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쓸모 있는 경제학 상식 사전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시리즈
테이번 페팅거 지음, 임경은 옮김 / CRETA(크레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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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세상을 낱낱이 드러내는 경제학, 한 권으로 꿰뚫기!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모든 것은 '돈'으로 이해가능해진다. 하지만 의외로 '돈'과 '돈의 흐름' 혹은 '법칙' 등에 대해 묶어말하자면 이른바 '경제'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알자면 어렵고 모르자니 답답하고 찜찜한 이 '경제'라는 것에 대해 상식으로라도 좀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책으로 조금이나마 배워보자면 어떤 책이 좋을까...

이 책은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관련 주요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경제 공부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온갖 변수와 복잡한 개념이 등장해 어렵게 느껴진다. 이 책은 각 장의 흥미로운 주제마다 필수 개념을 먼저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당 주제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차곡차곡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p. 9)

이 책의 목적은 나의 필요에 부합했다. 그저 기초적이고 얕은 상식 수준의 경제학을 좀 배워볼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는데 읽다보니 이 책은 의외로 깊이도 있었다. 50가지 주제에 대해 따로 읽으면 개념 중심적으로 관심 있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은근히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 상식 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 무엇일까? 화폐다. 따라서 이 책의 첫 주제는 당연히 '화폐'다. 이어서 경제성장, 수요와 공급 등 익숙한 단어들임에도 대충 알았던 개념들에 대해 경제학적으로 짧고 굷게 설명되어진다.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두 용어는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지만, 흔히 같은 의미로 혼용된다. 자본주의는 토지, 자본, 기업의 사유화를 중시하는 경제 체제다. 따라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제와 기업의 사적 소유권을 보호할 때는 정부 개입이 필요하지만, 개별 시장 규제에는 정부가 '불간섭'해야 한다는 접근 방식을 취한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경제 효율성과 고성장으로 이어지지만, 정부 규제와 세금이 없이는 결국 자본가가 독점력을 누리고 지대地代를 추구하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가 되기 쉽다. (p. 61)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시장과 자본주의는 혼용된다. 자유시장이지만 모든 것이 자유이기만 하다면 질서가 없을 터 어느 정도의 규제또한 필수다. 그 역할을 국가 혹은 정부가 하기 마련인데, 국가 혹은 정부란 권력이고 권력은 자본과 또한 밀접한 관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시장의 혜택을 과연 누가 더 누릴까? '최근 수십 년 동안 국가들이 낮은 법인세를 내세워 투자를 유치하려고 노력하며 꽤 치열한 감세 경쟁이 벌어졌다. 기업들은 법인세 감세로 이득을 봤지만, 전체 투자액은 그리 늘어나지 않았다. (p. 91)'

경기침체니 불황이니 하는 표현들이 익숙해진 사회에 살면서도 어느새 무감해졌나보다.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한달까. 때론 금리니 인플레이션이니 하는 말들이 너무 멀어보인달까. 하지만 모르고 살면 손해인데...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해도 되지만, 금리가 오르면 경제 성장률이 떨어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5%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과 경기 침체를 동시에 겪었다. 각국 중앙 은행들은 금리를 0.5%로 인하했다. 그 결과 저축자들의 형편이 나빠졌고, 임금 상승률을 능가하는 물가 상승률 때문에 많은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하락했다. 2022년에도 여러 중앙은행이 비슷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려고 금리를 올리면 경기 침체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는 균형 잡기 어려운 줄타기와 같다. (p. 107)

최근 몇 년 동안 각국 중앙은행은 대체로 물가 상승률 2%를 목표로 잡았다. 그들은 제로 인플레이션이나 여러 위험을 몰고 올 디플레이션보다는 차라리 적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낫다고 판단한다. (p. 117)

실업률과 물가가 동반 상승하는 상황에서 중응은행의 통화정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21)

미국의 전 대통력 해리 트루먼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웃이 직장을 잃으면 경기 침체고, 내가 직장을 잃으면 불활이다' (p. 127) 은근 참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나같은 소시민은 그저 내 저축 통장의 금리와 내 주택대출의 이자에만 신경쓰며 살기에도 급급하다. 하지만 때로는 경제뉴스를 보며 거시적인 생각도 해보려 노력해야할 것 같다. 지금 경기가 어떠한가 금리가 어떠한가 경제정책이 어떠한가를 이해려고 노력할 때, 그렇게 '침체'된 경기 속에서 아등바등 살면서도 왜 이런가 생각하며 살 때, 갑작스런 '불황'의 순간을 마주하더라도 덜 당황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런 갑작스런 '불황'의 순간을 짐작하고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이 직장을 잃는 것도 안타깝지만 내가 직장을 잃는것도 안되지 않겠는가...

중국이 미국 자산 매입을 중단하면 어떻게 될까? 달러 공급량이 수요량을 능가해 달러 가치가 하락할 것이다. 그 결과 미국 상품은 상대적으로 저렴해지고 중국 수입품은 비싸진다. 달러 가치는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될 때까지 하락할 것이다. 바로 이 이유로 중국은 종종 미국 자산을 기꺼이 사들인다. 이로써 중국은 미국에 재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더 중요하게는 중국 경제 성장의 큰 원천인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p. 170)

현실적으로 정부 정책에만 기대어 경쟁력을 높이기란 어렵다. 생산성 향상은 대개 민간 기업의 혁신에서 비롯된다. (p. 174)

미국과 중국간의 무역전쟁은 오래됐고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무역전쟁이 아니었다. 서로간의 국내 경제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서로 섣불리 뭘 할 수 없는 거다. 세계 경제가 거의 그렇다. 생각보다 세계적으로 각 국의 경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국가와 기업간의 관계도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도 그렇다. 알자면 복잡하고 모르자니 손해이니 어쩌겠나 조금이라도 알아가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렵더라도;;;


일반적으로 국가가 침체기에 들어서 인플레이션이 잠잠해지고 화폐 가치가 지나치게 상승하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하하거나 통화량을 늘리는 완화적 통화정책을 추구한다. 그러나 유로존에서는 유럽중앙은행이 국가마다 다른 통화정책을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유로화의 결정적 단점은 유로존 국가들의 평균 성장세를 쫓아가지 못하는 국가엔 유럽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p. 211)

불평등은 자본주의에서 필요악이고 심지어 바람직한 요소라는 말까지도 하는데, 중요한 문제는 불평등을 수용할 만한 수준이 어디까지냐다. 여기에 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불평등의 정도가 높아지면서 이처럼 까다로운 문제들이 속속 제기되기 시작했다. (p. 220)

인상된 최저임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용이나 실업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지 않고, 경제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는 걸 알 수 있다. (p. 231)

이민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수없이 연구 대상이 되어 왔지만, 결론은 대개 엇갈린다. 아무튼 이민으로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낮아질 수 있으나 그 영향은 아주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p. 293)

경제학 핵심 개념 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 정책이나 세계 경제 흐름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상식을 쌓을 수 있는 책이었다. 가짜뉴스들이 판치는 시대에 누군가의 몰상식한 주장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내상식을 채워놓는 수밖에 없다.

경제학은 단순히 돈에 관련된 경제에서 이제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경제학까지 세분되어 발달되었다. 따라서 경제에 관련된 상식도 돈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인간에 대한 분석까지 그 범위가 확장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세분화되고 확장된 그런 세계를 우리가 어찌 알수 있겠는가, 이렇게 상식수준으로라도 알아놓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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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 현대 물리학의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한 도발적인 답변
자비네 호젠펠더 지음, 배지은 옮김 / 해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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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우주, 빅뱅, 만물의 이론......

아이디어와 과학을 혼동하지 말라E

Existential Physics 라는 원제를 번역기에 넣으면 '실존 물리학'이라고 나온다. 실존주의 혹은 실존철학의 그 실존에 물리학이 접목되었다라... 이상한가? 그런데 어찌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접목이다. 역사에서 특히나 서양역사에서 종교와 과학은 그 어떤 학문분야보다도 실은 서로 굉장히 밀접한 연관 속에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을 어디서 어떻게 찾는가 라는 질문들에서 이 두 분야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는 것 같지만, 글쎄... 이 책을 읽어보면 좀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될 것도 같다.

저자는 독일의 과학자로 2006년부터 블로그에 '물리학계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후 다양한 매체에 과학을 대중화할만한 기사를 꾸준히 올려온 것같다. 그렇게 '10년 이상 대중을 상대로 여러 활동을 하면서 물리학자들이 문제의 답을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답에 사람들이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할 때는 정말로 형편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p. 9)' 그러나 과학이 계속해서 대중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다시말해 '지식을 우리끼리만 가지고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p.11) 된다는 것을 저자는 깨달았다. '인간의 경험에 관해 물리학이 알려주는 것들을 물리학자들이 앞장서서 설명하지 않으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 끼어들어 우리가 만들어낸 암호 같은 용어를 유사과학 증진에 써먹을 것이다. (p. 11)'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단순히 유사과학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영적이 개념 중 어떤 것은 현대 물리학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아이디어는 현대 물리학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p. 11,12)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현대 물리학이 제기하는 거대한 물음에 관한 책이다. (p. 13)

이 책은 거대한 물음을 서슴없이 떠올리고, 그 답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p. 14)

프롤로그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포부를 밝혀놓고는 너무 거창하다 싶었는지 곧이어 슬며시 '경고'도 있지 않는다.

'나는 불가지론자이면서 비종교인다. 조직화된 종교 단체의 일원이 된 적도 없고 그런 단체에 속하고 싶다는 마음을 한번도 품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반대하지 않는다. (...) 그들의 의미 탐구가 과학적 사실을 존중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p. 15)'

사실 내가 이 책에 흥미를 느낀건 거대한 프롤로그보다 솔직한 이 '경고'였다. 서양역사에서 기독교가 워낙 다방면에서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보니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서양인을 보면 나는 좀 신기하다. 서양인들은 과학자도 종교인이 많으니까 말이다. 서양인이지만 나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과학자가 설파하는 '실존'에 대한 질문이라... 흥미롭지 않은가?! ㅎㅎㅎ

차례를 보면 이 책이 얼마나 커다란 실존적 질문을 던졌는지 한눈에 확인이 된다.

과거는 정말 어딘가에 존재하는가

물리학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밝혀낼 수 있는가

물리학적으로 젊음을 되돌릴 수는 없는가

우리는 그저 원자가 든 자루일 뿐인가

정말 다른 세계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가

물리학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가

우주는 우리를 위해 만들어졌는가

우주는 생각하는가

인간은 예측 가능한 존재인가

그래서 이 모든 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총9장으로 구성된 이 9개의 질문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질문까지 어떤가? 정말 대단한 질문들이지 않나?

너무 어려워보인다고 지레 겁이난다면 이 책을 읽는 팁 하나를 추천하고 싶다. 각 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간단한 답변' 먼저 읽고 본 챕터를 읽는 것이다. 질문이 어려워 보이니 답부터 알고 설명을 읽으면 왠지 더 아는 것 같은 기분적 착각이 하나의 팁 이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간단한 답변'이 정말이지 아주 간단하다. ㅎㅎㅎ


지금 고개를 들어 구름을 보고 있다면, 당신이 실제로 보는 것은 수백만분의 1초 전의 구름이다. 사실 이 정도면 큰 차이는 아니지 않나? 우리는 8분 전의 태양을 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8분 동안 태양이 크게 바뀔 일은 없으므로 빛이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해서 큰일이 날 것은 없다. 지금 북극성을 보고 있다면, 그 북극성은 실은 434년 전의 모습이다. 그럼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어떤 사건이 발생한 순간과 그 사건을 관찰하는 순간 사이의 시간차를 단순히 인식의 한계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도 들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뜻밖에 지대한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시간의 흐름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p. 27)

시간의 흐름은 보편적이지 않고 우주의 그 어떤 정보도 사라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계속 존재한다. 우리의 증명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칙들로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방법을 다 알고 있지 못하다. 당연히. 그러니 과거는 정말 어딘가에 존재하느냐고 평행우주식으로 묻는다면 과학은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성립된 자연법칙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p. 51)' 라고. 하지만 이 존재의 방식이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던 그 방식은 아니다.

과학의 목적은 세상을 유용하게 서술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용함'이란 새로운 실험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거나, 이미 존재하는 관측을 정량적으로 설명한다는 뜻이다. 설명은 단순할수록 더 유용하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 이론의 설명력을 정량화할수 있다. (...) 우주론은 이런 작업을 자주 수행하는 분야 중 하나다. (p. 57)

그러니 쌓여진 데이터를 사용하여 물리학이 우주의 시작과 끝을 밝혀낼 수 있는가? 어쩌면 가장 과학적 답변이 나올 것 같은 이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좀 허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애당초 과학을 왜 하는가? (p. 77)' 라며 과학 무용론을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니 더욱 과학적 연구를 해야 한다고 답하는 과학자들의 입장에 고개를 끄덕여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빅뱅은 없지만 주기가 있는거죠?" (p. 89) 나도 이게 미친 소리 같다는 거 안다. 그러나 이 얘기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양립할 수 있다. (p. 90)'

과학은 생각보다 관대하다. ㅎㅎㅎ

우리는 중력이나 시공간에 대하여 엔트로피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사실상 모른다. 그런데 엔트로피는 우주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p. 109)

인간의 뇌 안에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지만, 마찬가지로 우리 뇌에 흔적을 남기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로 거슬러 가볼 수 있다. (...) 요약하자면, 시간의 흐름이나 현재의 순간에 관한 우리의 경험 때문에 굳이 지금 사용하는 이론들을 바꿀 필요는 없다. (p. 118)

물리학적으로 젊음을 되돌릴 수는 없는가 라는 질문은 의외로 타임머신 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엔트로피와 관련한 우주적 설명이었는데... 여하튼 중요한 건 '더 나은 설명을 찾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심지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p. 131)' 라는 굉장히 쏘쿨한 유연함 같다. 이러한 유연함은 때론 너무 흐리멍텅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때로 단호한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뒤이은 질문 인간이 그저 원자로 분석되는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합쳐진 그러니까 일종의 '원자가 든 자루일 뿐인가'라는 질문같은 것에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인간의 의식이 뇌 안에 있는 수많은 입자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가능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의식에 관해서라면 어떻게든 무엇이든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 같다. 그리고 과학적인 정신을 가진 이들도 영혼이라는 단어만 쓰지 않을 뿐, 실제로는 영혼을 믿는다. 그들은 신비롭고 설명할 수 없으며, 자신들의 존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추가적인 어떤 것'을 찾고 있다. (p. 139)

지금까지 우리가 수집해온 증거들에 따르면 전체는 부분들의 합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p. 140)

하지만 역시나 마무리는 유연하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양립할 수 있다. (p. 156)' 이다. 이어지는 질문들에 대해서도 왠만해선 이 입장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중우주의 모든 가지에서 죽지 않을 수 있겠지만, 당신의 생존 확률(또는 공통의 생존 확률)은 표준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줄어든다. 이것이 아무도 양자 자살을 감행하지 않는 이유다. 양자 자살이 그들이 생존하는 우주의 개수를 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관측에 한해 보자면 다세계 해석은 기존 해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무한히 많은 당신의 복제본이 가능한 대안적 삶을 모두 살아가며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면, 그렇게 믿어도 된다. 그 믿음은 과학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p. 187)

정말 다른 세계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양자역학적으로 저자는 위와 같이 답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복제본이 다중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아이디어는 과학적이지 않다. (p. 199)' 고 말한다. '믿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다. 그러나 이 가설이 옳다는 증거는 없다. (p. 199)' 과학은 많은 것을 밝혀냈지만 아마도 밝혀내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대중에게 과학이라고 널리 퍼진 과학적 아이디어에 대해 과학적으로 옳다그르다는 과학자들이 좀더 노력해서 설명해주는게 바람직하지 않겠나.

개인적으로 나는 그 말이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황종료라는 뜻이라고 말하겠다. 나보다 현명한 많은 이가 지적했듯이 자유의지는 그 자체로 일관성이 없는 아이디어이므로 용기 내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의 자유의지가 자유로우려면, 다른 무엇도 그 의지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아무것도 원인이 아니라면(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대로 '원인 불명의 원인'이라면) 당신도 그 의지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든지 간에 말이다. 니체가 요약한 대로, 그것은 '지금까지 나온 것들 중에 최고의 자기 모순이다.'나는 니체의 말에 동의한다. (p. 205)

물리학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가? 라는 질문에 앞서 과학과 철학이 질문을 공유하려면 '정의'가 중요하다. 자유는 무엇인가?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정의적 질문에 과학이 답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애초에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우주는 우리를 위해 만들어졌는가 라는 질문은 질문이 말이 안되니 답도 딱히 명확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모든 의문에 답을 내놓은 과학 이론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p. 264)' 과학에서 질문은 중요하지만 먼저 질문을 골라내는 기준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 뇌 안의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망이 우주 안 물질의 분포 거텍톰과 닮아 보인다 해서 우주는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정말로 저자가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질문도 질문 자체가 사실 말이 안된다고 생각되었다. 다행히 저자는 장황하지 않게 답을 주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주는 생각하지 못한다. 너무 크기 때문이다. (p. 269)'

의식이 물리적인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의 물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양손에 케이크를 들고 있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먹고 싶어 하면 안 된다. (p. 291)

무엇보다 중요한건 역시 '정의'문제다. '답을 줄 수 있는 문제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답으로 간주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데에는 과학철학자들의 조언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의식 연구는 철학의 영역을 떠났다. 이제 의식은 과학 문제다. (p. 296)' 난 저자가 이토록 철학적 질문들만 담아 놓은 이 책을 쓸수 있을 정도이면서 왜 여전히 과학철학자가 아니라 물리학 연구자인지 잘 모르겠다. 뭐... 철학적 질문에 대한 과학자의 답변과 과학철학의 영역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느새 마지막 질문에 다다랐다. 인간은 예측 가능한 존재인가? 예측이라면 물리학의 영역일테고 존재라면 이 책을 관통하는 실존의 영역이다. 더구나 AI의 시대에 인간행동의 예측은 더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의 질문들에서처럼 질문부터 하느라 간과한 것이 있다.

인공지능 장치에 어떤 윤리를 코딩해서 입력할지 고민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AI에 관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AI의 윤리가 아니라 '우리의'윤리다. (p. 328)

우리는 인간의 뇌를 시뮬레이션하는 문제 대신에, 인공 뇌에게 질문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측 가능성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수학적 흥미를 넘어 현실 세상에서의 응용으로도 중요하다. (p. 335)

'그래서 이 모든 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p. 337)

과학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과학은 이전에는 이해는커녕 상상조차 못했던 가능성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다. 경이로움을 앗아가기는커녕, 새로운 경이로운 것을 더 많이 제공한다. 과학은 우리의 마음을 확장시킨다. (p. 340)

따라서 저자는 과학자들이 일반 대중들과 더 자주 교류하고 더 많이 공유하여 '과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학의 이해가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더 많이 얘기해야 한다. 연구자들이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는 대신, 어려운 시기에 과학적 통찰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에게 듣고 배워야 한다. (p. 342)' 고 말한다. 어쩌면 이 책은 일반 대중보다도 과학자들이 더 읽어야 하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러니까, 맞다. 우리는 놀라우리만치 놀랍지 않은 은하의 나선 팔 바깥쪽에 있는 창백한 푸른 점 위를 기어다니는 원자가 든 자루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p. 346)

인간도 경이롭고 우주도 경이롭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이 물리학인가보다. 경이로운 질문에 대해 때로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에 물어봐야 할 필요도 있겠구나를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ps. 과학 이론적 설명이 많은 만큼 책 뒤편에 핵심 용어 설명이 있는데 다른 말들 보다도 나는 '창발성'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신기했다. 검색해보면 사전적 정의도 있겠으나 저자의 설명도 덧붙여 남겨놓아 본다.

[창발성 emergent 사물, 성질 또는 법칙이 그 구성 요소 그리고 구성 요소의 행동 수준에서 정의되거나 발견되지 않을 때 창발적이라고 한다. 만일 창발적 사물이나 성질, 법칙이 구성 요소의 행동과 성질로부터 유도될 수 있으면 약한 창발성이라고 한다. 전혀 유도되지 못한다면 강한 창발성이다. 자연에서 강한 창발성으로 알려진 예는 없다.] (p.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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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고독한 행복 아포리즘 시리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 엮음, 홍성광 옮김 / 열림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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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에 대한 염세주의라던가 비관주의 라던가 하는 오해를 없애기위해서라도 이런 책이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짧은 문장 몇개 만으로도 그의 철학이 얼마나 따듯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소중함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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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고독한 행복 아포리즘 시리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 엮음, 홍성광 옮김 / 열림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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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우 행복해지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를 이루는 것, 즉 인격에 좌우된다.
얼마전에 EBS오늘읽는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 라는 교양입문서를 읽고나서 쇼펜하우어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렇다고 그가 쓴 정통철학서를 찾아 읽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그를 염세주의자로 가볍게 오해하는 대중서들을 읽기도 안내키고 그러다가 쇼펜하우어의 본고장 독일에서 직접 대중을 위해 기획하고 엮은 책이 번역되어 나온 것을 알게 됐다. 더구나 번역자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서 원전을 포함한 다수의 독일 철학서를 번역했다니 이보다 더 믿을만하겠나 싶어졌다. 냉큼 읽기 시작했다.

엮은이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는 브레히트, 아도르노, 벤야민 등 세계적인 지성들의 책을 소개해온 독일의 유명 출판사 ‘주어캄프’ 편집자 출신으로 쇼펜하우어의 핵심을 담은 266개의 문장을 엄선했다. 번역자는 쇼펜하우어를 ‘연민과 온정의 철학자’로 명명하며 독자들이 익혀야 할 쇼펜하우어의 숨겨진 정수를 전달한다. 이 책은 총 7부 구성으로 1, 2, 3부는 한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추구해야 하는 행복과 가치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4, 5, 6부는 자연물을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지침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인 7부는 인간의 필멸성과 끝내 우리가 맞이할 죽음을 바라보는 쇼펜하우어만의 아름답고 차분한 통찰로 끝맺는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철학서를 읽기도 어려운데 그 핵심을 담은 문장만 골라 놓은 책을 읽는 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여 배경지식을 좀 갖추고 읽는 것이 좋을터, 그럴때 나는 책 뒤편의 작가연보와 해설을 꼼꼼이 읽고난 후 본문읽기를 시작하는 편이다. 이 책도 그 순서로 읽었더니 한결 나았다. 특히나 '연보'가 상당히 긴 편이라 쇼펜하우어의 일생을 꽤많이 파악할 수 있어 좋았다.

읽은 순서에 따라 해설[연민과 온정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라는 글에 대해 먼저 정리하고 난후 본문을 정리하려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는 근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성주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상가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인물로 중요하다. 그의 글은 나중에 생철학, 실존철학과 수많은 작가들,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19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사상가들 중 한 명인 쇼펜하우어의 전체 저작인 [충분근거율의 네 겹의 뿌리에 대하여],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자연에서의 의지에 대하여],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 [소품과 부록](국내 번역에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그리고 편지에서 행복, 진리, 삶의 의지, 마음의 선함, 현명함, 구원과 관련되는 주제를 다룬 핵심 문장을 정선해서 실은 것이다. (p. 197~198)
쇼펜하우어는 좀 천재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언어를 빠르게 익혔고 30세 이전에 이미 자신의 철학의 정수를 담은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했으며 잠시 대학강단에 섰지만 이내 철학은 그렇게 배울 수 있는게 아니라며 은둔의 철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평생 쉼없이 공부했고 연구했고 사유했고 그 결과물을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대개의 비운의 천재들이 그러했듯이 쇼펜하우어의 역작들도 당시엔 인정받지 못하다가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새롭게 발견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성 비판이 이룬 결과가 피히테, 셀링, 헤겔 같은 철학 교수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범한 오류를 지적하며 그의 오류를 보완하는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 논문을 '일시적이고 헛된 이념을 좇아 사라져가는 자기 세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손들과 인류를 위해'썼다며 대담한 선언을 했다. (p. 199)
대개의 천재들이 그러했듯 쇼펜하우어도 사회성은 좀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 저서가 근대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외면받은 것은 번번이 오해받은 '의지'개념 탓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의지는 이성의 힘이 아니라 삶에의 맹목적 본능, 충동, 욕망 등을 가리킨다. 그는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인간이 실제로 이것을 의식할 때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에게 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쇼펜하우어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의지를 사물 자체로 본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현상하고 숙고를 거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현상한다. (p. 200)
EBS오늘읽는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를 쓴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쇼펜하우어의 이 책은 제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반이상 이해한 거라고. 그가 말하는 '의지' '표상' '현상'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닌 일반 대중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나마 역자가 전공분야라 위 정도의 문단으로 잘 요약해줄 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에 불과한 [소품과 부록]이 뜻하지 않게 세속적 성공을 거두면서 쇼펜하우어의 명성이 점차 높아져 갔다. 사람들은 이제 뒤늦게 쇼펜하우어의 주저에 관심을 가졌다. 마치 눈사태가 난 것처럼 사람들은 쇼펜하우어에 새삼 열광했다. 그 전에 36년 동안 극단적인 냉대를 당하던 것과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에세이집은 출판사의 예상과는 달리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무명의 시간을 보낸 쇼펜하우어가 좌절과 시련을 겪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갖게 된 삶의 지혜가 문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p. 205)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개념인 '의지'말고 우리식대로 편하게 말하는 그 의지로 표현하자면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평생 누가 알아주건말건 자신의 철학을 우직하게 발전시켜 나갔고 끝내 빛을 보게 되었으니.
그의 견해에 의하면 도덕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는 동고同苦에서 성립한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이 바로 도덕과 윤리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p. 205)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이 '동고'라는 개념은 핵심적이다. 이 개념만 알아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 염세주의니 비관주의니 냉소주의니 하는 말은 못할것이다. 그의 철학에는 온정과 연민이 흘러넘친다. 그는 '동고'를 중요시하므로.
일반적으로 다양한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이 대개 이 세계를 비참한 눈물의 골짜기로 보지만, 그들은 시공간의 세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자비로운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초월계를 맹목적이고 목적도 없으며 도덕과 무관한 힘이나 충동으로 보았다. 그것이 현상계에 나타날 때는 맹목적인 충동으로 나타나며, 현존하는 실체나 각 대상물은 그 충동이 구현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통합하는 주된 열쇠가 이성이며, 윤리의 기초는 합리성이라는 칸트의 견해를 반박한다. (p. 206)
나중에 본문에서도 다시 언급되겠지만 쇼펜하우어는 보이지도 않고 알수도 없는 세계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삶을 중요시했다. '지금 여기'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동양철학을 깊이 연구한 철학자의 내공이 보인다고도 할 수 있겠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어차피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보면서도,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를 즐기고 인생의 향유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위대한 지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오직 현실만이 실재하며,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사고의 유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 211) 쇼펜하우어는 중요한 것은 현재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근심은 종종 무익하고 과거에 대한 미련은 항상 무익하다고 설명한다. (p. 212)
그렇다고 과거를 모르는 것처럼 뻔뻔하게 미래가 없는 것처럼 무작정 살라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이긴 하지만 과거도 현재였고 미래도 현재가 되므로 지금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은 단순한 쾌락이나 비관하고는 다른 의미다. 본격적인 철학서도 아니고 이 짧은 해설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문장들을 읽기전에 해설을 꼼꼼히 이해해보려 노력한 후 읽는다면 훨씬 더 가치 있게 본문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그야말로 쇼펜하우어의 명문장들의 향연인데 차례에서 볼 수 있는 소제목들이 그 핵심을 또 추려낸 문장들이라고 볼 수 있다.
1.우리의 요구와 통찰력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생각하자면 '우리의 행복은 우리를 이루는 것에 달려 있다'라고
2. 우리 자신은 우리 행위의 수행자이다 라면 그러니 '자신만의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라고
3. 원형, 의식하기, 보다 높은 예술 을 알고자 한다면 '그대 스스로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라고
4. 자연의 목소리 속에 있는 세계의 중심 을 이해한다면 '회복은 자연의 산물이다'라고
5. 자신과 타인과의 교제에 관하여 생각해본다면 '객관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위대하다'라고
6. 내적 충동과 실제로 성취된 시간 속엔 '우리에게는 두뇌보다 더 현명한 무언가가 있다'라고
7. 우리 참 존재의 불멸성에 대해 생각하면 '죽음이란 삶을 담는 커다란 저수지다'라고 
주제적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함께 제시되어 있는 것이 차례속 소제목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명문장들 속에서도 내 마음에 남은 문장들을 몇가지 추려보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수입을 적게 또는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나라가 가장 행복하듯이, 사람도 내적인 부가 충분하고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필요한 것이 적거나 전혀 없는 자가 행복하다. 외부로부터의 공급은 비용이 많이 들고, 종속하게 만들고, 위험을 초래하고, 성가신 일이 생기게 하며, 결국에는 자신의 토양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나쁜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 일반적으로 외부로부터 어떤 점에서든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p. 55)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자꾸 되뇔 필요가 있다.' (p. 25) 라고 말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가치와 무가치가 결정된다면 비참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웅이나 천재의 삶도 그의 가치가 명성에, 즉 타인의 갈채에 의존한다면 역시 비참한 삶이다. 오히려 모든 존재는 그 자신 때문에 살아가고 존재한다. 그 때문에 또한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p. 66)
쇼펜하우어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불교적 해탈의 논리가 자주 엿보인다. 스스로도 동양철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장서가 많더라도 정리되지 않은 도서관은 책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아도 정리가 잘된 장서만큼 효용이 없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이라도 자신의 사고로 철저히 다듬은 지식이 아니라면 양은 훨씬 적어도 다양하게 숙고한 지식만큼 가치가 없다. 알고 있는 지식을 모든 방면으로 조합하고, 모든 진리를 다른 진리와 비교해야 비로소 자신의 지식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하고, 그 지식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알고 있는 것만 면밀히 숙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이중에서 면밀히 숙고한 것만 정말로 안다고 할 수 있다. (p. 70)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와닿은 문장이었다. 나는 책을 읽고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내 생각을 정리해서 서평쓰는 일에 그야말로 진심이다. 내가 이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어느땐 하루종일 손목이 저리도록 정리하고 있는 나를 보며 스스로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야 책을 읽은 것에 만족이 느껴진다. 내 행복의 한가지 방법이다. 그 방법을 대단한 철학자가 맞다고 해준 것 같아서 꽤많이 위안이 됐다.
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라 나의 짧은 생애를 지옥으로 만든 악마다' 개를 쇠사슬에 묶어두는 자는 누구든 이런 봉변을 당해도 싸다! (p. 102)
쇼펜하우어는 개를 쇠사슬에 묶어놓고 기르던 귀족이 개에게 친한척 손을 내밀었다가 물렸다는 에피소드에 위와같은 말을 덧붙였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반려견과 함께 살았다. 그는 동물에게도 연민과 온정을 넘치게 생각하는 철학자였다. 당시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 외의 모든 생명체에 대해 무시했던 것과는 달리 말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하나의 오점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p. 107)
자연에 속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생명체들과 달리 인간만이 행하는 행동들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그때 이미 '인류세'를 예감했던 것일지도.
우리는 타인을 자기 행동거지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나와 타인의 처지, 상태, 사정이 같지 않고 따라서 두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해도 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충분히 숙고하고 날카롭게 통찰한 후에 자신의 성격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독창성은 실천의 문제에서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행하는 일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p. 125)
바람직한 행동을 모범삼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거의 생각없이 따라는 하는 모방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인간은 모두 독자적으로 스스로 숙고하여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곧잘 '이게 내 것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을 느낀다. 그 대신에 우리는 가끔 '이게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말은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때 잃어버리는 것은 재산, 건강, 친구, 애인, 배우자, 아이, 말, 개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대체로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러한 것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p. 128)
질문의 전환이라니, 좋은 방법인것 같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이런 질문의 전환을 스스로 하며 산다면 삶이 조금은 더 편안해 질 것 같다.
접촉하는 모든 사람의 가치와 존엄성에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말라. 그가 가진 의지의 열악함이나 지성의 협소함도, 개념의 불합리도 고려하지 말라. 전자는 그에 대한 증오심을, 후자는 그에 대한 경멸감을 일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의 고뇌와 고난, 불안과 고통만 눈여겨보아라. 그러면 항상 그에게 마음이 끌릴 것이다. (p. 146)
쇼펜하우어는 '동고'가 넘치는 온정과 연민의 철학자가 맞다!
삶의 모든 과정은 단 한순간만 '존재한다'일 뿐이고, 그다음에는 영원히 '존재했다'가 된다. 우리는 밤마다 하루씩 다 빈곤해진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토록 짧게 끝나는 생에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위대한 지혜라는 이론을 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직 현실만이 실재하며,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사고의 휴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가장 위대한 어리석음이라 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꿈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결코 진지하게 추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p. 188)
수천 년간의 죽음과 부패에도 아직 아무것도 소실되지 않았다. 자연이 나타내는 내적 존재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기분좋게 외칠 수 있다. '시간, 죽음, 부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있다' (p. 194)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맥락없이 좋은 문장들만 나열한 책이 오히려 어려운 사람이구나;;;
소설적 서사가 됐건 논리적 맥락이 되었건 읽으며 앞뒤 전후로 이해해가는 과정 속에서 깨달아지는 책이 편한 나로서는 아무리 명문장이라 하더라도 툭툭 끊기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시집을 못 읽나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염세주의라던가 비관주의 라던가 하는 오해를 없애기위해서라도 이런 책이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짧은 문장 몇개 만으로도 그의 철학이 얼마나 따듯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소중함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흥행?!을 기원하며 이만.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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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를 규정할 새로운 군주의 탄생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낳은 위대한 정치사상

그 유명한 고전 <군주론>을 이제야 읽었다. 생각보다 본문이 짧았고 예상보다 해설이 길어서 좋았다. arte에서 나온 고전시리즈 중 이번이 세번째 책인데 읽고난후 모두 흡족했다. 이 고전시리즈가 내내 잘 이어지길 응원한다. 그리고 이 책은 해설부터 읽고 본문읽기를 추천하고 싶다. 고전일수록 특히 철학이나 정치등 사상이 내포된 고전일수록 그 글이 쓰여진 시대와 그 시대 속 저자의 생각의 흐름을 그 당위성을 이해하고 읽는 것이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왜 이런 글을 썼는가? 이 글은 어떻게 고전이 되었는가?

그가 이야기했던 정치학은 이탈리아라는 공간에서 당대 이탈리아반도가 처한 정치 사회적 조건과 상황을 타개하고, 르네상스 이후 정체되었던 이탈리아에서 근대 국가의 발전과 새로운 권력을 추구하면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런그가 정치학이라는 학문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구체적인 수준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 연구 대상을 철학적 당위의 영역에서 학문적 존재의 영역으로 바꾸었던 획기적인 동인은 바로 '국가' 개념이었다. 특히 마키아벨리에 의해 제기된 근대 국가 개념이야말로 근대 정치학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p. 208)

마키아벨리의 수직적 삶의 궤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피렌체라는 도시의 역사적 배경과 마키아벨리가 관통했던 15세기와 16세기의 시대적 상황이다. 특히 마키아벨리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15세기와 16세기 이전의 피렌체와 그 이후의 피렌체를 이해해야 한다. 성장의 거점이었던 피렌체 뿐만 아니라 이 시기 마키아벨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군주론 집필의 목적 대상이 되었던 두 개의 가문, 메디치와 보르자 가문에 대한 이해 역시 필수적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메디치가에 바쳤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중용해달라는 근거로 증명하기 위한 책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전체적으로도 그랬지만 특히나 피렌체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메디치가는 가장 큰 세력이었고 마키아벨리가 봤을때 이 난세를 정리할 수 있는 세력은 메디치가가 유일했다. 마키아벨리는 그 메디치가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대를 걸었다. 세습이 아니라 의지가 있는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상은 (마키아벨리 본인도 모르고 그 당시 시대적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굉장히 선구적이고 근대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가 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근대적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제시한 방법은 절대왕정에 가까웠다. 그것도 일인독재 왕정. (하긴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누구라도 깔끔하게 이 상황을 정리하고 통일해 주었으면 하는 안정화욕구가 충만해질 수 있지... 그것이 일인독재일지라도...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피렌체는 중세를 넘어 라틴문화를 종결하고 세속적인 이탈리아적 인문학과 인문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진원지 역할을 수행했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의 이탈리아 역사에서 위대한 작가들이 탄생해 활동하였고, 이들이 사용하던 방언 토스카나어는 현대 이탈리아 표준어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p. 216)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부르즈아 계급들과 시민들은 피렌체를 공화정이라는 체제로 안착시킬 수 있었다. (p. 217) 인문이 중심이 된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면서 마키아벨리에게 진정한 '인민을 위한 정치'란 어떤 것인가 일깨워 준 근대 정치의 학습장이자 현장의 공간을 제공해준 곳이 바로 피렌체였다. 이런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에게 가장 먼저 현실정치의 실체로 다가온 이들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었다. (p. 219)

어차피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에게 좀더 공식적으로 국가를 세워서 피렌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길에 자신이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면서. 자신이 이만큼이나 분석을 다 해놓았으니 쓸모가 충분할 것이라면서.

<군주론>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도 당위성이 충분하고 방법적으로도 가능할 거라면서. 하지만 결론적으로 메디치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솔직히 메디치가로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 피렌체 하나만으로도 머리깨질 것 같은데 국가를 세우고 이탈리아를 통일하라고? 이 무슨 헛소리야! 하고.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이 무슨 꼰대같은 잔소리인가 싶어지지 않았을까?

위인전의 교훈이란 그런 것이니까.

혹은 역사는 나도 알만큼 알거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잘난척 하는 개입을 무시했던 게 아닐까...

메디치가 입장에서 봤을 땐 마키아벨리가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여겨지지 않았을까,

마키아벨리는 심사숙고하여 메디치가를 pick했으나 메디치가에겐 의미없는 pick였달까.)

메디치 가문 중에서 특히 마키아벨리와 연관 지어 주목할 만한 이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다. 교황 레오10세의 동생으로 1513년 이후 피렌체를 통치하던 인물로 마키아벨리의 저작 <군주론>을 헌정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1516년 줄리아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마키아벨리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조카인 로렌초2세 우르비노 공작에게 헌정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적 야망과 공직에 대한 열망이 계기가 되어 <군주론>을 집필하기는 했지만, 이탈리아반도의 통일을 이룩할 희망적인 군주로 로렌초를 상정했다. (p. 222)

1494년 프랑스 샤를8세의 피렌체 침공과 피에로의 항복, 사보나롤라의 봉기 및 메디치 가문의 추방 등의 일련의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는 '위대한 로렌초'만으로는 진정한 피렌체의 독립과 공화국을 유지하는데 한계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결국 그는 <군주론> 헌정 대상과는 다른 유형의 군주와 권력자의 모습을 끄집어냈고, 그가 바로 체사레 보르자였다. (p. 228~229)

<군주론>이 마키아벨리의 포부와는 다르게 메디치가로서는 그닥 구미가 당기는 책도 아니었는데 그 내용이 '체사레 보르자'를 보고 배우라 였다면 더더욱 메디치가로서는 <군주론>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메디치가라는 가문의 이름에서 확인되듯 오랜 기간 약이나 향신료 관련 업종에 종사한 가문이었던 만큼 독약 처방과 판매에 뛰어나다고 알려진 메디치가가 잔혹한 구설수들이 난무하여 가족 범죄집단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체사레 보르자까지 닮는다면 세간의 평가가 과연 어땠을까?! (어휴 절레절레 하지 않았을까;;;)

보르자 가문의 반인륜적 범죄 혐의를 모를 리 없었던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이상적인 군주로 칭송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마키아벨리가 보르자 가문, 그중에서도 특히 체사레 보르자를 주목한 것은 체사레가 가진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치적 지도력, 정치적 통찰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근친상간을 비롯해 간통과 살인, 수많은 혼외자 등의 반도덕적이고 지탄받을 행위를 저지른 가문의 인물이었음에도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가족들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치권력을 형성하면서 투쟁하는 방식이 당대 이탈리아 상황에 필요한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p. 231)

마키아벨리는 너무도 간절하게 강력한 절대군주를 필요로 했던것 같다. 자신이 책사로서 옆에서 돕는다면 체사레 보르자의 단점은 없애고 강점만 키우는 절대군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더구나 정치적 야심이나 고위 관직에 대한 열망이 평생토록 누구보다 높았던 그로서는 마지막 동앗줄 같은 것으로 <군주론>을 헌정했을 것이었다. 다만 상대방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을 뿐. 뭐..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좋은 자리도 아니고 험난한 자리라면 더더욱 굳이?! 그럼에도 이 책이 이토록 중요한 고전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1513년 발표한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생전과 사후에도 여전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치권력과 국가론 관련 야누스적인 이중성을 갖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는 마키아벨리뿐만 아니라 <군주론>에 대한 평가 역시 서구 지식사회를 갈라놓았다. (...) 마키아벨리의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와 정치권력을 향한 노력과 시도는 <군주론>이라는 저서의 중요성이나 과정에 그다지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p. 234) 역설적으로 그의 죽음 이후 마키아벨리의 명성과 저술의 중요성이 높게 평가되면서 18세기에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묘지를 이장했다. 이러한 이장 결정에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공헌에 대한 피렌체의 인정이 뒷받침되었고, 그의 묘비명에도 적혀 있듯이 위대한 저술가로서 그리고 정치사상가로서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p. 241) 마키아벨리에 관한 연구는 현재까지도 극단적 행동주의자로부터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 및 공화주의자로서 다양한 정치사상과 이념 등과 결합해 현대 정치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p. 245)

현실정치가 난세일수록 마키아벨리는 거듭되어 불려나오게 되는 걸까? 누구보다 먼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의미를 너머 심층적 혹은 은유적 의미를 유추하며 여전히 학자들에게 연구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사는게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게 없어서 그런 것일까... 과거 누군가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권위를 얹기 위해서이려나...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주요 사상은 세 가지 정도로 집약할 수 있다. 첫번째 출발점은 '현대 군주'로 상징되는 국가론이다. (p. 248) 두번째 정치사상의 핵심은 통치론이다. 마키아벨리 통치론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현재까지도 큰 이견이나 견해차가 크지 않은 영역이다. (...) 당대 가장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은 영역이기도 하다. (...) 세번째 정치사상은 현대에 와서 더욱 주목하고 있는 공화주의 사상이다. (p. 249)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혼합정의 성격을 갖지만, 좀더 인민의 편에 무게 중심을 싣는다. 이를 위해 마키아벨리는 이상주의적 공화주의보다는 현실정치와 권력의 속성에 적합한 현실주의적 공화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p. 250)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자꾸 회자되는 이유는 두번째 통치론 때문일 텐데 현재 학계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것은 세번째 공화주의 사상이라고 하니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른건가보다. 본문을 읽으며 확인되겠지만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군주를 원하면서도 군주의 덕목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인민의 재산을 갈취하지 말고 반도덕적 패륜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말하면서도 지배자에게 피지배인의 권리를 주지시키는 것은 학자들이 말하는 마키아벨리의 야누스적 사상인가 보다. 여하튼 마키아벨리를 강력한 군주통치로만 회자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렇게 불러내는 이에게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정치학을 현실에 근거한 존재의 학문으로 전환시킨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사상적 출발점을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에게서 구하기보다는 고대 라틴계 사상가들에게서 찾았다. (p. 254)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황제통치를 더 유념했다는 소리다. 서구 정치계에서는 지금도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후예입네 라는 것에 명예성을 두는 경우가 있다. 현재가 과거에 비해 민주주의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 서구의 많은 국가들은 민주주의 국가라기 보다는 공화주의 국가다. 어쩌면 그래서 마키아벨리를 끊임없이 소환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로마제국의 뒤를 잇고 싶고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혼합정 성격의) 공화주의를 실현하고 싶어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는 후대의 사가들이 명명한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흔히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대표적 정치적 신념으로 대표되는 문구는 많은 학자들에게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행위 정당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p. 260)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작의 곳곳에는 앞서 이야기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명제가 일반적인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즉, 마키아벨리가 무차별적으로 정치의 비도덕성, 폭력지상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모든 수단이 옹호되는 유일한 목적은 국가의 창설과 보존, 그리고 건강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팽창이다. (p. 261) 국가는 필요할 때에만 비도덕적일 수 있는 것이지, 모든 경우에 항상 비도덕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마키아벨리가 윤리나 도덕에 극단적 냉소를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질서가 잡힌 국가와 사회에서의 윤리와 도덕은 폭력이나 힘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p. 262)

마키아벨리는 너무나 강력하게 너무도 간절하게 사회질서의 안녕을 바랐던 것 같다. 악덕과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들에게 치를 떨면서도 도덕이나 윤리의 가치들을 보존하고 준수할 것을 잊지 않고 제시한 것은 국가라는 커다랗고 안정적인 틀 안에서 편안한 개인으로 살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을지도. 다만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고위관작에 있어야 한다는 개인적 열망이 가장 컸던 것이 오히려 그의 사상적 발목을 잡았던 게 아닐까...

결론적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근대 국가를 열망하고, 새로운 질서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조건과 행동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혁명가로서 '신군주'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출발점과 사상적인 유사성은 근대 국가의 시작 과정에서 군주라는 개념을 통해 정체의 문제, 국민개병제에 기반한 군대문제, 이를 위해 계급 구분을 통한 국민국아의 정당성 부여 문제, 귀족과 민중의 이분법적 계급대립 구조, 국가 내부의 사회적 제도로서 종교와 법률의 상정 문제 등은 마키아벨레가 추구하고자 했던 근대 국가 개념이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갖게 했다. (p. 273)

자 이제 해설은 끝났다. 본문을 읽을 준비가 되었다. 그에 앞서 외국어로 된 고전인만큼 번역이나 판본이 중요한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현대어로 기술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원전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탈리아어조차 버거웠던 저자에게는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집필을 끝냈을 당시에는 르네상스가 끝나가던 시기였기에 라틴어로 저술했을 것이라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 저명한 사상가들이나 저술가들이 라틴어로 글을 쓰고, 저서들을 집필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p. 10) 그럼에도 <군주론>이 보다 널리 읽히게 된 계기는 라틴어 판본보다는 코스카나어로 쓰인 판본이라고 추정된다. (...) 이 책에서 사용된 원본은 토스카나어로 작성된 판본이며, 내용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위해서 국가편집본을 참조했다. (p. 11)

토스카나어 원전 번역의 어려움과 누구나 느끼는 한국어 용어 선택의 문제는 저자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번역 과정에서 저자는 몇 가지 원칙과 기준에 의해 번역을 진행했다.

첫째, 이탈리아어 판본이 아닌 토스카나어 판본으로 번역을 진행한다는 원칙이었다.

둘째, 기존 번역서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이탈리아에서의 연구 경향과 해석을 중심으로 해설 부분을 덧붙이고자 했다. (...) 기존 번역서들이 주로 취하고 있는 영미 계열의 마키아벨리 번역과 해석에 연연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셋째, 토스카나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문맥과 마키아벨리의 생각이 한국적인 사고에 더욱 적합할 수 있는 윤문 번역을 진행했다.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기준은 용어 선택의 문제였다. 이 문제는 여전히 기존 번역서에서 지속해서 논란과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특히 자질이나 역량 등으로 번역되는 비르투virtu나 행운, 운명, 여신 등으로 번역되는 포르투나fortuna등의 용어는 한국어로 번역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해나 오류 가능성으로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p. 12, 13 에서 일부 발췌) -서문 中-

<군주론>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비르투와 포르투나 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국어가 다중적 의미를 가진만큼 이 단어들 또한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저자가 비르투와 포르투나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에 나도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전을 원어로 읽으면 문맥상 더 다양한 이해의 폭이 필요했을 이 단어가 한국어 번역본에서도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았던 것 같다.

<군주론> 본문을 읽기까지 나름 긴 준비가 필요했고 어느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래서인지 <군주론> 본문 읽기는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생각보다 큰 인상적인 감흥 없이 주욱 읽어가졌다.

전하의 충복이 되겠다는 의미로 무엇인가 바치고 싶지만, 제가 가진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집필한 고귀한 저서를 전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이 책은 최근 사건들에 대한 오랜 경험과 고대 사건들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제가 알게 된 위대한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관한 것입니다. 오랜 천착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을 집대성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얻은 지식을 집약하여 저술한 미천한 책을 전하께 보내드립니다. (p. 19) 이 책을 신중하고 꼼꼼히 읽으면서 그 의미를 새기신다면, 저의 가장 간절한 소망 다시 말해 전하께서 포르투나와 전하의 탁월한 자질을 통해 성취하게 될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저의 고귀한 뜻을 헤아리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그 고귀한 지위에서 잠시나마 아래에 있는 저에게 시선을 향해주신다면, 제가 얼마나 지속적이고 과한 불운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와 신세에 처해 있는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부디 살펴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p. 21)

그러니까 이 책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등용을 위해 마련한 제안서다. 그런데 이 책은 위인전에 가까운 역사서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서를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많았을까 싶은데;;; 게다가

이 사람을 보십시오 저 사람을 보십시오 그 중에서도 체사레 보르자를 보십시오. 배우십시오. 제가 하는 말이 맞습니다. 제가 다 오래 연구해온 결과니까요. 그러니 제 말대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설하고 절대군주가 되어 보십시오. 제가 만들어 드릴 게요. 저를 등용하시면 다 됩니다.

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당대 최고권력가 집안이었던 메디치가에게 과연 혹하는 조언으로 들렸을까, 관직 청탁용 간섭으로 들렸을까... 결과는 알다시피 메디치가는 마키아벨리도 그의 책도 모르쇠 했다.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하게 대하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는 마음을 갖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보복아거나 복수할 엄두조차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이 복수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매우 큰 피해를 주어야 합니다. (p. 32)

모든 악행과 가해 행위는 한꺼번에 실행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그 악행과 가혹 행위들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며, 그럴수록 그러한 행위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가 작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비로운 은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하며, 그래야만 그 은혜의 크기와 감사함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p. 81)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즘의 토대가 될 문장 중 하나이려나... 그런데 은근 이게 지금도 맞는 말 같네;;; 그래서 고전이 된 건가...

저는 여기에서 아주 위대하고 놀랄만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사례를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이 거의 항상 선인先人들의 행적을 따르며, 모방을 통해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p. 52)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군주가 되는 두 가지 방법, 즉 자기 비르투에 의해 군주가 된 경우와 포르투나에 의해 군주가 된 경우를이탈리아 역사 속에서 두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하나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와 체사레 보르자 입니다. (p. 60) 저는 보르자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보르자는, 상술한 바와 같이, 포르투나와 타인의 무력에 의해서 권력을 차지한 모든 사람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는 듯합니다. (p. 70)

지적인 훈련을 위해 군주는 반드시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데, 특히 역사 속 위인들의 행적을 잘 살펴 읽어야 합니다. (p. 118)

이 책은 거의 사례집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요구하는 사상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기에 그는 역사를 훑어가며 아주 다양한 사례들로 증명과 반증을 수차례 한다.

인간은 사악하며 당신과의 약속이나 신의를 잘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 역시 그러한 사악한 이들과 맺은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군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의 정당성을 항상 내세울 수 있습니다. (p. 138)

지금 이탈리아가 신에게 외세의 잔혹하고 오만한 지배로부터 이탈리아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p. 197) 지금 이탈리아가 이러한 희망에 기댈 대상은 오직 영광스러운 전하의 가문 뿐입니다. (p. 198)

이제 여기 전하께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의 순간에 제가 전하에게 여러 모범 사례로 제시한 여러 위인의 방식을 따르기만 한다면, 과업을 이루는데 커다란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p. 199)

모든 것을 진압하는 절대군주가 되십시오 라면서 내말데로 하면 됩니다 라면 절대군주가 과연 순순히 따를까?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자신의 메시지와 자신의 요구가 모순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여하튼,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도 자주 인용한다던 문구로 이만 마무리하련다.

{누군가 불가피하게 수행하는 전쟁은 정의로운 것이며, 무력에 의지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도나 희망이 없을 때는 그러한 무력 또한 신성한 것입니다}

주석: 리비우스의 '로마사' 제9장에 나오는 구절로 마키아벨리가 다른 저서에서도 자주 인용하던 구절로도 유명하다. (p. 198)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지만 의외로 허망함이 남았던 고전 <군주론>이었다.

ps. <군주론>자체를 떠나 arte 고전 시리즈는 역시 이번에도 훌륭했다. 덕분에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고전 시리즈 잘 부탁드려요.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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