 뜻밖의 한인물이 되었다가 하면서 그들 모두의 심리에 몰입하게 된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는 삶이 죽음으로 변하는 순간이 얼마나 특별하고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날 맛본 전능의 힘을 다시는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부터 그는 사냥꾼이었다. (1권 p. 15)

중간중간 등장하는 범인의 독백은 싸이코패스의 성장을 독자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싸이코패스는 한명이 아니다.

그리고 싸이코패스만 절대악인일까? 라는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을 하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항상 똑같은 소리! 주변의 겁쟁이들과 방관자들은범인에게 최고의 보호막을 제공한다. (1권 p. 250)

주인공 여형사 피아의 이러한 생각은 소설속에 여러번 등장한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당연히 나쁘지만, 일상에서 모른체 하고 방관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의외로 선과 악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게 된다.

피아는 자신과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킴이 왜 그렇게 됐는지 의아스러웠다.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타고난 천성의 발현일까? 유년기의 경험이 반드시 싸이코패스적 인격발달에 책임이 있는 걸까? 한 사람의 인격적 성장에서 유전인자가 하는 역할은 얼마나 클까? 누구나 정신적으로 다르게 설정된 상태로 태어나니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1권 p. 361)

피아의 이러한 생각들은 책을 다 덮고 나서도 계속 남는다. 생각하게 된다.

제목에서 예상되듯이 이 작품은 어머니와 아이의 문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버린 여자들이 죄의식을 느끼며 산다고 불쌍해 할 일은 아니다. 그들은 가장 나쁜 부류다. 나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질렀으니까. (2권 p.59)

이 여자는 아이에게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만 하고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 엄마처럼. (2권 p. 60)

낳아준 어머니도 길러준 어머니도 잔혹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아이에게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날은 일년 중 단 하루 '어머니날'이었다.

하지만 가장 소중했던 그날이, 그에게 일년 중 가장 잔혹한 기억을 준 날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직접 잔혹한 어머니의 '날' 을 만들어 갔다.

악인이 정말 악하면 오히려 깔끔하다. 악인 이 나쁜놈~! 하며 욕할 수 있으니. 그리고 그렇게 악한 놈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하지만 악인이 정말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때 오히려 현실감 높은 스릴러적 긴장감이 찾아온다. 바로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아서.

소설속 여러명의 싸이코패스를 보면서 악인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의 매력은 더 상승한다. 질문을 남기는 소설은 늘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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